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화이관은 문화와 지역을 중심으로 화(華)와 이(夷)를 구분하는 중국문화의 매우 특수한 측면이다. 중국은 스스로를 중화나 화하(華夏)로 규정하고, 적대적 관계에 있는 주변 민족들을 사이(四夷)로 규정해서 폄하한다. 화이관의 대두는 동주 열국(東周 列國)시대로, 이 시기가 되면 주변 이민족이 성장하면서 분열된 중국에 위협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문화적인 우월의식을 통해서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주변 이민족에 대한 공동대응 구조를 확립하게 된다(홍승현, 2008: 188). 이후 화이관은 절대신 구조가 약한 중국문화에서, 일종의 선민의식과 같은 역할을 하며, 왕조의 구분을 넘어서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배경관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화이관의 특징은 ‘중화’라는 명칭 속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중국이 ‘중’이라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와, ‘화’라는 찬란한 문화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이관은 인도문화에 따른 불교의 동점에, 화이관이 필연적인 방어기재로 대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중국의 불교비판 속에는 언제나 분량의 차이는 있을지지만 화이관에 대한 부분이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의 반론이, 조선 후기 백곡에 의해서 이방역의 문제로 비중 있게 등장하는 것은 매우 특이하다. 왜냐하면 조선은 화이관에 따르면 화가 아닌 이이기 때문이다. 즉, 조선에서의 화이관에 따른 불교비판이란, 실제로는 화의 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이의 이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백곡은 「간폐석교소」의 모두에서, 낮은 사람의 말이라도 이익이 있다면 들을 가치가 있다는 점을 항변하여 자신 주장의 타당성을 입론한다. 그리고 현종의 성덕을 찬탄한 뒤, 현종 원년부터 대두하는 불교탄압과 현종 2년에 인수원과 자수원의 폐지 부당성을 논변한다. 즉, 여기까지는 당시 「간폐석교소」를 작성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1)
이후 원인의 분석으로 백곡은 당시 가장 일반적인 불교비판으로 판단되는 ① 이방역·② 수시대(殊時代)·③ 무윤회(誣輪回)·④ 모재백(耗財帛)·⑤ 상정교(傷政敎)·⑥ 실편오(失偏伍)의 총 6가지를 들고 있다. 그런데 이 중 ①이 화이관에 따른 것이며, ② 역시 화이관과 관련된다. 즉, 화이관과 연관된 부분이 가장 높은 중요도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백곡이 6가지를 거론함에 앞서 ‘이방’과 ‘시대’의 문제를 독립시켜서 먼저 언급한 뒤,2) 그 다음으로 6가지 항목을 나열하는 것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본고는 화이관에 대한 불교비판과 이에 대한 반론제기를 기본배경으로, 왜 백곡의 시대에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하는지에 대해서 검토해본다. 백곡의 「간폐석교소」와 관련해서는 김기영의 1999년 박사논문을 비롯해, 지금까지 직간접적인 다양한 분석들이 존재해 왔다(김영태, 1973; 김용조, 1979; 김주호, 1994; 김기영, 1999; 김기영, 2000; 黃仁奎, 2005; 김용태, 2009; 오경후, 2009; 차차석, 2009; 이규정(원행), 2013). 그러나 백곡의 시대에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이, 중국이 아닌 동이의 조선에서 재등장하는 이유에 대한 측면은 다루어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정리는, 「간폐석교소」의 대두와 관련된 간접적인 배경을 보다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확보한다.
다음으로 본고는 백곡 이전의 화이관에 대한 반론구조를 정리한 뒤, 백곡의 반론이 이를 종합한 두 가지 층위의 논리구조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백곡이 이전의 호불론서들을 충실하게 검토한 뒤, 「간폐석교소」를 작성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는 「간폐석교소」를 좀 더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상의 연구접근을 통해서, 백곡이 「간폐석교소」에서 가장 먼저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이방역의 문제에 대해 보다 면밀한 입각점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시대적 요청구조 속에서, 백곡이 8,150자나(김기영, 2000: 89) 되는 장문의 소문(疏文)을 통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에 대한 한 방식을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충분한 연구의의를 확보한다고 하겠다.
Ⅱ. 이방역에 의한 불교비판과 백곡의 시대 상황
백곡이 제기한 이방역의 문제는 중국문화 전통의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으로 현대에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화이관에 매몰되어 있던 과거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백곡 역시 당시에 일반적으로 거론되던 불교비판 6가지 중에서, 이 문제를 가장 먼저 거론하고 있다.3)
이방역과 관련해서, 백곡은 불교가 서방 인도에서 탄생하여 화하로 들어온 이방의 문화이기 때문에 없애려는 것인지를 묻고 있다.4)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한족 문화 중심의 중앙을 상정하고, 주변 지역을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의 4이로 규정하며 폄하한다(홍승현, 2008: 188-190; 홍승현, 2011: 192-194). 이 같은 관점 속에서 인도 역시 서쪽의 이방에 속할 뿐이므로, 인도에서 기원한 불교 역시 온당할 수 없다는 비판이다.
백곡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화이관에 따른 불교 배척의 논리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올바른 지역이 아니면 올바른 기운의 문화가 존재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논어』 「팔일(八佾)」에는 공자의 말로 “이적(夷狄)의 유군(有君)이 제하(諸夏)의 군주 없음만 못하다.”라는 기록이 있다.5) 이는 중화주의에 입각한 공자 역시, 지역 차별 인식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즉, 중국이 아닌 이상 정(正)이 아닌 부정(不正)인 편(偏)일 수밖에 없고, 이 같은 연장 선상에서 불교는 중화의 문화가 아니므로 부정(否定),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정의 땅에는 성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중국문화에서 성인이란, 천지의 조화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6) 문화를 창달하는 군주여야만 한다.7) 이를 성인군주론(聖人君主論) 즉 성군론이라고 한다(馮友蘭, 2008: 33-34; 1993: 13-15; 李宗桂, 1993: 125-137). 그런데 중국이 아닌 변방에는 이런 정위(正位)의 성인이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붓다는 성인과 비슷한 상태에서, 올바른 성인을 미혹시키는 존재라는 관점이 성립하게 된다.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자주색은 붉은색의 가치를 현혹하기 때문에 싫어한다.’라고 하였는데,8) 이방의 성인인 붓다가 바로 이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화이관에 입각한 불교 배척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존재했다. 이는 중국문화와 인도문화의 충돌에 따른 것으로, 가장 이른 기록은 화이관에 의한 비판이 아주 뚜렷하지는 않지만 후한(後漢) 말기의 인물인 모융(牟融)의9) 『모자이혹론(牟子理惑論)』 ‘제17문’에서 살펴진다. 이의 해당 기록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물었다. 孔子가 말하기를, “夷狄의 有君이 諸 夏의 亡과 같지 않다.”라고. 또 孟子는 陳相이 다시금 (農家를 대표하는) 許行의 術 배우는 것을 나무라며 말했다. “내가 華夏로 夷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들었어도, 夷로 華夏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10) 당신은 弱冠에 堯·舜·周·孔의 道를 배웠으면서, 이제 그것을 버리고 다시금 夷狄의 術을 배우려 하니 미혹한 것이 아닌가?11)
여기에는 화이관에 입각해서 불교를 강하게 비판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화이관에 따른 중화 우월주의를 통해 이방의 불교를 낮추어 보는 것만은 명확하다. 인용문에서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이 구체적이지 않은 것은, 동한 말기가 혼란기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즉, 공자가 화이관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 것처럼,12) 당시의 현실 역시 화이관을 강하게 주장할 정도로 중국이 우월하고 평안한 상태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모융에게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공맹의 말을 통한 권위로 불교를 이적의 술이며, 미혹의 대상으로 치부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부정’과 ‘현혹(眩惑)’의 관점에서 불교를 이해하는 화이관의 관점과 일치한다. 즉,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이 역시 화이관에 입각한 관점임에는 분명한 것이다.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은 남조(南朝) 양나라 승우(僧祐)(445-518)의 「홍명집후서(弘明集後序)」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여기의 내용은 『모자이혹론』의 것보다 화이관에 의한 배척 관점이 보다 구체적이다. 이의 해당 기록을 적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만약 불교가 西戎의 것으로 교화 방법이 華夏의 것이 아니라고 의심한다면, (이는) 前聖의 터전에 집착하여 敎를 定하는 것으로(이는 새롭게) 敎를 베풀어 풍속을 바꾸려는 것은 아니다.13)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은 수·당 시대의 승려 법림(法琳)(572-640)이 당나라 초인 622년에 찬술한 『파사론(破邪論)』에서도 살펴진다. 『파사론』은 태사령 부혁(傅奕)(555-639)이 621년 불교를 폐하자는 11조를 올리자, 이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되어 당시 진왕(秦王)이던 이세민에게 올려진 책이다.14) 그런데 부혁의 11조 중 3번째에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이 수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의 해당 부분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부혁이 진언했다. 西域의 胡者는 추악한 진흙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진흙으로 기와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지금도 오히려 털에서 누린내가 나는 人面을 한 獸心의 土梟(올빼미)입니다. 道人(역시) 驢騾(나귀와 노새)이며 四色(카스트제도)으로 貪逆의 惡種입니다. 佛은 西方에서 태어났으니, 中國의 正俗이 아니며 대개 妖魅의 邪氣일 뿐입니다.15)
여기에서 토효 즉 올빼미는 중국에서는 부모를 잡아먹는 불효의 새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인도인들의 개인주의적인 측면이 당시의 중국인들에게는 불효와 같은 비윤리적인 관점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을 반영하는 것을 판단된다. 여라는 나귀와 노새로 인도인들을 얕잡아 부르는 폄칭이다. 또, 사색이란 카스트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역시 인도문화의 특징을 잡아서 폄하하려는 의도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당시 인도인들을 낮춰보는 풍속이 여러 가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인도인들 중에는 와공 일을 하는 이들이 상당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외에도 인종에 따른 냄새를 언급하는 부분도 있어 흥미롭다.
또, 붓다 역시 서방 출신의 치우침으로 이는 중국의 정(正)과 대비되는 사(邪)로써, 요매 즉 요사스럽게 현혹하는 주체라고 비판하고 있다. 부혁의 비판은 대단히 감정적이며 인종차별적이다. 그러나 화이론에 입각해서는 ‘중국-정속(正俗)’과 ‘인도-사기(邪氣)’를 대비시켜 요매 즉 사이비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정과 부정의 맥락과 일치되는 측면이다.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은 당말 한유(韓愈)(768-824)의 「논불골표(論佛骨表)(815년)」와 『원도(原道)』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여기에서는 붓다가 철저하게 이적(夷狄)의 1인일 뿐이라는 관점이 드러나 있어 주목된다. 이를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는) 夷狄의 一法일 뿐입니다. … 대저 佛이란 본래 이적의 人으로 중국의 언어와 不通이며, 의복도 殊製입니다. … 가령 (佛의) 몸이 지금에 이르도록 존재하여 그 國命을 받들어 京師에 來朝한다면, 폐하는 접견을 허용하시되, 宣政殿에서 一見하는 것조차 부적절합니다. (그러므로) 禮賓院에서 (연회를) 一設하고 衣 一襲을 賜여 하고는 국경까지 호위하여 떠나도록 하면 됩니다.16)
經(『논어』)에 이르기를 “夷狄의 有君이 (오히려) 諸 夏의 亡과 같지 않다.” 하였고, 『詩經』에 이르기를, “戎狄을 치고, 荊舒를 징벌한다.” 하였다. (그런데) 今也에 이적의 法을 들어 先王之敎의 위에 두고 있으니, 幾何에 우리 모두가 夷가 되지 않겠는가!17)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은 지극히 중국적인 관점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태생적으로 체계적이거나 논리적일 수는 없다. 특히 중국이 아닌 한반도 입장에서는 우리 역시 동이일 뿐이라는 점에서, 화이관에 따른 비판은 성립하기 어렵다. 이로 인하여 성리학이 들어오는 고려말 이전에는 화이관에 입각한 불교비판은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는 초기부터 강한 자주성을 표방했고, ‘정강의 변(1127)’ 이후에는 금과 남송의 대치 국면 속에서 실리외교의 노선을 취하게 된다(이석현, 2005: 134-153). 이는 고려가 조선과 달리 사대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일정 부분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원 간섭기가 되면 고려인은 한족의 화북인이나 강남인(남송인)에 비해 신분이 높았다(愛宕松男, 昭和18年: 98-104; 오타기 마쓰오, 2013: 201-210). 이는 중국에 대한 사대나 모화주의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1326년 원나라 진종(태정제)의 어향사(御香使)로(許興植, 1991: 92; 廉仲燮, 2014b: 261). 고려를 방문한 인도 승려 지공(指空)(Śūnyâdiśya, 1300-1361)은 고려사회와 고려불교(廉仲燮, 2014a: 104-106; 廉仲燮, 2014c: 37-40), 그중에서도 선불교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廉仲燮, 2015: 375-376). 말도 통하지 않은 지공이 단기간에 고려에 강력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원 제국 시대에는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이 약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인도적인 측면이 작용했기 때문이다(廉仲燮, 2014a: 110-120).
그러나 고려말이 되면 성리학의 전래와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인식이 재고되기 시작한다. 특히 금나라에 억압받던 남송 시대를 산 朱熹는 한족의 약화 이유 중 하나로 이방의 종교인 불교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26의 「석씨(釋氏)」와 같은 불교비판으로 표면화된다.18) 또, 주희는 현실적인 약자라도 대의명분만 있다면, 정통이 될 수 있다는 논리로 군사력이 열세인 남송의 한족을 단합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 부분은 북송의 사마광이 찬술한 정사(正史)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이 조조의 조위(曹魏) 정통론을 제시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치)통감강목』을 통해서 촉한(蜀漢) 정통론을 제기하는 것을 통해 분명해진다(狩野直喜, 1997: 431). 이러한 주희의 관점은 이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통해서 계승된다.
성리학은 북송의 정이(程頤)에게서 시작되어 남송의 주희에게서 완성된다. 그래서 성리학을 정주이학(程朱理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주희가 집대성자라는 점에서, ‘성리학=주자학’이라는 인식이 보다 보편적이다. 이런 점에서 성리학의 수학이란, 필연적으로 그 속에 내포된 주희의 배불적인 관점과 중화주의를 이식받는 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실제로 공민왕 만년인 1374년 장원급제를 하는 김자수는 한유의 「논불골표」에 나오는 “夫佛本夷狄之人, 與中國言語不通, 衣服殊製”의 구절을 사용해 불교를 비판하고 있다.19) 즉, 성리학의 유행과 함께 화이관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려 초의 최승로가 <시무이십팔조>에서 불교를 사회경제적인 관점에서 주로 비판한 것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주목된다(정성식, 2009: 138-146.).20) 그러나 조선 시대 최고의 불교비판서인 1398년 정도전이 찬술한 『불씨잡변(佛氏雜辨)』에는 화이관에 의한 비판이 독립된 항목을 차지하지 못한 채 극히 소략하게 살펴질 뿐이다. 그것도 진덕수(1178-1235)의 글과 한유의 「논불골표」를 인용하는 것 속에 일부가 나타나는 정도이다.21) 이 중 앞서 언급된 바 없는 진덕수의 인용문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비록 (성불함을) 求하여 얻는다고 하더라도 戎夷의 荒幻한 敎로는 華夏를 다스리는 것이 不可합니다.22)
『불씨잡변』에 화이관에 의한 비판이 소략한 것은, 이 책이 정치·사회적인 관점과 성리학의 진리론 관점에서 불교의 이론을 비판하는데 무게중심을 둔 저술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안재호, 2009: 317-326; 이기용, 2012: 31-34).23) 그러나 정도전보다 조금 늦은 함허(涵虛)(1376-1433)의 『현정론(顯正論)』과 작자 미상의(유정엽, 2007: 221).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에서는 이 문제가 하나의 항목으로 다루어지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조선 초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이 상당히 유력한 불교비판론 중의 하나였다는 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의 해당 부분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물어 말했다. 천하가 가히 따라야 하는 것은 五帝와 三王의 道뿐이다. 그러므로 孔聖은 (이를) 祖述하였고, 羣賢은 相傳하여 諸 方策에 수록하니 列國이 皆遵하였다. 이 道는 중국에서 구할 수 있지만 夷狄에서는 구할 수 없다. 佛은 西夷의 人이다. 어찌 그 道(불교)가 중국에서 유행할 수 있겠는가? 漢 明帝가 그 法을 서역에서 구하였으니, 昧한 것이지 明한 것이 아니다.24)
물어 말했다. 유교에서 불교를 헐뜯는 자는, 반드시 ‘불교는 西夷의 敎이므로 중국에서 시행되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말한다. 또 중국 聖人의 敎는 圖書에 앞서는 것이 없는데, 佛者의 논변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 하열하다는 (주장이) 어찌 그럴듯하지 않은가?25)
인용문을 보면, 강력한 중화주의와 이에 따른 불교의 지역적인 문제 및 교리적인 하열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여기에는 ‘지역의 문제’와 ‘교리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중 『유석질의론』에서 제기되는 교리 문제는 도서에 비해 불교의 논변이 하열하다는 주장이다. 도서란 복희(伏羲)의 『하도(河圖)』와 우왕(禹王)의 『낙서(洛書)』를 의미하는 것으로(문재곤, 1991: 123-127), 이는 『주역』에 입각한 철학성으로서의 우월론이다. 정도전이 『불씨잡변』에서 주안점을 두는 부분 역시 철학적인 우월론이라는 점에서, 당시 불교비판은 모화주의에 따른 피상적인 측면과 철학적인 측면의 두 가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말의 반원 정책 속에, 대륙에서 원을 물리치고 새롭게 등장한 명나라는 고려의 성리학자들로 하여금 한족 국가인 명에 경도되도록 한다. 특히 성리학적 관점에 따른 이민족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식과 강국인 원을 만리장성 밖으로 물리친 명의 존재는 사대의식을 환기하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성리학을 지배이데올로기로 하는 조선의 건국은 성리학의 위대성을 절감케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구조 속에 존재하는 것이 화이관에 입각한 불교비판이다. 만일 조선 초기 성리학자들의 명에 대한 경도가 없었다면, 우리 역시 동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불교비판은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곡은 「간폐석교소」에서 이방역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백곡의 시대는 성리학이 국시가 되는 조선 초의 상황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이방역의 문제가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백곡이 처한 당시의 시대 상황 즉 요청적인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현종의 시대는 양란을 겪은 이후의 회복기인 동시에, 왕실로는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으로 차남인 효종이 즉위해서 북벌을 주장한 직후이다. 당시 북벌은 시대적인 환경상 불가능했으나, 조선으로서 이를 자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로 인해 외부적인 측면은 내부적인 문제로 옮겨붙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예학(禮學)의 대두에 따른 1·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다. 이는 주희가 외부적인 금나라를 어찌할 수 없자, 역사적인 촉한 정통론을 제기한 것과 유사한 해법 구조라고 하겠다. 양난 이후 예학의 유행은 조선 백성의 정신을 단속해, 전후의 불균형한 조선이 붕괴되지 않도록 하는 정신적인 방어기제의 역할도 수행했다.
예학이란, 성리학이 발전하면서 『주자가례』를26) 바탕으로 실천적인 현실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학 시대에 차남인 효종의 사망과 효종비 사망을 왕통을 계승했다는 관점에서 장자로 볼 것이냐? 또는 가계에 의거해 차남으로 볼 것이냐?를 가지고 서인과 남인이 충돌하게 된다. 이것이 자의대비의 상복 복제와 관련된 1차 기해예송(己亥禮訟)(1659)과 2차 갑인예송(甲寅禮訟)(1674)이다(최근덕, 2001: 92-111). 현종의 재위가 1659∼1674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현종의 재위 기간에 1·2차 예송이 모두 포함된다. 예송은 예학을 통한 당쟁이기도 했지만, 이는 성리학이 예학을 통해서 보다 엄밀하게 현실 생활에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리학적 이념이 실생활까지 엄격하게 적용된다는 것은 사대부 밖에서까지도 불교의 위치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효종의 사망으로 촉발되는 기해예송과, 현종 원년부터 불교에 대한 비판이 첨예화되는 사건은 동일한 연장선 상에서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27) 즉, 효종의 사망으로 북벌 논의가 일단락되면서 무게중심이 예송으로 옮겨지고, 이 과정에서 불교 폐지에 대한 논의 역시 표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예학에 있어서 불교는 양립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전후의 더딘 회복은 불교의 폐지를 통한 인적 물적 자원의 환원요청을 수반하게 된다. 이러한 두 가지 요소가 현종 초에 불교 폐지에 대한 논의가 표면화되고, 현종 2(1661)년에 인수원과 자수원의 양니원(兩尼院)이 폐사 상황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화이관에 입각한 불교비판이 백곡 당시에 힘을 얻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임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과 삼전도 치욕을 통해, 명을 높이고 청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립되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이 명을 계승한다는 소중화의식으로 발전한 뒤, 송시열의 유훈에 의해 1704년 화양서원에 명나라 신종(神宗)을 모시는 만동묘(萬東廟)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조선의 소중화 의식확립이란, 조선이 더 이상 동이가 아니라 화이관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불교를 화이관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재점화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와 같은 시대 상황으로 인해, 백곡 당시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은 다시금 힘을 얻으며 유행하게 된다.
Ⅲ. 불교적인 대응 논리와 백곡의 변증 구조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의 대응은 『모자이혹론』에서부터 살펴진다. 모융의 논변은 특히 중요한데,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의 대응 논리의 대체가 여기에서 확립되어 이후에도 답습 유전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의 해당 내용을 적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禹는 西羌에서 출현했어도 聖哲하지만, 瞽叟는 舜을 낳았음에도 어리석고 완고(頑嚚)했다. 由余는 狄國에서 태어났지만 秦(목공)이 패자가 되도록 하였고, (주나라 무왕의 동생인) 管·蔡는 河洛(지역)에 있었지만 (성왕을 보필하는 주공을 의심해)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傳해지는 말에, ‘北辰의 星(북극성)은 하늘의 중앙에 있지만, 인간 세상의 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漢地는 필시 하늘의 중앙에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佛經의 所說에는 ‘上下와 周極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佛이 보듬어 준다.’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다시 존경하고 배우는 것이지, 응당 堯·舜·周·孔의 道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金과 玉은 서로를 傷하지 않으며, 隨侯珠와 和氏璧(隨珠和壁)은 서로를 방해하는 일이 없다.28)
인용문을 보면, 오제 중 한 명인 우임금의 출신지를 들어서 지역의 논리가 부질없음을 지적한다. 다음의 고수는 같은 오제 중 한 명인 순임금의 아버지인데, 후처와 후처의 아들 상(象)을 총애하여 효자인 순임금을 죽이려고까지 하는 인물이다.29) 그러므로 이 구절은 혈통의 필연성도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판단된다. 후대의 반론들에 순이 언급되는 것은 동이족 출신이라는 것으로 우와 마찬가지로 지역적인 측면에서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혈통의 타당성을 비판하는 이런 구조는 무척 흥미롭다.
모융은 순과 우라는 군주 다음으로는 신하로서 예를 들고 있다. 이때 대비되는 인물이 북적 출신으로 진목공이 춘추오패(春秋五霸) 중 한 명이 되도록 돕는 유여와 관중 사람임에도 주공과 대립하다 주살되는 관숙과 채숙이다. 이 또한 지역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핵심이라는 의미라고 하겠다.
다음으로 북극성의 치우친 것을 통해서 중국이 세계의 중앙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은 크게 주목된다. 이는 화이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인 동시에 화이관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동한 말기는 혼란기이므로 중화의 자존감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인식이 표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인도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주장은 같은 『홍명집』 안의, 남조 송나라의 도사인 고환(顧歡)(425-488)이 474-477년 사이에 찬술한 「이하론(夷夏論)」에 대한 반박문건인 「중서여고도사(重書與顧道士)」에서도 확인된다.30) 이의 해당 기록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天竺은 娑婆의 正域에 위치하며, 淳善의 嘉會 處임을 안다. 그러므로 능히 至聖에 感通하고 영토는 三千(대천세계)의 중앙이다.31)
인용문 속에는 모융과는 달리 인도 중심에 대한 천명이 나타나 보인다. 그러나 인도가 세계의 중앙이 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측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주장은 불교의 종교적 관점에 따른 것으로 이 역시 타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환이 활동할 남조에서는 이를 주장할 정도로 화이관의 경직성이 적고, 불교적인 영향이 확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모융 때와는 다른 불교의 보다 적극적인 대응과 주장이 인지되는 것이다.
끝으로 모융은 자신이 불교에 매료된 것이 불교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 평등, 보편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불교가 유교와 상충되지 않는 상호적이며, 보충적인 관계임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비유가 바로 김옥(金玉)과 수주(隨珠)와 화벽(和璧)은 상충되지 않는다는 언급이다.
모융이 제시한 화이관에 의한 비판의 반론은 논리 구조 면에서는 일관되지 않아 다소 산만하지만, 중요한 논점은 여기에서 모두 제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확인되는 화이관의 불교비판에 대한 반론은 모융이 제기한 논거들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 반론은 당연히 승우의 「홍명집후서」에서도 확인된다. 『홍명집』에 『모자이혹론』이 맨 처음으로 수록되어 있으니, 승우가 모융의 관점에 영향은 받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다. 실제로 승우의 반론 구조는 모융의 것과는 다르지만 논점은 상당 부분 일치되는 것이 확인되는데, 이의 해당 기록을 적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항상 諸 夏의 영토였는데, 세상의 가르침은 9번이나 변화했다. … 중략 … 禹는 西羌 출신이고 舜은 東夷 출생이다. (그러나) 누가 地賤이라고 그 聖을 버리자고 하겠는가! 孔丘는 동이에 거처하기를 바랐고, 老聃은 西戎으로 갔다. 道가 있는 곳이 어떻게 지역으로 선택되겠는가? 대저 俗에서 聖을 베풀어 교화할 뿐이니, 華·夷에 얽매이지 않는다.32)
승우의 반론 중 세상이 9번 변화했다는 것은, 중국에서 역대로 성인의 교화가 9번 바뀌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하나라와 은나라의 마지막 폭군인 걸·주를 정벌하고, 은나라와 주나라의 개조인 탕·문무가 등장하는 등의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 안에서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불교가 있기 전에도 바뀌었다는 것은 문제에 따른 보다 변화가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는 불교에 의한 중국의 변화 타당성을 변증하는 측면이라고 하겠다.
또 승우는 오제 중 이방인인 우임금과 순임금의 예를 들어서, 그 도의 성스러움이 귀한 것이지 지역이 문제될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본래 연대순으로는 ‘순→우’의 순서인데, 여기에는 『모자이혹론』에서처럼 ‘우→순’으로 되어 있어 구 영향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어 흥미롭다.
다음으로는 공자와 노자의 예를 들어, 공자도 구이에 살고 싶어 했다는 『논어』 「자한(子罕)」을 언급하고33), 노자가 관령(關令) 윤희(尹喜)에게 도덕지의 오천여언(道德之意 五千餘言)을 남기고 떠났다는 『사기』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34) 이를 통해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교화가 중요한 것으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는 화이는 문제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런데 공자와 노자를 지칭함에 있어서, 승우는 공구와 노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중국문화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은 폄하의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승려인 승우가 불교적인 관점에서 유교와 도가 및 도교를 낮추어 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모융의 유불조화 및 상보적인 인식과는 차이를 보이는 모습이다. 그리고 승우는 인용문의 마지막에서 “不繫於華夷”라고 하여 화이관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또, 승우의 반론 중에는 모융과 유사한 내용의 중화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부분도 있다. 이의 해당 내용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예기』 「王制」에 (수록되어) 있는 “四海의 內 方三千里”라는 (구절을) 살펴보면,35) 中夏의 所據 또한 그리 넓지는 않은 것이다. … 중략 … 또 대저 대지에는 疆域이 없고, 寰域은 (각기) 통치됨이 다르다. 北辰(북극성)은 西北에 있으므로 天竺 중앙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이제 좁아터진 땅을 중화라 칭하며, 正法을 가로막고 있구나.36)
이 기록을 보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주장을 넘어서 인도야말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공구, 노담의 이름 표현과 연관해서, 승우가 지극히 불교 중심적인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승우의 인도 중심설은 북극성을 등장시키는 강한 주장 천명이라는 점을 통해, 앞의 모융의 설과 「중서여고도사」에 등장하는 부분을 섞어놓은 것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고환과 승우의 시대에는 화이관 비판에 대한 주체적인 방어 논리가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임을 인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승우가 승려라는 특수신분이며, 중국 역사에서 가장 불교적인 왕조인 양나라를 살았던 인물이라는 점 역시 한몫하였을 것이다.
승우에 비해 법림은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법림의 논점은 지역이나 생김새는 말단에 불과한 것으로 본질은 도가 있느냐라는 것이다. 이의 해당 부분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답하여 말하겠다. 『史記』의 역대 帝王 목록과 陶隱居(도홍경)의 年紀(『帝代年譜』) 등을 살펴보니, ‘庖犧氏는 蛇身에 人首며, 大庭氏는 人身에 牛頭였다. 또 女媧氏 역시 蛇身에 人頭며, 秦仲衍은 鳥身에 人面이었다.
夏禹는 東夷 출신이며, 文王은 西羌에서 출생했다.
簡狄은 燕卵을 삼키고 契(湯의 조상)을 낳았고, 伯禹는 母의 胸背를 가르고 태어났다. 伊尹은 속이 빈 뽕나무에 의탁해서 (나왔고), 元氏인 魏主 역시 夷狄 출신’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모두 하늘의 밝은 命에 응하여 때를 타고 벽력같이 나타나거나 혹은 南面하여 孤를 稱했다. (또) 혹은 萬國에 君臨하였다. 비록 生處는 僻陋하고 形貌는 鄙麁하지만, 각기 天威를 어거하고 聖德을 갖추어 품었다. 老子 또한 牧母에 의탁하여 태어났다. 下凡으로 庸賤에서 나왔다고 해서 어떻게 聖을 얻음이 없겠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君子가 그곳에 거처하면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37) 하였으니, 그 말이 믿을 만하다. 첨언해서 말하면, ‘도가 있은즉 존귀한 것이니, 어찌 고하를 가리겠는가!’ 그러므로 聖의 응함에는 방소가 없고, 기틀을 따라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38)
법림은 사서(史書)를 통해서, 고대 성인의 생김새의 특이점과 지역의 문제 그리고 탄생의 특이점과 출신의 미천함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외부적인 조건이나 형용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적인 聖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형식이 아니라 본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성인과 관련해서 신이함이 등장하는 것은 그 비범함을 강조하기 위함이거나, 원래는 유력한 부족의 우두머리였던 상황이 후일 바뀌면서 변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림은 이와 같은 전승을 근거로 외부적인 조건의 차이가 본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논변하고 있는 것이다.
법림이 제시한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관점은 모융이나 승우에 비해서 보다 뚜렷하다. 때문에 법림 이후에는 이와 같은 측면 역시 화이관에 따른 불교비판에 대한 반론의 한 특징으로 수용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는 조선 초기에 이방역의 문제에 봉착했던 함허(1376-1433)의 『현정론』과 작자 미상의 『유석질의론』의 반론을 통해서 인지해 볼 수 있다. 이의 해당 부분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말하기를, ‘도가 있는 곳이 사람이 귀의할 바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五帝·三王이 이미 도를 가지는 바였으므로 사람들의 귀의할 바가 되어 華夏의 왕이 된 것이다. … 중략 … 華夏가 天竺을 가리켜 西라고 하지만, 오히려 天竺에서는 華夏를 가리켜 東이라고 한다. 만약 天下의 大中을 취한다면, 마땅히 正午에 그림자가 없는 곳이 중앙일 것이니 天竺이 그곳이다. 佛이 저곳에서 示生한 바가 어찌 그곳이 天下의 大中이 아니겠는가! 소위 東西라는 것은 대개 피차의 時俗에서 相稱하는 것일 뿐이지, 그 中을 占하여 그 東西를 정한 것은 아니다. 진실로 佛을 夷라 하여 그 도를 따르지 않겠다면, 舜은 東夷에서 나왔고 文王은 西夷 출신이다. (이럴진대) 그 사람을 夷라 하여 그 도를 따르지 않겠는가! 태어난 것은 자취고, 행하는 것이 도이다. 다만 그 도가 따를만한가, 따르지 않을 만한가를 볼지언정, 그 태어난 바의 자취에 구애될 것은 아니다. … 중략 … 『春秋』에서는 徐가 莒를 정벌하자 夷狄으로 여겼고, 狄人이 齊人과 더불어 邢에서 맹약하자 中國으로 여겼다. 대저 徐가 中國이면서도 夷狄의 이름을 받은 것은 그 不義 때문이며, 狄人이 中國의 稱을 받은 것은 그 有義 때문이다.39)
國土의 강역을 나누는 것은 비유하면 그릇과 같다. 그릇의 대소가 비록 같지 않으나, 中은 어느 그릇엔들 없겠는가? 저 또한 一天下요, 이 또한 一天下다. 諸 夏가 저곳을 夷로 여긴다면, 또한 천축도 이곳을 夷로 여길지 어찌 알겠는가! 하물며 저 천축은 南贍部洲의 中으로 夷가 아니다.40)
이상의 인용문을 보면 사람이 중요한 것이지, 지역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지역이란 상대적인 것이며, 중국보다도 오히려 인도가 중앙이라는 주장도 확인된다. 이는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불교적인 인식 속에는 인도가 중앙이라는 의식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다만 다른 것은 모융과 승우가 북극성의 위치를 가지고 주장 논거로 삼은 것에 반면, 함허는 해그림자를 통해서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도가 중앙이라는 주장과 관련해서 동아시아 불교 안에 여러 논거가 존재했음을 인지하게 해준다.
또, 『현정론』에는 주나라의 개창자인 문왕이 서융이었음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문왕이 은나라의 西伯이었던 점을 근거로 한 것이다.41) 주나라는 공자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던 왕조이며,42) 문왕은 역시 공자가 이상으로 여겼던 성인 중 한 명이다
이상과 같은 『현정론』과 『유석질의론』의 관점은, 모융과 승우 그리고 법림의 반론 구조와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는 백곡의 「간폐석교소」에게까지 계승된다.
백곡은 중국과 지역이 다르다고 불교를 배척할 수 없는 이유를 다양하게 열거하고 있다.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공자와 맹자에 관한 부분이다.43) 이는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 인물이 이들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노나라 정공 14년(B.C. 496)의 대사구(大司寇)로 임명되었다가 계환자와의 갈등 속에서 55세에 노나라를 떠나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주유열국(주유천하)을 하게 된다. 이 기간은 제자 염유의 중재로 노나라로 돌아오게 되는 68세까지 무려 14년간이나 계속된다.44) 백곡은 이를 통해서 지역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의미로 맹자가 이상을 펼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 유세를 하는 것으로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 백곡은 공맹과 관련된 비유로 드러나지 못했던 상황에서의 조벽(화씨벽)과 수주를 들고 있다.45)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벽과 수주는 『모자이혹론』에서만 확인된다. 그러나 모융과는 완전히 다른 층위의 관점에서 조벽과 수주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 중국이 아닌 다른 지역인으로 중국에 와서 성군이 되어 교화를 펼친 인물을 열거하고 있는데, 동이족 출신의 순임금과 서강 출신의 우임금이 그들이다.46) 순은 당요(唐堯)를 계승해서 우(虞)를 개창한 인물이며, 우는 하나라의 시조로 치수와 관계 수로의 정비로 군주가 되는 왕조의 개국자이다.47) 중국문화는 ‘성인=군주’라는 내성(內聖)·외왕(外王)의 성인군주론을 표방하며,48) 이로 인해 이들은 오제(堯·舜·禹·湯·文武)로 대표되는 최고의 성군들로 평가받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동이와 서융으로 중국인이 아님을 제기해, 불교와 붓다가 서방의 천축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법림과 함허는 문왕도 이방인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백곡은 문왕에 대해서는 열거하지 않고 있다. 이는 문왕이 『주역』과 관련된 인물인 동시에, 공자가 흠모한 주나라의 개조라는 점 등이 조선 후기 성리학적 가치 속에서 자칫 반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 지역적인 우월성이 존재한다면, 중국 태생의 걸·주는 타당한지에 대한 반론도 제기한다.49) 걸·주는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과 주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주지육림과 포락지형(炮烙之刑)을 통해서 폭군의 대명사로 불렸던 인물들이다.50) 이 같은 이야기는 원래 은나라의 시조인 탕임금과 주나라의 시조인 문·무왕의 정벌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전 왕조의 마지막 임금의 폭정을 폄하한 것이지만, 후대에는 이런 인식이 굳어져 무비판적으로 수용된다. 『논어』 「자장(子張)」에는 비록 자공의 말이기는 하지만, 모든 악덕이 폐망의 군주에게 몰린 것이라는 비평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51)
백곡은 순과 탕을 걸·주에 대비해, 지역에 따른 차이가 논점이 될 수 없고 사람에 대한 부분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게 군주에 대한 부분을 들고, 다음에는 신하에 대한 예를 열거한다. 군주가 먼저 나오고 신하가 나오는 것은, 군신의 관계에 따른 측면과 군주만이 성인일 수 있다는 중국의 성인군주론 때문이다. 즉, 신하는 군주의 사례에 대한 보편성을 언급하는 정도의 보충일 뿐이지 본령은 아니라는 말이다.
백곡이 신하로 열거하는 인물은 서융 출신의 유여와 남만 출신의 계찰이며, 이에 대비되는 사람은 도척과 장교라는 도둑집단의 우두머리이다.52) 유여는 춘추오패 중 한 명이었던 진목공(秦穆公)의 참모로 오고대부 백리해(五羖大夫 百里奚)와53) 함께 활동했던 사람으로 『모자이혹론』에서도 살펴지는 인물이다. 화벽과 수주의 언급과 더불어 유여의 등장은 백곡이 『모자이혹론』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다음으로 계찰은 춘추시대 오나라 왕인 수몽(壽夢)(B.C. 585-561 재위)의 4째 아들로 부왕이 왕위를 계승해 주려 했으나 사양하고, 부왕의 사망 뒤에 즉위하는 세 형을 보필하여 오나라를 반석과 같은 입지로 올려놓게 된다.54) 이를 바탕으로 오나라는 이후 춘추오패 중 한 명이 되는 합려(闔閭)가 등장하게 된다.
다음으로 이들에 대비되는 도척과 장교는, 사마천의 『사기』 권124 「유협열전(游俠列傳)」이나 『장자』 「잡편(雜篇)」의 <29. 도척> 등에 등장하는 전국시대 무리를 지어서 활동하던 유명한 도둑의 우두머리이다. 백곡은 유여와 계찰을 도척과 장교와 대비해, 지역의 문제가 아닌 인물의 문제라는 점을 앞에 이어서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
여기까지로 백곡은 자신의 반론 중 첫째로 ‘사례와 관련된 측면’을 일단락짓고 있다. 그리고는 이에 대한 소결의 경증(經證)으로 『논어』 「자한」에서 공자가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라고 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55) 이는 공자가 중국에서 뜻이 펼쳐지지 않자, 오히려 구이가 낫겠다는 자탄의 표현을 한 것이다.56) 그러므로 뒤 구절인 “혹자가 물었다. ‘누추할 텐데 어떻게 하려는가?’ 공자가 답했다. ‘군자가 그곳에 거처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는57) 부분까지 언급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구절은 법림도 사용하고 있고, 유학을 배운 백곡으로서는 『논어』의 이 구절을 모르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뒤 구절을 생략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백곡은 공자의 구이에 대한 동경 구절로, 이를 장소가 문제일 수 없다는 논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다음 마지막 끝으로 백곡은 “중국이든 변경지역이든 어디에서 태어나든지 간에 성인은 다르지 않다.”라는 말로 첫째 반론 부분을 마무리하고 있다.58)
다음으로 백곡은 후대 유학자들의 말을 빌려 유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다는 유·불조화 또는 유·불일치 관점을 제기한다. 백곡이 예로 드는 것은 송의 학자인 유원성의 “공자와 붓다의 말은 서로 처음과 끝이 된다.”는 것과 금나라 학자인 이병산의 “세 분의 성인은 모두 주나라에 태어났다. … 중략 … 마치 해 달 별이 부상에 모여 있고, 모든 물이 대해에 모여 있는 것과 같다.”라는 구절이다.59) 즉, 유·불은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보완과 보충적인 관계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백곡이 인용하는 인물이 북송오자(北宋五子)와 같이 성리학의 권위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가 말하려는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이런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백곡은 두 번째 반론의 소결에 대한 경증으로 『중용』의 “도는 함께 운행해도 서로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과 『주역』의 십익(十翼) 중 「계사하전(繫辭下傳)」에 나오는 “길은 달라도 귀일점은 같다.”라는 구절을 들고 있다.60) 그리고 마지막 정리로 유·불의 관계는 화살에 화살촉이 걸리는 것과 같고 부절(不節)이 합하듯 한다고 하여,61) 유·불조화와 유·불일치를 재천명하는 것으로 전체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상 백곡의 이방역에 대한 반론 구조를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반론 1: 지역이 핵심이 아니라, 사람이 핵심이다.
① 공맹을 통해서 지역 이동의 당위성을 주장함.
② 이방 출신의 순임금과 우임금을 중국 출신의 걸·주와 대비하여 1차로 예증함.
③ 이방 출신의 유여와 계찰을 중국 출신의 도척과 장교와 대비하여 2차 예증함.
④ 주장에 대한 경증으로 『논어』 「자한」을 인용함.
⑤ 성인은 지역의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재정리해서 마무리함.
반론 2: 유·불은 대립 관계가 아닌 상보적인 유·불조화와 유·불일치적인 구조임.
① 유원성과 김병산의 언급으로 유·불일치를 주장함.
② 주장에 대한 경증으로 『중용』과 『주역』 「계사하전」을 인용함.
③ 화살과 화살촉의 관계와 부절의 일치로 유·불의 상보와 일치 주장을 재정리해서 마무리함.
백곡의 반론은 앞서 검토한 『모자이혹론』 이하 『유석질의론』 속의 화이관에 입각한 불교비판에 비해서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이다. 특히 반론 1과 반론 2의 두 가지 층위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 역시 백곡의 앞선 비판론들을 검토한 뒤에서 나오는 깊은 고민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은 기존의 관점들을 넘어서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백곡의 논변 중 반론 1에서 주목되는 것은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 아니라 인도라는 조선 초기까지 전승되던 내용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두 가지로 추정될 수 있다. 첫째는 백곡 당시는 예학이 주도하던 경직성이 높은 시기였다는 점. 둘째는 백곡 역시 신익성(1588-1644)에게 유학을 사숙한 인물이기 때문에 자신도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반론 2의 유·불조화와 유·불일치적인 관점은 모융의 관점 이후로는 화이관의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서는 크게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나 『현정론』과 『유석질의론』이 전반적으로 불교의 오계(五戒)와 유교의 오상(五常)이 일치된다는 등의 유·불조화와 유·불일치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유정엽, 2007: 222-228; 김용태, 2009: 14-16; 김기영, 1999: 187-217). 또 이 같은 논조가 조선 중기 휴정의 삼가귀감(三家龜鑑) 등과 같은 저술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정혜정, 2012: 125-126; 오경후, 1999: 92-94; 금장태, 1999: 69-97; 김용태, 2009: 18). 그리고 유·불조화와 유·불일치의 관점은 명나라 불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로, 명말(明末) 4대 고승의 저술 속에서 고르게 살펴진다는 점 등에서 새롭다는 평가를 할 정도는 아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백곡의 반론은 내용적으로는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유교의 학습자답게 불교적인 관점만이 아닌 유교의 관점을 강화해서 보다 설득력을 부여하려고 했다는 점이, 다른 불교 반론들과 다른 백곡만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또 반론 1과 반론 2로 나누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는 구조적인 측면 역시 높이 평가할만하다. 이러한 두 가지가 백곡 「간폐석교소」가 가지는 특수한 측면인 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Ⅳ. 결론
이상을 통해서 화이관에 입각한 동아시아의 불교비판에 대한 측면들을 정리하고, 백곡 당시에 이방역의 문제가 재점화되는 이유 및 백곡의 대응구조와 내용에 대해서 검토해 보았다.
이의 접근을 위해서, 먼저 제Ⅱ장에서는 중국의 화이관에 따른 불교비판의 역사와 내용을 정리했다. 이는 화이관에 따른 불교비판의 논점을 이해하게 해주는데, 그 핵심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화하에만 올바른 기운에 따른 온당한 문화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 둘째는 바른 기운 속에서만 성인이 출세할 수 있다는 측면이다. 이는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불교와 붓다는 타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은 측면의 불교비판은 동한 말의 「모자이혹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이 불교의 전래 초기로까지 소급될 개연성을 환기시켜준다.
화이관에 따른 불교비판은 『홍명집』과 『파사론』을 거쳐 당말의 「논불골표」 등에서 일관되게 확인된다. 그리고 성리학의 전래와 함께 고려말부터는 한국사 안에서도 살펴진다. 성리학의 전래 이전에는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화이관이 성리학과 연관되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이는 백곡의 이방역 문제와도 직결되는 측면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성리학에 따른 조선의 확립은 이후 『현정론』과 『유석질의론』 등에서 확인되는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의 양적 확대를 초래한다. 이는 화이관과 성리학이 상호 연동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백곡의 시대에는 화이관에 의한 불교비판이 재점화된다. 이는 동이의 서융에 대한 차별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화이관과는 다른 특수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와 같은 특수성이 대두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양란 이후의 예학 발달과 예송논쟁을 통해서, 성리학이 사회의 실천적인 영역까지 확대된다는 점. 둘째는 임란 이후 명에 대한 조선의 재조지은과 삼전도의 치욕에 의해서, 조선이 명을 계승한다는 인식이 확립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백곡의 「간폐석교소」는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인 요청 속에 존재하게 됨으로, 이방역의 문제를 가장 먼저 다루게 된다.
다음으로 제Ⅲ장에서는 먼저 백곡 이전에 존재하던 화이관에 입각한 불교비판의 반론내용을 검토한다. 이는 지역의 문제를 넘어선 내용의 문제를 부각하는 것으로, 순임금과 우임금 등의 이방인과 걸·주의 중국군주에 대한 대비 등이 실질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모융에게서는 미진하던 ‘인도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주장’이, 승우나 법림에 이르면 단정적으로 강력해진다는 점이다. 이는 위진남북조시대라는 이민족의 화북 지배에 따른 화이관의 약화를 인지해 볼 수 있는 측면이다. 이와 같은 양상은 조선초기의 『현정론』에서도 살펴진다. 그러나 『유석질의론』에 이르면, 이러한 주장이 누그러지는 양상이 존재한다. 이는 성리학의 강화로 인해서, 이 같은 주장이 조선에서도 강하게 전개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백곡에 이르면 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는 예학을 통해서 성리학의 경직성이 보다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유교를 학습한 백곡 역시 이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끝으로 백곡의 이방역에서의 불교비판에 따른 반론구조를 보면, 크게 두 가지 층위로 구성된다는 점이 확인된다. 첫째, 본질은 지역이 아닌 사람이라는 점. 둘째, 유불은 서로 충돌하는 가치가 아닌 조화와 일치된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이미 선행하는 다른 호불론에서도 확인된다. 다만 백곡은 이를 보다 체계적인 측면에서 두 가지의 층위구분으로 재정리하고 있다. 또 자신의 입론 근거로 열거하는 인물들 역시 앞선 호교론들에 비해 보다 다양하고, 치밀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유교적인 측면의 보강은 백곡의 유학적 소양과, 당시 유교인을 위한 불교적인 설득이라는 점에서 높은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백곡 당시의 화이관에 따른 불교비판이 동이의 서융에 대한 것이었다면, 백곡 역시 반론에서 以夷制夷의 양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백곡이 불교가 극심하게 탄압받는 상황에서, 무려 8,150자에 달하는 이례적인 소문(疏文)을 현종에게 올리는 것에는 직접적인 원인도 있지만, 여기에는 간접적인 원인도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보다 거시적인 측면에서의 검토는 백곡 소문의 의미파악을 분명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충분한 연구의미를 확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