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일반논문

충주의 고중세 사찰의 역사와 의의

황인규*
In-gyu Hwang*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Professor, Dongguk University

© Copyright 2024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Nov 17, 2024; Revised: Nov 30, 2024; Accepted: Dec 08, 2024

Published Online: Dec 31, 2024

국문 초록

본 논문은 충주지방의 불교문화를 알기 위하여 불교 전래이후 사찰의 창건과 그 역사가 지니는 불교사적 역할 및 의의를 살피고자 한 연구이다. 고구려 불교가 남하하면서 반도의 중심지역인 충주를 상징하는 탑은 삼국의 민의 화합을 기원하여 세운 불교계의 중앙탑이다. 명필로 알려진 김생과 승려 탄연이 한 때 주석한 사찰이 김생사와 의림사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 불교계의 고승 왕사와 국사가 주석한 충주 사찰은 법경대사 홍법국사가 말년에 주석한 정토사, 광종이 어머니 유씨를 창건한 숭선사에 원명국사 징엄이 머물렀다. 의종대 충주 죽장사에 나타났다는 밤하늘 두 번째로 밝은 별인 시루우스 노인성의 출몰은 고려 왕실의 주목을 받기 충분하였다. 우리나라 민중 항쟁사에 빛나는 승장 김윤후와 우본이 주석한 미륵대원사의 주지였다. 대궐터로 알려지고 공민왕때 충주 천도론이 제기되었던 의림사도 왕실에서 주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려말 왕사 대지국사 찬영이 말년에 머물렀던 억정사, 보각국사 혼수가 머물렀던 청룡사 등에 주석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가운데 충주 불교에서 주목되는 사찰은 법경대사 현휘와 홍법대사가 충주를 택하여 주석하였다가 입적하여 추념 부도와 비가 세워진 정토사이다. 몽골침략에 노비를 이끌고 항쟁하였던 우본의 대원사 주지였다. 고려말 불교계를 태고 보우와 나옹 혜근 등 여말삼사가 주도하였는데, 그들의 문도인 환암 혼수와 목암 찬영이 마지막 왕사와 국사로 책봉되어 충주 청룡사와 개천사, 억정사에 머물다가 추념 부도와 비가 세워졌다. 조선초 세종대 충주의 중요 사찰인 청룡사, 개천사, 김생사, 용두사, 향림사 등의 사원전을 침탈당하고,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면서 혁파한 엄정사와 억정사의 승려를 비행을 빌미삼아 전국적인 불교탄압을 자행하였다.

Abstract

This paper is a study to examine the significance of the founding of temples and their history after the introduction of Buddhism in order to understand the Buddhist culture of Chungju.

As Goguryeo Buddhism moved south, the tower, which symbolizes Chungju, the central area of the peninsula, is the central tower of the Buddhist community established to pray for the harmony of the people of the three countries. The temples once annotated by Kim Saeng and Buddhist monk Tanyeon, known as masterpieces, are Kim Saengsa and Uirimsa. In addition, Chungju Temple, chaired by a high priest and a national history of Goryeo Buddhism, stayed Jeongto Temple, which was annotated by Hongbeopguksa of Beopdaesa Temple in his later years, and Wonmyeongguksa Wonyongguksa Temple, which was founded by the King Gwangjong, his mother Yoo. The appearance of Noinseong, the second brightest star in the night sky that appeared in Chungju Jukjangsa Temple, was enough to attract the attention of the Goryeo royal family. He was the governor of Mireukdaewonsa Temple, chaired by Kim Yun-hoo, and monk Ubon. Uirimsa Temple, which was also known as the site of the Grand Palace and raised the theory of Chungju during the King Gongmin's reign. Therefore, it is no coincidence that the late Goryeo Dynasty Wangsa's geodoguksa Chanyoung came to comment on Eokjeongsa Temple, where he stayed, and Cheongryongsa Temple.

Among them, the temple that attracts attention in Chungju Buddhism is Jeongtosa Temple, where the memorial stupa and the monument were built. He was the chief monk of Daewonsa Temple in Ubon, who led slaves to the invasion of Mongolia and protested. The Buddhist community at the end of Goryeo was led by the three female monks, including the monk Taego-Bowo and Naong Hye-geun, and their leaders, the monk Hwanam Honsu and Mokam Chan-young, were appointed as the last royal temple and national affairs, and stayed at Cheongryongsa and Eokjeongsa Temple in Chungju before the memorial Buddha and the monument were erected.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temples of Cheongryongsa Temple, Kimsaengsa Temple, Yongdusa Temple, and Hyangrimsa Temple, which were the main temples of Chungju and they carried out a nationwide Buddhist repression using the misconduct of Eomsa Temple and Eokjeongsa Temple.

Keywords: 김생사; 정토사; 숭선사; 의림사; 대원사; 청룡사; 억정사
Keywords: Kimsaengsa Temple; Jeongtosa Temple; Sungseon Temple; Uirimsa Temple; Daewonsa Temple; Cheongryongsa Temple; Ujeongsa Temple

Ⅰ. 머리말

충주는 예로부터 국토의 중심부인 중원지방으로 불려 왔다. 그러한 원력으로 중앙탑을 세워 국가 불교적인 면모를 지녀왔다. 충주는 어느 지역 못지 않게 불교 관련 문화유산이 많다(충청북도, 1982; 김현길, 1990·1992; 문화재청 불교문화재연구소, 2014·2018).1) 특히 많은 사지와 더불어 용산사와 천림사, 의림사 등의 사찰이 있었으며, 향후 이에 대한 연구가 더욱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2)

우리나라에서 글씨를 잘 쓴다는 신품 4현(神品四賢)3) 가운데 김생은 만년에 충주에 김생사(金生寺)를 짓고 머물렀으며, 승려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1070-1159)은 왕사 책봉전에 충주 의림사(義林寺)에 주석한 바 있다.

무신정변 즈음해 충주 죽장사(竹杖寺)에 두 번째로 밝은 별인 시루우스(狼星, 老人星)가 밤 하늘에 나타났다고 하여 왕실에서 주목하였다. 몽골 침략시 충주전투에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와 대원사(大院寺) 주지 우본(牛本, ?-1232)도 항쟁에 앞섰는데, 우리나라 민중 항쟁사에 있어서 최고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충주 지역에 불교계의 왕사와 국사가 주석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정토사(淨土寺)에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玄暉, 879–941)와 홍법대사(弘法大師, 912∼916?-?), 숭선사(崇善寺)에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嚴, 1090-1141)과 원융국사(圓融國師) 결응(決凝, 964-1053), 미륵대원(彌勒大院)에 정각국사(靜覺國師) 지겸(志謙, 1145-1229)과 고려시대 유일하게 여대사로 인정받은 진혜대사(眞慧大師) 성효(性曉, 1255-1324), 김생사에 마지막 화엄종계 국사인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 1307-1382) 등이 주석하였다. 특히 고려말 여말삼사(麗末三師)의 문도인 마지막 국사 환암 혼수(幻庵混修, 1320-1392)와 왕사 목암 찬영(木庵粲英, 1328-1390)이 청룡사와 억정사를 하산소(下山所)로 삼아 머물렀다.4) 그들의 문도 천봉 만우(千峯卍雨)와 죽암 선진(竹菴旋軫) 등도 충주 개천사와 억정사 등에 주석하였다(허흥식, 1990; 이철헌, 1994; 정영호, 1964·1968; 황인규, 1999·2003·2020).5) 본고는 충주 지역의 시대별 대표적인 주요 사찰에서 고승들이 전개한 불교사적 역할 및 의의를 밝혀보고자 한다.

Ⅱ. 고대의 주요 사찰-용두사, 창룡사, 김생사, 정토사

충주에는 반도의 중심 지역이며 요충지이다(정영호, 1996: 20). 충주에 불교가 언제 전래되었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다음에 소재하는 두 문화유산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즉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의 마애불상, 마애불상군(서영일, 2002: 90; 정영호, 1980: 16-24; 충청북도, 1982: 562-567)과 보련사지(寶蓮寺址)에서 출토된 건흥 5년명(建興五年銘) 금동 석가삼존불(金銅 釋迦三尊佛) 광배(光背)(충청북도, 1982: 554)6)를 통해 그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그후 용두사(龍頭寺)와 창룡사와 탑평리 7층 석탑이 돋보인다. 용두사는 삼국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 존속되다가 18세기 이전 폐사되었다.7) 가정 이곡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유항 한수, 포은 정몽주 등이 지은 시가 남아 있는데, 당시 용두사 주지 도생(道生)과 교유하였다.8) 용두사지는 동량면 말흘산 밑에 대전리에 있는데, ‘절골’이라고 불리고 있다(충청북도, 1982: 569).

창룡사(蒼龍寺)는 남산의 관록인 직동에 있었던 사찰이다. 1932년에 지어진 『창룡사 성불봉안기(蒼龍寺 聖佛奉安記)』에 의하면 원효(元曉) 성사가 창건했으며, 고려말 나옹(懶翁)과 조선 중기 청허 휴정이 중수했다고 전한다(충청북도, 1982: 107). 영조 무렵까지 사세가 지속되다가9) 1870년(고종 7)에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재목을 지금의 세무서 터에 군사시설인 수비청(守備廳)을 세우기 위해 창룡사의 법당을 헐어버렸다고 한다(충청북도, 1982: 569).10)

중원 탑평리 7층 석탑(국보 제6호)은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민을 화합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중심 지역인 충주에 세웠다(최근영, 1997). 건축 양식상 문성왕 때인 9세기 전반기에 세워진11) 현존하는 신라 석탑으로는 규모가 크고 가장 높은 탑이다(12.86m). 신라시대에 조성되었을 충주 원평리 석조 여래입상과 충주 원평리 3층 석탑이 있는(정영호, 1996: 176-177)12) 원평리(院坪里) 사지(寺址)는 ‘미륵댕이’로 불리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 같으며, 그 주변에는 근래에 건립된 미륵정사가 있다.

신라 통일기에 창건한 사찰로는 김생사(金生寺)와 정토사(淨土寺) 등이 있다. 김생(金生, 711-791)이 생애 만년인 8세기 후반에 충주 금가면 유송리 한강 변에 창건한 사찰이며, 조선 후기 폐사되었다. 고려말 문인 김구용과 이집, 정몽주, 권근 등의 시가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화엄종계 마지막 국사 설산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도 왕사로 책봉 전에 주석하였다.13) 천희의 손제자벌인 화엄종 고승 월창 의침(月窓義砧)과 총상인(聰上人)이 주석한 바 있다.14) 이러한 고승이 머물렀기 때문인지 조선초 1426년(세종 8)에는 조선초 충주의 주요 사찰인 청룡사(靑龍寺)와 용두사(龍頭寺), 엄정사(嚴政寺), 억정사(億政寺), 향림사(香林寺)와 더불어 김생사(金生寺)의 사전지(寺田地)가 침탈당하기도 하였다.15) 그후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의 생존시에 이미 황폐화되어갔다.16) 18세기 중엽에 호서지방 승려 공오(空悟)가 중수하였으나17), 18세기 말에 폐사된 듯하다.18)

정토사(일명 개천사)는 제천천이 남한강과 합류하는 동량면 하천리에 있었다.19)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신라 말 고려 초기에 고승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玄暉, 879-941)와 홍법국사(弘法國師)가 주석하였던 큰 사찰이었다. 고려초 현휘는 906년(효공왕 10)에 당으로 건너가 사천성(四川省) 구봉산(九峰山) 도건(道乾)에게 선을 수학하고, 924년(태조 7)에 귀국했다고 한다. 현휘가 귀국하자 태조는 특사를 파견하여 영접하고 국사로 예우하였으며, 정토사에 주석하게 하였다(김두진, 2006: 145-149).20) 왕건은 충주 지방의 유력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을 제3비 신명순성태후(神明順成太后)를 맞이했다.21) 건국 초기에 호족들이 득세하는 혼란한 정세 속에서 유씨 소생의 두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으며, 낙랑공주는 경순왕 김부(金傅, 897-978)의 비로 보냈다.22)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의 음기를 보면, 중앙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고 불교 선종(禪宗)에 의한 도관(道官)과 호족들에 의한 속관(俗官)이 지배하는 도·속(道·俗)의 2관부(官府)가 있었다. 속관의 제1인자로 유권열이었다.

홍법국사가 저장성[浙江省], 푸젠성[福建省] 지방 등을 유력하고 귀국 후 개경의 보제사와 봉은사 등에서 주석하였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지냈고, 목종 때 ‘국사’의 칭호를 받았다. 대선사로서 국사에 책봉되어 충주 개천산 정토사(淨土寺)를 하산소로 삼아 만년 몇 년 보내다가 입적하였다.23) 뒤에 언급한 바와 같이 개천사로 사명이 바뀌어 조선 중기 폐사되었다.24)

Ⅲ. 고려 전기의 주요 사찰-숭선사, 죽장사, 의림사, 대원사, 오갑사

충주의 고려 전기에 창건된 중요 사찰은 숭선사(崇善寺), 죽장사(竹杖寺), 의람사(義林寺), 대원사(大院寺), 오갑사(烏岬寺) 등이 있다.

숭선사는 954년(광종 5) 광종이 어머니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김철웅, 2006: 41-45)25) 고향 충주 신니면에 창건하였다. 이에 앞서 951년에 태조를 위해 개경 남쪽에 봉은사(奉恩寺)를 창건하고, 동쪽 성 밖에 어머니를 위해 불일사(佛日寺)를 창건한 바 있다.26) 「개성 영통사대각국사비」 음기에는 숭선사 주지 수좌 몽영(夢英)이 공사에 참여했다고 하며, 「개성 흥왕사원명국사묘지명」에는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儼)이 1119년에 흥왕사 주지를 하다가 숭선사 주지로 있었다고 전한다(정제규, 2006: 46-50).27) 고려말에 김구용과 권근 등 문집에 그 존재가 보이다가 16세기 이후 폐사된 듯하다(충청북도, 1982: 551-552).28)

죽장사(竹杖寺)는 금봉산에 있었다. 현대인 1986년에 석종사(釋宗寺)가 창건되었다(충주시지편찬위원회, 2001: 480). 1289년(충렬왕 15)에 제작된 죽장사 기축명 동종(竹丈寺 己丑銘 銅鐘)이 있다. 죽장사가 왕실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1170년(의종 24) 죽장사에서 狼星(시리우스)인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고 한다(이태형, 2021).29) 1170년(의종 24)에 서해도(西海道) 안찰사(按察使)가 노인성이 나타났다고 조정에 급히 보고하였다.30) 같은 해 4월 의종은 내전(內殿)에서 몸소 노인성에게 제사를 지냈다. 충주목사도 죽장사에서 노인성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그날 저녁에 수성(壽星)이 나타났다가 3헌(三獻)에 이르러 사라졌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의종이 크게 기뻐하고 백관들은 하례하였다.31) 그리고 태자는 복원궁(福源宮)에서 제사를 지냈고, 허홍재(許洪材)는 상춘정(賞春亭)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좌승선 김돈중(金敦中)은 충주 죽장사에서 제사를 지냈다.32) 이러한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 즈음에 충주 죽장사에서 나타났다고 하는 노인성은 죽장사가 왕실을 비롯한 불교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로부터 20여년 후인 명종대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다. 즉 충주 숭선사지에서 와편 “대정 22년(大定 二十二年)”(1182, 명종 12)(충청대학 박물관·충주시, 2006: 48)의 기록이나, 의림사지에 나온 청동 반자 “대정 삼십년(大定 三十年)”(1190, 명종 20), 오갑사지(烏岬寺址)의 와편명 “명창3년 임자 7월○○오갑사 지사대○○○(明昌三年 壬子 七月 ◯◯ 烏岬寺 知事大◯◯◯◯◯◯)”(충청북도, 1982: 556)과 중원 미륵대원사지의 와편명 “명창3년금당개개○○○대원사주지대사○와입비○◯◯◯◯◯◯사월현조(明昌三年金堂改盖◯◯◯大院寺住持大師◯瓦立碑◯◯◯◯◯◯四月現造)” 등을 통해 알 수 있다(정제규, 2006: 49-55). 그 가운데 의림사지에 나온 청동 반자 “대정(大定) 30년”(1190, 명종 20)의 기록으로 보아 의림사에 불사가 있었다고 하겠다.33) 의림사는 1188년(명종 18)에 청동 반자를 도둑맞아 1190년(명종 20) 신도들이 인연을 맺어 주조하여 매달았다. 여기에 참여한 인물은 부호장 유장보(劉張輔) 승려 관심(冠心)과 법명(法明)이며, 사찰의 주지는 유중(惟中)이었다(충청대학교 박물관, 2002: 21).34)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1070∼1159)의 비문에 의하면 탄연이 1104년(숙종 9)에 대선 승과에 합격하여 왕사 책봉전 의림사에 주석하였다.35) 의림사는 대궐터’ 또는 ‘이궁지(離宮址)’라고도 불렸는데, 1369년(공민왕 15) 8월 충주에 이궁을 건설하였다.36)

그리고 충주 상모면에 있는 미륵대원사지(彌勒大院寺址)를 『삼국유사』에는 ‘미륵대원 동쪽에 있는 령이 계립령이다.’37)라고 하였다. 고려 초기 석굴사원으로서 우리나라 석굴사원 계보를 잇는 중요한 유적이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신라의 재기를 뜻하며 창건하였다고 한다. 1978년 1차 발굴 조사에서 “대원사주지대사(大院寺住持大師)”명(銘) 와편이 발견되면서 “대원사(大院寺)”라 추정되었으며, “미륵당(彌勒堂)”, “미륵초당(彌勒堂草)”, “원전(院主)”명 와편이 출토되어 미륵 신앙계이자 원(院)을 겸하는 사찰이었다.38)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미륵원에 묵으면서 주천(酒饌)을 열은 적이 있다.39) 정각국사(靜覺國師) 지겸(志謙, 1145-1229)이 국사 책봉 전에 중원 광수원(廣水院) 법회에 참여하였는데40), 광수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미륵원을 지칭한다고 하였다.41) 특히 1231년(고종 18) 미륵대원의 승려 우본(牛本)이 충주 관노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1231년 12월에 충주전투에서 충주부사 우종주와 판관 우홍익이 몽고군이 침략하자 양잔 등과 함께 달아났다. 성에 남은 노군(奴軍)과 잡류(雜類)들이 싸워 이겼다. 그런데 몽고군이 약탈해 간 은그릇을 노군 잡류의 짓이라고 모함을 하였다. 충주 노군 등이 분노하여 봉기하였다.42) 유홍익의 요청에 안무별감을 편성해 보냈고 노군 도령 지광수와 우본이 대원사 주지가 되었다. 승려 우본은 고종 때 전투부대의 지휘관 도령(都令) 영사(令史)었다가43) 충주 노군으로 참전한 공로로 충주 대원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며, 우본은 삼중대사(三重大師)라는 승계를 받았다.44) 그해 8월에 3군 병사마사 이자성을 보내 지도자 승려 우본과 충주노군을 토벌하였는데, 이 때 순교하였다.45) 그 후 고려시대 유일의 여대사(女大師)로 불린 진혜대사(眞慧大師) 성효(性曉, 1255-1324)는 1302년 중국 임제종 고승 무(無)선사와 철산소경(鐵山紹瓊)이 오자 법요를 들은 후에 1311년(충선왕 복위 3) 여러 산천을 순례하는 중에 충주 미륵대원에 올라 장육석(丈六石)에 예를 올렸다.46)

Ⅳ. 고려 후기의 주요 사찰-청룡사, 개천사, 억정사, 엄정사, 향림사

충주의 고려 후기 사찰로 돋보이는 것은 청룡사(靑龍寺), 개천사(開天寺), 억정사(億政寺), 엄정사(嚴政寺), 향림사(香林寺) 등이다.

환암은 1357년(공민왕 6)에 소태면 오량리에 있었던(충주박물관, 2000: 169-183)47) 청룡사 서쪽 산기슭에 연회암(宴晦菴)을 짓고 은거하였다(충주산업대학교 박물관, 1996: 25).

忠州 靑龍寺로 갔다. 청룡사 서쪽 산기슭에서 시내를 따라 올라가면 산봉우리가 사방에 둘러 있고, 주위가 고요한 옛 집터가 있는데, 선사께서 몸소 목재와 돌을 날라다가 기탄없이 경영하여 일이 완성되자 宴晦菴이란 편액을 걸었으니, 대개 그 자신의 心迹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 무오년(1378, 우왕 4)에 雉岳山으로부터 宴晦菴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문 앞에 손이 찾아오자 선사께서는 곧 침실로 들어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그 손은 과연 中使[內侍]였다. 선사에게 光巖寺를 맡아 달라고 청하였는데, 선사가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끝내 나왔다. 48)

1378년(우왕 4) 치악산에서 다시 연회암으로 돌아왔다. 그해에 청룡사에서 환암의 문도 만회(萬恢)와 상이(尙侇) 등과 함께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49)과 『선림보훈』(박문열, 2017: 34)50)을 간행하였다. 개성 광암사 주지를 한 후 청룡사로 돌아와 1379년 8월에는 환암의 문도 승준(僧俊)과 만회로 하여금 『호법론』을 간행하게 하였다(허흥식, 1990; 이철헌, 1994; 곽승훈, 2011: 177-186; 황인규, 2020: 133-134).51) 다시 왕명으로 광암사 주지를 3년간 하고 1381년 다시 청룡사로 돌아와 환암의 문도 담여(淡如)와 각눌(覺訥) 등에게 『선종영가집』을 개판하게 하였다.52) 이렇듯 환암은 공양왕이 즉위하자 다시 국사로 책봉되고, 청룡사 연회암을 하산소로 삼았다. 문인 이색(李穡, 1328-1396)의 나옹행장53)과 『목은시고(牧隱詩藁)』에는 청룡사와 관련해 지은 시가 있다.54) 이러한 불서들을 간행하여 불교를 수호하고 선풍을 진작하고자 하였다(황인규, 2020: 133-134).55) 1392년 7월 조선이 건국되자 축하 표문을 올려고 청룡사로 이주하였다. 그해 9월 연회암에 다비하고 12월 청룡사에서 하관하였다.

또한 청룡사의 승려 정순(正恂)과 함께 세종대 태종의 후궁 신녕궁주 신씨가 금자 법화경을 사경하였다.56) 세종대 억불시책에 의하여 세종대 충주의 김생사와 용두사, 엄정사, 억정사, 향림사 등과 함께 사찰 전지를 침탈당하기도 하였다.57) 조선말기 민대룡(閔大龍)이 사찰 터에 묘를 쓰기 위해서 사람을 시켜 절에 불을 냈다고 한다.58)

찬영과 같은 해인 1383년 국사가 된 환암은 개천사를 하산소로 삼았다.

(1383년, 우왕 6) 여름 4월 초1일 갑술에 왕이 相臣 禹仁烈 등에게 御書ㆍ印章ㆍ法服ㆍ禮幣를 받들어 보내 선사가 계신 연회암에 나와서 國師로 책봉하는 동시, 曹溪宗師禪敎都摠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의 존호를 올리게 하고, 충주의 開天寺로 상주하는 곳을 삼았다. … 왕이 이르기를, “개천사는 선사께서 끝까지 머물러 있어 그 음덕을 입을 곳이요, 광암사는 내가 청하여 演法하게 한 곳이니, 둘 다 겸한들 무엇이 해로우랴.”하므로, 선사께서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 무진년(1388, 우왕 14) 여름에 왕이 외지에서 손위하고 어린 임금(창왕을 가리킴)이 그 뒤를 계승하자, 선사께서 개천사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창왕이 특별히 사람을 시켜 護行하게 하였고, 기사년 겨울에 恭讓君이 즉위하자, 表文을 올리며 印을 봉하여 조정에 드리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는데, 몇 달 안 되어 다시 國師로 봉하고 사람을 보내 개천사로 도로 모셔오게 하였다.59)

환암은 1384년 왜구의 침탈로 개성 광암사에 피신하여 왕실 불사를 주관하고,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개천사로 다시 돌아왔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다시 국사로 책봉되어 개천사로 돌아왔다. 개천사(開天寺)는 충주시 동량면 정토산에 있던 정토사이다. 고려 중기이후 개천사로 불리다가60) 고려말 왜구의 침탈로 고려실록이 보관되었으며, 조선초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과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이 있다.61) 문도 천봉 만우(千峯卍雨) 등도 충주 개천사와 억정사 등에 주석하였다. 고려말 문인 이 담선사(曇禪師)와 환암 혼수의 문도인 잠시자(岑侍者)와 이색, 이숭인 등과 교유하였다.62) 개천사는 조선 중기이후 퇴락하여 영조, 정조 연간에는 이미 사찰이 폐사된 듯하다(車勇杰, 1986: 23-25).63)

억정사(億政寺)는 엄정면 괴동리에 있었다(충북대학교 중원문화재연구소, 1998: 46).64) 고려말 내원당 감주를 지낸 죽암 선진(竹菴旋軫)이 주석하였고65), 대지국사(大智國師) 찬영(粲英, 1328∼1390)이 주석한 사찰이다.

찬영이 1385년(우왕 11)에 억정사에서 은거하다가 입적하였고, 이후 1393년(조선 태조 2)에 승탑과 탑비가 세워졌다(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571-573).

다음 해 2월 王이 專使를 보내서 護行하여 스님을 다시 億政寺로 모셨다. 恭讓君이 卽位한 다음 해인 庚午年에 謙遜한 말로 편지를 써서 사신을 보내어 京城으로 맞이하고 國師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당시 臺諫으로부터 異端인 佛敎人을 국사로 모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배척하는 上疏가 있었다. 스님은 이 일을 알고 강력히 거절하였다. … 또 中使를 시켜서 香을 하사하고 護行토록 하였으나, 스님이 이르기를 “나의 자취는 흐르는 물과 같고 野人의 家風이므로 모실 必要가 없거늘 主上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拳拳하며 이처럼 극진히 보살펴 주시는가”라 하고 드디어 億政寺로 가서 조용히 聖胎를 頤養하였다. … 스님은 병을 얻어 그 해 6월 28일 大衆에게 … 말이 끝나자 마자 北쪽으로 머리를 向하고 右脇으로 西쪽을 보면서 누워서 조용히 入寂하였다. 화장을 마치고 億政寺의 東쪽 언덕에 탑을 세우고 遺骨을 봉안하였다.66)

마지막 왕사 찬영이 주석하였던 억정사는 조선초인 1398년(태조 7) 중흥사와 함께 전조(田租)의 납세를 면제받았고67), 1407년(태종 7)에 88개의 명찰을 새로 선정해 기존의 자복사를 대체하였는데, 충주의 엄정사가 천태종 자복사(資福寺) 43소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68)

조선초 선교양종 36사 가운데 보련사(寶蓮寺)가 교종 소속으로 지정되었으며, 성종대에도 왕실원당인 장의사가 신륵사와 더불어 경제적 대우를 받은 사찰이다.69) 세종대 70명의 승려가 머무는 사찰로 제한하고 있지만70), 고려말에는 700여 명의 승려가 머무는 대찰이었다(충청북도, 1982: 554).71) 보련사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승려가 많아서 쌀 뜨물이 한강까지 흘러갔다고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폐사되었다.72)

세종대에 이르러 1426년(세종 8) 충주의 청룡사(靑龍寺)와 김생사(金生寺), 용두사(龍頭寺), 향림사(香林寺) 등의 사찰과 함께 사원전이 침탈당하기도 하였다.73) 또한 엄정사(嚴政寺) 승려 해신(海信)과 전 주지 해명(海明), 억정사 전 주지 성조(性照)와 해순(海淳)이 함께 비행을 빌미삼아 탄압의 표적이 되었다.74) 그리고 충주시 엄정면에 있었던 향림사(香林寺) 등의 사찰과 함께 사원전을 침탈당하기도 하였다가 19세기 말 이후 폐사되었다(청주대학교 박물관, 2007: 70).75)

Ⅴ. 맺음말

이상으로 충주 지역의 각 시대별 주요 사찰에서 고승들이 전개한 불교사적 역할 및 의의를 살펴보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불교가 남하하면서 한반도의 중심 지역인 충주를 상징하는 탑이다. 삼국의 민의 화합을 기원하여 세운 불교계의 중앙탑이 있는데, 이는 화쟁의 상징인 원효가 세운 창룡사가 세워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명필로 알려진 김생과 승려 탄연이 한 때 주석한 사찰이 김생사와 의림사이다. 김생사에는 고려말 화엄종 마지막 고승 진각국사 천희와 의침이 머물렀다.

뿐만 아니라 고려 불교계의 고승 왕사와 국사가 주석한 충주 사찰은 법경대사 홍법국사가 말년에 주석한 정토사, 광종이 어머니 유씨를 위하여 창건한 숭선사에 원명국사 원융국사가 머물렀다. 의종대 충주 죽장사에 나타났다는 밤하늘 두 번째로 밝은 별인 시루우스(狼星) 노인성의 출몰은 고려 왕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나라 민중 항쟁사에 빛나는 승장 김윤후와 우본이 주석한 미륵대원사에는 고려시대 유일의 비구니 여대사 성효가 다녀가기도 하였다. 대궐터로 알려지고 공민왕대 충주 천도론이 제기되었던 의림사도 왕실에서 주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려말 왕사 대지국사 찬영이 말년에 머물렀던 억정사, 보각국사 혼수가 청룡사와 개천사 등에 주석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가운데 충주 불교에서 주목되는 사찰은, 고려초에 중국에서 선진 사상을 익히고 온 법경대사 현휘와 홍법대사가 주석하였다가 입적하여 추념 부도와 비가 세워진 충주 정토사이다. 특히 현휘는 선종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고자 하여 그 시대의 통합을 강조하였다. 광종은 어머니 유씨를 위하여 원당을 개경의 불일사와 더불어 고향인 충주의 숭선사를 왕실 원당으로 지정하여 그 이후 왕실에서 운영하였다. 몽골침략에 노비를 이끌고 항쟁하였던 우본은 대원사 주지였다. 고려말기 공민왕대 반제 자주의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은 공민왕 때 개혁의 일환으로 여러 천도 후보지가 제기되었는데 충주도 한 곳으로 부상하였는데 의림사로 비정되고 있다.

고려말 불교계를 태고 보우와 나옹 혜근 등 여말삼사가 주도하였다. 그들의 문도인 환암 혼수와 목암 찬영이 마지막 왕사와 국사로 책봉되어 충주 청룡사 혹은 개천사, 억정사에 머물렀으며, 추념 부도와 비가 세워졌다.

조선초에 이르러 충주 보련사가 자복사로 지정되기도 하였지만, 1426년(세종 8) 청룡사와 김생사, 용두사, 향림사 등의 사찰과 함께 사원전이 침탈당하기도 하였다. 결국 1424년 7개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면서 엄정사와 억정사의 승려의 비행을 빌미 삼아 전국적인 불교탄압을 자행하였다.

Notes

그동안 충주의 사찰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사찰지가 기본서가 되었다.

조선시대 지리지 충주에는 충주에 더 많은 사찰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곡사(靈鵠寺)는 대림산에 있다고 했는데 정심사의 터로 추정된다. 난초사(蘭草寺)와 동가섭사(東迦葉寺)는 가섭산에 있었다고 하였고 월악산에 있었던 제천의 덕주사도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조선후기 영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종당산에 있었던 禾巖寺와 靈鷲寺, 지내면에 백운사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조사사 돤 사찰은 23소, 사지 41소로 64소에 이르고 있다.(디지털충주문화대전 충주 사찰 사지: https://www.grandculture.net/chungju/) 그 외에 충주에 용산사와 천림사 등 더 많은 사찰도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촤근 연구에 의하면 충주 의림사 근처에 龍山寺가 있었다. “此身無恙寄忠州 何事縱橫涕泗流 白髮慈親忘惡子 應將一日作三秋.”(成石璘(1338-1423), 「壬申九月寓忠州龍山寺 示門生全有生」, 『獨谷集』 卷下, 詩,) 성석린은 조선이 건국되자 우현보와 이색의 일당으로 몰려 본향인 충주 용산사에 우거하였다. 1392년 9월에 문하생 전유생에 보여준 시이다. 용산사는 충주 용산동의 지명 기원이 된 龍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용산리는 현재의 용산동과 지현동, 문화동을 포괄한 지역이었다. 김희찬(2021) 그리고 김구용의 문집에 의하면 충주에 千林寺라는 사찰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驪江漁友到忠州 一曲纖歌散萬愁 誰會歡場殊有味 山僧容易出纏頭 雪厭中原夜氣淸 故人相會更多情 醉眠不覺君歸去 還有琵琶一曲聲.”(金九容(1338-1384), 「忠州千林寺 與李察訪飮酒大醉因睡 覺而此作」, 『惕若齋先生學吟集』 卷下, 詩).

李奎報, 「東國諸賢書訣評論序 幷贊(晉陽公令述)」, 『동국이상국후집』 卷11, 序.

권근, 「충주 靑龍寺 普覺國師碑」, 『조선금석총람』 하.; 『고려사』 권135, 신우열전, 우왕 9년 2월 ; 朴宜中, 「충주 億政寺 大智國師碑」, 『조선금석총람』 하; 『고려사』 권137, 신창 즉위년 6월.

본고는 필자의 기왕의 논문을 바탕으로 ‘혼수와 찬영 두 고승과 충주 하산소’라는 주제로 추가 보강하였다.

1914년에 ‘建興五年歲在丙辰 佛弟子淸信女 上部兒庵造釋迦像 … 一切衆生同此願”명 금동불 광배가 출토되어 광배와 금동불은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건흥’은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되며, ‘병진’은 596년으로 추정된다.

“龍頭寺在末訖山下 三國時北狄數侵乃創寺建塔禳之 有高麗 崔彦僞撰 僧法鏡慈燈塔碑….”(『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충청도 충주 불우) ; 『梵宇攷』 충청도 충주.

이곡, 「李生의 운을 써서 龍頭寺의 노승에게 부치다」, 『가정집』 권14, 古詩. ; 이색, 「龍頭寺의 住持 生公을 보내다.」, 『목은시고』 권18, 시 ; 이숭인, 「送道生上人歸忠州龍頭寺」, 『도은집』 권2, 시; 한수, 「送▣▣師歸忠州龍頭寺次韻」, 『柳巷詩集』 詩. ; 정몽주, 「次李遁村韻送龍頭講主」, 『포은집』 권2, 詩.

“蒼龍寺 在縣東五里金鳳山下.”(『여지도서』 상, 충청도 忠原 사찰) ; “창룡사, 在金鳳山.”(『범우고』 충청도 충주).

「蒼龍寺觀音像緣起文(1730); 「忠淸北道 忠州郡 南邊面 錦鳳山 蒼龍寺重建後佛準竝記」(1913) ; 「蒼龍寺聖佛奉安記」(1939). 충주 관아인 淸寧軒과 製錦堂에 엊혀진 기와는 창룡사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1984년 중수시에 명문 기와를 통해 확인되었다. 창룡사는 조병로에 의해 철거된 이후 요사 한 채만이 남아 있다가 1905년 신도 박씨가 현재의 요사를 중수했으며 1951년에 한동인 주지가 중창하고 1975년에 오도관 주지가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앞뜰에는 고려시대의 청석 다층탑이 남아 있다.

9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발생하는 초층 신받침의 수법 등 신구 양식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불상과 석탑, 석등으로 추정되는 석조물 등은 원위치가 아니다. 9세기 이후 고려시대에 크게 성행했던 철조 불상은 20여 구에 이르며, 상모면 미륵리의 석불 입상(보물 98호)을 비롯하여 석조 불상은 십수 구에 이른다.

“十九 登上品選 歷住金生 德泉 符仁 開泰等十餘寺”(이색,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조선금석총람』 상). 9세에 上品選에 합격하였으며, 그로부터 金生寺·德泉寺·符仁寺·開泰寺 등 10여 개 사찰을 두루 歷住하였다. “金生寺 住持 重大師 □□ 國□王師”(같은 비의 음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충청도 충주목 불우 김생사. : 李集(1327∼1387), 「送砧上人歸金生寺」, 『遁村雜詠』 五言律詩 ; 김구용, 「送砧上人歸金生寺」, 『惕若齋學吟集』 卷下 詩. ; 김구용, 「崇善寺 送聰上人歸金生寺」, 『惕若齋先生學吟集』 卷下 ; 權近(1352∼1409), 「送砧上人歸金生寺」, 『陽村集』 卷4, 詩.

“傳旨忠淸道監司 內忠州 靑龍金生龍頭嚴政億政香林等寺田地 爲人濫奪 而守令非徒不禁 雖有告訴 淹延不決 間或有知情指揮者 上項奪占人職姓名 與知情指揮掩延不決守令 推劾以聞 上聞孝寧大君家臣 奴子等 濫奪作弊 故有是命.”(『세종실록』 권32, 8년(1426) 5월 13일(병오)).

황준량이 단양군수를 지냈던 1557∼1559년 사이에 지은 詩로 추정된다. “臺前江水海茫茫 落日空山樹自蒼 天上瑤臺分物色 海中蓬島幻風光 淄澠無辨川空咽 翰墨留名寺已荒 黃鶴白雲仙不見 月明何處倒霞觴(達川味居第二 又有金生寺 故及之).”(黃俊良(1517∼1563), 「登彈琴臺 次周先生景遊」, 『錦溪集』 外集 卷2 詩).

“激電奇巖過 停雲古塔來 野禽巢始定 歸雁響空哀 名共沈碑水 形疑造字臺 高標猶獨秀 長想絶倫才.”(任相元(1638∼1697), 「金生寺塔」, 『恬軒集』 卷4, 詩);“湖西僧空悟方謀鳩材重建.”(李種徽(1731∼1797), 「金生寺重修記」, 『修山集』 卷3, 記).

“金生寺 在北津岸”(『충청도읍지』 충주목 불우);“今廢.”(『梵宇攷』충청도 충주, 금생사).;李圭景(1788∼1863), 「金生事實辨證說」, 『五洲衍文長箋散稿』 卷34. 김생과 관련된 유적지는 전국적으로 매우 알려져 있다, 그 중 봉화 청량사 경내에 있는 ‘김생굴’, 음성 상평리 원통산 북록에 있는 ‘김생암’, 청주 문의면 유덕리에 있는 ‘김생사지’와 본 사지가 유명하다.

절 터에서 출토된 瓦片에 ‘淨土寺’· ‘開天寺’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청주대학교박물관(2002). ; “忠原界也 舊有開天寺故名之云.”(『여지도서』 상, 충청도 청풍 형승) ; “開天寺碑 俗傳唐開元間 所立碑文剝落 不可讀 淨土山 在縣北三十三里 天登山來 一云開天山.”(『여지도서』 상 충청도 忠原 산천).

“上乃特遣使臣, 奉迎郊外, 寵榮之盛, 冠絶當時. 翌日延入九重, 降於三等, 虔心鑽仰, 待以國師. … 上, 事佛精勤, 深求親近, 仍于中州淨土蘭若, 請以住持.”(崔彦撝, 「淨土寺法鏡大師碑」, 조선총독부(1919), 『조선금석총람』).

『고려사』 권88, 후비열전 태조후비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태조와 충주 유씨 사이에서 태(泰)·요(堯, 3대 정종)·소(昭, 4대 광종)·문원대왕(文元大王) 정, 정증통국사(貞證通國師) 다섯 왕자와, 樂浪(安貞淑儀)과 흥방(興芳) 두 공주가 태어났다.“왕이 正殿에 나아와 백관을 모아놓고 예를 갖추어 맏딸 樂浪公主를 新羅王과 결혼을 시켰다.”(『고려사』 권2, 태조세가 18년 11월 22일(계축)) 「淨土寺法鏡大師碑」 陰記에 法鏡大師 玄暉의 제자로 비 건립에 참여한 道官과 俗官의 인물을 찾아진다. 蔡尙植(1982), 현휘 입적(941년)후 2년도 안된 943년(혜종 즉위년) 6월 5일에 세웠지만 음기는 944년(혜종 1) 6월 1일에 새겼다.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과 비는 1915년경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본래의 절터는 충주댐의 조성으로 수몰되고 법경대사자등탑비(보물 제17호)는 더 높은 곳으로 옮겨 놓았다.

손몽주, 「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碑」, 허흥식(1984), 『한국금석전문』 고중세 상, 아세아문화사.

고려말 문인 김구용과 이집 등이 충주 정토사에 머물러 시를 남기고 있다. 金九容(1338-1384), 「淨土蘭若夜吟」, 『惕若齋先生學吟集』 卷下, 詩.; 李集(1327-1387), 「淨土寺留別敬之」, 『遁村雜詠』 七言絶句. ; 李集(1327-1387), 「次敬之韻」, 『遁村雜詠』 七言絶句.

『고려사』 권2 광종세가 5년(954).

“創大奉恩寺于城南 爲太祖願堂 又創佛日寺于東郊 爲先妣劉氏願堂.”(『고려사』 권2, 광종세가 2년).

“自崇善寺赴講內庭經由.”(「浮石寺圓融國師碑」(1053), 『조선금석총람』 상 ;“崇善寺(住持首座夢英)(「開城靈通寺大覺國師碑」(1125), 『조선금석총람』 상 ;“詔住興王寺己亥因疾辭興王有 旨移住崇善寺”(「開城興王寺圓明國師墓誌銘」(1141), 『조선금석총람』 상.

“馬首相分暗愴情 回頭月岳更崢嶸 誰知一覺僧窓夢 猶聽琵琶腸斷聲.”(金九容(1338∼1384), 「彌勒院路上相別 宿崇善寺 奉寄牧伯相公」, 『若齋學吟集』 권하) ; 金九容, 「崇善寺 送聰上人歸金生寺」, 『若齋學吟集』 권하. 권근의 중형 화엄종 승려 二巳(『태종실록』 권10, 5년 12월 19일(신사))가 숭선사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自註 時伯氏宰淸州仲兄大師住淸州崇善寺)(權近(1352∼14090, 「送楊廣薛按廉 稱」, 『陽村集』 권3, 詩) 출토 명문 와편 가운데 “成化十五”(1479), “嘉靖二十九申亥”(1551), “嘉靖四十年辛酉”(1561), “萬曆己卯”(1579)銘 와편 등이 발굴되어 16세기까지 존재가 확인된다. 영조대 편찬된 『여지도서』 권상 충청도 忠原 坊里에는 신니곡면에 “崇善里”가 속해있다고 하며, 18세기 중반에 편찬되었을 『朝鮮地圖』 忠州에는 “崇善站”, 『大東輿地圖』(1861)와 1872년 「忠州牧地圖」에는 “崇善”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해방 후“崇善寺三寶”명 와편이 발견되어 숭선사 사명이 알려지게 되었다.

老人星祭는 수명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노인성에 드리는 도교 제례다. 노인성이란 「남극성」·「壽星」·「壽老人」·「남극노인」 등으로 불리는 별로 도교에서는 南斗라고 부른다. 충주 죽장사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충주 석종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정남 방향에는 낮은 산들이 있어 지평선 바로 위에 떠오른 노인성을 볼 수는 없다. 죽장사의 위치가 현재 알려진 위치와 다른 곳인지, 아니면 기록이 잘못된 것인지는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남쪽 지평선이 트인 곳에서는 3월 8일을 기준으로 저녁 8시를 전후해서 정남쪽 방향에서 잠깐 이 별을 볼 수 있다. 노인성은 예로부터 사람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해서 壽星으로 불렸고, 남쪽 지평선 바로 위에서 보인다고 해서 南極星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南極星, 南極老人星, 壽星, 南極壽星으로 불린다. 秋分에 인간의 장수를 담당한다고 하는 노인성에 제사를 지냈다. 노인성이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여겨 고려시대에는 雜祀, 조선시대에는 小祀로 규정하여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노인성은 워낙 보기 힘든 별이어서 이 별을 보면 운이 좋아 장수한다는 의미로 장수별로 알려지기도 했다. 밤하늘에서 두 번째로 밝은 노인성은 남반구에서는 쉽게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별이다. 서양에서는 용골자리의 으뜸별인 카노푸스(Canopus, -0.65등급)로 알려진 노인성은 온 하늘에서 가장 밝은 시리우스(-1.45등급)가 남쪽 하늘에 가장 높이 떴을 때 그 아래에서 찾을 수 있다.

“狼星 見于南極 西海道按察使朴純嘏 以爲老人星 馳奏之.”(『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2월 갑신)).

“親醮老人星于內殿 忠州牧副使崔光鈞奏 前月二十八日 祭老人星于竹杖寺 其夕 壽星見 至三獻乃沒 王大喜 百官稱賀.”(『고려사』 권19, 의종세가 24년 4월 4일(갑신)) : 『고려사』 권48, 천문지 月五星犯星變 : 『고려사절요』 권11, 의종 4월 ; “竹杖菴邊古樹攢 石槃猶鎭壽星壇 聖神今日輝南極 負海人將指點看(府西五里 有竹杖寺 麗時 祭南極老人星于此)(김종직, 「允了作善山地理圖題十絶其上」, 『점필재집』 시집 권13, 시).

“노인성[壽星]이 다시 나타난 것과 관련하여 太子에게 명하여 福源宮에서 醮祭를 지내게 하고, 平章事 許洪材는 賞春亭에서 초제를 지내게 하였으며, 左承宣 金敦中은 충주의 竹杖寺에서 초제를 지내게 하였다.”(『고려사』 권19, 의종세가 24년 4월 25일(을사)).

의림사지는 1989년 충주 대원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명문이 새겨진 청동반자가 출토되면서 사명이 확인되었다. 충북 충주 안림동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름 45.0cm이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반적인 형태의 고려시대 靑銅金鼓이다. 금고는 금구(金口), 금구(禁口), 반자(盤子, 飯子, 般子, 鉡子), 판자(判子)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명문에는 1190년(명종 20, 大定 30) 3월 충주목(忠州牧)의 선의림사(禪義林寺)에서 2년 전에 도둑맞은 금고를 대신하여 만들어 매단 것으로 동량(棟梁) 등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忠州牧 禪 義林寺 戊申年(1188) 盜取因集衆緣 鑄成 懸排時 大定三十年 庚戌(1190) 三月日記 棟梁 副戶長 劉張輔 道人 冠心 法明 住持 重大師 惟中”(황수영, 1999, 혜안).

“肅王踐祚 徵赴輦 十年大遼乾統四年甲申 赴大選復中 是年命住中原義林寺”(李之茂, 「斷俗寺大鑑國師塔碑」, 허흥식, 1984, 아세아문화사), 의림사 근처에 용산사가 있었다. 성석린, 「壬申九月寓忠州龍山寺 示門生全有生」, 『獨谷集』 卷下, 詩. 용산사는 충주 용산동의 지명 기원이 된 龍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용산리는 현재의 용산동과 지현동, 문화동을 포괄한 지역이었다.

“於平壤忠州 皆作離宮及公主魂殿 儲峙供頓 民甚苦之.”(『고려사』 권41, 공민왕세가 18년 8월, 을축) ; “後仁任坐都堂 議遷都曰 今倭謀寇京都 忠州去海遠 四方道路適均宜 預遷太祖眞于忠州 以松都爲防戍之地.”(『고려사』 권126, 이인임열전) ; “旽密令春富 請移都忠州.”(『고려사』 권132, 신돈열전).

“立峴은 지금의 彌勒大院의 동쪽 고개가 이곳이다.”(『삼국유사』 권1, 왕력 阿達羅尼叱今). 大院嶺(하늘재·계립령) 북록에 위치한 미륵대원이라고도 불린다. 2011년 7월 28일에 ‘중원 미륵리 사지’에서 ‘중원 彌勒大院址’로, 2011년 7월 충주 미륵대원지로 변경되었다. 晦齋 李彦迪(1491-1553)은 『晦齋集』에서는 미륵리 사지 석불입상과 석실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곳을 ‘오래된 역원’(“忠西四十里 古院有彌勒 屹立繚垣墻 身長數十尺” (「西征時」, 『晦齋集』 卷1 古詩)이라고 하였다.

“明昌三年金堂改盖◯◯◯大院寺住持大師◯瓦立碑◯◯◯◯◯◯四月現造”명 와편이 발견되면서 대원사로 알려졌다. 절 터에는 석불 입상(보물 제96호), 5층 석탑(보물 제95호), 석등, 3층 석탑및 귀부, 당간지주 등 석조 유물이 있다.

李奎報(1168∼1241), 「十九日 宿彌勒院 有僧素所未識 置酒饌慰訊 以詩謝之」, 『동국이상국전집』 권6, 古律詩 92수.

林椿(1150∼1190), 「送志謙上人赴中原廣修院法會序」, 『西河集』 卷五, 序 : 『동문선』 권83, 序, “今因赴廣修院法會.”

“彌勒院 주 서쪽 50리에 있다. 일명 廣修라고도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충청도 충주목 驛院) ; “주 서쪽 50리에 있다. 일명 廣修院이라고 한다.”(『동국여지지』 권3, 충청도 우역 彌勒院). 역원 기능을 하는 광수원과 불교 신행의 大院寺가 함께 했던 공간이었다.

『고려사절요』 권16, 고종 19년 1월.

“僧氏 ; 『씨족서』에 "僧 牛本은 高宗 때에 都領令史였다."(李德懋, 「新羅ㆍ高句麗ㆍ百濟ㆍ高麗의 기이한 姓」, 『청장관전서』 권57, 盎葉記 4).

“忠州奴軍賊魁 令史池光守僧牛本來 怡褒賞 以光守補校尉 牛本爲忠州大院寺主 加三重.”(『고려사』 권129 최충헌열전 최이) : “安撫別監 朴文秀還自忠州 金公鼎留州以待平定 奴軍都領 令史 池光守僧牛本等赴京 崔瑀大加褒賞 以光守補校尉 以牛本爲忠州 大院寺主.”(『고려사절요』 권16, 고종 19년 1월 26일(정미)).

『고려사』 권103, 이자성열전. 그 후 1253년 10월 승려 김윤후가 忠州山城防護別監이 되어 몽고 장수 아무칸의 공격에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고려사』 권103, 김윤후열전.

“越壬寅無禪師 自江淮航而來 夫人慕見始聞法要 甲辰鐵山南來施化次受大乘戒 辛亥騰裝之彌勒大院禮丈六石驅歷諸山至涅槃淸凉二山聖跡”(金開物, 「追封卞韓國大夫人眞慧大師行陽川郡夫人許氏墓誌銘幷序」(1324), 「雜同散異』 4). 장육은 대체로 4∼6m 높이의 불상을 가리킨다.

‘天龍’, ‘天用’, ‘大天龍寺’ 등의 명문 와편이 발견되어 천룡산성과 관련된 천룡사지로 보았다.

權近, 「有明朝鮮國普覺國師碑銘 幷序」, 『陽村集』 卷37, 碑銘類.

“병진년(1376년) 安居가 끝나갈 때에 幻庵의 설법을 듣고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하는 이가 있어서 이 책을 설했는데, 청중 가운데 高息機거사가 감동하였다.”(『金剛般若經疏論纂要助顯錄』 跋文). 이 책의 간행 광포를 희망함에 따라 刊費를 보시했으므로 제자 万恢 등에게 맡겨 판각했다. “宣光八年戊午 二月上旬 幻菴比丘無作書 于宴晦菴”(『金剛般若經疏論纂要助顯錄』 跋文).

『禪林寶訓』의 ‘刊行秩’에 의하면, ‘兩街의 了庵 行齊(1328-?) 老禪師께서 그중의 1부를 求得하여 (보고는) 일찍이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라 감탄하며 門人 尙偉禪師에게 板刻하여 널리 流布할 것을 付囑한 것이니, 幻庵은 그 末尾에 몇 마디 語句로 題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刊行秩」에 의하면 忠州 靑龍寺版 「禪林寶訓」의 板刻은 尚偉禪師(?-?)와 万恢禪師(?-?)의 募縁과 優婆塞) 高息機(?-?)와 優婆夷 崔省縁(?-?)의 助縁으로 造成되었으며, 그 造成된 木板은 忠州 青龍寺에 서 처음으로 留板되었다. 즉, “刊行秩 ‘右寶訓者 宋之高僧 妙喜竹菴 愍諸末學 多求聲名 不修道德 共集尊宿之高談 叢林之遺訓 可以警衆者 析爲二卷 目之曰禪林寶訓 兩街了庵行齊公 得之一部 歎未曾有 囑門人尙偉禪者 募緣彫板 廣今流布 幻菴爲題數語于末 宣光八年戊午二月書于宴晦菴 募緣 商偉 万恢 緣優婆塞高 息機優婆夷崔 省緣 留板忠州靑龍禪寺.”(『禪林寶訓』 卷尾).

“宋丞相張天覺護法論一篇 殆萬餘言釋僧俊以幻菴普濟大禪師之命 重刊于忠之靑龍寺 旣訖 携墨本 求予跋其尾 予觀其辭 率不可解然喜闢韓 歐氏 韓 歐氏吾所師也 吾實駭焉 雖然 五濁惡世 爲善未必福 爲惡 未必禍 非佛何所歸哉 嗚呼 護法論 宜其盛行於世也.”(李穡, 「跋護法論」, 『牧隱文藁』 卷30 : 『東文選』 卷102, 跋).

“蒼龍辛酉 … 春月日 … 忠州靑龍寺留板.”(『선종영가집』).

“又忠州靑龍寺 僧玄珣 得碎齒歸本寺 焚香禱之 即得七粒”(「나옹행장」(국립중앙도서관본)).

이색, 「戲贈鄭簽書年兄 用前韻」, 『목은시고』 권8, 詩; 이색, 「絶磵倫公游靑龍回。以瓠蘆盛蓴菜相遺。又以幻菴書來投。喜甚。吟成一首」, 『목은시고』 권31, 詩.

또한 청룡사에서 『天地宴陽水陵齊儀纂要(1612), 『妙法蓮華經』(1614) 등의 판본이 개판되었다.

『세종실록』 권16, 4년 6월 21일(병오) ; 『광해군일기』[중초본] 권117, 9년 7월 15일(정축).

『세종실록』 권32, 8년 5월 13일(병오) ; 『세종실록』 권34, 8년 10월 3일(계해).

『여지도서』, 『범우고』, 『審理錄』, 『충청도읍지』, 『靑邱圖』에는 청룡사가 존재하지만 1871년에 간행된 『湖西邑誌』에서 폐사되었다. “在縣北五十里省台陽面.” ; “在州北五十里”(『梵宇攷』 忠淸道 忠州); “在州北五十里省台陽面.”(『忠淸都邑地』 忠州牧 寺刹) ; 『靑邱圖』 11層17板 ; “在州北五十里省台陽面今廢”( 『湖西邑誌』 忠州 寺刹) ; 『輿地圖書』 上卷 忠淸道 忠原 寺刹.

權近, 「有明朝鮮國普覺國師碑銘 幷序」, 『陽村集』 卷37, 碑銘類.

“정토사(淨土寺)”와 “개천사(開天寺)” 쓰인 명문 기와가 발견되었다.

권근, 「送裴仲員修撰曬史七長寺序 規」, 『양촌집』 권16, 序類 : 『동문선』 권90, 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8, 경기 죽산현 불우『고려사』 우왕열전 7년 7월. ; 『고려사』 우왕열전 9년 6월.;“又麗史辛禑七年 倭入丑山島 欲寇安東等處 甫州普門寺所藏史籍 移置忠州 開天寺 普門寺今有可徵處否.”(柳徽文(1773-1827), 「答申景學」, 『好古窩集』 卷5, 書)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珍島 및 내륙으로 옮겨져 공양왕 2년(1390) 忠州 開天寺가 조선의 충주사고가 되었다.

이색, 「得同甲開天曇禪師書茶」, 『목은시고』 권14, 시. ; 이색, 「代書答開天行齋禪師寄茶走筆」, 『牧隱詩藁』 권18, 시. ; 이색, 「奉簡開天同甲」, 『목은시고』 권19, 詩. ; 이색, 「開天曇師送紅杮」, 『목은시고』 권26, 詩. ; 이색, 「岑侍者告歸開天 走筆寄呈幻菴國師」, 『목은시고』 권35, 咸昌吟. ; 이색, 「傳燈錄序」, 『牧隱文藁卷』 권7, 序. ; 이숭인, 「送權使君之任忠州 州北有開天寺 是僕舊遊之地」, 『도은집』 권2, 시. ; 이숭인, 「偶唫錄奉千峯方外契」, 『도은집』 권2, 시.; 權近, 「有明朝鮮國普覺國師碑銘 幷序」, 『陽村集』 卷37, 碑銘類.

“凈土山開天寺有 (缺) 碑”(趙根(1631-1690), 「楓溪漫錄」, 『損菴集』 卷7, 雜錄) ; “開天山(案天燈山在忠州北四十里 山有開天寺碑 疑卽此山 又案先生答黃仲擧書云 移三徑於月岳之下 據此則天山字 但泛稱隱遯之意)”(柳道源(1721-1791), 「與具景瑞」, 『退溪集攷證』 卷8, 第五卷 書) ; “忠州開天內村開天寺碑 晉天福年間所立.”(李德懋(1741-1793), 「羅麗石刻」, 『靑莊館全書』 卷69, 寒竹堂涉筆 下) ; “天燈山碑(在忠州北四十里 一云開天寺碑 俗傳唐開元間所立 文剝落不可讀.) 龍頭寺碑(在忠州未訖山下 卽高麗崔彦撝所撰僧慈燈塔碑)”(成海應(1760-1839), 「高麗碑」, 『硏經齋全集外集』 卷61, 筆記類 蘭室譚叢), ;“忠原界也 舊有開天寺故名之云.”(『여지도서』 상, 충청도 청풍 형승), ; “開天寺碑俗傳唐開元間所立碑文剝落不可讀淨土山在縣北三十三里天登山來一云開天山.”(『여지도서』 상 충청도 忠原 산천,); “開天寺在淨土山下 今廢”

억정사지는 빌미산의 남동쪽의 ‘절골’과 ‘승골’이라고 불리는 골짜기 사이에 있으며, 북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에는 경종대왕태실이 있다.

이색, 「判曺溪事竹菴軫公 退院歸住所億政寺留岩串 以船若湯蔬菜五星 來慰吾三黜也 新亭適成 共坐移日而去」, 『목은시고』 권35, 衿州吟. ; 이색, 「送億政禪軫大禪師」, 『목은시고』 권18, 시.

朴宜中, 「忠州 億政寺大智國師智鑑圓明塔碑」, 『조선금총람』 하.

“上命都堂 特免重興億正二寺田租公.”(『태조실록』 권13, 7년 1월 24일(壬申)).

“議政府請以名刹 代諸州資福 從之 啓曰 去年寺社革去之時 自三韓以來大伽藍 反在汰去之例 亡廢寺社 差下住持者 容或有之 僧徒豈無怨咨之心 若擇山水勝處大伽藍 以代亡廢寺院 則庶使僧徒得居止之處 於是 諸州資福寺 皆代以名刹 … 天台宗 忠州 嚴正寺.”(『태종실록』 권14, 7년 12월 2일(辛巳)).

“傳旨戶曹 寶蓮寺位田一百四十結及藏義寺位田內一百結 移給神勒寺 又每春秋給鹽二十碩 正因寺春秋給鹽五碩.”(『성종실록』 권45, 5년 7월 15일(戊辰)).

“禮曹啓 … 敎宗屬寺十八 田三千七百結 … 忠州 寶蓮寺元屬田八十結 今加給七十結 居僧七十.”(『세종실록』 권24, 6년 4월 5일(庚戌)): “寶蓮寺(屬敎宗, 給田一百五十結)(『세종실록』 권149, 地理志 忠淸道 忠州牧). 조선초 사사혁거시 고려말의 1/10로 축소하였다고 한다.

보련산에는 ‘도둑 절터’와 ‘붉은 절터’, ‘연하동 부도골 절터’라고 불리는 보련사지로 추정하고 있다.

“寶蓮寺 在天龍寺.”(『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충주목 불우), ; “在天龍山.”(『梵宇攷』 忠淸道 忠州) ;“천룡산에 있으나 지금은 폐사되었다.”(『동국여지지』 권3, 忠淸道 左道 忠州牧),

『세종실록』 권32, 8년 5월 13일(丙午). ; 『세종실록』 권34, 8년 10월 3일(癸亥).

『세종실록』 권34, 8년 10월 27일(丁亥).

『세종실록』 권32, 8년 5월 13일(丙午). ; 『세종실록』 권34, 8년 10월 3일(癸亥) ; 『世宗實錄』 卷32 8年(1426) 5月 13日.; “주 북쪽 삼십리 엄정면에 있다.”(『忠州郡邑誌(1899) 寺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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