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1,7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한국불교사에서 개개 사찰의 역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찰의 역사는 일반 역사 뿐 아니라, 미술사 등을 포함한 문화사 전반, 사회사, 지역사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중요성에 비추어 사찰의 역사를 정리하고, 그 속에 담겨있는 다양한 의미를 조명하는 일, 즉 사찰사(寺刹史) 연구는 아직까지 미흡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찰사는 유, 무형의 역사와 문화자산 등이 모두 포함된 수준에서 언급되어야 하며, 사찰사를 규명하기 위한 이 같은 노력이 전제될 때 한국불교사는 비로소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태백산 정암사(淨巖寺)는 비교적 뚜렷한 창건연기를 지니고 있는 고찰(古刹)이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삼국유사』에는 자장(慈藏)과 정암사의 관계를 밝히는 다양한 기록1)이 전한다. 창건주 자장과 함께 수마노탑(水瑪瑙塔)은 정암사의 사격(寺格)2)을 상징하는 대표적 성보 유산이다.3) 수마노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정암사는 ‘5대 적멸보궁’이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성지(聖地)의 하나로 손꼽힌다.
정암사는 정선군과 함께 10여 년 동안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수마노탑은 2020년 보물 제410호에서 국보 제332호로 승격 지정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비록 세 번째 도전 끝에 성취된 일이었지만, 오히려 이 과정4)에서 정암사와 수마노탑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정영호의 연구5) 이후 한동안 부진했던6) 정암사 관련 연구는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정암사는 정선군의 지원을 받아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모두 네 차례에 걸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으며, 2013년의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네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도 진행되었다.7) 이들 결과를 결집하여 총 17편의 논문8)이 수록된 학술서 『정암사 수마노탑 연구』(정선군, 2017)를 간행하였는데, 수마노탑 국보 승격은 결국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성취된 것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창건 이후 정암사 역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정암사의 사격을 나름대로 제시해 보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제Ⅱ장에서는 정암사 창건과 관계된 내용을 살펴볼 예정이며, 제Ⅲ장에서는 18-19세기에 조성된 각종 자료9)를 바탕으로 이 시기에 진행된 정암사 불사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제Ⅳ장에서는 일제강점기 이후 현재에 이르는 정암사 역사를 살펴보고자 하며, 특히 수마노탑 국보 승격의 과정과 그 의미를 주목해 보고자 하였다. 끝으로 맺음말에서는 정암사의 사격을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제시해 보고자 하였으며, 부록으로는 필자가 수집 정리한 ‘정암사의 주요 연혁’을 연표 형식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정암사는 최근 창건 1376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개산문화제를 봉행하였다(2021. 10. 9.). 이처럼 장구한 정암사 역사 관련 내용을 한 편의 논문에 모두 다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며, 이것은 곧 이 논문이 지니고 있는 한계라는 점을 아울러 밝혀두고자 한다.
Ⅱ. 정암사의 창건과 자장율사
정암사 창건주 자장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생몰연도나 일부 행적에 관계된 사실10)조차 시기 비정이 일치하지 않을 정도로 연구과제 또한 적지 않다고 하겠다. 이 글의 성격상 여기서는 자장과 관계된 일반적 논의는 제외하겠으며, 정암사의 창건과 연관된 내용만 간추려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를 위해 먼저 다음의 자료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Ⅰ-① 만년에 서울을 떠나 강릉군(지금의 溟州이다)에 수다사(水多寺)를 창건하고 살았다. 다시 이승(異僧)이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북대(北臺)에서 본 모습이었다. 그가 와서 말하기를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너를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놀라서 깨어나 아침 일찍 송정에 가니 과연 문수보살이 온 것에 감응하여 법요(法要)를 물으니 이에 말하기를 “다시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만나자”라고 하고 마침내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송정은 지금 가시나무가 나지 않고 또한 매·새매 종류가 살지 않는다고 한다). 자장은 태백산에 가서 그를 찾았는데 큰 구렁이가 나무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시종에게 일러 “이곳이 이른바 갈반지이다”라고 말하고 이에 석남원(石南院, 지금의 淨岩寺이다)을 창건하고서 문수대성이 내려올 것을 기다렸다.11)
② 사(師)는 정관(貞觀) 17년(643) 이 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하였으나 3일 동안 날씨가 어두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가서 살다가 문수보살을 뵈니 이르기를, “칡덩굴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정암사가 이것이다. 역시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12)
③ 절 안에 전하는 고기(古記)를 살펴보니 자장법사는 처음에 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산기슭에 띠집을 짓고 머물렀으나, 7일 동안이나 보이지 않으므로 묘범산(妙梵山)으로 가서 정암사(淨岩寺)를 창건하였다.13)
④ 후에 큰 소나무 아래(지금의 寒松汀이 이곳이다.) 한 거사가 갑자기 나타나 조사와 더불어 오랫동안 청담(淸談)을 나누다가 말하였다. “(스님은) 지난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 말을 마치자 곧 사라져 버렸다. 조사는 이에 자책하며, “거사는 지난날 오대산에 나타나신 범승(梵僧)의 화현일 따름이다.” (조사는) 공중을 향하여 예배를 올리고 곧 태백산을 향해 갈번의 땅을 찾아가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나무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시자에게 일러 말하길, “이곳은 문수께서 깨우쳐 주신 곳이다.” 곧 계를 내려 구렁이를 산 아래로 옮겨가게 하고 암자를 창건하여 그곳을 살나암(薩那庵, 오늘날의 정암사가 바로 그곳이다.)이라 하였다. 그 암자에서 남쪽으로 1천 보 거리에 신선동(神仙洞)이 있다. 또 다시 암자를 창건하여 ‘상살라’라 하였다. 두 암자를 왕래하면서 문수를 기다렸다.14)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정암사’라는 사명(寺名)이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등장한다(Ⅰ-①-③). 그리고 Ⅰ-④는 민지(閔漬, 1248-1326)가 지은 『오대산사적』의 내용으로, 이 자료에도 역시 정암사의 사명이 정확하게 나타난다. 민지는 일연(一然, 1206-1289)의 입적 후 그의 비문을 지을 정도로 일연의 삶과 저술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오대산사적』에 실린 자장 및 정암사 관련 내용은 『삼국유사』와 일치하지 않아 의문이 남는다.15) 어쨌든 위에서 제시한 자료는 지금까지 정암사의 창건연기를 밝히는 핵심 전거(典據)16)로 인식되고 있으며, 18세기 이후 찬술된 각종 사적 관련 자료에서도 이들과 유사한 내용이 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정암사의 창건연기 인식은 18-19세기까지 꾸준하게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장에서 상술하겠지만, 정암사는 이 시기에 이르러 도량과 수마노탑을 중수하는 불사를 다양하게 진행하였으며, 이들 불사에 관계된 자료가 다수 전한다. 우선 1972년 7월에 진행되었던 수마노탑 해체 복원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5매의 탑지석 자료17)를 들 수 있다. 이 자료는 현재 탑 내부에 다시 봉안되어 있지만, 그동안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판독문18)이 알려져 있는 상태이다. 아울러 이 시기 진행되었던 불사의 과정을 정리한 몇 종의 기문 자료가 있는데, 1778년(정조 2) 취암 성우(翠巖性愚)가 편찬한 「강원도정선군태백산정암사사적」(이하 「정암사사적」으로 줄임)19)과 「수마노탑중수사적」, 그리고 1874년(고종 11) 경운 이지(景雲以祉)가 편찬한 「수마노보탑중수지」 등을 들 수 있다. 경운 이지는 이들 3종의 자료를 취합하여 목판본 『정암사사적편(淨巖寺事蹟篇)』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정암사 역사, 특히 18-19세기의 역사는 이들 자료에 의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먼저 정암사 창건과 관계된 내용을 간추려 살펴보고자 한다.
Ⅱ-① 옛날 신라의 선덕여왕20) 때 우리나라의 대덕(大德)인 자장율사가 적현신주(赤縣神州: 中國)로 들어가, 중국 오대산에 천인(天人)이 만든 문수보살[曼殊室利] 상 앞에서 7일 동안 정진 수행하여, 꿈속에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이 설법을 해주는 감응을 입었다. 이어서 부처님의 두골(頭骨)과 부처님의 어금니[佛牙] 그리고 사리 100과를 자장율사에게 전해주며 말하길 “그대의 나라에 인연이 있는 곳 중에 삼재(三災)가 닿지 않는 명승지가 있을 것이니, 그곳에 탑을 세우고 이것들을 안치하시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자장율사가 받아 지니고서 바다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에, 당나라의 여러 승려들이 의논하여 “나라의 귀중한 보물을 어찌 해외의 작은 나라로 보낼 수 있겠는가?”라 하고는, 4부(部)의 병사들을 동원해 그것들을 빼앗으려 하였다. 대사가 바닷가로 나가서 그것을 용왕에게 전하니, 용왕이 받들어 맞이하여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 영남의 울산군(蔚山郡) 포구에 내려주었다. 얼마간의 수마호석[水瑪瑚]과 전해준 부처님의 두골과 사리를 대사에게 바쳤다. 대사가 이것들을 이 산으로 맞아들여 천의봉(天倚峯: 太白山) 아래 문수보살이 점지한 삼갈반지(三葛盤地)에 용왕이 바친 수마호석으로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탑 아래쪽에 향화(香火)를 올리는 법당을 하나를 짓고, ‘정암(定岩: 淨巖)’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21)(탑지석 제4석의 내용, 1713년 作)
② 이 산의 서쪽에 오래된 옛 절이 있으니, 정암사가 그곳이다. 신라의 자장 법사께서 당 태종 정관(貞觀) 19년 을사(乙巳, 645)년에 세존의 수마노보탑을 창건하여 비로소 48방(房)이 놓일 수행처를 열었다.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세속의 티끌22)이 아득히 끊어져서 정결하기 비할 데 없으므로, ‘정암(淨巖)’이라 이름 지었다. 천지가 개벽할 적에 이 산 위에 세 개의 나무상자가 있었는데, 미륵 부처님께서 용화회(龍華會)를 여는 때가 되면 상함(上函)에서는 부처님의 이름이, 중함(中函)에서는 경전의 이름23)이, 하함(下函)에서는 승려의 이름이 나온다고 한다. 봉우리 또한 셋이 있으니, 동쪽에 천의봉(天倚峰), 남쪽에 은대봉(銀臺峰), 그리고 북쪽에는 금대봉(金臺峰)이다. 그 가운데 보탑(寶塔)이 셋 있으니, 그 첫째가 금탑(金塔)이요, 둘째가 은탑(銀塔)이며, 셋째가 수마노탑(瑪瑙塔)이다. 수마노탑은 지키고 보존하여 지금까지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사라져서24) 보이지 않으니, 이는 산의 영기(靈氣)로 인해 은밀히 감춰진 것인가? 아니면 박복(薄福)한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산에 올라 약초를 캐는 사람들이 간혹 보기도 하지만 다시는 찾을 수 없다고 하니, 가히 신령스럽고 기이하다고 할 만하겠다. (중략) 법사는 임금께 아뢰어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안치하였다. 이어서 월정사에 13층 탑을 세우고 사리를 안치한 다음, 중대(中臺)를 개창하여 부처님의 두골[佛顱]을 봉안하였다. 다음으로 법사는 대화사(大和寺)를 창건하여 사리를 모신 뒤, 태백산의 삼갈반지(三葛盤地)를 개척하여 보탑을 건립하고서 사리와 부처님 손가락뼈[佛指節]·치아·부처님의 장주[佛掌珠]·염주·패엽경을 안치하였다. (중략) 이후에 법사는 다시 대화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홀연히 한 범승이 나타나 말하길 “그대를 태백산에서 다시 만나겠노라”라고 하고는, 곧 사라졌다. 법사가 드디어 태백산으로 들어가니, 구렁이가 나무 아래 서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에 계를 설하여 구렁이를 산 아래로 옮겨가게 하였으므로, 그곳에 하살나(下薩那)25)를 세우니, 지금의 정암사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상살나(上薩那)를 세우니, 현재의 조전(祖殿)이다.26)(취암 성우, 「강원도정선군태백산정암사사적」, 1778)
③ 우리 부처님 세존께서 열반에 드실 때 불두골(佛頭骨)·치아·손가락뼈·사리·염주·가사·패엽경 등 탑묘(塔廟)에 관한 일을 문수보살에게 부촉하시니, 문수보살은 오대산[五臺]에서 선정에 들어 시절 인연을 기다렸다. 1,000여 년이 지난 후에 우리 동국의 자장율사가 불법을 구하기 위해 서쪽 중국으로 건너가서, 문수보살이 전해 받은 위와 같은 여러 보배들을 받았다. 신라로 돌아와 공양을 올리고, 청량산의 오대사[五臺], 취서산[鷲棲: 靈鷲山]의 통도사, 그리고 이 천의봉 아래의 삼갈반지에 봉안하였다. 그런데 금대와 은대(銀臺)의 두 탑은 감추어져 보이지 않고, 마노대(瑪瑙臺)의 한 탑만이 사람들에게 보일 뿐이니, 본래부터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그러함을 모르는 것인가?27)(탑지석 제3석의 전면 내용, 1874년 作)
이상은 탑지석 제4석(1713), 「정암사사적」(1778), 탑지석 제3석(1874)에 실려 있는 내용 가운데 정암사 창건과 관계된 부분만을 시대순으로 옮겨온 것이다. 먼저 탑지석 제4석에서는 ‘용왕’이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자장이 문수보살에게 받은 진신사리를 옮겨오는 과정에 용왕이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인데, 여기서는 수마노석 역시 용왕을 통해 전해 받은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 이후 1713년까지 정암사 창건과 관련한 내용을 전하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탑지석의 내용은 1713년 무렵 정암사 사중에서 인식하고 있던 창건연기라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에 전혀 보이지 않던 ‘용왕’이 갑자기 등장한 배경28)은 알 수 없으나, ‘용왕’은 「정암사사적」에도 등장29)한다.
1778년에 편찬된 「정암사사적」에서는 우선 창건 시기를 명시해 놓은 점이 주목된다. 취암 성우는 ‘신라의 자장 법사께서 당 태종 정관 19년(645)에 세존의 수마노보탑을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아울러 ‘비로소 48방(房)이 놓일 수행처를 열었다’고 하면서 창건기의 가람규모까지 추측케 하는 점을 밝혔다. 정암사 사중에서는 현재 645년(신라 선덕왕 14) 창건설30)을 신뢰하고 있으며, 이에 근거하여 해마다 개산대제를 봉행해 오고 있다. 645년 창건설은 아마도 「정암사사적」에 근거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계속된 내용에서는 세 곳의 봉우리와 연계하여 보탑이 세 개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성우는 이 자료의 전거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사적을 편찬할 당시 사중과 인근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금탑, 은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던 듯하다. 성우는 이를 두고 “이는 산의 영기로 인해 은밀히 감춰진 것인가? 아니면 박복한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라며 한탄하였으며, “산에 올라 약초를 캐는 사람들이 간혹 보기도 하지만 다시는 찾을 수 없다고 하니, 가히 신령스럽고 기이하다고 할 만하겠다.”고도 하였다. 성우가 기록한 이른바 ‘삼탑설(三塔說)’이 단순한 설화적 내용에 불과한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또한 이 자료에서는 하살나(下薩那)와 상살나(上薩那)에 관계된 내용도 주목된다. 이것은 물론 앞서 살펴보았던 민지의 『오대산사적』과 연계된 내용이지만, 이를 통해 1778년 무렵 정암사는 ‘상살나 = 조전’, ‘하살나 = 정암사’로 구분된 도량이 각각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조전은 적어도 19세기 후반31)까지 암자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에는 산신각으로 알려진 전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32)고도 한다. 여하튼 ‘살나’의 용어 문제33)라던가 조전 관련 내용 등에 대해서는 향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사안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 그리고 18-19세기에 작성된 자료에 전하는 정암사 창건 관련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물론 사찰의 창건주와 창건연기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검토가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수많은 사찰은 그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조차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례에 비하면 정암사는 비교적 뚜렷한 창건주와 창건연기를 확인할 수 있는 사찰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최근 진행된 일련의 발굴조사 과정을 통해 드러난 유물, 유적은 정암사 역사의 공백을 메꾸어주는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34)
Ⅲ. 18-19세기 정암사의 불사와 그 의미
비교적 뚜렷한 창건연기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건 이후 17세기까지의 정암사 역사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18-19세기에 작성된 정암사 관련 자료 역시 대부분 자장과 창건기 역사 기술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를 통해,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전기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다수 출토됨으로써 정암사는 창건 이후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35)
조선시대 사찰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해당 사찰의 존폐와 관련한 부분을 확인하는 작업은 우선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는 사항이다. 조선시대 사찰은 극심한 불교탄압의 과정을 겪으면서 ‘금폐(今廢)’로 표기된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정암사의 존폐 여부는 우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530년(중종 25)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된 관찬 지리지이다. 특히 이 자료에는 전국 사암(寺庵)의 존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어 사찰의 역사를 서술할 때 긴요하게 활용되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폐사인 경우 ‘금폐’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반면, 조사 시점 존속하고 있던 사찰에 대해서는 ‘재(在)’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강원도 정선군 불우(佛宇)조에 ‘정암사 재정암산(淨巖寺 在淨巖山)’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정암사는 16세기 초까지 사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후 정암사 존폐 여부는 1682년(숙종 8) 경 찬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비고(東輿備考)』에 의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자료에도 정암사는 역시 현존사찰로 등재되어 있다.
한편, 申景濬(1712-1781)이 찬술한 『가람고(伽藍考)』 ‘정선’조에는 강선암(降仙庵), 수미암(須彌庵), 설암(雪庵) 등 세 개의 사찰만 등재되어 있으며, 1799년(정조 23)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금폐’(淨巖寺 在淨巖山 今廢)라는 기록이 있다. 『가람고』와 『범우고』에 의지해서 판단한다면, 18세기 정암사는 폐사의 지경에 이른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18세기 정암사는 여러 불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제부터 이와 관계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 장에서 이미 간략하게 언급한 것처럼, 1972년의 수마노탑 해체 복원공사 과정에서 5매의 탑지석이 발견되었다. 한 탑에서 이렇게 시기를 달리하는 탑지석이 5매나 발견된 것은 극히 드문 경우이며, 이들 5매의 탑지석을 통해 정암사의 창건주 및 창건 연기와 관계된 다양한 내용을 살필 수 있었다. 하지만 5매의 탑지석은 18-19세기의 정암사 불사와 관련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정암사사적」(1778), 「수마노탑중수사적」(1778), 「수마노보탑중수지」(1874) 등의 기문류까지 포함한다면, 이 시기 정암사 불사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오횡묵(吳宖默)이 지은 『정선총쇄록』 역시 이 시기 정암사 역사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자료이다. 특히 이 자료는 1887년(고종 24)과 1888년의 정암사 실상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36)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러면 이들 자료에서 확인되는 연대기적 자료를 바탕으로 18-19세기 정암사 불사의 실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1713년(숙종 39) 윤5월 25일, 무너진 탑을 중창함. 이 불사의 증사(證師)는 대덕(大德) 자인(慈忍) 스님이었음. ‘제2석’에 다수의 연화질(緣化秩)과 화원질(畵員秩) 명단이 수록되어 있으며, “일을 거행할 때 각 도읍의 사찰에서 사용한 재물은 그 다소에 따라서 더하여 보충하였음”이라는 내용처럼, 이 불사에는 다수의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 사찰들이 동참하였음.37)
1719년(숙종 45) 탑이 무너지자 4월 8일 수마노탑 중수 불사를 시작하여 6월 5일에 마침(제1석). 이 때 천밀(天密) 스님이 탑을 5층으로 복구하였다고 함.38).
1769년(영조 45) 취암(翠巖) 스님이 정암사에 주석하기 시작함. 취암 스님이 수마노탑 중수를 발원하고 불사를 시작하였으며, 여특(呂特)이란 노스님을 만나 이전의 보탑 중수 관련 사실을 전해 들음(「수마노탑중수사적」).
1770년(영조 46) 4월 취암 스님이 법당을 중창함. 기도를 올리고 도량과 수마노탑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기 위한 불사를 시작함. 주민들의 반대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왕실의 협조로 7월에 불사를 재개함. 은휴당(隱休堂) 시연(時演) 스님이 수백 금(金)을 모금하고 또한 자신이 모아두었던 사재를 털어서 도와줌으로써 이 때 비로소 공사가 시작되었음. 서월당(瑞月堂) 홍관(興寬) 스님도 한마음으로 찾아와 도왔다고 하며, 본군(本郡)에서도 서로 번갈아 사람을 보내어 백성들을 거듭 알아듣도록 타일렀다고 함.39) 구리 100근이 들어간 수마노탑 찰간을 서울에서(望月寺로 기록하기도 함) 제작해 옴.
1771년(영조 47) 4월 12일부터 탑의 벽돌을 쌓기 시작하여, 4월 28일 완공함.40) 12월 20일 한밤중에 느닷없이 천지가 진동하더니, 탑의 찰간이 백 보쯤이나 내던져짐.
1772년(영조 48) 안성(安城)에서 구리와 놋쇠로 찰간을 다시 제작함. 찰간을 들어서 운반할 때 설파(雪坡) 노선사가 와서 기한 내에 방광(放光)하기를 기도했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까지 뻗쳤다고 함. 5월에 찰간을 봉안하였는데, 본 탑은 7층이요, 놋쇠[銅鍮]로 만든 찰간은 5층이며, 풍경(風磬)이 32개였음.41)
1773년(영조 49) 전좌(典座) 태선(泰禪) 스님이 뽑혀 나간 찰간을 팔고 아울러 여러 인연에 따라 재물을 모아서, 향각(香閣)을 건립함. 이후 산불로 인해 조전(祖殿)이 모두 타버렸음.
1775년(영조 51) 취암 스님이 조전을 중건함.
1777년(정조 원년) 4월 「보탑중수비(寶塔重修碑)」(전면: 佛糧願碑, 후면: 寶塔重修秩)를 세움.
1778년(정조 2) 들깨 100여 말[斗]을 탁발하여 기름을 짜고, 석회를 물레방아에 찧어 탑의 틈새에 발라서, 탑이 오래도록 보전되기를 도모함. 남자 신도들에게 권하여 불량답[佛粮]을 마련토록 하였음.42) 취암 성우 스님이 「강원도정선군태백산정암사사적」과 「수마노탑중수사적」을 편찬함.
1858년(철종 9) 대규(大奎)스님이 해월(海月) 대사와 함께 적멸궁 법당을 중수하는 불사를 시작하여 한 달 여 만에 회향함.43) 이를 기념하기 위해 7월 상순 「적멸궁법당중수기(寂滅宮法堂重修記)」를 지음.
1872년(고종 9) 벽암 서호(蘗庵西灝) 스님이 수마노탑 중수를 발원하고 많은 돌을 구함. 이 불사에 남호 영기(南湖永奇) 스님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으나, 그만 불사 도중에 입적하고 말았음.44)
1874년(고종 11) 벽암 스님이 2월 13일 장인(匠人)에게 명하여 수마노탑 불사를 시작함. 3월 12일 길일(吉日)을 가려 탑을 열었고, 4월 초파일에 탑을 쌓기 시작하여, 5월 15일 아무런 장애 없이 공사를 마쳤음.45) 이 불사를 기념하기 위해 경운 이지(景雲以祉) 스님이 「보탑중수유공기」를 지었음. 이 기문에 「보탑중수대시주」 명단이 첨기되어 있는데, 주상전하·왕비전하·원자저하·대왕대비전하·왕대비전하 등은 각각 문(文) 500냥을 시주하였으며, 경빈전하(慶嬪殿下)·공주·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 등은 각각 문 100냥을 시주한 것으로 적혀 있음. ‘제3석’의 기문 역시 경운 이지 스님이 5월에 지은 것임. ‘제3석’의 후면에 새겨진 ‘연화질(緣化秩)’과 ‘대소동참시주등(大小同參施主等)’ 100여 명의 명단은 대부분 스님들로 구성되어 있음. ‘제5석’에는 이 해 4월 초8일 불염주(佛念珠)를 봉안한 금합과 은합46)을 김좌근(金左根, 1797-1869)이 홀로 시주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음.
1887년(고종 24) 전종학(全宗學) 등 6인47)이 7월 1일부터 7일간 절에 머무르며 나라와 왕실을 위한 기도48)를 올림. 이들이 7월 2일 작성한 「축문(祝文)」, 「축원산신(祝願山神)」, 「축사(祝詞)」 등의 글을 보면 민비, 즉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와 관련한 내용49)이 많음.
18세기 정암사 불사를 주도한 승려로 대덕 자인, 취암 성우, 은휴 시연, 서월 홍관, 설파, 태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취암 성우는 스스로 밝혀 놓은, 즉 “나[翠巖]는, 성은 곽씨요,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어려서부터 불문에 귀의하여 오랫동안 강의하고 설법하는 자리에 머물렀다. 그러나 후학을 길러내는 재주가 없고 나이만 들어서, 나이가 황혼[桑楡]에 가까워도 이루어낸 공이 하나도 없었다. 고금의 현철들을 미루어 보니, 대중들을 뒤로 하고 떠나서 현묘한 이치를 참구하여 도를 이루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계미(癸未, 1763)년에 지팡이 하나와 누더기 가사만을 걸치고 금강산과 묘향산에 들어가 6년 동안 정진하여 수행하고, 기축(己丑, 1769)년에 이곳 보탑 아래에 이르게 되었다.”50)는 내용을 통해 어느 정도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정암사 불사를 주도한 승려 가운데 남호 영기(1820-1872)와 벽암 서호(1837-1911)는 각각 행장 자료51)가 전하며, 이 둘을 포함한 12명 승려의 불사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손신영이 자세하게 살펴본 바52) 있다.
19세기 정암사 역사와 관련하여 응운 공여(應雲空如, 1794-?)와 청화(淸華)대사의 주석 사실이 확인된다. 먼저 공여는 을해년(1815) 여름 4월 영동에서 태백산 정암사로 들어가 탑에 예를 올리고 재를 지냈다53)는 기록이 전한다. 그는 용암 혜언(龍岩慧彦, 1783-1841)의 제자였으며,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金祖淳)에게 ‘공여’라는 호를 받았다고 한다. 공여의 정암사 주석은 한 달 여 남짓에 불과하여 도량 중창 등의 일을 직접 진행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공여에 비해 청화는 정암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던 고승이며, 『정선총쇄록』에 이와 관련한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정선군수 오횡묵은 청화대사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868년(고종 5) 춘천의 차양평(遮陽坪)에서 청화를 만난 적이 있으며, 1888년 정암사를 찾았을 때 대사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대사가 잠시 출타 중이라 만나지 못하였다. 그는 이같은 아쉬움을 달래며 총쇄록에 대사와 관련한 기록을 남겼다. 이에 의하면 청화의 속성(俗姓)은 김(金)이요, 이름은 명희(明熙)였으며, 서울 사람으로 군자(君子) 김희령(金羲齡)54)의 아들이라고 한다. 오횡묵은 대사의 부친 김희령을 “희령은 문학과 행의(行義)로 세상에서 군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청화대사에 대해 “명희는 수십 년 전부터 명산과 대천(大川)을 두루 유람하였는데, 사찰로 승려를 찾아가기도 하고, 혹은 시골마을로 문사(文士)를 방문하기도 하다가, 육근(六根)을 속세[膏火]에서 끊어내고 사대(四大)를 바리때에 의지하여 초연히 세상을 벗어난 듯한 상념을 가졌다. 그러다가 나이 51세에 경산(京山)의 성은사(聖恩寺)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는데, 그의 깨달음은 이미 출가하기 전부터 칠팔푼(七八分)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이곳에 주석한 지 꽤 여러 해가 되어서, 많은 경서를 두루 보고 도기(道氣)를 수련하여 우뚝하게 선종과 교종 양종(兩宗)의 어른이 되었다.”55)는 기록을 남겼다.
이상에서 18-19세기 정암사의 역사와 이 시기에 진행되었던 정암사 불사의 대강을 정리해 보았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이 시기 정암사 역사와 관련한 자료56)는 비교적 풍부하게 전하고 있다. 위에서 제시한 연대기적 사항은 물론 이들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구성된 것이지만, 향후 조선후기 사찰사 연구에서 정암사의 활발했던 불사 사례는 보다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아울러 이 시기 수마노탑의 중수 과정에 대한 세밀한 검토라든가, 19세기 후반 정암사와 군수 오횡묵,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김좌근 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Ⅳ. 근·현대 정암사의 역사
일제는 식민통치를 시작하는 동시에 조선 불교계에 대한 통제와 간섭 정책을 시행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불교계를 통제하기 위하여 1911년 6월 3일자 제령 제7호로 「사찰령」을 공포하였으며, 이어서 7월 8일에는 「사찰령시행규칙」을 제정하였고, 1911년 9월 1일부터 사찰령과 시행규칙의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갔다. 이들 법령에 의해 당시 전국의 사찰은 30본말사 체제 아래 속하게 되었고, 30본사 주지는 조선총독에게, 본사에 부속된 말사 주지는 지방장관에게 각각 인가를 받아야 취임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30본말사 사찰 주지 인사와 관련한 내용을 『관보』에 빠짐없이 수록하였다. 『관보』에 수록된 정암사 주지인사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2년 1월 10일 | 이환공(李幻空)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
1912년 10월 21일 | 이환공 스님 9월 30일 입적. 김덕송(金德松)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
1915년 10월 20일 | 김덕송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
1917년 3월 22일 | 홍보룡(洪莆龍) 스님 주지직 겸무취직 인가 |
1920년 3월 21일 | 홍보룡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
1920년 4월 20일 | 홍보룡 스님 주지직 재임 인가 |
1923년 6월 26일 | 홍보룡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이우영(李愚榮)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
1924년 9월 29일 | 이우영 스님 주지직 사직 |
1924년 10월 29일 | 변지안(邊智眼)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
1928년 12월 5일 | 변지안 스님 주지직 재임 인가 |
1930년 12월 3일 | 변지안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
1931년 5월 7일 | 어철화(魚鐵花)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
1933년 8월 13일 | 어철화 스님 주지직 사직 |
1933년 10월 25일 | 주도치(周道致)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
1935년 11월 30일 | 주도치 스님 주지직 사직 |
1936년 4월 6일 | 최성암(崔性庵)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
1939년 4월 6일 | 최성암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
1939년 6월 28일 | 박양용(朴亮容)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
1942년 6월 10일 | 박양용 스님 주지직 사직 |
1942년 7월 13일 | 삼산타암(三山馱庵)57)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58) |
이상의 일제강점기 주지직을 역임한 스님 가운데 홍보룡(洪莆龍) 스님의 1919년 중수불사 진행 사실이 확인된다. 「태백산정암사중수기」의 다음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본 태백산의 정암사는 명승대지(名勝大地)이다. 그러나 창건한 지 이미 오래되도록 너와[木瓦]로 지붕을 이어왔을 뿐, 기와[土瓦]를 잇는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심히 개탄치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기미(己未, 1919)년 봄에 홍보룡(洪甫龍) 주지 스님과 화주(化主) 김혜봉(金慧峰) 스님이 한편으로는 서로 의논을 하고, 한편으로는 장인(匠人)을 불러 모았다. 5월 4일 기와를 올려 법당과 칠성각(七星閣) 등 큰절을 중수하고, 5월 7일 낙성예식(落成禮式)을 베풀었으니, 훗날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공로가 있다고 하겠다. 대정 7년 기미년 음력 5월 일59).
일제강점기 정암사와 관련한 내용은 이 시기 발행된 몇 건의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에 실린 정암사 관련 기록은 총 8건이 보이는데, 이 가운데 5건은 사찰림과 관련한 내용이며, 3건은 국방헌금 납부와 관련한 기사 내용이다. 『매일신보』의 기사 제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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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寺刹 風致林 供出 十 三日 淨岩寺林에 斧入式」(1945년 0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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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旌善 淨巖寺 寺有林 利用作業案 編成 - 道 山林課에서 調査」(1939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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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淨岩寺의 寺有林 卅萬尺締를 伐採 十個年計劃으로 開發」(1938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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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十年間繼續事業으로 淨岩寺有林伐採」(1938년 0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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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崔性菴氏特志」(淨岩寺國防獻金, 1939년 0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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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江原道의 國防獻金 七萬圓을 遂突破 - 到處에 赤誠의 奔流」(1939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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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勤勞所得獻金」(1939년 09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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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山林王國旌善郡에 林道開發具體化 五萬圓經費를 計上」(1938년 09월 20일)
해방 이후 1960-70년대의 정암사 역사61)에서 주목되는 일은 역시 수마노탑과 관계된 일들이다. 수마노탑은 1964년 9월 3일 보물 제410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보물 지정 직후 『대한불교』 47호(1965. 10. 31)에는 「水瑪尼塔 補修는 언제?-全面倒壞直前에 束手無策 財産處分 안돼. 財源막히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으며, 『대한불교』 286호(1969. 2. 9.)에는 「국보 410호 탑 탑신에 금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특히 1969년의 기사에는 ‘오랜 풍우로 탑신 전체가 금이 가 있으며, 탑이 동쪽으로 5도가량 기울어 도괴 직전에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 수마노탑의 보존 상태가 매우 위험한 수준에 처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문화재 당국은 1972년 7월부터 수마노탑에 대한 해체 복원공사를 진행하였으며,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 과정에서 사리장엄과 탑지석 5매 등의 소중한 성보 유산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정암사 역사에서 등각(登覺) 스님의 활동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님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이곳의 주지로 재직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일주문, 육화정사, 범종각, 삼성각, 자장각을 중창하고 범종을 주조하였으며, 계류에 가로놓여 각각 적멸궁과 탑을 향하는 돌다리 두 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62) 스님은 또한 동국대 이종익 교수에게 『정암사사적편』의 번역을 부탁하여 『수마노탑과 자장율사』(1977)의 출판을 이루어 내기도 하였다. 한편, 1963년 석주선(石宙善, 1911-1996) 선생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남아있는 것만도 고마운데 날로 헐어가는 淨岩寺 ‘금란가사金欄袈裟’」라는 제목의 글은 이 시기 정암사의 아픈 역사로 기억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이 기고문 가운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절에는 아직도 선덕여왕이 하사한 金爛袈裟가 남아있다. 이 가사는 자장법사께서 친히 입었던 것으로 一三○○여년 내려오는 동안 많이 상하기는 하였으나 色하나 變치 않은 가사 모양이 그대로 있다. 橫이 一五二 「센티」, 縱이 八五 「센티」, 주위의 선이 五.五「센티」, 二四條로 된 과거의 화려하였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材料는 紅金線緞에 藍金線緞으로 裙이 둘러져 있고 바느질의 技法도 하나의 藝術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國寶的 유물, 우리나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물을 누가 이해하는 이 별로 없고 너무나 소홀히 보관되어 있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국가의 하나의 중한 보물이거늘 그렇게도 좀 먹고 습기 차고 누구나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어 있으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수명을 좀 더 길게 한다는 뜻에서 잠시나마 내가 金襴袈裟를 대하였을 때는 목욕재계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조그마한 유리함에서 꺼내어 防蟲的 의미에서 다리미질을 곱게 하여 다시 모양을 갖추어 유리함에 넣고 돌아왔다.
이것은 소중하다기 보다도 천으로 된 하나의 물건이 一三○○餘年이 넘도록 그 형태를 갖추어 남아 있다는 감사함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여진 處事라 하겠다. 하루 속히 문화재에 대한 일반 인식이 필요한 동시 계몽이 필요하다. 여기 따라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유물을 한자리에 모아 놓는다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에 산재해 있는 유물은 최선을 다하여 보관할 수 있도록 중앙에서 어떤 대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대로 방치 상태로 나아가면 金襴袈裟 같은 귀중한 유물들이 몇 해 안가서 자연 소멸될 것이다(『조선일보』 1963년 11월 8일자).
석주선은 한국복식사 분야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963년 정암사에 보관되어 있던 자장의 금란가사63)를 친견하고, 그 가사의 빼어난 솜씨를 찬탄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보급 유물인 금란가가의 열악한 보존 상태를 크게 우려하였으며, 기사를 통해 국가 차원의 시급한 대책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대로 방치 상태로 나아가면 금란가사 같은 귀중한 유물들이 몇 해 안가서 자연 소멸될 것이다.”는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으며, 지금 자장의 금란가사는 그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상태이다.64)
정암사의 현대사에서 수마노탑 국보 승격을 위한 활동은 가장 주목되는 일이다. 지역신문(『강원일보』)과 불교계 신문(『법보신문』 등)에서 2020년 10대 뉴스의 하나로 선정할 만큼 수마노탑 국보 승격은 지역사회와 불교계 전체에서 큰 환영을 받았던 쾌거였다. 정선군과 정암사는 두 차례에 걸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특히 학술세미나 개최, 발굴조사, 자료집 발간으로 이어졌던 학문적 성과는 결국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받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수마노탑 국보 승격을 추진하였던 핵심 주체는 정선군청과 정암사였다. 먼저 정암사는 두 차례에 걸친 천일기도(2016년 1월 10일과 2018년 10월 6일 각각 입재)를 봉행하는 한편, 군 관계자들, 그리고 지역사회와 활발한 교류를 펼쳐 나갔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수마노탑 국보 승격이 단지 정암사라는 특정 사찰의 경사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다. 또한 군 관계자들은 행정적 노력과 함께 관민(官民)이 함께 하는 ‘승격운동’ 차원으로 이 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정선종합경기장에서 개최된 ‘제37회 정선군민의 날 기념 군민체육대회’(2019. 6. 20.)는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기원하는 행사로 기획되기도 하였다. 문화재위원회의 실사가 임박하자, 정선군 9개 읍·면 주민들, 지역의 100여 개 사회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승격 발원’ 현수막을 게시하였다. ‘불교성지’의 국보 승격을 위해 지역의 개신교와 천주교 측에서도 적극 협조하였다. 결국 ‘2전3기’의 도전 끝에 수마노탑은 국보 승격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65)
Ⅴ. 맺음말-정암사의 사격
태백산 정암사는 뚜렷한 창건연기를 지니고 있는 고찰(古刹)이다.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에는 자장과 정암사의 관계를 밝히는 기록이 전하며, 수마노탑에서 발견된 5매(枚)의 탑지석과 『정암사사적』 등의 자료를 통해 18-19세기 정암사 역사의 구체적인 불사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최근에는 발굴조사를 통해 나말여초 시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 논문은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창건 이후 정암사의 역사를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하였으며, 이제 맺음말에 대신하여 정암사의 사격을 나름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 정암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성지(聖地)로서의 사격을 지니고 있다. 부처님 진신사리는 불자들에게 있어 가장 성스럽고 소중한 신앙의 대상이다. 이로 인해 진신사리를 봉안한 도량은 ‘보궁(寶宮)’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으며, 정암사 역시 적멸보궁과 수마노탑으로 연계된 보궁신앙을 간직하고 있다. 그 정확한 유래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현대 한국불교에는 ‘5대 보궁신앙’이 자리 잡고 있으며, 정암사는 보궁신앙의 성지로서 뚜렷한 사격을 유지해가고 있다.
둘째, 정암사는 창건주 자장율사의 ‘열반지처(涅槃之處)’라는 사격을 지니고 있다. 아직까지 일부 연구자들은 자장의 만년 행적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한다. 하지만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의 자료적 가치, 특히 이들 전적이 월정사 사중의 전승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조전(암)’은 창건주 자장을 기리기 위한 전각이다. 1778년 무렵까지 정암사는 ‘상살나=조전(암)’, ‘하살나=정암사’로 구분된 도량이 각각 존재하고 있었으며, 1887년 오횡묵이 조전을 탐방했을 때도 암자 자체는 존재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상 자장의 만년 행적은 오대산과 태백산 일대에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결국 정암사는 자장의 입적 도량이라는 사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셋째, 정암사는 문수신앙을 신봉하는 ‘문수성지’로서의 사격을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 등에는 ‘문수보살 친견’이 마치 자장의 일대기를 상징하는 일처럼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곧 자장의 문수신앙이 매우 특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대산 월정사와 태백산 정암사는 오랫동안 자장의 불교를 계승하고 있으며, 문수신앙의 성지와도 같은 위상을 간직하고 있다. 한국불교사에서 이 같은 사례는 매우 드문 경우에 속하며, 따라서 ‘문수성지’로서의 정암사 사격은 정암사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더욱 중시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넷째, 정암사는 창건주 자장 이후 오랫동안 계율을 중시하는 ‘계율도량’으로서의 사격을 지니고 있다. 『속고승전』 「자장전」은 자장의 일대기에서 지계(持戒)와 수계(授戒)에 관련된 행적을 집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연 역시 『삼국유사』에서 자장을 ‘정률(定律)’로 상징화하였다. 최근의 발굴조사를 통해 정암사 경내에서는 ‘敎律淨嵓講’, ‘淨嵓律舍’, ‘律淨嵓寺’ 등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정암사는 ‘율사 자장’의 계율 전통을 오랜 기간 동안 유지해 오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창건주 자장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던 ‘계율도량 정암사’는 정암사의 사격과 관련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다섯째, 정암사는 18-19세기 조선불교사에서 독보적 불사를 추진했던 ‘불교중흥도량’으로서의 사격을 지니고 있다. 본문에서 자세하게 살펴본 것처럼, 정암사는 18-19세기 매우 활발한 불사를 추진하였다. 이 시기 불교계가 처해 있던 제반 상황을 감안한다면, 정암사의 불사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 시기 불교는 곧 근 현대 불교사의 전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정암사는 벽지(僻地)에서 불교 중흥을 위해 뚜렷한 자취를 남겼던 도량으로, 보다 새롭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여섯째, 정암사는 지역의 관민(官民)과 함께 하는 ‘지역모범도량’으로서의 사격을 지니고 있다. 1887년 군수로 부임한 오횡묵은 선정을 펼쳤으며, 이에 감동한 지역의 선비들은 정암사를 찾아 7일간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오횡묵은 『정선총쇄록』에서 이 지역의 성소(聖所)인 정암사와 수마노탑에 대한 존중의 뜻을 진실하게 표현하기도 하였다. 정선군과 정암사는 10여 년 동안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수마노탑은 2020년 국보 제332호로 승격 지정될 수 있었다. 19세기 말 군수 오횡묵이 보여주었던 모습과 지난 10여 년 동안 정선지역 관민이 보여주었던 모습은 서로 닮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수마노탑 국보승격운동’은 지자체와 지역중심도량의 모범사례로 보다 널리 선양될 필요가 있다. 지난 10여 년의 과정을 백서, 또는 사례집의 형태로 정리하여 관련 기관에 배포하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