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일반논문

식민지적 근대성과 불교지식인의 사회운동적 대응: 김법린의 만당(卍黨) 결성과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석보원*
Bo-won Seok*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불교학과 박사수료
*Ph.D. Candidate, Dongguk University WISE Cam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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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Dec 10, 2025; Revised: Dec 26, 2025; Accepted: Dec 31, 2025

Published Online: Dec 31, 2025

국문 초록

본 연구는 식민지 조선이 경험한 근대성의 충격을 배경으로, 불교지식인 김법린의 만당(卍黨) 결성과 독립운동을 사회운동적 실천으로 재해석한다.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의 단일 경로를 모방한 과정이 아니라 식민지라는 비자발적 조건 속에서 억압·저항·전통의 재해석이 중층적으로 결합된 다중적 근대성의 양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는 김법린의 활동을 주로 민족적 책무, 호국·민족불교의 도덕적 실천, 혹은 개인의 사상적 특성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강해 “무엇을 했는가”의 기술에 머물고, “왜 그 실천이 불가피했는가”라는 구조적 질문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또한 식민지 조건을 단순한 시대 배경으로 처리함으로써 불교지식인의 형성과 실천이 어떤 사회적 압력과 과제 속에서 조직화되었는지를 해명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이에 본 연구는 식민지적(종속적) 근대성을 거대한 설명 이론이 아니라, 김법린의 실천이 형성되는 구조 조건을 포착하기 위한 최소 준거로 한정한다. 또한 불교지식인은 승려·재가라는 신분 범주가 아니라, 공적 문제를 해석·제기하고 의미를 정당화하며, 결사·교육·출판·네트워크를 통해 실천을 조직하고 대사회적 개입과 불교 내부 재편을 연결·조정하는 행위자 유형으로 규정한다. 이를 통해 만당 결성과 독립운동, 그리고 교육·학문 활동이 식민지 근대 조건 아래에서 불교가 사회적 발언권과 실천 역량을 재구성하려 한 대응의 궤적임을 밝히고자 한다. 본 연구의 의의는 근현대 불교사회운동을 민족주의나 개인윤리로 환원하지 않고 구조–행위–의미의 상호작용 속에서 분석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다른 불교지식인 및 이후 시기의 불교사회운동 연구로 확장 가능한 이론적 지평을 마련하는 데 있다.

Abstract

This study reinterprets the formation of the Mandang (卍黨) and the independence activism of the Buddhist intellectual Kim Beoprin against the backdrop of the shock of modernity experienced in colonial Korea, approaching them as forms of social-movement practice. Korea’s modernization was not a simple imitation of a single Western trajectory; rather, under the involuntary condition of colonial rule, it unfolded as a configuration of multiple modernities in which oppression, resistance, and the reinterpretation of tradition were layered and intertwined. However, previous scholarship has tended to explain Kim Beoprin’s activities primarily in terms of national duty, the moral practice of patriotic or nationalist Buddhism, or his personal intellectual characteristics. As a result, it has largely remained at the level of describing “what he did,” without sufficiently addressing the structural question of “why such practices became unavoidable.” By treating colonial conditions merely as historical background, it has also been limited in elucidating the social pressures and tasks through which Buddhist intellectuals were formed and their practices organized.

Accordingly, this study confines “colonial (dependent) modernity” not to a grand explanatory theory but to a minimal analytical reference for capturing the structural conditions under which Kim Beoprin’s practices took shape. It likewise defines “Buddhist intellectuals” not as a status category of monastic or lay identity, but as a type of actor who interprets and raises public problems, legitimizes meanings, organizes through associations, education, publishing, and networks, and links outward- oriented social practice with inward reconfiguration of Buddhism. Through this framework, the study seeks to demonstrate that the Mandang’s formation, independence activism, and Kim’s educational and scholarly work constituted a trajectory of response through which Buddhism attempted to reconstitute its social voice and practical capacities under the conditions of colonial modernity. The significance of this study lies in offering a perspective that analyzes modern and contemporary Buddhist social movements within the interaction of structure, agency, and meaning—rather than reducing them to nationalism or individual morality—thereby opening an analytic horizon that can be extended to other Buddhist intellectuals and to Buddhist social movements in subsequent periods.

Keywords: 근대화; 다중적 근대성; 불교사회운동; 김법린; 만당(卍黨)
Keywords: Modernity; MuLtiple Modernities; Buddhist Social Movements; Kim Beoprin; Mandang (卍黨)

Ⅰ. 여는 말

근대성(modernity)은 시대 구분이 아니라, 삶의 방식과 사회 구조를 재편하는 총체적 변동이다. 기든스가 정리하듯, 산업화·자본주의·도시화·세속화·민주정치의 확대 등은 근대성의 핵심 구성요소이며(Anthony Giddens·Philip W. Sutton, 김봉석 역, 2022: 17), 사회는 그 충격 속에서 새로운 규범과 질서를 구성한다. 한국의 근대화는 이러한 근대성의 압력을 받았지만, 식민지라는 비자발적 조건 속에서 전개되었다. 아이젠 스타트의 다중적 근대성 관점에서 보면(Shmuel N. Eisenstadt, 임현진 외 공역, 2009: 6-8), 한국의 근대성은 억압과 저항, 전통의 재해석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독립운동은 국권 회복을 넘어 식민지적 근대 조건에서 정치적 주체성과 민주적 질서를 형성하려는 실천이었다. 한국의 민주제는 제도 수입의 결과라기보다 사회적 요구의 축적과 결합해 형성되었으며, 독립운동은 그 형성 과정의 핵심 경로였다(최형익, 2004: 184-185).

근대성의 충격과 다중적 근대화의 압력은 종교 영역에도 직접적인 변화를 요구하였다. 조선불교는 일본 제국의 종교정책, 근대 학문 체계의 도입, 교육제도의 재편 등으로 인해 제도적 자율성과 사회적 위상을 상실하였으며, 근대적 종교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긴급한 요구에 직면했다. 전통적 수행 중심의 불교는 더 이상 사회적 역할을 설명하기 어려웠고, 이에 따라 불교계 내부에서도 사회적 참여, 교육개혁, 교단 현대화 등 새로운 실천 방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승려상과는 다른 근대적 불교지식인이라는 새로운 유형이 등장한다.

김법린(金法麟, 1899-1964)은 이러한 시대적 구조 속에서 활동한 대표적 불교지식인이다. 그는 청년불교운동, 만당(卍黨) 결성, 비밀결사를 통한 독립운동, 불교개혁론, 서구 불교학의 도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천적 개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기성 연구는 그의 실천을 대체로 민족불교·호국불교 또는 개인적 사상적 특성으로 설명해 왔다. 권기현(2005), 강미자(2010), 김광식(2018) 등의 연구는 그의 독립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이를 주로 민족적 책무나 종교적 도덕성에서 기인한 행위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엄연석(2021), 김영진(2023)의 연구는 서구 불교학 수용이라는 학문적 성취를 조명하지만, 그 배경에 있는 근대성의 구조적 압력까지는 충분히 분석하지 못한다. 김은영(2025)은 불교계의 근대화 고민을 중요한 문제로 제시하지만, 김법린의 실천이 어떠한 구조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밝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김법린의 실천을 “무엇을 했는가”라는 행위 중심으로 기술할 뿐, “왜 그러한 실천이 불가피했는가”, “그 실천은 한국불교가 맞이한 다중적 근대성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특히 그의 활동을 민족주의적 범주에 고정시키는 해석은 불교지식인이 근대성의 충격 속에서 어떠한 구조적 조건과 시대인식을 기반으로 실천을 전개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한계를 가진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사회운동 연구에서 제기되어 온 네 가지 기본 질문, 곧 ① 사회운동은 언제·왜 발생하는가, ② 누가 참여하는가, ③ 어떻게 조직되는가, ④ 무엇을 수행하는가를 식민지 조선의 불교사회운동을 분석하는 기본 축으로 삼는다(Jeff Goodwin and James M. Jasper, 2015: 7)1). 다만 구조 조건과 행위자 활동을 매개 없이 직접 연결하는 방식은 피하고자 한다. 또한 특수한 근대 조건을 설명하기 위해 식민지적(종속적) 근대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되, 이를 거대한 이론 체계로 밀어붙이기보다 최소한의 작업정의로 제한한다. 즉, 종속이란 단지 경제적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예속을 토대로 정치·군사·이데올로기적 지배가 관철되는 총체적 지배-예속 관계라는 점에 주목한다(문영찬, 2011: 74).2)

또한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특히 집약되는 1920-1930년대 초반을 분석의 중심 시기로 설정하고, 이 시기에 전개된 김법린의 청년불교운동과 만당(卍黨) 결성 및 관련 실천을 축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다만 본문에서 1910년대 후반 등 선행 시기에 대한 서술은 연구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일반사적 개괄이 아니라, 해당 시기 만당이 비밀결사적 방식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조건과 공론장 제약을 정리하기 위한 배경 설명이다. 따라서 이 범위 설정은 일제강점기 전체를 포괄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만당의 조직 방식과 실천이 갖는 의미를 보다 정밀하게 검토하기 위한 분석적 장치로서 기능한다.

이를 위해 Ⅱ장에서는 ‘식민지적(종속적) 근대성’과 ‘불교지식인’의 작업정의를 정리하고, 사회운동 분석질문과 매개모형(구조→의미→조직화→실천)을 제시한다. Ⅲ장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적 조건과 불교계 구조를 개괄하고, 그 조건이 불교지식인의 시대인식을 어떻게 형성했는지를 검토한다. Ⅳ장에서는 김법린의 만당 결성과 독립운동을 조직화 양상과 실천 내용의 차원에서 분석함으로써, 근대 한국불교가 식민지적 근대성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대사회적 실천과 내부 재편을 동시에 모색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3)

다만 본 연구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거시적 구조와 그 속에서 형성된 불교지식인의 실천 궤적을 우선적으로 조망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에 따라 김법린의 저술·강연과 동시대 신문·잡지 담론에 대한 미시적 텍스트 분석은 전면적으로 수행하기보다, 시대인식과 사회운동적 대응 과정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활용하였다. 구조–행위–의미의 상호작용을 보다 세밀한 차원에서 추적하는 작업은, 향후 한용운·백용성 등 다른 불교지식인과의 비교를 포함하여 김법린의 텍스트와 실천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후속 연구에서 별도의 과제로 심화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이 연구는 근대 한국불교가 다중적 근대성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적 실천을 구성했는지, 그리고 김법린이라는 불교지식인의 활동이 근대 한국불교의 자기 재편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이는 단지 한 인물에 대한 재해석을 넘어, 근현대 불교사회운동을 구조–행위–의미의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지평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Ⅱ. 이론적 검토: 식민지적 근대성 조건과 불교지식인의 사회운동

1. 핵심 개념의 조작적 정의와 분석 범위

본 연구는 김법린의 만당(卍黨) 결성과 독립운동을 식민지 조선에서 형성된 불교지식인의 사회운동적 실천으로 분석한다.4) 본고는 경합적 정치의 장에 나타나는 다양한 실천을 포괄적으로 서술하기보다 김법린과 만당을 중심 사례로 삼아 권력자와의 경합이 어떻게 조직화 양식과 정당화의 공유로 응집되고, 반복되는 실천 레퍼토리로 구현되는지에 분석의 초점을 둔다. 즉 본 고가 중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① 경합의 지속성과 궤적, ② 조직화의 경로(교육·출판·단체 활동 및 네트워크), ③ 정당화 프레임의 구성·확산, ④ 실천 레퍼토리의 반복과 변형이다.

또한 ‘식민지적(종속적) 근대성’은 거대한 설명이론을 적용하기 위한 용어가 아니라, 김법린의 실천이 형성되는 구조 조건을 Ⅲ장에서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포착하기 위한 조작적 정의로만 사용한다. 본고는 1920-30년대 조선총독부 통치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표면 전환하는 과정에서 억압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법·경찰·행정·제도·포섭 전략을 통해 통치기제가 재조직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따라서 본고에서 식민지적(종속적) 근대성의 구조 조건은 다음의 세 축으로 확인된다.

1) 문화통치 하에서 재조직화된 정치적 억압 구조(통치기제의 재배치): 문화통치의 표면적 완화와 달리, 통치 장치가 제도·법제·치안기구를 중심으로 재배치되며, 통제의 일상화가 진행되는 과정이다. 본고는 특히 이러한 재조직화가 합법적 공론장과 공개 정치공간을 구조적으로 축소시킴으로써, 저항이 비합법·비밀결사형 조직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형성했다는 점을 분석의 연결고리로 삼는다.

2) 자원 공급지·소비시장화로 심화된 경제적 수탈 구조(종속적 재편): 식민지 경제가 본국의 필요에 맞춰 재편되며, 자원·노동·시장 구조가 종속적으로 재조직되는 과정이다. 본 고는 이를 단순한 “빈곤”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의 자율성과 생활 기반이 정책적으로 축소·변형되는 구조적 상실로 파악하며, 이 상실의 경험이 불교지식인의 문제의식과 실천 필요를 강화하는 조건으로 작동했음을 검토한다.

3) 그 결합 위에서 전개된 사회적 긴장과 저항의 확산(운동의 장 형성):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 구조가 결합하면서 저항의 양상이 다각화되고, 다양한 주체와 실천이 교차하는 운동 장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다만 본고는 이 지점을 “구조 조건이 곧바로 운동을 산출한다”는 결정론으로 이해하지 않으며, 구조적 압박이 행위자에게 의미화·문제화되고, 사회운동으로 형성되는 과정 속에서 특정한 실천 형태로 전환되는 장면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지표 설정은 경제적 예속을 기초로 정치·이데올로기적 지배가 관철되는 총체적 지배-예속 관계라는 최소 정의를 구조 조건으로 전환한 것이며, 지배가 국내의 제도·권력 구조를 통해 관철된다는 문제의식을 전제로 한다(문영찬, 2011: 73-74).

한편, 불교지식인은 승려 일반이나 전통적 승려상과의 대비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본고는 근대 지식인론이 지식인의 역할을 공적 문제의 해석과 담론의 생산·매개라는 기능 차원에서 규정해 온 논의를 참조하여(강수택, 2000: 507), 불교지식인을 신분 범주가 아니라 기능 범주로 정의한다. 즉, 불교지식인이란 ① 공적 문제를 해석·제기하는 담론을 생산하고, ② 그 해석을 불교적 윤리·세계관을 하나의 근거로 삼아 정당화 프레임으로 구성·확산하며, ③ 교육·출판·단체 활동 등 불교계 제도권의 자원과 경로를 활용해 실천을 조직화하고, ④ 공적 개입을 대사회적 실천과 불교 내부 재편의 과제로 동시에 연결·조정하려는 행위자 유형을 가리킨다.

일반적 지식인이 공적 문제의 해석과 담론 생산에 주로 초점을 둔다면, 불교지식인은 교단 제도와 수행 윤리라는 규범적 틀 속에서 그러한 담론을 실천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또한 불교지식인은 대사회적 개입과 종교 내부 재편을 분리하지 않고 동시에 매개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불교지식인의 특수성은 지식의 내용 자체보다, 종교 제도·윤리가 제공하는 제약과 자원을 활용해 공적 실천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다.

더 나아가 본고는 불교지식인의 실천을 불교적 사유만으로 설명하지 않으며, 불교적 윤리와 세계관은 구조적 조건 속에서 상실과 고통을 문제화하고 실천을 정당화하는 의미 자원으로 기능하는 수준에서만 고려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고는 김법린을 불교지식인의 대표 사례로 설정하고, 만당의 결성과 관련 실천을 중심으로 그 작동 양상을 분석한다.

2. 분석 질문과 적용절차: 구조-시대인식-조직-실천

사회운동 분석을 위해 본고는 굿윈·재스퍼가 제시한 질문군을 참조하되, 연구 범위에 맞게 네 가지 핵심 질문으로 축소한다(Jeff Goodwin and James M. Jasper, 2015: 7).

  • ① 사회운동은 언제·왜 발생하는가(구조 조건)

  • ② 누가 참여하는가(주체 형성)

  • ③ 어떻게 조직되는가(조직화 경로)

  • ④ 무엇을 수행하는가(실천 레퍼토리)

이 네 질문은 다음의 절차로 운영된다. 첫째, 구조 조건은 Ⅲ장에서 정치적 억압 구조와 경제적 수탈 구조, 그리고 그 위에서 분출된 사회적 긴장과 저항의 확산을 통해 확정한다. 둘째, 구조 조건이 곧바로 실천을 산출한다고 보지 않고, 행위자가 그 조건을 어떻게 해석·문제화했는지, 즉 시대인식(의미/문제정의)을 매개로 설정한다. 이때 박탈 개념은 전체 사회를 설명하는 총괄 변수가 아니라, 시대인식의 형성과 동기화 과정에 대한 보조 개념으로 제한하여 사용한다. 특히 본고는 가치 능력(value capabilities)의 하락·상실이 초래하는 체감적 박탈(decremental deprivation)을 준거로 삼아, 식민지 조건이 불교지식인에게 상실로 경험되고 그것이 실천의 필요를 강화하는 과정을 설명한다(Gurr, 2011: 24). 셋째, 조직화의 문제는 자료 제약으로 인해 만당의 내부 운영을 전면 복원하는 방식으로 다루기 어렵다. 다만 Ⅳ장에서는 교육·출판·단체 활동을 포함한 조직화 경로를 가능한 범위에서 추적하고, 만당 결성을 조직화의 한 형태로 위치 지어 그 의미를 검토한다. 넷째, 실천은 독립운동(대사회적 실천)과 불교계 내부의 재편 시도(대내적 실천)를 구분하여, 김법린의 활동이 두 방향을 어떻게 병행하려 했는지를 Ⅳ장의 서술을 통해 검토한다.

끝으로 본고는 구조적 긴장과 통제의 누적을 운동 가능조건으로 정리하는 데에는 스멜저의 집합행동론을 참고하고(Neil Smelser, 박영신 역, 1981: 88), 동기화 요인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거어의 박탈 개념을 제한적으로 활용하며, 식민지 국가구조와 국제질서의 배치를 장기 조건으로 위치 짓는 데에는 스카치폴의 역사적 접근을 보조적으로 참조한다(Theda Skocpol, 2015: 17). 다만, 스멜저·거어·스카치폴을 하나의 통합 인과모형으로 합성하지 않는다. 이러한 제한적 활용은 이론 범주의 과도한 확장을 피하면서도, 본고가 실제로 작동시키는 분석 절차를 명료화하기 위한 방법론적 선택이다.

Ⅲ. 일제강점기의 구조적 위기와 불교지식인의 시대인식

1.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문제와 구조적 배경

앞서 Ⅱ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회운동이 ‘언제·왜 발생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운동이 등장한 사회의 구조 조건을 우선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본고는 ‘식민지적(종속적) 근대성’을 거대한 설명이론으로 사용하지 않고, 김법린의 실천이 형성되는 구조 조건을 Ⅲ장에서 실증적으로 확인 가능한 방식으로 포착하는 조작적 정의로만 사용한다. 이에 따라 Ⅲ장은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1) 문화통치 하에서 재조직화된 정치적 억압 구조, (2) 자원 공급지·소비시장화로 심화된 경제적 수탈 구조, (3) 그 결합 위에서 전개된 사회적 긴장과 저항의 확산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구조 조건을 확정한다.

이 시기 식민지 조선이 직면한 구조적 위기는 크게 두 층위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국권 상실로 인한 정치적 주권의 박탈이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대한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했으며, 이는 조선인에게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권리의 부재라는 현실로 이어졌다. 일본은 황국신민화 정책 등을 통해 조선인의 정체성과 민족적 자존감을 약화시키려 했고, 이러한 억압은 사회 전반에 장기적인 긴장을 축적하였다.

둘째, 조선의 병참기지화와 그 수행을 위한 경제적 수탈이다. 조선총독부의 역대 총독들이 다수 군인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일본이 조선을 대륙 침략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조선의 산업과 인프라를 제국의 필요에 맞추어 재편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자원과 노동력은 동원·수탈 구조 속에 편입되었다. 이때 조선 사회가 경험한 것은 집단의 자율성과 생존 기반이 정책적으로 축소되는 과정—곧 상실의 경험이었다.

이러한 구조적 위기는 사회운동의 필요 조건을 형성하지만, 구조 조건이 곧바로 특정 실천을 산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본고는 구조적 압박이 불교지식인에 의해 어떻게 해석·문제화되었는지, 그리고 그 문제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실천의 필요를 강화했는지를 함께 묻는다. 특히 박탈 개념은 전체 사회를 설명하는 총괄 변수가 아니라, 시대인식의 형성과 동기화 과정에 대한 보조 개념으로 제한하여 사용하며, 가치 능력(value capabilities)의 하락·상실이 초래하는 체감적 박탈(decremental deprivation)을 준거로 삼는다.

합법적 공론장이 제도적으로 봉쇄되는 조건에서, 1930년 5월 비밀결사 만당의 결성은 곧바로 조직형태·동원방식·연계범위를 체계 분류하여 검토하는 대상이라기보다, 공개적 운동 공간의 축소가 비밀결사형 대응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Ⅳ장에서 다루어진다. 따라서 Ⅲ장은 만당 자체의 조직 분석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그러한 선택을 가능하게 한 정치·경제·사회 구조의 작동 방식과 그 구조 위에서 형성된 시대인식의 조건을 먼저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을 검증하기 위해, 이하에서는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정치·경제 구조가 어떠한 억압과 상실의 경험을 만들어냈는지를 검토하고, 이어 그 구조 위에서 사회적 긴장과 저항이 확산되는 장면을 확인함으로써 김법린의 실천이 등장할 수 있었던 운동의 장을 확정하고자 한다. 이는 Ⅱ장에서 설정한 구조 조건의 지표를 Ⅲ장에서 구체적 역사 장면으로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 1920-30년대의 식민지 조선사회의 정치·경제·사회적 배경
1) 문화통치 하에서 재조직화된 정치적 억압 구조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 이후 강력한 정치적 억압과 가혹한 경제적 수탈에 대한 대규모 저항으로 3·1운동이 폭발하자, 일본은 1920년대에 들어 통치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1924)는 3·1운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으며, 후임으로 전 해군대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사이토는 유화정책을 표방하며, 문화통치라는 이름 아래 한국에 대한 지배방식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가 문화통치를 펼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일본 내에서 확산된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전상숙, 2022: 125).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사회에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사조가 확산되면서 나타난 정치·사회적 흐름으로, 국민의 권리와 참여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라 다카시(原敬, 1856-1921),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1933)와 같은 일부 정치 세력과 지식인들은 제국의 식민통치 또한 강압적인 무단통치가 아닌 유화적 접근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사이토의 총독 취임은 하라 수상의 영향이 컸다. 일본 최초의 평민 출신 수상이었던 하라는 외무차관 시절 대만을 식민지로 편입할 때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의 통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김동명, 2006: 54-55). 그 결과, 조슈벌(長州閥) 출신의 군인 정치가였던 데라우치·하세가와와는 달리, 전 해군대신 출신인 사이토가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었다(전상숙, 2022: 128). 그러나 사이토 역시 전임 총독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의 병참기지화라는 기본 정책 방향은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이러한 일관된 목표 아래 부임한 사이토는 무단통치에 대한 한국인의 강한 반발을 완화하기 위해 한국인의 정치·사회 참여를 일부 허용하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등 유화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동시에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를 도입하여 강압적 통치를 표면적으로 완화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문화통치는 한국 내 친일 인사를 육성하여 일본 제국에 협조적인 세력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고, 실제로는 무단통치기보다 더 많은 경찰 인력을 배치하고, 권한을 확대하여 한국인의 일상생활을 더욱 철저히 감시·통제하였다.

특히 1925년에 제정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은 조선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뿐 아니라, 민족주의 운동까지 폭넓게 탄압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항일 민족운동을 비롯한 각종 정치적 저항을 철저히 억압하는 법적 도구가 되었다. 일본은 「치안유지법」을 통해 독립운동에 대한 감시를 대폭 강화하는 한편,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지역 유지들을 총독부 통치에 협력하는 세력으로 포섭하려 했다. 1920년 개정된 지방제도를 통해 도평의회와 부·면협의회 등의 자문기구가 설치되었고, 여기에 제한적인 선거권이 부여되어 지역 유지들이 제도권에 편입될 수 있도록 하였다(전상숙, 2022: 147-148).

이를 통해 일제는 지역 사회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회유하고 친일 세력을 양성하는 데 집중하였으며, 특히 지방의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쥔 인물들을 체제 내부에 흡수함으로써 민족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분열 전략은 식민 통치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항일세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동시에 합법적 정치활동의 공간을 축소시켜 사회운동이 제도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고, 김법린과 같은 청년 지식인에게는 공개적 운동이 아닌 비합법·비밀결사 형태의 저항 방식을 모색하게 만드는 구조적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2) 자원 공급지·소비시장화로 심화된 경제적 수탈 구조

3·1운동이라는 대규모 저항을 겪은 이후, 일본은 통치 방식을 문화통치로 전환하여 민족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조선을 본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원 공급지이자 소비시장으로 체계화하고자 했다. 특히 3·1운동 이후 치안 유지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이 증가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재정 부담이 커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에서 보다 적극적인 경제 수탈 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을 비롯해, 세금 징수와 각종 수탈 정책을 강화하여 재정적 자립을 도모하고자 했다(전상숙, 2022: 153).

산미증식계획은 사이토가 취임 직후 “반도의 부력(富力)을 증진하는 최첩경”이라며, 산업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수립·시행한 정책이다(朝鮮總督府, 1935: 390-391).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내부에서 심화된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조선을 본국의 식량 공급지로 활용하고자 한 조치였다. 산미증식계획은 조선에서의 쌀 생산을 증대시키고, 이를 일본으로 대규모 반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농민들은 토지 개량비와 수리조합비를 부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의 농업 구조는 일본의 필요에 종속되었고, 많은 농민이 경제적 압박 속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이토는 「회사령(會社令)」을 철폐하여 일본 자본이 조선에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해 식민지 조선 내 주요 산업은 빠르게 일본 기업에 의해 장악되었고, 조선 경제는 본국 경제의 이익에 맞게 구조화되었다. 일본 자본이 식민지 경제에 깊숙이 침투하면서 조선의 상공업은 일본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었고, 이는 조선인 기업가의 성장과 경제적 자립을 크게 저해하였다(유성희·박은경, 1998: 10).

이처럼 일본은 조선을 철저하게 본국의 경제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자원 공급지이자 소비시장으로 활용하였으며, 이를 위해 식민지 경제 구조를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산미증식계획과 「회사령」 철폐를 통한 경제적 수탈은 조선 사회 전반에 심각한 경제적 압박을 가하였고, 한국인들은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 당하며, 생계와 경제적 자립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경제 구조는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가 불평등한 종속 구조 속에서 진행되는 왜곡된 근대성이었음을 보여준다. 체감적 박탈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시기 조선 사회가 경험한 핵심은 ‘기대의 상승’이라기보다 ‘가치 능력의 하락과 상실’이었으며, 이러한 상실의 경험은 청년 지식인에게 기존 질서를 넘어서는 사회변혁의 필요를 각인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김법린 역시 이러한 경제적 현실 속에서 민족 공동체의 생존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훗날 그의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적 실천에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3) 그 결합 위에서 전개된 사회적 긴장과 저항의 확산

이러한 정치·경제적 압박은 무단통치기보다 더 교묘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조선인에게 가해졌고, 그 결과 농민과 노동자는 이전보다 더 심각한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농민들은 산미증식계획과 경제적 수탈에 맞서 쌀 수탈 반대운동과 농민조합 결성을 시도했으며,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에 항의하며,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파업을 전개하였다(장상환·정진상, 2001: 122-124).

1930년을 전후해서는 학생층을 중심으로 한 저항도 격화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은 일제의 민족 차별과 억압에 항거한 학생들의 집단적 시위였고, 이후 전국적인 학생운동으로 확산되면서 광범위한 항일 여론을 형성하였다. 사회주의 사상과 민족주의 사상을 매개로 한 독립운동 세력은 언론·출판 활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의열단·조선공산당 등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속적인 무장·비합법 투쟁을 전개하였다(장상환·정진상, 2001: 119-122).

이처럼 1920년대 일본은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도 여전히 조선의 병참기지화라는 일관된 목표 아래 한국사회를 정치·경제적으로 더욱 옥죄었다. 이러한 교묘하고도 가혹한 억압 속에서 농민·노동자·학생·지식인 등 다양한 계층은 각자의 위치에서 독립과 자유를 요구하는 저항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민족적 자존감과 독립 의식은 오히려 심화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긴장과 저항의 확산은 사회운동의 구조적·역사적 조건이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구조적 위기와 저항의 지형 속에서 불교지식인 김법린 역시 독립운동과 불교의 자주성 회복을 시대적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고, 1930년 만당 결성 및 이후의 실천을 통해 식민지 근대에 대응하는 불교적 사회운동의 한 형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의 선택은 단지 개인적 신념의 산물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구조의 장기적 모순과 이를 해석·문제화하는 시대인식,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화된 체감적 박탈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온 구조적 대응이었다.

Ⅳ. 만당 설립과 독립운동: 근대성 대응의 의미와 성격

앞선 장에서 확인했듯이,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의 심화, 그리고 그 위에서 확산된 사회적 긴장과 저항 속에서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은 불교지식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고, 김법린은 그 안에서 만당 결성과 독립운동을 비롯한 사회적 실천, 그리고 불교의 재편을 동시에 모색한 대표적 사례로 위치한다.

본 장에서는 김법린의 생애 경로를 따라가며 만당 결성과 독립운동이 어떤 문제의식과 선택의 연쇄 속에서 형성·전개되었는지를 검토하고, 나아가 그의 대사회적 실천과 불교계 내부 재편 시도가 어떤 방식으로 병행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김법린의 유년기와 출가

김법린은 1899년 경상도 영천군 신녕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령(金寧), 본명은 김진린(金桭隣), 법명은 법윤(法允), 호는 범산(梵山)이다. 이후 그가 사용한 법명 ‘법린(法麟)’은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다시 외국 유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바꾸어 사용한 이름이었다. 그의 유년기는 러·일 전쟁, 을사늑약, 정미7조약 등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단계적으로 잠식해 가던 시기와 겹친다. 그리고 1910년, 일본의 강압적인 한일병합으로 국권 상실이라는 민족적 경험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김법린은 회고록에서 “내 나이 열두 살 때 조국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통곡하는 어른들의 몸부림”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 경험이 “내 일생의 가는 길을 지배하는 자극”이 되었으며, “평생동안 조국 독립의 염원이 유일한 신념처럼 몸에 배었다.”라고 술회하였다(김법린, 정종 편, 1963: 60). 이 진술은 국권 상실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당대 청년에게 가치 능력의 하락과 상실로 경험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김법린의 초기 시대인식에서 독립은 선택 가능한 정치 노선이 아니라, 삶의 토대가 붕괴한 상태를 회복하려는 실존적 과제로 자리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곧 출가 결심으로 이어졌다. 김법린의 집안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일반적인 교육 경로를 통해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력을 기르는 것, 곧 지식과 교양을 갖춘 주체로 성장해야 함을 자각했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기반이 부족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그는 출가를 통해 교육 기회를 확보하고, 동시에 불교적 삶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14세가 되던 해, 그는 은해사(銀海寺)에 들어가 양혼허(楊渾虛, 1880-?)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후 은해사에서 사미계를 받은 뒤 범어사 명정학교(현 부산 금정중학교) 보습과로 옮겨 비구계를 수지하였다(조준희, 2009: 59). 이 시기의 출가는 결과적으로 김법린이 공적 문제를 해석·제기하고, 그 해석을 정당화하며, 조직화와 실천을 연결하는 불교지식인으로 이동하기 위한 생애적 기반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 한용운과의 만남과 3·1운동

김법린이 불교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독립운동가로서의 경로를 본격적으로 형성하게 된 계기는 한용운과의 만남이었다. 1917년 그는 서울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곧 중앙학림(中央學林)으로 편입하였다. 이 무렵 한용운은 중앙학림에 자주 특강을 하러 출입하고 있었고, 김법린과의 인연도 이 시기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조준희, 2009: 61).

당시 한용운은 계동에서 유심사(唯心社)를 조직하고, 잡지 『유심』을 발간하며, 불교를 매개로 민족의식과 근대적 주체 형성을 결합하려는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김법린은 이러한 활동을 직접 보조하며, 자연스럽게 한용운의 사상과 실천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후 1931년 한용운의 「정교를 분립하라」(『불교』 87호), 1932년 김법린의 「정교분립에 대하여」(『불교』 100호)가 나란히 발표되는데, 두 논설은 정치와 종교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며, 정교분리가 근대 국가의 기본 원칙이라는 점을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만해사상실천선양회 편, 2000: 119-126). 이는 김법린의 시대인식이 민족만이 아니라 근대적 국가 원리, 종교의 자율성,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묶는 문제정의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1919년 3·1운동은 김법린이 오랜 염원이었던 독립운동에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용운은 최린으로부터 3·1운동 추진 계획을 전달받은 뒤, 불교계 대표로 백용성과 함께 참여하였고,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자신을 따르던 청년 승려들을 불러 모았다. 이때 김법린에게 주어진 역할은 독립선언서 3천 매를 각 지역 사찰에 배포하고,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지역 시위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김법린은 이 과정을 회상하며, 한용운이 청년 승려들에게 “서산·사명의 법손임을 기억하여 불교청년의 역량을 발휘하라”고 독려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여러 달을 두고 궁금히 여기던 제군들에게 쾌 소식을 전하겠다.⋯ 유구한 역사 찬란한 문화를 가진 우리 민족이 왜적의 폭악한 기반을 항거하고 그 자주독립을 중외에 선언함은 당연한 일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결연히 나선 우리는 아무 장애도 없고 포외(怖畏)도 없다. 군 등은 우리 뜻을 동포 제위에게 널리 알려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 특히 군 등은 서산, 사명의 법손임을 굳게 기억하여 불교청년의 역량을 잘 발휘하라(김법린, 1946: 16–17). 그는 범어사에서 시위를 준비하며, 3월 3일에는 서울 시위의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부산과 마산 일대에 배포하여 지역의 항일 여론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3월 18일 범어사 만세운동은 김법린과 김상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들은 독립선언서 5,000여 매와 대형 태극기, 수많은 작은 태극기를 준비해 시위를 주도하였다(김순석, 2020: 19).

이 시기 경험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불교가 민족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체험하게 해주었다. 둘째, 공개적 시위와 결사 활동이 식민 권력의 탄압 속에서 지속되기 어렵다는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 주었다. 범어사 시위를 주도한 이후 그는 체포를 피해 상경했다가 상하이로의 밀항을 선택하게 된다. 이는 김법린이 공개적 공론장이 봉쇄된 조건에서 독립운동의 경로를 해외·국제 연대로 확장하게 되는 출발점이자, 이후 비밀결사형 조직화가 갖는 의미를 체득하는 계기가 된다.

3. 프랑스 유학과 국제 반제국주의 운동

상하이로 망명한 김법린은 곧바로 진로를 놓고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하나는 만주로 가서 무관학교에 입교해 무장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길, 다른 하나는 서구로 건너가 학문을 통해 독립운동의 지적 기반을 마련하는 길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젊음을 구사하기에는 무엇인가 허전함이 있어, 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가담할 것인가, 미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할 것인가 고민한 끝에, 우선 상하이로 돌아가 영어와 중국어를 공부하기로 했다.”고 적고 있다(김법린, 정종 편, 1963: 63-64).

결국 그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제정세를 정확히 이해하고, 민중을 계몽할 수 있는 학문적 자산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조준희, 2009: 65). 그리하여 중국을 거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1920년 마르세이유에 도착한 뒤 고등교육 과정을 밟았다. 1923년에는 파리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3년 만에 졸업하였고, 이후 근세철학을 중심으로 대학원에서 연구를 이어갔다.

유학 생활 동안에도 그는 독립운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보고」를 발표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 대회는 코민테른이 국제반항식민지대연맹(Liga gegen Imperialismus und für nationale Unabhängigkeit)을 조직하여 개최한 것으로, 식민지 민족과 피압박 민중의 연대를 목표로 한 국제적 반제국주의 운동의 장이었다.

한국은 유사 이래 독립국이었으며, 고유한 문화를 가진 나라이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점령함으로써 한국인은 끝없는 불행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 내 일본인 이민자의 수, 토지침탈, 한국인의 생활고, 한국인과 일본인 지주의 자본 비교, 학교 교육의 억압과 차별, 관료의 수와 대우 비교 등이 나타나 있다. 1919년 3월 1일 한국 학생들이 주도해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최후의 단계이며, 우리는 자유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은 무력이나 기만술로는 더 이상 한국을 지배할 수 없다. 일본에 대한 투쟁만이 우리를 자유와 생명으로 인도할 마지막이자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김순석, 2020: 46).

김법린은 연설에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 일본의 강제 병합 과정, 토지 침탈과 경제 수탈, 교육과 관료제에서의 차별 실태를 구체적으로 보고하고, 1919년 3·1운동의 의미를 국제사회에 설명하였다. 그는 일본의 지배가 폭력과 기만을 통해 유지되고 있으며, 일본에 대한 투쟁만이 한국인의 자유와 생존을 보장할 유일한 길임을 주장하였다. 이는 그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단지 민족 내부의 과제로만 보지 않고, 세계적 반제국주의 운동의 일부로 위치시키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경험이 갖는 분석적 함의는 명확하다. 식민지 조건은 단지 국내 정치공간을 봉쇄했을 뿐 아니라, 불교지식인으로 하여금 독립의 정당화 근거를 국제적 언어로 번역하고,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시대인식을 재구성하도록 만들었다. 즉, 프랑스 유학과 국제회의 경험은 김법린의 실천을 지적·운동적 차원에서 심화시키며, 이후 귀국 뒤 대사회적 실천(독립운동)과 “내적 재편(불교의 근대화)을 병행하려는 전략적 구상으로 연결된다.

4. 귀국 이후 불교계 현실 인식과 만당(卍黨) 결성

1920년대 후반, 김법린의 해외 활동 소식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을 통해 국내에도 알려졌다.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서의 활동이 전해지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그에게 귀국을 요청하였다. 당시 그는 박사학위 취득 여부를 고민하고 있었으나, 결국 조국의 현실과 불교계의 요청을 받아들여 1928년 2월 귀국을 결심하였다. 귀국 이후 그는 불교계 안에서 독립운동과 민중 계몽,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한국불교의 현실은 매우 암담했다. 사찰령과 총독부의 종교정책 속에서 불교는 식민지 통치의 도구로 전락해 있었고, 근대 학문과 사회변동에 대한 체계적인 대응도 부족했다. 김법린은 앞서 구미 학계에서 접한 불교학 연구의 수준과 비교하면서 한국불교의 후진성을 통감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불교계 내부의 인재 양성과 학문적 기반 구축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구미(歐米) 학계(學界)의 불교학(佛敎學)의 지위는 멀리 있는 우리가 상도(想到)치 못할 만큼 중대한 것이다. 구미(歐米)의 어떤 큰 학부(學府)를 물론하고, 인도학(印度學)과 불교학(佛敎學)의 강좌(講座)가 없는 곳이 없다. 불교(佛敎)가 구미(歐米)에 학술적(學術的)으로 소개(紹介)된 지 겨우 일세기(一世紀) 여(餘)이나, 역대(歷代)의 석학(碩學) 천재(天才)들이 배출(輩出)하여 필생(畢生)의 노력을 경주(傾注)해 얻은 오늘의 연구(硏究) 성적(成績)은 동양(東洋)의 불학도(佛學徒)로 하여금 경탄(驚嘆)케 할 만한 것이다. 이에 필자(筆者)는 구미(歐米) 불교학(佛敎學)의 가장 중요한 분과(分科)인 불전(佛典) 연구(硏究)의 개관(槪觀)을 약초(略抄)하고자 한다(김법린, 1928, “歐美學界와 佛典의 硏究”, 『불교』, 49호).

특히 이 대목은 Ⅲ장에서 확인한 구조 조건—종교 행정과 제도 통제—이 김법린에게 단순한 제약이 아니라 불교의 자율성과 사회적 설득력이 상실된 상태로 경험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는 식민지적 근대 조건을 정치·경제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불교 자체가 근대적 공론장 속에서 발언권을 상실한 문제로 정의한다. 바로 이 시대인식이 이후의 조직화와 실천을 매개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비밀결사 만당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1930년 5월 결성된 만당은 불교계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보다 광범위하게 민족운동과 사회개혁을 동시에 지향하는 비밀조직이었다. 안타깝게도 만당은 1938년 일본에 의해 발각·해체되기 전까지의 구체적 활동내역이 충분히 남아있지 않아, 조직 구조나 활동 내용을 면밀히 복원하기는 어렵다. 다만 강석주·박경훈(1980)의 연구에 따르면, 만당 당원은 입당 시 불전(佛前)에서 두 가지 서약을 해야 했는데, 하나는 “비밀한사엄수(秘密限死嚴守)”, 다른 하나는 “당의(黨議)에 대한 절대복종”이었다(강석주·박경훈, 1980: 200-201). 비밀을 누설할 경우 목숨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서약과, 입당 희망자의 과거 경력과 사상까지 전원 검증 후 만장일치로 입당을 허용하는 방식은, 만당이 식민 권력의 감시를 우회하며 고도의 정치·사상적 결속을 추구했던 조직이었음을 보여준다.

귀국 이후 김법린의 활동은 만당과 같은 비밀결사 활동과 더불어, 교육·포교의 영역에서도 전개되었다. 특히 1935년 경남 사천 다솔사에서 그는 최범술, 김범부와 함께 학원을 운영하며 불경과 한국 역사를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다솔강원의 원장으로서 불교 교학뿐 아니라 한국사의 이해를 통해 조국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강미자, 2010: 186). 이러한 활동은 불교가 단순한 출세간적 수행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의식과 역사 인식을 고양하는 교육 운동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5. 학문적·사상적 근대화 시도

귀국 이후의 현실 인식과 만당 결성, 다솔사에서의 교육 활동은 한편으로 김법린으로 하여금 불교의 학문적·사상적 토대를 근대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더욱 자각하게 만들었다. 만당이 식민지 조선에서 비밀결사 형태의 조직적 실천을 전개한 장이라면, 서구 불교학 방법론과 불교문헌학의 도입은 그 실천을 떠받치는 지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는 독립운동이라는 대사회적 레퍼토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조건에서, 불교가 근대적 공론장에서 설득력을 회복하기 위한 대내적 재편의 레퍼토리로 이해될 수 있다.

김법린은 1920년 프랑스로 유학하여 유럽의 철학·사회과학·불교학을 수학한 뒤 1928년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그는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있던 각황사에서 「구미의 불교」, 「불교와 쇼펜하우어의 철학」, 「인도철학사에서 불교의 지위」, 「불교윤회관에 대하여」 등의 강연을 통해 서구 사조와 근대 불교학을 소개했다. 또, 『불교』 지면에는 「근대철학의 비조 르네 데카르트」, 「歐美學界와 佛典의 硏究」, 「뒤르켐의 종교론」, 「불란서의 불교학」 등을 연달아 발표하였다(김영진, 2023: 45-49). 이는 서구 근대철학·사회학과 유럽 불교학의 성과를 조선 불교 담론 안으로 끌어들여, 불교를 근대 학문 언어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김법린은 불교를 포함한 모든 사상이 ‘인간 문화의 사적 진전(史的進展)’ 속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라고 보면서, 이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 형식으로 고정시키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무릇 한 사상의 흥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 문화의 사적 진전의 필연성에 제약되어 그 형식과 내용이 시대적으로 착색되고 지방적으로 윤색되고 채색된다(김법린, 1932: 7).

나아가 그는 ‘사상의 시공적 상대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사상 형성의 역사적·사회적 조건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은 기존 연구를 사적 비판의 태도를 몰각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김법린은 동아시아 불교의 교판론이 서로 다른 시기의 사상들을 일대시교라는 틀 안에 평면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실제 역사 속에서 발생한 모순과 당착을 은폐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번쇄한 훈고와 견강부회의 주석에 의존하는 교학을 스콜라주의적 한계로 비판하였다(김영진, 2023: 50-53). 이러한 진술에 비추어 보면, 그는 서구 근대불교학에서 경전성립사 연구와 그에 기초한 불교문헌학을 특히 중시하는 방법론적 방향을 받아들였으며, 이를 한국 불교 연구에 적용하려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그는 서구 근대불교학의 핵심 방법론을 경전성립사 연구와 그에 기초한 불교문헌학으로 파악하고, 이를 한국불교 연구에 도입하고자 했다. 「십이인연에 대하여」에서는 기무라 다이겐(木村泰賢)의 『원시불교사상론』을 요약·번역하면서, 연기관을 상키아·니야야 등 동시대 인도 사상계의 인과론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김영진, 2023: 53-54). 불교 연기관을 인도 철학사 전체 속에서 위치 짓는 이러한 작업은 교설을 초역사적 진리가 아닌, 특정한 사상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담론으로 읽어내려는 시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김법린의 서구 불교학·불교문헌학 방법론의 수용은 서양철학·사회학의 수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데카르트와 뒤르켐을 비롯한 서양 근대사상가들을 소개함으로써, 불교를 근대 학문 언어와 사상 지형 속에 위치를 지우고자 했다. 엄연석은 이러한 수용을 동서 사상의 해석학적 지평융합으로 규정하며, 김법린이 서양철학을 매개로 대중불교 혁신과 사회참여적 불교를 모색했다고 분석한다(엄연석, 2021: 354-355).

이처럼 김법린에게 서구 불교학과 불교문헌학, 서양철학·사회학의 수용은 식민지 조선의 왜곡된 근대성 속에서 불교가 다시 사회적 발언권과 설득력을 획득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경전과 사상을 역사적·비판적으로 독해하고 근대적 합리성을 갖춘 불교지식인 집단을 형성하는 일은 만당을 비롯한 비밀결사 활동과 다솔사를 중심으로 한 교육·계몽 실천을 가능하게 한 학문·사상적 기반이었다.

정리하면, 김법린의 실천은 ① 구조적 위기―억압·수탈·운동 장―라는 조건 위에서, ② 상실의 경험이 시대인식―문제정의·정당화―을 형성하고, ③ 그 결과로 비밀결사―조직화―와 독립운동 및 불교개혁이 병행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식민지적 근대 조건에 대한 불교지식인의 근대성 대응 경로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Ⅴ. 맺는말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본 연구는 근대성과 다중적 근대성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형성된 불교지식인의 사회운동적 실천을 분석하기 위한 최소한의 분석틀을 마련하였다. 특히 사회운동 연구에서 제기되어온 질문군을 참조하여, ① 사회운동은 언제·왜 발생하는가(구조 조건), ② 누가 참여하는가(주체 형성), ③ 어떻게 조직되는가(조직화 경로), ④ 무엇을 수행하는가(실천 레퍼토리)라는 네 가지 질문을 핵심축으로 설정하였다(Jeff Goodwin and James M. Jasper, 2015: p.7). 다만 본고는 거대한 설명이론을 적용하기보다, Ⅲ장에서 실증적으로 확인 가능한 구조 조건을 포착하기 위해 식민지적(종속적) 근대성을 조작적 정의로만 사용하였다. 구체적으로는 ① 문화통치 하에서 재조직화된 정치적 억압 구조, ② 자원 공급지·소비시장화로 심화된 경제적 수탈 구조, ③ 그 결합 위에서 전개된 사회적 긴장과 저항의 확산이라는 세 가지 축을 통해 구조 조건을 확정하고, 그 조건이 곧바로 실천을 산출한다는 결정론을 피하기 위해 시대인식을 매개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틀 위에서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은 표면적으로는 문화통치로 전환했으나, 실제로는 법·경찰·행정·검열과 포섭 전략을 통해 억압이 재조직화되는 한편, 산미증식계획과 회사령 철폐 이후의 자본 침투 등으로 경제적 수탈 구조가 심화되며, 그 결과 농민·노동자·학생·지식인 층의 저항이 다각화되는 국면을 경험하였다. 이 조건은 불교가 전통적 수행 공동체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근대적 주체 형성과 사회변동 과정에 개입하는 행위자로 전환할 것인지를 강하게 요구하는 압력으로 작동했다.

김법린의 생애 경로는 이러한 구조적 위기가 한 개인의 실천을 규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조건이 불교지식인에게 상실(가치 능력의 하락)로 체험되고, 그 체험이 시대인식(문제정의·정당화)을 형성하여 이후 조직화(비밀결사)와 실천 레퍼토리(대사회·대내)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년기의 국권 상실 경험과 출가 결단, 한용운과의 만남과 3·1운동 참여, 상하이 망명과 프랑스 유학, 국제 반제국주의 운동 참여, 귀국 이후 만당 결성과 교육 활동에 이르는 궤적은, 식민지적 근대 조건 속에서 민족운동과 불교 내부 재편을 결합하려는 실천 모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드러낸다.

또한 만당은 조직 형태·동원 방식·연계 범위를 체계적으로 복원하기 어렵다는 자료적 제약이 분명하지만, 합법적 공론장이 제도적으로 축소되는 조건에서 실천이 비밀결사형 대응으로 수렴하는 양상을 확인하는 핵심 사례로서 분석적 의미를 갖는다. 만당을 통해 김법린의 실천은 대외적으로는 독립운동을, 대내적으로는 불교의 자주성과 근대화를 병행하려는 이중의 지향을 드러낸다.

김법린의 학문적·사상적 시도는 이러한 실천을 떠받치는 지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서구 철학·사회과학·불교학의 성과를 적극 소개하고, 사상과 교설을 역사적·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통해 전통 교학의 한계를 비판하였다. 이는 불교가 근대적 공론장과 지식 체계 속에서 설득력과 발언권을 회복하기 위한 전략이자, 불교지식인이 수행한 의미 생산·담론 생산의 작업이었다.

요컨대 김법린의 실천은 구조–행위–의미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었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이 재조직화되는 식민지적 근대 조건과 그 조건을 상실로 경험하며 문제화한 시대인식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비밀결사·교육·학문 활동이 결합하여 하나의 사회운동적 경로를 구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활동은 민족주의적 열정이나 개인적 도덕성만으로 환원되기 어렵고, 다중적 근대성의 장 속에서 불교가 어떻게 자기 재편을 시도하며 사회적 실천의 주체로 나아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본 연구는 김법린의 실천을 둘러싼 거시적 구조 조건과 생애 경로를 우선적으로 조망하는 데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개별 저술·강연·잡지 담론에 대한 미시적 텍스트 분석은 제한적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또한 만당의 조직 구조와 활동을 정밀하게 복원하기에는 사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제약도 존재한다. 따라서 구조 조건—시대인식—조직화—실천 레퍼토리의 연쇄를 보다 세밀하게 추적하기 위해서는 김법린의 텍스트와 동시대 담론을 정밀 분석하고, 한용운·백용성 등 다른 불교지식인과의 비교를 병행하는 후속 연구가 요구된다.

그럼에도 본고의 재해석은 한 인물의 공헌을 재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근현대 한국불교가 식민지적·종속적 근대성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대사회적 실천과 대내적 재편을 결합·병행하려 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나아가 근대성을 단순한 시대 배경이 아니라, 실증적으로 확인 가능한 구조 조건이자 의미 구성과 실천을 촉발하는 역사적 압력으로 파악하는 분석틀의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관점은 향후 다른 불교지식인의 사례, 그리고 해방 이후의 다양한 불교사회운동 흐름을 재검토하는 연구로도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Notes

이 과정에서 본 연구는 구조적 긴장과 통제의 누적이라는 운동 가능조건의 정리, 상실의 체험이 동기로 전화되는 동기화의 설명, 식민지 국가구조와 국제질서라는 장기 조건의 위치 설정이라는 세 수준을 구분해 보조 준거로 삼는다. 구체적으로 본 연구는 스멜저의 구조적 긴장 및 촉발요인과 거어의 체감적 박탈의 유형화, 그리고 스카치폴에서 국가구조와 국제질서의 장기 제약을 각각 취하되, 그 범위를 넘어서는 이론적 논증은 채택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들 이론을 통해 인과를 입증하기보다, 구조→의미→조직화→실천의 매개모형에 따라 식민지 조선 불교지식인의 실천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가능해졌는지를 해석적으로 정렬하는 데 목적을 둔다.

다만, 종속이론이 그 자체로 완결된 설명체계가 아니라, 비판과 수정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점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본 연구는 이를 적용하기보다 식민지 조건을 개념화하기 위한 최소준거로만 사용한다.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한국 근․현대 불교사회운동에 대한 사회운동론적 재해석”(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6, pp. 59-72, 162-170)의 일부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독립운동을 사회운동의 범주에서 논의하는 것은 개념 설정의 문제를 수반한다. 본고는 사회운동을 특정 의제의 유형으로 한정하기보다, 정부(또는 지배 권력)가 요구 관계 속에서 요구 제기자(claimant), 요구의 대상(object of claims), 요구 관계의 당사자(party to the claims) 가운데 하나로 포함되는 공적․집합적 상호작용의 장, 즉 경합적 정치(contentious politics)의 한 형식으로 위치 짓는다(Doug McAdam, Sidney Tarrow and Charles Tilly, 2001: 5).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운동은 경합적 정치 가운데 권력자와의 지속적 경합이 일정한 조직화 양식과 정당화의 공유를 통해 응집된 형태로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독립운동을 정부와의 경합이 전개되는 경합적 정치의 한 양식으로 이해하고, 이를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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