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연구논문

淸虛 休靜의 佛敎史的 價値:

오경후*
Kyeonghwo Oh*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조교수
*Assistant Professor, Dongguk University Buddhist Academy

© Copyright 2020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Nov 28, 2020; Revised: Dec 22, 2020; Accepted: Dec 24, 2020

Published Online: Dec 31, 2020

국문 초록

청허 휴정의 위상과 가치는 조선불교사에서 머물지 않고 한국불교사에서 평가해야 한다. 조선의 불교는 건국 직후부터 탄압을 받고, 승려의 가치나 기능은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임진왜란은 이와 같은 불교와 승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허 휴정은 승려가 국난극복에 앞장서게 했을 뿐만 아니라, 폐허가 된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직된 승군은 이후 국방과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청허는 불교의 근간인 선교학의 정체성을 확립하였고, 그 갈등을 통합으로 조정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염불 역시 승려들의 수행과 교육과정으로 확정하여 수행과 교화의 범위를 넓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불교의 기초는 편양 언기와 같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확산되어갔다. 대흥사는 청허 휴정의 불교중흥을 위한 노력과 정신이 계승되고 있는 곳이다.

Abstract

The status and value of Ch’ǒnghǒ Hyuchǒng (淸虛休靜) should not remain in Chosun Buddhism, but should be evaluated in Korean Buddhism. Buddhism in Joseon was oppressed right after the founding of the country, and the values and functions of monks were recognized as useless. The Imjin War served as an opportunity to rethink the negative perception of Buddhism and monks. Ch’ǒnghǒ Hyuchǒng (淸虛休靜) not only helped monks take the lead in overcoming the national crisis, but also played a pivotal role in bringing up ruined Buddhism. During the Imjin War, the organized buddhist army played an important role in national defense and socio-economic aspects. Ch’ǒnghǒ established the identity of Zen and Non-zen Buddhism, which is the basis of Buddhism, and adjusted the conflict to unity. Moreover, Buddhānussati was also confirmed as the monks' training and curriculum to expand the scope of practice and edification. This foundation of Chosun Buddhism was spread by his disciples like Pyeonyang Unkee Daeheung Temple is a place where the spirit and effort for the revival of Buddhism in the retreat of Ch’ǒnghǒ Hyuchǒng (淸虛休靜) is inherited.

Keywords: 청허 휴정; 임진왜란; 편양 언기; 승군; 선교학 조선후기
Keywords: Ch’ǒnghǒ Hyuchǒng (淸虛休靜); Imjin War; Pyeonyang; Unkee; Study of Zen and Non-zen Buddhism; Late Joseon (朝鮮) Period

Ⅰ. 머리말

선조(宣祖) 때의 문신 최립(崔岦, 1539-1612)은 청허 휴정을 산중의 ‘절승(絶僧)중에 최고’로 꼽았고,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은 ‘동방 석씨(釋氏)의 조종(祖宗)’으로 높이 칭송하였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소극적이었던 동시대 유학자들조차도 청허 휴정을 조선불교의 대표적 인물로 칭송하였다. 오늘날 대흥사는 표충사(表忠祠)에서 서산대제를 봉행하여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탄압과 소외가 본격화되어 간 조선불교계의 암울한 상황은 청허에게 문제의식과 극복의 화두를 던져주었다. 그의 호국(護國)과 호법(護法)활동이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불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그가 승군을 모집하여 참전한 호국불교 선양은 당시 사회로부터 불교계가 긍정적 인식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특성으로 확고하게 정착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조선시대 불교사가 본격화되지 않았고,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시절에는 청허와 사명의 호국불교는 조선시대 불교를 상징하는 전부였고, 그들의 忠義 역시 조선불교의 충의가 아닌 유교의 충의였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예외는 아니어서 불교에 기초한 충의는 도외시되고 있다.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가치를 찾고자 했을 때 이러한 한계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1)

한편, 청허는 조선불교의 法統을 비롯한 선교학(禪敎學)과 수행체계 등 조선불교 중흥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불교사의 입장에서는 호국불교보다는 그의 호법활동이 더욱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당대의 불교안정만을 계획한 것이기 보다는 이후 한국불교의 천년대계를 내다 본 결과가 되었다.2) 현대한국불교가 전개되고 있는 원동력은 청허와 제자들의 숨결과 노고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청허 휴정에 대한 연구는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중흥시킨 대표적인 인물이어서 여전히 많은 관심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3) 2011년부터는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호국불교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고, 호법활동 역시 조선중후기 불교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청허 휴정의 호국과 호법활동은 조선불교사와 한국불교사에서 기념비적인 의미가 있다. 더욱이 매년 호국불교가 불교계 내외의 행사나 세미나의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선양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청허의 활동이 지닌 역사적 가치는 동시대뿐만 아니라, 이후 불교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체계적으로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청허 휴정의 호국과 호법활동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본 연구가 조선시대 불교사와 한국현대불교사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Ⅱ. 護國·護法活動의 背景

청허 휴정(1520-1604)은 조선의 중종·명종·선조 년간을 살다 간 인물이다. 이 시기는 조선 조정의 불교 억압정책이 노골화되기 시작하였고, 주자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불교탄압이 강화되어 불교계는 사회경제적으로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학자적 관료인 사림(士林)이 중종 후반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으로 점차 성장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원 건립과 성리학 이해 심화를 통해 그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더욱이 언론·경연(經筵)활동을 통해 국왕에게 언로(言路) 개방, 현인(賢人) 등용, 사기(士氣)진작 등을 요구하면서 신료 중심의 정치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4) 이것은 사림의 성리학 이념 지향이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의 뚜렷한 기반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성리학 이념에 의한 도학정치(道學政治)라는 새로운 정치질서 수립을 명분으로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군주와 백성이 천명에 따라 도를 실현하는 정치이자 이상사회를 지치(至治)로 규정한 것이다. 도학정치의 강조는 국왕이 먼저 수신·제가하여 그 덕을 배양하고 실천한다면 그 덕에 백성이 자연스럽게 교화될 것이라고 하는 덕치 또는 교화론이 강조되었다. 이와 같은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기진재(忌晨齋)·소격서(昭格署)와 같은 성리학 이념에 반하는 제도를 강력하게 혁파할 것을 주장하여 기신재가 1516년(중종 11), 소격서가 1518년(중종 13)에 혁파되었다. 성리학적 이상을 현실정치에 구현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사림세력의 교조주의의 결과였다.

한편, 척신정치(戚臣政治)를 청산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하는 사태를 맞았고, 남인·서인·대북·소북 등 많은 붕당의 출현을 가져왔다. 조선 최대의 외침인 임진왜란도 사림세력의 이러한 분열 속에서 맞았다. 붕당의 분열로 인한 정국의 혼란은 외침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16세기 이래의 소빙기 대자연재해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크게 침식하기 시작하여 생산력과 인구감소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장기적인 자연재해와 그 속에서 일어난 왜란·호란과 같은 여러 차례의 전란은 농경지의 대규모적인 황폐화를 가져왔다. 16세기 양안(量案)이나 호적의 작성은 계속되는 자연재해와 지배층의 부패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萬曆 임진년 4월 일본적이 대거 入寇하였다. 이보다 10년 전 粟谷 李珥선생은…10만의 병과 都城戍軍 2만 명을 양성할 것을 청원하였는데…갑신(1584) 정월 율곡이 돌아갔다. 뒤에 당국자들은 오직 偏黨을 逢迎하는 데 힘쓰고 또 역적의 술수에 빠져들어 있었으며 鹿屯島의 屯田과 海西地方의 蘆田으로 백성을 이사시키고 玉非의 자손을 추쇄하는 일로 능사를 삼으니 팔도의 인심이 크게 이반되었고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서남 연해의 鮑人들은 수령이 침탈함으로써 일본에 도망해 들어가 강진의 沙火同같은 자가 곳곳에 있어도 조정이 걱정으로 여기지 않았다. 5년 뒤인 정해년(1587) 봄 3월에 왜적선 16척이 영남 외양으로부터 곧바로 興陽 損竹島에 와 닿으니…조야가 크게 놀랐다…이 해 9월 平秀吉이 사신을 보내 화친하기를 바랐다.5)

인용문은 임진왜란 전의 조선의 국내정세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본 침입의 전조가 보이자 율곡은 그 대비를 주장했지만 국가재정의 허약으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지배층은 편당을 일삼았고, 정치기강이 해이해졌으며, 피지배층에 대한 수탈과 착취는 심화되고 있었다. 급기야 일본의 실정을 파악하고 돌아온 통신사의 보고가 상반되면서 전란이 발발하였다. 왜군이 대거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접한 조정은 장수를 전장으로 파견했지만, 인솔한 병력은 적어 적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고을 수령도 소속군사를 이끌고 京將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군량이 떨어지고 적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흩어졌다. 결국 붕당정치의 폐해가 총체적인 국가안위의 위태로움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의 정치와 사회가 변화하는 가운데 불교계는 더욱 위축되어 갔다. 조선 초기 불교계는 태종과 세종 대 사원·승려·토지·노비가 대폭 축소되는 가운데 11종 → 7종 → 선교양종으로 종파가 파격적으로 축소되면서 불교의 경제적, 인적 기반은 상당부분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불교계내의 선교학 수행은 급격하게 퇴보해갔고,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는 산중승단 형성으로 귀결되었다. 급기야 연산군대에는 양종의 본사인 흥천사(興天寺)가 공해(公廨)로 전락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6), 승과 또한 실시되지 못했다. 더욱이 중종 대는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사찰 신축과 중수를 금지하고7)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도첩승(度牒僧)도 각도의 군액(軍額)에 편입하게 하였고, 또 중종은 즉위 2년에 승ㅘ를 실시하지 않아 도승(度僧)을 허가하지 말도록 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중종은 신료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경국대전』에서 「도승」 조를 아예 삭제해 버렸다.8) 불교의 흔적이 나라와 왕실에서 혁거되면 이단이 사라지고 성학(聖學)이 밝아질 것이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강력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승려수가 증가하자 승려에게 호패를 발급하게 되었다.9)

한편, 명종 대에는 봉선사와 봉은사와 같은 능침사찰에 유생이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유생의 경우는 일정기간 동안 과거응시를 정지시키고10) 중종 대와는 달리 사찰에 사사전(寺社田)을 환급하는 등11) 불교우호정책이 시행되었다. 급기야는 선교양종이 복립(復立)되기까지 하였다.

良民의 수가 날로 줄어들어 군졸의 고통스러움이 지금보다 더한 때가 없다.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백성들이 4∼5명의 아들이 있을 경우에는 軍役의 괴로움을 꺼려서 모두 도망하여 승려가 되는데 이 때문에 僧徒는 날로 많아지고 軍額은 날로 줄어드니 매우 한심스럽다. 대체로 승도들 중에 통솔하는 이가 없으면 雜僧을 금단하기가 어렵다. 조종조의 『大典』에 선종과 교종을 설립해 놓은 것은 불교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승려가 되는 길을 막고자 함이었는데, 근래에 혁파했기 때문에 폐단을 막기가 어렵게 되었다. 奉恩寺와 奉先寺를 선종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아서 『대전』에 따라 大禪取才條 및 승려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신명하여 거행하도록 하라."12)

1549년(명종 5) 문정왕후는 군역(軍役)이 과중하여 백성이 역을 피해 승도가 되고 늘어나는 잡승(雜僧)을 금단하기 어려우니 통솔하는 이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봉은사와 봉선사를 선종과 교종의 본산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문정왕후는 “선대에서 선교양종은 승려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인데 혁파했기 때문에 승려인구가 증가하는 폐단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신료들은 승려의 증가를 억제하는 대책으로 부적절하고 승려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고 승려가 더 증가하는 길을 열어 줄 것이라고 반대하였지만13) 양종승과(兩宗僧科)의 시경승(試經僧) 2천 5백 80명에게 도첩을 발급하였다.14)

이때에 聖朝에서 兩宗을 복구하였으므로 外人의 청에 못 이겨 억지로 좇아서 大選의 이름을 얻은 것이 한 여름이요, 住持의 이름을 얻은 것이 두 여름이요, 傳法의 이름을 얻은 것이 3개월이요, 敎判의 이름을 얻은 것이 3개월이요, 禪判의 이름을 얻은 것이 또 3년입니다.15)

청허 휴정 역시 30세이던 1550년 선과(禪科)에 합격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른 것은16)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적어도 조선불교계 내부에서 청허 휴정이 선교학을 중심으로 한 수행과 학식으로 그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던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가 승하하고, 보우의 유배 이후 선교양종은 혁파되었고, 내원당의 사사전은 속공(屬公)되었다. 이것은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사림세력의 불교억압정책으로 환원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청허 휴정과 그의 제자들이 활약하기 전까지의 선조 대에는 다시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승려·사찰을 방임한 정책으로 복귀하였다. 유생이 벽불소(闢佛疏)를 올렸고, 왕은 경연에서 “유교를 중하게 하고, 불교를 경(輕)하게 할뿐 사찰을 철훼하는 강경한 정책을 취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사실 왕은 불교계를 방임한 정책을 펼친 것이다.17)

요컨대 조선의 불교계는 태종과 세종의 억불정책 단행에 이어 성종·연산군·중종 대를 거치면서 교단·사원경제·수행·신앙 등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산중불교의 면모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청허가 살았던 동시대의 조선은 우선 불교계가 왕조교체 후 지속적으로 탄압과 소외의 길을 걷고 있었고, 자생력을 유지한 채 존립했던 시기였다. 밖으로는 주자성리학의 도학화가 진전되고 있었고, 사림파가 중앙정계에 등장하면서 붕당정치가 시작되어 붕당 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것은 전란에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대응자세를 갖추지 못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계 내외환경은 청허 휴정이 호국과 호법활동을 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Ⅲ. 護國活動과 歷史的 價値

청허 휴정의 비문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그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宣廟가 서쪽으로 피난을 하자 대사가 산에서 내려와 行在에 가서 알현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큰 난리가 발생했는데 山人이라고 해서 어찌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 대사가 눈물을 뿌리며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이 갸륵하게 여기면서 대사에게 八道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이에 대사가 여러 上足들에게 개별적으로 명하여 僧兵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惟政은 關東에서 일어나고 處英은 湖南에서 일어나 權公 慄과 병력을 합친 뒤 幸州에서 왜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대사 자신은 門徒 1천 5백인을 이끌고 중국 군사를 따라 진격해서 平壤을 수복하였다. 이때 明의 經略 宋應昌과 提督 李如松 및 三協 摠兵 이하 將佐들이 대사의 이름을 듣고서 다투어 帖을 보내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詩를 증정하여 찬미하기도 하였는데, 그 말과 예우하는 뜻이 지극히 경건하였다. 경성을 수복하고 나서 상이 장차 大駕를 돌리려 할 적에 대사가 승병 수백 인을 이끌고 扈駕하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상에게 청하여 아뢰기를, “신은 나이가 많아 곧 죽을 몸이니 제자 유정 등에게 兵事를 맡겼으면 합니다.”하고, 사직하면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고, 인하여 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18)

장유(張維, 1587-1638)가 지은 청허의 비문이다. 청허의 참전을 기록한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비문19)뿐만 아니라, 일련의 글들이 대체로 동일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20) 전란이 발발하자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로 피한 선조는 가까이 있는 청허에게 통지하여 군사를 모으게 하자는 尹斗壽의 의견을21) 받아들여 청허에게 팔도선교도총섭의 직책을 수여하였다고 한다.

오랑캐 평정할 계책 없음을 잘 알지만 極知無策可平戎
앉아서 경도를 적의 수중에 빼앗겼네 坐使京都陷賊鋒
천리의 산하에는 수치심이 그치지 않고 千里山河羞不歇
만민의 어육 신세 참혹하기 그지없네 萬民魚肉慘何窮
군대를 청하면서 머리가 먼저 희어짐을 면치 못하고 乞師未免頭先白
격문을 받들고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네 奉檄還慙面發紅
사미를 보내는 것은 응당 뜻이 있나니 爲送沙彌應有意
훗날에 나를 전장에서 찾아 주오 他時覓我戰場中
맑고 수척한 백 살이나 되는 몸 靑羸已近百年身
古寺風煙에 또한 봄일세 古寺風烟又一春
온 세상이 다 전쟁터가 되었는데 寰海自成戎馬窟
오직 대사만이 아직도 한가한 사람이구려 惟師猶一閑人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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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수가 의주로 어가(御駕)를 호종하며 쌍익(雙翼)을 보내 청허의 참전을 독려하는 시의 내용이다. 왜적의 침입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 그 수치심과 백성의 희생은 참혹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읊고 있다. 특히 “오직 대사만이 아직도 한가한 사람이구려”라는 구절은 청허의 마음을 부끄럽게 혹은 격동시켰다. 청허는 선조를 알현하고 제자 유정과 처영, 의엄(義嚴) 등에게 승병을 규합하도록 하고, 자신도 문도 1,500명을 이끌고 평양을 수복했다고 한다. 실록은 “승통(僧統)을 설치하여 승군(僧軍)을 모집하였으며, 휴정이 여러 절에서 불러 모아 수천여 명을 얻었는데 제자 의엄을 총섭(總攝)으로 삼아 그들을 거느리게 하고, 원수(元帥)에게 예속시켜 성원(聲援)하게 하였다. 또 격문(檄文)을 보내어 제자인 관동의 유정과 호남의 처영을 장수로 삼아 각기 본도에서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수천 명을 얻었다.”고23)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청허가 전란 당시 승병을 모집하고 참전한 것은 사회적 인식을 전환시키는 계기뿐만 아니라, 이후 전개되는 불교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군병을 뽑을 때 色吏가 농간을 부려 대부분 사실로써 하지 않는 것이 이미 고질적인 폐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僧軍은 戰陣에 도움이 없지 않아 공을 세운 자가 연달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首級을 베어 바친 자에게 禪科를 주겠다는 내용으로 休靜에게 通諭하여 그로 하여금 승군을 모으게 하소서. 휴정이 보낸 승려 雙彦이 말하기를 ‘만약 禪宗·敎宗의 判事 두 사람을 시급히 差出하여 승군을 거느리게 한다면 형세가 퍽 수월할 것이다. 尙珠와 雙印이 현재 香山에 있으니 그들을 任使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승려에게 該司에서 差帖을 만들어 주어 급히 승군을 거느리고 내려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따랐다.24)

인용문은 전란 발발 이후 승군조직의 목적으로 전공이 있는 승려와 승군을 통솔할 선교양종 판사의 필요성을 언급한 내용이다. 예컨대 선종과 교종에서 각도에 판사 한 사람씩을 임명하여 16명의 판사가 승군을 통솔하는 것이었다. 이 양종판사제는 청허의 요청으로 선조가 윤허한 것이다. 그러나 양종의 부활을 우려한 신료들의 반대로 8월 7일 그 명칭이 ‘총섭(摠攝)’으로 바뀌었는데, ‘판사’라는 이름이 마치 선종과 교종을 설립하는 것 같아 후환이 없지 않을 듯 하여 명칭만으로 승군조직의 성공을 권면하고자 한다면 총섭이란 호칭도 무방할 것이라고25) 한 것이다.

이른바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지속된 승과의 시행과 승직제는 부침을 거듭하였다. 고려시대에 설치되어 영향력을 행사해 온 승록사(僧祿司)가 1424년(세종 6) 유신들의 상소문과 논쟁 끝에 혁파되고, 선교양종도회소(禪敎兩宗都會所) 체제로 개편된다. 그 운영의 책임자는 판사가 맡았는데, 판사는 3품에서 1품까지의 아문의 장관이므로 양종도회소는 3품 아문의 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승과와 주지 추천의 역할을 맡았으며 각종 불교의식을 관장하였지만, 연산군 때 철폐되었다가 명종 조 일시 부활 후 1566년(명종 21) 文定王后 사망 후 명종의 전교에 따라 공식적으로 완전히 혁파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官의 행정제도에 편입되어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로써 명종 21년 양종·승과·승직의 제도가 한꺼번에 폐지되면서 산중승단으로 돌아갔던 조선의 불교세력을 다시 국가의 행정체제 안으로 포함시키는 도총섭제도가 시작되었다.26)

대체로 都總攝이란 바로 先朝의 난리 초기에 묘당이 품지하여 僧將에게 내려준 칭호입니다. 그 뒤에 폐지하기도 하고 그대로 두기도 하면서 만일 승려에게 役事를 시킬 일이 있을 경우 總攝을 정하여 역사하는 諸僧을 관장하도록 해서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음은 누군들 모르겠습니까.27)

인용문은 선조 대부터 시행한 총섭이 지휘하는 승군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이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총섭제도는 선조 이후에는 남북한산성의 수축과 의승번전의 봉납(奉納), 부역의 징발 등 국가의 필요에 의하여 지속되고 확대되어 갔다. 또한 인조대 사고(史庫)설치와 함께 수호사찰의 주지를 총섭으로 임명하였으며, 왕실의 원당 등으로 사세를 키운 사찰의 주지에게도 총섭으로 임명하는 첩과 함께 인신이 발급되기도 하였다. 결국 총섭제는 임진왜란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조선후기 국방문제뿐만 아니라, 부역에 따른 부족한 노동력 확보와 사회경제 문제를 지속적으로 해결하는데 활용되었다. 조정에서는 총섭제의 운영을 통해 불교교단의 효율적 통제와 함께 당면한 현안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한편, 조선정부가 총섭제와 함께 승려를 유용한 노동력으로 확보하고자 한 근본적인 대책은 승려들에게 선과의 합격증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군사들은 말할 수 없이 피로하여졌으며, 또 그 수효가 만 명도 채 되지 못하니 매우 한심하다. 각 도에 승려의 수효가 상당히 많지만, 모두가 세속을 떠나서 구름처럼 떠도는 무리들이라서 국가에서 사역시킬 수 없게 되었으니, 그들을 사역시킬 수 없을 바에야 한 장의 임명장을 주어 적의 수급 하나라도 얻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렇게 한다면 승려들을 다투어 분발하게 싸우게 될 것이고 승려들이 매일 같이 몰려들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의병들에게 빈 관직을 줌으로써 나라의 법을 문란하게 하는 폐단도 없을 것이고, 또 재물을 소비하여 군사를 먹여야 할 걱정도 없어질 것이다. 이는 異端을 숭상해서 禪科를 다시 회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임시방편으로 적을 토벌하려는 술책일 뿐이다. 지난날에도 비변사와 상의하여 어떤 승려든지 적의 머리 한 급을 바치는 자에게는 즉시 선과의 합격증을 주기로 하였는데, 그 뒤에 臺諫들의 논란이 있어 임금의 체면상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이 부당한 듯하여 대간의 의견을 따랐던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조항은 진실로 적을 토벌하는 일에 유익한 방법이므로 그만둘 수 없다. 이 일을 두고 내가 이단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듣는 자들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내 생각에는 전후에 걸쳐 적의 수급을 참획한 승려에게는 각각 선과의 합격증을 주되 즉시 휴정에게 내려 보내 그로 하여금 나누어 주게 할 것이니, 이러한 뜻을 여러 도의 승려들에게 시급히 下諭하는 것이 어떻겠는가.28)

인용문은 선조가 승정원에 전교한 내용이다. 일본과의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병력의 부족은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승려에게 선과첩을 지급하는 일은 부족한 군사를 보충하고, 승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효과를 거두는 것이었다. 크고 작은 공으로 선과첩(禪科牒)을 받은 승려 역시 인용문에서 언급한 관직제수의 의미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조선의 臣民에서 제외된 채 살아가야 했던 소외감을 정신적으로나마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여하튼 조정의 선과첩 발급은 승병동원의 의도와 승려에 대한 표면적인 처우개선에서 효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국가의 일 가운데 어떤 일이 가장 급한가?”하기에, 신이 응답하기를, “武備일 뿐이다. …혹자가 또 묻기를, “그대가 오늘날의 급선무를 논하면서 무비가 가장 먼저라고 말한 것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무비를 갖춤에 있어서는 반드시 사졸을 근본으로 삼는다. 우리나라는 사졸이 아주 적고 또한 약하다. 어떻게 하면 적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기는 하지만 封疆이 수천 리나 된다. 그러니 어찌 사졸이 없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그러나 束伍들은 모두 수척하고 약하여 쓸 만한 자가 없다. 그 까닭은 잘 알 수가 있다. 팔도에는 완력이 있으면서도 士族에 이름을 의탁하고는 문예도 닦지 않고 무예도 닦지 않으면서 놀고먹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僧軍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 산이다. 郡에는 산이 없는 군이 없으며, 산에는 절이 없는 산이 없으며, 절에는 승려가 없는 절이 없다. 이들을 모두 억지로 還俗하게 한다면, 군사를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대에 걸쳐서 쌓여 온 습속을 하루아침에 변혁한다면 변란이 생겨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통하여 쓰는 것만 못하다. 임진왜란 때 僧將 가운데 休靜이나 處英, 郭震卿과 같은 자들은 자신들에게 속한 무리들을 거느리고 국난에 달려 나왔다. 현재의 승려들 가운데에도 역시 이런 무리들이 어찌 없겠는가. 만약 이런 무리들을 얻어 그 무리들을 가르쳐서 깨우치게 한다면 승군의 힘 역시 한쪽 방면에서 쓸 수 있을 것이다.”하였습니다.29)

병자호란이 발발하던 해, 鄭斗卿(1597-1673)이 권경(權憬, 1569-1655)을 대신해서 올린 상소문 가운데 일부분이다. 그는 1629년 무렵 북방의 호족(胡族)인 청나라가 강성해지자 「완급론(緩急論)」을 지어 무비(武備)의 급함을 강조하였다. 이 글에서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휴정을 비롯한 승장들이 승군을 지휘하여 전장으로 달려 나갔으므로 병자호란 당시도 승장들로 하여금 승군을 동원하여 방비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청허의 전례를 들어 승군동원의 장점을 지적하며 그 효율성과 지속성을 호소한 것이다.

요컨대 임진왜란 당시 청허의 전란참여와 승군 동원은 일시적인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도총섭과 총섭의 통솔하에 전란 참여뿐만 아니라, 국방, 토목공사와 같은 각종 역역(力役)에 중요한 자원으로 그 기능을 다하였다. 승군은 급기야 병자호란 이후부터는 남북한산성을 수호하는 정규군화 되었다. 이것이 청허 휴정이 조선의 호국불교에 끼친 첫 번째 가치라고 할만하다.

신수야 너도 나태하지 말고 秀也亦懶者
염불을 열심히 하기 바란다 念佛宜付囑
항상 멋대로 굴지도 말고 莫使長放緩
정욕에 빠지지도 말 것이며 無慙恣情慾
모쪼록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내어 須生慙愧心
한 생각이 일어날 때 곧바로 깨달을 지어다 念起勤卽覺
아침저녁으로 四恩을 생각하고 早暮念四恩
나라 위해 성실히 복을 빌 것이요 爲國勤資福
상하의 무리와 원만하게 어울리며 和同上下輩
모나지 않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去就勿乖角……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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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가 살았던 시절 불교계의 한 모습이다. “너의 스승이 여염에서 구걸하나니 애달프다 이 노승의 외로움이여.”라고 읊고 있어 당시 불교계의 참혹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 청허는 병들어 누워있는 제자인 응선자(應禪子)를 오랜만에 만나 애달픈 정을 나누고 끊임없이 공부할 것을 독려하였다. 참선으로 번뇌를 떨쳐버리고, 염불을 열심히 하길 바라고 있으며, “아침저녁으로 사은(四恩)을 생각하고, 나라 위해 성실히 복을 빌 것”을 당부하고 있다. 군주와 부모에 대한 충의를 비롯한 사은에 대한 보답이 불가(佛家)의 일상사임을 이해할 수 있다.

西山大師 休靜이 축원문을 지어서 승려들로 하여금 朝夕으로 외게 하였다. 萬德寺 승려 謹恩은 병약자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서산대사가 지은 축원문 가운데 이를테면 三殿을 위한 축원과 諸宮과 百官을 위한 축원과 같은 것은 다 괜찮거니와 ‘도내 방백은 벼슬이 더욱 높아지라.’고 한 것은 山僧이 알 바가 아니요, ‘城主閤下는 善政을 행하라.’고 한 것도 축원으로 되는 바가 아닙니다. 소승은 이를 고쳐 ‘도내 방백은 절에 들어오지 말고, 성주 합하는 짚신을 감해 주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이 말은 비록 우스갯소리지만 민정을 엿볼 만한 것이다.……31)

인용문은 다산이 『목민심서』에서 조선후기 사찰에서 부담해야 했던 짚신(僧鞋)세를 지나치게 징수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을 지적하고 있는 글이다. 수령들의 사찰에 대한 수찰과 착취를 풍자해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다. 다산은 이 글에서 “강진 만덕사의 승려 근은이 한 말을 들어보니 서산대사가 삼전(三殿)과 제궁(諸宮), 백관(百官)을 위해 축원문을 지어서 아침저녁으로 외우게 했다.”고 한다. 삼전은 원래 천자와 태후, 황후를 가리키지만, 흔히 주상전, 왕비전, 세자전을 말하기도 한다. 불가의 사은에 대한 관념이 유구하지만, 전란 이후 조선에서는 청허 휴정이 삼전과 제궁·백관의 안녕을 바라는 위한 축원문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부모와 국왕, 시주와 삼보의 은혜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본격화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계의 국가 관념이 이전과는 달라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이 청허 휴정이 조선의 호국불교에 끼친 두 번째 가치라고 할만하다.

한 고을을 다스리려면 반드시 한 고을을 다스리는 도구가 있어야 하고, 한 나라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한 나라를 다스리는 도구가 있어야 하며, 천하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천하를 다스리는 도구가 있어야 한다.…불교가 중국에서부터 해동에 이른지가 1,700여 년이 된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조정에서는 유교를 숭상하고 道를 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도구로 삼아, 300의 郡縣에 모두 공자의 廟가 있어 멀거나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봄에는 거문고를 타고 여름에는 시를 읊어서, 異端의 학인 도교가 마침내 전해지지 않았고, 오직 승려들만 한갓 오래된 절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깊은 산골짜기의 우거진 숲 속이나 큰 늪 가운데는 호랑이와 표범의 소굴이기도 하며 못된 무리들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여 관아의 문서가 이르지도 못하며 소송이 있지도 아니하고, 군량미를 의뢰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比丘大衆으로 진정시켜 길이길이 큰 재난에서 보호받게 하니. 대체로 승려들이 참여하여 거기에 힘을 썼다. 이것이 『범우고(梵宇攷)』를 짓게 된 까닭이기도 하며…32)

정조(正祖)가 그의 명으로 편찬한 『범우고(梵宇攷)』에 제목을 달고 쓴 글이다. 『범우고』는 정조의 명령으로 전국 8도 330개 지역의 사찰을 조사하여 조선전기와 비교하여 그 증가와 감소를 정리한 책이다. 정조는 『범우고』의 맨 앞에 책을 쓴 연유에 대해 밝혔다. 즉, 불교가 중국에서 전래되었지만,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여 도교는 자취를 감췄고, 불교는 스님들이 절만을 지키고 있을 정도로 이단이 쇠락했음을 말했다. 그러나 궁벽진 산골은 나라의 법령과 제도가 다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하여 소송할 수 있는 길도 없으며, 위태로운 상황에서 군대와 군량미조차도 의뢰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하였다. 다행히 승려가 존립하여 최소한의 법령과 제도가 전해지고, 스님들이 군량미를 마련하여 도적을 막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전란에 참여하여 나라를 재난에서 구해낸 것이라고 하였다. 때문에 정조는 불교에 대해 우호적이지는 않았지만,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참여한 무학대사나 청허·사명과 같은 호국승려라든가 왕실불교와 관련된 사찰에 대해서는 각별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요컨대 정조는 불교가 비록 이단이지만, 스님들이 국가운영의 기본이기도 한 예악과 교화, 풍속의 유지에 힘쓰는 바가 지대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조선불교의 호국정신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Ⅳ. 護法活動과 歷史的 價値

청허의 비문은 그를 “근대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종풍(宗風)을 진작시켰으며, 제자가 1천여 인이나 되는데 이름이 알려진 자들만도 70여 인에 달했으며, 후학을 영도하면서 일방(一方)의 종주(宗主)가 된 자들 역시 4, 5인을 밑돌지 않았으니, 정말 성대했다고 할 만하다.33) 출가 이후 그의 인생역정이 다사다난했지만, 자신의 수행과 불교중흥을 완성시키기 위한 노고에 대한 찬사이자 결실이다. 한마디로 청허는 폐허 위에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진력했다.

正德 戊辰(중종 3년(1508)) 가을에 금강산 妙吉祥庵으로 들어가 大慧語錄을 보다가 狗子無佛性話에 疑着하여 오래지 않아 漆桶을 깨뜨렸으며, 또 高峰語錄을 보다가 颺在他方이라는 말에 이르러 前解를 頓落시켰다. 그러므로 스승이 평생 발휘한 바는 高峰과 大慧의 宗風이었다. 大慧和尙은 六祖의 17대 嫡孫이며, 고봉화상은 임제의 18대 적손이다. 스승께서는 해외의 사람이면서도 5백 년 전의 종파를 은밀히 이었다. 마치 程子와 朱子가 孔子·孟子의 천년 뒤에 태어났지만 그 학통을 遠承한 것과 같으니, 儒學이나 釋敎가 道를 이어 전함에는 곧 한가지이다.34)

청허는 연희(衍熈)에게서 교를, 정심(正心)에게서 선을 닦았던 벽송 지엄이 대혜어록과 고봉어록을 보다가 돈오(頓悟)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대혜와 고봉의 종풍을 계승했다고 하였다. 요컨대 법(法)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결국 청허가 강조한 것은 대혜가 육조 혜능의 17대 적손이고, 고봉이 임제의 18대 적손으로 이것은 정자와 주자가 공맹의 학통을 계승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조선불교가 임제법통을 계승한 순간이었다. 조선불교의 장래를 위한 청허의 임제법통 인식은 확고한 것이었다.

대사가 사람들에게 言句를 보일 때에는 臨濟의 宗風을 잃지 않았으니, 이는 本原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동방의 太古 화상이 중국 霞霧山에 들어가서 石屋의 法嗣가 된 뒤에 이를 幻庵에게 전하였고, 환암은 龜谷에게 전하였고, 귀곡은 登階 正心에게 전하였고, 등계 정심은 碧松 智嚴에게 전하였고, 벽송 지엄은 芙蓉 靈觀에게 전하였고, 부용 영관은 西山 登階에게 전하였는데, 석옥은 바로 임제의 적손이었다. 이 8代 중에서 오직 西山이 미친 물결을 잠재우고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는 힘을 발휘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뼈대를 바꾸는 靈方이요, 눈의 백태를 긁어내는 金鎞라고 할 만하였다.35)

청허의 법통규정과 인식은 제자 편양 언기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언기는 임제 법통을 이은 해동 초조(初祖)는 태고 보우이며, 벽송 지엄을 거쳐 마침내 청허 휴정이 미친 물결을 잠재우고 무너진 기강을 바로 잡았다고 하였다. 예컨대 “선교가 어수선하게 뒤섞임에 옥석을 구분하여 가르고, 보검을 휘둘러서 칼날을 감히 범하지 못하게 하고, 입을 다물고 정관(靜觀)하며 불 꺼진 재처럼 되지 않게 한 것은 그 누구의 공인가. 살활(殺活)의 감추(鉗鎚)를 손에 쥐고서 많은 영재를 길러내고, 불조(佛祖)의 광명을 새로 밝혀 인천의 안목을 열어 준 것이 이처럼 성대한 때는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비록 태고법통설이 대두한 초기부터 적지 않은 혼란과 문제가 제기가 되었지만, 조선불교의 정체성이라고 할 만한 어떤 근간도 마련되지 못한 채 식은 재와 같이 무기력한 불교계에 청허가 생명력을 불어 넣었고, 그의 제자 언기와 중관 해안·월저 도안 등 청허의 제자들이 조선불교의 근간으로 정착시켰다.36) 결국 임제법통을 확립시킨 것이 청허가 진행했던 호법활동의 첫 번째 역사적 가치라고 할만하다.

옛날에 불교를 배우는 자들은 불타의 말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불타의 행동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배로 여긴 것은 오직 貝葉의 靈文일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를 배우는 자들이 전하며 암송하는 것은 士大夫의 句文이요, 구걸해서 지니는 것은 사대부의 詩句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붉고 푸른빛으로 그 종이를 색칠하고, 아름다운 비단으로 그 두루마리를 粧幀하는가 하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게 여기면서 최고의 보배로 삼고 있는 실정이다. 아, 어찌하여 옛날과 오늘날에 불교를 배우는 자들이 보배로 삼는 것이 같지 않게 되었단 말인가.37)

『선가귀감』의 서문 가운데 일부분이다. 책을 찬술하게 된 배경이 적나라하게 소개되어 있다. 즉 불도(佛徒)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처님의 말씀과 행동을 이정표 삼아 사바세계의 비바람을 견디며 살아왔다. 경전을 오직 몸 안의 보배로 삼고 복덕과 지혜를 키워나갔던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신라와 고려로 대표되는 조선 이전의 시대에는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수행과 신앙에서 그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고 국가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교체된 다음에는 그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특히 공자와 맹자의 유교에 기초한 주자성리학이 왕과 신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후에는 불교탄압과 소외는 정해진 이치였다. 불법을 신봉했던 수행자라 할지라도 근기가 약해서 신료와 관리가 억압하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해 사찰의 전답과 노비를 나라에 바치거나 그것도 부족하면 환속하는 일이 이상한 것도 아닌 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그 혹독한 시간을 살아남기 위해 유학자나 사대부들의 변변치 못한 글이나 시를 받으려고 줄을 서거나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文人의 흉내를 일삼는 일로 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청허의 눈에 비친 불도들의 이 허약한 모습은 부처님 뵙기에 몹시 부끄러운 일이었고, 서글픈 일이었다. 더욱이 왕조가 바뀐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부처님의 숭고한 말씀과 행동이 공자와 맹자의 유려한 말 속에 자취를 감춘 지는 오래되었다. 청허가 『선가귀감』을 지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청허는 부처의 수많은 법문에서 요긴한 수백 어(語)를 뽑아 하나의 종이에 적었으니 글은 간단하면서도 뜻은 주밀(周密)하니 스승을 삼아 궁구하면서 오묘한 뜻을 얻는다면 구절마다 살아있는 석가가 그 속에 있을 것이니 부디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오늘날 禪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스승의 법이다.”라고 하고, 오늘날 敎를 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스승의 법이다.”라고 하니, 한 법을 놓고 서로 옳고 그르다고 하며 한 마리의 말을 가리키며 서로 다투는 격이다. …오늘날 禪旨를 잘못 이어받은 사람들이 頓漸의 문을 正脈으로 삼기도 하며, 圓頓의 교를 宗乘으로 삼기도 하고, 外道의 글을 이끌고 와서 은밀한 뜻을 설하기도 하며, 業識을 희롱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기도 하고, 빛의 그림자를 잘못 인식하여 자기로 삼기도 하며, 심지어 제멋대로 눈멀고 귀 먼 棒과 喝을 행하고도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데, 이는 진실로 어떻게 된 마음인가?…이제 말세에 이르러 열등한 근기는 많으나 교외별전의 근기는 아니므로 다만 圓頓門의 이치의 길(□路), 뜻의 길(義路), 마음의 길(心路), 말길(語路)로 보고 듣고 믿고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길 뿐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뜻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의 길이 끊어지고, 말길이 끊어져 재미도 없고, 모색할 것도 없는 경지에서 漆桶을 깨뜨리는 徑截門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이제 선사가 팔방의 衲子의 무리를 제접할 때 요긴한 곳에 칼을 내리쳐 구멍을 뚫지 못하면, 바로 본분인 徑截門의 活句로써 저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얻게 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종사로서 사람을 위해 해야 할 됨됨이인 것이다.38)

청허가 제자 유정에게 보여준 『선교결(禪敎訣)』 앞부분이다. 당시 불교계가 선교학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청허는 당시 수행자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들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불이(不二)의 한 법을 놓고 옳고 그름을 논쟁한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굳이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고 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배워서 안다고 하고 생각하여 얻는다고 주장하여 가련한 일이라고 하였다. 청허는 구체적으로 교학자(敎學者)들이 “교(敎) 가운데 선(禪)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성문승(聲聞乘)도 아니고 연각승(緣覺乘)도 아니고, 보살승(菩薩乘)도 아니며, 불승(佛乘)도 아니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선가(禪家) 입문의 초구(初句)일뿐 선지(禪旨)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선주교종(禪主敎從)의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둘째, 당시의 수행자들이 선지(禪旨)를 잘못 이어받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였다. 교외별전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길이 다하여 끊어진 연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점의 문을 정맥(正脈)으로 삼기도 하며, 원돈(圓頓)의 교를 종승(宗乘)으로 삼기도 하고, 외도(外道)의 글을 이끌고 와서 은밀한 뜻을 설하기도 하며, 업식(業識)을 희롱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기도 하고, 빛의 그림자를 잘못 인식하여 실체로 삼기도 하며, 심지어 제멋대로 눈멀고 귀 먼 봉(棒)과 할(喝)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원돈문의 이치의 길(□路), 뜻의 길(義路), 마음의 길(心路), 말길(語路)로 보고 듣고 믿고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길 뿐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뜻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의 길이 끊어지고, 말길이 끊어져 재미도 없고, 모색할 것도 없는 경지에서 칠통(漆桶)을 깨뜨리는 경절문(徑截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이와 같은 당시 불교계의 무질서한 선교관과 그 수행을 바로잡고자 “팔방의 납자의 무리를 제접할 때 요긴한 곳에 칼을 내리쳐 구멍을 뚫지 못하면, 바로 본분인 경절문의 활구로써 저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얻게 하여야 하는 것”이 본인의 의무라고 하였다. 敎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깨침을 향한 궁극적인 나룻배 역시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가 부용 영관(芙蓉靈觀)에게 화엄을 전수받았고, 편양 언기 역시 청허로부터 화엄학을 전수받았지만39) 후학에게는 다음과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텅 비어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虛寂本無物
어찌하여 대장경을 수고스럽게 轉讀하나 何勞轉大藏
가을 강에 비친 서늘한 달빛은 秋江寒月色
원래 張王의 전유물이 아닌 것을 元不屬張王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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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사(祖師)의 관문을 뚫기 위해서 대장경을 수고스럽게 전독(轉讀)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또 다른 시에서는 종이를 뚫어 깨달음을 구함은(鑚紙求眞覺)/모래를 쪄서 밥 짓는 것과 같도다(蒸沙立妄功)/허공 꽃을 바위 위에 심고(空花栽石上)/끓는 물을 목구멍으로 삼키도다.(燄水吸喉中)라고41) 하였다. 요컨대 청허는 동시대 조선 불교의 정체성과 독자성이 확립되지 못해 선교학 역시 무질서하여 논쟁만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청허는 『선가귀감』·『선교석(禪敎釋)』·『선교결(禪敎訣)』 등의 저술을 통해 선교학이 지닌 개념과 구분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이정표 없이 떠다니는 조선불교의 실상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화두를 강조하는 선주교종(禪主敎從)의 근간을 확립한 것이 청허의 호법활동이 남긴 두 번째 역사적 가치라 할만하다.

오래도록 소식이 끊어졌는데, 예전에 앓던 병은 완쾌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척 걱정된다. 또 그동안 참선을 했느냐, 염불을 했느냐, 大乘經典을 보았느냐, 秘密呪를 외웠느냐, 女色을 멀리했느냐, 말조심을 했느냐? 너의 나이가 벌써 서른을 넘겼는데도, 아직도 마음을 돌리지 못한 채 군중을 따라다니며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있으니,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마음이냐? 백발이야 어찌할 수 없으니 나는 이제 그만이지만,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너도 알긴 하느냐?42)

서른이 넘은 제자가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경책하는 글이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 사이에 참선·염불·대승경전·비밀주를 닦았는지를 묻고 있다. 네 가지 수행요목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불교계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수행체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선 수행을 궁극의 수행법으로 확립했지만, 전란 전후의 시대상황과 정체성과 근간이 사라진 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던 불교계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분명 발전적인 모습이다. 수행자 모두가 경절문(徑截門)의 활구(活句)를 깨치기 쉽지않은 점을 고려한다면 이와 같이 근기에 따른 수행법은 당시 불교계의 수행풍토에서도 바람직스러운 일이었다.

승려 대여섯 사람이 有僧五六輩
내 암자 앞에 집을 지었네 築室吾庵前
새벽 쇠종 소리에 함께 일어나고 晨鍾卽同起
저녁 북소리에 함께 잠드네 暮鼓即同眠
시내의 달빛 함께 길어다 共汲一澗月
차를 달이며 푸른 연기 나눈다네 煮茶分靑烟
날마다 무슨 일 의논하느냐면 日日論何事
염불 그리고 참선이라네 念佛及叅禪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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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가 두류산 내은적암에 있을 때다. 승려 대여섯 사람이 암자 옆에 집을 짓고 수행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염불결사(念佛結社)였을 것이다. 선정쌍수(禪淨雙修)다. 그러나 청허는 타력신앙인 염불수행 보다는 유심정토(唯心淨土)·자성미타(自性彌陀)를 강조하였다. 청허가 백처사(白處士)에게 써주었던 염불문은 “입으로는 송(誦)한다고 하고, 마음으로는 염(念)한다고 하는데, 송만 하고 염을 하지 않으면 이치로 볼 때 아무 이익도 없으니, 이 점을 거듭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부처가 상근(上根)의 사람을 위해서는, 즉심즉불(即心即佛), 마음이 곧 유심정토, 자성미타라고 설하였으니, 이른바 서방이 여기에서 멀지 않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44)라고 하였다. 때문에 마음이 곧 정토이며, 자성이 곧 미타여서 서방이 멀고 가까운 것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서방이 드러나고 숨는 것은 말에 있지 뜻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요컨대 청허는 궁극적으로 화두에 기초한 경절문 터득이 최고의 수행법이었지만, 사람의 근기에 기초해서는 참선이 바로 염불이요(叅禪即念佛)/염불이 바로 참선(念佛即叅禪)이었다.45) 결국 선주교종의 근간 속에서 선·교·염불·주력등의 수행체계를 마련한 것이 청허가 진행했던 호법활동의 세 번째 역사적 가치라고 할만하다. 그는 선이 아니라고 해서 배척하지 않았다. 근기에 따른 수행법을 인정했고, 이것은 조선불교의 수행체계를 다양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통한 불교계의 결집과 통합의 의미도 있었다.

정조가 찬한 청허의 화상당명(畵像堂銘)은 그가 이룬 호국과 호법의 가치를 잘 드러내고 있다.

西山大師 休靜 같은 이의 사미됨은 아마 慈悲에서 안식하는 뜻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錫杖을 지니고 여러 곳에 두루 참례하여 法幢을 세움으로써 人天眼目이 되어 雲章과 寶墨의 하사품이 특별히 융성하였으니, 지금까지 貞觀이나 永樂의 서문과 兜率蘭若에서 영광을 다툴 지경이다. 중간에는 宗風을 발현하여 국난을 크게 구제하고 의병을 창설하여 군왕을 구제한 元勳이 되어 요사스럽고 腥羶한 기운이 손을 따라 맑아졌으니, 지금까지 방편으로 세상을 제도한 공적은 閻浮提ㆍ無量劫에 영원히 의지할 것이다. 끝에 가서는 인연을 따라 現身하고 업보를 따라 攝身하여 因果를 찾아 上乘의 교주가 되어 매화가 익고 연꽃이 피어나 순식간에 彼岸에 이르렀으니, 지금까지 바라보면 엄연하고 가까이 가면 온화한 초상이 남아 있어 서북과 남도의 영당에서 頂禮를 받고 있다. 이러한 다음에야 비로소 三千大千을 구제하고 속세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46)

예컨대 정조는 청허가 처음에는 출가 후 수행을 통해 불법(佛法)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사람과 하늘의 눈이 되었으며, 중간에는 국난을 구제하고 군왕과 세상을 구제한 공적이 영원하며, 끝에는 인연에 따라 현신하고 업보를 따라 섭신(攝身)하여 인과를 따라 상승의 교주가 되어 순식간에 피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정조가 불교는 “운천(雲天)과 수병(水甁)의 실상의 밖에서 마음을 유람하고 취죽(翠竹)과 황화(黃花)의 정이 없는 물체에 몸을 비교하니, 마침내 우리 유학에서 고목(枯木)과 사회(死灰)라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지만, 청허에 대해서는 매우 객관적으로 평가하였다. 자신을 독실히 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였다는 것이다.

淸虛子가 嘉靖 乙卯年(1555, 명종 10) 여름에 처음 敎宗의 判事에 임명되었고, 그해 가을에는 또 禪宗의 판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丁巳年(1557, 명종 12) 겨울에 印綬를 풀고 楓嶽山으로 들어갔으며, 戊午年(1558, 명종 13) 가을에는 지팡이를 날려 頭流山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어떤 儒士가 나를 기롱하며 말하였다. “처음에 판사를 맡았을 때에는 영화로움이 더할 나위 없었는데, 지금 판사를 그만두고 나니 빈궁함이 또 더할 나위 없게 되었다. 몸이 괴롭고 마음이 울적하지는 않은가?” 내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내가 판사를 맡기 이전에도 一衣 一食으로 금강산에 높이 누웠고, 지금 판사를 그만둔 뒤에도 일의 일식으로 두류산에 높이 누웠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의 생애는 평생토록 山林에 있지 塵世에는 있지 않다. 그런 까닭에 得失과 喜悲는 밖에 있을 뿐 나의 안에는 있지 않으며, 進退와 榮辱은 몸에 있을 뿐 나의 性에는 있지 않다.47)

청허가 1557년 판사직을 그만두고 지리산으로 향할 때 유학자가 “몸이 괴롭고 마음이 울적하지 않는가하고 비웃으며 희롱했다.”고 한다. 그러자 청허는 “득실(得失)과 희비(喜悲)는 밖에 있을 뿐 나의 안에는 있지 않으며, 進退와 榮辱은 몸에 있을 뿐 나의 性에는 있지 않다.”고 하였다. 외물(外物)이 다가오면 순순히 응하고, 외물이 떠나가면 편안히 잊는 것이니, 스스로 자심(自心)을 쉬고 스스로 자성(自性)에 맞출 것을 알았던 청허에게는 세간의 벼슬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청허의 이와 같은 수행상은 30여 년 후인 1593년 선조의 환도(還都) 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면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여 묘향산으로 돌아가 무심하게 한가롭게 지내는 도인일 따름이었다. 청허의 충의가 유교만의 충의가 아닌 자비에 바탕한 충의이자, 수행에 기초한 충의여서 그에게 산림이나 진세(塵世)에 대한 구분은 없었다.

Ⅴ. 맺음말

조선의 불교는 건국 이후 그 탄압과 착취가 지속되면서 저자거리에서 자취를 잃어갔고, 산중에서 비승비속으로 존립했다. 선종과 교종의 우위를 다투는 싸움은 여전했지만,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조선불교사에서 청허 휴정의 가치가 세세생생 빛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조가 지적했듯이 청허는 “몇 알의 염주로 면벽하거나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는 따위를 자비라 하지 않았으며, 탑묘를 많이 건축하고 경률이나 많이 쓰는 것으로 자비”라 하지 않았다. 전란에 참전했을 때는 자신이 호국불교의 화신이자 이후 조선의 부족하고 허술한 국방과 수취체제를 보완하는 승군조직을 체계화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아울러 승가가 조석으로 사은에 보답하도록 축원문을 만들어 잠시 잊혀졌던 불가의 대사회적 본분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정조는 “불교는 이단이고, 승려 스스로가 세간의 비난을 초래했다.”고 했지만, 궁벽한 산골에 처했으면서 조선의 예악과 교화, 풍속을 유지하는데 그 공로가 지대했다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한편 청허 휴정은 법통을 확립하여 조선불교의 뿌리를 모른 채 존립했던 당시 승가의 무지(無知)를 바로잡았다. 임제법통을 확립하여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세운 것은 법통논쟁에 우선하는 것이었다. 선주교종(禪主敎從)에 근거한 선교통합의 결실 역시 청허가 조선불교에 기여한 역사적 가치라고 할 만하다. 그는 교학을 배척하지 않았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강조했고, 경절문의 활구로써 종도(宗徒)들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얻게 하였다. 그는 참선 수행을 최고의 수행법으로 강조했지만, 염불도 주력도 인정했다. 저마다 근기의 다름을 인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청허의 포용성은 조선불교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지만, 교계의 분열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역사적 가치 역시 돋보였다. 청허 휴정은 해동의 절승이자 동방 석씨의 조종이었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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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현재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서 제공하는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 통계에 따르면 四溟 惟政에 관한 연구 성과가 약 511건(학위논문 25, 국내학술논문 93, 단행본 160)으로 가장 많고, 淸虛 休靜이 약 378건(국내학술논문 169, 학위논문 41, 단행본 160), 虛應堂 普雨가 약 28건(학위논문 3, 국내학술논몬 5, 단행본 19)을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본 주제와 관련된 연구 성과를 별도로 소개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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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廷龜, 「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普濟登階尊者扶宗樹敎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幷序」, 『月沙集』 제45권, 碑 그러나 『淸虛堂集』 제6권(『한불전』 7: 716c쪽)의 그가 지은 「自樂歌」는 “淸虛子가 嘉靖 乙卯年(1555, 명종 10) 여름에 처음 敎宗의 判事에 임명되었고, 그해 가을에는 또 禪宗의 판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丁巳年(1557, 명종 12) 겨울에 印綬를 풀고 楓嶽山으로 들어갔으며, 戊午年(1558, 명종 13) 가을에는 지팡이를 날려 頭流山으로 향하였다.”고 하여 비문과 시기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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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場稅 關稅 津稅 店稅 僧鞋 巫女布 其有濫徵者察之」, 『牧民心書』 戶典 6조, 제5조 平賦 - 下 - 다산은 당시 사원경제가 곤궁하여 원래 부과하지 않았던 짚신세(僧鞋)를 여러 절이 부담해야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한 절에 떠맡긴다고 하였다. 고을 수령과 아전, 그리고 官奴들이 함부로 굴어 奉命 使臣이 한번 지나가면 그를 빙자하여 誅求하되 실제 支供은 다섯 냥인데 수 십 냥을 징수하며, 이웃 고을 수령과 서로 모여 놀 때에 끌어가는 기생이나 악공과 따라가는 아전이나 관노들이 비록 100명에 이르더라도 사람마다 한 켤레씩의 신발을 토색하게 된다고 실상을 토로하였다. 그러므로 수령은 그 실제 지공을 조사하고 놀이를 할 경우에는 수행하는 무리들을 줄여야만 그 폐해가 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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