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연구논문

진천 용화사 경내 문화유산과 주변 석조물에 관한 고찰과 의의

임양순1
Yang-Soon lm1
1진천 용화사 주지
1The Chief Priest, Yonghwa-sa Temple in Jincheon

© Copyright 2019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4.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09, 2018; Revised: Jun 12, 2018; Accepted: Jun 20, 2018

Published Online: Jun 30, 2018

국문초록

조선 시대의 숭유억불 정책과 한반도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란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찰이 폐사되고 문화재는 유실되었다. 그러나 이에 관한 변변한 조사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실정에서 각 지방에 방치된 채 산재해 있는 문화재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고, 원형을 복원하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논문은 진천 용화사의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유실 문화재의 보존과 관리에 대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진천 용화사와 용화사 경내의 문화유산을 살펴본 후, 용화사 주변에 산재한 불교 관련 유물의 실태를 기술하였다. 특히, 이 논문은 유실되었던 석조 보살입상을 용화사 경내로 봉안하게 된 과정과 아직도 돌려받지 못한 사찰 인근의 석조 부재들을 소개함으로써 폐사지의 유실 문화재 관리와 관련해 중요한 사례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토대로 문화재 관리와 관련해 국내·외에 유출된 문화재의 환수 노력과 그에 대한 평가, 그리고 유실 문화재의 보존과 관리를 위한 불교계의 대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ABSTRACT

During the political repression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numerous wars in the Korean peninsula, many temples were destroyed and cultural assets were lost. However, it is our reality that we have not even been able to investigate this. In this situation, it is very difficult to restore and take it to its original location cultural assets that has been neglected and scattered in each region.

This paper shows the problems of the conservation and management of the lost cultural properties by presenting the examples of Jincheon Yonghwa-sa Temple and tried to provide an alternative to them. For this purpose, this paper first examined Jincheon Yonghwa-sa Temple and its cultural heritage, and then described the actual state of Buddhist artifacts scattered around Yonghwa-sa Temple. In particular, this paper provided an important case for the management of the lost cultural property of the Buddhist temple destroyed by introducing the stone artifact near the Buddhist temple which has not yet been returned and the process of the return of the lost stone Buddhist statue.

Based on the results, we discussed the efforts of the recovery of the cultural assets spilled in and out of Korea, the evaluation for such efforts, and the Buddhist alternatives for conservation and management of the lost cultural assets.

Keywords: 진천 용화사; 문화유산; 문화재 환수; 유실 문화재; 폐사지
Keywords: Jincheon Yonghwa-sa Temple; Cultural Heritage; Cultural Property Recovery; Lost Property; Destroyed Temple

Ⅰ. 서 론

진천 용화사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전통사찰로 지정된 사찰이다. 용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에 속해 있으며, 제5교구 법주사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사찰은 진천군청 소재지인 진천읍의 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사찰의 전면부에 해당하는 동쪽으로는 넓은 논이 광활하게 펼쳐 있고, 그 앞으로 백곡천이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야트막한 걸미산(榤尾山)1) 이 자리하고 있다. 걸미산은 종래에 걸미산성2) 으로 알려져 왔으며, 최근 조사에서는 원삼국∼삼국시대로 추정되는 연질․경질 토기가 발견되었고, 지금은 신정리 유적으로 부르고 있다(박연서, 2005: 171).

용화사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헌상 기록은 1825년(순조 25년)에 발간한 『상산지(常山誌)』에 남아 있다. 『상산지』에는 용화사 건너편 덕문이들 앞에서 적병이 용화사 경내에 있는 석조여래입상을 바라보고 늠름한 장군으로 오인해서 놀라 달아났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적병이 놀라 달아난 덕분에 진천군 지역의 주민들은 큰 피해가 없었고, 그 후부터 이 불상은 진천의 수호신으로 지역 주민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충북학연구소, 2001: 244).

이처럼 진천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석조여래입상을 문화재로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지만, 그동안 용화사는 전국적으로는 물론 충청북도 지역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사찰이며 문화재 보유사찰임에도 불구하고, 불교 신자, 참배객 그리고 관광객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물론 그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당해 지역 자치단체장의 문화유산에 관한 이해도와 관심, 철도와 고속도로 등의 미비로 인한 낮은 접근성, 해당 사찰 주지의 역량 등이 큰 요인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던 사찰이 폐사된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수많은 변란과 전란 속에 폐사된 사찰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다. 폐사된 사찰의 문화재는 당해 사찰 터에 남아 있는 예도 있지만, 제자리에서 이관되어 전혀 관련이 없는 장소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도난 등 다양한 원인으로 인하여 원위치에서 이탈한 무수한 문화재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 불교계 일부에서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이 펼쳐지면서 원래 위치로 봉안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싹트고 있으나, 아직도 정부나 종교계 그리고 국민들의 문화재에 대한 의식은 성보 문화재의 의의와 귀중함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2018년 보물 제1977호로 지정된 청와대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청와대 불상은 일제강점기 문화재 수난사를 대표하는 유물로, 본래 경주 남산 혹은 도지동 이거사(移車寺) 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3년 무렵 경주금융조합 이사였던 오히라(小平)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 총독에게 바쳐 서울 남산 왜성대로 옮겨졌다. 이후 1939년 경복궁에 새로운 총독관저(현 청와대)가 지어지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된 것으로 전한다.”(<연합뉴스>, 2018.4.12.)

위의 인용문은 2018년 4월 12일 <연합뉴스>에 보도된 기사의 일부이다. 이에 따르면 청와대 불상은 원래의 자리인 경주를 떠나 청와대에 옮겨져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 불상의 중대석(中臺石)은 불상과 떨어져 2002년 춘천박물관 개관 시기에 춘천으로 이전된 것으로 밝혀졌다(이경민, 2017).

이처럼 불교 관련 성보 문화재가 본래 위치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며 제 모습의 원형을 잃고, 더욱이 하나의 형태에서 분리되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각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70여 년간 우리 손으로 국가운영을 하면서도 청와대 안에 불상이 어디에서 왔는지, 제자리는 어디인지도 찾지 않을 만큼 정부의 문화재 정책과 의식은 부족한 실정이었다. 청와대 경내에 있는 문화재조차 제자리를 찾지 못한 점을 살펴보건대, 제자리를 벗어난 채 각 지방에 방치된 문화재의 원래 자리 찾기는 요원한 실정이다.

이 논문은 용화사의 사례를 통해 이러한 문제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용화사의 문화유산에 관한 연구와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원래 용화사에 있던 문화유산의 자취를 확인하기 위한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진천 용화사에 대하여 학계에 소개된 내용은 미미한 형편이다. 박상일(2004), 충북학연구소(2001), 신광철(1993) 등의 연구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나 있으나, 그 내용 또한 몇 줄에 한정된 극히 적은 내용이 소개되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진천 용화사 혹은 용화사에 있는 문화유산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된 논문은 전혀 없는 상태이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진천 용화사와 용화사 경내의 문화유산에 대하여 살펴본 후, 용화사 주변 1km 내외에 산재한 불교 관련 석조물에 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이는 용화사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경내 문화유산 그리고 주변 불교 석조물에 관한 연구 기록을 남기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기록들이 경배의 대상이 되었던 각종 문화재에 대한 관리와 향후 귀속(즉, 소유권) 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 결과를 토대로 유실된 불교 문화재의 환지본처(還至本處)3) 와 관련된 몇 가지 쟁점과 대안을 검토할 것이다.

Ⅱ. 진천 용화사

용화사는 진천읍 신정리 584-1에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로 비구니 스님이 수행하는 전통사찰이다. 2018년 3월 현재 기준으로 충청북도 관내의 전통사찰은 총 85개이며, 용화사는 1988년 5월 28일 충청북도에 의해 제24호 전통사찰로 등록되었다.4) 앞으로는 덕문이들을 향하고 있으며, 뒤로는 진천읍의 안산(安山)인 걸미산을 등지고 있다. 지역 사람들은 용화사를 걸미산 미륵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한국문화유산답사회, 1998: 29-30).

전해 내려오는 창건 설화에는 신라 시대 성덕왕(재위: 702-737) 19년(720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지만(임양순, 2016; 신광철, 1993), 이를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 사료나 문헌은 나온 바 없다. 다만 용화사 경내에서 연질 토기와 경질 토기가 무수히 발견되어 창건 연대를 신라 시대로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열어놓고 있다. 또한, 경내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된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석불입상)5) 이 있다. 석불입상은 7.5m의 대불로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성 시기는 신라말(新羅末) 혹은 고려 초기로 추측하고 있다(진천군지 편찬위원회, 1994: 1131). 한편, 진천 용화사는 어린 시절을 진천에서 보낸 신라 시대 김유신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한 송덕(頌德) 불상과 관련이 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이러한 3가지의 견해에 따라 용화사의 창건 역사는 길게 잡아 통일신라 시대로 보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창건 설화가 남아 있는 사찰이지만 조선 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오랜 기간 사찰은 폐허가 되어 폐사지(廢寺地)의 형태로 존재하였다(진천군지 편찬위원회, 1994: 634). 폐사지에 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여래입상만 외롭게 서 있다가 근래에 새롭게 조성된 사찰이 현재의 용화사이다. 따라서 최근에 새로이 건립된 전각들로 이루어진 용화사는 충청북도 지역의 사찰을 소개한 문헌과 자료에도 잘 나타나 있지 않다.

Ⅲ. 용화사 경내 문화유산

용화사 경내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석불 한 구와 비지정 문화재로 되어 있는 석불 한 구 등 총 2구의 석불입상이 있다.

1. 석조 여래입상(龍華寺 石造如來立像):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된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높이가 7.5m의 거불이다. 석조여래입상 혹은 석불입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원효대사가 조성했으며, 만덕(萬德) 불상이라고 전해오기도 하고(진천군지 편찬위원회, 1994: 1308), 디지털진천문화대전에는 김유신 장군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고려 초에 조성해 송덕(頌德) 불상이라고 부른다고도 한다.6) 석조여래입상에 대한 기록은 진천지역의 향토자료인 『상산지』7) 에 처음 나타난다.

<그림 1>은 『상산지』 상권 고적(古蹟) 조에 있는 석조여래입상 관련 원본 기록과 이고(정우섭, 1932: 38-39), 그 아래의 인용문은 상산고적회가 번역한 국역본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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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상산지에 나타난 석조여래입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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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석불은 읍의 대안(對案) 걸미산 밖에 미륵부처가 있는데 언덕 곁에서 단정히 손을 모으고 있는데, 그 높이가 5장 남짓하다. 전설에 적의 군대가 덕문(德文)의 앞 들에 진을 쳐서 고을의 안으로 향하려고 할 때, 신장이 5척이나 되고 위엄스럽고 용모가 늠름한 한 장군이 장차 진을 충돌하니, 적의 군대가 흩어져 달아나는 것 같았다. 마을사람들이 뒤에서 그것을 보니, 이는 걸미산의 미륵부처였다고 한다. 어느 연대에 어느 적병들이 왔었는지는 징험할 수 없으나, 그러나 성스러운 모습이 나타나서 읍을 보호한 것으로 기이한 일이다(상산고적회, 2002: 80-81).

한편,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한군선사문화연구원, 2013: 70).

석조여래입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재질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얼굴부터 다리까지 단일석으로 조성되어 있다(<그림 2>). 이는 국내에 현존하는 오래된 석불 중에서 단일석으로 조성된 것으로는 그 높이가 가장 높은 석불입상이다. 물론 크기나 높이로 보면 용화사 석불입상보다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이 더 크지만, 관촉사 은진미륵은 3등신8) 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단일석으로 하나의 불상을 조성한 예로는 용화사 석불이 가장 장대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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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석조여래입상(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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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여래입상은 2006년 보수작업을 하면서 보관(寶冠)과 백호상(白毫相)을 교체하였다(<그림 3>). 기존의 보관은 처음 조성할 때의 보관이 아니라는 설이 있었으며, 중부지방 미륵불의 보관이 주로 팔각형의 형태로 조성되어 있어 충청북도에서 진천군과 논의한 후 보관을 팔각형의 형태로 교체하였다. 백호상은 일제강점기 금으로 만든 것을 도난 당하여 그 후 철에 금을 입혀 백호상을 조성하였으나,9) 빗물이 들어가면서 녹물이 미간으로 흘러 미관상 흉해 수정으로 교체하면서 녹이 흐른 부분을 세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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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석조여래입상(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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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은 하단의 폭이 170cm이며, 높이는 7.5m이고, 둘레는 4.15m에 이르는 장대한 규모이다(진천군지 편찬위원회, 1994: 1306). 불상의 몸체는 비교적 순화하였으나, 얼굴이나 몸의 전체 윤곽, 그리고 옷 주름선의 표현 등은 단정하고 원만하여 전체적으로 위엄을 풍기고 있다. 법의(法衣)는 가슴을 거의 드러낸 채 여래상처럼 거칠고 얇은 통견(通肩)을 입고 있는 모습이며, 하체는 U자 모양의 옷 주름이 중첩되어 표현되어 있다. 머리에는 팔각형의 보관을 쓰고 있다.

얼굴 모양을 보면 타원형의 얼굴로 눈이 가늘며 감은 듯 웃는 얼굴이다. 얼굴 미간에는 백호(白毫)10 가 박혀 있다. 코는 길면서 큼지막하며 볼에는 보조개가 있어 전체적으로 웃는 모습을 띤 인자하고 자비로운 부처상으로 흔히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불’11) 과 비슷한 풍모가 특징이다.

불상의 앞부분은 목 부분에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와 치장한 구슬을 꿴 장식인 영락(瓔珞)12) 목걸이, 그리고 가슴 부분에 손과 연꽃줄기·불의가 조각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손으로 연꽃을 잡은 모습이 여타 불상과 다르다는 점이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었으며, 왼손은 배에 대어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 뒷부분은 상단의 머리 부분의 나발과 귀, 그리고 뒷덜미의 통견을 식별할 수 있는 선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세부적인 선의 흐름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형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석불은 걸미산을 뒤로 한 채 동쪽을 향하고 있다. 따라서 드넓은 진천 벌판을 향하여 인자한 모습으로 주민과 농토를 지켜주고 있는 모습이다.

지역주민들을 지켜주었다는 이유로 진천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지역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다(진천군지 편찬위원회, 1994: 1306).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떠난 아들의 급제를 기원하기 위해 정화수를 올려놓고 어머니들의 기도가 이어졌으며, 아들 낳기를 발원하는 등 용화사 미륵불은 예로부터 진천 주민의 애환을 달래주고, 소원을 들어주었던 부처님이다(<불교신문>, 2002.2.15.).

석조여래입상은 손으로 연꽃을 잡고 있는 모습만 특이한 것이 아니다. ‘용화사 나한전 건립을 위한 시굴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석조여래입상은 “현재의 표토면 바로 아래 거대한 암반 위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러한 정황이 사실이라면 석불입상은 처음 조성될 당시에 하천변에 솟아있는 암반 위에 불상을 만들어 세운 특이한 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박연서, 2005: 186)고 한다. 아울러 여태껏 공식적으로 학계에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석조여래입상의 측면에서 특이한 점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석불 측면에 조성된 조각의 형태이다. 불상의 측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달마상의 형태가 조각되어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그림 4>), 이러한 형식은 이제껏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우리나라 불상, 특히 불교 미술사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앞으로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의 학술적, 미술사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더욱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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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석조여래입상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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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석조 보살입상

진천 용화사에는 용화사 석조여래입상 옆에 그보다 작은 석조 보살입상이 있다. 보살입상은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충북학연구소, 2001: 245). 1980년 9월 용화사 북쪽의 작은 냇가에서 불두(佛頭)와 불신(佛身)이 분리된 채 발굴되었다(윤은정, 2013; 충북학연구소, 2001: 244-245). 그 후 불두와 불신을 접합하는 복원 과정을 거친 후, 진천문화원 정원에 일시적으로 전시되었다가 진천군청, 진천문화원 등 관계기관의 협조 속에 2008년 4월 23일 이운식(移運式)을 거행하고 용화사 경내의 원위치를 찾아 봉안되었다(<그림 5>). 진천군청 등의 관계 공무원과 용화사 신도 및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후원과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이 일은 향후 폐사되었던 사찰의 문화재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유사한 사업의 중요한 모범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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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석조 보살입상 이운식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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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보살입상은 높이 230cm 크기로 석조여래입상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석조 보살입상도 화강암 재질의 석조 불상으로 머리에 얼굴보다 더 긴 원통형의 관을 쓰고 있고, 두 손을 배 앞에 가지런하게 모으고 있어 공손하게 보이는 보살상이다(<그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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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석조 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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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은 정교하지는 않지만, 몸 전체에 양감이 풍부한 편이다. 상호(相好)13)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마멸이 심해 이목구비(耳目口鼻) 중 눈가와 코 부분은 거의 형태가 마모됐지만, 복스러운 얼굴에서 나타나는 입 부분의 양감이 두드러지게 남아 있다. 머리에 쓴 관의 선과 얼굴 상호에 거의 붙어 있는 눈과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보여 후덕한 상호의 보살상이다.

어깨에 걸쳐져 둥글게 늘어진 가사처럼 보이는 옷자락과 불신의 하단까지 주름 스커트처럼 퍼지게 입은 치마가 특이하다. 불두에서 보이는 복스러운 상호와 원통형 고관 등의 조각 수법으로 미루어 조성 연대를 추정할 수 있고, 발견 장소가 용화사와 인접한 지역이라 진천 용화사 석불입상과 같은 사지에서 전하던 불상으로 판단하여 용화사 경내에 봉안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까닭에 얼굴이나 몸체의 마멸이 심해 윤곽이 희미하다. 그러나 입 부분과 볼록한 볼, 어깨부터 내려온 손 모양, 몸체 하단의 옷 주름의 윤곽은 확연하게 살아 있어 전체적으로 양감을 느끼게 한다. 반면 불두와 불신 사이에 복원을 위하여 이어 붙인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석조 보살입상은 2018년 현재 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지 않으나, 문화재적 가치로 보아 조속한 시일 내에 지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Ⅳ. 용화사 주변 석조물

용화사에서 진천군청 방향으로 약 1km 남짓 서쪽에 진천 상산초등학교가 있다. 상산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 위치한 정원에는 불교 관련 석조 부재가 여러 점 보인다. 이 석조 부재들은 현재 용화사 경내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 보살입상과 같은 시기에 용화사 옆 개울가에서 함께 발견된 부재들이다.14) 처음 발견되었을 때 주변 개인 집 정원으로 옮겨졌다가 이후 현재 위치인 진천읍 읍내리 상산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이전된 상태이다.

현재 하나의 탑 형태를 갖추고 있는 석조 부재와 그 주변에 또 다른 석조 부재들이 흩어져 있다. 석조 부재의 규모는 작으나 정교한 형태로 미루어 보아 고려 시대의 석탑 부재와 석등 부재로 판단된다.

1. 석탑 부재

석탑 형태의 석조 부재는 <그림 7>처럼 하나의 석등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석탑의 부재와 석등의 부재를 전문가의 고증 없이 마구잡이로 쌓아 올려 석탑의 형태로 만들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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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석탑 형태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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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처럼 보이는 <그림 7>의 석조 부재에서 진짜 석탑 부재는 옥개석 2매뿐이다. 석탑 옥개석의 크기는 86cm × 86cm이고, 석등의 부재인 화사석을 가운데 두고 위와 아래에 한 점씩 놓여 있다. 가장 위에 놓여 있는 보주형 상륜부는 화사석과 마찬가지로 석등 부재이다.

2. 석등 부재

석등 부재는 석탑의 부재로 잘못 사용된 화사석 1매와 보주형 상륜부 1매 외에 옥개석 1점이 더 남아 있다(<그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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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석등의 옥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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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석은 높이가 47cm이며 직경은 30cm로 작지 않은 크기이다. 화사석에 사천왕상 모양은 보이지 않으나, 네 곳에 창을 달기 위해 화창이 균형감 있게 뚫려 있으며, 팔각형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아울러 위에 놓여 있는 보주형 상륜부의 크기가 장대하다. 상륜부의 크기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석등의 규모도 상당히 컸을 것으로 판단된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그림 8>의 부재는 중앙에 석등의 간주석(竿柱石)을 끼워 넣기 위한 원형의 홈이 패여 있는 것으로 볼 때, 석등의 옥개석으로 판단된다. 안타깝게도 현재 땅바닥에 놓여 있어 반대편 하부의 모습은 볼 수 없다. 형태적으로는 통일신라 시대에 많이 건립된 석등 양식으로 경남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남 밀양의 표충사 석등과 고려 시대에 건립된 칠곡 송림사 석등의 옥개석과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석등의 옥개석을 보다 자세하게 연구하면 진천 용화사의 초기 창건연대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논의한 석탑과 석등의 부재들은 용화사 경내에 있는 석조여래입상과 부재의 재질이 유사하다. 따라서 석조여래입상 주변의 백곡천이 범람할 때 사찰 경내까지 흘러넘친 물에 석조물이 넘어진 후 천변에 묻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3. 그 외 석조 부재

위에서 상술한 석조물 주변에 <그림 9>와 <그림 10>처럼 두 개의 부재가 더 놓여 있다. 단일 부재만을 놓고 볼 때, 용도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석조 부재이다. 그러나 이 부재들도 용화사에 모셔져 있는 석조 보살입상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용화사에서 사용한 물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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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석조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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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석조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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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에 보이는 석조 부재는 석확 또는 물확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용도는 좀 더 상세한 조사가 필요하다. 또한, <그림 10>의 석조 부재는 구멍이 작아 석조에 나무나 어떤 물품을 끼워서 쓰는 용도로 판단되나, 현재로서는 단정 짓기 어려운 실정이다. 아울러 용화사 경내에 현재 보관되어 있는 석조 부재와 동일한 형태와 크기를 보이고 있어 1짝의 형태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용화사 주변에 사찰 관련 석조물이 현존해 있으나, 용화사 경내가 아닌 교육청 관할의 초등학교 운동장에 놓여 있어 이들에 대한 자세한 관찰과 조사가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땅바닥에 놓여 있는 이 부재를 들어 올려 반대편의 형태와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어야 정확한 용도와 부재의 명칭을 기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확인할 수 없는 점이 매우 아쉽다.

또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놓여 있다 보니 철없는 초등학생들의 발에 밟히고 마모되는 등 훼손의 위험성이 매우 큰 상황이다. 아울러 석조 부재 주변은 쓰레기통 등으로 인해 지저분한 상태이다. 오랜 기간 우리 선조들에게 경배의 대상이요 기원의 대상이 되었던 탑과 석등의 부재가 처해 있는 현재 상황이 매우 안타까운 실정이다. 예상되는 석조 부재의 훼손을 방지하고,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되찾기 위해 이들을 용화사 경내로 이전할 수 있도록 충청북도 교육청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반환이 어렵다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이러한 충청북도 교육청의 답변에는 아직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정부 기관의 문화재에 대한 의식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고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꾸준히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면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타당하고 이해 가능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Ⅴ. 결 론

지금까지 진천 용화사 경내(境內) 문화재와 주변 석조물의 현황과 실태에 대해 고찰한 결과와 그 의의를 토대로 문화재 관리와 관련된 몇 가지 쟁점에 대해 살펴보겠다.

조선 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은 고려 시대까지 이어지던 불교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만 쇠락시킨 것은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가야사라는 절을 불 질러 폐사시킨 사례(황현, 2012: 34-36)처럼 권세 있는 양반들의 별장이나 정자를 짓기 위해 절을 빼앗거나 파괴하고, 사찰에 전해오던 각종 문화재를 약탈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그리고 병인양요 등 서양의 침범에 이르기까지 잦은 전란으로 인해 사찰과 불교 문화재를 온전히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많은 불교사찰이 폐사되고 문화재는 유실되었다. 이로 인해 불교 관련 성보문화재가 본래 위치에서 벗어나 다른 장소로 옮겨지며 제 모습의 원형을 잃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의 형태에서 분리되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각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변변한 조사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게다가 문화재는 역사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제 기능을 하고 있을 때 비로소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더욱 빛날 수 있다는 의식조차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다. 이런 실정에서 각 지방에 방치된 채 산재해 있는 문화재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고, 원형을 복원하는 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불교계 및 민간기관 등 각계각층의 노력을 통해 많은 해외 소재 문화재를 국내로 환수하고, 일부는 제자리를 찾아 돌려놓을 수 있었던 점은 다행이다.

1965년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 1,432점을 환수한(김영규, 2009: 55) 이후, 정부는 우리 문화재가 반출되어 있는 국가들과 협상을 통해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부당하게 유출된 문화재의 반환에 힘쓰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 당했던 강화도 외규장각 의궤를 임대라는 형식을 통해 되돌려 받은 것은 일본 이외의 국가에서 문화재를 환수한 첫 번째 사례로 주목할 만한 성과이다(박흥신, 2014).

한편, 문화재보호법을 근거로 2012년 설립된 문화재청 특수법인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해외에 유출된 한국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조사·연구하고, 활용·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문기관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8년 4월 1일 기준으로 현재까지 집계된 국외 유출 문화재는 모두 172,316점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의 실태를 파악하고, 부당하게 반출된 문화재의 환수와 적법하게 반출된 문화재의 활용 및 홍보 지원 등 관련된 제반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15) 특히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문화재청과 대한불교조계종과의 협력을 통해 해외 불교 문화재 환수 사업에서 여러 차례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순천 선암사 ‘동악당재인대선사진영’(2015년, 미국에서 환수), 남양주 석천암 ‘지장시왕도’(2016년, 독일에서 환수), 청도 운문사 ‘철성도’(2018년, 미국에서 환수) 등이 대표적인 성과이다.

국가 간 협상과는 별도로 환수 운동을 펼치고 있는 ‘문화재제자리찾기’와 ‘사단법인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의 활동도 눈여겨 볼만하다.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김영준, 환속 전 법명 혜문)는 2006년 일본 도쿄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 47책 반환, 2011년 일본 궁내청 소장 『조선왕실의궤』 1,205책 반환, 2013년 LA 카운티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문정왕후 어보의 반환 결정과 2014년 대한제국 국새를 포함한 조선왕실 인장 9점의 환수 과정을 주도했다. 또한,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오구라 컬렉션,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라마탑형 사리구, 뤼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금강산 장안사 종, 일본 오쿠라호텔에 소장된 평양 율리사지 석탑 등의 환수를 위한 운동도 적극 전개하고 있다.16)

‘사단법인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은 경북지역의 해외 반출 문화재 환수 운동을 전개하는 단체이다. 해외로 유출된 경북의 문화재 매입, 청소년이나 교사 등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국외 소재 문화재에 대한 각종 학술행사 등을 주요 사업으로 하고 있다.17)

그러나 민간단체의 해외 유출 문화재 환수 노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 환수를 위한 여론 조성에 적극적인 민간단체의 노력이 조용하게 외교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정부 입장과 배치되면서 일각에서는 이 같은 노력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예도 있고, 해외 소재 문화재가 한국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역할을 하므로 굳이 환수할 이유가 있느냐는 견해도 있다.18) 또한, 해외에서 민간인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어렵사리 구입한 문화재를 도난 문화재라고 하여 국가에서 무상으로 몰수하는 사례도 있다.19)

국외 문화재 환수 노력과는 별개로 국내 문화재 제자리 찾기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매월당 김시습(설잠스님)의 사리가 김시습의 부도가 있는 부여 무량사로 반환될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 80여 년 만에 사리가 부여 무량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이시영, 2017).20) 한편, 고성 옥천사의 나한상은 사찰과 학계의 공조 노력을 통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가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나한상의 사진이 공개되었고, 이를 통해 도난 당했던 나한상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다(신성민, 2016).21)

문화재는 종교를 초월해 국민 모두에게 소중한 유산이다. 문화재는 우리 선조들의 얼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중한 자원이고, 우리는 문화재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다. 따라서 정부와 관계기관, 그리고 종교계와 일반 국민 모두가 문화재 보호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와 종단, 그리고 사찰 등은 문화재 회수 및 제자리 찾기를 위한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문화재 회수 및 관리 체계를 공고하게 구축해야 한다.

국외 문화재 환수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국내의 폐사된 사찰에서 유실된 문화재도 중요한 성보이며, 관리·보존의 대상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국내 폐사지에서 유실된 문화재는 최소한의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관련된 불교계와 각급 기관의 적극적인 협력과 대책 마련을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대안 모색의 범위를 불교계로 국한하여 살펴보면, 문화재 관련 인력과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던 과거에 비해 현재의 사정은 조금 나아 보인다. 우선 불교계 내부에서 문화재 관련 인력의 양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교에서는 문화재학 전공을 이수한 학사 및 석·박사 승려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이들이 문화재 관련 현장에서 충분한 경험과 전문적 역량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각 교구 본사나 지역별로 문화재 관련 조직을 결성하여 해당 지역의 불교 문화재에 대한 조사와 보존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폐사지에 관한 연구와 발굴 및 보존 사업도 지역사찰과 교구본사, 중앙종단 등이 각기 역할을 분담해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의 연구 대상인 진천 용화사도 충청북도에 소재한 작은 사찰로서 수많은 전란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사찰은 폐사가 되고, 각종 문화재와 석조물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거나 용화사 앞 개울가 모래 아래 깊숙이 묻히게 되는 비운을 맞이했을 것이다. 진천 지역주민들의 관심과 도움으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이후 많은 사연을 지닌 채 용화사 경내로 모신 석조 보살입상은 폐사지의 불상을 원래의 사찰에 봉안할 수 있었던 점은 폐사지의 유실 문화재 관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산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석조물 부재들은 아직도 제자리에 온전하게 돌아오지 못한 상태이다. 문화유산은 원래의 자리에 보존해야 한다는 ‘문화유산 제자리 원칙’은 문화재 보호와 보존의 기본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용화사 외부에 산재해 있는 석조 부재들을 하루 빨리 용화사 경내로 봉안할 수 있도록 진천군청 및 교육청 등 관계기관의 협조를 유도하기 위한 불교계 각급 기관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이 논문에서 고찰한 진천 용화사의 사례가 전란과 숭유억불 정책 등으로 인하여 폐사되었던 사찰의 유실 문화재에 관한 연구와 이들의 제자리 찾기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Footnotes

1)미륵당(용화사) 옆에 있는 작은 산으로 천지개벽 때 떠내려가다가 미륵(용화사 석조여래입상)에 걸려 남았다 하여 걸미산이라고 부른다(진천군지 편찬위원 회, 1994: 634).

2)진천 용화사 뒤편 도구머리 마을 뒤에 있는 해발 약 86m 정도의 낮은 구릉지의 야산에 있는 산성으로 남쪽의 저곡(底谷) 지대를 끼고 있는 포곡(包谷)식의 토성이다(상산고적회, 1997: 171).

3)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유실된 불교 문화재의 관리 원칙이다.

4)자세한 것은 공공데이터포털에 등록된 충청북도 전통사찰 정보(https://www.datago.kr/dataset/3067369/fileData.do. )를 참조.

5)충청북도 지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된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석불입상, 석불 혹은 미륵불로 진천지역에서 통용되고 있어 이 논문에서도 혼용하기로 한다.

6)디지털진천문화대전 진천 용화사 석조여래입상 항목을 참조하라(http://jin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jincheon&dataType=01, 2017년 4월 24일 검색). 또한, 다른 견해로는 신라 시대에 길상사(吉祥寺)의 제향을 국제(國祭)로 하였는데 고려 시대에도 신라의 예를 따라 국제로 하려면 표적이 있어야 하겠기에 고려 시대에 이 불상을 건립하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충북학연구소, 2001: 244).

7)『상산지』는 진천군 읍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진천군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내용 이 가장 풍부하게 실려 있어 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책은 1825년 정재경(鄭在褧)에 의해 처음 편찬된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6년 과 1932년 등 총 3회에 걸쳐 속간되었다. 1932년 정우섭은 『상산지』를 재차 편집하여 발간하면서 이전 간행본과의 차이점을 주를 달아 옮겨 놓았다. 2002 년 진천 상산고적회가 기존의 『상산지』를 모두 합하여 주를 달아 번역함으로 써 현대 진천군의 역사에 대해 좀 더 쉽게 알 수 있게 하였다. 『상산지』 「권 상」에는 범례, 서(序), 군명 연혁, 강역, 성지, 봉수, 면리, 병제, 진공, 봉름, 창저, 요역, 단사, 역원, 제언, 도로, 교량, 토산, 풍속, 성씨, 호구, 전제 연혁, 이혁, 세액, 관공서 연혁, 관공리 경비, 교원 연혁, 종교, 교육, 위생, 농업, 상판, 관적, 산천, 명승, 고적, 분묘, 정사, 사사 등이 기록되었다. 『상산지』 「권 하」에는 인물, 충의, 효행, 정렬, 학행, 문과, 무과, 음사, 연방, 서기, 사조가 있으며, 원문 이 수록되어 있다(상산고적회, 2002: 3).

8)관촉사 은진미륵은 몸 전체를 3개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한 석불이다.

9)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금으로 만든 것을 도난 당하여 미륵부처님을 모시는 주민들에 의해 철에 금을 입혀 백호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철에 금을 입힌 백호상은 현재 진천 용화사에 보관되어 있다.

10)백호는 무량 세계를 비추는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을 말하며, 불상에서 가장 중요한 길상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광명을 무량 세계에 비친다 고 하여 부처뿐만 아니라, 보살상에도 조성하는 사례가 있다. 초기 불상을 만 들 때부터 이 상은 작은 원형을 도드라지게 새기거나 수정 같은 보석을 끼워 넣기도 했으며, 드물게 채색으로 직접 그리기도 하였다.

11)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은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의 가야산 절벽에 새겨진 백제 후기의 마애불로서 국보 제84호 이다. 서산 마애석불 또는 서산 마애불 또는 운산 마애석불이라고도 부른다.

12)구슬을 꿰어서 만든 목걸이 또는 가슴 치레 걸이를 말한다.

13)부처가 가지고 있는 신체의 크고 작은 특징을 지칭한다(곽철환, 2003: 350),

14)자세한 것은 디지털진천문화대전(http://jincheon.grandculture.net) 사이트에서 ‘석조부재’를 검색하라.

15)국외문화재 현황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자세한 내용은 재단 홈페이지 (https://www.overseaschf.or.kr)를 참조하라,

16) 자세한 것은 ‘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 홈페이지(http://caro.or.kr)를 참고하라.

17)자세한 것은 (사)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홈페이지(http://www.gbcs.or.kr)를 참 고하라.

18)민간단체의 해외 문화재 환수 노력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서는 주간경향 에 실린 원희복(2014)의 글을 참조하라(http://www.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9021714581).

19)자세한 것은 2015년 6월 22일 보도된 JTBC 뉴스룸의 ‘탐사플러스’ 기사 “‘호조 태환권 원판’ 환수… 그 불편한 진실”(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935979)을 참고하라.

20)자세한 것은 불교신문 기사(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0468)를 참고하라.

21)자세한 것은 현대불교신문의 해당 기사(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8352)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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