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연구논문

퇴옹성철의 대중법어와 방편의 활용

최원섭*
Won-sup Choe*
*전 위덕대학교 전임연구원
*Former Researcher, Uiduk University

© Copyright 2019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17, 2019; Revised: Jun 04, 2019; Accepted: Jun 21, 2019

Published Online: Jun 30, 2019

국문초록

퇴옹성철(1912-1993)은 자신의 수행에서 비롯된 불교의 핵심을 현대 학문을 이용한 법어로 대중에게 전한 인물이다. 시대적 고민을 담은 성철의 대중법어는 현대적인 학문, 특히 과학을 활용한 법문과 일반 대중을 향하여 발표한 우리말 법어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글은 성철의 두 가지 대중법어 내용을 중심으로 시대적 의의를 찾아본 것이다. 성철은 1960년대 대학생을 상대로 하는 법문에서 불교가 낡고 우매한 것이 아니라, 신선하고 경이로운 것임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고통과 번뇌로 가득 찬 세상이 아니라, 불생불멸임을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의 두 가지 측면에서 객관적인 입증을 하려고 한다. 또한, 1980년대 대중법어를 통해서는 견성즉불과 본래성불이라는 불교 개념어를 현대의 우리말로 표현하였다. 이상과 같은 성철의 대중법어는 진실 그 자체인 방편을 잘 구현한 예라고 할 수 있다.

Abstract

Toe-ong Seongcheol (1912-1993) is a person who introduced the core of Buddhism from his practice to the public in the language of modern knowledge. His public dissemination which contains his concerns of the times, was presented in the form of modern knowledge, especially in the form of Dharma Talks using science and ordinary language, to the general public. This paper is for searching the significance of the times of his two ways of the public dissemination. In his Dharma Talks to many university students during 1960s, Seongcheol tried to prove that Buddhism is not old and stupid, but fresh and wonderful, in two aspects: material and spiritual, that the world we live in is not a world full of pain and anguish, but neither non-appearing nor non-disappearing. In the 1980s, he also expressed Buddhist conceptions such as “Gyeonseong-jeukbul” (見性卽佛, Seeing one’s nature is just Buddha) and “Bollae-seongbul” (本來成佛, Originally Buddha) in modern Korean. His public dissemination is a good example of utilizing the skillful means of the truth itself.

Keywords: 퇴옹성철; 대중법어; 방편; 진실; 불생불멸; 본래성불
Keywords: Toe-ong Seongcheol; Dharma Talks; Skillful Means; Truth; Neither Non-appearing Nor Non-disappearing; Bollae-seongbul (本來成佛, Originally Buddha)

Ⅰ. 머리말

퇴옹성철(1912-1993)이 한국 사회 일반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면서 발표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로 끝나는 법어였다. 이 법어 한 마디로 “일반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가 일약 유명해진”(<동아일보> 1981년 12월 28일: 9면) 성철 종정이 대중에게 비친 이미지는 전설적인 수행 일화를 가진 베일에 싸인 인물이자, “사회현상과 타종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동아일보> 1981년 1월 13일: 10면) 해박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3,000배를 하지 않으면 만날 수도 없고, 8년 동안의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을 했다”(<주간중앙> 1981년 2월 1일: 23면)는 것 등이 대표적인 신비의 베일이었고, “독학으로 영(英)·독(獨)·불(佛)·일어(日語)에 능통하다. … 중략 … <뉴스위크>, <타임>지 등은 물론 해외 신간도 탐독”(<동아일보> 1981년 1월 13일: 10면)하며 “물리학·심리학 등 현대 학문들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주간중앙> 1981년 2월 1일: 23면)는 것이 성철 종정의 해박함이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지금 언급한 ‘법어’와 ‘수행’과 ‘현대 학문’의 세 가지는 종정으로서 한국 사회에 등장한 성철을 평가하는 핵심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종정 성철은 자신의 수행에서 비롯된 불교의 핵심을 현대 학문을 이용한 법어로 대중에게 전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이 점에서 성철 종정이 어떤 방법으로 불교를 현대적인 의미로 설명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철 종정이 공식적으로 처음 발표한 법어는 1981년 초파일법어였다. ‘생명의 참모습’이라는 제목으로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로 시작하는 이 법어는 쉬운 우리말로 불교를 설명하는 현대적인 법어였다. 당시 성철 종정의 세속 나이가 70세임을 고려하면 더욱 놀랍다. 이후로도 1993년 열반에 들 때까지 신년법어와 초파일법어를 우리말로 발표하였다. 해인총림 방장으로서 안거 때 출가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법문은 한문으로 된 선종 정통의 상당법어 형식이면서도, 종정으로서 일반 대중에게 발표하는 법어는 순우리말이라는 점에서 성철의 현대적인 안목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철의 현대적인 법어가 불교 종단을 대표하여 불교를 모르는 일반인들을 염두에 두고 발언을 해야 하는 종정이라는 위치 때문에 이제야 불교를 현대적으로 전하려고 발표된 것은 아니다. 이미 1967년 해인총림 방장으로서 열었던 백일법문에서, 또 그 이전의 1965년 김용사 법문에서도 성철의 법문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불교의 현대적 고찰’이었기 때문이다. 성철이 불교를 현대화하려고 했던 노력은 1980년대에 들어서 새삼스럽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불교를 전하려면 반드시 현대적인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시대적 고민을 담은 성철의 이러한 대중법어는 현대적인 학문, 특히 과학을 활용한 법문과 일반 대중을 향하여 발표한 우리말 법어의 형태로 나타났다. 성철의 법어집 중에서는 『영원한 자유』와 『자기를 바로 봅시다』에 해당한다. 이 글에서는 성철의 두 가지 대중법어 내용을 중심으로 시대적 의의를 찾아보기로 한다.

Ⅱ. 1960년대 방장 성철: 대학생과 과학

1912년에 태어나 1993년에 입적한 퇴옹성철의 생애는 그대로 20세기 한국불교의 역사와 함께 한다. 성철은 1936년에 출가하였으므로 출가하고 10여 년 동안 일제 강점기를 보냈다. 1930년을 전후하여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 1877-1966)와 누카리야 카이텐(忽滑谷快天, 1867-1934)이 엄밀한 문헌 비판을 바탕으로 한국불교사와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근대적 학술서를 출판하면서,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아류로서 사상적 독자성이 전혀 없고 조선시대 불교는 억불과 교학의 침체로 정의하였으며, 한국의 선종 전통을 비판하였다(김용태, 2011: 243). 이에 대한 대응으로 당시 불교계는 선종 전통을 회복하기 위하여 선학원(禪學院)을 설립하고 종명과 종조 논의가 일어났으며 1941년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太古寺)를 건립하였다(김용태, 2011: 251). 선학원의 주축 인물에 용성과 동산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성철이 기본적으로 한국불교의 전통을 선종으로 확고하게 정립한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당시 불교계는 선교사들의 비판을 마주하면서 “새로 유입된 서구세계의 사상사조와 만나”, “새로 유입된 ‘종교’ 개념을 이해해야 함은 물론 그것을 통해 불교를 재인식해야 했으며, 나아가 그 범주 안에 불교의 위상을 정립해야 했다”(송현주, 2003: 328-329). 뿐만 아니라 종교라는 새로운 개념에 대응하기도 벅찬데 합리라는 서구의 과학적 사고방식에도 불교는 대응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철이 택한 방식은 선종이라는 확고한 전통을 과학이라는 시대적 방편에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철의 방편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해인총림의 방장이 되어 대중들에게 법문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 대학생수련법회

퇴옹성철의 대중법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과학의 틀을 이용하여 불교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는 1969년 여름에 해인사에서 열린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수련회에서 성철이 했던 법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것 외에도 과학을 이용한 법문을 한 것이 있으나, 이 법문이 2011년에 전편 방송1)되어 성철의 육성 그대로 미디어에 담긴 것이 이 자료가 처음2)이기 때문이다.

1963년 9월에 창립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는 1969년 7월 24일부터 8월 2일까지 제3차 간부 및 제12차 일반회원 합동수련회를 해인사에서 가졌다. 이 수련회는 성철이 지도법사로서 “불교의 현대적 고찰”을, 일타가 “사중생활(寺中生活) 습의(習儀) 법구(法具) 행사”를, 지관이 “각종 경 및 종파 소개”를, 홍교가 “불교조각미술 강의”를 맡았다(<대한불교> 1969년 8월 3일: 1면). 성철의 법문은 7월 26일부터 8월 1일까지 7일 동안 매일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다른 경우도 그렇지만, 이 수련회 법문 역시 성철이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구상된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진행되었다. 제1일에, 불교는 깨치는 것이 핵심이라는 대전제 아래, 깨친다는 것은 현실 세계 이대로가 절대 세계임을 깨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절대의 세계에서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우주과학시대에는 현실이 바로 절대 세계임을 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한다면서 제2일과 제3일에는 물질적 증명을, 제4일과 제5일에는 정신적 증명을 한다. 제6일에는 영원한 행복을 얻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는 실례로 역사 속의 많은 스님들을 거론하고, 마지막으로 제7일에는 그러한 영원한 행복을 얻는 방법으로 화두참선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문은 전 해에 했던 “종교와 과학”이라는 제목의 법문을 대중의 요청에 의해 다시 한 것이다. 이 사정을 성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도 인자 한 일주일 동안 좀 얘길 해달라 이래. … 중략 … 특별 요청이 있어. 그래 무슨 요청이냐면, “작년에 우리가 열흘 동안 있으면서 법문을 들었는데, 그 법문을 갖다가, 그 내용을 가지고 말이지, 해 줬으면 참 좋겠다”고, … 중략 … 그 법문이 참으로 인자 학생들, 또 지식인들에게 많은 이해를 주었고 감명을 갖다 아주 깊이 우리가 받은 사람이 많은데 말야, 전체적으로. 천상 그걸, 그 내용을 가[지고] 해 줬으면 좋겠다.”고 이랬어. … 중략 … 작년엔 어떤 제목을 했냐면은 ‘종교와 과학’이라 카는 걸 제목으로 했거든. … 중략 … 현대 우주과학 시대에 있어서 종교의 입장이라는 거, 종교와 관계되는 걸 갖다 여러 가지로 얘길 했어. 얘길 했는데, 내용은 인자 그 내용으로 하긴 하는데 제목을 또 그대로 할 수 없다 말이여. 그래서 제목을 바꾸었어. ‘불교의 현대적 고찰’이라, 이래기로 인제 했어요. 내용은 내나 그 내용입니다(<BTN 특별기획, 산은 산 물은 물> 2011년 4월 25일).

전 해에 했던 법문이란 1968년 7월 17일부터 7월 26일까지 10일 동안 해인사에서 진행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제10차 수련대회 중 간부 수련대회를 가리킨다. 이때 지도교수는 박성배, 김항배, 정종규, 지도법사는 성철, 지관, 일타가 맡았으며, 성철은 불교의 윤회사상, 불생불멸사상 등을 현대과학으로 증명하였다(<대한불교> 1968년 8월 4일: 1면)고 전하고 있다. 정확한 법문 구성안이 존재했기 때문에 반복해서 같은 내용을 법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65년 9월 1일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의 13일간의 구도행각 중에 김용사를 방문했을 때 9월 2일부터 이틀에 걸쳐 “불교의 근본사상인 이변(離邊)중도로부터 시작하여 불교에서 본 우주의 실상, 우리가 이 실상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그 방법론 등을 현대학문의 방증을 들어 설법”(<대한불교> 1965년 9월 26일: 3면)한 내용 역시 같은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으로는, 성철이 공식적으로 대중을 상대로 법문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65년에 김용사 조실로 머물게 되면서부터이다. 위에서 언급한 1965년 9월의 법문을 시작으로 1966년 1월 8일부터 2월 20일까지 김용사를 찾아온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를 상대로 50일 안거정진을 지도하면서 강론을 하였고(<대한불교> 1966년 2월 27일: 1면), 8월 3일부터 8월 24일까지 봉은사 입사생을 중심으로 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의 구도법회를 지도하였다(<대한불교> 1966년 8월 7일: 1면).

성철의 행장에서 김용사에 머물기 전에 머물던 곳은 팔공산 성전암이었다. 성전암은 철조망을 두르고 10년 동안 동구불출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구불출하면서 성철은 남전대장경을 비롯한 불교 전적은 물론 현대 학문의 최신 서적과 잡지를 구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철의 전설적인 수행과 해박함이라는 대중적인 이미지가 함께 만나 완성된 곳이다. 불교 전적과 현대 학문의 서적을 함께 보았다는 사실에서 이 시기에 불교의 현대화를 위한 준비를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넓게 말하자면 세상을 향해 발언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마련된 구성을 통해 이후 대학생을 상대로 한 법문에서 반복적으로 현대과학과 불교에 관한 내용을 법문하고 있는 것이다.

성철이 당시 엘리트층인 대학생을 상대로 하는 법문에서 이와 같은 주제를 설파했다는 것은 불교가 낡고 우매한 것이 아니라, 지식인 계층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선하고 경이로운 것임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당시의 대학생들이 성철이 종정으로 추대되었던 1980년대에 우리 사회의 장년층이 되어 있었으므로 종정 성철의 이미지는 일정 정도 이들의 견해가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불생불멸의 객관적인 증명

수련회 법문에서 주로 할애되고 있는 부분은 우주과학시대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한다면서 현대 학문의 이론으로 불교를 입증하는 부분이다. 성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고통과 번뇌로 가득 찬 세상이 아니라, 상주법계(常住法界)이고 무애법계(無礙法界)이며, 불생불멸 그대로라고 강조(<BTN 특별기획, 산은 산 물은 물> 2011년 5월 30일)하며, 이 불생불멸을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의 두 가지 측면에서 객관적인 입증을 하려고 한다.

물질적인 면에서의 입증은 “질량과 에너지 관계를 가장 근본적으로 공식화한 등가원리(等價原理)”(<BTN 특별기획, 산은 산 물은 물> 2011년 5월 27일)에 의지해서 에너지가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임이 입증된 것을 통해 불생불멸을 입증하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4차원 세계를 통해 시간과 공간이 융합함을 보이고, 우주 망원경을 예로 들어 삼천대천세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정신적인 면에서의 입증은 영혼사진, 최면의 연령역행, 전생을 기억하는 사례 등을 통해 영혼과 윤회가 입증되므로 사람의 정신 역시 불생불멸임이 증명된다고 설명한다.

과학을 이용한 물질적인 증명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비판보다는 공감을 하며 응용하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증명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이 많은 편이다. 초심리학적 연구 사례를 통해 불교적 정신세계의 실재성을 증명하려 했기 때문에 완전히 반과학적인 것을 과학적인 것으로 둔갑시켰다(김종인, 2006: 336)는 것이다. 심지어는 석가모니는 힌두교식 윤회 사상을 거부하였다며 성철의 이와 같은 논증을 강도높게 비난하는 경우(강병조, 2008)까지 있다.

하지만 성철의 입장에서는, 만약 일체 만법이 전체가 다 불생불멸이고, 그것이 물질 면에서 완전히 증명이 되었다면 정신 면에서도 입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BTN 특별기획, 산은 산 물은 물> 2011년 6월 13일). 그렇지 않다면 불교의 모순이라고까지 하였다. 성철이 정신과학의 예시 이외의 것으로 드는 정신의 무한한 능력의 예가 대부분 불교 내의 영험담이라는 점 역시 비난의 대상이다.

성철의 대중법어는 시대에 맞게 객관적 입증이 담긴 우리말 법어로 표현할 수 있다. 그 필요성에 대해 성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흔히 볼 때는, 저 노장은 자꾸 과학 갖고, 불교는 얘기 안 하고 말이지. 과학 선전하는가? 그리 혹 비난하는 사람 있는 것도 내 알아. 그렇지만은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있어서, 한 시대성을 완전히 여의어서는 우리가 불교를 소개할 수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요새 현대과학을 갖다가 불교를 소개하는 한 도구로, 한 중개물로 삼아 이용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다 이 말이여. 안 할 뿐 아니라 거기 완전히 배치된다면 또 불교는 서지 못 하고. 그래서 내가 여러 가지 얘기 하는 긴데(<BTN 특별기획, 산은 산 물은 물> 2011년 5월 30일).

그러나 성철은 “결코 과학적 진리를 보편타당한 진리로 보고 과학적 진리 기준을 토대로 불교의 교리를 검토하지 않는다. 과학적 세계관에 맞추어 불교를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교의 진리의 절대성을 믿는 입장에서 과학을 포섭하려는 것이다”(김종인, 2006: 335). 그렇기 때문에 과학을 이용해 불교를 현대적으로 설명하는 일을 방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과학의 시대가 되었으므로 방편설법이 아닌 부처님의 직설(直說)을 말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현대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지금 현대도 방편설 쓸 필요가 있나 이걸 우리가 한번 검토를 해봐야 하거든. 지금 현대 사람들의 정도가 방편설을 써서 유익하다면 거짓말이라도 해서 사람을 키워야 되는데, 지금 현대는 수천 년 동안 인지가 발달되고 문화가 형성되니만치 방편설은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여. 필요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역효가 나게 되어 있어(<BTN 특별기획, 산은 산 물은 물> 2011년 5월 13일).

여기에서 성철이 말하는 방편설은 서방정토를 말하는 불교이고, 직설은 지금 이대로가 절대 세계임을 말하는 일승법이다.

방편가설은 그냥 포기를 해버리고 부처님 진담 말이야, 진설, 일승법 말이지, 이것만 소개한다면은 누구든지 이것은 안 따라올래야 안 따라올 수 없고, 이해 안할래야 안 할 수 없다 이것이야. … 중량 … 그게 일진법계다 이 말이여. 제법실상 일진법계. 그렇게 되면은 중생 이대로가 부처고, 현실 이대로가 극락세계고, 중생 이대로가 전체가 다 부처다 이 말이여. 그러니 극락세계 갈 것도 없고, 딴 데로 갈 것도 없는 동시에 현실 이대로가 극락세계고 현실 이대로가 부처님인데,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입장인데, 그래도 앞으로 현실 이대로가 절대고 현실 이대로가 영원이란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을 해야 되지, … (<BTN 특별기획, 산은 산 물은 물> 2011년 5월 13일).

어느 법문을 막론하고 성철의 지향점은 확실하다. 현실 이대로가 극락세계이고 현실 이대로가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불교의 근본 입장을 듣고 “자기를 바로 보면 된다”.

Ⅲ. 1980년대 종정 성철: 한글과 불교

성철의 대중법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현대의 우리말로 불교 개념어를 표현한 일이다.3) 이러한 성철의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입니다” 등 종정 성철이 신년과 초파일에 발표한 법어를 통해서이다. 물론 1960년대 법문에 이미 ‘영원한 생명’, ‘무한한 능력’, ‘정신변환’ 등 1980년대 법어에 담겨있는 어휘들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1980년대 종정이 되었기 때문에 한글로 법어를 발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대중에게 불교를 전할 때는 현대적인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는 자각을 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철이 종정에 취임하고 맞이한 첫 부처님오신날인 1981년 5월 11일에 발표한 「생명의 참모습」은 최초의 한글로 된 조계종 종정 법어였다(원택, 2001: 152).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 만법의 참모습은 둥근 햇빛보다 더 밝고 푸른 허공보다 더 깨끗하여 항상 때묻지 않습니다. 악하다 천하다 함은 겉보기뿐, 그 참모습은 거룩한 부처님과 추호도 다름이 없어서, 일체가 장엄하며 일체가 숭고합니다. 그러므로 천하게 보이는 파리·개미나 악하게 날뛰는 이리·호랑이를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여야 하거늘, 하물며 같은 무리인 사람들끼리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살인·강도 등 극악 죄인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할 때 비로소 생명의 참모습을 알고 참다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광대한 우주를 두루 보아도 부처님 존재 아님이 없으며, 부처님 나라 아님이 없어서, 모든 불행은 자취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영원한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서로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퇴옹성철, 2003: 39).4)

성철이 이와 같이 한글로 법어를 발표하게 된 것은 “방장이 아닌 종정으로서 모든 국민들에게 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 중량 … 쉬운 한글로 법어를 내려주셔야 합니다”(원택, 2001: 151). 라는 주변의 건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문투성이 법어를 두 번이나 고쳐서 발표되었다는 사정(원택, 2001: 151-152)을 보면 애초의 것은 상당법문 형식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981년이면 1912년에 태어난 성철의 세수가 70일 때이다. 불교계 최고 어른이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메시지를 전하면서 ‘부처님’이라는 말을 제외하면 단 하나의 불교 용어도 사용하지 않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놀랍다. 그리고 이런 특징은 성철의 거의 모든 부처님오신날 법어에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총림의 방장이 아닌 종정으로서 모든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일의 의미를 성철은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방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철이 종정 재임 기간 동안 발표한 부처님오신날 법어는 다음과 같이 총 12편이다.5)

1981년 「생명의 참모습」

1982년 「자기를 바로 봅시다」

1983년 「중도가 부처님」

1984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1985년 「거룩한 부처님」

1986년 「생신을 축하합니다」6)

1987년 「물 속에서 물을 찾는다」

1988년 「인간은 모두 지고지선한 절대적 존재이니」

1989년 「부처님은 항상 지옥에 계십니다」

1990년 「본래불의 마음으로 바라보라」

1992년 「칠흑같은 어둠 사라지고」

1993년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자」

법어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철의 부처님오신날 법어에는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석존의 탄생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성철이 석존의 탄생을 언급할 때는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1982년 「자기를 바로 봅시다」, 퇴옹성철, 2003: 44) 라거나 “부처님은 중생이 본래로 성불한 것, 즉 인간의 절대적 존엄성을 알려 주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988년 「인간은 모두 지고지선한 절대적 존재이니」, 퇴옹성철, 2003: 56) 등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성철에게 중요한 것은 석존이 탄생했다는 ‘사실’보다 석존이 탄생한 ‘의미’이다.

성철에 따르면, 석존은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고, 인간의 절대적 존엄성을 알려주려고 이 땅에 태어났다. 석존 탄생의 의미를 지금 현재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부처의 출현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사바에 오셨으니 중생이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부처님도 중생으로 와서 부처 되었으니 오늘은 중생들의 생일”(1992년 「칠흑같은 어둠 사라지고」, 퇴옹성철, 2003: 64)이고, “사월이라 초파일! 우리들의 생일을 맞이하여 모두가 감로수에 흠뻑 젖어”(1992년 「칠흑같은 어둠 사라지고」, 퇴옹성철, 2003: 65)볼 뿐이다. 결국 부처님오신날은 석존이 탄생하였음을 찬탄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 모두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 이 거룩한 모습을 역력히 바라보며 길이길이 찬양”(1985년 「거룩한 부처님」, 퇴옹성철, 2003: 50)하는 날이며, “부처님 생신날 다 함께 스스로 자축”(1993년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자」, 퇴옹성철, 2003: 67)하는 날이기 때문에 성철에게 부처님오신날이란 ‘부처님되는날’이다.

이처럼 성철의 부처님오신날 법어에서는 부처의 탄생을 과거의 ‘석존의 탄생’으로 보지 않고, 지금 현재의 ‘모두의 성불’로 파악하고 있다. 대중들이 성불을 향해 노력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부처님오신날 법어의 목적인 셈이다. 따라서 성불과, 성불의 계기가 되는 견성이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1. 견성즉불(見性卽佛)의 활용

성불은 성철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강조7)할 만큼 중요시하는 개념이다. 불교의 목적이 성불이 아니면 무엇인가 싶을 정도로 당연하게 보이는 이 선언은, 불교의 목적을 아라한과를 이루는 것으로 보거나,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등의 다른 견해를 떨쳐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성철은 성불을 무엇이라고 설명할까?

성철의 대표 저술인 『선문정로』 제1장의 제목은 「견성즉불(見性卽佛)」이다. 바라밀행을 닦아서 3아승지겁의 수행의 결과로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견성하면 부처라는 설명이다. 성철이 강조하는 견성에서 중요한 것은 일단 견성한 뒤 닦아서 성불한다는 것이 아니라 ‘견성이 바로 성불’이라는 점이다. 『선문정로』가 가장 힘주어 주장하는 내용도 견성을 잘못 알고 있는 수행자들에 대한 경책이다.8) 그렇다면 견성은 무엇일까?

성철은 이미 『선문정로』의 서언에서 “선문은 견성(見性)이 근본이니 견성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철견(徹見)함이다.”(퇴옹성철, 2006: 4)라고 견성의 의미를 지적하였다.

“자성을 바로 보면 곧바로 성불한다” 하였는데, 자성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보기만 하면 부처가 된다 하는가? 자성이란 모든 중생이 지니고 있는 진여의 본성으로서 불성, 법성, 법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또한 중생이란 사람만이 아니라 육도중생을 다 포함해 일컫는 말이다. … 중략 … 극악한 중생과 원만한 부처가 그 불성에 있어선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선한 기미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극악한 단선근중생(斷善根衆生)도 깨치면 곧 부처이다. 무엇을 깨친다는 말인가? 본래 구비하고 있던 진여자성, 즉 불성을 깨치는 것이다(퇴옹성철, 2006: 54).

견성은 모든 중생이 지니고 있는 진여 본성으로서의 자성을 보는 것이고, 자성은 불성이며, 중생은 육도중생을 모두 포함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성의 내용을 다른 형식으로 나타내기 위해 성철의 견성 설명에 등장하는 핵심어를 뽑아보면, 중생·본성·자성 ·불성·보다·육도중생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핵심어는 다양한 불교 교학에서 두루 등장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성철의 설명에 따라 성철이 한정하고 있는 핵심어의 특성을 추출할 필요가 있다. 위의 설명에 따라 대표적인 핵심어의 특성을 추출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 핵심어의 추출
견성의 핵심어 핵심어의 특성
견성 / 보다 보기만 하면 부처가 된다
자성 / 본성 / 불성 / 법신 모든 중생이 본래 구비 / 진여
중생 / 육도중생 사람만이 아니라 육도중생 모두 /
부처와 차이가 없음 / 단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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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견성을 표현하는 핵심어가 그 특성이 반영되어 부처님오신날 법어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보기로 한다. 견성 개념을 활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법어는 1982년 「자기를 바로 봅시다」이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 중략 …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퇴옹성철, 2003: 42-43).

이 법어에서 성철은 ‘견성’을 ‘자기를 바로 봄’으로 표현하고, 그러한 ‘자기’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순금’이라고 하고 있다. 자기는 본래 순금이지만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잡철로 보고 있다는 설명이다. 중생이라면 누구나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이 번뇌에 가려져 있으며, 이것만 제거하여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바로 보면 성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잠을 깨지 못하면 꿈이 계속되듯이,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면 중생이 끝없이 계속된다”(1989년 「부처님은 항상 지옥에 계십니다」, 퇴옹성철, 2003: 59). 또한 ‘자기’는 ‘우주의 삼라만상’이기 때문에 ‘반짝이는 별과 춤추는 나비까지도’ 자기를 바로 보기만 하면 성불한다고 하고 있다. 불교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앞에서 예로 든 견성의 설명과 조금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기를 바로 본다’는 말은 ‘자기’를 어떤 존재로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자기의 한계도 모르고 지나치게 자신을 과신하는 경우라면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은 아직은 부족한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의미가 된다. 또 자기를 한없는 능력을 지닌 긍정적인 존재로 보는 경우라면 자신감 없이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자기를 바로 보고 적극적인 삶을 살라는 의미가 된다. 성철의 법어는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성철의 법어에서 표현되고 있는 ‘자기를 바로 본다’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영원하고 무한’하며 ‘순금’이라는 긍정적인 말로 표현하고 있고, 그것이 견성이라는 개념을 설명할 때 사용한 자성이나 본성 등의 핵심어와 같은 가치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철의 법어는 견성이라는 불교 개념의 구조를 확고하게 정립하고, 그에 따라 명확한 핵심어가 마련된 상태에서 이루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철의 부처님오신날 법어는 불교 개념을 정확히 담고 있으면서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한글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인뿐만 아니라, 불교를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도 감동을 주었다. 성철의 법어가 발표되었을 당시 재가불자와 일반인의 반응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원택, 2001: 154), 여러 분야에서 관심을 끌게 된 것도9) 이와 같은 성철 법어의 특성 때문이다.

2. 본래성불(本來成佛)의 활용

성불에 대해서 성철이 강조하는 내용은 견성이 바로 성불임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성철은 구체적으로 성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부처가 된 이후로 지내온 많은 세월은 한량없는 백천만억 아승지로다.(自我得佛來 所經諸劫數 無量百千萬億阿僧祗)”

이 구절은 『법화경』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있는 말씀인데, 『법화경』의 골자입니다. … 중략 … 불교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보통 물으면 “성불이다”, 즉 부처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으레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실제 내용은 중생이 본래부처[本來是佛]라는 것입니다. 깨쳤다는 것은 본래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일 뿐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전에는 자기가 늘 중생인 줄로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억천만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 중략 … 부처님이 도를 깨쳤다고 하는 것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한 본래 모습 그것을 바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 일체 생명, 심지어는 구르는 돌과 서 있는 바위, 유정·무정 전체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다 성불했다는 그 소식인 것입니다(퇴옹성철, 2003: 140-141).

성철은 『법화경』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의 유명한 구원성불론(久遠成佛論)을 이용하여 사실은 중생이 지금 새롭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깨달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생 누구나가 본래 갖추고 있는 자성을 보아서 깨쳤다는 것은 본래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일 뿐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철이 설명하는 성불은 1차적으로 ‘본래성불’이다. 이것은 앞에서 견성의 핵심어인 ‘자성’이 ‘모든 중생이 본래 구비하고 있음’이라는 특성에서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결과이다.

이러한 설명을 활용한 법어 역시 1982년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예로 들 수 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 중략 …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퇴옹성철, 2003: 42).

‘자기를 바로 본다’는 것은 자기가 ‘원래 구원되어 있다’는 것을 바로 보는 것이고, ‘본래 부처’라는 것을 바로 보는 것이며, ‘모든 진리가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음’을 바로 보는 것이다. ‘깨쳤다는 것은 본래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이라는 설명을 완전히 우리말로 전환시켜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1982년 법어의 결론인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다.”(퇴옹성철, 2003: 44)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중생이 새롭게 성불한 것이 아니라, 본래 성불한 상태라면 지금 이 자리의 중생들 모두가 부처인 셈이다. 그러므로 성철이 설명하는 성불은 ‘여래출현’이다. 성철의 부처님오신날 법어 중에 가장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1986년 「생신을 축하합니다」를 보자.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 없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꽃밭에서 활짝 웃는 아름다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구름 되어 둥둥 떠 있는 변화무쌍한 부처님들,

바위 되어 우뚝 서 있는 한가로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물 속에서 헤엄치는 귀여운 부처님들,

허공을 훨훨 나는 활발한 부처님들,

교회에서 찬송하는 경건한 부처님들,

법당에서 염불하는 청수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넓고 넓은 들판에서 흙을 파는 부처님들,

우렁찬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자욱한 먼지 속을 오고 가는 부처님들,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천지는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이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퇴옹성철, 2003: 51-52).

이 법어에는 ‘자기를 바로 봅시다’와 같은 견성과 관련한 어떠한 표현도 들어 있지 않다.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을 시작으로 지금 이 현실을 살고 있는 모든 중생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며 ‘생신을 축하한다’고 하고 있다. 중생의 모습 그대로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님오신날은 곧 중생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교도소에서 살아간다면 죄를 지었다는 것이므로 세간의 눈으로는 거룩할 수 없지만, 성철은 ‘거룩한 부처님들’이라고 부른다. 또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사람이 엄숙할 수 없지만 성철은 ‘엄숙한 부처님들’이라고 부른다. 모두가 부처로서 융화하여 시비와 장단이 사라진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꽃밭에서 활짝 웃는 아름다운 꽃, 구름 되어 둥둥 떠 있는 변화무쌍한 구름, 우뚝 서 있는 한가로운 바위를 모두 ‘부처님’으로 부르며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이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세상에 출현한 모든 부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부처님은 남의 고통을 대신 받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삼습니다.

부처님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부모로 모시고 가장 존경하며 정성을 다하여 지극히 섬기고 받듭니다.

이는 부처님이 베푸는 자비가 아니요 부처님의 길이며 생활입니다(1989년 「부처님은 항상 지옥에 계십니다」, 퇴옹성철, 2003: 59).

부처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받고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부처가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것 그대로가 생활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부처라면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하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1982년 「자기를 바로 봅시다」, 퇴옹성철, 2003: 43)이기 때문이다.

종정 성철의 부처님오신날 법어에는 성철 스스로 “부처님께 밥 값 했다”고 할 정도로 대표적인 저술인 『선문정로』에서 전하려고 하는 핵심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중을 상대로 한다고 해서 선업을 쌓고 복을 지으라는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문의 근본을 담고 있는 것이다.

Ⅳ. 성철의 열반 후 영향과 한계

요새는 아무리 깊은 산중에 앉았다 해도 귀가 멀어놓으면 골동품이 돼버리고 말아. 낙오자가 돼버린다 말이여. 요새는 학문이라든지 과학이라든지 모든 것이 다 초음속으로, 제트기 이상으로 발전이 돼 나가는 편인데, 눈 깜짝 새에 300년, 400년 전 사람이 돼버리고 만다 그 말이여. 아무리 산중에 앉았다 해도 귀와 눈은 온 세계에 통해 있어야 되지, 그렇지 않고는 실제에 있어서 완전한 낙오자가 돼버려 골동품밖에, 결국 박물관에 가게 된다 그 말이야. 그래 「라이프」나 딴 유명한 권위있는 잡지 같은 거 말이지, 세계에서 유명한 그런 것은 유명한 학설이라든가 무슨 발견이라든가 이런 거에 대해서 자세한 보도가 제일 빠르거든. 그래서 그런 것을 우리가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다 이것이라(<BTN 특별기획, 산은 산 물은 물> 2011년 5월 30일).

성철 종정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은둔적으로만 비쳐서 세상 물정에 관심이 없었던 인물인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위와 같은 육성을 들어보면 늘 세간에 관심을 가지고 예의주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절대 산중에 단절되어 살았던 인물이 아니다. 만약 지금 성철 종정이 법문을 한다면 클라우드 서비스를 언급하며 데이터 저장 방식을 설명하고 최신 어플리케이션을 시현할지도 모른다.

단, 조건이 있다. 그것에 반드시 불교의 핵심, 즉 성철이 전통이라고 여기는 선종의 가치가 담겨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과학을 활용하는 성철의 대중법어는 이후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성철의 본의까지 영향을 주지는 못한 것 같다. 최근의 동향을 보면 아예 과학자가 ‘법문’을 하는 듯이 보이는 상황도 있다.

한글로 전하는 법어는 전혀 계승되지 않았다. 성철 이전도 없을뿐더러 이후도 없으므로 한글 법어는 퇴옹성철의 특징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일반이 만나고 이해하는 불교는 불교 전체가 아니라 사소한 몇 가지를 통해서이다. 방편이 진실의 전하는 일부가 아니라 진실 그 자체인 이유이다. 퇴옹성철의 대중법어는 진실 그 자체인 방편을 잘 구현한 예라고 할 수 있다.

Notes

프로그램의 제목은 “BTN 특별기획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산은 산 물은 물”이다. 2011년 4월 25일부터 2011년 8월 29일까지 매주 한 편씩 모두 19회에 걸쳐 ‘1969년 대불련 수련회 법문’이 방송되었다.

이미 이 법문의 내용은 1980년대의 법문과 합쳐 법어집 『영원한 자유』로 출간되었다.

이하의 설명은 최원섭(2014: 203-216)을 수정하였다.

성철의 법어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는 성철이 생존해 있던 1987년에 초판이 발행되었기 때문에 법어 역시 1987년에 발표한 것까지만 수록되었다. 이후 2003년에 개정판이 발행되어 1993년에 발표한 법어까지 포함된 전체 법어가 수록되었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자기를 바로 봅시다』는 2003년 개정판을 이용하기로 한다.

목록에 1991년 법어가 누락되어 있는 것은 1991년에 종정 법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철은 1981년 1월에 종정에 취임한 후 1991년 1월에 임기 10년을 마친다. 그러나 종단 문제와 관련하여 후임 종정을 선출하지 못하고 있다가 1991년 8월에야 성철이 종정을 연임한다. 따라서 1991년 부처님오신날에는 종정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종정의 법어가 발표되지 못하였다.

1987년본 『자기를 바로 봅시다』에는 「천지는 한 뿌리」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불교의 목표는 무엇인가? 불교의 목표는 부처가 되는 成佛이다.”(퇴옹성철, 2006: 15)

“견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망설은 자신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선종의 종지를 흐리고 正脈을 끊는 심각한 병폐이다. 『선문정로』를 편찬하면서 첫머리에 ‘견성이 곧 성불’임을 밝힌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견성하면 곧 부처임은 선종의 명백한 종지이다.”(퇴옹성철, 2006: 17-18)

소설가 최인호는 소설 『가족』에 성철의 법어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인용하였고(최인호, 1984: 365), 정신과 의사 박진생은 성철의 법어를 활용하여 정신치료에 이용하기도 하였다(박진생, 2007: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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