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연구논문

청허 휴정의 선풍과 계승*

정광균**
Kwanggyun Jung**
**대한불교포교원 전 연구실장.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아사리, 한국정토학회 회장.
**Ācārya,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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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Nov 25, 2020; Revised: Dec 20, 2020; Accepted: Dec 24, 2020

Published Online: Dec 31, 2020

국문 초록

본 논문은 “청허 휴정의 선풍과 계승”이란 논제하에, 먼저 휴정의 선풍이 형성되는 배경에 대해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배경, 그리고 종단적 배경을 고대 한국의 고승대덕과 휴정의 법조(法祖)와 법부(法父)까지 살펴보았다. 다음에 휴정이 선교를 회통한 부분에 대해서는 휴정의 저술을 통해서 선교회통(禪敎會通)의 사교입선(捨敎入禪),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선주교종(禪主敎從)에 대해서 간략히 검토하였다. 그 다음에 휴정의 조사선풍의 격외선지(格外禪旨)가 이루어지는 내용을 종지종풍(宗旨宗風)과 관련해서 중국의 조사선과 고대 한국의 조사선인 구산선문(九山禪門)과 중흥조들까지 전승하여 수렴된 내용을 고찰하였다. 끝으로 휴정의 선풍이 계승되는 내용으로 휴정의 문하 4대 종장인 사명유정·편양언기·소요태능·정관일선을 중심으로 검토하여 보았다.

이러한 휴정의 선풍은 산승들을 계도하는 저서로 우선 『선가귀감』을 찬술하여 선교의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승풍을 진작시켜서 조사선의 수일불이(守一不移)한 수본진심(守本眞心)과 본래성불의 조사관에 대한 수행체계인 돈오점수의 선주교종을 확립하였다. 이런 가운데 선교의 논쟁이 벌어지자 다시 『선교석』을 통하여 전통적인 『선문보장록』과 『선문강요집』, 중국 찬술의 전거를 인용한 선과 교를 판석하여 이를 회통하려 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계속되자 『심법요초』를 저술하여 선과 교를 회통시키고, 선과 정토까지 일치시켜 회통하는 학문과 수행의 풍토를 삼문수학(三門修學)으로 확립시켜 조선 후기에 전승되었다.

Abstract

This thesis first examined the background of the period and social background, and the background of jongdan about the background of the formation of the sonpung of adjournment, to the law and the law of the ancient Korean sonmaster and Hyujeong. Next, for the part in which Hyujeong repented of songyo, briefly reviewed the sagyoibson (捨敎入禪) by songyohoitong (禪敎會通) and sonjugyojong (禪主敎從) by songyohoitong (禪敎會通) and donohjyumsu (頓悟漸修). I did. Next, Hyujeong’s investigation of sonpung’s gyegoisongi (格外禪旨) was transmitted to the Chinese investigation vessels, ancient Korean investigation vessels, ninemauntinsonmun (九山禪門) and the jungHeungjos. The contents were considered. Finally, the contents of Hyujeong’s sonpung were reviewed, focusing on the four major elders of Hyujeong, samyeng Yujeong, Pyunyang Eongi, Soyotaeneung, and Jeonggwanilsun.

This Hyujeong’s sonpung is a book that guides the mountain monks. First of all, he praised the 『Seongaguigam』, promoted the victory based on the correct understanding of songyo, and kept the one spoken in jyosameditation (祖師禪) and did not move keeping only one (守一不移) and keeping the fundamental true mind (守本眞心). It established the sonjugyojong of donojeomsu, which was originally a system of conduct for the guarding and the gateway to the investigation of Seongbul. In the midst of this, when the missionary debate broke out, the traditional 『Seonmunbojanglog』 and meditation and doctrine quoted from the authority of Chinese chanting were attempted to repent through the 『Seonmungangyojyb』. Nevertheless, as the conflict continued, he wrote 『simbeobyocho』 to convert meditation and doctrine, and to establish the culture of meditation and doctrine in harmony with the son and to the pure land as sammunsuhak (三門修學), which was passed down in the late Joseon Dynasty.

Keywords: 청허 휴정; 사교입선; 돈오점수; 선주교종; 삼문수학; 조사선풍; 선교회통
Keywords: Hyujeong; Sagyoibson; Donohjeomsu; Sonjugyojong; Sammunlesson Course; Josasonpung; Songyo Hoetong

Ⅰ. 시작하는 말

현재 한국불교의 특성을 말할 때 교학적인 측면에서 회통불교(會通佛敎)라고 말하고, 실천 수행적인 측면에서 선(禪)불교라고 회자한다. 고대 삼국에 불교가 전래하여 수용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시대마다 특성을 발휘하였다. 그러다가 불교의 포용성을 기반으로 삼국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국가적인 이념의 총화를 위해서 불교적 융화와 조화의 중도적 실현을 지향하였다. 이는 불교적 이론을 바탕으로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을 확립하여 국토의 지명과 국왕의 법호까지 불교의 전적에서 불명(佛名)을 발취하여 왕명으로 삼았다. 이것이 아마도 호국불교라는 대의로 삼아 면면히 이어져 역사를 장식함과 더불어 고려에서는 국교로까지 채택되었다. 그 결과, 고대 한국의 풍속과 문화까지 경시할 수 없는 업적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고대 한국불교의 역사를 장식한 불교의 인물 중에 수많은 국사와 왕사, 고승들이 존재하였다. 그들은 국가의 정책에 불연국토와 호국불교 사상으로 이끌어주면서 불교 내부에서도 비록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오교구산(五敎九山)을 이루었지만, 그 내부에는 회통불교라는 중도사상을 끊임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역대 한국불교는 순탄한 길만을 걸어온 것이 아니다. 여말선초에 이르러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적 역성혁명을 계기로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비록 불교 내부에 귀족이 출가하여 교단이 타락한 부분도 있었지만,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맞물려 새로운 국가의 이념적 배경에서 쇠퇴의 길을 걸어가고야 말았다.

조선불교는 세계종교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무려 500여 년의 오랜 세월에 걸쳐 불교를 탄압하는 억불숭유(抑佛崇儒)라는 법난(法難)을 맞이하여 풍전등화의 초로불교로 조선불교의 역사를 장식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란 국가의 위기를 맞이하여 구국을 위해 호국불교라는 기치 아래 한국 역사에서 승려의 본분을 벗어난 의승군을 형성하여 국왕을 호위함과 아울러 국토 수복에 지대한 영향의 역사를 장식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에 시행된 도성출입금지로 인하여 중기와 후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산중불교로 일관되었다. 그런 와중에 승려는 국가의 노역과 부역을 담당하면서도 산중불교 내부에서는 삼문수업(三門修業)의 수행체계에 입각하여 선교(禪敎)를 회통한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선주교종(禪主敎從)으로 조사선풍이 면면이 계승되었다. 이러한 조선 중기의 불교적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선승이 바로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이고, 그의 선풍은 지금도 한국불교에 계승되고 있다. 따라서 청허 휴정의 선풍을 고찰함은 바로 한국불교의 선풍과 계승을 고찰하는 과제일 것이다.

조선 중기에 등장한 청허 휴정은 조사선의 계승자로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와 더불어 1,600여 년의 한국 불교사의 고승 중에 한 분으로 주목할 선사다. 휴정은 조선 초기 척불숭유(斥佛崇儒)의 정책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조선 중기에 활약한 허응당(虛應堂) 나암보우(懶庵普愚, 1509?-1565)에 힘입어 아사 직전의 불교를 일신하여 조사선풍을 다시 진작시켜 후대에 크나큰 영향을 발휘하였다. 청허 휴정은 가까이는 법부(法父)인 부용영관(芙蓉靈觀, 1485-1571)과 법조(法祖)인 벽송지엄(碧松智嚴, 1464-1534), 숙부(叔父)인 경성일선(敬聖一禪, 1488-1568) 등의 영향을 받았고, 멀리는 중국을 비롯한 신라와 고려, 조선 등의 고승대덕의 영향을 받아 삼교일원(三敎一元)과 선교회통(禪敎會通)의 새로운 수행체계인 삼문수업을 확립하여 기존의 조사선의 선종오가 가운데 간화선풍을 진작시켜 휴정 이후 조선 후기와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업적을 드러내었다. 따라서 고대에서 현재까지 한국불교의 선풍과 그 계승은 바로 휴정과 직결된다고 하겠다.

그러면 휴정의 선풍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중국의 조사선풍이 도래한 이래 나말여초에 정립된 조계선풍과 더불어 고려 중기 삼문체계(三門體系) 가운데 간화경절문을 바탕으로 선종오가의 종지종풍을 계승하여 선주교종(禪主敎從)의 사교입선(捨敎入禪)은 아닐까? 그런데 과연 실제로 그런 것인가? 왜 선주교종이고 사교입선인가? 혹여 주교종선은 아닌가? 말하자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본질이고, 그것을 개별적으로 입증하는 과정이 바로 선(禪)이지 않은가? 즉, 이론이 실천으로 입증되어야 함은 아닐까? 매우 난제 가운데 난제이다. 그리고 조사선풍은 선교(禪敎)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것인가? 나아가 휴정 이후 조선 후기의 어떤 선풍을 계승하였는가?

그래서 휴정은 조선 중기에 제자들의 질의와 훈육의 의문에 대응하는 저술을 남겼다. 그는 『선가귀감(禪家龜鑑)』을 통해서, 먼저 불교의 가장 근원이 되는 불교원리론(佛敎原理論), 다음 부처와 조사의 연원인 불조론(佛祖論), 그 다음 선과 교를 구분하는 선교론(禪敎論), 끝으로 여러 다양한 보임수행(保任修行)의 수행방편론(修行方法論)과 더불어 선종오가의 종지종풍을 명시하였다. 그러면서 당시 선교(禪敎)의 분쟁을 종식하는 『선교석(禪敎釋)』과 삼문체계를 확립하는 『심법요초(心法要抄)』를 저술하여 제자를 계도하는 지침서로 삼았다. 이러한 저술은 조선 후기 불교의 중요한 입증의 연구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후학도는 선리(禪理)의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논쟁의 역사를 통해서 보다 진척된 조사선의 이해를 확장하였다.

이러한 청허 휴정에 대해서 대흥사에서는 서산대사 탄신 50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학술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서산대사, 그 위대한 호국 호법의 자취”라는 대주제 아래에 총 5개의 소주제를 설정하였다. 그 가운데 논자에게 부여된 것은 ‘청허 휴정의 선풍과 계승’이다. 휴정의 선풍은 이미 여러 학자에게 주목을 받아 매우 심도 있게 연구되었고, 본 연구발표자도 석사와 박사 논문에서 연구한 바가 있다. 그러나 청허의 선풍과 계승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청정휴정의 선정일치(禪淨一致)의 염불선(念佛禪)에 중점을 두었던 논문이기에 휴정의 본질에서 벗어난 이탈임을 감지하였다. 하지만 이번 대흥사의 세미나에서 휴정의 본분에 맞는 과제여서 연구에 기대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청허 휴정의 선풍을 고찰함에, 먼저 휴정의 선풍이 형성되는 과정을 여러 선학(先學)이 논술한 내용을 참고하여 고찰해 보고서, 다음에 휴정의 저술을 통해서 선교관(禪敎觀)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다음에 휴정의 선풍내용(禪風內容)과 선풍계승(禪風繼承)을 그의 4대 제자들과 후학에게 미친 영향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면서 조선 후기의 선풍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를 고찰함에 휴정이 저술1)한 전적인 『청허당집(淸虛堂集)』을 비롯하여 『선가귀감』과 「선교결」, 『선교석』, 『심법요초』 등을 주제와 결부된 내용을 중점적으로 간취하여 살펴보면서 연구된 성과물들2)에서 부합된 부분을 참고하여 논하고자 한다.

Ⅱ. 청허 휴정의 선풍과 계승

1. 휴정의 선풍형성배경(禪風形成背景)

인간은 누구나 시절인연과 시기상응의 영향을 받아 인성을 개발하여 발휘하고, 그만의 독특한 개성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휴정의 선풍이 형성되는 과정과 배경을 검토하는 필연성이 요청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시대와 환경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휴정이 살았던 시기와 교단의 배경, 그리고 수행가풍의 영향 관계를 검토하여 휴정의 선교관과 조사선풍이 형성되는 과정을 간략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시기적 배경이다. 불교와 더불어 삼국에 전래한 유교는 불교와 약간의 갈등은 있었으나, 조선 시대처럼 극단적인 예는 없었다. 그래서 조선 시대를 불교적 관점에서 법난(法難)의 시기라고 말한다. 고려말 새로운 국가 건립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급부상한 정주학(程朱學) 또는 성리학(性理學)3)은 우주와 인성의 문제, 인간을 교화하는 도덕정치와 천명(天命)을 실현하는 왕도정치를 표방하는 학문이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역성혁명으로 성공한 왕권이다. 이러한 정주학이 처음 전래했던 사람은 고려 25대 충렬왕(1275-1308) 때의 유신(儒臣) 안향(安珦, 1243-1306)이고, 백이정(白頤正)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수입되었다. 이어 삼은(三隱; 정몽주, 이색, 길재)에 의해서 성리학이 본격화되면서 배불 성향의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불교의식을 배척하고 주자가례를 존숭하여 선양한다. 또 이러한 학풍은 절의파(節義派)와 개혁파(改革派)로 나누어져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주역들이 바로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의 유신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척불(斥佛)의 성향은 비단 국내의 사정만은 아니고, 중국 왕조의 변화와 더불어 학풍의 영향이 가미되었다. 고려말 불교 내부의 무사안일주의와 부패와 타락했지만, 개혁파는 민본주의와 왕도정치, 그리고 대의명분을 제시하면서 대두된 신흥사대부들에게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 1392-1398)는 이들을 등에 업고 조선을 개국하면서 진청(秦請)을 받아들여 제한책을 쓰고 승려도첩제도를 실행하는 등 개인적인 과도한 불사를 엄금하였다. 이어 개국에 공이 많았던 태종(太宗, 1401-1418)은 억불책을 강화하여 사찰의 전답과 노비를 강압하였고, 11종에서 7종으로 모든 종파를 정리함과 동시에 사찰을 242개 사찰만 남기고 나머지는 폐쇄시켜 버렸다. 그리고 왕사와 국사의 제도를 폐지하였고, 능사제도(陵寺制度) 역시 폐지하여 승려의 신분을 하락시켰다.

한편, 태종을 이은 세종(1419-1450)은 더욱 억불책을 강화하여 내불당을 폐지하고, 승려의 도성출입까지 금지하였으며, 연소자의 출가를 제한하는 등 관혼상제를 주자가례로 시행하여 불교적 의례를 제한하였다. 그리고 불교계의 모든 종파를 선(禪)과 교(敎)의 양종(兩宗)으로 다시 통합한다. 말하자면 천태·조계·총남의 18사(寺)를 선종으로, 자은·화엄·시흥·중신의 18사(寺)를 교종으로 정리하는 등 억불책을 강화하여 불교가 위축되어 그야말로 산중불교가 되었다.

그러나 제7대 세조(1456-1468) 때는 조선불교 가운데 흥불(興佛)의 빛이 보인 듯하였다. 하지만 제9대 성종대에서는 세조대의 반동으로 더욱 혹독한 불교억압이 시행되었다. 특히 성종은 도첩제(度牒制)를 완전히 폐지하는 등 백성의 출가를 금지하였고, 도성 안의 尼舍까지 철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성종의 숭유호학(崇儒好學) 정책은 사림(士林)을 양성하여 더욱 불교를 배척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불교에 공양의식을 금지하고 도성 내에 염불소를 폐지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연산군대(1495-1506)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횡포가 극심하였고, 사대사화(四大士禍)가 일어나 당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런가 하면 중종(1506-1544)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흐지부지했던 승과(僧科)를 완전히 폐지해 버렸다. 이처럼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은 그나마 이어 오던 선교(禪敎)의 양종마저 사라지는 실정에 이르러 무종단(無宗團)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명종(1546-1567)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섭정이 시작되면서 순교한 허응당 나암보우(1507?-1565)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불흥(佛興)의 기미가 보여 선교양종의 부활로 승선과 승과가 다시 실행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별세하자, 다시 더욱 가혹하게 불교를 탄압하는 실정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적으로는 사색당파가 일어나 살육이 벌어졌고, 국가는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풍전등화의 실정에 이르고야 말았다. 이러한 시기는 국가의 지도원리로서 주도권을 상실한 불교에 대한 억불과 탄압의 시대와 국가위기의 상황에 서산대사 청허 휴정은 태어나 살아갔던 시기였다.

다음에 교단적 배경이다. 한국불교의 시원은 말할 것도 없이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통일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북종선과 남종선이 전래하여 오교구산(五敎九山)을 성립하였다가 선교가 대립하고 갈등하는 현상을 겪고서 고려말 선종만의 통합이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에 의하여 시도되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태종에 의하여 11종의 종단이 7종으로 통합되고, 세종대에는 7종이 선교양종으로 폐합된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양종마저 유명무실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종의 종단은 사라지고 교학자만이 남게 되었고, 선종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 은둔과 산중불교로 그 법맥(法脈)을 잇는 실정에 이르렀다.

즉, 교단의 통폐합과 승니(僧尼)의 도태, 사원의 혁파, 부역과 병역에 동원하는 등 배불억승(排佛抑僧)의 법난으로 법등(法燈)이 꺼져가는 시기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휴정은 외부적으로는 『삼가귀감』을 저술하여 대처하였고, 내부적으로는 『선가귀감』을 저술하여 대처하였다. 하지만 불교 내부에서는 선교의 대립이 그치지 않았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청허 휴정은 『선교석』을 지어서 불교 내부적으로도 완전한 선교통일을 이루어 불조의 혜명을 계승하려 하였다. 이러한 휴정이 소속되어 있던 조선시대 선종승단의 원류는 당의 홍인문하의 지선계의 정중무상(淨衆無相)과 육조혜능의 남돈선 계통의 마조문하의 제자들에게 유학한 법등을 계승하여 전래한 구산선문의 개창자들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다시 간략히 살펴보면 신라 법랑(法朗)은 제4조 도신(道信, 580-651)에게서 인가(印可)를 받아 왔고, 다시 신행(信行, 704-779)은 신수(神秀)의 문인 지공(志空)에게서 북종선을 인가받아 와서 선법을 펼쳤으나, 신라 말기 헌덕왕 13년(821)에 중국에서 마조도일의 문인인 서당지장의 법을 받아 귀국한 가지산(迦智山)의 체징(體澄, 804-880)은 도의(道義)의 법을 이어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함으로 인해서 시작되었다고4) 전한다. 신라말에 홍척(洪陟)·혜소(慧昭)·현욱(玄昱)·혜철(惠哲)·무염(無染)·도윤(道允)·범일(梵日) 등은 모두 남종선을 배우고 인가를 받아 귀국하고 나서 각자 산문을 열어 종풍을 드날렸기 때문에 고려초기에는 구산선문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 9개의 수선 도량을 중심으로 성립된 분파를 통칭하여 구산선문이라고 일컬었다. 이것이 한국에서 최초 선종 승단의 형태를 갖춘 것이다. 그 성립이 언제쯤인지 명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고려 중기 이후에는 종단의 명칭을 통일하여 조계종으로 통칭하게 되었다.5) 이 조계종은 조선에 들어와서 세종 6년에 모두 종파가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되기까지 계속되었고, 한국의 대표적 종파로서 존속되었지만, 중종조에는 양종조차도 폐지되어, 무종무파(無宗無派)의 산중에 은둔하는 불교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조계종이란 이름은 때때로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선가귀감』의 저자를 「조계노화상퇴은사옹」이라고 기록하였다. 『선가귀감』 발문을 쓴 사명유정 자신을 「조계종유사명종봉유정」이라고 명기하였다.6) 비록 종단은 없어진 지 오래지만, 한국선종승단으로서 조계종의 계통과 명맥은 면면히 존속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연산군과 중종시대의 강제폐지를 거쳐 다행히 명종대에 잠깐 선교양종이 부흥되었을 때, 선종 출신의 휴정은 처음 승과에 합격하여 판교종사가 되었고, 이어서 판선종사를 겸임하였다. 휴정의 이러한 경력은 한 사람의 선사가 어떤 제자에게는 선법을, 어떤 제자에게는 교법을 각각 전수했던7) 것이다.

그런데 일시적으로 부흥되었던 양종의 승단은 폐지되어 다시 산중에 은둔한 불교로 무종단 상태에 빠졌다. 여기에는 물론 선종이라든가 교종이라는 확연한 구별은 없었다. 그 때문에 조계노화상이라는 휴정을 「선교양종청허휴정」이라고8) 일컬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선종도 교종도 없었던 조선의 승단은 대한제국 말기인 순종 2년(1908)에는 원종이라는 종단의 명칭을 자칭하게 되었다. 그 2년 후에는 남부사찰들이 중심이 되어 새롭게 임제종을 세우고 원종과 대립하였다. 그 후 일제총독부의 사찰령에 의해 다시 양종의 이름이 폐지되고, 단지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1941년에는 조계종으로 복귀하였다.9)

그 다음은 수행가풍의 형성 배경이다. 조선시대의 승려는 한결같이 산중사암에서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산승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반사였다. 신라통일기 중엽 이후부터 승려들이 산중에 들어가는 경향이 증가하였지만, 특히 당대부터 선법을 전수한 선승들에 의해서 산중사암의 수가 계속 늘어가면서 산승의 수도 또한 상당히 많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선법이 성행했던 신라말부터 고려일대를 통해 다년간에 걸쳐서 지속되었다.

그러나 조선대에 들어와서 소위 산사의 양상이 변화되고, 선승만 산사에 상주한 것이 아니라 종래 성안이나 민간지역의 사원에 주거하였던 교학승들까지도 산중에 은거하게 되었다. 이것은 배불억승책에 따라 지금까지 겨우 명맥을 유지했던 선교양종조차 소멸되었고, 승려는 도성출입까지 금지하게 되었다. 즉 조선시대의 승려는 산중에만 거주하는, 즉 문자 그대로 산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려는 본래부터 산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누구라도 승려는 산승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승려가 산승이기 때문에 교종의 법맥은 쇠잔해졌다. 반면에 선종 계통의 산승은 종통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승이란 대명사는 선승에 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선종 중심이 되었던 산승의 종풍은 종래의 선문전통의 가풍 그대로는 아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후 세종 6년에는 천태·총남·조계의 3종이 국가의 명령에 따라서 병합되고, 복합적 불교로 변형된 조계 또는 산승 계통의 선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계 계통의 선이 휴정에게 전승되었다. 휴정은 그 법을 부용영관(1485-1571)으로부터 계승하고, 영관은 벽송지엄(1464-1534)의 법을 계승하였다. 그 이전의 법계는 주로 임제 18전의 석옥청공(1272-1352)으로부터 고려국사 태고보우(1301-1382)와 백운경한(1298-1374)에게 전수되었다. 그 이후 환암혼수(1320-1392) → 구곡각운 → 벽계정심에게 전수되어 벽송지엄(1464-1534)에게 이르렀다.10) 그런데 이러한 법맥의 계승에 관한 문제는 이설이 있다. 즉, 허단보(許端甫, 1569-1618)의 설이다. 여기에서는 휴정이 보조지눌의 법맥과 영명연수의 법안종의 법맥을 이었고, 심지어는 지공과 평산처림의 법을 이은 나옹혜근(1320-1376)의 법맥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을 중관해안(中觀海眼, 1567-?)은 일축하고, 능인(能仁)의 63대이며, 임제의 25세 직손이라고 단정하였다.11) 이러한 관점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학통과 그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재고할 여지가 있다.12) 왜냐면 중국의 전등설 역시 당대와 송대를 거쳐 전등서가 나오면서 여러 설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휴정이 수행가풍을 형성하는 배경에는 멀리 조계혜능(638-713)과 정중무상(684-762), 마조도일(709-788)을 비롯한 구산선문, 규봉종밀과 영명연수, 보조지눌과 나옹혜근로부터 가까이는 법조인 벽송지엄과 법부인 부용영관(1534-1571)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법조인 지엄은 28세에 출가하여 연희(延熙)선사를 찾아가 원돈교의를 학문(學問)하고, 다음에 정심선사를 찾아가서 선지를 지도받았다. 그리고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를 의착(疑着)하여 칠통(漆桶)을 타파하고, 고봉어록(高峰語錄)을 보다가 앞의 알음알이를 단박에 탈락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대혜와 고봉의 종풍을 드날려 후학을 지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사들의 수행가풍을 전승한 휴정은 종단이 부재한 산중의 승려로 경교의 대의를 선양하여 선지의 진면목을 발휘하였다. 그는 처음에 지리산에서 놀러 갔다가 숭인장로(崇仁長老)의 지도로 심공급제(心空及第)하기 위해서 화엄·원각·능엄·법화·유마·반야 등의 경론을 학습하고, 이어서 수선(修禪)으로 전환하여 선수행을 실천하여 실증하였다. 선풍의 맹렬한 구도심에 자극을 받은 승가에는 선주교종(禪主敎從)하는 학도와 수선자가 대다수 배출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화엄과 유식을 비롯한 경교에 밝았지만, 뒤에는 교학을 버리고 수선 쪽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사교입선의 경향을 계승하였다.

이러한 승풍은 이미 보조로부터 전해진 삼문수학의 체계를 계승한 것이다. 삼문수학(三門修學)이란 경절문(徑截門)·원돈문(圓頓門)·염불문(念佛門)을 말한다.13) 이것은 선(禪)과 경교(經敎)와 염불정토(念佛淨土)의 3종으로 분류된 것이 아니라, 조계 계통의 법맥을 이은 산승일가(山僧一家) 가운데 겸수하는 수행풍토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진언(眞言; 誦呪)까지 겸수하는 수행자도 있었다. 휴정 이후 산사에는 거의 강당·선원·염불당이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당시 산승들이 삼문겸수를 수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14) 이러한 수행가풍은 중국의 종밀과 고려의 보조지눌과 원묘요세(圓妙了世)로부터 유래하여 면면히 이어진 수행가풍이다.

이상의 형성배경에서 휴정은 산승들을 계도하는 저서로 우선 『선가귀감』을 찬술하여 올바른 승풍을 진작시키려 하였고, 이런 가운데 선교의 논쟁이 벌어지자 다시 『선교석』을 통하여 전통적인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을 인용한 선과 교를 판석하여 이를 회통하려고 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계속되자 『심법요초』를 저술하여 선과 교를 회통시키고, 선과 정토를 일치시켜 회통하는 학문과 수행풍토를 확립하였다. 나아가 제자 유정을 위하여 종장의 지침서로 『선교결』을 지어 후학을 경계시키려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시대와 사회적 배경과 승단의 수행풍토로부터 형성된 휴정의 조사선풍 가운데 하나인 간화활구(看話活句)의 경절적(徑截的) 선풍을 검토하기 전에 선교회통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왜냐면 휴정은 조사선의 5종 가풍을 모두 수용하는 태도와 앞에서 언급한 사교입선과 선주교종, 선(禪)의 돈오(頓悟)와 교(敎)의 점수(漸修)도 함께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2. 휴정의 선교회통(禪敎會通)

불교의 모든 교상(敎相)에는 이론과 실천을 담보한다. 이에 대해 휴정은 그의 저술들에 녹아 있는 핵심적인 내용에서 옛적 조사들의 말씀을 빌려서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단언하였다. 덧붙여 말하길, ‘교는 일생에 걸쳐서 아난에게 전하였고, 선은 세 곳에서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섭에게 전[이심전심(以心傳心)]하였다.’라고15) 명시하였다. 이것이 선과 교의 갈래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인도로부터 전해진 중국과 한국의 역사적 현장에서 번역과 연구 기간을 거쳐서 이론과 더불어 실천하여 실증하는 과정에 혼재하였다. 여기서 선과 교는 애초에 불가불리의 관계 속에 어느 것을 특정하여 경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과 한국에서 불교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 최종의 목적을 달성하는 정점을 상정한 결과를 가늠하자면 아마도 실증의 선이 본각을 드러낼 최적이기 때문에 시각의 이치에서 선심교천(禪深敎淺)한 사교입선이기에 선주교종하는 현상에서 돈오점수(頓悟漸修)여야 한다는 정합성을 제시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교학은 안내서의 역할로 그 공능을 다하고, 선수(禪修)는 최종목적에 부합하는 실증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실천실증(實踐實證)하는 과정에서도 단박에 깨쳤을지라도[頓悟]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익혀진 습기를 단박에 단절할 수 없어 점차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漸修]이 필요적절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점수의 내용에도 여러 가지 근기에 따른 내용들, 말하자면 깨닫는 과정과 깨달음의 내용을 이해하는 간경(看經), 윤회를 벗어나는 첩경인 염불, 불·보살님의 위신력을 빌려서 숙세의 마장을 퇴치하는 주력, 스스로 실증한 도과(道果)를 체현하는 선정수행은 각기 근기에 걸맞은 선택이다. 그러나 소론에서 이러한 주제를 모두 논의할 수는 없고, 본 발표에서 부여된 휴정의 선풍에 국한하여 검토해 보기로 한다.

휴정은 먼저 『선가귀감』에서 선교의 원리와 갈래, 선을 신해(信解)하고 수증(修證)하는 내용을 간결하면서 풍부한 이론을 명시하여 제종의 종지와 종풍을 드러내면서 선교회통(禪敎會通)을 드러내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간결하게 「선교결」을 가지고 선교의 같고 다름을 제시해 주었고, 교가들에게는 선과 교의 대론을 통해서 갈등을 해소하여 그 내용을 『선교석』으로 종결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차례로 검토하면 먼저 「선교결」에서 선교의 갈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

요즘의 선학자(禪學者)는 ‘이것은 우리 스승의 법이다.’라 말하고, 교학자(敎學者)도 ‘이것은 우리 스승의 법이다.’라고 말한다. 하나의 법에 대해 같은 것은 같다고 하고 다른 것은 다르다고 해야 하는데, 손가락과 말을 가지고서 서로 쟁론하고 있다. 아! 그 누가 이 쟁론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16)

라고 당시 선학자와 교학자의 첨예한 대립의 양상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선가귀감』의 근원적 존재자를 체득하는 원리에 대해서,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일찍이 소멸하지도 않았으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형언하여 그릴 수도 없다.17)

라는 내용은 불교의 근본문제이며, 모든 수행자의 화두에 대해서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제시한 것을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의 서설에 제기한 것과 흡사한 부분이다. 그리고 주석에서, 여기서 “한 물건이란 어떤 물건인가? ○ 옛 어른이 이렇게 읊었다. 옛 부처님 나기 전에 의젓한 동그라미 석가도 모른다고 하였는데, 어찌 가섭이 전했으랴.”18)하면서 혜능과 그의 문하들의 견해19)와 황벽의 ‘무착일물(不着一物)’20), 지눌(知訥)의 ‘일물장령(一物長靈)’21), 함허기화(涵虛已和)의 견해22) 등을 인용하여 고증하였다.

휴정은 이것을 우주의 근본이고 원리인 ‘한 물건’ 즉 본분사(本分事)를 들어 그 무한한 생명력과 미묘한 자유자재함을 설명한다. 여기서 보여주는 설명의 이미지는 마치 『유마경(維摩經)』의 유마거사가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서 여러 부처님의 제자와 보살들이 보여주었던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즉,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는 지혜나 어떠한 사량 분별의 알음알이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불교의 제일 명제이며, 만인의 전칭명제다. 불교의 모든 수행의 방편은 결국 이 ‘한 문건’의 체득이다. 그래서 휴정은 진리의 세계는 모두 하나로 통일된다고 삼교일원(三敎一元)을 드러내는 게송을 읊는다.

삼교(三敎)의 성인이 이 글귀에서 나왔네. 그 누가 이 도리를 말할 것인가, 눈썹이 빠질라.23)

위의 간략한 게송은 휴정의 근본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구절이다. 그는 『삼가귀감』을 저술하여 유불도(儒佛道) 삼교를 일심으로 회통하였다. 이것은 억불숭유(抑佛崇儒)라는 정책의 핍박 아래 기화(己和)로부터 이어진 불교에서 해소해야 할 최대 과제였다. 이러한 의식의 바탕에서 휴정은 불교 내부에서도 대립적인 면을 지양하고 융화시키고 회통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그래서 그는 『심법요초』에서,

이 일은 하늘과 땅도 덮을 수 없고 그 본체는 산천도 숨길 수 없다. 그 빛은 안으로 엿보아도 쌓임이 없고 밖으로도 넘침이 없다. 8만의 대장경도 다 거두어 들이지 못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도 말하지 못한다. 어떠한 넓은 도량도 능히 알지 못하고, 어떠한 문장과 구절의 법도 알 수 없다. 그것을 말하자면 곧 어그러지고 그것을 생각하면 곧 어긋나는데 하물며 말하고 붓으로 그리겠는가?”24)

라고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의 경지인 실상무상(實相無相)인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한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종지(宗旨)를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또, 이것은 고려 지눌이 『절요(節要)』의 서문에서 언급한 첫 구절과도25) 상통한다. 그런데 휴정은 모순되게도 수많은 언설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선가귀감』의 「불조론(佛祖論)」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부처와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이 마치 바람 없는데 물결을 일으킴이다. 그러나 법(法)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온갖 기질이 있으니, 여러 가지 방편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 억지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였으나, 이름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모두 그대로 옳은 것이니, 일념(一念)을 일으키면 곧 어긋난다.26)

라고 의문을 해소하였다. 여기서 휴정은 먼저 『치문(緇門)』27) 등의 문장을 인용해서 불조무공론(佛祖無功論)을 논하고, 다음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28)와 『임제록(臨濟錄)』29)의 장구를 인용하여 불조유공론(佛祖有功論)을 전개한다. 그리고 또 『대혜어록(大慧語錄)』30)과 『전심법요(傳心法要)』31)를 인용해서 부처님과 조사의 사체각별론(事体各別論)을 논하였다. 이어서 주석에 이처럼 불조(佛祖)는 세존과 가섭이요, 세상에 출현한 것은 대비가 근본이라고 명시한다. 그러나 일문(一物)으로서 보면 사람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뚜렷이 이루어졌지만, 남이 해주기를 기대하지 않고 세상에 나와 파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허공장경(虛空藏經)』을 인용하여 문자(文字)·명상(名相)·불어(佛語)까지도 모두 마업(魔業)이라 인용하여 불조(佛祖)의 본분은 무공능(無功能)이라고 입증한다.32) 그리고 불조(佛祖)의 유공능(有功能)을 설명하면서 법(法)이란 한 물건이고 사람이란 중생인데, 法에는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이 있고, 사람에게는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기질이 다르므로 문자나 언어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중생의 본래 성품은 뚜렷이 이루어져 있지만, 무명(無明)에 가리어 생사윤회를 계속하기 때문에 불조께서 가엾게 여기어 자비로 다양한 방편문을 시설하였다는 공능을 설명하였다. 말하자면 불조께서 출현한 본의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본래 진리는 문자로서 설명할 수 없지만, 사람의 기질이 다르므로 억지로 이름을 붙여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의를 잃을 것을 염려하여 게송을 읊고서 선(禪)과 교(敎)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휴정은 『선가귀감』의 「선교문(禪敎門)」에 대해서,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일생에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이 모두 교의 자취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하신 선지가 된다.33)

라고 명쾌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 여기서는 『치문경훈』34)과 『선원제전집도서』35)의 전거를 인용하여 선교를 정의함과 동시에 대의를 밝히면서 교와 격외선지(格外禪旨)의 의미까지 언급하여 선교(禪敎)의 심천(深淺)을 논하여 드러내고 있다. 즉, 주석에서36) 선(禪)은 삼처전심(三處傳心)한 가섭이라 말하고, 교(敎)는 일대에 설한 인천교(人天敎)·소승교(小乘敎)·대승교(大乘敎)·돈교(頓敎)·원교(圓敎)가 아난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선교의 근원은 세존이라 명백히 밝히고, 또 말 없는 곳에서 말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은 선(禪)이고, 말 있는 곳에서 말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을 교(敎)라고 덧붙여 설명한다. 그러고 나서 마음은 선법이고 말은 교법인데, 법(法)은 비록 일미(一味)이지만 견해가 천지현격으로 달라서 이렇게 선교의 두 갈래를 판석한다는 이유를 명시하였다. 또 『선교결』37)에서도 약간의 글자만 바꾸어 『선가귀감』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심법요초』에서 정의하길,

선(禪)과 교(敎)는 일념(一念) 가운데서 일어났으나 심의식(心意識)이 미치는 곳은 곧 사량에 속하는 것으로 교(敎)라 하고, 심의식(心意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곧 참구(參究)에 속하는 것으로 선(禪)이라 한다.38)

라고 정의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심의식이 미치는 것은 사량분별이기 때문에 교이고, 심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참구에 속하기 때문에 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량(思量)과 비사량(非思量)에 따라서 교와 선으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휴정은 유식의 심적 작용을 인용하여 인간의 심리학적 분별의식을 일소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심법요초』를 보면 처음에 마음의 대용(大用)을 밝히고, 삼승학인(三乘學人)의 병을 지적하면서 공부의 단계와 사구(死句)와 활구(活句)를 정의하여 참선공부를 권장하고 선과 교에 대해 설명하길,

조사가 보인 것은 모두가 이 일구(一句) 가운데 8만4천의 법문이 원래 저절로 구족하다. 그러므로 수연불변(隨緣不變)한 성상체용(性相體用)을 돈오점수(頓悟漸修)함으로써 전수전간(全收全揀)한 원융한 행위가 펴지되 자재무애하여 원래 한때여서 전후가 없는 것이 선(禪)이다. 제불께서 열어 보임을 돈오(頓悟)하고 점수(漸修)하여 반연을 따라도 변화하지 않는 그 성상체용을 온전히 거두어들이고 온전히 가려서 원융하게 행이 펴지되 일마다 걸림 없는 법문이 비록 갖추어졌으나 수증·계급·차례·선후가 있는 것이 교(敎)다.39)

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즉, 선과 교는 모두 본성과 현상, 본체와 작용이 화하지 않음과 반연을 따름이 원융무애하지만, 선은 전후와 차례가 없고, 교는 수증과 차례와 전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과연 휴정의 견해가 올바른 견해인지 비판적 태도가 요청된다. 휴정은 돈오(頓悟)를 선(禪)으로 보고, 점수(漸修)를 교(敎)로 보아 선은 단박에 깨닫는 것만을 인정하고, 교는 경론에 설해진 내용으로 수증과 수행계위나 그 차례를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수증(修證)을 교(敎)에 포함한다면 선(禪)은 교(敎)의 체득의 과정에 속하여 선(禪)도 역시 수증(修證)의 계위나 단계가 있게 되지 않을까? 따라서 교(敎)의 수증(修證)하는 점차에 선(禪)의 터득이 결부되어야만 진정으로 원융무애한 선교회통(禪敎會通)에 부합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휴정의 견해에 관해서 『선교결』과 『선가귀감』의 설명을 들어서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했던 ‘자무언지어무언(自無言至於無言)’이라는 것이 선(禪)인데, 이 무언(無言)이란 언어를 떠난 마음을 가리킴이므로 마음이 곧 선법(禪法)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구라도 입으로 잘못 말하게 되면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의 미소가 모두 교(敎)의 자취가 된다고 하였다. 또, ‘자유언지어무언(自有言至於無言)’이라는 것이 교(敎)인데, 만약 마음에서 얻게 되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나 새의 지저귐까지도 모두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격외선지(格外禪旨)가 되며, 그러므로 법(法)은 알음알이가 끊어진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법(法)은 모양이 없기에 심행처멸(心行處滅)이다. 만약 어떤 것을 말해 보려고 마음을 일으키면 본래 청정한 근본 심왕(心王)을 잃게 되고, 심왕을 잃게 되면 부처님이 꽃을 드신 것이나 가섭이 웃는 것이 모두 묵은 소리에 떨어져서 마침내 죽은 물건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敎)와 선(禪)은 모두 언어도단이요, 심행처멸한 수일불이(守一不移)의 수본진심(守本眞心)의 체득을 구경으로 삼아 일치한다는 견해다.

이상에서 휴정은 선심교천(禪深敎淺)이기 때문에 사교입선(捨敎入禪)하여 선주교종(禪主敎從)해야할 이치와 수증을 정립하였다. 그러면서 휴정은 주선융교(主禪融敎)하고 회교귀선(會敎歸禪)하는 당위성은 바로 교(敎)를 배제하지 않고 반듯이 교(敎)를 터득한 다음에 선(禪)에 귀결하는 회통의 원리를 원융무애하게 적용하였다. 그렇다면 휴정은 교를 통해서 수증의 원리를 인식하고서 수증할 바탕을 마련한 다음에 실증을 통해서 궁극에 도달할 목적의 실현이라고 이해된다. 이것이 아마도 교의 분별의식을 방하착(放下著)하고 자기중심적 자아의식의 경험을 방아착(放我着)함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선교회통과 함께 휴정의 선풍이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해서 휴정이 조사선풍과 종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3. 휴정의 조사선풍(祖師禪風)

삼국에 불교가 전래한 이래 나말여초에 이르러 조사선40)이 전래하면서 오교구산이 성립되었다. 이는 세존의 심인(心印)과 경전을 달마대사가 그 진수를 중국에 전래한 이래 혜능에 이르러 선종의 종전인 『육조단경』이 형성되면서 宗旨가 확립되고 종통(宗統)이 정립되었다. 그 가운데 구산선문은 희양산계(曦陽山系)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남종선인 조계혜능계의 사법제자들로 혜능선을 지향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래서 주지하듯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종의 종명을 여러 과정을 거쳐서 조계종이라 명명하였고, 종지도 이를 계승하였다.

고려 중엽 보조지눌(1158-1210)이 송광산 길상사를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수행도량으로 설정하면서 조계산 수선사로 개칭하였다. 이는 혜능의 선지(禪旨)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종명(宗名)도 이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구산선문을 통칭하는 것이라고도41) 전한다. 그래서 수선자는 누구나 조계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휴정도 자신의 별호를 조계라고 칭하였다. 이것은 휴정 자신이 선사임을 자처한 것이며, 학풍과 기존의 선풍을 계승하고 있음을 시사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면 휴정의 선풍을 고찰하기 위해 한국불교 조계종의 종지(宗旨)를 먼저 간략히 검토하기로 한다.

한국선가의 종지에 대해 먼저 김영수(1884-1967)는 소론에서42) 달마의 선종에서 종지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조계혜능 문하의 마조와 석두에 의해서 주창된 ‘즉심즉불(卽心卽佛)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가 도불용수(道不用修)의 단막오염(但莫汚染)의 무염수(無染修)한 대기대용(大機大用)의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약칭하여 논하였다. 이러한 종지는 나말려초에 선(禪)이 전래하면서 오교구산이 대립하다가 고려 중엽에 이르러 선가도 불교요 교가도 불교라는 전제 아래 선학자나 교학자가 각기 자기의 단점을 버리고 상대의 장점을 취해 융화시키면서 보조지눌의 중흥조에 의해서 돈오점수(頓悟漸修)한 조계선종의 종지가 완성되었다고 논하였다.

다음에 권상로(1879-1965)는 소론에서,43) “선종의 종지는 불립문자(不立文字)하고 직지인심(直指人心)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로 철칙을 삼는다.”라고 언급하고서, “역대조사가 언외의 양구(良久)·방(棒)·할(喝)·거불자(擧拂子)·양미순목(揚眉瞬目) 등 공용이 없는 활용을 언설이 없는 중에도 언설의 의미가 있다.”라고 논하고서, 육조혜능의 『법보단경』에 있는 “무념(無念)으로 종지를 삼고, 무상(無相)으로 본체를 삼으며,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는다.”라고 언급하고,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 언급된 “정중무상(淨衆無相)의 무억(無憶)·무념(無念)·막망(莫忘; 莫妄)의 삼학일원(三學一元)”과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주창한 “무념(無念)·무수(無修)의 이성(理性)을 신해수증(信解修證)함”과 보조(普照)의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에서 거론한 “비록 만행을 갖추었으나, 유심(唯心)으로 위종(爲宗)하고 무작(無作)으로 위본(爲本)한다. 그러므로 무념(無念)·무작(無作)이기 때문에 시겁(劫時)·지위(地位)·점차(漸次)의 행이 없으며, 또한 법(法)·의(義)·차별(差別)의 상(相)이 없다.”라고 논하였다. 그리고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에 “직하무심(直下無心)이 가장 성요(省要)가 됨이니, 안으로 만약 무심(無心)하면 밖으로 곧 일이 없으니, 일이 없는 일 이것을 대사(大事)라 이름함이요, 무심(無心)의 마음 이것이 직심(直心)이라 이름한다.” 등의 마음에 요체가 되는 언구를 실증으로 들었다. 이는 보조지눌의 삼문(三門)44)을 준칙으로 삼은 것이라고 하여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의 정혜쌍수(定慧雙修)와 화엄의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조사선의 경절득입문(徑截得入門)을 적시하였다.

또, 이종익은 「조계종중흥론(曹溪宗中興論)」에서 한국불교 조계종은 인도의 부파나 중국의 종파와는 달리 “선과 교를 일원(一元)으로 하는 회통불교로써 원효의 통불교 이념과 부처님의 선과 교를 원융하게 섭수함에 이어서 주선융교(主禪融敎)·회교귀선(會敎歸禪)의 조계종으로 구현하는 것”45)이라고 논하였다. 그다음 가산지관(1932-2012)도 『조계종사(曹溪宗史)』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선지(禪旨)에 의하여 사람마다 원만하게 구족한 자기의 자성을 단박에 깨달은 후에 십신(十信)의 계위로부터 삼현(三賢)과 십지(十地)의 계위차례에 의하여 본래 저절로 갖추어 충족한 한량 없는 32상80종호의 공덕의 부처님의 법체를 증득하게 된다.”라고 논하고서, 이것을 “돈오점수(頓悟漸修)한 조계의 종지를 보조가 중흥함으로써 구산선문의 이 산문 저 산문할 것이 없이 모두 계승하여 조계의 종지를 이룩하게 되었다.”라고46) 논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수선사(修禪寺)를 중심으로 지눌이 제시한 간화선을 최상의 방편으로 삼아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은 간화일문(看話一門)의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저술하여 참선수행자의 관문을 설정하여 16국사가 배출되었다. 그런가 하면 국조 보각일연(普覺一然, 1206-1289)은 원사목우(遠師牧牛)하였고, 보조의 사상은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종조(宗祖)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어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과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5)나 환암혼수(幻庵混修) 등에 면면히 이어졌다.47) 이후 벽송지엄(碧松智嚴, 1464-1524)도 초학자의 지도에 『도서(都序)』와 『절요(節要)』로 올바른 지견(知見)을 세우게 한 다음,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와 『대혜서장(大慧書狀)』으로 알음알이의 병통을 제거하고 활로를 지시해 주었다. 이러한 지눌의 영향은 조선 중기에까지 이어졌으며, 마침내 청허 휴정에 이르러 비록 외압적 영향은 있었지만, 완전한 한국불교 단일종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휴정의 학문풍토나 선풍은 정중무상과 대각의천, 보조지눌,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으로 전해진 학문풍토와 선풍의 계승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를 일반적으로 회통불교라고 말한다. 이는 신라의 원효성사(617-686)가 주도한 제교학적 화쟁사상과 고려의 대각의천(1055-1101)이 시도했던 천태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주교융선(主敎融禪)과 보조지눌(1158-1210)이 주도한 주선융교(主禪融敎)의 관점에서 선교융합의 수행체계를 확립하고 계승하여 발전하였다. 그리고 태고보우(1301-1382)는 원융부를 설치하여 구산선문을 통합하려 시도하였다. 이러한 수행체계는 조선중기 청허 휴정에 이르러 마침내 선교양종의 완전한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48) 그래서 휴정은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선교양종의 종통(宗統)과 종맥(宗脉), 그리고 학풍과 종지인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을 모두 섭렵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휴정은 태고보우와 백운경한, 나옹혜근이 전승한 임제정맥의 법통까지 전승한 명실상부한 대종사이며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한 국조이기도 하다. 나아가 휴정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선(禪)과 정(淨)을 일치하는 수행체계를 정립하였다.

특히 휴정은 여러 저술에서 지눌의 학풍을 활용하였으며, 이른바 지눌에 의해서 확립된 삼문(三門)이라는 수행체계를 원동문(圓頓門)·경절문(徑截門)·염불문(念佛門)으로 다시 조직하였다. 이러한 휴정의 새로운 수행체계는 구산선문으로부터 지눌에 이르러 선학의 체계를 갖추고, 태고와 나옹에 와서 염불선(念佛禪)이 가미되어 지눌과 혜심이 개설한 경절활구문(徑截活句門)을 그대로 지키면서 원돈문(圓頓門)은 사구(死句)로 규정하여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과는 그 의미를 달리한다. 그러나 시류에 걸맞은 염불문(念佛門)을 강조하여,

참선은 곧 염불이요, 염불이 곧 참선이다. 근본 성품은 방편을 떠나 밝고 밝으며 고요하고 고요하구나.49)

라고 유심정토(唯心淨土) 자성미타적(自性彌陀的) 법리(法理)를 적용하여 모든 수행체계를 회통시켰다. 이는 지눌이 적용한 하근기만의 염불수행을 중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휴정은 대립적으로 보이는 자력의 성도문(聖道門)과 타력의 정토문(淨土門)을 완전히 조화시켜 중도적 실천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휴정의 법맥과 종맥 또는 종지종풍은 중국의 임제선풍을 이어받았지만, 구산선문과 지눌에 의해서 확립된 고대 한국의 조사선풍을 규합한 것이며, 휴정 특유의 선풍이다. 즉, 지눌과 태고는 선에 치우쳤지만, 휴정은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는 불교 본래의 회통불교의 특성을 발휘한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타카하시 토오루(高橋亨, 1878-1967)의 저술을 참조하면 “휴정 이후의 한국불교를 서산종(西山宗)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서산대사의 조선불교에서 위치는 공전절후하여 조선불교는 스님으로서 분명히 일시의 시기를 구분한 것이다. 즉 스님은 조선불교계에 제일의 영걸로서 교리에 관해서는 종래의 무수한 교파로 구분된 교계를 그 교관으로서 통일하고, 스님 이후의 조선불교는 말하자면 서산종이라 말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필경 스님의 학덕과 공업의 발군이며, 자연 교계의 귀향을 넓혀서 의지한 것으로서 스님 이후의 조선의 승려는 과반이 스님의 법맥을 계승하고 전국의 단림을 점령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스님이 교계를 통일했다는 것은 스님 이전까지 보우당년의 인습으로 말미암아서 의연한 형국에서도 교선양종이 대립하고 교종에 나아가면 선종을 비난하고 선종에 들어가면 교종을 가볍게 여긴다. 선교양종이라고 해도 세밀히 보면 사파이다. 좌선·다라니·염불·간경이다. 국초에 칠종의 대립이 세종조에 이르러서 양종으로 축소되었다고 해도 오히려 사종문수행의 별립함이 있고, 각각의 전문수행자가 존재한다.”50)라고 논하였다.

이상의 내용에서 휴정의 선풍을 종범의 논문을 참조하여 요약하면51) 그의 저술 전반에 걸쳐 곳곳에 언급되는 조사선과 조사관문이다. 그런데 조사선은 본래 성불의 관점에서 그야말로 대기대용(大機大用)으로 오가선풍(五家禪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면 후학들이 명시하였듯이 임제선풍이다. 그러나 단순한 임제선풍이 아니라 조사선 일체의 오가칠종의 조사선풍을 아우름과 고대 한국의 조사선까지 수렴하는 선풍이다. 그 이유는 그가 저술에 인용한 문헌들이 모두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참선문(參禪門)’과 ‘염불문(念佛門)’은 그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관(禪觀)과 선염일치(禪念一致)의 염불선(念佛禪)이 잘 드러나 있다. 덧붙여 『선가귀감』을 비롯하여 『청허집』의 『선교석』과 「선교결」, 『심법요초』에는 원돈문(圓頓門)의 제교행상(諸敎行相)을 갈무리한 경절문(徑截門)의 조사선풍(祖師禪風), 염불문(念佛門)의 선염일치의 염불선을 융화시켜52) 정법안장의 열반묘심을 이심전심하는 교외별전의 조사선풍으로 귀결시켜 새로운 삼문수업과 조사선풍을 정립하여53) 후대에 영향을 끼쳐서 면면히 이어졌다. 특히 휴정은 『선가귀감』에서,

본분종사(本分宗師)는 온전히 이 法句를 들어 보이기를, 마치 장승이 노래하고 불붙는 화로에 눈 떨어지듯 하며, 또한 번갯불이 번쩍이듯 하니, 배우는 자가 참으로 어떻다고 헤아리거나 더듬을 수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그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씀하기를 ‘스님의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스님이 나에게 설파하여 주지 않은 것을 귀중하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대저 배우는 사람은 먼저 종파의 갈래부터 자세히 가리어 알아야 할 것이다. 옛날에 마조가 한 번 ‘할’ 하자, 백장은 귀가 먹고, 황벽은 혀가 빠졌다. 이 한 ‘할’이야말로 곧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소식이며, 또한 달마대사의 처음 오신 면목이다. 아! 이것이 임제종의 근원이다.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이 다 무생(無生)의 도리를 철저히 증득하여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꿰뚫어서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이 자유자재하고 방소(方所)가 없어 전신으로 출몰하며 전신으로 짊어지되, 물러나 문수와 보현의 대인 경계를 지킨다고 하더라도, 실상대로 말한다면 두 보살도 또한 도깨비가 됨을 면치 못한다.54)

라고 휴정의 격외선지선풍(格外禪旨禪風)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선가귀감』의 「실증묘득(實證妙得)」의 글 가운데 일부이다. 문두에 본분종사의 허망을 지적하고 이어 실증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그리고 학자의 병폐를 들면서 심문분화상(心門賁和尙)의 설55)을 인용하여 종사의 병폐를 지적하였다. 이어서 동산양개(洞山良价)와 향엄지한(香嚴智閑) 양사(兩師)의 고사56)를 인용하여 본분종사의 진면목을 들었고, ‘선사(先師)의 도덕을 중히 여기지 않고 단지 선사(先師)가 우리를 위해 설파하지 않은 것을 중시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전등록(傳燈錄)』57)에 있는 마조일할(馬祖一喝)에 백장(百丈)이 귀먹고 황벽(黃檗)이 혀를 토하였다는 큰 기틀과 큰 작용을 인용하면서 수도인(修道人)은 우선 종(宗)의 갈래를 자세히 알아야 함을 전제로 하여 임제종·조동종·운문종·위앙종·법안종의 5종을 들어 밝히고, 다음에 5종의 종풍을 드러낸 후 특별히 종지를 들어 임제의 사할(四喝)과 덕산의 팔방(八棒)은 모두 무생(無生)을 철저하게 증득하고 머리에서 밑바닥까지 대기대용(大機大用)이 자재하고 방소가 없어 전신으로 출몰하고 전신으로 짊어지되 물러나 문수와 보현의 두 경계를 지킨다고 하더라도 진실에 따라 논한다면 이 두 보살도 또한 마음을 훔치는 도깨비가 됨을 면하지 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휴정은 선에 있어서 여러 조사와 제종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처럼 그는 철저한 선수행자였다. 그리고 그의 수행가풍은 그 어느 것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간화경절의 계승자임을 보인다. 또한 『선교석』의 내용에 철저하게 선 중심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위 예문의 내용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며, 후학이 휴정을 임제종으로 규정지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선가귀감』이나 『심법요초』를 총괄해서 살펴보면, 학풍이나 수행가풍에 있어서 허단보(許端甫)의 지적에 대해서58) 유의할 점이 있다. 왜냐면 휴정의 수행가풍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선주교종(禪主敎從),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또한 실천수행적인 측면에서 사람의 역량에 따라 다양한 방편이 존재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선만을 주장하는 일지반해(一知半解)의 오류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하여튼 휴정은 『선가귀감』에서,

대장부는 부처나 조사 보기를 마치 원수처럼 대해야 한다. 만약 부처에게 매달려 구하면 부처에게 얽매인 것이고, 만약 조사에게 매달려 구하면 조사에게 얽매이는 것이 된다. 무엇이든 구하는 것이 있다면 다 고통이 되므로, 일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신령한 빛이 어둡지 않아 만고에 훤하구나.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59)

라고 하여 출격장부의 기상을 나타내어 총결하고 있다. 즉 대장부는 부처를 보고 조사를 보기를 원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임제록의 살불살조(殺佛殺祖)와 유사한 내용을 피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벗어날 대장부의 진정한 귀결은 초출하여 무상(無相)·무주(無住)·무착(無着)·무념(無念)·무상(無想)·무심(無心)이라는 것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본분상의 원리 즉 ‘일물(一物)’의 신광(神光)이 항상 어둡지 않고 만고에 변하지 않아 빛나는 대도(大道)임을 들고 있다. 이러한 예로 보면 휴정은 철저한 선자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타의 수행방편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문은 최상근자의 수행이고, 교문은 선에 들어가는 입문임을 거듭거듭 밝혔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유독 정토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긍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선과 교의 국집을 벗어난 본래의 불교로 회귀를 보여주는 실증이라 짐작된다.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정법안장을 전하고 아난에게 교를 전한 것은 방편과 역량의 문제이지 실제적인 입장에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자비의 실현인 것이다. 휴정은 선교회통에서 고찰해 보았듯이 그의 사상과 수행의 정체성을 부처에 두고 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교의의 발전에 따라 그 수행방편이 다양해졌다. 이러한 모든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체득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따라서 휴정 역시 본래의 불교인 깨달음을 체득하라는 목적이지 지엽적인 방편에 얽매여 참뜻을 잃지 말라는 의도로 보인다.

이처럼 휴정은 실제 궁극의 경지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선종의 역사에 있었던 여러 종파에 대해, 그 가르침의 계승과 종파의 특징을 간략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의탁하고 있는 당시 조선불교에 가장 널리 실천되고 있던 가르침인 임제종의 교의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 모든 궁극의 경지를 가장 잘 열어 보인다는 선종 종파들, 특히 임제종까지도 궁극의 경지로 나가게 하는 도구임을 누누이 강조하며 『선가귀감』를 마친다. 그러면 휴정의 이러한 선풍의 계승에 대해서 휴정의 문하 4대 종장을 간략히 검토해 보기로 한다.

4. 휴정의 선풍계승(禪風繼承)

이상에서 검토한 휴정이 계승한 선풍은 단순한 조사선풍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의 모든 조사의 선풍을 갈무리한 것이다. 중국의 조사선풍에 대한 자료는 『사가어록(四家語錄)』과 『임제록(臨濟錄)』을 비롯하여 『전등록(傳燈錄)』과 『인천안목(人天眼目)』, 『오가종지찬요(五家宗旨纂要)』와 『종문현감도(宗門玄鑑圖)』 등을 활용하였다. 또 고대 한국의 자료는 원효성사로부터 비롯된 회통불교의 성격을 대동하면서 실천적인 측면에서 임제선풍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남긴 저술들은 고려와 조선을 매개하는 저술들이다. 말하자면 고려조에서 저술된 선의 자료 중 지눌의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진심직설(眞心直說)』, 혜심이 찬술한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과 혜심의 제자 각운(覺雲)이 보충한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를 비롯하여 천책(天頙)의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과 『선문강요집(禪門綱要集)』을 통해서 한국 고대 조사선을 계승하였다. 그 내용을 『청허당집(淸虛堂集)』의 원준(圓俊)대사에게 증여한 「조사심요(祖師心要)」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게송을 언급한 다음에, “임제(臨濟)와 덕산(德山)의 일은 음계(陰界)[五蘊] 속의 광혜(狂慧)[癡禪]에게 미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단지 살리고 단지 죽이기만 하는 것은 좋은 수단이 아니다. 황룡병부(黃龍病夫)는 서(序)하였다.”라고 언급하고서,

[문] 무슨 방편을 지어야만 일념을 돌려서 자성을 곧바로 깨달을 수 있는가? [답] 단지 그대 자심이 있을 뿐이다. 또 무슨 방편을 짓는단 말인가? 도(道)는 알고 알지 못하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그대가 지금 만약 방편을 짓는다면, 이는 또 알음알이를 구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자기의 눈이 보이지 않자 눈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눈을 보려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의 눈이 있는데, 어떻게 또 달리 보려고 한단 말인가! 눈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일러 눈을 보았다고 한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자심이 진불(眞佛)이요, 자성이 진법(眞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밖으로 부처를 찾으려고만 할 뿐, 안으로 자기 마음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만약 자심 밖에 부처가 있고 자성 밖에 법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마음을 굳게 지니고 불도를 구하려고 한다면, 설령 진묵겁을 거치며 몸을 사르고 팔뚝을 태우는 등 갖가지 고행을 닦더라도, 이는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단지 헛고생만 늘어날 뿐이다. 바른 생각[正念]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도인이 날마다 행해야 할 일이다. 이 몸의 사지 관절이 풀어지고 목숨이 끊어질 때 다다라서도, 이 바른 생각을 잃지 않으면 바로 성불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체중생이 본래 보리이니, 다시 보리를 얻으려고 할 것이 없다. 그대가 지금 만약 보리심을 발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배워서 불도를 얻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대가 삼아승기겁(asaṃkhya)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얻는 것은 단지 보신불이요 화신불일 따름이니, 그대의 본원인 진성불(眞性佛)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겠는가.60)

라고 조사가 자심과 자성을 요체로 삼아 체득할 내용을 언급하였다. 말하자면 조사선에서 궁극에 도달한 지점은 바로 자심이 진정한 부처요, 자성이 진정한 진리임을 체득함이 바로 정념을 삶의 현장에 활용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만약 혹여 무엇을 얻고자 하면 본래의 마음을 상실하여 본래의 근원인 진정한 자성의 부처인 법신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심요(祖師心要)는 일심으로 종지를 세움에 곧 마음이 부처이고, 무심(無心)이 도(道)이기에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소유자로 도불용수(道不用修)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주인이 되며 의지함이 없는 도를 체득한 아무 일이 없는 한가한 사람으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본래성불을 향유한다.

그러면 휴정의 선풍을 계승한 후예에 대해서는 4대 종장에 국한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휴정의 문도는 무려 일천여 명을 능가하였으며, 고준한 상당의 제자만도 70여 인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鞭羊彦機)·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淨觀一禪)·현빈인영(玄賓印英)·원당원준(院堂圓俊)·중관해안(中觀海眼)·기암법견(奇岩法堅)·보응해일(普應海日)·무월경헌(霧月敬軒)·기허영규(騎虛靈圭)·뇌묵처영(雷黙處英)·의엄(義嚴)·쌍익(雙翼) 등 저명한 용상들이 있었고, 특히 사명유정·편양언기·소요태능·정관일선의 네 종장이 휴정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사대문파(四大門派)를 이루었다.

먼저 사명유정(1544-1610)은 자가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또는 사명당(四溟堂), 탑호는 종봉(鐘峰)이며 속성은 임씨 밀양 사람이다. 13세에 속학(俗學)은 천루한 것이라 일컫고 무루학(無漏學)을 배우고자 직지사 신묵화상(信黙和尙)에게 출가하였다. 그런데 명종 16년(1561)에 승과에 오르고 사류(士流)들과 교류가 깊었다고 한다. 선조 8년(1575)에 봉은사 주지를 사직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청허 회하에서 인가(印可)를 받았다. 그 후 운수행각하면서 오대산에 머물 때, 모함을 받아 역옥사건(逆獄事件)이 일어나 투옥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되었다.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 하안거 결제 중에 임진왜란을 만나 궐기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구국하였다. 또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건너가 외교적 성과를 거두는 업적을 이루는 국사를 수행하였으며, 전란 이후에 민생과 국력의 회복에도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광해군 2년(1610)에 입적하였다. 이러한 그의 선교관(佛敎觀)은 선과 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융섭(融攝)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법제자(嗣法弟子)로 문하에 송월상언(松月應祥) 외에 여러 제자가 있었으며, 저서로 『사명집(四溟集)』 6권이 전한다.

유정은 휴정의 적자로 그의 가풍은 『법화경』·『화엄경』·『아미타경』에 기초한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선교회통이다. 그런데 김동화(1902-1980)는 그의 사상을 선교가 불분명한 사상이라고 하였으나 타카하시 토오루(高橋亨, 1878-1967)는 휴정의 골수를 얻은 적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편양언기도 「봉래산운수암종봉영당기(蓬萊山雲水菴鐘峰影堂記)」에서 종봉 즉 유정을 적자로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유정의 선교관은 우열이나 심천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하고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양자를 초월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그는 「화엄경발문」에서

대저 화엄은 돈교(頓敎)가 된다. 본체는 본래 불생(不生)이어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이고, 작용은 실로 비멸(非滅)이어서 무성무괴(無成無壞)한다. 이것은 모든 교의 근본이 되어서 만법의 종(宗)이다. 하늘은 이것으로써 청정하고 땅은 이것으로써 편안하며, 산천은 이것으로써 흐르고 우뚝하며, 금수는 이것으로써 날고 달리며, 초목곤충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것으로써 움직이고 휴식한다. 이것은 이른바 만물의 본체로서 남김이 없고 일체의 성품이어서 틀림이 없다. 우리 부처님께서 선설하신 바는 대개 이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53선지식이 사람들에게 보이신 바가 대개 이것을 보이신 것이다.61)

라고 하여 휴정과는 대조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는 바로 선과 교를 대등하게 표출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선관을 곧바로 보여주는 「증마도승만공(贈馬島僧萬空)」이라는 게송에 「정중편(正中偏)과 더불어 편중정(偏中正)이여, 정(正)에서 편(偏)을 제거하면 이사(理事)가 온전히 온다. 다시 정중래(正中來)를 향해 간(看)할 때에, 앞에 따르면 도리어 정중편(正中偏)에 들어간다네.」62)라고 하였다. 그는 동산양개(洞山良介)의 오위(五位)를 들어 선수행의 요점을 보였다. 본체와 현상 즉 평등과 차별이 원융하여 이사무애한 선지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선정관(禪淨觀)에 대해서 「원준장로미타발(圓俊長老彌陀跋)」에서,

대저 맑은 거울과 혼탁한 금은 원래 이물(異物)이 아니다. 흐린 파도와 담담한 물은 동일하게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 그 근본은 같고 끝이 다름은 존재하는 것이 마모됨과 더불어 마모되지 않음이고 움직임과 더불어 움직이지 않음일 뿐이다. 범부와 성인은 어리석음을 담지 않고 성품 또한 그러하다. 다만 미혹함과 깨달음을 분별함으로써 누구를 일러 어리석고 지혜로운 종자가 있다 하겠는가. 어리석음에 이르러서 대각(大覺)을 바람은 형세가 하늘과 땅으로 끊어져 미치겠는가마는 일념(一念)을 돌이키면 문득 본각(本覺)과 같다. 그러나 기틀을 돌이킴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자력이요, 둘째는 타력이다. 자력이란 이른바 일념을 회기하면 문득 본각과 같은 것이고, 타력이란 이에 자부에게 귀의하여 십념의 공(功)을 이루는 것이다.63)

라고 하여 범부와 성인의 본성은 다르지 않으나 단지 미혹과 깨침에 의해서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에는 자력과 타력이 있는데, 자력이란 한 생각에 기틀을 돌이키면 본각(本覺)과 같고, 타력이란 아미타불에게 귀의하여 십념의 염불 때문에 공업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어서 타방의 염불관에 대해서,

서방에 국토가 있는데 극락이라고 한다. 큰 성인이 계시는데 무량광(無量光)이라고 한다. 항하사의 보살과 무수한 성문이 에워싸서 48원과 8만 4천 가지 몸의 상호를 따라 광명을 놓아 중생을 섭취한다. 일념(一念)이 칠념(七念)에 이르면 모두 옥호(玉毫)의 접인을 입는다. 그러므로 이른바 불(佛)의 일자(一字)는 깨달음의 바다 가운데 하나의 갈고리라는 것은 적합한 말이 아니며, 스승과 제자가 드러내어 일컬어도 풀리지 않아 이에 모든 성인께서 한결같이 왕생을 바라는데 어찌 우리를 속이겠는가.64)

라고 확신하면서 염불관을 드러내고 있다. 유정의 이러한 관점은 자력은 자력대로 타력은 타력 그대로 양자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사(諸師)들과는 판이한 차이를 보인다. 그는 이론에서 화엄과 법화, 선에서는 조동선, 염불을 겸수하였다.

다음 편양언기(1581-1644)는 호가 편양당이며, 속성은 장씨(張氏) 죽산(竹山) 사람이다. 11세에 출가하여 현빈(玄賓)에게 출가하여 휴정의 회하에 들어가서 심인(心印)을 얻었다. 그 후 남유(南遊)하여 금강산 천덕사(天德寺)와 구룡사(九龍山) 대승사(大乘寺), 향산(香山) 천수암(天授庵) 등에서 개당(開堂)하여 선과 교를 강의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법예(法譽)가 사방에 떨쳐 편양당문하가 가장 융성했다고 전한다. 그의 문하에는 부법제자(付法弟子) 의심(義諶)을 비롯하여 석민(釋敏)·설청(說淸)·홍변(弘辯)·계진(契眞)·의천혜상(義天惠常)·천신(天信) 등 수 백인이었다. 편양언기의 주요 수행관은 휴정의 뒤를 이은 철저한 임제선 계통의 간화경절문 수행자였다. 「선교원류심검설(禪敎源流尋劒說)」에 의하면,

예전에 마조는 일할(一喝)을 하여 백장은 귀가 먹었으며, 황벽은 혀를 내밀었다. 이 일할이야말로 곧 꽃을 들어 보인 소식이고, 달마가 중국에 건너온 본래면목이며, 공겁이전(空劫以前) 부모미생전의 소식이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기이한 말과 미묘한 구절, 양구(良久)와 방(棒), 그리고 할과 10만 가지 공안들과 갖가지 방편이 모두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 은산철벽이라 들어갈 문이 없고, 석화전광(石火電光)이라서 사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지이며 이른바 경절문(徑截門)이라고 한다.65)

라고 휴정의 조사선지(祖師禪旨)를 제자 중에 가장 잘 드러내어 오직 부처님께서 전하고자 함은 바로 격외선지(格外禪旨)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조의 일할(一喝)은 백장과 황벽, 임제로 이어진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다양한 방편으로 스승과 제자가 대기대용(大機大用)임을 피력하였다. 또 편양은 교(敎)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분별하여 언급하였다. 즉,

교(敎)에는 4가지 차별이 있으니, 부처님께서 처음 성도하셨을 때 인연이 성숙한 보살과 상근의 범부를 위하여 두 번 화엄을 설하셨다. 또 성문을 위하여 사제법을 설하시고, 연각을 위해 십이인연의 아함을 설하셨다. 그리고 또 보살을 위해서 육도(六度)방편을 설하셨다. 앞의 삼승을 위해 마침내 아눗따라삼약삼보디의 법화를 설하심이 바로 사교(四敎)다.66)

라고 간략히 세존의 일대시교를 드러내었다. 이러한 분별은 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기에 있고 법체(法體)는 일심(一心)에 있다면서 일심은 허공의 꽃과 같아서 그 자취가 없다고 부연하였다. 이러한 분별에 대하여 교(敎)의 차례적 방편을 일컬어 원돈문(圓頓門)이라 하였다. 그리고 정토염불에 관해서 편양의 「원불표(願佛表)」의 문두에, “듣건대 진사국토(塵沙國土)의 서쪽에 있는 극락세계는 서방의 여래인 아미타불이 계시는 가장 존귀한 이름이다.”67)라고 하였고, 그리고 “명호를 일컬어 염하는 한 소리에 천마는 그 심간(心肝)이 서늘해지고, 단정히 앉아 십념(十念)을 하면 염라대왕이 저승의 귀부(鬼簿)에서 그 이름을 삭제한다.”68)라고 하였다. 또한 「상고성(上高城)」에서,

근기에는 비록 세 가지가 있지만, 법은 곧 한 가지이다. 문에는 비록 세 문을 시설하였지만 이르는 경지는 둘이 없다. 그러므로 참선이 곧 염불이고, 염불이 바로 참선이다. 애초에 무슨 사이가 있겠는가.69)

라고 근기에는 비록 세 가지가 있으나 법은 한 가지이며, 또 문도 세 가지를 시설하였으나 무이(無二)여서 휴정이 언급한 ‘‘참선즉염불(參禪則念佛) 염불즉참선(念佛則參禪)’이란 선정일치(禪淨一致)를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편양은 휴정의 삼문수학을 그대로 이어 그의 사상과 수행문을 피력하였다. 그래서 자성(自性)을 깨닫는 성도문(聖道門)의 경절문(徑截門)은 공안을 통해서, 원돈문(圓頓門)은 자성의 반조를 통해서, 그리고 염불문(念佛門)은 염불과 참선을 일치시켜서 공부한다는 것이다. 또 방편의 차이는 있으나 깨달음의 문에 들어가면 차별이 없다고 하여 삼문수학의 가풍을 계승하였다.

그 다음에 정관일선(1533-1608)의 호는 정관(正觀), 속성은 곽씨(郭氏) 연산(連山) 사람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처음 백하선운(白霞禪雲)에게 법화를 배우고 후에 휴정에게 심인(心印)을 얻었다. 그리고 속세를 벗어나 오직 수도정진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임성충언(任性沖彦)·호연태호(浩然太浩)·무염계훈(無染戒訓)·운곡충징(雲谷沖徵)·운흥성희(雲興性熙)·사안충인(師安沖忍) 등이 있어서 하나의 정관문파를 형성하였다. 정관일선은 의승군에 참가하지 않고 오직 불법을 수호에 진력하였다. 그는 「상도대장년형(上都大將年兄)」이라는 서(書)에서 승려가 속복을 입고 종군하며 동분서주하며 죽고 죽임을 당하는가 하면 속세의 습관을 갖음을 보았고, 또 사찰이 황폐화됨을 목격하고서 육조(六祖)와 승조(僧稠)의 고사를 들어 우려하였다. 그러면서 본연의 납자로 돌아가 선정의 물을 마시고 지혜의 달을 거듭 밝혀 반야의 인자한 배에 올라 보리의 피안에 곧바로 이르시기를 바란다고 기술하였다. 이런 그의 선교관을 살펴보면, “참선하여 조사관을 통달하고 도를 배워 현철을 계승하네. 입속에서는 천경을 지송하나 걸망 속에는 한 물건도 없네.”70)라고 언급하여 선교를 초탈한 선의 경지를 표출하고 있다. 그러면서 선교회통하여 제자에게 보이는 시구에서,

진세를 벗어나 명산을 찾아, 깊이 흰 구름 붉은 숲에 들어가라. 거리에 심어진 난초는 오래 푸르기 어렵고, 깊은 골짜기에 난 계수라야 길이 붉을 수 있다. 교의 바다에 넉넉히 놀면서 참된 法을 통달하고, 선문을 참구하여 조사관을 꿰뚫어라. 배움을 아끼어 세 번 여유 부리면 오히려 잃을까 두렵고, 공부를 성취하지 못하고 기꺼이 편안하고 한가할 것인가.71)

라고 경계하여 일생에 조사관을 꿰뚫을 지도방편을 펴고 있다. 즉, 진세(塵世)를 떠나 출가수행을 권장하고 출가해서는 먼저 교해(敎海)에서 진제(眞際)를 통달하고 선문에서는 조사관을 꿰뚫어 통달하라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지도방편을 보였다. 그는 또 정토관에 대해 「박거사수도호 이인지서증(朴居士須道號 以仁智書贈)」에서,

나이 40이 가까워 갑자기 무상(無常)을 깨달아 가업을 돌보지 않고, 오직 정토를 염함으로써 멀리 안락국을 생각하여 부지런히 날로 새롭게 그 功 또한 얼마쯤은 지혜롭다 하지 않겠는가… 바라건대 거사는 이름으로 인해서 도를 얻어 향상일로를 초출하여 바로 유마의 방장실에 들어가 정명거사와 더불어 해탈의 평상에 앉은 것과 같이 곧 이 인지(仁智)라는 이름은 진실로 헛된 말이 아니니, 다시 모름지기 부지런히 정토의 업을 닦아 영원히 진로의 인을 버리면 안락국의 구품연대에 결정코 왕생하리라.72)

라고 언급하여 정토왕생을 권장하였다. 즉, 나이 40에 무상(無常)을 깨닫고 가업을 돌보지 않고 정토를 생각함으로써 멀리 극락정토를 그리워하여 부지런히 닦아서 날로 공이 새롭게 되는 것은 지혜롭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지(仁智)라는 법명을 주면서 덧붙여 설명한 것이다. 즉 속세의 사람은 인연이 많아 선정을 수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으므로 인자함과 지혜로서 사람을 이롭게 하면 유마거사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진로의 因을 버리려면 닦던 정업(淨業)을 부지런히 닦는다면 극락세계의 구품연대에 결정코 왕생할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밖에 「망부소(亡父疏)」나 「망모소(亡母疏)」 등에서 고해(苦海)를 벗어나 극락왕생하여 아미타불로부터 수기를 받아 보리를 증득하라고 기원하였다. 그는 왕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왕생하여 불력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라는 것이다.

끝으로 소요태능(1562-1649)은 호가 소요(逍遙)이며 속성은 오씨(吳氏) 담양(潭陽) 사람이다. 13세에 백양사에 출가하였고 부휴선수에게 경율을 배운 삼걸(三傑; 逍遙·沖徽·應祥) 가운데 한 사람이며, 청허 회하(會下)에 들어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라는 화두를 받아 여러 선지식을 찾아 그 오의(奧義)를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어 20년 만에 다시 휴정을 참문(參問)하여 심인(心印)을 얻었다. 그 후 금강산과 오대산, 구월산 등에서 도예(道譽)를 떨치다가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호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곡성 연곡사(鷰谷寺)에서 선교를 선양하다가 인조 27년(1649)에 입적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침굉현변(枕肱縣辯)·계우(繼愚)·경열(敬悅)·학눌(學訥)·처우(處遇)·천해(天海)·극린(克璘)·광해(廣海) 등이 있어서 각파의 문풍(門風)을 이루었다.73) 태능의 행적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수행체계를 여실히 잘 드러낸다. 그는 「의신란야야좌서회(義神蘭若夜坐書懷)」에서,

40년 전에 한가히 배워 이해하여, 남은 찌꺼기로 만족하며 살았네. 불법이란 원래 글자가 아님을 비로소 알았고, 서쪽에서 온 벽안(碧眼)의 스님을 부끄러워한다네.74)

라고 하여 사교입선의 선교관을 나타내었다. 즉 40년에 걸쳐서 한가하게 배워서 이해하고 살다가 갑자기 그것을 찌꺼기라고 깨달아 교학을 버리고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감득한 내용을 피력하였다. 또 읊기를, “선과 교가 근원이 같아 일미(一味)일 뿐이네. 부디 심식(心識)을 가지고 달다 쓰다 분별마소. 만일 물결 따라 쫓아가면 남에게 다시 나루터 물음 면치 못하리라.”75)라고 노래하여 선교관의 요체를 드러내었다. 즉 선과 교를 동일한 일원으로 본 이것은 바로 휴정의 선교관에 부합한 것이다. 그래서 휴정이 강조한 오직 분별망상을 떠나 근본적인 뜻을 알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제(無題)」에서,

도(道)를 배우려면 먼저 모름지기 경전을 궁구해야 하나, 성스런 경전은 다만 내 마음속에 있다네. 곧바로 나아가 집안의 길을 밟아 보나니, 머리 돌리면 먼 허공에 가을 기러기 떨어지리라.76)

라고 노래를 불러 선과 교가 불가불리의 관계임을 밝히고 있다. 사교입선뿐만이 아니라 경전 자체가 자기 마음속에 있기에 본래의 마음의 고향을 그리다가 허공을 보니 그대로 고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태능의 정토관(淨土觀)은 「시선행우바이(示善行優婆夷)」라는 시구에서,

몸은 사바세계의 동일한 세계 가운데에 있으나, 마음은 안양세계의 구품연대에 노니네. 다른 해가 되면 가죽 주머니를 벗어버리고, 아미타불의 대원의 바람에 돛을 달으소서.77)

라고 정토관에 대해서 청신녀를 위해 사바세계와 극락세계를 대비하여 아미타불의 대원력에 힘입어 왕생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다음은 「관음찬(觀音贊)」에서, “백의관음 넓은 용모여, 살활에 바람처럼 흐르는 세월 밖의 용모라네. 텅 비고 고요한 한 몸에 온갖 존재를 포용했고, 인연을 따라 감응함에 나아가 자비의 용모를 나투시네.”78)라고 관음신앙을 언급하여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한 용모와 중생구제를 노래하고 있다. 이어 그는 선정일치(禪淨一致)의 경계를 읊고 있는 「무제(無題)」에서, “옛 성인이 관하는 속엔 세계가 텅 비었고, 천지가 있기 이전과 이후엔 이름뿐이구나. 한 소리로 부르고 웃는 서쪽 창의 달이여, 털끝도 까딱하지 않으면 곧 거기가 정토라네.”79)라고 유심정토(唯心淨土)의 경계를 언급하여 선정의 세계와 정토의 세계를 일치시키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에 대해서,

산하대지가 이미 공(功)을 이루었고, 한바탕 꿈인 지금의 몸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네. 일대상(一大事)은 신령하고 신령하여 생사 밖이고, 근(根; 六根; 주관)과 진(塵; 六塵; 객관)을 떨쳐 버리면 이내 안락국이라네.80)

라고 유심정토(唯心淨土) 자성미타(自性彌陀)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상에서 소요태능은 철저하게 선교(禪敎)와 선정(禪淨)의 일치를 강조하여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태능은 휴정의 삼문수업(三門修業)을 계승하면서 스스로 실천하고 남에게도 권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조사선풍도 역시 간과하지 않고 있다.

이상의 4파 이외에도 무월경헌(霧月敬軒, 1544-1633)의 문하에 도일(道)一·홍민(弘敏)·설암(雪庵)·밀운(密雲)·담원(曇元) 등과 청매인오(淸梅印悟, 1548-1621)의 문하에는 벽운쌍운(碧雲雙運)이 있었으며, 그 뒤에는 무영탄헌(無影坦憲)이 있었다고 한다. 또, 중관해안(中觀海眼)의 법사(法嗣)로 능허청간(凌虛淸侃)에 이어 형곡복원(荊谷復遠)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 석실명안(石室明眼, 1646-1710) 등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고81) 한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 불교계는 거의 산중불교로 승단이 연명되었다. 이런 와중에 삼문수학의 학풍을 계승하여 외관상으로는 선종 일종만이 유지되어 이어졌다. 이러한 승가의 수행가풍은 표면적으로는 간화경절적 임제가풍의 조사선 중심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경절문·원돈문·염불문의 수행체계로 계승되었다.

Ⅲ. 끝맺는 말

이상과 같이 주마간산 격으로 “청허 휴정의 선풍과 계승”이란 논제하에, 먼저 휴정의 선풍이 형성되는 배경에 대해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배경, 그리고 종단적 배경을 고대 한국의 고승대덕과 휴정의 법조(法祖)와 법부(法父)까지 살펴보았다. 다음에 휴정이 선교를 회통한 부분에 대해서는 휴정의 저술을 통해서 선교회통(禪敎會通)의 사교입선(捨敎入禪),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선주교종(禪主敎從)에 대해서 간략히 검토하였다. 그 다음에 휴정의 조사선풍의 격외선지(格外禪旨)가 이루어지는 내용을 종지종풍(宗旨宗風)과 관련해서 중국의 조사선과 고대 한국의 조사선인 구산선문(九山禪門)과 중흥조들까지 전승하여 수렴된 내용을 고찰하였다. 끝으로 휴정의 선풍이 계승되는 내용으로 휴정의 문하 4대 종장인 사명유정·편양언기·소요태능·정관일선을 중심으로 검토하여 보았다.

이러한 휴정의 선풍은 산승들을 계도하는 저서로 우선 『선가귀감』을 찬술하여 선교의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승풍을 진작시켜서 조사선의 수일불이(守一不移)한 수본진심(守本眞心)과 본래성불의 조사관에 대한 수행체계인 돈오점수의 선주교종을 확립하였다. 이런 가운데 선교의 논쟁이 벌어지자 다시 『선교석』을 통하여 전통적인 『선문보장록』과 『선문강요집』, 중국 찬술의 전거를 인용한 선과 교를 판석하여 이를 회통하려 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계속되자 『심법요초』를 저술하여 선과 교를 회통시키고, 선과 정토까지 일치시켜 회통하는 학문과 수행의 풍토를 삼문수업으로 확립시켜 조선 후기에 전승되었다.

나아가 제자 유정을 위하여 종장의 지침서로 『선교결』을 지어 후학을 경계시켰다. 이러한 휴정은 조선 중기 시대와 사회, 승단의 수행풍토적 배경으로부터 형성된 휴정의 조사선풍 가운데 하나인 간화활구의 경절적 선풍은 선교를 회통한 고대 중국과 한국의 조사선의 오종가풍을 포괄하였다. 특히 여말선초 석옥청공과 평산처림에게서 심인을 전수한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이 임제법맥을 전승하고, 기존의 구산선문의 조사선풍을 모두 수렴한 계승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그 결과, 휴정은 사교입선과 선주교종, 선의 돈오와 교의 점수도 함께 수용하여 회통적 조사선의 일파인 임제선풍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바로 휴정문하 4대 종장에게 전해져 계승되었다.

이러한 휴정의 선풍은 조선 후기 전적에 드러난 내용에 전승되고 있다. 예를 들면 대표적으로 작자 미상의 『선교총판문(禪敎摠判門)』을 비롯하여 환성지안(喚性志安, 1664-1729)이 찬술한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휴정의 삼문수업을 총정리한 진허팔관(振虛捌關, ?-1782)의 『삼문직지(三門直指)』(1769), 조선 후기 선리논쟁(禪理論諍)의 불씨가 된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의 『선문수경(禪文手鏡)』, 백파의 선적 이치를 비판한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의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의순의 이론을 옹호한 우담홍기(優曇洪基, 1822-1881)의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 의순을 비판하고 긍선을 옹호한 설두유형(雪竇有炯, 1824-1887)의 『선원삭류(禪源遡流)』 등이다. 또 근대에 이르러 중국과 한국의 핵심적인 선적을 총정리한 『선문촬요(禪門撮要)』 등이다. 이러한 선적(禪籍)의 내용이 여러 학자에 의해서 번역되고 연구되었다. 앞으로 『선교석』의 후반을 보유한 『선문촬요』에 관해서 더욱더 면밀한 연구가 진행되는 과제로 기대해 본다.

이러한 휴정의 삼문수학과 오종가풍 가운데 임제선풍을 선양하면서도 중국의 조사선과 한국의 고유한 조사선까지 통합하여 회통하였다. 그리하여 휴정의 선풍은 그의 4대 종장에서 계승되어 면면히 이어져서 조선 후기 후손들의 저술에 매개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런 내용은 비록 간결하지만, 중국의 법안종 제3대 종사 영명연수의 『종경록(宗鏡錄)』에 버금가는 『선가귀감』은 오늘날에도 선가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법통과 종통 또는 조사의 선풍은 끊임없이 전개된 과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세계적인 종교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조선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계승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혼탁한 현대에 전승하여 감득함은 매우 주목할 부분이라 사료된다.

우리네 삶은 모두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바로 마음의 흔적을 지워가는 작업으로 방하착(放下着)하여 구경에 방아착(放我着)을 구현하여 본성과 본질에 부합한 삶이다. 말하자면 방하착은 지금까지 개인이 살아오면서 배우고 익혀 쌓아온 경험적 알음알이를 내려놓아 당장에 무념(無念)한 무심(無心)이다. 방아착은 지금의 중생이 바로 본래부터 부처임을 자각한 본각의 열반 상태로 무아를 현실에 적용하여 대승의 보살로 살아가는 대기대용의 보살도이다. 다시 말해서 경험적 자아와 본래적 자아를 모두 놓아버린 당장 무심(無心)이고, 무차별적 무아를 경험함이 이른바 수행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네 삶은 평소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무분별(無分別)한 마음으로 수행이 삶이고, 삶이 바로 수행이 된다. 이것은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의 마음 바탕이 현실에 발현하여 작동하면 그 결과로 드러나는 열반을 체현한 깨달음의 구현일 것이다.

Notes

본 논문은 해남 대흥사에서 서산대사 탄신 50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개최한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三家龜鑑』 3卷, 異本 『三家龜鑑』 1卷, 『禪家龜鑑』 1卷, 『淸虛堂集』 7卷, 「禪敎訣」 1篇, 『禪敎釋』 1卷, 『心法要鈔』 1卷, 『說禪儀』 1卷, 『雲水壇謌詞』 1卷, 『三老行蹟』 1卷 등이 있다. 본 논문에서 인용할 『淸虛堂集』의 底本은 七卷本이며, 底本과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은 二卷本과 四卷本을 참조하여 수록할 것이다. 「朝鮮時代篇一」(韓國佛敎全書 第七冊, 東國大學校出版部, pp. 616-758) 이하 韓佛全이라 칭한다.

저술로는 高橋亨 『李朝佛敎』와 忽滑谷快天 著·鄭湖鏡 譯, 『朝鮮禪敎史』(寶蓮閣, 1978)를 비롯한 禹貞相·金暎泰 『韓國佛敎史』(進修堂, 1969); 休靜 著, 法頂·朴敬勛 譯, 『淸虛堂集』(韓國名著大全集, 1973); 金暎泰, 『西山大師의 生涯와 思想』(博英社, 1975); 申法印, 『西山大師의 禪家龜鑑硏究』(김영사, 박사학위논문, 1989); 한국전통사상서간행위원회, 『한국전통사상총서·불교편; 精選休靜』(대한불교조계종 한국전통사상서 간행위원회, 2010) 등이고, 논문으로는 休靜 著, 法頂·朴敬勛 譯, 『淸虛堂集』(韓國名著大全集, 1973); 權奇悰, 「西山의 和思想」(佛敎學報, 제15집, 1978); 申法印, 「西山休靜의 淨土思想에 관하여」(印度學佛敎學硏究, 제31권, 1983); 禹貞相, 「禪家龜鑑流布考」(佛敎學報, 제14집, 1985), 「西山大師略傳考」(朝鮮前期佛敎思想硏究, 1985); 釋宗眞, 「淸虛休靜의 禪思想」 『白蓮佛敎論集』, 3호(白蓮佛敎文化財團, 1993: 46-73); 宗梵(서정문), 「臨濟禪風과 西山禪風」, 『論文集』6(중앙승가대학, 1993); 鄭光均(法常), 『西山休靜의 禪淨觀 硏究』(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永明延壽의 淨土觀 硏究』(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정영식, 『조선시대 선사상연구의 현황과 과제』(한국불교학회 학술발표논문집 2016, 권1호) 등 이외 다수이다.

申法印 『休靜의 儒家龜鑑에 관한 硏究』(佛敎思想論叢, 1989: 835)에서 程朱學이란 宋나라 程顥·程頤의 형제와 朱熹 등이 대성시킨 신유학의 철학이며 달리 주자학이라고 한다. 이 새로운 체계의 유학은 우주의 根本原理와 인간의 心性問題에 관한 사색적 학문이며, 넓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道學·性理學 혹은 理學이라고도 한다. 宋代의 이 철학은 周㾾溪(1017-1073), 張橫渠(1020-1070)를 비롯하여 程明道(1032-1085), 程伊川(1033-1107)으로 계승되고 朱晦庵(1130-1200)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던 학문을 말한다고 하였다.

金暎泰 著. 1990. 『韓國佛敎史槪說』. 經書院: 99-107 참조.

金映遂. 1938. “曹溪禪宗에 대해서.” 『震壇學報』 第9卷; 權相老. 1959. “韓國禪宗略史.” 『白性郁博士華甲記念佛敎學論叢集』; 金暎泰. “高麗의 曹溪宗名考.” 『東國思想』 第10·11合輯; 申法印. 1989. 『西山大師의 禪家龜鑑硏究』 김영사: 33-42; 李法山. 1995. “曹溪宗에 있어서 普照의 位置.” 『普照思想』 8: 49-76 等 참조.

“時萬曆己卯春節 曺溪宗遂 四溟隱峰惟政拜手口訣因爲謹䟦”(惟政 著, 「禪家龜鑑跋」(萬歷己卯, 1579, 春), 『禪家龜鑑』(韓佛全典, p. 138)).

“碧溪正心…將啓手足 傳禪干碧松, 傳敎干淨蓮”(『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 「碧溪正心條」, 韓佛全 10: 104, 上).

『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 「佛祖源流」(韓佛全 10: 104, 中) 참조.

禹貞相·金暎泰. 1969. 『韓國佛敎史』. 進修堂: 172-191; 李法山. 1995. “曹溪宗에 있어서 普照의 位置.” 『普照思想』 8: 49-58 참조.

禹貞相·金暎泰. 1969. 『韓國佛敎史』. 進修堂: 172-191; 金暎泰. 1992. “近代佛敎의 宗統 宗脉.” 『近代韓國佛敎史論』. 民族社: 183-189 참조.

金暎泰. 1969. 『韓國佛敎史』. 進修堂: 323-337 참조.

李法山. 1995. “曹溪宗에 있어서 普照의 位置.” 『普照思想』 8: 67-75 참조.

申法印. 1989. 『西山大師의 禪家龜鑑硏究』. 김영사: 51; 振虛捌關 撰. 『三門直指』. 韓佛全 10: 139b-166c에서 제자 普喆이 정리한 저술로 普照知訥로부터 이어진 三門修學을 자세히 정리하고 있다. 이를 三門修業이라고도 한다.

金暎泰. 1992. “近代佛敎의 宗統 宗脉.” 『近代佛敎史論』. 民族社: 188; 金暎泰. 1990. 『韓國佛敎史槪說』. 經書院: 217-218 참조.

“以無言至於無言者 禪也 以有言至於無言者敎也 乃至心是禪法也 語是敎法也 則法雖一味 見解則天地懸隔 此辨禪敎二途”(『禪家龜鑑』, 韓佛全 7: 635, 中).

“今禪者曰, ‘此吾師之法也.’ 今敎者曰, ‘此吾師之法也.’ 一法上, 同於同, 異於異, 而指馬交諍. 嗚呼! 其孰能訣之?”(「禪敎訣」, 韓佛全 7: 657, 中).

“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 不曾滅 名不得 狀不得”(『禪家龜鑑』, 韓佛全 7: 626, 上).

“一物者 何物 ○ 古人頌云 古佛未生前 凝然一圓相 釋迦猶未會迦葉豈能傳 此一物之所以不曾生 不曾滅 名不得 狀不得也”(『禪家龜鑑』, 韓佛全 7: 626, 上)란 내용은 得通己和 說誼, 『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 「序說」(韓佛全 7: 10,中)에 “一物何物 ○ 祇這一著子 希夷焉絶情謂看似有 髣髴焉看似有 蠁曶然難可追 恍惚然難可測 非迷非悟 不可以凡聖稱 無我無人 不可以自他名”을 재구성하였다.

「慧能條」, 『景德傳燈錄』 卷5(大正藏 51: 235, 中)의 「懷讓條」(p. 240, 下); 「神會條」(p. 245, 上) 참조.

“八萬四千法門對八萬四千煩惱…○學道人欲得知要決 但莫於心上著一物”(「黃檗希運禪師傳心法要」, 『景德傳燈錄』 卷9, 大正藏 51: 271, 下)의 어구를 축약한 것으로 보인다.

“三界熱惱 猶如火宅…一物長靈 蓋天蓋地”(知訥, 『牧牛子修心訣』, 韓佛全 4: 708, 中).

僧伽大學院 編纂. 1997. “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序說.” 『金綱經全書』. 僧伽大學院: 27 참조.

“三敎聖人 從此句出 誰是擧者 惜取眉毛”(『禪家龜鑑』, 韓佛全 7: 635, 上).

“此事天地不能覆, 其軆山河不能匿. 其光, 內窺無積聚, 外望無盈餘. 八萬大藏收不得, 諸子百家說不得. 愽量聰明, 所不能知; 文章句法, 所不能識. 言之卽乖, 念之則差, 況以言語筆畵?”(『心法要鈔』, 韓佛全 7: 648, 上).

“聞夫妙道冲虛 不可以言語文字求也”(孤翁 述,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序」,韓佛全 4: 740, 上).

“佛祖出世 無風起浪 然法有多義 人有多機 不妨施設 强立種種名字 或心 或佛 或衆生 不可守名而生解 當體便是 動念卽乖”(『禪家龜鑑』, 韓佛全 7: 635, 上-中).

“達磨西來無風起浪。世尊拈花一場敗闕。到遮裡說甚麼閻羅老子。千聖尚不奈爾何”(如巹 續集, 「黃檗示衆」, 『緇門警訓』 권7, 大正藏 44: 1075, 中).

“自信已性知心妄動無前境界修遠離法以如實知無前境界故種種方便起隨順行不取不念乃至久遠熏習力故”(法藏 撰, 『大乘起信論義記』 卷下, 大正藏 44: 271, 上).

“僧云 如何是人境具不奪 師云 王登寶殿野老謳歌”(慧然 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大正藏 47: 497, 上).

蘊聞 編, 「答曾侍郞」, 『大慧普覺禪師語錄』 卷25(大正藏 47: 918, 중) 참조.

裴休 集, 『黃蘗山斷際禪師傳心法要』(大正藏 48: 382, 上) 참조.

“仁者!汝等所說悉是魔境。何以故? 施設文字皆為魔業, 乃至佛語猶為魔業。無有言說 離諸文字, 魔無能為。若無施設即無我見及文字見, 以無我故, 則於諸法無有損益, 如是入者則超魔境。是為菩薩超魔法門”(不空 譯, 『大集大虚空藏菩薩所問經』 卷7, 大正藏 13: 642, 上).

“世尊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 爲敎門 故曰禪是佛心 敎是佛語 故若人 失之於口 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 則世間麤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禪家龜鑑』, 韓佛全 7: 635, 中-下).

“來教又謂道若不在言語文字上。諸佛諸祖何謂留許多經論在世。經是佛言。禪是佛心。初無違背。但世人尋言逐句。沒溺教網不知有自己一段光明大事。故達磨西來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謂之教外別傳。非是教外別是一箇道理。只要明了此心不著教相。今若只誦佛語而不會歸自己。如人數他珍寶自無半錢分”(如巹 續集, 「陳提刑貴謙答眞侍郎徳秀書」, 『緇門警訓』 권7, 大正藏 48: 1080, 中).

“初言師有本末者。謂諸宗始祖即是釋迦。經是佛語。禪是佛意。諸佛心口必不相違。諸祖相承根本是佛”(圭峯 述, 『禪源諸詮集都序』 권상, 大正藏 48: 400, 中).

“三處者。多子塔前分半座一也。靈山會上舉拈花二也。雙樹下槨示雙趺三也。所謂迦葉別傳禪燈者此也。一代者四十九年間所說五教也。人天教一也。小乘教二也。大乘教三也。頓教四也。圓教五也。所謂阿難流通教海者此也。然則禪教之源者世尊也。禪教之派者迦葉阿難也。以無言至於無言者 禪也 以有言至於無言者敎也 乃至心是禪法也 語是敎法也 則法雖一味 見解則天地懸隔 此辨禪敎二途”(『禪家龜鑑』, 韓佛全 7: 636, 上-中).

“敎也者 自有言至於無言者也 禪也者 自無言至於無言者”(「禪敎訣」, 韓佛全 7: 657, 中).

『心法要鈔』(韓佛全 7: 649, 上-中), 「禪敎起於一念中 心意識及處 卽屬思量者 敎也 心意識未及處 卽屬參究者 禪也」.

“祖師所示 皆是一句中 八萬四千法門 元自具足 故隨緣不變 性相體用 頓悟漸修 全收全揀 圓融行布 自在無碍 元是一時 無前後者 禪也. 諸佛開示 頓悟漸修 隨緣不變 性相體用 全收全揀 圓融行 事事無碍法門 雖有具足 有修有證 階伋次第 先後者 敎也”(『心法要鈔』, 韓佛全 7: 649, 중).

“仰山云。此是夙習記持而成。若有正悟。則更說看。香嚴又成頌云。去年貧未是貧。今年貧始是貧。去年貧猶有卓錐之地。今年貧錐也無。仰山云。如來禪。許師弟會。祖師禪。未夢見在。香嚴復有頌云。我有一機。瞬目視伊。若人不會。別喚沙彌。仰山乃報師云。且喜。閑師弟。會祖師禪也”(語風圓信·郭凝之 編, 『潭州潙山靈祐禪師語録』, 大正藏 47: 580, 中-下), 祖師禪의 수행방법은 看話禪과 黙照禪, 念佛禪이다.

金映遂. 1937. “朝鮮佛敎宗旨에 對하여.” 『佛敎新』 第9號; 1944. “曹溪問答.” 『佛敎新』 第62號; 權相老. 1959. “韓國禪宗略史.” 『白性郁博士華甲記念佛敎學論叢集』. 東國大學校出版部: 293-297; 李智冠. 『曹溪宗史』(東國大學校) 등을 참조하면 신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계종의 宗旨宗統과 宗風을 논하였다. 그 중요한 내용은 중국의 선종에서 내세운 부처님의 正法眼藏 涅槃妙心을 不立文字로 以心傳心하는 敎外別傳인 直指人心하여 卽心卽佛로 見性成佛하는 修證의 頓悟漸修을 통해서 傳法度生하는 曹溪宗旨를 논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제자의 지도방식에서도 良久와 棒, 喝, 擧拂子, 圖一圓相, 指一指, 揚眉瞬目 등 다양하게 적용하였다.

金映遂. 1937. “朝鮮佛敎宗旨에 對하여.” 『佛敎新』 第9; 1944. “曹溪問答” 『佛敎新』 第62 참조.

權相老. 1959. “韓國禪宗略史.” 『白性郁博士華甲記念佛敎學論叢集』. 東國大學校出版部: 293-297. 참조.

李鍾益. 1972. “普照國師의 禪敎觀.” 『佛敎學報』 9. 佛敎文化硏究院: 68을 참조하면 일찍이 고려의 知訥은 해이해진 宗風을 바로 잡고 수행자의 올바른 수행체계를 위하여 ‘禪是佛心 敎是佛語’라는 禪敎一元의 원리에 따라서 三學一心·定慧雙修의 원칙에서 惺寂等持門을 설정하고, 一念迷悟·生佛異名의 원리에서 圓頓成佛門을 開立하고, 離十種病·直透祖觀의 방편으로서 看話徑截門을 세웠다. 또 定慧雙修의 方便으로 ‘十種息妄’의 要諦와 末法衆生의 修心方便으로 念佛三昧門과 了事丈夫의 任運修行으로 無心合道門을 건립하였다. 이러한 惺寂等持門·圓頓信解門·看話徑截門 등의 三門은 正門이라 하고, 十種息妄·念佛三昧門·無心合道門 등의 三門은 助道方便이라 논하였다. 지눌의 이러한 지도체계는 당시 定慧結社의 지침인 동시에 고려중기 이래 한국불교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禪敎融會·聖淨一如의 通佛敎는 원효 이래 會通佛敎의 구현임과 동시에 한국적 정체성의 확립이다. 이는 인도의 원천적 불교와 중국의 종파적 불교에 대한 한국적 會通佛敎의 완전한 정립이다. 이것은 한국불교의 전통과 특징이며, 석가세존이래 不變隨緣한 禪敎一元과 禪敎不二의 기반 아래 禪敎融會와 會敎歸禪을 지향한 頓悟漸修의 修心正路이다.

李鍾益. 1976. 『曹溪宗中興論』. 寶蓮閣 참조.

李智冠. 1992. 『曹溪宗史』. 東國大學校 참조.

李法山. 1992. “曹溪宗에 있어서 普照의 位置.” 『釋林』 第25輯: 64 참조.

李法山. 1992. “朝鮮時代의 禪脈과 淸虛의 和思想.” 『釋林』 第25輯: 27 참조.

“參禪卽念佛 念佛卽參禪 本性離方便 昭昭寂寂然”(休靜, 『心法要鈔』, 韓佛全 7: 651, 中).

高橋亨. 1923. 『李祖佛敎』. 寶文館, 昭和4: 388-390 참조.

宗梵. 1993. “臨濟禪風과 西山禪風.” 『論文集』 6: 122-149에 臨濟의 禪風을 無修無證과 殺佛殺祖, 無依道人, 示敎接化에서 綱要인 三句와 三玄三要를 비롯하여 四賓主, 四料揀, 四喝과 휴정 禪風을 비교하여 논하였다.

“心卽緣佛境界 憶持不忘 口則稱佛名號 分明不亂 如是心口相應 念一聲則能滅八十億劫生死之罪 成就八十憶劫殊勝功德 一聲尙爾 何況千萬聲一念尙爾 何況千萬念耶 所謂十聲念佛 往生蓮池者 此也 然在口曰誦 在心曰念 徒誦失念 於理無益 思之思之 佛爲上根人 說卽心卽佛 惟心淨土 自性彌陀 所謂西方去此不遠是也 爲下根人 說十萬(十惡)八千(八邪)里 所謂西方去此遠矣 然則西方遠近 在於人而不在於法也 西方顯密 在於語而不在於意也 若人不生一念 前後際斷則自性彌陀獨露 而自心淨土現前矣 此卽頓悟頓修 頓斷頓證故 無地位矣 雖然繁妄行相 非一朝一夕 要假歷劫熏修 故曰佛本是而勤念 業本空而勤斷”(「念佛門贈白處士」, 『淸虛集』 卷6, 韓佛全 7: 711, 上-中).

釋宗眞. 1993. “淸虛 休靜의 禪思想.” 『白蓮佛敎論集』, 3호: 46-73을 참조하면 휴정의 저술로 간주되는 『江西馬祖四家錄草』과 『精選四家錄』·『續眞實珠集』·『禪家金屑錄』·『三家錄』·『說禪儀』·『雲水壇歌詞』를 비롯하여 眞覺慧諶의 『禪門拈頌』, 眞靜天頙의 『禪門寶藏錄』과 『禪門綱要集』 등도 祖師禪이나 看話禪 또는 선적 의식과 의례에 관련된 저술이다.

“本分宗師 全提此句 如木人唱拍 紅爐點雪 亦如石火電光 學者實不句擬議也 故古人知師恩曰 不重先師道德 只重先師不爲我說破 大抵學者 先須詳辨宗途 昔馬祖一喝也 百丈耳聾 黃檗吐舌 這一喝 便是拈花消息 亦是達摩 初來底面目 吁此臨濟宗之淵源. 臨濟喝 德山棒 皆徹證無生 透頂透底 大機大用 自在無方 全身出沒 全身擔荷 退守文殊普賢大人境界 然據實而論 此二師 亦不免偸心鬼子……”(『禪家龜鑑』, 韓佛全 7: 643, 下-645, 下).

“心聞賁和尙曰 衲子因禪致病者多 有病在耳目者…據實而論無非是病 惟本色宗師明察幾徽……”(淨善 重集, 『禪林寶訓』 卷4, 「心聞賁和尙曰」, 大正藏 48: 1036, 上).

語風圓信·郭凝之 編, 『瑞州洞山良价禪師語錄』(大正藏 47: 520, 上-中) 참조.

『景德傳燈錄』 卷11, 「鄧州香嚴智閑禪師傳」(大正藏 51: 283, 下-284, 上) 참조.

金暎泰. 1984. “休靜의 禪思想과 그 法脈.” 『韓國禪思想』: 324-331 참조.

“大丈夫 見佛見祖如冤家 若着佛求被佛縛 若着祖求 被祖縛 有求皆苦 不如無事 神光不昧 萬古徽猷 入此門來 莫存知解”(『禪家龜鑑』, 韓佛全 7: 645, 下-646, 上).

“臨㴉(濟) 德山事。非陰界中狂慧所及也。故單活單殺。非好手也。黃龍病夫序。問。作何方便。一念回機。便悟自性。答。只汝自心。更作什麽方便。道不屬知不知。汝今若作方便。更求解會。譬如有人。不見自眼。以謂無眼。更欲求見。旣是自眼。如何更見。若知不失。是謂見眼。今時人。不識自心是眞佛。自性是眞法。欲求佛而不觀己心。若言心外有佛。性外有法。堅執此情。欲求佛道者。縱經塵劫。燒身煉臂。修種種苦行。猶如蒸沙作飯。只益自勞。正念者。道人日用事。乃至解身支節。臨命終時。不失正念。即得成佛。一切衆生。本是菩提。不應更得菩提。伱今若聞發菩提心。將一箇心學取佛。擬作佛道。任伱三祗劫修。只得報化佛。與伱本源眞性佛”(『淸虛堂集』 卷3, 「祖師心要贈圓俊大師」, 韓佛傳 7: 702, 上).

“大哉 華嚴之爲頓敎也…五十三善知識所示人 盖示此也”(惟政, 『四溟堂大師集』 卷6, 「華嚴經跋」, 韓佛全 8: 62, 上-中).

“正中偏與偏中正 正去偏來理事全 更向正中來上看 依前還入正中偏”(『四溟堂大師集』, 「贈馬島僧萬空」, 韓佛全 8: 69, 上).

“夫淸鏡濁金 元非異物 渾波湛水 同出一源 其本同而末異者 在乎磨與不磨動與不動耳 凡聖愚不肖 性亦如是 但以迷悟爲別 孰云愚智有種 以至愚望大覺 勢絶霄壞 及乎一念回機 便同本覺 然而回機二種 一自力 二他力 自力謂一念回機 便同本覺者也 他力乃歸依慈父 十念功成者也”(『四溟堂大師集』, 「圓俊長老法華後跋」,韓佛全 8: 61, 下-62, 上), 여기서 ‘法華’는 ‘彌陁’의 誤記로 보인다.

“西方有國曰極樂 有大聖曰無量光 河沙菩薩 塵數聲聞圍繞 而四十八願八萬四千隨身相好光明 攝取衆生 一念至於七念 皆蒙玉毫接引 然則所謂佛之一字 覺海中一鉤者 非的言也 非釋師子獨稱 乃諸聖同願往生 豈欺我哉”(『四溟堂大師集』, 「圓俊長老法華後跋」, 韓佛全 8: 62, 上).

“昔馬祖一喝也…禪旨所謂徑截門也”(『鞭羊堂集』 卷2, 「禪敎源流尋劒說」, 韓佛全 8: 256, 下).

“敎有四等差別…是爲四敎也”(『鞭羊堂集』, 「禪敎源流尋劒說」, p. 256, 下).

『鞭羊堂集』, 「願佛表」, p. 260, 上.

『鞭羊堂集』, 「願佛表」, p. 260, 上-中.

“機雖有三 法則一也 門雖設三 所造之地無二也 然則參禪則念佛 念佛則參禪 初何嘗有間哉”(『鞭羊堂集』, 「上高城」, p. 262, 中).

“參禪通祖關 學道繫賢哲 口裏誦千經 囊中無一物”(一禪, 『靜觀集』, 「行脚歸故山」, 韓佛全 8: 29, 上).

“出離塵世訪名山 深入白雲紅樹間 蘭植露衢難久翠 桂生幽壑可長丹 優遊敎海通眞際 參究禪門透祖關 學惜三餘猶恐失 未能成就肯安閑”(「示侍者普天禪子」, 韓佛全 8: 29, 下).

“年將四十 頓覺無常 不顧家業 唯以淨土爲念 遙想樂邦 孜孜日新 其功亦不幾於智乎…願居士因名得道 超出向上一路 直入維摩丈室 與淨名居士 共坐解脫之床則此仁智之名 固非虛說 更須勤脩淨土之業 永棄塵勞之因 則安樂國九蓮臺 決定往生”(『靜觀集』, 韓佛全 8: 29, 下-30, 上).

禹貞相·金暎泰 著. 1969. 『韓國佛敎史』. 進修堂: 143-147; 高橋亨. 1929. 『李祖佛敎』. 寶文館, 昭和4: 382-388; 忽滑谷快天. 1978. 『朝鮮禪敎史』. 寶蓮閣: 490-508; 李永子. 1997. “朝鮮 中·後期의 禪風-西山 五門을 中心으로-.” 『韓國禪思想』.불교문화연구원: 339-405 참조.

“四十年前閑學解 滿尖殘羹以爲能 始知佛法元非字 慚愧西來碧眼僧”(『逍遙堂集』, 韓佛全 8: 191, 中).

“禪敎同源唯一味 莫將心識辨甘辛 若也隨波逐浪走 未免從他更問津”(『逍遙堂集』, p. 194, 下).

“學道先須究聖經 聖經只在我心頭 驀然踏著家中路 回首長空落雁秋”(『逍遙堂集』, p. 197, 中).

“身在娑婆一界中 心游安養九蓮紅 他年脫却皮袋子 帆掛彌陁大願風”(『逍遙堂集』, p. 193, 下).

“白衣觀音普門容 殺活風流劫外容 虛寂一身包萬有 隨緣赴感顯慈容”(『逍遙堂集』, p. 196, 下).

“古聖觀中世界空 先天後地尙留名 一聲喚笑西窓月 不動纖毫卽淨方”(『逍遙堂集』, p. 197, 下).

“山河大地已成空 一夢今身但有名 大事靈靈生死外 抹却根塵乃安方”(『逍遙堂集』, p. 197, 下).

高橋亨. 1929. 『李祖佛敎』. 寶文館, 昭和4: 382-388; 禹貞相·金暎泰 著. 1969. 『韓國佛敎史』. 進修堂: 143-14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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