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이 연구는 인간이 경험하는 ‘소외(疏外)'와 ’고(苦, 괴로움, 고통)'를 각각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소외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인간이 노동의 결과물, 노동 행위, 사회적 관계, 나아가 자신의 본질적 존재로부터 단절되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러한 소외는 자본주의의 구조적·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필연적 현상으로 설명된다. 불교에서 고(苦)는 삶의 근본적인 속성으로서 집착과 갈애, 무명에서 비롯되는 불만족 등과 같은 느낌이나 감정을 지칭한다. 사성제(四聖諦)는 괴로움(고성제)의 원인(집성제), 그 소멸 가능성(멸성제),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도성제)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소외와 괴로움은 각각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의 핵심 개념으로, 일반적으로는 함께 논의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영국의 철학자 그레이엄 프리스트(Graham Priest)는 Marxism and Buddhism: Not Such Strange Bedfellows라는 논문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불교가 공통적으로 “삶의 불만족을 분석하고, 그 원인을 규명하며, 더 나은 삶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부족한 윤리적 기반을 제공하며, 마르크스주의는 불교에 부족한 정치철학적 방향성을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Preist, 2018). 또한, 유승무(2009)는 “불교와 마르크시즘의 동몽이상”에서 두 사상이 ‘계급 차별 없는 이상사회’라는 공통된 목표를 공유하지만, 그 실현 방식과 과정에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와 불교를 상호 보완적으로 탐구하는 연구들을 발견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2011년 5월 9일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위치한 서던메소디스트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에서 달라이 라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진행하며 “저는 사회주의를 선호합니다. … 저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경제적 통찰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고,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착취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들을 공유하며, 불교를 단순히 윤리적 차원에 제한시키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와의 비교를 통해 현대사회의 구조적 소외와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통합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며 시작한다.
⑴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에서 각각 소외와 괴로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⑵ 소외와 괴로움은 현대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되고 심화되는가?
⑶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의 사상적 접점에서 발견되는 소외와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사유와 실천은 무엇인가?
이 연구는 마르크스주의와 불교를 통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소외와 괴로움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 사회의 관계에 대한 대안적 이해를 탐색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적 모순이 심화하는 현실 속에서 불교 수행과 사회적 변혁이 결합할 가능성을 모색하고, 새로운 인간 해방과 문명전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II. 소외와 고(괴로움)의 이해
‘소외’ 개념은 철학, 사회학, 정치경제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에서 논의되어 왔으며, 인간이 경험하는 보편적 현상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1) 뒤르켐은 ‘아노미(anomie)’ 개념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규범의 붕괴가 개인의 소외감을 심화한다고 분석했다. 한편, 베버는 관료제의 확산이 인간관계를 비인간화하여 소외를 심화한다고 보았다. 이때의 소외는 초역사적이며 실존적 인간 조건의 보편적 현상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은 소외를 개인적 경험이나 심리적 상태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결과 구조적·사회적 맥락이 간과되는 한계를 가진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는 소외를 특정한 역사적·경제적 조건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현상으로 규정하며, 이를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문제로 보았다. 그는 소외를 단순한 인간의 내적 상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노동자의 상태로 분석하였다.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그는 소외를 네 가지 차원으로 구체화하였다(마르크스, 2003).
첫째,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로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제품이 독립적이고 적대적인 힘을 가지며, 노동자를 지배하는 상황을 경험한다. 생산물은 노동자의 손을 떠나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며, 시장에서 상품화된다.
둘째, 노동 행위로부터의 소외이다. 노동은 본래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표현의 과정이어야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생존을 위한 강제적 활동으로 전락한다. 이는 노동의 본질적 목적을 왜곡하고, 인간의 창의적 본성을 억압하며, 노동을 고통스러운 생계 활동으로 전환한다.
셋째,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이다. 노동자는 같은 인간으로부터 소외된다. 자본주의적 경쟁 구조 속에서 노동자는 동료 노동자와 협력적 관계를 맺기보다는 경쟁적이고 대립적인 관계에 놓인다. 노동자들은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하며, 이는 연대와 협력을 약화시킨다. 나아가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계급적 분열이 심화하면서 노동자는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철저히 종속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타인의 이익을 위해 제공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도구적이고 비인격적인 형태로 변화한다.
넷째,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존재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노동자가 자신의 본질적인 인간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자유롭고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 실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이 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과정이 된다.
생산적인 힘들은 … 사회적 노동에 의해 전개되는 … 자본주의의 생산력들로 나타난다. […] 협동과 노동분업의 결합, 자연과 과학의 이해, 기계 같은 노동 생산물의 이용 등 집단적 단위들 모두가 무언가 소외되고 대상화되며, 이미 주어진 것으로 노동자의 개입 없이도 존재하고, 자주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개별 노동자들과 대면한다. 자본주의의 생산적 힘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노동자들에게 독립적인 대상으로서 노동도구들의 지배적인 형태로 모두 매우 단순하게 나타난다. 작업장은 일정 정도 노동자들의 결합체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장 내에서의 모든 지능과 의지는 자본가들이나 그 대리인들에게 속한 것으로 보이고,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자본의 기능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Marx, K. 1976: 1054; 무스토, 2011: 106에서 재인용).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은 노동 과정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자연과 인간(사회)의 관계로 확장된다. 인간은 본래 자연(생태계)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의 존재를 자연 안에서 실현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연을 착취 가능한 자원으로 전락시키며,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파괴하였다(포스터, 2016; 사이토, 2020a).
마르크스는 자연을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2)로 정의하며, 인간이 자연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연이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임을 강조한다. ‘비유기적’이라는 표현은 자연이 인간의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분리된 외부 환경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뜻한다. 자연은 단순한 외부 환경이 아니다. 자연은 인간이 생존하고 활동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며, 인간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존재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연과 관계를 맺고, 자연을 변화시키면서 자신의 필요를 충족한다고 이해하였다. 인간이 생존하려면 자연에서 자원을 얻어 노동을 통해 가공하고 활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농부가 땅을 경작하여 곡식을 생산하거나, 건축가가 나무와 돌을 사용해 집을 짓는 것은 노동을 통해 자연과 관계를 맺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은 단순히 인간이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변화하고 발전하는 존재가 된다.
동물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서도 유적 생활은 육체적으로는 첫째로 인간이 (동물과 마찬가지로) 비유기적 자연에 의해 생활하다는 점에 그 본질을 두고 있는바, 인간은 동물보다 더 보편적이며, 그가 그것에 의해 생활하는 비유기적 자연의 범위도 동물들보다 더 보편적이다. 식물, 광물, 광석, 공기, 빛 등등은 이론적으로는, 부분적으로 자연 과학의 대상으로서, 부분적으로는 예술의 대상으로서 인간, 의식의 한 부분을 이루듯이-인간이 향유하고 소화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준비해 두어야 하는 인간의 정신적·비유기적 자연, 정신적 생활 수단-. 그것들은 실천적으로도 인간 생활과 인간 활동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자연 생산물이 식료품, 난방, 의복, 주거 등등의 어느 형식으로 나타나는 간에, 인간이 육체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은 오직 이러한 자연 생산물에 의해서이다. 자연 전체가 I. 직접적 생활 수단인 한에 있어서, [2] 자연 전체가 인간의 생활 활동의 대상\재료 및 도구인 한에 있어서 자연 전체를 자신의 비유기적 신체로 만드는 바로 그러한 보편성 속에서 인간은 보편성은 나타난다.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 몸이다. 요컨대 자연이 인간 신체가 아닌 한에서 그렇다. 인간이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자연은,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과의 지속적인 [교호] 과정 속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자기 자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마르크스, 2003: 77-78).
마르크스는 자연이 인간 생존에 필수적이며, 노동을 통해 인간이 자연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연을 단순한 자원으로 전락시키고, 인간이 자연과 맺는 유기적 관계를 파괴하였다. 이에 따라 노동자는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속에서 자연과 소외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살아서 활동하는 인간들과 이들의 자연과의 물질대사의 자연적·비유기적 조건들의 통일 그리고 이들의 자연 점취(Aneignung)가 아니라, 인간존재(Dasein)의 이 비유기적 조건들과 이 활동하는 존재의 분리, 즉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완벽하게 정립된 바와 같은 분리는 설명이 요구되거나 역사적 과정의 결과이다. 이런 분리는 노예 관계 및 농노 관계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사회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 자체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재생산을 위한 비유기적·자연적 조건으로 취급된다(마르크스, 2007).
마르크스는 자연소외를 생산활동을 하는 인간이 생존의 비유기적 조건인 자연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포스터(Foster)는 이를 노동의 이중소외론으로 해석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을 “자기 내부의 본성(nature)과 외부의 자연(nature) 모두로부터 소외되는 것”으로 풀이한다(포스터, 2016; 사이토, 2020a). 이처럼 생태사회주의에서는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에서 자연소외(natural alienation) 개념을 발전시켰다. 자연소외는 인간과 자연의 심리적 거리감을 넘어,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기후변화, 생태계 파괴, 환경 오염 사이의 구조적 문제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다. 자연소외의 과정은 단지 환경적 손실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본질적 존재를 부정하고, 사회적 관계를 왜곡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자연과 인간 간의 물질대사3)를 극단적으로 왜곡했다. 화석연료 사용의 증가, 대규모 토지 개간, 그리고 대량 생산을 위한 자연 자원의 무분별한 채굴은 이러한 물질대사 균열의 전형적 사례로 꼽힌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자연의 재생 능력을 훼손하고, 기후위기와 같은 전 지구적 문제를 초래했다(포스터, 2016; 사이토, 2020a).
이처럼 자연소외와 노동소외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노동자가 소외됨과 동시에, 자연도 인간의 생산활동에서 단절된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대사를 왜곡하고 파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예컨대, 산업화된 농업은 자연의 자생적 재생 능력을 고갈시키며, 인간과 자연 간의 유기적 관계를 훼손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물질대사 균열(metabolic rift)’로 개념화하며, 자본주의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왜곡한다고 보았다(포스터, 2016).
괴로움(dukkha)은 불교의 핵심 교리이다. 인생을 괴로움의 바다인 고해(苦海)라고 하며, 그런 괴로움의 삶이 영위되는 이 세계를 화택(火宅)이라고 부른다(박찬욱 외, 2013). 따라서 불교의 관점에서 모든 존재는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괴로움 속에 있으며, 이를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괴로움은 신체나 정신이 처해 있는 객관적 상태 그 자체보다는 그 상태로부터 일어나는 주관적 감각 내지 느낌이다(박찬욱 외, 2013). 이러한 괴로움이 불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확인하였다.
사성제는 괴로움의 본질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네 가지 진리를 제시한다. 고성제(苦聖諦)는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집성제(集聖諦)는 이 고통의 원인이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癡)4)과 같은 삼독(三毒)에 있음을 밝힌다. 멸성제(滅聖諦)는 이러한 고통과 그 원인을 소멸할 수 있음을 가르치며, 도성제(道聖諦)는 팔정도(八正道)와 같은 실천적 방법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를 수 있음을 설파한다. 사성제는 단순히 이론적 진리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괴로움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지침으로 이해된다(정학열, 2018; 윤희조, 2020).
비구들이여, ‘이것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라고 나는 시설(施設)하였다. ‘이것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여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조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표현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품」 뜻의 함축경(S56:19)).
고성제에서의 괴로움에는 수많은 의미와 표현이 담겨 있다. 둑카는 육체적 괴로움뿐만 아니라,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뉘앙스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인간이 지니게 되는 고민, 고뇌, 번민 등의 다양하고 격렬한 경험을 나타낸다. 초기불교는 이러한 괴로운 감정들이 모든 인간에게 매우 다양한 수준과 형태로 나타나며, 매일의 삶과 행동에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경험한다고 이야기한다. 같은 「초전법륜품」에서는 이를 사고팔고(四苦八苦)와 괴로움의 3가지 성질로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蹄]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디섯 가지 무더기[五取蘊] 자체가 괴로움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품」 초전법륜경(S56:11)).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인간이 겪는 주요 고통의 근원이 되며, 이는 원증회고(怨憎會苦, 싫어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는 괴로움),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서 오는 괴로움), 구부득고(求不得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오온성고(五蘊盛苦, 물질적·정신적 집착에서 오는 괴로움)로 확장된다. 이 팔고(八苦)는 삶의 다양한 고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또한 불교는 이러한 괴로움의 원인을 갈애, 집착, 느낌, 자아 관념, 무명 등으로 설명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갈애와 집착이 괴로움의 원인이며, 갈애와 집착은 괘락에 대한 욕망뿐만 아니라 존재에 대한 욕망에서도 비롯된다는 점이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곧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품」 초전법륜경(S56:11)).
현상에 대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갈애와 집착이 일어나고, 갈애와 집착은 괴로움이 발생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외에도 경전에는 느낌, 자아 관념(五取蘊) 등 다양한 괴로움의 원인이 거론되며, 이보다 다양한 원인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괴로움의 원인은 특정한 한 가지가 아니며, 다양한 원인이 중첩되어 발전해 나간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외부 세상과의 접촉을 시작하며, 접촉이 시작되면 인간의 감각기관과 외부 대상과의 상호작용은 시작된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둑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괴로움을 일으킨다. 이는 불교의 연기론을 고려하면 당연한 전개이다.
불교의 연기론은 괴로움을 독립된 실체가 아닌 조건적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결과로 설명한다. 개인의 몸과 마음은 고립된 개별 실체가 아니라, 인드라망으로 비유하는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연기적 상호의존적 관계망에 놓여 있다. 따라서 불교는 괴로움이 개인적 문제를 넘어 자연과 인간, 사회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한다(이은정, 2018; 윤희조, 2020).
불교의 우주론과 연기론을 괴로움의 관점에서 교차하면, 괴로움은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공업(共業)의 산물이라는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불교 우주론에서는 업과 과보의 법칙을 통해 형성된 세계를 중생세간(衆生世間)과 기세간(器世間)으로 구분하며, 이는 인간의 행위와 그 결과가 만들어낸 상호연결·상호의존적 구조로 설명된다.
불교에서는 업(業)에 의해 과보(果報)가 결정되며, 이는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로 나타난다. 의보는 개인이 업에 따라 받는 환경적 조건으로서, 이는 불교 우주론에서 기세간과 연결된다. 정보는 개별적 존재의 신체와 정신적 요소를 의미하며, 이는 중생세간과 대응한다. 그러나 불교 우주론에서 기세간과 중생세간은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개인의 경험이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환경적 조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괴로움은 단순히 개인의 업보로 환원될 수 없으며, 사회적 관계망과 환경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 구조적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연기와 공업의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의 괴로움은 단순히 개인적 업보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과 환경적 조건 속에서 집단적으로 경험되는 측면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는 불교의 연기법에 근거하여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적 관계망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내며, 개인의 괴로움 역시 그가 속한 사회와 환경의 구조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는 관계론적 시각을 제공한다. 따라서 불교는 개인의 윤리적 실천뿐만 아니라, 괴로움의 사회적·구조적 원인에 대한 통찰을 함께 요청한다고 볼 수 있다(이명호, 2023; 고영섭, 2001).
결국,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은 ‘사회적 괴로움’이라고 부를 수 있다. 불교는 연기와 무아에 입각한 가르침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특정한 한 개인이 경험하는 괴로움은 단지 그 개인만의 괴로움이 아니다.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양한 사람과 집단, 공동체, 제도, 관계망 등이 함께 작용한 사회적 고통이다. 이러한 특성을 강조하면, 불교의 관점에서 모든 괴로움은 연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고통이다.5)
불교의 삼독은 괴로움의 근원이며,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기후위기·생태위기의 핵심 요인이기도 하다. 탐욕은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분리하고 고립시키며, 무명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된 존재로 오인하게 만든다. 이러한 왜곡은 생태계 파괴와 사회적 갈등을 초래한다. 예를 들어, 무분별한 개발과 소비는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이는 다시 인간에게 기후위기와 생태적 재앙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해석에 근거해, 우리는 괴로움을 인간과 자연의 상호연결성과 상호의존성을 재조명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통합적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괴로움의 근본적 해소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기후위기와 생태위기가 인간과 자연의 소외를 초래한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며, 불교적 생태윤리가 지속 가능한 공존의 대안을 제시한다(권순홍, 2010; 이은정, 2018).
논의를 마무리하기 전에 불교에서 괴로움을 부정적 경험으로만 간주하지는 않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초기불교는 괴로움을 직면하고, 이를 초월하려는 인간의 노력에서 의미를 찾는다. 괴로움을 철저히 이해하고 직시함으로써, 인간은 삶의 근본적 본질을 탐구하고 해탈(解脫)에 이를 수 있다. 붓다는 “고를 직시함이 해탈로 이끄는 첫걸음”이라고 설파하며, 괴로움이 내적 성찰과 지혜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고 가르쳤다(정승석, 2011). 괴로움은 단지 극복해야 할 부정적 경험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진다. 불교는 고통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사회 간의 상호연결성과 상호의존성을 탐구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괴로움은 내적 성찰과 실천적 지혜를 통해 평화와 해탈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과정으로 이해된다.
소외와 괴로움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문제이지만, 단순한 개인적 경험을 넘어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심화된다. 이 연구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외와 괴로움이 구조적으로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검토하였다. 자본주의가 특정한 역사적 체제 중 하나라면,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 태도, 세계관도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노동자가 경제적 생존을 위한 객체로 전락하며, 자신의 본질적 존재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가 제시한 소외의 네 가지 차원은 자본주의적 삶의 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결국 인간의 주체성을 약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은 단순한 신체적 고통을 넘어 존재 자체가 내포하는 불안정성과 무상(無常)의 특성을 포함한다. 괴로움은 삼독(三毒)에서 비롯되며, 이로 인해 인간은 지속적인 불만족과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불교는 괴로움을 개인적 문제로만 이해하지 않고, 사회적·구조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복합 과정으로 심화하여 이해한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지속적인 욕망과 소비 추구, 경쟁적 관계,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들은 모두 괴로움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소외와 불교적 괴로움은 인간이 본래적 존재(상태)로부터 멀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자본주의적 노동관계에서의 소외는 노동자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 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까지 단절시키는 구조적 문제를 낳는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집착과 무명의 상태와 유사하며, 인간이 현실을 왜곡되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경제적 구조와 심리적 상태가 결합되어 인간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노동의 상품화는 노동자의 존재 자체를 수단화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 본성의 왜곡을 초래하며,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불만족과 괴로움을 유발하는 심리적 구조를 형성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방식의 전환을 통해 소외를 극복하고, 계급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 이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이러한 변화를 통해 인간이 온전히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불교는 수행과 명상을 통해 집착과 무명을 벗어나, 괴로움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수행을 통한 깨달음은 모든 중생에게 가능한 길이며, 그러한 가능성은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불교 역시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계급 없는 사회’를 추구한다고 이해된다(유승무, 2009). 불성(佛性) 개념을 수용하면, 모든 존재가 깨달음을 향한 본래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해방 가능성이 더욱 강조될 수 있다. 이는 개별 수행을 넘어 사회적·집단적 차원의 실천적 움직임과 결합될 때 더욱 의미 있는 해방의 과정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불교는 서로 다른 전통과 이론적 기반을 갖추고 있지만, 인간의 소외와 괴로움이라는 문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 공통된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소외를 극복하는 것은 단순한 경제개혁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문제이며, 이는 불교의 수행적 실천과도 맞닿아 있다. 따라서 두 사상의 결합을 통해 현대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개인의 내면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자본주의와 위기
마르크스주의는 전통적으로 계급 갈등과 자본주의의 경제적 착취 분석에 중점을 두었으며, 자연에 대한 분석은 인간과 사회를 구성하는 기반으로서 간접적으로 다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처럼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간주하거나, 자연과 인간(사회)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단절된 상태로 인식했다는 비판을 받았다(포스터, 2016). 자연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변형되고 이용되는 수동적 자원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마르크스가 기술 진보를 통해 자연을 인간의 통제 아래 두는 방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에서 뚜렷하다. 하지만 현대의 생태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재조명하며, 인간과 자연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재해석했다. 생태사회주의자들은 자연을 단순히 이용가능한 자원이 아니라, 인간 사회와 함께 발전하는 유기적 총체로 간주한다(사이토, 2020a).
포스터는 마르크스의 ‘물질대사 균열' 개념을 통해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며, 자본주의가 이 관계를 어떻게 왜곡하고 파괴했는지를 분석했다(포스터, 2016). 즉, 마르크스는 노동을 형성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물질대사’ 개념을 활용하였다. 그는 『자본론』에서 노동과정 자체를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적 상호작용의 보편적 조건이며, 이 조건은 자연이 인간의 생존을 위해 부과한 영속적인 것”(마르크스, 2002)이라고 정의했다. 경제적 순환 과정은 물질교환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고, 이는 다시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대사적 상호작용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물질대사 과정은 한편으로는 모든 역사 단계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자연적-생태적 과정이다. 인간의 생존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대상으로 수행하는 작업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물질대사는 사회-역사적 과정이다. 이 경우 그 구체적인 형태는 기존의 사회관계에 의해 매개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물질대사 과정은 ‘기본적’으로 노동에 의해 매개되며, 생산적 재생산의 객관적인 조건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사이토, 2020b).
마르크스는 인간의 노동이 자연과의 물질 교환을 매개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자연을 변형한다고 설명했다(마르크스, 2003). 즉,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일방적 이용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과 실천 활동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노동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킨다(마르크스, 2002: 235-236).
따라서 물질대사의 균열은 곧 ‘자연이 인간의 생존을 위해 부과한 영속적인 조건’을 파괴한다는 의미이다(포스터, 2010: 201).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이러한 자연스러운 물질대사를 파괴하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구조적 균열을 발생시킨다.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당시, 자연과 인간 사이의 심각한 균열은 토양의 비옥도 고갈, 도시와 농촌의 대립관계, 인간 및 동물의 배설물이 도시 쓰레기로 전락하는 문제 등으로 나타났다.6) 전통적인 농업 사회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배설물이 자연스럽게 순환하며 토양 비옥도를 유지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배설물이 오염물질로 간주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토양의 비옥도를 낮추고, 다시 외국에서 비료를 수입해야 하는 문제로 이어졌다. 이러한 예들은 도시와 농촌의 물질대사가 단절되는 것과 유사한 과정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자연의 순환을 방해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인구를 대중심지로 집결시키며, 도시인구의 비중을 끊임없이 증가시킨다. 인구의 도시집중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회의 역사적 동력을 집중시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토지 사이의 물질대사를 교란한다. 즉, (인간이 식품과 의복의 형태로 소비한) 토지의 성분들을 토지로 복귀시키지 않고, 따라서 토지의 생산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원한 자연적인 조건이 작용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은 도시노동자의 육체적 건강과 농촌노동자의 정신생활을 다 같이 파괴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된 물질대사의 상황을 파괴함으로써, 물질대사를 (사회적 생산을 규제하는 법칙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완전한 발전에 적합한 형태로) 체계적으로 재건할 것을 강제한다. 농업에서도 (공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생산과정의 자본주의적 변혁은 동시에 생산자들의 순교사이고, 노동수단은 노동자를 예속하고 착취하며 가난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되며, 노동과정들의 사회적 결합은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활기, 자유 및 자립성에 대한 조직적 압박으로 나타난다. …… 더욱이 자본주의적 농업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들을 약탈하는 방식의 진보일 뿐 아니라, 토지를 약탈하는 방식상의 진보이며, 일정한 기간에 토지의 생산력을 높이는 모든 진보는 생산력의 항구적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다. 한 나라가 대공업을 토대로 발전하면 할수록 (예컨대 미국처럼) 이러한 토지의 파괴과정은 그만큼 더 급속하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도를 발전시킨다(마르크스, 2002: 678-680).
포스터는 물질대사 균열이 자연의 재생 가능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지적하며, 이를 극복하려면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지속 가능한 생산방식을 도입하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포스터, 2016). 이러한 모습은 초기 산업혁명 시대보다 현대사회에서 더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생산수단을 직접적이고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생산관계 속에서 물질대사의 균열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김민정, 2012).
이러한 문제는 현대에도 반복되고 있으며, 특히 공장식 축산업과 같은 산업화된 농업 형태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가축 사육과 질병 발생 사례를 통해 물질대사 균열의 현대적 양상을 분석하고 있다(김민정, 2012). 2010년 한국에서 발생한 구제역 사태는 산업화된 축산업이 어떻게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관계를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공장식 축산업은 동물을 좁은 공간에 밀집 사육하여 자연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이러한 환경에서 질병은 급속히 확산하고 대량 살처분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례는 단순히 축산업의 위기가 아니라 물질대사 균열이라는 광범위한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불교 철학에 의하면, 인간 활동은 자연의 변화로 이어진다. 자연의 변화는 인간 활동이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그 양상도 달라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명증하게 반영된 개념이 ‘인류세(Anthropocene)’이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2000년, 대기화학자 크뤼천(Paul Crutzen)과 생물학자 스토머(Eugene Stoermer)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Crutzen & Stoermer, 2000). 이들은 인간 활동이 지구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현재의 지질학적 시대를 기존의 홀로세(Holocene)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인 인류세로 명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인류세 개념은 지질학적 시대명칭으로 인간 활동이 지구 환경과 생태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강조한다(Crutzen and Stoermer, 2000).
국제층서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 ICS)는 인류세를 공식적인 지질학적 시대(epoch)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무관하게 개념 등장 이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빠르게 확산하였으며, 단순한 지질학적 구분을 넘어 사회과학, 철학, 환경윤리 등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8) 인류세는 단순한 지질학적 시대 구분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소외와 생태위기의 총체적 결과로 이해되고 있다. 즉, 단순히 인간 일반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경제적 체제인 자본주의의 결과로 이해한다(Malm and Hornborg, 2014).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초래한 기후위기와 생태적 변화는 인류세의 본질이다.
기후변화는 인류세 논의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자연과 인간(사회)의 관계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요구를 더욱 강하게 제기한다. 앞에서 검토한 생태사회주의와 불교는 자연을 인간과 상호의존하는 관계에 있으며, 함께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를 불교의 연기 원리, 생태사회주의의 물질대사와 연결된다. 따라서 인류세에 대한 대응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 즉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된 물질대사 균열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자연소외와 노동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불교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자연과 인간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각은 고립된 실체로 존재한다는 무지와 집착에서 비롯된 괴로움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외는 결국 인간 자신의 괴로움으로 되돌아오는 구조를 형성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분석하는 자본주의적 소외 구조와도 연결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류세는 단순한 과학적 개념이나 사회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새로운 사회적 조건으로 이해된다.
최근 연구들은 기후위기와 생태위기가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윤리적 차원의 위기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기후정의와 정의로운 전환 등은 기후변화가 불평등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지적하며, 생태적 책임을 더욱 분배 정의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의는 불교적 관점에서 연기와 자비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실천과도 접점을 형성할 수 있다.
Ⅳ. 자연-인간(사회)의 관계 재구성
기후위기와 생태위기는 공업(共業)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에서 업(業) 사상은 개인의 행위에 따른 결과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역사적 조건 속에서 공동으로 형성되는 공업 개념으로 확장된다(로이, 2012). 즉,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는 개인이나 개별적인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체제에서 집단적으로 만들어진 괴로움이다. 이 괴로움은 기후변화로 인해 생존 위기에 처한 저소득 국가와 미래 세대에게 불균형하게 전가되며, 이는 생태적 불평등과 함께 사회적 괴로움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괴로움의 해결방안은 단순한 경제적·기술적 전환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있다. 붓다는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연기를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연기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 요소의 변화는 전체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Williams, 2009).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며, 경제적 성장과 생태계 보호가 반드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가 기술 발전과 산업화를 강조하며, 자연을 인간이 지배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데 반해(Moore, 2016), 최근의 생태마르크스주의에서 자본주의적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제안하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상호 협력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불교에 기반한 접근법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공존을 중시한다. 특히, 불교의 무아(無我) 개념은 인간이 자연과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생태계와 연결된 존재임을 인식하게 한다(하비, 2000).
불교에서 괴로움의 핵심 원인은 집착(執着)과 갈애(渴愛)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본래 무상(無常)한 존재이며,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이를 영속적인 것으로 집착하며 갈애한다. 이러한 무명(無明)과 갈애로 인해 괴로움이 발생한다(하비, 2000). 자본주의적 사회구조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인간이 자연과의 유기적 관계를 망각하고, 자연을 자원의 형태로 고정된 실체로 간주하며 착취하는 것은 일종의 갈애와 집착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갈애와 집착을 자본주의적 축적 논리로 해석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영구적 성장을 전제로 하며,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강박을 내면화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경제적 교환으로 환원되고, 자연은 무한한 자원처럼 취급된다(포스터, 2016). 그러나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무상한 현실을 왜곡하여 영속적 소유가 가능하다는 착각 속에서 이루어진다. 마치 개인이 특정한 경험, 감각적 쾌락, 혹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고 집착하며 괴로움을 경험하듯,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도 끝없는 축적을 향한 집착 속에서 생태적·사회적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다(Keown, 2005).
불교는 인류가 직면한 기후위기와 생태위기를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업(業)과 연기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자연(생태계, 법계) 파괴와 기후위기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행위가 복합적으로 얽혀 초래된 결과라는 점에서 연기 원리 속에 놓여 있다(김보경, 2021). 불교 세계관은 생태계를 자원 공급원이 아니라, 상호의존하는 유기체적 관계망으로 본다. 연기론은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며, 하나의 생태적 요소가 다른 요소와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근대 서구 철학에서 인간을 자연과 구분하는 이분법적 관점과 대조된다(이도흠, 2011). 불교는 인간을 생태계의 중심이 아니라, 전체 관계망의 일부로 간주하며,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근대산업문명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촉구한다.
불교의 생태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은 ‘자비(慈悲)’와 ‘소욕지족(少欲知足)’이다. 자비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대상으로 하며, 이를 통해 불교적 생태윤리는 단순한 환경 보호를 넘어 생명의 근원적 가치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포함한다(유기쁨, 2006; 이명호, 2024). 소욕지족은 인간의 과도한 소비와 탐욕이 생태계 파괴를 초래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필요 이상의 자원을 소비하지 않는 절제의 태도를 강조한다.
불교에서 괴로움은 신체적 고통을 넘어, 존재 자체가 내포하는 불안정성과 무상(無常)을 의미한다. 특히 기후위기 및 생태위기와 관련하여 괴로움의 개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작동한다. 첫째, 생태위기는 불교적 의미에서 인간의 탐욕(貪)과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한자경, 2005). 인간이 무한한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무명에서 비롯되며, 이는 결과적으로 생태계 파괴와 같은 구조적 고통을 발생시킨다. 불교적 관점에서 이러한 생태적 괴로움은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으며, 구조적 전환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김보경, 2021). 둘째, 괴로움은 전환과 해탈의 계기로 작용한다. 불교에서 괴로움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깨달음의 계기로 삼아야 할 대상이다. 생태위기는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을 깨고, 연기적 관계 속에서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괴로움의 인식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실천적 전환의 주체로서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는 요소가 된다.
기후위기와 이와 연관되어 발생하는 생태적 소외와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사회)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실천적 대안이 필요하다. 실천적 대안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모색될 수 있다. 첫째는 사회적 생산양식, 둘째는 개인의 소비방식(넓게는 삶의 양식)을 전환하는 것이다.
첫째, 사회적 생산양식의 전환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사회적 연기성에 기반한 협력적 경제 모델을 의미한다. 연기 원리는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하며, 한 존재의 변화가 전체 체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적·경제적 구조 또한 연기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개별 소비자의 윤리적 선택을 강조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고, 협력적 생산과 분배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로이, 2016).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 공동체 기반 경제는 연기 원리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방식 중 하나이며, 이는 지속 가능한 지역 경제와 생태적 전환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러한 관점과 방향성은 현재 정체되어 있는 기후정치를 새롭게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기후위기가 심화하면서 기후정치(Climate Politics)가 중요한 담론으로 부상하고 있다. 기후정치는 기후변화 대응을 둘러싼 정치적 권력관계, 정책 결정 과정, 사회적 운동, 경제적 이해관계를 포함하며, 이를 통해 사회적·경제적 구조의 전환을 모색한다. 이는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과 권력 불균형을 해결하려는 시도와 연결되며, 기후정의(Climate Justice)와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과 같은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만과 웨인라이트(만·웨인라이트, 2023)는 『기후 리바이어던(Climate Leviathan)』에서 기후위기에 대한 정치적 대응 방식을 크게 네 가지 경로로 제시했는데, 여기서는 기후 리바이어던과 기후 X에 주목한다.
기후 리바이어던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행성적 권력을 통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국제기구와 세계정부가 탄소배출 규제를 강제하고, 탄소 배출권 거래와 같은 시장 기반 정책 및 지구공학적 기술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적 성장 논리를 전제로 하며, 기후위기로 인한 불평등을 해소하기보다는 기존 권력 구조를 더욱 강화할 위험이 있다.
반면, 기후 X는 중앙집권적 기후정책과 자본주의 체제를 거부하고, 지역 기반 생태공동체와 기후정의운동을 중심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모델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정치적 실행 모델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다. 현재 기후위기와 생태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형태의 소외와 괴로움을 겪고 있다. 기후 리바이어던이 강화될수록 기후위기로 인해 피해를 받는 약자들은 더 큰 소외를 경험하게 되고, 이는 더 큰 괴로움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후 X의 원리를 기반으로 한 지역공동체의 정치적 주체화가 필요하다.
생태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생활방식을 실천하는 동시에, 지역 단위에서 기후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구조를 갖출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이러한 지역공동체가 정치적 주체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기후정의운동을 포함하는 다양한 사회운동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지역 주민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마을주권(Communal Sovereignty)’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마을주권은 ‘국가 중심의 기후정책을 넘어, 지역공동체가 직접적으로 기후 및 생태 문제를 포함한 사회적 결정권을 행사하는 자율적 주권’을 의미한다. 이는 기존 국가 주도 정책이 대규모 산업과 시장 기반 해결책을 중심으로 하는 데 반해,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주민 주도의 대응을 강조한다. 마을 단위에서 기후변화의 영향을 직접 체험하며, 이에 따라 각 지역의 구체적인 상황에 맞는 기후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다(클라인, 2016).
이러한 마을주권 모델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생태공동체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실천 주체들을 세력화하고, 이들의 활동공간인 공공영역을 확보하며, 이 공공영역에서 지역 단위의 민주적 거버넌스를 활성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지역 기반의 생태공동체와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이 결합할 수 있으며, 정치적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개인적 수준에서 삶의 양식을 전환하려는 노력도 요청된다. 불교 세계관에서 욕망과 집착을 줄이는 것은 괴로움을 극복하는 핵심 방법이다. 이는 무한한 성장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탈성장(degrowth) 철학과 맥락을 공유하며, 불교의 중도(中道) 사상과도 조화를 이룬다. 탈성장은 생산과 소비의 규모를 단순히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조화롭게 조정하며,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지역 기반의 생산 및 분배 시스템을 강화하며, 자원 순환 경제를 정착시키는 정책적 전환이 필요하다. 이처럼, 삶의 전환은 사회적 평등과 생태적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불교의 자비와 생명존중 사상을 바탕으로 한 생태적·윤리적 소비 운동도 필요하다. 생태적·윤리적 소비는 단순히 친환경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유통·소비 과정 전반에서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를 거부하고,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지역 생산물을 소비하는 ‘로컬푸드 운동’, 환경 부담을 최소화하는 ‘제로 웨이스트 운동’뿐만 아니라, 공정무역 제품 구매와 노동권 보호를 중시하는 소비 방식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소비 방식의 변화는 기업의 생산방식을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촉진제가 될 수 있다. 소비자는 단순히 친환경 제품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경제를 만드는 정치적 주체로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생태적·윤리적 소비는 생태적 전환을 촉진하는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
Ⅴ. 결론
이 연구는 마르크스주의와 불교를 중심으로 소외와 괴로움의 개념을 비교하고, 이를 현대 자본주의 체계 맥락에서 재조명하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노동의 결과물, 노동 행위, 타인과의 관계, 본질적 인간성으로부터 단절되는 과정을 ‘소외’로 개념화하였다. 불교는 존재의 불만족과 집착, 무명(無明)에서 비롯되는 ‘고(苦)’를 핵심 개념으로 제시하였다.
두 사상은 각각 경제적 구조, 심리와 감정 상태에 주목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의 고통과 불만족을 사회적·구조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해방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소외 개념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까지 확장되며, 불교의 연기와 자비 개념은 인간과 자연, 사회적 관계망의 복합적 상호작용 속에서 괴로움을 해결할 실천적 방안을 제시하려 노력한다.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주요 시사점을 도출하였다.
첫째, 소외와 괴로움은 모두 구조적·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하지만, 그 본질에서 차이가 있다. 소외는 특정한 역사적·경제적 조건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상태이며, 괴로움은 이러한 소외가 초래하는 주관적 경험과 감정을 의미한다. 소외는 사회구조가 야기하는 객관적 현실이며, 괴로움은 그 현실 속에서 인간이 겪는 사회적 경험이다. 따라서 소외를 해결하는 과정과 괴로움을 극복하는 과정은 분리될 수 없으며, 사회적 구조 개혁과 개인적 수행의 조화로운 결합이 필요하다.
둘째, 자본주의적 노동관계에서 발생하는 소외는 경제적 착취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를 왜곡하고 생태위기를 초래한다. 이러한 왜곡은 인간이 자연을 단순한 착취와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성을 부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에 대한 대안적 관계는 인간과 자연이 상호의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물질대사 균열 개념과 불교의 연기론을 결합하여, 인간과 자연이 본래 지니고 있는 관계 지향적 특성을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자연을 인간의 외부적 대상이 아니라, 상호 관계를 맺는 존재로 인식하고, 인간 역시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존재로 이해하는 생태적 관점이 요구된다. 이러한 관계 회복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일반적으로 수행은 종교적 의미가 강조되지만, 불교에서 연기적 관계와 불성(佛性)은 수행의 의미를 확장하여 연기적 삶의 실천 자체를 수행으로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교의 실천은 개인의 수행을 넘어 사회적·생태적 관계를 전환하는 과정과 연결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구조 변화는 자본주의 체제 전환을 직접적인 목표로 하지만, 불교에 기초한 실천은 이를 보완하는 관점에서 지역공동체의 회복과 사회연대경제의 실현을 강조한다. 생태적이고 연기적 관계에 기반한 삶의 문화가 지역에서부터 실천될 때, 사회적 소외와 생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보다 지속가능한 대안이 마련될 수 있다. 따라서 수행과 사회적 실천은 분리될 수 없으며, 연기적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삶의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사회적 변혁의 핵심 과정이 된다.
향후 연구에서는 이러한 이론적 논의를 더 구체적인 사례 분석과 접목하여 현대사회에서 소외와 괴로움이 어떻게 재구성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가능성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불교의 자비와 사회적 연대 개념을 사회운동과 연결하여 사회적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