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학계의 조선시대 불교사 관련 연구는 양과 질적인 측면 모두에서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물론 조선시대 불교사 관련 연구가 지극히 부진하다는 점, 그로 인해 조선시대 불교를 바라보는 우리의 역사인식 또한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1) 등은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던 문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할만한 학계의 노력은 무엇보다 연구자 부족이라는 장벽에 막혀 오랫동안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의 조선시대 불교사 관련 연구는 역사학 분야에서 활발하게 주도해 나가고 있다. 그동안 불교학, 미술사 등의 분야에 비해 역사학 분야 연구가 상대적으로 부진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 연구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있으며, 연구주제 또한 다양하다. 이들의 연구에 힘입어 이제 조선시대 불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 가운데 특히 손성필의 다양한 연구와 견해가 주목된다. 그는 16∼17세기의 불교사를 면밀하게 검토한 이후, 이 시기 불교사의 성격을 새롭게 규명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2) 이러한 노력은 단지 이 시기 불교사 이해뿐 아니라, 조선시대 불교사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가설’이라는 전제를 달기는 하였지만, 그의 연구는 이제 ‘조선불교 시대구분론’에까지 이르러 있는 상태이다.
16∼17세기 불교사에서 명종대(明宗代) 불교는 특별한 주목을 받아왔다. 연산군-중종대에 이르는 불교 탄압의 절정기3)를 지난 이후, 명종대는 문정왕후와 허응 보우(虛應 普雨)를 중심으로 불교 회생4)의 기틀이 가까스로 마련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명종대 불교와 관련한 연구는 그동안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어 왔다. 먼저 이 시기에 진행되었던 불교정책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를 들 수 있으며,5) 다음으로 보우의 활동과 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한 연구를 들 수 있다.6) 이들 연구를 통해 문정왕후와 보우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이 시기 불교 회생 노력의 실상은 상당 부분 규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보우의 생애라든가 그가 끼친 영향 등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더욱 진전된 연구가 이루어진 상태라고 하겠다.7)
이 논문은 문정왕후의 불교 회생 노력과 그것이 지니는 불교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논문의 앞부분에서는 중종-명종 시기 불교와 관련한 최근의 새로운 견해들을 소개하고, 아울러 이들 연구에 나타나는 몇 가지 의문점을 함께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해 보고자 하였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명종대 불교 회생을 가능케 하였던 요인들과 함께 이 시기 진행된 불교 회생의 실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계속해서 문정왕후가 1550년(명종 5) 주도하였던 ‘선교양종(禪敎兩宗) 복립(復立)’이 지니고 있는 불교사적 의의를 나름대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선교양종 복립은 명종대 불교 변화를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다양한 측면에서의 평가와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 명종대 불교와 관련한 연구는 본격적인 토론이 필요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 불교 전체에 대한 성격 규정에서부터 훈척세력과 사림세력의 대립 문제라든가, 문정왕후의 불교회생 의도에 대한 해석 문제, 또는 보우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평가 문제 등이 우선 떠오르는 과제라 할 수 있다. 물론 연산군-중종대의 불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선결과제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 논문이 향후 이러한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있어 다소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Ⅱ. 중종대 불교사의 새로운 인식
중종-명종 시기의 불교는 그동안 ‘중종대의 극렬한 불교탄압’과 ‘명종대의 일시적 부흥’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이 같은 관점을 적극 부정하는 연구가 발표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 연구를 통해 16세기 불교사 전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손성필은 연산군과 중종대의 불교를 각각 성격이 다른 시기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태조-연산군대의 불교를 ‘조선초기’, 중종-인조대의 불교를 ‘조선중기’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는데(2015), 이는 기존 학자들의 인식과 크게 다른 것이다. 물론 손성필은 중종대의 불교를 면밀하게 분석한 이후(2013c)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지만, 과연 연산군과 중종대 불교의 성격을 이렇게 별개의 시기로 각각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손성필은 중종대 불교를 불교탄압이 극심했던 시기로 보지 않으려 한다. 그는 기존 견해가 중종대의 ‘교화론적 불교정책’8)을 잘못 이해한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중종대 불교계가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임에 틀림없지만, “불교계에 대한 탄압이라고 할 만한 조치는 거의 없었고, 불교계는 다만 사적 영역에서 방치 방임되고 있었을 뿐”9)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중종대 불교를 바라보는 손성필의 인식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의문점은 과연 무엇을 ‘불교탄압’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성리학에 투철한 신료들은 국가체제에서 승정체제를 폐지한 후 승도가 저절로 교화되어 줄어들기를 기다렸을 뿐 직접적인 제제를 지향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즉, 연산군대에 승정체제를 폐지한 이후 성리학에 투철한 신료들은 ‘직접적인 제제’나 ‘직접적인 탄압’을 지향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중종대 불교계에 대한 탄압이라고 할 만한 조치는 거의 없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파악하고 있는 승정체제는 물론 선교양종, 승과고시, 도첩제 등과 관련한 제도적 장치를 의미한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조선 불교는 태종-세종 연간을 거치면서 극단적인 탄압을 받았다. 이 시기 불교계는 종파의 강제적 통폐합과 대규모 사사(寺社) 혁파 등의 조치를 통해 불과 30여 년 만에 그 규모가 거의 100분의 1로 축소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선교양종 존치와 승과고시, 도첩제 시행 등은 이러한 불교탄압의 과정을 겪은 이후 마련된 최후의 제도적 장치라는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이들 제도는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나마 불교가 존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적 장치였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연산군-중종대의 권력자들은 여기에서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교(異敎)나 사교(邪敎)에 불과했던 불교의 완전한 소멸을 주창하였으며, 이를 위해 불교 존립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마저 전면 폐지시켰다. 연산군-중종대를 지나면서 선교양종은 혁파되었으며, 승과고시와 도첩제 역시 시행되지 않았다.10) 이것은 불교의 완전한 소멸을 이루기 위한 조치였음이 분명하다. 이 시기 권력자들이 정치세력의 성향에 따라 승정체제의 폐지를 주창하였든, 아니면 이른바 교화론적 불교정책을 지향하였든 그들이 지향하는 공통 목표는 불교의 완전한 소멸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를 두고 중종대의 불교를 ‘직접적인 제제’나 ‘직접적인 탄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릇된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이미 불교 존립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마저 전면 폐지시킨 상황에서 더 이상의 ‘직접적인 제제’나 ‘직접적인 탄압’이 가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11)
중종대 불교의 성격 규정과 관련하여 크게 주목되는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1538년(중종 33)에 발생한 신륵사 사태이다. 필자는 이 사태를 중종대 불교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사건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 불교사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법난(法難)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다. 이 사건은 1538년 8월 30일 사헌부에서 중종에게 올린 보고의 내용을 통해 처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사헌부는 경상도 유생인 생원 장응추(張應樞) 등 30여 인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수로(水路)로 올라오다가 여주 신륵사에 투숙하였는데, 이 절의 주지 축령(竺靈) 등 승려 30여 명이 유생들을 도적이라고 하면서 막대로 난타하여 한 사람이 상해를 입었다는 내용을 보고하였다. 사헌부는 보고와 함께 이 사건에 관계된 승려들의 죄를 다스려달라 청하였고, 왕은 이를 승낙하였다.
신륵사 사건은 당시 유생과 관료들 사이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사건의 진상보다 훨씬 과장되거나 왜곡된 이야기들이 유통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사헌부가 왕에게 이 사건을 처음 보고한 때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9월 19일, 성균관 진사 박문수(朴文秀) 등은 이 사건과 관련한 상소를 올렸다. 『중종실록』에 전하는 장문의 이 상소는 극렬한 불교 탄압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박문수 등은 먼저 신륵사 사건을 언급하였는데, 사건 개요는 앞선 사헌부의 것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과장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12) 이들은 신륵사 사건의 원인으로 앞서 일부 승려들에게 지급한 호패(號牌) 문제13)를 들었으며, 이의 즉각적인 환수를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 사건을 저지른 승려들을 서울로 잡아와 극형에 처할 것, 경진(敬震) 보담(寶湛) 등 호남의 난승(亂僧)들을 효수하여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상소는 결국 “사찰을 헐어버리고 서적도 태워버려야 하는데 반드시 봉은사와 봉선사부터 시작하여 나머지 사찰도 모두 이와 같이 하면 농민이 날로 많아지고 군액이 보충될 것이며, 갑자기 몰려 도적이 되는 걱정이 없게 되고 강상(綱常)을 저버리고 세속을 어지럽히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이러한 것이 신들이 성상께 바라는 것입니다.”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상소에 대해 조정은 승려 처벌 등의 요구는 적극 수용하면서 호패 환수, 사찰 철훼 등에 대해서는 다소 유보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자 박문수 등은 계속해서 상소를 올렸으며, 결국 9월 26일 『여지승람』에 등재되지 않은 사찰들의 철거를 결정하는 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14) 이처럼 신륵사 사건에서 시작된 불교탄압 논의는 호패의 환수와 사찰 철폐 논의까지 이어졌다. 특히 『여지승람』에 등재되지 않은 사찰을 모두 철폐하라는 조치는 일시적 소요15)를 우려할 만큼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1538년에 발생한 신륵사 사태는 실록에 전하는 기사만으로 그 실체적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 특히 신륵사 승려 30여 명이 뚜렷한 이유 없이 유생들을 폭행했다는 실록 기사는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보인다. 당시 불교계가 처해 있었던 상황을 고려할 때, 다수의 유생들이 신륵사에 투숙하면서 승려들에게 참기 어려운 만행을 저질렀고, 폭행은 바로 이것을 제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었다는 점을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다. 여하튼 신륵사 사건에서 비롯한 사찰 철폐는 당시 불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태를 직접 겪은 허응 보우는 심지어 피눈물을 흘렸다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보우는 중종이 제방의 사찰들을 불태워 없애버린다는(燒毁諸方佛寺) 소식을 들었으며, 그 시점을 무술년(1538) 9월 기망(旣望), 즉 9월 16일이라고 명확하게 밝혀 놓았다. 보우는 신륵사 사태와 그로 인해 자행되었던 사찰 철폐 소식을 접한 이후 피눈물을 흘리면서 두 수의 시를 지어 여러 벗에게 보여주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보우가 벗들에게 보여주었다는 두 수의 시 가운데 “불교가 쇠퇴하기가 이 해보다 더 하겠는가/피눈물을 뿌리며 수건을 적시네. 구름 속에 산이 있어도 발붙일 곳 없으니/티끌세상 어느 곳에 이 몸을 맡기리.”(釋風衰薄莫斯年 血漏潛潛滿葛巾 雲裏有山何托跡 塵中無處可容身)라는 내용이 들어있기도 하다.16)
1538년 신륵사 사태로 촉발된 사찰 철폐는 승정체제의 폐지 못지않게 불교계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허응 보우는 이 해에 이르러 불교가 가장 쇠퇴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피눈물을 흘리면서 이 사태를 겪었다고 표현하였다. 중종대 불교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있어 이러한 보우의 표현은 무엇보다 중시될 필요가 있다. 중종대 불교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당사자, 즉 이 시기 승려들이 중종대 불교를 과연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17) 따라서 중종대 불교계에 ‘직접적인 제제’나 ‘직접적인 탄압’이 가해지지 않았다거나 중종대 불교계에 대한 탄압이라고 할 만한 조치는 거의 없었다는 손성필의 주장은 재고할 필요가 있는 견해라는 생각이 든다.18)
Ⅲ. 문정왕후와 명종대 불교 회생
연산군-중종대의 불교는 조선시대 전 기간 중에서도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불교계는 불교 존립을 위한 최소한의 공적 근거마저 상실케 되었으며, 앞서 언급한 것처럼 1538년에는 법난과도 같은 대규모 불교 탄압 사태를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수의 유생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불교의 완전한 소멸을 목표로 봉선사, 봉은사 등의 사찰마저 철거해야 한다는 상소19)를 지속하고 있었다. 문정왕후의 불교 회생 노력은 이같은 상황 속에서 진행된 것이기에 더욱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불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만큼 더욱 의미 있는 일이었다는 평가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명종대 불교 회생은 철저하게 문정왕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불교 회생의 실상과 그것이 지니는 불교사적 의의를 살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정왕후의 불교 회생 ‘의도’와 관계된 연구가 보다 구체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 그가 이 시기 불교 회생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나선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지, 또는 그가 최종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불교계와 승단의 사회적 위상은 어느 정도였는지 등에 대해서 앞으로 보다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정왕후는 불교 회생을 위한 의도적 절차와 시행계획을 미리 구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우선 불교 회생을 위한 명분을 찾는 일에 몰두하였을 것이며, 양종 복립을 위한 행정체계 및 재정 확보 방안을 미리 마련해 놓았을 가능성도 크다. 아울러 그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갈 수 있는 불교계의 대표 승려도 물색하였을 것이다. 그가 수렴청정을 시작한 이후 진행한 불교 관련 조치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정황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명종대 문정왕후의 불교 회생 노력을 상징하는 일은 선교양종 복립이었다. 문정왕후는 이 일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두 가지 일을 추진하였는데, 보우의 발탁과 내수사(內需司) 강화 조치가 그것이다. 보우는 1548년(명종 3) 12월 15일 대비로부터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다.20) 보우의 봉은사 주지 임명 배경에 대해서는 그동안 몇 가지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보우 스스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내수사 박한종(朴漢宗)이라는 인물이 적극 협력하였을 것이라는 주장, 강원감사 정만종(鄭萬鍾)이 적극 추천하였을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보우와 대비의 만남은 오히려 우연적인 요소가 더 클 것이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21) 이들은 대체로 보우와 문정왕후의 만남을 누가 주선했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물론 대비에게 보우를 소개하거나 천거했던 별도의 인물이 있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하지만 보우는 이미 봉은사 주지 직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자량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이고, 대비 또한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보우는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이후 17년 여 동안 불교 회생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는 봉은사 주지에 부임하자마자 유생들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551년 무렵22)까지 그를 향한 비판과 상소는 집중적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보우는 문정왕후의 두터운 신임과 후원에 힘입어 유생들과 당당히 맞서는23) 과감함을 보여주었으며, 선교양종 복립 이후 실질적인 불교계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보우의 기용과 함께 문정왕후는 내수사를 크게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24) 특히 1550년(명종 5) 1월 내수사 담당 내시에게 당상인(堂上印)을 발급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것은 문정왕후가 향후 양종 복립 등의 불교정책을 추진해 나가기 위한 사전 조치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내수사 역할의 확대 강화는 문정왕후가 그의 의도대로 불교정책을 펼쳐갈 수 있었던 중요한 여건 중 하나로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견해이다.25) 이 때 내수사를 통솔하던 인물은 환관 박한종이었다. 그는 문정왕후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으며, 2품에 해당하는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로 인해 실록에는 박한종의 권세를 비난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명종대 내수사는 내원당 운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1550년 81개 정도였던 내원당은 1552년 무렵 395개로 급증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내수사와 내원당, 그리고 양종 복립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한춘순의 견해26)를 참고할 수 있다.
이처럼 문정왕후는 치밀한 사전 계획을 수립한 이후 본격적인 불교 회생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데, 특히 그가 비망기(備忘記)를 통해 선교양종 복립을 지시하자 이를 둘러싼 비판은 극에 달할 정도였다. 양사(兩司)와 홍문관 등의 상소는 거의 매일 계속되었으며, 심지어 성균관 유생들은 모두 성균관을 비우고 떠나는 식의 극렬한 저항 의지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자신이 구상했던 정책을 강력하게 실행해 나갔으며, 결국 연산군-중종대를 거치면서 폐지되었던 선교양종과 승과고시, 도첩제 등의 승정체제는 모두 복구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명종대 초반을 지나면서 불교 존립을 위한 최소한의 공적 장치는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였지만, 이 시기 승정체제의 복구와 그것에서 파생된 다양한 결과는 17세기 이후의 불교계 변화양상과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명종대 불교 회생을 반대하던 유생과 일부 관료들의 저항은 매우 극렬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저항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일차적 요인은 물론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문정왕후에게서 찾아야 하겠지만, 명종대 초반 그를 둘러싼 정치세력의 존재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중종-명종 시기 불교정책과 훈척세력-사림세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주목하는 견해가 새롭게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한춘순은 “필자는 중종대부터 명종대에 이르는 기간을 척신정치가 아닌 ‘훈척정치’로 규정하였고, 무엇보다도 양종 복립은 문정왕후가 단순히 수렴청정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명종과 문정왕후의 권력관계 및 훈척정치 구조에서 가능하였다.”27)는 견해를 제시하였으며, 손성필은 이 사항과 관련하여 보다 구체적인 주장을 전개하였다.
중종대는 사림세력이 대두하는 한편, 왕권이 약화됨에 따라 국왕과 신료, 훈척세력과 사림세력 간에 불교정책 노선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인 시기였다. 대체로 사림세력은 국가체제에서 불교적 제도를 제거한 후 백성과 승려들이 저절로 교화되기를 기다리는 정책을 지향하였으나, 훈척세력은 15세기와 같이 승정체제나 도첩제의 일종인 승인호패제 등을 통해 국가가 불교계에 직접 개입하는 정책을 지향하였다. 명종대에는 왕실과 훈척세력에 의해 선교양종의 승정체제가 복구되었고, 선조대에는 다시 사림세력에 의해 교화론적 불교정책으로 회귀하였다.28)
중종-선조대에 걸친 불교사 전개양상을 이렇게 훈척세력과 사림세력 간의 정책 대립양상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시각은 무척 흥미롭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도식적 이해는 자칫 심각한 학술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특히 ‘사림세력’ 또는 ‘훈척세력’으로 지칭되는 당시의 정치세력이 각 집단별로 과연 동일한 불교관을 지니고 있었을까 하는 점은 보다 구체적으로 논증되어야 할 과제라 하겠다.29) 필자는 앞선 연구를 통해 문정왕후와 보우의 불교회생 노력을 지지했던 관료들을 ‘지원세력’으로 표현하면서, 윤원형(尹元衡)·윤춘년(尹春年)·상진(尙震)·심연원(沈連源)·정만종·한지원(韓智源) 등의 인물들을30)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문정왕후의 불교정책을 지지했던 인물 모두를 이 시기 훈척세력으로 집단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아울러 이 시기 훈척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에 뚜렷한 불교관의 차이가 존재하였는지, 더 나아가 이들 사이에 불교 관련 정책의 견해차가 뚜렷하게 존재하였는지, 존재하였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인지 등을 밝히는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정왕후의 불교 회생 노력은 여러 가지 요인이 결합되어 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는 먼저 보우를 발탁하여 불교계를 통솔해 나가도록 하였으며, 계속해서 내수사 강화를 통한 재원 확보 등의 여건 마련을 추진해 나갔다. 아울러 그의 불교 관련 정책을 지지하는 지원세력도 등장하여 그들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들 요인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확립된 그의 막강한 권력으로부터 비롯한 것이지만, 이들 요인의 결합과 작동을 가능케 했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문정왕후의 돈독한 불심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31)
문정왕후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시기 불교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유의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신앙으로서의 불교’를 지나치게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시기 조선의 유생들은 가례(家禮)를 보급하고 불교를 탄압하면서 성리학적 이상사회의 실현을 꿈꾸었다. 하지만 불교의 완전한 소멸은 결국 성사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들은 승려 수나 사찰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식의 불만을 자주 표출하기도 하였다. 불교는 성리학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신앙의 영역을 오랜 세월동안 간직해 왔으며, 이러한 영역은 강제적이거나 인위적인 방법으로 제거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문정왕후의 불교정책을 지원했던 세력 가운데 일부 인사32)는 불교를 신앙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 시기 불교사에 신앙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해석해야 할 사례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문정왕후의 불교 회생 노력을 도왔던 인사 가운데 혹시 불교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인물은 없는지, 앞으로 조금 더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Ⅳ. 선교양종 복립과 그 의의
1550년 12월에 내려진 문정왕후의 비망기는 당시 정국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선교양종의 복립과 승과고시의 부활은 신료들이 쉽게 양보할 수 없는 대사(大事)였기 때문이다. 이때의 상황을 전하는 실록 기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① 선교양종의 복립을 명하였다. 자전이 상진에게 내린 비망기에 이르기를, “양민의 수가 날로 줄어들어 군졸의 고통스러움이 지금보다 더한 때가 없다.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백성들이 4∼5명의 아들이 있을 경우에는 군역의 괴로움을 꺼려서 모두 도망하여 승려가 되는데, 이 때문에 승도는 날로 많아지고 군액은 날로 줄어드니 매우 한심스럽다. 대체로 승도들 중에 통솔하는 이가 없으면 잡승을 금단하기가 어렵다. 조종조의 『大典』에 선종과 교종을 설립해 놓은 것은 불교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승려가 되는 길을 막고자 함이었는데, 근래에 혁파했기 때문에 폐단을 막기가 어렵게 되었다. 봉은사와 봉선사를 선종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아서 『대전』에 따라 대선취재조(大禪取才條) 및 승려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신명하여 거행하도록 하라.”하였는데,
② 상진이 회계하기를, “민정(民丁)으로서 군역을 도피하는 자들은 거의가 승려가 됩니다. 오늘날 군액이 줄어드는 것이 모두가 이 때문이며 심지어 도둑으로 잡히는 자들 가운데 승려가 그 반을 차지합니다. 만일 이들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막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매한 백성들이 봉은사 등의 승려들이 특별한 은혜와 보호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는 망령되이 위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승려가 되는 자가 점점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니 어찌 이단을 숭신하실 염려가 있겠습니까마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망동은 이렇게까지 되었습니다. 제왕의 덕에 누가 됨은 이교를 숭신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만약 발론(發論)하여 『대전』에 따라 시행한다면 해가 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애당초 감히 계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하였다.
③ 사신은 논한다. 상진의 본성이 총민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는데 자전이 이단으로 인도하여 유생이 절에 가는 것을 금하고, 재 올리는 절이라는 푯말을 세웠다. 인수궁의 역사가 바야흐로 한창인데 양종에 관한 명을 또 내리니 사람들마다 나중에 가서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린 임금을 보필하여 청정하면서 위로는 중묘(中廟)의 척사한 뜻을 어기고, 아래로는 부모로서 정치를 보필하는 도리를 잃었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33)
문정왕후는 비망기에서 이들 시책을 시행하는 목적, 즉 시행 명분을 우선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 첫째 명분은 군역의 괴로움 때문에 승도는 날로 늘고 군액은 날로 줄어드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명분은 승도를 통솔하는 자가 없으면 잡승을 구제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이미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있는 선교양종을 복립하는 것이고, 이는 곧 불교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승려가 되는 길을 막기 위함이라는 명분이었다. 이러한 명분을 앞세운 문정왕후는 봉은사와 봉선사를 각각 선종과 교종의 본산으로 삼을 것, 그리고 『대전』에 따라 승과고시와 도첩을 실시할 것 등을 명하였다.
대비가 내린 비망기 소식이 전해지자 곳곳에서 반대 여론이 들끓었으며, 그 결과 하교된 조치를 시행하는데 무려 한 달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물론 이러한 여론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위의 실록 기사 후미에 있는 사평(史評), 즉 “위로는 중묘의 척사한 뜻을 어기고, 아래로는 부모로서 정치를 보필하는 도리를 잃었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而上違中廟斥邪之志 下失父母輔治之道 可勝痛哉)”는 내용은 지극히 자극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양종 복립을 둘러싼 ‘투쟁기’가 지난 이후 문정왕후가 계획했던 불교 회생 절차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1552년 이후 문정왕후는 ‘안정기’34)로 칭해도 좋을 만큼의 분위기 속에서 승과제도와 도첩제를 부활시켰으며, 이 때 부활된 승과고시를 통해 청허 휴정, 사명 유정 등의 고승이 배출되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결국 양종 복립은 명종대 불교 회생의 결정적 단초를 마련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 불교 회생의 성사 여부를 가늠할 만큼의 중요성을 지니는 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명종대 선교양종 복립의 의미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35)가 존재하며, 필자는 이 시기 양종 복립은 무엇보다 불교 존립을 위한 최소한의 근거를 다시 확보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이것은 물론 문정왕후가 비망기를 통해 밝힌 명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의미이다. 조선의 권력자들은 건국 초기부터 꾸준하게 불교 종파의 축소와 통폐합을 추진하여 왔으며, 결국 중종대에 이르러 완전한 폐지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목적하는 바는 불교의 소멸이었음이 분명하다. 태종대 7종으로의 축소, 세종대 선교 양종으로의 통폐합 조치는 단지 교세의 외형적 축소에서 그치지 않는다. 조선초 진행된 이들 조치에 의해 한국불교는 전문성과 집단성을 크게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종대 자행된 ‘선교양종’으로의 통폐합 조치는 한국 종파불교의 역사를 가장 극단적으로 퇴행시킨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은 서로 너무나도 다른 전문성을 지니는 종파였다. 그런데 이들을 한데 묶어 ‘선종’이라 하였다는 것은 결국 이전 시기까지 유지, 발전시켜왔던 불교의 전문성을 멸실시키는 조치였다. 이처럼 극단적인 폐불책을 시행하면서 내걸었던 명분은, “석씨(釋氏)의 도는 선·교 양종뿐이었는데, 그 뒤에 정통과 방계가 각기 소업(所業)으로써 7종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잘못 전하고 거짓을 이어받아, 근원이 멀어짐에 따라 말단이 더욱 갈라지니 실상 그 스승의 도에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또 서울과 지방에 사사(寺社)를 세워 각 종에 분속시켰는데, 그 수효가 엄청나게 많으나, 승려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절을 비워두고 거처하는 자가 없으며, 계속하여 수즙(修葺)하지 않으므로 점점 무너지고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36)라는 것이었다.
다분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1424년(세종 6) 이후의 조선불교는 그나마 선교양종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노력이었다. 중종-명종대에 걸친 양종 폐지와 복립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의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선교양종의 복립은 불교의 ‘중흥’이나 ‘부흥’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종대 선교양종의 복립은 결국 불교, 또는 승단이 존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근거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비록 일시적이지만 문정왕후의 양종 복립은 이러한 불교의 ‘회생’을 보장하기 위한 시도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37)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 관료와 유생들은 곧바로 양종을 혁파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양종의 혁파가 결정되자 전국에서 뛸 듯이 기뻐하였다38)고 한다. 이후 조선왕조 내내 불교계에는 공식적 의미로서의 ‘종파’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승려 비명(碑銘)에서 ‘선교양종(禪敎兩宗)’ ‘화엄종주(華嚴宗主)’라는 표현이 다수 발견된다. 이것은 조선 중기 이후를 살다간 많은 승려들의 의식 속에 ‘종파인식’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비록 조선 왕실은 1566년 이후 단 한 차례도 불교 종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 시대를 살다간 승려들이 의도적으로 ‘종파인식’을 표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문정왕후의 선교양종 복립은 이같은 측면에서 앞으로 더욱 새롭게 평가되고 인식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Ⅴ. 맺음말
이 논문은 문정왕후의 불교 회생 노력과 그것이 지니는 불교사적 의의를 살펴보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본문에서는 먼저 중종대 불교와 관련한 손성필의 연구를 중점적으로 소개하였다. 손성필은 중종대 불교를 ‘교화론적 불교정책’이라는 틀에 의지하여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중종대 불교계에 ‘직접적인 제제’나 ‘직접적인 탄압’이 가해지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특히 1538년에 발생한 신륵사 사태를 주목하면서, 중종대 불교의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시기 승려들의 인식이 중시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서술하였다.
중종대 불교의 성격과 관련한 문제를 검토한 이후, 본문 제Ⅲ장에서는 문정왕후와 명종대 불교 회생에 관계된 내용을 검토하였다. 명종대 불교 회생은 전적으로 문정왕후의 주도하에 진행된 것이었다. 여기에 보우의 발탁, 내수사 강화, 지원세력의 확보 등의 요인이 결합되면서 결국 문정왕후의 불교 회생 노력은 성공적인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최근 중종-선조대에 걸친 불교사 전개양상을 훈척세력과 사림세력 간의 정책 대립양상 관점에서 파악하는 연구가 발표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지만, 도식적 역사 이해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오류 또한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시기 ‘사림세력’ 또는 ‘훈척세력’으로 지칭되는 정치세력이 각 집단별로 과연 동일한 불교관을 지니고 있었을까 하는 점은 향후 보다 구체적으로 논증되어야 할 과제라고 보았다.
마지막 제Ⅳ장에서는 1550년(명종 5)의 ‘선교양종 복립’이 지니고 있는 불교사적 의의를 검토하였다. 고려시대의 다양했던 종파불교는 조선 초기의 종단 통폐합 과정을 겪은 이후 선, 교 양종으로 축소되었으며, 연산군-중종대를 거치면서 이들 두 개 종단마저 폐지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이 시기 불교 종단은 불교 또는 승단이 존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적 장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문정왕후의 양종 복립은 17세기 이후 불교사 전개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 후기 승려들에게 ‘종파인식’이 지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중시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명종대 양종 복립의 성과에 상당 부분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