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일반논문

심원의 비교불교연구의 비교연구: 루만을 경유하여

유승무*
Seung-mu Lew*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교수
*Professor, Joong-Ang Sangha University

© Copyright 2024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Jun 03, 2024; Revised: Jun 16, 2024; Accepted: Jun 20, 2024

Published Online: Jun 30, 2024

국문 초록

이 논문의 목적은 심원의 비교불교연구가 갖는 장점과 한계를 드러내는 데 있다. 여기에서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란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김형효, 2000b),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김형효, 2002), 『원효의 대승철학』(김형효, 2006), 『마음혁명』(김형효, 2007) 등을 의미하는데, 전자의 두 저서는 하이데거의 전기와 후기를 매개로 불교의 마음의 철학과 화엄의 사유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것이고, 후자의 두 저서는 원효를 매개로 대승철학과 마음혁명의 연결을 시도한 것이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심원의 시도를 루만의 체계이론에 비춰봄으로써 그 장점과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였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심원은 마음(불성 혹은 원효의 일심 및 일심지원)에 근거하여 양가성의 공존이란 역설을 탈역설화함으로써 동양적 연결의 사유를 설명하는데 성공하였다. 반면에 루만은 사회적 세계의 작동으로부터 인간을 철저하게 걸러내어 환경에 위치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마음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루만은 자신의 고유한 체계이론을 창안하여 구별 작동과 그로 인한 역설에만 근거하여 동일성의 역설을 처리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구별의 사유를 일반이론으로 구체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볼 때, 심원의 비교불교학과 루만의 체계이론 사이의 차이는 명백하다. 그 둘은 한편으로는 각자 자신의 고유한 맹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서로 상대방의 결여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혹은 바로 그러한 차이점 때문에 그 둘은 또 다른 차원의 생산적 만남을 낳을 수도 있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reveal the advantages and limitations of Simwon(心遠 金炯孝)'s comparative Buddhist research. Simwon's comparative Buddhist research refers to 『Heidegger and the Philosophy of the Mind』 (Kim Hyung-hyo, 2000b), 『Heidegger and the Thought of Hwaeom』 (Kim Hyung-hyo, 2002), 『Wonhyo's Mahayana Philosophy』 (Kim Hyung-hyo, 2006), and 『Mind Revolution』 (Kim Hyung-hyo, 2007). The former two books attempted to understand the Buddhist Mind's Philosophy and the Thought of Hwaeom in an integrated manner as if an integrated understanding about Heidegger's early and late period studies, and the latter two books attempted to connect the Mahayana Philosophy and the Mind Revolution through Wonhyo. Therefore, this paper attempted to reveal Simwon's strengths and limitations by reflecting these attempts on Luhmann's system theory, and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of all, Simwon successfully explained the reason for the oriental connection by debunking the paradox of the coexistence of ambivalence based on the mind (one heart and one heart support of Buddha-nature or Wonhyo). On the other hand, Luhmann not only thoroughly filtered humans out of the workings of the social world and placed them in the environment, but also did not seem to fully understand the Buddhist concept of mind. Instead, Luhmann successfully developed his own system theory and successfully handled the paradox of identity based solely on the operation of distinction and the resulting paradox, thereby concreting the idea of distinction into a general theory. From this point of view, the distinction between Simwon's comparative Buddhist studies and Luhmann's system theory is obvious. On the one hand, each of them has its own blind spots, but at the same time, they have the potential to make up for each other's shortcomings. However, because of those differences, the two could lead to another level of productive encounters.

Keywords: 심원; 하이데거; 원효; 루만; 화엄; 대승철학; 마음혁명
Keywords: Shimwon; Heidegger; Wonhyo; Luhmann; Hwaeom; Mahayana Philosophy; Mind Revolution

Ⅰ.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란 아기

인구에 회자되는 레닌의 비유담 가운데 ‘목욕물과 아기’1)가 있다. 비유의 핵심 내용은, 가끔씩 사람들이 아기를 씻긴 다음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리는 우를 범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기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유물론이다.

심원에 관한 한, 대상이 유물론에서 심원으로 바뀌었을 뿐, 나 역시 그런 유형의 우를 범했다. 아무런 인연도 없었고 전공도 다르기도 했거니와 심원의 정치참여에 대한 선입견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심원의 학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심지어 『불교사회학: 불교와 사회의 연기적 접근을 위하여』(유승무, 2010)에서 기존의 실체론적 사회이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의 하나로 화엄적 사유에 기초한 상즉상입의 사회이론적 가능성을 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심원의 비교불교연구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극히 최근에, 오직 ‘활자’로만, 심원의 비교불교연구2)를 만났다.

나는 『마음사회학』(유승무·박수호·신종화, 2021)을 계기로 심원을 만났다, 그런데 첫 만남의 순간부터 나의 뇌리에는 번개가 쳤다. 문제의식의 차원에서 유승무(2010)김형효(2002)와, 유승무 외(2021)는 김형효(2000b)와 거의 유사했고, 심지어 유승무 외(2021)의 제 2부는 김형효(2000a)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음의 사회적 역능에 대한 나의 고민도 심원의 그것과의 관련성 속에서 논의하는 것이 가장 생산적일 듯 했다. 특히 나의 학문적 관심이 주로 서구의 전통적 실체론에 기초한 기존의 사회이론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불교의 화엄사상과 마음사상을 활용하여 새로운 사회이론 및 사회변동론을 탐구하는데 있었다는 점, 반인간주의적이고 반규범론적이 사상가이자 훗설 및 하버마스와 특수 관계에 놓여 있는 루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자생적 학문의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주자학보다는 불교를 선택한 점 등 수많은 점에서 나의 인식관심이 심원의 그것과 맞닿아 있었다.

물론 차이가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맑스의 경우, 나는 실천의 목욕물과 이론의 아기를 구분하고 있는데 반하여, 심원은 맑스 전체를 목욕물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나는, 심원과 달리, 마음혁명의 사회적 의미를 다소 제한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들조차 인식관심의 놀라운 유사성의 가치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차이들조차도 그 자체로 모종의 의미를 산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속 연구의 계기도 제공한다는 점에서 소통적 가치도 지니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첫 만남 이후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는 나에게는 더 이상 목욕물이 아니라 아기였다. 이 글의 목적은 이 아기를 나의 학문적 인식관심의 차원으로 구출해 내는데 있다. 심원과 직접 대화할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놀라움도 관찰자의 맹점을 근저적으로(radically) 반성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결코 나쁘지 않다. 게다가 이런 만남은 미네르바의 올배미처럼 심원의 장점뿐만 아니라, 그의 맹점까지도 학문외적 방해 없이 관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잇점도 있다. 바로 이 잇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이 글에서는 니클라스 루만(N. Luhmann)을 소환하기로 했다.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니클라스 루만이지만, 그 사용법만 잘 익혀도 이 글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요긴한 성능 좋은 장비(tool)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Ⅱ. 아기 구출의 전략(tactics)과 장비(tool)

1. 심원의 사유 속 ‘아기 그림’과 그 전략적 함의

이 글에서 한정한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는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김형효, 2000b),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김형효, 2002), 『원효의 대승철학』(김형효, 2006), 『마음혁명』(김형효, 2007) 등이다. 그런데 이 저서들이 그려내고 있는 위상학적 의미 즉 아기 그림이 절묘하다.

우선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과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심원의 진술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필자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전기에는 유식학적으로, 후기에는 화엄학과 선학으로 해석해야 그의 사유가 이해되고 소화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김형효, 2000b: 12).” 이렇듯 이 두 저서는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저서다. 전기와 후기 사이에 의미론적 전회(轉回)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후기의 사유는 인간존재의 해명을 존재 일반의 해명으로 전개해 나갔다(윤병렬, 2021: 461-562)는 점에서 전기의 확장으로도 볼 수 있다. 게다가 전기와 후기는 하이데거를 매개로 그의 전기와 후기 사유의 상관적 비교는 물론 유식과 화엄 사이의 상관적 차이(pertinent difference)까지 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두 저서는 결국 하나의 아기 그림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이데거의 인식 틀에 따라 그려진 아기 그림으로 보인다. 이에 이 글에서는 이를 ‘하이데거를 모사한 아기 그림’으로 작업적 정의를 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원효의 대승철학』은 심원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수행했던 연구 활동의 대미란 의미를 스스로 부여한 저서인데, 여기에 이 저서가 앞의 두 저서를 잇는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란 점까지 고려하면, 이 책은 전후기 하이데거의 사유를 모두 담고 있다는 메시지로도 읽힌다. 실제로 『원효의 대승철학』 2부에서 심원은 유식과 화엄적 사유를 압축하고 있는 『대승기신론』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원효가 이미 하이데거의 전후기 사유를 모두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심원이 새롭게 발견했음3)을 암시한다. 게다가 1 부에서는 중관의 공사상을 담고 있는 『금강삼매경론』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바, 이는 하이데거의 무(無)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이미 원효가 선취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원효가 일심 혹은 일심지원(一心之源)에 기초하여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을 회통한 사상가란 점(유승무, 2010)까지 고려하면, 심원은 이미 하이데거를 넘어서 원효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욱 절묘한 점은 『마음혁명』의 위상과 내용이다. 『마음혁명』은 심원의 비교불교연구의 마지막 저술이란 위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마음혁명을 통한 사회변화라는 실천적 성격을 내포한 일종의 철학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심원의 비교불교연구가 『마음혁명』으로 귀결된 것은 심원의 불교공부의 사필귀정이기도 하겠지만, 심원의 비교불교연구의 대전제이기도 한 듯하다. 심원은 자신의 비교불교연구의 첫 저작인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필자의 철학적 관심은 이 세 가지 철학의 진리를 어떤 사유의 길에 의하여 인간 마음의 심학으로서 동시에 거주케 할 것인가를 궁구하는데 집중되어 있다(김형효, 2000b: 16).” 이렇게 볼 때 『원효의 대승철학』과 『마음혁명』은 하이데거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원효를 넘어 붓다를 지향하는 저서로도 읽힌다. 이에 이 글에서는 작업적 차원에서 이 두 저서를 ‘붓다를 모사한 아기 그림’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요컨대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는 이렇듯 뚜렷한 초점 이동을 보이면서 전게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심원이 자신의 비교불교연구를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동거성의 관계, 마음을 매개로 한 회통의 관계, 나아가 법성의 깨달음을 통한 사회적 실천으로 이해하라는 주문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방법론적 차원에서 보면 이는 심원이 자신의 비교불교연구를 두 가지 그림으로 해석하라는 전략적 함의로도 읽힌다. 나는 이러한 방법론적 함의를 이 글의 전략으로 설정하려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를 두 가지 아기 그림으로 나누고, 그 두 가지 그림을 관통하는 비교불교연구의 전체그림을 인간과 세계의 동거성 및 회심을 통한 회통이란 틀로 읽고, 바로 그 점이 갖는 학문적·실천적 의의를 평가하려고 한다.

이러한 방법론적 전략을 선택하는 순간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는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플라톤의 각주’와 맞닿다. 실제로 심원은 하이데거를 ‘플라톤의 마지막 각주’로 읽고 싶어 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인용문은 이를 증거한다. “그(하이데거: 필자 추가)의 사상의 기본적 흐름은 … 플라톤 이후의 모든 서양사상사를 해체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사료된다(김형효, 2000b: 16).” 그리고 심원에 따르면 그렇게 읽을 때 하이데거는 노장철학 및 불교와 맞닿는다. 바로 이 점이 방법론상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인 비교연구의 방법론적 장치(tool) 즉 Moeller(2012)가 ‘플라톤의 마지막 각주’4)라고 부른 루만을 소환하려는 이유다. 심원의 비교불교연구가 시도한 ‘플라톤의 마지막 각주’는 또 다른 ‘플라톤의 마지막 각주’로 비춰 볼 때 그 장단점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자의 전략도 또한 심원의 방법론적 전략 즉 비교연구란 전략에 그대로 따른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 비교연구의 방법론적 장치(tool)로서 루만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이 글의 목적과 전략에 따른 방법론적 장치로 루만의 체계이론을 활용하려고 한다. 그 까닭은 ‘플라톤의 마지막 각주’란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루만이 서구의 전통적 철학을 전복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 훗설을 계승하면서도 극복하고 있는 점,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불교 및 도교와 유사한 점 등에서, 하이데거 및 심원과 연관성을 찾기가 매우 용이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루만은 하이데거와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원의 비교불교학과도 매우 큰 차이점을 갖고 있는 바, 바로 그러한 점에서 최소한 심원에 한정하더라도 루만은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에 적절한 도구적 의미를 갖는다. 이에 여기에서는 루만이 이 연구와 관련하여 어떠한 도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제시해 두려고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플라톤의 마지막 각주’란 차원에서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를 압축해 보자.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에서 심원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동서고금의 철학적 진리가 결국 ... 영혼의 철학과 육체와 물질의 철학, 이성의 철학, 정신의 철학 등 세 가지 철학이 각각 다른 얼굴을 갖고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 필자가 하이데거를 소화하려고 애쓴 이유는 그의 철학이 불교의 철학과 함께 깨닫는 정신의 초탈적 사유를 가장 탁월하게 보여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김형효, 2000b: 14-16).

이 인용문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심원의 철학함은 한마디로 플라톤에서 시작된 영혼과 육체(혹은 물질)의 이분법적 존재론 영역과 그 인식론적 영역을 해체하고, 그 대안을 하이데거와 불교에서 찾으려는 철학적 시도로 이해된다. 심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결국 차연(Unter-Schied)5)의 사유를 말하고 있음을 홅어 보았고, 그 사유는 화엄학이 말한 상즉상입의 사유로서 단가적인 사유의 해체를 겨냥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서양의 모든 전통적인 논리학의 사고가 다 이 단가적인 사유의 전형에 해당한다6)(김형효, 2002: 123).

반면, 2500여 년 간의 서구 철학 전체를 구유럽적 사고로 규정하고, 그 전복을 시도한 루만은 이른바 ‘플라톤 각주’로 정리할 수 있는 이 세 가지 영역의 이분법을 다음과 같이 해체한다.

첫째, 관념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 사이의 존재론적 이분법 대신에 최소한 세 가지,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훨씬 더 많은, 유형의 체계 기능(systemic function)들 사이의 차이가 있다. 심리적 체계, 생명체계, 사회적 체계가 있다. … 둘째, 두 가지 지식 유형 사이의 위계적인 인식론적 양분 대신에, 관찰 유형들 사이의 분화가 있을 뿐이다. … 셋째, 관념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사이의 윤리적 구별과 그로부터 파생된 규범적 규정의 공식화는 체계이론에 존재하지 않는다(Hans–Georg Moeller, 2012: 67).

위의 인용문이 암시하듯이, 루만은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하이데거 및 심원의 철학과 비슷하면서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뭇 다르다. 그런 점에서 루만의 급진적(radical) 해체성과 그 파상력은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를 비교연구하기에 적합한 도구로서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이에 아래에서는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를 루만과 비교하면서 그 장단점들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Ⅲ. 하이데거를 모사한 아기 그림과 그 루만적 관찰

1.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에 나타난 아기 그림과 그 루만적 관찰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은 심원의 비교불교연구의 첫 대작이다. 이는 이 책이 심원의 비교불교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부제가 말하고 있듯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소화하기 위한 책이다. 그리고 심원은 하이데거를, 제목이 이미 암시하고 있듯이, ‘마음의 철학’으로 읽는데, 이는 심원이 불교의 유식학을 끌어들인 이유로 보인다.

심원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현존재 즉 존재의 현재적 나타남을 가능케 하는 인간인 동시에 세상에 던져져 있는 인간인 현존재를 최초로 정립시킨 철학자이자 존재의 현재적 나타남으로서의 자신과 자신을 감싸고 있는 세상을 매개하는 현존재의 마음을 복원한 철학자이다. 그리고 심원이 보기에는 바로 이러한 점이 하이데거와 유식학의 유사성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심원은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제 1 장에서 현존재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그 현존재의 ‘세상에 있음’과 그 실존적 의미를 논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에서 심원은 현존재의 마음을 현존재와 세상의 관계를 매개하는 매체로 간주하고, 그러한 마음을 통해 현존재의 존재성과 그 실존적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심원은 초기 하이데거를 현존재와 그 마음으로 소화하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심원에 따르면, 플라톤 이후 서구 지성사에서 망각되어 온 존재와 마음을 복원하여 그 현존재적 중요성을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두 가지 인식론적 전회(轉回)의 의미를 갖는다. 우선 존재로의 전회(轉回)는 실체나 본질을 배제하고, 다시 존재를 나타내는 방식을 묻는 하이데거적 현상학7)으로 드러나는데, 이에 대한 심원의 주장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전회로 새롭게 등장하는 현상학의 존재자가 바로 전통적 의미의 주체와는 다른 현상학적 존재자, 즉 존재를 나타내는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자인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이를 새롭게 개념화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가 바로 인간을 현존재(Dasein)으로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 현존재는 또한 존재로 구성되는 세상에 거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학적 존재자, 즉 존재의 나타냄을 가능케 하는 현존재의 마음의 작동 속에는 현존재 자신과 존재로 구성되는 세상이 동거하며, 동시에 그 시간적 현재성을 매개로 과거에 내맡겨짐과 미래의 투사 가능성이 확보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심원은 이러한 현존재의 하이데거식 이해를 유식학과 연결하는데, 바로 마음의 복원이란 인식론적 전회다. 심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자의 존재를 이해하는 방법은 마치 이심관심(以心觀心)의 법에서 마음의 견분인 능연이 존재자와 얽혀 상분인 마음의 현상으로 떠올리면서 마음으로서의 능연이 소연의 능연으로 해석됨직하다(김형효. 2000b: 61).” 결국, 심원에 따르면, 이러한 두 가지 인식론적 전회에 성공한 하이데거야말로 ‘플라톤의 마지막 각주’이며, 포스트모더시즘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Moeller(2012)가 ‘플라톤의 마지막 각주’라 부른 루만을 소환해 보자. 우선, 하이데거는 존재의 복원을 통해 그리고 루만은 급진적 구성주의를 통해, 플라톤 이후의 서구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전복하는데 성공하였고, 그러한 점에서 두 사람은 모두 ‘플라톤의 마지막 각주’라 불릴 수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훗설과의 관계에서 하이데거와 루만은 전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도 하이데거는 훗설의 의식철학과 결별하고, 현존재의 실존적 근거로서 존재와 실존론적 마음을 복원함으로써 현존재(혹은 현존재의 마음)의 무한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루만은 훗설의 의식철학을 그대로 수용하는 대신 인간을 사회 밖으로 추방하고, 인간의 의식의 자리에 체계를 설정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루만에게 인간은, 하이데거의 현존재와는 달리, 사회의 작동에 개입할 수 없는 사회외적(extrasocial) 존재일 뿐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은 학문적으로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다. 우선 공통점은 ‘플라톤의 마지막 각주’란 의의 즉 ‘인식론의 전회’의 의의를 갖고 있다. 게다가 시간을 강조하는 공통점 즉 존재의 양가성을 시간 개념으로 처리하는 하이데거와 복잡성의 시간화를 통해 동일성(Einheit)에 내포된 역설을 해소하는 루만의 공통점도 무아무상한 존재의 여실함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차이점 역시도 두 사람의 맹점을 드러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만큼이나 큰 학문적 의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와 루만은 현상학적 형식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적용대상은 판이하기 때문이다. 심원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그 적용대상을 현존재의 마음으로 설정하였고, 그러한 점에서 불교의 유식학과 유사하지만, 루만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과 세상의 관계 및 인간사회를 설명하는 것을 인식론적 장애로 간주하고 있다. 게다가 하이데거는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성을 마음(Da-sein)으로 환원하여 처리하는8) 반면에, 루만은 이러한 존재 즉 인간을 생물학적 차원, 심리적 차원, 그리고 사회적 차원을 모두 갖춘 사회외적 존재로 간주한다.

필자가 보기에 결정적인 차이들은 서로의 맹점을 보여주는 거울 효과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마음을 복원하여 매우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원에 의해 유식학적으로 해석됨으로써 루만의 결정적인 한계, 즉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루만의 한계를 극복하는 결정적인 연구로 활용될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반면에 루만의 관점에서 보면, 하이데거의 논지 즉 마음과 세상의 양자관계와 그 매개로서 마음의 작동은 마음, 육체, 그리고 사회 등 3자 사이의 구조적 연동과 그 차이 이론적 관찰에 의해 비판적으로 재조명될 수밖에 없다.

2.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에 나타난 아기 그림과 그 루만적 관찰

앞에서 요약했듯이, 심원은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을 통해 하이데거의 전기 사유를 현존재의 마음으로 읽었고, 그래서 유식학으로 소화하였다. 그런데 심원에 따르면, 그 마음이란 개념은 전통적 의식철학의 의식이나 정신이 아니라 무(無)이고-그러한 점에서 ‘플라톤의 마지막 각주’이다-, 이 무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심원은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의 마지막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이 무(無)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하려면 우리는 그의 후기 사상 즉 전회(轉回) 이후의 사유에로 들어가야 한다. … 그의 후기 사유는 현존재로서의 마음을 품으면서 그 마음을 법계(法界)의 성(性)으로 보다 더 대승화(大乘化)시킨 존재 일반의 존재론으로 확장된다. 『존재와 시간』이 마음의 본래적 존재를 깨닫기 위한 사유라면, 후기의 사유는 마음에 깃들어 있는 본래성으로서의 자성(自性)을 이 세상의 법성이라고 보는 화엄적(華嚴的) 진여(眞如)의 길을 걷는 것 같다(김형효, 2000b: 404-405).

심원의 비교불교연구의 두 번째 대작인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는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를 매우 감동적으로 해석해 나가고 있다. 심원은 특히 그 저작의 후반부에서 하이데거의 마음 개념을 존재의 근원으로 해석하는데, 예컨대 그 저작의 제 10 장에서 심원은 ‘존재의 집’이란 하이데거의 말 개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하이데거는 말과 그리기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리기가 빈 공간을 갈라놓으면서 그려진 것과 빈 공간을 차이 속에서 접목하듯이, 말도 빈 마음의 바탕에서 존재의 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김형효, 2002: 540).” 이 인용문에서 빈 마음의 바탕이 바로 무(無)이고, 그것은 유(有)의 존재조건이자 유의 무늬와 이중적 접합구조를 형성하면서 존재를 생성시킨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정확히 루만과 일치한다. 실제로 루만은 이 ‘말’ 대신에 ‘그리기(draw a distinction)’ 즉 ‘태초에 구별이 있었다’라고 선언하고, 그 전제에 내포된 동일성(Einheit) 위에서 현재성과 잠재성의 작동 즉 하이데거의 존재를 설명한다.

나아가 심원은 이 저작의 제 11 장 이후부터 마지막 장인 제 14 장까지에 걸쳐서 이러한 마음을 깨달음과 연결시키고, 이를 화엄적 사유로 설명한다. 우선 제 11 장에서 심원은 벽난로와 샘을 이웃으로 그리는 휠더린-루만도 자주 활용함-의 시 세계를 깨달음의 시로 해석하고, 이를 다음과 같이 화엄적 사유로 해석한다: “마음이 법성과 이웃이기 때문에 그 마음에 법성의 본질이 자리잡는다. 그래서 법성과 자성은 이웃이다(김형효, 2002: 589).”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혹은 인간의 마음이 이 법성을 망각하지만 않는다면 그는 무애의 세상에 노릴 수 있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심원처럼, 쉽게 이사무애와 이사의 상즉상입을 연상할 수 있다. 나아가 제 12 장에서 심원은 하늘, 땅, 인간, 신 등 사중물(四重物)과 사물의 관계를 무애와 상즉상입으로 설명하고, 이를 하이데거의 존재 즉 현존재와 마음의 근원인 존재로 해석한다. 그리고 제 13 장에서는 놀라움이나 경이와 같은 마음의 회심- 그런 점에서 전기의 불안이나 죽음을 통한 회심과 다소 다르다-을 경험할 수 있는 예술세계의 깨달음에 의한 종용(從容; Gelassenheit)을 통해 이를 실증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예술세계의 진리에 대한 깨닫기가 불교의 깨달음만큼이나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깨달음의 눈에는 세속적인 현대사회가 지양의 대상으로 보일 뿐이라는 점이다. 심원이 직접 인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하이데거의 산업사회관은 이를 증명한다.

산업사회는 스스로가 사이버학(Kybernetik)에 의해 지배된 과학과 과학적인 기술의 척도 부여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있는데, 이것이 그 사회의 본질이다. … 사이버적인 세상을 기도하는 근본적인 특징은 정보의 피드백(Rückkoppelung)이 통과하는 규칙 순환이다. 가장 광범위한 규칙 순환은 인간과 세상을 교환관계로서 둘러싼다. 이런 둘러싸기에서 무엇이 지배적인가? 인간의 세상에 대한 관계들과 함께 인간의 사회적 실존은 사이버적인 과학의 지배 영역 속으로 갇혀진다(김형효, 2002: 703).’

이 지점에서 루만을 다시 소환해 보자. 우선 루만에 따르면 인간과 사회는 소통하거나 각자의 작동에 개입하거나 침투할 수 없고, 오로지 소통만이 소통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소통의 환경에 놓임을 의미하고, 나아가 오히려 그러할 때 인간은 오히려 편안하고 자유롭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루만의 체계이론에 따르면 사사무애는 가능하지만, 이사무애는 불가능하다. 둘째, 루만에 따르면, 이사의 관계이든 사사의 관계이든, 구별의 타자는 관찰에 의한 재진입을 통해 구별된 것 속으로 재진입할 수 있는데, 이는 상즉상입 개념의 설명과 유사하다. 단 이러한 유사성은 현존재의 마음이나 사회적 체계의 마음 – 루만과 달리, 그리고 필자의 관심에 따라 관찰과 인식을 마음으로 가정한다면-이 모두 무(無)의 조건과 구별의 유(有)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을 전제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셋째, 하이데거의 경우, 그리고 심원의 경우 무애의 마음은 깨달음이나 놀라움과 같은 회심 이후에나 가능한 놀랍고 경이로운 존재의 세상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바로 그런 점에서 종교나 예술 세계에서 특히 설득력을 가진다. 루만의 경우 사사무애는 정치체계, 경제체계 등 모든 사회적 체계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Ⅳ. 붓다를 모사한 아기 그림과 그 루만적 관찰

1. 『원효의 대승철학』과 레닌의 아기

제 2장에서 이미 시사하였듯이, 필자는 『원효의 대승철학』을 심원의 하이데거로부터의 철학적 독립선언으로 읽는다. 여기에서 독립선언이란 하이데거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효의 대승철학』을 통해 하이데거의 전후기를 포함하면서도 그 너머의 철학적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원효와 관련된 심원의 두 가지 연구를 비교해 보면 쉽게 드러난다. 심원은 비교불교연구를 출판하기 이전에 이미 『원효에서 다산까지』(김형효, 2000a)를 출간하였는데, 거기에서는 주로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서문 분석을 통해 중관사상(혹은 공사상)을 매우 세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반면에 하이데거를 거치는 비교불교연구 이후의 저서인 『원효의 대승철학』에서는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서문 분석에다가 <대승기신론소>와 <대승기신론별기> 해석을 덧붙임으로써 원효가 중관의 부정사상과 유식의 긍정사상을 화엄의 논리로 화쟁하는데 성공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초점 변화는, 필자가 보기에는, 심원이 하이데거의 전후기를 거치면서 원효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그 새로운 발견을 통해 중중무진의 화엄적 세계를 심학 속에 포섭한 철학자로 원효를 다시 자리매김하려 한 것으로 읽힌다. 『원효의 대승철학』에서 그 근거를 직접 확인해 보자.

심원은 『원효의 대승철학』의 제 1부 ‘금강삼매경과 원효의 대승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원효의 사상을 검토하면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힘은 마음의 묘용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마음의 묘용은 곧 마음의 활용과 같은 뜻이다. 선악이나 시비에 대한 기준이 바깥의 척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마음이 어떤 생각으로 자신의 길을 닦아 나가느냐 하는 마음의 활용에서 세상의 복락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대승기신론의 가르침은 매우 중요하다(김형효, 2006: 177).

이러한 논지는 제 2 부 ‘대승기신론과 원효의 대승철학’에서도 그대로 표현된다.

개방과 합일, 다양한 갈래와 통일적 요체, 긍정적 정립과 부정적 파괴 같은 이중성을 하나의 존재양식으로 여기는 사유를 원효는 일심의 대승적 사유라 일렀다. … 일심의 대승적 사유는 단적으로 말하여 마음의 철학과 다르지 않다. 우주법계의 진리는 결국 마음의 묘용과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마음의 묘용이 바로 우주 자연 법계의 진리와 교응(交應)한다는 것을 가르친다(김형효, 2006: 263).

이 인용문에서 긍정적 정립과 부정적 파괴 같은 이중성을 하나의 존재양식으로 여기는 사유가 바로 원효의 저 유명한 화쟁적 사유에 내포된 화엄적 사유라는 것이 심원의 주장이다. 그리고 심원은 원효의 화쟁적 사유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화쟁적 사유는 논리적 이성으로 개발된 화해와 종합의 변증법이 아니다. 오히려 해체적 사유에서 본질적으로 보고 있는 격자무늬짜기의 얽힘 장식과 같은 로고스가 우주의 사실성으로 여기고 있는 이사무애법의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김형효, 2006: 253).” 이 지점에서 또 다시 루만을 소환하면, 원효의 화쟁적 사유는 헤겔의 변증법을 해체하고, 차이이론을 전개하는 루만의 사유와 동일하다. 다만 루만은 이러한 사유를 동일성(Einheit)개념으로 포착하여 사회적 체계이론으로 발전시킨 반면에, 원효는 이를 일심의 개념으로 처리하고, 바로 거기에 심원도 적극적으로 동의를 하고 있다.

원효나 심원의 경우, 문제는 이러한 세속을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 상태가 이러한 마음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마음 상태는 예술적 놀라움이나 종교적 회심 이후에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심원도 분명하게 언급한다.

결국 그런 불법을 체득하는 까닭은 … 인간이 마음과 세상을 두 개로 나누어서 마음을 능연하면서 망상으로 스스로를 포박하고, 대상을 쪼개면서 스스로 그 경계에 속박 당하는 두 가지 얽매임을 풀어서 훨훨 자유롭게 태허나, 원기처럼 우주에 무생무멸하도록 존재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해탈의 존재양식이다(김형효, 2006: 434).

게다가 사회학적 시각에서 볼 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초영지의 추구와 해탈의 세계에 노닐 경우,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른바 ‘레닌의 아기’가 목욕물과 함께 버려져는 우를 범하기 십상이다. 특히 루만이 말하는 기능분화사회인 현대사회의 모든 기능체계들은 ‘레닌의 아기’처럼 모든 정보를 체계자신의 코드에 따라 자기준거적으로 처리하는 바, 만약 마음을 체계의 마음 즉 체계의 관찰(구별과 한쪽 지시를 통한 인식)로 확대 적용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국집시킬 경우, 자칫 사회는 오히려 베버가 일찍이 비판한 바 있는 ‘주술의 정원’으로 돌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삶의 현실에 뿌리를 둔 철학함을 지향했던 심원도 이를 인식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래서일까? 심원은 존재론적 종용이란 마음혁명을 사회혁명과 배대시키면서 그 실천적 의의를 제시하였다. 심원의 비교불교학의 마지막 저서 『마음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2. 『마음혁명』의 열정과 루만의 평정심(equanimity)

이미 언급하였듯이 『마음혁명』은 철학적 저술이기 보다는 삶의 실천을 강조하는 52개의 철학적 에세이를 엮어 놓은 산문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서야말로, ‘김형효의 철학 산책’이란 부제가 말하듯, 하이데거나 원효 등 다른 철학자들을 이해하는데 관심을 할애하기 보다는 심원 자신의 철학적 사유들을 진솔하게 담아 대중들에게 알리려는 목적으로 쓴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혁명』에서 유독 실천적 함의와 그 사회적 의의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글들을 발견할 수 있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는 듯하다. 그 중에서도 사회적·실천적 함의가 가장 강하게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사구시적 심원 철학의 고갱이를 담고 있는 글이, 필자가 보기에는, ‘혁명’이란 말이 명시된 2 개의 에세이 즉 ‘존재론적 혁명’과 ‘마음의 혁명’이다.

먼저, ‘존재론적 혁명’은 『마음혁명』에 실린 첫 에세이다. 이 글의 말미에서 심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하자면 인류가 경험한 두 가지 큰 혁명인 산업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은 모두 소유론적 혁명의 세상보기일 것이다. ... 이제 인류는 제 3의 혁명을 모색해야 할 그런 시절인연에 이르렀다. 그것은 편리와 정의가 상충하지 않는 존재론적 혁명의 길이다. 존재론적 혁명의 길은 이전의 소유론적 혁명과는 매우 다르다. 그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우리의 마음을 혁명하는 일이다. 앞으로 우리는 계속 이 글을 걸어 갈 것이다(김형효, 2007: 24).

이 인용문에 잘 나타나 있듯이 심원은 소유론적 혁명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혁명이 아니라 ‘존재론적 혁명’이 요구되고, 이를 위해서는 마음의 혁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는 에세이가 바로 ‘마음의 혁명’이란 에세이와 그와 직접적으로 연동되어 있는 바로 앞 에세이 즉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비판에 대하여’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이 두 에세이는, 심원 자신이 직접 표현했듯이, 사실상 연결된 하나의 에세이로 간주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 심원은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비판에 대하여’에서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의 병리현상을 비판하는 맑시즘, 네오맑시즘, 그리고 보들리야르 등이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생리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사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그 존재론적 사유를 위해 마음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9). ‘마음의 혁명’에서 심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경제기술적 자본주의의 장점을 살리면서, 그것이 갖고 있는 찌꺼기인 낭비와 배금주의를 씻는 길이 무엇인가를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를 다시 그 처방으로 생각한다. …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론적 욕망의 부름인 양심’을 천명했다. … 모든 것이 양가적이고 이중적인 한, 세상을 구하는 길은 세상을 분별적으로 여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양심의 소리는 분별적인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본래의 본성적 마음으로 되돌리는 마음의 자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는 것이다. … 세상을 혁명하려 하지 말고, 마음을 혁명해야 한다(김형효, 2007: 329-332).

이 지점에서 루만을 소환해 보자. 무엇보다도 루만 역시도 하이데거나 심원처럼 맑시즘의 실천이 전제하고 있는 규범적 당위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루만의 급진성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일체의 계몽적 시도 그 자체를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루만의 급진적 비판에 따르면 세상을 구한다거나, 사회적 병리현상을 치유하려 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시도는 그 자체로 어불성설의 열정에 불과할 뿐이다. 이 지점에 이르러 혹자는 루만의 이러한 태도가 도교와 유사하다(Moeller, 2012)고 말하고, 혹자는 루만의 인식론이 선불교와 닮았다(헬가 그립-하겔슈탕에, 2016)고 말하고, 또 혹자는 루만의 인식론이 도교 및 불교와 유사하다(펠릭스 라우, 2020)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루만은 불교나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한 점에서 심리적 체계에 대한 논의를 미완성으로 남겨 놓았다. 다만, 루만은 자기준거적으로만 작동하는 사회적 체계들을 분석하고 기술하는데 있어서 독보적인 성과를 남겼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루만의 사회학적 성취에 따르면, 사회적 체계들의 작동에 인간은 결코 개입할 수 없다. 사회적 체계로서의 소통만이 소통한다. 법체계는 합법과 비합법의 코드로만 작동하고, 과학체계는 진리와 비진리의 코드로만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체계들의 작동은 전통적인 ‘부분/전체의 관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오히려 ‘체계/환경-차이’로 설명되어야 한다. 게다가 체계는 자기준거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사회적 체계도 1차 질서 사이버네틱스가 아니라 2차 질서사이버네틱스로 설명되어야 한다. 사회적 체계의 생성과 작동을 개관하고 있는 아래의 인용문은 루만의 이론적 특징을 보여주는 전형적 보기이다.

체계 분화는 체계와 환경의 차이를 체계 내에서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전체 체계는 자신의 하위 체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를 환경으로 활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을 더 엄격하게 걸러내어 하위 체계 수준에서 더 큰 비개연성(improbability)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분화된 체계는 단순히 상대적으로 많은 부분과 그 부분들 사이의 관계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더 이상 아니다; 오히려 분화된 체계는 작동적으로 활용 가능한 수많은 체계/환경 차이로 구성되는데, 각각의 차이는 각기 다른 경계선을 따라 하위 체계와 환경의 동일성(unity)으로 전체 체계를 재구성한다(‘루만, 2020: 84-85’를 필자가 수정 번역함).

루만에 따르면, 이렇듯 복잡성을 띠면서 작동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오직 사회의 작동과 그 기술을 자신의 관견(管見)으로 관찰하는 것, 즉 2차 질서관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루만이 하버마스를 비판하고, 나아가 인간 일반은 말할 것도 없고 연구자들에게도 평정심(equanimity)과 겸손(modesty)을 요구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마음의 혁명이나 존재론적 혁명을 포함한 일체의 계몽주의적 열정도 평정심을 잃은 것이 아닐까?

Ⅴ. 사족(蛇足)

이렇게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심원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앞으로 해야 할 공부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명상이고. 둘째는 과학이다. 철학은 해 보니까 굳이 필요한 학문이 아니다(심원사상연구회 편, 2022: 323).” 심원의 비교불교학이란 측면에서 볼 때는 비록 장외 발언이지만, 팔자가 보기에 이 자기부정적 자기성찰의 행간에는 심원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진심을 나는 ‘심원을 위한 변명’으로 읽는다. 굳이 뱀다리를 그려넣으려는 까닭이다.

우선 심원의 비교불교학을 평가해 보면, 심원은 하이데거와 불교(원효)에 기대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말하면 심원은 마음(불성 혹은 원효의 일심 및 일심지원)에 근거하여 양가성의 공존이란 역설을 탈역설화함으로써 동양적 연결의 사유를 설명하는데 성공하였다. 반면에 루만은 사회적 세계의 작동으로부터 인간을 철저하게 걸러내어 환경에 위치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마음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루만은 자신의 고유한 체계이론을 창안하여 구별 작동과 그로 인한 역설에만 근거하여 동일성의 역설을 처리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구별의 사유를 일반이론으로 구체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볼 때, 심원의 비교불교학과 루만의 체계이론 사이의 차이는 명백하다. 그 둘은 한편으로는 각자 자신의 고유한 맹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서로 상대방의 결여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혹은 바로 그러한 차이점 때문에 그 둘은 또 다른 차원의 생산적 만남을 낳을 수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 심원의 마지막 목소리가 바로 이를 암시하는 듯하다. 실제로 심원이 전망한 두 가지 미래 공부 즉 과학과 명상은 구별의 사유와 연결의 사유를 각각 대표한다. 다시 말하면, 과학이 구별의 사유에 따라 연기의 법칙을 이해하는데 적합한 공부라면(루만이 성취한 영역), 명상은 일심에 기초한 연결의 사유에 따라 이 법칙을 체득하는 공부로 보인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이는 붓다의 법등명과 자등명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여기에다 심원이 붓다와 법을 호지한 금강선원의 신도였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심원의 마지막 목소리는 목목자락(木木自樂)하는 새처럼 자신의 철학(비교철학과 비교불교학을 포함한)을 내려놓고, 무애의 마음으로 과학과 명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학문을 하라는 당부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는 필경 심원이 이미 루만의 평정심을 뛰어 넘어 붓다의 평정심으로 열반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알리는 깨달음의 노래이리라.

Notes

이 비유담의 출처 중 하나를 보자: “그들(관념론적 물리학자들: 필자 첨가)은 유물론 및 유물론의 일면적 ‘기계론’과 싸웠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목욕 물과 함께 아기까지 쏟아버렸던 것이다(레닌, 1988: 279).”

여기에서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란 이 글의 작업적 정의로서, 심원의 비교철학적 업적 중에서 불교와 다른 사유를 비교한 심원의 비교연구성과를 지칭한다. 그러나 이렇게 의미를 한정하더라도, 심원의 비교불교연구의 범위를 확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다작으로 알려진 심원의 저술들의 곳곳에 비교불교연구에 해당되는 논문들이나 철학적 논고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교불교학으로 명확히 확정할 수 있는 4권의 단행본, 즉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김형효, 2000b),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김형효, 2002), 『원효의 대승철학』(김형효, 2006), 『마음혁명』(김형효, 2007) 이외에도, 심원의 비교불교연구에 해당되는 글들은 『철학적 사유와 진리에 대하여』1권과 2권 및 김형효의 철학적 편력 3부작(『철학 나그네』, 『사유 나그네』, 『마음 나그네』)에도 다수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글들은 대부분 내용적으로 4권의 단행본과 겹쳐지기도 하거니와, 이렇듯 방대한 비교불교연구의 성과를 이 글에서 모두 검토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도 하다. 이에 이 글에서는 상기의 단행본 4 권을 심원의 비교불교연구로 설정하고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의 제 4 장 1절에서 다시 자세하게 입증해 보기로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Hans–Georg Moeller(2012: 51-67)를 보기 바란다.

하이데거의 이 개념을 김종욱(2003)은 ‘사이-나눔’으로 번역하고 한 단위 속에 두 가지 상반된 정질이 함께 묶여 있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설하고 있다. 반면 에 루만은 이 개념을 구별(Unterschiedung)으로 개념화하고, 이것이 모든 발생의 근원임을 천명한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심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과 그 전통이 바로 단가적 사유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인식론적 형상학 혹은 순수현상학이라 할 수 있는 훗설의 현상학과 전혀 다르다는 의미이고, 그러한 점에서 별도로 ‘실존적 현상학’으로도 부른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윤병렬(2021)의 마지막 장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러한 사실은 윤별렬(2021)의 마지막 문장 중 하이데거와 관련된 진술만을 중심을 재구성할 때 잘 드러난다: “존재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론과 논리의 추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격적 성숙과 비약에 의해서라야 가능하다. 하이데 거에게는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 혹은 그의 후기 사유에서는 ‘이성적 동물’ 에서 존재의 개현에 따르는 현-존재(Da-sein)에로 되어야 한다(윤병렬, 2021: 495).” 바로 이 인용문의 현-존재(Da-sein)를 심원은 마음으로 해석한다.

박찬국(2017)은 현대과학기술에 의한 삶의 지배를 하이데거가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참고하기 바란다.

참고문헌

1.

김종욱. 2003. 『하이데거와 형이상학 그리고 불교』 철학과현실사.

2.

김형효. 2000a. 『원효에서 다산까지』 청계.

3.

김형효. 2000b.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청계.

4.

김형효. 2002.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 청계.

5.

김형효. 2006. 『원효의 대승철학』 소나무.

6.

김형효. 2007. 『마음혁명』 살림.

7.

니클라스 루만. 2020. 『사회적 체계들』 이철·박여성 옮김. 한길사.

8.

니클라스 루만. 2021. 『근대의 관찰들』 김건우 옮김. 문학동네.

9.

레닌. 1988.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정광희 옮김. 아침.

10.

박찬국. 2017.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21세기북스.

11.

심원사상연구회. 2022. 『심원 김형효의 철학적 사유와 삶』 보고사.

12.

유승무. 2010. 『불교사회학』 박종철출판사.

13.

유승무·박수호·심종화. 2021. 『마음사회학』 한울.

14.

윤병렬. 2021. 『하이데거와 도가의 철학』 서광사.

15.

펠릭스 라우. 2020. 『역설의 형식』 이철·이윤영 옮김. 이론출판.

16.

헬가 그립-하겔슈탕에. 2016. 『니클라스 루만-인식론적 입문』 이철 옮김. 이론출판.

17.

Hans-Georg Moeller. 2012. The Radical Luhmann. New York: Columbia Univ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