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일반논문

淸虛 休靜 관련 연구의 현황과 과제

이향문*
Hyang-moon Lee*
*대흥사 성보박물관장, 미황사 주지
*The Director of Daeheungsa Temple Seongbo Museum, The Chief Priest of Mihwangs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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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Nov 07, 2022; Revised: Dec 03, 2022; Accepted: Dec 09, 2022

Published Online: Dec 31, 2022

국문 초록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은 1520년에 태어나 21세의 나이로 정식 출가하였다. 이후 1604년 입적할 때까지 그는 무려 65년이라는 세월을 승려로 살았다. 그는 『선가귀감』, 『청허집』, 『심법요초』, 『선교석』 등의 저술을 통해 선교겸수를 표방하는 한편, 궁극적 수행방안으로 간화선을 중흥하였다. 이와 함께 선·교·염불의 삼문(三門) 수행체계를 원융회통하여 조선중기 이후의 불교 방향성을 새롭게 제시하기도 하였다. 휴정의 일대기는 호법활동과 호국활동으로 상징할 수 있다. 그의 호법활동은 수행, 저술, 교육 등의 분야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조선불교 이전의 사상을 집성하여 조선후기의 선문종풍(禪門宗風)을 수립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호국활동은 임진왜란 시기 의승(義僧) 참전을 앞장서 이끌었던 공적에서 뚜렷하다. 하지만 휴정이 참전을 결행하고 승군을 통섭한 기간은 불과 2-3년 남짓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를 평가함에 있어 출가 사문(沙門)으로서의 면모는 더욱 중시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 논문은 청허 휴정과 관련한 연구사 검토를 목적으로 작성하였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청허 관련 연구를 종합적으로 수집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한 바 있으며, 그 결과, 기존 연구는 ‘①생애와 저술 ②사상 ③법통 ④의승 활동 및 표충사 ⑤문학 및 기타’ 등의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음을 밝혔다. 이 논문은 이들 가운데 ‘문학 및 기타’ 항목을 제외한 분야의 주요 연구성과를 개략적으로 소개하고, 이들 연구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과제와 문제점들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이 논문을 통해 향후 휴정 관련 연구의 방향이 새롭게 제시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Abstract

Cheongheo Hyujeong (1520-1604) was born in 1520 and officially entered the Buddhist priesthood at the age of 21. Afterwards, he lived as a monk for 65 years until he passed away in 1604. He advocated simultaneous practice of meditation in sitting and invocation of Buddha’s name through his writings such as ‘Seonga Gwigam’, ‘Cheongheo Collection’, ‘Simbeop Yocho’, and ‘Seongyoseok’, while also pursuing Ganwha Seon (word contemplation meditation) as an ultimate method of practice. Along with this, he presented the new direction of Buddhism after the mid-Joseon Dynasty by Weonyung Hoitong (complete accommodation and unification) of the three gates practice system of Seon, Doctrine, and Yeombul (Buddha chanting, recollecting, or recitation of Buddha’s name). Hyujeong’s life can be symbolized by activities to protect the Buddha- dharma and protect the country. His activities for the protection of the Buddha- dharma were developed in various fields such as practice, writing, and education and has the status of establishing the Wind of the Seon Gate and Sect in the late Joseon Dynasty by compiling the thoughts before Joseon Buddhism. In addition, his national defense activities are evident in his achievements leading the participation of the volunteer Sangha arm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owever,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 period during which Hyujeong participated in the war and joined the volunteer Sangha army was only about 2-3 years, I think it is necessary to give more importance to his appearance as a Buddhist monk in evaluating him. This thesis was written for the purpose of reviewing the research history related to Cheongheo Hyujeong. To this end, the author first carried out the work of comprehensively collecting and organizing research related to Cheongheo, and as a result, the existing studies were divided into five themes: ① Life and writings ② Thought ③ Dharma lineage ④ The activity of the volunteer Sangha army and Pyochungsa shrine ⑤ Literature and others. This thesis outlines the major research achievements in the fields excluding ‘Literature and Others’ among them, and is composed in the form of presenting some tasks and problems that appear in these studies. It is hoped that this thesis will provide a new direction for Hyujeong-related research in the future.

Keywords: 청허 휴정; 호법활동; 간화선 중흥; 호국활동; 의승; 해남 표충사
Keywords: Cheongheo Hyujeong (淸虛休靜); Activities for the Protection of the Buddha-Dharma (護法活動); Restoration of Ganhwaseon (看話禪); Protection of the Country (護國活動); The Volunteer Sangha Army (義僧); Haenam Pyochungsa (表忠祠) Shrine

Ⅰ. 머리말

조선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이자,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널리 알려진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은 1520년에 태어나 21세1)의 나이로 정식 출가하였다. 이후 1604년 입적할 때까지 무려 65년이라는 세월을 승려로 살았다. 휴정은 『선가귀감』, 『청허집』, 『심법요초』, 『선교석』 등의 저술을 통해 선교겸수를 표방하는 한편, 궁극적 수행방안으로 간화선을 중흥하였다. 이와 함께 선·교·염불의 삼문(三門) 수행체계를 원융회통하여 조선중기 이후의 불교 방향성을 새롭게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불교 존망(存亡)의 시기 속에서,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사회 국난의 위기까지 더해져 암울한 현실에 처해있을 때 ‘보제존자(普濟尊者)2)’라고 추앙받는 존호처럼 16세기 불교계와 조선사회를 널리 구제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휴정의 일대기는 크게 호법활동과 호국활동으로 상징할 수 있다. 그의 호법활동은 수행, 저술, 교육 등의 분야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호국활동은 임진왜란 시기 의승(義僧) 참전을 앞장서 이끌었던 공적으로 대표된다. 하지만 휴정이 참전을 결행하고 승군을 통섭한 기간은 불과 2-3년 남짓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를 평가함에 있어 출가 사문(沙門)으로서의 면모는 더욱 중시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3)

조선시대 불교는 ‘청허 이전’과 ‘청허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저술과 수행은 일종의 지침처럼 다수의 제자들에 의해 충실하게 계승되었으며, 이로 인해 17세기 이후 승단은 이전 시기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법풍(法風)과 승풍(僧風)을 유지해 나가게 되었다. 특히 청허의 문도들은 ‘임제 의현-태고 보우-청허 휴정’의 법통(法統)을 새롭게 천명하였는데, 이 시기 형성된 법통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 논문은 청허 휴정과 관련한 연구사 검토를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청허 관련 연구를 종합적으로 수집 정리하는 작업4)을 진행하였는데, 그동안 진행된 청허 관련 연구는 그 성격상 크게 다섯 가지의 주제로 나눌 수 있다. ‘① 생애와 저술, ② 사상, ③ 법통, ④ 의승 활동 및 표충사, ⑤ 문학 및 기타’ 등의 주제가 그것인데, 이 논문은 이들 가운데 ‘문학 및 기타’ 항목을 제외한 분야의 주요 연구성과를 개략적으로 소개하고, 이들 연구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과제와 문제점들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이 논문을 통해 향후 휴정 관련 연구의 방향이 새롭게 제시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Ⅱ. 생애와 저술

1. 생애 관련 연구

휴정의 생애는 다양한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각종 불전(佛典)에 전하는 생애 관련 자료는 다음과 같다.

  • ① 休靜(1520-1604), 「上完山盧府尹書」, 『청허집』 권7(한국불교전서 제7책: 719-721).

  • ② 敬軒(1544-1633), 「淸虛大師行蹟」, 『제월당대사집』 上(한국불교전서 제8책: 120-121).

  • ③ 彦機(1581-1644), 「西山行蹟草」, 『편양당집』 권2(한국불교전서 제8책: 254-255).

  • ④ 金洛一 撰(1675), 「西山大師行錄」, 『조선사찰사료』 上(320-323).

  • ⑤ 覺岸(1820-1896), 「淸虛尊者傳」, 『동사열전』 권2(한국불교전서 제10책: 1014-1017).

①은 휴정 스스로 자신의 성장 과정과 출가 전후의 행적을 술회하며 노수신(1515-1590)에게 부친 두 편의 편지글이다. 이 자료는 휴정의 부모님과 선조들의 행적, 그리고 휴정의 소년기 이력과 출가한 인연, 운수행각 등에 관하여 상세하게 기술한 자서행록의 성격을 지닌다. ②와 ③은 휴정의 직계 제자인 제월 경헌과 편양 언기가 지은 행장이다. 이 자료에는 휴정이 임제종의 가풍에 충실한 선법을 계승했으며, 그 법통의 후손으로서 문도를 천명한 부분이 명시되어 있다. ④는 조선후기의 문관인 김낙일이 휴정의 문학적 조예를 흠모하고, 구국의 충절을 찬탄하는 내용이 돋보이는 행록이다. 불교계뿐 아니라, 유학자들에게도 휴정의 위상과 명성이 높았음을 알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다. ⑤는 해남 대흥사의 고승 범해 각안(1820-1896)이 편술한 것으로 동국의 고승들에 관한 전기적 자료이다. 휴정의 입적 후 비석을 세우는 과정, 해남 대흥사 표충사 건립과 사액제문에 관련된 기록 등 비교적 풍부하고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불전에 전하는 자료에 이어 휴정과 관련된 각종 비(碑)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휴정과 관련된 「비명(碑銘)」은 생애와 사상, 주변 인물들과의 교류 내용 등을 알게 해주는 1차 자료이자 기초자료로써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①∼③은 각 지역 사찰의 승탑원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찰의 사격(寺格)과 위상을 함께 고찰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④∼⑦은 조선시대 사액사우로 건립된 표충사 내 비각에 자리하며, 휴정의 생애와 사상은 물론 그가 펼쳤던 의승 활동과 표충의 공훈을 상징하는 석비(石碑)이기도 하다. 이들 비의 대강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5)

표 1. 청허 휴정 관련 비문(碑文) 현황
번호 撰者 碑銘 및 建立年代 揭載文獻
李廷龜 「淮陽 表訓寺 白華庵 淸虛堂 休靜大師碑」
1630(仁祖 8)年 3月立,
1632(仁祖 10)年 改立.
『朝鮮寺刹史料』下(1911: 255-261).
『朝鮮金石總覽』下(1919: 852-855).
『楡岾寺本末寺誌』(1977: 505-511).
『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朝鮮篇1(1999: 214-239).
『韓國高僧碑文總集』朝鮮朝·近現代(2000: 50-54).
李廷龜 「淮陽 表訓寺 白華庵 淸虛大師碑」
1630(仁祖 8)年 9月立,
1632(仁祖 10)年 改立.
『朝鮮佛敎月報』(1912: 17~21).
『朝鮮佛敎通史』上(1918: 463-469).
『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朝鮮篇1(1999: 242-244).
『韓國高僧碑文總集』朝鮮朝·近現代(2000: 56-57).
張維 「海南 大興寺 淸虛堂 休靜大師碑」
1647(仁祖 25)年 立.
③-1 「淸虛堂普濟尊者碑」, 有一, 1778(正祖 2)年 改立.
『朝鮮佛敎通史』上(1918: 469-472).
『大芚寺誌』(1980: 233-240).
『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朝鮮篇1(1999: 246-262).
『韓國高僧碑文總集』朝鮮朝·近現代(2000: 60-62).
『海南地方金石文大系』(2002: 173-185).
李雨臣 「密陽 表忠祠 西山大師 休靜碑」
1742(英祖 18)年 立.
『朝鮮佛敎通史』上(1918: 535-539).
『韓國金石文大系』4(1985: 143).
『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朝鮮篇1(1999: 264-279).
『韓國高僧碑文總集』朝鮮朝·近現代(2000: 64-66).
徐有隣 「海南 大興寺 西山大師
表忠祠 紀蹟碑」6)
1791(正祖 15)年 立.
『朝鮮寺刹史料』上(1911: 323-327).
『朝鮮佛敎通史』上(1918: 561-563).
『韓國金石文大系』1(1979: 147-150).
『大芚寺誌』(1980: 240-248).
『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朝鮮篇1(1999: 282-310).
『韓國高僧碑文總集』朝鮮朝·近現代(2000: 68-73).
『海南地方金石文大系』(2002: 153-166).
有一 「海南 大興寺 表忠祠 建祠事蹟碑」
1792(正祖 16)年 立.
『朝鮮寺刹史料』上(1911: 327-329).
『韓國金石文大系』1(1979: 151-153).
『大芚寺誌』(1980: 248-250).
李秉模 「寧邊 普賢寺 酬忠祠碑」
1795(正祖 19)年 立.
『朝鮮寺刹史料』下(1911: 261-266).
『朝鮮金石總覽』下(1919: 1238-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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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③은 휴정의 제자 해안과 쌍흘이 스승의 행장을 모아 1631년 장유를 찾아가 부탁한 비문이다. 장유에게 비문을 받은 이후 이들은 다시 해남 대흥사로 내려와 이로부터 16년 후인 1647년 비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 비의 실물은 현재 대흥사 경내에 남아있지 않다. 이 비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비가 1778년 새롭게 세워지는데, 이것이 현재 대흥사 부도전에 자리하고 있는 ③-1의 비이다. 비문의 전제(篆題)는 비신의 전면에 ‘淸虛堂普濟’, 우면에 ‘尊者碑銘’이 각각 전각(篆刻)되어 있고, 비신의 좌면 하단에 ‘七代孫主事宗正蓮潭有一改立 八代孫京主管等獜追書’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새롭게 비를 세우는 1778년의 불사는 연담 유일과 뇌묵 등린이 주관하였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7) 연담 유일의 문집에는 이때의 정황, 즉 휴정의 비를 재건립하게 된 연유라든가 불사의 과정 등에 관계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1777(정조 1)년 봄에는 嶺南宗正에 차정되었고, 春享에 가서 참가하였으며 해인사에서 지냈다. 그런데 그해 겨울에 대둔사에서 내게 戒洪을 보내어, “西山대사의 비석 허리 부분이 손상되었으니, 불가피하게 다시 세워야 하게 되었다.”고 알려왔다. 이에 각 도에 통문을 보내어 돈을 거두게 하였다. 1778(정조 2)년 봄에 영남 종정에서 遞任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비석을 사고 서울에서 비문까지 새겼으니, 임오년(喚醒堂 志安大師碑 建立) 때처럼 하였다.8)

대흥사는 청허 휴정의 법손들이 가장 중시하던 도량이었다. 그 결과, 대흥사에는 휴정의 유물이 다수 보관되어 있으며, 일부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특별 관리·전시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부도전에 있는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은 보물 제134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문화재의 공식 명칭은 ‘해남 대흥사 청허당탑’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이 탑의 탑신부에는 ‘청허당’이라는 당호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또한 휴정을 ‘서산대사’라고 널리 지칭하기 시작한 때는 정조(正祖) 시기로 보인다. 휴정의 당호는 ‘청허당’이고 문집 또한 『청허집』이며, 조선 후기 전법 계보, 승려 문집 등에도 휴정의 공식적인 호는 대부분 청허로 쓰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이수경·임성춘·김다빈, 2017).

휴정의 생애에 관한 연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다.9) 이후 197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먼저 김영태(1975)는 그의 저서에서 “서산대사께서 道術僧으로 神僧視되는 전설로만 알려지는 것을 우려하고 勤王救國이 護國佛敎의 당연한 결과이며, 민족불교의 한 자랑이라고 까지만 보는 이들을 경계하고자 그 眞面目을 백분의 한 쪼각이라도 세상에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노라”고 머리말에 밝히고 있다. 그는 「생애편」과 「사상편」의 두 갈래로 나누어 이 책을 서술하였는데, 「생애편」에서는 출생과 입적에 이르기까지 모두 7개 항목으로 분류해서 다루었고, 사상편에서는 선관과 교관을 통한 불교관, 수행 및 염불에서 보이는 실천관, 유교관과 도교관을 통한 국가관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서산사상의 특징을 구명(究明)하였다. 특히 그는 이 책에서 7쪽 분량에 달하는 휴정의 상세한 연보를 제시하였는데, 이 연보는 상당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신법인(1983)은 『선가귀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휴정의 생애를 함께 고찰하였다. 그는 먼저 『선가귀감』에 대해 “『선가귀감』은 오늘날 한국 조계종의 종전적(宗典的)인 성격을 가진 귀중한 저서라고 할 수가 있다. 가급적이면 찬자(撰者) 자신의 말은 넣지 않고 있지만 인용해 온 교설과 어구들이 남의 것이면서도 조금도 거리감 없는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서 독자들의 마음속에 울려온다고 할 수가 있다”라는 평가를 하였다. 그는 이 저서에서 『선가귀감』 전문을 과목분단(科目分段)하여 상고(詳考)하고 있는데, 『선가귀감』 연구에 있어 이 저서는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님은 또한 지속적으로 『명심보감』의 편자가 휴정이라는 점을 주장하였는데, 아직까지 이에 대한 일반 학계의 동의는 얻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종범은 휴정의 선풍인식과 임제선풍과의 비교 검토를 통하여 서산선풍의 특성을 조명하였다. 그는 일련의 연구를 통해 휴정의 생애와 저술을 검토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휴정은 ‘불사선악·격외선지’에 입각한 조사선풍(祖師禪風)의 ‘본분종사’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휴정은 화엄가의 보살도(菩薩道) 수행자에 못지 않게 많은 불사에 참여하였으며, 그가 복국이생(福國利生)을 염원한 것은 그 시기에 형성된 서산선풍(西山禪風)의 특성이 아닐 수 없다고 보았다.

휴정의 생애와 관련한 연구는 아직까지 적지 않은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특히 그의 생애를 전하는 각종 자료를 보다 치밀하게 대조,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온전한 내용의 행장을 구성해 보는 작업은 시급한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그와 교류했던 다양한 인사들과의 관계라든가, 그가 참전을 결행하였던 진정한 의도 등에 대해서도 보다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다음은 월사 이정귀와 계곡 장유의 명문(銘文) 가운데 일부를 옮긴 것이다. 이들 비문의 찬자들이 전하는 것처럼, 휴정은 조선시대 불교의 고승이자, 역사를 빛낸 위인으로 오랫동안 추앙받고 있었다. 향후 이러한 인식 문제, 즉 휴정에 대한 불교계와 유림의 인식 문제와 관련한 연구는 보다 활발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는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① 出而濟世 산을 나와 이 민족을 구제하시니,
名動華夷 그 이름이 국내외에 진동하도다.
入而修定 산에 들어 문을 닫고 수도함에는,
法闡宗師 정법안장 천양하는 종사이시다.
(이정귀. 1632. 『회양 표훈사 백화암 청허당 휴정대사비문』.)
② 殺活自由 죽이거나 살리는데 자재하오며,
隱現無累 은둔커나 나타남에 걸림이 없네.
世出世間 세상일과 불법 중의 어디로 가나,
兩盡能事 두루두루 능통하여 막힘이 없네.
(장유. 1647.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문』.)
2.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저술

휴정이 남긴 저술의 서명(書名)과 주요 사항을 간략히 살펴보면 <표 2>와 같다.

표 2. 청허 휴정의 저술과 주요 사항
서명 주요 사항
『禪家龜鑑』 50여권의 경론과 조사어록을 보다가 요긴한 것을 추려 모아 제자들을 가르쳤던 저술이다. 휴정의 서문과 유정의 발문에 의하면 휴정이 45세 때에 저술하여 휴정이 60세 때인 1579년에 간행되었다. 처음에는 원문만 써 놓았는데 난해하다는 제자들의 뜻을 받아들여, 주해를 달고 더러는 송이나 평석도 붙였다.
『心法要抄』 심법은 선가에서 말하는 중생의 정체이다. 조사의 화두 참구를 통해서 심법을 밝혀야 한다고 말하고 수행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들을 제시한 책이다.
『禪敎釋』 행주·유정·보정 등의 제자들을 위해서 선교에 대한 불가분의 관계를 해설한 책이다. 간기에 의하면 1586(선조 19)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禪敎訣』 유정을 위해 저술한 것으로 3장 정도의 짧은 글이나 휴정의 선교에 대한 주관이 서술되어 있어 선교관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淸虛集』 휴정의 대표 문집으로 다양한 詩·書·文을 총망라하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 禪師로서의 경지를 유감없이 드러낸 見智가 가득하다. 1612년 제자 종봉이 휴정이 남긴 글을 수집하여 간행한 것이 최초의 간행본이다. 대표 저본은 1630년 용복사에서 간행한 7권본이다.
『三老行蹟』 휴정에게 벽송 지엄은 師翁, 부용 영관은 嚴師, 경성 일선은 叔師이다. 이 삼화상의 행적을 특별히 찬술한 책이다.
『江西馬祖四 家錄草』 중국 송대의 황룡 혜남(1002-1069)이 엮은 『사가어록』에서 중요한 대목을 발췌하여 휴정이 직접 필사한 책이다. 四家란 마조도일·백장회해 ‧ 황벽희운 ‧ 임제 의현을 말한다.
『續眞實珠集』 『선림보훈』, 『치문』, 그리고 옛사람의 편지와 법어 중에서 정선하여 간행한 책이다. 대체적으로 학인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선정한 글로 보인다.
『三家龜鑑』 『선가귀감』, 『유가귀감』, 『도가귀감』을 합본한 저술로 삼교회통사상을 주창하여 불교의 주체성을 되찾고, 타종교와 조화를 모색하기 위해 간행되었다.
『禪家龜鑑諺解』 『선가귀감』에 한글로 토를 달고 언해한 책으로서 원간본 끝의 ‘金華道人義天書’라는 표현으로 보아 금화도인 의천이 편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說禪儀』 설법장의 장엄과 설법에 관한 의식집이다.
『雲水壇謌詞』 헌공의식문을 선의 입장에서 편집하여 다시 저술한 책이다.
『成佛圖』 육도윤회에서 벗어나 성불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놀이로 만든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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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정의 저술 관련 연구 가운데 상당수는 『선가귀감』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물론 『선가귀감』의 중요성에 기인한 결과라 하겠다. 하지만 최근 들어 휴정의 여타 저술에 대한 연구방향은 보다 다양해지고 있으며, 이는 그동안의 저술 관련 연구가 지니고 있던 문제점을 극복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송일기(1990)는 『선가귀감』의 서지학적 연구를 통하여 적어도 세 가지 계통의 판본과 11종의 이판(異版)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혔다. 그는 이처럼 『선가귀감』에 대한 수차례의 판각활동이 있었던 사실을 중시하면서, 이 서적은 한국 선사의 찬술서로 단연코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또한 그는 『선가귀감』을 휴정의 독립 편저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점을 제시하였으며, 특히 언해본은 그의 제자로 보여지는 ‘金華道人 義天’에 의한 전면적인 재편(再編)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10)를 밝혔다.

김영배(1992)는 1569년에 간행된 『선가귀감』 언해본, 즉 묘향산판본에 평안도 지역의 방언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하는 관점에서 이 연구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 언해본은 간행지와 번역자의 출신·활동 지역이 서로 달라서, 간행지의 방언으로만 다룰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결국 그는 묘향산판 언해본의 언어 상태는 번역자의 활동지역, 즉 전라도 지역 방언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은정희(1998)는 『삼가귀감』 저술을 중심으로 휴정의 유(儒)·도(道)·선(禪)의 삼가(三家) 회통사상을 조명해 보고자 하였다. 그는 삼가에 따라 각기 입장의 차이는 있으나 결국 일심을 밝혀 마음을 닦는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삼가에서 각각 뜻하는 마음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밝히고자 하였으며, 더 나아가 휴정이 삼가를 회통시킨 근거를 제시해보고자 하였다. 그는 “유가에서 심은 뿌리를 도가에서 배양한다고 하는 것은 儒·道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은 아니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禪家에서 아예 이 뿌리를 뽑아 버리는 태도와는 같지 않다”는 내용의 원문을 인용하면서, 삼가의 착안점이 이처럼 다르기 때문에 삼가의 마음 닦는 법은 자연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삼가에서 추구하는 마음을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불상리(不相離)의 관계로 비유하면서 결국은 같은 것이라는 취지의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백옥수(2013)는 『청허당집』의 판본들을 비교 분석하여 그 텍스트의 가치와 중요성을 조명하는 작업이 선행될 필요가 있음을 고찰하였다. 그는 각 판본별로 엄밀한 비교 작업을 진행한 이후 그 내용을 분석하여 표로 정리, 제시하였다. 또한 그는 기초연구의 토대 확립에 주안점을 두고 대중적인 이용이 가능하도록 『청허당집』의 DB구축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연구과정을 체계적으로 확대 발전시킨다면 단지 휴정뿐 아니라 조선시대 불교 문학 전반에 걸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것으로 파악된다.11)

오가와 히로카즈(小河寬和, 2016)는 일본의 『선가귀감』 간행 사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연구를 발표하였다. 그는 17세기 초 한·일 외교를 담당했던 키하쿠 겐포(規伯玄方, 1558-1661)에 의해 『선가귀감』이 일본에 최초로 전래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아울러 최초 전래 이후 17세기에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선가귀감』이 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일본에서 『禪家龜鑑考』와 『禪家龜鑑五家辨』이라는 주석서까지 저술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17세기 일본 임제종은 명(明)에서 건너온 중국 승려를 둘러싸고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려는 종파와 비판하는 종파로 나뉘어졌다고 하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임제종풍을 논한 『선가귀감오가변』이 집필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의 연구를 통해 17세기 일본의 선서(禪書) 간행에 있어 휴정의 『선가귀감』이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연구를 계기로 향후 16-17세기 동아시아 간화선의 전개 양상이라든가, 간화선 관련 선적(禪籍)의 유통이나 수용 등과 관계된 연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으로 주목하였다.

한편 중앙승가대학교 승가학연구원에서는 ‘승가학자료집-법어편’을 간행해 오고 있는데, 2016년 제9권으로 『휴정』을 출판하였다. 『휴정』은 ‘휴정의 저술 및 법어’, ‘내외전에 보이는 휴정관련 자료’, ‘휴정의 비명과 행적’의 순으로 되어 있으며, 본문은 휴정 관련 각종 자료를 대교, 교감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 자료는 한국불교전서에 수록된 휴정 관련 내용까지 대교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향후 휴정 연구자들에게 좋은 선본(善本)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12)

Ⅲ. 원융회통사상과 간화선 중흥

1. 선(禪)·교(敎)·염(念)의 원융회통사상

휴정은 『선가귀감』, 『심법요초』, 『선교석』, 『선교결』, 『삼로행적』 등의 저술을 통해 조선중기 선풍을 중흥하고 선교겸수를 중시하였다. 이와 함께 선, 교, 염불의 삼문 수행체계를 세워 조선중기 이후 불교의 방향을 새롭게 형성해 가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휴정은 이미 1910년대의 역사 개설서에서부터 큰 비중으로 서술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휴정은 ‘임제종 법맥 계승과 그 역할’, ‘임제법통과 선교포섭’, ‘선, 교, 염불의 이른바 삼문수업’ 등과 관련한 내용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또한 승려로서는 특이한 경력이라 할 수 있는 승장활동에 대한 일본인 학자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청허 휴정과 관계된 다양한 연구물들이 출판되었다.13)

휴정의 사상과 관련한 연구는 1960-7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 발표된 주요 연구성과를 살펴보면 우정상(1965)은 휴정의 위대한 업적으로 ‘조선불교 전반에 대한 사상적 통일’과 ‘선교관의 확립’을 꼽았다. 아울러 휴정의 사상적 특징을 ‘선교겸수, 사교입선, 선교일치를 통한 독특한 통일불교의 재건’이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가 표현한 ‘통일불교’의 개념 문제를 비롯하여, 휴정의 통일불교는 그 근본 사상을 신라 원효대사에게 받았다는 식의 주장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다.

신법인(1974)은 휴정이 당시 교계를 간파하고 유·불·도 삼교의 종조는 다르다고 해도 그 본질은 유전일심법(惟傳一心法)의 뜻을 술하였다고 하였으며, 휴정은 당시 교계는 물론 후세 불교계의 승도들에 의해서 삼교합일론의 효시가 될 수 있었다고 서술하였다. 권기종(1978)은 선심교천(禪深敎淺), 선념일치(禪念一致), 자중타긍(自重他肯)14)의 탁월한 조화를 통해 실천하였던 휴정의 불교사상을 ‘화사상(和思想)’의 측면에서 정리하였다. 신법인과 권기종의 연구는 주로 선교겸수, 유불불이(儒佛不二)의 회통적 관점을 강조한 연구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한편, 휴정의 사상에 대하여 지관(1976)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주목된다.

대사가 저술한 頓敎頌15)에 따르면, 만약 불성을 알고자 하면 마음이 바로 그것이요, 三악도를 면하려 하면 마음이 곧 三악도라고 하였다. 그리고 精進은 석가요, 直心은 아미타불이며, 明心은 문수이고, 圓行은 보현이며, 자비는 관음이요, 喜捨는 대세지며, 嗔心은 지옥이요, 탐심은 아귀이며, 痴心은 축생이요, 起心은 天魔이며, 不起는 陰魔이고, 或起或不起는 번뇌마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일심에서 四聖六凡인 十法界가 전개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관이 주목한 「돈교송」에는 휴정의 선사상과 교학관, 염불관, 선교합일관이 축약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휴정은 학인을 지도함에 있어서는 본체제시와 방편교설을 근기에 따라 중도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고 정리하였으며, 선의 요체는 교외별전이지만 학인을 제접함에는 항상 ‘조주무자화(趙州無字話)’를 들어 그 문을 열어준다고 하였다. 또한 염불관에 있어서는 삼종정관(三種淨觀)과 사종염불(四種念佛)을 강조하였는데, 삼종정관이란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상징되는 극락삼성을 명상하여 염불자의 마음이 명념상응(冥念相應)하는 것이고, 사종염불이란 입으로 불명을 외우고, 불상을 생각하고, 상호를 관조하고, 실상을 나투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선교합일관에서는 교 중에도 선이 있다고 하여 궁극의 선지로 나아가도록 점차 수행으로 이끌기 위함이고, 선의 요체는 진귀조사(眞歸祖師)에게 별전(別傳)하신 것이요, 고불(古佛)의 진언(陳言)이 아닌데 이를 잘못 알고 돈점, 정맥(正脉), 원돈(圓頓) 등으로 분석하는 것을 지적하고, 수행자들의 병을 예리한 혜안으로 비판하였다고 평가하였다.

1980-90년대에는 인물과 사상뿐 아니라, 다양한 주제에 대한 연구가 시도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조선불교의 법통설과 관련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기도 하였다. 물론 태고법통설과 임제법통설의 이중적 구조와 관련한 견해는 아직도 이견이 분분한 상태이지만, 이 시기 연구는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단의 전통인식이라든가 정체성과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제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법인(1994)은 휴정의 사상에 대해서 사교입선이라 하여 교학을 다소 경원한 것 같은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는 불교의 삼장을 위시하여 유학의 시·서·역 등 제자백가와 노·장학 등 수많은 책자를 열람하였던 수행자로 평가하였다. 또한 많은 저술들을 통하여 실수실참(實修實參)하면서 후학 지도에 조금도 쉬지 않았던 면모를 강조하였다. ‘선과 교의 근원은 세존이시고, 선과 교를 나누어 전한 것은 가섭과 아난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항상 교와 선을 결부시켜서 언급하고 있는 점을 휴정의 ‘원융한 선교관의 핵심’으로 보았다. 한편, 염불정토관에서 있어서도 『선가귀감』, 『심법요초』의 저술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휴정은 아미타불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철저한 미타신앙자였음을 주창하였다.

김영태(1984)는 휴정의 선교관, 선과 교의 차이, 사교입선의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교문을 거쳐서 높고 깊고 주(主)되는 구경의 선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선교관에 직결되어 있는 하나의 선론’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휴정의 선교관 특징은 차별적인 소극적 교설의 방편문에서 쟁론을 떠나 격외선의 활구문으로 귀일시키는 ‘융화회통의 사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실천론으로서 참구방법, 선자의 일용자세, 본분과 묘득(선문을 통해 얻는 바) 등을 항목별로 서술하면서 ‘불학자의 무량행문’ 중 가장 으뜸이라는 조사의 선지 참구를 집중적으로 언급한 “휴정의 수선 구경관”(1992)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종범(1992)은 조선전기, 중기, 후기의 선교관과 선풍을 각각 고찰한 이후, 조선조의 불교를 구분함에 있어 휴정 이전을 전기라고 한다면, 중·후기는 휴정 이후의 시대를 통틀어서 포괄적으로 지칭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즉, 조선전기는 ‘함허 득통, 매월 설잠, 등곡 학조’의 현존하는 글을 통해서 선교관을 살핀 결과, 그들은 대동소이하게 선교원융·의교입선의 선교관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이같은 선교관은 조선전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계속된 한국불교의 전통적 특성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조선중기는 휴정의 저술과 수행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참선·간경·염불·송주 등 원융수행을 교설하고 있었으며 많은 행화불사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언급하였다. 아울러 휴정의 선풍은 그의 저술과 후대의 문도를 통해 계속 이어져 화엄과 선, 선과 정토를 동일시하며 겸행한 경우도 보인다고 파악하였다.

또한 종범(1993)은 휴정의 여러 저술들을 총망라하여 검토하면서 휴정이 어떠한 돈점의 선풍을 형성하고 있는가를 고찰하였다. 그 결과, 휴정은 ‘돈오돈수이면서 점수점증이며 시종점수인 선풍’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견해를 밝혔다. 아울러 휴정의 생애 관련 기록을 포함한 저술·법어·가송 등의 문헌들이 한결같이 돈오돈수적인 경절문 조사선을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계학과 교학을 배격하지 않고 염불과 송주 등의 수행을 융섭하며 회통하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이것은 휴정의 선풍이 조사선이면서도 초심수행이나 오후수행이 다를 바 없이 ‘시종 점수로 점수점증하는 선법’임을 의미한다고 피력하였다. 하지만 “무엇을 돈점이라 하는가, 법에는 돈점이 없으나 사람에게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기에 돈점이라 말한다”는 육조단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오수(悟修)의 돈점을 논하는 것이 오수의 성불을 위해서 진실로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종범(1996)은 휴정 선사상의 돈점관을 이루는 바탕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휴정이 찬술한 『삼로행적(三老行蹟)』에 근거해서 삼사(三師)와의 관계를 서술하였는데,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은 사옹(師翁)이고,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은 엄사(嚴師)이며, 경성 일선(慶聖一禪, 1488-1568)은 숙사(叔師)이었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이들 삼사를 ‘삼화상(三和尙)’이라 표현하는 것은 전적으로 휴정이 직접 찬술한 행적에 의한 것이다. 삼화상의 선풍에 대하여 벽송은 수행에 중점을 두었고, 부용은 오랜 기간을 교육에 임했으며, 경성은 교화의 기연이 많았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삼화상은 공통적으로 조사선풍에 의한 공안참구를 중시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그것은 ‘숭선양교(崇禪揚敎)’의 선풍이라고 정의하였다. 삼화상은 교의와 선지에만 융통할 뿐 아니라, 율행이 엄정하며 사은의 보은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 공통의 면모가 살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풍은 외국으로부터 갑자기 유입된 것도 아니고, 조선시대에 처음 조성된 것도 아니며, 중국에서 형성된 선풍이 신라하대에 선법이 전해지면서부터 점진적으로 계승된 한국의 선풍이라고 주창하였다.

종진(1993)은 휴정의 선사상을 조명하고자 휴정이 수학기간에 학습한 불전에 대한 내용을 고찰하였고, 그의 저술과 편저 문헌에도 관심을 기울여 검토하였으며, 그의 저술 속에 보이는 인용서목과 인용빈도 등을 통해서도 휴정 선사상의 특성을 도출하려 시도하였다. 그의 연구에 대해 종범은 “시종 문헌 검토에 근거하여 서산 선사상의 특성과 원류와 더 나아가서는 후대의 계승에까지 자연스러운 결론이 성립되도록 논리를 전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 점은 논문을 무척 돋보이게 하는 내용의 특성이다. 여기에는 논자의 서지학적인 밝은 안목과 평소 문헌을 세밀히 고찰하는 정진력이 온집되어 있어서 문헌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논자가 검토한 문헌은 서산의 저술 중에서 선문에 관계된 문헌만을 한정적으로 선택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서산에 대한 연구가 계속 되리라고 볼 때 본 논문은 학문적으로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은 것이다”고 평한 바 있다(종범, 1993: 61-62).

2000년대 이후는 휴정의 계율사상, 정토사상, 화엄사상, 호국사상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 주제가 확산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료의 발굴과 새로운 연구 관점의 도입 등으로 인해 이제 휴정 관련 연구는 그 지평이 확장되고 본격적인 도약의 시기를 맞이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들 연구를 통해 그동안 ‘통설’로 인식되어왔던 내용들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며, 아울러 최근에는 휴정 문도들의 사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조명하는 연구가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일문(2002a, 2002b)은 『심법요초』에 나타난 지계관을 기준으로 의승장으로서의 불살생계를 조명하였다. 결국 휴정의 의승활동을 사은과 관계된 ‘출가자의 본분사’로 파악하였으며, 『법화경』 개차법에서도 나타나듯이 섭화중생하는 계율 정신을 계승하여 활용한 구국의 보살행 실천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보광(2013)은 선정일치를 주창한 휴정의 정토관에 대해 고찰하였다. 휴정이 마음의 관념과 불명호를 부르는 칭명불이 하나가 되었을 때 염불이라고 정의하였으며, 휴정의 정토관을 구송염불(口誦念佛), 사상염불(思像念佛), 관상염불(觀相念佛), 실상염불(實相念佛) 등으로 분류하고 설명하였다. 또한 휴정은 극락세계의 실유정토(實有淨土)를 주장하였으며, 유심정토(唯心淨土)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철우(2016)는 휴정 선사상의 핵심은 조사선의 불성론과 무수무증(無修無證)의 수증론을 바탕으로 임제종의 간화선 선풍을 중시한다고 보았다. 여기서의 임제종 선풍이란 구체적으로 대혜의 간화선을 삼관문과 인가를 강조한 몽산 덕이와 간화선의 삼요를 강조한 고봉 원묘의 선풍을 의미하는데, 보다 포용적인 성향의 임제종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전등록』의 관점과 다르게 조동종을 제외한 임제종, 운문종, 위앙종, 법안종 모두를 마조의 법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편양 언기를 거쳐 백파긍선에 이어진 이러한 인식은 임제종의 선풍이 혜능 이후 조사선의 흐름을 대변하고 있는 주류라는 점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휴정의 선풍을 임제선풍과 간화선 사이에 흐르는 내적 유기성을 강조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김용태(2015)는 휴정의 영향을 받은 조선후기 불교의 수행과 사상을 선과 화엄의 두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선종으로서의 정체성을 표방한 임제법통과 간화선풍, 그리고 선교겸수의 방향에서 결실을 맺은 화엄교학의 성행 양상을 검토한 내용이다. 그는 휴정의 선교인식을 간화선 우위의 선교겸수라는 관점에서 조망하였다. 즉 휴정은 간화선을 선양하면서도 선교겸수를 용인하였으며, 간화선 수행방식을 단계적으로 추구한 보조 지눌의 정혜쌍수와 돈오점수적 수행체계와도 연결된다고 파악하였다. 아울러 조선후기에 화엄을 필두로 한 교학전통이 간화선 및 임제법통과 대등한 위상을 확보하게 된 것은 선과 교의 두 전통을 포괄하고 계승해야 했던 시대적 요구에 부합한 결과라는 견해를 밝혔다.

조선전기에는 불교와 함께 교학도 침체되었지만 휴정 이후 선과 교, 염불이 공존하는 원융회통적 수행풍토가 정착되었다. 휴정의 사상을 고찰함에 있어 근대 시기의 연구는 순수한 선문종풍의 선사상만을 중심으로 한국불교의 재건, 조계단일종 성립이라는 목표와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이후 휴정의 사상과 관련한 연구는 정토사상, 화엄사상, 밀교사상, 호국사상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연구 동향은 물론 반가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자칫 휴정 사상의 본류와 핵심을 놓쳐버리는 오류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2. 임제법통(臨濟法統)의 계승과 간화선 중흥

조선전기의 극단적 불교탄압기를 겪으면서 불교계는 종명을 상실하고 선문 전통의 단절이라는 상황을 겪게 되었다. 휴정 이후 조선중기 불교계는 임제-태고 법통을 수립하고 간화선 선풍을 고양하였는데, 이로 인해 조선중기 이후 불교계는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의 법맥을 중심으로 하는 계파와 문파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새롭게 형성된 ‘법통’은 한국불교의 승보(僧譜)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되고 있다.

한국 선불교의 법통과 관련한 논의는 한동안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이른바 임제법통설, 태고법통설, 나옹법통설 등은 나름대로의 논리적 근거와 타당성을 내세우며 다양한 견해들을 내세웠는데, 최근 들어 이와 관련한 논의는 정체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우선 1980-90년대에 발표되었던 법통 관련 주요 연구성과를 살펴보면 먼저 김영태(1997)는 앞서 발표한 1985, 1993년 두 편의 논문을 결합하여 새로운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태고법통설을 담고 있는 여러 문헌을 자세하게 살펴본 이후 그 문제점을 언급한 내용, 태고법통 확정의 역사적 연유를 살펴본 내용, 그리고 휴정 스스로가 인식한 법통과 그의 가풍을 살펴보는 내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논문에서는 특히 일부에서 비판하고 있는 태고법통설의 합리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최병헌(1995)은 조선 후기 불교계의 양대 법맥이었던 ‘서산계’와 ‘부휴계’의 갈등 문제를 본격적으로 주목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부휴계에 속하는 승려들의 동향과 송광사의 관계를 주목한 이후 7명의 주요 고승 행장을 간략히 정리하였다. 아울러 송광사 16국사 비정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과 법통설을 언급하였는데, 특히 송광사는 지눌의 업적을 강조하고 16국사의 영정을 받들면서 다른 한편 태고보우의 법통을 주장하는 ‘이중성’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점을 부각하기도 하였다.

종범(1992)은 “조선시대 선문법통설에 대한 고찰”에서 조선시대에 형성된 선불교 법통설의 주요 내용과 그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조명하였다. 이 논문은 법통설의 내용을 의식문, 나옹법통설, 태고법통설, 보조법통설로 각각 나누어 살펴본 이후, 이들 각 설이 지니는 문제점을 서술하였으며, 법통 연구와 관련한 향후 연구과제에 대한 내용도 밝혀놓았다. 특히 조선 선가의 법통을 마치 세속적인 혈통처럼 인식하거나, 성리학의 도통(道統)과 흡사한 것으로 인식하는 종래의 문제점을 비판한 내용은 법통설 이해의 중요한 준거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진행되었던 법통 관련 연구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부휴계 법통 관련 연구와 조계종사(曹溪宗史) 관점에서의 종조 및 법통 관련 연구가 주를 이룬다고 하겠다. 이 시기 발표된 주요 연구성과에서 김용태의 연구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면에서 주목된다. 김용태(2010)는 허흥식 이후 한국 선불교 법통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상세하게 정리한 논문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특히 이른바 4대 문파로 칭해지는 조선 중·후기 승려들의 계파를 간명하게 정리함으로써 그 당시 불교계의 선풍진작과 법통형성 연구에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아울러 이 논문에서는 조선후기 임제종이 조계종을 대신하여 선종을 대표하는 명칭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 김상영(2013)은 “조선 중기 이후를 살다간 많은 승려들의 의식 속에는 ‘종파인식’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허 휴정 관련 자료에는 ‘判大華嚴宗師’‘判大曹溪宗師’라는 표현이 자주 보이며, 그의 제자 사명 유정은 휴정을 ‘曹溪老和尙’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선교양종이 되었든, 혹은 화엄종이나 조계종이 되었든 조선 중·후기 승려들은 ‘무종파시대’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영허 선영(暎虛善影, 1792-1880)의 비제는 ‘朝鮮曹溪宗師華嚴講伯暎虛堂大禪師塔碑銘’으로 되어있어 눈길을 끈다. ‘조계종사’라는 종단 명칭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비의 본문에는 ‘尊爲曹溪宗師’라는 표현까지 있다. 당시 승단에서 선영스님을 ‘조계종사’로 존숭하고 있었다는 표현이다. 조계종 역사에 있어 이상과 같은 점들은 매우 중요하게 인식, 평가될 필요가 있다.”고 평한 바 있다(김상영, 2013: 485-486).

이철헌(2014)은 휴정의 법통에 대해 휴정의 선대 제자들은 초기에는 전통의 수행을 계승한 나옹혜근 법통으로 정리했으나, 훗날 후대 제자들이 논의하여 순수 임제선을 표방하는 태고보우법통으로 정리하게 되었다는 견해를 밝혔다. 아울러 태고보우를 중심으로 임제법통을 확립하고자 하는 법계정립에 대해서 삼국시대부터 고려말까지 이어온 고승들이 제외되는 점, 선(禪)·교(敎)·염(念)을 함께 수행해온 국내 불교의 수행전통을 무시하는 점, 혼수의 사법스승이 태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문제점 등을 지적하였다. 그는 또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사자상승의 법통설은 ‘스승과 인가’의 선법 특성상 필요는 하겠지만, 마치 속세의 장자상속처럼 인식되어지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김상영(2014)은 도의(종조), 보우(중흥조), 지눌(중천조)은 이미 조계종 종헌에서 뚜렷한 위상이 명시되어 있는 고승이며, 휴정은 조선시대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족적을 남긴 고승이라 평가하였다. 아울러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헌에서 보우와 지눌을 각기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결국 지눌, 보우, 휴정 등의 조사들은 모두 ‘조계종 중흥조’로 표현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16)

Ⅳ. 의승 활동과 표충사

조선왕조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불교를 정책적 탄압의 대상으로 만들고 말았지만, 한편으로는 불교계의 인력을 국가의 토목공사나 국방사업, 세원(稅源) 확보 등을 위해 제도화하여 억압 속에서 활용을 병행하는 양면책을 구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불교탄압은 승려와 사원, 사원전(寺院田), 종파의 축소, 그리고 도첩제(度牒制)와 승과(僧科)의 폐지를 통한 불교계의 인적, 물적 기반의 축소에 주력하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조정에서는 집권체제의 유지에 활용하는 방안으로 승려의 효용성을 의식하여 군인으로 편입시키는 법제적 규약체계를 실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승군제도’이다.17)

조선전기까지 승군은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었다기보다는 일시적이었으며, 대규모 공사나 비상시를 당하여 국가에서 축성(築城)과 방번(防番) 등을 담당하기 위해 승병을 징발하였다. 명종 대 이후에는 각종의 지물(紙物)을 생산하는 조지서(造紙署)에도 승군을 배속시키기도 하는 등 상납이 과중되었다. 이후 조선후기에는 국방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국가 공역을 위해 승군을 상설 제도화하여 산성의 축성과 수비, 궁궐의 수축과 사고(史庫)의 수호 등 여러 방면으로 동원하였다. 이렇게 승군이 정착하게 되는 배경에는 조선중기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고 하는 전쟁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휴정을 중심으로 한 ‘의승군(義僧軍)’의 희생은 양대 전란을 겪은 이후 조선불교를 가까스로 회생시키는 분위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조선 의승군들의 목숨을 담보로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근왕(勤王)’보다 조선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 즉 승단의 존속이었다(김상영, 2012: 190).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의 발발은 국가 존망의 위기였을 뿐 아니라, 불교계에도 엄청난 지각변동을 가져오는 등 조선후기 불교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사건이었다. 당시 선조는 휴정에게 국가적 위기를 맞아 널리 구제하기를 청하였고, 휴정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승군을 통섭(統攝)하여 전란 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의 승군 활동은 그동안 국가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탄압과 차별, 멸시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이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이었다.

김영태(1997)는 삼국시대부터 승려의 신분으로 종군(從軍)하거나 참전(參戰)한 사례는 더러 있으나, 신라의 치군(緇軍), 고려의 항마군(降魔軍)의 기록을 언급하면서, 승군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에 와서의 일이라고 명시하였다. 특히 의승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부터 『선조실록』을 비롯한 당시의 여러 사서(史書)들에 등장하는 용어라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휴정으로 대표되는 팔도도총섭부터 도총섭(都摠攝), 총섭(摠攝),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 도대장(都大將) 등의 용어와 역할에 대한 설명을 하였으며, 전란 후의 승군 역할에 대한 내용도 약술하였다. 또한 임란 때의 송운 유정, 기허 영규, 뇌묵 처영, 의엄 등과 호란 때의 벽암 각성, 허백 명조, 회은 응준, 백곡 처능 등 대표적인 승장들을 소개하면서 관련 내용들을 간략히 정리하기도 하였다.

황인규(2009)는 의승군 활동에서 주목되는 사례로 평양성 전투 참가, 처영의 행주산성 전투 승리, 사명유정의 노원평 전투 승리 등을 들었으며, 이들에 힘입어 임진왜란에서 역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의승군의 사상적 발현은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비롯된 국가비보사상의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아울러 그는 휴정 문도들의 추념사업과 국가제향에 대한 내용도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김용태(2012)는 휴정과 그 문도들의 면모, 의승군의 구체적 활동과 업적, 승려의 전란 참여에 따른 폐해, 그리고 불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조선후기 불교사 전개에 미친 영향 등과 관계된 연구를 발표하였다. 그는 특히 휴정의 주요 문도들이 남긴 문집18)을 통하여 그 면모를 평가하였고, 휴정 이후 부휴계를 대표하는 벽암 각성과 청허계 의승군이 지속적으로 의승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혔다. 그는 또한 호국불교 관련 연구사를 검토하고 의승군 활동을 ‘충의와 계율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한 논문도 발표하였다(2016). 그는 특히 조선시대 의승 활동을 ‘호국불교의 조선적 발현이라는 명제 하에 전란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유교 사회와의 존립을 모색한 것’으로 평가하였으며, 그 전통이 결국 승역의 관행화로 귀결되어 과도한 경제적 부담과 사회적 위상의 하락, 국가권력으로의 종속이라는 부정적 유산을 남겼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의승군 활동이 승역의 관행화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인식에 대해서는 보다 다양한 검토가 뒤따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양은용(2012)은 임진·정유왜란의 의승군 활동과 정유재란 및 난후 의승군의 동향에 대해서 상세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는 특히 호남지역의 의승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오고 있는데, 그의 연구를 통해 각 지역에서 전하고 있는 의승 관련 자료의 수집과 정리 필요성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이종수(2012)는 승군제도가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시의 모집 이후 제도적으로 정착되었음을 강조하였고, 그 역할은 궁궐 조영, 산성 축조, 사고 수호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또한 조선사회 지배층의 불교에 대한 인식 변화와 승군의 역할 사이에는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장희(2013)는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의승군의 위상과 역할을 상세하게 서술하였는데, 특히 조선 승려들의 신분적 정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란 극복에 끼친 의승의 활동을 보다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한편, 윤기엽(2014)은 조선왕조와 불교와의 관계를 조망할 때 그 중심에는 승군의 역할과 제도화라는 관점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고, 조기룡(2016)은 임진왜란기 의승군의 활동을 호교적 호국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휴정의 의승 활동 역시 불교의 실존을 달성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의 관점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휴정과 조선시대 의승 활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하나 있다. 바로 ‘호국불교’의 개념에 관계된 문제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이와 관련한 연구가 지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호국불교의 진정한 의미와 그 개념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특히 의승군의 활동과 역사적 공훈이 교육 현장에서조차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19) 호국불교 관련 연구는 앞으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그동안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에서 간행한 논문집과 자료집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① 한국호국불교의 재조명 1-10 (2012-2021).

    『호국불교의 시대별 용례 및 제향 의례』(제1책, 2012), 『의승군의 위상과 서산대사 국가제향 복원의 의미』(제2책, 2013), 『불교와 국가』(제3책, 2014), 『고려시대의 국가와 불교』(제4책, 2015), 『조선시대의 국가와 불교』 (제5책, 2016), 『불교계의 3·1운동과 항일운동(1)-(3)』(제6-8책, 2017-2019), 『불교의례와 국가』(제9책, 2020), 『금산사(뇌묵 처영)와 국일암(벽암 각성)』(제10책, 2021).

  • ② 한국호국불교 자료집 1-9 (2012-2021).

    『조선시대 승장·승통·총섭편』(제1집, 2012), 『승역편』(제2집, 2013), 『승잡역편』(제3집,2014), 『임명관련고문서 및 승잡역편』(제4집, 2015), 『사찰소장문서편』(제5-6집, 2016-2017), 『인·패류』(제7집, 2018), 『고려시대편』(제8집, 2020), 『삼국·통일신라·고려(보유)편』(제9집, 2021).

  • ③ 호국불교사찰총서 1-9 (2013-2021).

    『해남 대흥사 표충사』(제1책, 2013), 『밀양 표충사 표충사』(제2책, 2014), 『갑사 표충원』(제3책, 2015), 『금산사』(제4책, 2016), 『범어사』(제5책, 2017), 『진관사』(제6책, 2018), 『해인사』(제7책, 2019), 『건봉사』(제8책, 2020), 『월정사』(제9책, 2021).

『한국호국불교의 재조명』은 불교사회연구소에서 해마다 호국불교와 관련한 주제를 선정하여 두 차례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발표문을 수정·보완하여 수록·발간되는 논문집이다. 호국불교의 용례부터 최근의 항일운동 관련 연구까지, 이 논문집에는 그야말로 전 시대에 걸친 호국불교 관련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가는 중이다. 『한국호국불교 자료집』은 ‘호국불교 연구사업20)’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사업이며, 호국불교와 관계된 1차 자료들을 집대성해 가는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호국불교사찰총서』는 이른바 ‘호국사찰·호국도량’으로서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과 그들 사찰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호국불교의 사례를 집성해가고 있는 사업이라 하겠다. 이 연구는 어느덧 『월정사』(2021)를 포함하여 모두 9권의 책이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최병헌(2013)은 “호국불교는 이제 ‘호국’이라는 개념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한국불교사에서의 국가와 불교의 관계, 그리고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좀 더 폭넓은 시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호국의 사례만을 일방적으로 모아 한국불교의 특성으로 일반화시키려는 기왕의 이해방법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김상영(2014) 역시 조선시대 의승군의 참전 행위에 대해 당시에도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승려가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지금의 우리는 호국불교라는 이름 아래 고려대장경 조성불사와 조선 의승군 활동을 한데 묶어 이야기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경계하였다. 이제 호국불교의 개념 문제라든가, 호국불교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 등에 대해 본격적이면서도 보다 적극적인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Ⅴ. 맺음말

청허 휴정은 조선시대 당시 조정과 유림, 민중으로부터 각각 ‘보제존자, 법천종사, 서산대사’로 추앙받았던 고승이다. 이러한 휴정의 면모는 수행, 교육, 저술의 측면에서 조선불교 이전의 사상을 집성하여 조선후기의 선문종풍을 수립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휴정이 간직하고 있는 사문상(沙門像)은 한국불교의 특성으로 인식되고 있는 회통불교와 호국불교의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 논문에서는 생애와 저술, 사상과 법통, 의승과 호국이라는 측면에서 그동안의 휴정 관련 연구성과를 고찰하고 향후 과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본문에서 검토한 내용을 바탕으로 향후의 연구과제를 나름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휴정의 활동과 사상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생애와 관련한 기초적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김영태(1975), 신법인(1983)의 저술 이후 휴정의 생애를 세밀하게 검토하기 위한 학계의 노력은 중단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휴정 관련 각종 비문의 판독과 교감, 그리고 휴정 저술서에 대한 서지적 검토, 특히 이본(異本) 간의 대교작업 등은 무엇보다 시급한 연구과제에 속한다고 하겠다.

둘째, 휴정에게는 임제법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참선, 염불, 간경, 송주, 예경 등을 다 권장하는 선교겸수 원융수행의 선풍이 있다. 이것은 종파의 독립성을 상실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 선풍이다. 조선 후기에는 평생을 교학업, 정토업, 지송업을 닦았어도 모두 선사라 칭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예는 오늘날에도 종종 발견된다. 휴정의 선풍과 그 영향을 살펴보는 연구에서 반드시 고려할 필요가 있는 과제가 존재한다. 혹시 우리는 겸수나 원융이라는 표현으로 종파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제적으로 박탈 당했던 시대의 아픔마저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이다.

셋째, 조선시대 의승군의 활동과 희생은 ‘근왕’보다 ‘승단의 존속’이라는 대승적 명분의 결행이었다는 점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휴정의 참전 결행은 ‘중생구제’, ‘자비심’, ‘방편’ 등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왜곡된 ‘호국불교’ 개념과 연계되면, 조선시대 수많은 의승의 희생은 정당한 역사적 평가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향후 호국불교의 개념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학술 담론이 형성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Notes

“서산의 득도 연대는 정확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서산의 자서행록인 「上完山盧府尹書」에 확실한 시기가 표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산이 입적한 뒤에 후인들이 서산의 득도시기를 기술한 내용에 약간의 차이점을 보인다. 월사 이정귀가 지은 묘향산 비문에는 서산의 법랍을 67세라 하였고, 월사 이정귀의 표훈사 비문에는 서산의 법랍을 64세라 하였다. 서산은 세수가 85이니 법랍이 67이면 19세에 득도한 것이 되며, 법랍이 64이면 22세에 득도한 것이 된다. 그런데 해남 대흥사에 세운 장유가 찬술한 碑文과 김낙일이 찬술한 「西山大師行錄」에는 모두 21세에 득도 수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와 같이 서산은 득도하기 전에 경론을 탐구하여 확신을 얻은 다음 20세를 전후한 나이에 득도하였다.”(종범, 1992: 171-172).

「休靜爲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者」, 선조임금하사 휴정 도총섭 임명교지, 1602.

「淸虛堂普濟尊者碑銘」, 해남대흥사 청허당휴정대사비 碑題(篆刻), 1778(改立).

「休靜爲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登階普濟尊者加贈表忠禪師者」, 정조임금하사 표충사 사액 휴정 추증교지, 1788.

“조선중기 이후 불교사에 끼친 휴정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파생된 4대 문파는 조선 중 후기 불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으며, 그가 엮은 『선가귀감』은 지금까지 불교 입문서나 선 수행 교재와도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다. 『청허집』에는 조선시대 최고 禪師로서의 경지를 유감없이 드러낸 禪詩가 가득히 남아있기도 하다. 이러한 휴정의 일대기에서 ‘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승군을 統攝한 기간은 불과 2-3년 남짓이었다. 우리는 ‘호국승병장 휴정’이 아니라 ‘사문 휴정’으로서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더욱 충실한 노력을 기울여 나갈 필요가 있다.”(김상영, 2012: 5-6).

필자는 이미 ‘청허 휴정 관련 연구논저목록’을 정리하여 발표한 바 있다(향문 2020). 이 논저목록은 김상영·황인규 편 『조선시대불교연구 논저목록』(2005)과 김상영(2001), 김상현(2002), 김순석(2000), 김용태(2013a), 김천학(2001), 손성필(2013), 오경후(2013), 채상식(1998) 등이 발표한 연구사 관련 논문들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이었음을 밝혀둔다.

이들 碑文에 관계된 자세한 사항은 필자의 석사학위 논문(향문, 2012)를 참고하기 바란다.

정명호는 碑③의 파편으로 추정되는 2개의 비편을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들 비편마저 그 소재 파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현재 대흥사 부도전 내에 세워진 휴정의 비신은 방주형이지만 귀부석에 파인 홈은 장방형이다. 서로 결구된 모습이 맞지 않고, 빈 공백이 좌우로 보이기 때문에 碑③의 비신이 치워지고, 碑③-1이 새롭게 세워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1823년 편찬된 『대둔사지』에는 이러한 일련의 경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최근 간행된 각종 보고서나 문화재 현황 목록 등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을 명확하게 서술해 놓고 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정명호, 1979; 이수경·임성춘·김다빈, 2017).

필자는 2012년(앞의 논문) 연구 당시 각종 금석자료를 탁본이 아닌 정밀 사진촬영으로 진행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 방법은 무엇보다 탁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료의 훼손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을 지니며, 또한 자료의 판독에도 실제로 탁본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조사연구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碑⑤의 후면 음기 부분을 촬영하였는데, 여기에서 ‘咸鏡道勸錢二百四十買碑’라는 구절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선행자료 어떤 곳에서도 게재되어 있지 않은 최초의 내용이었다. 필자는 이 외에 호남지역 소재 다수의 불교 금석자료에서 미판독 字와 누락된 字들을 찾아내고 바로잡을 수 있었다. 향후 금석문 조사연구에 있어 이같은 정밀 사진촬영을 바탕으로 한 조사방법이 보다 널리 확산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丁酉春受嶺南宗正之差 徃叅春享 居海印寺 是冬大芚寺 送戒洪來告曰 西山之碑腰傷 不可不改立 乃發文諸道收錢 戊戌春遞任上京 買貞珉 在京磨刻 如壬午事”- 有一, 「蓮潭大師自譜行業」, 『연담대사임하록』 권4, 한국불교전서 제10책, 285上.

일제강점기의 주요 연구성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車生, 1927; 김태흡, 1929; 『조선』 182, 1996; 권상로, 1939(1988판). 보다 자세한 내용은 김용태(2015: 66)을 참고하기 바란다.

현재까지 『선가귀감』 언해본은 原刊本과 覆刻本 2종의 판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간본은 1569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간행되었으며, 복각본은 1610년 선수의 교정을 거쳐 송광사에서 간행되었다고 한다. 한편, 송일기는 종래에 판본학적인 검토 없이 두 본을 동일한 것으로 오인한 경우도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선가귀감』에 대한 서지학적 검토의 중요성을 제기하였다.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동국대 불교문화유산 아카이브 사업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한국불교 문화유산, 특히 각종 기록유산을 종합적으로 수집, 분류, 정리하고 이를 DB로 구축해 간다면 한국불교사 전반에 대한 이해 수준은 지금보다 훨씬 고양될 수 있을 것이다.

종범은 이 자료집의 발간사를 통해, “일반적 과학불교학과 전통적 승가불교학을 간략히 표기하면, ‘과학불교학’과 ‘佛學불교학’이다. 과학불교학은 불교를 ‘대상화’한다. 많은 연구업적을 축적했어도 연구자의 삶과 죽음의 실존적 문제는 늘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것이 과학불교학의 한계이다. 이에 비해서 불학불교학은 불교를 ‘자기화’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심으로 參學하고 보현행원으로 실천해서,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고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불교학이 불학불교학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화, 생활화, 대중화 한다’고 하는 불학불교학의 신천강령을 과학불교학의 업적을 응용하여 실현하면 이것은 현대적 불학불교학이며, 현대적 불학불교학은 현대적 승가불교학이 된다”라는 뜻을 밝혔다.(승가학연구원 편, 2016: 4-5)

1910-50년대까지의 주요 연구성과는 필자의 논문(2020)을 참조하기 바란다.

권기종에 의하면 ‘선심교천’은 즉 敎門禪旨로서 선의 궁극에는 반드시 교의 문을 열어야 하는 조화를 말함이다. ‘선념일치’는 선교의 마음이 염불의 마음과 다르지 않으므로 염선의 일치를 성립시킨 것이다. ‘자중타긍’이라는 것은 출가인의 본분과 국민의 의무 사이에서 탁월한 조화를 실천한 호국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若欲見佛性 知心是佛性 若欲免三途 知心是三途 精進是釋迦 直心是彌陁 明心是文殊 圓行是普賢 慈悲是觀音 喜捨是勢至 瞋心是地獄 貪心是餓鬼 痴心是畜生 婬殺亦如是 起心是天魔 不起是陰魔 或起或不起 是名煩惱魔”

休靜, 「偈」, 『청허집』 권4, 한국불교전서 제7책, 703上(대부분 판본에서는 ‘頓敎頌’으로 게재).

“청허 휴정의 문도들은 ‘단절’되어있던 조선 선가의 법통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두 가지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태고 보우-서산 휴정에 이르는 전법 관계를 일부 작위적으로 만들어 냈다는 점, 그리고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태고법통’ 일변도로 확정시켜 놓고 말았다는 점이다. 600여 년 가까이 ‘선문 중심’으로 존속되어 오던 조계종의 법통은 이 시기에 이르러 단일화된 ‘태고법통’으로 변질되고 말았다(김상영, 2013: 24-25).”

승군제도와 의승군 활동 자체에 관련된 선행연구는 다음의 자료들이 있다. 우정상(1959, 1963), 이종영(1963), 안계현(1972), 여은경(1987), 김갑주(1988), 김덕수(1991, 1992, 1993), 고영섭(2013).

김용태(2012)의 논문에서 『정관집』, 『영허집』, 『사명당집』, 『운곡집』, 『제월당집』, 『청매집』, 『기암집』, 『소요당집』, 『중관집』, 『영월당집』, 『편양당집』 등 총 11종의 문집을 소개하고 있다.

김상영은 2012년 당시 고등학교 한국사 검인정교과서 6종에 실려 있는 불교 관련 내용을 분석하면서, “이들 모두는 임진왜란의 전개와 극복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의승장의 이름을 본문에 소개한 경우는 단 한 종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교과서로 우리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은 의승군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조선시대 전란사에서 보여주었던 의승군의 활동과 역사적 공훈에 대해서는 교과서 집필자들의 올바른 역사인식과 적극적 서술태도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김상영, 2013: 51-52).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와 대흥사는 이른바 ‘호국불교’의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오고 있다. 이들의 노력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호국불교와 관련한 학술사업의 전개와 표충사 향례를 국가제향으로 복원하기 위한 노력 등이 그것이다. 최근까지도 ‘호국 의승군의 날’이라는 국가기념일 지정 실현과 표충사 향례의 국가무형문화재 등재를 위한 논의와 실무를 추진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상영(2013: 56-58)의 자료를 참고하기 바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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