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일반논문

고우스님의 생애와 선사상 연구

오종만*
Jong-man Oh*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교수
*Professor, Joong-Ang Sangha Univeristy

© Copyright 2023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Dec 11, 2023; Revised: Dec 20, 2023; Accepted: Dec 22, 2023

Published Online: Dec 31, 2023

국문 초록

본 논문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선사인 고우스님의 생애와 선사상을 주제로 하는 최초의 학술연구이다. 연구를 위해 스님의 법문과 인터뷰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고 분석하였다. 한국사회에 2000년대 이후 명상 붐이 일었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명상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불교 수행법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였지만 그 관심은 제한적이다. 불교 수행법, 대표적으로 간화선은 어려운 수행법이라는 선입견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우스님은 간화선 수행과 보급, 선사상 정립에 일평생을 바쳤다. 나아가 스님은 현대산업문명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선은 개인적 차원에서 마음의 문제를 다루며, 동시에 사회와 문명의 차원에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 연구에서는 고우스님의 선사상을 ① 직접성, ② 실천성, ③ 사회성으로 정리하였다. 첫째, 직접성은 선수행은 본래자리를 직접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특성은 한국불교의 오래된 ‘본래부처’에 기초한다. 스님은 모든 인간은 본래 깨달음이 완성되어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착각에 빠져서 깨닫지 못할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스님은 선수행의 준비 요소로서 신심과 발심, 정견을 강조한다. 둘째, 실천성은 선이 실천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을 통한 ‘실천’ 즉, 지혜와 평화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셋째, 사회성은 선의 역할이 인류가 처한 위기 극복을 지향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선은 문명사적 대안이라는 의미규정과 통한다. 그래서 스님은 선수행을 통해 획득한 지혜는 남과 나를 넘어 사회와 인류를 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불교에 대한 스님의 비판도 이 부분에 집중되었다. 한국불교의 교리는 깊고 선수행 전통은 뛰어나지만, 그 내용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음을 안타까워 하였다.

Abstract

This paper is the first academic study to focus on the biography and Seon [禪] thoughts of Ven. Go-woo, a representative of Seon master of Korean Buddhism. For this study, I collected, organized, and analyzed various materials, including the monk's sermons and interviews. There has been a meditation boom in Korean society since the 2000s, and many people are practicing meditation for various purposes. Along with this trend, interest in Buddhist practices has also increased, but interest is limited. Buddhist practices, most notably Ganhwa Seon, have not been able to overcome the preconceived notion that it is difficult. Against this backdrop, Ven. Go-Woo has devoted his life to practicing and disseminating Ganhwa Seon and establishing Seon's thoughts. Furthermore, he argued that Seon can play an important role in solving the problems caused by modern industrial civilization. Seon can address issues of the mind on an individual level and, at the same time, explore new directions for humanity on a social and civilizational level. In this regard, this study summarizes his thoughts on (1) directness, (2) practicality, and (3) sociality. First, directness refers to Seon's practice being directed toward its original place. This characteristic is based on the long-standing Korean Buddhist concept of 'originally the Buddha.' He explained that all humans are inherently enlightened; they just do not know it and are mired in illusion. Therefore, he emphasizes faithfulness[信心], initiation of the spirit of enlightenment[發心], and right view[正見] as preparation for Seon’s practice. Second, practicality is that Seon includes practice. He explained that Seon is not a purpose in itself but rather the "practice" of Seon or following the path of wisdom and peace. Third, sociality explains that the role of Seon is to overcome the crises facing humanity; in this sense, Seon is a civilizational alternative. Thus, he argued that the wisdom acquired through the practice of Seon should be directed toward society and humanity, beyond others and oneself. His criticism of Korean Buddhism also centers on this point. Although Korean Buddhism's doctrine is profound and its athletic tradition is outstanding, he lamented that its content and practice are inconsistent.

Keywords: 고우스님; 선사상; 선수행; 직접성; 실천성; 사회성; 본래부처
Keywords: Seon Master Go-Woo; Seon Thoughts; Seon Practice; Directness; Practicality; Sociality; Originally the Buddha[本來佛]

Ⅰ. 서론

명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오래 되었고, 실제 많은 사람들이 명상센터를 찾아 심신치유와 마음안정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명상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명상 붐 속에서 불교의 수행법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고 있지만, 그 관심은 매우 제한적이다. 불교에 근거하지 않는, 종교를 추구하지 않는, 단지 영적이라고 주장하는 명상센터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불교의 수행법은 어려운 수행법이라는 선입견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종단에서는 이러한 선입견을 극복하기 위해 대중화, 생활화, 국제화를 목표를 다양한 사업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그 성과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을 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간화선 수행과 보급 그리고 선사상 정립에 일평생을 바친 선사가 있다. 고우스님이다. 스님은 ‘심오하고 수승한 조사선의 전통을 표방하는 한국불교가 그 깊이에 비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대책을 강구해야’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바 있다(고우스님, 2021: 5). 스님은 다른 불교 전통에 기반한 수행법들을 인정하고 소통하면서도, 간화선이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는 자부심을 놓지 않았다. 또한 현대산업문명이 가진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간화선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며 선수행을 권장하였다. 이는 한국불교가 ‘본래부처’에 입각한 선이기 때문이다. 고우스님의 선사상도 본래부처에 토대를 두고 있다.

고우스님의 선사상을 통해 선수행이 ‘개인’의 문제만을 다루지 않고, 사회와 문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은 개인적 차원에서 마음의 문제를 다루며, 동시에 사회와 문명의 차원에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즉, 선은 현대 산업문명이 우리 인류에게 남기고 있는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성찰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고우스님의 생애와 선사상을 정리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스님의 법문과 인터뷰를 담은 책과 기사, 그리고 스님의 강의를 기반으로 번역된 경전을 참고하였다. 스님이 직접 기술한 저술이 없다는 아쉬움이 크다. 언어문자를 초월하고 손가락이 아닌 달을 직접 보는 체험을 권장했던 선가(禪家)의 전통을 생각하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스님은 일반인들에게도 ‘산 정상에서 본 허공’을 글로 보여주려고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아쉽다. 또한 본 연구는 고우스님에 대한 첫 번째 학술적 연구이다. 스님이 최근래까지 생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승가학이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것도 한 이유이다. 불법승 삼보 중 하나인 승가에 대한 연구도 필요함에도 기존 불교학은 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승가에 대한 고우스님의 비판을 생각하면 더욱 아쉽다. 승가와 개별 승려에 대한 학술적·객관적 연구가 활발해져 승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II. 고우스님의 생애와 깨달음

1. 고우스님의 생애

고우스님은 1937년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났다. 25살이던 1959년에 폐병으로 요양하려 김천 청암사 수도암에 왔다가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스님은 자신의 출가는 ‘발심 출가’는 아니라며, 특유한 겸손함으로 자신의 출가 경험을 담담하게 별일 아닌 것처럼 설명한다.

나는 발심(發心)해서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폐결핵을 심하게 앓고 있어 요양차 절에 간 것이 인연이 돼 출가하게 된 것입니다. 가급적 인적이 드물고 대중이 적은 사찰을 찾아 스물다섯 살에 김천 청암사 수도암으로 가게 되었습니다(고우스님·유철주, 2011: 339).

고우스님은 이처럼 자신은 일반적인 ‘발심 출가’가 아니며, ‘결핵 치료를 위해 공기 좋은 데 살려고 산중을 택한 것’이 인연이 되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혜국스님은 ‘폐결핵으로 삶을 포기한 상황에서 선택한 출가이므로 이미 경계를 뛰어넘은 선택’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였다(<현대불교>, 2021.09.09.).

그 당시 젊은 스님이 저의 집에 자주 출입했는데, 제가 그 스님에게 무위도식한다고 엄청 비판을 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수행한다고 하면서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죠. 그러던 제가 중이 되어서 그 분이 입적하시기 전까지 자주 찾아뵈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불교 집안의 독실함은 없었던 것이죠(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월간 우리길벗 편집부, 2005: 43).

출가 당시 집안에서는 어머님만 불자였다고 스님은 이후 한 인터뷰에서 언급하였다. 스님 또한 신심이 그리 깊지는 않았다. 출가 이후 강원에서 만난 관응스님의 첫 강의를 듣고 뒤늦게 발심하였다고 스님은 언급하였다.

관응스님의 강의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관응스님이 말씀하신 『도서』의 ‘장식파경(將識破境)’ 한마디를 듣고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발심을 한 것 같습니다(고우스님·유철주, 2011: 339).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스님은 일반인과 일반 불자들의 입장에서 선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진심이었고 탁월하였다. 고우스님은 불교를 일상의 언어로 쉽고 명쾌하게 설명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렵고 추상적인 선(禪)은 스님에게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언어가 되었다(<경향신문>, 2007.10.26.). 그래서 스님의 법문을 청하는 곳이 많았다. 스님은 세수 80세가 되어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전까지 장소 불문하고 법문을 하였고, 법문을 위해 운전면허를 취득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스님은 청암사 강원에서 고봉스님에게 수학했으며, 관응스님에게 『대승기신론』, 흔해스님에게 『금강경』과 『원각경』을 배웠다. 양산 묘관음사에서 첫 안거를 보냈다. 그때 향곡스님께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뭣꼬?(不是心 不是佛 不是物 是什麽)’라는 화두를 받았다. 그런데 이 화두가 잘 안 돼 나중에 향곡스님의 법문을 듣고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 화두를 들었다(고우스님·유철주, 2011: 340).

첫 안거 이후 스님은 봉암사와 각화사, 김용사 등 제방선원에서 평생을 참선수행으로 일관하였다.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를 지냈고, 원로의원에 추대되었다. 봉화 문수산 금봉암에 주석하셨다. 고우스님은 2021년 8월 29일 봉암사에서 세수 85세, 법랍 60세에 입적하였다. 종단은 수행자로서의 스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스님의 영결식을 ‘전국선원수좌회장’으로 봉행하였다. 한평생 수좌로 살았던 스님에 대한 존경의 뜻이 담겨 있다. 특별한 임종게를 남기지 않은 스님은 입적하기 얼마 전 가까운 이들이 안부를 여쭈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가 전해라’ 하였다.

선사(禪師)로서 고우스님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일은 봉암사 재건과 선승들의 모임인 선납회(禪納會, 지금의 선원수좌회) 창립이다. 스님은 1968년경 경북 문경 김용사에서 수행하던 도반들과 함께 문경 봉암사에 들어가서 선원을 재건하였다. 봉암사는 구산선문의 수선도량이고, 1947년에는 성철스님과 청담스님 등이 주도하여 “부처님 법대로 조사님 가르침대로” 살아보자는 취지의 결사가 진행된 도량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한국전쟁의 영향 등으로 이러한 전통이 끊겨 있었다. 이에 고우스님은 당대 선지식인 서옹·서암·지유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선풍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스님은 총무와 주지 소임을 맡아 이를 주도하였다. 스님은 수행 분위기뿐만 아니라, 수행환경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님은 당시 봉암사의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해 벌목업자들과 당당히 맞섰고, 이로 인해 큰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법보신문>, 2021.09.01.). 이러한 각고의 노력으로 봉암사에서는 부처님 법대로 수좌 대중들이 원융살림하는 전통을 수립하였고, 이는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이 되었다. 또한 1988년에는 해인사에서 선어록을 공부하는 선화자(禪和子) 법회를 개최하는 등 수좌들의 사상 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고우스님은 종단 내의 교역직을 맡은 경험도 있었다. 종단이 신군부의 폭압에 의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였다. 1980년 신군부가 10·27법난을 자행하여 총무원 기능이 마비되었다. 당시 봉암사 스님들이 총무원을 임시로 운영하게 되었고, 고우스님은 탄성스님과 함께 총무부장 소임을 맡아 법난을 수습하고 종헌을 개정하는 등의 개헌 조치를 한 뒤 3개월 후에 다시 봉암사로 되돌아갔다(<한겨례>, 2021.08.29.).

2. 경계를 뛰어넘은 경험

불교계와 사회에서 이 시대를 이끄는 ‘선지식’과 ‘실천전 지성’으로 평가받았던 고우스님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앞서 자신의 출가는 발심 출가가 아니라고 애써 설명했듯이 자신에게 ‘깨달음 여부’를 묻는 질문에 “나는 깨닫지 못했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답한다. 그리고 그 뒤 깨달음은 언행일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자신은 아직까지 언행일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부연 설명한다. 이러한 스님의 설명은 ‘일생을 여법하게 살았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다. 언행일치가 부족하다는 한국불교에 대한 비판을 생각하면 경책의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된다.

스님은 여러 이유에서 깨달음에 대해서는 부정했지만, 생각이 바뀌는 경험 곧 자신의 경계를 뛰어넘는 경험을 두 번 했다고 설명하였다(고우스님·박희승, 2009: 84-85; 고우스님·유철주, 2011: 342). 첫 경험은 1970년대 초 상주 심원사에서 정진할 때였다. 당시 새벽이면 일어나서 정진을 하였는데, 어느 날 아침에 참선을 하다 불현듯 ‘무시이래(無始以來)’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무시이래가 비롯함이 없는 아득한 옛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구나’ 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스님은 『서장』을 찾아 살펴보았더니 그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대목이 화두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해되었다. 화두도 이제 시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1981년 각화사 동암에서의 경험이다. 『육조단경』 「정혜불이품(定慧不二品)」의 ‘정혜가 하나가 되더라도 비도(非道)이다. 하나가 되어 통류(通流)해야 한다’라는 구절을 보고 나서다. 스님은 이 대목을 보다가 이해도 아니고 체험도 아닌 어떤 느낌이 왔다고 설명하였다. ‘통류’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그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던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란 문구가 이해되었다. 이를 “안목이 열렸다”고 표현하였다. 그 이후 눈앞의 두두물물이 다 부처라는 것을 알았고, 모든 존재 원리가 이해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 경험은 화두 타파하고는 다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스님은 선종 초기 수행법인 ‘회광반조’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 경험 이후에 서암으로 내려와 조사어록, 민족사의 깨달음총서 시리즈와 같은 불교교리서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종이 모두 한 말씀이고,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부처님께서 깨치신 것이 ‘중도연기(中道緣起)’이고, 지금까지의 모든 불교사상들이 중도연기를 중심으로 교리를 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스님은 당시의 경험과 경전 공부를 겸한 확인을 통해 중도연기로 모든 불교 교학체계를 회통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체험을 하기 위해 다시 화두를 들었다. 나아가 스님은 이 경험들이 이후 ‘중노릇’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에 대한 가치와 의미는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음을 알았고, 부처님의 제자라는 자부심이 스님 자신을 매우 행복하게 하였다.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어떻게 살아야 모두 함께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인지도 알게 되었다고 언급하였다(고우스님·박희승, 2009: 85).

Ⅲ. 고우스님의 선사상

1. 한국불교 간화선를 위한 노력

고우스님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선승이자 선지식이었고, 참선을 생활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간화선 수행법을 정리한 『간화선-조계종 수행의 길』이다. 스님은 참선을 본래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공부라고 정의한다. 또한 참선은 화두 하나에 집중하여 확철대오하면 분별망상을 완전하게 타파하는 공부로 우리나라의 전통 수행법이라고 강조하였다(고우스님, 2020: 91). 그렇다고 ‘간화선’만을 강조하거나, 그것만이 유일한 수행법이라고 하지 않았다. 일례로 고우스님은 2011년 4월 간화선을 대표하여 위빠사나를 대표하는 미얀마 파욱사원의 파욱스님과 공개문답을 하였다.1)

나는 지난 연찬회에서 두 수행법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 참석했습니다. 영가스님은 『영가집』에서 위빠사나를 성성적적(惺惺寂寂)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두를 통한 삼매나 위빠사나를 통한 삼매는 다르지 않습니다. 색깔이 다른 보자기에 포장된 같은 내용물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두 수행법이 서로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대립하고 싸우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고우스님·유철주, 2011: 347).

공개문답에서 스님은 ① 간화선이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돈오돈수(頓悟頓修) 수행법이며, ②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목표에 이르는 방법만 다를 뿐 그 끝(목표)은 똑같으며,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다는 점, ③ 개인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와 국가가 좋은 방향으로 가도록 불자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연합뉴스>, 2011.04.10.).

1) 본래성불에 기초한 선(禪)의 정립

고우스님은 선, 구체적으로 간화선의 여러 논쟁에 참여하여, 간화선을 사상적·이론적으로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간화선과 관련된 기본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화두는 상대적인 분별의 말을 끊는 절대 세계의 말이다. 이처럼 상대적인 분별의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말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말을 제시하는 것은 화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화두는 존재의 원리를 깨닫게 하는 방법, 참선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관문의 역할이다. 그래서 고우스님은 화두도 방편 중의 하나라고 분명하게 언급한다(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월간 우리길벗 편집부, 2005: 44).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간화선은 에둘러 돌아가지 않고 곧장 달을 향하는 가장 좋은 수행법임을 강조한다. 둘째, 돈오점수 돈오돈수(頓悟漸修 頓悟頓修) 논쟁에서도 스님은 돈오돈수가 선불교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였다. 이는 선(禪)은 곧 모든 사람이 원래부터 본래부터 깨달은 완전한 존재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이러한 본래부처론에 입각하면, 모든 사람은 이미 본래 깨달음이 완성되어 있는데, 어떤 연유로 그것을 알지 못하고 착각에 빠져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깨달음이란 본래 있는 그 자리에 가서 계합(혹은 감응)하는 것이다. 이를 꿈을 깨는 것으로 비유한다(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월간 우리길벗 편집부, 2005: 45). 잠을 깨는 것은 ‘찰나의 순간’이다. 단계를 거쳐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스님은 『서장』에서 대혜스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체험하면 내가 바로 부처이고 조사가 될 수 있다고 언급했음을 강조하며, 좌선(坐禪)은 몸이 앉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앉는 것이 좌선이라고 설명한다. 셋째, 깨달음의 기준을 ‘오매일여’로 제시하였다. 화두 참선할 때 화두 일념이 되면 대체로 세 단계–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를 거쳐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이 중 오매일여는 깨어있을 때나 잠을 잘 때도 한결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고우스님은 여러 경전 등을 참고하여 ‘오매일여’를 화두 깨침의 한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깨달음의 기준이 제각기인 현실을 타파하기 위함이었다. 간화선 전통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분명한 깨달음의 기준에 대하여 혼란함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착각’에 빠져 아직 깨닫지 못했음에도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발생하였다. 이에 성철스님도 경전과 어록을 검토하여 조사들이 언급한 오매일여를 기준으로 설정하였다.2) 실제 성철스님이 “화두가 자나 깨나 지속되는 오매일여가 되어야 깨친다”라고 한 뒤에 도인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처럼 고우스님은 간화선을 둘러싼 논쟁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경전과 어록을 근거로 엄밀한 기준을 세우고 혼란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통해 간화선이 사회에 더욱 광범위하게 수용되기를 기대하였다. 즉, 교학적 관점에서 선사상을 정립하는 것도 스님은 중요한 과제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교리적 측면에서보다는 실천적·사회적 측면에서 스님의 선사상이 갖는 의미를 탐구한다. 이는 스님이 언급했듯이 선(禪)이 양극화 시대에 인류의 문명사적 대안일 수밖에 없으며, 그 역할 잘 수행하는 것이 선지식으로서 승가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과 관련된 스님의 노력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간화선 보급을 위한 노력

고우스님은 체험으로서 선수행을 위해 정견(正見)을 바로 세우는 일을 중시하였고, 이해 그 자체도 중시하였다. 이는 일반인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흔히 깨달음에 대해서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며, 이를 전제로 선(禪)에 대해 말과 글로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정당화한다. 하지만 스님은 ‘산꼭대기에서 허공을 봤으면 대중에게 글로, 입으로라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전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맥락에서 스님은 대중과의 소통 매체로서 ‘중도’를 강조하였다. 즉 ‘도는 글로 표현할 수 없고, 아는 사람은 다만 알 뿐이다. 오히려 중도의 가르침으로 더 많은 대중들이 발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현대불교>, 2021.09.09.).

이러한 흐름에서 스님이 전재강과 함께 간화선과 관련된 주요 고전을 번역·출간한 일도 조명되어야 한다. 스님은 2004년에 간화선 수행의 핵심을 담고 있는 『서장』, 2006년에는 종단의 강원에서 기본교과서로 교육하는 『선요』, 2019년에는 『금강경』의 여러 해설서 중에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금강경 삼가해』를 발간하였다. 번역 작업은 고우스님의 강의에 기초하고 있다. 『서장』은 2001년 3월 2일부터 8월 17일까지 각화사 서암에서 진행된 강의, 『금강경 삼가해』는 2005년에 안동에서 진행한 강의 내용에 기초하고 있다. 전재강은 번역-검토-수정-정리 작업을 반복하면서, 스님의 강의 내용을 번역에 반영하였다. 특히 『선요』는 조계종 강원의 기본교과서임에도, 강원에서 사용하는 기존 번역서가 선의 핵심을 드러내는 종지 부분에서 해석을 그르치고 있어서 오랜 시간 많은 폐단을 낳고 있었다. 전재강은 고우스님에게 직접 강의를 듣고 번역하여 기존의 오류를 바로잡고 정확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현대불교>, 2004.09.23.; <한겨레>, 2006.08.08.; <법보신문>, 2019.03.12.).

2. 고우스님의 선사상

고우스님의 선사상 특징은 ① 직접성, ② 실천성, ③ 사회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선의 직접성은 본래자리를 직접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수행을 단계로 구분하고, 달이 아닌 손가락을 향하는 다른 여러 수행법과 구분되는 특성이다. 선의 실천성과 사회성은 중도에 근거한 선의 특성이다. 스님은 선이 사람들의 마음 안정이나 치유만을 추구하거나, 선의 작용 대상이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향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며 잘못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 경책한다. 양변을 떠난 중도연기에 입각한 선의 지혜는 나를 뛰어넘은 실천을 추구하며, 때문에 사회와 인류를 향한다. 그래서 스님은 깨달음과 사회성은 하나라고 강조한다.

1) 직접성

고우스님은 선(禪)은 돈오(頓悟)적이고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한다고 정리한다. 이처럼 스님이 설명하는 선은 매우 직접적이다. 스님은 자기 자신이 바로 선이며, 부처이고 불성이라고 설명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선이 삶이고 사실이고 본래 모습이라 한다. 때문에 선을 닦는다, 선을 증득한다는 표현은 군더더기이며 사족이다. 선에 대한 모든 설명이 대상화해서 논의하는 것이고, 우리 눈동자에 모래를 뿌리는 일과 같으며, 맨살을 긁어서 상처를 내는 것과 같다. 나아가 스님은 이를 믿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스님은 여러 법문과 인터뷰에서 선은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 바로 그 본래자리에 바로 직접적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간화선, 화두 참선은 중도를 화두로 체득하고 깨치는 수행법이다.

존재가 연기이자 법이며 여래이기에 우리는 그대로 선이고 부처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되기 위해 참선한다는 생각을 하면 틀린 소리일 뿐더러 손가락을 달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현대불교신문사, 2004: 12).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모든 수행법은 중도와 연기를 깨치고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치는 수행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대부분의 수행법이 바로 직접 가지 못하고 단계로 구분하고 돌아가는 반면에 간화선은 그렇지 않고 직접 향한다는 차이가 있다.3) 그래서 스님은 그 누구보다 선을 실참하기 전에 정견, 즉 바른 견해(바른 안목)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님은 ‘간화선이 어렵다’는 선입견은 바로 이 정견이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화두 일념, 일상생활에서 화두참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선의 이치인 정견이 바로 서야 한다. 스님은 정견이 바로 설 경우에 간화선에 대한 확신과 신심(信心), 발심(發心)이 생긴다고 하였다. 신심은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뜻한다. 특히 자기 자신이 본래부처라는 것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주만물의 존재원리인 중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어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믿음이다. 발심은 부처님이 깨달아 생로병사를 해탈하여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누렸듯이 자신도 부처님이 제시한 길을 가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고우스님은 바로 이 정견, 신심, 발심을 화두 참선을 위한 기본 요소로 제시한다(고우스님, 2020: 134-135).

간화선은 화두를 통해 단계 없이 바로 깨우치는 수행법이다. 하지만 대부분 바로 깨치지 못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이때 화두를 참구하는 과정은 결코 단계가 아니다.

일단 발심이 되었으면 길을 바로 알고 검증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했다고 길도 모른 채 참선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부터 배워 길을 바르게 알고 사상이 정립된 후에 ‘불교가 이래서 좋구나’, ‘내 본래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하는 확신을 가진 후에 참선에 몰두하는 게 오히려 빠릅니다(현대불교신문사, 2004: 27).

고우스님이 이처럼 화두 실참 이전에 정견을 바로 세울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본래부처’를 전제로 공부하는 것과 ‘있다/없다’를 구별하는 차원에서 공부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본래부처(본래성불)를 믿고 이해하면 이번 생에 설사 확철대오는 못해도 정(正)과 사(邪)는 구별해서 절대로 외도에는 떨어지지 않으며, 결국에는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2) 실천성

고우스님은 교(敎)와 선(禪)의 차이를 설명하는 법문에서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를 언어와 문자로 설명하면 교라 하고, 체험하고 실천하는 것을 선이라고 하였다. 즉 선은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에 이르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그래서 역대 모든 부처와 선지식들처럼 생로병사를 해탈하고 영원한 행복의 성취에 이를 수 있다. 스님은 좀 더 쉽게 중도는 처방전, 선은 처방대로 약을 지어 먹은 것으로 설명한다(고우스님, 2020: 131-132). 아무리 좋은 처방전이 있고 그 처방전대로 약을 조제해도, 그 약을 먹지 않으면 아무런 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식을 담고 있다.

고우스님은 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을 통한 ‘실천’ 즉, 지혜와 평화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불교의 목적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설명과 일치한다.

참선이 무엇인가? 참선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선을 왜 하는가?’, ‘불교를 왜 믿는가?’라는 질문도 같습니다. 둘 다 목적이 있습니다. 다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고우스님, 2012: 33).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우스님은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종교나 사상은 행복을 밖에서 추구하지만, 불교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언급하고, 학문·권력·물질·부·외모 등 외적 조건은 행복의 일부는 될 수 있어도 완전한 행복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고우스님, 2012: 33). 특히 삶의 목적을 ‘돈’에 두는 물질주의적 경향을 경계하며, 물질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언급한다.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다 보니 행복의 조건을 물질에 둡니다. 그러나 물질은 절대적인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밖으로 추구하는 행복은 상대적이고 유한한 행복이기 때문에 순기능과 역기능이 항상 함께 따라옵니다(고우스님·유철주, 2011: 344).

또한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을 하지 않고 초월한 사람, 공(空)을 깨달은 사람은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법문을 통해 무아와 연기, 중도를 체득하고 사는 삶이 곧 행복한 삶이라고 주장한다. 즉 ‘본래부처’를 향하는 수행, 본래부처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곧 행복을 추구하는 실천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올바른 방법은 불교의 핵심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이 실천도 하기 전에 지레짐작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수행이 어렵고 불법이 어렵다는 선입견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은 자신도 100%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지는 못하다고 말하며, 노력 그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불교에서 말하는 삶의 방식은 사실 우리가 세속에서 사는 방법과 분명히 다릅니다. 저 자신도 100%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살지는 못해요.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살면 행복해진다.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삶도 행복해진다.”고 하셨습니다. 불교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해서 산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갈등과 고민 속에 살 수밖에 없고 사회도 혼란해지고 국가도 어려워지고 있어요(고우스님, 2015: 51).

불교는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라는 고우스님의 주장도 실천성을 보여준다. 고우스님은 공을 깨달으면 자비와 연민으로 반응하는데, 이때 자(慈)는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것, 비(悲)는 상대방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향하는 이러한 행위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우스님은 부처님 법의 가치는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모든 기능과 작용을 100%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양한 훌륭한 기능이 있음에도 자신이 중생이라는 착각 때문에 그 효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본래모습으로 돌아가면 100% 발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신이 참선 법문을 하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기도 하였다.

제가 참선 법문을 하는 요지는 어떻게 하면 본래의 기능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회복해 참된 행복을 얻느냐 하는 것입니다(현대불교신문사, 2004: 27).

이러한 실천성은 화두 참선을 일상생활에서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고우스님은 이를 ‘생활 속의 실천’, ‘중도의 생활화’로 표현한다(고우스님, 2020: 96). 이러한 흐름에서 스님은 수행의 실천적 효능을 네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수행을 통해 무아를 알고 실천하면 형상은 달라도 본질이 다 평등하다고 알게 된다. 따라서 비교를 안 하게 되고, 비교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된다. 둘째,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된다. 가치와 의미를 알면 하는 일의 즐거움이 커지고 열심히 하게 된다. 열심히 함으로써 전문가가 되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을 가능성도 커지게 된다. 셋째, 자주적인 사람이 된다. 안으로 자신의 욕망이나 외부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공익을 위해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넷째, 소통하는 사람이 된다. 수행을 통해 형상만 보지 않고 본질을 보아서 모든 다른 것들이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것을 알면 자연스럽게 소통하게 된다. 특히 이 소통의 실천성은 한국사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스님은 기대하였다. 교통과 정보망이 발달하여 접촉이 늘어나면서 소통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졌다. 산에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다툼없이 잘 자라듯이, 사람들도 다양한 삶을 서로 인정하면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소통 능력은 그만큼 늘지 않아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소통부재에서 오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경험하고 있다(고우스님, 2012: 41-42; 고우스님·유철주, 2011: 345-346).

공이라고 해서 완전히 없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항상 역동적인 활발발(活潑潑)한 평상심이 있습니다. 인종 문제, 민족 문제, 이데올로기 문제, 종교 문제 등등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혜의 마음이 우리 모두의 본모습입니다. 갈등·대립·투쟁하는 모든 일들은 착각과 오해에서 나온 허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잘못된 착각과 오해와 허구로부터 깨어나려면 오직 부처님께서 깨치신 본질을 체험해야 합니다. 본질을 체험하게 하는 방법 가운데 화두 참구가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고우스님, 2012: 42-43).

이러한 선수행의 실천성은 공, 무아, 연기에는 항상 역동적인 활발발한 평상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평상심이 곧 지혜의 마음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스님은 생활에 선을 스며들게 하는 것이라 표현한다. 이 본질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화두 참선이라고 강조한다.

3) 사회성

선의 의미와 역할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고우스님은 선의 역할을 인류가 처한 위기 극복을 위한 문명사적 대안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선, 스님은 현대사회, 인류세계가 빈부와 이념, 종교, 인종, 남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양극화 시대에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기치로 지혜와 평화의 길을 제시하는 선은 인류의 문명사적 대안이라고 주장한다(고우스님, 2020: 129).

이때 문명사적 대안은 중도의 입장에서 사회현상을 보면 나타나는 지혜이다. 그 한 예로 고우스님은 부처님의 출가 동기 자체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고, 인도 계급제도인 카스트를 부정하고 그 대안으로 평등한 승가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지닌 평등한 존재인데, 인도의 기득권 세력이 계급제도를 만들어 이 관습으로 인간을 차별하고 억압한다고 비판하고 부정하였다. 중국 남송시대 대혜스님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역할을 하였다. 이때 부처님과 대혜스님의 입장은 중도에 입각한 파사현정(破邪顯正)이다. 깨달은 지혜의 눈으로 사회문제를 보면 문제의 해결방법이 나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 스님은 ‘깨달음과 사회성’이라 표현하였다(고우스님·유철주, 2011: 349).

깨달은 지혜의 눈, 다른 표현으로는 중도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면 특정한 집단이나 사람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이기적인 견해와 사회제도, 양변에 집착하는 견해와 사회제도를 모두 삿된 것으로 이해되고,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견해와 사회제도로의 변화를 추구한다. 이처럼 중도의 입장에서 행하는 사회적 실천을 공심(公心)이라고 하였다. 어떤 단체나 사회활동을 할 때는 반드시 공심이 요청된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눈으로 사회를 개혁하고 발전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스님들은 사회성의 실천에 몸에 비치고 본인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하겠다고 출가한 사람들입니다. 스님들은 사명감과 원력을 가져야 합니다(고우스님·유철주, 2011: 350).

이러한 이유에서 고우스님은 수행을 통해서 사회와 이웃에 굉장한 도움을 줄 수 있다며 자신만을 위해서 수행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수행을 시작했더라도 ‘선’을 지속하다 보면 나와 너를 구분하는 분별심이 없어지면서 자신만을 위한 수행이 아닌 이웃과 사회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스님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면 선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혼자만 잘 되려고 참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나와 우리 집을 위하여 하다가, 선을 자꾸 하다 보면 눈이 열리고 이웃과 내가 하나이기 때문에 이웃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고, 나를 위하는 것이 이웃을 위하는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참선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제대로 하면 마음이 넓어지고, 이기심이 없어지며 남과 더불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됩니다. …(중략)… 참선을 제대로 하면 자신은 물론 사회와 국가도 편안하게 하려는 큰 마음이 열립니다(고우스님, 2012: 34-35).

선수행을 통해 자비와 지혜가 열리고, 이 자비와 지혜로 인해 이웃과 사회, 국가를 위한 실천을 행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선수행은 현대산업문명이 가져온 다양한 병폐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다. 고우스님은 이를 세 가지 의식-제8 아뢰야식, 제7말나식, 제6의식-의 변화를 통해 설명한다(고우스님, 2012: 37-38). 관건은 분별심을 삼라만상이 공·무아라는 지혜를 통해 정화하는 것이다. 세상 어느 곳에나 ‘작용’이 있다. 주관과 객관으로 오염되어 작동하기도 하며, 정화되어 주객이 없는 작용도 있다. 전자가 허구이고 착각인 줄 알면, 갈등을 조장하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 이기심을 정화할 수 있다. 다양한 모든 종류가 서로 소통하고 상생하면서 평화적으로 더불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처럼 불교는 잘못된 의식을 바꾸어 행동하게 하여 모든 사람이 더불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

오염되어 작용하다 보니 우리는 인종과 민족, 이데올로기, 종교 갈등과 같은 역기능을 오랫동안 겪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허구이고 착각인 줄 알아서 정화하면 갈등이 없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고우스님, 2012: 38).

이는 현대사회, 특히 서구사회에서 명상이 유행하고 있는 이유이다. 현대사회에서 일고 있는 명상 붐에 대해 스님은 물질문명의 한계를 사람들이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물질문명의 폐해와 더불어 사회불안, 경제적 불안정 등이 더해서 정신적 안식처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며, 선수행은 사람들의 참여를 끌어낼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이다.

Ⅳ. 한국불교의 비판

고우스님의 선사상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점은 ‘승가’에 대한 경책이다. 고우스님은 승가가 사회의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처님 재세시의 승가의 모범을 예로 들면서 당시 승단이 사회에 훌륭한 ‘롤모델’이 되어 주었고, 따라서 승단이 끼친 영향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매우 컸다고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승가는 롤모델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곧 한국불교와 승단, 그리고 스님들이 ‘선지식’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불교계 내부적으로는 젊은 스님들이 제대로 법답게 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롤모델이 없으니 젊은 스님들이 답답해 합니다. 스님은 뭐 별다른 사람인가요?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나에게 불이익이 생길지 모른다 생각하니까 ‘이쪽’으로 적극적으로 못 뛰어들어요. 뛰어들더라도 그저 흉내만 내고 근본사상이 안 변하니까, 차라리 안 하는 사람보다 못한 경우도 있어요. 위선적이 되니까(이경숙, 2009: 308).

집단이 잘 살아 훌륭한 귀감이 되면 개인보다 더 큰 파급효과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스님은 승가가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승가는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음에 아쉬움을 표한다.

또 다른 인터뷰는 더욱 강한 어조로 승가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고 수행과 생활이 일치되지 않는 승가의 모습을 언급하며, 이러한 승가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준엄하게 비판한다.

일부 스님들이 승복을 입고도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니 문제가 생깁니다. 수행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진정한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없지요(<경향신문>, 2007.10.26.).

이는 간화선이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는 현실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고우스님은 간화선 수행에서 ‘선지식’의 역할을 강조한다. 간화선의 기본 3요소인 정견, 신심, 발심이 선 사람은 선지식을 찾아 공부 점검을 받는 문답을 하고 화두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선지식은 화두를 제시하고 공부를 점검해 주어야 한다. 고우스님은 화두 참선은 반드시 선지식에게 의지해서 공부해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근래에는 스스로 깨쳤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을 검증할 체계가 불교계에 마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불자들이 이런 사람들을 선지식으로 알고 잘못 공부할 가능성이 있다(고우스님, 2020: 136-139).

이러한 흐름에서 한국불교에 대한 비판은 ‘실천의 부재’로 이어진다. 고우스님은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 스님을 소개하고, 그에 대해 평가하는 법문에서 한국불교의 실천 부재를 비판하고 있다.

그분들은 철저히 생활에서 실천합니다. 그분들이 언행하는 모습이 대중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불교는 법은 깊이 보나 행으로 실천이 안되니 신뢰도 존경도 받지 못하는 현실입니다(고우스님, 2020: 95).

한국불교는 ‘모든 상대를 부처님으로 보고 행하라’고 법문에서는 말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고 스님은 냉정하게 비판한다.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모습 때문에 한국불교는 일반시민들과 불자들에게 신뢰도 존중도 받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토로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님은 좋은 사회는 ‘인격이 갖추어진 존경받는 어른들이 많은 사회’라고 설명한다(고우스님, 2012: 41). 이러한 측면에서 스님은 사회의 원로로서 불교계를 포함한 종교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종교계의 어른으로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상황을 사과하기도 하였다.

최근 몇몇 종교인들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사회가 막다른 곳까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원인은 종교인들 스스로 자신의 종교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를 이용해 자기 욕망을 충족하려는 생각까지 합니다. 부처님과 하느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고우스님·유철주, 2011: 349).

앞서 선의 사회성을 강조했던 스님은 불교는 사회문제에 해법을 제시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지혜를 개발해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불교는 사회에 해법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적으로 닮아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스님은 한국불교계에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Ⅴ. 결론

한국불교는 본래부처(본래성불)에 기초한 수행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스님은 언제나 자신과 대화하는 상대방이나 스님 자신이나 ‘이미 본래부터 깨달음을 완성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우리 모두는 이미 본래 깨달음이 완성되어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것을 알지 못하고 착각에 빠져서 깨닫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선수행의 준비 요소로서 신심과 발심, 정견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자신이 이미 깨달은 존재라고 믿는 신심을 강조하고, 신심의 토대가 되는 중도와 연기 등에 대한 공부, 그 공부를 통한 정견 수립, 그리고 발심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토대가 튼튼하게 다져진 후에 시작된 수행은 잘못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고우스님이 불교 수행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참선이 공·무아를 체험하는 지름길이라고 설명한 이유이다(고우스님, 2012: 37).

그리고 스님은 선에 있어 실천성과 사회성을 강조하였다. 자신과 가족만을 향하는 선은 잘못된 수행이라 하였다. 선수행을 통해 획득한 지혜는 필연적으로 남과 나를 넘어 사회와 인류를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에서는 스님을 ‘실천적 지성’으로 평가하였다. 한국불교에 대한 스님의 비판도 이 부분에 집중되었다. 한국불교의 교리는 깊고 선수행 전통은 뛰어나지만, 그 내용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음을 안타까워 하였다. 또한 사회에 문제의 해법을 제시 못하는 교계의 현실도 비판하였다. 스님은 승가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며 승가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Notes

2011년 4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공주 전통불교문화원에서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만남과 소통’ 국제연찬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국제연찬회의 마지막 날 ‘선지식의 대화’ 시간에 고우스님은 위빠사나를 대표하는 파욱스님과 함께 3가지 주제에 대해 설명하고 청중들의 질문에 답하였다. 3가지 주제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방법에 대하여' '깨달음과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였다.

고우스님은 『태백산 선지식의 영원한 행복』에서 오매일여에 대한 대혜스님, 고봉스님, 태고스님, 나옹스님, 성철스님의 어록을 정리하였다(고우스님·박희성, 2020: 178-185).

일례로 일본의 선은 화두를 하나하나 타파해 가는 수행방식, 소위 ‘사다리 참선’으로 변형되었다(현대불교신문사, 200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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