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m and Society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일반논문

지눌 선사의 정토 수행론: 『권수정혜결사문』 제7문답을 중심으로

김부용(승원)*
Boo-yong(Ven. Seung-won) Kim*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부 부교수
*Associate Professor, School of Buddhist Studies, Joong-ang Sangh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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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Nov 28, 2021; Revised: Dec 21, 2021; Accepted: Dec 24, 2021

Published Online: Dec 31, 2021

국문 초록

이 글에서는 『권수정혜결사문』 제7문답에 나타난 지눌 선사의 정토수행론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 먼저 제7문답의 구성과 내용을 분석하고, 다음으로 제7문답에서 지눌 선사가 강조했던 수행의 근본을 파악하여, 이를 지눌 선사의 정토 수행론으로 정리하였다.

지눌 선사는 제7문답을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선사는 처음에 1) 대심중생의 특징을 설명하고 이들을 상근이라고 구분하였고, 마지막에는 4) 최하근이라는 용어로써 칭명(稱名)만으로도 희유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중간에는 2) 자력과 타력으로 안과 밖이 서로 돕는 수행을 하는 사람 두 종류(①, ②)를 묶어서 설명하고, 또 3) 불법 가운데 마음을 잘 쓰지 못해서 장애에 막힘이 많은 사람 둘(①, ②)을 구분해서 설명하였다. 또한 선사는 최하근 외에 다시 5) 심법의 가르침은 알지 못하지만, 실제의 수행에서는 범행을 이루는 사람과 6) 조종문하(祖宗門下)에 이심전심으로 비밀한 뜻을 전하는 격외선 수행자를 밝혔다. 지눌 선사는 여섯 부분을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나타나는 수행의 특징으로 구분하였다.

지눌 선사는 각각의 근기에서 닦는 정토 수행을 말하는 가운데 선문 수행자가 닦아야 하는 바른 정토 수행을 강조하였다. 1)에서는 대심범부가 불심인 자심·불성인 법성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해서 이루는 법성정토를 말하였고, 2)·3)·4)·5)에서는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으로서의 정토 수행을 반복적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제5)에서는 고금의 달자(達者)가 구했던 정토는 결국 진여를 깊이 믿고 정혜를 오로지 하는 것임을 밝혔다. 그래서 이와 같은 세 가지 특징을 법성정토를 닦는 수행,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 진여를 믿고 정혜를 오로지 하는 수행 등으로 정리하였고, 이 모두는 결국 진여를 믿고 정혜를 오로지 하는 수행으로 돌아간다고 파악하였다.

Abstract

In this article, I tried to grasp Jinul (知訥, 1158~1210)’s theory of pure land practice focusing on the seventh question and answer in Gwonsujeonghyegyeolsamun (『勸修定慧結社文』). To this end, first I analyzed the composition and content of the seventh question and answer and then figured out the basis of the practice emphasized by Jinul in the seventh question and answer and summarized it as Jinul’s theory of the practice of pure land.

The seventh question and answer consists of six parts according to sentient beings’ faculties: he classified (1) people with the great mind as the uppermost faculties (上根); (2) two types of people who practice helping each other inside and outside with self-power and others’ help as the second group; (3) two types of people who are blocked a lot because they are not good at using their minds in Buddha’s dharma as the third group; (4) people regarded as rare only if they invoke a buddha’s name as the lowermost faculties (最下根); (5) people who do not know the teachings of the Dharma of mind but achieve clean acts in actual practice as the fifth group; (6) people who convey secret meanings by the way of transmission from mind to mind in the Zen patriarchy as the sixth group. Jinul classified these six groups into the characteristics of practice that appear according to the faculties of practitioners.

Jinul emphasized the proper practice of pure land that zen practitioners should perform, referring to the practice of pure land according to each faculty. As for the first group, he talked about the pure land of dharma nature achieved by the ordinary people with the great mind who believe and understand that the Buddha's mind is their mind and the Buddha's character is dharma nature. About the second to fifth groups, he repeatedly said the practice of pure land which is the practice of knowing the will of Buddha. Finally, as for the sixth group, he revealed that the pure land pursued by all the adepts of all ages was to deeply believe in tathāta and devote oneself to meditation and wisdom.

To sum up, he summarized these three characteristics: (1) practice of the pure land of dharma nature, (2) practice of knowing the will of Buddha, and (3) practice of deeply believing in tathāta and devoting oneself to meditation and wisdom. And he concluded that all of these eventually return to the third practice, the practice of deeply believing in tathāta and devoting oneself to meditation and wisdom.

Keywords: 지눌; 정토수행; 근기수행; 법성정토; 지불의수행; 정혜수행
Keywords: Jinul(知訥); Practice of Pure Land; Practice of Pure Land According to Each Faculty; Pure Land of Dharma Nature; Practice of Knowing the Will of Buddha; Devoting Oneself to Meditation and Wisdom

Ⅰ. 머리말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은 지눌(知訥, 1158~1121) 선사가 정혜결사를 시작하면서 배포했던 글이다. 이 책의 제목은 ‘정혜 닦는 수행을 본무로 삼는 결사에 참여하기를 권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지눌 선사 스스로 『권수문(勸修文)』이라고 줄여서 부른 것처럼,1) 이 책은 수행에 함께 참여할 것을 권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권수정혜결사문』의 7개의 문답 중에 제1과 제7 두 개의 문답은 정토를 구하는 수행에 대한 것이다. 정혜결사 이전에 이루어졌던 결사 대부분이 수행의 내용을 정토를 구하는 염불로 삼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2) 하지만 처음 정혜결사를 논의하고 주도했던 사람들이 선문의 수행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선문 수행자들은 왜 이렇게 집요하게 정토 수행을 질문했을까?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당시 선문에는 정토를 구하는 염불이 수행의 주요 관심사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눌 선사는 ‘말법 시대에는 정토 수행이 더 적절한 것 아닌가’하는 첫 번째 질문에 최상승법을 닦는 선문 수행자가 알아야할 바른 수행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답하였다. 하지만 일곱 번째에서는 다르게 답한다. 선사는 수행자에 따라 수행의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 가지 예로써 일반화할 수 없다는 말로 답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서 선사는 상근부터 최하근까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수행의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선사는 필요한 경우, 근기에 따라 행하는 정토 수행까지도 아울러 밝힌다.

그러므로 기존의 지눌 선사의 정토 수행과 관련한 연구는 『권수정혜결사문』의 제7문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3) 그 결과, 지눌 선사는 정토사상 또는 정토 염불에 대단히 부정적이었다4)는 것과 정토사상을 전적으로 배격하지는 않고 근기에 따라 수용하였다.5) 그리고 선사는 당시의 말법사관을 극복하였고, 칭명염불을 비판하였으며, 영명연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6) 유심정토설을 수용하였다7)는 등8)의 견해를 보였다. 또한 제7문답의 구성과 내용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서 지눌 선사가 설명한 근기에 따른 수행의 특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9)

제7문답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선문 수행자가 행하는 정토 수행의 특징을 밝힌 내용이다. 즉, 선문 수행자가 닦는 정토는 먼저 부처님의 뜻을 알고, 이를 의지해서 닦는 수행[知佛意而修]이기 때문에 단지 칭명(稱名)과 억상(憶相)만으로 정토를 구하는 일반의 염불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그 차이를 강조한 부분이다. 지눌 선사의 이와 같은 견해는 제7문답의 처음에 서술된 법성정토(法性淨土) 설명과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정혜(定慧)로써 정토 수행을 닦는 것과 그 취지가 다르지 않다. 선사의 이와 같은 일련의 견해는 선문에서 행하는 정토수행의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먼저 제7문답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구성에 따라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선사는 제7문답 전체에 걸쳐서 근기에 따른 수행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지눌 선사가 제7문답에서 강조했던 법성정토(法性淨土),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知佛意而修], 정혜로 돌아가는[歸結定慧] 정토수행 등을 밝혀보고자 한다. 선사는 근기에 따른 수행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각각의 근기에서 행하는 정토 수행과 관련해서는 이들 세 가지를 수행의 근본으로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Ⅱ. 『권수정혜결사문』 제7문답의 구성과 내용

1. 제7문답의 구성

『권수정혜결사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보제사 담선법회에서 결사의 논의가 시작된 연유를 밝힌 머리글과 7개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본문, 그리고 맺는 글 등이다. 맺는 글에는 결사의 서원과 바램, 보제사 담선법회에서의 맹약과 거조사에서 시작하여 수선사로 옮겨서 계속하게 된 결사의 과정, 그리고 이 책을 거조사에서 간행했던 그대로 수선사에서도 간행하여 유포하는 사정 등이 정리되었다.

『권수정혜결사문』에서 정토 수행에 대한 내용은 제1문답과 제7문답에서 볼 수 있다. 때문에 두 문답은 지눌 선사, 또는 지눌 선사 당시 선문 수행자들의 정토 수행에 대한 견해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그런데 제1문답의 질문은 ‘당시를 말법시대로 단정하고 이러한 시기에 정혜를 본무로 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부지런히 미타를 염하여 정토업을 닦는 것이 낫지 않은가?’라고 하여 말법사관에 의거한 정토 수행을 권하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은 선문의 수행자가 말법시대로 인식하는 문제를 강하게 비판하고, 대승 요의(了義)의 가르침을 닦는 선문 최상승의 수행자가 행하는 이상적인 수행을 말한다.10) 지눌 선사는 이 답에서 정토 수행은 거의 말하지 않고, 선문 수행자가 반드시 알고 닦아야 하는 지혜로운 사람의 바른 수행을 강조한다. 즉, ‘일대사를 마친 수행자 경지[了事人分上]’이다. 선사는 이를 ‘점차(漸次)없는 가운데 점차가 있고 공용(功用)없는 가운데 공용이 있는 수행’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눌 선사의 정토에 대한 견해를 파악하려는 대부분의 연구는 제1문답이 아닌 제7문답에 의거해서 이루어졌다.

제7문답은 짧은 질문과 긴 답으로 구성되었다. 질문은 당시 선문의 일반적인 수행자가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수행상의 문제와 이에 따른 불안의 문제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즉, ‘당시의 수행자들이 정혜 닦는 수행을 오로지 한다고 해도 도력이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정토를 구하지도 않고 이 예토의 땅에 남겨져서 고난을 만나게 된다면, 지금까지 닦았던 수행력까지도 물러나거나 잃어버리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이다.11)

지눌 선사는 “이 또한 당사자 각자에 달린 것이지 한 가지 예로 취할 수 없다.”12)라는 말로 답을 시작한다. 모든 수행은 수행자 각자의 근기에 달린 것이지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선사는 이어서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나타나는 수행의 양상을 구별해서 설명한다. 선사는 상근, 최하근 등의 용어로써 구별하기도 하고, ‘혹 어떤 수행자는[或有行者]’으로 시작하는 문장13)으로 근기에 따라 불교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14)

지눌 선사는 먼저 최상승의 가르침을 닦는 대심중생(大心衆生)의 수행을 설명하고,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을 상근(上根)이라고 하였다.15) 선사는 다음으로 자력과 타력으로 내외상자(內外相資)의 수행을 닦는 두 종류의 사람16)과 불법 가운데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장애에 막힘이 많은 두 종류의 사람이 행하는 바17)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를 줄 아는 것만으로도 희유하다고 생각하는 최하근인(最下根人)을 이들의 수행과 구별한다.18)

그런데 지눌 선사는 최하근을 설명한 후 다시 두 종류의 수행자를 든다. 하나는 심법(心法)을 들으면 어디다 마음을 두어야 할지 알지 못하지만 불교를 행하는 순간 바로 범행(梵行)을 이루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타고난 기운이 매우 강하고 세속적 생각이 깊어서 불법을 들으면 어디다 뜻을 두어야 할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사람은 부처님과 범자를 관(觀)하고 경을 외우며 염불하는 등의 수행을 하면 미혹의 장애를 당하지 않고 범행을 이루는 사람이다.19) 이 사람은 체계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서툰 것 같지만 몸으로 행하는 순간 바로 그 이치까지 터득하는 특별한 근기의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눌 선사도 이 사람을 ‘처음에는 사(事)를 쫒아 행하지만 감응의 길이 통하여 마침내는 유심삼매(唯心三昧)에 들기 때문에 이 또한 부처님의 뜻을 잘아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조종문하(祖宗門下)에서 이심전심의 격외선을 닦는 수행자이다.20) 그래서 지눌 선사는 이 수행자를 ‘근기의 한계에 있지 않다[不在此限]’라고 한 것이다. 이들 두 종류의 수행자는 일반적인 근기의 영역에서 설명하기 힘든 특별한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심법의 가르침을 알지는 못하지만 행하는 순간 바로 범행을 이루는[心法不知 梵行成建] 사람과 조사선의 이심전심 도리를 닦는 격외(格外)의 선문 수행자 등 두 경우는 근기에 따른 수행을 설명한 것과는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21)

지눌 선사는 근기에 따라 수행의 내용이 다른 특징을 설명하는 가운데 정토를 닦는 수행의 차이도 아울러 밝힌다. 즉, 선문 달자(達者)의 정토 수행이 범부와 이승이 행하는 정토 수행과 어떻게 다른지를 밝힌 경우이다. 또한 선사는 일반과는 다른 특별한 근기를 구분해서 설명한다. 이들은 불교를 배운 경험이 없지만, 불교를 접하는 순간 미혹의 장애 없이 범행을 이루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선사는 이들 또한 부처님의 뜻을 잘 아는 수행자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선사는 조사의 종지에 따라 이심전심을 닦는 선문의 격외 수행자도 말하고, 이들 격외 수행자는 이러한 근기론의 한계에 있지 않다고 구별한다. 앞에서 설명했던 근기에 따른 수행자와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22)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제7문답은 수행의 내용을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누었다고 할 수 있다. 1) 대심중생의 상근, 2) 내외상자에 설명된 두 종류의 사람, 3) 불법 가운데 장애에 막힘이 있는 두 종류의 사람,23) 4) 최하근인, 5) 심법을 알지는 못하지만 범행을 이루는[心法不知 梵行成建] 사람,24) 6) 조종문하의 비밀한 뜻으로 가리켜 주는[祖宗門下 密意指授] 사람 등이다. 이를 내용에 따라 구별하면 다음과 같다.

  • 1) 大心衆生(上根機)(H4, p.704b8-c5)

  • 2) 自力他力 內外相資者(H4, pp.704c5-705b9)

    • ①悲願重者(H4, pp.704c18-705a1)

    • ②淨穢苦樂 欣厭心重者(H4, p.705a1-7)

  • 3) 佛法中 不善用心 多有滯障者(H4, pp.705c14-706a16)

    • ① 堅執名相 情執未忘者(H4, pp.705c14-706a11)

    • ② 稟性浮僞 知見未圓者(H4, p.706a11-14)

  • 4) 最下根人(H4, p.706a16-18)

  • 5) 心法不知 梵行成建者(H4, p.706a18-24)

  • 6) 祖宗門下 密意指授者(H4, p.706c18-20)

2. 제7문답의 내용

위에서는 『권수정혜결사문』 제7문답에서 지눌 선사의 답을 내용에 따라 구분해서 파악해 보았다. 지눌 선사는 수행자가 나타내는 특징적인 양상을 여섯 가지로 구별해서 설명하였다. 선사는 먼저 상근부터 최하근까지 네 가지로 구별해서 설명하고, 다음으로 일반적인 근기의 영역에서 설명하기 힘든 두 종류 사람의 수행 특징을 밝혔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지눌 선사가 근기에 따라 구별하여 설명한 수행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25)

1)의 대심중생26)은 선문의 최상승법문을 의지해서 닦는 수행자이며, 법성정토에 사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기의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며, 자기의 자성이 부처님의 법성임을 분명하게 신해(信解)하고, 이 신해를 의지해서 닦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들은 습기가 있어도 머무름 없는 지혜로 다스리고, 방편의 삼매가 있어도 성품의 청정함에 맡겨서 취하고 거두는 모양이 없으며, 마음에 거슬리거나 맞는 바깥 인연을 만나도 오직 마음임을 알아서 좋고 싫음과 성내고 기뻐함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이와 같이 법에 맞게 습기를 다스리기 때문에 이치에 맞는 지혜는 더욱 늘어나고, 인연에 따라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삼계 속에 있다고 해도 법성정토(法性淨土) 아닌 곳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27)

2)의 자력과 타력으로 안과 밖이 서로 돕는 사람[自力他力 內外相資者]은 자심(自心)의 청정하고 미묘한 덕으로 닦는 자기 수행의 힘과 삼보를 공양하고 대승을 독송하며, 도를 행하고 예배하며, 참회하고 발원하는 외연의 힘이 서로 돕는 수행자이다. 이들은 자심의 청정하고 미묘한 덕의 가르침을 들으면 믿고 즐기며 닦고 익힌다. 하지만 아상(我相)과 습기(習氣) 때문에 미혹의 장애를 만나면 망정(妄情)을 잊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들은 자력과 타력 수행을 함께 닦아야 한다. 자력 수행은 공관(空觀)을 깊이 닦는 것으로, 이를 통해서 정혜를 도와 밝고 고요한 자성으로 점차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자력만으로는 수행에 걸림이 있을 우려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힘을 비는 온갖 선행으로 이를 도와야 한다. 지눌 선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삼보 공양, 대승경전 독송, 행도와 예배, 참회와 발원 등의 선행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28)

지눌 선사는 자력과 타력으로 안과 밖이 서로 돕는 수행을 하는 사람 중에는 소원이 다른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①자비와 원력이 무거운 사람[悲願重者]과 ②청정하고 더러움과 고통스럽고 즐거움에 기뻐하고 싫어함이 무거운 사람[淨穢苦樂 欣厭心重者] 등이다. ①자비와 원력이 무거운 사람은 태어나는 곳마다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을 듣는 것을 소원한다. 그래서 따로 정토를 구하지 않아도 어려움을 만나거나 신심이 물러나고 잃을 근심이 없는 사람이다.29) ②기뻐하고 싫어함이 무거운 사람은 닦는 정혜와 선근 모두를 왕생을 구하는데 회향한다. 그래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을 들어서 속히 깨달아 물러나지 않고 다시 와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서원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해서30) 이 예토의 땅에 남겨져서 여러 고난을 만나면 신심이 물러나고 잃을 근심이 있다.31)

그리고 지눌 선사는 자력과 타력으로 안과 밖이 서로 돕는 수행을 하는 두 종류의 사람 가운데 정토에 태어나기를 구하는 사람[求生淨土者]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가운데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사람은 밝고 고요한 자성 가운데 정혜의 공이 있어서 멀리 저 부처님이 안으로 깨달은 경계에 계합한다. 그러므로 단지 명호만 부르고 거룩한 얼굴만 생각하여 왕생하기를 희망하는 저들과 비교하면 우열을 알 수 있다.32)

자력과 타력으로 안과 밖이 서로 돕는 수행을 하는 사람은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믿고 즐기며 닦고 익히는 사람이다. 이미 신해하는 마음이 있고, 이를 의지해서 정혜를 닦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수행은 단지 칭명(稱名)하고 존상을 생각하는 수행만으로 왕생을 구하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33) 지눌 선사가 이와 같이 선문의 정토 수행과 단지 칭명과 억상(憶想)만으로 왕생을 희망하는 사람을 굳이 비교한 것은 선문의 정토 수행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선사는 『유마경』,34) 『여래부사의경계경』35) 등의 대승경전과 『법보단경』,36) 『천태지자대사별전』,37) 『만선동귀집』38) 등의 법어를 증명으로 삼아서 선문에서 정토를 구하는 수행은 바로 자기의 마음을 닦는 수행이라는 주장을 반복한다.39) 지눌 선사는 선문에서 정토를 구하는 이와 같은 수행을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知佛意而修]’이라고 하였다.40) 여기서 지눌 선사가 강조하는 부처님 뜻을 알고 닦는 정토 수행은 결국 상근 대심범부가 이룬다고 했던 법성정토를 닦는 것이다.

3)은 불법 가운데 마음을 잘 쓰지 못해서 장애에 막힘이 많은 사람[佛法中 不善用心 多有滯障者]이다. 지눌 선사는 여기에 두 사람의 특징을 소개하고, 이들은 슬프고 애통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①이름과 모양을 굳게 집착해서 망정의 집착을 잊지 못하는 사람[堅執名相 情執未忘者]과 ②받은 성품이 들뜨고 거짓되어 지견(知見)이 원만하지 못한 사람[稟性浮僞 知見未圓者]이다. 이들도 이미 불교에 입문해서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①의 경우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서 대승법문을 듣지도 않고 대승의 가르침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염불해서 왕생하면 오온의 몸 그대로 무량한 즐거움을 받는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망정의 집착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선을 닦는 사람을 보면 “염불해서 왕생을 구하지 않으니 언제 삼계를 벗어나겠는가.”하고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람은 대승의 가르침이나 선문의 근본 뜻을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지눌 선사는 이 사람이 하는 수행을 “집착하고 아끼며 탐내고 애착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경계를 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네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으려는 것과 같다”라고 평가하였다.41) ②의 경우는 타고난 품성이 문제가 있어서 불법을 배우고 따르지만 작은 것에 만족하고 수행을 더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지눌 선사는 이 사람을 “지견이 원만하지 못하면서 온전히 근본 성품만 믿고 만행을 닦지도 않고 정토를 구하지도 않는다. 왕생을 구하는 사람을 보면 가벼이 업신여기는 마음을 낸다.”라고 평가하였다. 지눌 선사는 이들 두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서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위의 2)자력과 타력으로 안과 밖이 서로 돕는 수행자로 분류했던 두 사람의 경우에는 그들이 닦는 정토 수행의 특징까지도 설명해서 단순히 칭명하고 관상하는 것만으로 왕생을 희망하는 사람과의 우열을 알게 한 것과는 많이 다르다. 2)의 수행자들과 비교하면 3)의 수행자들은 근기가 낮다고 할 수 있겠다.

4)의 최하근인은 눈 멀어서 지혜의 눈이 없는 사람이다. 이들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를 줄 아는 것만으로 희유한 일이라고 찬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눌 선사는 이들이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수행한다고 해서 그것을 허물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42)

『권수정혜결사문』 제7문답은 짧은 질문과 긴 답으로 이루어졌다. 지눌 선사는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나타나는 수행의 양상을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선사는 1)상근과 4)최하근 둘은 근기의 명칭으로 구별해서 설명하였고, 나머지는 네 종류의 수행자를 둘씩 묶어서 구분하였다. 상근과 최하근 사이 네 종류의 수행자는 2)자력과 타력으로 안과 밖이 서로 돕는 수행자 두 사람(①, ②)과 3)불법 가운데 마음을 잘 쓰지 못해서 장애에 막힘이 많은 두 사람(①, ②)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또한 선사는 근기의 영역으로 포함시킬 수 없는 5)와 6) 두 종류의 수행자를 마지막에 따로 밝혔다.

지눌 선사는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중에 정토 수행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선사는 각각의 근기에서 닦는 정토 수행을 말하기도 하고, 대승경전과 선문 조사의 법어를 이끌어서 선문 수행자의 정토 수행을 밝혔다. 1)에서는 대심범부가 이루는 법성정토를 말하였고, 2), 3), 4), 5)에서는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으로서의 정토 수행을 반복적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제5)의 말미에서는 고금의 달자(達者)가 구했던 정토는 결국 진여를 깊이 믿고 정혜를 오로지 하는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43) 이들 견해를 정리하면 지눌 선사가 강조했던 선문의 정토 수행은 법성정토,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정토, 결국 정혜 수행으로 돌아가는 정토 수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Ⅲ. 정토수행론

1. 법성정토를 닦는 수행

지눌 선사는 『권수정혜결사문』 제1문답에서 ‘말법시대에는 정혜를 수행의 본무로 삼기보다는 미타를 부지런히 염하여 정토업을 닦는 편이 더 나은 것 아닌가?’44)하는 질문에 지혜 있는 사람의 바른 수행으로 답한다. 선사는 먼저 근본을 궁구하지 않고 상에 집착하여 밖으로 구하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까 걱정된다고 한다.45) 그리고 지혜 있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채찍질해서 단지 부처님과 조사의 성실한 말씀을 밝은 거울로 삼아 자기의 마음을 조견(照見)하고, 삿됨과 바름을 잘 가려서 자기의 견해를 집착하지 않으면 깨달음의 지혜가 항상 밝게 된다. 지혜 있는 사람은 범행을 잘 닦고 큰 서원을 세워서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 이는 자기 한 몸을 위해서 홀로 해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46) 이와 같은 지눌 선사의 답은 제2문답에서 ‘먼저 자기의 마음을 반조하여 신해(信解)가 참되고 바르며 단견과 상견에 떨어지지 않고 선정과 지혜 두 수행문에 의지하여 모든 마음의 때를 다스림이 그 마땅함이다’47)라는 말로 정리된다. 지혜로운 수행은 먼저 자기의 마음을 신해하고, 이 신해를 의지해서 닦는 것이라는 뜻이다.

지눌 선사는 제7문답의 정토 수행에서도 ‘먼저 자기 마음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해서 닦는 수행’을 똑같이 말한다. 대심중생이 닦는 법성정토가 바로 그것이다. 지눌 선사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만약 대심중생(大心衆生)이라면, 이 최상승(最上乘)의 법문을 의지해서 사대는 거품과 허깨비 같고 육진은 허공 꽃 같으며, 자심(自心)이 불심(佛心)이고 자성(自性)이 법성(法性)이며, 본래부터 번뇌의 본성을 여의어서 성성(惺惺)함은 바로 그렇게 성성하고 역력(歷歷)함은 바로 그렇게 역력함을 결정적으로 신해(信解)한다.

이러한 신해를 의지해서 닦는 사람은 비록 시작 없는 습기가 있어도 의지하고 머무름 없는 지혜로 다스리니, 도리어 이것이 본래의 지혜라서 억누름도 아니고 끊음도 아니다. 비록 방편과 삼매로 혼침과 산란을 여의는 공이 있지만, 반연하는 생각과 분별이 참 성품 가운데 반연해서 일어남임을 알기 때문에 성품의 깨끗함에 맡겨도 취하거나 거두어들이는 모양이 없다. 비록 바깥 반연의 어기고 따르는 경계를 지나더라도 오직 마음임을 알아서 자신과 타인, 주체와 대상이 없기 때문에 사랑과 미움, 성냄과 기쁨이 자유로이 생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법에 맡겨 습기를 고르고 다스리니 이치에 맞는 지혜가 더욱 밝아져서 연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고 보살도를 행하게 되니, 비록 삼계 속에 있어도 법성정토(法性淨土) 아님이 없고, 비록 세월을 지내도 본체는 때를 옮기지 않는다.48)

지눌 선사는 선문의 최상승법을 의지해서 닦는 대심중생의 법성정토 수행을 말하였다. 이 사람은 불심인 자심·법성인 자성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해서 습기를 다스리고 방편삼매를 닦는다. 이 사람은 의지하고 머무름 없는 지혜로 습기를 다스리기 때문에 본래의 지혜를 쓰는 것이며, 방편삼매로 혼침과 산란을 여의는 공이 있어도 모두가 참 성품 가운데 반연해서 일어난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 수행에는 취하고 거두어들이는 모양이 없다. 결국 이 모두는 법대로 닦는 수행이며 보살도를 행하는 수행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법성정토 아닌 곳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불심인 자심·법성인 자성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해서 보살도를 행하는 모든 곳은 법성정토라는 말이다.

인용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법성정토는 한마디로 보살도가 행해지는 곳이다. 보살도는 불심인 자심·법성인 자성을 신해하고, 이 신해를 의지해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스스로는 이치에 맞는 지혜가 더욱 밝아지고, 밖으로는 인연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이 이루어지는 그 자체이다. 그래서 보살도가 행해지는 곳은 어느 곳이라도 법성정토 아닌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두는 법성정토를 닦는 지눌 선사의 법성정토론이라고 할 수 있다. 불심인 자심·법성인 자성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해서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 법성정토를 닦는 수행이다. 그리고 보살도가 행해지는 곳이 법성정토이다. 법성정토를 닦는 수행은 자기의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 자기가 깨달은 대로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눌 선사는 법성정토론의 증명을 이통현의 『화엄론』으로 삼았다. 지눌 선사가 인용한 문장은 “대심범부는 믿음을 내어 깨달음에 들 수 있기 때문에 여래의 집[如來家]에 태어난다. 이미 부처님의 집에 난 모든 보살을 말한 것이 아니다.”49)라는 짧은 글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눌 선사는 대심중생의 법성정토 수행과 한번 뛰어 계위에 올라 신통력을 구족한 옛 과량인(過量人)과 비교한다. 물론 대심중생이 상근이라고 해도 과량인에 미치지는 못한다. 하지만 대심중생은 숙세에 선근을 심어서 타고난 성품이 매우 영리하고, 이에 더하여 자기 마음을 깊이 믿어서 자성이 다시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세간의 어려움을 만나도 신심이 물러나거나 잃을[退失] 근심은 없다고 강조한다.50) 대심중생은 자기 마음을 신해하고, 이를 의지해서 닦는 정토 수행이어서 신심이 퇴실할 근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지눌 선사의 법성정토는 정토경전에서 가르치는 정토와 다르다. 아미타불이 설법하고 항상 즐거움만 있다는 『아미타경』의 서방정토, 법장비구가 서원했던 『무량수경』 정토, 그리고 16관법으로 닦아서 성취하는 『관무량수경』의 정토 등과 다르다. 지눌 선사의 법성정토는 최상승법을 닦는 수행자가 자기 마음인 자성을 신해하고, 이를 의지해서 보살도를 행하는 곳이다.

지눌 선사의 법성정토(法性淨土)는 자심정토(自心淨土)이다.51) 법성정토를 구하는 모든 수행이 자기 마음을 닦아 보살도를 행하는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눌 선사는 ‘자력과 타력으로 안과 밖이 서로 돕는 두 종류 수행자는 정토 왕생을 구하는 수행을 해도 단지 칭명과 억상으로 왕생을 희망하는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경전과 어록에서 설하는 정토 왕생을 구하는 뜻도 자기의 마음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2) 더 나아가 지눌 선사는 “비록 염불해서 왕생을 구하지 않아도 단지 오직 마음이라는 것만 깨닫고, 그에 따라서 관찰하면 자연히 저 국토에 나는 것이 반드시 정해져서 의심할 것 없다”53)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정토왕생은 염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깨달아서 깨달은 마음을 닦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뜻이다.

자심정토, 자성정토를 닦는 수행은 지눌 선사가 증명으로 삼았던 『육조단경』에 자세하다. 단경의 정토 왕생에 대한 설법은 ‘아미타불 염불을 해서 서방에 왕생할 수 있습니까?’하는 위사군의 질문을 계기로 시작된다. 혜능 조사의 설법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세존이 사위성에 계시면서 서방정토를 설하여 교화하였는데, 경문에서도 분명하게 ‘여기에서 멀지 않다’라고 하였다. … 사람에게는 두 종류가 있지만 법에는 둘이 없다. 미혹하고 깨달음이 달라서 견해가 더디고 빠름이 있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해서 저 세계에 나기를 구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이 청정함을 따라서 불토가 청정하다”라고 하였다. …

범부 어리석은 사람은 자성을 깨닫지 못하고 몸 가운데 정토를 알지 못해서 동쪽을 원하고 서쪽을 원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있는 곳이 한결같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머무는 곳을 따라서 항상 안락하다”라고 하였다. 사군이여 마음에 단지 선하지 않음이 없으면 서방이 여기서 멀지 않지만, 만약 선하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염불해도 왕생해서 도달하기 어렵다. …

사군이여 단지 십선만 행하면 어찌 다시 왕생을 원할 것이며, 십악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어떤 부처님이 와서 맞이하고 청하겠는가? 만약 무생돈법(無生頓法)을 깨달으면 서방을 보는 것이 찰나에 있고, 깨닫지 못하면 염불하여 왕생을 구해도 길이 멀다.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54)

경에서는 먼저 미혹한 사람과 깨달은 사람이 왕생을 구하는 방법이 어떻게 다른지 가르친다. 즉,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자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성을 깨달았는지, 마음이 선한지, 십선을 닦는지, 무생돈법을 깨달았는지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고 가르친다. 혜능 조사는 “미혹한 사람은 염불해서 저 세계에 나기를 구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자성을 깨달아서 자기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정토왕생의 길이라는 설법이다.

『육조단경』의 이와 같은 설법은 지눌 선사의 법성정토, 자심정토가 자기의 마음을 신해하고 그 신해를 의지해서 닦는 수행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취지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눌 선사의 법성정토는 신해를 의지해서 법에 맡겨 인연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살도가 행해지는 정토이다. 궁극에서는 다르지 않겠지만 설해진 내용만으로 본다면 『육조단경』의 자성정토와 지눌 선사의 법성정토는 보살도를 명확히 하는 부분에서 차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

『권수정혜결사문』 제7문답에서 볼 수 있는 정토 수행의 다른 특징은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知佛意而修]이다. 지눌 선사는 제7문답의 상근 법성정토 설명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을 강조하였다. 지눌 선사가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을 강조하게 된 것은 ‘의학사문(義學沙門)’이라고 이름 붙인 당시 수행자들의 잘못된 구도행을 지적하고 바른 수행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지눌 선사는 이들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한다.

요즘 대부분의 의리를 배우는 사문[義學沙門]들은 이름을 버리고 도를 구하지만, 모두 바깥 모양에 집착해서 얼굴을 서방으로 향하고 큰 소리로 부처를 부르는 것을 도행으로 삼고, 전부터 배우고 익혀왔던 마음을 밝히는 부처님과 조사의 비밀한 가르침을 명리(名利)를 배우는 것이라 여기며, 또한 [자기들] 분상의 경계가 아니라고 여겨 끝내 마음을 두지 않고 일시에 버려버린다. 이미 마음 닦는 비결을 버리고 돌이켜 비추는 공능도 알지 못한 채, 한낱 총명한 지혜의 마음만 가지고 헛되이 평생의 힘을 써서 마음을 등지고 모양을 취하면서 성인의 가르침을 의지한다고 말한다. 모든 지혜 있는 사람들이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55)

지눌 선사는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고산지원(孤山智圓, 976∼1022) 법사의 「아미타경소서(阿彌陀經疏序)」를 길게 인용한다. 이 서문에는 ‘심성(心性)은 밝고 고요한 것[明靜]이며, 부처님은 밝고 고요한 하나를 깨달은 분이다, 부처님은 온갖 방편으로 중생들이 근본을 회복하게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밝고 고요한 본체를 회복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다’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지눌 선사가 이 서문을 길게 인용한 것은, 지원 법사는 부처님의 좋은 방편을 깊이 잘 아는 분이라고 생각해서이며, 당시에 정토를 구하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뜻을 알고, 정토를 닦아서 잘못 공력을 쓰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56)

지눌 선사가 개선하기를 바랐던 의학사문의 문제는 부처님의 뜻을 알고 정토를 닦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눌 선사는 부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굳이 설명한다.

부처님의 뜻을 안다[知佛意]는 것은, 비록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하여 부지런히 왕생을 구하지만, 저 부처님 경계의 장엄하는 등의 일이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오직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 진여를 여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생각하고 생각하는 중에 혼침과 산란을 여의고 정과 혜를 고르게 하여 밝고 고요한 성품에 어긋나지 않으면,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아서 감응의 길이 통하는 것이 마치 물이 맑으면 달이 나타나고 거울이 깨끗하면 그림자가 분명해지는 것과 같다.57)

부처님의 뜻을 안다는 의미는 부처님의 모든 일이 오직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 진여를 여의지 않음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토왕생을 구하는 것도 정토를 장엄하는 등의 부처님 경계 전부가 진여인 자기의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난 것임을 알고 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용문에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중에’ 이하의 내용은 부처님의 뜻을 알고 그 이후에 찰나 찰나마다 순간순간 언제나 닦아가는 수행을 설명한 것이다. 모두가 진여인 마음을 의지해서 나온 것임을 알고, 혼침과 산란을 여의고 정혜를 고르게 하는 수행을 해서 밝고 고요한 자성에 어긋나지 않으면, 털끝만큼도 차이 없는 감응의 길이 통한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뜻을 알고 이를 의지해서 닦는 수행이다.

지눌 선사가 말하는 부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부처님이 자기 마음이며, 자기 마음이 부처님임을 안다는 뜻이다. 선사가 비석(飛錫) 화상의 『염불삼매보왕론』을 인용한 『만선동귀집』을 길게 인용하고,58) “『문수소설반야경』에서 염불해서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얻는다고 밝힌 내용이 이와 같은 뜻이다”59)라고 한 것이 그 의미이다. 『염불삼매보왕론』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비석화상의 『고성염불삼매보왕론』에서 말하였다. “큰 바다에서 목욕하는 사람은 이미 백 가지 냇물을 사용한 것이며,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삼매를 이룬다. 또한 마치 밝은 구슬을 흐린 물에 내려놓으면 흐린 물이 맑아지지 않을 수 없듯이, 부처님 생각하는 것을 어지러운 마음에 던지면 어지러운 마음이 부처님이 아닐 수 없다. 이미 계합한 뒤에는 마음과 부처가 함께 없다. 함께 없음은 정(定)이며 함께 비춤은 혜(慧)이다. 정혜(定慧)가 이미 고르다면 또한 어떤 마음이 부처가 아니며, 어떤 부처가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부처가 이미 그러하다면 만 가지 경계와 만 가지 연이 삼매 아님이 없다.”60)

염불로써 삼매를 얻는 수행을 말하였다. 글에서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 염불하면, 어지러운 마음이 점차 염불하는 마음으로 계합하여 염불하는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이 둘 다 없어지고, 두 마음이 하나가 되어 생각하는 부처님과 염불하는 마음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담았다. 어지러운 마음과 염불하는 마음이 하나가 되는 계합(契合)이 되면, 어지러운 마음도 염불하는 마음도 다 없어지는 한마음을 이룬다. 이를 쌍망(雙亡)이라고 하였다. 한마음을 이루어 쌍망이 되면 한마음은 쌍망이 된 그 자리를 돌이켜서 비추는 수행을 계속한다. 이를 쌍조(雙照)라고 하였다. 쌍망은 정(定), 쌍조는 혜(慧)라고 하였다. 쌍망과 쌍조가 둘이 아닌 것을 습정균혜(習定均慧)·정혜등지(定慧等持)·정혜쌍운(定慧雙運)·정혜쌍수(定慧雙修) 등으로 부른다. 마음이 부처님이고 부처님이 마음이어서, 마음과 부처님이 둘이 아님을 알고 이를 의지해서 닦는 수행이 바로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이다. 지눌 선사가 인용문의 비석화상 설법이 『문수소설반야경』의 일행삼매설과 같은 뜻이라고 한 이유가 그것이다.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은 상근 대심범부부터 최하근까지 근기에 따라 설명한 수행에도 적용할 수 있다. 상근 대심범부는 불심인 자심·법성인 자성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해서 보살도를 닦는 사람이다. 대심범부는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 닦는 온전한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자력과 타력으로 안과 밖이 서로 돕는 수행자[自力他力 內外相資者]는 부처님이 설하는 자기 마음의 청정하고 미묘한 덕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이다. 이들은 들어서 배운 것에서 더 나아가 믿고 즐기며 닦고 익히는[信樂修習]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정토를 구하는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도 단지 염불하고 억상하는 것으로 왕생을 희망하는 사람과도 다르다. 그러므로 자력과 타력으로 안과 밖이 서로 돕는데 속하는 두 종류의 수행자도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법 가운데 마음을 잘 쓰지 못해서 장애에 막힘이 많은 사람[佛法中 不善用心 多有滯障者]은 부처님의 뜻을 잘 알고 닦는 사람이라고 하기는 쉽지 않다. 이들은 불법을 배우기는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 중 한 사람은 이름과 모양을 굳게 집착하고 망정의 집착을 잊지 못해서 집착하고 아끼며 탐내고 애착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경계를 구하는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타고난 품성이 들뜨고 거짓되어 불법을 배우면 믿고 즐기며 닦고 익히기는 하지만 작은 것을 얻으면 만족해서 더 이상 닦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불법을 배운 사람들이고 나름대로 믿고 즐기며 닦고 익히는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부처님의 뜻을 잘 알고 닦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고 하겠다. 최하근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칭명 염불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희유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눌 선사는 이들에게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기대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자에는 특별한 두 경우가 더 있다. 이심전심으로 조사선을 닦는 격외 수행자는 당연히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 사람은 타고난 기운이 강대하지만 망정의 인연이 가장 깊어서 불법을 들으면 뜻을 둘 곳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실제 수행에서는 어지럽지 않고 오로지 정미로움을 이루어 망상을 고르게 할 수 있고, 미혹의 장애를 입지 않아 범행을 이룬다. 실체의 수행에서 시작하여 마침내는 유심삼매에 들어가기 때문에 지눌 선사는 이 사람도 부처님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지눌 선사는 정토 수행과 관련하여 특히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을 강조하였다. 부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부처님의 모든 일이 진여인 자기의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난 것임을 아는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 닦는 정토 수행은 불심이며, 불성인 자심·법성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해서 보살도를 닦는 법성정토 수행과 근원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지눌 선사가 자심을 신해하고 닦는 수행을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으로 설했던 것은 근기를 배려한 설명으로 생각할 수 있다. 상근으로 부른 대심중생에게는 자기 마음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해서 보살도를 행하는 수행을 설하고, 정토왕생을 구하는 수행자에게는 부처님의 뜻을 알고 이를 의지해서 닦는 수행을 설했다는 이해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지눌 선사의 정토 수행은 신해이수론(信解而修論), 지불의이수론(知佛意而修論)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정혜로 돌아가는 수행

지눌 선사는 『권수정혜결사문』 첫머리에서 ‘달사진인(達士眞人)’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 말은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서 정혜결사를 결의하고 함께 맺은 서약을 옮긴 글 마지막에 들어 있다. “멀리 달사와 진인의 고결한 행을 따른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61)라는 글이다. 진인(眞人)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달사(達士)는 달인(達人)과 같은 말로 널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라는 뜻이다.62)

지눌 선사는 정토를 구하는 수행을 말하면서 고금(古今)의 달자(達者)가 닦는 수행을 든다. 달자는 달사와 같은 뜻이다. 선사는 “고금의 달자는 비록 정토를 구하지만 깊이 진여를 믿고 정혜(定慧)를 오로지 한다.”라고 하였다. 지눌 선사가 이 말을 한 것은 당시의 많은 수행자가 염불해서 왕생하면 그 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말한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요즘의 수행자들은 대부분 “다만 염불해서 왕생을 얻은 연후에는 뭐가 있는가”라고 말하는데, 구품(九品)에 오르고 내림이 모두 자기 마음을 신해하는 것이 크고 작고 밝고 어두움을 말미암아 나타남을 알지 못해서이다. 경전 가운데서는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알고 권하여 수행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상품이 된다’라고 하였다. 어찌 총명하고 영리한 마음으로써 달게 아둔한 근기가 되어 제일의를 알지 못하고 단지 명호만 부르겠는가.

『만선동귀집』에서 말하였다. “구품에 왕생하는 것은 위·아래가 모두 통달한다. 혹은 변화 국토에 노닐면서 부처님의 응신을 보고, 혹은 보토에 태어나서 부처님의 참모습을 보며, 혹은 하룻저녁에 문득 상품(上品)의 경지에 오르고, 혹은 겁수를 지내고 바야흐로 소승을 증득하며, 혹은 영리한 근기와 아둔한 근기, 혹은 안정된 마음과 산란한 마음이다.”

이로써 알아라. 예나 지금이나 통달한 사람들은 비록 정토를 구하지만, 깊이 진여를 믿고 정혜를 오로지 하기 때문이다.63)

지눌 선사는 먼저 왕생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이해를 지적한다. 원인은 정토왕생이 자기 마음을 신해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에서도 부처님의 근본 뜻인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알고 수행하는 사람이 상품이라고 하였는데, 총명한 사람이 부처님의 근본 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칭명만 일삼고 있느냐고 질타한다. 그래서 누구나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친 『만선동귀집』을 증명으로 삼고, 고금의 가장 뛰어난 수행자들이 닦았던 수행의 근본을 다시 말한다. 그들은 정토를 구하는 수행도 ‘깊이 진여를 믿고 정혜를 오로지 하는 것’ 그것뿐이었다는 것이다.

지눌 선사는 다시 고금의 달자와 범부·이승이 정토의 장엄을 이해하는 차이를 밝혀서 바른 수행을 보인다.

그러므로 알아라. 저 색상으로 장엄하는 등의 일은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영역을 여의고, 오직 마음을 의지해 나타나서 진여를 여의지 않는다(라고 안다). 범부와 이승은 식(識)이 바뀌어서 나타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아 색의 영역을 취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비록 “함께 정토에 난다”라고 말하지만 어리석은 이와 지혜로운 이의 행하는 모양이 하늘과 땅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 지금 대승의 유심법문을 배워 정혜를 오로지 하는 것이 범부와 소승이 마음 밖에서 색을 취하는 영역의 견해에 떨어짐을 면하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64)

달인은 정토의 장엄이 자기의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어서 진여를 여의지 않는다고 알지만, 범부와 이승은 장엄을 갖가지 형태로 장식된 색의 모양으로 본다. 그 이유는 범부와 이승은 모든 현상이 식(識)이 바뀌어서 나타난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달인과 범부·이승이 똑같이 ‘함께 정토에 난다’라고 말하지만,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현격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범부와 소승이 마음 밖에 색을 취하는 영역의 견해에 떨어지는 것을 면하는 정도가 대승의 유심법문을 배워서 정혜를 오로지하는 달인의 수행과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지눌 선사의 결론은 진인 달사, 즉 달인의 정토 수행도 결국에는 깊이 자기의 마음인 진여를 믿고 정혜를 오로지 하는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지눌 선사는 『권수정혜결사문』 전편에서 정혜 닦는 수행을 역설하였다. 마찬가지로 선사는 정토를 구하는 수행도 정혜를 오로지 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정토를 구하는 수행도 결국에는 정혜 수행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지눌 선사의 정혜로 돌아가는 수행론이다.

Ⅳ. 맺음말

이 글에서는 『권수정혜결사문』 제7문답에 나타난 지눌 선사의 정토수행론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 먼저 제7문답의 구성과 내용을 분석하고, 다음으로 제7문답에서 지눌 선사가 강조했던 수행의 근본을 파악하여 이를 지눌 선사의 정토 수행론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다.

지눌 선사는 불교 이해와 수행의 정도에 따라 당시의 수행자를 구별하고 각각의 특징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제7문답을 구성하였다. 각각의 내용은 특징적인 용어와 내용으로 나눌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제7문답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선사는 처음에 1) 대심중생의 특징을 설명하고 이들을 상근이라고 구분하였고, 마지막에는 4) 최하근이라는 용어로써 칭명만으로도 희유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중간에는 2) 자력과 타력으로 안과 밖이 서로 돕는 수행을 하는 사람 두 종류를 묶어서 설명하고, 또 3) 불법 가운데 마음을 잘 쓰지 못해서 장애에 막힘이 많은 사람 둘을 구분해서 설명하였다. 또한 선사는 최하근 외에 다시 5) 심법의 가르침은 알지 못하지만 실제의 수행에서는 범행을 이루는 사람과 6) 조종문하에 이심전심으로 비밀한 뜻을 전하는 격외선 수행자를 밝혔다.

지눌 선사는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중에 정토 수행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선사는 각각의 근기에서 닦는 정토 수행을 말하기도 한편, 대승경전과 선문 조사의 법어를 이끌어서 선문 수행자의 정토 수행을 밝혔다. 1)에서는 대심범부가 이루는 법성정토를 말하였고, 2), 3), 4), 5)에서는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으로서의 정토 수행을 반복적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제5)의 말미에서는 고금의 달자(達者)가 구했던 정토는 결국 진여를 깊이 믿고 정혜를 오로지 하는 것임을 밝혔다.

제7문답에서 지눌 선사가 강조했던 선문의 정토 수행은 법성정토,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정토, 결국 정혜 수행으로 돌아가는 정토 수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법성정토 수행은 불심인 자심·법성인 자성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해서 본래의 지혜로 습기를 다스리고 방편삼매를 닦기 때문에 이치에 맞는 지혜가 더욱 밝아져서 인연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고 보살도를 행하는 수행이다. 지눌 선사는 부처님의 마음인 자기 마음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해서 본래의 지혜로 보살도가 행해진다면, 그곳은 법성정토 아닌 곳이 없다고 하였다. 지눌 선사가 강조한 법성정토는 『육조단경』의 자성정토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눌 선사의 법성정토는 본래의 지혜를 행하는 것에 더하여 인연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살도가 행해지는 곳이기 때문에 『육조단경』의 자성정토와는 차이가 있다고 이해하였다.

부처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은 정토를 장엄하는 등으로 나타나는 부처님의 모든 일이 오직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 진여를 여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정토왕생을 닦는 수행이다.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은 자기 마음을 신해하고, 이를 의지해서 보살도를 행하는 수행과 근원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눌 선사가 둘을 다르게 설명한 것은 근기를 배려한 설명으로 생각된다. 상근 대심중생에게는 신해를 의지한 수행을 설하고, 정토왕생을 구하는 수행자에게는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을 설한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지눌 선사는 제7문답의 마지막에 고금의 달자(達者)가 닦았던 수행으로 정혜 수행을 들었다. 모든 뛰어난 수행자들은 정토를 구해도 ‘깊이 진여를 믿고 정혜를 오로지하는 수행’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신해를 의지해서 닦는 수행이나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과 근원적으로 같다. 그런데 지눌 선사는 고금의 달자들이 오로지 닦았던 수행은 정혜 수행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지눌 선사는 결국 모든 수행은 정혜 수행으로 돌아간다고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지눌선사가 『권수정혜결사문』 제7문답에서 설한 정토수행은 불심인 자심·불성인 법성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해서 닦는 수행[信解而修]과 부처님의 뜻을 알고 닦는 수행[知佛意而修]과 진여를 믿고 정혜를 오로지 하는 수행이며, 이 모두는 결국 진여를 믿고 정혜를 오로지 하는 수행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Notes

지눌 선사는 『勸修定慧結社文』에서 『勸修文』이라는 표현을 3차례(H4, p.700c21, p.706c20, p.707c18) 사용하였다. 이 글에서도 두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함을 밝혀둔다.

김상영(2000)은 중국과 한국에서 이루어진 결사를 불교의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탐구하였다. 이 연구에서도 정혜결사이외에는 대부분의 결사에서 정토 염불을 수행의 내용으로 삼았음을 보였다. 또한, 고려 전기의 결사가 아미타 신앙을 표방하였다는 점은 김영미(2000)의 논문에 자세하게 설명된다.

『念佛要文』, 또는 『念佛因由經』의 지눌 선사 찬술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때문에 『염불요문』과 이 자료를 포함하여 진행한 지눌 선사의 정토 관련 연구는 참고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염불요문」과 관련한 연구 동향은 권동우(2013)의 논문에 자세하다. 이종익(1980)은 연구의 단초를 열었고, 권기종(1986)은 따로 항목을 나누어서 「염불요문」을 분석하였고, 고익진(1986)과 송석구(1992)의 연구는 「염불요문」에 의거하였다. 한편 고익진은, 「염불요문」 또는 「염불인유경」은 지눌에 假託된 것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권동우 이후 신규탁(2014)은 「염불요문」을 지눌의 진찬으로 수용하면서, 지눌은 유심정토설과 함께 타방정토설을 수용하였다는 견해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고익진(1984), 권기종(1989, 1997) 두 견해가 있다.

김호성(1990)의 견해이다.

영명연수 저술의 영향에 대해서는 종진(1992)의 연구가 자세하다. 이후 한보광(1998; 2000)과 서왕모(정도, 2018)도 이를 수용하고 보완하였다.

唯心淨土說이라는 표현은 이종익(1980)부터 한보광(1998, 2000), 강건기(2007), 서왕모(2018)에 이르기까지 지눌 정토설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지눌 선사는 法性淨土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뿐, 唯心淨土라는 표현은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두 용어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정토가 국토를 나타내는 표현이라면, 自心이 佛心이고 自性이 法性이라(自心是佛心 自性是法性. H4, p.704b9-10)고 했던 지눌 선사의 설명에 따라 法性淨土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법성정토로 표현하고자 한다. 권기종(1987)은 法性淨土觀이라고 하였고, 김호성(1990)은 唯心淨土說-法性淨土說이라고 하여 두 용어를 나란히 사용하였다.

말법사관 극복부터 유심정토설 수용까지는 한보광(1998, 2000)이 논문의 목차에서 밝힌 결론이다. 제7문답을 대상으로 진행한 이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내린 이해의 총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덕진(2003: 124)은 한보광의 논문을 포함하여 이전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지눌의 정토수용은, 비록 유심정토의 입장이지만, 지눌 선사상 전체의 특징이 아니다. 전기 지눌의 특징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후기 지눌은 보다 간화선 쪽에 경도되고 있다”(p.124)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제7문답의 구성과 내용을 분석하여 근기에 따른 수행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논문으로는 김호성(1990), 이병욱(2002), 강건기(2007) 등이 자세하고, 이덕진(2003)의 연구도 참고된다.

“諸公 聞語曰 時當末法 正道沈隱 何能以定慧爲務. 不如勤念彌陀 修淨土之業也. 余曰 時雖遷變 心性不移. 見法道之興衰者 是乃三乘權學之見. 有智之人 不應如是. …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H4, pp.698a5-699b22).

“問. 今時行者 雖專定慧 多分道力未充. 若也不求淨土 留此穢方 逢諸苦難 恐成退失”(H4, p.704b5-7).

此 亦各在當人 不可一例取之(H4, p.705b07). 지눌 선사의 이와 같은 답은 이미 제6문답의 수행과 교화에 대한 답에서도 있었다. 선사는 제6문답의 답을 시작하면서 “此各在當人 不可一向(H4, p.703c20)”이라고 하였다. 수행과 교화 역량은 각자에 달린 것이지 한결같을 수 없다는 뜻이다.

지눌 선사는 제7문답에서 근기에 따라 수행의 내용이 다른 점을 설명할 때 내용을 구분하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上根의 수행은 “若有大心衆生 … 今時如此修行者 爲上根(H4, p.704b8-c5)”이라고 설명하고, 나머지는 “或有行者”(p.704c5; p.705c14; p.706a1; p.706a18)”, 또는 “或有∼者(H4, p.704c18; p.705a1) ”등으로 문장을 시작하여 내용을 구분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若是最下根人”(p.706a16)이라는 표현으로 최하근 수행을 구분하였다. 이 모두는 근기에 따라 다른 수행의 내용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호성(1990: 456-460), 한보광(1998: 380-388), 이병욱(2003: 283-290), 이덕진(2003: 113-120), 강건기(2007: 31-35) 등이 제7문답의 내용을 근기에 따라 구분하고 각자의 견해를 나타내었다. 이들은 큰 틀에서 상·중·하근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고, 지눌 선사가 사용한 최하근인이라는 표현을 염두에 두어 최하근을 따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중근 또는 하근으로 나눈 부분, 즉 필자가 아래의 표에서 2)와 3)으로 나눈 부분은 견해가 미세하게 달랐다. 대부분은 전체를 중근으로 해석하였고, 이병욱(2003)은 중근과 하근으로 나누었다.

“若是大心衆生 … 如此修心者 爲上根也”(H4, p.704b8-c5).

“或有行者 聞自心淨妙之德 … 諸修道者 切須在意在意”(H4, pp.704c5-705c14). 自力他力으로 內外相資의 수행을 닦는 사람에는 자비와 원력이 큰 사람[悲願重者]과 淨穢苦樂에 기뻐하고 싫어함이 많은 사람[欣厭心重者]의 둘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수행은 단지 稱名憶想만으로 정토를 구하는 수행과의 차이를 밝히고, 知佛意 수행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或有行者 堅執名相 … 多有滯障 可悲可痛也”(H4, pp.705c14-706a16). 이들은 불법 가운데서[於佛法中] 마음을 잘 쓰지 못해서[不善用心] 장애에 막힘이 많은[多有滯障] 사람이다. 여기에는 이름과 모양을 굳게 집착해서[堅執名相] 정념의 집착을 잊지 못하는[情執未忘] 사람과 타고난 성품이 들뜨고 거짓되어[稟性浮僞] 지견이 원만하지 못한[知見未圓] 사람 등의 둘이 있다고 하였다. 지눌 선사는 정념의 집착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집착하고 인색하며 탐착하는 마음[執吝貪着之心]으로 부처님의 경계를 구하기[求佛境界] 때문’이라고 하였다.

“若是最下根人 盲無慧目 … 豈以不知佛意修行爲過哉”(H4, p.706a16-18).

“或有行者 受氣剛大 … 故亦是善知佛意者也”(H4, p.706a18-24).

“若是祖宗門下 以心傳心 密意指授之處 不在此限”(H4, p.706c18-20).

지눌 선사의 이와 같은 이해는 大心衆生의 수행이 최상승의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어서 이들이 사는 곳은 法性淨土가 아닌 곳이 없다고 정리하고, 이어서 “이 사람은 비록 위와 같이 옛날 헤아림을 넘어선 사람이[古過量人] 한 번 뛰어 지위에 올라 신통력을 구족한 것과는 같지 않지만 … (故此人 雖不如上古過量人 一超登位 具足通力者 …”(H4, p.704b21-22))라고 하였다. 문장에서 비교한 ‘古過量人’은 여기서 말하는 대심중생, 즉 상근보다 더 뛰어난 수행자를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무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눌 선사는 초월적인 격외의 수행자를 근기 수행의 논의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호성(1990: 456-460), 한보광(1998: 380-388), 이병욱(2003: 283-290), 이덕진(2003: 113-120), 강건기(2007: 31-35) 등이 제7문답의 내용을 근기에 따라 구분하고 각자의 견해를 나타내었다. 이들은 큰 틀에서 상·중·하근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고, 지눌 선사가 사용한 최하근인이라는 표현을 염두에 두어 최하근을 따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중근 또는 하근으로 나눈 부분, 즉 필자가 아래의 표에서 2)와 3)으로 나눈 부분은 견해가 미세하게 달랐다. 대부분은 전체를 중근으로 해석하였고, 중근과 하근으로 나눈 경우가 있다(이병욱). 지눌 선사는 상근과 최하근의 명칭은 사용했지만, 2)와 3)의 내용에는 근기를 구분하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 내용에 굳이 명칭을 붙여서 구분해야 하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있다. 그래서 내용만으로 나누어서 서술하였다.

기존의 연구는 이 부분을 위의 2)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이해한 경우(한보광, 이덕진)와 하근기로 구분한 경우(이병욱), 그리고 내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은 경우(김호성, 강건기)로 나뉜다.

김호성(1990: 460), 한보광(1998: 387), 이덕진(2003: 119) 등은 이를 최하근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이해하였다. 이병욱(2002: 290)과 강건기(2007: 34)는 이를 하근기의 내용으로 이해하였다.

「1. 제7문답의 구성」에서 표로 나타낸 5)와 6)은 이미 앞에서 그 특징을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하지 않는다.

大心衆生은 지눌 선사가 인용한 『화엄론』(『新華嚴經論』)(T36, p.770c16-18)의 大心凡夫와 같은 말이다. 대심범부는 크고 넓은 마음을 가진 범부를 가리키며, 대심중생은 40권본 『화엄경』권6 「入不思議境界普賢行願品」에는 “積集福智大心衆生 令其能轉諸佛法輪 捨生死輪 住正法輪 摧滅一切異道邪論. 如是利益 遍滿十方一切法界”(T10, p.689c14-17)라는 내용에서 용례를 볼 수 있다(해주, 2009: 135, 각주 126) 참조).

“若是大心衆生 依此最上乘法門 決定信解四大如泡幻 六塵似空花 自心是佛心 自性是法性 從本已來 煩惱性自離 惺惺直然惺惺 歷歷直然歷歷 依此解而修者 … 如是任法 調治習氣. 使稱理智增明 隨緣利物 行菩薩道. 雖處三界內 無非法性淨土 雖經歲月 體不移時 任大悲智 以法隨緣. … 今時 如此修心者 爲上根也”(H4, p.704b8-c5).

“或有行者 聞自心淨妙之德 信樂修習. … 具以空觀 推破自他身心 … 如是深觀 巧洗情塵 心常謙敬 遠離憍慢 折伏現行 資於定慧 漸入明靜之性. 然 此人 若無萬善 助開自力 恐成迂滯. 直須勤供養三寶 讀通大乘 行道禮拜 懺悔發愿 始終無癈”(H4, p.704c5-15).

“或有悲願重者 於此世界 不厭生死 自利利他 增長悲智 求大菩提. 所生之處 見佛聞法 以之爲願也. 此人 不別求淨土 亦無逢難退失之患”(H4, pp.704c18-705a1).

원문에는 ‘忍力未成’이라고 하였다. 대부분은 忍力을 ‘참는 힘’이라고 번역하였다. 하지만 이 경우는 法忍처럼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의미로 읽는 편이 더 적절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或有淨穢苦樂 欣厭心重者 所修定慧及諸善根 廻向願求生彼世界 見佛聞法 速成不退 却來度生 以之爲願也. 此人 意謂雖專內照 忍力未成 留此穢土 逢諸苦難 恐有退失之患”(H4, p.705a1-6). 제7문답의 질문에서 ‘도력이 충분하지 못한 사람이 여러 고난을 만나면 물러나고 잃을 걱정’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此中 求生淨土者 於明靜性中 有定慧之功 懸契彼佛內證境界. 故望彼但稱名號 憶想尊容 希望往生者. 優劣可知矣”(H4, p.705a7-10).

한보광(2000: 383-384)은 여기서 비교하는 둘을 유심정토적인 求生淨土者와 指方立像적인 稱名念佛의 希望往生者로 대비하였다.

“是故寶積 若菩薩 欲得淨土 當淨其心 隨其心淨 則佛土淨”(『維摩詰所說經』卷1 「佛國品1」, T14, p.538c4-5).

『大方廣如來不思議境界經』(T10, p.911c19-24).

『六祖大師法寶壇經』(T48, p.352a25-b1).

『隋天台智者大師別傳』(T50, p.196a26-29).

『萬善同歸集』(T48, p.966c4-5).

“如上 佛祖所說 求生淨土之旨 皆不離自心. 未審. 離自心源 從何趣入”(H4, p.705a18-20). “以此而推 雖不念佛求生 但了唯心 隨順觀察 自然生彼 必定無疑”(H4, p.705b1-2).

지눌 선사는 孤山智圓(976~1022) 법사의 「아미타경소서」를 길게 인용하고, 이 서문의 본뜻을 ‘知佛意而修’로 해석하였다(孤山智圓法師 阿彌陁經疏序云 … 予 謂圓師 深知吾佛善權本末者也. 今引繁文 庶使今時求淨土者 知佛意而修之 不枉用功耳(H4, p.705b9-c4). 또한 知佛意의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H4, p.705c4-9). 知佛意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시 자세히 논한다.

“或有行者 堅執名相 … 却謂念佛往生 將五蘊身 受無量樂. 以是情執未忘故 或見修禪者 以爲是人 不念佛求生 何時出離三界哉. … 不知斯旨者 以執吝貪着之心 求佛境界 如將方木逗圓孔也”(H4, pp.705c9-706a10). 한보광(2000: 385-386)은 3)의 ①과 ②를 영명연수의 『叅禪念佛四料揀偈』(彭希涑 述, 『淨土聖賢錄』卷3, 卍135, p.244)에 의거하여 無禪無淨土者의 잘못과 有禪無淨土者의 잘못된 수행을 경계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若是最下根人 盲無慧目 而知稱佛號 則歎其希有. 豈以不知佛意修行爲過哉”(H4, p.706a16-18).

“是知. 古今達者 雖求淨土 以深信眞如 專於定慧”(H4, p.706c10-11).

“諸公 聞語曰, 時當末法 正道沈隱. 何能以定慧爲務. 不如勤念彌陀 修淨土之業也”(H4, p.698b7-9).

“然不窮根本 執相外求 恐被智人之所嗤矣”(H4, p.698b16-17).

“如有智者 當須兢愼 策發身心 自知己過 改悔調柔 晝夜勤修 速離衆苦. 但依佛祖誠實之言爲明鏡 照見自心從本而來 靈明淸淨 煩惱性空 而復勤加決擇邪正 不執己見 心無亂想 不有昏滯 不生斷見 不着空有 覺慧常明 精修梵行. 發弘誓願 廣度群品 不爲一身 獨求解脫”(H4, p.699a22-b6).

“先須返照自心 信解眞正 不落斷常 依定慧二門. 治諸心垢 卽其宜矣”(H4, p.699c20-21). 이러한 취지는 제2문답의 질문에서 제1문답에서 지눌 선사가 답한 내용을, “汝今解說者 先須信解自身性淨妙心 方能依性修禪”(H4, p.699b23- 24)라고 이미 정리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若是大心衆生 依此最上乘法門 … 如是任法 調治習氣. 使稱理智增明 隨緣利物 行菩薩道. 雖處三界內 無非法性淨土 雖經歲月 體不移時”(H4, p.704b08-20).

T36, p.770c11-20.

“此人 雖不如上古過量人 一超登位 具足通力者. 然 以夙植善根 種性猛利 深信自心 本來寂用自在 性無更改故. 於諸世難 何有退失之患”(H4, p.704b21-c2).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지눌 선사의 정토관을 唯心淨土로 표현하였으며, 自性彌陀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강건기, 2007: 27). 하지만 제7문답에서 사용된 唯心淨土라는 표현은 영명연수의 『만선동귀집』을 인용한 문장 한 곳(H4, p.705a17) 뿐이며, 지눌 선사의 글에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자성미타라는 용어는 사용된 적이 없다. 선문과 화엄의 정토론을 정토교의 타방정토설과 비교하여 유심정토로 표현했던 것이 지눌 선사의 정토관에도 자연스럽게 수용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此中 求生淨土者 於明靜性中 有定慧之功 懸契彼佛內證境界. 故望彼但稱名號 憶想尊容 希望往生者. 優劣可知矣. … 如上 佛祖所說 求生淨土之旨 皆不離自心”(H4, p.705a9-19).

“雖不念佛求生 但了唯心 隨順觀察 自然生彼 必定無疑”(H4, p.705b1-2).

“師言, 使君善聽 惠能與說. 世尊在舍衛城中 說西方引化 經文分明 去此不遠. … 若悟無生頓法 見西方只在剎那 不悟念佛求生 路遙如何得達”(『六祖大師法寶壇經』, T48, p.52a15-b3).

“近世 多有義學沙門 捨名求道 皆着外相 面向西方 揚聲喚佛 以爲道行. … 旣棄修心之秘訣 不識返照之功能 徒將聰慧之心 虛用平生之力 背心取相 謂依聖敎. 諸有智者 豈不痛傷”(H4, p.705b2-9).

“予謂圓師 深知吾佛善權本末者也. 今引繁文 庶使今時求淨土者 知佛意而修之 不枉用功耳”(H4, p.705c1-3).

“知佛意者 雖念佛名 懃求往生 知彼佛境莊嚴等事 無來無去 唯依心現 不離眞如 念念之中 離於昏散 等於定慧 不違明靜之性 則分毫不隔 感應道交 如水澄月現 鏡淨影分”(H4, p.705c3-9).

지눌 선사가 인용한 비석화상의 고성염불삼매보왕론(T47, p.134a25-b2)의 내용은 전문이 그대로 『만선동귀집』에 인용되고 마지막에 “誰復患之於起心動念 高聲稱佛哉.”라고 하여 영명연수 자신의 견해를 붙였다(T48, p.962a29-b7). 지눌 선사는 『만선동귀집』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지눌 선사가 인용한 비석화상의 저술은 제목이 『염불삼매보왕론』인데 『만선동귀집』과 똑같이 『고성염불삼매보왕론』이라고 제목하였고, 영명연수의 견해를 담은 “誰復患之 於起心動念 高聲稱佛哉”라는 문장도 구분 없이 그대로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文殊所說般若經中, 明念佛得一行三昧者 亦同此意也”(H4, p.706b8-9).

“飛錫和尙 高聲念佛三昧寶王論云, 「浴大海者 已用於百川. 念佛名者 必成於三昧. 亦猶淸珠下於濁水 濁水不得不淸. 念佛投於亂心 亂心不得不佛. 旣契之後 心佛雙亡. 雙亡定也 雙照慧也. 定慧旣均 亦何心而不佛 何佛而不心. 心佛旣然 則萬境萬緣 無非三昧”(H4, p.706a24-b8; 『念佛三昧寶王論』, 卷1, 「念未來佛速成三昧門第一」, T47, p.134a25-b2; 『萬善同歸集』, T48, p.962a29-b7).

“遠追達士眞人之高行 則豈不快哉”(H4, p.698b5-6).

해주(2009: 81, 각주 14, 15) 참조.

“今時行者 多云, 但得念佛 往生然後 何有哉. 不知九品昇降 皆由自心信解 大小明昧而發現也. … 古今達者 雖求淨土 以深信眞如 專於定慧”(H4, p.706c1-11).

“故知 彼色相莊嚴等事 無來無去 離於分齊 唯依心現 不離眞如. 不同凡夫二乘 不知轉識現故 見從外來 取色分齊故也. 如是則雖曰同生淨土 愚智行相 天地懸隔. 何如現今 學大乘唯心法門 專於定慧 免墮凡小心外取色分齊之見也”(H4, p.706c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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