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특집 1 | 자장율사와 정암사의 역사

태백산 정암사의 역사와 사격(寺格)

김상영*
Sang-young Kim*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Professor, Joong-ang Sangha University

© Copyright 2021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Nov 25, 2021; Revised: Dec 20, 2021; Accepted: Dec 24, 2021

Published Online: Dec 31, 2021

국문 초록

태백산 정암사는 뚜렷한 창건연기를 지니고 있는 고찰(古刹)이다.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에는 자장(慈藏)과 정암사의 관계를 밝히는 다양한 기록이 전하며, 수마노탑에서 발견된 5매(枚)의 탑지석과 『정암사사적』 등의 자료를 통해 정암사 역사를 잘 살필 수 있다. 수마노탑은 정암사의 사격을 상징하는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2020년 보물 제410호에서 국보 제332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정선군과 정암사는 10여 년 동안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정암사와 수마노탑에 대한 학계의 연구 역시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 논문은 이들 연구를 바탕으로 창건 이후 정암사 역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정암사의 사격을 나름대로 제시해 보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작성되었다.

창건 이후 17세기까지의 정암사 역사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18-19세기 정암사 역사와 관련한 자료는 상당 수 전하고 있으며, 본문에서는 이 시기 진행된 불사(佛事)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필자가 제시한 정암사의 사격은 ①‘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성지(聖地)로서의 사격, ②자장율사 ‘열반지처(涅槃之處)’로서의 사격, ③문수신앙을 신봉하는 ‘문수성지’로서의 사격, ④계율을 중시하는 ‘계율도량’으로서의 사격, ⑤18-19세기 ’불교중흥도량’으로서의 사격, ⑥국보승격운동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지역모범도량’으로서의 사격 등이다.

Abstract

Jeongamsa Temple in Taebaeksan is an ancient temple with a clear history of construction. Various records revealing the relationship between 'Jajang' and Jeongamsa Temple are reported in Samguk Yusa(三國遺事). The history of Jeongamsa Temple can be well studied through materials such as the 'Stupa Inscriptions' and 'Jeongamsa Historic Site' of 5 sheets found in the 'Sumano Pagoda'. As a representative cultural heritage symbolizing the Buddhist temple status of Jeongamsa Temple, Sumano Pagoda was honored to be elevated from Treasure No. 410 to National Treasure No. 332 in 2020.

Jeongseon-gun and Jeongam-sa have put a lot of effort into promoting Sumano Pagoda as a national treasure for over 10 years. In this process, academic research on Jeongamsa Temple and Sumano Pagoda was also able to make great progress. Based on these studies, this paper was written with the purpose of comprehensively examining the history of Jeongamsa Temple since its foundation and presenting its status as a Buddhist temple in its own way.

The history of Jeongamsa Temple from its foundation to the 17th century is not known in detail. However, there are a lot of data related to the history of Jeongamsa Temple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In this text, the contents of Buddhist work conducted during this period were examined in detail. The Buddhist temple status of Jeongamsa Temple presented by the author is as follows: ① Status as one of the ‘Five Great Precious Palaces’ and a sacred site representing Korean Buddhism, ② Status as ‘the place of nirvana’ of Jajang-yulsa, ③ Status as a ‘Munsu Holy Land’ that believes in the Munsu faith, ④ Status as a ‘Buddhist seminary for religious precepts’ that emphasizes religious precepts, ⑤ Status as 'Buddhist seminary of the revival of Buddhism'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and ⑥ Status as a ‘regional exemplary Buddhist seminary’ shown in the process of the promotion of national treasure.

Keywords: 정암사; 자장율사; 『삼국유사』; 수마노탑 탑지석(塔誌石); 『정암사사적』(淨巖寺事蹟); 정암사의 사격
Keywords: Jeongamsa Temple; Jajang Precepts Master; Samguk Yusa (三國遺事); Sumano Pagoda Stupa Inscriptions (塔誌石); Jeongamsa Temple Historic Site (淨巖寺事蹟); Status as Buddhist Temple of Jeongamsa Temple

Ⅰ. 머리말

1,7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한국불교사에서 개개 사찰의 역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찰의 역사는 일반 역사 뿐 아니라, 미술사 등을 포함한 문화사 전반, 사회사, 지역사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중요성에 비추어 사찰의 역사를 정리하고, 그 속에 담겨있는 다양한 의미를 조명하는 일, 즉 사찰사(寺刹史) 연구는 아직까지 미흡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찰사는 유, 무형의 역사와 문화자산 등이 모두 포함된 수준에서 언급되어야 하며, 사찰사를 규명하기 위한 이 같은 노력이 전제될 때 한국불교사는 비로소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태백산 정암사(淨巖寺)는 비교적 뚜렷한 창건연기를 지니고 있는 고찰(古刹)이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삼국유사』에는 자장(慈藏)과 정암사의 관계를 밝히는 다양한 기록1)이 전한다. 창건주 자장과 함께 수마노탑(水瑪瑙塔)은 정암사의 사격(寺格)2)을 상징하는 대표적 성보 유산이다.3) 수마노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정암사는 ‘5대 적멸보궁’이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성지(聖地)의 하나로 손꼽힌다.

정암사는 정선군과 함께 10여 년 동안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수마노탑은 2020년 보물 제410호에서 국보 제332호로 승격 지정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비록 세 번째 도전 끝에 성취된 일이었지만, 오히려 이 과정4)에서 정암사와 수마노탑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정영호의 연구5) 이후 한동안 부진했던6) 정암사 관련 연구는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정암사는 정선군의 지원을 받아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모두 네 차례에 걸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으며, 2013년의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네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도 진행되었다.7) 이들 결과를 결집하여 총 17편의 논문8)이 수록된 학술서 『정암사 수마노탑 연구』(정선군, 2017)를 간행하였는데, 수마노탑 국보 승격은 결국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성취된 것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창건 이후 정암사 역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정암사의 사격을 나름대로 제시해 보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제Ⅱ장에서는 정암사 창건과 관계된 내용을 살펴볼 예정이며, 제Ⅲ장에서는 18-19세기에 조성된 각종 자료9)를 바탕으로 이 시기에 진행된 정암사 불사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제Ⅳ장에서는 일제강점기 이후 현재에 이르는 정암사 역사를 살펴보고자 하며, 특히 수마노탑 국보 승격의 과정과 그 의미를 주목해 보고자 하였다. 끝으로 맺음말에서는 정암사의 사격을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제시해 보고자 하였으며, 부록으로는 필자가 수집 정리한 ‘정암사의 주요 연혁’을 연표 형식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정암사는 최근 창건 1376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개산문화제를 봉행하였다(2021. 10. 9.). 이처럼 장구한 정암사 역사 관련 내용을 한 편의 논문에 모두 다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며, 이것은 곧 이 논문이 지니고 있는 한계라는 점을 아울러 밝혀두고자 한다.

Ⅱ. 정암사의 창건과 자장율사

정암사 창건주 자장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생몰연도나 일부 행적에 관계된 사실10)조차 시기 비정이 일치하지 않을 정도로 연구과제 또한 적지 않다고 하겠다. 이 글의 성격상 여기서는 자장과 관계된 일반적 논의는 제외하겠으며, 정암사의 창건과 연관된 내용만 간추려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를 위해 먼저 다음의 자료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Ⅰ-① 만년에 서울을 떠나 강릉군(지금의 溟州이다)에 수다사(水多寺)를 창건하고 살았다. 다시 이승(異僧)이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북대(北臺)에서 본 모습이었다. 그가 와서 말하기를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너를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놀라서 깨어나 아침 일찍 송정에 가니 과연 문수보살이 온 것에 감응하여 법요(法要)를 물으니 이에 말하기를 “다시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만나자”라고 하고 마침내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송정은 지금 가시나무가 나지 않고 또한 매·새매 종류가 살지 않는다고 한다). 자장은 태백산에 가서 그를 찾았는데 큰 구렁이가 나무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시종에게 일러 “이곳이 이른바 갈반지이다”라고 말하고 이에 석남원(石南院, 지금의 淨岩寺이다)을 창건하고서 문수대성이 내려올 것을 기다렸다.11)

② 사(師)는 정관(貞觀) 17년(643) 이 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하였으나 3일 동안 날씨가 어두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가서 살다가 문수보살을 뵈니 이르기를, “칡덩굴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정암사가 이것이다. 역시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12)

③ 절 안에 전하는 고기(古記)를 살펴보니 자장법사는 처음에 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산기슭에 띠집을 짓고 머물렀으나, 7일 동안이나 보이지 않으므로 묘범산(妙梵山)으로 가서 정암사(淨岩寺)를 창건하였다.13)

④ 후에 큰 소나무 아래(지금의 寒松汀이 이곳이다.) 한 거사가 갑자기 나타나 조사와 더불어 오랫동안 청담(淸談)을 나누다가 말하였다. “(스님은) 지난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 말을 마치자 곧 사라져 버렸다. 조사는 이에 자책하며, “거사는 지난날 오대산에 나타나신 범승(梵僧)의 화현일 따름이다.” (조사는) 공중을 향하여 예배를 올리고 곧 태백산을 향해 갈번의 땅을 찾아가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나무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시자에게 일러 말하길, “이곳은 문수께서 깨우쳐 주신 곳이다.” 곧 계를 내려 구렁이를 산 아래로 옮겨가게 하고 암자를 창건하여 그곳을 살나암(薩那庵, 오늘날의 정암사가 바로 그곳이다.)이라 하였다. 그 암자에서 남쪽으로 1천 보 거리에 신선동(神仙洞)이 있다. 또 다시 암자를 창건하여 ‘상살라’라 하였다. 두 암자를 왕래하면서 문수를 기다렸다.14)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정암사’라는 사명(寺名)이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등장한다(Ⅰ-①-③). 그리고 Ⅰ-④는 민지(閔漬, 1248-1326)가 지은 『오대산사적』의 내용으로, 이 자료에도 역시 정암사의 사명이 정확하게 나타난다. 민지는 일연(一然, 1206-1289)의 입적 후 그의 비문을 지을 정도로 일연의 삶과 저술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오대산사적』에 실린 자장 및 정암사 관련 내용은 『삼국유사』와 일치하지 않아 의문이 남는다.15) 어쨌든 위에서 제시한 자료는 지금까지 정암사의 창건연기를 밝히는 핵심 전거(典據)16)로 인식되고 있으며, 18세기 이후 찬술된 각종 사적 관련 자료에서도 이들과 유사한 내용이 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정암사의 창건연기 인식은 18-19세기까지 꾸준하게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장에서 상술하겠지만, 정암사는 이 시기에 이르러 도량과 수마노탑을 중수하는 불사를 다양하게 진행하였으며, 이들 불사에 관계된 자료가 다수 전한다. 우선 1972년 7월에 진행되었던 수마노탑 해체 복원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5매의 탑지석 자료17)를 들 수 있다. 이 자료는 현재 탑 내부에 다시 봉안되어 있지만, 그동안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판독문18)이 알려져 있는 상태이다. 아울러 이 시기 진행되었던 불사의 과정을 정리한 몇 종의 기문 자료가 있는데, 1778년(정조 2) 취암 성우(翠巖性愚)가 편찬한 「강원도정선군태백산정암사사적」(이하 「정암사사적」으로 줄임)19)과 「수마노탑중수사적」, 그리고 1874년(고종 11) 경운 이지(景雲以祉)가 편찬한 「수마노보탑중수지」 등을 들 수 있다. 경운 이지는 이들 3종의 자료를 취합하여 목판본 『정암사사적편(淨巖寺事蹟篇)』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정암사 역사, 특히 18-19세기의 역사는 이들 자료에 의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먼저 정암사 창건과 관계된 내용을 간추려 살펴보고자 한다.

Ⅱ-① 옛날 신라의 선덕여왕20) 때 우리나라의 대덕(大德)인 자장율사가 적현신주(赤縣神州: 中國)로 들어가, 중국 오대산에 천인(天人)이 만든 문수보살[曼殊室利] 상 앞에서 7일 동안 정진 수행하여, 꿈속에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이 설법을 해주는 감응을 입었다. 이어서 부처님의 두골(頭骨)과 부처님의 어금니[佛牙] 그리고 사리 100과를 자장율사에게 전해주며 말하길 “그대의 나라에 인연이 있는 곳 중에 삼재(三災)가 닿지 않는 명승지가 있을 것이니, 그곳에 탑을 세우고 이것들을 안치하시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자장율사가 받아 지니고서 바다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에, 당나라의 여러 승려들이 의논하여 “나라의 귀중한 보물을 어찌 해외의 작은 나라로 보낼 수 있겠는가?”라 하고는, 4부(部)의 병사들을 동원해 그것들을 빼앗으려 하였다. 대사가 바닷가로 나가서 그것을 용왕에게 전하니, 용왕이 받들어 맞이하여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 영남의 울산군(蔚山郡) 포구에 내려주었다. 얼마간의 수마호석[水瑪瑚]과 전해준 부처님의 두골과 사리를 대사에게 바쳤다. 대사가 이것들을 이 산으로 맞아들여 천의봉(天倚峯: 太白山) 아래 문수보살이 점지한 삼갈반지(三葛盤地)에 용왕이 바친 수마호석으로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탑 아래쪽에 향화(香火)를 올리는 법당을 하나를 짓고, ‘정암(定岩: 淨巖)’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21)(탑지석 제4석의 내용, 1713년 作)

② 이 산의 서쪽에 오래된 옛 절이 있으니, 정암사가 그곳이다. 신라의 자장 법사께서 당 태종 정관(貞觀) 19년 을사(乙巳, 645)년에 세존의 수마노보탑을 창건하여 비로소 48방(房)이 놓일 수행처를 열었다.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세속의 티끌22)이 아득히 끊어져서 정결하기 비할 데 없으므로, ‘정암(淨巖)’이라 이름 지었다. 천지가 개벽할 적에 이 산 위에 세 개의 나무상자가 있었는데, 미륵 부처님께서 용화회(龍華會)를 여는 때가 되면 상함(上函)에서는 부처님의 이름이, 중함(中函)에서는 경전의 이름23)이, 하함(下函)에서는 승려의 이름이 나온다고 한다. 봉우리 또한 셋이 있으니, 동쪽에 천의봉(天倚峰), 남쪽에 은대봉(銀臺峰), 그리고 북쪽에는 금대봉(金臺峰)이다. 그 가운데 보탑(寶塔)이 셋 있으니, 그 첫째가 금탑(金塔)이요, 둘째가 은탑(銀塔)이며, 셋째가 수마노탑(瑪瑙塔)이다. 수마노탑은 지키고 보존하여 지금까지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사라져서24) 보이지 않으니, 이는 산의 영기(靈氣)로 인해 은밀히 감춰진 것인가? 아니면 박복(薄福)한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산에 올라 약초를 캐는 사람들이 간혹 보기도 하지만 다시는 찾을 수 없다고 하니, 가히 신령스럽고 기이하다고 할 만하겠다. (중략) 법사는 임금께 아뢰어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안치하였다. 이어서 월정사에 13층 탑을 세우고 사리를 안치한 다음, 중대(中臺)를 개창하여 부처님의 두골[佛顱]을 봉안하였다. 다음으로 법사는 대화사(大和寺)를 창건하여 사리를 모신 뒤, 태백산의 삼갈반지(三葛盤地)를 개척하여 보탑을 건립하고서 사리와 부처님 손가락뼈[佛指節]·치아·부처님의 장주[佛掌珠]·염주·패엽경을 안치하였다. (중략) 이후에 법사는 다시 대화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홀연히 한 범승이 나타나 말하길 “그대를 태백산에서 다시 만나겠노라”라고 하고는, 곧 사라졌다. 법사가 드디어 태백산으로 들어가니, 구렁이가 나무 아래 서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에 계를 설하여 구렁이를 산 아래로 옮겨가게 하였으므로, 그곳에 하살나(下薩那)25)를 세우니, 지금의 정암사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상살나(上薩那)를 세우니, 현재의 조전(祖殿)이다.26)(취암 성우, 「강원도정선군태백산정암사사적」, 1778)

③ 우리 부처님 세존께서 열반에 드실 때 불두골(佛頭骨)·치아·손가락뼈·사리·염주·가사·패엽경 등 탑묘(塔廟)에 관한 일을 문수보살에게 부촉하시니, 문수보살은 오대산[五臺]에서 선정에 들어 시절 인연을 기다렸다. 1,000여 년이 지난 후에 우리 동국의 자장율사가 불법을 구하기 위해 서쪽 중국으로 건너가서, 문수보살이 전해 받은 위와 같은 여러 보배들을 받았다. 신라로 돌아와 공양을 올리고, 청량산의 오대사[五臺], 취서산[鷲棲: 靈鷲山]의 통도사, 그리고 이 천의봉 아래의 삼갈반지에 봉안하였다. 그런데 금대와 은대(銀臺)의 두 탑은 감추어져 보이지 않고, 마노대(瑪瑙臺)의 한 탑만이 사람들에게 보일 뿐이니, 본래부터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그러함을 모르는 것인가?27)(탑지석 제3석의 전면 내용, 1874년 作)

이상은 탑지석 제4석(1713), 「정암사사적」(1778), 탑지석 제3석(1874)에 실려 있는 내용 가운데 정암사 창건과 관계된 부분만을 시대순으로 옮겨온 것이다. 먼저 탑지석 제4석에서는 ‘용왕’이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자장이 문수보살에게 받은 진신사리를 옮겨오는 과정에 용왕이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인데, 여기서는 수마노석 역시 용왕을 통해 전해 받은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 이후 1713년까지 정암사 창건과 관련한 내용을 전하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탑지석의 내용은 1713년 무렵 정암사 사중에서 인식하고 있던 창건연기라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에 전혀 보이지 않던 ‘용왕’이 갑자기 등장한 배경28)은 알 수 없으나, ‘용왕’은 「정암사사적」에도 등장29)한다.

1778년에 편찬된 「정암사사적」에서는 우선 창건 시기를 명시해 놓은 점이 주목된다. 취암 성우는 ‘신라의 자장 법사께서 당 태종 정관 19년(645)에 세존의 수마노보탑을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아울러 ‘비로소 48방(房)이 놓일 수행처를 열었다’고 하면서 창건기의 가람규모까지 추측케 하는 점을 밝혔다. 정암사 사중에서는 현재 645년(신라 선덕왕 14) 창건설30)을 신뢰하고 있으며, 이에 근거하여 해마다 개산대제를 봉행해 오고 있다. 645년 창건설은 아마도 「정암사사적」에 근거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계속된 내용에서는 세 곳의 봉우리와 연계하여 보탑이 세 개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성우는 이 자료의 전거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사적을 편찬할 당시 사중과 인근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금탑, 은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던 듯하다. 성우는 이를 두고 “이는 산의 영기로 인해 은밀히 감춰진 것인가? 아니면 박복한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라며 한탄하였으며, “산에 올라 약초를 캐는 사람들이 간혹 보기도 하지만 다시는 찾을 수 없다고 하니, 가히 신령스럽고 기이하다고 할 만하겠다.”고도 하였다. 성우가 기록한 이른바 ‘삼탑설(三塔說)’이 단순한 설화적 내용에 불과한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또한 이 자료에서는 하살나(下薩那)와 상살나(上薩那)에 관계된 내용도 주목된다. 이것은 물론 앞서 살펴보았던 민지의 『오대산사적』과 연계된 내용이지만, 이를 통해 1778년 무렵 정암사는 ‘상살나 = 조전’, ‘하살나 = 정암사’로 구분된 도량이 각각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조전은 적어도 19세기 후반31)까지 암자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에는 산신각으로 알려진 전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32)고도 한다. 여하튼 ‘살나’의 용어 문제33)라던가 조전 관련 내용 등에 대해서는 향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사안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 그리고 18-19세기에 작성된 자료에 전하는 정암사 창건 관련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물론 사찰의 창건주와 창건연기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검토가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수많은 사찰은 그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조차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례에 비하면 정암사는 비교적 뚜렷한 창건주와 창건연기를 확인할 수 있는 사찰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최근 진행된 일련의 발굴조사 과정을 통해 드러난 유물, 유적은 정암사 역사의 공백을 메꾸어주는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34)

Ⅲ. 18-19세기 정암사의 불사와 그 의미

비교적 뚜렷한 창건연기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건 이후 17세기까지의 정암사 역사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18-19세기에 작성된 정암사 관련 자료 역시 대부분 자장과 창건기 역사 기술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를 통해,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전기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다수 출토됨으로써 정암사는 창건 이후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35)

조선시대 사찰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해당 사찰의 존폐와 관련한 부분을 확인하는 작업은 우선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는 사항이다. 조선시대 사찰은 극심한 불교탄압의 과정을 겪으면서 ‘금폐(今廢)’로 표기된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정암사의 존폐 여부는 우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530년(중종 25)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된 관찬 지리지이다. 특히 이 자료에는 전국 사암(寺庵)의 존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어 사찰의 역사를 서술할 때 긴요하게 활용되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폐사인 경우 ‘금폐’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반면, 조사 시점 존속하고 있던 사찰에 대해서는 ‘재(在)’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강원도 정선군 불우(佛宇)조에 ‘정암사 재정암산(淨巖寺 在淨巖山)’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정암사는 16세기 초까지 사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후 정암사 존폐 여부는 1682년(숙종 8) 경 찬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비고(東輿備考)』에 의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자료에도 정암사는 역시 현존사찰로 등재되어 있다.

한편, 申景濬(1712-1781)이 찬술한 『가람고(伽藍考)』 ‘정선’조에는 강선암(降仙庵), 수미암(須彌庵), 설암(雪庵) 등 세 개의 사찰만 등재되어 있으며, 1799년(정조 23)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금폐’(淨巖寺 在淨巖山 今廢)라는 기록이 있다. 『가람고』와 『범우고』에 의지해서 판단한다면, 18세기 정암사는 폐사의 지경에 이른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18세기 정암사는 여러 불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제부터 이와 관계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 장에서 이미 간략하게 언급한 것처럼, 1972년의 수마노탑 해체 복원공사 과정에서 5매의 탑지석이 발견되었다. 한 탑에서 이렇게 시기를 달리하는 탑지석이 5매나 발견된 것은 극히 드문 경우이며, 이들 5매의 탑지석을 통해 정암사의 창건주 및 창건 연기와 관계된 다양한 내용을 살필 수 있었다. 하지만 5매의 탑지석은 18-19세기의 정암사 불사와 관련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정암사사적」(1778), 「수마노탑중수사적」(1778), 「수마노보탑중수지」(1874) 등의 기문류까지 포함한다면, 이 시기 정암사 불사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오횡묵(吳宖默)이 지은 『정선총쇄록』 역시 이 시기 정암사 역사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자료이다. 특히 이 자료는 1887년(고종 24)과 1888년의 정암사 실상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36)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러면 이들 자료에서 확인되는 연대기적 자료를 바탕으로 18-19세기 정암사 불사의 실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1713년(숙종 39) 윤5월 25일, 무너진 탑을 중창함. 이 불사의 증사(證師)는 대덕(大德) 자인(慈忍) 스님이었음. ‘제2석’에 다수의 연화질(緣化秩)과 화원질(畵員秩) 명단이 수록되어 있으며, “일을 거행할 때 각 도읍의 사찰에서 사용한 재물은 그 다소에 따라서 더하여 보충하였음”이라는 내용처럼, 이 불사에는 다수의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 사찰들이 동참하였음.37)

1719년(숙종 45) 탑이 무너지자 4월 8일 수마노탑 중수 불사를 시작하여 6월 5일에 마침(제1석). 이 때 천밀(天密) 스님이 탑을 5층으로 복구하였다고 함.38).

1769년(영조 45) 취암(翠巖) 스님이 정암사에 주석하기 시작함. 취암 스님이 수마노탑 중수를 발원하고 불사를 시작하였으며, 여특(呂特)이란 노스님을 만나 이전의 보탑 중수 관련 사실을 전해 들음(「수마노탑중수사적」).

1770년(영조 46) 4월 취암 스님이 법당을 중창함. 기도를 올리고 도량과 수마노탑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기 위한 불사를 시작함. 주민들의 반대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왕실의 협조로 7월에 불사를 재개함. 은휴당(隱休堂) 시연(時演) 스님이 수백 금(金)을 모금하고 또한 자신이 모아두었던 사재를 털어서 도와줌으로써 이 때 비로소 공사가 시작되었음. 서월당(瑞月堂) 홍관(興寬) 스님도 한마음으로 찾아와 도왔다고 하며, 본군(本郡)에서도 서로 번갈아 사람을 보내어 백성들을 거듭 알아듣도록 타일렀다고 함.39) 구리 100근이 들어간 수마노탑 찰간을 서울에서(望月寺로 기록하기도 함) 제작해 옴.

1771년(영조 47) 4월 12일부터 탑의 벽돌을 쌓기 시작하여, 4월 28일 완공함.40) 12월 20일 한밤중에 느닷없이 천지가 진동하더니, 탑의 찰간이 백 보쯤이나 내던져짐.

1772년(영조 48) 안성(安城)에서 구리와 놋쇠로 찰간을 다시 제작함. 찰간을 들어서 운반할 때 설파(雪坡) 노선사가 와서 기한 내에 방광(放光)하기를 기도했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까지 뻗쳤다고 함. 5월에 찰간을 봉안하였는데, 본 탑은 7층이요, 놋쇠[銅鍮]로 만든 찰간은 5층이며, 풍경(風磬)이 32개였음.41)

1773년(영조 49) 전좌(典座) 태선(泰禪) 스님이 뽑혀 나간 찰간을 팔고 아울러 여러 인연에 따라 재물을 모아서, 향각(香閣)을 건립함. 이후 산불로 인해 조전(祖殿)이 모두 타버렸음.

1775년(영조 51) 취암 스님이 조전을 중건함.

1777년(정조 원년) 4월 「보탑중수비(寶塔重修碑)」(전면: 佛糧願碑, 후면: 寶塔重修秩)를 세움.

1778년(정조 2) 들깨 100여 말[斗]을 탁발하여 기름을 짜고, 석회를 물레방아에 찧어 탑의 틈새에 발라서, 탑이 오래도록 보전되기를 도모함. 남자 신도들에게 권하여 불량답[佛粮]을 마련토록 하였음.42) 취암 성우 스님이 「강원도정선군태백산정암사사적」과 「수마노탑중수사적」을 편찬함.

1858년(철종 9) 대규(大奎)스님이 해월(海月) 대사와 함께 적멸궁 법당을 중수하는 불사를 시작하여 한 달 여 만에 회향함.43) 이를 기념하기 위해 7월 상순 「적멸궁법당중수기(寂滅宮法堂重修記)」를 지음.

1872년(고종 9) 벽암 서호(蘗庵西灝) 스님이 수마노탑 중수를 발원하고 많은 돌을 구함. 이 불사에 남호 영기(南湖永奇) 스님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으나, 그만 불사 도중에 입적하고 말았음.44)

1874년(고종 11) 벽암 스님이 2월 13일 장인(匠人)에게 명하여 수마노탑 불사를 시작함. 3월 12일 길일(吉日)을 가려 탑을 열었고, 4월 초파일에 탑을 쌓기 시작하여, 5월 15일 아무런 장애 없이 공사를 마쳤음.45) 이 불사를 기념하기 위해 경운 이지(景雲以祉) 스님이 「보탑중수유공기」를 지었음. 이 기문에 「보탑중수대시주」 명단이 첨기되어 있는데, 주상전하·왕비전하·원자저하·대왕대비전하·왕대비전하 등은 각각 문(文) 500냥을 시주하였으며, 경빈전하(慶嬪殿下)·공주·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 등은 각각 문 100냥을 시주한 것으로 적혀 있음. ‘제3석’의 기문 역시 경운 이지 스님이 5월에 지은 것임. ‘제3석’의 후면에 새겨진 ‘연화질(緣化秩)’과 ‘대소동참시주등(大小同參施主等)’ 100여 명의 명단은 대부분 스님들로 구성되어 있음. ‘제5석’에는 이 해 4월 초8일 불염주(佛念珠)를 봉안한 금합과 은합46)을 김좌근(金左根, 1797-1869)이 홀로 시주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음.

1887년(고종 24) 전종학(全宗學) 등 6인47)이 7월 1일부터 7일간 절에 머무르며 나라와 왕실을 위한 기도48)를 올림. 이들이 7월 2일 작성한 「축문(祝文)」, 「축원산신(祝願山神)」, 「축사(祝詞)」 등의 글을 보면 민비, 즉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와 관련한 내용49)이 많음.

18세기 정암사 불사를 주도한 승려로 대덕 자인, 취암 성우, 은휴 시연, 서월 홍관, 설파, 태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취암 성우는 스스로 밝혀 놓은, 즉 “나[翠巖]는, 성은 곽씨요,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어려서부터 불문에 귀의하여 오랫동안 강의하고 설법하는 자리에 머물렀다. 그러나 후학을 길러내는 재주가 없고 나이만 들어서, 나이가 황혼[桑楡]에 가까워도 이루어낸 공이 하나도 없었다. 고금의 현철들을 미루어 보니, 대중들을 뒤로 하고 떠나서 현묘한 이치를 참구하여 도를 이루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계미(癸未, 1763)년에 지팡이 하나와 누더기 가사만을 걸치고 금강산과 묘향산에 들어가 6년 동안 정진하여 수행하고, 기축(己丑, 1769)년에 이곳 보탑 아래에 이르게 되었다.”50)는 내용을 통해 어느 정도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정암사 불사를 주도한 승려 가운데 남호 영기(1820-1872)와 벽암 서호(1837-1911)는 각각 행장 자료51)가 전하며, 이 둘을 포함한 12명 승려의 불사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손신영이 자세하게 살펴본 바52) 있다.

19세기 정암사 역사와 관련하여 응운 공여(應雲空如, 1794-?)와 청화(淸華)대사의 주석 사실이 확인된다. 먼저 공여는 을해년(1815) 여름 4월 영동에서 태백산 정암사로 들어가 탑에 예를 올리고 재를 지냈다53)는 기록이 전한다. 그는 용암 혜언(龍岩慧彦, 1783-1841)의 제자였으며,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金祖淳)에게 ‘공여’라는 호를 받았다고 한다. 공여의 정암사 주석은 한 달 여 남짓에 불과하여 도량 중창 등의 일을 직접 진행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공여에 비해 청화는 정암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던 고승이며, 『정선총쇄록』에 이와 관련한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정선군수 오횡묵은 청화대사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868년(고종 5) 춘천의 차양평(遮陽坪)에서 청화를 만난 적이 있으며, 1888년 정암사를 찾았을 때 대사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대사가 잠시 출타 중이라 만나지 못하였다. 그는 이같은 아쉬움을 달래며 총쇄록에 대사와 관련한 기록을 남겼다. 이에 의하면 청화의 속성(俗姓)은 김(金)이요, 이름은 명희(明熙)였으며, 서울 사람으로 군자(君子) 김희령(金羲齡)54)의 아들이라고 한다. 오횡묵은 대사의 부친 김희령을 “희령은 문학과 행의(行義)로 세상에서 군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청화대사에 대해 “명희는 수십 년 전부터 명산과 대천(大川)을 두루 유람하였는데, 사찰로 승려를 찾아가기도 하고, 혹은 시골마을로 문사(文士)를 방문하기도 하다가, 육근(六根)을 속세[膏火]에서 끊어내고 사대(四大)를 바리때에 의지하여 초연히 세상을 벗어난 듯한 상념을 가졌다. 그러다가 나이 51세에 경산(京山)의 성은사(聖恩寺)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는데, 그의 깨달음은 이미 출가하기 전부터 칠팔푼(七八分)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이곳에 주석한 지 꽤 여러 해가 되어서, 많은 경서를 두루 보고 도기(道氣)를 수련하여 우뚝하게 선종과 교종 양종(兩宗)의 어른이 되었다.”55)는 기록을 남겼다.

이상에서 18-19세기 정암사의 역사와 이 시기에 진행되었던 정암사 불사의 대강을 정리해 보았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이 시기 정암사 역사와 관련한 자료56)는 비교적 풍부하게 전하고 있다. 위에서 제시한 연대기적 사항은 물론 이들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구성된 것이지만, 향후 조선후기 사찰사 연구에서 정암사의 활발했던 불사 사례는 보다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아울러 이 시기 수마노탑의 중수 과정에 대한 세밀한 검토라든가, 19세기 후반 정암사와 군수 오횡묵,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김좌근 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Ⅳ. 근·현대 정암사의 역사

일제는 식민통치를 시작하는 동시에 조선 불교계에 대한 통제와 간섭 정책을 시행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불교계를 통제하기 위하여 1911년 6월 3일자 제령 제7호로 「사찰령」을 공포하였으며, 이어서 7월 8일에는 「사찰령시행규칙」을 제정하였고, 1911년 9월 1일부터 사찰령과 시행규칙의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갔다. 이들 법령에 의해 당시 전국의 사찰은 30본말사 체제 아래 속하게 되었고, 30본사 주지는 조선총독에게, 본사에 부속된 말사 주지는 지방장관에게 각각 인가를 받아야 취임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30본말사 사찰 주지 인사와 관련한 내용을 『관보』에 빠짐없이 수록하였다. 『관보』에 수록된 정암사 주지인사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2년 1월 10일 이환공(李幻空)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12년 10월 21일 이환공 스님 9월 30일 입적. 김덕송(金德松)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15년 10월 20일 김덕송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1917년 3월 22일 홍보룡(洪莆龍) 스님 주지직 겸무취직 인가
1920년 3월 21일 홍보룡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1920년 4월 20일 홍보룡 스님 주지직 재임 인가
1923년 6월 26일 홍보룡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이우영(李愚榮)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24년 9월 29일 이우영 스님 주지직 사직
1924년 10월 29일 변지안(邊智眼)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28년 12월 5일 변지안 스님 주지직 재임 인가
1930년 12월 3일 변지안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1931년 5월 7일 어철화(魚鐵花)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33년 8월 13일 어철화 스님 주지직 사직
1933년 10월 25일 주도치(周道致)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35년 11월 30일 주도치 스님 주지직 사직
1936년 4월 6일 최성암(崔性庵)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39년 4월 6일 최성암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1939년 6월 28일 박양용(朴亮容)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42년 6월 10일 박양용 스님 주지직 사직
1942년 7월 13일 삼산타암(三山馱庵)57)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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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일제강점기 주지직을 역임한 스님 가운데 홍보룡(洪莆龍) 스님의 1919년 중수불사 진행 사실이 확인된다. 「태백산정암사중수기」의 다음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본 태백산의 정암사는 명승대지(名勝大地)이다. 그러나 창건한 지 이미 오래되도록 너와[木瓦]로 지붕을 이어왔을 뿐, 기와[土瓦]를 잇는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심히 개탄치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기미(己未, 1919)년 봄에 홍보룡(洪甫龍) 주지 스님과 화주(化主) 김혜봉(金慧峰) 스님이 한편으로는 서로 의논을 하고, 한편으로는 장인(匠人)을 불러 모았다. 5월 4일 기와를 올려 법당과 칠성각(七星閣) 등 큰절을 중수하고, 5월 7일 낙성예식(落成禮式)을 베풀었으니, 훗날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공로가 있다고 하겠다. 대정 7년 기미년 음력 5월 일59).

일제강점기 정암사와 관련한 내용은 이 시기 발행된 몇 건의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에 실린 정암사 관련 기록은 총 8건이 보이는데, 이 가운데 5건은 사찰림과 관련한 내용이며, 3건은 국방헌금 납부와 관련한 기사 내용이다. 『매일신보』의 기사 제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60)

  • ① 「寺刹 風致林 供出 十 三日 淨岩寺林에 斧入式」(1945년 04월 13일)

  • ② 「旌善 淨巖寺 寺有林 利用作業案 編成 - 道 山林課에서 調査」(1939년 10월 20일)

  • ③ 「淨岩寺의 寺有林 卅萬尺締를 伐採 十個年計劃으로 開發」(1938년 9월 1일)

  • ④ 「十年間繼續事業으로 淨岩寺有林伐採」(1938년 08월 25일)

  • ⑤ 「崔性菴氏特志」(淨岩寺國防獻金, 1939년 01월 7일)

  • ⑥ 「江原道의 國防獻金 七萬圓을 遂突破 - 到處에 赤誠의 奔流」(1939년 9월 2일)

  • ⑦ 「勤勞所得獻金」(1939년 09월 02일)

  • ⑧ 「山林王國旌善郡에 林道開發具體化 五萬圓經費를 計上」(1938년 09월 20일)

해방 이후 1960-70년대의 정암사 역사61)에서 주목되는 일은 역시 수마노탑과 관계된 일들이다. 수마노탑은 1964년 9월 3일 보물 제410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보물 지정 직후 『대한불교』 47호(1965. 10. 31)에는 「水瑪尼塔 補修는 언제?-全面倒壞直前에 束手無策 財産處分 안돼. 財源막히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으며, 『대한불교』 286호(1969. 2. 9.)에는 「국보 410호 탑 탑신에 금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특히 1969년의 기사에는 ‘오랜 풍우로 탑신 전체가 금이 가 있으며, 탑이 동쪽으로 5도가량 기울어 도괴 직전에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 수마노탑의 보존 상태가 매우 위험한 수준에 처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문화재 당국은 1972년 7월부터 수마노탑에 대한 해체 복원공사를 진행하였으며,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 과정에서 사리장엄과 탑지석 5매 등의 소중한 성보 유산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정암사 역사에서 등각(登覺) 스님의 활동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님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이곳의 주지로 재직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일주문, 육화정사, 범종각, 삼성각, 자장각을 중창하고 범종을 주조하였으며, 계류에 가로놓여 각각 적멸궁과 탑을 향하는 돌다리 두 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62) 스님은 또한 동국대 이종익 교수에게 『정암사사적편』의 번역을 부탁하여 『수마노탑과 자장율사』(1977)의 출판을 이루어 내기도 하였다. 한편, 1963년 석주선(石宙善, 1911-1996) 선생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남아있는 것만도 고마운데 날로 헐어가는 淨岩寺 ‘금란가사金欄袈裟’」라는 제목의 글은 이 시기 정암사의 아픈 역사로 기억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이 기고문 가운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절에는 아직도 선덕여왕이 하사한 金爛袈裟가 남아있다. 이 가사는 자장법사께서 친히 입었던 것으로 一三○○여년 내려오는 동안 많이 상하기는 하였으나 色하나 變치 않은 가사 모양이 그대로 있다. 橫이 一五二 「센티」, 縱이 八五 「센티」, 주위의 선이 五.五「센티」, 二四條로 된 과거의 화려하였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材料는 紅金線緞에 藍金線緞으로 裙이 둘러져 있고 바느질의 技法도 하나의 藝術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國寶的 유물, 우리나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물을 누가 이해하는 이 별로 없고 너무나 소홀히 보관되어 있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국가의 하나의 중한 보물이거늘 그렇게도 좀 먹고 습기 차고 누구나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어 있으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수명을 좀 더 길게 한다는 뜻에서 잠시나마 내가 金襴袈裟를 대하였을 때는 목욕재계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조그마한 유리함에서 꺼내어 防蟲的 의미에서 다리미질을 곱게 하여 다시 모양을 갖추어 유리함에 넣고 돌아왔다.

이것은 소중하다기 보다도 천으로 된 하나의 물건이 一三○○餘年이 넘도록 그 형태를 갖추어 남아 있다는 감사함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여진 處事라 하겠다. 하루 속히 문화재에 대한 일반 인식이 필요한 동시 계몽이 필요하다. 여기 따라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유물을 한자리에 모아 놓는다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에 산재해 있는 유물은 최선을 다하여 보관할 수 있도록 중앙에서 어떤 대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대로 방치 상태로 나아가면 金襴袈裟 같은 귀중한 유물들이 몇 해 안가서 자연 소멸될 것이다(『조선일보』 1963년 11월 8일자).

석주선은 한국복식사 분야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963년 정암사에 보관되어 있던 자장의 금란가사63)를 친견하고, 그 가사의 빼어난 솜씨를 찬탄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보급 유물인 금란가가의 열악한 보존 상태를 크게 우려하였으며, 기사를 통해 국가 차원의 시급한 대책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대로 방치 상태로 나아가면 금란가사 같은 귀중한 유물들이 몇 해 안가서 자연 소멸될 것이다.”는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으며, 지금 자장의 금란가사는 그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상태이다.64)

정암사의 현대사에서 수마노탑 국보 승격을 위한 활동은 가장 주목되는 일이다. 지역신문(『강원일보』)과 불교계 신문(『법보신문』 등)에서 2020년 10대 뉴스의 하나로 선정할 만큼 수마노탑 국보 승격은 지역사회와 불교계 전체에서 큰 환영을 받았던 쾌거였다. 정선군과 정암사는 두 차례에 걸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특히 학술세미나 개최, 발굴조사, 자료집 발간으로 이어졌던 학문적 성과는 결국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받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수마노탑 국보 승격을 추진하였던 핵심 주체는 정선군청과 정암사였다. 먼저 정암사는 두 차례에 걸친 천일기도(2016년 1월 10일과 2018년 10월 6일 각각 입재)를 봉행하는 한편, 군 관계자들, 그리고 지역사회와 활발한 교류를 펼쳐 나갔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수마노탑 국보 승격이 단지 정암사라는 특정 사찰의 경사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다. 또한 군 관계자들은 행정적 노력과 함께 관민(官民)이 함께 하는 ‘승격운동’ 차원으로 이 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정선종합경기장에서 개최된 ‘제37회 정선군민의 날 기념 군민체육대회’(2019. 6. 20.)는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기원하는 행사로 기획되기도 하였다. 문화재위원회의 실사가 임박하자, 정선군 9개 읍·면 주민들, 지역의 100여 개 사회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승격 발원’ 현수막을 게시하였다. ‘불교성지’의 국보 승격을 위해 지역의 개신교와 천주교 측에서도 적극 협조하였다. 결국 ‘2전3기’의 도전 끝에 수마노탑은 국보 승격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65)

Ⅴ. 맺음말-정암사의 사격

태백산 정암사는 뚜렷한 창건연기를 지니고 있는 고찰(古刹)이다.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에는 자장과 정암사의 관계를 밝히는 기록이 전하며, 수마노탑에서 발견된 5매(枚)의 탑지석과 『정암사사적』 등의 자료를 통해 18-19세기 정암사 역사의 구체적인 불사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최근에는 발굴조사를 통해 나말여초 시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 논문은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창건 이후 정암사의 역사를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하였으며, 이제 맺음말에 대신하여 정암사의 사격을 나름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 정암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성지(聖地)로서의 사격을 지니고 있다. 부처님 진신사리는 불자들에게 있어 가장 성스럽고 소중한 신앙의 대상이다. 이로 인해 진신사리를 봉안한 도량은 ‘보궁(寶宮)’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으며, 정암사 역시 적멸보궁과 수마노탑으로 연계된 보궁신앙을 간직하고 있다. 그 정확한 유래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현대 한국불교에는 ‘5대 보궁신앙’이 자리 잡고 있으며, 정암사는 보궁신앙의 성지로서 뚜렷한 사격을 유지해가고 있다.

둘째, 정암사는 창건주 자장율사의 ‘열반지처(涅槃之處)’라는 사격을 지니고 있다. 아직까지 일부 연구자들은 자장의 만년 행적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한다. 하지만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의 자료적 가치, 특히 이들 전적이 월정사 사중의 전승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조전(암)’은 창건주 자장을 기리기 위한 전각이다. 1778년 무렵까지 정암사는 ‘상살나=조전(암)’, ‘하살나=정암사’로 구분된 도량이 각각 존재하고 있었으며, 1887년 오횡묵이 조전을 탐방했을 때도 암자 자체는 존재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상 자장의 만년 행적은 오대산과 태백산 일대에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결국 정암사는 자장의 입적 도량이라는 사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셋째, 정암사는 문수신앙을 신봉하는 ‘문수성지’로서의 사격을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 등에는 ‘문수보살 친견’이 마치 자장의 일대기를 상징하는 일처럼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곧 자장의 문수신앙이 매우 특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대산 월정사와 태백산 정암사는 오랫동안 자장의 불교를 계승하고 있으며, 문수신앙의 성지와도 같은 위상을 간직하고 있다. 한국불교사에서 이 같은 사례는 매우 드문 경우에 속하며, 따라서 ‘문수성지’로서의 정암사 사격은 정암사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더욱 중시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넷째, 정암사는 창건주 자장 이후 오랫동안 계율을 중시하는 ‘계율도량’으로서의 사격을 지니고 있다. 『속고승전』 「자장전」은 자장의 일대기에서 지계(持戒)와 수계(授戒)에 관련된 행적을 집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연 역시 『삼국유사』에서 자장을 ‘정률(定律)’로 상징화하였다. 최근의 발굴조사를 통해 정암사 경내에서는 ‘敎律淨嵓講’, ‘淨嵓律舍’, ‘律淨嵓寺’ 등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정암사는 ‘율사 자장’의 계율 전통을 오랜 기간 동안 유지해 오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창건주 자장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던 ‘계율도량 정암사’는 정암사의 사격과 관련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다섯째, 정암사는 18-19세기 조선불교사에서 독보적 불사를 추진했던 ‘불교중흥도량’으로서의 사격을 지니고 있다. 본문에서 자세하게 살펴본 것처럼, 정암사는 18-19세기 매우 활발한 불사를 추진하였다. 이 시기 불교계가 처해 있던 제반 상황을 감안한다면, 정암사의 불사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 시기 불교는 곧 근 현대 불교사의 전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정암사는 벽지(僻地)에서 불교 중흥을 위해 뚜렷한 자취를 남겼던 도량으로, 보다 새롭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여섯째, 정암사는 지역의 관민(官民)과 함께 하는 ‘지역모범도량’으로서의 사격을 지니고 있다. 1887년 군수로 부임한 오횡묵은 선정을 펼쳤으며, 이에 감동한 지역의 선비들은 정암사를 찾아 7일간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오횡묵은 『정선총쇄록』에서 이 지역의 성소(聖所)인 정암사와 수마노탑에 대한 존중의 뜻을 진실하게 표현하기도 하였다. 정선군과 정암사는 10여 년 동안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수마노탑은 2020년 국보 제332호로 승격 지정될 수 있었다. 19세기 말 군수 오횡묵이 보여주었던 모습과 지난 10여 년 동안 정선지역 관민이 보여주었던 모습은 서로 닮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수마노탑 국보승격운동’은 지자체와 지역중심도량의 모범사례로 보다 널리 선양될 필요가 있다. 지난 10여 년의 과정을 백서, 또는 사례집의 형태로 정리하여 관련 기관에 배포하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하고 싶다.

Notes

『삼국유사』 권3 탑상편의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그리고 권4 의해편의 「자장정률(慈藏定律)」조에 각각 관련 내용이 실려 있다.

“사격은 과거 전통시대 불교에서 사용되지 않던 용어이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용어는 일제강점기 이른바 본말사법(本末寺法)이 제정, 시행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분히 제도적 성격을 띤 상태에서, 그것도 일본불교의 영향 속에서 자리를 잡게 된 표현이라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이제 사격은 인격, 품격 등과 같이 특정 사찰이 지녀왔던 또는 현재 지니고 있는 위격(位格)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김상영, 2017: 142).

정암사와 수마노탑의 상관성에 대해 신대현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정암사 창건과 수마노탑 건립은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일어난 연속선상의 일이다. 다른 사찰의 경우 역사 기록의 패턴에 있어서 탑을 세운 일은 창건담에 부속된 일부로 다루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정암사의 경우는 수마노탑 건립이 창건담과 거의 엇비슷한 비중으로 다루어져 있다. 이는 곧 정암사에 있어서 수마노탑의 의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傍證이기도 하다. 이렇게 수마노탑은 정암사를 말할 때 빠트릴 수 없는 부분이라서 정암사 사적 등 모든 정암사 관련 기록마다 수마노탑이 함께 언급되어 왔던 것이다.”(신대현, 2017: 112).

정선군은 2011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수마노탑 국보 승격 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역사적·학술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모두 부결되었다. 정선군과 정암사는 이러한 아쉬움을 극복하면서 정암사 관련 학술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그 결과가 2020년의 국보 승격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정영호(1960, 1975a, 1975b). 한편, 이능화는 수마노탑을 중시하는 내용의 간략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1917).

이 기간 동안 이종익의 책(1975)과 흥선 스님과 김효형이 함께 엮은 책(1995)이 출간되었다. 두 책은 주로 정암사 관련 자료를 번역, 소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격적인 학술서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강원도문화재연구소는 그동안 진행된 발굴조사 성과를 정리하여 두 권의 보고서(2015, 2016)를 간행하였으며, 2018년 이후 진행된 발굴조사의 주요 성과는 두 권의 약식보고서(2018, 2020)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7편의 논문 가운데 이 논문 작성을 위해 주로 참조한 논문은 남무희(2017), 신대현(2017), 염중섭(자현, 2017), 정병삼(2015)의 논문이다.

수마노탑에서 발견된 탑지석 5매와 「정암사사적」(1778), 「수마노탑중수사적」(1778), 「수마노보탑중수지」(1874) 등의 기문류 자료, 그리고 오횡묵(吳宖默)이 지은 『정선총쇄록(旌善叢鎖錄)』 등을 통해 이 시기 정암사의 역사와 관계된 내용을 상세하게 살필 수 있다. 이들 자료는 이번에 발간된 문헌자료집 『정암사의 역사와 자장율사』(정암사, 2021)에 실려 있으며, 수록된 자료의 번역은 대부분 윤찬호 선생이 담당한 것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자장의 행적 가운데 그의 ‘동북방행(東北方行)’, 즉 그가 오대산과 태백산 일원에 실제로 행차하였는가 또 행차하였다면 그 시기는 언제였을까 하는 문제에 대한 이견이 적지 않다. 일부 연구자들은 『속고승전』 「자장전」에 이와 관계된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자장의 동북방행 자체를 부정한다. 또한 일부 연구자는 다소 비극적인 결말 내용을 담고 있는 『삼국유사』 자장 관련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자장의 만년 행적은 오대산과 태백산 일대에 집중되었으며, 정암사는 곧 자장의 입적 도량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논문은 이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임을 전제해 두고자 한다. 정병삼 역시 “자장의 행적과 관련하여 경론의 강론과 수계, 승단 통제와 사탑 건립 등 『속고승전』에서 밝힌 내용과 불사리의 전수와 황룡사탑의 건립 및 통도사 계단의 창건 등에 더하여 오대산과 태백산에 신앙 근거를 마련한 것도 가능성 있는 행적으로 보고자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정병삼, 2015: 135).

“暮年謝辝京輦於江陵郡(今冥州也) 創水多寺居焉 復夢異僧状北臺所見來告曰 明日見汝於大松汀 驚悸而起 早行至松汀 果感文殊來格 諮詢法要 乃曰重期於太伯葛蟠地 遂隠不現(松汀至今不生荊刺 亦不棲鷹鸇之類云) 藏徃太伯山尋之 見巨蟒蟠結樹下 謂侍者曰 此所謂葛蟠地 乃創石南院(今浄岩寺) 以候聖䧏”(『삼국유사』 권4 의해 「자장정률」).

“師以貞觀十七年來到此山 欲覩真身 三日晦隂 不果而還 復住元寧寺 乃見文殊云 至葛蟠處 今淨嵓寺是 亦載别傳”(『삼국유사』 권3 탑상 「대산오만진신」).

“按寺中所傳古記云 慈藏法師初至五䑓欲覩真身 於山麓結茅而住 七日不見 而到妙梵山創淨岩寺”(『삼국유사』 권3 탑상 「대산월정사오류성중」).

“後於大松下(今寒松汀是也) 一居士忽現 與師淸談 良久而謂曰 昔日之約 卿識之乎 言已卽滅 師於是自責曰 居士是昔日五臺山所現梵僧化現耳 向空頂禮 卽向太白 尋葛蟠處 見大蟒蟠在大樹下 謂侍者曰 此文殊所諭之地 卽受戒移蟒於山下 創院曰薩那(今淨岩寺是也) 從此院而南去一千許步 有神仙洞 又創蘭若曰上薩那 往來兩寺以待文殊”(민지, 『오대산사적』, 「五臺山月精寺開創祖師傳記(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 『오대산사적』의 내용은 한국목간학회의 자료집에서 옮겨온 것이다(한국목간학회 편, 『『五臺山事蹟』 및 『御牒』의 解題와 譯註』, 한국목간학회 하계워크샵 자료집, 오대산 월정사, 2014).

강호선 역시 “그러므로, 『오대산사적』은 기본적으로는 일연이 참고한 것과 거의 동일한 기록을 바탕으로 찬술된 것으로 보이지만, 『유사』 외에도 관련된 여러 자료들과의 대조가 필요하며, 또한 민지가 찬술한 다른 사적기와의 비교도 요구된다. 민지와 일연의 관계도 주목되므로, 민지와 일연, 민지의 사적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에 대한 상호분석은 『오대산사적』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강호선, 2014: 3).

정병삼은 일연이 월정사에 대해서는 자장의 창건을 확정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에 비해 정암사에 대해서는 이견 없이 자장이 창건한 확실한 고찰임을 말하고 있다. 자장이 오대산에서는 문수를 친견하는 데 실패했으나, 태백산에서 문수가 지시해 준 터를 찾아 훗날 정암사가 된 石南院을 창건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장의 만년 행적이 분명하지 않아 확정하기 어렵지만, 전승이 다양하지 않은 정암사 기록이 오대산에 비해 자장과의 관계가 더 분명한 편이다.”는 견해를 밝혔다(정병삼, 2015: 131-132).

수마노탑에서 발견된 탑지석 5매에 대해서는 손신영과 신대현의 연구가 주목된다. 손신영은 그동안 잘못 알려져 왔던 탑지석의 조성 시기를 바로 잡아줌으로써 관련 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제2석과 제4석의 조성 시기를 모두 1713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이후의 관련 연구에서는 대체로 그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는 또한 불교미술사 관련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제3석’ 즉 1874년의 중수불사 기록에 등장하는 12명의 승려에 관계된 내용도 소개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 연구는 상당한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손신영, 2014). 한편, 신대현은 탑지석 5매가 지니는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그동안 탑에서 발견 또는 출토된 탑지석의 예가 봉화 서동리 삼층석탑, 불국사 삼층석탑,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월정사 구층석탑,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등 그다지 많은 예가 없었으므로 수마노탑 탑지석은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수마노탑 탑지석은 5매가 발견되었는데 한 탑에서 이렇게 시대를 달리하는 탑지석이 5매나 발견된 예는 지금까지 없었다. 해당 탑 건립 당시의 배경과 관련인물 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1차 사료이다. 수마노탑은 문화재적으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이 탑지석으로 인해 더욱 가치가 있다. 정암사 탑지석은 그것이 봉납되었던 조선시대 중후기 중건의 사적은 물론이고, 신라시대의 불교와 문화면에서 상당히 커다란 역할을 했던 자장의 행적과 창건 정신 및 불교사적인 의미까지도 담겨 있어 신앙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역사자료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신대현, 2017: 124-125).

탑지석 5매의 판독문은 대부분 황수영의 『金石遺文』(혜안출판사, 2000)을 따르고 있으며, 신대현이 최근 연구에서 일부 글자를 보입(補入)·수정하였다. 비록 실물을 직접 대할 수 없다는 한계는 있으나, 이번에 발간되는 자료집(『정암사의 역사와 자장율사』)에 조금 더 보완된 내용의 판독문이 수록되었다.

『太白山世尊寶塔與靜巖寺事蹟紀』(계명대 동산도서관, 필사본, 294.369-성우ㅌ), 『江原道㫌善郡太白山淨巖寺事蹟』(송광사 성보박물관, F-3-17), 『淨巖寺事蹟』(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2012), 『江原道旌善郡太白山淨巖寺事蹟』(고려대 도서관, 화산C3-A100), 『江原道旌善郡太白山淨巖寺事蹟』(동국대 중앙도서관, D218.61-강67).

원문에는 “新羅乾德之時”로 되어 있으나, 위와 같이 교정하여 번역하였다.

“往在新羅乾德之時 我國慈藏大德律師 入赤縣神州 於五臺山 天人所成 曼殊室利菩薩像前 七日精修 夢感眞身爲說法 仍以佛頭骨·佛牙與舍利百粒 授之曰 汝國有緣三災之不到處 建塔以安之 言訖遂隱 大師受持 欲渡海還國時 大唐諸釋議曰 國之重寶 豈送海外小國耶 發四部兵將 欲奪之 大師投於海邊 授之龍王 王奉邀渡海於我疆岺南蔚山郡浦 以水瑪瑚若干片 與所授佛頭骨·舍利 奉于大師 師邀入是山 天倚峯下 神得三葛盤之地 以龍王所獻水瑪瑚 立塔奉安 塔下造香火一所 以定岩扁之云矣”.

원문의 ‘형(炯)’은 ‘연(烟)’의 잘못으로 보인다.

‘경(經)’ 뒤에 ‘명출(名出)’자가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원문에는 “金銀喼”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상 “金銀隱”으로 보인다.

하살나(下薩那): 아래의 수행처란 뜻이다. 살나(薩那)는 한역하면 ‘의지(依止)’로, 수행자가 머무르며 수행하는 곳을 말한다.

“山之西有古寺 曰淨巗 新羅 慈藏法師 唐太宗 貞觀 十九年 乙巳 創建世尊水瑪瑙寶塔 而始開四十八房之處 林壑蔽日 敻絶塵炯 淨潔無穢 故扁額 曰淨巖 天開之初 山上有三函朴 彌勒龍華會時 上函佛名出 中函經 下函人名出 峰亦有三 東天倚峰 南銀臺峰 北金臺峰 於中有三寶塔 一金 二銀 三瑪瑙 瑪瑙于今守護者 金銀喼而不現 無乃山靈之秘藏歟 薄福者難見歟 入山採藥者或見 而再不訪 可謂靈奇也 (中略) 師奏建皇龍寺九級塔 而藏舍利 次竪月精十三層塔 而藏舍利 因開中台 而安佛顱 次創大和寺 藏舍利 次啓太白山三葛盤地 而建寶塔 藏舍利·佛指節·齒牙·佛掌珠·念珠·貝葉經 (中略) 伊後法師 再住大和寺 忽有梵僧曰 再見卿於太白山云云 卽滅 遂入此山 蟒盤樹下 說戒移蟒於山下 因建下薩那 今淨巖是也 南去十里 建上薩那 今祖殿是也”.

“吾佛世尊示入涅槃 以佛頭骨·齒牙·指節·舍利·念珠·袈裟·貝葉等 塔廟事 付囑文殊 文殊入定五臺 以待時緣 千有餘年 東國慈藏律師 求法西遊 受文殊所傳如上數寶 歸供養 而奉安於淸凉之五坮·鷲棲之通度 及此天倚峯下三葛盤之地 而金銀二坮隱而不現 瑪瑙一坮現人耳 目抑隱現俱成 而人不知然耶”.

염중섭(자현)은 이에 대해 “수마노는 ‘수(水)+마노(瑪瑙)’가 결합된 명칭인데, 여기에서의 ‘수’는 용궁과 관련되어 있다는 푸른 바다의 의미에, 푸른색이라는 질료적인 특징이 결합된 의미이다. 즉, 수마노탑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용궁에 관한 부분이 대두하고, 이것이 태화지 용을 서해용왕으로까지 대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염중섭(자현), 2018b: 120).

“정관 17년 계묘(癸卯, 643)년에 천자에게 아뢰어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때 당의 승려들은 귀중한 보배들이 변방으로 옮겨가는 것을 시기하여서, 병사를 동원하여 그것을 빼앗고자 하였다. 법사는 그 음모를 미리 알고서, 몰래 서해(西海)로 가는 뱃길을 택하였다. 이에 서해 용왕이 법사를 용궁에 맞이하여서, 공경히 예배하고 공양하였으며,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압침(鴨枕)을 바치며 말하길 ‘법사의 본국에 있는 황룡사라는 곳에는, 가섭불과 석가불께서 마주 앉아 설법하시던 바위가 아직 남아 있는데, 저의 맏아들이 가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용왕은 곧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의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실어주고 울진포(蔚珍浦)까지 운반해 주었다. 그리고는 용왕의 신통력으로 이곳 태백산에 옮겨두어서, 장차 불탑을 세우고 고치는 데 쓸 보배로 삼도록 하였다.”(貞觀十七年癸卯 奏還本國 爾時唐僧妬其重寶之去邊邦 欲興兵遮竊 師先知其謀 暗浮西海 西海龍王奉入本宮 敬禮供養 以紫檀木鴨枕獻曰 師之本國皇龍寺者 迦葉佛與釋迦佛相對說法座石尙存 吾之長子往護其寺 龍王卽以瑪瑙無數片載船 到蔚珍浦 以龍王神力藏于此山 將爲佛塔修補之寶).

「황룡사찰주본기」에 의하면 황룡사구층목탑은 645년 4월에 착공해서 다음해인 646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자현 스님은 “황룡사구층목탑의 건립은 귀국한 자장이 경주 안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한 대작불사이자,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국책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시기에 자장이 왕복으로 상당한 기간을 요하는 명주행을 단행했다고 보는 것은 동의하기 쉽지 않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염중섭(자현), 2018a: 376).

“이튿날(1887년 7월 3일) 아침에는 길을 안내해 줄 스님과 함께 10리쯤 떨어져 있는 조전으로 향했다. 암자는 텅 비어 사람이라곤 없었으며, 다만 문수보살의 유상만 남아 있었다(翌朝與指路一僧 往十餘里祖殿庵虛無人 但有文殊菩薩遺像).”(「태백산갈래사건성일록(太白山葛來寺虔誠日錄)」, 『정선총쇄록』).

“조전은 바로 자장스님이 돌아가신 곳이다. 따라서 정암사로서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지만, 현재는 그 흔적조차 희미해 안타까움이 크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정암사를 휘돌아 흐르는 계곡을 끼고 만항재를 향해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2킬로미터쯤 가다보면, 이곳 사람들이 ‘평화촌’이라 부르는 허름한 마을이 나선다. 그 마을을 가로질러 동쪽 산기슭을 100미터 가량 오르면 산줄기의 끝머리에 아담한 집이 한 채씩 들어설 만한 평평한 터가 아래위로 있다. 이곳이 조전터이다. ‘수마노탑 중수사적’에 산불로 모두 불타버린 조전을 1775년에 취암 스님이 재물을 시주받아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8세기 말까지는 암자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언제 무슨 이유로 조전이 없어지게 되었는지는 고증할 길이 없다. 이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 산신각으로 알려진 작은 건물이 있었으나, 70년대에 불어 닥친 ‘미신 타파’의 바람에 헐리게 되었다고 한다.”(흥선·김효형, 1995: 28).

염중섭(자현)은 살나에 대해 “살나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하(下)’는 아래라는 의미가 분명하다. 여기에 일연이 제시하고 있는 석남원의 명칭을 환기해 보면, 살나는 바위를 나타내는 방언이 아니었을까 추정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또 석남원과 살나가 후대 개변된 명칭이 다름 아닌 정암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살나는 ‘깨끗한 바위(淨巖)’와 같은 의미였을 개연성이 존재한다. 즉, 석남원의 ‘바위 남쪽 사찰’이라는 의미처럼, 하살나 역시 ‘바위 아래 사찰’이라는 뜻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염중섭(자현), 2018b: 123). 하지만 살나(薩那)는 한역하면 ‘의지(依止)’로, 수행자가 머무르며 수행하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하살나’는 곧 ‘아래에 있는 수행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정병삼은 발굴조사 성과를 요약하면서 “주목되는 것은 ‘大平三’, ‘大平’, ‘律淨嵓寺’, ‘敎律淨嵓講’, ‘淨嵓律舍’, ‘思甫造善’, ‘師甫造’ 등 다양한 명문기와가 출토된 점이다. 대평 3년은 1023년이므로 이들 기와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함께 출토된 청자편 또한 음각 양각 압출양각 상감 등 여러 기법을 보이고 있어 11~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들 건물터와 유물은 정암사가 고려 전기에 번창하였음을 알려준다. ‘敎律淨嵓講’ ‘淨嵓律舍’와 같은 명문으로 보아 교리를 강설하는 강당 시설이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고 하였으며, “고려 전기의 유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정암사가 고려 전기에 번창했던 자취의 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건물지 세 곳 모두에서 통일신라 제작 가능성이 있는 연화문 수막새 기와 등이 출토된 것은 정암사가 신라말에 창건되어 고려 전기에 번영했음을 확인해 준다”고도 하였다(정병삼, 2015: 139).

정병삼은 이에 대해 “특히 ‘敎律淨嵓講’ ‘淨嵓律舍’ ‘律淨嵓寺’ 등의 명문 기와가 갖는 의미는 크다. 정암사가 자장을 창건조로 강조하듯이 자장이 창도했다고 하는 계율 계통의 전통을 잇는 사찰임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와 고려의 종파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율종의 존재를 명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律舍’, ‘律寺’는 계율을 중심으로 하는 뚜렷한 계통의 존재 가능성을 분명히 해 주며, ‘敎律’은 계율을 강론하는 흐름 또는 계율과 교학을 병행하는 흐름 등의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들 명문 기와는 정암사가 적어도 신라말에 자장을 계승하는 계통에 의해 창건되어 계율을 중심으로 활동했음을 말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려시대의 종파와 사찰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알 수 있는 자료가 매우 적은데, 정암사와 계율의 관계는 새로운 자료로서 큰 의미가 있으며, 장차 고려 불교 종파의 해명에도 의미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는 견해를 밝혔다(정병삼, 2015: 139-140). 한편, 1972년 수마노탑을 해체 수리할 때 ‘정암선원년기(淨巖禪院年記)’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으로 만든 도장이 발견되었으며, 그 손잡이에는 ‘선원주기(禪院朱記)’ 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고 한다(흥선·김효형, 1995: 15). 정암사가 어느 시기에 ‘선원’으로서의 사격을 유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세밀한 검토가 필요한 사항으로 보인다.

『정선총쇄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정암사 경내에는 수마노탑·적멸궁·칠성각·산신각·소요각(逍遙閣) 등이 있었으며, 조전암의 실재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화운(華雲)·덕월(德月)·시연(時淵)·운악(雲岳)·성오(性悟)·인우(仁雨)·긍인(亘諲)·기엽(琪燁)·계환(戒環)·달상(達祥)·달현(達賢)·성안(惺安)·성호(性浩) 등의 승려와 김희령(金羲齡)의 아들인 청화(淸華) 대사의 주석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자장이 읽던 것으로 알려진 경문 수십 권과 그의 가사, 그리고 그의 지팡이로 심었다고 전하는 고목 등이 실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넷째, 당시 지역민들에게는 ‘갈래사(葛來寺)’라는 사명이 통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而新羅乾德不知其幾千載也 然其時所創寺刹 盡爲空虛 所立奉安塔 自是差頹 山緇野白 慨然于志 同共發心 出貨財召良工 逮萬歷後百餘年之至癸巳三月二十五日 虔禱始役 而同年閏五月日完役 而後考以記之”(제4석). “呂特老宿曰 去康熙五十二年 癸巳 鷲峰堂慈忍·一宗二禪 使天密募緣重修時 我參其供養主 詳見其事 三月祈禱始役 五月點眼 下層作法堂 安石拂石金剛 上層安凡僧舍利矣 八月十五日夜半 忽然霹靂破塔 佛及金剛折項黜之 因以霜災 人聞其事 莫不驚怪 越六年己亥 天蜜不勝慨然 再鳩檀財 僅築五層坮 非聖力 安得如是”(「수마노탑중수사적」).

“噫壞空數也 修造緣也 康熙五十八年己亥 天密造五層塔 而功不久完浚”(제3석).

“五十餘載 乾隆三十六年庚寅 翠嵒性愚作七層 而纔經百五 傾頹過半 天神緇素咸歎久矣”(제3석). “余聞其說 身心悚懼 尤切誠信 乾隆 三十六年 庚寅 四月 祈禱濫觴 而請木石工匠 寶塔與寶宮衆寮 一時辨設 而衆幾百餘 然正道興魔戱作 近邑村氓屯議曰 去癸巳 修塔 民受其殃 今又重修 應有其禍 告官至危境 勝事遠聞 朝家賜香燭 遣使看檢 瑞月堂興寬同心 來助魔伏 而本郡亦遣使 遞相申勅”(「수마노탑중수사적」). ‘제3석’ 원문에 “乾隆 三十六年 庚寅”으로 되어 있는데, 건륭 36년은 신묘(辛卯, 1771)년이고, 경인(庚寅)년은 건륭 35년(1770)이다. 내용으로 보아 건륭(乾隆) 35년 경인(庚寅, 1770)년으로 보아야 한다.

“因上京得宮銅百餘斤 與瑞月塤箎相應 入望月寺 成刹竿 借沿軍交發羿運 至月奉安 辛卯磚石 四月念八落成 洞門下雪尺許 翫人不入 佛事正安”(「수마노탑중수사적」).

“然事多掣肘 香閣未就 余移結竹山七長矣 忽有僧自言名淨巗 僧來告曰 臘念夜半 無端天地震動 刹竿脫擲半箭許 遠近見聞 莫不驚異 壬辰 更以鳩財 使安城匠人打成 舁運時 雪坡老禪來 祈禱限期放光 未過一日 瑞氣亘天 五月奉安 元塔七層 銅鍮五層 風磬三十二口 香風微動 淸響滿空 依俙焉寶光殿上 親說妙法之聲 豈無慶躍”(「수마노탑중수사적」). 원문의 “忽有僧自言名淨巗 僧來告曰”는 “忽有僧言自淨巗來 僧告曰”로, “依俙焉”는 “依俙於”로 각각 교정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癸巳 典座泰禪 貨刹竿兼募衆緣 創立香閣 山火祖殿煨燼 乙未 余亦募財重建 戊戌 又丐百餘斗荏作油 石灰水砧搗之 塗於塔隙 以圖長久 亦觀信士 辨立佛粮 此乃時運所度 豈容人力於其間哉 荊榛變作玉樹禪林 瓦礫還成金沙寶界 始知成毁有數也”(「수마노탑중수사적」). 원문의 “觀信士”는 “勸信士”로 교정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持殿海月大師與余有棠棣之誼 手敵意合 一以要良工於大乘 一以募檀財於十方 經始勿亟 不月成功 蓋神龍之陰助 人天之默佑歟”(「적멸궁법당중수기」).

“同治十一年壬申 蘗庵西濱以夙世之因 發無漏之信 虔禱百日 幸得無數片石 五彩交映 宛是龍王之舊輸西 豈非神力之所護也 於是與南湖永奇 同心翼戴 期成所願 而不幸中逝 胡爲乎失助援之緣若是也”(제3석). 원문의 “蘗庵西濱”은 “蘗庵西灝”(1837-1911)로 교정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去壬申秋 蘗庵虔禱得石 發信募化 得若干銅 越明年 甲戌二月十三日 命匠始役 三月十二日 涓吉開塔 四月初八日 築塔爲始 五月十五日 無障告功 十三層寶塔 出重霄 臨無地 而常放光明 東照國土 其所感化 何萬八千而已耶”(「보탑중수유공기」). “乃刻意募緣 越甲戌二月 始役召匠 三月十二日 涓吉開塔 是夕風雨大作 雹下如注 四月初五 盡毁之日 雷聲震動 雲陰晦冥 俄而雲收雨霽 天晴日朗 一會見聞 始而驚怖 終而歡喜者 是亦靈異之不可以思量測也”(제3석).

1972년 해체할 당시에 탑의 기단부 가장 아래인 탑 적심부(積心部)에서 석함(石函)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는 은으로 되어 있는 외함과 금으로 된 내함이 있었다. 그리고 금함에는 수정으로 이루어진 염주와 금제 장신구 6점이 나왔다.

헌관(獻官)은 전종학(全宗學)·최재하(崔在河)·전동하(全東夏)이고, 대축(大祝)은 전지선(全志善)이며, 예차(預次)는 고용건(高鏞建)·신달한(辛達漢)이다.

오횡묵은 이 해 윤달에 정선군수로 부임하였는데, 부임 이후 “석 달이 채 못 되어 온 경내가 크게 바뀌었으니, 그 혜택을 입은 바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는 평이 나올 정도였다. 특히 군민들은 당시 녹용을 진상하는 건으로 매우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오횡묵은 본인이 대신 진상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한다. 이에 군민들은 어진 군수를 임명해준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해주기로 하였고, 선비 전동하(全東夏)가 군수에게 “이 고을 갈래산은 명산이고 영찰(靈刹)입니다. 성상을 위하여 치성을 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 한 이후 7일간의 기도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정황은 「태백산갈래사건성일록」(『정선총쇄록』) 등에 자세히 전한다.

“今我聖后 克念克勤 深山窮谷 遍被洪恩 桃源一郡 吏民欣拚”, “中宮殿下辛亥生閔氏玉體安寧龜齡萬歲”, “今我聖后 神聖慈仁 化曁鳥獸 德被生民 雨露所霑 俱依神人 人之忠愛 誠心是將 神兮感應 必有禎祥 禎祥最貴 在壽命長 願言神靈 佑我聖后 永奠鴻基 永享龜壽 永永萬年 遐福多受 虔告謹祝 拜手稽首 尙饗”.

“翠巖 本玄風郭氏 早托空門 久居講壇 材無伏卵之能 年近桑楡 一無尅功 推其古今賢哲 莫不散衆而參玄得道 癸未 單筇破衲 超入金剛妙香 六年脩精 己丑 轉到塔下”(「수마노탑중수사적」).

남호 영기는 『동사열전』 제5 「남호선백전(南湖禪伯傳)」, 벽암 서호는 『동선노사유고(東宣老師遺稿)』의 「벽암대선사행적」(이 행적은 『유점사본말사지』에도 실려 있음)을 통해 각각의 행장을 살펴볼 수 있다. 1872년 벽암 서호는 남호 영기와 함께 수마노탑 중수 불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영기는 이때의 불사 회향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입적한 듯하며, 서호는 “이에 남호 영기 스님과 한마음으로 서로 일을 도와서, 불사가 잘 이루어지길 소원했는데, 불행히도 중간에 영기 스님이 입적하였으니, 돕는 이를 잃게 된 인연이 어찌 이와 같단 말인가.”라며 영기의 입적을 안타까워했다.

손신영(2014: 121-128) 내용 참조. 그는 12명 승려들의 활동내용을 정리한 이후 “이상과 같이 수마노탑 탑지석 제3석에 등장한 승려들의 이름을 19세기 후반 불사기록과 비교하여 살펴본 결과, 1874년 수마노탑 중수는 당대에 서울과 강원도·경상남북도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하던 승려들이 대거 참여한 불사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秋八月 入金剛修禪 乙亥夏四月 自嶺東 入太白山淨岩寺 禮塔致齋 五月入頭流碧松”(『응운공여대사유망록(應雲空如大師遺忘錄)』, 「龍岩傳」, 한국불교전서 제10책. 749上).

실제로 김희령은 지석관(池錫觀)과 함께 조선 말기 시파(詩派)의 하나인 서원시사(西園詩社)를 이끌었던 당대의 명사였다 .

“此僧俗姓金 名明熙 卽京城人也 金君子羲齡之子也 以文學行義 世稱君子焉 明熙自數十歲 遍遊名山大川 或尋僧徒於寺刹 或訪文士於村閭 絶六根於膏火 付四大於甁鉢 超然有脫世之想矣 年五十一 落髮於京山之聖恩寺 蓋其妙悟 已自未出家時 到得七八分 住錫于此 頗有年所 而遍覽群經 修鍊道氣 蔚然爲禪敎兩宗之丈”(『정선총쇄록』).

전인지는 동원(東垣) 이홍근(李洪根, 1900-1980)이 기증한 회화자료 가운데 두 화첩을 분석한 연구를 발표하였다(전인지, 2011). 그의 연구에 의해 이 화첩은 1778년 무렵 화암(畵岩)이라는 호를 가진 인물이 정선의 명승을 그린 것이라는 점이 밝혀지게 되었다. 아울러 그가 이 논문에서 소개한 그림(「갈천산정암도」)과 시(「갈천산정암」) 및 기문(「갈천기」) 등을 통해 18세기 후반의 정암사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정병삼 역시 이 자료에 관계된 내용을 언급한 바 있다(정병삼, 2015: 145-149). 여러 가지 정황상 「갈천기」에 등장하는(“塔與寺 皆聖悟所創改”) 성오(聖悟)는 「정암사사적」을 편찬한 취암 성우(翠巖性愚)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1943년 7월 5일자 『관보』 제4926호(137권, 839면)에는 사유림 벌채허가와 관계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자료에는 주지 스님의 이름이 ‘삼산묵암(三山黙菴)’으로 되어 있다. 삼산은 창씨개명에 따른 성씨의 표현이지만, 스님의 법명이 ‘馱庵’인지 아니면 ‘黙菴’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내용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총무부 편, 『일제시대 불교정책과 현황-조선총독부관보 불교관련 자료집-』(선우도량출판부, 2001. 7.)에 실려 있는 관보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本太白山淨岩寺 名勝大地也 然創建已久 只是木瓦維來 而唯所未成者土瓦故 未嘗不慨嘆矣 幸於己未春 住持和尙洪甫龍 化主金慧峰 一以協議而一以召匠 五月四日以翻瓦 重修法堂與七星閣大寺 而五月七日 設落成禮式 將有後日欽慕之功歟 大正 七年 己未 舊五月 日”(「태백산정암사중수기」).

『관보』에는 또한 일제강점기 정암사의 ‘사유토지 매각허가’(1939년 9월 1일), ‘사유토지 기부허가’(1941년 5월 22일), ‘사유림 벌채허가’(1938년 3월 14일 두 건, 1941년 9월 4일, 1942년 6월 24일, 1943년 6월 30일), ‘사유림 벌채기간 연기허가’(1944년 2월 4일) 등과 관련한 총 7건의 허가 내용 정보가 실려 있다. 이 시기 정암사 재산과 관련하여 이들 자료 역시 주목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1960년대 이후 정암사 주지직을 지낸 승려는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취임 일자).

혜진(1962. 9. 28.)–성각(1965. 3. 16.)–월국(1965. 5. 25.)–상화(1967. 5. 13.)–동화(1967. 8. 30.)–원형(1969. 11. 28.)–서호(1971. 1. 23.)–법종(1971. 9. 27.)–등각(1975. 1. 28.)–삼지(1979. 2. 2.)–유인(1980. 1. 12.)–삼지(1984. 6. 20.)–삼지(1988. 7. 5.)–홍법(1989. 2. 15.)–법보(1991. 7. 31.)–현우(1995. 8. 1.)–화광(1997. 4. 4.)–화광(2001. 5. 24.)–정광(2002. 7. 30.)–정광(2006. 7. 30.)–정광(2010. 7. 30.)–천웅(2014. 9. 17.)–천웅(2018. 9. 17.)

오횡묵은 1888년 5월 8일 정암사 적멸궁을 참배하고 적멸궁 내부에 봉안되어 있던 자장의 가사를 친견한 바 있다. “불단의 탁자에는 하나의 감실을 설치해 놓았고, 세 겹의 비단 요를 깔아 놓았으며, 위에는 붉은 비단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안에는 불상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중략) 감실의 왼쪽에는 궤가 하나 있었는데, 모두 절의 고적과 자장 법사가 읽던 경문 수십 권이 보관되어 있었다. 잠깐 뒤적여보았으나 일일이 다 기록할 수는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 궤 속에는 가사 한 벌이 있었는데, 역시 자장 법사가 입던 것으로, 옷의 모양이나 색상은 다만 형체만 남아있을 뿐이었다.”(佛卓設一龕室 鋪三重錦褥 上垂紅錦帳 而空空的無佛像虛位也(중략) 龕之左有樻子 皆是寺中古蹟 慈藏所讀經文爲數十冊 暫閱不能一一殫記 其中袈裟一襲 亦慈藏所着件 而衣樣與物色只存形體而已)는 『정선총쇄록』의 기록으로 보아 1888년 무렵 자장의 가사는 적멸궁 내부의 궤 속에 봉안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선덕여왕이 자장율사에게 하사했다는 금란가사가 적멸보궁에 보관되어 왔으나, 어느샌가 도난당하였다. 나이 든 신도들의 말에 따르면 가사뿐만 아니라, 궁중복처럼 보이는 화려한 옷 한 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행방 또한 알 수 없다”(흥선·김효형, 1995: 19).

필자는 ‘정암사 수마노탑 국보승격을 염원하는 강강수월래’(뉴스1, 2019. 8. 13.)라는 뉴스 기사를 보고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정선군 고한읍행정복지센터 직원들과 주민들이 로비에 설치된 정암사 대형 수마노탑 모형을 중심으로 강강수월래를 돌며 국보승격을 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이 기사는 사진과 함께 여러 매체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수마노탑 국보 승격이 이 지역민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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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

부록

정암사의 주요 연혁

시기 주요 내용
645년(신라 선덕왕 14) 자장율사가 정암사를 창건
1023(고려 현종 14) ‘大平三’ ‘大平’ 등의 명문 기와를 통해 이 해에 정암사 불사가 진행중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음
13세기 후반 경 일연(一然) 스님이 자장과 정암사에 관계된 기록을 『삼국유사』에 남김
1530년(중종 25) 『신증동국여지승람』 정선군 불우(佛宇)조에 현존사찰로 등재
1682년(숙종 8) 경 『동여비고(東輿備考)』에 현존사찰로 등재
1713년(숙종 39) 창봉당(蒼峰堂) 자인(慈忍), 일종 이선(一宗二禪), 천밀(天密) 등의 스님이 수마노탑을 중수하고 탑지석 2매를 봉안. 탑 하층에 석불과 범승(梵僧)의 사리 봉안
1719년(숙종 45) 4월 8일 탑이 무너지자 천밀(天密) 스님이 수마노탑 중수 불사를 시작하여 6월 5일에 마침. 이 때 탑을 5층으로 복구한 것으로 추정. 탑지석 1매 봉안
1769년(영조 45) 정암사와 수마노탑 중수 불사 시작
1770년(영조 46) 4월 기도를 올리고 도량과 수마노탑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기 위한 불사 시작. 주민들의 반대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왕실의 협조로 7월에 불사 재개
1771년(영조 47) 구리 100근이 들어간 수마노탑 찰간을 서울에서 제작
1772년(영조 48) 찰간이 뽑히자 안성(安城)에서 구리와 놋쇠로 다시 제작. 이 때 탑을 다시 7층으로 복원하고 풍경 32구(口)를 달았음
1773년(영조 49) 찰간을 팔고 모연하여 향각(香閣) 건립
1777년(정조 원년) 「보탑중수비(寶塔重修碑)」(전면:佛糧願碑, 후면:寶塔重修秩)를 세움
1778년(정조 2) 들깨기름과 석회로 수마노탑의 틈새를 보완. 취암 성우(翠巖性愚) 스님이 「강원도정선군태백산정암사사적」과 「수마노탑중수사적(水瑪瑙塔重修事蹟)」 편찬
1778년(정조 2) 경(?) 화암(畵岩)이 「갈천산정암도(葛川山淨菴圖)」를 그리면서 「갈천기(葛川記)」라는 기록을 남김
1799년(정조 23) 『범우고(梵宇攷)』에 폐사된 사찰(‘今廢’)로 등재
1858년(철종 9) 「적멸궁법당중수기(寂滅宮法堂重修記)」 편찬
1872년(고종 9) 벽암(蘗庵) 스님이 수마노탑 중수를 발원하고 필요한 돌을 구함
1874년(고종 11) 2월 수마노탑 중수불사를 시작하여 5월 15일 마침. 남호 영기(南湖永奇)와 함께 불사를 주도한 경운 이지(景雲以祉) 스님이 「수마노보탑중수지(水瑪瑙寶塔重修誌)」와 「보탑중수유공기(寶塔重修有功記)」 편찬. 탑지석 2매 봉안. 취암 성우의 「강원도정선군태백산정암사사적」 등을 합쳐 목판본 『정암사사적편(淨巖寺事蹟篇)』 간행. 김좌근(金左根)이 염주와 금은합을 시주
1887년(고종 24) 7월 1일 전종학(全宗學) 등 6인이 7월 1일부터 7일간 절에 머무르며 나라와 왕실을 위한 기도를 올림
1888년(고종 25) 5월 8일 오횡묵이 적멸궁을 참배하고 적멸궁 내부의 궤 속에 자장의 가사와 경문 수십 권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는 기록을 남김
1912년 1월 10일 이환공(李幻空)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12년 10월 21일 이환공 스님 9월 30일 입적. 김덕송(金德松)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15년 10월 20일 김덕송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1917년 3월 20일 이능화가 「佛祖遺骨東來史-강원도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 세존사리수마노탑」를 게재(『朝鮮佛敎叢報』 1, 삼십본산연합사무소)
1917년 3월 22일 홍보룡(洪莆龍) 스님 주지직 겸무취직 인가
1919년 홍보룡 스님과 김혜봉(金慧峰) 스님 등이 협력하여 적멸보궁과 대방, 칠성각 등을 중수함. 이를 기념하기 위해 「태백산정암사중수기(太白山淨岩寺重修記)」 편찬
1920년 3월 21일 홍보룡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1920년 4월 20일 홍보룡 스님 주지직 재임 인가
1923년 6월 26일 홍보룡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이우영(李愚榮)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24년 9월 29일 이우영 스님 주지직 사직
1924년 10월 29일 변지안(邊智眼)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28년 12월 5일 변지안 스님 주지직 재임 인가
1930년 12월 3일 변지안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1931년 5월 7일 어철화(魚鐵花)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33년 8월 13일 어철화 스님 주지직 사직
1933년 10월 25일 주도치(周道致)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35년 11월 30일 주도치 스님 주지직 사직
1936년 4월 6일 최성암(崔性庵)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39년 4월 6일 최성암 스님 주지직 임기 만료
1939년 6월 28일 박양용(朴亮容)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42년 6월 10일 박양용 스님 주지직 사직
1942년 7월 13일 삼산타암(三山馱庵) 스님 주지직 취임 인가
1962년 10월 30일 혜진(金慧眞) 스님 주지직 취임
1964년 9월 3일 수마노탑 보물 제410호로 지정
1965년 3월 16일 성각 스님 주지직 취임
1965년 5월 25일 월국(洪月國) 스님 주지직 취임
1965년 10월 31일 『대한불교』 47호에 「水瑪尼塔 補修는 언제?-全面倒壞直前에 束手無策 財産處分 안돼. 財源막히고」라는 제목의 기사 게재
1967년 5월 13일 상화 스님 주지직 취임
1967년 8월 30일 동화 스님 주지직 취임
1969년 2월 9일 『대한불교』 286호에 「국보 410호 탑 탑신에 금가」라는 제목의 기사 게재
1969년 11월 28일 원형 스님 주지직 취임
1971년 1월 23일 서호 스님 주지직 취임
1971년 9월 27일 법종 스님 주지직 취임
1972년 7월 수마노탑 해체 복원공사 진행. 이 과정에서 사리장엄과 탑지석 5매 등의 다양한 유물 발견
1972년 8월 20일 『대한불교』 468호에 「수마노탑 성보 복원 후 봉안해」라는 제목의 기사 게재
1975년 1월 28일 등각(登覺) 스님 주지직 취임. 등각 스님이 이종익에게 『정암사사적편』의 번역을 부탁
1977년 이종익이 『수마노탑과 자장율사』를 간행
1979년 2월 2일 삼지 스님 주지직 취임
1980년 1월 12일 유인 스님 주지직 취임
1984년 6월 20일 삼지 스님 주지직 취임
1988년 7월 5일 삼지 스님 주지직 취임
1989년 2월 15일 홍법 스님 주지직 취임
1991년 7월 31일 법보 스님 주지직 취임
1995년 6월 29일 주지 법보 스님의 청원으로 수마노탑 해체 복원 공사 시작
1995년 7월 27일 흥선 스님과 김효형이 『태백산 정암사』를 간행
1995년 8월 1일 현우 스님 주지직 취임
1997년 4월 4일 화광 스님 주지직 취임
2001년 5월 24일 화광 스님 주지직 취임
2002년 7월 30일 정광 스님 주지직 취임
2006년 7월 30일 정광 스님 주지직 취임
2010년 7월 30일 정광 스님 주지직 취임
2011년 2월 14일 ‘태백산 적멸보궁 정암사 홈페이지’ 오픈
2012년 4일 제1차 수마노탑 학술대회 개최
2014년 9월 17일 천웅(天雄) 스님 주지직 취임
2014년 11월 21일 강원문화재단 부설 강원문화재연구소와 정선군 주최로 학술세미나 ‘정암사의 역사적 가치와 수마노탑의 위상’을 개최
2015년 12월 30일 정암사 신도회 ‘정선장학회’에 장학금 기탁
2016년 6월 5일 문수전 상량식 봉행
2016년 1월 10일 수마노탑 국보 승격을 기원하는 천일기도 입재식 봉행
2016년 10월 3일 문수전 낙성 및 문수보살 점안법회 봉행
2016년 11월 13일 관음전 상량식 봉행
2016년 11월 16일 정선군을 방문하여 관내 저소득가구를 위한 ‘사랑의 쌀’ 전달
2016년 12월 9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학술세미나 ‘정암사 수마노탑의 문화적 가치와 위상’ 개최(주최: 정선군, 주관: 한국문화유산연구센터)
2017년 2월 8일 정선군에서 2018년까지 ‘자장율사 열반길’을 조성하겠다는 계획 발표
2017년 4월 29일 관음전 복장의식 및 점안식 봉행
2017년 10월 25일 정암사 신도회 고한읍복지회관에서 경로잔치 개최
2017년 11월 10일 정선 문화예술회관에서 학술세미나 ‘정암사 수마노탑의 문화재적 가치와 위상’ 개최(주최 : 정선군, 주관 : 한국문화유산연구센터)
2018년 4월 14일 시인 전윤호의 ‘소통’을 주제로 한 인문학특강 개최
2018년 5월 16일 도 문화재위원회에서 수마노탑의 국보 지정 신청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현지 실사 진행
2018년 7월 23일 강원문화재단 부설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문화재 발굴(정밀)조사 시작
2018년 8월 1일 경내에서 ‘2018 아라리 페스티벌 산사 음악회’를 개최
2018년 9월 17일 천웅 스님 주지직 취임
2018년 10월 6일 천일기도 회향식 및 수마노탑 국보 승격을 기원하는 천일기도 입재식 봉행
2018년 12월 17일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 결과를 발표. 고려 시대 건물지 5동과 관련 부속시설 그리고 연화문 막새를 비롯한 다수의 유물 확인
2018년 12월 22일 정암사 신도회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사랑의 팥죽나누기’ 행사 진행
2019년 3월 정선군에서 문화재청에 수마노탑 국보 지정 신청서 제출. 목우당, 향각, 선원의 단청 불사 시행
2019년 5월 40여 년 만에 적멸보궁 번와 불사 및 공양간 진입로 불사 시행
2019년 5월 21일 문화재청장 등 관계자들이 수마노탑 방문
2019년 5월 25일 수마노탑의 국보승격 발원과 함께 ‘수마노탑의 역사 미술적 가치’를 주제로 ‘제 13회 정암사 인문학 강연’ 개최(단국대 박경식 교수)
2019년 6월 8일 ‘자장율사 순례길’ 개통을 기념하고 수마노탑 국보 승격을 기원하기 위한 ‘자장율사 순례길’ 걷기행사 개최
2019년 6월 20일 정선종합경기장에서 개최된 제37회 정선군민의 날 기념 군민체육대회에서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기원하는 행사를 진행
2019년 8월 1일 정선문화원에서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기원하는 사진전 개최(장소: 정선터미널문화공간)
2019년 8월 3일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발원하는 야생화 축제와 산사음악회 개최
2019년 8월 19일 수마노탑 국보 지정 여부를 심사하기 위한 문화재위원회 현장 실사 진행
2019년 8월 진입로 보수공사 시행
2019년 10월 4일 정선아리랑제 개막을 알리는 ‘아라리 길놀이’에서 수마노탑 국보 승격을 기원하는 길거리 퍼레이드 연출
2019년 10월 12일 수마노탑 국보 승격 기원과 폐광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희망공감 프로젝트’를 진행
2020년 4월 진입로 주변 환경정비사업 시행
2020년 4월 23일 문화재청에서 수마노탑을 국보로 지정 예고
2020년 6월 16일 대한불교조계종이 정선군수와 문화관광과장에게 종정 공로패와 총무원장 공로패를 각각 수여
2020년 6월 25일 문화재청에서 수마노탑을 국보 제332호로 승격 지정
2020년 7월 9일 수마노탑 국보 승격을 기념하기 위한 ‘정암예술제’ 개최
2020년 7월 10일 수마노탑 국보 지정 기념법회 봉행
2020년 7월 15일 수마노탑 국보 승격 기념식 봉행
2020년 10월 25일 창건 13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개산대재 및 합동위령재 봉행
2020년 12월 29일 ‘수마노탑 국보 승격’ 강원일보 2020 도내 10대 뉴스로 선정
2021년 2월 8일 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과 함께 학술세미나 ‘지역전통문화와 정암사 문수신앙의 콘텐츠화 방안 모색’ 개최
2021년 4월 28일 적멸보궁 해체보수공사 시작. 이 과정에서 ‘함풍(咸豐) 7년 정사(丁巳)’, 즉 1857년에 작성된 기문이 발견됨
2021년 5월 12일 강원도청 본관회의실에서 강원도, 정선군과 함께 ‘정선 야생화 사업 활성화’ 업무협약 체결
2021년 7월 29일 수마노탑 국보승격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회화 13인전 '시공의 인연을 보다' 개최(8월 31일까지, 삼탄아트센터 3층 현대미술관). 같은 주제의 전시회를 서울(8월 4∼9일,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과 정선(10월 8∼17, 정선읍 아리샘터: 10월 19∼11월 4일, 하이원리조트 컨벤션 홀)에서 계속 개최
2021년 9월 6일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에서 추진하는 ‘평화통일도량’에 선정되어 단체 협약식 개최
2021년 10월 9일 창건 1376년을 기념하기 위한 개산문화제 봉행
2021년 10월 열목어 서식지의 생태환경을 복원하기 위한 사업 착수
2021년 11월 4일 수마노탑 관광자원화를 위한 프로젝트 ‘수마노탑에 이는 바람’ 포에라마 공연 개최
2021년 11월 12일 수마노탑 국보승격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학술세미나 ‘자장율사와 정암사의 역사’ 개최
2021년 12월 문헌자료집 『정암사의 역사와 자장율사』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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