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는 다양한 윤리문화는 공동체 사회 질서의 유지와 개인 및 집단이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윤리는 인간다운 삶의 질을 보장해 주며, 개인의 도덕성과 함께 국가와 사회의 전통적인 가치와 법체계를 형성하는 근간(根幹)이 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베넷(Christopher Bennett, 2013: 17)은 “윤리는 개인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려는 고민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견해를 남들 앞에서 정당화하거나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출발한다.”라고 했다. 이처럼 윤리란 인간의 도리이며,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행동규범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두 축으로 하는 한국사회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민주화는 전통적인 윤리적 가치 체계가 거부 당하거나 붕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가족의 붕괴, 젠더(성) 갈등, 세대 갈등 등 개인주의에 이어 지금의 MZ세대는 또 다른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또한 20세기 1차, 2차 세계대전 이후 탈냉전화와 동시에 중동지역은 포탄의 뇌관처럼 100여 년간 분쟁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리고 최근 2023년 10월 이슬람 무장 세력 하마스가 안식일을 기일로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 공격과 수십 명의 인질을 끌고 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혐오와 증오 그리고 분쟁은 아수라 세계를 연상하게 한다. 특히 시대를 거슬러 아브라함 시기까지 올라가면 같은 한 아버지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서로 배타적인 정체성으로 살아왔다. 또한 유럽과 중동지역의 종교 분쟁과 전쟁을 통하여 종교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의구심을 들게 한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물질주의와 개인주의의 성장에 대한 반감, 끊임없는 전쟁과 그것의 불안 요소들이 사회적 윤리에 관한 새로운 관심과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삶의 의미와 가치가 지표가 되는 종교윤리에 대한 관심과 함께 불교윤리는 삼국시대부터 근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존엄과 관계된 정신적인 윤리문화를 형성했다.
불교윤리의 토대는 부처님 말씀과 역대 조사의 가르침에 해당하는 경·율·론 삼장과 조사 어록 그리고 이를 따르는 수행문화를 포함한다. 대표적으로『사분율』 등 율장의 청정과 화합, 무소유와 공동체 정신에서 출가 집단의 윤리성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자비’ 수행과 관련하여 4무량심(四無量心)은 불교윤리가 지향하는 목표에 해당하며,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은 이러한 대비심(大悲心)의 완성과 다르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 불교윤리와 관련하여 4부 대중을 향한『범망경보살계본』 중심의 보살계(菩薩戒) 포살(布薩)1)의 의미는 인간성의 바탕에 지구촌의 모든 생명체를 향한 존중과 사랑, 연민의 계체를 형성하고 유지토록 하는 목적이 있다. 계본 내용에 있는 10중대계(十重大戒)와 48경계(四八輕戒)는 직·간접적으로 생명의 존엄과 이타주의에 관한 불교윤리의 지침에 해당한다. 특히 계본에서 가장 으뜸가는 10중대계의 제1계가 ‘불살생계’이다. 이것이 생명존중을 상징하는 것처럼 불교는 일심(一心) 사상과 더불어 생태계를 품는 지구촌 모두를 한 몸의 생명체로 보고 있다. 또한 이 계본의 대계(大戒)와 경계(經戒)가 의지해야 하는 것이 주로 의업(意業)인 것처럼 불교윤리는 ‘마음윤리’와 분리될 수 없다. 마음은 선업과 불선업과 관련한 모든 신구의(身口意) 3업의 토대이며 중심이기 때문이다.
불교 윤리의 특수성은 마음윤리와 더불어 계율을 바탕으로 선정과 지혜를 닦는 계(戒)·정(定)·혜(慧)의 3학(學) 체계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에서 인간관계의 도리를 중요시하는 것도 삼학(三學)에서 계학(戒學)과 관계된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회윤리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윤리적인 삶의 완성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완성에 해당하는 불지혜(佛智慧)인 ‘마하반야(mahā prajñā)’를 성취하기 위한 것들이다. 이와 반대로 현재 진행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불교 윤리와 율장의 입장에서 생명윤리를 파괴하는 가장 위험한 모습이다. 살생한다는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는 없다. 특히 중동 전쟁과 관련하여 그 원인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불교 윤리의 내용과 구조 형태, 비폭력과 평화에 대한 생명존중의 특수성을 고찰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사회 구조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사회적인 가치 실현, 개인과 단체의 인권 신장에 따른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갈등 현상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욕구와 욕망을 제어하는 사회적 윤리문제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국가와 사회문화를 책임지는 공동체의 운명과 삶의 방향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또 다원화된 현실에서 실질적인 사회문제 해결의 기준에 따라 생명윤리, 환경윤리, 정보윤리, 의료윤리 등 다양한 응용윤리가 요청되고, 점차 우리 사회는 나름의 자구책을 위한 윤리적 논의는 확산하고 있다. 종교적인 성격에 따라 불교윤리는 이러한 응용윤리의 관점에서 인간과 지구촌에 대한 생명윤리에 더 큰 관심을 둔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상황의 발생은 시간적인 그리고 공간적인 위치에서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이 없다. 모두는 다른 모든 것의 관계 속에 서로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II. 불교윤리에 관한 생명문화의 기저
불교 윤리의 시원은 승가의 대표적인 목적인 화합승가(和合僧伽 samagga-saṃgha)의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교와 함께 승가의 성쇠는 승단 운영과 관련하며, 불교가 2,500여 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배경은 승가 공동체의 ‘화합’과 관계된다. 이에 관한『마하승기율』에서 화합승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화합승이란 무리가 분열하지 않은 것이다. 설사 비구들이 투쟁하고 서로 싸운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계, 하나의 무리, 하나의 주처에 살며 포살이나 자자를 함께 실행한다면 화합승이라고 한다.2)
위의 화합에 관한 율장의 내용과 함께 불교 윤리에 관한 붓다의 말씀은 다양하게 전해진다. 대표적으로『담마빠다(Dhammapada)』의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는 오늘날 4부 대중 모두가 화합하고 실천해야 할 불교윤리의 대의(大義)를 나타낸다. 이처럼 불교 윤리란 붓다의 말씀, 계율, 청규, 종헌·종법 등 이에 근거한 4부 대중을 위한 각종 실천지침의 포괄적인 영역이다.
초기 인도 불교의 전통에서 출가자 중심의 승가(僧伽)는 불·법·승 3보(寶)의 유지 및 계승에 목적을 두고『사분율』 등 율장을 중심으로 청정과 화합, 무소유와 공동체 정신을 배양(培養)해 왔다(김정천, 2008: 92). 계율은 공동체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장애와 갈등을 예방하고 단속함으로써 수행을 위한 기본적인 토대로서의 조건을 갖추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율장의 「바라제목차」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그것이 별해탈(別解脫)로서 몸과 입으로 범한 허물을 따로따로 해탈한다는 의미가 있다. 물론 승가의 존속과 발전을 위한 화합의 목적과도 분리할 수는 없다. 이러한 계율과 관련하여 붓다와 우팔리 사이의 ‘승가 화합’에 관한 인식해야 할 18가지 기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존자시여, 승가 화합, 승가 화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승가가 화합했다고 하는지요? 우팔리여! 여기 어떤 비구가 있어 비법(非法)을 비법(非法)이라 설하고, 법을 법이라 설하며, 비율(非律, avinaya)을 비율(非律)이라 설하고, 율을 율이라 설한다. 如來가 설한 것도 아니고 말씀한 것도 아닌(abhāsitaṃ alapitaṃ tathāgatena)것을 여래소설 · 소언(如來所說 · 所言)이 아니라고 설하고, 여래소설 · 소언(如來所說 · 所言)을 여래소설 · 소언(如來所說·所言)이라 설하며, 여래의 상법(常法)이 아닌 것(anāciṇṇaṃ tathāgatena)을 여래의 상법(常法)이 아니라고 설하고, 여래의 상법을 여래의 상법이라고 설한다. 여래가 제정하지 않은 것(appaññatta tathāgatena)을 여래가 제정하지 않은 것이라 설하고, 여래가 제정한 것을 여래가 제정한 것이라 설한다. 죄(罪)가 아닌 것(anāpatti)을 죄(罪)가 아니라고 설하고 죄를 죄라고 설한다. 경죄(輕罪, lahukā āpatti, 바라이와 승잔 이외의 죄)를 輕罪라 설하고, 중죄(重罪, 바라이와 승잔)를 重罪라 설한다. 유여죄(有餘罪, sāvasesā āpatti, 승잔 이하의 죄)를 有餘罪라 설하고, 無餘罪(바라이죄)를 無餘罪라 설한다. 추죄(麤罪, duṭṭhullā āpatti, 중죄)를 추죄라고 설하고, 麤罪가 아닌 것을 麤罪가 아니라고 설한다. 그들이 이러한 18事에 유혹되지 않고, 별도의 포살(布薩, āveṇi uposatha)을 하지 않고, 별도의 자자(自恣, āveṇi pavāraṇa)를 행하지 않으며, 별도의 승가 갈마(羯磨, āveṇi saṃghakamma)를 행하지 않는다. 우팔리여, 이것을 가지고 승가는 화합했다고 하느니라.3)
이처럼 초기 승가의 대중은 법, 율,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며, 법과 비법, 율과 비율 등 18가지 기준은 공동체 구성원의 ‘불교윤리’와 상응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법(非法), 비율(非律), 비소설(非所設), 불공정한 갈마로 결국 승가 운영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시대의 변천에 따른 승가 대중의 구성, 계본 등이 변화되었으며, 오늘날은 비구, 비구니의 2부 대중에서 우바새, 우바이를 포함하는 4부 대중으로 확대되었다. 기존 출가자 중심에서 재가자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는 계율 중심에서 재가자를 포함한 불교 윤리로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박병기(2013: 168)는 불교 윤리를 “붓다의 가르침인 불교의 기본정신에 근거해서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논의와 실천지침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초기 경전에서 불교윤리를 암시하는 재가자를 위한 대표적인 경으로『디가니까야』의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Sīgālasutta)」4)이 있다. 붓다는 동·서·남·북·상·하 여섯 방향으로 예경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장자의 아들이여, 어떻게 고귀한 제자에게 여섯 가지 방향이 수호됩니까? 장자의 아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① 동쪽 방향은 부모라고 알아야 하고,
② 남쪽 방향은 스승이라고 알아야 하고,
③ 서쪽 방향은 처자식이라고 알아야 하고,
④ 북쪽 방향은 친구와 동료라고 알아야 하고,
⑤ 아래 방향은 하인과 고용인이라고 알아야 하고
⑥ 위 방향은 수행자와 성직자라고 알아야 합니다.
육방예경은 가족, 스승, 친구, 동료, 고용인, 수행자에 대한 구체적인 도리로서 가정윤리와 사회윤리를 포함하여 개인과 사회의 조화로운 삶과 평화를 의미한다. 이처럼 초기교단은 우선 율장 중심의 운영이었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개인과 사회의 보편적인 불교윤리를 내포하고 있다.
불교 윤리의 범주와 관련하여 초기 불교 교단은 현전승가와 사방승가로서 구분된다. 현전승가는 일정 지역의 공간 영역을 설정하여 행동에 제약을 거는 행정적인 단위로서 결계(結界)와 포살(布薩), 자자(自恣) 등을 위한 독립된 승가이다. 또한 사방승가는 국내·외의 현전승가를 포함하는 일체의 불교 교단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불교윤리의 범위와 그에 따른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대승불교에 이르러 중국의 선종은 대규모 수행집단을 형성하였고, 기존의 율장 정신에 벗어나지 않으면서 중국 현실 상황에 적합한 수행 문화를 만들어야 했다. 청규는 이러한 선불교를 토대로 경제적·문화적·생활적 측면을 고려하여 일상생활과 수행 생활 속에서 준수해야 할 법도를 나타낸다(허훈, 2008; 68). 백장청규는 현재 문헌이 남아 있지 않지만, 장로종색(長蘆宗賾)의『禪苑淸規』, 양억(楊億)의 「古淸規」, 의윤(儀潤)의『百丈淸規證義記』등을 통해 당시 공동체 집단의 운영 상황을 잘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이후 지금까지 각 본사와 선원을 중심으로 자체적으로 청규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1962년 제정된 조계종의 종헌 종법과 종령에 따른 종법령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상황에 적용된 율장 또는 청규의 응용 규범이다.
이러한 불교윤리는 종교적인 측면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초기 승가 공동체에서 승단의 유지 존속을 위한 화합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통한 수행집단의 면모를 갖추고, 정진을 통해 지혜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2부 대중 또는 4부 대중을 대상으로 계율 또는 불교윤리를 바탕으로 선정과 지혜를 닦는 계(戒)·정(定)·혜(慧)의 3학(學)은 대표적인 불교의 수행체계이다. 이처럼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에서 인간관계의 도리를 중요시하는 것도 삼학(三學)에서 계학(戒學)과 관계된 불교윤리 위치를 잘 나타내고 있다. 물론 재가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은 보시(普施), 지계(持戒), 생천(生天)을 중시했지만, 초기경전에서 재가자들이 4과(果)위를 이룬 경우들도 많았었다. 궁극적으로 불교윤리는 인간의 완성에 해당하는 ‘마하반야(mahā prajñā, 대지혜)’를 성취하기 위한 것들이다.
현대 불교윤리의 기준은『범망경보살계본』 중심의 보살계(菩薩戒) 포살(布薩)5)과 청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계본의 내용이 되는 10중 대계(十重大戒)와 48경계(四八輕戒)는 불교윤리의 모범적인 지침에 해당된다. 이처럼 보살계는 불교의 윤리와 도덕을 가장 차원 높게 설해 놓은 규범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생명윤리와 관련하여 10중 대계의 제1계가 ‘불살생계’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48경계 가운데 제3계가 ‘고기를 먹지 말라’, 제10계가 ‘살생도구를 준비해 두지 말라’, 제11계가 ‘나라의 군사사절이 되지 말라’, 제14계가 ‘불을 놓아서 태우지 말라’, 제20계가 ‘생명을 구제하라’ 등이 있다. 이러한 48경계는 대승보살이 실천해야 할 자비 수행의 규범들이다.
인도 비하루주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의 핵심은 연기(緣起)법이다. 연기란 어떤 사물이 어떤 조건 또는 원인으로 해서 어떤 사물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붓다의 연기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위의 정형구는 모든 존재와 상황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또 어떻게 소멸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공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동시에 그것에 상응하는 상황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모두 공간적인 연관 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라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시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시간적인 연관 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는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연기적인 시공간적 표현이다. 둘째,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라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소멸에 대한 공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소멸과 그것에 상응하는 상황의 소멸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사라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소멸하는 법은 없으며, 공간적인 연관 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소멸에 대한 시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시간적인 연관 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존재와 상황의 소멸’에 대한 연기적인 시공간적 표현이다. 이처럼 연기법은 상의상관(相依相關)의 형태로서 무엇하나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모든 존재가 시공간적으로 서로 의지하며 연결되어 있으며, 동시에 변화하는 모습은 출렁이는 바다의 움직임과 같다. 박병기는 “연기성의 자각은 동체자비의 구현으로 이어지는 불교윤리의 기본 틀이다”(박병기, 2013: 131)라고 하였다. 이처럼 붓다는 연기법을 통해 ‘무아(無我)’의 대각을 성취하게 된다. 또한 연기에 관한 용수의『중송』에서 사물은 상호의존적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행위자는 행위를 연해서, 행위는 행위자를 연(緣)해서 일어난다.
우리들은 그 이외의 다른 성립의 원인을 보지 못한다.7)
청정에 관계없이 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부정은 청정을
연(緣)하여 알려진다. 그러므로 청정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8)
부정에 관계없이 청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청정은 부정을
연(緣)하여 알려진다. 그러므로 부정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9)
이것들을 연(緣)해서 결과가 발생할 때, 이것들이 그 결과의 연들
이라고 말한다. 그 결과들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것들은 비연(非緣)이 아니겠는가?10)
위의 글에서 행위자와 행위, 청정과 부정, 연과 비연은 모두 원인과 조건에 따른 동시성을 나타낸다. 모든 것은 상호의존 속에 연결되어 있다. 청정과 부정의 관계처럼 장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세상을 이것과 저것으로 구분 짓고 시비(是非), 대소(大小), 미추(美醜)를 따지는 등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처럼 용수는 인식론의 입장에서 상호의존해서 성립하는 사물의 존재성을 모두 부정한다. 그렇지만 누군가 경쟁에서 승리하게 되어 패자가 생기게 되면, 승리로 연(緣)한 결과는 상대의 박탈이 된다. 이는 경쟁적인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이며, 우리 사회는 이러한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공정성’의 공론화를 낳았다. 연기적인 사회에서 불공정과 부조리가 미치는 충격과 갈등은 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일어나는 각종 내전과 분쟁 그리고 전쟁은 특정 단체 및 자국의 이익 또는 영향력을 가지기 위한 이기적인 탐욕과 관련한다. 이 모두는 공존·공생에 관한 연기적인 공동체 관계에 대한 무지와 생명 존엄의 가치를 함부로 무시하고 발생하는 경우이다. 불교의 업설에 따르면 연기적 원인과 그 과보는 심오하다고 하였다. 붓다는 연기에 관련하여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히게 되고, 베 짜는 사람의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어서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다”(각묵, 2009: 286)라고 하였다. 붓다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 형태가 인과 연에 의한 인연생기(因緣生起)로 보았다. 우리는 별업(別業)의 입장에서 누군가 교통사고를 일으키면 이에 상응하는 결과로 보험, 병원, 직장, 가정,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영향을 받는 것처럼 모두가 상호의존 속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 및 국가의 모든 사건과 분쟁도 모두 연기적 관계에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세상을 향해 인간적인 이해와 자애심 그리고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다면 세상은 거울처럼 반사하며 별업과 공업에 반응할 것이다. 이처럼 연기법 속에 살고 있는 동시에 행위에 따른 인과(因果)법을 따르게 된다. 불교의 기본 사상인 인과법은 대표적으로 12연기를 업사상과 결부시킨 설일체유부 학파의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가 있다.
현대사회는 물질문명의 다양한 분야에서 생명윤리와 직면하게 되었다. 먼저 20세기 초 멘델, 왓슨, 클리크 등에 의한 유전공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으며, 이후 유전자 지도 작성, 세포 조작 등으로 인한 생명체의 복제와 관계된 생명공학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난치병과 불치병 치료에 대한 접근, 유전자 조작의 품종개발과 바이오산업의 성장 등을 가져왔다(우희종, 2006: 55-56; J. D. Watson, 1990: 44-49). 그러나 경쟁적 산업 자본주의의 탐욕과 개발 욕구는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무분별한 연구로 사회질서와 문화를 크게 훼손할 가능성이 있는 생명윤리와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배아줄기세포, 이종장기개발연구 등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생명 조작의 연구 분야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윤리적인 연구 수준에 대한 심의, 조사·감독 등을 받아야 했다. 또한 유전자변형작물은 자연계 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생명체의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그 균형을 깨트리고, 조작을 통해 변형된 작물로서 장기적으로 전체적인 균형 파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우희종, 2006: 84-86). 이에 우리나라는 ‘유전자변형생물체의 국가간 이동 등에 관한 법률’을 2001년부터 시행해 오고 있다. 다음 사례로는 핵발전소와 관계된 생태 파괴의 위험성이다. 세계 자본주의는 온실가스 배출 감축과 경제성을 이유로 핵발전소 건립에 찬성하고 있지만, 2011년 후쿠시만 원전사고 이후 전 세계는 원전의 안전성에 깊은 고심을 하고 있다. 핵발전은 친환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우라늄 채굴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이산화탄소 배출, 다량의 온배수11) 배출을 통한 수온 상승 외에도 더 큰 문제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의 적체이다. 10만 년 이상을 격리해야 하는 감당할 수 없는 반환경 핵폐기물이 매년 수천 톤(한국은 매년 700t 이상)씩 증가시키고 있음은 자연생태계에 치명적인 암 덩어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미래사회의 가장 큰 생존 위협을 의미한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빈번한 지진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재난을 의미한다. 지난 후쿠시마 사고 이후 수습비용이 약 279조 원 정도로 추산되며, 체르노빌의 피해액은 265조 원 정도로 추산(양기석, 2017: 72)되지만 지금도 바다에 오염수를 방출하는 등 그 피해는 일본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어업과 수산업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로는 가장 심각한 생명윤리를 파괴하는 현상으로, 지금도 진행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과 분쟁이다. 이와 같이 위험이 발생하고 위기를 감지하면서도 달콤한 경제적 유혹과 욕망에 빠져 어떤 결정이 유익하고 적합한 것인지 외면하며 생명 존중과 함께 생태계을 위협하고 있다. 또한 약육강식의 적의와 혐오로 생명을 죽이는 전쟁은 생명윤리와 정면 대치되는 인간성의 말살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다원화된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불교로써 특히 생명윤리는 공동체 삶의 가장 중요한 도리이며, 진정한 행복과 열반의 가장 중요한 원인과 조건에 해당한다.
붓다의 생명윤리는 일체의 생명에 대한 존엄의 가치를 부여한다. 재가 오계(五戒), 팔계(八戒), 십계(十戒), 비구계, 비구니계, 보살계 등 모든 계율의 첫 번째는 불살생계(不殺生戒)이다.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라는 엄중한 규범은 살생, 살생의 원인이 되는 모든 행위와 살생을 인정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율장의 가장 두드러진 벌칙은 불공주(不共住)이며, 살생(殺生)은 투도(偸盜)·음행(淫行)·망어(妄語) 등과 함께 가장 엄중한 바라이죄에 해당한다. 이는 승가 공동체 질서유지와 화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업사상과 관련한 삼세양중인과의 윤회와도 관련이 깊다. 불살생의 생명윤리와 관련하여 용수보살의『大智度論』에서 살생한 과보는 살생 후에 받게 되는 두려움과 자신의 불성 종자를 끊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후에는 지옥에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악취에 태어난다고 묘사되고 있다.
살생에는 열 가지 죄가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마음에 항상 품은 독은 세세생생 끊어지지 않는다. 둘째는 중생을 증오해서 눈으로 모든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셋째는 항상 나쁜 생각을 가지고 나쁜 일을 생각한다. 넷째는 중생들이 그를 두려워해서 호랑이나 뱀과 같이 본다. 다섯째는 잠자고 있는 동안 마음이 두렵고 깨어나면 또한 편안하지 못하다. 여섯째는 항상 악몽에 시달린다. 일곱째는 목숨이 끊어질 때 두려워하며 나쁘게 죽는다. 여덟째는 단명의 업 인연을 심는다. 아홉째는 몸이 무너져 목숨이 마칠 때에 지옥에 떨어진다. 열 번째는 만약 다시 사람이 되어 태어나더라도 항상 반드시 단명한다.12)
생명윤리는 불교 윤리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분야이다. 붓다는 다른 생명체에 대한 가해는 자신을 향한 가해임을 인식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생명과 다른 생명체까지도 동등하게 여기도록 가르치며, 엄격한 계율로서 살생을 금지했다(목정배, 2001: 333). 심지어 붓다는 석밀 공양 마친 후 먹다가 남은 석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붓다는 상사(象師)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이 남은 석밀을 가지고 깨끗한 땅의 벌레가 없는 물에 부어라”…상사가 남은 석밀을 깨끗한 땅의 벌레가 없는 물에 부으니 소리와 메아리가 진동하고 연기와 불길이 솟았다. 마치 불에 달은 쇠젓가락이 물속에서 타는 것처럼 소리와 메아리가 진동하고 연기와 불길이 맹렬히 타올랐다.13)
이처럼 먹다 남은 석밀을 맑은 물에 부으면 물속이 타는 것처럼 연기와 불길이 솟듯이, 만약 물속에서 벌레가 있었다면 타서 죽었을 것이다. 계율이 제정된 것은 보통의 흙과 나무 근처와 물에는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으므로 작은 생명조차 보호해야 한다는 까닭이다. 또한 대승 보살이 가져야 하는 보리심(菩提心)의 조건은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慈悲心)이며, 이것은 위 없는 열반을 의지한다.
불교의 생명윤리는 수행의 차원에서 적극적인 자비심 개발과 관련이 깊다. 달라이 라마는 ‘자비심’ 개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우리 모두의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같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남으로 모두가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킬 동등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둘째, 나 자신과 타인을 비교해 볼 때 타인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혼자이지만 타인은 다수이기 때문이다. 셋째, 티베트 불교에서 모든 중생은 우리의 자애로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셀 수 없는 환생을 통해서 셀 수 없는 어머니들의 도움과 보살핌 속에서 자랄 수 있었는데, 우리 주변의 모든 이웃은 과거의 셀 수 없는 어머니들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바로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한 가족임을 강조한다. 넷째, 자비심의 개발은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또 맑게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끊임없는 욕망의 흐름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체로 미움, 시기심, 질투, 이기심은 우리의 마음을 흩트려서 바른 판단을 어렵게 한다. 바로 마음이 흐트러져서 미움, 시기, 이기심에 지배 당할 때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자비와 지혜의 개발은 우리 모두에게 유용한 것이며, 특히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하다. 그는 인간적인 이해와 보편적인 책임의식 그리고 이타주의적 마음을 개발하는 것이 지구촌의 산적한 문제와 함께 세계평화를 위한 지름길임을 강조한다(고형일, 2001: 19-20). 이처럼 달라이 라마는 모든 이념과 가치가 인류 공동체를 넘어 지구 공동체 운명에 관한 생명윤리의 규범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한『상윳다니까야』의 「자애경(Metta-sutta)」은 생명윤리의 입장에서 자비 수행의 확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살아있는 존재들이건, 동물이거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 약하거나 강하고 굳세거나, 그리고 긴 것이건 짧은 것이건 중간치건, 굵은 것이건 가는 것이건, 또는 작은 것이건 큰 것이건 어떤 생물이든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눈이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사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마치 어머니가 자기의 외동아들을 신명을 걸고 지키는 것과도 같이, 그렇게 일체의 살아있는 것에 대하여서도 무량의 자비의 마음을 수행해야 한다. 또 전 세계에 대하여 무량한 자비심을 수행해야 한다. 위로도 아래에도 또한 옆으로도, 가림 없이, 원한 없이, 적대심 없는 자비를 수행해야 한다. 서거나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잠들지 않는 동안은 이 자비심을 확립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자비의 숭고한 경지라고 부른다(SN 1:8)
위의 「자애경」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한결같은 무량한 자비 수행을 강조한다. 존재하는 모든 영역에서 모든 형태의 생명체를 대상으로, 심지어 태어날 생명체까지 무한한 자비 실천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한 자비에 대한 순수한 마음은 외아들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으로 비유하며, 일상의 행주좌와 가운데 깨어있는 모든 순간순간에 이 자비 수행을 실천해 가야 한다. 이처럼 자비 수행과 확립은 살생의 단속뿐만 아니라, 발보리심과 무상정각을 위한 대비심의 증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이 경에 관한 붓다고사의 주석서 내용은 자비 수행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첫째, 수행의 원만한 성취를 위해 초보 수행자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해야만 하는 것은 세 가지 훈련을 말한다. 이것은 ‘병 없음’, ‘정직함’, ‘부지런히 정진함’을 구족하는 것을 말한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은 ‘계의 어긋남’, ‘견해의 어긋남’, ‘행위의 어긋남’, ‘생계의 어긋남’이다. 둘째, 수행의 원만한 성취를 위해 능숙하게 해야 하는 것은 주석서에서 총 여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계와 감각기관의 규제’, ‘계와 생계수단의 청정’, ‘인연 조건의 수용’, ‘반조와 알아차림’, ‘수행 준비와 실천’ 등이다(이병재, 2022: 118-121). 또한『앙굿따라니까야』의 「Aṅga- sutta(구성요소의 경)」(AN Ⅲ:65)은 수행을 위해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구성요소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은 ‘믿음(saddha)’, ‘병이 없는 건강함(appābādha)’, ‘정직함(asaṭha)’, ‘부지런히 정진함(āraddha- viriya)’, ‘통찰지(paññā)’를 구족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4부 대중 모두가 「자애경」에 나타난 생명윤리를 실천하는 수행에 관한 것들이다. 특히 현대사회의 각종 정책과 변화 속에 그것이 어떤 상황에 부닥친 것들인지 생명윤리에 관한 분명하고 올바른 앎이 필요하다. 불교 수행처럼 불선업을 짓지 말고, 불선업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에 관한 위리야(viriya, 근면함), 삼빠자나(sampajāna, 분명한 알아차림), 사띠(sati, 바른 앎)의 확립이 요청된다.
Ⅲ. 불교윤리로 보는 중동전쟁
2023년 10월 7일 새벽 안식일에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수천 발의 미사일을 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단 이틀 만에 천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수십 명을 인질로 끌고 갔다. 이를 주도한 단체는 극단적인 무장 테러 집단으로 ‘이슬람 저항 운동’을 뜻하는 하마스(Hamas)이며, 이스라엘에 대항해 무장 투쟁을 하는 팔레스타인 정치세력이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자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는 곧바로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많은 사람은 이것이 두 정부 간의 분쟁이 아닌 주변 국가가 참여하는 5차 중동전쟁으로 번지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지만, 당면한 전쟁에 대해 UN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중재 등의 역할이 그렇게 효과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20세기 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지역은 탈냉전기를 맞아 민족 문제, 식민지 지배의 유산 분할과 지배, 종교 및 영토 문제와 관련한 각종 분쟁이 빈발하였다. 이러한 분쟁이란 “2개 이상의 국가 또는 정부가 각각의 존립이나 발전 등과 직결된 중대한 이익확보를 위하여 조직적 무력수단에 기반한 대립 또는 충돌상태”(이한방, 2002: 200)를 말한다. 우선 영국, 프랑스 등 식민지 국가에서 독립의 과정에 일어난 정치, 외교, 종교, 사회, 문화 등의 지배권 충돌의 현상이다. 이러한 분쟁 발생의 원인은 아브라함 시절까지 올라갈 수 있는 다양한 사건으로 중첩돼 왔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국 역사에 관한 민족의식도 중요하지만, 당면한 현재 상황에 관한 상호 존중과 연기적 삶을 살아가는 수용적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
먼저 최근 100여 년의 중동전쟁은 밸푸어 선언14)을 계기로 시작된 1947년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이후 제4차 중동전쟁(1973)까지 진행됐다. 처음 1차 전쟁은 2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을 둘러싼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의 아랍 연합국가들이 이스라엘의 건국을 막으려는 시도였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 전쟁으로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했으며, 팔레스타인의 영토는 ‘가자지구’ 일부와 요르단강 ‘서안 지역’ 예루살렘으로 축소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난민은 가자지구와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축소된 영토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만과 증오심 등으로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는 더욱 가중되어 갔다. 이후 중동전쟁은 제2차 수에즈운하 전쟁(1956), 제3차 6일 전쟁(1966)이 있었다. 2차 전쟁의 특징은 소련의 중동 정책으로 이집트군에 현대식 무기를 지원하고, 전투병력 파병 및 핵무기 사용을 경고하는 등 주변 국가의 정치적 세력화이다. 3차 전쟁에는 5만 명의 군사자문단을 이집트와 시리아에 파병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아랍이 아닌 소련과의 전쟁으로 불렀다. 이처럼 소련은 직접 참전하거나 간접적인 개입을 통해 서구진영의 대소 봉쇄를 와해시키려고 하였다(정기종, 2021: 283). 그리고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제4차 욤키푸르 전쟁(1973)으로 이어져 갔다. 하지만 아랍연합국은 이스라엘에 번번이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이러한 민족적, 종교적 갈등과 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으며, 뭔헨 올림픽 납치 사고, 인티파다(Intifada)15) 발발, 오슬로 협정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출범, 이스라엘 가자지구 철수와 반이스라엘 조직 하마스 지배와 분쟁, 알아크사 사원 갈등, 네타냐후 총리 재집권과 강경 정책 등으로 이어져 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 가속화되는 원인은 이스라엘 건국 초기보다 아랍계 국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가 향상됐으며, 1차 인티파다와 2000년 알-아크사 인티파다 발생 이후 팔레스타인 정부와 하마스 정권에 대한 아랍계 이스라엘인들의 연대의식으로 팔레스타인 민족의 정체성 강화(최영철, 2012: 45)와 관련이 깊다. 또한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아랍계 이스라엘인 인구 증가에 따른 유대계 이스라엘인과 갈등, 유대 종교인과 세속적인 비종교인 간의 갈등, 유럽과 미국 및 아프리카 출신의 유대인 간의 갈등 등이 악화하였다. 그리고 네타냐후 정권의 오슬로 협정 파계 및 서안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을 늘려가겠다는 정책도 분쟁 가속화에 이바지했다. 하지만 전쟁을 하는 현시점조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합의 도출이 불가능해 보이는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처리 문제, 예루살렘의 공유 문제,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잔류 문제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할 것이냐! 등 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당장 이스라엘 사회 내부의 유대계와 아랍계, 외국에서 들어온 이스라엘 출신들 간의 민족적, 종교적 갈등이 그러하다. 이밖에 아랍국가연합, 나머지 중동 국가, 러시아, 미국, 유럽 등 중동 주변국 사이로 번지는 민족적 또는 종교적 동질성에 따른 지지, 정치적 이익을 위한 제국주의 국가의 야욕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분쟁의 근원을 바라보는 원인은 민족성, 종교성, 지정학적 이해관계 등 다양하겠지만, 심층적으로는 ‘정체성’과 관련이 깊다. 분쟁은 일종의 정체성들 사이의 충돌로 자기 우월감과 자기중심적 또는 피해의식이 모이면 분쟁 또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는 Dower, John(2012)의『War Without Mercy: Race and Power in the Pacific War』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의 인종적 편견과 자기 우월감과 자기중심적 역사관 등이 전쟁을 더 비참하게 몰고 갔다(이찬수, 2019: 386)고 한 사례가 있다. 또한 유럽 사회에서 찾아내었던 대표적인 적이 유대인이며, 프랑스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유대인계 장교를 처벌했던 드레퓌스 사건이 대표적이다(이찬수, 2010: 388-391).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오랜 세월 유럽의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해 조상들이 살았던 팔레스아인에 자국을 건설하려는 시도로부터 비롯된다.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가공할 박해를 지속해서 받은 근본 원인은 유대교를 거부하는 기독교 문화적 흐름은 물론, 유대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을 제국주의의 강자인 영국 등이 근동 지역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부추기고 이용하면서 벌어진 일이다(이찬수, 2010: 394). 하지만 실제로 문화적 심층으로 들어가면 엄밀하게 종교적 정체성과 관련이 깊다. 이러한 사례는 시리아 전쟁의 경우, 그 배경에는 반정부군이며 극단적 이슬람주의 세력인 IS가 있었다(김재명, 2018: 89). 또한 보스니아의 내전은 가톨릭, 정교회, 무슬림 종파 간의 갈등이다(김철민, 2010: 179-209). 이 밖에 남북 아일랜드 분쟁은 카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적 갈등이며(구갑우, 2013: 189-228),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 일어난 미얀마의 주류 세력과 이슬람 문화권인 로힝야족 사이의 분쟁이 있다.
이러한 정체성과 관련하여 불교적인 대응은 최종적으로 연기법의 통찰에 따른 ‘무아(無我)’와 함께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체득하는 것이다.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와 관련한 자기의식이다. 따라서 정체성의 등장은 ‘나’라는 의식의 등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나’라는 정체성이 일어남으로써 ‘너’라는 것이 연기로 일어난다. 이것이 ‘나’와 ‘너’, ‘나의 것’과 ‘너의 것’의 이분법적 분리심이다. 이 분리심이 나를 통해 ‘남’이 등장한 경우이다. 이러한 분리는 가아(假我)의 생성에 따른 반응으로부터 모든 고통이 시작된다. 붓다는 고통의 진짜 원인을 ‘반응’, 즉 상카라16)라고 말했다(윌리엄 하트(William Hart), 2017: 201).『숫따니빠따』의「두 가지 관찰의 경」에서 ‘어떤 고통이 일어나든 그 원인인 반응이 있다. 모든 반응이 멈추면 더는 고통도 없을 것이다(『Suttanipata』Ⅲ.12).’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반응은 업연에 따라 일어나고, 5온이 펼쳐지고 12연기를 맞이하게 한다. ‘나’의 정체성은 곧, ‘나의 집단’ 또는 ‘우리 의식’으로 동질성을 갖추게 되고, 마침내 ‘집단’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 집단 정체성이 다른 집단과의 경계선을 긋고, 다른 집단을 혐오스러운 또는 잘못된 집단으로 간주하는 우월주의와 배타주의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심화하면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분쟁 또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에 반하여 불교 윤리의 특수성은 근본적으로 ‘나’ 또는 ‘나의 것’에 대한 정체성(我相)에 반기를 들고, 이 법(dhamma)의 해체를 지향하는 교리의 이해와 수행으로 동체대비의 일심(一心)을 바탕에 둔다. 그리고 윤리적 행위와 관련하여 신·구·의 3업에 관한 규범, 특히 ‘나’의 정체성에 관한 ‘마음윤리’에 초점을 두었지만, 종국에는 ‘무아’의 정체성으로 가기 위한 원인과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곳은 대부분 갈등이 있거나 분쟁이 있기 마련이다. 중생의 삶 속에는 늘 탐진치 3독이 있기 때문이다. 세속을 떠난 출간 집단 내부에도 오랜 과거의 훈습된 업들이 있어 갈등과 분쟁은 일어난다. 이와 관련한 부처님의 분쟁해결 사례로는 ‘코삼비 승가 분쟁’, ‘석가족과 꼴리야족의 분쟁’, ‘밧지족의 칠불쇠법(七不衰法)’(김성식·김용길, 2022: 143) 등이 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계발해야 하는 마음은 인간적인 이해, 이타주의적 마음 그리고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과 관련이 깊다.
‘코삼비 승가 분쟁’은 사소한 계율에 관한 시비로 시작한 언쟁으로 양쪽 모두가 자신이 옳다는 관념에 빠져 점차 분열이 거세게 일어났다. 처음에는 금방 끝날 것처럼 보였지만, 서로는 무리를 이루고 거센말들이 오고 갔다. 언쟁이란 사실 파승(破僧)으로 치닫는 가장 심각한 위험 요소이다. 승가의 언쟁이란 처음에는 붓다가 설한 경과 율의 해석, 불설의 진위를 둘러싸고 의견 대립에서 시작하여 결국 분쟁(김성식, 2021: 138-139)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그들을 향해 ‘용서’와 ‘화해’에 관한 설법을 3번이나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코삼비를 떠나게 된다. 결국 이를 지켜본 재가자들은 분노와 냉소로 코삼비 스님들을 외면함으로써 뒤늦게 후회한 비구들은 기원정사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뵙고 참회를 한 사건이다. 다음은 ‘석가족과 꼴리야족의 분쟁’이다. 부처님의 부족과 마야부인의 부족 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양쪽 모두 로히니강의 물로 농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물 부족으로 인해 강의 소유권을 가지고 분쟁이 크게 일어났다. 마침내 이 문제는 양국의 정치적인 문제가 되어 군사를 집결하였고, 곧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가 되었다. 이때 부처님은 양쪽 군대 사이로 들어가서 불교적인 분쟁해결(BDR)17)(김성식, 2022: 144) 방식으로 조정 또는 중재를 하였다. ‘장군들이여 이 물의 가치는 어느 정도이며, 한사람이 지닌 생명의 가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하고 묻자, ‘물은 공짜이며 생명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고귀한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이에 부처님은 ‘가치 없는 물을 위해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을 죽이는 것이 영리한 일입니까?’ 그리고 ‘이것이 올바른 정치이며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됩니까?’ 하고 되물었다. 이에 양국 모두는 너무나 큰 수치심을 느끼고 싸움을 그만두게 되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그들은 욕심, 자만, 분노, 어리석음에 빠져 전쟁을 통한 비극과 참상을 경험해야 했을 것이다. 끝으로 ‘밧지족의 칠불쇠법(七不衰法)’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는 현대 국가의 사회적 통합과 평화를 위한 이상적인 단서이다. 2,500년 전 강대국인 마가다국의 왕은 소국인 밧지족을 침략하기 전에 부처님의 의견을 듣고자 사신을 보냈다. 이에 마다가국의 사신을 위해 부처님은 아난에게 밧지족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관한 7가지를 질문하게 된다. 붓다는 아래의 7가지 사항을 시행하는 한, 7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이라도 시행이 되는 한 그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① 아난다여, 밧지족 사람들은 회의를 자주 열고, 회의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다고 들었는가? ② 아난다여, 밧지족 사람들은 화합하여 모이고, 화합하여 해산하고, 화합하여 밧지족의 업무를 본다고 들었는가? ③ 아난다여, 밧지족 사람들은 아직 공인하지 않은 것은 새로 정하지 않고, 이미 공인한 것은 깨뜨리지 않으며, 공인되어 내려온 오래된 밧지의 법들을 준수하고 있다고 들었는가? ④ 아난다여, 밧지족 사람들은 밧지족 노인들을 존경하고 환대하고 예를 다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경청해야 한다고 여긴다고 들었는가? ⑤ 아난다여, 밧지족 사람들은 종족의 남의 부인이나 여자아이를 강제로 끌고 가서 살지 않는다고 들었는가? ⑥ 아난다여, 밧지족 사람들은 밧지족 내외(內外)에 있는 조상의 탑묘들을 존중하고 공경하며 예배하며, 탑묘 전에 바쳤고, 이전에 시행했던 올바른 봉납을 철회하지 않는다고 들었는가? ⑦ 아난다여, 그대는 밧지족 사람들이 아라한들을 법답게 살피고 감싸고 보호해서 아직 오지 않은 아라한들은 그들의 영토에 오게 하며, 이미 그들의 영토에 온 아라한들은 편안하게 살도록 한다고 들었는가?18)
이처럼 칠불쇠법은 국가나 민족 그리고 각 사회단체가 갈등, 분쟁, 전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공동체 생활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특히 다원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강한 사회란 주인 의식과 공동체 의식이 있는 열린 사회이며, 법과 질서를 위한 공동체 규범이 준수되며, 인간적인 자애와 지혜를 중시하는 사회문화를 잘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침략으로 인한 티베트 독립운동 망명 정부를 수립해야 했던 달라이 라마는 진정한 세계평화는 각 개인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순수한 실천에서 찾았다. 달라이 라마의 평화론에 관한 외적 조건은 그의 전쟁관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전쟁과 군비확대를 지구상 폭력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이러한 것은 항상 인간을 살상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고형일, 2001a: 12). 그는 평화를 달성하는 조건으로 정치적, 군사적, 과학적, 기술적 외적 조건보다는 타인을 위한 자비심의 개발과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는 내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상호 존중과 관심 어린 애정을 갖는다는 것이 무기 또는 힘보다 가슴으로 우러나는 진정한 평화를 달성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달성하기 위한 4가지 명제를 제시하였다. 첫째,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보편적 인류애가 기본이 된다. 둘째, 자비는 세계평화를 위한 기둥이다. 셋째, 모든 종교는 그 철학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이미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점에서 평화적 속성을 갖는다. 넷째, 모든 개인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평화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제도를 만들 보편적 책임을 지고 있다(고형일, 2001b: 17).
중동전쟁과 관련한 불교적인 대응방식은 ‘코삼비 분쟁’의 사례에서 자신이 옳다는 ‘아만(我慢),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애(我愛)19)’와 같은 교만한 마음을 자비심 계발 등을 통해 자애로운 마음으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을 길러내는 것이다. 「자애경」에 기초한 붓다의 교지는 과거 칠불통게(七佛通偈)의 대의(大義)를 통해 엿볼 수 있으며, 오작선사가 백락천에 일러준 것처럼 ‘3세 아이도 알기는 쉬우나 80세 노인도 행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와 사회는 수행과 교육에 있어 사회윤리와 문화의 바탕에 자비심의 개발, 심리치료와 마음윤리에 관한 관심 등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 또한 가뭄에 따른 ‘석가족과 꼴리야족의 분쟁’ 사례처럼 오랜 유대관계를 가진 부족조차 갑작스러운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집단행동을 통한 충돌과 무력 전쟁이 발생할 수 있음을 잘 나타낸다. 실제 중동전쟁의 원인은 요르단강20)을 둘러싼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국가들 사이의 물분쟁과도 관련이 깊다. 국토의 80%가 사막인 요르단의 입장처럼 다른 국가들도 물 사정은 좋지 못하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1950년에 운하를 만들어 요르단강의 물을 서부와 남부로 보내는 과정에서 주변국가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에 긴장과 갈등을 유발했었으며, 요르단강 서안에서 이스라엘이 갈릴리 호수를 비롯한 수자원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1967년 이스라엘이 무단으로 점령한 시리아 땅인 골란고원은 이 지역의 유일한 요르단 강의 상류로서 만년설이 흘러 내려오는 곳이다. 이처럼 물분쟁은 이 지역에서 끊이지 않는 중요한 갈등요인이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석가족과 꼴리야족의 물 분쟁’을 통해 부족 간의 인간적인 이해와 생명존중 그리고 이를 염두에 두는 유익하고 적합한 조정 또는 중재의 대응방식을 나타낸다. 오늘날 21세기 현대사회의 국제 문제에 있어 당사자 간 또는 제3자를 통한 국제적인 조정과 중재(adr)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관심 분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마지막 사례로서 밧지족의 ‘7불쇠법’은 자국의 통치 문화와 관계한다. 첫째, 대화와 소통이 잘 이뤄져야 한다. 공존·공생의 본질적인 토대가 소통이며, 소통을 통해 신뢰를 형성하여 조직과 공공의 대중 사이에 연기적인 공동체 의식, 내적 질서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둘째, 공동체 규범의 준수이다. 승가가 지난 2천 5백 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수계·참회·징법·의결 사항 그리고 각종 쟁사를 최고의 진리체계인 경·율·론 3장에 의한 갈마 때문이다. 국가 공동체의 유지와 계승을 위한 법과 제도 역시 일관성 있는 성문법에 근거하여 올바른 의무와 책임을 지는 행동규범이어야 한다. 셋째, 사회적 윤리의 실현이다.『반니원경』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공경하며, 가르침을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21)’고 했다. 노인을 공경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며, 조상의 탑 묘를 잘 섬기는 효경사상의 생활문화를 나타낸다. 넷째, 사회적 회복과 통합이다. 사회적 회복은 상호 존중의 중립적인 자세와 사회적 합의가 보편화한 사회이다. 이것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자국민의 사회적 통합을 이루게 한다. 이처럼 중동지역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등 모든 정부는 공동체의 사적 자치를 기반으로 원융한 외교 관계를 계승 발전해야 한다. 틱낫한은 연기적인 관계에 대해 ‘상호존재’(interbeing)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상호존재란 모든 존재가 경계를 두고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상호 연결된 비이원성의 존재로 파악할 때 진정한 의미의 평화와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격히 말하여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다. 상호존재에 대한 자각과 이를 토대로 일어나는 소통, 즉 나의 고통이 곧 상대의 고통이며, 상대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라는 의식이다. 이러한 자각은 틱낫한의 사상과 실천에서 ‘적대한 분노’가 ‘벗에 대한 자비’로 전환되는 핵심이다(이거룡, 2011: 10). 상호존재 또는 연기적 공동체의 의식 성장과 함께 인간적인 교류와 활발한 소통이 미움, 원망, 증오심을 대체할 구체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중동전쟁을 포함한 모든 갈등과 분쟁의 근원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미움, 혐오, 증오심과 같은 배타적인 마음에서 각종 내전과 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평화로운 마음에는 어떤 불행의 씨앗도 찾아볼 수가 없다. 대승 경전인『維摩經』의 「佛國品」은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가 청정하다(心淨佛土淨)’라고 설하고 있다.
보살은 그의 곧은 마음을 따라서 수행을 시작하게 되고, 수행을 시작함을 따라서 깊은 마음을 얻게 되고, 깊은 마음을 따라서 뜻을 조복하게 되고, 뜻을 조복함을 따라서 말과 같이 행하게 되고, 말과 같이 행함을 따라서 회향하게 되고, 회향함을 따라서 방편이 있게 되고, 방편을 따라서 중생을 성취하게 되고, 중생을 성취함을 따라서 불국토가 청정하게 되고, 불국토가 청정함을 따라서 법의 말씀이 청정하게 되고, 법의 말씀이 청정함을 따라서 지혜가 청정하게 되고, 지혜가 청정함을 따라서 마음이 청정하게 되고, 마음이 청정함을 따라서 온갖 공덕이 청정해진다. 그러므로 보살이 정토를 얻으려면 마땅히 마음을 청정하게 가질 것이니 마음이 청정함을 따라서 부처님의 국토가 청정해진다.22)
이처럼 정토 수행이란 유심론(唯心論)적인 수행으로 시작하여 정토 세계로 나아가는 사회적 실천의 삶이다. 또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은 외부세상이란 내면세계의 반영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음은 선법과 불선법을 창조하는 힘이 있고, 선법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마음가짐과 태도는 「佛國品」의 ‘곧은 마음’과 ‘깊은 마음’과 관계된다. 세상의 본질 또는 참된 평화는 내면세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으며, 이에 붓다를 포함한 모든 조사와 스승들은 한정처(閑靜處)에 머물고, 또 면벽수행으로 자정기의(自淨其意)를 했다. 마찬가지로 계·정·혜 3학의 체계와 초기불교의 37조도품 수행 그리고 유식, 중론, 여래장 등 대승의 수행을 비롯하여 오늘날 심리치료와 명상의 모든 영역은 오직 ‘마음’과 관계한다. 따라서 불교윤리는 ‘마음윤리’와 분리될 수 없다. 붓다는 중생들의 마음이 장애 또는 족쇄에 걸려있거나, 걸리기 쉽다는 점을 사성제(四聖諦)의 고성제와 집성제를 통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탐·진·치 삼독(三毒)은 모두 마음에 관한 부분이다. 여기서 갈애23)는 집성제(集聖諦)의 6근(根), 6경(境), 6식(識), 6촉(觸), 6수, 6상, 6행(行), 6심(尋), 6사(伺)에서 일어나며, 그곳에서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각묵스님, 2013: 269)라고 자리 잡는다. 붓다는 이를 해결하는 멸성제(滅聖諦)와 도성제(道聖諦)를 통해 내면적인 번뇌와 외부적인 분쟁을 해소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 부파불교는 마음에 관한 궁극적 진리(究境法)로서 84가지로 구분하였으며, 수행을 통한 불선법을 지양(止揚)하고 선법을 제고(提高)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마음윤리는 신·구·의 3업의 개인윤리에 관한 도덕적 행위 규범과 가치를 형성하며, 나아가 깊은 마음은 한 사회의 반인권과 반생명적인 폭력, 방화, 자살테러, 전쟁 등의 패러다임을 용인하는 중동지역의 비도덕적 사회윤리에 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마침내 마음윤리의 성취는 개인윤리의 확보를 의미하는 동시에 사회윤리 차원에서 개인과 사회의 인권과 생명존중의 정당성 확보, 사회 질서 유지, 다양한 사회 정의의 실현 등 사회 또는 국가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한다. 이처럼 「佛國品」의 가르침은 오늘날 중동지역의 분쟁 및 전쟁 해결에 관한 방안으로 구성원 개개인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전쟁 및 분쟁의 해결방안에 관한 ‘마음윤리’의 확보는 중동지역의 평화와 회복적 정의를 위한 근본적인 바탕이 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사회의 마음윤리는 규범 윤리학적인 측면과 덕(德) 윤리적인 측면24)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 인격의 완성과 함께 정토 수행의 완성을 지향한다. 따라서 마음윤리의 입장에서 승가는 일찍이 마음에 관한 계체(戒體) 형성을 기본적인 바탕으로 해서 자비 수행과 지혜 수행을 동시에 닦아왔다. 여기서 계체는 연민심, 자비심 등 생명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으로 수행에 장애가 발생할 수 있는 행위의 단속과 절제와 관계된다. 이에 불가의 4부 대중은 보살계를 비롯한 5계, 10계, 비구계 및 비구니계 등을 받아 지니는 수계법회와 포살법회를 통해 신행 초기에 이러한 계체가 마음의 토대가 되도록 하였다. 달라이 라마 또한 세계평화를 위한 네 가지 명제로서 ‘인류애’, ‘자비’, ‘평화’, ‘보편적 책임’의 인간성이 마음의 근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고형일, 2001: 17). 그는 마음윤리의 측면에서 비폭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행동의 드러난 면만을 보고 그 행동이 폭력적인가 비폭력적인가를 구별하기는 힘듭니다. 그러한 구분은 근본적으로 그 행동 뒤에 숨어 있는 동기를 간과합니다. 만일 동기가 부정적이면 비록 그 외양이 부드럽고 온화하다 할지라도 그 행위는 본질에 있어서 매우 난폭한 것입니다. 반대로 진지하고 긍정적인 동기에서 나오는 심한 행동이나 말은 근본적으로 비폭력입니다. 다시 말해 폭력은 파괴적인 힘이며 비폭력은 건설적인 힘입니다. … 폭력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결국 다른 누군가의 안녕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비록 우리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우리는 아마도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의 씨앗을 심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제일 나은 방법은 인간 이해, 상호 간의 존중을 통하는 길입니다. 한편으로 양보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문제에 관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은 완전한 만족을 줄 수는 없으나, 그로 인해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다. 적어도 미래의 위험을 피하게 됩니다. 비폭력은 매우 안전한 길입니다.(달라이 라마, 1999: 242-244)
이상과 같이 마음윤리는 행동 뒤에 숨어 있는 동기나 의도가 중요하다. 특히 폭력과 분쟁 해결을 위해서는 인간의 이해, 상호 간의 존중, 이타주의에 기초한 범 지구촌의 보편적 책임의식과 관계된다. 따라서 중동지역의 평화를 위한 방안은 근본적으로 마음 윤리에서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서 어린아이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들의 마음에 종교적, 민족적 배타주의를 포함한 미움, 증오, 원한 등이 있는 한 분쟁과 전쟁의 종식은 그만큼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2차대전 후 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는 ‘프랑스의 6.8운동’에서 종교를 포함한 모든 억압(금지)으로부터 자유를 표방한 것처럼 중동지역은 배타주의, 폭력주의에 따른 분쟁과 전쟁으로부터 자발적인 집단의식의 각성과 성장이 요구된다. 따라서 마음윤리와 비폭력에 관한 교육정책의 개선, 생명윤리의 공론화, 심리치료 등과 함께 적극적인 상호 교류를 통한 인간적인 이해가 확대되고, 연기적인 공동체 의식을 통한 용서와 화해의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조성해 가야 한다. 그리고 ‘칠불쇠법’의 내용과 같이 열린 사회, 법과 질서를 위한 공동체 규범 준수, 인간적인 자애와 지혜를 중시하는 사회문화를 위해 소통의 장이 많이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원화된 현대사회는 전통방식의 단일한 윤리규범으로 사회윤리를 적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발발하고 있는 폭력, 분쟁, 전쟁에 대응하는 생명윤리의 사회적 목표 달성을 위한 이론적 합의 또는 실천적 장치들은 조속히 보완되거나 준비되어야 한다. 이러한 불교의 생명윤리에 관한 사회윤리의 이념은 연기적 공동체 의식, 중선봉행과 제악막작의 실천규범, 보살사상과 보살행의 실천윤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마음윤리의 측면에서 비폭력, 자애심, 사무량심, 보리심 등의 계발과 확산에 따른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는 중동지역을 포함한 지구촌의 평화와 화해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Ⅳ. 결론
인류사를 통해 사람들은 시대마다 직접·간접적으로 많은 분쟁과 전쟁들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전쟁이 주는 참담한 역사의 큰 교훈을 깨닫고서 세상을 떠나가고 또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이 공간을 대체한다. 그리고 변함없이 계속되는 것은 탐욕과 이기적인 문명의 대물림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 준비이다. 지난날 겪었던 참사와 비극들은 역사적인 기록물로 느껴질 뿐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명윤리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각성은 늘 미흡해 보인다. 또한 사랑과 평화를 외치는 성스러운 종교집단이 다른 종교집단을 향해 배타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전쟁의 중심에 있다는 점도 종교윤리의 측면에서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가 제국주의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 건립을 위한 발 빠른 움직임들이 아시아를 비롯한 유럽 등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중동지역 또한 탈냉전기를 맞아 독립된 자주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복잡한 이해관계와 각종 분쟁을 맞이해야만 했다. 중동은 일찍이 화약고라고 불릴 만큼 언제 무엇이 터질지 모르는 곳이었다. 특히 1916년 밸푸어 선언 이후 100여 년 중동 분쟁의 중심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있다. 이 지역에서만 이미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이 있었으며, 2023년 지금은 이슬람 무장 테러 집단인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교전 중에 있다. 이러한 오랜 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난민들이 발생했으며, 수시로 자살테러가 일어나고 있다. 제3차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의 수도 예루살렘이 이사라엘에 점령 당하는 등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과 언제든지 교전할 만한 담벼락이 경계선으로 놓여있다.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과거의 오랜 경험처럼 폭력과 전쟁을 통해 이 분쟁이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과연 공존의 씨앗이 자라날 수 있을 것인가! 의구심이 든다.
분쟁의 발생원인은 민족적, 종교적, 인종적, 영토 문제 그리고 외부세계의 정치적 이해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있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요인은 내면세계와 연결된 정체성과 관련이 깊다. 사람들은 민족이든 종교이든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에서 하나의 집단 정체성으로 형성되어 소속감을 느끼지만 한 편으로는 다른 사람 또는 집단과 구별하고, 또다시 우월주의, 배타주의적 성향이 있게 된다. 이러한 형태는 집단 이기주의 속에서 동질성을 강화하고 또 분리해 ‘남’ 또는 ‘혐오집단’으로 낙인을 찍고 밀어낸다. 특히 오랜 역사 속에 중동전쟁의 발생원인은 이러한 정체성, 특히 종교적 이념 속에 가려진 배타적 정체성과 관련이 깊다.
불교윤리의 정체성은 계·정·혜 3학의 체계 속에 있다. 먼저 계학(戒學)과 관련하여 5계, 10계, 보살계 등은 인간성의 바탕에 생명존중, 인간적인 이해와 이타주의, 비폭력과 평화에 대한 계체(戒體) 형성과 유지를 바탕으로 한다. 달라이 라마는 “오늘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으로서의 우리가 좋은 인간적 자질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진적으로 그러한 기본자세를 지니는 단체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달라이 라마, 1990: 210)라고 했다. 이처럼 불교윤리는 다음 수행인 정학(定學)과 혜학(慧學)을 위한 토대가 된다. 수행적 측면에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모두 자비심 개발과 보살행에 있으며, 인류 공동체를 넘어 지구 공동체 운명에 관한 생명윤리의 규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혜학(慧學)은 연기법의 통찰에 따른 ‘무아(無我)’를 체득하는 것이다. 개인 정체성, 집단 정체성의 근저(根底)에 ‘나’가 있음으로 이분법적 분리심이 모든 갈등과 분쟁의 원인이 된다면 ‘무아’는 전혀 다른 정체성이 된다. 더는 다른 집단과 경계선을 긋거나 우월주의와 배타주의를 가질 이유가 없게 된다. 사실 무경계는 걸림 없는 자비심과 유사하여 지구 공동체 모두를 생명윤리로 보게 된다. 따라서 중동전쟁을 바라보는 불교적 윤리는 ‘마음윤리’로서 불선한 마음에 대한 단속과 이것에 대한 보편화한 책임감이 필요하다. 이에 공존에 관한 대화와 소통이 있는 열린 사회를 지향하고, 인간적 이해와 연민심을 바탕으로 이타주의 및 생명과 평화에 대한 교육과 문화적 연대를 공유해 가야 한다. 나아가 신뢰 회복, 공동체 규범 준수, 인간적인 자애와 지혜를 중시하는 사회문화를 확산시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