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1인 가족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보편적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결혼을 안하는 젊은층이 증가한지도 오래 되었다. ‘저출산’, ‘고령화’라는 말은 실과 바늘처럼 함께 다닌지 오래 되었다. 배우자를 떠나보내고 자식을 독립시킨 노인들도 대부분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 이것은 도시도 시골도 사정은 비슷하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어도 이혼하거나 별거해서 가족 간에 연락이 끊어진 채 홀로 지내다가, 고독사(孤獨死)를 맞이한 사람들이 하루면 전국적으로 수십 명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급속한 개인화와 가족 해체, 고령화의 진행 속에서 한국은 점차 ‘무연사회(無緣社會)’로 변모하고 있다.
SNS, 즉 사회관계망서비스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관계가 오히려 ‘연결’보다는 ‘고립’과 ‘단절’을 향해 치닫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1인 가족은 잠재적 독거노인이며, 고독사(孤獨死)하거나 무연고(無緣故) 사망자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인간이 서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단절과 고립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무연고 사망자’는 그 극단적인 사회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살아 있을 때도 사회적 관계망에서 배제되고, 죽음 이후에도 기억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사회 제도나 복지 차원의 문제를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적 문제 즉, 이 시대라 앓고 있는 ‘관계의 상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본 논문은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緣起)’와 ‘자비(慈悲)’의 관점에서 이 시대 무연사회(無緣社會)의 문제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연기의 가르침은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여 성립함을 밝히고 있다. 자비(慈悲)는 그 인연의 끈을 회복시키는 실천적 힘으로 작용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무연사회는 무연사회를 이루는 어떤 ‘조건’이 우리 사회에 조성됐고, 그것을 유연(有緣)사회로 변모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조건들을 우리가 다시 제안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무연사회와 무연고 사망자 문제를 단순히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이 아니라, 현대 불교가 새롭게 응답해야 할 수행적·사회적 과제로 보고, 불교적 관계 회복의 방향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II. 무연사회의 개념과 현상
무연사회(無緣社會), 고독사(孤獨死)에 대한 시대적 고민은 이미 십여 년 전부터 대두되었다. 고령화 사회, 고령 사회 모두에서 고독사(孤獨死)는 중요한 사회적 문제임이 인식되었다. 특히 1인 가구 증가와 남성 독거 노인의 고독사 위험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에 고독사 예방을 위한 정책적 수립이 매우 시급함을 거론하였다(한무명초:2025).
‘고독사(孤獨死)’는 홀로 임종을 맞이한 후 일정시간이 경과한 후 발견되는 사망의 형태를 뜻한다. ‘무연고 사망’은 시신을 인수할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가 있더라도 인수를 거부하는 경우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시신 인수 거부’는 혈연관계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단절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즉, ‘무연고’라는 말 속에는 서로가 ‘연결되고 싶지 않은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라 볼 수 있다.
무연사회(無緣社會)란 말 그대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없는 사회, 인연(因緣)이 없는 사회’를 뜻한다(NHK 무연사회 프로젝트2012). 한국사회보다 이러한 현상이 몇 년 앞서서 진행되는 일본의 경우, 이렇게 무연고로 지내다 죽은 사람에 대해 ‘행려사망자’라 하며, 이들은 재정적 이유로 인해 간단하게 ‘몇 줄로 정리된 인생’이 된다.1) 또한 이들은 살아서도 혈연관계나 지연관계의 사람들과 연락을 두절하고 살지만, 죽어서도 그 시신이 인수거부 당함으로서 두 번의 관계 단절을 겪게 된다. 이들의 시신은 병원에서 해부용으로 위임되거나, 그들의 유골은 일정 장소에 보관되었다가 함께 처리되는 방식으로 나라에서 관리하게 된다.
한국 사회의 무연고 사망자는 2019년 2,656명에서 2023년 5,415 명으로 크게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통계청 인구총조사에 의하면 1인 가구는 2019년 6,147,516가구(30.2%)에서 2023년 7,829,035가구(35.5%)로 늘어나는 등 가족구조의 변화가 크게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현재 전국 15개 시·도와 191개 시군구에는 공영장례에 관한 조례가 마련되어 무연고 사망자와 수급자, 미성년, 중증장애인, 고령자 등에 대해 공영장례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2)(원신원 外: 2025). 보건복지부의 통계자료도 무연고 사망자의 증가추세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3).
우리나라의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볼 수 있는 자료로는 성유진(2017) 외 2인이 취재한 『남자 혼자 죽다』라는 단행본이 있다. 이들은 무연사한 209인의 기록을 취재함으로써 무연고자들의 거주처와, 무연고자가 되는 과정과 배경들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외환위기가 무연고자가 되는 큰 영향으로 작용하며 특히 경제적 부담을 지는 50대 남성들이 경제적 빈곤과 더불어 무연고자로 지내다 고독사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미 무연사회의 고독사,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공론화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황이다. 지금은 무연사회 현상의 초기단계가 아니라, 한창 정점을 향해 가고 있는 시점이라고 인식해도 무방해 보인다. 이러한 추세는 일본에서 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무엇이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하는가. 초고령 국가이자, 고독사가 증가하는 현상은 이혼과 사별 또 미혼율 증가가 그 원인이 되고 있다(고타니 미도리, 2019: 4). 더군다나 고독사의 증가현상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고령화에 따른 다사(多死)사회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장례의식은 대체적로 간소화되고 있으며, 화장(火葬)만으로 끝나는 장례가 3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또 지자체에서 무연고사망자 수습으로 인한 재정부담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윤강인(2023)은 공영장례의 실태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사무를 위탁받는 민간단체에 대한 평가는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동참, 그들에 의한 무연고 사망자 애도, 무연고 사망자의 존엄성 유지 등 공영장례의 취지에 맞는 적절한 요소들이 구성해야 한다는 점과, 또한 장례와 관련된 자원을 갖추지 못한 지역사회 구성원 조직에 대해서는 공영장례와 관련된 교육 기회를 주기적으로 마련하여 무연고 사망자 장례에 대한 지역사회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는 구체적 제안을 하고 있다.
고독사라 부를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우에노 지즈코는 다음 네 가지를 들고 있다(우에노 지즈코, 2022: 86).
중요한 것은 살아있을 때 고립되지 않는 것이다. 또는 지인들과의 연락을 끊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본인이 자발적으로 혼자 살기를 택한 것과, 어쩔 수 없이 혼자 살게된 것은 엄연히 다르다. 따라서 양자가 겪는 우울과 불안의 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우에노 치즈코, 2022: 36). 어차피 혼자 살아가는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최철주(2024)는 현실적인 답변을 한다. 주변에서 또는 스스로 겪는 노화와 환경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그리고 1인 가족 간에 정보를 공유하고 나누는 일로서 대면하는 것이다. 관계의 자발적 단절이든 불가피한 단절이든, 궁극적 결론은 죽음이다. 죽음의 순간에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거나, 사후의 문제를 담당해줄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1인 가구의 삶은 상당부분 심리적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연사회가 사회문제인 것은 고립과 단절에 의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누구나 겪게 된다는 점에 있다. 무연사회가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고립과 단절이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구성원 누구에게나 신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작용하는 까닭이다.
고립과 단절이 보편화되는 현상은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추세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산업사회가 발달된 나라에서는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무연사회와 고독사, 무연고 사망자 증가 문제를 전반적으로 경험하고 있다(한무명초, 2025).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관계의 소멸’이라는 핵심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서 관계의 소멸이란, 인간이 맺는 사회적·정서적 연결이 점차 약화되어 개인의 삶과 공동체적 삶 모두에서 관계적 지원과 상호작용이 현저히 감소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권혁남(2025)은 고독사 위험을 사회적 자립형, 정서적 고립형, 구조적 취약형, 고위험 배제형으로 네 유형으로 구분하고, 위험 양상과 개입 방식이 서로 다름을 지적한다. 본 장에서 논의되는 관계 소멸의 원인들은 이러한 유형과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개인주의적 선택과 정서적 고립의 문제이다. 현대인은 관계에서 얻는 이익보다 위험과 부담이 크다고 판단하면, 스스로 관계를 회피하거나 단절하는 선택을 한다. 또한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나 갈등 경험은 정서적 고립형 위험군의 특성과 연결된다. 이 유형에서는 자발적 관계 회피가 고독사 위험을 높이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SNS 연결망의 확산과 표면적 연결의 문제이다. 사회적 연결망서비스(SNS) 발달은 역설적으로 고립과 단절에 기여한다. 사람들은 온라인 상에서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으나, 실제로 깊은 인간관계는 감소한다. 이러한 현상은 정서적 고립형과 일부 사회적 자립형 유형에서 두드러지며, 관계의 질적 결핍이 지속적으로 누적되는 결과를 낳는다.
셋째, 경제적 빈곤과 구조적 취약의 문제이다. 경제적 어려움은 사람들을 만남에 제한을 두게 되고, 사회적 참여를 감소시켜 구조적 취약형 위험군과 직결된다. 돈을 써야 가능한 관계 맺기 활동에서 소외되는 경험은 자연스럽게 사회적 고립을 강화시킨다. 이는 무연고 상태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인다.
넷째, 공동체 약화와 고위험 배제형의 유형이다. 가족과 공동체의 역할이 약화되면서, 사람들은 이전보다 관계적 의무와 책임에서 자유로워졌다. 반면, 그로 인해 도움과 연대가 필요한 고위험군은 사회적 지원망 밖으로 배제될 수 있다. 공동체의 약화는 고위험 배제형 위험군의 증가와 관계되며, 사회적 안전망 구축 필요성을 증가시킨다.
결과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관계의 소멸’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나 우연한 환경으로 인해 조성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사회·기술적 요인이 상호작용한 구조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불교적 실천과 연계했을 때, 개인의 정서적 안정과 공동체 회복, 삶의 의미와 연대감을 회복하는 수행적·사회적 대안 마련의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지역사회의 연대망 회복, 정서적 고립 해소를 위한 관계 회복 프로그램, 그리고 마음챙김과 자비 수행을 통한 개인의 내적 안정 등은 고독사 위험 감소와 관계 회복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III. 불교의 연기(緣起)와 자비(慈悲)
만일 이 인(因)이 없으면 곧 저것이 생기지 않고, 이것으로 인하여 저것이 있게 된다. 만일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곧 멸한다. 그래서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 생을 인연하여 노·사가 있는 것이다. 만일 무명이 멸하면 행이 곧 멸하고 나아가 생이 멸하면 곧 노·사도 멸한다고 말한 것이다.4)
주지하다시피, 연기법(緣起法)은 붓다가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법계(法界) 즉 이 세상에 항상 존재하는 자연적 이치이다. 자칫 연기법에 대한 경전의 표현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는 자명하고 뚜렷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적이고 상호 의존적(相互依存的)인 관계로 이어진 존재라는 것. 즉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가진다는 것을 현대사회는 여러 가지 구조적 이유로 사람들로 하여금 망각(妄覺)하게 만들어 버린다.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서로 간에 의지하고 있는 경험, 세상을 혼자서 살고 있지만은 않다라는 것을 안타깝게도 많은 현대인들이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조차 그러하다. 그들은 기계의 부품처럼 사회에서 기능하고 감정적으로 메마르기 쉬운 환경에 노출된다. 진솔하게 대화하고 마음을 터놓을 시간이 부족하다. 현대사회는 가족이 모두 둘러앉아 밥 한 끼 먹기도 쉽지가 않다. 특히 사람 간에 갈등이 생겼을 때 생기는 피로와 고통을 사람들은 직면하고 싶지 않다. 회피하거나 고립, 단절하는 방법으로서 관계의 어려움에서 도피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편안한 1인으로서의 삶이자, 독거노인으로의 이행, 고독사인 것이다. 과연 이 수순이 최선인 것일까.
행복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미도리(고타니 미도리, 2019)는 ‘우리들은 사람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성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라고 서술한다. 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원칙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무연고자일 수가 없다. 다만 사회적 조건과 합의에 의해 ‘무연고자’로 보이고, 이름 불리게 될 뿐이다. 무연고사망자들의 경우, 본인의 바람과 상관없이 그러한 삶을 살다 생을 마감하게 된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아픔이다. 고립과 소외, 단절의 현실에 대해 불교는 어떻게 ‘연기(緣起)’의 이치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체험하게 할 것인가.
실상은 연기(緣起)의 세계임에도 현상은 단절(斷切)의 세계이며, 단절의 세계에서 연기의 세계를 다시 구축해 나가는 것이 이 시대 불교계의 역할이라고 본다.
불교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바탕은 무아(無我)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변화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무연사회와 고독사라는 현상이 생겨났고,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그 흐름을 바꾸는 일도 가능하다. 삼법인(三法印)의 진리는 단순히 현실을 고증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불교는 고통의 직시와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천적이다. ‘열반’이라고 표현되는 고통이 멸한 상태가 제시되어 있고, 수많은 보살들이 추구하는 바도 깨달음, 열반의 상태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깨달음’이 추구하는 것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깨달음이다. 깨닫기 위한 과정과 방편으로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다양한 행과 실천이 십지(十地)보살의 수순 과정이 된다. 이것은 『십지경』에도 십지보살의 단계를 통해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사회의 문제가 단지 세간의 일로만 치부되어선 안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비(慈悲)’ 또한 연기(緣起)와 더불어 불교를 상징하는 중심적 사상이다. 자애심을 닦는 일은 ‘모든 존재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 관점을 몸소 실천하는 일이 된다. 무연고 사망자들이라 사회적으로 부르고 있지만, ‘무연고’인 사람이 실질적으로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불교적 입장에서 본 진실이다. 그들이 외롭게 살다가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그들이 죽고 나서 사회적 ‘처리’가 되기 전에, 불교계가 할 수 있는 일이 지금 여기 산재해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연기(緣起)와 자비(慈悲)를 그들의 삶 속에서 체험하게끔 돕는 일이다.
일체 중생 가운데 구호(救護)를 받지 못하는 자, 귀의하여 나아가지 않는 자, 의지할 곳이 없는 자, 지견(知見)이 없는 자들을 보살이 보면 즉시 자비의 마음을 낳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다. 만약에 남을 위하여 길을 열어 가르침을 보이지 못한다면, 보살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들이 용감하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는 것은 곧 비심이 견고함을 말한다.5)
자비(慈悲), 동체대비(同體大悲), 세계일화(世界一華), 불이(不二) 등등. 불교의 사상은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표현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깨달음의 높은 경지는 즉 무분별(無分別)의 경지이고, 무분별의 근간에는 자비심이 있다. 『유마경』에서 유명한 표현 중 하나가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이다. 그것은 단순한 연민심이 아니다. 당신의 아픔으로 인해 연기적 관계에 있는 나 또한 영향을 받게 되는 이치를 여실히 아는 것을 통찰했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다. 무연사회의 흐름을 유연(有緣)사회로 돌리려는 노력과 무연고자들에게 다시 좋은 인연을 지어 주는 일. 이것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의 현대적 실천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무연고자들이 나와 관계된 사람이 아니라는 상(想)을 깨야 하고, 무연고자들은 내가 고립된 개인이라는 상(想)을 깨야하기 때문이다. 무연의 자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모든 부처님의 힘과 기세도 불가사의하다.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은 중생이란 생각을 여의지 못하면서 자비심을 내지만, 모든 부처님은 중생이란 생각을 여의면서 자비심을 내신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시방의 중생의 모양을 얻을 수 없는데도 중생이란 모양을 취하면서 자비를 내지만, 지금 모든 부처님은 시방으로 중생을 구해도 얻을 수도 없고 또한 중생의 모양을 취하지도 않으면서 능히 자비를 내시기 때문이다. 마치 『무진의경(無盡意經)』 가운데 말씀하시기를 “세 가지의 자비가 있나니, 중생연(衆生緣)과 법연(法緣)과 무연(無緣)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6)
즉, 자비는 인연 있는 중생에게도, 법의 연으로 엮인 인연에게도, 그리고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도 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금강경』에서 보리심을 낸 보살이 ‘내가 모든 중생을 무여열반에 들게 하리라는 서원을 하되,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된 바가 없다고 여겨야 한다’는 말과 상응한다.7)
초기 경전에서는 자애의 마음을 여러 방향으로 키워야 한다는 표현으로 자비의 증장을 권하고 있고, 대승 경전에서는 어떤 고정된 틀에 머무르지 말고, 자비를 행하는 것이 마땅히 보리심을 낸 보살이 해야 할 일이라 말한다. 초기불교부터 대승불교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바로 자비심이다. 그리고 그 자비는 어떤 것에 머물거나 한계를 짓지 않는 ‘능동적인 자비’인 것이다.
현대의 무연사회(無緣社會)는 개인의 삶이 스스로의 여건과 상황, 부분적 선택과 사회적 구조에 의해 단절되는 구조 속에서 발생한다. 이에 불교적 관점에서 사찰은 단순한 신행 공간을 넘어, 수행과 일상이 결합된 ‘공동체적 삶의 장’으로서의 승가(僧伽)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도량’에 대한 보다 거시적인 관점을 공유함으로서 가능한 일이 된다.
자비로운 마음이 도량이니, 뜻을 평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연민의 마음이 도량이니, 고통을 인내하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도량이니, 법으로써 사람을 즐겁게 하기 때문입니다. 수호하는 마음이 도량이니, 인도[導]하는 대로 집착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신통의 마음이 도량이니, 6신통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직 힘쓰는 마음이 도량이니, 성냄이 없기 때문입니다. 멸진의 마음이 도량이니, 사람들을 제도하기 때문입니다.8)
이는 ‘상호의존(相互依存)’과 ‘연기(緣起)’ 사상을 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실천적 대안이 된다. 실제 승가(僧伽)에서도 공동체가 무너지고 사찰운영의 사유화, 개인화 현상이 확산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여기에서는 무연사회의 고독사, 무연고사망자에 중심을 두어 서술하고 있지만, 승가 구성원 역시 이 무연사회의 흐름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 승가의 현주소이다. 본고에서 제시하는 사안들은 단순히 사회 참여적 대안이 아니라, 승(僧)과 속(俗) 모두를 위한, 상생(相生)의 제언이기도 하다.
사찰이 1인 가구, 노년층, 사회적 고립자를 위한 열린 수행 공동체로 기능한다면, 개인의 고립을 완화하고 ‘함께 살아감’의 연기를 체험하는 장으로 발전할 수가 있다. 하나의 모범적인 사례로는 화엄사의 승려복지 제도를 들 수 있다. 누구보다도 자칫 고독사와 무연고사망에 노출될 수 있는 사람들은 출가수행자들이다. 걱정없이 공부와 소임에 전념한 이후에는 노후에 이르러서도 안정적인 수행 환경과 임종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승려 복지의 성공적인 선순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9) 그 외에도 1인 가구의 관계 맺기와 상호소통을 위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의 활성화, 자비명상 프로그램의 지속적 운영과 확대, 다양한 세대별 1인 가족 공동주거 확대10) 등 이러한 방향은 궁극적으로 ‘무연(無緣)’을 ‘유연(有緣)’으로 전환시키는 불교적 연대의 토대가 된다.
불교의 자비(慈悲)는 단순한 감정적 동정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스스로의 고통으로 인식하는 실천적 연민이다. 실제 사회 제도적 측면이나 병원 현장 등에서는 이러한 실천적 연민이 결여된 업무적인 차원으로서 돌봄이 이루어지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실제 무연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도적 서비스보다도, 정서적이고 인간적 연결감이다. 그것은 제도가 해결하지 못한 영역이고, 종교계에서 적극적으로 실천되어야 할 부분일 수 있다. ‘영적 돌봄’은 꼭 임종에 임박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살아서 기능할 때, 종교지도자들과 포교사, 재가 불자들을 통해 사회적 돌봄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찰에서는 절에 사람이 찾아 오기를 기다리는 포교가 아닌, 사회에서 불교의 자비가 필요한 곳을 찾아나서는 수고를 감내해야 하는 시대이다. 어떻게 자비를 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유마경』의 다음 대목을 잘 새겨볼 필요가 있다.
문수사리가 말했다.
“이렇게 관찰하는 사람은 어떻게 자(慈)를 행합니까?”
유마힐이 답했다.
“이렇게 사람을 관찰하면 인물이 환(幻)이 되고, 법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서 법을 설하게 된다. 자비로 지(止)를 닦고 지(止)로써 자비로운 것을 일으키는 바가 없기 때문이며, 행이 자비를 방해하지 않으니 흠이나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며, 평등한 자비를 행하니 3도(塗)에 평등하기 때문이며, 다툼이 없는 자비를 행하니 지(止)하는 처소가 없기 때문이며, 둘이 아닌 자비를 행하니 안팎으로 습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내지 않는 자비를 행하니 모두 성취하기 때문이며, 강건한 자비를 행하니 금강처럼 강해서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며, 청정한 자비를 행하니 내적인 성품이 이미 청정하기 때문이며, 평등의 자비를 행하니 허공처럼 평등하기 때문이며, 여래의 자비를 행하니 근본에 따라 깨닫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자비를 행하니 모든 보통 사람들을 자각시키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자비를 행하니 지혜로써 때를 알기 때문이며, 훌륭한 방편의 자비를 행하니 일체를 나타내서 듣기 때문이며, 아첨하지 않는 자비를 행하니 뜻이 청정하여 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가식적인 자비를 행하지 않으니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며, 무아의 자비를 행하니 다시는 악의가 없기 때문이며, 안위(安慰)의 자비를 행하니 깨달음을 얻는 데 이르러서 크나큰 안락함을 세우기 때문이니, 보살의 자비는 이와 같이 행합니다.”
문수사리가 물었다.
“무엇을 비(悲)라고 합니까?”
유마힐이 답했다.
“이제껏 이루어 놓은 덕의 근본과 닦아 놓은 변재로써 사람을 위하는 것입니다.”11)
『유마경』에서 말하는 자비는 강건하고, 성내지 않고, 청정한, 여래의 자비이다. 또 자연과 도의 자비이며, 보이지 않는 자비이다. 대비, 보시, 인욕의 자비이며, 방편의 자비이자 무아의 자비이다. 이것은 ‘비(悲)’가 무엇인가란 답변으로 인해 완성된다. 즉 이제껏 이루어놓은 덕의 근본과 닦아 놓은 변재로써 결국 ‘사람을 위하는 일’인 것이다. 즉 대승의 자비는 ‘능동적인 자비’이다. 현대불교는 보다 능동적인 입장에서 자비행을 실천할 다양한 방법을 제안하고 시도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승 보살행(菩薩行)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찰과 재가 불자들이 연대해 지역사회 내 고립위기자, 독거노인, 무연고자 등을 지원하는 ‘자비돌봄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다. 이 네트워크는 법회·식사 나눔·의료 및 생활지원, 재능기부 등 구체적 활동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이는 『유마경』의 “중생병즉보살병(衆生病卽菩薩病)”의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길이다. 즉,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적 자비심의 발현이 무연고 사망자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불교의 ‘인연(因緣)’은 인간 존재를 관계적 실재로 이해하게 하는 핵심적 교리이다. 따라서 무연고사망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인연의 단절’에 있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한 의례적 차원의 불교적 실천도 필요하다. ‘생전결연법회’는 고립된 노인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사찰 내 신도나 수행자와 삶의 도반(道伴) 관계, 멘토와 멘티 관계를 맺고, 서로의 생과 사를 돌보는 프로그램이다.
이 법회는 단순한 행사에 그치지 않고, 죽음을 준비하는 수행(生死觀)과 자비의 관계 회복을 포함한 포괄적 웰다잉(well-dying) 실천으로 확장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생전예수재’를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길이 바로 이러한 ‘생전결연법회’를 통해 참다운 의미의 공덕을 짓는 일로 실천될 수 있다. 이는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一切唯緣起)”는 불교적 인식의 사회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
무연고사망자 상당수는 우울, 고립감, 무가치감 등 심리적 요인에 의해 사회적 관계로부터 단절된다. 불교의 심리학적 전통, 특히 유식학(唯識學)과 마음챙김 명상 등은 이들의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사회 저변으로 불교 명상 프로그램이 대중화 되어 무연고자들의 고립감과 우울을 해소하고 자존감 획득과 연결감을 회복시키는 일에 불교계에서는 어느 때보다 앞장 서야만 한다.
사찰은 지역사회에 개방된 불교심리상담센터나 명상 치유공간을 마련하여, 고립된 이들이 스스로의 마음을 직면하고 치유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또는 학교나 문화센터, 지방자치시설에 직접 찾아가 사람들에게 불교 명상이라는 대중적 방법으로 ‘연기’와 ‘자비’를 체험하고 경험하게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개인은 ‘나는 아무 관계 없는 존재’라는 분리된 의식에서 벗어나, ‘나 또한 관계 속에 살아 있는 존재’라는 연기의 자각을 회복하게 된다.
불교의 연기사상은 존재의 상호의존성과 관계적 생명을 강조한다. 따라서 무연고사망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관계망이 붕괴된 연기적 붕괴현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에 불교계는 ‘연기(緣起)사회 구현’ 운동을 전개하여, 생명존중· 관계회복· 자비실천의 가치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켜야 한다. 최근 붐이 일고 있는 ‘명상’ 역시, 개인의 웰빙과 삶의 질 향상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연기적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인류애적 차원으로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임규철(2020)은 무연사회의 무연고사망자 증가 문제에 대해 사회적 인식전환이 필요함을 말한다. 불교계는 학교, 복지기관, 지자체 등과 협력하여 불교적 공동체 윤리와 생명교육을 실시하고, 개인 수행이 개인적 수행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실천으로 확장되는 대승적 실천 구조를 제도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기사회의 구현’은 무연사회의식을 전환시키는 근본적인 불교적 대안이 된다.
이 다섯 가지 대안은 각각의 접근 방식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연기’와 ‘자비’의 원리를 사회적 관계 회복의 축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무연고사망자는 개인적 실패가 아니라, 관계와 공동체가 약화된 우리 사회의 그림자이다. 불교는 그 해법을 인간 내면의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타자와의 관계 속 실천으로 완성시키는 종교이다. 따라서 불교적 자비와 연기의 사회적 실현이야말로 무연사회의 비극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 길이라 할 수 있다.
IV. 결론
본고에서는 무연사회와 무연고 사망자 급증의 사회적 문제를 불교의 연기(緣起)사상과 자비(慈悲)의 확장으로서 사회에 구체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현대 불교가 구현해야 할 중요한 사안 중의 하나로 보았다. 기존의 무연사회나 무연고 사망자, 고독사 문제에 대한 자료들과 문헌들을 살펴보았고, 이제는 이러한 문제들이 가속화 되고 심화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에서 무연고사망자나 고독사 문제는 그것이 개인적 책임이라는 여론과 공동체 연대의식의 결여 등이 팽배해 있다. 제도권의 행정적이고 관례적인 문제 처리 방식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선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커다란 단절과 결핍이 이어짐을 살펴보았다.
현 시대의 무연사회와 무연고 사망자의 증가추세는 단순히 인구구조의 변화나 복지정책의 미비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본래 ‘관계적 존재’이자 ‘연기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개인을 고립과 단절로 몰아넣는 구조적 조건을 강화시킨다. 관계의 해체는 삶에서 뿐 아니라, 죽음의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이는 결국 인간 존엄성의 붕괴를 뜻한다. 이러한 불행한 현실 속에서 불교의 연기와 자비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관계성의 회복을 위한 사상적·실천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연기(緣起)’는 모든 존재가 서로 의지하고 조건지어진 상의상존적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무연사회는 인연이 끊어진 사회가 아니라, ‘단절을 만들어내는 조건들’이 빚어낸 사회현상이다. 다시 말해, 무연사회는 고정불변의 결과가 아니라, 여러가지 개인적, 사회적 요인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낸 ‘연기적 구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조건 즉, 관계를 회복시키는 연기의 조건을 조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비(慈悲)’는 바로 그 조건을 실천적으로 실현하는 원동력이다. 자비는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알아차리고 연결성을 회복하려는 능동적 행위다. 이는 고립을 깨뜨리고 관계를 다시 짓는 구체적 사회적 실천행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불교는 이미 유구한 역사 속에서 사찰, 마을, 신행공동체를 중심으로 관계망을 조성하고 유지해 왔다. 어떤 종교보다도 인연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이제는 이러한 전통적 자원을 현대적 방식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적 고립을 해소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연사회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미래가 아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조건들의 결과이며, 따라서 다시 바꿀 수 있는 영역이다. 본 논문은 연기와 자비의 관점에서 무연사회 문제를 조명함으로써, 개인의 삶과 죽음이 공동체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다시 묻고자 하였다.
개인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 관계성을 회복하는 일 자체를 수행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이 개개인에게 필요하다. 이러한 방향성이 실현될 때, 우리는 무연사회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돌보는 유연(有緣)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