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m and Society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연구논문

청허 휴정의 수행론

한상길*
Sangkil Han*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Assistant Professor, Academy of Buddhist Studies, Dongguk University

© Copyright 2020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Nov 27, 2020; Revised: Dec 21, 2020; Accepted: Dec 24, 2020

Published Online: Dec 31, 2020

국문 초록

청허 휴정은 숭유억불의 어려운 시대에서 수행의 가풍을 정립하고, 평생 동안 수행과 전법에 진력하였다. 청허가 이룩한 수행의 가풍은 조선불교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였고, 그의 회상에서 한국불교의 법통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민족을 구한 의승장으로서의 위업은 마침내 그를 우리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이 글은 청허의 수행론에 관한 연구이다. 『선가귀감』 등의 저술이 그의 수행에 관한 ‘이론서’, ‘지침서’라고 한다면, 문집은 ‘일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일상의 일기에서 여러 수행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찾아 그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문집에 나타난 이야기들은 간혹 그가 저술에서 제창한 선수행론과 다르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달라 보인다. 즉, 이론과 실재에 차이가 있어 보인다. 일상의 하루하루에서 제자를 제접하고, 선객과 문답하며, 염불을 행하는 수행자의 모습에 수행론이라 이름 붙이고, 이를 선수행, 교학수행, 염불수행, 의례수행의 넷으로 구분하였다.

청허의 일생은 선사로서의 수행의 여정이었다. 그런데 그는 삶의 곳곳에서 선수행은 물론 교학, 염불, 정토, 다라니, 의례 등 다양한 수행의 궤적을 남겼다. 이 글은 선사 청허에게 나타난 이러한 여러 수행론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수행의 방편문이라는 점이다. 이에 따라 염불과 정토, 다라니와 의례 등의 여러 수행을 인연에 따라 적용하였다. 두류산 내은적암에서는 염불수행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행한 일도 있었다. 두 번째는 교화의 일환이었다는 점이다. 제자를 지도하고 가르치기 위해 선수행만을 고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제자를 올바르게 교화하기 위해서는 참선이나 염불, 교학과 송주(誦呪) 등 그 어떤 수행도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청허는 이처럼 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깨달음이지만, 이 깨달음은 중생 구제, 즉 교화의 길에서 완성된다는 가르침을 여실히 실천하였다.

Abstract

During the difficult times of the Joseon Dynasty, Cheong-heo Hugh-jeong (1520-1604) established the style of Seon practice and devoted his life to performing and practicing the Buddhism. His methods of practice Joseon Buddhism presented a way forward, and his teachings established a tradition of performing Korean Buddhism. In addition, his feat of saving the nation from the crisis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finally established him as a great figure in our history.

This article is a study on the theory of the practice of Cheong-heo. If his writings, Seon-ga Gugam are called ‘theories’ and ‘guidelines’ on his practice, it is safe to say that the writing collections, Cheong-heo Dang-Jip is a ‘diary’. I tried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is diary by looking for honest stories about various practice. To this end, the story of his practice was divided into four categories: Seon practice, sutra practice, chanting practice, and ritual practice.

As a result, two aspects of understanding were found. The first is that it is a bangpyeon (expedient method). Accordingly, various practices such as chanting practice, darani practice, and ritual practice were applied according to their karmic relations. The second is that it was part of teaching. Attention is drawn to the fact that he did not only insist on seon practice to guide and teach monks. In other words, in order to properly educate the disciples, any practice, such as meditation, sutra studies and chanting, is not important. Master Cheong-heo practiced the lesson that although the ultimate purpose of practice was to realize, this realization was completed in the path of the restoration of the peoples.

Keywords: 청허 휴정; 수행론; 선수행; 교학수행; 염불수행; 의례수행
Keywords: Cheong-heo Hyu-jeong; A Theory of Practice; Seon Practice; Sutra Practice; Chanting Practice; Ritual Practice

Ⅰ. 머리말

청허 휴정(1520-1604)은 조선시대 불교를 이끌어간 주역이었다. 숭유억불의 어려운 시대에서 수행의 가풍을 정립하고 평생동안 수행과 전법에 진력하였다. 청허가 이룩한 수행의 가풍은 조선불교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였고, 그의 회상에서 한국불교의 법통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민족을 구한 의승장으로서의 위업은 마침내 그를 우리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이러한 위상에 따라 청허에 관한 연구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그에 관한 연구는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선승으로서 사교입선의 수행관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를 규명하는 연구이다.1) 대부분의 연구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두 번째는, 한국불교의 법통을 고찰하면서 그의 법맥이 어떻게 전수하였는가에 대한 연구2), 세 번째는, 의승장으로서의 활약에 관한 연구3) 등이다.

이 글은 청허의 수행론에 관한 연구이다. 수행론은 수행에 관한 다양한 방법, 이를 테면 선수행, 교학수행, 염불수행, 의례(다라니)수행 등에 관한 견해, 관점 등을 말한다. 이러한 다양한 수행법을 청허는 어떻게 이해하고,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하였는가를 살펴보는데 글의 목적이 있다. 청허에 대한 연구가 선수행에 집중되어 있는 이유는 그가 남긴 저술, 『선가귀감』, 『선교석』, 『선교결』 등이 모두 선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연구는 이 저술의 내용을 분석하고, 의미를 파악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러한 저술들은 그의 수행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본고의 주요한 전거는 이상의 저술이 아니라, 그의 문집 『청허당집』이다. 문집에는 그의 출가 생활 60여 년의 흔적들이 여실히 녹아 있다. 대부분 시와 게송, 그리고 짧은 편지글이지만 여기서 수행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어린 사미에게 쓴 시와 교학의 노장, 정토를 찾는 염불행자 등에게 쓴 글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선가귀감』 등의 저술이 그의 수행에 관한 ‘이론서’, ‘지침서’라고 한다면, 문집은 ‘일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일상의 일기에서 여러 수행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찾아 그 의미를 이해하려고 한다. 문집에 나타난 이야기들은 간혹 그가 저술에서 제창한 선수행론과 다르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달라 보인다. 즉, 이론과 실재에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내 눈에 다르게 보일 뿐이다. 청허는 저술에서 이렇게 말하고, 문집에서는 저렇게 말했다는 등의 차이를 지적할 만한 안목이나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일상의 하루하루에서 제자를 제접하고, 선객과 문답하며, 염불을 행하는 수행자의 모습에 수행론이라 이름 붙이고, 이를 선수행, 교학수행, 염불수행, 의례수행의 넷으로 구분하였다.

Ⅱ. 청허 수행론의 이론과 실제

1. 『청허당집』의 수행론

청허는 1604년(선조 37) 1월 23일에 입적하였다. 나이는 85세, 법랍은 67세였다. 그가 남긴 저술은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가사(雲水壇歌詞)』, 『삼가귀감(三家龜鑑)』, 『선가귀감(禪家龜鑑)』, 『심법요초(心法要抄)』,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제목에서 보듯이 대부분 선에 대한 이론서로서 선과 교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통해 선수행의 지침을 제시하였다.

그의 문집 『청허당집』은 2권본, 7권본, 4권본의 세 종류가 있다. 최초의 판본은 1612년(광해군 4) 제자 사명 유정이 허균(許筠, 1569-1618)의 서문을 받아 간행한 2권본이다. 분량은 가장 적으나 청허의 입적 후 8년 만에 제자들이 간행하였으므로 그의 법통과 사상의 추이를 비교적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4) 7권본은 1630년(인조 8)에 제자인 보진(葆眞)·언기(彦機)·쌍흘(雙仡) 등이 경기도 삭녕 용복사(龍腹寺)에서 간행하였다. 이식(李植, 1584-1647)과 임진부(任眞怤, 1586-1657)의 서문이 있다. 3종의 판본 가운데 가장 방대한 분량으로 2권본에 없었던 많은 시문을 모으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5) 끝으로 4권본은 1794년(정조 18)에 평안도 묘향산 묘향사에서 간행하였다. 선조가 청허에게 하사한 「묵죽시」와 정조가 지은 「서산대사 화상당의 명문(西山大師畵像堂銘)」, 「임종게」, 「수충사제문」 등을 추가하였다.

『청허당집』을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은 동국대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시스템(https://kabc.dongguk.edu/)이다.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제공하고 있다. 2016년에 『한국불교전서』에 수록된 7권본을 역주하여 한글본으로 출간하였고, 이를 웹에서 제공하고 있다.6) 문집에 수록된 목록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1권에는 사(辭) 7수, 사언시 3수, 오언고시 16수, 칠언고시 8수, 오언율시 24수, 칠언율시 23수, 오언배율 6수 등이 수록되었다. 2권에는 오언 절구 317수, 3권에는 육언절구 2수, 칠언절구 135수가 수록되었다. 4권에는 게(偈) 1편과 잡저 11편, 5권에는 「청허초(淸虛草)」 96수, 기(記) 8편, 명(銘) 1편, 발(跋) 1편을 수록하였다. 6권에는 26편의 시, 서(序), 소(疏), 기, 모연문 등을 수록하였다. 7권에는 60편의 서간문, 서(書)를 수록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청허집 보유>라는 제목으로 7권본에는 없는 시와 서, 문 26편을 추가하였다.

선사의 글은 대체로 간결하다. 문장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직설적이다. 첫 문집의 서문을 쓴 허균은 “그 글이 얼마나 진실하고 쇄탈한지는 보는 자들이 스스로 알 것이기에 여기서는 다시 평하지 않는다.”7)고 하였다. 이러한 『청허당집』에서 수행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탐색하였다. 대략 28건의 시와 게, 문, 서간에서 수행과 관련한 내용을 취합할 수 있었다. 이를 4개의 주제, 선수행, 교학수행, 염불수행, 의례수행으로 구분하였다. 간략한 표로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청허당집』의 수행 관련 글
주제 기사명 형식 청허당집
강을 마치는 날에 행 대사에게 보이다 오언절구 329
『선문귀감』 서문 서문 729-730
교사에게 답한 글 서간 828
오대산 일학 장로에게 부친 글 서간 851-853
교학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린 글 서간 793-803
송암 도인에게[2수] 오언절구 303
천민 선자에게 답하다 오언절구 337
천감 선자가 나에게~ 오언배율 152
명감과 상주와 언화 등 여러 문도에게 보이다 오언배율 150-151
매 대선이 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칠언절구 608
잡흥[3수] 오언절구 469
『원각경』 중간 모연게 소문 726-727
『원각경』 경찬소 소문 751
염불 응 선자에게 부치면서 겸하여 신수 사미에게도 보이다 오언고시 75-77
백련 선화자에게 주다 오언고시 79
두류산 내은적암에서 오언고시 82
염불 염불승에게 주다 오언절구 481
염불승에게 주다 칠언절구 627
염불문[백 처사에게 주다] 서간 732
묵년 시자에게 부친 글 서간 850
옥계자에게 올린 글 서간 885-886
성눌 선자에게 주다[3수] 909
의례 이용면이 그린 석왕사의 천불탱에 제하다 칠언절구 628
채씨를 대신해서 남편을 천도한 글 소문 745-746
심 대비를 대신하여 대왕을 천도한 글 소문 747-749
종합 유방하는 선자에게 주다 오언율시 113
지리산 황령암기 기문 760-761
동호 선자에게 부친 글 서간 83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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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행론

청허는 1531년(중종 26) 12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다가 15세에 진사시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친구들과 지리산 유람을 떠났다. 당시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린 글>

이렇게 해서 동학(同學) 몇 사람은 각각 서울로 돌아가고 나만 홀로 선방에 머물게 되었는데, 앉아서 여러 경전을 탐독하였으나 갈수록 명상(名相)에 얽매인 나머지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지 못한 채 답답한 심정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에 홀연히 문자를 떠난 묘한 경지를 얻었으므로 마침내 시를 읊기를, “창 밖에서 우는 두견이 소리 홀연히 들으니, 눈 가득 봄 산이 모두 고향이로세.”라고 하였고, 다른 날에 또 시를 읊기를, “물 길어 돌아오며 문득 고개 돌리니, 청산이 백운 속에 무수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에 은도(銀刀)를 손에 쥐고 스스로 청발(靑髮)을 자르면서 “차라리 한평생을 바보 천치로 살지언정, 맹세코 문자를 일삼는 법사는 되지 않겠다(寧爲一生痴獃漢 矢不作文字法師也).”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선대사(一禪大師)를 수계사로, 석희법사(釋熙法師)와 육공장로(六空長老)와 각원상좌(覺圓上座)를 증계사(證戒師)로, 영관(靈觀)대사를 전법사로, 숭인(崇仁)장로를 양육사(養育師)로 삼았습니다.8)

이 글은 노 부윤(盧府尹)이 청허에게 조상의 행적과 어려서의 행적, 출가 인연, 운수 행적 등에 대해서 숨기지 말고 자세히 알려 달라는 청을 받고 썼다.9) 그러므로 출가의 배경과 과정에 대한 정확하고 진솔한 설명이다. 여러 경전을 탐독하였으나 명(名)과 상(相)에 얽매일 뿐 문자, 즉 교학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문자를 떠난 묘한 경지를 얻었다. 이후 청허는 “차라리 한평생을 바보 천치로 살지언정, 맹세코 문자를 일삼는 법사는 되지 않겠다.”고 하였다. 수행의 목표가 분명하였다.

이러한 출가 수행의 결연한 의지는 평생 계속되었다. 청허의 수행론을 대표하는 개념인 ‘선주교종(禪主敎從)’, ‘선심교천(禪深敎淺)’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지만,10) 어디까지나 선이 주이고, 교는 종이라고 하였다. 선과 교의 차이를 논하면서 이 둘을 통합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사교입선의 입장을 고수하였다.11)

내가 비록 불초하기는 하지만, 옛날 불교를 배우던 이들에게 뜻을 두고서 경전의 거룩한 글[靈文]을 보배로 삼고 있다. 그런데 그 글이 워낙 번다하여 바다처럼 한없이 광대하기 때문에 후세에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자못 잎을 따고 가지를 찾는 수고를 면하지 못하겠기에 그 글 중에서 요긴한 수백 어를 뽑아 하나의 종이에 적었으니, 글은 간단하면서도 뜻은 주밀(周密)하다고 하겠다. 만약 이 말을 가지고 엄한 스승을 삼아 궁구하면서 오묘한 뜻을 얻는다면, 구절마다 살아 있는 석가가 그 속에 있을 것이니, 부디 힘쓸지어다. 문자를 떠난 일구(一句)를 격외의 기보(奇寶)로 쓰지 않는 바는 아니나, 이는 다른 기회를 기다리려 한다.12)

1564년(명종 19) 45세의 여름에 쓴 『선가귀감』의 서문이다. 광대한 교학의 바다에서 헤매지 않도록 요긴한 말만을 선별하여 지름길로 안내하려는 의도이다. 그러면서도 “문자를 떠난 일구는 격외의 기보로 쓸 기회가 따로 있다.”며 교학을 방편으로만 한정하였다.

청허가 제자를 지도하는 원칙은 당연히 선수행이었다. 『선문귀감』과 『선교석』, 『선교결』을 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의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제자들을 어떻게 선수행으로 지도했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먼저 그의 대표적인 제자 사명 휴정의 기록에서 그 일단을 찾아볼 수 있다.

<석장비문>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청허의 좌하(座下)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노사가 심지(心地)를 일깨우며 곧바로 성종(性宗)을 가르쳐주니 대사가 당장에 크게 깨닫고는 즉시 쓸데없는 언어들을 쓸어버리고 노닥거리는 습관을 끊어 버렸다. 그리하여 종전에 글놀음으로 유희하던 것들을 꾸며대는 말이었다고 참회하고는 한결같이 안심(安心)과 정성(定性)에 뜻을 두어 3년 동안 고행한 끝에 그 정법을 모두 증득하였다.13)

1575년(선조 8) 사명은 32세의 늦은 나이에 묘향산 보현사로 찾아가 청허의 제자가 되었다. 사명이 서산의 제자가 된 배경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1573년 30세 때 출가사찰인 직지사의 주지를 맡았다가 2년 뒤에 청허를 찾아갔다. 스승은 사명이 봉은사 시절 교학과 유학을 익히고, 유자들과 교류했던 지난 행적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심지(心地)를 일깨우며 곧바로 성종(性宗)을 가르쳐 주었다. 지난날들의 쓸데없는 언어들을 쓸어버리고 노닥거리는 습관을 끊어버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명은 글놀음으로 유희하던 것들을 꾸며대는 말이었다고 참회하였다.

서산은 사명을 각별하게 대접하였다. 선과에 급제한 엘리트인데다가 이미 상당한 지경에 이른 32세의 제자였다. 제자이지만 사명을 부를 때는 늘 ‘정공(政公)’, ‘사(師)’, ‘대사(大師)라고 경칭(敬稱)하였다.14) 신분계급이 엄연한 전통사회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제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기대가 엿보인다.

청허는 『선가귀감』 서문에서 “예전에 불교를 배우는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부처님의 행동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배로 여긴 것은 경전의 거룩한 글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를 배우는 이들은 전해 가면서 외는 것이 세속 선비들의 글이요, 청하여 지니는 것이 벼슬아치들의 시뿐이다. 심지어는 그것을 울긋불긋한 종이에 쓰고 화려한 비단으로 꾸며서, 아무리 많아도 족한 줄을 알지 못하고 가장 큰 보배로만 여기고 있다. 예와 오늘에 불교를 배우는 이들의 보배 삼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같지 않을까.”15)라고 하였다. 선가의 귀감, 지침서를 쓰면서 첫 마디로 출가자들이 세속 선비의 글이나 외우고, 벼슬아치들의 시나 지니는 세태를 지적하였다. 사명 들으라고 하는 말 같다.16)

사명은 묘향산 금선대에서 서산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도반인 행주(行珠), 보정(寶晶) 등과 함께 『금강경오가해』를 들고 스승에게 물었다. “반야교 가운데도 또한 선지가 있으니 반야를 종으로 삼아도 되겠습니까?” 서산은 이들에게 자세하게 대답한 후, 사명당에게만 이 별지로 가르침을 내렸다.

<또 별지로 보이다>

천 리를 치달리는 말이 어찌 채찍의 그림자를 빌리겠는가. 광야에 부는 봄바람이 마치 물 흐르듯 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도를 보기는 쉬워도 도를 지키기는 어렵다.”라고 하였다. 그대는 언제나 ① 율법을 힘껏 지켜 지해(智解)와 수행에 어긋남이 없게 하고, ② 타인의 허물을 말하지 말 것이며, ③ 조정의 일을 의논하지 말라. ④ 그리고 외서를 보지 말고, ⑤ 사색(邪色)을 보지 말며, ⑥ 감언(甘言)을 듣지 말라. 세상속의 사람들도 두려워하는 바인데, 하물며 세상 밖의 사람이겠는가. ⑦ 아첨하는 웃음을 가까이 하지 말라. 속인들도 병으로 여기는데, 하물며 도인이겠는가. ⑧ 총혜(聰慧)로 교만을 부리지 말고, ⑨ 문자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지극한 도[至道]에는 남이 없고 진리에는 나가 없느니라. ⑩ 모름지기 자기의 분수를 항상 지키고, 자기의 허물을 항상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⑪ 질직(質直)으로 체(體)를 삼고 자인(慈忍)으로 용(用)을 삼으면서, ⑫ 청산과 백운을 안식처로 삼고 수월(水)과 송풍(松風)을 마음 아는 벗으로 삼으면 거의 도인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17)

서산에게 사명당은 이미 ‘천리를 치달리는 말[千里之驥]’이고, ‘광야에 부는 봄바람[曠野春風]’이었다 그러나 도는 보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듯이, 지키기를 잘하라고 당부하였다. 구체적으로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열 두 가지를 조목조목 열거하였다. 대체로 사문으로서, 선사로서 지녀야 할 지침들이다. 끝으로 스승은 사명에게 푸른 산과 흰 구름, 달빛과 솔바람을 벗 삼아 사는 도인이 되기를 당부하였다. 사명의 비, 석장비명에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한결같이 안심(安心)과 정성(定性)에 뜻을 두어 3년 동안 고행한 끝에 그 정법을 모두 증득”하였다는 짧은 구절의 배경에 이러한 청허의 가르침이 있었다.

청허가 제자를 선수행으로 인도하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1579년(선조 12) 60세 때18) 제자 일학(一學) 장로에게 쓴 편지이다.

<오대산 일학(一學) 장로에게 부친 글>

헤어진 뒤로 도체(道體)는 어떠합니까. 질병은 없습니까. 마군의 장난은 없습니까. 화두는 힘을 얻었습니까. 입지(立志)와 발원은 지금도 여일(如一)합니까. 오탁(五濁)의 세상 속에서 공과 같이 기질이 청수(淸粹)하고, 지개(志槪)가 예리한 사람은 실로 찾기 힘듭니다. 내가 그래서 애지중지하며 날이 갈수록 더욱 그리워하는 것입니다.(중략)

공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마다 참회하고 달마다 참회하며, 날마다 참회하고 때마다 참회하며, 부지런히 정진해야 할 것이니, 계속 나아가면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 장부가 할 일입니다. 모름지기 신심은 바다와 같이 하고 지기(志氣)는 산악과 같이 하여 종전에 배우고 이해한 불견(佛見)·법견(法見)과 기언(奇言)·묘구(妙句) 등은 일체 거대한 바다 속으로 쓸어버리고서 다시는 거론하지 말 것이요, 8만 4천의 미세한 염두(念頭)는 앉은 자리에서 끊어 없애 버려야 할 것입니다.19)

공부는 쉽지 않으니, 언제나 참회하며 정진해야 한다. 과거의 알음알이는 모두 버리고, 수많은 머릿속의 생각마저 끊어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청허는 다양한 방법으로 깨달음을 위한 선수행을 강조하였다. 제자를 제접하는 것은 물론, 남종선의 근본서인 『육조단경』을 강의하기도 하였다.20) 때로는 교학자와의 논쟁도 주저하지 않았다.

<교사(敎師)에게 답한 글>

생각하던 중에 편지를 받고 위로가 되었네. 저번에 선교(禪敎)를 분변(分辨)하던 때의 이야기가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데, 지금 편지를 보아도 그 의혹을 풀지 못했으니 우습기만 하네그려. 그런데 나와 자네는 안으로 통하지 못하는 것이 많으면서 밖으로 다투기만을 힘쓰는데, 이는 날파리가 단지 속에서 왱왱거리는 것과 같고, 절름발이 자라가 높은 산에 오르는 것과 같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와 자네가 적요(寂寥)한 가운데 들어앉아서 다시 치밀하게 헤아려 보는 것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21)

청허가 어느 교학자에게 쓴 편지이다. 만나서 선과 교를 분변(分辨)하였고, 논쟁은 편지 왕래로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 둘의 다툼은 단지 속의 날파리 같고, 절름발이 자라가 제자리만 맴도는 모습과 같이 진전이 없으니, 다시 만나 치밀하게 논의하자는 제안이다. 이른바 끝장 토론을 해보자는 자신감이 드러난다.

3. 교학수행론

청허의 수행론에서 교학은 하나의 방편문이었다. 이가 시릴 정도로22) 많은 경전을 섭렵하였으나 명상(名相)에 얽매일 뿐이었다. 선수행에 대한 굳은 믿음은 교학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청허당집』에 보이는 교학 비판과 관련한 글은 다음과 같다.

<천감 선자가 나에게 매우 은근하고 간절하게(天鑑禪子 求我於一言)>
일생을 아무 기량도 없이 一生無伎倆
그냥 백발의 늙은이가 되었도다. 虛作白頭翁
종이를 뚫어 깨달음을 구함은 鑚紙求眞覺
모래를 쪄서 밥 짓는 것과 같도다. 蒸沙立妄功
허공 꽃을 바위 위에 심고 空花栽石上
끓는 물을 목구멍으로 삼키도다. 燄水吸喉中
사변의 그물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難出四邊網
팔도의 바람을 늘 따르누나. 長隨八倒風
진주를 쥐고서도 구걸함이 슬프고 持珠悲乞丐
보배를 지니고도 빈궁함이 한스럽다. 守藏恨貧窮
나의 가보를 알고 싶은가. 欲識吾家寶
가을 하늘 점점이 나는 기러기로다.23) 秋天亂點鴻
<송암 도인에게(松嵒道人)>
산 속에서는 문자를 금하나니 林下閑文字
많을수록 마음이 산란하니까. 多多必亂心
정겨운 시도 오직 한 수만 情詩唯一首
그것으로 나의 노래 충분하다오.24) 可以偹吾吟
<천민 선자에게 답하다(酬天敏禪子)>
텅 비어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虛寂本無物
어찌하여 수고스럽게 대장경을 전독하나. 何勞轉大藏
가을 강에 비친 서늘한 달빛은 秋江寒月色
원래 장왕의 전유물이 아닌 것을.25) 元不屬張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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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감 선자, 송암 도인, 천민 선자에게 각각 써 준 시인데, 공통적으로 교학 무용론을 강조하였다. 종이를 뚫어[鑚紙] 즉, 경을 읽어 깨달음을 구하는 일은 모래를 쪄서 밥 짓는 것과 같다. 산속에서는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문자를 금한다. 텅 비어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하여 수고스럽게 대장경을 읽느냐며 교학에 대한 일관된 비판론을 전개하였다. 청허는 시의 주인들을 선자, 도인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중견 이상의 선사들로 짐작된다. 선수행에 매진하는 이들에게도 수시로 교학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그런데 청허의 다른 글에서 교학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볼 수 있다. 먼저 「명감(明鑑)과 상주(尙珠)와 언화(彦和) 등 여러 문도에게 보이다(示明鑑尙珠彦和諸門輩)」(2수)라는 시이다.

[2]
지원을 산해와 같이 하여 志願如山海
기필코 대각의 성에 오를지라. 期超大覺城
스승을 가리고 벗을 가려서 擇師兼擇友
정묘하고 정명하게 정진하여라. 精妙更精明
앉을 때는 서쪽을 향해 앉고 坐必向西坐
걸을 때는 땅을 보고 걸어라. 行須視地行
하루 한 끼로 시장기를 면하고 療身常一食
3경에만 잠깐 눈을 붙여라. 許睡限三更
경전을 손에서 놓지 말고 金書不離手
외전에 마음을 두지 말라. 外典莫留情
인간 세상이 즐겁다 말하지만 人世雖云樂
죽음의 악마가 금방 닥치느니라. 死魔忽可驚
우리는 실사를 논할 뿐이니 吾儕論實事
어찌 헛된 이름을 숭상하리오.26) 安得尙虛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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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수 중 두 번째 시이다. 첫 번째 시에 “출가하여 도를 닦는 자들은 가장 먼저 재물과 여색을 금하고, 여럿이 거할 때는 입을 삼가며 홀로 처할 때는 마음을 단속하라. 밝은 스승을 항상 받들어 모시고 나쁜 친구와 이불 함께 덮지 마라.”는 구절이 있다. 이처럼 출가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가르치는 것으로 보아 명감과 상주, 언화는 초심자들이라 짐작된다. 청허는 이들에게 “경전을 손에서 놓지 말라.”고 하였다. 앞에서 선자, 도인들에게는 문자, 교학의 무용론을 제창하였고, 초심자들에게는 경전을 놓지 말라고 각각 다르게 말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대상에 따른 수기설법이라 해석된다. 즉 초심자에게는 늘 경전을 지니고 교학을 이해하도록 하였고, 중견 이상의 선수행자들에게는 이제 문자를 버리고 견성에 매진하라는 사교입선을 강조한 것이다.27)

이처럼 청허는 교학을 방편문으로 단정하였다. 『선가귀감』에서 “경을 들으면 귀를 거치는 인연도 있게 되고, 따라 기뻐하는 복이 된다.”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러나 “경을 보되 자기 마음속을 돌이켜봄이 없다면 비록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보탬이 없는 것과 같다.”28)고 하여 방편으로서의 교학만을 인정하였다. 또한 『선교석』에서는 “문자에만 집착하지 않으면 한 권의 경전을 읽어도 좋을 것”29)이라 하였다. 방편문으로서의 교학에 관한 견해는 문집의 「원각경 경찬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원각경 경찬소(圓覺經慶讚疏)>

박가범(薄伽梵; bhagavat, 세존)이 적광(寂光)에서 가르침을 베푼 것은 진체(眞體)를 비춰서 몽형(夢形)을 없앤 것이요, 함허당(涵虛堂; 己和得通, 1376-1433)이 말을 새기고 뜻을 해설한 것은 허공을 조각내고 뱀의 다리를 그린 것입니다. 그러나 문자를 통한 지식이 아니라면, 끝내 무슨 수로 밀의(密義)와 종강(宗綱)을 궁구할 수 있겠습니까.(중략)

법은 문자를 떠났으니 이것은 얼음에 새긴 문장이요, 도는 언어를 끊었으니 이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은 격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인연한다면, 한 권의 경이 비록 간략하기는 하지만, 한번 눈을 스치기만 해도 삼각(三覺; 自覺·覺他·覺行圓滿)의 뜻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불문의 고승들을 모아 적토(寂土)의 진법(眞法)을 연설하게 되었습니다.30)

『원각경』을 간행하고 경찬의 소문을 지었다. 청허는 종밀(宗密)의 『대방광원각수다라료의경략소(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의 서문을 인용하여 “오종(五種)의 이름만 들어도 찰진(刹塵)의 보시보다 낫고, 반 게(偈)의 뜻만 설해도 항하사의 소승(小乘)보다 낫다.”고하였다. “그런 까닭에 입으로 암송하며 마음으로 수지하는 한편, 나무에 새겨서 세상에 전하기 위해”31) 경을 간행한다고 밝혔다.

청허는 이 『원각경』을 중간(重刊)하기 위해 사전에 모연게를 쓰는 등 각별히 노력하였다.

<원각경 중간 모연게(圓覺經重刊募緣偈)>
삼천세계에 가득한 보배를 가지고 寶滿三千界
보시해서 복을 얻는다 해도 持用布施福
이 경의 한 글자 한 구의 뜻을 不如聞此經
얻어 듣는 것만 못하리라. 一字一句義
중생을 교화하여 4과를 얻는다 해도 化衆得四果
반 게를 선포하는 것만 못하리니. 不如宣半偈
그 묘한 공덕은 헤아리기 어렵고 功德妙難思
그 진리는 상정을 뛰어 넘었도다. 眞理越常情
더구나 제천의 부중과 而況諸天衆
8만 금강이 항상 수호하여 金剛恒守護
재앙을 없애고 복혜를 증진하며 除灾增福慧
재보를 충족하게 해줌이리오. 財寶常充足
내가 지금 구본을 간행하여 我今鋟舊本
원각의 바다를 광포하려 하노니 欲廣圓覺海
바라건대 뜻을 같이하는 분들은 願諸同志士
재물을 희사하여 좋은 인연 맺으시라.32) 捨財共結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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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문집의 여러 글에서 청허의 교학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초심자에게는 늘 경전을 수지 독송하도록 하였고, 『원각경』을 간행하면서 교설(敎說)의 귀중함을 강조하였다.33) 그러나 이러한 교학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고, 선사로서의 올바른 수행은 교학을 떠나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를 위해 논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천감 선자가 나에게 매우 은근하고 간절하게 한마디 말을 청하였다. 그래서 내가 먼저 자신을 책망하며 선자의 잘못을 지적하였으니, 선자도 스스로 책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34)라며 강한 어조로 반박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4. 염불수행론

청허는 『선가귀감』에서 염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면 염불이다.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도움이 없다.”35) 즉, 입과 마음으로 하는 염불은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청허당집』에는 염불에 관한 그의 생각을 자세히 알수 있는 「염불문」이라는 글이 있다.

<염불문[백 처사에게 주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좇아서 잊지 않고 항상 생각하며,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산란하지 않게 분명히 한다.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는 가운데 한번 소리 내어 부르면서 생각하면, 80억 겁의 생사의 죄를 소멸할 수 있고, 80억 겁의 수승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 한 번 소리 내어 불러도 그러한데, 더군다나 천만 번 부르는 것이겠는가. 한 번 생각하는 것도 그러한데, 더군다나 천만 번 생각하는 것이겠는가. 이른바 “열 번 소리 내어 염불하면 연지(蓮池)에 왕생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송(誦)한다고 하고, 마음으로는 염(念)한다고 하는데, 송만 하고 염을 하지 않으면 이치로 볼 때 아무 이익도 없으니, 이 점을 거듭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상근(上根)의 사람을 위해서는, 마음이 곧 부처이고(即心即佛), 마음이 곧 정토이며(惟心淨土), 자성이 곧 미타(自性彌陀)라고 설하였으니, 이른바 서방이 여기에서 멀지 않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 부처님이 하근(下根)의 사람을 위해서는, 10만 8천 리라고 설하였으니, 이른바 서방이 여기에서 멀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고 보면 서방이 멀고 가까운 것은 사람에게 있지 법에 있지 않고, 서방이 드러나고 숨는 것은 말에 있지 뜻에 있지 않다고 할 것이다. 만약 사람이 한 생각을 내지 않아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면, 자성의 미타가 홀로 드러나고, 자심의 정토가 앞에 출현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돈오이며 돈수요 돈단(頓斷)이며 돈증(頓證)이기 때문에 점차 거쳐야 할 단계가 없다. 그렇긴 하지만 잘못된 인식 작용을 바로잡는 일은 일조일석에 되는 일이 아니요, 오랜 세월 수행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은 본래 그대로이지만 항상 유념해야 하고, 업은 본래 공한 것이지만 부지런히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36)

설명이 필요 없는 간결하고 명백한 설명이다. “열 번 소리 내어 염불하면 극락에 왕생한다.”는 『아미타경』을 인용하여 입과 마음이 상응하는 염불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염불을 통한 정토왕생 수행은 근기에 따라 차이가 있다. 상근자(上根者)는 ‘즉심즉불(即心即佛)’, ‘자성미타(自性彌陀)’의 경지에서 단박에 돈오하고 돈수하며, 돈단(頓斷)하고 돈증(頓證)한다. 하근자(下根者), 백 처사는 오랜 세월의 염불수행이 필요하고 항상 유념하며 부지런히 끊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청허의 이러한 염불관은 제자에게 쓴 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백련 선화자에게 주다(贈白蓮禪和子)>
서방정토 염불수행법을 통해서 西方念佛法
틀림없이 생사를 뛰어넘나니. 決定超生死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면 心口若相應
왕생은 손가락 튀기는 그 사이에 徃生如彈指
한 생각으로 연화를 밟나니. 一念踏蓮花
누가 8천 리라 말을 하는고. 誰道八千里
공 이루고 명 다하기 기다리면 功成待命終
대성이 와서 그대를 영접하리라.37) 大聖來迎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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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는 어린 사미에게 염불에 힘쓰도록 권장하고,38) 위의 백련 선화자와 같은 선사에게도 염불수행은 생사를 초탈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초심자나 중견 수행자에게나 염불은 한결같이 수행의 중요한 방법이었다. 결국 그에게 염불은 곧 참선이었다.

<염불승에게 주다(贈念佛僧)>
참선이 바로 염불이요. 叅禪即念佛
염불이 바로 참선이니 念佛即叅禪
본심이 방편을 여의는 그곳. 本心離方便
밝고 밝으면서 고요하고 고요하리.39) 昭昭寂寂然
성눌 선자에게 주다(贈性訥禪子)
염불하거나 참선하거나 念佛叅禪法
성취하는 도리는 다르지 않나니. 功成理不差
몸과 마음을 내려놓으면 身心如放下
고목에 정녕 꽃이 피리라.40) 枯木定生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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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산 내은적암에 머물 때는 염불승들과 한마당에서 수행한 일도 있었다.

<두류산 내은적암에서(頭流內隱寂)>
승려 대여섯 사람이 有僧五六輩
내 암자 앞에 집을 지었네. 築室吾庵前
새벽 쇠종 소리에 함께 일어나고 晨鍾卽同起
저녁 북소리에 함께 잠드네. 暮鼓即同眠
시내의 달빛 함께 길어다 共汲一澗月
차를 달이며 푸른 연기 나눈다네. 煮茶分靑烟
날마다 무슨 일 의논하느냐면 日日論何事
염불과 참선이라네.41) 念佛及叅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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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참선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맑은 정신으로 화두에 집중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와 달리 염불은 소리 높여 아미타불이나 경을 염송한다. 칭명염불, 고성염불이다. 때로는 목탁과 굉쇠 등의 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조화하기 쉽지 않은 둘을 중국불교에서는 일찍부터 결합하여 염불선을 제창하였다. 이른바 ‘염선겸수(念禪兼修)’, ‘염선일치(念禪一致’이다.42)

청허의 시대는 선과 염불은 물론 교학과 제반 수행이 어우러지던 때였다. 청허가 쓴 「지리산 황령암기」에 1545년(명종 원년) 무렵 황령암에서 이러한 종합 수행이 펼쳐지는 모습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性熙法師는) 선정에 드는 스님을 뼈로 삼고, 불경을 보는 스님을 살로 삼으며, 죽반승(粥飯僧)을 가죽으로 삼고, 행지(行智)가 구족한 스님을 안목(眼目)과 수족(手足)으로 삼으니, 한 암자에 거하는 승도들이 엄연히 하나의 법왕의 몸을 이루게 되었다.”43)고 하였다.

청허의 염불수행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사실은 염불정토를 강조한 글들이 대체로 노년 이후에 썼다는 점이다. 다음과 같은 두 편의 글이다.

① <옥계자(玉溪子)에게 올린 글>

사모하여 마지않던 차에 한 폭의 정다운 글과 여섯 가지 진미를 홀연히 설산 속에서 받고 보니, 늙은 눈이 갑자기 밝아지고 마른 창자가 갑자기 불러옵니다. 이 선물이 고인(故人)의 마음에서 나왔다고 생각을 하니, 기쁨의 눈물과 슬픔의 눈물이 번갈아 뺨을 적시며 스스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한 그릇의 귀한 떡을 법당에 가득한 납승들에게 공양하였더니, 납승들이 각자 수복을 더하는 축원을 끝도 없이 올렸습니다. 이로써 생각건대 새해를 맞아 수산(壽山)과 복해(福海)가 더욱 늘어나실 것이기에 거듭 축하드리는 바입니다.(중략)

60년 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바탕 꿈처럼 순식간에 지나갔으니, 섭섭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나는 머리에 눈이 내리고 마음이 재처럼 식어서 세상 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이 연화세계(蓮花世界)로만 더욱 마음이 치달리는데, 존형께서도 그러하십니까. 여기에서는 실(實)을 논할 뿐 허(虛)는 논하지 않습니다. 부귀[千鍾]와 영화[駟馬]도 필경은 무익한 것이니, 모쪼록 몽환과 같은 부생(浮生)에 절대로 뜻을 두지 마시고 극락에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입니다.(중략)

수십 년 동안 화두를 잊고 지내다가 나도 모르게 ‘가섭의 춤추는 소매[迦葉舞袖]’를 들게 되었으니, 이것도 선가의 일단의 기사(奇事)라고 하겠습니다. 껄껄껄. 삼가 이렇게 절하며 감사드립니다. 경진년(1580) 설날에 경진생 청허자가 경진생 옥계자께 올립니다.44)

② <묵년(默年) 시자에게 부친 글>

뜻이 견개(狷介)함을 숭상하며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소년의 모습이요, 마음이 적요(寂寥)함을 좋아하며 좋은 벗을 갈망하는 것은 노인의 실상입니다. 20년 전에 알고 지내던 이들이 이미 솔 아래 티끌로 변했으니, 가는 것은 동쪽 바다로 흐르는 물과 같고, 점차 사라지는 것은 쇠잔한 촛불과 같습니다. 오직 남아 있는 것은 나와 존형과 몇 명의 동년일 뿐이니, 조용히 생각하노라면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중에 정 공(政公)이 끊어진 통서(統緖)를 잇고자 찬 재를 뒤적이며 하나의 불씨를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늙은 나는 두류산에 있고, 노부는 밀양에 있고, 은사는 관동에 있어서 애타는 정이 갈래가 많으니, 실로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관동으로 들어가서 존형과 함께 늙어 가며 정 공의 근심을 반쯤 풀어 주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존형께서는 성호(聖號)를 열심히 염송하여 기필코 극락정토에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정다운 말은 많은 데에 있지 않으니, 이만 줄입니다. 진중하십시오.45)

①은 1580년(선조 13)년 설날, 환갑을 맞은 청허가 옥계자에게 보낸 답신이다. 이 둘은 경진생 동갑인데 옥계자가 먼저 청허의 환갑을 축하하는 선물을 보냈고, 청허가 감사의 편지를 썼다. 글 가운데 “나는 머리에 눈이 내리고 마음이 재처럼 식어서 세상 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이 연화세계로만 더욱 마음이 치달리는데, 존형께서도 그러하십니까.”라는 내용이 있다. 환갑을 맞은 노인 청허는 요즘 세상 일에 관심 없고, 오로지 연화세계, 즉 극락정토에만 마음이 있다는 고백이다. 또한 “수십 년 동안 화두를 잊고 지내다가 나도 모르게 ‘가섭의 춤추는 소매’ 화두를 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화두를 잊고 산다는 말은 평생을 선사로서 살아 온 청허의 겸양의 표현이지만,46) 극락정토에 대한 소망은 진솔한 고백인 듯하다. 청허는 『선가귀감』에서 “법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근기가 있으므로 여러 가지 방편을 쓰지 않을 수 없다.”47)고 하였다. 즉 그에게 염불과 정토신앙은 모두 방편이었다.

②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 존형에게 보낸 글이다. 오랜 벗들은 모두 돌아가고 자신과 존형만이 남은 슬픈 현실에서 아미타불[聖號]을 열심히 염송하여 기필코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당부하였다.

이러한 노년에 쓴 글에서 조선불교의 위인 청허당도 어찌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번뇌를 보게 된다. 삶보다 죽음이 가까운 현실에서 화두는 잊은 채, ‘연화세계’와 ‘극락정토’로 향하는 마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인 듯하다.

5. 의례수행론

의례에 관한 청허의 저술로 『운수단가사(雲水壇謌詞)』와 『설선의(說禪儀)』 2책이 있다.48) 이 책들은 제목에 ‘가사’와 ‘의례’를 표방하여 의례서임이 분명하다. 먼저 『운수단가사』는 불보살·천신·귀신 등에 대한 재래의 헌공의식문(獻供儀式文)을 선의 입장에서 재편한 의례서이다. 결계(結界)와 상위의 제불보살, 중위의 삼부제대성중(三部諸大聖衆)에 대한 소청(召請)과 헌공, 하위의 귀신에 대한 시식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시기는 전하지 않고, 가장 빠른 판본이 1588년의 청도 운문사 본이다. 청허가 선교 양종판사를 지낼 때는 이 책을 편찬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므로 봉은사를 떠나 운수납자로서 금강산과 지리산 등에 머물 때인 37세(1557년) 무렵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한다.49) 이 책은 수륙재의 대표적 의례서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와 형식이 유사하다. 전체 구성을 크게 다섯으로 분류하고, 상·중·하의 분단 절차로 구성한 점이 공통적이다. 또한 각종 게(偈)와 문구들은 당시의 상용의례집이었던 『진언권공(眞言勸供)』의 결계의식을 거의 대부분 인용하고 있다. 즉 『운수단가사』는 전래하는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와 『진언권공』을 모본으로 자신의 화엄교관을 융합한 찬술이다. 기존 의식집의 내용을 과감히 생략하고 영가에 대한 설법 등의 새로운 문구를 삽입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삼보에 대한 귀의와 화엄사상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였다.50)

『설선의』는 부처님이 선을 설법하는 의식 절차와 도량 장엄을 설명한 책이다. 9장의 간결한 분량으로 1634년(인조 12)의 삭녕 용복사(龍腹寺) 판본이 전한다. 제자와 사부대중이 도량에 시립한 가운데 도리천왕과 범천왕, 문수보살 등이 청법게와 설선게 등을 창한다. 이윽고 부처님이 17회의 문답으로 선법의 요체를 설한다는 내용이다.

이상의 두 책은 제목에 의례를 표방하고 있지만, 청허의 의례수행론을 살펴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운수단가사』는 기존의 의식집을 인용한 내용이 대부분이고, 『설선의』는 부처님이 선을 설법하는 도량의 장엄과 절차에 대한 설명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조선중기의 의례와 수행에 관한 실체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만 청허가 선사로서의 굳건한 정체성을 지녔으면서도 당시의 수륙재와 상용의례를 중시하였음을 알수 있는 사례이다.

청허는 『운수단가사』에서 보듯이 수륙재에 대한 각별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청허당집』에 수륙재를 개설하면서 쓴 수륙재 소문 2편이 전한다. 선사가 쓴 천도의례 수륙재의 소문은 다소 생경하다. 본래면목을 깨닫기 위한 선정(禪定),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고 깨어 있는 가운데 고요해야하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이 선사의 본분사이다. 그런데 의례는 몸과 소리로 표현해야 한다. 특히 수륙재는 여러 불기(佛器)와 악기, 그리고 의복 등이 어우러지는 범패와 작법무가 중요한 요소이다. 이처럼 선과 의례의 간극은 크고 멀어 보인다. 선사에게 의례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설명하기에는 필자는 역부족이다.

청허도 이러한 점을 유의한 듯하다. 석왕사의 천불탱에 제(題)를 쓰면서

기특하도다. 손에 든 한 자루 붓의 힘이여. 奇哉手裏一毫力
가슴속 1만 부처의 몸을 그려내었네. 寫出胷中萬佛身
단하를 만나면 그대로 지나지 않을텐데 若遇丹霞難放過
석왕사 문 밖에 다행히 사람이 없구나.51) 釋王門外幸無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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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주지하듯이 단하 천연(丹霞天然) 선사는 목불(木佛)을 태워 불을 쬐었다는 고사로 유명하다.52) 단하가 천불탱을 봤으면 불속으로 들어갈 일이라면서도 청허는 천불탱 조성을 칭송하였다. 천불탱 조성에 참여하였지만, 선사로서의 정체성은 그대로인 듯하다.

청허의 수륙재 소문은 2편이 전한다.

① <채씨를 대신해서 남편을 천도한 소문(代蔡氏薦夫䟽)>

지리산의 정사에서 무차대회53)를 경건히 베풀게 되었으니, 일시는 달이 꽉 찬 밤중이요, 계절은 꽃이 지는 봄날입니다. 용상(龍象)이 종횡으로 교차하니 연화장의 세계와 흡사하고, 나범(螺梵)이 다투어 울리니 영축산의 도량과 흡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망부는 멀리 유루(有漏)의 육신을 벗고 무생(無生)의 지혜를 곧바로 증득하여 미운(迷雲)이 모두 흩어지고 각월(覺月)이 홀연히 밝아지게 해주소서. 이와 함께 제자도 오장(五障)54)을 완전히 없애고 이엄(二嚴)55)을 빠짐없이 갖추어 몸은 쇠와 돌처럼 튼튼해지고, 목숨은 소나무나 대나무처럼 보전되게 해주소서. 그리고 감로의 남은 물결로 한 가문이 모두 목욕하여 삼도에서 길이 이익을 얻고 칠취(七趣)56)에서 모두 은혜에 젖게 해주소서. 제자는 못내 운운.57)

② <심대비를 대신하여 대왕을 천도한 소문(代沈大妃薦大王䟽)>

계해년(1563, 명종 18) 가을에 동궁[순회세자]이 세상을 떠났고, 을축년(1565, 명종 20) 여름에는 자전(慈殿, 문정왕후)이 또 승하하였습니다. 대왕이 이에 3년 동안 최질(衰絰)58)하면서 음식을 줄여 얼굴이 검게 변하였고, 온갖 걱정과 시름으로 늙기도 전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습니다. 금년에 이르러 임종(林鍾) 금붕(錦棚)의 날59)에 정호(鼎湖)의 용이 찬 안개 속에 하늘로 올라가고,60) 무역(無射) 패수(佩茱)의 달에 무릉(茂陵)의 솔바람 소리가 슬피 울렸습니다.61) 신하와 백성들의 통곡 속에 하늘도 빛을 잃고, 전각은 텅 빈 채 귀뚜리만 귀뚤귀뚤 울었습니다. 짧은 수명을 연장할 수 없으니 인자(仁者)의 장수도 믿을 수가 없고,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 천리의 도수(度數)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금강산의 정찰(精刹)에 나아가 경건히 무차(無遮)의 법연(法筵)을 열었습니다. 귀의하는 것은 자성 중의 삼신의 부처요, 전독(轉讀)하는 것은 자심(自心) 위의 한 권의 경서입니다. 범음(梵音)은 최상의 종풍(宗風)을 연출하고, 법악(法樂)은 무생의 곡조를 연주하며, 용상(龍象)은 연화장의 세계에서 종횡으로 교차하고, 인천(人天)은 영축산의 도량에서 서로 접합니다.62)

이상의 수륙재 소문 2편은 모두 남을 대신한 글이다. ①은 채씨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자 지리산의 정사에서 천도재를 열어주며 써준 글이다.63) ②는 1567년 명종이 서거하자 심대비가 ‘무차법연(無遮法筵)’ 즉 수륙재를 열어 국왕을 천도하면서 청허에게 천도문을 청하였다. 수륙재를 개설한 곳은 유점사로 추정된다.

이처럼 청허의 수륙재 소문은 남을 대신해 썼지만, 글 내용으로 보면 그저 대필에 그치지 않고 이들을 위해 수륙재를 개설해 주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수륙재는 억불의 시대에서 유일하게 국가가 공인한 국행의례였다. 태조가 1395년(태조 4) 삼화사와 견암사, 관음굴에서 고려 왕족의 천도를 위해 시작하여 1397년(태조 6)에는 진관사에 국행수륙사(國行水陸社)를 상설하였다. 이후 수륙재는 사찰은 물론 민가에서도 성행하며 불교의례의 대표로 정착하였다. 억불의 시대에서 불교가 존립할 수 있었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64)

앞서도 말했지만 필자는 선과 의례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식견이 없다. 다만 수행자로서의 선사의 삶 모든 것이 수행이 아님이 없듯이, 의례 역시 수행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즉 선사로서의 청허에게 수륙재는 여전히 수행의 여정이었을 것이다. 청허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선불교의 중흥조, 허응당 보우선사도 수차례 수륙재를 개설하고 3건 이상의 소문을 썼다.65)

청허의 입적 후 사명 유정도 스승을 천도하기 위해 수륙재를 개설하고 소문을 썼다.

<등계대사의 소상에 올린 소문(登階大師小祥疏)>

만력 32년 갑진년(1604) 정월 23일에 조계(曹溪) 보제등계(普濟登階) 청허대사가 시적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임진년에 변란이 발생한 초기에 임금님이 도성을 떠났는데, 그때에 조정이 대사에게 명하여 선교도총섭이 되게 하고, 의승을 모아서 대병(大兵)을 돕도록 부탁하였습니다. 당시에 제자도 관동에 있으면서 의승을 모집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문하에 달려가서는 분부를 받고 승군을 대신 통솔하는 칭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화살을 등에 지고 종군하며 수륙 천리에 10년 동안 전장에서 지내다 보니 한 번도 북으로 달려가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계묘년(1603) 여름에 영남에 있을 때 조정에 보고하여 말미를 청하고는 개골산 유점사로 말을 치달려 들어가서 뵈었습니다. 그리고 표훈사에서 전송할 때 다음 해 봄이 오면 곁에서 모시겠다는 뜻을 고하고는 물러나 오대사(五臺寺)로 돌아와서 동안거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갑진년(1604) 2월 21일에 홀연히 부음을 듣고는 즉시 분상(奔喪)하다가, 경기도 양근(楊根) 오빈역(娛嬪驛)을 지날 무렵에 유지(有旨)를 받고 서울에 들어와 일본에 잡혀간 우리 백성들을 구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8월에 바다 건너 일본에 들어갔다가 을사년(1605) 5월 초에 돌아와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며, 6월 초에 복명(復命)하였습니다. 그리고 10월 그믐에야 비로소 대사의 탑에 와서 예배하였는데, 그 뒤로 해가 날고 달이 지나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법은을 받은 것이 하늘과 같고 은덕을 입은 것이 땅과 같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비통함이 골수에 사무쳐서 어떻게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고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문하의 형제들을 의지하여 향화 등 공양구 보시의 의물(儀物)을 정성껏 갖추고는, 시방의 구름 같은 성현들을 공양하면서 원만하게 감응해 주시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벌써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셨으므로 목소리와 모습을 생각하며 공연히 슬퍼하고, 지팡이와 신발을 어루만지며 길이 가슴 아파합니다. 그리하여 낮에는 영산(靈山)의 높은 법회[靈山高會, 영산재]를 열고, 밤에는 평등의 수승한 법연[平等勝筵, 수륙재]을 베풀게 되었습니다. 66)

구국의 일념으로 임진왜란에 참여하면서 스승의 상에도 참여하지 못한 회한이 담겨 있다. 사명은 20개월이 지나서야 스승의 부도 앞에서 영산재와 수륙재를 봉행하며 천도를 기원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선사의 삶에서 수륙재는 자연스런 천도의례였다.

Ⅲ. 맺음말

청허의 일생은 선사로서의 수행의 여정이었다. 출가의 동기가 “차라리 한평생을 바보 천치로 살지언정, 맹세코 문자를 일삼는 법사는 되지 않겠다.”는 각오에서 출발하였듯이 선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는 삶의 곳곳에서 선수행은 물론 교학, 염불, 정토, 다라니, 의례 등 다양한 수행의 궤적을 남겼다. 이 글은 선사 청허에게 나타난 이러한 여러 수행론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수행의 방편문이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교화의 일환이었다는 점이다. 즉, 청허는 교학수행에 대하여 “경을 들으면 귀를 거치는 인연도 있고 복이 된다. 그러나 경을 볼 때는 반드시 자기 마음속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법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근기가 있으므로 여러 가지 방편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염불과 정토, 다라니와 의례 등의 여러 수행을 인연에 따라 적용하였다. 두류산 내은적암에서는 염불수행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행한 일도 있었다.

두 번째로 교화의 일환이라는 이해 역시 크게 보아 방편문에 포함되지만, 제자를 지도하고 가르치기 위해 선수행만을 고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오래도록 소식이 끊어졌는데, 예전에 앓던 병은 완쾌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척 걱정된다. 또 그동안 참선을 했느냐, 염불을 했느냐, 대승경전을 보았느냐, 비밀주(秘密呪)를 외웠느냐, 여색을 멀리 했느냐, 말조심을 했느냐? 너의 나이가 벌써 서른을 넘겼는데도, 아직도 마음을 돌리지 못한 채 군중을 따라다니며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있으니,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마음이냐? 백발이야 어찌할 수 없으니 나는 이제 그만이지만,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너는 알기는 하느냐?”67) 제자를 향한 노스승의 지극한 정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즉 제자를 올바르게 교화하기 위해서는 참선이나 염불, 교학과 송주(誦呪) 등 그 어떤 수행도 중요하지 않다는 심정으로 보인다.

청허는 이처럼 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깨달음이지만 이 깨달음은 중생 구제, 즉 교화의 길에서 완성된다는 가르침을 여실히 실천하였다. 그러기에 제자 사명은 “법랍이 칠십이 되도록 좌선하면서 몇 개의 방석이 해어졌겠으며, 나이가 구순(九旬)이 되도록 얼마나 많은 가르침을 펼쳤겠습니까.”68)라고 칭송하였다.

Notes

법상. 2004. “서산휴정의 선정관에 대한 일고.” 『정토학연구』 7; 한보광. 2013. “서산대사의 정토관.” 『정토학연구』 20; 고영섭. 2017. “청허 휴정의 선교 이해.” 『불교학보』 79.

김호귀. 2009. “청허휴정의 오가법맥 인식의 배경에 대한 고찰.” 『한국선학』 22; 김용태. 2016. “청허 휴정과 조선후기 선과 화엄.” 『불교학보』 74.

황인규. 2009. “서산대사의 승군활동과 조선후기 추념사업.” 『불교사상과 문화』 1; 김상영. 2012. “청허 휴정의 사문상과 표충사 제향의 의의.” 『한국선학』 33.

정병삼. 2007. “청허당대사집(해제).” 『한국불교문학고서 해제 1』.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129-136.

김승호. 2016. “청허당집 해제.” 『청허당집』. 한글본 한국불교전서 조선 27. 동국대출판부: 10.

이 글에서 인용한 『청허당집』의 번역문과 용어 해설 등은 모두 이를 따랐다.

「청허당집 서문」, 『청허당집』, 앞의 책. 55.

『청허당집』, 앞의 책, 798.

노수신(盧守愼, 1515-1590)에게 쓴 편지라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청허가 48∼51세경에 당시 완산(전주) 부윤이던 노진盧禛(1518-1578)에게 쓴 편지라는 견해도 있다(안득용. 2013.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자전적 서사의 창작 경향과 그 의미.” 『한국한문학연구』 51: 226-227).

“世尊三處傳心者爲禪旨 一代所說者爲敎門 故曰禪是佛心 敎是佛語”(『선가귀감』, 『한불전』 7: 635b-636a.).

한보광. 「서산대사의 정토관」, 앞의 글. 159.

「선문귀감 서문」, 『청허당집』, 앞의 책. 729-730.

『사명당대사집』. 한글본 한국불교전서 조선 19. 동국대출판부: 470-471.

조영록. 2009. 『사명당평전』. 한길사: 99-108.

『청허당집·삼가구감』 한글대장경 151; 1969. 『한국고승』 1. 동국역경원: 51.

한상길. 2017. “사명당 유정의 사문상.” 『정토학연구』 28: 357-360.

「또 별지로 보이다」, 『청허당집』, 앞의 책, 667.

“나는 59년 동안의 잘못을 깨닫는 나이(58세)를 2년이나 넘겼으나, 쇠하고 병든 것이 해마다 심해지고 달마다 심해지고 날마다 심해지고 때마다 심해지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오대산 일학(一學) 장로에게 부친 글」, 『청허당집』, 앞의 책, 852).

『청허당집』, 앞의 책, 851.

“말할 수 없는 곳 모두 강하여 육조의 등불을 환히 밝혔네. 흰 구름 일어나는 돌길에 등나무 지팡이 높이 떨치누나.”(「강(講)을 마치는 날에 행 대사에게 보이다」, 『청허당집』, 앞의 책. 329).

「교사(敎師)에게 답한 글」, 『청허당집』, 앞의 책, 828.

“봉래산 풍악산 몇 천 리 인고. 예전에 불경 외우느라 이가 시렸지. 선석(選席)을 거두고 다시 석장 떨치며, 흰 구름 머문 하늘가 청산을 세어 보네.”(「매(梅) 대선(大選)이 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청허당집』, 앞의 책, 608).

『청허당집』, 앞의 책, 152.

『청허당집』, 앞의 책, 303.

『청허당집』, 앞의 책, 337.

『청허당집』, 앞의 책, 150-151.

한보광은 이와 관련하여 “서산대사의 중심사상은 어디까지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선사로서의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선교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선이 우선이고, 교는 차선으로 보았다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는 사교입선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선은 불심이고, 교는 불어’라고 하였지만, 상근자는 선수행으로 돈오가 가능하지만 하근자는 점오로서 교학적인 단계를 밟아야 한다고 하였다.”고 하였다(한보광, 앞의 글, 128).

“聽經 有經耳之緣 隨喜之福 幻軀有盡 實行不亡”, “看經 若不向自己上做工夫 雖看盡萬藏 猶無益也”(『선가귀감』).

“只聞世尊以正法眼藏 付囑摩訶迦葉 不聞以金剛般若 付囑摩訶迦葉也 大抵百草頭上 有活底祖師意 至於鸎燕 常談實相法 況我金剛一句乎 不著文字, 則可讀一卷經也”(『선교석』).

『청허당집』, 앞의 책, 750-751.

『청허당집』, 앞의 책, 750.

『청허당집』, 앞의 책, 726-727.

한편 청허는 『법화경』을 간행하면서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신간 연경(蓮經)의 발문」, 『청허당집』, 앞의 책, 714-715).

「천감 선자가 나에게 매우 은근하고 간절하게(天鑑禪子 求我於一言)」, 『청허당집』, 앞의 책, 152.

“念佛者 在口曰誦 在心曰念 徒誦失念 於道無益”(『선가귀감』).

『청허당집』, 앞의 책, 731-732.

『청허당집』, 앞의 책, 79.

“신수야 너도 나태하지 말고 염불을 열심히 하기 바란다(秀也亦懶者 念佛宜付囑)”(「응 선자에게 부치면서 겸하여 신수 사미에게도 보이다(寄應禪子兼示神秀沙彌)」, 『청허당집』, 앞의 책, 76).

『청허당집』, 앞의 책, 481.

『청허당집』, 앞의 책, 909.

『청허당집』, 앞의 책, 82.

“이미 염불 속에 선이 내재하고 선의 목적에 염불의 추구가 내재한다. 그래서 事와 理가 즉 염불과 선이 서로 도와서 편견을 지양할 수 있다. 事로 말미암아서 생각 생각이 상속해서 곧바로 일심불란에 이르고, 이로 말미암아서 마음의 청정을 밝힌다. 一念이 나지 않음으로부터 반야가 빛을 발한다. 정토와 선정수행의 事는 여기에 동일한 일치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정광균(법상). 2008. “염불에 내재한 선적요인에 대한 일고.” 『정토학연구』 11: 453).

“以禪定僧爲之骨 以看經僧爲之肉 以粥飯僧爲之皮 以行智具足僧爲之眼目 爲之手足 則一庵之居僧 儼然做一箇法王之身也”(「智異山黃嶺庵記」, 『청허당집』, 앞의 책, 759-762).

『청허당집』, 앞의 책, 885-886.

『청허당집』, 앞의 책, 850.

청허가 선수행의 지침서로서 『선가귀감』을 간행한 때는 1579년, 59세 때이다. 옥계자에게 심정을 고백한 때보다 한 해 앞선다.

“然法有多義 人有多機 不妨施設”(『선가귀감』).

『운수단가사』에는 찬자, 또는 편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제자 편양 언기(1581-1644)가 쓴 「金剛山 退隱國一都大禪師 禪敎都揔攝 賜紫扶宗樹敎 兼登階普濟大師 淸虛堂 行狀」에서 청허의 글이라고 하였다.

김성일(희찬). 2008. “청허 휴정의 『운수단』 가사 연구.” 동국대 석사학위논문: 19.

김성일(희찬). 앞의 글, 65-71.

「이용면이 그린 석왕사의 천불탱에 제하다」, 『청허당집』, 앞의 책, 628.

“唐元和中 至洛京龍門香山 與伏牛和尚為莫逆之友 後於慧林寺遇天大寒 師取木佛焚之 人或譏之 師曰 吾燒取舍利 人曰 木頭何有 師曰 若爾者何責我乎” (『경덕전등록』 권14, 「鄧州丹霞天然禪師」, 대정장 51, 310c).

無遮大會; 수륙재의 대표적인 의식집이 『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수륙재를 ‘無遮會’, ‘無遮法筵’이라고 한다.

五障; 欺·怠·瞋·恨·怨의 다섯 가지 장애.

二嚴; 두 가지의 莊嚴, 智慧莊嚴과 福德莊嚴이다.

七趣; 지옥·아귀·축생·인·천·아수라의 육취에 神仙趣를 더한 것. 『능엄경』 권9에서 유래한다.

『청허당집』, 앞의 책, 745-746.

衰絰; 喪中에 입는 삼베옷,

林鍾錦棚之晨; 林鍾은 음력 6월의 별칭, 6월의 무더운 날에 명종이 승하했다는 말. 錦棚도 6월의 별칭인데 무더위가 심할 때 林亭 안에 비단으로 차일을 치고 기생을 불러 즐기며 피서하였다는 結錦棚의 고사가 『開元遺事』에 전한다.

鼎湖之龍乘寒霧; 황제가 荊山 아래 鼎湖에서 솥을 만들어 鍊丹을 하다가 그 일을 끝내고서 용을 타고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한다(『史記』 권28 「封禪書」).

無射佩茱之月 武陵之松動悲風; 無射은 음력 9월의 별칭. 佩茱는 중국에서 9월 9일에 악귀를 쫓기 위해 茱萸 주머니를 차고 산에 올라가서 국화 술을 마시던 풍속에서 유래한다. 茂陵은 漢武帝의 능호이다.

『청허당집』, 앞의 책, 747-749.

청허는 천도재의 소문뿐만 아니라 「채씨가 남편을 천도하는 게송」도 대신 썼다. 『청허당집』, 앞의 책, 724.

한상길. 2009.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한국선학』 23: 671-705.

① 「薦母點眼水陸齋疏」, 『懶庵雜著』, 『한불전』 7: 588. ② 「祝聖齋疏」, 앞의 책, 590. ③ 「淸平寺保上春秋水陸齋䟽」, 앞의 책, 591-593.

『사명당대사집』, 앞의 책, 324-327.

「동호 선자(東湖禪子)에게 부친 글」, 『청허당집』, 앞의 책, 834-835.

「등계대사의 소상에 올린 소문」, 『사명당대사집』, 앞의 책, 32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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