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특집: 월주 스님의 행원(行願)과 한국사회의 발전

불교 실천윤리와 월주스님의 자비행:

박병기1
Byung-Kee Pak1
1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1Professor, Department of Ethics Education,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 Copyright 2019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Feb 19, 2018; Revised: Apr 27, 2018; Accepted: Jun 20, 2018

Published Online: Jun 30, 2018

국문초록

자비행(慈悲行)은 불교윤리의 핵심 요소이자 실천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자비행은 실천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 실천윤리를 상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것은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차원과 분리될 수 없고, 월주스님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 실천윤리와 만나게 된다.

월주스님은 1990년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면서 이 운동을 펼쳤고, ‘함께 살아야 한다.’라는 명제를 근간으로 국내외에 걸쳐 불교 실천 활동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그 중에서 특히 국외에서 펼친 운동은 현재까지 이어지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불교계 내부와 국내의 도덕성 회복 운동은 그 지속성과 성과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추구와 실천을 통한 자비행의 추구를 분리시키지 않고 삶 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월주스님의 노력은 불교 실천윤리의 한 전형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불교계가 다층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재평가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Abstract

The benevolent practices are a important point of Buddhist ethics, and it's a symbolic point of Buddhist practical ethics because of the nondisjunction between action and theory. The monk Wolju have suggested the movement on socialization of awakening, and it has an link to the Buddhist practical ethics.

The Monk Wolju was a dean of Korea Jogae order and his practices actualized by the slogan, ‘we have to live together’, and his endeavor extendended into the global zone. But his endeavor had a limit to the moral restoration of inter Korean Buddhism in that duality and result.

Nevertheless, his endeavor to the actualization of benevolent practices with seeking awaekening has a value to a model of Buddhist practical ethics. I have judged the situation that it has an possibility becoming an alternative to the crisis of current Korean Buddhism.

Keywords: 불교 실천윤리; 월주스님; 자비행;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 불교 위기 극복의 대안
Keywords: Buddhist Practical Ethics; The Monk Wolju; Benevolent Practices; The Movement on Socialization of Awakening; an Alternative to the Crisis of Current Korean Buddhism

Ⅰ. 머리말1)

몸에 기반한 실천을 전제로 하지 않는 윤리이론은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하다. 이것이 몸과 마음의 긴밀한 연계성에 주목하고자 하는 현대 자연주의 윤리설의 기본 전제다. 윤리이론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실천과 온전히 분리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관점이 윤리학의 주류를 형성해왔다. 불교와 유교로 대표되는 동양윤리사상의 경우는 그중에서도 실천 또는 함(doing)에 방점을 찍으면서 그 이론적 토대를 쌓고자 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분석윤리학 중심의 서양윤리학이 지배권을 획득하면서 실천으로부터 거리를 전제로 하는 학문적 차원의 윤리학만이 온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생겼고, 이러한 경향은 덕윤리학의 부활이라는 전환점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일정 부분 유지되고 있다. 서양윤리학을 윤리학과 동일시하는 우리 윤리학계의 경우는 그 경향이 더 심할 수밖에 없다. 윤리학의 외연(外延)을 스스로 좁힘으로써 철학계 안에서 윤리학의 위상을 최소화해버린 한국 윤리학계는 오히려 의료윤리학 등 외부의 요청에 기반한 실천윤리학에 의지해 겨우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2016년 말부터 시작한 촛불혁명의 격동기를 함께 겪었고, 이 과정 속에서 우리가 20세기를 통해 이룩한 것들과 잃은 것들이 무엇인지를 총체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압축성장과 외적인 풍요, 내적인 빈곤과 물질 중심의 개인주의 가치관, 분단구조의 고착화로 인한 극단적 이념 대립의 내면화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우리의 성취와 상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와 우리 자신의 삶을 가치와 의미를 중심으로 재편해갈 수 있는 ‘윤리귀환 시대’를 요청하고 있다.

이런 국면 속에서 우리 불교는 어떤 상황일까? 경쟁의 내면화로 인한 피로가 사회 전반으로 스며든 ‘피로사회’로서의 한국사회 속에서 불교는 템플스테이와 명상으로 상징되는 쉼의 공간을 제공해 주었고,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지속적인 불사(佛事)를 통해 성장을 거듭해오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10년간 300만 명의 불자인구 감소와 조계종단 집행부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 수행공동체의 실질적인 와해로 인한 수행정신의 약화 등의 위기와 직면하고 있기도 하다. 봉암사 결사와 ‘94년 개혁으로 대표되는 조계종단 중심의 한국불교 재건립은 이제 다시 어떤 근원적인 전환의 요구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가능한 지점이기도 하다.

방향전환과 실천을 위한 토대는 당연히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이 작은 논의의 초점은 ‘월주스님’이라는, 아직 평가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구체적인 존재자이다. 그중에서도 그의 자비행(慈悲行)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에 초점을 두고,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 목표에 다가가는데 장애로 작용할 수 있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분석 대상의 실천행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현재성에서 비롯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분석 대상의 실천행에 직접적으로 다가설 기회가 없었던 연구자 자신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이다.

연구자는 월주스님과 직접적으로 만난 경험이 전무하다. 물론 이 점은 반드시 약점으로만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객관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줄 수 있을 것으로도 기대하면서 그의 회고록 『토끼뿔 거북털』(조계종출판사, 2016)를 주요 텍스트로 삼는 문헌 분석과 함께 그 행간을 읽어내고자 하는 해석학적 방법을 택해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중에서도 이 책의 5부 ‘깨달음의 사회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불교윤리의 관점과 가장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는 이론과 실천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Ⅱ. 불교윤리에서 이론과 실천의 문제

1. 불교윤리와 계율

월주스님의 자비행에 불교윤리적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본 논의의 목표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윤리가 무엇인지에 관한 정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이 개념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설기도 하다. 일상적인 어법 속에서 불교윤리는 불교를 전제로 하는 윤리적 논의와 실천 규범, 태도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불교학계에서 이 개념은 계율과 어떻게 구분되는지조차 명료하지 않은 낯선 것이기도 하다. 불교윤리학이 윤리학의 하위 영역인 것은 비교적 확실하지만, 불교학 안에서는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응용불교학의 한 하위 영역에 속하는 것 정도로 다들 짐작하고 있을 뿐인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계율학(戒律學)과는 어떻게 연결되고 차별화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거의 없거나 불명료하다.2)

불교윤리는 사분율(四分律)과 보살계(菩薩戒)를 포함하는 계율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윤리적 논의와 지침, 실천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토대가 계율에 한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서의 불교 자체에 토대를 둔 모든 윤리적 논의와 실천을 포용하는 개념이라고 보아야 한다(박병기, 2013). 이렇게 불교윤리를 광의로 정의할 경우 우리는 계율의 토대를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최근에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생명윤리 관련 쟁점 등에 관한 불교의 관점을 정립하여 제시할 수 있는 여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불교윤리는 또한 윤리학의 하위 영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유교윤리, 그리스도교윤리와 같이 특정한 철학적·종교적 전통을 기반으로 삼아 형성된 윤리이고, 따라서 그 논의의 전개 과정 또한 불교철학 또는 종교로서의 불교와의 긴밀한 연계성 속에서 전개된다. 그런데 이러한 분류는 윤리이론을 주로 의무론과 공리주의, 덕윤리 등으로 구분하는데 익숙한 우리 풍토에서는 낯선 것이다. 철학과 종교 사이의 엄격한 분리를 전제로 해서 성립한 근대 이후 서양윤리학이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지만, 또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 윤리학계의 후진성이다.

서양윤리학 논의로만 이루어진 책에도 여전히 ‘윤리학’이라고 이름 붙이는, 이 후진성은 서양에서 발간되고 있는 상당수의 윤리학 책들이 유교와 불교윤리 등을 포함하고 있을 때에만 ‘윤리학’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서양윤리학’이라고 하는 것에 비교해서도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다만 이 지점에서 우리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은 불교윤리가 단순한 비교윤리학적 수준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내용과 체계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3)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계율의 윤리학적 재해석의 과정과 함께 불교 자체의 윤리학적 재해석과 구성의 과정이 반드시 포함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과정은 우리 불교학계와 윤리학계 사이의 소통의 과정을 전제로 할 수 있을 때 더 활성화될 수 있지만, 그 노력의 출발점은 불교학계 내부의 논의일 수밖에 없다.

2. 불교윤리의 실천성

불교윤리 또한 이론적 차원을 포함하지만, 그 궁극적인 특성은 실천성의 차원에서 부각된다.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윤리적 판단은 잘못된 것이거나, 알음알이의 수준에 그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도덕적 진술의 특성을 보편화 가능성과 처방성으로 보고자 하는 헤어(Hare, R. M.) 같은 윤리학자의 견해에서도 윤리적 판단은 보편에의 지향성과 함께 구체적인 행위의 요구 또는 요청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그렇지만 그 처방성은 어떤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진술이라는 사후적인 성격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4)

그에 비해 불교윤리의 실천성은 하비의 적절한 요약과 같이 도덕 또는 윤리를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더러움을 씻어버리고 그에 반작용하는 덕목을 함양함으로써 보다 건전한 인격을 도야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길의 한 부분’으로 보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 전환의 과정은 깨달음의 경험을 통해 탐욕과 집착, 분노와 어리석음, 그 결과인 고통의 모든 흔적으로부터 해방된 상태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피터 하비, 2010: 125). 탐진치 삼독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자유가 곧 깨달음이고, 그 깨달음의 과정에서 구체적인 행동의 전환까지를 포함하는 결단이 곧 불교윤리적 차원의 판단이다.

이런 맥락을 고려해 보면 불교윤리는 기본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이끌어낼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논의와 그 논의 과정과 결과에 따르는 실천 지향성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2011: 318). 이러한 실천지향성이 약화되거나 뒤따르지 않은 경우 불교윤리는 온전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행의 과정을 방해하는 알음알이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특히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수사학적 방편을 통해 단박깨침[頓悟]을 추구하는 선불교의 윤리를 논하는 과정에서 부각된다.

선불교의 비어있음에 주목하는 한병철은 부버(Buber, M.)의 사이 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그것의 근본 특징이 ‘내면성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의 내면성을 제거함으로써 개방성과 친절을 확보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을 통해 내면성과 욕구를 가지지 않고도 함께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한병철, 2017: 183184). 다시 말해서 너와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온전한 존재와 만남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 선불교의 비어있음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비어있음은 동체(同體)의 차원을 열고, 그것은 다시 자비(慈悲)의 실천으로 이어지면서 불교윤리의 실천적 맥락을 뒷받침하게 된다.

불교윤리의 실천성은 그것이 인간의 고통에 대한 즉각적인 해소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도 부각될 수 있다. 모든 불교윤리는 인간이 현세 속에서 받고 있는 고통의 해소와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그 해소의 지향 자체는 마음의 혁명적인 전환과 몸의 점진적인 전환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가필드(Garfield, J. L.) 또한 불교윤리의 이러한 특성에 주목하면서 더 나아가 ‘불교가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중생의 고통에 대해 연기성(緣起性)에 기반한 동일한 도덕적인 지위를 보장한다는 점’과 특히 ‘대승불교 운동의 결과물로 보살의 자비를 최고의 도덕원칙으로 제안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Garfield, 2015: 294-296).

이러한 불교윤리의 실천성은 당연히 이론적 논의와 심도를 배제하지 않는다. 불교윤리가 옳음에 관한 정의나 좋음과 행복에 관한 분석적 규명을 토대로 그것에 이르는 과정과 방법을 찾고자 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 서양윤리학적 논의와는 달리, 독화살의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치유의 과정과 방법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독이나 화살의 특성 등에 관한 분석을 온전히 배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오히려 독화살을 뽑고 난 이후에 그 독의 성분을 분석하면서 해독제를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불교윤리에서 실천과 이론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불교윤리 이론은 앞선 정의에서 언급한 것처럼, 계율에 근거한 윤리적 논의와 함께 붓다의 가르침 자체에 근거한 삶의 의미 물음과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 전반을 포괄한다. 그 구체적인 예로 우리는 사성제(四聖諦)의 불교윤리적 해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이라는 독화살을 출발점으로 삼는 붓다의 가르침은 사성제라는, 단계적이면서도 논리적인 과정을 포함하면서 제시된다. 이 사성제를 불교윤리 실천가인 시바락사(Sivaraksa, 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Sivaraksa, 2016: 23). 1. 고통이 존재한다. 2. 고통은 원인을 갖는다. 3. 우리는 고통의 원인이 지속되는 것을 중단시킬 수 있다. 4. 마음이 청정한 삶이 바로 그 길이자 방법이다.

불교윤리는 이처럼 삶의 현상에 관한 논리적인 분석의 과정과 그것에 기반한 실천의 과정을 동시에 지니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명료한 행위 지침과 규범을 제시한다. 모든 윤리이론이 이러한 특성을 부분적으로 지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불교윤리의 경우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강하게 부각시키고자 하는 점과 실천이 따르지 않는 이론 자체의 완결성을 부인할 정도로 실천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러한 특성은 현대윤리학의 실천적 불모성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불교윤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점일 뿐만 아니라, 몸과 그 움직임의 원천이 되는 뇌세포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는 현재의 과학적 성과와도 만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몸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 몸의 움직임은 다시 뇌세포들 사이의 상호관련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뇌과학과 생명과학의 지속적인 연구성과들은 마음의 윤리와 몸의 윤리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고, 불교윤리는 몸의 실천과 마음의 실천이 분리될 수 없음을 전제로 해온 ‘오래된 미래’로 재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Ⅲ. 깨달음의 사회화와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

1. 불교윤리와 깨달음의 사회화

한국불교 전통과 현실 속에서 불교윤리를 말하고자 할 때 넘어갈 수 없는 주제 중 하나가 깨달음과 윤리의 관계 물음이다. 깨달음을 위해서는 속세의 윤리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으로 대표되는 입장이 우리 불교계에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자칫 수행과정의 막행막식을 허용하는 준거로 작동할 가능성마저 있어 조심스러운 접근을 필요로 한다. 이런 분위기는 선불교의 선문답 과정에서 있었던 방과 할 같은 특수한 행위들을 일상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분위기와 함께 우리 불교계가 시급히 극복해내야 하는 과제에 속한다.

초기불교에서는 불교윤리와 깨달음 사이의 거리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삿된 견해에 의존하지 않고 계행과 통찰을 갖추어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면,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숫타니파타』의 가르침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계행과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는 윤리적 행위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전재성 역주, 2011: 137). 이러한 초기불교의 특성은 수행공동체로서의 승가(僧伽)가 재가공동체의 의존 속에서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재가로부터의 보시를 통해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면서 수행의 과정과 결과를 나누어주는 상호관계적 맥락 속에서 승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수행과 깨달음 과정 못지않게 계율과 윤리도 함께 강조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동아시아의 선불교 전통은 일정하게 이러한 초기불교의 전통과 차별화된다. 그 차별성은 화두(話頭)라는 매개체를 전제로 하는 몰록깨침[頓悟]이라는 차별성과 함께 재가로부터 일정한 독립성을 확보하는 경제공동체로서의 승가라는 차별성을 포함한다. 이 전통은 한편으로 선원청규와 같은 새로운 계율을 요청하는 요인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간화선 수행 중심주의를 가져와 상대적으로 경전공부와 계율준수를 소홀하게 만들 수 있는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수행과정에서 삼학(三學)의 중요성은 불교전통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져 왔고, 그것은 현재 한국불교계에서도 여전히 외형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만, 실제로는 계(戒)와 혜(慧)의 위상이 정(定)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5)

이러한 현실은 한국불교계 전반의 윤리적 위기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비판을 부르기도 한다. 물론 우리 불교계에 관한 비판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관점에서 또 다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 구체적 내용 또한 상반될 수 있지만, 최소한 우리 사회 속에서 불교가 윤리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만을 받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요인들이 작동하고 있겠지만,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축이 된 자본주의 질서와의 적절한 관계정립의 지속적인 실패와 함께 승가의 계율에 대한 경시와 재가의 불교윤리에 대한 무지를 주요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부대중공동체가 함께 지향해야 하는 깨달음과 불교윤리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 정립이라는 과제를 생각해볼 필요와 마주하게 된다.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라는 두 주체 사이의 긴밀한 연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부대중공동체 안에서 깨달음은 그 두 주체의 상황, 즉 출가와 재가라는 상황에 바탕을 두고 전개된다. 출가보살의 경우, 삭발염의로 상징되는 속세로부터의 자유로움을 토대로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반면, 재가보살의 경우 일상적 생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한계 상황 속에서 출가보살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각자의 수행을 이끌어가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또한, 출가와 재가 모두 21세기 초반 한국 시민사회의 구성원인 시민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런 여건 속에서 수행과 깨달음의 과제는 시민윤리와의 접점을 지니고 있어야만 하고, 그것은 다시 계율을 포함하는 불교윤리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이어진다. 불교윤리는 사부대중공동체와 시민사회를 연결시켜주는 공통의 접점을 마련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형적인 정립에 그치고 있는 시민사회의 윤리적 토대를 강화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간의 이기적 본능에 기반하여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윤리와 절대자를 대체한 보편적인 도덕법칙에 대한 무조건적 순응을 강조하는 의무론적 윤리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형성된 서구 시민윤리가 우리 사회에 쉽게 착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시민들 사이의 연기적 관계망에 기반한 자비의 윤리를 강조하는 불교윤리는 시민윤리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풍부하다.6)

불교윤리가 시민윤리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전제는 당연히 사부대중공동체 안에서 충분히 작동되는 것이다. 보살불교에서 불교윤리는 보살의 윤리가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다시 보살의 수행과 깨달음 지향이 일상적 삶의 국면에서 구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를 ‘역사를 잘 이해하여 제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가르침’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현응스님의 주장과 같이, 깨달음은 사회와 역사 속에서 펼쳐질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검증도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현응, 2016).

박병기(2016)는 다른 글을 통해서 깨달음이 일상 속 어리석음의 극복이자 자본주의 사회 질서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확대된 탐욕과 그 탐욕 충족의 지속적인 좌절로 인한 분노를 극복하고자 하는 종교적 지향점이자 동시에 윤리적 지향점임을 강조한 바 있다(박병기, 2016). 깨달음이 일상에 기반을 두고 추구되는 것이어야 하고, 그 일상은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직면하고 있는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그 어리석음 때문에 지속적으로 범하고 있는 탐욕과 분노의 삶을 성찰하면서 근원적인 해소를 시도하는 과정 자체가 깨달음의 과정이고, 따라서 깨달음은 본질적으로 사회화 또는 역사화의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7) 그런데 우리는 그 깨달음이 마치 일상과는 분리된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또 다른 어리석음을 쉽게 범하곤 한다.8)

2. 월주스님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문제를 깨달음의 성격 자체에서 정당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천을 통해 지속적으로 검증되어야 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우리 논의의 맥락 속에서 이제 월주스님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서 있다. 이미 논의의 출발점에서 이 주제에 접근할 때 논자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현재 진행 중이라는 사실과 논자의 체험 결여 문제로 제시한 바 있고, 그것을 부분적으로나마 넘어설 수 있는 방안으로 당사자인 월주스님의 육성을 통한 증언 분석과 평가 방법을 택하고자 함도 밝힌 바 있다.

이 논의에서 주요 참고자료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월주스님의 회고록(『토끼뿔 거북털』)이고, 다른 하나는 이 회고록의 발간을 계기로 이루어진 여러 언론 매체의 인터뷰 기사이다. 700쪽이 넘는 방대한 회고록 중에서도 ‘5부 깨달음의 사회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고, 관련 인터뷰 기사도 주로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주제에 맞춰 인용하면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상은 항상 현실 가운데 있다. 계속 노력하는 과정이 수행이고 보살도(菩薩道)의 실현이다. 지금도 나는 보현행자처럼 정진한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수행의 목적은 올바른 불교관의 확립이며 실천에 나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의 내용도 간화선뿐 아니라 2,700년을 이어온 풍부한 불교 교학에서 눈길을 돌려 필요한 가르침을 취사선택해야 한다. … 중략 … 불법의 수행과 실천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노납의 일관된 회통불교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개인의 안락과 행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수행하고 공부하여 구한 결과를 마땅히 대중에게 회향할 때 그 빛을 더욱 발할 수 있다(송월주, 2016: 328, 330-331).”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어디 있고, 세간과 출세간이 따로 있느냐. 이판이 아니면 사판도 제대로 못하고, 사판을 하지 않으면 이판도 의미 없다. 나는 세간에서 여러 일을 하지만 시간 날 때마다 ‘이뭣꼬’ 화두를 들며 출세간의 수행을 하고 있다.”9)

이상의 인용문을 통해서 우리는 월주스님의 수행과 깨달음, 실천 사이의 유기적인 연계성을 강조하는 관점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세간과 출세간이 따로 없고 따라서 이판과 사판의 구분도 의미 없는 것일 수 있다는 일갈은 ‘수행하고 공부하여 구한 결과를 마땅히 대중에게 회향할 때 그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다시 수행의 목적을 ‘올바른 불교관의 확립’과 함께 ‘실천에 나서는 것’으로 확장하는 지점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월주스님의 실천적 관점은 두 번의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는 과정에서 제안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불교의 중생구제 정신을 사회 속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운동으로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은 구체적으로 통일운동의 지원, 사회구제 사업 강화, 문화공동체 실현, 환경 및 생명보호의 생활화, 국제 기아 난민 돕기 등으로 상세화하여 전개하고자 했다. 그것은 다시 ‘사회, 자연, 세계는 하나다.’라는 구호 속에서 동체자비의 불교윤리와 정신을 사회 속에서 펼쳐가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10)

이러한 월주스님의 노력은 1996년 5월 원광대학교의 명예철학박사 수여 등을 통해 평가받기도 했고, 상당 부분 불교에 관한 사회적 인식을 넓히고 바로 잡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만큼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원광대학교측은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 등 불교와 대사회적인 눈부신 발전을 이룬 스님의 업적’을 근거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다고 밝혔고, 스님은 기조강연을 통해 ‘마음을 내어 신심을 갖고 자기 수행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중생을 위해 자비행을 실천하지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을 온전히 이행하지 못한 것’이라고 강조했다(송월주, 2016: 308-310).

이렇게 조계종 총무원장으로서 월주스님이 주축이 되어 실현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 구체적으로 현실 속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계량화하여 평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운동이 기본적으로 보살정신의 확산을 전제로 하는 정신운동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계종단 차원의 이 운동이 현재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있다는 한시성 때문에 비롯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소한 ‘94년 종단개혁의 결과로 출범한 개혁종단의 총무원장으로서 월주스님이 자신의 종단개혁 방향을 구체적인 사회운동으로 전개하고자 했다는 선언적 차원의 평가와 함께, 몇 가지 구체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찾는 데는 어려움이 크지 않다.

1995년 11월 개혁종단이 출범한 지 1년이 지난 지점에서 이루어진 한 언론매체의 평가를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11) 이 매체는 1년 동안 이루어진 일 중에서 불교사회복지 재단 설립, 외국인 노동자 법회 실시, 삼풍 참사 자원봉사, 북한 수재민 돕기 성금 모금 등과 함께 한국통신 노조원들의 조계사 농성을 허용하고 감싸주었다는 점까지 성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각 거점사찰의 민주적 운영을 위해 마련된 교구종회의 무력화, 재가불자의 적극적 참여를 보장하고자 했던 사찰운영위원회의 형식화 등이 개혁종단의 한계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삼권분립 체제의 정착 속에서 환경과 노동 등 사회문제에 적극 대처했지만, 보수 세력의 저항으로 곳곳에 형성된 걸림돌을 지속적으로 제거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2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현재 시점에서 이런 당대의 평가에 대해 어떤 접근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나의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그 성과의 지속성과 현재성 물음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94년 개혁을 바탕으로 성립된 조계종단 총무원장 월주스님이 시도했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은 ‘지구촌공생회’와 ‘나눔의 집’ 같은 구체적인 활동으로 현재까지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월주스님의 ‘함께 같이 살아야 한다.’는 자각의 실천적 구현이라는 점에서, 또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관성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불교의 대사회적 목소리를 높이고 시민의식과 도덕성 제고에 불교계가 앞장 서고자 했던 노력은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단지 불교계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세태’가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고, 지난 촛불혁명을 통해 드러난 이른바 사회지도층의 도덕의식 부재에 대해 어떤 대안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12) 더 나아가 현재 종단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의 도덕성이 사회적 모범이 될 만한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가 훨씬 더 많음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불교가 사회적 도덕성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고자 했던 월주스님의 목표는 최소한 성공하지는 못한 것 아닌가 하는 평가에 우리는 도달할 수밖에 없다.

Ⅳ. 맺음말: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의 사회화’ 과제

깨달음의 사회화는 쉽게 달성될 수 없는 목표이자 당위적 지점에 있는 좌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1994년 종단 개혁을 기점으로 조계종단 차원에서 전개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대한 평가 또한 잠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운동의 지향점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와 한국불교계 상황 속에서 다시 조명하여 살려내고자 하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는 결론에는 도달할 수 있다. 한편으로 깨달음은 중생을 향하는 자비의 눈길과 손길을 통해서 비로소 구현될 수 있고 또 검증될 수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엄중한 현실이 그것을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역사를 통해서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등의 참사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잡아내는데 성공한 우리는 현재 개인화와 물질화라는 자본주의 질서의 급속한 정착과 분단구조의 고착, 이로 인한 삶의 의미와 방향 상실이라는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위기와 전면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특히 지난 촛불혁명과 대통령 탄핵과정에서 드러난, 이른바 사회지도층의 ‘부도덕성’과 ‘불감증’은 식민지 노예도덕과 군부정권의 국민윤리의 굴레를 동시에 벗어던지는 ‘진정한 윤리의 귀환 시대’를 요청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노예도덕과 국민윤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윤리는 기본적으로 시민윤리이다.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이끌어가는 주체로서의 시민을 전제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윤리인 공정성으로서의 정의(正義, justice)와 동료시민에 대한 우정을 전제로 하는 배려(配慮, care)가 바로 그 시민윤리의 핵심이다. 이 윤리는 각 시민사회 전통 속에서 축적해온 관습으로서의 도덕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시민교육의 한 축으로 도덕사회화를 포함해야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시민교육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 축으로 그렇게 수용한 도덕규범에 관한 비판능력을 목표로 하는 자율성과 비판성 함양 교육이 포함될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 초반 한국 시민사회를 전제로 하는 새로운 윤리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유의해야 하는 또 하나의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서구 근대시민사회에 뿌리를 둔 윤리가 토대하고 있는 개인주의에 관한 비판적 수용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개인주의는 각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 권리를 보장하게 하는데 기여했고,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개인화는 피할 수 없는 추세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개인주의는 그 뿌리에서부터 각 개인의 고립성(孤立性)과 이기성(利己性)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인간의 이기성은 최근 뇌과학 등 생명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공감과 협력 또한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라는 증거들이 지속적으로 확인되면서 고립성과 함께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불교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이기성은 탐욕과 집착의 과정이자 결과물이고, 고립성은 그 자체로 무명(無明)에 근거한 현상인식의 오류일 뿐이다.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이기성이 내재해 있지만 동시에 이타성 또한 지니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고, 고립성은 심리적인 착각이거나 자본주의적 생존경쟁의 과정이 심화되면서 드러나는 병적인 징후일 뿐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서로 얽혀 있다는 연기론(緣起論)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인식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과학적 처방이 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은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관심과 배려를 가능하게 하는 윤리적 처방, 즉 자비윤리(慈悲倫理)의 토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우리 불교는 이러한 현실 속에 급속히 편입되면서 돈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또 하나의 이익단체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깨달음 지상주의에 파묻혀 가능하지 않는 이분법적 구분을 전제로 수행공간에 함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은 ‘94년 조계종단 개혁 이후에 시민사회적 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조계종단을 중심으로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들이 늘고 있다. 자본주의와 돈이 지니는 강력한 원심력을 감안하거나 그것들에 맞설 수 있는 승가교육을 비롯한 현대적 수행공동체를 마련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던 과정들을 감안해 보면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 지점, 즉 ‘지금 여기’의 시·공간 속에서 우리는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관한 답으로 우리는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대승불교의 오래된 화두를 다시 궁그려 보고자 했다. 그것도 개혁종단의 실질적 수장을 역임하면서 당시 우리 사회와의 적극적인 만남을 모색하고자 했던 월주스님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성을 검토해 보고자 했다. 그 운동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한 점과 논자의 연구 역량 한계 등이 겹쳐 상세한 분석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운동이 전개되던 시점이 한편으로 군사정권의 그림자를 떨치며 문민화를 시도하는 민주화의 완성기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제금융사태라는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과 마주해야 했던 시기였음을 상기하면서 재평가할 필요성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지금 여기’는 익숙해진 물질적 풍요와 함께 빈부격차의 심화, 그로 인한 소외계층의 절망 확산, 분단구조의 고착화로 인한 일상적 평화 위협과 무감각 등을 전제로 사회적 고통이 극대화하는 시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당연히 ‘모든 종교는 치열하게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고’, 그 구체적인 노력은 고통받은 이들에 대한 눈길과 손길로 먼저 나타나야 한다. 월주스님 언급처럼, “배고픈 이에게는 먼저 밥을 주고, 아픈 사람에게는 먼저 약을 준 후에 법을 이야기해야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다.”13)

그런 점에서 ‘깨달음의 사회화’는 주변의 고통 받는 이에게 먼저 눈길과 손길을 보내는 자비행의 실천을 우선시하는 수행을 의미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다시 승가 안에서 소외되고 있는 수행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와 관심이어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한 제도적 방안들을 함께 보완해 가야만 한다는 당위적 과제를 포함한다. 그것이 사부대중공동체로 확산되고, 연속적으로 시민사회로 확장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하는데, 그 정신적 토대는 승가의 수행정신 회복과 재가의 불교윤리 회복이다. 도덕성의 기반을 상실한 승가는 사회적인 존중과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행공동체로서의 지속성 자체를 지켜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승가의 도덕성과 수행정신은 곧바로 재가공동체의 지원과 비판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와 같은 상호적인 소통이 가능한 사부대중공동체는 월주스님의 바람과 같이 우리 불교가 시민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지향점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 구체적인 노력이 이 시점에 맞는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으로 다시 전개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오늘 우리의 만남이 그 출발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Footnotes

1) 이 논문은 2017년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연구원 학술세미나(2017. 9. 중앙승가대)에서 같은 제목으로 발표한 논자의 발표문을 학술지 형식에 맞춰 보완한 것이다.

2) 우리 불교학계 구성원 중에서 자신이 불교윤리학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도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시켜주는 한 근거일 수 있다.

3) 불교윤리를 비교윤리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키온(Keown, D.)을 꼽을 수 있다. 그는(2000) 특히 불교윤리를 공리주의 및 덕윤리와 비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4) 피터 하비(2010: 114)는 서양 윤리체계의 주요 측면으로 ‘도덕적 처방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꼽는다.

5) 월주스님의 지관스님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런 한국불교의 이상적 지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스님은 선·교·율(禪敎律)을 겸비한 수행자들의 스승, 선지식(善知識)이었다. 특히 경학(經學)에 집중해 혜안(慧眼)을 얻었다(송월주, 2016: 448).”

6) 물론 이 주제에 관한 논의는 시민윤리가 개인주의에 기반한 최소윤리인데 비해 불교윤리는 연기적 관계망에 기반한 최대윤리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현실적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보다 상세한 논의는 박병기(2013)의 책, 12장 ‘한국사회의 새로운 이념으로서의 연기적 독존주의’를 참조할 수 있다. 또한, 논자가 2015 초·중등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의 책임자를 맡아 도덕 교과를 이끌어가는 4가지 핵심가치 중 하나로 설정된 배려 속에 자비를 포함시키고자 했던 것도 같은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교육부(2015)를 참조하라.

7) 불교에 관한 사회학적 접근 또는 불교의 사회적 책임 등과 관련된 우리 불교학계의 논의는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논자의 관점에서 의미있다고 평가할 만한 것들은 박경준(2010), 유승무(2010), 이병욱(2016) 등의 논의들이다.

8) 이찬훈은 2016년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개정증보판 발간을 계기로 전개된 한국불교계에 깨달음 논쟁이 산중불교, 신비주의, 기복불교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빠져나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논쟁은 지속되지 못하고 있다.

9) 서정보, 2016. “월주 스님 ‘이판사판 구별이 어딨어, 화두 들고 세상 일 하는 건 함께 해야지’.” <동아일보>, 9.26. http://news.donga.com/3/all/20160927/80497500/1.

10)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관한 기사는 <한겨레신문> 1995년 1월 8일자, <동아일보< 1995년 1월 10일자 15면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동아일보는 같은 기사를 통해 “개혁회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새 종단은 이타적인 보살정신을 바탕으로 황폐해진 시민의식과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에 적극 앞장 서 나갈 것”이라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의 입장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11) 안영진. 1995. “조계종 개혁종단 출범 1돌/종무행정 민주화·사회참여 새기틀.” <한겨레신문>, 11.26.

12) 그중 일부는 ‘독실한 불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비율로 보면 물론 ‘독실한 기독교인’이 더 많지만 불교인이라고 해서 전혀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점을 부인할 길은 없다. 또 하나 쉽게 넘어갈 수 없는 현상은 지난 10년간 불자인구의 급속한 감소이다. 약 300만 명이 줄어들어 개신교에 이어 제2의 종교로 전락한 현실은 물론 제도종교 인구의 지속적인 감소라는 탈종교화 현상과도 맞물려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계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과 불자들 자신의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3) 은수정. 2016. “회고록 출간한 월주 스님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 세간에서 실천해야’.” <전북일보>. 10.7.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111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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