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m and Society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연구논문

‘코로나19’ 상황에서 종교의 의미와 역할:

박병기*
Byungkee Pak*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Professor,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 Copyright 2020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Nov 04, 2020; Revised: Dec 13, 2020; Accepted: Dec 21, 2020

Published Online: Dec 31, 2020

국문 초록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초래한 상황은 우리 삶 전반에 관한 성찰과 일상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실제 삶의 변화가 자발적으로 진행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기준을 요구하면서도 현실은 이전의 기준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불안과 불만이 커지고, 전반적인 삶의 방향 상실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종교에 대한 전통적인 기대는 이런 상황에서 그 불안감을 해소하면서, 삶의 의미 물음을 제대로 껴안을 수 있는 배경으로 자리해주는 것이다. 실제 우리 종교는 이 기대에 부응하고 있을까? 그리스도교와 함께 우리 시민사회의 대표적인 제도종교로 자리잡은 불교는 외형적으로 비대면 법회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다만 그리스도교와의 대비 속에서 상대적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정도이다.

불교가 보다 적극적인 위상과 역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코로나19 사태’를 불교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공유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토대 위에서 자비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태 속에서 우리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상호의존의 관계망 속에 있다는 붓다의 진리를 확인하고 있고, 그 인식 위에서 실질적인 자비행(慈悲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고 어려움에 처한 존재자들을 도울 수 있다. 이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제도종교로서 우리 불교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고찰하면서 승가공동체가 제대로 성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동시에 재가공동체의 확립을 통한 사부대중공동체의 지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다른 종교와의 공존은 물론 ‘종교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지닌 일반 시민들과의 공존과 보다 나은 미래를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Abstract

The situation caused by the “Covid-19 virus” calls for reflection and daily changes in our lives as a whole, but it is not easy for real life changes to proceed voluntarily. As a result, while demanding new standards, the reality is that anxiety and discontents are growing in the process of sticking to the previous standards, and the overall loss of direction in life is emerging. The traditional expectation of religion in our society is to relieve the anxiety in this situation, while properly embracing the question of meaning of life. Is our religion actually living up to this expectation? Although Buddhism, which has become a representative institutional religion of Korean civil society along with Christianity, is adapting to some extent through non-face-to-face Buddhist ceremony, it is difficult to say that it is playing an active role, but it is relatively evaluated in comparison with Christianity.

In order for Buddhism to secure a more active status and role, it must first be able to analyze and share the “Covid-19 situation” from a Buddhist perspective, and actively practice the ethics of mercy on its foundations. In this situation we are confirming the truth of Buddha that all existing things are in a network of interdependence, and above that recognition we can make our lives intact and help those in need through practical mercy. In order to do so, we must first objectively consider the reality of our Buddhism as a institutional religion and at the same time make sure that the Buddhist Priesthood Community (僧伽) is properly established, and at the same time, the direction of the community among the four units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a community of reconsideration should be premised. On that basis, we will be able to seek coexistence and a better future with ordinary citizens who have a desire for “religious things” as well as coexistence with other religions.

Keywords: 코로나19 바이러스; 불교윤리; 제도종교; 종교적인 것; 공존의 윤리
Keywords: Covid-19 Virus; Buddhist Ethics; Institutional Religion; Religious Things; Coexistence Ethics

Ⅰ. 서론1)

위기 상황이 닥쳐와야 비로소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존재인 우리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맞으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 일상과 소중함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일상의 회복이 가장 큰 목표로 부상하면서 이 사태의 원인은 무엇이고, 해결방안은 무엇인지와 같은 직접적인 물음과 함께,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과정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까지 던지면서 어떻게 하면 그 회복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에 관한 지혜를 실천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요청과 지속적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과의 의존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의존을 단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정도로 착각하며 살았고,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소중한 시간들을 그저 지루함을 견디는 방식 중 하나 정도로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0세기를 식민지 형태로 맞아야 했던 역사의 질곡을 떨치지 못하고, 이른바 선진국이 하는 일들은 무조건 따라 해야 한다는 예속과 굴종의 자세를 당연시하기도 하며 살아왔고,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이 상황의 끝이 잘 보이지 않는 데서 생긴다. 이런 상황이 일시적인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견디면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면 되지만, 어느새 1년 가까운 시간을 축적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종식될지, 또 종식된다고 할지라도 유사한 상황과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우리 일상은 물론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전 지구인의 삶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불안감은 우리에게 낯선 개념이 아니다.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한계 지워진 존재자’로서 인간이 느껴야 하는 근원적 불안감이나 자신의 일상을 좌우하는 욕망체계에 깔린 무지에서 비롯되는 집착의 고통 같은, 종교적이면서도 철학적인 개념으로 그것은 이미 우리 지성사 속에 편입되어 있다.

이런 일상의 불안에 대응하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불안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해결(解決)하는 과학적 대응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객관적 원인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마음 또는 정신에 작동하는 과정에 주목하여 문제를 해소(解消)하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대응이다. 가능하다면 이 두 방법은 서로 통합적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지만, 과학과 철학, 종교 사이의 일정한 긴장으로 인해 각각 다르게만 작동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특히 그 긴장은 그리스도교와 불교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제도종교가 타력신앙(他力信仰)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강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고타마 붓다라는 역사적 존재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초기불교는 기본적으로 자력신행(自力信行)의 원칙을 표방하고 있었고, 그것이 동아시아 선불교로 넘어와서 살불살조(殺佛殺祖)의 다소 극단화된 형태로 정착했지만, 21세기 초반 현재 한국불교의 신행형태는 주로 신격화된 부처들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복이나 안녕(安寧)을 기원하는 타력신앙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예수라는 중심축을 중심으로 그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전통적인 타력신앙의 형태를 우리의 경우에도 거의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종교는 이런 제도종교의 형태로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인도 신화를 분석하면서 찾아낸 종교를 대하는 두 자세, 즉 ‘새끼 고양이 방식’과 ‘원숭이 방식’으로 구별한 타력종교(他力宗敎)와 자력종교(自力宗敎)는 제도종교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캠벨, 2020: 190). 종교사회학자 울리리 벡(U. Beck)이 강조한 것처럼 20세기 이후 종교는 제도종교와는 구별되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열망’으로 강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고(벡, 2013: 78), 이 열망은 뇌과학이나 신경과학 같은 최근 과학의 연구 성과를 통해 상당 부분 입증되고 있기도 하다(피글리우치, 2016: 298). 인간의 뇌가 과학적인 결과와는 반대되는 믿음을 수용하는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한 진화의 결과만이 아닌 문화적 상호작용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인간은 넓은 의미의 종교와 분리되어 존재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인들에게 널리 퍼진 무신론(無神論)과 함께, 그것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돈 숭배 현상까지를 그 넓은 의미의 종교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별 수 없는 인간’(손봉호, 1989)으로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불안감을 온전히 떨치기 어렵고, 현재와 같은 비상한 상황 속에서는 특히 증폭되기 마련이다. 이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것이 종교의 전통적 역할로 꼽혀온 안심(安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의 우리 종교가 그 역할을 얼마나 잘 해내고 있는지를 물음으로써 종교의 의미와 위상, 역할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종교는 철학과 함께 삶의 의미 물음에 관한 책임을 지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20세기 이후 서양철학이 주도한 철학계의 상황이 분과화와 전문화의 요구 속에서 현저히 축소됨으로써 종교가 이 역할을 좀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요구와 마주하고 있다. 종교의 이 역할과 관련되는 전통적인 개념은 입명(立命)이다. 천명(天命)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진리의 영역 또는 목소리에 접근하거나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종교라는 생각이 담겨 있는 이 개념을 우리는 그 하늘의 존재성에 관한 합의를 상실한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에서 ‘삶의 의미 물음’이라는,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바꾸어볼 수 있다.

안심과 입명의 두 차원은 당연히 서로 긴밀히 연결되지만, 일상 속에서 먼저 다가오는 것은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불안감을 느낄 때 그것을 해소 또는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도 함께 느끼게 되고, 그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 물음이라는 입명의 차원을 소환한다. ‘코로나19 사태’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종교를 대표하는 제도종교들, 특히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자신의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해내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이 작은 고찰의 목표이다. 물론 다른 제도종교들을 배제할 이유는 전혀 없고 자연스럽게 이 논의의 맥락에 포함되어야 하지만, 논자 자신의 역량 등을 감안하여 초점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Ⅱ. ‘코로나19 상황’과 제도종교, 시민윤리

1. ‘코로나19 바이러스’: 불교의 눈으로 바라보기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세계의 모든 개인의 삶은 물론, 그 개인들이 주로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도 강력한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리 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의미가 있는 변화로 볼 수 있는 것은 가치관 구조의 변화 양상이다. 한 사회의 가치관 또는 가치구조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고 또 지속되지만, 불변의 것은 아니다. 다양한 요인에 의해 사회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제도의 변화가 뒤따르거나 그 제도를 뒷받침하는 규범의 변화 또한 이루어진다.

사회 정의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제도와 행동유형이 갖는 상호의존적 역할에 주목하는 아마르티아 센에 따르면, “모든 정의론은 제도의 역할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해야 하기 때문에 제도의 선택이 정의를 그럴싸하게 설명하기 위한 중심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논의한 이유로 제도 자체를 정의의 발현이라 여길 것이 아니라, 정의를 증진시킬 제도를 모색해야 한다(센, 2019: 93).” 센의 주장은 사회구성원의 행동유형과 제도 사이의 상호의존성뿐만 아니라. 가치관 구조와 제도 사이의 상호의존성에 주목할 수 있게 해준다. 제도종교로서 불교 또한 종교를 다루는 제도와의 상호의존성 속에서 존재하고 있고, 그 제도는 다시 한국 시민들이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 또는 가치선택에 의존하는 순환성을 지닌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바로 그 종교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 자체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긍정적인 시각이 가능하지만, 우리에게는 부정적인 시각이 더 크게 다가와 있고, 그런 부정적인 시각들은 자칫 제도종교와 시민사회의 불필요한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오고 있다. 논자는 이 점에 주목하여 시민사회와 제도종교 사이의 상호의존성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한국사회에서 불교로 대표되는 제도종교가 세계적인 감염병 유행 상황 속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21세기 초반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제도종교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하는 그리스도교와 불교다. 이 두 종교 사이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고, 불교의 경우에는 타종교와 만나는 과정에서 배타성을 덜 노출시키는 편이어서, 전형적인 다종교국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런데 2015년 종교인구 통계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특정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상황이 전개되면서 제도종교 자체에 대한 반감과 불만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우려할 만한 현상이 함께 발견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맞게 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특별히 좋아하다보니, 종교집회에 대한 일반시민의 시선이 고울 수 없고, 반감과 불만 또한 폭발적으로 고조되어 특정종교, 즉 그리스도교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보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과 마주하며 각 종교는 적절한 대응방안을 모색하고자 노력하고 있고, 상당수의 교회와 절이 원격예배나 집회로 바꾸거나 모이더라도 ‘사회적 거리두기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바람직한 대응이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대응으로 충분한 것일까? 종교에 긍정적인 시민들이 기대하는 것은 그런 일차적인 대응과 함께, 이런 위기상황을 어떻게 보고 대처할 것인지에 관한 각 종교의 지혜인지 모른다. 대체로 불안에서 적대감 표출, 희생양 만들기 등의 수순으로 진행된다는 전염병 위기의 일반적인 전개 속에서, 시민 개개인의 마음을 진정시켜주고 위기상황 속에서 어떤 삶의 자세를 갖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를 조용하게 제시해주는 종교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 종교의 관점에서 이번 사태의 본질과 현상을 분석하고, 그에 상응하는 해소책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불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이 글에서는 당연히 불교의 관점을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필요와 마주한다. ‘코로나19 사태를 바라보는 불교의 관점은 무엇일 수 있을까? 여러 차원의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그 중심에는 석가모니 붓다가 발견한 진리가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타자에 대한 연기적 의존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바로 그 이유로 ‘삼매를 일으키는 한 찰나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몸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진리다(전재성 역주, 2014: 189). 이것은 하나의 작은 구슬 각각이 중심이 되면서 동시에 연결된 다른 모든 구슬들을 비치는 인드라의 그물망이 존재하는 것들의 의존 양상을 설명하는 비유의 그물이자 실제 우리 삶의 전개 양상을 보여주는 경험적 진리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화엄(華嚴)의 사유로 구체화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또한 다른 생명체에 기생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자이다. 처음에는 동물의 몸에 기생하다가 그 동물들과 부적절한 접촉을 가진 인간에게 옮겨와서 전 세계의 모든 인간들을 대상으로 삼는, 공포의 생명체가 되어버렸다. 어떤 것에든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그 의존의 양상은 업(業)이라는 역사적이고 유전학적인 토대와 자신의 선택과 실천이라는 윤리적 지침에 더해지면서 각각 다르게 전개된다는 것이 불교윤리의 기본명제이다(박병기, 2013: 180). 따라서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유정물(有情物)과 맺게 된 인연의 고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함께 실천해가는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불교적 관점은 연기적 관계망의 체감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부각될 수 있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의 연기론은 공감이 가면서도 지나치게 과장된 것은 아닌지 하는 느낌으로 다가올 가능성도 있다. 오늘 길거리에서 옷깃만 스친 사람과도 이미 전생을 통해 수없는 인연의 고리로 얽혀있다는 주장은, 윤회에 대한 믿음의 요청과 함께 비현실적인 과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모든 영역에서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우리가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대형 상점에서 열대과일을 사시사철 살 수 있다는 사실과, 도심 변두리와 농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외국노동자들의 존재가 그런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일상은 늘 그 이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세계가 뗄 수 없는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음을 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망이 단순한 추상적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경험적 차원의 것임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는 셈이다.

붓다의 가르침으로서 불교는 이러한 연기적 인식을 동체(同體)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면서 그 구체적 실천윤리로 자비(慈悲)를 제시하는 것으로 완성된다(하비, 2010:89). 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타자들에는 인간과 동물, 식물과 같은 유정물(有情物)은 물론, 바위나 광물 같은 무정물(無情物)도 포함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절대자의 사이에 주목하고자 했던 부버(M. Buber, 2001)의 관점과도 통하는 이러한 인식틀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생태중심주의로 전환할 수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동체의 인식론은 그러나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들이 모두 동일하다는 주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존재성이 타자와의 의존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연결된 몸이라는 인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 그 연결고리를 의식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점이라고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런 전제 위에서 타자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그 고통을 덜어주는 윤리적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자비의 윤리이다(Gowans, 2015: 71). 이 윤리에 근거하면, 코로나19 사태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자비의 눈길과 손길이 동시에 주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가 자연스럽게 이끌려 나온다.

2. ‘코로나19’ 상황 속 제도종교와 시민윤리

‘코로나19’ 상황을 초래한 일차적인 출발점인 바이러스에 대한 불교적 관점의 이러한 분석은 그 불교와 함께 제도종교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교까지 포함하는 종교 전반의 차원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두 제도종교 사이를 넘나드는 문제가 쉽지 않은 과제임을 감안하면 조심스러운 접근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 시민사회에서 제도종교의 위상이 지속적인 논쟁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이다.

시민사회에서 제도종교가 어떤 위상을 차지할 수 있고, 또 차지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여기서는 종교의 전통적 역할인 안심과 입명의 차원에서 살펴보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우리 시민사회가 정착한 이후 서구적 맥락의 종교사회학적 논의들이 소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논의들 또한 전통적 맥락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고, 그럴 경우 우리가 제도종교를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과는 일정한 간극을 빚어낼 가능성이 있다.

우리 시민사회는 안심과 입명의 과제를 일차적으로 시민 개개인의 몫으로 넘긴다. 자유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사유권을 인정받는 존재자가 시민사회의 주인인 시민이다. 민주(民主)를 근간으로 정착한 이러한 개인으로서 시민의 위상은 한국사회에서도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확립되기 시작해서 상당한 수준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그 시민 개인의 몫,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당연하고 또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그런데 시민은 시민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공화(共和)의 과제를 함께 떠맡는다. 개인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의 것에 대한 정당한 관심과 참여를 전제하지 않으면 민주의 영역 또한 심각한 훼손을 가져올 수밖에 없고, 이미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곳에서도 그런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징후는 특히 ‘코로나19’라는 사태를 경험하면서 극대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경향은 나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는 ‘공공의 것’은 무시할 수 있다는 반시민적 행태로 표출된다.

19세기의 동학농민항쟁을 출발점으로 삼아 20세기의 3·1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정 선언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우리 시민사회는, 20세기 후반 광주와 6월 항쟁, 21세기의 촛불항쟁을 거치면서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정착단계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제는 이 시민사회의 주체인 시민에게 요구되는 덕성 또는 윤리가 얼마나 갖추어진 사회인가와 관련된 시민윤리의 차원에서 생기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각 시민의 사적 영역이 만나게 되는 경계에서 비롯되는 관계의 윤리와 ‘공공의 것’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관계의 윤리는 현실공간의 직접적인 대면과 가상공간의 간접적인 대면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인터넷 기반의 가상공간 영역이 확장하고 있는 중에 맞게 된 코로나19 사태는 삶의 중심축을 가상공간에 두도록 강제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고, 이런 변화추세는 정치와 경제는 물론, 교육과 종교 등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강화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종교, 특히 제도종교는 각 시민의 내적 삶에서 안심과 입명의 실존적 과제를 감당하는 사적 영역에 속하면서도, 다른 한편 가족 등과 함께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의미 있는 관계망 자체로서의 속성도 동시에 지닌다. 전자에 주목할 경우, 시민사회와 국가가 제도종교 영역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극히 좁혀지지만, 후자까지 포함하고자 할 경우 제도종교 또한 가정과 지역사회, 국가 등의 영역과 협력하며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적 과제가 주어진다. 그 과제 속에는 타종교는 물론 무종교인들과의 공존이 포함되고, 이런 맥락의 공존 요청을 우리는 넓은 의미의 종교윤리로 담아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종교윤리는 시민윤리의 하위 요소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와 같은 다종교사회에서는 그 중심축 중 하나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 제도종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 중에는 바로 이러한 시민윤리적 차원의 종교윤리와 심각한 긴장을 야기시키는 현상이 부각되고 있다. 이른바 ‘전광훈과 사랑의 제일교회’ 사태나, 보수(또는 수구) 개신교 세력이 중심이 되어 벌인 ‘광화문 집회 집단 감염 사태’는 이전의 ‘신천지 대구 집단감염 사태’ 등과 맞물리면서 ‘제도종교로서 기독교’ 전반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나타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김진호, 2020).

다행히 가톨릭과 불교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비대면을 원칙으로 삼아 미사와 법회를 진행하고 있고, 이런 바람직한 대응은 일정한 영역에서 중앙통제가 가능하다는 이점과 함께 시민사회와의 공존을 모색해온 역사적 과정을 축적하고 있다는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판단해볼 수 있다. 개신교의 경우는 개별교회로 나뉘어져 중앙 통제가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도의 헌금에 의존하는 정도가 절대적이어서 대면예배를 포기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현실적인 진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 방식의 차이는 모두 시민사회가 제도종교에 요구하는 소극적 차원의 것일 뿐이다. 보다 적극적 차원의 요구 또는 요청은 새로운 고통의 상황 속에서 시민들에게 어떤 방식의 삶의 의미 물음을 던질 수 있느냐와 같은, 종교 자체의 본질과 관련지어 등장한다.

물론 우리 시민윤리의 문제는 종교윤리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하지 못하는 일상적 무례와, 시민사회에 걸맞지 않는 사적 영역에 대한 과도한 관심에 기반한 폭력적인 언사들, 빈부격차의 심화에 따른 신종 계급의식의 정착 등 우리 사회의 공화를 해치는 요소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다만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중심을 이루는 우리 제도종교에는 각 시민들의 종교적 욕구 충족과 함께 그런 문제들에 대한 일정한 관심과 기여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최근의 사태가 더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일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전반적으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인식과 대처에서 긍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오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이 사태 속에서 “우리가 개인과 가족, 지역공동체의 안녕이 인류가 하나의 종으로 함께하는 길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리프킨, 2020: 25).”라고 강조하면서, 이미 시작된 3차 산업혁명의 가속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런 우려와 기대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 대응할 것인가는 열린 물음에 속한다. 두 방향 모두에 열려 있다는 의미이다. 이 사태 속에서 마주하고 있는 불안감에 이끌려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할 것인지, 아니면 불안을 가져오고 있는 원인들에 관한 객관적인 분석을 토대로 보다 적극적이고 미래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할 것인지는 우리 시민사회의 인식과 역량에 달려 있다. 이 과정에서 제도종교는 후자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요구와 지속적으로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현실 속에서는 대체로 전자의 모습을 보이면서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는 비판이 우세하다.

그 비판의 초점은 제도종교와 시민사회의 만남의 지점에 맞춰져 있다. 이 지점에서는 우선적으로 제도종교가 최소한 시민사회에 부담을 주지는 않아야 한다는 최소도덕이 먼저 문제시된다. 제도종교가 시민사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거나 그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의 일상에 불필요한 이유로 불편을 끼치지는 말아야 한다는 요구는 종교윤리라기보다는 시민윤리 자체에 속하는 요구이다. 그런데 우리 제도종교들이 그런 정도의 요구에도 부응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비판을 넘어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지점에서 시민사회가 제도종교에 대해 가져주어야 하는 자세와 관련된 최소도덕의 문제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도종교의 구성원들 또한 시민이고, 그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적 차원에서 보장받는다. 그 자유는 종교관련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고, 따라서 시민사회는 제도종교 구성원들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해야 하는 당위적 의무를 지니게 된다. 단지 종교의례나 행사가 자신들에게 불편한 느낌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최소도덕 차원의 시민윤리에 위배되는 행위다.

그런데 이러한 쌍방의 최소도덕이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 다름의 출발점은 종교행사에 따른 감염병 확산 가능성이다. 주로 입에서 나오는 비말을 통해 전염되는 것으로 알려진 이 바이러스는 종교행사의 주요 부분을 이루는 직접 접촉을 통해 급속한 확산이 가능하다는 점이 사례를 통해 입증됨으로써 시민사회의 종교행사 자체에 대한 경계심은 상당한 정도의 정당성을 지니게 되었다. 시민으로서 참아내야 하는 다름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도덕적 책임은 주로 제도종교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되는 것이고, 실제로 제도종교 또한 비대면 예배와 법회 등으로 전환함으로써 이런 책임을 성실히 수행해오고 있기도 하다.

남은 문제는 일부 기독교 세력의 무분별한 인식과 행동을 주류 기독교에서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지이다.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20세기 중후반 ‘경이로운 성장’의 역사를 써온 기독교는 토착신학에 대한 관심과 정착을 지속적으로 배제하면서 서구신학의존성과 친미, 반공주의, 물신화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면서 배제와 혐오를 주된 구호로 내세우는 세력들이 또 다른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그들은 감염병 확산의 중심이라는 오명을 동시에 부여받고 있기도 하다. 이들에 대한 기독교계 일반의 적극적인 대응과 실질적인 차별화가 실천적인 과제로 이미 충분하게 부각되어 있다.

Ⅲ. 지금 여기서 종교의 의미와 역할 다시 묻기

1. 지금 우리에게 종교는 무엇일까?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종교(宗敎, religion)는 과연 무엇일까? 이 때 종교는 제도종교와 ‘종교적인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고, 그럴 경우 이 물음은 특정 제도종교의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우리 시민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되는 범위를 지닌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것에 제도종교를 포함시킴으로써 시민사회의 구성영역 중 하나로서 공적 영역에 동시에 속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벡의 정의와 같이 ‘종교적인 것’이 세계 속에서 사람들이 제기하는 실존적 질문에 접근하는 어떤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 종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을 상정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종교적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전제를 받아들일 경우, 우리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종교적 삶의 형태를 지니게 되고, 단지 그것이 제도종교인가 여부에 따라 차별화되지만 어떤 점에서는 그 차별화가 큰 의미를 지닐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제도종교와 종교적인 것이 공유하는 ‘종교의 실존적 의미’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우리 삶의 양식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이념이자 현실인 자본주의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삶으로부터의 부자유는 당연히 시민의 실존 영역에서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이유는 서로 긴밀히 연결된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 이후 처음으로 그 유럽과 북미, 아시아 세 대륙의 소득수준이 근접해진 단계에 이르렀다.’는 평가적 발언을 출발점으로 삼아 자본주의가 지구 유일의 사회경제체제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밀라노비치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는 동일한 경제원리에 따라 작동한다. 이런 사실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데, 그 동일한 경제원리란 합법적 자유 임금의 노동력과 대부분 개인 소유 자본에 의해 이윤을 추구하는 생산 체제, 분권화된 조정력이다(브랑코 밀라노비치, 2020: 22).” 그는 이 자본주의 체제가 미국으로 상징되는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와 중국으로 상징되는 ‘국가 자본주의’로 나뉘어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고, 한국은 전자에 속해서 ‘성공’한 나라인데 비해 북한의 경우는 ‘폭력적 민족주의 성격’의, 정말 분류하기 어려운 체제이다(밀라노비치, 12쪽 ‘한국어판 서문’ 참조).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하게 된 결과 중 하나인 세계화는 이런 자본주의와 결합된 신자유주의로 인해 세계 거의 모든 곳으로 스며들며 정착해가고 있다. 그 결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국가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제 세계화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일상 속에서 쉽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다국적 커피점과의 거리를 중심으로 측정하는 일상의 심도와 개인화로 인한 관계의 급격한 축소와 도구화, 불평등 구조의 지속적인 심화로 인해 빚어지는 불안정한 고용의 확산 등이 그런 편린들이다. 그것들이 가져오는 불안 속 편안함과 관계로 인한 귀찮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의 내면화 등이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요소들로 자리한 지 오래고, 이번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된 가상공간의 주도권 행사와 겹치면서 하루하루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이런 일상은 모든 위험부담을 약자에게 지우는 ‘신자유주의의 약점’(장하준, 2020: 89)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시민들 사이의 격차를 심각한 수준으로까지 확대시킬 수 있다는 우려로 현실화되고 있기도 하다. 다행히 우리 한국의 경우 전 국민 의료보험 체제의 확립을 토대로 거의 모든 시민을 의료보장망 안으로 포용하고 있고 그것은 다시 1인당 확진자 수를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관리하는 성과를 공유하고 있지만, 약자에 속하는 시민들이 직면해야 하는 생존의 위협을 결정적인 수준으로 관리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초점을 생존에서 실존의 차원으로 옮기고 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시민 개개인들에게 떠맡겨지는 생존의 과제는 현실의 위협과 그것으로 인해 부추겨지는 상상 속 위협으로 인해 곧바로 실존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이 위기는 약자들에게서 더 처절한 양상을 보이겠지만, 경쟁에서 살아남은 강자라고 비켜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은 바탕으로 하는 생명연장의 가능성이 삶의 의미 물음까지 해결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인간의 관심을 모아온 행복을 바라보는 두 관점, 즉 쾌락주의 윤리와 덕윤리의 관점 중에서 다시 후자가 부각되는 현상 속에 이 문제가 숨어 있다. 주로 몸의 쾌락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신적 쾌락을 부수적인 것으로 추구해온 쾌락주의 윤리에 기반한 행복관은 쾌락의 역설을 넘어서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고, 그 한계에 직면한 사람들이 늘면서 보다 온전한 삶의 추구로서의 행복이라는 덕윤리적 관점의 행복관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에우다이모니아(eudiamonia), 즉 좋은 영혼 또는 보편적인 질서와 목적에 대한 열망으로 인간의 행복을 정의하고자 했던 아리스트텔레스의 덕윤리학이 부각된 배경이기도 하고(피글리우치, 2016; 12), 불필요한 집착을 과감히 놓아버린 상태로서 행복을 정의해온 불교윤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배경이기도 하다.

종교는 주로 실존의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일상이 그다지 불편하지도 않고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음에도 문득 다가서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라는 물음에 대응하는 방식 중 하나가 종교이고, 종교는 그런 점에서 철학과 함께 우리 삶의 필수 요소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삶의 의미 물음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그런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의미 물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에 충실함으로써 그 의미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하는 방식이다.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이 두 방식은 혼용 가능하고, 아마도 우리는 후자에 더 익숙한지 모르지만 그럼으로써 망각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한계상황과 직면할 수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 기반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우리들에게서 그런 망각은 삶의 끝 지점까지 쉽게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미 다가와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는 보다 적극적인 존재감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는 당위적 요구와 마주하게 된다. 좀 더 직접적으로는 일상의 불필요한 불안을 해소시켜 주어야 하고, 좀 더 근원적으로는 삶의 의미 물음에 직면한 시민에게 그 물음을 올바르게 던질 수 있는 배후가 되어 주어야 한다. 그 지점에서 종교와 철학은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가 중심축 중 하나였던 서구 근대화 과정 속에서 거의 절대적인 과제로 다가왔던 세속화로 인해, 철학과 종교는 모두 본래의 목적을 상실할 수 있는 위기를 맞게 된다. 철학은 분과학문화되면서 실천적 영역을 상실하는 경향성을 드러내고, 종교는 그 세속화의 파고 속에서 확보해야 했던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지 못해 표류하는 결과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이승종, 2020: 63). 그런 과정을 일본과 미국 등을 통한 식민지화의 간접적 과정으로 경험한 우리는 20세기의 외형적인 성공을 토대로 질적인 심화를 꾀할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고, 그런 가운데 맞게 된 코로나19 사태는 철학과 종교의 위상과 역할을 뿌리부터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적극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2. 불교의 위상과 역할 재정립을 위한 불교윤리적 대안

지금 여기서 종교가 우리에게 무엇일까 라는 물음을 던지고 나자마자 직면하게 되는 또 하나의 물음은 바로 그 종교의 현실적 차원, 특히 제도종교의 현실에 관한 물음이다. 제도종교가 ‘종교적인 것’과 분리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종교적인 것’의 표상으로 제도종교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여기서는 주로 제도종교로서 불교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때의 불교는 일차적으로 ‘21세기 초반 한국불교’이다. 모든 종교의 교리는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지만, 최소한 현실에 그 교리의 이상적 지점을 향하는 지향과 실천이 더해지지 않으면 제대로 된 종교라고 말할 수 없다. 제도종교로서 현재 우리 불교는 이런 지향과 실천의 최소한을 확보하고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다. 우선 현재의 한국불교를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지의 문제와 만나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렇게 규정된 한국불교가 어떤 인식과 실천 지향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분석하는 과제와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은 글에서 온전히 감당할 수 없는 과제이고, 필자의 역량으로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평가와 해답 찾기는 한국불교는 물론 그리스도교를 포함하는 한국 시민사회 전반의 종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 한계를 인정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출발해 보고자 한다.

21세기 한국불교는 1,700여 년 전통을 지닌 전통종교이면서 동시에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큰 종단을 중심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제도종교 중 하나다. 그런 점에서 이 한국불교에는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교리적 기반과 함께, 우리 한국인들이 이 땅에서 함께 경험한 역사적·문화적 기반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실인식의 과정 속에 역사성과 문화성 등의 요소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요구로 작동하고, 현재의 상황에 관한 인식과 함께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찰나(刹那)의 순간과 그 지속에 눈길을 주어야 한다는 요청으로도 작용한다.

이런 전제 위에서 우리 불교를 바라보고자 할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불행히도 부정적인 면면들이다. 조계종 승려들의 도박 사건이나 한국 현대사 속에서 끊이지 않던 조계종 폭력 사태 등 어두운 사건이 먼저 뇌리에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는 조계종 승려가 이른바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불법 성착취물 사건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았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지방 대형 사찰의 홈페이지 관리자이기도 했다는 그 승려는 수행자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아 우리 불교 전반에 대한 시선을 흐리게 만드는 원인제공자 역할을 담당한 바 있다.2)

이런 사건들이 한 승려의 단순한 일탈에 그치지 않고 승려집단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 부각된다. 특히 이른바 지도급에 속한다는 종단 고위직 승려들의 성추행이나 공금 횡령 의혹 등이 포털사이트의 뉴스 부분에 잊을 만하면 등장함으로써, 조계종을 비롯한 한국불교의 승가공동체가 과연 수행공동체로서의 위상을 어느 정도라도 확보하고 있는지 하는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론 부정적인 뉴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 21세기 세계불교사에서 쉽게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비구니승단이 비구승단과 함께 엄연한 이부승제(二部僧制)를 구축하고 있고, 명상마을과 같은 수행공간을 통해 불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을 위한 쉼과 수행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더 나아가 압축성장으로 외적 팽창과 내면적 황폐화를 동시에 경험한 우리 한국인들에게 맑은 샘물 같은 죽비를 내려준 법정, 성철 같은 수행자를 배출해왔고, 현재도 그런 역할을 나름대로 해내고 있는 승려가 없지 않다.

이와 같은 긍정과 부정의 두 측면 모두에 주목하는 일은 올바르고 균형 잡힌 현실 인식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주제인 ‘코로나19 사태의 인식과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면 더 깊은 맥락의 인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맥락은 바로 ‘현재의 한국사회’라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시·공간이다. 대체로는 ‘2020년 전후의 한국사회’로 규정해볼 수 있고, 공간은 북한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주로 한반도의 남쪽에 초점이 맞춰진다. 우리가 함께 살아내고 있는 이 시·공간을 이끌어가는 지배적인 담론 또는 이념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기반의 민주주의이다. 후자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형태로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세계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음을 앞에서 함께 살펴본 바 있다. 이제 우리 모두가 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부각되어 있지만, 체감의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고 한국불교를 비롯한 종교계라고 해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적 구속력을 지니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정착과 확산은 왜곡된 개인주의, 즉 개인을 분리된 존재로 보고 그의 이기성(利己性)을 경제활동의 주동력으로 설정하는 개인주의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오랜 전통을 통해 형성해온 관계망의 끈을 상당 부분 훼손하게 되었고, 가정과 교육 현장을 중심으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이데올로기가 뿌리를 내린지 오래되었다. 이 도도한 흐름을 직시하면서, 연결고리의 사실성 인식에 기반한 올바른 인식과 자비로운 실천을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 한국불교에 주어져 있음에도, 그 책임에 반하는 인식과 행동이 끊이지 않는 불행한 현실인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현실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지혜가 부족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유전적 요인과 실천적 노력의 오묘한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 부적절한 기대를 하게 되고, 그 기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고통(苦, dukha)의 진리로 이어진다. 붓다가 발견한 진리는 그런 점에서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라.’는 정언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박병기, 2013: 168).

코로나19 사태는 별다른 고민 없이 유지해온 우리 일상에 심각한 균열을 만들면서 세계적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 다행히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공유하면서 함께 극복해보자고 외치는 정치지도자의 리더십과 의료진의 헌신, 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더해져 상대적으로는 모범적인 극복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의 지혜는 먼저 이 문제에 관한 인식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자신의 기준 없이 외부의 시선에만 의지하는, 식민지적 인식틀이 ‘선진국 담론’과 맞물리며 무분별하게 전개되는 무명(無明)의 그림자를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특히 이른바 엘리트층과 한동안 지배세력을 형성해온 지역의 사람들에게 한국불교는 적극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도움을 줄 수 있으려면 동시에 한국불교의 어두움에 대한 정당한 관심과 극복노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외제차를 타는 주지’나 ‘도박장을 출입하는 스님’ 같은 일탈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외부를 향한 충고는 힘을 잃거나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할 가능성마저 있다. 승가공동체를 제대로 형성하기 위한 교육과 수행, 계율 준수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다행히 우리 불교에는 삼학(三學)의 전통이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전승되어 있다. 수행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맹세를 의미하는 계율의 준수와 지속적인 경전 공부 및 현대적 재해석, 간화선(看話禪) 중심의 수행 전통을 적극적이고 현대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에 불교 전통의 다양한 수행법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노력이 더해질 수 있다면, 한국 승가공동체는 밝은 미래를 위한 등불을 밝히는 역할을 감당해내는 희망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노력에 꼭 더해져야 하는 것은 한국불교 전통의 대승적 토대에 관한 적극적인 인식과 재구축이다. 한국불교는 출가보살 뿐만 아니라, 재가보살의 수행과 깨달음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부대중공동체(四部大衆共同體)를 전제로 형성되어 왔다(박병기, 2013: 182). 가상공간이 현실공간을 압도하는 현실 속에서 출가(出家)는 율장(律藏)에서 강조하는 ‘나쁜 악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최소한으로만 보장할 수 있는 장치일 뿐이다. 오히려 재가보살들과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적극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따로 또 함께’ 사부대중공동체를 형성해가고자 하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비구와 비구니, 출가와 재가 사이의 불평등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고, 그것을 기반으로 삼아 시민사회와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을 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불자의 윤리는 연기적 존재성 인식에 기반한 자비의 일상적 실천으로 요약된다. 연기적 존재성에 관한 인식은 동체(同體)의 인식이고, 자비의 일상적 실천은 일상의 소중함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 토대를 둔 작은 실천의 공유로 시작된다.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마스크를 쓰고 손을 자주 씻은 행위는 나 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타자를 위한 것임을 우리 모두가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삼가고 그러면서도 관계의 소중함을 잊지 않는 비대면 접촉을 늘려가는 노력이 바로 동체인식에 기반한 자비의 일상적 실천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지점은 현 상황에 대한 불교 사회윤리적 인식과 실천이다. 불교 사회윤리는 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면서도 그 개인이 타자와의 의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연기성 인식에 기반한 역사와 구조 차원의 실천을 의미한다. 우리는 역사적 존재임과 동시에 문화적 존재다. 문화와 역사의 산물임과 동시에 그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회적이고 역사적 존재자인 것이다. 이 사실에 관한 인식이 자본주의적 일상 또는 ‘시장적 삶의 편재성’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버거운 과제로 다가오곤 했다.3) 그런데 이번 사태가 이런 우리 삶의 실상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어, 인식 전환의 획기적인 계기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 계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불교 사회윤리의 적극적 확산이 필요하고, 그 출발점에는 당연히 보살이자 시민인 불자들의 인식과 실천이 자리해야 한다. 이 때 보살은 재가와 출가를 포함하고, 특히 재가보살들의 선도가 더 절실히 요구된다.

Ⅳ. 맺음말

우리가 처한 현실은 늘 만만치 않다. 생존의 절박함과 실존의 적극적 요청이 겹치며 다가와 삶을 혼돈과 혼란 속으로 몰고 가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가져온 이번 사태는 그 혼돈과 혼란의 양상을 직시할 수 있는 가능성의 틈새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인간 삶의 연기적 맥락과 그 맥락 속에서의 근원적 취약함을 잘 드러내줌으로써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과 관련된 실존의 차원을 훨씬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물론 다른 한편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의 만연, 그 불안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쏟아내는 외부와 타자를 향한 혐오와 배제의 몸짓과 눈짓, 생존의 위기를 온몸으로 홀로 견뎌야 하는 사회적 약자의 확대와 그들에 대한 무관심의 확산 등이 그런 기대에 힘을 싣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로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직시하는 가운데 불교와 그리스도교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제도종교들은 그다지 바람직한 대응 자세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대면을 전제로 하는 종교의례의 강행과 편협한 정치성 표출 등이 겹치면서 사회적인 문제 집단 또는 요소로 매도당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미 시민사회의 외형을 지니게 된 21세기 초반 우리 한국사회에서 제도종교의 영역은 그 시민사회의 구성요소 중 하나이다. 이런 제도로서 종교는 구성원들의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 또는 가치관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제도와 가치의식 사이의 상호의존성이 가장 강한 영역이 바로 이 영역인지 모른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에 의해 보장받는 종교 집회의 상대적인 자율성에 대한 주장은 항상 한국 시민사회 구성원들이 현재 보여주고 있는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제도종교에 관한 시민사회 일반의 존중이라는 최소도덕으로서 시민윤리의 기반 위에 있다는 점에서만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최소도덕은 타자와의 관계를 위해 설정되는 것임과 동시에 ‘함께 살아감’, 즉 공화(共和)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고, 이 윤리를 정착시키지 못할 경우 제도종교들은 지속적으로 배제되거나 결과적으로 시민사회로부터 추방 당하는 일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과 마주 할 수도 있다. 제도종교의 영역에서 윤리가 부각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주로 제도종교로서의 불교에 초점을 맞추고 불교윤리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석하면서 실천적 대안까지 모색하고자 했지만, 그리스도교 윤리의 관점 또한 동등한 비중으로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부터 강조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는 ‘종교적인 것’을 제도종교와의 연관성 속에서 살펴보면서, 종교의 본래적 역할로서 안심과 입명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음도 함께 강조하고자 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불안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수용하여 해소하는 가운데, 각 시민들이 삶의 의미 물음에 관한 화두를 붙들고자 할 때 적극적인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종교이다. 이때 종교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교와 불교로 상징되는 제도종교이지만, ‘종교적인 것’에 대한 정당한 관심과 수용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철학함의 과제와도 직결되는 ‘종교적인 것’을 향한 열망이 각 개인과 시민사회의 차원에서 정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은 철학과 종교가 함께 해야 하는 과제이다. 그것은 다시 우리 시민사회의 주인공인 시민의 교양과 윤리, 역량의 강화라는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Notes

이 글은 2020년 정의평화불교연대의 ‘코로나19 이후’라는 주제의 집담회(2020.6.19.)와 인하대학교 다문화교육연구소의 ‘2020년 2차 다문화사회와 다종교교육 포럼(2020.11.6.)에서 발표한 논자의 발제문(「코로나19 상황에서 종교의 의미와 역할을 다시 묻다」)을 학술지의 성격에 맞게 수정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익명의 심사자 두 분의 의견 중에서는 관련된 사회현상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는 사항과 불교에 좀 더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 구체적인 실천방안까지 제시하겠다는 의견을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글쓰기 스타일에 대한 제안이나 관련 연구물을 더 많이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은 그 의견 자체가 학술논문에 대한 특정한 의견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참고만 했다. 이제 각주만 많이 달고 자신의 의견은 그 안에 감추는 방식의 소극적인 글쓰기는 이제 극복의 대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장적 삶의 편재성’이라는 개념은 에스트라 테일러·한상직 옮김. 2012. 『불온한 산책자』 이후, 41쪽에서 재인용한 것으로, 본래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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