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m and Society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특집 1 | 자장율사와 정암사의 역사

자장 관련 연구의 성과와 과제

신선혜*
Sun-hye Sin*
*호남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Assistant Professor, Honam University

© Copyright 2021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Nov 24, 2021; Revised: Dec 15, 2021; Accepted: Dec 17, 2021

Published Online: Dec 31, 2021

국문 초록

자장(慈藏)에 대한 연구는 착종된 사료에 대한 합리적 이해와 기존 사료를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방대한 연구성과를 모두 정리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자장 연구에 논점이 되는 부분을 선별하여 연구의 현황과 재고가 필요한 부분, 그리고 또 다른 시각에서의 해석 가능성 등을 제시해보았다.

논점은 크게 자장의 생애-생몰년 및 출가동기-, 입당(入唐) 행적-오대산행-과 신라사에 있어 그의 정치, 외교적 역할, 그리고 사상과 신앙 경향-계율 및 화엄 등으로 대별된다. 각 논점별로 연구경향의 특징이 발견되었는데, 자장의 생애 및 입당 행적과 관련한 연구들은 자장 관련 사료의 취신 여부에 따라 다른 결론이 도출되었다. 원효, 의상을 제외하면 한국 고대의 승려 중 자장은 비교적 여러 곳에 기록이 남겨져 있음에도 인물 연구의 가장 기본적 주제인 생몰년에 대해서도 연구자 간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료의 착종이 심하고, 당대 혹은 후대의 변형된 인식이 사료에 다수 반영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이는 자장이 그만큼 다양한 행적을 보였고, 나아가 후대에까지 그의 위상에 대한 천착이 지속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파악할 수 있다.

자장의 정치, 외교적 역할에 대한 연구들 역시 그의 행적에 대한 사료 간 상반된 기록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나, 이와 함께 당시 신라의 국내적 상황과 자장이 입당(入唐)을 통해 파악한 중국의 정치, 사상적 변화상 등을 바탕으로 그의 위상이 가늠되었다. 특히 동시기 김춘추의 활동 양상과 비교하여 파악하고, 자장의 말년 기록의 모호함이 그의 정치적 실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자장 관련 연구의 대부분은 그의 사상 및 신앙의 경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앞서의 연구들과 달리 견해 간 대립을 보이지는 않지만, 특히 자장의 화엄사상을 강조하는 견해들은 그의 입당 후 오대산행에 대한 긍정이 토대가 되는 만큼 사료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주요한 연구방법이 되었다.

그간 다양한 접근을 통해 방대한 양의 연구성과가 도출되었음에도 여전히 사료로 돌아가 이를 면밀히 살피고, 방증 사료에 이르는 관련 내용에 대한 천착이 필요함을 본고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Abstract

Research on JaJang (慈藏) is progressing toward a rational understanding of mixed historical records and analysis of existing historical records from a new perspective. Within the limitations of not being able to summarize all of the vast research results, this paper selected the issues that are the subject of JaJang's research and suggested the current status of the research, the areas that need reconsideration, and the possibility of interpretation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The issues are broadly divided as follows: The life of JaJang, year of his birth and death, motives of become a Buddhist monk, entering the Tang Dynasty, the Journey to Mt. Odae, his political and diplomatic roles in the history of Silla, tendencies of thought and belief, religious precepts and Hwaeom, etc.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search trend were found for each issue, and different conclusions were drawn depending on whether the JaJang-related sources were trusted or not in the studies related to the life of JaJang and entering the Tang Dynasty. With the exception of WonHyo and EuiSang, among the Buddhist monks of ancient Korea, JaJang has been recorded in relatively many places. Nevertheless, the fact that researchers cannot agree on the most basic subjects of character research, such as the year of birth and the year of death, means that the historical records are seriously inconsistent with each other and that many of the changed perceptions of the contemporary or later generations are reflected in the historical records. However, it can be understood that this fact proves that JaJang showed that many different traces, and furthermore, research on his status continued until later generations. Studies on JaJang's political and diplomatic roles were also conducted in the direction of rationally interpreting the conflicting records of his trace but at the same time, his status was assessed based on the domestic situation of Silla at the time and the political and ideological changes in China that JaJang grasped through entry into the Tang Dynasty. In particular, at the same time, his traces were compared with the activities of KIM CHUN-CHU, and the view that the ambiguity of JaJang's later records stemmed from his political resignation was mainstream.

On the other hand, most of JaJang's research was to identify the trends of his thoughts and belief. Unlike previous studies, there is no conflict between views in this regard, but in particular, in the views that emphasize JaJang's Hwaom Idealism (Flower Garland Sutra), a thorough analysis of historical records became a major research method as it is the basis for his journey to Odaesan after entering the Tang Dynasty.

Even though a vast amount of research results have been derived through various approaches, this paper was an opportunity to confirm once again that it is necessary to go back to historical records and examine them closely, and to delve into related contents ranging from evidence to historical records.

Keywords: 자장(慈藏); 오대산(五臺山); 계율(戒律); 화엄(華嚴); 계단(戒壇); 수계(受戒)
Keywords: JaJang (慈藏); Odaesan (五臺山); Religious Precepts (戒律); Hwaeom (華嚴); A Platform of Receiving the Religious Precepts (戒壇); Ordination Ceremony (受戒)

Ⅰ. 머리말

한국의 사찰 중 그 시원을 고대로 보는 사찰의 대부분이 원효, 의상 그리고 자장으로 개창조(開創祖)를 삼고 있다. 다만 그 중에서도 신라불교의 대표자로 원효, 의상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는 자장에 대한 사료가 상대적으로 적게 남아 있고, 현존하는 그의 저술을 확인할 수 없는 점이 그 이유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자장은 수계제(受戒制), 교단 정비 등 불교계의 여법한 조직화와 체계화에 일조하였고, 그의 행적은 건탑(建塔)의 공덕을 강조하는 사리신앙(舍利信仰)의 시원이 되었으며, 당(唐)-신라를 막론하고 당대 왕실의 존경을 받은 까닭에 신라 불교, 나아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미 자장 당대부터 시작되어 그의 행적이 645년 도선(道宣)이 편찬한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입전되었고, 668년에 편찬된 도세(道世)의 『법원주림(法苑珠林)』 등 중국 사서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는 하대 황룡사 9층 목탑의 중수 시 그의 생애가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이하 「찰주본기」)에 정리되었다. 고려에 이르러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그간의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여 고려로 이어진 자장의 모습이 정리되었고, 이후 각종 사찰 기록, 문집 등에 그의 행적이 전해졌다. 특히 『삼국유사』에는 「자장정율(慈藏定律)」을 비롯한 다수의 조목에 자장의 기사가 실려있어1) 한국 불교사 상 그의 위상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사료를 통해 자장의 생애와 행적을 복원할 수 있으나, 자장의 생몰년, 입당시기, 행적 등에 대해 사료 간 차이가 보여 자장 연구에 있어 이들 사료의 비판적 분석이 선행되어야 했다. 초기 연구에서는 대체로 『삼국유사』를 신뢰하였으나, 점차 당대 사료의 중요성이 인식되며, 『속고승전』, 「찰주본기」 등의 기록에 주목하였는데, 이에 따라 두 사료군 간 가장 큰 차이점인 자장의 오대산행 여부가 논의의 쟁점이 되었다. 최근에는 1307년 작성된 『오대산사적기(五臺山事蹟記)』 「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이하 「제일조사전기」)의 신빙성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고, 돈황 막고굴의 <오대산도(五臺山圖)>와 돈황문서 중 「오대산찬(五臺山讚)」에 자장을 지칭하는 ‘신라왕자(新羅王子)’가 주목됨에 따라 자장의 오대산행을 기록한 『삼국유사』를 신뢰하는 시각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자장은 중고기 말∼중대 초에 당-신라 간 외교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만큼 일찍이 그의 정치, 외교적 역할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이는 사료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당시의 정치, 외교적 상황 속에서 자장의 위상을 가늠한 것으로, 김춘추(金春秋)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의 위상은 다르게 파악되었다. 자장과 관련한 최근의 논고들이 주로 이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실상 자장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시작된 일제강점기 전후의 연구 역시 ‘호국불교(護國佛敎)’라는 일본 불교의 프레임 속에서 자장의 황룡사 9층탑 건립을 비롯한 정치적인 역할에 대한 고찰로 시작되었다(江田俊雄, 1935).

한편, 자장에 대해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부분은 그의 사상에 대해서이다. 일연(一然)도 『삼국유사』에서 자장의 가장 큰 업적을 “정율(定律)”로 내세웠듯이 계율의 정립과 이에 따른 불교계 재편 양상에 대해서는 한국학계의 초기 연구에서부터 주목되었다. 그를 계율종(戒律宗)의 종조(宗朝)로 보는 시각에서 시작하여 계단의 정립 여부에까지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화엄(華嚴) 및 사리신앙의 정립자로서 자장을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자장에 대한 연구는 착종된 사료에 대한 합리적 이해와 기존 사료를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방대한 연구성과를 모두 정리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자장 연구에 논점이 되는 부분을 선별하여 연구의 현황과 재고가 필요한 부분, 그리고 또 다른 시각에서의 해석 가능성 등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별고(別稿)를 통해 정치하게 논증해야 할 부분도 있겠지만, 본고가 자장 연구의 앞으로의 과제를 가늠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Ⅱ. 자장의 생애와 입당 행적

자장의 생애와 관련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가장 큰 견해의 차이를 보이는 주제는 생몰년(生沒年)과 입당(入唐) 시 오대산 참배의 여부에 대한 것이다. 전자는 각종 사료에 관련 내용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고, 후자는 자장에 대한 국내 사료에만 오대산 참배 사실이 보이기 때문에 연구의 주요 논점이 되었다.

먼저 생몰년에 대해서는 『속고승전』의 그가 신장(神將)으로부터 80여 세까지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는 기록과2) 「제일조사전기」에 나타나는 바, 선덕왕의 출사령(出仕令)을 거부한 나이가 25세였다는 점,3) 그리고 『법원주림』의 영휘 연간(永徽 年間, 650- 655) 입적 기록을 통해4) 대략의 시기를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간의 연구에서는 빠르게는 576-655년경에서부터(남무희, 2012: 16-24) 늦게는 610-650년경(남동신, 1992: 7-9), 594-655년경으로 보는 시각(염중섭(자현), 2017: 370-375)까지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여기에는 생몰시기에 대한 각 사료의 취신 여부가 강하게 작용하였고, 나아가 자장과 명랑(明朗)의 숙질(叔姪) 관계를 고려하여 당으로부터 귀국할 당시 50세가 넘었으리라 추정하고, 당 도선(道宣, 596∼667)보다 출생년이 앞서는 것으로 파악하는 시각(안계현, 1965, 1980, 1983), 몰년(沒年)을 대략 70세 전후로 추측하는 등(江田俊雄, 1957, 1977: 173-174) 당대 인물들의 평균적인 나이대를 통해 생몰년을 추정하였다.5)

사실 이와 관련해서는 자장의 행적 중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늦은 것이 『삼국유사』 「자장정율」조에 보이는 650년 신라에서 당의 연호(年號)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6) 앞서 649년 중국의 의관제(衣冠制)를 들여온 것도 자장의 공이라 하였는데, 이 두 가지의 사실이 『삼국사기』에는 김춘추의 공으로 기록되어 있어 자장의 행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들이 있지만7), 이 시기까지 자장이 왕실과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영휘 연간의 전반부까지는 자장이 생존해 있었다고 볼 수 있고, 영휘 연간의 후반부에 이르러 자장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사라지는 점을 고려하면(박미선, 2012: 99) 『법원주림』의 영휘 연간 입적 기록은 취신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속고승전』의 80여 세 기록은 신화적 성격이 가미된 예언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선덕왕 대 25세 기록은 당대 인물들의 평균적인 출가(出家) 및 출사(出仕) 시기와8) 함께 자장이 늦은 나이에 입당한 것으로 보는 견해들을(안계현, 1983; 김두진, 1989) 고려한다면 신중한 해석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한편, 자장의 출가 동기에 대해서도 양친을 여읜 슬픔 때문으로 보는 사료와9) 꿩 사냥을 하다가 꿩의 눈물을 보고 발심하였다는 사료로 다르게 나타난다.10)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조실부모(早失父母)의 이유에 동의하는데, 『속고승전』과 「찰주본기」를 모두 참고하여 「자장정율」로 정리한 일연이 「찰주본기」의 기록을 취하지 않은 것은 8, 9세기 당시 신효거사(信孝居士)나 김대성(金大城)의 설화에 보이듯이 당대 살생(殺生)으로 인한 뉘우침이 종종 출가의 원인으로 등장하므로 「찰주본기」 역시 이러한 분위기가 반영된 기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신종원, 1992: 252-253; 박미선, 2012: 79-80). 그런데 이렇게 볼 때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진덕왕대 우지암회의(亐知巖會議)에 자장의 아버지로 무림공(茂林公)이 참여하였다는 점이다.11) 호림공(虎林公)으로 기록된 인물이 자장의 아버지인 무림(茂林)과 동일인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지만(박미선, 2012: 80-81; 염중섭(자현), 2015: 127), 우지암 회의는 선덕, 진덕왕 대 국사(國事)를 논의하는 중요한 회의일 뿐만 아니라, 두 여왕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 매우 중요시되는 자료이다. 이렇게 보아 조실부모했다는 사료를 윤색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金杜珍, 1990: 7; 염중섭(자현), 2015: 127). 물론 이 두 사료를 절충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살생을 즐긴 것에 대한 반성과 이후 양친을 여읜 슬픔에 출가를 결심하였다는 것이다(金英美, 1992: 3; 염중섭(자현), 2015: 128-129).

다만 여기서 자장의 출가 후 이어진 행적을 좀 더 살필 필요가 있다. 왕의 출사 요청에 대해 하루라도 계(戒)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破戒)하면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며 거절하자 왕이 “출가”를 허락하였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출가한 후 가장 처음의 행적이 계행(戒行)으로 나타난다.12) 이는 자장의 출가에 계행에 대한 필요성이 염원으로 담겨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살생에 대한 뉘우침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층이 사냥을 즐기던 풍속을13) 경계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어 이는 「찰주본기」의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자장의 행적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입당 후 중국 오대산행의 여부이다. 『삼국유사』의 자장과 관련한 여러 조목들에서는 공통적으로 자장이 중국 오대산을 참배하고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4) 아울러 「제일조사전기」에도 오대산행의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이를 제외한 다른 기록, 즉 「찰주본기」와 『속고승전』을 비롯한 중국 사료에는 오대산 참배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찰주본기」는 황룡사 9층탑의 중수(重修)에 대한 내용이 우선하므로 자장에 대해서는 생애를 중심으로 짧게 기술된 까닭일 수 있지만, 중국 사료의 경우는 당시 자장의 중국 내 활동상 파악이 더욱 용이하였을 것임에도 관련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다.15)

연구의 초기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신뢰하여 오대산행에 긍정하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오대산에서의 문수보살 감응에 의한 신라 불국토설(佛國土說)로써 자장이 신라 왕실과의 관계 강화를 도모하였다는 시각에서였다(江田俊雄, 1957, 1958; 김영미, 1992). 나아가 오대산을 참배하지는 않았지만 화엄사상(華嚴思想), 문수신앙(文殊信仰)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남동신, 1992; 박노준, 1997). 그러나 신라 화엄학과 중국의 오대산 신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며 오대산행은 부정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와 「자장정율」에 자장이 받았다는 범게(梵偈)가 80권본 『화엄경』(이하 80화엄)에 나오는 구절과 일치함에 주목하였다. 즉, 80화엄은 795-798년 무렵 번역되었고, 799년에 신라 승려 범수(梵修)가 신라로 수입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자장의 오대산행은 후대 윤색의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이다(김복순, 1988, 1990: 27).16) 이는 자장의 입당시기가 사료 간 636년과 638년으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과도 관련되는데, 실제 입당은 638년이었으나 자장의 오대산행을 설명하기 위해 『삼국유사』에서는 이를 앞당겨 636년으로 설정한 것으로 파악되었다(신종원, 1992: 258).

아울러 중국 오대산 신앙에 대한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자장의 입당 시 중국 내에서 오대산이 문수신앙과 관련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므로 오대산행은 신뢰할 수 없다는 시각이 대두하였다.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 이르러 보리유지(菩提流志)가 『문수사리보장다라니경(文殊師利法寶藏陀羅尼經)』을 번역하면서 ‘오정(五頂)’이라는 표현을 한 것이 청량산(淸涼山)이 오대산(五臺山)으로 비정된 인식을 반영한다고 보거나(박노준, 1997: 15-21), 법장(法藏)이 편찬한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서 그러한 인식이 보인다고 함으로써 공통적으로 측천무후 때에 비로소 중국 오대산 신앙이 성립된 것으로 보았다(곽뢰, 2016: 52-53). 이에 신라에서도 중대(中代) 혹은 하대(下代)에 오대산 신앙이 성립된 것으로 보아 결국 자장의 오대산행은 후대 윤색된 것이라 결론지었다.17)

그런데 이와 달리 『삼국유사』, 「자장정율」조에 보이는 바, 자장이 입당 후 바로 오대산으로 간 것은 신뢰할 수 없으나 신라로 귀국하기 전에 오대산으로 향했던 것에는 긍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염중섭(자현), 2015). 이는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에서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나타나서”라고 한 내용과 함께 「제일조사전기」의 정관 16년(642) 오대산행에 대한 기록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최근 주목된 돈황 막고굴의 <오대산도(五臺山圖)>와 돈황문서 중 「오대산찬(五臺山讚)」에 보이는 ‘신라왕자’를 자장에 비정하면서 자장의 오대산행에 대한 관심이 환기되었다(신동하, 2015). 다만 신라왕자가 자장을 가리킨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외국인의 오대산행은 8세기 후반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보면서 <오대산도>와 「오대산찬」의 기록은 신라에서 만들어진 자장의 오대산 방문 “설화”가 역수출되었음을 말한다고 보기도 하였다(박광연, 2015: 225; 곽뢰, 2015: 345).

이렇듯 어떤 사료를 신뢰하는가에 따라 자장의 입당 후 행적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앞서 출가동기의 예에서도 그러했듯이 자장 당대에 가까운 사료를 차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찰주본기」와 『속고승전』에 보이는 행적을 다시금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사실 자장의 입당이 사신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입당 즉시 장안이 아닌, 오대산으로 가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위의 두 사료에는 공통적으로 자장이 643년 3월에 귀국하기 전 3년 간 종남산(終南山)에 머물렀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때 도선(道宣)과 교유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도선은 630-645년 사이 종남산 운제사(雲際寺)에서 전후 20회에 걸쳐 반야삼매(般若三昧)를 행하였고, 그 중 642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종남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18) 이렇게 본다면 642년경에 자장이 오대산에 들렀다가 귀국하였을 가능성은 연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19)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자장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는 어떤 사료를 취신하는가에 따라 논지의 큰 차이를 보인다. 이는 연구성과가 다수 축적되었음에도 사료의 신뢰성에 대한 연구가 여전히 필요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Ⅲ. 자장의 정치, 외교적 역할

642년 8월,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여 신라의 대당외교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에 신라는 백제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대야성(大耶城)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위기 상황 속에서 선덕왕은 자장의 귀국을 요청하고 이에 643년 3월, 자장은 신라로 귀국하였다. 이미 자장의 입당 전에 선덕왕이 한 차례 출사(出仕)를 요청하였다는 점을 통해서도 선덕왕의 행보에 자장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였을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상 자장은 귀국 후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하여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대외적으로 국력을 신장시키고자 하였다. 황룡사는 진흥왕대에 전륜성왕(轉輪聖王) 의식을 비롯한 왕즉불(王卽佛) 의식, 그리고 진평왕대에 추진된 석가족(釋迦族) 의식을 구현하는 신라의 핵심사원이었다(이기백, 1986: 72). 선덕왕은 황룡사가 여전히 그런 위상을 유지하게 하여 진흥왕이 추구한 것과 비슷한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왕권의 강화를 의도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자장은 여기에 사상적 배경과 함께 실질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자장의 귀국 후 친왕실적(親王室的) 행보에 대해 이견은 없으나, 황룡사 9층탑 건립에 대한 건의가 자장이 아닌, 이전 시기의 안함(安含)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안함 등이 장안의 대흥선사(大興善寺) 사리탑을 보고 와서 이를 모델로 9층탑 조성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신종원, 1992: 244-245). 실제 황룡사 탑지 조사 결과, 9층탑은 자장의 건의 전에 이미 조영 계획을 가지고 시도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러나 중층 목조 건축을 조성할 수 있는 기술력의 부족으로 기단 축조만 한 후 더 이상 공정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자장의 건의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양정석, 2004: 169). 이는 앞서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장에 의해 9층탑이 완성을 보았고, 황룡사 장육존상(丈六尊像)과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의 조성연기에 자장의 행적이 배속되었다는 점은 그를 신라 불국토설의 “완성자”로 보기에 충분할 것이다.

자장의 정치, 외교적 활동 중 가장 크게 부각되는 것은 그가 당의 정삭(正朔)과 의관(衣冠) 등을 신라로 도입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는 『속고승전』과 『삼국유사』, 「자장정율」조 및 「태종무열왕」조, 그리고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 보인다. 반면 『삼국사기』를 비롯한 정사류(正史類) 사서에는 김춘추에 의해 당(唐) 장복(章服)의 도입이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어 두 사료의 차이점이 당대 정치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논점이 되었다.20) 이에 대해서는 자장에 대한 사료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의관, 연호 등이 유교적 정치질서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김춘추에 의한 도입에 무게를 두는 견해가 대체적이다.21) 이러한 견해의 바탕에는 김춘추는 유교(儒敎), 자장은 불교(佛敎)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아가 실제 자장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하여도 김춘추가 복식 개혁의 주도권과 대당 외교권을 장악하고 왕위에 오른 까닭에 자장과의 관련성이 삭제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남동신, 1992: 40-42; 주보돈, 2017: 22; 김숙희, 2019: 18-20).

그러나 자장과 김춘추가 정치, 외교적으로 대립하였다는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장이 황룡사 9층탑의 공사를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金龍春)에게 맡기고 있다는 점, 김춘추는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비담(毗曇)의 난 이후 진덕왕을 옹립하였다는 점 등에서 두 사료군은 자장이 의관제 도입을 건의하고, 김춘추가 그것을 실행하였음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김상현, 1995, 1999: 44-45). 두 인물의 의관제 도입 관련성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자장의 역할이 더 컸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김복순, 2019: 315-322).

한편, 최근에는 의관제 등의 도입이 유교적 혹은 불교적 관련성 속에서가 아니라, 당의 선진적인 문화 수용이라는 당대의 공감대 속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자장과 김춘추의 역할을 동일한 비중으로 파악한 견해가 제기되어 주목된다. 이는 『삼국사기』와 함께 『책부원구(冊府元龜)』 등 중국 사서에 김춘추의 사행(使行) 기간이 648년 후반부터 649년 초반으로 보이므로 당 의관제 실시 시점인 649년과 시간적으로 가깝다는 점을 또 하나의 근거로 한다. 신라에서 자장의 귀국으로 인해 640년대 중반에 중국 관복 등에 대한 관심이 나타났고, 이후 김춘추가 공복을 사여받아오면서 구체적인 공복제가 시행되었다고 보았다(박수정, 2021: 89-93).

이렇게 본다면 자장의 말년(末年) 기록이 영세하고 순탄하지 않게 기록된 것을22) 김춘추 집권에 따른 유교적 정치이념의 확산으로 인해 자장이 몰락한 양상을 의미한다고 보는 시각은 재고를 요한다. 물론 선덕왕의 후원 속에서 대국통(大國統)에까지 오른 그의 이전 행적에 비하면 말년에 경주를 떠나 동북방(東北方)으로 간 모습은 정치적 실권 때문으로 설명될 수 있을 만큼 대조적이다.23) 이에 자장이 선덕왕 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배경에는 동륜계(銅輪系) 왕실과 연결되었기 때문이었지만, 진덕왕 대 이후 사륜계(舍輪系)가 우세해지면서 정계에서 밀려났다고 보기도 하였다(김두진, 1989; 남무희, 2012: 13-45). 한편, 자장의 몰락이 불교의 사상적 변화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자장은 구유식(舊唯識)을 수학한 수대(隋代)의 유학승들과 사상적 맥을 같이 하였으므로 신역(新譯) 불교의 유입에 따른 사상 기반의 혼란으로 자장이 정계에서 도태되었다고 본 것이다(김복순, 2008: 94-115). 그러나 이를 당시 동북방이 신라의 최북단 전방이었으므로 이곳을 안정시키기 위해 선덕왕과 진덕왕이 자장을 중심으로 한 불교 세력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에 따른다면24) 자장과 김춘추는 대립적 관계로 볼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장의 말년을 몰락으로만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때 앞서 자장의 생몰년과 관련하여 취신할 수 있었던 『법원주림』에 자장이 병을 얻어 입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주목된다.25) 자장의 말년이 여느 승려의 입적과 다르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삼국유사』의 자장의 말년 기록은 그의 계율에 대한 태도와 당대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자장은 “아상(我相)”으로 인해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아상이란 계(戒)를 지니지 않으면서 계를 지닌 사람과 비슷한 네 가지 경우의 하나이다. 즉, 12두타(頭陀)를 지켜 결점은 없지만 ‘나’라는 마음이 있어 아인상(俄人相)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26)

실상 자장의 말년인 중대 초 계율에 대한 이해가 확산되면서 지계의식(持戒意識)이 일반민에게까지 확산된다. 특히 원효에 의해 소승계(小乘戒)에서 대승계(大乘戒)로 계율 연구의 중심이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최원식, 1999: 41), 불교 교리의 확산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분율(四分律)』을 중심으로 하는 소승계를 중시한 자장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일연은 “정율(定律)”의 업적을 이룬 자장의 계율관과 이에 따른 그의 행적이 더 이상 당대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아상으로 설명한 것이다.27) 이러한 변화에 따라 자장의 정치, 외교적 입지 역시 이전에 비해 좁아졌던 것이다.

자장의 활동기간이 신라 중고기 말~중대 초라는 변화의 시기였던 까닭에 정치, 사회 그리고 사상적으로도 이러한 변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시기였다. 그런 만큼 자장의 정치, 외교적 위상에 대한 연구는 정치적 혹은 사상적으로의 편향적 접근을 지양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Ⅳ. 자장의 사상과 신앙 경향

자장에 대한 연구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제가 그의 사상과 신앙에 대한 것이다. 그간의 연구들에서는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 사리신앙(舍利信仰), 밀교(密敎) 등 자장의 사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율사(律師)로서의 행적과 계율관에 대한 고찰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오대산행에 대한 긍정적 견해가 제기되며, 화엄 및 문수신앙적 측면을 고찰한 연구 역시 진행되었다. 이렇듯 자장의 사상과 신앙에 대한 연구는 사실의 여부를 대립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여러 측면에서 다각도로 분석하는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선덕왕대 대국통(大國統)으로 임명된 자장은 승정(僧政)을 위임받아 승관제(僧官制)를 정비하고, 포살(布薩)을 실시하는 등 교단의 정비에 나선다. 아울러 『삼국유사』, 「자장정율」조에 자장의 귀국 후 불법을 숭앙하는 자가 열 집에 여덟 아홉 집이 되었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기를 청하는 자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고, 계단(戒壇)을 쌓고 사방(四方)에서 오는 자를 제도하였다고 한다.28)

자장이 일련의 교단정비를 진행한 시기에는 『사분율』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축적되어 있었다. 자장에게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등 『사분율』 중심의 찬술이 있음과 그와 함께 귀국한 원승(圓勝) 역시 『사분율갈마기(四分律羯磨記)』, 『사분율목차기(四分律木叉記)』 등을 찬술하였다는 점을 통해서도 자장의 교단정비는 『사분율』 등의 소승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채인환, 1977: 259). 이렇게 본다면 계율에 대한 이해는 자장을 대표하는 사상으로서, 그로 인해 계율은 신라에서 완연한 사상체계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29)

그러나 자장은 소승계에만 의지하지 않고 대승계의 유포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황룡사에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설하였는데,30) 이러한 그의 활동들이 일반민에게도 계율이 유포되고, 지계(持戒)와 파계(破戒)에 대해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신선혜, 2012: 237-240). 그가 소승계와 대승계를 함께 연구하고 유포하였던 점에는 대부분의 연구에서 동의하지만 이때의 보살계를 범망계(梵網戒) 혹은 유가계(瑜伽戒)로 보는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전자의 경우, 앞서 언급한 원승에게 『범망경(梵網經)』 관련 저술이 있다는 점과 원광(圓光)의 활동시기를 전후하여 신라에 범망계가 수용되어 있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채인환, 1977: 259; 김두진, 1989: 21; 박미선, 2012: 91-92). 후자의 견해는 자장이 입당 시 법상(法常)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았다는 점과 함께31) 그가 귀국 후 궁에 초청되어 『섭대승론(攝大乘論)』을 강설한 사실을 근거로 하는데, 법상이 섭론학의 대표적 학승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듯 수, 당대의 보살계가 유가계 중심이었으므로 자장 역시 그러한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남동신, 1992: 37; 김복순, 2007: 25-27).

이와 관련하여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자장은 출가를 전후한 시기에 이미 신라 내 계율 경향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생각된다.32) 이에 원광 등을 통해 범망계를 접하였을 것이고, 이후 입당 시 도선(道宣) 및 법상(法常) 등과 교류하며, 당의 계율 경향을 체득하였을 것이다. 특히 도선이 유가계와 범망계를 총합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점을 참고한다면, 자장의 계율관 역시 그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33)

한편, 자장은 한국 불교사상 최초의 계단(戒壇) 창설자로, 신라에서는 선덕왕대 여법한 수계의식이 확립되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채인환, 1982). 그런데 이때의 계단은 출가희망자를 위한 수계의 장이었던 점이 주목된다. 즉, 『삼국유사』 「자장정율」조에서는 출․재가자를 막론하고 불교에 귀의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전하는 한편, 이들 중에서도 특별히 출가를 원하는 이들이 많아져 이들을 위해 통도사 계단을 설립하였다고 구분하여 서술되었다. 이전 시기 수계의 양상은 소승율에 의거하지 않아 출‧재가자간 수계의식이 혼재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자장은 이러한 양상을 계가 갖추어지지 못하였다고 파악하여 『사분율』에 의거한 출가자만의 수계제를 확립하기 위해 계장(戒場)을 분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자장이 활동하고 있던 황룡사가 재가자 수계를 중심으로 한 보살계도량의 장소로서 기능하고 있었기에 자장은 이와는 별도의 장소로 통도사를 택한 것이다.34) 통도사 계단을 금산사 계단과 구별하여 소승계단(小乘戒壇)으로 파악하는 견해도(임경미(원영), 2007: 344)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때 통도사 계단의 형식이 자장 당대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확립되었다는 점에 반론이 제기되면서, 선덕여왕대 자장에 의한 계단 성립 자체가 부정되기도 한다. 즉, 통도사 계단이 도선의 『계단도경(戒壇圖經)』에서 말한 형식과 유사하기 때문에35) 이를 『계단도경』 성립 후, 즉 667년 이후 설치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자장은 643년에 통도사 계단을 축조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도선보다 20년이나 앞서 계단을 세운 것임에도 도선의 계단과 형식이 유사하다는 점은 이것의 후대 건립 가능성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橫超慧日, 1941: 56). 실상 선덕왕대 이후 이곳에서의 수계사실은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고, 통도사에 대한 기록 역시 『삼국유사』에 자장의 불사리 봉안과 관련된 「황룡사9층탑」조 및 「전후소장사리」조에만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수계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장에 의해 『사분율』을 비롯한 계율서가 신라에 유포되고, 자장은 이를 이용하여 신라 교단의 정비를 단행하였으며, 이러한 정비의 일환으로 수계 및 계단제도를 신라 교단에 적용하였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두 계단이 3층과 2층으로 형식의 차이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장과 도선 간 교류의 시기에 이미 계단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이 모아졌을 것이므로, 자장은 이 중 인도 및 서역의 계단 형식을 받아들여 신라에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제출되었다(蔡印幻, 1982: 11). 이의 연장선상에서 통도사 계단의 형식은 이미 도선보다 앞선 시기부터 사용되고 있었을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계단 양식을 반영하는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임경미(원영), 2007: 343-344).

이렇게 본다면 이 시기에 수계를 위한 장소가 마련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수긍할 수 있는데, 자장은 자신이 가져온 불사리를 모시고 수계의 장으로서 통도사를 건립한 것이다. 다만, 그의 귀국 후 주요 활동무대였던 황룡사에 수계의 장을 마련하지 않고, 별도로 통도사를 선택하였다는 점은 결계(結界)의 원칙이 반영된 인도적 계장(戒場) 관념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때 결계의 원칙이란 동일한 계(界)가 중복되는 것을 피하여 계(界)의 외부에 또 다른 계(界)를 설정하는 것으로, 인도에서는 수계의 장소로서 단을 쌓은 계단이 아닌 땅을 깎아서 평평하게 만든 계장의 형태로 발달하였는데, 이는 지금 남방불교에서 북방의 계단과 같은 형태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혜남스님, 2007: 4).

이렇듯 인도 계단의 경우, 수계의 장소로서 일정한 영역을 구분하는 ‘계장(戒場)’의 형태로 계단을 삼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36) 자장의 통도사 계단 설립의 시기가 도선의 『계단도경』 저술 이전이었음을 전제한다면, 설립 당시에는 중국과 같은 단(壇)의 형태가 아닌, 장(場)의 형태로 조성되었다가 이후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불사리를 중심으로 하여 단의 형태를 가진 계단으로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본다면 자장은 자신이 수지한 『사분율』에 의거하여 당대 출․재가자 모두의 수계의 장으로 결계된 황룡사와는 별도로 소계(小界)의 개념을 적용하여 출가자들만을 위한 수계의 장으로 통도사를 설정한 것이다(신선혜, 2016: 65-68).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자장의 사상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그가 “율사(律師)”로 표현되었던 점에서 주로 계율과 관련하여 주목되었다. 그러나 연구의 초기부터 자장의 오대산행이 긍정되면서 입당 시 화엄종의 개조로 알려진 두순(杜順)을 만났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자장이 중국에서 수학한 곳이 청량산(淸涼山)이었다는 점, 범게(梵偈)가 모두 화엄적 철학사상을 고양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귀국 후 원녕사의 낙성회 때 잡화만게(雜華萬偈)를 논했다는 점 등이 주목되었다(이기영, 1983: 514; 정병조, 1987: 10-11). 이에 따라 자장을 율사보다 화엄사상가로서 더 높이 평가하거나 화엄의 초조(初祖)로까지 일컫기도 하였다(김영태, 1971; 이행구(도업), 1995).

그러나 앞서 자장의 오대산행 여부에 대한 기존 성과를 일별해보았듯이 범게가 80화엄의 구절뿐만 아니라, 징관(澄觀)의 저술에도 나온다는 점이 밝혀지며 자장의 오대산행과 함께 사상적으로 화엄신앙으로서의 문수신앙은 부정되었다. 문수신앙이 화엄종과 연결되는 것은 8세기 후반경부터라는 것이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자장의 문수신앙은 『문수열반경(文殊涅槃經)』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는 자장이 교류한 도선과 그의 사적을 『법원주림』에 실은 도세에게서 오대산 문수신앙의 경전적 배경이 『문수열반경』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남동신, 1992: 18-23).

이에 대해 자장 당시 중국 오대산 문수신앙이 신라에 유입되어 있었다고 이해하면서 『삼국유사』 「낭지승운보현수」조에 보이는 “중국 청량산”의 내용에 주목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아울러 중국에서도 이미 북제(北齊) 시대에 오대산-문수-화엄이 연결되었고, 청량산이 오대산으로 확정되는 것은 당대(唐代)라고 보았다. 여기에 자장이 교류한 도선이 당의 고승으로서 오대산에 주목하여 참배한 인물이라는 점과 법상 역시 계율, 섭론, 화엄의 부분에서 자장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자장과 두순과의 관련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환기하면서 당시 종남산에 화엄종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다고 보았다(염중섭(자현), 2016: 261-273).

그러나 문수신앙과 오대산 문수신앙은 각각 대승불교의 보살사상, 『화엄경(華嚴經)』에 의거한 신앙이라는 별개의 연원에서 출발하는 신앙이므로 오대산 문수신앙은 자장의 신라 귀국 이후에나 비로소 전개되었다는 주장이 지속되고 있다(곽뢰, 2016).37) 다만 『화엄경』과 화엄신앙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확립된 신라 중대(中代)에 오대산에 『화엄경』을 독송하는 사찰이 건립되는 것은 자장의 사상과 관련해서 주목할 만하다고 보았다(최연식, 2005: 258).

이렇듯 중국 오대산 신앙의 성립 시기, 그리고 신라로의 유입 시기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자장의 오대산행 여부는 물론, 그의 사상과 신앙 경향에 대해서도 연구자마다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의 계율 및 화엄 사상에 대한 연구가 축적됨에 따라 자장과 아울러 신라 불교계의 양상이 더욱 명확해지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자장의 사상과 신앙 경향은 밀교, 사리신앙 등 다양한 시각에서의 접근이 시도되고 있는 만큼 풍부한 성과의 도출이 기대되는 주제라고 생각된다.

Ⅴ. 맺음말

자장에 대한 연구는 이미 90년대 초반에 그 성과가 “적지 않게” 축적되었다고 밝혀진 바 있다(남동신, 1992: 1-3). 양적 방대함뿐만 아니라, 논제 역시 다각도로 분석된 만큼 본고에서는 그간의 연구성과를 모두 정리하는 대신 연구자 간 견해의 차이를 보이는 주제를 선별하여 살펴보고자 하였다.

논점은 크게 자장의 생애-생몰년 및 출가 동기-, 입당 행적-오대산행-과 신라사에 있어 그의 정치, 외교적 역할, 그리고 사상과 신앙 경향-계율 및 화엄 등으로 대별되었다. 각 논점별로 연구경향의 특징이 발견되었는데, 자장의 생애 및 입당 행적과 관련한 연구들은 자장 관련 사료의 취신 여부에 따라 다른 결론이 도출되었다. 원효, 의상을 제외하면 한국 고대의 승려 중 자장은 비교적 여러 곳에 기록이 남겨져 있음에도 인물 연구의 가장 기본적 주제인 생몰년에 대해서도 연구자 간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료의 착종이 심하고, 당대 혹은 후대의 변형된 인식이 사료에 다수 반영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는 자장이 그만큼 다양한 행적을 보였고, 나아가 후대에까지 그의 위상에 대한 천착이 지속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파악할 수 있다.

자장의 정치, 외교적 역할에 대한 연구들 역시 그의 행적에 대한 사료 간 상반된 기록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나, 이와 함께 당시 신라의 국내적 상황과 자장이 입당(入唐)을 통해 파악한 중국의 정치, 사상적 변화상 등을 바탕으로 그의 위상이 가늠되었다. 특히 동시기 김춘추의 활동 양상과 비교하여 파악하고, 자장의 말년 기록의 모호함이 그의 정치적 실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자장 관련 연구의 대부분은 그의 사상 및 신앙의 경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앞서의 연구들과 달리 견해 간 대립을 보이지는 않지만, 특히 자장의 화엄사상을 강조하는 견해들은 그의 입당 후 오대산행에 대한 긍정이 토대가 되는 만큼 사료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주요한 연구방법이 되었다.

이렇듯 주요 논점에 대한 정리와 함께 좀 더 주목해 볼 사료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자장 연구의 과제를 궁구해 보았다. 그간 다양한 접근을 통해 방대한 양의 연구성과가 도출되었음에도 여전히 사료로 돌아가 이를 면밀히 살피고, 방증 사료에 이르는 관련 내용에 대한 천착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Notes

『三國遺事』에서 자장과 관련한 내용이 보이는 조목은 다음과 같다. 권1 기이1 「진덕왕」 ; 권1 기이1 「태종춘추공」 ; 권3 흥법3 「동경흥륜사금당십성」 ; 권3 탑상4 「황룡사장육」 ;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 ; 권3 탑상4 「가섭불연좌석」 ; 권3 탑상4 「전후소장사리」 ;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 ; 권3 탑상4 「대산월정사오류성중」 ; 권4 의해5 「자장정율」 ; 권5 신주6 「명랑신인」.

“神語藏曰 今者不死 八十餘矣”(『續高僧傳』 권24 「唐新羅國大僧統釋慈藏傳」).

“善德王聞師魁傑 欲拜相國 師堅志不聽 王大怒 以釼授使者 曰今若不從斬首級來 祖師引頸授使者 曰破戒而生不如持戒而死 略無懼色 使者不忍加誅 復于王 於是王壯其岳立之志許焉 師時年二十五也”(『五臺山事蹟記』 「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

“因遘微疾卒於永徽年中”(『法苑珠林』 권64 「唐沙門釋慈藏」).

연구자별 생몰년 추정 성과는 남무희(2012: 19)와 염중섭(자현)(2017: 363-364)의 논고를 참고하기 바란다.

“乃以真德王三年己酉始服中朝衣冠 明年庚戌又奉正朔始行永徽号 自後每有朝覲列在上蕃 藏之㓛也”(『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율」).

본고 3장의 내용을 참고하기 바란다.

자장의 25세 출가 연령에 대해 당시 평균 출가연령이 12-3세인 것에 비하면 늦은 나이였다고 보기도 하고(김복순, 2007: 13), 출사 연령으로 보기에는 젊은 나이이므로 「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 기록의 취신에 신중해야 한다고도 하였다(박미선, 2012: 83-84).

“會二親俱喪 轉厭世華 深體無常終歸空寂”(『續高僧傳』 권24 「唐新羅國大僧統釋慈藏傳」); “早䘮二親轉猒塵譁捐妻息捨田園爲亢寕寺”(『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율」); “幼而頴悟 雅信正法 弱喪雙親 盡禮居憂 於是喪期已滿 棲身高岑以求其志”(『五臺山事蹟記』 「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

“少好殺生放鷹摯雉雉出淚而泣感此發心”(「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王之代有閼川公 林宗公 述宗公 虎林公 慈藏之父 廉長公 庾信公 㑹于南山亐知巖議國事”(『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

“適台輔有闕 門閥當議累徴不赴 王乃勑曰 不就斬之 藏聞之曰 吾寕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 事聞 上許令出家 乃深隠岩叢粮粒不恤 時有異禽含菒來供就手而喰 俄夢天人來授五戒方始出谷 郷邑士女爭来受戒”(『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율」).

『삼국유사』 권4 의해5 「이혜동진」조 등에서 당시 사냥을 즐기는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 권4 의해5 「자장정율」.

이러한 의문은 一然도 가지고 있었다(『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율」, “藏公初匿之 故唐僧傳不載”). 이를 道宣이 계율을 중시하는 입장이므로 이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다고도 본다(노재성, 2003: 23-28; 신동하, 2015: 84).

반면 이를 자장이 원래는 60화엄에 수록된 게송을 들었으나, 후에 80화엄의 유행과 더불어 바뀐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행구(도업), 1994: 15).

오대산 사적이 성덕왕의 즉위를 둘러싼 쟁탈전을 반영한 것이므로 성덕왕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거나(신종원, 1987), 오대산에서 독송한 『金光明經』이 8권본이므로 오대산신앙 전체 성립시기가 8세기 중엽을 넘지 않는다고 보기도 한다(박미선, 2007: 150-154). 한편, 신라 하대에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연구는 다음과 같다. 김복순(1988); 남동신(1992); 신동하(1997); 박노준(1997); 남무희(2012); 곽뢰(2015) 등.

『佛祖統紀』 권29 도선전; 弘一大師, 2007, 『南山律在家备览略编』, 財團法人佛陀教育基金會(남동신, 1988: 7; 곽뢰, 2016: 46).

道宣 역시 오대산에 참배한 사실이 있으므로 그가 주로 활동한 장안 종남산의 불교의 분위기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639-641년에 慈藏과 道宣이 교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염중섭(자현), 2016: 270).

김춘추설은 『일본세기』, 『일본서기』, 『신당서』,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보이고, 자장설은 본문에 언급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 『속고승전』, 『대각국사문집』에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권덕영(1995: 86-93); 한준수(2012: 52); 박명호(2016: 76); 김창석(2018: 123); Pankaj Mohan, 송준혁 역(2007: 62)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居士曰 歸歟歸歟 有我相者焉得見我 乃倒簣拂之狗變爲師子寳座 陞坐放光而去 藏聞之方具威儀尋光而趍登南嶺 已杳然不及 遂殞身而卒”(『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율」); 「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도 해당 부분의 내용이 유사하다.

이에 자장이 황룡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남무희, 2012: 43). 한편, 자장의 말년에 대한 내용이 자장 이후 반대세력들에 의해 『入唐求法巡禮行記』 권3의 840년 7월 2일자 기록에서 차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박노준, 1997: 102-103).

이와 관련하여 이용관(1995: 32-33); 김복순(1996: 16-17); 강종훈(2004: 225); 남무희(2013: 59-61)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因遘微疾卒於永徽年中”(『法苑珠林』 권64 「唐沙門釋慈藏」).

『佛說大迦葉問大寶積正法經』 권4(대정장12: p.214a-b)(남동신, 1992: 43).

자장의 말년에 대한 기록을 서민불교가 등장하면서 귀족불교인 자장을 비판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김영태, 1987: 112-116). 문수보살이 평범한 일반민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장의 귀족적이며 보수적인 불교를 비판하였다고 한다(남동신, 1992: 43).

“當此之際 國中之人 受戒奉佛 十室八九 祝髮請度 歲月增至 乃創通度寺 築戒壇以度四來”(『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율」).

초기의 연구에서 그를 戒律宗祖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김영수(1937)의 논고가 있다.

“一夏請至宫中講大乗論 又於皇龍寺演菩薩戒夲七日七夜 天䧏甘澍雲霧暗靄覆所講堂 四衆咸服其異”(『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율」).

“新羅王子金慈藏 輕忽貴位棄俗出家 遠聞虔仰思覩言令 遂架山航海遠造京師 乃於船中夢矚顏色 及覩形狀宛若夢中 悲涕交流欣其會遇 因從受菩薩戒 盡禮事焉”(『續高僧傳』, 권15, 「唐京師普光寺釋法常傳」).

‘瑞祥受戒’와 ‘五戒’ 등 자장의 입당 이전 율사로서의 위상을 검토한 논고도 있다(염중섭(자현), 2016).

그간의 연구들은 대체적으로 자장의 菩薩戒가 瑜伽戒(地持戒) 및 梵網戒 두 가지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율」에 의하면, 자장은 귀국 후 황룡사에서 7日7夜동안 『菩薩戒本』을 강연하였는데, 통도사 개창 이전에는 황룡사에 출 ‧ 재가자 모두를 대상으로 보살계 도량을 設하였던 것이다.

『戒壇圖經』에는, “戒壇은 땅 위에 있으며, 三重相이 된다. 그것은 三空을 나타내는 것이다. 불법에 들어가는 초문이 된다. … 佛五肘는 오분법신을 나타낸다. 석가여래는 二肘半이며, 그 위에 二寸을 더해 3층이 된다. 그 뒤 하늘제석은 覆釜形으로 만든 것을 그 위에 두어 사리를 모셨다. 이것은 곧 五重으로 五分法身을 나타내는 것이다”라 하였는데, 級이 있는 모습이나 사리탑이 중앙에 놓인 점 등이 통도사 戒壇과 유사하다.

平川彰(釋慧能 譯, 2003)은 이미 부파불교시대에 계단제도가 완비되었을 것이나, 그것은 어떤 특정장소를 계단으로 제정해 표시해 둘 목적이 강했던 것으로, 현재와 같은 고정설비를 갖춘 계단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후에도 동일한 논지의 연구가 진행되었다(곽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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