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연구논문

동·서양 종교적 자연관에 내재된 긍정적 정서의 명상 공간

문정필*
Jung-Pil Moon*
*동명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Professor, Tongmyong University

© Copyright 2021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16, 2021; Revised: Jun 03, 2021; Accepted: Jun 22, 2021

Published Online: Jun 30, 2021

국문 초록

명상행위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데 반해, 그 공간을 제시하는 연구는 미미하다. 이를 위해 명상에 들 수 있는 초입공간의 개념 정립이 필요하며, 그 환경에 접근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선행되어온 동·서양의 종교적 자연관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명상 행위를 위한 공간적 접근으로서, 동·서양의 종교적 자연관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긍정적 정서가 생성되는 명상 초입공간의 개념적 가치를 논의하고자 한다.

연구의 방법은 명상에 들어갈 환경을 동·서양의 종교에 나타난 자연관에 관련성을 두어, 동아시아 전통건축물과 서구의 전통건축물을 대상으로 해석, 긍정적 정서로 생성되는 공간을 통해 명상의 초입에 들어갈 환경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동·서양의 종교적 자연관을 논의하여 긍정적 정서가 생성되는 명상 초입공간을 이루는 공간적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아시아 유·불·선의 자연관을 배경으로 한 명상공간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비워 자연과 연속되어 하나 된다는 점에서 허공이나 비움을 우선으로 한다. 이는 물질적 세계를 비워내는 공간으로, 자연과 연속성을 이루는 효용적 가치로 긍정적 정서에 접근될 수 있다.

둘째, 서구 기독교의 자연관을 배경으로 한 명상공간은 근본적으로 물질을 위계적으로 활용하는 공간이다. 이는 물질적 세계를 중심으로 표현되는 공간으로, 노출된 자연환경에서 신에 의해 보호되는 내밀함의 가치로 긍정적 정서에 접근될 수 있다.

따라서 동·서양 종교적 자연관에 긍정적 정서가 내재된 명상 초입공간은 과거의 종교적 사회성을 현대사회에서 요구하는 사상적 가치로 공간을 변환시켜 적용해야 할 과제이다.

Abstract

Today, various forms of meditation and related behaviors are spreading socially. On the other hand, research surrounding the space of meditation is insignificant.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organize the 'entry space' as a spatial concept entering the space of meditation and the perspectives related to the perception surrounding the space. To this end, a review of the traditional view of nature from the religious point of view of the East and West is also requested.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pay attention to the step-by-step approach in space for meditation behavior. We will look at the difference in perception in the religious natural view of the East and West, and look at the conceptual definition and meaning of the entrance space for meditation. In particular, we tried to discuss the environmental meaning of the entrance space that generates positive emotions at the entrance of meditation. To this end, attention was paid to differences in religious perspectives between the East and West, which reveal differences in perception of the natural environment for meditation. Based on this basis, interpretation was attempted in preparation for traditional East Asian and Western buildings.

In this study, the spatial meaning created in the entrance space for meditation by differences in natural views from religious perspectives in the East and West was presented as follows.

First, in the meditation space set in the natural view of East Asian traditional thought, the empty mind is fundamentally emptied and the empty space is prioritized in that it becomes one with nature. This is a spatial perception to empty the material world, and to give more positive and emotional value to achieving continuity with nature.

Second, in the meditation space set in the natural view of Western Christianity, a space that hierarchically utilizes the material world is given priority. This is a space expressed around the material world, pursuing the value of sticking out while being protected by God in an exposed natural environment, and approaching positive emotions.

In the space of traditional architecture, the religious nature and sociality of the era are basically reflected. As discussed above, discussions on the space for meditation entry are common in trying to elicit positive emotional values regardless of East or West. This has a social and ideological meaning that can be sufficiently utilized in the spatial perception of modern society and has practical value to apply.

Keywords: 동·서양의 종교; 자연관; 긍정적 정서; 명상
Keywords: Eastern and Western Religions; Nature View; Positive Emotions; Meditation

Ⅰ. 들어가면서

현대 사회는 근대의 연장선상에서 근대 사회 이전처럼 소통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므로 사회는 개인이 가족이나 공동체로부터 독립되어 가면서 인성의 부재로 일어나는 문제들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중 39.5명이 매일 스스로 죽음을 선택 한다1)는 것은 다양한 범죄에 뒤지지 않는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이러한 세태에 대한 반성은 소외된 개인의 인성을 바로 세우는 것이 하나의 대안적 방향 설정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제시할 수 있는 사회·종교적 대안이 ‘명상(冥想, meditation)’이다. 명상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사고의 정체성과 각성을 통해 자기주체의 근원에 다가설 수 있으므로 인성이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

명상이라는 개념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 감정, 감각을 알아차리고 평정상태를 유지하면서 평화로움을 찾아가는 것이다. 명상은 자신이 가진 치유력으로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하여, 왜곡된 생각을 감소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마음이 지나가는 현상을 알고 순간의 감정에 짓눌리지 않게 된다. 때문에 새롭게 변화되고 전개되는 사회에 긍정적 정서로 접근 할 수 있다.2) 이에 명상을 배경으로 하는 국내·외 연구들은 주로 그 효과를 과학적으로 밝히려고 시도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명상행위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수요에 비해 이 행위를 위한 공간 조건을 제시하는 연구는 미미하다. 이를 위해 명상공간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몰입하여 명상에 들 수 있는 초입공간의 개념 정립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명상 초입을 위한 공간의 가치는 먼저 선행되어온 동·서양의 종교관을 통해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인간의 마음과 사회를 긍정적 정서가 내재된 친밀한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전제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로서, 현대의 명상은 기존의 종교들을 통해 특정 형태로 체계화해 왔다. 예를 들면, 힌두교의 요가(yoga)는 육체, 정신, 영혼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매우 정교한 과정을 규정해 놓았고, 기독교의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도 정신이나 육체를 회복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3) 이로 인해 명상은 삶의 과정을 지속해 긍정적인 자질을 형성, 증진시키는 정서를 통해 올바르게 수련하는 행위로도 이해된다. 이와 같이 명상의 개념이 갖는 긍정적 정서 추구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의 목적과 유사하다.

명상 행위를 할 때 꽃이나 먼 산 등의 시각적인 형상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격식에 매이지 않은 공통된 사색 방법이며, 여러 종파는 이 방법을 공식화해왔다.4) 나아가서 명상은 원소들로 이루어진 우리 생명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우주의 근원을 찾아 나서는 ‘진아’5)인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을 하는 데 있어 갖추어야 할 공간이 긍정적인 정서와 친자연적 요건이 요구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접근 방법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명상 행위를 위한 공간적 접근으로서, 동·서양의 종교적 자연관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긍정적 정서가 생성되는 명상 초입공간의 가치를 논의하고자 한다.

Ⅱ. 동·서양 종교적 명상의 선행연구 및 연구방법

명상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끌게 된 계기는 1960년대부터 인간의 내적인 잠재력이 유용한 것으로 보고, 이를 개발하려는 인본주의 심리학(humanistic psychology)이 대두되고 초 개인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이 등장 발전하면서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주요한 이론과 방법체계로 동양 심리학으로부터 수용하게 되었다(김정호, 1996: 80). 그런데 동양에는 ‘동양’이라는 단어나 심리학이라는 단어가 없었으므로 동양심리학이란 말은 서양에 대응되는 마음공부를 위한 사상적 견해라 볼 수 있다.

동양심리학의 접근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에서 영향을 받은 융(Carl Jung)의 ‘분석심리학’에서, 집단 무의식에 동양의 사상적 견해를 현실에 적용하는 심혼관계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서구의 초 개인심리학이라 볼 수 있다. 이에 최상진은 동양사상의 근본이 되는 마음의 본질 문제에서 출발하는 ‘심성론’으로 집약하여 서구 심리학의 “인간의 마음이 있다”는 대안에서 동양심리학이라 언급하였다(최상진 외, 1999). 이와 같은 초 개인심리학이나 동양심리학에서 말하는 배경은 명상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다. 그러므로 명상은 동양적 개념과 서구적 개념으로 고찰할 수 있다.

동양적 개념은 인도를 배경으로 하며, ‘요가(Yoga)’ 또는 ‘다냐(Dhyana)’6)라고 하여 고요히 생각하고 그것을 끊는 데까지 심화시킨다. 힌두교에서 유래된 요가는 “실천적 생활 철학에서 철저함을 추구한다”라고 정의한다. 요가학파 경전인 ‘요가 수트라’의 첫머리에는 ‘마음 작용(心作用, Citta-Vṛtti)의 지멸(止滅, Nirodhaḥ)’이라고 요가를 정의하고 있다. 현대의 요가는 뉴욕에서 유행하여 운동의 한 형태로 전 세계로 퍼져있지만, 인도에서 발생한 여러 종교적 수행과 관련을 이룬다. 그러므로 종교적 ‘수행’에서 온 전해진 ‘명상’은 동양에서 선행된 어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7)

그리고 동양사상에서 불교의 선(禪)이라는 말도 BC 3000년 전 인도의 사유명상법인 요가에서 비롯되었다. 선은 붓다의 깊은 사유와 정각(正覺)을 통하여 불교의 실천 수행으로 체계화된 말이다. 이는 불교가 생기기 전의 명상법이다. 붓다는 숨을 짧게 들이쉬고 길게 내쉬는 호홉법인 ‘안반념법’8)을 주장했다(동국대불교교재편찬위원회, 1997: 272). 이러한 붓다의 수행적 명상에 대해, 서광은 경험의 주체와 대상화 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마음작동까지도 사라져가서 결국은 우주나 자연에 하나 되어 자아의 경계가 없어지는 구조를 주장하였다(서광, 2016: 2-7). 때문에, 불교의 선은 오늘날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생된 유교나 도교와 융합되어 종교적인 면에 그치지 않고 사상적 가치로 자리 잡아 일상생활에 긍정적인 정서를 부여해 왔다.

서구적 개념의 명상(meditation)은 2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기독교의 묵상(黙想) 또는 관상(觀想)과 관계있는 유의어이다. ‘묵묵히 마음속으로 생각한다’는 개념으로, 묵상은 마음과 정신을 몰두하여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관계된 모든 일의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이는 절대자인 신과의 합일을 목표로 한다. 때문에, 묵상은 ‘정신의 기도’이며, 지적(知的) 행위와 의지가 결합된다. 묵상법 가운데 성 이냐시오 로욜라(St. Ignatius de Loyola)가 쓴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9)을 통해 사람들을 하느님의 뜻과 함께하는 영신적 방법들을 널리 사용하고 있다. 묵상은 신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행위를 하는 관상과는 구별된다.

관상은 수득적(修得的) 관상과 주부적(注賦的) 관상으로 도달하는 양식으로 나뉜다. 먼저, 주부적 관상은 절대자의 은혜로 신적인 체험과 신비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수동적이다. 수득적 관상은 개인의 노력으로 직관에 도달, 마음을 가다듬어 번뇌를 끊고 깊은 진리로 무아의 경지에 몰입한다. 이런 점에서 수득적 관상은 인간의 능력으로 접근하는 기도법으로 불교의 선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수득적 관상 행위는 유물론적이다. 수득적 관상은 육체의 의식적 노력으로 절대자와 조화되는 물질을 통한 영적인 힘을 일치시킨다.10) 불교의 입장이 자율적인 반면에 수득적 관상을 통한 기독교 입장의 수동적인 면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나름대로는 짐을 벗어버리는 명상 경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 짐은 불안, 공포, 증오, 욕망의 부정적 정서에서 기대, 갈등, 신념, 사랑, 희망, 행복 등의 긍정적 정서로 향하는 총체적 현상이면서 자기 인식의 구성체일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의 요가나 선을 통한 수행에서 출발한 명상은 바로 나이기를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혁명이다. 기독교에서는 자아를 포함한 육체의식을 탈피하고 생각을 끊는 것에 머물지만, 불교는 육신을 벗어난 마음까지도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 진정한 해탈이 된다. 이 과정으로 향하는 명상행위가 반복되면 인연으로 얽혀진 현재의 실상이 점점 긍정적 정서를 일으키고 나아가 해탈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 연구의 방법은 마음치유를 위한 명상에 들어갈 환경을 동·서양의 종교에 나타난 자연관에 내재된 긍정적 정서를 논의함으로써 나타나는 의미적 공간을 통해 명상의 초입에 들어갈 환경으로 개념화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인간 삶의 본향인 자연으로 환원되거나 자연을 신으로 해석한 동·서양의 종교적 자연관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종교적 자연관은 요가, 선, 기도, 묵상, 관상의 행위를 위한 선험적 공간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 공간은 긍정적 정서를 생성해 명상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이라는 점에서 논의할 연구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동·서양의 종교적 명상에 대한 선행적 관점들을 고찰하였다.

3장에서는 명상과 긍정적 정서를 관련지어 동·서양의 자연관을 논의한다. 명상, 긍정적 정서, 동·서양의 자연관을 상호관입 시켜 명상을 위한 공간적 환경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4장에서는 동·서양의 종교적 자연관에 나타난 전통적 공간으로 명상초입을 위한 환경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 종교적 전통건축물과 서구의 종교적 전통건축물을 대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결론은 3장과 4장 종합해 종교적 자연관에 나타난 명상에 쉽게 들어설 초입공간이나 환경을 대상으로 긍정적 정서를 일으키는 공간의 가치를 정의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명상에 들어갈 환경을 동·서양의 종교에 나타난 자연관에서 찾고자 한다. 이는 종교적 자연관과 관련성 두어, 동아시아 전통건축물과 서구의 전통건축물을 대상으로 해석, 긍정적 정서로 생성되는 공간을 명상의 초입에 들어갈 환경으로 논의하는 데 그 의의를 두고자 한다.

Ⅲ. 동·서양의 자연관과 긍정적 정서

1. 긍정적 정서와 자연

먼저, 긍정적 정서를 논의하기 전에 ‘정서(情緖, emotion)’를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 정서는 감정과 유사하게 활용되며 정동(情動, affect), 느낌(feeling)과 혼용, 사용된다.11) 그레이엄 뮤직(Graham Music)도 정동, 정서, 느낌이 서로 교차로 작용될 수 있다고 했다(Music, 2005: 8-9). 그 이유는 정서가 정동과 느낌 사이에서 객관적, 주관적 관계성을 유연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 정서는 정동과 느낌을 아우르는 긍정성과 함께 긍정적 정서로 명명하여 논의한다.

‘긍정적 정서’12)는 공간과 함께 현대적 명상 행위에 접근하는 과정의 일차적 목표가 될 수 있다. 이는 명상이 진행 중일 때, 무념무상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명상에 들기 위한 주변 환경의 분위기가 긍정적인 진리나 최종적 관심, 가치추구, 통찰, 지혜가 깃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명상에 쉽게 들어가기 위해 긍정적인 정서를 일으키는 데 집중하는 환경적 노력이 필요하다. 즉, 명상을 행하는 환경은 긍정적인 정서를 함양하는 공간의 조건이 요구된다. 그러나 도시공간은 산업화된 물질의 과대한 구축으로 인한 자연의 단절로 주체의 존재가 부정적이다. 이는 도시 공간이 지구성의 생명체로 공존되는 인간의 존재론적 순환을 억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긍정적 정서를 일으키는 전통적 공간을 고찰하기 위하여 그 배경이 되는 동·서양의 자연관을 대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대표적인 예로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명상가 오쇼(Osho, 1931- 1990)는 자연이 있는 곳이 명상에 적합한 장소라고 했다. 그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나무 곁이나 새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곳, 강물이 흐르고 음악소리가 연주되는 곳을 찾아 가라고 했다(Osho, 2014: 54). 이는 붓다가 나무 밑에서 정좌하여 도(道)를 득한 내용과 유사하다. 자연은 원초적으로 도의 흐름이 살아 고동치고 진동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연환경은 인간에게 긍정적 정서의 전환을 지향하며, 기본적인 자연적, 우주론적 리듬으로 향하므로 인간의 정서에 긍정성의 변화를 꾀한다. 즉, 긍정적 정서를 들게 하려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자연의 순환질서에 속해 있을 때 자아가 긍정적 존재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같이 자연에서 인식되는 긍정적 정서는 명상행위를 위한 환경이 되며 영원한 자유임을 알게 해주는 공간성으로 논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명상에 적합한 장소는 자연이 존재하는 곳이므로 전통적인 명상은 자연에 개방된 공간이었을 것으로 사료되고 고대에 존재했던 종교적 공간을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명상과 관련된 종교적 공간 도출의 출발점으로 동·서양 문화 저변에 긍정적 정서를 추구하는 자연관에 대한 논의를 다음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2. 동·서양의 자연관과 긍정적 건축 공간

산업사회에 의한 기계론, 결정론적 사고는 후기산업사회에 와서 물질적인 풍요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이러한 물질주의, 자본주의적 사회는 환경파괴와 생태계 훼손, 인간성 상실이라는 부작용과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근본으로 돌아가 전통적 가치의 자연을 재해석했다.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긍정적 정서를 논의하기 위해 인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전통적으로 어떤 가치관을 두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동양의 자연관은 토속신앙과 유·불·선에서 유래된 사상적 가치에서 기의 우주관인 허와 실이 상생하는 가치관을 발전시켰다. 동아시아의 토속신앙은 자연을 살아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신적(神的)인 것으로 해석하여 숭배했다. 주역에서는 무극에서 출발한 음·양 8괘를 64괘로 확장시켜 음과 양의 상호의존성을 통해 자연과 도덕을 유기적 통합체로 인식했다. 유학자 공자(孔子)는 천(天)을 인(仁)과 같은 도덕의 원천으로 해석했으며, 순자(荀子)는 천론(天論)을 통한 자연이용으로 인문적 개조를 강조했다. 송대(宋代)의 신유학에서도 자연을 전체로 인식하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로운 유기적 관계로 인식했다(쓰까모도 게이쇼 외, 1990: 219). 또한, 불교의 자연관은 인과(因果)에 의한 자연계의 순환적 사고를 연기법의 생명원리로 보여준다. 이는 색심불이(色心不二), 만물일체론(萬物一體論) 사상으로 몸과 마음 그리고 물질계가 분리될 수 없으며,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 장자(莊子)의 도가사상은 도(道)에 도달하는 방법을 자연에 연속되는 무위(無爲)를 강조 했다(장주, 2000: 250-281). 이러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사람의 생각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자연을 말하는 것이며, 그 순리대로 사는 최고의 자연사상이다.

서양의 자연관은 고대의 신인동형, 중세의 기독교, 근세의 인본주의, 근대의 산업화가 사상적 가치로 자리 잡아 실체의 우주관으로 동양의 허공과 대립하는 가치관을 발전시켰다. 고대 사상인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은 자연을 매개로 신과 인간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았다. 신인동형론은 신전 건립 시에도 인체의 비례로 형식화 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우주를 유기체라는 범신론적 성격을 띠었다. 플라톤은 자연물에서 추출된 비례와 제 원소를 기하학적 형태로 해석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와 비례로 자연을 유기체로 해석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아퀴나스(Tommaso d'Aquino)를 통해, 인간은 신을 위해 봉사하고 자연은 인간의 삶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기독교도들은 인간이 느끼는 자연은 신의 창조에 의한 것이라 했다. 르네상스시대의 인본주의 사상은 객관적으로 자연의 모습을 물질적으로 인식하고자 했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우주의 수학적 규칙성으로 정연함을 강조했고, 갈릴레이(Galileo Galile)는 자연이 양적으로 계량 가능한 수학적 원리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17세기,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자연을 기계론적으로 보았고, 뉴턴(Newton)은 시·공간을 절대적인 관점으로 자연을 기계적인 운동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18세기,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심정을 강조해 자연으로 돌아가라 했고, 칸트(Immanuel Kant)는 자연의 숭고 개념으로 아름답고 완전한 것은 신이나 이성이 아니라고 했다.

이와 같이 동·서양 자연관에서, 동양은 자연의 본질을 탐구한 원리를 건축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자연에 연속되어 조화로운 관계를 사상적으로 유지해 왔다. 반면에, 서양은 자연을 객관적, 물적 대상물로 인식하여 자연의 모방, 차용을 통하여 건축에 적용했다. 그러므로 건축에 자연을 받아들이는 동양적인 방법은 자연·우주적, 유기체적 구성 원리를 은유적으로 해석, 적용하거나 암시적으로 공간에 반영하였다. 반면에, 건축에 자연을 받아들이는 서구적인 방법은 자연의 원리, 본질을 탐구·분석하여 수, 비례, 위계, 기하학 등 개념화를 이룬 형식, 표현, 심리, 합목적인 내용으로 반영하였다(권태문, 2009).

그 실상으로서, 동양의 전통건축은 유교사상으로 양(陽), 남성 중심적 건축배치가 특성을 이룬다. 불교사상에 전통건축은 의한 연기법에 의한 고정적인 실체가 없는 무자성(無自性)의 공간 표현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도가 사상에 의한 전통건축은 인간의 활동과 관련된 자연적 공간에 대해 상대적 사고를 도입하여 비움이나 허공을 표현하는 창과 문을 활용한 공간의 전이적 관계를 통해 긍정적 정서를 드러낼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다. 서구의 전통건축은 고대 신전에서의 비례, 중세 고딕교회의 단일 리듬의 수적 평면형식과 신에게 향하는 앙천적 조형성과 광명을 추구하는 자연성을 들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자연을 배경으로 알베르티의 수리체계에 의해 명료함을 드러냄으로, 기둥이나 벽면을 중시하는 건축모델을 통해 긍정적 정서로 드러낼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전통적 자연관에 의한 건축은 긍정적 정서 공간을 확립하는 동·서양의 명상초입을 위한 단서적 공간이 될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즉, 동·서양 자연관이 배경된 전통건축의 공통성은 자연의 순환질서가 잘 이뤄지는 곳을 선정하여 사찰, 사원이나 교회, 수도원 등을 구축하였으므로 긍정적 정서가 이입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명상은 전통적 자연관 함께 종교공간을 통해 진행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연관을 통해 건축은 과학, 예술, 문학, 철학의 체계에서 영감을 받아 명상을 행할 수 있는 긍정적 정서를 이루는 환경으로 다음과 같이 동·서양의 전통적인 종교적 공간을 대상으로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Ⅳ. 동·서양의 종교적 자연관에 나타난 명상 공간

1. 동아시아 종교의 자연관에 나타난 전통적 명상 공간

본 절은 동아시아의 종교인 유·불·선의 가르침이 생활화되어 사상적 가치로 자리 잡은 사상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유교는 본래 성선설을 주장했다. 성선설에서, 인간은 자라나면서 본성이 나빠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한다. 즉, 천성은 착하나 후천적인 기질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래 변하지 않는 천성은 이(理)라고 하고, 변할 수 있는 성격이나 습성 등은 기(氣)라고 하는 이기설(理氣設)이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순수한 천성 그대로를 나타내는 것이 수양이고, 이를 지켜내고 간직하여 도(道)에 맞게 사는 사람을 군자(君子)라 했다. 그 본래의 순수한 천성을 나타내는 것이 인, 의, 예, 지의 네 가지 덕이며, 이 네 가지 덕을 유지하는 것이 천성을 유지하는 것이요, 실천하는 것이 인생의 이상으로 보았다. 인(仁)은 남과의 관계에서 사랑하는 마음, 의(義)는 자기의 천성을 올바르게 찾는 마음, 예(禮)는 서로 존경하고 자신을 감추어 남을 앞세우고 존경하는 마음, 지(智)는 천성이 그대로 나타나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 옳은 것을 실천하는 마음이다. 이를 위해 유교의 명상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념을 고요히 가라 앉혀 중용의 도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에서는 인간 본래 모습을 되찾는 노력 즉, 본래 성품을 되찾는 과정을 ‘명상’이라고 보고 있다. 유교에서는 ‘극기(克己)’를 강조하는데, 이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욕심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극복하여 본래의 순수한 천성인 본성으로 돌아가라고 유학자들은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본성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는 ‘거울 앞에서 사물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춰지듯이, 마음의 본성역시 이와 같아 사물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게 된다. 마음이 항상 맑고 비어있으면 때가 묻을 수가 없고,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다’고 말했다(이황, 1987). 이처럼 고요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노력이 곧 유교의 명상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자연 그대로의 천성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며, 관용과 조화를 위한 덕(德)과 도(道)의 내적 수양방법을 일상의 생활 속에 스며들게 하는 가르침이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위한 전통 향교나 서원 그리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전통 주택에서 명상공간이 잘 나타난다. 이러한 전통건축은 외부와 차단되면서 내부로는 개방적인 환경으로 자연을 도입하여 일상에서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경전을 읽고, 자연적 삶의 근본이 되는 예의 규범을 지속하게 하는 공간은 긍정적 정서로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정서는 유학자의 생활 속에 깃든 검소함과 겸손함 그리고 자연과 친밀한 소박함이 건축의 공간적 환경을 제공하는 특성이다(문정필, 2017: 19).

불교는 명상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처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교리 전체의 핵심이 되는데, 이는 영적인 삶에 이르는 본질이 명상이기 때문이다. 붓다(釋迦牟尼, Śākyamuni, BC 624-544)는 35세 때 보리수 아래에서 49일간 앉아 해탈을 맞이했다. 훗날 그 나무는 생명의 나무로 알려졌다. 생명의 나무는 심상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특별한 통찰력을 부여해, 보다 높고 깊은 영적 수준을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 그것은 물질계의 보편적 법칙이 균형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것이 창조되는 순간에 균형과 상호 의존되는 두 가지 힘이 작용된다. 그러므로 붓다가 수행했던 나무 밑의 환경은 만물의 균형이 유지되고, 죄악과 질병이 사라지며, 필요한 산물이 풍부해지며, 여러 신들과 교감하게 되고, 여러 언어와 예언의 능력 그리고 연금술과 기적의 능력을 인류에게 부여해 줄 것을 약속하는 의미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이 담겨있는 대승불교는 깨달음을 얻은 후 속세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모두가 해탈에 이르도록 여러 생을 반복하는 존재에 더 큰 중요성을 이룬다. 때문에 불교는 창조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부처의 본질 즉, 해탈은 우리내면에 이미 존재하므로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해탈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자기만의 깨달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속세의 사람들에게 깨닫도록 가르침을 준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회복지의 정신적 교훈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불교에서는 수양적 명상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 선원건축은 자연환경이 걸러진 균질한 공간감이 긍정적 정서의 환경을 제공하고 선 수행의 초입을 이끌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 정서의 공간은 절제된 편안함이 선행되어 명상에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특성이 있다(문정필, 2017: 19).

불교가 중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강조하는 도교와 광범위한 관계를 맺었다. 도교의 무위(無爲)사상은 자연의 만물 가운데 하나라도 훼손되면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둔다. 그러므로 도교는 자연과 하나 되는 명상 그 자체이다.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사색은 자연과 분리되지 않는 도(道)를 추구한다. 이는 영생을 영적, 정신적 측면뿐만 아니라 잠재적, 육체적 측면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즉, 명상을 통한 육체적 에너지인 정(精)은 정신적 혹은 미묘한 에너지인 기(氣)로 변하고, 이러한 기는 영적 에너지인 신(神)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절대자와 하나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죽지 않는 완벽한 활력을 유지하면서 몸과 마음, 영혼이 내적, 외적으로 평온을 누림으로써 조화로운 삶이 영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교적 명상환경은 자연과 소통되는 편안한 시간이 흐르는 공간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도가의 친자연적 가치관은 우리민족의 선사상이 녹아있는 성지나 사찰에 진입하는 길을 걸을 때 긍정적 정서를 맞이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서는 이 공간과 저 공간을 이어주는 건축적 산책을 통한 여유로움과 전이되는 공간의 흥미로움을 통해 잠시라도 무위에 다가가 심신을 식혀주는 환경적 특성이 있다(문정필, 2017: 20).

따라서 유·불·선의 자연관을 배경으로 한 명상공간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비워 자연과 연속되어 하나 된다. 이는 검소함, 편안함 여유로움 등으로 물질보다는 허공이나 비움을 우선으로 하는 상징적 가치로 공간화되므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종교관에 기반된 우리의 자연관에 나타난 명상공간의 특성으로 볼 수 있다.

2. 서구 종교의 자연관에 나타난 전통적 명상 공간

서양은 고대 피다고라스학파가 기독교 공인 이전보다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수학자이면서, 이집트, 칼데아, 바빌론의 신비주의를 연구했을뿐 아니라 힌두 신들의 신비에 대해서도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이 학파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인들은 이성뿐만 아니라 존재의 보다 높은 수준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근본적인 의문을 해결하고자 했다. 피타고라스학파 학생들은 처음 5년간은 침묵과 명상으로 일관하여, 그전에는 의문을 던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명상가로서의 체험까지 포함된다(Fontana, 2003: 108).

기독교에서는 명상을 논하기 전에 ‘예배’부터 언급할 필요가 있다. 명상이 예배 속 기도에서부터 출발되었기 때문이다. 예배란, 종교학적으로 거룩하고 성스러운 대상을 공경하고 절하는 행위를 말한다. 기독교적으로는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고 선포하는 의식이다. 기독교에서는 구약의 예배로부터 전승되어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어 왔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는 중세에 도래하면서, 예배하는 공간은 바실리카와 공유하는 공공적 장소성과 융합되고 성당 건축으로 발전을 이루었다. 그것은 초기에 바실리카식 성당 형식으로 면모를 갖추었다가 로마네스크에서 사원, 사탑, 세례당이 분리되어 지어졌고, 고딕에서 사원에 탑이 합쳐진 높이 솟은 앙천적 형태로 완성되었다. 이러한 성당은 도시의 중앙에 우선적으로 세워져 신본주의적 예배공간을 확보했던 것이다.

기독교에서 명상이라고 할 만한 전통은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4세기 바실(St. Basil)에 의하면 ‘외부의 일들로 인해 마음이 번잡하지 않고 평온해진다면, 마음은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 스스로 하느님의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고 했다. 정교회에서 가장 빈번히 쓰는 방법은 예수기도문(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사)을 반복해 암송하는 것이었다. 또한, 수도원을 통해서 신비주의적 형태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로 알려진 영성수련 방법은 중세 신비주의 영성을 창출하였다.

수도원은 세속적인 추구를 버리고, 오직 영적인 추구에 전념하는 구도자적인 삶을 사는 곳이다. 초기 수도원은 세상과 단절되어 홀로 은둔하여 수행하는 수도사들로부터 세상을 벗어난 외진 거처에서 정기적으로 필요한 빵만을 공급받으며 수행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유재산을 버리고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공동체로서의 수도원은 절대자 하나님의 신적 질서 속으로 들어가 진정한 평안을 찾고자 하는 자들의 공동체였다.

그런데 수도원 공동체는 고독한 은수자의 삶에서 시작해 수도원 공동체를 이뤄 유럽 르네상스에 영향력을 주는 역사와의 관계성을 부인할 수 없다. 수도원의 순기능이 명상기도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중세 말기에 와서는 대사회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Christopher Brooke, 2005). 예를 들면, 라트베르투스(P. Radbertus, 790-859)가 세운 코르비(Corbie) 수도원은 852년 경 약 150여명의 수도사가 거주했다. 이 수도원은 매일 부양하는 과부가 수도사의 수와 거의 같았고, 매일 300명의 나그네들을 객사에서 대접했다. 나아가 중세말기, 근세에 와서, 수도원은 사회적 극빈층이나 경제적 활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부양했고, 환자의 치료나 나그네를 대접하는 사회 복지적 봉사에 앞장섰던 것이다. 또한, 수도원은 중세 내내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감당하면서 집필과 도서를 관리했다.

그러므로 초기수도원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를 피해 생활을 하였지만, 후기에는 단순히 은둔의 수도생활에만 중점을 두지 않았다.13) 그러나 초기 수도원의 건축 공간적 본질은 일반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패쇄적 공간성을 띠었다. 이는 신적이고 성스러운 영역성을 강조하여 수도사들의 고된 일상에 대한 정신적 안식처인 신성과 내밀함이 공존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양의 전통적 명상 행위를 위한 환경은 피타고라스학파 학생들의 일상과 단절된 신비주의적 침묵수행의 분위기나 수도사들이 초기수도원의 은거하는 분위기의 신성하고 내밀한 공간이었다. 이는 서양의 전통적 종교의 자연관에 나타난 명상공간의 특성으로 볼 수 있다.

Ⅴ. 나가면서: 현대사회에 반영할 명상 공간

이상과 같이 동·서양의 종교적 자연관을 이해하고 긍정적 정서가 생성되어 명상 초입공간을 이루는 공간적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아시아의 유·불·선의 자연관을 배경으로 한 명상공간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비워 자연과 연속되어 하나 된다는 점에서 물질보다는 허공이나 비움을 우선으로 하는 ‘절석법(截石法, stereotomy)적 공간’으로 자연과 연속성을 이루는 효용적 가치로 긍정적 정서에 접근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은 물질적 세계를 비워내는 공간으로 자연과 연속성을 이루는 효용적 가치로 긍정적 정서에 접근될 수 있다.

둘째, 서구 기독교의 자연관을 배경으로 한 명상공간은 근본적으로 물질을 위계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비움보다는 물질로 영역성을 강조하는 구축법(構築法, tectonic)적 공간으로, 물질적 세계를 중심으로 표현되는 공간으로 노출된 자연환경에서 신에 의해 보호되는 내밀함의 가치로 긍정적 정서에 접근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자연관이 반영된 전통건축의 두 가지 명상공간은 동·서양의 긍정적 정서를 잘 나타내는 이원적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각각의 공간들을 전이시키는 방법도, 동양적인 것은 창과 문의 비움이요, 서양적인 것은 벽이나 기둥의 물질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비움/물질의 이원적 특성을 갖는다. 여기에 동·서양의 이성·감성, 농담(濃淡)·색채 등의 이원화된 일반적인 문화 특성들이 융합된다면, 현대에 전통적 가치를 결합한 명상을 위한 공간을 디자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현대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요가, 정좌명상, 걷기명상, 차문화 명상 등을 위한 공간을 디자인하는 데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명상을 위한 전통적 건축의 공간은 그 시대의 종교성이나 사회성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공간을 현대사회에 적용하는 방법은 현대의 사상적 가치로 환원시킬 수 있는 방향성을 드러내어야 한다. 이에 본 연구에 상정된 긍정적 정서는 전통적 종교건축에 내제된 형용사적 어휘(예를 들면 검소함, 편안함, 여유로움, 신성함, 내밀함 등)를 도출해 현대건축에 필요한 명상프로그램을 위한 공간 디자인에 적용 가능하다. 이는 종교적 건축에 녹아 있는 명상을 위한 공간적 특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현대사회에서 요구되는 명상행위를 위한 가치로 접근할 과제이다. 결과적으로, 동·서양 종교적 자연관에 긍정적 정서가 내재된 명상 초입 공간은, 과거의 종교적 사회성을 현대사회에서 요구하는 사상적 가치로 공간을 변환시켜 적용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현대의 명상행위가 건강증진, 심리상태의 이완, 스트레스 대처, 심리치료와 상담, 교육, 스포츠, 예술, 문화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확산되고 응용되고 있다는 것은 종교사상의 일부가 현대사회의 가치적으로 발전·정착되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종교를 통한 전통 가르침이 현대의 문화나 사상적 가치로 자리잡았듯이, 명상을 위한 공간은 사회의 일상이 스며든 주거로부터 적용을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는 전통적인 유·불·선의 가르침이 존재했던 건축공간에서 긍정적 정서감이 생성된 선조들 지혜를 엿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산업화·도시화 추구로 인해 획일적인 주거환경에서 몰개성적인 인간 삶을 탈출해 긍정적 정서로 안정감을 찾아야 할 가치라 볼 수 있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명상공간은 자연의 내용이나 형식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동일한 사고체계가 기본적이고 일상적인 주거생활에서 긍정적 정서가 내재된 공간으로 자리 잡아, 가장 작은 사회구성인 가정의 정신성을 먼저 확립해야, 소외되었던 인성을 되찾고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Notes

통계청. 2013년 자살률 통계.

때문에 현대에 와서, 명상은 심리치료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종교적 수행이었던 명상행위가 현대에 와서 건강증진, 심리상태의 이완, 스트레스 대처, 심리치료와 상담, 교육, 스포츠, 예술, 문화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확산·응용되고 있는 것이다(문정필, 2017: 11).

요가의 한 측면인 디아나(Dhyana)는 선불교(禪佛敎)의 초점이 되었고, 영신수련은 기도, 묵상, 관상, 영적 독서의 지침을 통해 수련의 일부를 형성한다. 또한, 힌두교와 불교의 ‘진언’, 이슬람교의 ‘지크르’, 기독교의 ‘예수기도문’ 등은 효과적인 음절, 단어, 본문을 소리 내거나 속으로 반복함으로써 영적인 정화를 얻으려 했다.

예를 들면, 티베트의 금강승은 만다라를 통해 명상할 수 있는 우주 세력들의 집합으로 간주한다. 또한, 고대로부터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깊은 숭배와 자각에 초점을 둔 샤머니즘은 흙, 공기 물, 불의 4원소를 통한 인간의 몸이 동일한 근원을 가지므로 주변세계와 하나라고 믿었다.

진아(眞我, Purusa)란, 외적 사상에 좌우되지 않는 참된 자아를 말하며, 인간의 지식과 지혜도 이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다냐(dhyana)라는 말은 명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명상을 체계화한 인도의 수행자들이 쓰는 말이다(정태혁, 1987: 17-18).

명상 즉, meditation은 서양적 어원이다. 동양적 어원인 ‘수행’과 유사한 ‘수양’, ‘수련’ 등의 어원과 함께 명상의 기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안반념법’은 요가의 숨을 멈추는 쿰바카를 개선했다(동국대불교교재편찬위원회, 1997: 272).

영신수련은 특별한 생활규칙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과 영혼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기도, 묵상, 관상, 영적 독서 등의 영신적 방법들을 말한다(St. Ignatius de Loyola, 1967).

불교 사상과 수득적 관상과의 대별은 불교에서 ‘놓아버려라’는 화두가 밖으로 육진(六塵)과 내적으로 육근(六根), 육식(六識)을 놓아 다시 더 버릴 것이 없어야 생사에서 벗어난다고 했다면, 성경에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유사한 구절을 예로 들 수 있다.

정동은 순간을 모두가 관찰하는 입장이므로 객관적이다. 느낌은 내적인 개인적인 경험을 나타내는 주관적인 입장이다. 정서는 정동과 느낌 중간쯤에 위치한다. 시간의 관점에서도 정동은 관찰하는 순간의 시간성, 느낌은 내적인 상태로 길어지는 시간성을 이루는데, 정서는 정동과 느낌 두 개념의 시간적 차이 중간쯤에 머무른다(Edward E. Smith 외, 2004: 352).

여기서 말하는 긍정적 정서는 형용사인 기쁨, 사랑, 흥미, 존경, 즐거움, 신뢰 등으로 표현되는 감정이다.

후기수도원은 노동이나 봉사, 간호, 교육을 위한 건축적 공간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수도원은 중세에 완성된 그릭크로스 성당이나 라틴크로스 성당 형식 같은 통일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건축은 하나의 이념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낙원에 있는 것과 닮은 거처를 지상에 건설하겠다는 것으로, 벽으로 둘러싸여 폐쇄된 도성의 모습을 천상의 위계질서로 구현한 공간을 배치했다. 그 위계는 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대기하는 죽음의 공간과 객들을 대접하기 위한 봉사의 자리 등이 수도원 건축의 공통적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이념에 따라서 수도원 건축은 서로 다른 네 구역으로 구분되었는데, 그것은 수련 수도자들의 구역, 병자들의 구역, 묘지 구역, 그리고 수도원 영내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클로이스터(cloister)구역으로 각각 격리되어 건축되었다(Brooke, 2005: 108).

참고문헌

1.

권태문. 2009. 『건축미학을 찾아서』. 대가.

2.

김인숙. 2015. “지적장애인 가족의 스트레스 감소를 위한 차문화 치료 프로그램.” 『차문화·산업학』 28: 61-78.

3.

김정호, 1996. 『한국의 경험적 명상연구에 관한 고찰』. 덕성여자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4.

남희근. 2000. 『주역강의』, 신원봉 역. 문예출판사.

5.

동국대불교교재편찬위원회. 1977. 『불교사상의 이해』. 불교시대사.

6.

문정필. 2016. “안도 타다오와 루이스 바라간 건축의 명상 공간.” 『사회사상과 문화』 19(2): 295-336.

7.

문정필. 2017. “한국 전통건축의 명상초입을 위한 공간 고찰.” 『대한건축학회 지회연합논문집』 29(2): 11-20.

8.

서광. 2016. 『치유하는 유식 읽기』. 공간.

9.

쓰까모도 게이쇼·우에야마 슌뻬이·가지야마 유이찌. 1990. 『불교의 역사와 기본사상』. 대원정사.

10.

윤재근. 2011. 『한권으로 읽는 주역』. 동학사.

11.

이영림. 2007. “명상과 긍정적 정서에 관한 최근 연구동향.” 『종교교육학연구』 25: 231-255.

12.

이황. 2012. 『성학십도』. 이광호 옮김. 홍익출판사.

13.

장현갑. 2000. “명상을 통한 자기치유.” 『인문연구』 39: 255-283.

14.

정수미·임경란. 2010. “커뮤니케이션 확장으로서의 치유적 명상공간 디자인 연구.” 『기초조형학연구』 1(3): 449-459.

15.

정태혁. 1987. 『명상의 세계』. 정신세계사.

16.

조현규. 2011. 『왕필이 본 도덕경』. 새문사.

17.

최상진·윤호균·한덕웅·조긍호·이수원, 1999. 『동양심리학』. 지식산업사.

18.

莊周. 2000. 『장자』. 김학주 역. 을유문화사.

19.

Brooke, C. 2005. 『수도원의 탄생-유럽을 만든 은둔자들』. 이한우 역. 청년사.

20.

Edward, E. S·Susan Nolen-oeksema·Barbra. F·Geoffrey R.L. 2004. 『힐가드와 애트킨슨의 심리학 원론』, 장현갑·이진환·신현정·정봉교·이관오·정영숙 역. 박학사.

21.

Fontana, D. 2003. 『나를 새롭게 하는 명상』. 박수미 역. 들녘미디어.

22.

Hope, J. 2007. 『불교』. 김영사.

23.

Lazarus, R. S·Bernice N. Lazarus. 1997. 『감정과 이성』. 정영목 역. 문예출판사.

24.

Music, G. 2005. 『감정(Affect and Emotion)』. 김숙진 역. 이제이북스.

25.

O'Hear, A. 2008. 『기독교』. 김영사.

26.

Osho. 2014. 『명상,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 태일출판사.

27.

St. Ignatius de Loyola. 1967.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윤양석 역.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28.

Plutchik, R. 2002. Emotions and Iife: Perspectives from Psychology, Biology, and Evolution(1st). Washington, DC: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