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충주는 예로부터 국토의 중심부인 중원지방으로 불려 왔다. 그러한 원력으로 중앙탑을 세워 국가 불교적인 면모를 지녀왔다. 충주는 어느 지역 못지 않게 불교 관련 문화유산이 많다(충청북도, 1982; 김현길, 1990·1992; 문화재청 불교문화재연구소, 2014·2018).1) 특히 많은 사지와 더불어 용산사와 천림사, 의림사 등의 사찰이 있었으며, 향후 이에 대한 연구가 더욱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2)
우리나라에서 글씨를 잘 쓴다는 신품 4현(神品四賢)3) 가운데 김생은 만년에 충주에 김생사(金生寺)를 짓고 머물렀으며, 승려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1070-1159)은 왕사 책봉전에 충주 의림사(義林寺)에 주석한 바 있다.
무신정변 즈음해 충주 죽장사(竹杖寺)에 두 번째로 밝은 별인 시루우스(狼星, 老人星)가 밤 하늘에 나타났다고 하여 왕실에서 주목하였다. 몽골 침략시 충주전투에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와 대원사(大院寺) 주지 우본(牛本, ?-1232)도 항쟁에 앞섰는데, 우리나라 민중 항쟁사에 있어서 최고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충주 지역에 불교계의 왕사와 국사가 주석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정토사(淨土寺)에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玄暉, 879–941)와 홍법대사(弘法大師, 912∼916?-?), 숭선사(崇善寺)에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嚴, 1090-1141)과 원융국사(圓融國師) 결응(決凝, 964-1053), 미륵대원(彌勒大院)에 정각국사(靜覺國師) 지겸(志謙, 1145-1229)과 고려시대 유일하게 여대사로 인정받은 진혜대사(眞慧大師) 성효(性曉, 1255-1324), 김생사에 마지막 화엄종계 국사인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 1307-1382) 등이 주석하였다. 특히 고려말 여말삼사(麗末三師)의 문도인 마지막 국사 환암 혼수(幻庵混修, 1320-1392)와 왕사 목암 찬영(木庵粲英, 1328-1390)이 청룡사와 억정사를 하산소(下山所)로 삼아 머물렀다.4) 그들의 문도 천봉 만우(千峯卍雨)와 죽암 선진(竹菴旋軫) 등도 충주 개천사와 억정사 등에 주석하였다(허흥식, 1990; 이철헌, 1994; 정영호, 1964·1968; 황인규, 1999·2003·2020).5) 본고는 충주 지역의 시대별 대표적인 주요 사찰에서 고승들이 전개한 불교사적 역할 및 의의를 밝혀보고자 한다.
Ⅱ. 고대의 주요 사찰-용두사, 창룡사, 김생사, 정토사
충주에는 반도의 중심 지역이며 요충지이다(정영호, 1996: 20). 충주에 불교가 언제 전래되었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다음에 소재하는 두 문화유산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즉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의 마애불상, 마애불상군(서영일, 2002: 90; 정영호, 1980: 16-24; 충청북도, 1982: 562-567)과 보련사지(寶蓮寺址)에서 출토된 건흥 5년명(建興五年銘) 금동 석가삼존불(金銅 釋迦三尊佛) 광배(光背)(충청북도, 1982: 554)6)를 통해 그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그후 용두사(龍頭寺)와 창룡사와 탑평리 7층 석탑이 돋보인다. 용두사는 삼국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 존속되다가 18세기 이전 폐사되었다.7) 가정 이곡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유항 한수, 포은 정몽주 등이 지은 시가 남아 있는데, 당시 용두사 주지 도생(道生)과 교유하였다.8) 용두사지는 동량면 말흘산 밑에 대전리에 있는데, ‘절골’이라고 불리고 있다(충청북도, 1982: 569).
창룡사(蒼龍寺)는 남산의 관록인 직동에 있었던 사찰이다. 1932년에 지어진 『창룡사 성불봉안기(蒼龍寺 聖佛奉安記)』에 의하면 원효(元曉) 성사가 창건했으며, 고려말 나옹(懶翁)과 조선 중기 청허 휴정이 중수했다고 전한다(충청북도, 1982: 107). 영조 무렵까지 사세가 지속되다가9) 1870년(고종 7)에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재목을 지금의 세무서 터에 군사시설인 수비청(守備廳)을 세우기 위해 창룡사의 법당을 헐어버렸다고 한다(충청북도, 1982: 569).10)
중원 탑평리 7층 석탑(국보 제6호)은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민을 화합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중심 지역인 충주에 세웠다(최근영, 1997). 건축 양식상 문성왕 때인 9세기 전반기에 세워진11) 현존하는 신라 석탑으로는 규모가 크고 가장 높은 탑이다(12.86m). 신라시대에 조성되었을 충주 원평리 석조 여래입상과 충주 원평리 3층 석탑이 있는(정영호, 1996: 176-177)12) 원평리(院坪里) 사지(寺址)는 ‘미륵댕이’로 불리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 같으며, 그 주변에는 근래에 건립된 미륵정사가 있다.
신라 통일기에 창건한 사찰로는 김생사(金生寺)와 정토사(淨土寺) 등이 있다. 김생(金生, 711-791)이 생애 만년인 8세기 후반에 충주 금가면 유송리 한강 변에 창건한 사찰이며, 조선 후기 폐사되었다. 고려말 문인 김구용과 이집, 정몽주, 권근 등의 시가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화엄종계 마지막 국사 설산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도 왕사로 책봉 전에 주석하였다.13) 천희의 손제자벌인 화엄종 고승 월창 의침(月窓義砧)과 총상인(聰上人)이 주석한 바 있다.14) 이러한 고승이 머물렀기 때문인지 조선초 1426년(세종 8)에는 조선초 충주의 주요 사찰인 청룡사(靑龍寺)와 용두사(龍頭寺), 엄정사(嚴政寺), 억정사(億政寺), 향림사(香林寺)와 더불어 김생사(金生寺)의 사전지(寺田地)가 침탈당하기도 하였다.15) 그후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의 생존시에 이미 황폐화되어갔다.16) 18세기 중엽에 호서지방 승려 공오(空悟)가 중수하였으나17), 18세기 말에 폐사된 듯하다.18)
정토사(일명 개천사)는 제천천이 남한강과 합류하는 동량면 하천리에 있었다.19)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신라 말 고려 초기에 고승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玄暉, 879-941)와 홍법국사(弘法國師)가 주석하였던 큰 사찰이었다. 고려초 현휘는 906년(효공왕 10)에 당으로 건너가 사천성(四川省) 구봉산(九峰山) 도건(道乾)에게 선을 수학하고, 924년(태조 7)에 귀국했다고 한다. 현휘가 귀국하자 태조는 특사를 파견하여 영접하고 국사로 예우하였으며, 정토사에 주석하게 하였다(김두진, 2006: 145-149).20) 왕건은 충주 지방의 유력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을 제3비 신명순성태후(神明順成太后)를 맞이했다.21) 건국 초기에 호족들이 득세하는 혼란한 정세 속에서 유씨 소생의 두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으며, 낙랑공주는 경순왕 김부(金傅, 897-978)의 비로 보냈다.22)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의 음기를 보면, 중앙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고 불교 선종(禪宗)에 의한 도관(道官)과 호족들에 의한 속관(俗官)이 지배하는 도·속(道·俗)의 2관부(官府)가 있었다. 속관의 제1인자로 유권열이었다.
홍법국사가 저장성[浙江省], 푸젠성[福建省] 지방 등을 유력하고 귀국 후 개경의 보제사와 봉은사 등에서 주석하였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지냈고, 목종 때 ‘국사’의 칭호를 받았다. 대선사로서 국사에 책봉되어 충주 개천산 정토사(淨土寺)를 하산소로 삼아 만년 몇 년 보내다가 입적하였다.23) 뒤에 언급한 바와 같이 개천사로 사명이 바뀌어 조선 중기 폐사되었다.24)
Ⅲ. 고려 전기의 주요 사찰-숭선사, 죽장사, 의림사, 대원사, 오갑사
충주의 고려 전기에 창건된 중요 사찰은 숭선사(崇善寺), 죽장사(竹杖寺), 의람사(義林寺), 대원사(大院寺), 오갑사(烏岬寺) 등이 있다.
숭선사는 954년(광종 5) 광종이 어머니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김철웅, 2006: 41-45)25) 고향 충주 신니면에 창건하였다. 이에 앞서 951년에 태조를 위해 개경 남쪽에 봉은사(奉恩寺)를 창건하고, 동쪽 성 밖에 어머니를 위해 불일사(佛日寺)를 창건한 바 있다.26) 「개성 영통사대각국사비」 음기에는 숭선사 주지 수좌 몽영(夢英)이 공사에 참여했다고 하며, 「개성 흥왕사원명국사묘지명」에는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儼)이 1119년에 흥왕사 주지를 하다가 숭선사 주지로 있었다고 전한다(정제규, 2006: 46-50).27) 고려말에 김구용과 권근 등 문집에 그 존재가 보이다가 16세기 이후 폐사된 듯하다(충청북도, 1982: 551-552).28)
죽장사(竹杖寺)는 금봉산에 있었다. 현대인 1986년에 석종사(釋宗寺)가 창건되었다(충주시지편찬위원회, 2001: 480). 1289년(충렬왕 15)에 제작된 죽장사 기축명 동종(竹丈寺 己丑銘 銅鐘)이 있다. 죽장사가 왕실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1170년(의종 24) 죽장사에서 狼星(시리우스)인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고 한다(이태형, 2021).29) 1170년(의종 24)에 서해도(西海道) 안찰사(按察使)가 노인성이 나타났다고 조정에 급히 보고하였다.30) 같은 해 4월 의종은 내전(內殿)에서 몸소 노인성에게 제사를 지냈다. 충주목사도 죽장사에서 노인성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그날 저녁에 수성(壽星)이 나타났다가 3헌(三獻)에 이르러 사라졌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의종이 크게 기뻐하고 백관들은 하례하였다.31) 그리고 태자는 복원궁(福源宮)에서 제사를 지냈고, 허홍재(許洪材)는 상춘정(賞春亭)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좌승선 김돈중(金敦中)은 충주 죽장사에서 제사를 지냈다.32) 이러한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 즈음에 충주 죽장사에서 나타났다고 하는 노인성은 죽장사가 왕실을 비롯한 불교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로부터 20여년 후인 명종대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다. 즉 충주 숭선사지에서 와편 “대정 22년(大定 二十二年)”(1182, 명종 12)(충청대학 박물관·충주시, 2006: 48)의 기록이나, 의림사지에 나온 청동 반자 “대정 삼십년(大定 三十年)”(1190, 명종 20), 오갑사지(烏岬寺址)의 와편명 “명창3년 임자 7월○○오갑사 지사대○○○(明昌三年 壬子 七月 ◯◯ 烏岬寺 知事大◯◯◯◯◯◯)”(충청북도, 1982: 556)과 중원 미륵대원사지의 와편명 “명창3년금당개개○○○대원사주지대사○와입비○◯◯◯◯◯◯사월현조(明昌三年金堂改盖◯◯◯大院寺住持大師◯瓦立碑◯◯◯◯◯◯四月現造)” 등을 통해 알 수 있다(정제규, 2006: 49-55). 그 가운데 의림사지에 나온 청동 반자 “대정(大定) 30년”(1190, 명종 20)의 기록으로 보아 의림사에 불사가 있었다고 하겠다.33) 의림사는 1188년(명종 18)에 청동 반자를 도둑맞아 1190년(명종 20) 신도들이 인연을 맺어 주조하여 매달았다. 여기에 참여한 인물은 부호장 유장보(劉張輔) 승려 관심(冠心)과 법명(法明)이며, 사찰의 주지는 유중(惟中)이었다(충청대학교 박물관, 2002: 21).34)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1070∼1159)의 비문에 의하면 탄연이 1104년(숙종 9)에 대선 승과에 합격하여 왕사 책봉전 의림사에 주석하였다.35) 의림사는 대궐터’ 또는 ‘이궁지(離宮址)’라고도 불렸는데, 1369년(공민왕 15) 8월 충주에 이궁을 건설하였다.36)
그리고 충주 상모면에 있는 미륵대원사지(彌勒大院寺址)를 『삼국유사』에는 ‘미륵대원 동쪽에 있는 령이 계립령이다.’37)라고 하였다. 고려 초기 석굴사원으로서 우리나라 석굴사원 계보를 잇는 중요한 유적이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신라의 재기를 뜻하며 창건하였다고 한다. 1978년 1차 발굴 조사에서 “대원사주지대사(大院寺住持大師)”명(銘) 와편이 발견되면서 “대원사(大院寺)”라 추정되었으며, “미륵당(彌勒堂)”, “미륵초당(彌勒堂草)”, “원전(院主)”명 와편이 출토되어 미륵 신앙계이자 원(院)을 겸하는 사찰이었다.38)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미륵원에 묵으면서 주천(酒饌)을 열은 적이 있다.39) 정각국사(靜覺國師) 지겸(志謙, 1145-1229)이 국사 책봉 전에 중원 광수원(廣水院) 법회에 참여하였는데40), 광수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미륵원을 지칭한다고 하였다.41) 특히 1231년(고종 18) 미륵대원의 승려 우본(牛本)이 충주 관노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1231년 12월에 충주전투에서 충주부사 우종주와 판관 우홍익이 몽고군이 침략하자 양잔 등과 함께 달아났다. 성에 남은 노군(奴軍)과 잡류(雜類)들이 싸워 이겼다. 그런데 몽고군이 약탈해 간 은그릇을 노군 잡류의 짓이라고 모함을 하였다. 충주 노군 등이 분노하여 봉기하였다.42) 유홍익의 요청에 안무별감을 편성해 보냈고 노군 도령 지광수와 우본이 대원사 주지가 되었다. 승려 우본은 고종 때 전투부대의 지휘관 도령(都令) 영사(令史)었다가43) 충주 노군으로 참전한 공로로 충주 대원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며, 우본은 삼중대사(三重大師)라는 승계를 받았다.44) 그해 8월에 3군 병사마사 이자성을 보내 지도자 승려 우본과 충주노군을 토벌하였는데, 이 때 순교하였다.45) 그 후 고려시대 유일의 여대사(女大師)로 불린 진혜대사(眞慧大師) 성효(性曉, 1255-1324)는 1302년 중국 임제종 고승 무(無)선사와 철산소경(鐵山紹瓊)이 오자 법요를 들은 후에 1311년(충선왕 복위 3) 여러 산천을 순례하는 중에 충주 미륵대원에 올라 장육석(丈六石)에 예를 올렸다.46)
Ⅳ. 고려 후기의 주요 사찰-청룡사, 개천사, 억정사, 엄정사, 향림사
충주의 고려 후기 사찰로 돋보이는 것은 청룡사(靑龍寺), 개천사(開天寺), 억정사(億政寺), 엄정사(嚴政寺), 향림사(香林寺) 등이다.
환암은 1357년(공민왕 6)에 소태면 오량리에 있었던(충주박물관, 2000: 169-183)47) 청룡사 서쪽 산기슭에 연회암(宴晦菴)을 짓고 은거하였다(충주산업대학교 박물관, 1996: 25).
忠州 靑龍寺로 갔다. 청룡사 서쪽 산기슭에서 시내를 따라 올라가면 산봉우리가 사방에 둘러 있고, 주위가 고요한 옛 집터가 있는데, 선사께서 몸소 목재와 돌을 날라다가 기탄없이 경영하여 일이 완성되자 宴晦菴이란 편액을 걸었으니, 대개 그 자신의 心迹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 무오년(1378, 우왕 4)에 雉岳山으로부터 宴晦菴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문 앞에 손이 찾아오자 선사께서는 곧 침실로 들어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그 손은 과연 中使[內侍]였다. 선사에게 光巖寺를 맡아 달라고 청하였는데, 선사가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끝내 나왔다. 48)
1378년(우왕 4) 치악산에서 다시 연회암으로 돌아왔다. 그해에 청룡사에서 환암의 문도 만회(萬恢)와 상이(尙侇) 등과 함께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49)과 『선림보훈』(박문열, 2017: 34)50)을 간행하였다. 개성 광암사 주지를 한 후 청룡사로 돌아와 1379년 8월에는 환암의 문도 승준(僧俊)과 만회로 하여금 『호법론』을 간행하게 하였다(허흥식, 1990; 이철헌, 1994; 곽승훈, 2011: 177-186; 황인규, 2020: 133-134).51) 다시 왕명으로 광암사 주지를 3년간 하고 1381년 다시 청룡사로 돌아와 환암의 문도 담여(淡如)와 각눌(覺訥) 등에게 『선종영가집』을 개판하게 하였다.52) 이렇듯 환암은 공양왕이 즉위하자 다시 국사로 책봉되고, 청룡사 연회암을 하산소로 삼았다. 문인 이색(李穡, 1328-1396)의 나옹행장53)과 『목은시고(牧隱詩藁)』에는 청룡사와 관련해 지은 시가 있다.54) 이러한 불서들을 간행하여 불교를 수호하고 선풍을 진작하고자 하였다(황인규, 2020: 133-134).55) 1392년 7월 조선이 건국되자 축하 표문을 올려고 청룡사로 이주하였다. 그해 9월 연회암에 다비하고 12월 청룡사에서 하관하였다.
또한 청룡사의 승려 정순(正恂)과 함께 세종대 태종의 후궁 신녕궁주 신씨가 금자 법화경을 사경하였다.56) 세종대 억불시책에 의하여 세종대 충주의 김생사와 용두사, 엄정사, 억정사, 향림사 등과 함께 사찰 전지를 침탈당하기도 하였다.57) 조선말기 민대룡(閔大龍)이 사찰 터에 묘를 쓰기 위해서 사람을 시켜 절에 불을 냈다고 한다.58)
찬영과 같은 해인 1383년 국사가 된 환암은 개천사를 하산소로 삼았다.
(1383년, 우왕 6) 여름 4월 초1일 갑술에 왕이 相臣 禹仁烈 등에게 御書ㆍ印章ㆍ法服ㆍ禮幣를 받들어 보내 선사가 계신 연회암에 나와서 國師로 책봉하는 동시, 曹溪宗師禪敎都摠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의 존호를 올리게 하고, 충주의 開天寺로 상주하는 곳을 삼았다. … 왕이 이르기를, “개천사는 선사께서 끝까지 머물러 있어 그 음덕을 입을 곳이요, 광암사는 내가 청하여 演法하게 한 곳이니, 둘 다 겸한들 무엇이 해로우랴.”하므로, 선사께서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 무진년(1388, 우왕 14) 여름에 왕이 외지에서 손위하고 어린 임금(창왕을 가리킴)이 그 뒤를 계승하자, 선사께서 개천사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창왕이 특별히 사람을 시켜 護行하게 하였고, 기사년 겨울에 恭讓君이 즉위하자, 表文을 올리며 印을 봉하여 조정에 드리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는데, 몇 달 안 되어 다시 國師로 봉하고 사람을 보내 개천사로 도로 모셔오게 하였다.59)
환암은 1384년 왜구의 침탈로 개성 광암사에 피신하여 왕실 불사를 주관하고,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개천사로 다시 돌아왔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다시 국사로 책봉되어 개천사로 돌아왔다. 개천사(開天寺)는 충주시 동량면 정토산에 있던 정토사이다. 고려 중기이후 개천사로 불리다가60) 고려말 왜구의 침탈로 고려실록이 보관되었으며, 조선초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과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이 있다.61) 문도 천봉 만우(千峯卍雨) 등도 충주 개천사와 억정사 등에 주석하였다. 고려말 문인 이 담선사(曇禪師)와 환암 혼수의 문도인 잠시자(岑侍者)와 이색, 이숭인 등과 교유하였다.62) 개천사는 조선 중기이후 퇴락하여 영조, 정조 연간에는 이미 사찰이 폐사된 듯하다(車勇杰, 1986: 23-25).63)
억정사(億政寺)는 엄정면 괴동리에 있었다(충북대학교 중원문화재연구소, 1998: 46).64) 고려말 내원당 감주를 지낸 죽암 선진(竹菴旋軫)이 주석하였고65), 대지국사(大智國師) 찬영(粲英, 1328∼1390)이 주석한 사찰이다.
찬영이 1385년(우왕 11)에 억정사에서 은거하다가 입적하였고, 이후 1393년(조선 태조 2)에 승탑과 탑비가 세워졌다(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571-573).
다음 해 2월 王이 專使를 보내서 護行하여 스님을 다시 億政寺로 모셨다. 恭讓君이 卽位한 다음 해인 庚午年에 謙遜한 말로 편지를 써서 사신을 보내어 京城으로 맞이하고 國師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당시 臺諫으로부터 異端인 佛敎人을 국사로 모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배척하는 上疏가 있었다. 스님은 이 일을 알고 강력히 거절하였다. … 또 中使를 시켜서 香을 하사하고 護行토록 하였으나, 스님이 이르기를 “나의 자취는 흐르는 물과 같고 野人의 家風이므로 모실 必要가 없거늘 主上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拳拳하며 이처럼 극진히 보살펴 주시는가”라 하고 드디어 億政寺로 가서 조용히 聖胎를 頤養하였다. … 스님은 병을 얻어 그 해 6월 28일 大衆에게 … 말이 끝나자 마자 北쪽으로 머리를 向하고 右脇으로 西쪽을 보면서 누워서 조용히 入寂하였다. 화장을 마치고 億政寺의 東쪽 언덕에 탑을 세우고 遺骨을 봉안하였다.66)
마지막 왕사 찬영이 주석하였던 억정사는 조선초인 1398년(태조 7) 중흥사와 함께 전조(田租)의 납세를 면제받았고67), 1407년(태종 7)에 88개의 명찰을 새로 선정해 기존의 자복사를 대체하였는데, 충주의 엄정사가 천태종 자복사(資福寺) 43소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68)
조선초 선교양종 36사 가운데 보련사(寶蓮寺)가 교종 소속으로 지정되었으며, 성종대에도 왕실원당인 장의사가 신륵사와 더불어 경제적 대우를 받은 사찰이다.69) 세종대 70명의 승려가 머무는 사찰로 제한하고 있지만70), 고려말에는 700여 명의 승려가 머무는 대찰이었다(충청북도, 1982: 554).71) 보련사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승려가 많아서 쌀 뜨물이 한강까지 흘러갔다고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폐사되었다.72)
세종대에 이르러 1426년(세종 8) 충주의 청룡사(靑龍寺)와 김생사(金生寺), 용두사(龍頭寺), 향림사(香林寺) 등의 사찰과 함께 사원전이 침탈당하기도 하였다.73) 또한 엄정사(嚴政寺) 승려 해신(海信)과 전 주지 해명(海明), 억정사 전 주지 성조(性照)와 해순(海淳)이 함께 비행을 빌미삼아 탄압의 표적이 되었다.74) 그리고 충주시 엄정면에 있었던 향림사(香林寺) 등의 사찰과 함께 사원전을 침탈당하기도 하였다가 19세기 말 이후 폐사되었다(청주대학교 박물관, 2007: 70).75)
Ⅴ. 맺음말
이상으로 충주 지역의 각 시대별 주요 사찰에서 고승들이 전개한 불교사적 역할 및 의의를 살펴보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불교가 남하하면서 한반도의 중심 지역인 충주를 상징하는 탑이다. 삼국의 민의 화합을 기원하여 세운 불교계의 중앙탑이 있는데, 이는 화쟁의 상징인 원효가 세운 창룡사가 세워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명필로 알려진 김생과 승려 탄연이 한 때 주석한 사찰이 김생사와 의림사이다. 김생사에는 고려말 화엄종 마지막 고승 진각국사 천희와 의침이 머물렀다.
뿐만 아니라 고려 불교계의 고승 왕사와 국사가 주석한 충주 사찰은 법경대사 홍법국사가 말년에 주석한 정토사, 광종이 어머니 유씨를 위하여 창건한 숭선사에 원명국사 원융국사가 머물렀다. 의종대 충주 죽장사에 나타났다는 밤하늘 두 번째로 밝은 별인 시루우스(狼星) 노인성의 출몰은 고려 왕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나라 민중 항쟁사에 빛나는 승장 김윤후와 우본이 주석한 미륵대원사에는 고려시대 유일의 비구니 여대사 성효가 다녀가기도 하였다. 대궐터로 알려지고 공민왕대 충주 천도론이 제기되었던 의림사도 왕실에서 주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려말 왕사 대지국사 찬영이 말년에 머물렀던 억정사, 보각국사 혼수가 청룡사와 개천사 등에 주석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가운데 충주 불교에서 주목되는 사찰은, 고려초에 중국에서 선진 사상을 익히고 온 법경대사 현휘와 홍법대사가 주석하였다가 입적하여 추념 부도와 비가 세워진 충주 정토사이다. 특히 현휘는 선종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고자 하여 그 시대의 통합을 강조하였다. 광종은 어머니 유씨를 위하여 원당을 개경의 불일사와 더불어 고향인 충주의 숭선사를 왕실 원당으로 지정하여 그 이후 왕실에서 운영하였다. 몽골침략에 노비를 이끌고 항쟁하였던 우본은 대원사 주지였다. 고려말기 공민왕대 반제 자주의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은 공민왕 때 개혁의 일환으로 여러 천도 후보지가 제기되었는데 충주도 한 곳으로 부상하였는데 의림사로 비정되고 있다.
고려말 불교계를 태고 보우와 나옹 혜근 등 여말삼사가 주도하였다. 그들의 문도인 환암 혼수와 목암 찬영이 마지막 왕사와 국사로 책봉되어 충주 청룡사 혹은 개천사, 억정사에 머물렀으며, 추념 부도와 비가 세워졌다.
조선초에 이르러 충주 보련사가 자복사로 지정되기도 하였지만, 1426년(세종 8) 청룡사와 김생사, 용두사, 향림사 등의 사찰과 함께 사원전이 침탈당하기도 하였다. 결국 1424년 7개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면서 엄정사와 억정사의 승려의 비행을 빌미 삼아 전국적인 불교탄압을 자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