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연구논문

중국 5세기 「난백흑론(難白黑論)」에 나타난 자아의 본질과 열반

김석주*
Seok-joo Kim*
*서울대학교 미학과 박사수료
*Ph.D. Student, Department of Aesthetics, Seoul National University

© Copyright 2019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03, 2019; Revised: May 10, 2019; Accepted: Jun 21, 2019

Published Online: Jun 30, 2019

국문초록

종교에 있어서 죽음의 문제는 핵심적 주제이다. 중국 5세기 불교의 초기 수용과정에서 이루어진 아미타 정토사상은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당시의 종교적 관념이 투영된 사유이다. 이러한 사상을 잘 드러내는 자료는 5세기 중엽 승우(僧祐)의 『홍명집(弘明集)』이다. 그 중 아미타 정토사상의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종병(宗炳)의 「종거사병답하승천서난백흑론(宗居士炳答何承天書難白黑論)」이다. 이 글은 죽음의 문제로서의 열반(涅槃)과 사후 세계로서의 윤회(輪廻)와 정토(淨土)의 문제를 중심으로 서술된다. 종병은 이 글에서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비판뿐만 아니라, 불교 내부 사람들의 비판까지도 반박한다. 죽음의 문제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서부터 출발되며, 그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는 연기(緣起)와 공(空)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다. 아미타 정토사상은 이러한 불교 개념의 논리적 전개 과정으로부터 성립되며, 당시의 불경 번역과 이해의 성숙 과정이 결부되어 드러난 현상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아미타 정토사상이 불교의 철학적 논변뿐만 아니라, 종교적 신념으로서 당시 불교의 경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불교 철학과 종교의 현상을 설명하는 문헌을 중심으로 그 사유를 분석하고자 한다.

Abstract

In religion the matter of death is a main theme. In 5th century China, the thought of Amitâbha and the Pure Land in the process of acceptance of Buddhism is an idea that was projected by the death and the afterlife. Hong-Ming-Ji shows this thought in 5th century. Zong Bing’s “Nan-BaiHei-Lun” is understood the context of the thought of Amitâbha and the Pure Land. This text is described as the Nirvana (涅槃) in the matter of the death and the Samsara (輪廻) and the Pure Land in the matter of the afterlife. Zong Bing refuted the criticism of Buddhism that was understood by both non-buddhist and buddhist with distrust. The matter of the death is about the matter of ‘who I am?’, and this is about the understanding about pratītya-samutpanna (緣起) and the emptiness. The thought of Amitâbha and the Pure Land is established from the process of developing the logic about the buddhist concepts, and is a phenomenon that colligated translating Buddhist scriptures and understanding those. Especially the thought of Amitâbha and the Pure Land shows the buddhist philosophy as well as the religion of Buddhism. This study is to analyse the text for explaining the phenomenon about the Buddhism as philosophy and religion.

Keywords: 열반; 아미타; 정토; 윤회; 인과
Keywords: Nirvana; Amitâbha; The Pure Land; Samsara; Cause and Effect

Ⅰ. 들어가며

중국 5세기는 전쟁과 살륙이 끊이지 않는 정치사회적 혼란기였다. 이러한 난세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성찰을 이끌게 되었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당시의 사람들은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경험적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적 접근이다. 경험적 접근은 인간으로서 관찰할 수 있는 바로, 삶과 죽음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반면 초월적 접근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철학적 해석으로서의 현학의 본체론적 이해에 따른 삶과 죽음의 이해이다. 이러한 두 가지 접근 방식에 더해 죽음 이후의 존재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죽음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네 가지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있게 된다. 첫째, 경험적으로 인간은 반드시 죽고, 죽은 이후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당시의 유가적 관점이다. 둘째, 경험을 넘어선 초월적 인식으로 볼 때, 본체로서의 존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영원한 바이기 때문에, 인간은 생멸의 변화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본체로서의 존재와 다르지 않아서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인간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체의 작용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당시의 현학적 관점이다. 셋째, 인간은 본래 죽을 수밖에 없지만, 도를 얻으면 불생불멸의 도와 마찬가지로 불멸한다는 것이다. 이는 양생(養生)으로 신선(神仙)을 이뤄 불사(不死)를 얻는다는 도교적 관점이다. 여기서 도교는 방술(方術)을 중시하는 황로도(黃老道)와 통하는 바로, 노장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현학과 유사하지만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넷째, 인간은 반드시 죽지만,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육체의 죽음은 인정하지만, 무형(無形)한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불멸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 5세기 신불멸론(神不滅論)1)의 관점으로 영혼의 존재와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관점이다.

종병(宗炳)의 「종거사병답하승천서난백흑론(宗居士炳答何承天書難白黑論)」(이하 「난백흑론」)2)은 마지막 신불멸론과 관련된 편지글이다. 이 글은 당시 불교의 종교적 신념과 신앙에 비판적이던 유송(劉宋)의 승려 혜림(慧琳)의 「백흑론(白黑論)」으로 촉발된 논쟁의 과정 중 유학자 하승천(何承天)과 불교거사인 종병이 편지로 문답을 나눈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불교에 대한 배척과 옹호에 대한 여러 입장이 드러나는데, 그 중 주목되는 것은 형신(形神)논쟁의 맥락에서 제기된 ‘신멸·신불멸(神滅·神不滅)논쟁’이다. 이 논쟁에 대해 기존의 연구는 형신논쟁의 맥락으로 신(神)의 소멸과 불멸의 상반된 입장을 주목하여 육체[形]의 죽음에 따라 정신[神]이 같이 없어지는가, 아니면 없어지지 않는가를 중심으로 분석해 왔다(박해당, 1998; 조원일, 2004; 조윤호, 2011). 신의 소멸을 주장하는 입장은 체용(體用) 관계로 볼 때, 육체를 실체로, 정신을 그 실체의 작용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가 사라지면 그 실체로부터 나오는 작용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혜림 이후 범진(范縝)의 「신멸론(神滅論)」으로 이어진다. 반면, 신의 불멸을 주장하는 입장은 현학의 본체론적 해석과 관련된다. 본체로서의 도가 있을 때, 그 도의 작용은 신이다. 그 신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만물의 변화이다. 그렇다면 신과 형의 관계를 볼 때, 신은 본체이고, 형은 그 작용이 된다. 따라서 신은 도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불생불멸의 존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신불멸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멸하는 정신은 ‘나(我)’인가 ‘무아(無我)’인가? 인과의 법칙이 유효하여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면, 그것은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나’라는 것은 없는가? 더욱이 인과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윤회가 존재한다면, 그 윤회의 주체는 ‘나’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은 윤회와 해탈의 주체가 있다면, 무아는 모순이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종병의 글에 따르면, 분명히 공(空)을 깨달아 열반(涅槃)3)에 이르는 것을 불교의 목적이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환영과 같고 꿈과 같은 것, 즉 무상(無常)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몸은 단지 지나가는 여관과 같은 것일 뿐, 존재의 참된 본질은 신(神)에 있다. 그 신은 도에서 비롯하여 모든 존재에 있기 때문에, 변화하는 존재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를 무아 개념에 적용하면, ‘나’라고 생각하는 것, 즉 몸이 ‘나’라고 할 수 없을 뿐,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존재로서 신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참된 ‘나’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종병은 이를 깨달으면 바로 열반이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면 끊임없는 윤회에 속박된다고 말한다.

종병은 현학과 불교의 관점 모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본체로서의 도와 신과 작용으로서의 물(物)과 형(形)의 관계로 이해한다.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그는 신을 우주만유의 본원적 작용으로, 만물의 변화[形]를 이끄는 힘이자 존재로 본다. 이러한 의미로 종병은 ‘신불멸’을 ‘법신상주(法身常住)’4)로 연결시킨다. 인간의 영혼을 본체인 신으로 볼 때, 그 본성으로서의 공을 깨달으면 이미 도와 둘이 아니게 된다. 이미 열반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글에서 나오는 아미타 정토사상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의 영혼이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열반이라기보다 또 다른 구속에 해당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분명 종병은 인과의 주체로서 ‘나’를 설정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그러한 인과의 속박으로부터 해탈이지만, 본체로서의 열반이라기보다 구원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공을 깨닫는다고 해도 인과의 영향을 받는다면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神)5)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체론적 관점과 종교적 구원의 관점이 혼재된 종병의 「난백흑론」을 검토하기로 한다.

Ⅱ. ‘나’는 누구인가?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만약 ‘내’가 없다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분명하게 있다면, 그것을 인식하는 ‘내’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생사문제는 자아의 인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대부분의 우리는 이러한 ‘나’의 존재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생사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로 ‘나’는 있을까? 이 문제는 존재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에 의해 성립한다.6) 연기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7)는 것으로, 존재와 생성의 논리이다. 십이인연(十二因緣)8)은 모든 존재가 무명(無明)으로부터 시작해서 노사(老死)에 이르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는 인과로 윤회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존재도 ‘그 존재’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즉, 모든 존재는 어느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있을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모든 존재가 무상(無常)하다면,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고유한 속성, 즉 자성(自性)도 없을 것이다.9) 만약 어떤 존재에 자성이 없다고 한다면, 어떤 존재든 ‘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의 이치로부터 무자성(無自性), 공(空), 무상, 무아(無我)의 개념이 성립한다.

중국 3세기 말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에서는 이러한 무아의 맥락으로 비신(非身)을 언급한다.10) ‘나’를 ‘나’로 여기는 근거가 몸[身]과 마음[心]이 있기 때문인데, 그 몸이 곧 ‘내’가 아니라는 점을 밝힌 것이 ‘비신’ 개념이다. 초기 중국의 불교사상에서는 몸이 곧 ‘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몸은 생멸변화를 겪는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나’는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없는 것인가? 아니면 참된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중국 4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는 동안 존재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형신논쟁(形神論爭)’이다. 이것은 ‘신멸·신불멸논쟁(神滅·神不滅論爭)’으로도 불린다. 형신의 문제는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의 ‘장작과 불’의 비유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장작이 다 타버려도 불은 다른 장작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산의 혜원(慧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이 장작에 전하는 것은 마치 신(神)이 형(形)에 전하는 것과 같고, 불이 다른 장작에 전해지는 것은 신이 다른 형에 전해지는 것과 같다. 앞의 장작과 뒤의 장작은 다르지만 불이 전해질 수 있다면, 불을 옮겨 붙게 하는 바가 정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의 형과 뒤의 형이 다르지만 신이 전해질 수 있다면, 정(情)과 수(數)의 감응이 심오한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에 미혹한 사람은 몸[形]이 일생에서 늙고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신(神)과 정(情)이 함께 없어진다고 여기지만, 이것은 마치 불이 하나의 장작에서 다 타버린 것만을 본 것과 같다.11)

장작[形]은 몸[身]과 같은 것이고, 불[神]은 마음[心]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형(形)’과 ‘신(神)’, ‘신(身)과 ‘심(心)’이 동일한 의미로 대응되지는 않는다. 형(形)은 명사적으로 보면 모양, 형상 등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술어적으로 보면 형성(形成)하다, 변화하다 등으로 사용될 수 있다. 신(神)은 인간의 차원으로 보면 마음이나 영혼의 의미이지만,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신적인 존재로서의 신이나 신명의 의미이기도 하다. 신(身)은 육체나 몸 또는 나 자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심(心)은 마음인데, 무형으로 존재하며, 다양한 작용을 하는 것이다. 마음은 몸을 의지하여 있지만, 본질적으로 무형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도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시 현학에서 도의 작용으로 신을 이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음은 신의 작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장작에 피어오른 불만을 한정하면, 몸에 의지한 마음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나, 어떤 장작에도 피어오를 수 있는 불로 생각하면, 본질적 작용으로서 신으로 볼 수 있다. 혜원과 종병이 말하는 신은 본체적 작용으로, 마음 역시 그에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의 비유는 단지 영혼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고 법신과 신명(神明)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종병은 「난백흑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은 장작에서 생기는 것이지만, 신(神)은 형(形)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意)에는 정묘하거나[精] 거친[麁] 감응이 있어서 이에 따라 형(形)을 얻는다. 정신(精神)이 극치에 이르면, 형(形)을 초월하여 홀로 존재하는데, 형(形)이 없으면서 신(神)만 있는 것을 법신상주(法身常住)라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의 본질은 신(神)이고, 그 신으로부터 정묘하거나 거친 감응으로 형(形)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몸은 참된 ‘내’가 아니고 단지 거친 감응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 만약 그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마음 역시 ‘나’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몸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이인연의 논리를 적용하면, 이미 ‘나’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연기는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병은 「명불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 하고, 음양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陰陽不測]을 신(神)이라 한다’12)는 것은 대개 지극한 없음[至無]이 도가 되어 음양이 함께 일체가 되는 것[陰陽兩渾]을 말하기 때문에 ‘일음일양’이라 말하는 것이고, 도에서 비롯하여 다시 정신(精神)으로 들어가서, 음양으로 항상 드러나 있지만, 음양으로 궁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음양으로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엄군평이 말하는 “하나에서 둘이 나온다”[一生二]는 것은 바로 신명(神明)을 말한 것이다. 만약 이 두 구절이 모두 [도와 신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정신을 밝히겠는가? 그러나 중생의 신(神)은 궁극적으로는 [정신과] 같지만, 인연(因緣)에 따라 변화하고 유전(流轉)하여 거칠거나[麁] 정묘한[妙] 식(識)을 이루나, 근본과 더불어 없어지지 않는다.13)

종병의 두 인용문에 따르면, 중생은 본질적으로 본래의 신(神)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신과 다르지 않지만, 인연에 따라 유전하여 의(意)와 식(識)을 이루고 형(形)에 감응하여 ‘나’라고 생각하는 몸과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본래의 신(神)으로서 법신과 중생의 신(神)으로서 의식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면, 종병이 생각하는 참된 ‘나’는 신(神)으로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즉, 신(神)은 ‘나’라고 생각하는 몸과 마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상주하는 법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중생은 연기의 이치로 말미암아 존재할 수밖에 없다. 즉, 연기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중생은 윤회를 피할 수 없다. 그 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은 공(空)으로써 참된 ‘나’인 신(神)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신(神)에 있어서는 모든 존재가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의 분별이 사라져서 주고받을 인과도 없게 된다. 모든 분별이 사라져, 전체인 ‘하나’만 여여(如如)한 것이 참된 ‘나’이다.

Ⅲ. 공과 열반

거짓된 ‘나’의 인식으로부터 참된 ‘나’의 인식으로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연기의 이치로서 무자성은 곧 공이다. 그것을 깨달으면, 그러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공 개념은 당시에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혜림은 「백흑론」에서 공을 존재의 유무 논리로 비판한다.

나무를 미세하게 분석하여 나무를 공한 것이라 해도 그림자를 드리우는 울창한 나무는 그대로 있으며, 건물을 구성하는 흙과 재목이 합한 것이라 하여 건물이 공하다고 해도 높고 빛나는 건물의 아름다움은 없어지지 않는다. 화려한 비단은 현란한 무늬에 따라 화려함이 나오고, 맛있는 국은 염매에 따라 맛에 이른다.14)

혜림은 존재의 ‘있음[有]’이 분명하다면, 그러한 ‘있음’을 ‘없음[無]’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그가 이해한 공은 ‘어떤 존재가 실은 없음[無]’을 의미한다. 존재의 유무에 있어서, 공은 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병은 혜림의 공 이해가 잘못된 것임을 말한다.

불경에서 말하는 본무(本無)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인연이 모여 있는 것까지 모두 공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나 높고 빛나는 건물은 그 자체로 ‘있는[有]’ 것이다. 그래서 이를 유제(有諦)라 한다. 하지만 그 자성은 본래 없기 때문에 이를 무제(無諦)라 한다.

종병이 말하는 ‘본무’는 절대적인 ‘없음’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없음’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본무’는 공으로서 자성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불경에서 말하는 ‘색이 곧 공이 되어서 다른 공이 없다’는 것은 존재[有]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 ‘있으면서’ ‘공’하다는 것이다. … 중략 … 색이 그 자체로 색이 아니고, 비록 색이지만 공하다는 것은 연이 합하여 있지만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모두 환영이 만든 것, 꿈에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록 ‘있는’ 것이라 해도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고, 과거는 없어졌으며, 현재는 머물지 않는다. 정해진 ‘있음’은 없다.15)

공은 존재의 유무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이다. 인식되는 대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분명히 실재한다. 하지만 인식의 주체로서 ‘내’가 그것을 인식할 때, 그 대상은 실체가 아니다. 그 대상이라고 인식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눈을 통해 대상을 보고, 그 대상을 ‘그것’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실재 대상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차이를 없게 하는 것이 공이다.

더 나아가 공은 시간 개념과 결부된다. 과거의 존재는 현재의 존재와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개체로 볼 때, 과거와 현재의 존재는 동일할 수 없다. 또한 현재는 바로 이 순간이어야 하는데, 시간이 흐른다면 그 순간은 이미 지나고 지금은 또 다른 순간이 된다. 따라서 현재는 머물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현재와 미래의 관계와 같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머무를 수 없는 바로 지금을 개념적으로 구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모든 존재가 ‘하나’라고 본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각각의 존재를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시간의 흐름으로 볼 때, 모든 존재는 무상하기 때문에 공하다고 할 수 있고, 시간이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고 볼 때,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전체로서의 ‘하나’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공하다고 할 수 있다.16) 전자는 거짓된 ‘내’가 없다는 의미로 ‘무아(無我)’로 연결되며, 후자는 참된 ‘내’가 있다는 의미로 ‘진아(眞我)’로 연결된다.

종병은 이러한 공 개념으로 열반에 이르는 수행과 결부시킨다.

성스러운 신이 그윽하게 비추어 생각으로 헤아리는 식이 없게 되는 것은 마음과 사물의 [분별이] 없어져 오직 신만 있는 것이다. 텅 비어 밝은 근본은 항상 상주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마음과 사물이 만나면, 신과 하나가 아니게 된다. … 중략 … [마음의] 작용과 작용이 묘하게 접하고 식과 식이 묘하게 이어지는 것은 마치 불의 불꽃과 불꽃이 상즉(相卽)하여 큰 화염을 이루는 것과 같다. 이제 공을 깨달아 마음을 쉬면, 마음의 작용이 멈춰지고 정과 식 또한 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신명이 온전해진다. 반면 정과 식이 이루어지는 것은 옛 것과 새 것이 묘하게 이어지는 것으로, [신과] 하나가 아닌 경계[際]가 되니, 어찌 항상 있는 것이라 하겠는가? … 중략 … 불경에서 변화하고 흩어지는 법(존재)을 말하는 바, “법(존재)와 식의 본성은 공이니,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달그림자와 같다”고 하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 중략 … [현상의] 질과 맛과 소리와 색은 정(情)이 거짓으로 만든 그림자이다. 또한 골짜기에 둔 배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진다고 한다는 것은 변화의 속도가 번개와 같이 신속하다는 것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고, 과거는 이미 사라졌다. 눈 한 번 깜박이고 숨 한 번 쉬는 짧은 순간도 조금도 의지할 수 없으니, 무엇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심하다. 거짓으로 있는 것이 신을 가리고 있다. 이제 여기에 밝은 거울이 있는데, 티끌이 쌓인 것이 조금 있으면, 그 비춤은 은은하게 있지만, 많이 쌓이면 그 비춤은 어슴푸레하게 된다. 티끌이 더 두텁게 쌓이면 거울은 비추긴 하지만 어둡다. 거울은 본래 밝음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거울에 티끌이 쌓여서 그 비춰지는 것이 은은함부터 어두움까지 다르다고 해도, 거울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사물은 티끌이 가리는 바에 따라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잘못된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신의 이치도 이와 같다. 거짓이 신을 가려서, 정묘하거나 거친 식이 이루어진다. 식은 신에 부합되기 때문에, 몸이 죽는다고 해도 식은 없어지지 않는다. 식이 공으로 천천히 나아가서 결국 점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극치에 이르게 되면, 본래의 신을 다 이루게 된다. 이것을 열반[泥洹]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지극한 말씀이 구름처럼 많아도 공으로 활연대오하는 것이다. 바위와 숲이 희미해져 바람과 물이 텅 비게 되면, 마음에 [신이] 가득하니, 텅 비어 넓고 밝게 있구나. 하물며 성인은 공으로 맑아서, 텅 빈 것으로 사람에게 가르치니, 마음이 맑고 즐거움이 다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예로부터 텅 빈 것으로 도에 들어가니, 모래알 하나하나가 모두 부처라, 어찌 많지 않겠는가?17)

종병은 참된 ‘나’인 신(神)이 가려지는 바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열반(涅槃)이라 한다. 여기서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바로 공이다. 모든 존재의 이치인 공을 깨달으면, 본래의 신은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즉각적인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수행에 따라 이루어진다. 거울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본래 밝지만 티끌을 없애고 없애다보면 결국 본래 밝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그 관점은 ‘돈오(頓悟)’가 아닌 ‘점오(漸悟)’라 할 수 있고, 수행은 ‘점수(漸修)’로 볼 수 있다. 또한, 법신과 열반을 서로 다르지 않은 맥락으로 설명한다.

식은 불멸의 근본을 맑게 할 수 있다. 날마다 비워내는 공부를 배워, 비워내고 또 비워내면, 반드시 무위(無爲) 무욕(無欲)에 이르게 된다. 욕(欲)과 정(情)에 오직 신만 홀로 비추면, 생(生)에 해당하는 것이 없게 된다. 생이 없기 때문에 몸이 없고, 몸이 없으면서 신만 있는 것을 법신이라 말한다.18)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열반은 공을 깨달아 법신을 가리는 것을 비우고 없애서 법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여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IV. 중생의 윤회와 열반

참된 ‘나’를 깨닫고 열반에 이르는 것은 불교의 목적이다.19) 그런데 문제는 중생은 참된 ‘나’를 깨닫지 못하고, 인과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어서 끊임없는 윤회의 고통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중생은 생명이 있는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업(業)을 지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먹지 않고 살 수 없고, 살기 위해 움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과의 법칙이 작동하는 한, 중생은 업에 대한 과보를 피할 수 없다.20) 중생은 생존 본능이 있으며, 그에 따른 반응으로서 감정이 있다. 이러한 본능과 감정은 몸과 마음의 작용으로, 참된 ‘나’를 인식하는 것을 가리고 거짓된 ‘나’를 ‘나’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공’으로 인식을 맑게 하여 본래의 신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은 이러한 본능과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몸과 마음을 ‘나’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열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열반은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에서 열반을 이루었다. 만약 석가모니와 같이 깨달을 수 있다면, 누구나 열반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열반은 주로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과 『사자월불본생경(師子月佛本生經)』과 같이 오랜 시간 전생의 서원과 공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열반은 수많은 전생의 서원과 수행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지, 순간의 인식 전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논리 역시 인과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즉, 과거에 깨달음을 얻을 원인을 지었으니, 미래에 그 원인에 따라 깨달음이라는 과보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중생에게 적용시키면, 중생은 중생으로서 살기 위해 지은 모든 죄를 참회(懺悔)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계(戒)를 지키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수행을 하면, 결국 부처와 같이 열반을 이룰 수 있다.21)

중생은 본질적으로 부처와 다르지 않지만 부처는 아니다. 중생은 전생에 성불(成佛)의 원인보다 중생의 원인을 지었기 때문에, 현생에 중생이라는 과보를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22) 이러한 인과론은 숙명론(宿命論)으로 오해될 수 있지만, 오히려 미래의 내생을 생각한다면 숙명론이 아니다. 전생의 과보로 현생이 있지만, 현생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현재를 설명하는 것은 과거이지만, 미래 결과의 원인은 현재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참된 ‘나’는 본래의 신(神)이면서 부처이다. 따라서 ‘나’를 중생이게 하는 것만 없으면, ‘나’는 부처가 되며 열반을 이룬다. 여기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본질적인 존재의 변화라기보다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는 중생이라는 상태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부처가 아닌 중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열반을 이루려면, 참된 ‘나’를 깨달아 스스로 부처가 되면 된다. 그런데 그것이 어렵다면, 중생에게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도 다른 존재의 도움으로 이룰 수도 있다. 즉, 타력 구제가 가능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뿐만 아니라, 오랜 과거로부터 일체의 중생을 성불하도록 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아미타불과 같은 존재와 능력을 설하여 중생이 부처의 힘으로 구원될 수 있는 길도 가르쳤다.23) 이는 자력 수행뿐만 아니라, 타력 신앙으로도 열반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중생은 전생의 인연에 따라 현생의 모습을 하기 때문에, 각각의 중생마다 그 근기(根機)는 서로 다르다.24) 만약 가장 좋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중생이라면, 스스로의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중생은 지금의 생을 이끌게 만든 전생의 죄업을 참회하고, 현재의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 짓는 죄업을 참회하여, 내생에 현재보다 더 나은 과보를 받도록 해야 한다. 만약 더 좋은 인연이 있어서 아미타불의 광명을 받을 수 있다면,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내생은 서방정토에 왕생하게 된다. 중생은 참회를 하고 선행을 쌓아도 그것만으로는 윤회를 벗어날 수 없지만, 아미타불의 힘으로 구원되면 그 윤회로부터 해탈하여 일체의 괴로움이 없는 극락세계인 서방정토에 들어가게 된다. 모든 고통이 소멸한 것이 바로 열반이라면, 현생의 죽음으로 내생의 열반에 들게 되는 것이다.

Ⅴ. 열반과 불성

당시 현학의 논리적 구조로 보면, 도와 둘이 아님을 깨달으면, 이미 지인(至人)25)이다. 당시 불교의 이해에서도 불도(佛道)를 깨달으면, 이미 부처이다. 만약 도가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면, 지인 역시 도와 둘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도 도와 하나이다. 유형과 무형을 모두 포괄하는 존재로서 도는 일체(一體)로서 우주만유에 편재한다. 이는 법신 개념이다. 따라서 도를 깨닫기만 하면, 이미 열반이다.

그런데 중생은 전생의 인연으로 인하여 그 과보를 피할 수 없어서 끊임없이 윤회한다. 그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본질적으로 도를 깨닫는 것이다. 도의 본성이 공(空)이기 때문에, 그 이치를 여실히 깨달으면 된다. 하지만 중생이 가진 전생의 인연은 그러한 이치를 깨닫기 어렵게 만든다. 중생은 한정된 감각과 지각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경험 이상의 깨달음을 이루기 쉽지 않다. 종병은 이러한 중생에 대하여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해탈된다는 사상을 제시한다.

대승불교의 이행도(易行道)와 난행도(難行道)의 관점으로 보면, 종병이 제시하는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한 구원은 이행도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거울과 먼지의 비유에서도 언급되듯, 먼지를 없애는 과정은 부단히 긴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는 윤회를 설명하면서 무수히 긴 세월을 지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먼지를 없애고 또 없애면 결국엔 밝은 거울 자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듯, 피할 수 없는 전생의 인연을 다 하고 새로운 인연을 짓지 않는 정(情)을 줄이고 또 줄이면 결국엔 반야만 남는다는 것이다. 밝은 거울은 본래부터 갖추어진 것이다. 없는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밝은 거울은 불생불멸이다. 불생불멸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바로 신(神)이다. 도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밝음(明)은 본래부터 갖추어진 바로, 본질적으로 먼지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먼지에 영향을 받는 것은 비추어진 상(象)이다. 이렇게 보면, 사실 이미 열반이지만 그것을 모르고 비추어진 상을 보고 중생이라 말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종병은 밝은 거울이 밝게 비출 수 있을 때를 부처라 생각하기 때문에, 먼지를 줄이고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종병의 관점은 이후 도생(道生)이 불성(佛性) 사상을 제시하기 이전의 과도기적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불성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하지만 종병은 결국 먼지를 없애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먼지를 없애고 없애는 과정은 오히려 난행도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전생의 인연은 무한한 윤회의 결과이기에 무한하게 많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전부 과보를 받고 참회를 하여 없애는 것은 쉬운 길은 아니다.

종병은 이에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구원받는 것을 생각한다. 아미타불은 본질적으로 중생을 모두 구원하려는 신이다. 종병에 따르면, 정말로 간절하게 염불하면 임종 직전이나 꿈속에서 부처가 현현한다고 한다. 이 표현에서 주목할 점은 정말로 간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간절한 것인가? 그의 논리를 따르면, 신의 작용으로서 마음이 공하여 오직 마음에 아미타불만 남아 있는 것이다. 즉 일심(一心)과 다르지 않다. 만약 일심으로 염불하면, 아미타불이 감응하여 구원하게 된다. 일견 타당한 논리이지만, 당시 이를 비판하는 입장으로 보면, 본질적으로 일심이면 이미 도와 하나여서 이미 열반인데, 굳이 서방정토에 왕생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아마도 종병의 이러한 논리는 혜원의 백련사(白蓮社)로부터 이어온 종교적 신념과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논서 대부분에서 현학적 논리 구조로 설명하지만, 아미타 정토사상과 관련된 부분은 지극히 신앙적 측면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아의 본질과 열반에 대한 개념은 이후 불성 개념의 토대로서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현학불교로서의 반야학에서 열반학으로 이행하는 가교로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현학적 논리로서 본체와 작용의 관계와 유무의 관계로 볼 때, 본체로서의 도와 그 작용인 신은 불생불멸하여 항상 존재한다. ‘무아’라는 것은 형(形)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나’라고 확정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의미이다. 불생불멸한 신으로서 ‘나’의 존재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참된 ‘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무아’를 나의 존재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나’, 즉 진아(眞我)를 깨닫는 계기로 삼는다는 것이다. 종병은 이를 정신으로 보면서, 무형의 부처라는 의미로 법신이라 여겼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이후 불성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종병의 글에 불성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밝은 거울이 본래 있다는 비유처럼 이미 본질로서 부처 아님이 없음을 말한다는 점에서 불성 개념이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VI. 나가며

지금까지 살펴본 「난백흑론」에 나타난 종병의 사상은 중국 5세기 불교의 사상적 논쟁의 맥락뿐만 아니라, 종교적 현상으로서 유의미한 가치를 가진다. 본 연구에서 주목한 점은 종교적 주제로서의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5세기 불교적 맥락에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현재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까지도 결부시켰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믿음은 증명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문제는 철학적 주제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주제일 수밖에 없다.

이른바 ‘신멸·신불멸논쟁’으로 불리는 자아의 본질과 윤회와 열반에 대한 논쟁은 중국의 불교 수용과 변용의 과정에서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나’라는 자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은 ‘무아’에서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결국 본체로서의 ‘나’는 항상 있다는 것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현학의 도와 신의 관점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노자』에서 ‘무’를 강조하는 이유는 어떠한 존재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一體)로 존재하는 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도는 결국 참된 존재의 본질로, 본체로서 존재하는 ‘나’와 다르지 않은 개념이다. 이러한 참된 ‘나’는 이미 도와 둘이 아니기에, 불교적 관점에서 열반과 다르지 않다. 또한, 우주만유가 일체로서 도라면, 그것은 법신이다. 우주만유에 ‘나’는 속하므로, ‘나’ 역시 법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본래 반야를 갖춘 존재이다. 종병은 이를 밝은 거울로 비유한다. 반야에 대한 초기 번역어 중 하나가 ‘명(明)’임을 생각할 때, 그가 밝은 거울로 비유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본래 갖추어진 깨달음의 본성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후대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론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종병의 사상에서 이러한 흐름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거울의 먼지를 없애는 신앙과 수행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먼지가 남아있는 한 열반은 발현되지 않는다. 스스로 없애는 공부를 끊임없이 하여 열반에 이를 수 있지만,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같은 신의 원력의 도움으로 열반에 이른다는 것이다. 다만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한 열반은 죽음 이후에 지극한 안락이 있는 서방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이다. 왕생한다고 하기 때문에 마지막 윤회의 과정으로 보이지만, 이미 정토 왕생은 성불의 길이므로, 열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병의 아미타 정토사상은 당시의 자아의 본질과 윤회와 열반에 대한 종교적 관점을 보여주는 중국불교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는 예이다.

Notes

종병의 「명불론(明佛論)」의 다른 이름으로, 이후 신멸·신불멸(神滅·神不滅)논쟁의 중요한 논문이다. 이 문헌은 『홍명집(弘明集)』 권2 (T52n2102_2)에 있다.

『홍명집(弘明集)』 권3(T52n2102_3).

당시 열반의 번역어는 니원(泥洹)이지만, 음역으로 의미상 차이가 없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열반으로 사용한다.

“夫火者薪之所生, 神非形之所作意有精麁感而得形隨之, 精神極則超形獨存無形而神存法身常住之謂也.”(T52n2102_3, 20b3).

종병의 글에 따르면, 신(神)은 영혼과 같은 의미로도 쓰이지만,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존재, 즉 신(god)의 의미로도 쓰인다.

“夫萬化者固各隨因緣, 自於大道之中矣.”(宗炳, 『弘明集』, 「明佛論」, T52n2102_2, 13a22).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雜阿含經』, T02n99, 66c25).

“夫佛家大趣, 自以八苦皆由欲來, 明言十二因緣, 使高妙之流, 朗神明於無生耳.”(宗炳, 『弘明集』, 「宗居士炳答何承天書難白黑論」, T52n2102_3, 18a7).

“夫忿戾之類約法三章交賞見罰尚不信懼, 寧當復以卽色本無泥洹法身十二因緣微塵劫數之言, 以治之乎.”(T52n2102_3, 20b3).

“雖然, 夫億等之情, 皆相緣成識, 識感成形. 其性實無也.”(T52n2102_2, 9b29).

“… 十二因緣, 無我無人, 非壽非命, 志空, 無願, 無想之法, 不由眾行, 處于道場而轉法輪, … 究竟眾苦無我非身 …”(『正法華經』, T09n0263_6, 99b21).

“無常苦空, 非身之事, 無我無人, 無壽無命.”(T09n0263_6, 100a10).

“以實火之傳於薪. 猶神之傳於形火之傳異薪. 猶神之傳異形. 前薪非後薪. 則知指窮之術妙. 前形非後形. 則悟情數之感深. 惑者見形朽於一生. 便以為神情俱喪. 猶覩火窮於一木. 謂終期都盡耳.”(慧遠, 『弘明集』, 「沙門不敬王者論」, T52n2102_5, 31c02).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見之謂之仁, 知者見之謂之知. 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 顯諸仁, 藏諸用, 鼓萬物而不與聖人同懮, 盛德大業至矣哉. 富有之謂大業, 日新之謂盛德. 生生之謂易, 成象之謂乾, 效法之為坤, 極數知來之謂占, 通變之謂事, 陰陽不測之謂神.”(『周易』, 「繫辭上」 5).

“今稱一陰一陽之謂道, 陰陽不測之謂神者. 蓋謂至無爲道, 陰陽兩渾, 故曰一陰一陽也. 自道而降便入精神, 常有於陰陽之表, 非二儀所究, 故曰陰陽不測耳. 君平之說一生二, 謂神明是也. 若此二句, 皆以無明, 則以何明精神乎. 然群生之神, 其極雖齊, 而隨緣遷流, 成麁妙之識, 而與本不滅矣.”(T52n2102_2, 9b29).

“折毫空樹無傷垂蔭之茂, 堆材虛空無損輪奐之美, 貝錦以繁彩發華, 和羹以鹽梅致旨.”(T52n2102_3, 18a7).

“夫佛經所稱, 卽色爲空無復異空者, 非謂無有, 有而空耳. … 夫色不自色, 雖色而空, 緣合而有, 本自無有, 皆如幻之所作, 夢之所見, 雖有非有, 將來未至, 過去已滅, 現在不住, 又無定有.”(T52n2102_3, 20b3).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그물을 늪에 숨겨 두고서 이를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밤중에 힘 있는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가버린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한다. 작은 것을 큰 것 속에 감추면 그만인 줄 알지만, 오히려 빠져나갈 곳이 있다. 만약 천하에 천하를 감추면, 빠져나갈 곳이 없다. 이것이 변함 없는 사물의 참된 모습이다. 우리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온 것을 기뻐한다. 만약 사람이 모양이 수없이 변화하는 것이 끝이 없다면, 그 즐거움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인은 사물이 빠져나갈 수 없고 언제나 있는 곳에 노닌다. 일찍 죽어도 좋고 늙어 죽어도 좋다. 태어나도 좋고 죽어도 좋다. 사람은 이를 본받는다. 하물며 만물이 이어져 있으니, 일체의 변화가 기다리지 않겠는가!(夫藏舟於壑, 藏山於澤, 謂之固矣. 然而夜半有力者負之而走, 昧者不知也. 藏大小有宜, 猶有所遯. 若夫藏天下於天下, 而不得所遯, 是恆物之大情也. 特犯人之形而猶喜之, 若人之形者, 萬化而未始有極也, 其為樂可勝計邪!故聖人將遊於物之所不得遯而皆存. 善妖善老, 善始善終, 人猶效之, 又況萬物之所係, 而一化之所待乎!)”(『莊子』, 「大宗師」 2).

“夫聖神玄照, 而無思營之識者, 由心與物絶, 唯神而已. 故虛明之本, 終始常住, 不可凋矣. 今心與物交, 不一於神. … 皆心用乃識, 必用用妙接, 識識妙續, 如火之炎炎相卽而成爓耳. 今以悟空息心, 心用止而情識歇, 則神明全矣. 則情識之搆, 旣新故妙續, 則悉是不一之際, 豈常有哉. … 佛經所謂變易離散之法, 法識之性空, 夢幻影響泡沫水月, 豈不然哉. … 況又質味聲色, 復是情僞之所影化乎. 且舟壑潛謝, 變速奔電, 將來未至, 過去已滅, 已在不住. 眒息之頃, 無一毫可據, 將欲何守而以爲有乎. 甚矣. 僞有之蔽神也. 今有明鏡於斯, 紛穢集之微, 則其照藹然, 積則其照昢然, 彌厚則照而昧矣. 質其本明, 故加穢猶照, 雖從藹至昧, 要隨鏡不滅. 以辯之, 物必隨穢彌失, 而過謬成焉. 人之神理, 有類於此. 僞有累神, 成精麁之識. 識附於神, 故雖死不滅. 漸之以空, 必將習漸至盡, 而窮本神矣. 泥洹之謂也. 是以至言雲富, 從而豁以空焉. 夫巖林希微, 風水爲虛. 盈懷而往, 猶有曠然. 況聖穆乎空, 以虛授人, 而不情心樂盡哉. 是以古之乘虛入道, 一沙一佛, 未詎多也.”(T52n2102_2, 9b29).

“識能澄不滅之本, 稟日損之學, 損之又損, 必至無爲無欲. 欲情唯神獨映, 則無當於生矣. 無生則無身, 無身而有神, 法身之謂也.”(T52n2102_2, 9b29).

“夫佛家大趣, 自以八苦皆由欲來, 明言十二因緣, 使高妙之流, 朗神明於無生耳.”(T52n2102_3, 18a7).

“神旣無滅, 求滅不得復當乘罪受身.”(T52n2102_2, 15b28).

“是以始自凡夫終則如來, 雖一生向麁, 苟有識向萬劫不沒, 必習以淸昇.”(T52n2102_3, 20b3).

“安知今生之苦毒者, 非往生之故爾耶.”(T52n2102_3, 21a14).

종병이 참고하거나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경전은 다음과 같다. 시기별로 보면, 3세기 중엽 강승개(康僧鎧)가 번역한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 지겸(支謙)이 번역한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과 『유마힐경(維摩詰經)』, 5세기 초 강량야사(畺良耶舍)가 번역한 『불설관무량수불경(佛說觀無量壽佛經)』,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등이 있다. 종병은 이러한 경전으로부터 법신으로서의 부처, 아미타불과 같은 보신으로서의 부처, 석가모니와 같은 화신으로서의 부처 개념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Zürcher, 2007: 419-427). 특히 정토삼부경에 해당하는 세 경전을 통해 아미타 정토사상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여산의 혜원과 더불어 염불결사인 백련사(白蓮社) 활동을 함께한 것과 관련된다(湯用彤, 1991: 725-737; Zürcher, 2007: 412-419).

“況佛之道衆, 高者窮神於生表, 中者受身於妙生, 下則免夫三趣乎.”(T52n2102_2, 13a22).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표현으로, 도를 얻은 존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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