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연구논문

1970년대 法頂의 사회민주화 운동 考察: <씨알의 소리>에 投稿한 原稿를 中心으로

여태동*
Tae-Dong Yeo*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문학박사, 불교신문 편집국장
*Ph.D. of Literature Dongbang Culture University/ Managing Editor of Buddhist News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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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Apr 28, 2021; Revised: Jun 11, 2021; Accepted: Jun 21, 2021

Published Online: Jun 30, 2021

국문 초록

본 논문은 우리시대에 함께 살았던 법정스님(法頂, 1932-2010)의 1970년대 사회민주화 운동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법정은 전라남도 해남의 바닷가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부터 목포로 유학을 와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니다 출가한다.

전직 판사 출신으로 당대의 고승이었던 효봉스님을 은사로 통영 미래사에 출가한 법정은 쌍계사와 선운사 등을 거쳐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섭렵한다. 법정은 해인사에서 어느 여자신도가 팔만대장경을 ‘빨래판’으로 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음을 얻어 수많은 한문경전을 한글로 옮기겠다고 다짐한다. 해인사에서 수많은 경전을 공부한 법정은 그곳에서 민주인사인 서울대 황산덕 교수, 장준하 선생, 함석헌 목사 등의 가르침을 들으며 사회민주화에 관심을 갖는다.

한글로 된 불교사전 편찬사업에 뛰어든 법정은 통도사에서 운허스님을 도와 『불교사전』을 만든다. 그 인연을 이어 서울로 올라와 동국대학교가 설립한 동국역경원의 역경위원이 되어 한문불경의 한글화에 앞장선다. 이 과정에서 <불교신문>(당시 대한불교)에 글을 실으며 불교계를 대표하는 지식인사로 이름을 올린다.

다양한 글쓰기를 하며 저술활동을 한 법정은 1970년에 접어들면서 당시 진보매체로 민주화를 주도했던 잡지 <씨알의 소리>에 기고를 한다. 1972년 첫 원고를 시작으로 법정은 불교를 알리는 한편 사회민주화에 대한 다양한 글을 게재해 유신독재 아래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아픔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이는 1970년대 사회민주화 운동사에서 불교계의 활동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시기에 불교계 인사였던 스님의 활동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법정은 칼럼과 토론 시 총 16편의 글을 <씨알의 소리>에 게재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기도 했다. 아울러 불교의 가르침에 입각해 사회민주화가 어떻게 이루어져 하는 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1972년 10월 유신헌법의 공포되면서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하는 시(詩)를 게재해 반향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활동으로 법정은 정권으로부터 감시와 탄압을 받았으며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기도 했다.

탄압의 수위가 높아지는 가운데 제2인혁당 사건으로 젊은이들이 희생됨을 보고 충격을 받은 법정은 수행자의 본래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1975년 송광사 불일암으로 은거(隱居)한다. 그곳에서도 법정은 다양한 저술활동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한편 사회민주화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러한 법정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활기차게 이루어져 불교계의 사회민주화 운동사가 재정립되길 희망한다.

Abstract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social democratization movement of the 1970s of Buddhist Ven. Beop-jeong (1932-2010) who lived together in our era. He was born on the beach in Haenam, Jeollanam-do Province, studied in Mokpo since the days of middle school, attended College of Commerce, Chonnam National University and became a Buddhist monk.

Serving as a teacher Ven. Hyobong who was a former judge and high priest of the time and who became a monk in Miraesa Temple located in Tongyoung, Beop-jeong extensively read the Tripitaka Koreana at Haeinsa Temple in Hapcheon, Gyeongsangnam-do Province through Ssanggyesa Temple and Seonunsa Temple. At Haeinsa Temple, he greatly realized that a female believer saw the Tripitaka Koreana as a “laundry board” and pledged to translate numerous Chinese Buddhist scriptures into Hangeul. He who studied numerous Buddhist scriptures at Haeinsa Temple took a keen interest in social democratization by listening to the teachings of democratic figures such as professor Hwang San-Deok, Jang Joon-Ha, and minister Ham Seok-Heon.

He, who launched into the Korean Buddhist dictionary compilation project, helped Ven. Un-heo to create “The Dictionary of Buddhism” at Tongdosa Temple. After that, he came to Seoul to become a translation member of Dongguk Buddhist Scripture Translation Institute established by Dongguk University and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Korean alphabetization process of Chinese Buddhist scriptures. In this process, he contributed his writings in the Buddhist Newspaper (Korean Buddhism at the time) and became an intellectual figure representing the Buddhist world.

He, who worked on various writing and engaged in writing activities, contributed to “Voice of the People”, a magazine that led democratization as a progressive medium at the time in 1970. Starting with the first manuscript in 1972, he promoted Buddhism to people on the one hand and began to inform the world of the pain of the people suffering under the Yushin dictatorship by publishing various articles on social democratization on the other. It is noteworthy that it was his activity as a Buddhist monk, the figure of Buddhism, when the Buddhist circles seldom engaged in activities in the history of the social democratization movement in the 1970s.

He published a total of 16 articles such as columns and discussion poems on “Voice of the People” to convey Buddhist teachings, and also insisted on how social democratization should be achieved based on Buddhist teachings. In particular, with the promulgation of the Yushin Constitution in October 1972, he published poems offering resistance to the dictatorial regime, causing repercussions. These activities were monitored and suppressed by the government, and he got a lot of activities restricted. Shocked to see that young people were sacrificed by the Second Inhyukdang Incident amid rising levels of oppression, he retired to Songgwangsa Buliam(Bulilam Hermitage in Songgwangsa Temple) in 1975 to return to the original truth before the practice. He also conveyed Buddhist teachings through various writing activities there as well on the one hand and engaged in the voices of social democratization. I hope that the research of these Beop-jeong’s activities will be actively conducted and the history of social democratization movements in the Buddhist community will be re-established.

Keywords: 법정(法頂); 씨알의 소리; 함석헌 목사; 장준하; 사회민주화 운동; 송광사 불일암
Keywords: Ven. Beop-jeong; Voice of the People; Jang Joon-ha; Minister Ham Seok-Heon; Social Democratization MoveMent; Songgwangsa Buliam

Ⅰ. 서론

일반적으로 불교계의 사회민주화 운동을 거론하면 1980년대를 상기한다. 1987년 6월항쟁 전후로 우리사회에 일어난 민주화 운동은 불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86년 9월 7일 ‘9.7 해인사 승려대회’는 불교계의 자주화를 외치는 큰 함성이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민주화는 1980년대에만 근원을 두지 않는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매 시대마다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났고, 그와 관련된 활동가들을 찾을 수 있다. 1970년대도 마찬가지다. 이 시기는 불교계의 민주화 활동에 대한 연구들이 이루어지지 않은 듯 역사적 기록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기독교계는 1960년대부터 사회민주화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불교계는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수준이다.

본 논문은 1970년대 사회민주화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던 법정스님(法頂1), 1932-2010, 이하 법정이라 호칭)의 활동을 고찰하고자 한다. 법정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은 에세이스트로서의 법정을 떠오른다. 그만큼 1970년대부터 원적(圓寂)에 들 때까지 수많은 저술들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법정의 글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 그 안에 깊이 공감이 되는 가르침을 담고 있어, 사회 저명인사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원적에 들었을 때도 수많은 대중들은 우리시대를 살았던 한 성자의 마지막 가심을 추모했다.

헤아릴 수 있는 태어남과 더불어 헤아릴 수 없는 태어남까지도, 존재하려는 의지를 성자는 놓아버렸다네. 안으로 즐거운 삼매에 들어 자아의 태어남이라는 쇠사슬을 끊어 버렸네(이중표 역해, 『정선 디가니까야』, 2019: 298).

이처럼 우리사회에 큰 울림을 남겼던 법정은 출가 이후 해인사 시절부터 사회민주화에 눈을 뜬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에는 당시 민주화 인사였던 서울대 황산덕 교수, 함석헌 목사, 장준하 선생과 같은 인사들이 강연을 오곤 해서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법정은 해인사에서 서울을 오가며 동국역경원 역경위원과 <大韓佛敎>에 원고를 쓰면서 활동하는 동안 서울 종로에서 장준하 선생이 발행인으로 있었던 『思想界』사(社)를 다니다가 함석헌 선생을 처음 만난 시기이도 하다. 맑고 향기롭게 사보에는 “63년 봄, 종로 사상계사에 장준하 선생을 만나러 간 길에 함석헌 선생을 처음 만남(<맑고 향기롭게>, 2020: 9)”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법정은 또 자신의 저서에서도 사회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아 내고 있다.

어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니 울컥 목이 메었다. 모두가 착하디착한 이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루의 고된 생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눈매에서 뭐라 말하기 어려운 인간의 우수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이웃으로서의 정다움을, 굳게 맺어진 인연의 밧줄 같은 것을 문득 실감했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답답하기만 한 이 가을의 공기 속에서 그토록 선량한 눈매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어디서 무얼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이 뭘 잘못했다고 이 가을의 공기는 이렇게 숨이 막히는가. 언어가, 인간의 그 언어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들으려야 들을 수가 없다. 요즈음 신문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라디오를 들어도 눈물이 난다. 인간의 말이 듣고 싶어서, 우리들 이웃의 나직한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내 귀는 도리어 문을 닫는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모르겠다. 어제는 알 것 같더니 오늘은 모르겠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즐거움의 양지보다 괴로움의 그늘이 더 짙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시들어서 지고 있는 이 가을의 하늘 아래서는 …(중략)… 지형(紙型)까지 떠 놓았지만 언제 책이 되어 햇빛을 보게 될는지 알 수 없다. 영혼의 모음(母音)은 맑게 개인 하늘 아래서가 아니면 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바쁘신 중에도 선뜻 제자(題字)를 써 주신 소전(素筌) 손재형 선생님과 그림을 주신 장욱진 화백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해 가을 군사 독재 정부는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 소위 10월 유신으로써 선량한 국민들로부터 언론과 집회 결사등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했다.

1972년 입동절 다래헌(茶來軒)에서 저자 합장(법정, 2010: 9-11)

본격적인 대사회 활동은 법정이 1972년부터 <씨알의 소리>가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하면서부터다. 그 인연으로 <씨알의 소리> 관계자들과 교류를 하고 1973년 6월부터는 ‘편집위원’으로 이름을 올려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사회민주화 조직에도 활동하기 시작한다.

1973년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75년 젊은 목숨을 앗아간 제2인혁당 사건을 목격한 스님은 큰 충격을 받아 그해 10월 본래 수행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무소유 사상을 설파하며 자기다운 질서속에 텅 빈 충만의 시기를 보낸다(불교신문사, 2019: 310).

이러한 1970년대 법정의 사회민주화 운동 활동을 시기별로 투고한 <씨알의 소리> 원고를 분석하며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1970년대 초기 글들

1970년대 초(1970-1973) <씨알의 소리>에 보이는 법정의 원고는 총 4편이다. 토론회 참석 발언 1편과 수상 3편이다. 편수로는 4편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9편이다. 토론내용 1편과 8편의 수상(수필, 에세이)이다.

1. ‘民族統一의 構想’ 토론 발언

1972년 8월호 <씨알의 소리>는 ‘民族統一의 構想⓵’이라는 주제의 대토론회를 열고 있다. 소주제로 ‘민족노선의 반성과 새 진로’의 함석헌 발행인과 ‘7.4 남북공동성명과 민족재통합의 제문제’의 김도현 영남일보 논설위원이 주제발표를 했다. 여기에 토론자로 김동길, 백기완, 계훈제, 장준하, 함석헌 등 당시 사회민주화에 앞장섰던 인사들이 대거 나서고 있고, 이 자리에 법정이 불교계를 대표해 토론자로 나서고 있다. 이는 법정(法頂)이라는 이름이 <씨알의 소리>에 처음 등장하는 대목이다. <씨알의 소리>는 ‘奉恩寺스님’인 법정을 “奉元寺 스님(1972 8월호: 34)”으로 오기(誤記)하고 있다.

당시 법정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지 않았고, 다만 우리민족 문제에 관심이 있어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미 이전에 장준하 선생과의 인연은 있었으며, 이날 참석은 편집진과 교류가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972년의 당시의 법정스님은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로서 <불교신문>(당시는 <대한불교>)에 불교문제와 사회문제에 다양한 의견을 담은 글을 썼으며 사회 일간지와 기독교계 신문에도 진보적인 글을 써서 상당히 알려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전체 토론에서 법정의 처음 발언은 “저는 오늘 들으러 왔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어 법정은 “아직도 저는 통일 논의에 대한 자리에 참석해 본 일도 없고, 오늘 뭐 평소에 존경하던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신다고 해서 사실은 들으러 왔습니다. 저는 소박한 의미에서 과연 그 우리가 어떤 식으로 통일을 해야 할 것인가 이점에 대해서 생각한 것 말씀드리겠습니다(1972 8월호: 50)”라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발언에서 법정은 민족통일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일전에 국회에서 질의 답변한 것을 보면 7.4이전과 조금도 변화가 없고 또 그 질문이나 답변을 본다고 할 때 도저히 통일 가능성이 없는 걸로 저는 알았습니다. 또한 위정자들이나 실제 직업적인 정치인들이 통일에 대해서 아직도 전연 준비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가령 정보부장 말을 들으면 ‘대화 있는 대결’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저는 부정적입니다. 대화로서 ‘화해’가 있어야되지 어떻게 ‘대결’이 되느냐 그것입니다. 아까도 김 선생님2)께서도 말씀이 있었지만 대화의 정신이라는 것은 대결이 아니고 하나의 ‘화해’인데 ‘대화 있는 대결’이라고 할 때 과연 이것이 현실적으로 통일이 가능한가 할 때 저는 부정적입니다. 물론 언젠가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은 해야 합니다. 또한 어느 한쪽에 치우친 통일도 우리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호간에 양보를 안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무슨 통일은 차치하고라도 민족이 재결합으로 갈 수 있는 기본적인 노력은 무엇인가? 할 때 저는 몇 가지로 잡아 봤습니다. 이것은 물론 정치도 아무것도 모르는 소박한 하나의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되는 것입니다(1972 8월호: 50).

윗글에서 법정은 “정치도 아무것도 모르는 소박한 하나의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되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는 겸손한 표현으로 보여진다. 이미 법정은 불교계 내부와 불교언론 등 다양한 외부 언론에 글을 기고하며 자신의 진보적인 생각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법정은 계속해서 논리를 갖춰 첫째, 둘째, 셋째의 예시를 들면서 통일문제 대한 자신의 생각을 토론회에서 피력하고 있다.

첫째, 상호간에 종래의 고정관념, 가령 자유민주주의가 됐건 공산주의가 됐건 간에 종래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어느 한쪽이 이념이라든지 사상이 옳다고 고집할 때 현실적으로 재결합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대결로써 끝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지 재결합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종래의 고정관념에서 탈출할 이런 일이 첫째로 필요할 것 같고, 둘째는 제 자신도 그렇습니다마는 저쪽을 상호간에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쪽을 올바르게 알고 또한 이쪽을 바르게 알리는 일, 그동안 오해가 이해로서 전환될려면 우선 알고 알리는 일이 선행돼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만이 재결합으로 나갈 수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셋째로 가령 한 인간을 형성하는 것도 그렇고 어떤 집단을 형성하는 것도 그렇고 사상이나 이념이 얼마만치 중요하냐? 오히려 여기는 어떤 감성, 감정 이것이 더 선행되는 것이 아니냐할 때 가령 어떤 재결합이라, 민족통일이라 할 때 직업정치인의 염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전체민중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통일이라면 오히려 감정문제 이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여기서 민족이라 할 때 어떤 배타적인 것보다는 가장 인연이 짙은 이유, 다시 말하면 운명을 같이 하고 있는 민족으로서의 감정적인 동질화 이것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냐? 따라서 감정적인 동질화라는 것은 민족정서의 함양같은 것, 이런 것이 필요한 것 같고…(1972 8월호: 50-51).

탄탄한 논리를 전개하고 법정은 계속해서 함석헌 목사의 발언에 동조하는 발언을 이어가며 결론을 맺어간다.

넷째는 아까 咸(함석헌)선생님께서 말씀이 계셨습니다만 어떤 새로운 지도이념, 종래 어떤 기성관념에서 벗어난 가장 헌신적이고 이상적인 여기에는 현재보다 오히려 과거와 미래에 초점을 둔 그런 새로운 지도이념이 나와야 되지 않겠느냐? 저는 이렇게 소박하게 네 가지고서 생각해 봤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지금 분단이 비극이냐? 그렇지 않으면 재결합의 진통이냐? 우리 민족에게 어떤 것이 기여도가 크냐? 여기에서 우리가 선택의 기회에 놓여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어떤 개인이 화해할래도 그렇고 어떤 사회가 이루어 질 때도 그러한데 하물며 25년이나 단절됐던 남북한이 재결합할려고 할 때에는 역사적으로 어떤 상호간에 더 절실하고 아픈 그리고 진통을 거치치 않고는 상호 어떤 고정관념이라든가 이해에서는 재결합이 과연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 현재보다는 과거와 미래에 안목을 둔 새로운 지도이념이 나와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1972 8월호: 51).

“지금 분단이 비극이냐? 그렇지 않으면 재결합의 진통이냐? (1972 8월호: 50)”라는 발언은 법정의 사상적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단순하게 “들으러 왔다”고 했으나 철저하게 자신의 생각을 깊이 고민하고 사유의 과정을 거친 논리적인 발언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법정은 25년이나 단절됐던 남북한이 재결합할려고 할 때에는 역사적으로 어떤 상호간에 더 절실하고 아픈 그리고 진통을 거쳐야 함을 강조하며 ‘현재보다는 과거와 미래에 안목을 둔 새로운 지도이념’을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같은 내용으로 보아 법정은 이미 <씨알의 소리>를 발행하고 있는 인사들과 어느 정도 사상적 내용을 공감하고 있으며, 법정 나름의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인다. 이날 토론회는 법정이 처음 등장한 ‘교류의 마당’이었으나 그의 뛰어난 사회인식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영입하려는 생각을 하게 했을 것으로 본다. 이미 법정은 자신의 진보적인 생각들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피력하기도 한 상황이었다.

법정은 이날 토론회에서 토론자로 참석했던 유희세 당시 고려대교수로부터 “한국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봐서 공산주의에 대한 피해의식과 거기 대한 감정적인 반항의식이 공통적으로 있지 않았는가 그런 감이 있습니다. 불교에는 그런 점은 어떻는지 좀 말씀 할 수 있습니까?(류희세, 1972: 51)”라는 질문을 받고 통일에 대한 불교의 입장과 생각을 전한다.

우선 저쪽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신앙인으로서 어떤 영상을 생각할 수 없는 겁니다. 여기서 또 민족 민족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본다면 인간의 善의지에 바탕을 두지 않는 그런 어떠한 재결합이나 통일도 우리가 원할 수 없는 거지요.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6.25때 많은 피해를 불교가 받았습니다(1972 8월호: 51-52).

법정은 유희세 교수로부터 “이북의 불교는 어떻습니까?”라는 질문도 받고 “이북의 불교는 저희들이 일본을 통해 들어온 자료에 의하면 절간은 그대로 있습니다. 관리인이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지키는 또 외국 관광객들이 오면은 이렇게 사찰이 있다는 것을 하나의 전시적인 효과,(웃음) 이걸로써 존속한다고 합니다(1972 8월호: 52)”라고 답하며 북한 불교에 대한 소식도 전하고 있다.

2. ‘知識의 人格化’ 칼럼에 실은 6편의 글
1) 오랑캐 꽃은 오랑캐 꽃 답게

1년이 지난 1973년 <씨알의 소리> 3월호에 다시 법정의 글이 등장한다. ‘知識의 人格化’라는 제목으로 직함은 ‘스님’으로 표기하고다. 코너를 하나 만든 듯이 ‘法頂隨想錄’이라는 타이틀이 만들어져 있다. 여기에는 6편의 단편적인 칼럼이 게재돼 있다. 첫 번째 칼럼 ‘오랑캐꽃은 오랑캐 꽃 답게’를 보자.

한평생 數學이 좋아서 그것만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연구하는 수학자가 있다. 그는 數學에서 美意識같은 것을 느낄 정도로 그 길에는 통달한 사람이다. 연구실에서 풀리지 않던 문제가 山을 오르거나 바닷가를 산책하는 無心한 여가에 문득 풀리는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러한 그는 가끔 동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네는 지겹지도 않아서 평생을 두고 수학만을 그렇게 연구하는가. 그럼 자네가 하고 있는 그 일이 인류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때마다 그 수학자는 다음같이 대답했다고 했다. ‘오랑캐 꽃은 오랑캐 꽃 답게 피면 그만이지. 오랑캐꽃이 핌으로써 봄의 들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그건 오랑캐 꽃으로서는 알 바가 아니라네.’

어떻게 들으면 아주 오만 무례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의 대답은 그마만치 자신의 신념에 넘친 소리다. 오랑캐꽃이건 제비꽃이건 간에, 그 꽃이 그 꽃답게만 핀다면 한 두 송이를 피어가지고도 온 봄의 들녘을 술렁거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오랑캐꽃이 오랑캐꽃답게 피지 못하고, 개나리처럼 핀다거나 진달래처럼 핀다거나 혹은 주책없이 벚꽃처럼 피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정말 보아 줄 수 없는 꼴불견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오랑캐꽃만의 이변이 아니라 봄의 悲劇일 것이다(1973, 3월호: 20).

언뜻 보면 평범한 단순한 칼럼이지만 법정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기만의 소중한 개성을 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해 주고 있다. <씨알의 소리>에 법정의 이러한 글이 게재된 사실 하나로만으로도 당시 사회민주화 세력에게 법정의 글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분석된다. <씨알의 소리>는 암울했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는 진보매체로서의 위상을 굳건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지식인으로서의 법정의 진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2) 凡俗한 同質化

두 번째 수상록 ‘凡俗한 同質化’는 법정이 수필을 통해 우리사회의 문명의 획일성을 비판하고 자기 주체성의 상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러한 법정의 비판의식에는 당시의 획일화된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기도 했고, 자본주의적 문명에 대해 불교적 세계관을 담아 비판하는 법정의 세계관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들은 自己 빛깔을 지니고 살기가 정말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개인의 信念이나 個性이 둘레로부터 도전을 받는다기보다 조준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도도히 흐르는 劃一의 강물에 휩쓸려 끝없이 표류해야 할 大氣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日常을 돌아보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손으로 만져볼 수 있다. 한때는 無冠의 제왕이라고 제법 호기를 뽐내던 신문을 비롯하여 그 사촌격인 주간지와 라디오, 텔레비 등 이와 같은 媒體들이 우리들에게 획일적인 俗物이 되어 달라고 몹시도 보채대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빛깔을 빼앗고 얼을 앗아간다. 思考의 힘과 가치에 대한 판단력을 흐려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마약같은 힘을 가지고 그 안에서만 허우적거리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맹목적이라고 범속한 추종은 있어도 자기신념을 갖기는 어려운 것이다(1973, 3월호: 20-21).

1970년대 초에는 <씨알의 소리>에 원고를 게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시를 받던 시기라 법정의 글은 감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해 보이지만 언중유골(言中有骨)의 글은 획일화된 군사독재 정권에 대해 비유적 비판을 하고 있다고 분석된다. 법정의 글을 더 살펴보자.

이렇게 해서 오늘 우리들은 서로 닮아간다. 주택단지의 집들처럼 그놈이 그놈 같은 것이다. 동작뿐 아니라 사고까지도 범속하게 동질화되어 간다. 이쯤 되면 고유명사는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일련번호나 보통명사로서 우리들의 호칭을 대신해도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幸인지 불행인지, 인간은 범속한 일상성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기 생명의 전개, 즉 창조적인 활동을 원한다. 모험과 위험을 무릎쓰고라도 자기식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욕구인 것이다. 단 하나인 목숨도 희생해가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山을 오르는 것은, 산이 거기 그렇게 있기 때문에서일까. 물론 우리는 산을 보고 산을 오른다. 그러나 산이 나를 불러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산을 오르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힘, 그것이 곧 생명력인 것이다(1973, 3월호: 21).

평범한 칼럼 같지만 획일화된 ‘범속한 동질화’는 ‘사고의 힘과 가치에 대한 판단력을 흐려놓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법정의 결론을 살펴보자.

우리들의 창조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사전에 여러 가지 知識과 정보가 필요하다. 많은 이웃들과 함께 일에 얽혀 살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그러한 정보를 모르고서는 제대로 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더기로 공포 발효된 새 법의 조문을 외워두어야 하고, 지식과 정보를 배당 받으려고 비싼 값을 치르면서, 비현실적인 경쟁을 수 없이 겪으면서 좁은 門을 뚫고 모여든다. 이건 누구나 느낌직한 일이지만, 나는 책가게에 들를 때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그 많은 情報資料 앞에 압도당한다. 그토록 엄청나게 쌓여 있는 정보를 어떻게 다 소화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기가 질린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중 몇장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갑자기 왜소해진다. 그리고 우울하다(1973 3월호: 20).

1972년 10월에 확정된 유신헌법3)에 대한 비유적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칼럼은 급변하는 사회와 다양한 갈등이 현존하는 가운데 느껴지는 비애도 내포하고 있다.

3) 접촉이 過多한 현대인들

단순하고 검소한 삶을 추구하고 있는 법정은 자신의 글에서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러한 글이 ‘접촉이 과다한 현대인들’이다. 자신의 세계관을 초지일관하게 보이고 있는 법정의 글이 다른 이들의 글과 차별되는 대목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얼마만한 지식이 필요할까. 물론 사람에 따라 모르겠지만 많을수록 좋을 것 같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유용하게 쓰이고 대우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따른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知識이 필요하기 하지만, 때로는 過多한 지식이 인간을 매몰시킨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본래부터 따지기를 좋아한다. 그 가운데서도 知識人들은 더욱 분별하고 思量하기를 좋아한다. 말하자면 이유가 많은 동물이어서 단순 소박하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도리어 自繩自縛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이 말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하게 분별하고 있느냐의 뜻이다. 그와 같은 외부의 지식에만 의존할 때 우리는 자기 言語와 思惟를 박탈당한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접촉의 過小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다에서 인간적으로 소외감을 갖게 된다. 大地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하는 나그네가 된다. 파우스트이 비유를 들출 것도 없이, 회색의 이론에 묻혀 생명의 나무가 시들고 있는 것이다(1973 3월호: 21-22).

이 글은 곡학아세하는 많은 사람들이 돋보이기를 원하는 시대적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 대외적인 원고에서도 불교의 경전을 인용하고 있는 법정은 단순히 앎의 지식인 분별지(分別智)를 넘어 인간을 형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되는 지혜, 즉 무분별지(無分別智)에 의지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수행자답게 불교의 가르침을 체득해 불교적인 입장에서 세간에 올바른 지식인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럼 안다는 것이 인간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知識이 인간을 형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을까. 산스크리트語의 비즈냐나 vijnana는 知識을 가리킨 말이다. jnana는 ‘앎을’, vi는 ‘나누다’, ‘분할하다’는 뜻. 그러니까 아는 것은 쪼갠 것, 즉 分別이 지식이다. 그래서 分別智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이 분별지는 인격과 직접 관계가 없다. 그저 아는 것만을 뜻할 뿐이다. 일찍부터 인도 사람들은 이와 같은 지식을 分別 妄想이라 해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 대신 分別을 넘어선 無分別의 세계를 추구하고 또한 거기에 도달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無分別이란, 물 불을 가리지 못하고 허둥대는 것을 가리킴이 아니고, 시시콜콜하게 따지고 쪼개고 하는 分別 妄想을 초월한 경기를 뜻한다. 프라즈냐야(prajna)란 知慧를 가리킨 말인데, pra는 ‘갈설하다’, ‘통합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는 것을 통합하는 것이 지혜다. 그래서 지혜를 無分別智라고도 한다. 이 지혜는 人格과 직결된 것이므로,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知慧라고 佛典에서는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1973 3월호: 21-22).

4) 信念은 智慧로부터

출가 후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섭렵(涉獵)한 법정은 풍부한 불교경전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은 자신의 저서 『버리고 떠나기』에 ‘아직 끝나지 않은 出家’라는 글에서 잘 드러난다.

또 한 가지 일은 방선(放禪)시간에 법당 둘레를 거닐고 있었는데, 시골에서 온 듯한 아주머니 한 분이 장경각에서 내려오면서 나를 보더니 불쑥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방금 보고 내려오지 않았느냐고 하자, ‘아, 그 빨래판 같은 것이요’라고 되물었다. ‘빨래판 같은 것’이라는 이 말이 내 가슴에 화살처럼 꽂혔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한낱 빨래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받은 충격으로 그해 여름 안거를 마치고 나는 강원으로 내려가 경전을 배우고 익혔다. 국보요, 법보라고 해서 귀하게 모시는 대장경판이지만, 그 뜻이 일반에게 전달되지 않을 때는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나를 끝없이 부추겼다. 어떻게 하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것인가, 이것이 그때 내게 주어진 한 과제였다.

그 몇 해 뒤 통도사에 계신 운허(耘虛)스님에게서 한 통의 서찰이 왔다. 자금을 댈 시주가 나타나 숙원사업이던 『불교사전』을 만들까하는데 통도사에 와서 편찬 일을 도와 줄 수 없겠느냐는 사연이었다. 기꺼이 동참했다. 60년 초봄부터 이듬해 여름 사전이 출간될 때까지 편찬 일을 거들었다. 이 기간에 4.19와 5.16을 겪었다. 이때 운허 스님과 맺은 인연으로 해서 원고지 칸을 메우는 업이 지속되었다(1993: 264-265).

세상사에 무기력하게 대처하는 ‘무기력한 지식인’을 모습을 비판하기도 한 법정은 선어록을 예시로 들어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불교의 가르침이 세상에 어떻게 통용되는 지를 보여주기도 하고 불교의 지혜를 드러내 보인다. 그 대표적인인 칼럼이 ‘신념은 지혜로부터’이다.

9세기 중국의 禪僧으로 潙山이란 분이 있었다. 그의 語錄은 일찍부터 우리나라 禪家의 發心 修行者에게 교재로 쓰일 만큼 널리 알려졌다. 그의 문하에 키가 7척이나 되고 총명과 재주가 비상하게 생긴 香嚴이란 學人이 있었다. 위산은 향엄이 法器임을 한눈에 알아내고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을 떠나 한마디 말해 보아라.’ 향엄은 미리 생각하고 저리 따지면서 몇 마디 대답해 보았지만, 스승은 모두 아니라고 한다.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가지고 다니던 여러 가지 책들을 꺼내어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고 들은 것을 제쳐놓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다시 위산 앞에 나아가 가르쳐 주기를 청한다. 그러나 위산은 ‘내가 말하는 것은 내 소견이지, 그게 너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느냐’라고 한다. 향엄은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아 가졌던 책을 다 불살라 버리고 홀로 수행하던 끝에 그 본래면목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창백한 知識人, 무력한 지식인이란 말을 우리들은 가끔 듣는다. 향엄은 곧 오늘의 우리다. 평소에는 온 세상을 주름잡듯 큰소리 떵떵 치던 그 지식인이 어떤 상황 앞에서는 찍소리 못하고 비실비실 주저앉는 것이다. 막상 그 행동이 요구될 때 그는 움츠려들고 마는 것이다. 知識이 이런 것이라면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이것이 人格과 別個인 것을 우리는 이런 데서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1973 3월호: 22-23).

법정은 당시 나약한 지식인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수행자(위산의 제자인 향엄)’에 비유하며 ‘어떤 상황 앞에 비실비실 주저 앉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법정은 제도권에서의 교육제도와 교육방법이 이러한 나약한 지식인을 양성한다고 비판하며 지식을 배우지 말고 지혜를 깨우칠 것을 설파한다. 1973년 1월 법정은 최초의 수상집인 『靈魂의 母音』을 출간했던 시기로 세상에 그의 명성은 제법 알려진 상태였다. 그는 불교적인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려 했고, 불교적 사고로서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계도하려 했는데 이 칼럼에 잘 드러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쪼개는 分別에서는 지혜로운 행동이 나올 수 없다. 용기 있고 바람직한 行動은 이론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이러한 작용은 신념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럼 信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분별의 지식에서가 아니라 無分別의 智慧에로까지 深化되고 昇華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 형성의 기초교육 기관을 학교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그 학교교육의 맹점은 지식의 傳達에만 安住하고 있다는 것이다. 敎育이란 어원을 살펴보면 처넣는 것이 아니라 끌어내는 것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교육의 요체는 지식의 전달에 있지 않고 지혜의 啓發에 있다는 말이다. 메마르고 차디찬 정보의 교환에 그치기 때문에 거기에는 상호간에 人格이 교류될 수 없다. 옛날과는 달리 師弟間의 길이 단절되어버린 것도 바로 이 점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스승의 그림자까지 밟기를 주저했던 그 시절엔 스승이 그만큼 절대적이고 존엄한 존재였다. 그러나 식을 파는 일에 그쳐버린 오늘날의 관계는 마치 계약노동자의 사이처럼 돼버린 것이다. 한 학기에 얼마를 내고 몇 시간짜리 정보를 얻어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계약기간일지라도 비위에 거슬리면 그림자의 실체까지도 밟고 올라선다. 이러한 바탕에서 오늘의 인간은 형성되기 때문에 냉혹한 사회인이 될 수밖에 없다(1973 3월호: 23).

결론을 통해 법정은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의 상(像)을 제시하며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인격과 智慧의 전달자로서의 스승의 모습을 제시한다. 교육관에서 기계적으로 남의 책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견대로 의견을 개진하는 비판적 지식을 대하는 법정의 태도는 수행과 사회를 대하는 데 있어서 한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들 기억에 자리잡고 있는 스승의 像을 곱아보면 그렇게 많지 않다. 아직도 그분들이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은 많은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 아닌 것 같다. 크고 있는 우리에게 開眼의 자극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그 자극을 통해 우리 안에 접혀 있던 지혜의 날개를 펼치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스승의 像은 오랜 세월을 두고, 그러니까 계약기간이 만료된 뒤까지도 우리들 자신을 照明해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람직한 교육인가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스승의 像을 통해서도 如實히 알 수 있다(1973 3월호: 23).

5) 自身에 대한 凝視

법정은 계속해서 나약한 지식인에 대한 비유를 들면서 인격이 심화된 지혜를 갖춘 인간상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중 한편의 칼럼이 ‘自身에 대한 凝視’다. 이러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법정은 불교경전의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고 선어록도 거론하며 다양한 비유를 들었다. 결국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응시가 중요함을 설파하고 있다.

지식이 지혜로 深化되려면 거기에는 어떤 여과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日常을 客觀化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순수한 集中을 통해서 生의 밀도 같은 것을 의식하는 일이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응시함으로써 자기 존재에 대해서 自覺하는 일이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와 같은 원초적인 물음이 내려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부의 情報에서 벗어나 자기 內心의 소리를 듣는 일이다. 외부의 정보란 사실 한낱 소음 같은 것, 그것은 결국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우리들의 독창력을 매몰시켜 버린다. 우리들의 홀려 있다는 것은 온전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과다한 접촉으로 인해 홀로 있는 시간을 거의 잃어버린다. 빽빽하게 꽂혀 있는 密에서 虛를 익힐 필요가 있다. 無心한 경지가, 순수의식의 상태가 아쉬운 것이다(1973 3월호: 23-24).

자기존재를 온전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자신의 불교적 세계관을 펼치고 있는 법정의 글은 신선함을 주고 있다. “빽빽하게 꽂혀 있는 密에서 虛를 익힐 필요가 있다. 無心한 경지가, 순수의식의 상태가 아쉬운 것이다(1973 3월호: 24)”라는 표현은 불교의 세계관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홀로 있음은 보랏빛 외로움이 아니라 본래의 自己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것은 堂堂한 人間實存인 것이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순수해진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窮理를 한다. 가장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깊은 것을 들여다보게 되고 높은 것에 눈을 주게 된다. 또한 사람이 홀로 있을 때는 죽음이라든가 永遠같은 非日常的인 것을 헤아리게 된다. 저만치서 하루 하루 죽어가고 있는 자기모습을 본다. 말하자면, 껍질에서 알맹이를 찾는다. 그래서 제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이다. 眞空妙有라는 말이 있다. 텅 빈 데에 오묘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텅 비우지 않고는 새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자기 생명의 우물을 고이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禪家에서는 ‘入此門內하려면 莫存知解하라’고 타이른다. 이 문안에 들어오려면, 즉 진리의 세계에 들어오려면 분별을 두지 말라는 말이다. 이전까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새 눈이 열릴 수 있다는 간절한 당부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여과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은 自己의 무게와 존재의 미를 자각한다. 내가 지금 할 일이 무엇인가를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자기 생명을 展開한다(1973 3월호: 24).

이 글에서 법정은 ‘역사의 소리’를 언급한다. 역사의식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이를 언급하기 위해 법정은 “이전까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새 눈이 열릴 수 있다”며 “이와 같은 여과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은 自己의 무게와 존재의 미를 자각한다. 내가 지금 할 일이 무엇인가를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자기 생명을 展開한다(1973 3월호: 24)”고 설파하고 있다. 추상적인 내용으로 역사의식을 언급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암울한 유신독재의 체제하이었기에 이 글이 제시하는 바는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6) 갖기 위해 버린다

법정은 “갖기 위해 버린다”는 칼럼을 통해 ‘다시 자신으로 돌아와 자기관조를 통해 스승을 찾아야 한다’는 논지를 거듭 펼친다.

본질적인 스승은 내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인간의 책임과 긍지가 있을 것 같다. 외부의 것은 사람이나 事物을 막론하고 나에게 다만 자극을 줄 뿐이다. 그것을 긍정적으로나 혹은 부정적으로 受容하는 것은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다. 그러기 때문에 바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일도 소중하지만, 그것이 바른 것이 아닐 때는 선뜻 버리고 돌아설 수도 있어야 한다. 사실 찾는 일보다 버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는 되풀이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현대인들은 外部의 소음에 중독되어 버렸다. …(중략)… 한 인간의 생애는 唯一한 것이고 尊嚴한 것이라고 우리는 교과서와 그밖의 정보에서 얻어 들었다. 그러기 때문에 시시하게 살아버릴 수가, 아무렇게나 죽어버릴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더 말할 것도 없이 일종의 自己燃燒 같은 것 아닌가. 남이 타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훨훨 타서 재가 되는 것이다(1973 3월호: 24-25).

3. 外貨도 좋지만

1973년 <씨알의 소리> 6월호에 의미 있는 글이 한 편 올라온다. 編輯後記에 게재된 글로 “한가지 반가운 일은 法頂 스님께서 본지 편집위원이 되신 일이다. 마음 깊이 환영하고 싶다(1973 6월호: 77)”는 짤막한 내용이다. 이 때부터 법정은 <씨알의 소리>를 통해 사회민주화에 대한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한다. 법정은 이어 7월호에 ‘外貨도 좋지만’이라는 칼럼을 게재한다. 목차에는 ‘편집위원 컬럼(1973 7월호 표지)’이라고 전재하고 김동길 연세대교수의 칼럼 ‘民衆의 지팡이’이와 함께 싣고 있다.

우리들이 잘 살려면 外貨를 많이 벌어 들여야 한다는 것은, 국민학생들까지도 교과서에서 배우 익히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오로지 그 외화 획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중략)… 그들이 우리나를 즐겨 찾아드는 이유는 新生 대한민국의 發展相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妓生 파티’에 최대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중략)… 일본의 돈주머니 앞에 납작 엎드려 버린 우리를 밖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생각만해도 부끄러운 노릇이다. 미국이나 구라파의 ‘눈들’은 요즘의 우리를 보고 ‘한국은 일본의 창녀야!’하고 비웃는단다. 우리가 쪽발이들의 창녀란 말인가. 이런 소리를 듣고도 우리는 그 外貨를 위해 못들은 체 잠잠히 있어야 된단 말인가(1973 7월호: 16-19).

뚜렷한 역사의식을 보이고 있는 이 칼럼은 법정이 일본의 왜곡된 한국관광을 비판하며 우리의 굴욕적인 자세에 대해 “우리가 쪽발이들의 창녀란 말인가”라는 표현까지 쓰며 외화벌이도 좋지만 비도덕적인 행위에 눈감는 시대흐름을 비판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야 함을 강변하고 있다. 진보인사 법정이 우리사회를 향해 사자후(獅子吼)를 일갈(一喝)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4. 趙州禪師

1973년 <씨알의 소리> 10월호에 법정의 칼럼 ‘趙州禪師’가 게재된다. 역시 ‘편집위원 컬럼’이라는 이름으로 김성식 전 고려대 교수의 칼럼 ‘애틀리와 그라버’와 함께다. 불교적인 내용 가운데 禪語錄인 『趙州錄』을 매개체로 ‘平常心이 道’라는 가르침을 전하는 이 칼럼은 지식이 단순한 알음알이인 지해(知解)가 아닌 지혜(智慧)를 일깨워야 한다는 논지를 펼치고 있다.

사변적인 지식은 우리를 피로하게 하지만, 철저한 체험을 통해서 發音된 말들은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주기 때문이다. <趙州錄>은 책장마다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活字 밖의 소식을, 그러니까 出世間問題인 안목을 띄워 주고 있는 것이다(1973 10월호: 10).

이상 1970년대 초기 <씨알의 소리>에 게재한 9편의 법정 수상록과 토론의 글들은 그 자체로 상당한 반향을 불러왔다.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법정의 글들은 불교를 알리면서도 불교가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당시는 불교계 인사 중에 사회민주화에 참여하는 인사는 있었지만 승복을 입고 사회민주화를 언급하는 스님은 보이지 않았던 상황이라 법정의 글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고 분석된다.

Ⅲ. 1970년대 중·후기 글들

1970년대 중·후기(1974-1979) <씨알의 소리>에 보이는 법정의 원고는 총 7편이다. 이중 6편은 칼럼 형식이며 1편은 詩다. 여기에서 특이한 사항은 서정적인 칼럼을 쓰는 법정이었지만 세태를 비판하는 글이 칼럼과 함께 1편의 시(詩)가 나온다. 이 시는 유신독재에 대해 대항하는 내용으로 ‘저항시인 법정’의 면모가 보인다. 또한 장준하 선생의 서거 1주기를 맞아 쓴 글이 1편 있는데 이 역시 당시 민주화에 헌신했던 인사에 관한 글이라는 점에서 소위 ‘반정부 인사 법정’의 모습이 그려진다.

1. 悲

1970년대 중기에 접어드는 1974년 4·5월호 합본호 <씨알의 소리>에 법정의 글 ‘悲’가 게재된다. 이 글은 <씨알의 소리> 창간 4주년을 맞아 법정이 기념강연을 한 내용을 요약한 글로 “本誌創刊4週年記念講演秒(1974 4·5월호: 64)”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서 법정은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민족통일에 대한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피력하고 있다.

이런 자리에서 씨알가족들과 함께 만나게 된 인연을 감사드립니다. 편집실로부터 佛敎애기를 해 달라고 해서 제가 아는 것이 또 그것뿐이라 佛敎애기를 중심으로 해 볼까 합니다. …(중략)… 圓覺經이라는 경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心이 청정하면 온 法界가 淸淨하다’ 한 마음이 떳떳하면 온 세계가 떳떳하다는 말입니다. …(중략)… 불교의 기본사상은 緣起입니다. 즉 關係性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즉 相依相關관계입니다. …(중략)… 거듭 말씀드립니다.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 중생이 만일 병에서 일어나면 나도 털고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보살이 생사유전하는 것은 오로지 중생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략)… 좀 낡은 표현입니다만 8.15 직후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도 거듭 음미할만한 고전적인 가치가 있는 말입니다. 이기적인 우리에게, 나약한 소시민들에게 던진 엄숙한 人間宣言입니다(1974 4·5월호: 64-72).

2. 파장

1974년 10월 유신헌법이 통과된 시기에 법정은 ‘파장’이라는 칼럼을 <씨알의 소리>에 싣는다. 시골장터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열거하며 전통시장의 정겨움과 정부가 이런 시장을 철폐하려 한다는 정책을 비판하기도 한다. 글 뒤편에는 시장통에 야바위꾼들이 전통시장꾼들을 속이다가 혼나는 모습을 그려낸다. 법정은 이 글을 통해 선량한 사람들도 인내심에 한계가 올 때는 마침해 폭발해 응징을 한다고 결론을 내고 있다. 마치 유신헌법을 비유해서 ‘민초들의 성난 마음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듯하다.

시골에서 장이 서는 날은 흐뭇한 잔칫날이다. 날이 갈수록 각박해만 가는 世情임에도 장터에는 아직 人情이 남아 있다. …(중략)… 언젠가 ‘정부당국에서 시골의 장이 소비적이고 비능률적이라는 이유에서 철폐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심히 아쉽고 안타까와 했었다. …(중략)… 그러나 어수룩하고 무력한 듯한 겁쟁이들도 忍耐의 極에 달하면 자신의 生存을 위해서라도 피사적인 抗拒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흩어져 보잘 것 없던 개개인이 하나로 結集될 때는 그 어떤 不義와 횡포도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生命의 妙理를, 나는 그날의 파장에서 거듭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중략)… 파장을 보고 화엄사로 들어가면서 나는 ‘잔치는 끝났더라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더라’하고 未堂의 詩 ‘行進曲’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외웠었다(1974 10월호: 62-65).

3. 돌아본다 1974년

<씨알의 소리> 1974년 12월호에서 법정은 정부를 비판하는 장문의 글 ‘돌아본다 1974년’을 실었다.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주고받는 인사말은 한결같이, 그 동안 별 일 없었느냐는 것이다. ‘별일 없었느냐’ 혹은 ‘별고 없었느냐’는 이 말밖에 무슨 인사말을 나눌 수 있겠는가. 그만큼 우리들은 별일과 別故 속에서 별스럽게 살았던 것이다. 이 세상이 온통 ‘별일’뿐인데 그 안에 사는 우리들에게 어찌 별일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이런 인사말은 이제 우리들에게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관광호텔에 투숙한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러한 인사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1974년 이 韓半島 남쪽에서 일부 몰지각자로 불린 사람들에게는 밤사이의 안부가 아니라 白晝의 안녕이 문제였기 때문이다(1974 12월호: 43).

‘돌아본다 1974년’은 10쪽에 달하는 긴 글로 당시 암울했던 시대상황을 잘 보여준다. 법정이 살았던 처소에 사복경찰이 붙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내용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1월 8일 밤 대통령 긴급조치가 발동되자 그때까지 ‘憲法改正 請願운동’을 벌였던 중추 멤버들은 갑자기 沒知覺者가 되어 호되게 다스림을 받는다. 내게는 그 다음날 食前아침 機關에서 왔다는 네 사람의 私服이 그 시각부터 고정배치의 임무를 띠게 된다. 그들은 내 一擧一動을 낱낱이 살피어 시간마다 上部에 보고한다. 변소에만 가도 따라붙을 만큼 그 私服들은 충직한 그림자가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아픈 것은, 절에 왔던 신도들을 내 앞에서 검문하던 일. 이 일은 가죽잠바와 함께 두고두고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電話가 공공연하게 가로채이는 일은 그전부터 있는 일이지만, 우편물도 검열을 받아 숫제 개봉이 되어 들어오곤 했다. 그리고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어떤 書信은 전혀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저 專制君主 시절에도 上疏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억울한 백성들이 두둘길 북이 있었다는데, 이 時代의 市民들은 자갈을 물린 채 쉬쉬 눈치만 살피면서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와 장님이 되었던 것이다. 오로지 國民總和를 위해서(1974 12월호: 44).

박정희 독재정권이 1972년 공포한 유신헌법으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냈고 이로 인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74년에는 신년 벽두부터 긴급조치가 발동되고 민주인사들을 탄압하자 법정은 “정말 무섭고도 비민주적인 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며 구체적인 내용을 적고 있다.

한 사람이 갑자기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말을 해 놓으면 그 시간부터 그것은 무서운 법이 된다. 그 말을 털끝만치라도 어기거나 비방하면 15년 징역에다 또한 15년 자격까지 정지된다. 일찍이 이런 법이 우리 歷史 안에 언제 있었던가. 이런 법이기 때문에 民主的인 법으로 고쳐야 한다고 청원운동을 벌였던 것이 아닌가. 이 일로 우리들은 中央情報部로 혹은 非常軍法會議 검찰부로 실려 다녔었다. 많은 동료들이 重刑을 받아 복역중이다(1974 12월호: 44).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부터 헌법개정 청원운동을 벌였던 당시 민주인사들은 상당한 감시와 고초를 당했는데 함석헌, 계훈제 장준하, 김동길 등이 이들이었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내용의 시국선언인 ‘國民宣言’이 1974년 11월 27일 발표되었다. 여기에 불교계를 대표해 법정도 앞장서고 있다.

政府가 곧 國家라는 專制的 思考方式은 民主主義에 逆行하는 것이며 反政府는 反國家가 아니다. 民主國家의 國民은 國家를 위하여 政府에 수시로 要望事項을 提示하여 政府의 失政을 批判하여 是正을 促求하고 나아가서는 政府의 退陣까지 주장할 수 있다는 데에 民主體制의 發展的 生命力이 있는 것이다. 오늘 國家紀綱을 송두리째 紊亂시키는 갖은 不正腐敗가 이 나라에서 판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民主主義의 本質的 要素인 自由로운 批判이 封鎖되어 온 때문이다. 우리는 反政府行動으로 말미암아 服役, 拘束, 軟禁등을 당하고 있는 모든 人士들을 赦免 釋放하고 그들의 政治的 權利를 回復시키고 言論의 自由를 保障할 것을 要求하는 바이며 그럼으로써 民主的 過程을 통한 國民的 合意위에 國家課業의 遂行을 뒷받침할 참다운 國民總和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確言한다(1974 12월호: 44).

이러한 절박한 시국선언은 당시 <씨알의 소리> 관계자 가운데 편집위원인 김동길, 장준하가 구속 중이었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한 당시에는 문화공보부가 <씨알의 소리>에 대한 압류와 삭제 지시, 인쇄인으로 하여금 인쇄를 기피하거나 거부케 하는 압력행사 등에 대한 항의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이 적시돼 있다. 당시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법정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유신헌법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시국선언에 불교계 인사로 유일하게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씨알의 소리>, 1974 11월호: 3-4). 이 시기는 법정이 전면으로 사회민주화에 앞장섰던 시기다.

4. 1974년 1월 - 어느 沒知覺者의 노래

1973년 6월호 <씨알의 소리>에 처음 ‘편집위원’ 이름을 올린 법정은 이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사로 활동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민주인사들과 교류하며 감시를 받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 인사들의 숱한 감시를 받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 ‘1974년 1월 - 어느 沒知覺者의 노래’라는 詩다.

1.

나는 지금

다스림을 받고 있는

一部 몰지각한 者

大韓民國 住民 3천 5백만

다들 知覺이 있는데

나는 知覺을 잃은 한 사람.

그래서, 뻐스 안에서도

길거리에서

또한 住居地에서도

내 곁에는 노상

그림자 아닌 그림자가 따른다.

機關에서 고정배치된

네 개의 私服

그 그림자들은

내가 어떤 動作을 하는지

스물 네 시간을 줄곧 엿본다.

…(중략)…

8.

우리는 지금

다스림을 받고 있는

一部 몰지각者

大韓民國 住民 3천 5백만

다들 말짱한 知覺을 지녔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知覺을 잃었는가

아, 이가 아린다

어금니가 아린다.

입을 가지고도 말을 못하니

이가 아리는가

들어줄 귀가 없어 입을 다무니

이가 아리는가

들어줄 귀가 없어 입을 다무니

이가 아리는가

오늘도 부질없이

齒科病院을 찾아 나선다.

흔들리는 그 계단을 오르내린다.

- ‘1974년 1월 -어느 沒知覺者의 노래’ 일부(1975 1·2월호: 60-66)

8연으로 된 위의 시는 특별히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읽는 자체로 당시 상황을 이해를 할 수 있다. 당시 정치적 상황이 어떠했으며 법정이 받았던 감시와 탄압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박정희 정권의 막강한 권력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이런 시를 쓴 법정의 강직함과 정의감에 불탔던 감정을 표현한 시로 평가된다. 이 시의 제목 아래에는 “本誌 編輯委員”이라는 직함이 적혀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5. 장준하 선생님께 띄우는 편지

법정은 장준하 선생 서거 1주기를 맞아 추모의 글 ‘장준하 선생님께 띄우는 편지’를 <씨알의 소리>에 게재했다.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사였고, 오랫동안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법정이 송광사 불일암으로 은거한 지 1년여가 지난 시기였다.

선생님이 어처구니없이, 정말 어처구니없이 우리 곁을 떠난 지 한 돌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다 그런 것이긴 하지만, 장 선생님의 죽음처럼 그렇게 허망(虛妄)한 경우는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무렵 산거(山居)를 마련하느라고 산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중략)… 장 선생님을 처음 뵙기는 『사상계(思想界)』 시절입니다. 제가 해인사에 머물고 있을 때지요. 서울 올라간 김에 사상계사(思想界社)로 찾아갔더니 아주 반겨주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마침 함석헌 선생님도 계셨지요. 함 선생님이 저를 소개해 주시더군요. 그 후 시절이 잘못되어 가면서 우리들은 만날 기회가 잦았습니다. 그때까지 산에만 묻혀 살던 저에게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눈뜨게 해 주셨습니다. <씨알의 소리> 편집회의를 몇차례 우리 茶來軒에서 열 때, 다른 분은 더러 빠지는 일이 있어도 함 선생님과 長 선생님만은 거르는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중략)… 우리들의 시대가 보다 밝고 건강해질 때까지 우리들의 걸음은 멈출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늘 함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올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더위에 안녕히 계십시오. 분향(焚香) 합장(合掌)(1976 8월호: 28-31).

‘松廣寺 佛日庵·스님’이라고 소개돼 있는 법정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송광사 불일암으로 은거에 들어가서도 세상을 향해 올곧은 목소리를 냈던 것으로 확인되는 글이다. 글 내용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법정은 장준하 선생과 함석헌 목사와의 인연이 1960년대 중후반 해인사 시절부터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어 그들의 끈끈한 유대관계도 파악된다. 다래헌에서 편집회의와 ‘시절이 잘못되어 만날 기회가 잦았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일찍이 이러한 민주인사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했던 법정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활동은 물흐르는 듯 자연스럽게 진행된 듯하다.

6. 마하트마 간디의 종교

1976년 <씨알의 소리> 11·12월호에는 ‘예수의 참모습’이라는 특집코너를 마련했는데 법정은 ‘마하트마 간디의 宗敎’라는 주제로 글을 쓴다. “편집자의 요구는 ‘기독교 밖에서 본 예수’를 써 달라고 하지만 필자의 입장으로는 아무래도 감당하기 거북스럽다(1976 11·12월호: 44)”고 밝히며 간디가 말하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여기에서 법정은 간디가 말하는 종교에 대한 평가와 비폭력을 중시하는 간디의 생각들을 언급하며 진정한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논파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한 장소에 모이는 각각 다른 길이다. 같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따로 따로의 길을 간다고 해서 달리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실 종교는 인간의 수만큼 많이 존재할 수 도 있다. 자기 종교의 진수를 이해한 사람은 다른 종교의 진수도 함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비폭력은 인간의 법이고 폭력은 짐승의 법이다. 짐승에게서는 정신은 잠들고 완력만이 법인데 대해서, 인간의 존엄은 精神力이라고 하는 한층 높은법에 따른 것을 바란다. …(중략)… 그러므로 비폭력은 단순히 종교적인 성자의 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일반 민중을 위해 확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1976 11·12월호: 46-48).

7. 佛敎에서 본 惡의 문제

1977년에 접어들어 법정은 <씨알의 소리>에 글을 싣지 않는다. 한 해를 지나 1978년 6월호에 ‘佛敎에서 본 惡의 문제’라는 글을 싣는다. ‘惡’이라는 주제로 특집호를 만들었는데 여기에 법정을 소개한 내용에는 ‘松廣寺 佛日庵 스님’이라고 밝히고 있다. 편집위원을 그만 둔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글에서 법정은 불교적인 입장에서 본 악에 대한 입장을 심도 있게 펼치고 있다.

악이란 더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악행을 가리킨 말이다. 공동체에서 정해진 생활규범, 즉 계율을 깨버리는 것을 비롯하여 일반의 세간적인 악한 행위를 뜻한 말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악은 그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惡行이 나올 수 있는 근원을 문제 삼는다(1978 6월호: 47).

Ⅳ. 결론

이상과 같이 법정의 1970년대 사회민주화 운동을 고찰해 보았다. 법정은 1973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사회민주화 운동에 참여한다. 이 시기 법정은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에도 동참해 유신헌법에 대한 저항운동을 한다.

이러한 시기에서 법정은 <씨알의 소리>에 다양한 원고를 게재했다. 1970년대 초기인 1970년부터 1973년까지 시기에는 토론과 칼럼의 성격의 글 9편을 게재한다. 이 시기 법정의 글은 불교의 교리에 입각해 사회를 해석하는 칼럼이 주를 이룬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의 중·후기에는 저항시 1편을 비롯한 칼럼 7편을 게재하고 이 시기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1972년 유신헌법을 공포한 후 폭압정치를 하던 시기다. 이 당시 법정은 긴급조치 반대와 민주인사 탄압을 반대하는 글과 시를 연이어 발표하며 강력한 저항운동에 나선다. 이러한 법정의 활동은 불교의 민주화 운동사에 조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법정은 1970년대 이후에도 사회민주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글을 썼다. 특히 1980년 광주항쟁에 대해서도 진실을 알리려는 글을 쓰기도 했다. 참혹했던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대 중반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진실이 밝혀지면서 해마다 시위가 일어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법정은 글을 통해 과감하게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세상에 내놓는다.

5월에 들어서 경향 각지의 대학에서 내세운 주장은 ‘광주사태의 진상을 밝히라’는 것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광주사태! 그동안은 금기사항인 양 언급하는 것조차 꺼려 그저 뒷전에서 쉬쉬하고 말았었다. 그래서 광주권(光州圈) 밖의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부의 발표만 믿고 그런 줄 알았는데 지난번 총선거를 통해 유세장마다 광주사태가 커다란 쟁점을 드러나게 되었다.…(중략)…나라 밖에서 보도되고 있는 생생한 영상 자료를 빌릴 것도 없이, 이른바 광주사태에 대해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 살벌하고 끔찍하고 무자비한 만행의 현장을 수많은 사람들이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기 어려운, 하늘과 땅이 함께 치를 떤 살육이었던 것이다(법정, 1986: 342).

일반적으로 법정을 평가할 때 자연주의에 심취한 에세이스트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의 행적으로 고찰해 보면 불교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체화해 그 가르침을 사회에 구현하려 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법정은 출가 이후 1960년대는 해인사에서 경학을 익히고 수행을 하면서 사회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1970년대에는 진보적인 매체인 <씨알의 소리>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대표적인 불교인사로 사회민주화 운동에 나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는 독재정권하에서 민주화운동이 매우 엄혹했으며 기독교계의 활동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정의 활동은 매우 두드러졌으며, 더구나 필력으로 할 수 있는 영향력과 의지로 감당해야 할 고통은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 1980년 이후에도 광주민중항쟁 등 사회민주화에 침묵하지 않았던 법정의 활동은 불교민주화 운동사에서 재조명되어야 하며,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에서도 기록되어야 할 역사의 한 조각이다.

Notes

‘법정스님 행장’, 2019, 『낡은 옷을 벗어라』, 불교신문사, pp.310-311. “1932년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안길 81(선두리)에서 태어났다. 1956년 효봉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후 통영 미래사, 지리산 쌍계사에서 스승을 모시고 정진했다. 이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기초를 닦았다. 1960년 통도사에서 『불교사전』 편찬작업에 동참하였고, 1967년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스님과 더불어 불교경전 번역을 하며, 불교계 언론과 유력한 신문에서 죽비같은 글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중략)…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모임’을 발족하여 1994년 3월 첫 대중강연을 시작했다. …(중략)… 1997년 12월 14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창건되었다. …(중략)… 2010년 3월 11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 원적(세수 78세, 법랍 55세)에 들었다.”

여기서 김 선생은 김동길 前 연세대 교수(당시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활동)를 지칭하는 말이다. ‘민족문제의 구상/토론회’, <씨알의 소리> 1972년 8월호, p.46. 이곳에서 김동길 교수는 ‘대결보다는 대화로 남북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논지를 펼치고 있다.

포털 다음(Daum) 백과사전의 유신헌법 정의다. “제4공화국의 헌법. 1972년 10월 대통령특별선언에 따라 대한민국 헌정사상 7차로 개정되었다. 전문 12장 126조 및 부칙 11조로 되어 있다. 1972년 5월초부터 개헌작업을 추진하여, 11월 21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었다.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대한 전면부정과 대통령에게 권력집중 및 반대세력의 비판에 대한 원천봉쇄를 특징으로 한다.”(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7a155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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