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연구 목적과 문제 제기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이 세 가지 중편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이다. 기존에 이 작품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과 논의가 있어 왔다.
오은영(2017)은 이러한 논의 전반의 흐름에 대해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자기중심성의 폭력성’이라는 관점에서 이 소설을 이해하고자 했다. 김명훈(2025)은 한강의 소설이 우리의 일반화된 서사 읽기 패턴과 문학적 경험을 그 토대부터 뒤흔드는, 강력한 정동 장치임을 지적하면서 문학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토대의 재구성이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김명훈, 2025: 413). 그리고 우리의 문학적 경험을 생태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언어 기호와 물질적인 것(감소된 이미지)의 연결망을 사유하기 위한 새로운 시좌를 찾되, 그 시좌의 좌표를 관찰자의 메타적 수준이 아니라, 텍스트(언어) 혹은 문학 현상이라는 단일한 평면 위에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요청된다고 보았다(김명훈, 2025: 425). 이는 불교에서 바라보는 언어의 위치와 연계지어 사유해 볼 수 있다. 언어(텍스트)란 모든 무명(無明)과 희론(戲論)의 시작점이기도 하지만, 진제(眞際)와 무위(無爲)의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뗏목과도 같다. 김명훈의 지적대로 문학을 현상적 차원에서 사유하는 일은 우리의 문학적 경험을 생태적으로 전환하는 하나의 시도가 될 수 있다는 의견에 공감한다. 한강의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실험적으로 접근하기에 좋은 텍스트이다. 또한 불교적 관점1)에서의 문학 읽기는, 그러한 생태적 문학 경험의 좋은 도구로 응용될 수 있다. 불교와 문학은 공통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20년간 채식의 삶을 실천하며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비평을 한 글도 있었다. 김지수(2016)는 자신의 채식 경험의 입장에서 주인공 영혜가 채식주의자라면서 어떻게 젓갈이 든 김치는 먹었는가를 ‘작가가 놓친 부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주요 문제가 ‘채식’의 문제였을까? 작품을 ‘채식’이라는 틀에서 보는 것 역시 우리에게 ‘해독 가능한’ 하나의 부분상(部分相)을 취한 일이었을 수 있다. 신수정(2010)은 소설에서 차지하는 ‘채식’의 의미에 대해 보다 심도있는 분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에 대해 ‘생태학적 기호로 발화하는 여성의 욕망이 어떻게 남성 공동체 내에서 규제되고 소멸되는지 그 규율의 과정을 보여주는 텍스트’라 보았다. 그리하여 채식을 우리 사회가 재생산해내고 있는 통념들에 의문을 가지고 다시 근원적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실천적 움직임으로 해석한다(신수정, 2010: 5). 그러나 남성과 여성, 육식과 채식이라는 이분법적 토대 위에서 이 작품이 이해되는 것은 무언가 작품의 전체성을 조망하는 면에서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보인다. 조성해(2025)는 『채식주의자』에 나타난 불교적 기호를 논하였다. 불살생, 사성제, 무아론, 연기론이라는 불교적 함의를 설명하며 기존의 이분법적 해석과 다른 차원의 관계맺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작품을 이해하고자 하는 폭이 보다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는 작가가 ‘고행 끝에 인간이 아니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결백(潔白)해질 수 있는가?’(조성해, 2025: 48)라고 되묻고 있다. 이 질문 속에서 그가 비록 불교적 기호를 가져와 작품을 이해해 보려 시도는 했으나, 작가의 언어와 작가의 문법을 온전히 수용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는가를 짐작해 보게 된다. 이러한 사례들은 단순히 서사 속에서 불교적 기호나 관련 기호들을 ‘발견’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함을 시사한다. 독자(讀者)는 불교적 기호를 소설에 적극적으로 대입하여 사유(思惟)하는, 보다 능동적인 독서(讀書)가 필요한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주는 난해함과 불편함은 독자가 보다 사유해야 하는 지점이 다른 텍스트들에 비해 많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본인이 『채식주의자』 에 포함된 세 작품 중 가장 처음 접한 작품은 「몽고반점」이다. 작품이 나왔을 무렵에 읽고는 거의 20여년이 지나 나머지 연작인 「채식주의자」, 「나무불꽃」을 읽게 됨으로써 이 세 편의 중편소설이 가지는 ‘상호연기적 서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몽고반점」만을 외따로 읽게 되었을 때는 이 작품이 단순히 한 예술가의 반인륜적인 성욕에서 오는 번민을 그렸다고 보았다. 그러나 「채식주의자」를 읽게 됨으로써 「몽고반점」이 고립된 개체(個體)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나머지 두 작품과 ‘상호 연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이자 한 부분’으로서의 작품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세 작품의 구조 자체가 우선 연기적(緣起的)임을 알 수 있다.2)
세 편의 작품이 연기(緣起)적인, 즉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독립적인 하나의 작품만 읽게 되면 자칫 오해를 할 수가 있다. 『채식주의자』 장편 중 첫 번째 작품인 「채식주의자」만 읽었을 때는 이 작품이 단순히 채식에 대한 이야기나 사회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다소 평면적으로 비추어진다. 그러나 세 작품을 모두 읽었을 때는 이것이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다층적인 서사이자, 이 소설을 관통하는 고통이 존재의 별업(別業)과 공업(共業)의 산물임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고통은 불행이라는 개별적 사건이 아닌, 고통의 원인인 집착을 해체할 수 있는 직접적 통로이기 때문에 성스럽다. 구원과 해탈의 가능성은 고통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 출발한다. 불교적 관점에 기반한 이러한 작품 읽기는, 기존에 이 작품이 독자에게 주었던 해석의 난해함과 부분적 이해를 풀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즉 기존의 연구가 작품에 대한 의미 해석의 차원에 머물렀다면, 본 연구에서는 작품 속의 고통이 왜 발생하는지, 그 고통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더 나아가 살펴보고자 한다.
Ⅱ. 사성제(四聖諦)의 관점에서 본 『채식주의자』
고성제(苦聖諦)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양쪽에 있어 모두 매우 중요하다. 고통의 자각이 없는 이가 열반이라는 초기불교의 목표를 이룰 리 없고, 중생에 대한 연민심을 바탕으로 보살행을 하고자 하는 대승보살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생의 갖가지 고통을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등현, 2022: 39).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각자의 ‘고통’ 속에 갇혀 있다. 여기서 주인공 영혜는 고(苦)를 끊으려 하고, 인혜(영혜의 언니)는 고를 견디며, 영혜 남편은 고에 적응하고 살고, 인혜 남편은 고를 욕망과 낙(樂)으로 여긴다. 작가는 실제 「나무 불꽃」을 쓰면서 ‘고통 3부작’이란 파일명을 붙였다고 한다(한강, 2007: 270). 인물들 간의 상호 영향이 연기적으로 구성된 『채식주의자』는 그야말로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첨예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원적 근거를 종합하면 duḥkha는 원래 ‘불편하거나 불쾌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이었으며(정승석, 2011: 100),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이 duḥkha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정승석(2011: 125-126)은 불교의 고관(苦觀)을 고에 대한 기본 인식과 형성 단계인 초기불교기, 고에 대한 분석적 통찰과 정립의 아비달마 불교기, 정립된 고관의 확장과 응용 및 자비 실천의 단계인 대승불교기로 정리하였다. 또 고에 대한 보편적 분류 개념으로 3고를 들고 있다. 그중 『중변분별론』에서 설명하는 3고는 취고(取苦), 상고(相苦), 상응고(相應苦)이다.3) 취고는 취(取)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으로 인집(人執), 법집(法執)을 취해서 오는 고통이다. 자아와 대상을 실체로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데서 기인하는 고통을 가리킨다. 상고[相苦]는 3수(受)와 3고(苦)로 그 모양이 나타나므로 상고라 한다. 상고는 아비달마 불교에서 말하는 3고에 해당하는 고통을 가리킨다. 상응고(相應苦)는 유위(有爲)와 서로 어울리기 때문이며, 유위법의 공통된 모양이기 때문이다. 조건으로 이루어진 것들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을 가리킨다(정승석, 2011: 115). 『중변분별론』에 나타난 3고는 고통의 3가지 종류라기보다는 고통이 가지는 세 가지 성질에 가깝다. 불교의 고관(苦觀)을 바탕으로 소설의 인물들이 겪는 고통을 분석하는 일은 우리가 고통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 영혜는 가부장적인 가정과 사회적 폭력에 장시간 노출되었던 인물이다. 육식(肉食)으로 상징화된 사회의 폭력성과 야만성에 고통받는다. 영혜의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이 아닌 살아있음 자체가 주는 ‘폭력성’에 기인한다. 그녀는 자신의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목숨들 때문에 몸과 마음의 고통을 호소한다(한강, 2007: 72).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중략…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막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중략…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우리 사회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가족들과 사회로부터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당한다. 「몽고반점」에서 영혜는 예술을 이유로 접근한 형부로부터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성적 폭력을 당한다. 「나무 불꽃」에서 영혜는 살고 싶지 않았으나, 병원으로부터 생명 유지라는 합법적 이유로 치료라는 이름의 강요를 당한다. 이 모든 고통은 고고(苦苦)라 볼 수 있는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고통의 생생한 모습들이다. 또한 ‘평범한 아내’라는 정체성이 무너지면서 기존의 일상이 무너지는 모습은 괴고(壞苦)의 묘사라 볼 수 있다. 영혜가 생존이라는 조건을 위해 육식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거부로 ‘식물 되기’를 희망하는 것은 행고(行苦)의 또다른 표현일 수 있다. 영혜는 작품에서 고고, 괴고, 행고의 삼고를 극단적으로 겪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인혜(영혜의 언니)에게도 남편과의 무미건조한 관계나 동생 문제, 삶의 피로가 고고(苦苦)로 현현한다. 그녀가 느끼는 괴고는 가족과 가족을 지탱하는 역할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그녀에게 행고는 살아내야만 한다는 태도에서 빚어지는 삶의 무게로 파악된다(한강, 2007: 239-242).
피곤해요. 정말 피곤하다니까요. 그는 낮게 말했다. 잠깐만 참아. 그때 그녀는 기억했다. 그 말을 그녀가 잠결에 무수히 들었다는 것을. 잠결에, 이 순간만 넘기면 얼마간은 괜찮으리란 생각으로 견뎠다는 것을. 혼곤한 잠으로 고통을, 치욕마저 지우곤 했다는 것을. …중략… 아무것도 문제될 것 없었다.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언제까지나 살아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는 어떤 다른 길도 없었다. …중략…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중략…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 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인혜는 고에 대한 자각은 있으나, 그것을 견디려고 할 뿐 벗어나거나 극복하려는 의지는 다소 약해 보이는 인물이다. 아니, 그녀는 자신이 한번도 제대로 ‘살아있지’ 못했음을 자각한다.
영혜의 남편이 겪는 고고는 급작스런 아내의 변화로 인한 불편함과 사회적 체면의 손상으로 나타난다. 정상적이고 평범한 아내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괴고를 겪고 있으며, 행고(行苦)에 대한 인식4)이 거의 없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자신의 관점에서 고통은 느끼지만, 주변에 대한 성찰이 없는 무명(無明)적 인물이다. 가장 평범해 보이지만 가장 큰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적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영혜의 형부는 예술적 욕망과 갈애(渴愛)에 번민하는 인물이다. 욕망을 충촉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양심과 죄책감, 수치심을 회피하는데서 극심한 불안과 긴장을 느낀다. 예술과 욕망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에 이르러서 괴고(壞苦)를 경험한다. 또한 그는 행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욕망으로 미화(美化)시키는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몸과 정신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복합적이고 실존적인 고뇌, 오취온고(五取蘊苦)에 괴로워하고 있다. 취고, 상고, 상응고와 사고, 팔고의 차원에서 보면 이들의 고통을 보다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표 1>은 고통의 종류로서 인물들의 고통을 분석한 자료이다.
고에 대한 분석은 『채식주의자』의 고통이 단순한 개인 심리나 사회문제를 넘어서 고통의 구조 전체를 담고 있는 서사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주요 고통을 분석해 보면 크게 두 가지 특징이 보인다.
하나는 입장은 달라도 네 인물 모두 구부득고(求不得苦)를 경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 영혜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여서 먹지 않고도 식물처럼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갈구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상황을 그녀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영혜의 남편은 지극히 평범해서 선택한 아내가 어느 날부터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는 궁극에 가서 부인과 이혼을 하고자 할 만큼 계산이 빠른 전형적 현대인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는 평범함을 원했으나 평범한 아내를 얻을 수 없었다. 인혜(영혜의 언니)의 경우는 딱히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문맥상으로 볼 때는 가정의 평안과 동생 영혜의 건강과 안정을 바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생의 상태는 점점 악화될 뿐 좋아지지 않았다. 인혜 남편의 경우도 예술작업과 처제의 몸에 있는 몽고반점에 대한 성적 환타지가 결합되면서 자신도 억제하지 못하는 강한 성적 충동과 번뇌로 괴로워한다. 막상 현실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까지 가버리지만, 처제와의 예술작업과 관계에서 얻은 것은 행복도 만족도 아닌 공허함이다.
다른 하나는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의 고통이 분화되는 원인에 대해, 그들이 집착하는 바가 각기 다른데서 비롯된다는 점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고통의 결과가 되기도 한다. 고통의 주체가 되고 고통의 대상이 되며 상호 관계 맺기를 하고 있다. <그림 1>은 고통의 상호 방향성을 도식화한 자료5)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단순히 폭력에 대한, 불살생에 대한, 여성에 대한 단편적 차원의 문제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세 편의 중편소설이 상호 연기적 관계를 가진 소설이라는 점은 이와 같은 고통의 분석에서도 알수 있듯이 서로의 고통에 깊이 ‘가담’되어 있고 영향을 주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채식주의자』는 “오취온고(五取蘊苦)의 붕괴와 저항, 구부득고(求不得苦)를 그린 소설, 내지는 고통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선을 그린 소설”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고통이라는 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상호 연기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오히려 고를 철저히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고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전향적 입장에서 고의 해결책을 제시했다(정승석, 2011: 98). 그러한 면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우리가 자세히 보기 꺼려지는 고통의 민낯을 섬뜩할 정도로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이 주는 불편함은 이 지점에서 온다. 고통 직면의 불편함. 고통을 직면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학은 이처럼 ‘소설’이라는 안전한 장치로 독자로 하여금 고성제(苦聖諦)를 직면하게 만든다.
고통의 원인에 대해 불교에서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과 갈애(渴愛)와 집착(執着) 때문이라 말한다. 『채식주의자』의 등장인물들이 집착하고 있는 것은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인다.
영혜는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존재에게 합리적이고 당위적인 것처럼 행해지는 폭력과 살생을 혐오한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영혜가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하여 채식을 선언한 것처럼 비춰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혜의 삶에서 암묵적 폭력과 강요에 대한 인내가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것을 소설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한강, 2007: 44-45, 46, 58, 72, 254). 그래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영혜에게는 고통이 된다. 영혜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빛과 물만 있으면 되는 나무에 집착한다. 심지어 나무를 보고는 나무들이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것이라면서 자신도 물구나무를 서서 버티는 기행(奇行)을 보이기도 한다. 육식을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섭식을 포기하는 단계로까지 자신을 밀어붙인다. 「나무 불꽃」은 고통에 타오르는 나무로 비유된, 존재 심연의 슬픔을 그리고 있다.
영혜 아버지는 영혜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관철시키려는 집착을 보인다. 남성 가장(家長)의 뜻을 가족 구성원들이 잘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제대로 된 집안이라는 전제가 그의 의식 전면에 깔려 있다. 그러한 자신의 규칙을 흔드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딸이라도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한강, 2007: 57-60).
영혜의 형부는 영혜 몸에 남아있는 몽고반점이라는 표상(表相)에 집착한다. 몽고반점이라는 표상과 영혜와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 접촉된 느낌이 주었던 낙수(樂受)에 집착한다(한강, 2007: 85-86, 94, 103). 그리고 몽고반점이란 표상에서 확장된 온몸에 꽃이 그려진 교합하는 남녀의 형상에 집착한다. 예술적 욕망과 낙수(樂受)라고 오해된 성욕으로 고통받는다. 영혜 언니 인혜도 고통받는다. 그녀의 고통은 일반적인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하려는 집착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들을 포기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고통이 있고 고통의 원인으로서 집착하는 내용도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집착에 대해 좀더 살펴보면, 집착에는 안으로 향하는 자신에 대한 집착과 밖으로 향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이 있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이고, 대상에 대한 집착은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의 대상에 대한 집착인 욕애(欲愛), 몸이 있는 천상이나 정신만 있는 신들의 세계 등 좋은 곳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인 유애(有愛),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회피하고자 하는 욕망인 무유애(無有愛)등이다. 이러한 집착과 욕망이 인간의 의도와 신체적 행위를 일으키면서 그 결과 괴로움이 생겨난다고 본다(등현, 2022: 44-45). 등장인물들은 모두 안팎으로 향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해 괴롭다.
멸성제와 도성제적 차원에서 작품 속 인물들을 이해해 보자.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결핍과 집착에 기인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인물이다. 또 서로가 다른 방법으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인간군상의 상징들이다. 다만, 그들은 정견(正見)이 없는 인물들이기에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추구하지만, 더 깊은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예로 영혜는 다른 생명의 희생에 의해서 유지되는 인간의 섭리(攝理)를 버리고 식물이 됨으로써, 약육강식이라는 생존의 굴레를 끊어내려 시도한다. 그녀가 땅에 뿌리를 박고 물구나무를 서 있다고 본 나무를 흉내내는 장면, 햇빛과 물만으로 살아가려는 장면은 단순히 ‘이해하기 힘든’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아니다. 영혜가 찾아낸 고통 소멸의 방법은 그러했던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의 실천은 고통의 소멸로 이어지지 않았다. 영혜의 이러한 시도가 진정한 도성제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폭력의 거부가 실질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자학, 자해라는 양상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즉 영혜는 ‘폭력’이라는 외부 경계를 거부하는데 함몰(陷沒)되어, 그 폭력을 인식하는 마음의 성질을 관찰할 수 없었다. 외부의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자기 자기 자신에게 폭력적이게 된다. 그리고 영혜는 동일시 해서는 안 되는 외부 경계에 대해 자신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지속적으로 범한다. 왜 영혜의 고행(苦行)이 열반에 이르지 못하고, 광기와 불행이라는 현실에 가까웠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형부(인혜 남편)가 찾은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또한 유사한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처제의 몽고반점이라는 표상에서 확대된 예술적 영감에 사로잡힌 그는, 그 계획대로 예술 작업을 하고 나면 그 번민에서 벗어날 것이라 기대한다(한강, 2007; 138). 하지만 예술 작업을 하고 나서 예술 작업이라는 미명 아래 더 크게 자리잡은 성적 충동에 의해 고통 소멸의 길은 와해되어 버린다. 영혜 아버지가 생각하는 고통 소멸의 길은 가족 구성원들이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영혜 어머니가 생각하는 고통 소멸의 길은 딸 영혜가 이전과 같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평범하게 고기를 먹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영혜 언니가 생각하는 고통 소멸의 길은 참고 견디는 행위를 통해 다른 가족들이 다시 회복되고 안정되어 일상적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고통 소멸의 방식은 모두 진정한 고통 소멸에 이르지 못하고 또다른 고통을 낳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 자신의 마음을 돌보지 못하는 인물군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6) 네 사람 모두 외부의 조건을 바꾸려고 시도할 뿐, 내면의 인식 구조를 바꾸는 방법들을 알지도 찾지도 못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기 자신과의 소통에서도 길을 잃고, 타자와의 소통도 건강하게 나누지 못한다. 그것은 고통의 환멸(還滅) 연기가 아닌 유전(流轉) 연기적 관점에서 작가가 서술하고 있음을 뜻한다. 독자들은 궁금해진다.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작가는 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독자에게 작품을 통해 질문을 던짐으로서 보다 능동적인 사유(思惟)를 권하고 있다.
Ⅲ. 불교의 공업(共業)사상 관점에서 본 『채식주의자』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불교의 공업(共業)사상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우리는 이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난해함과 불편함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보통 불교에서 업(業)은 의도를 가지고 한 행위를 뜻한다. 업은 개인의 행위인 별업(別業)과 여러 존재가 공동으로 짓고 받는 공업(共業)의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구사론』 4 분별업품(分別業品)에서 “세간의 차별은 업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사(思)와 사의 소작(所作)이니, 사는 바로 의업(意業)이며 사의 소작이란 이를테면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이다.”라고 말한다.7) 이것은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게 하는 개념이다. 공업(共業)에 대해서는 여러 유정(중생)들이 공통된 업의 증상력에 의해, 기세간이라는 물리적 세계를 느끼어 얻게 된다고 표현되고 있다.8) 또한 업감연기론(業感緣起論)은 모든 존재들이 공업중생(共業衆生)이기에 서로 떼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속에서 한순간도 끊어짐 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는 상호관계성과, 나아가 이 세계를 움직이는 동력인(動力因)과 질료인(質料因)은 바로 개인의 행위라는 행위철학(業論)을 체계적으로 설해 놓았다(종석, 2022: 255).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인물들을 통해 업감연기(業感緣起)의 이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가족, 자매라는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욕구와 결핍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은 별업을 구성하는 조건이 된다. 등장인물의 별업과 공업을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표 2>와 같다.
『채식주의자』에 나타나는 첫 번째 공업(共業)적 관점은 우리 모두가 가담한 ‘육식의 세계’라는 측면이다. 영혜가 어느 날 갑자기 채식을 선언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육식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질서에 대한 적극적 거부의 행위이다.9) 그러나 영혜의 파멸을 지켜보며, 자신들의 일상이 누군가의 희생과 폭력 위에 세워진 것임을 역설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한강, 2007: 230). 영혜의 채식선언은 또한 개인적 행동, 의지 변화가 결코 개인의 영역으로 그치지 않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혜의 채식 선언은 일차적으로 남편에게 영향이 미쳤고, 그것을 근심하는 가족들로 번진다. 암묵적으로 합의되어 있던 육식의 공업에 대해, 영혜는 굉장히 거친 방법으로 저항하고 있다.
두 번째 공업적 관점은 가부장제라는 사회적 굴레이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가장 큰 공업은 바로 폭력적인 위계질서이다. 영혜 아버지로 상징된 군대식 가부장 문화는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다. 영혜 남편이 보여주는 철저한 무관심, 형부의 대상화된 욕망은 모두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도구나 장식으로 보는 가부장적 시선이라는 공업의 산물이다.
이러한 별업과 공업의 차원에서 소설 속 등장인물의 관계를 살펴보면 고통의 전이(轉移)와 연기적 관계를 여실히 직면하게 된다. 영혜와 인혜는 폭력적인 아버지라는 공업(共業)에서 자랐다. 영혜가 그 영향을 외부 행위로 드러내며 식물이 되는 길을 택한 반면, 인혜는 그 공업을 내면으로 수렴하며 삶을 견디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두 자매의 별업(別業)이 형성된다. 같은 공업에 노출되었어도, 별업의 연에 의해 다른 양상의 결과가 파생된다는 것을 인혜와 영혜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다. 그래서 인혜는 영혜의 고통의 근원에 공감하면서도, 동생 영혜의 불행 앞에서 또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다.
두 남편들은 무명(無明)이라는 공업적 무지를 공유한다. 두 남편 모두 공통적으로 영혜와 인혜의 고통을 이해하고 도와주려하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 즉 평범한 삶의 지속(영혜 남편)과 예술적 성취 및 성욕 해결(인혜 남편)을 우선시 한다. 영혜의 거친 파멸과 광기(狂氣)는 두 남편들의 무명(無明)이라는 공업의 힘에 거의 정비례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상호 연기적 관계와 업의 측면에서 『채식주의자』를 바라보면, 우리가 서로의 고통에 얼마나 깊이 연루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사유해 보게 된다. 영혜의 비극은 개인적 차원의 정신병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내재된 폭력의 공업이 영혜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약한 인물을 통해 터져 나온 것이다. 삶의 의지를 상실한 영혜를 보며 느끼는 인혜(영혜의 언니)의 슬픔은 우리 모두가 이 공업의 그물망 속에서 독단적으로 자유롭거나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이상과 같은 불교적 관점에서 문학읽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결국, 소설을 읽는 행위가 독자로 하여금 고(苦)의 자각, 공감, 치유의 과정을 일으키고 있음을 구조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시도할 만하다고 본다. 대부분의 독자(讀者)들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 단어, 사건의 의미 유추를 통해 작품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그와 유사한 개념들을 대입하는 방법으로 정형화된 해석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 읽기 방식’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당연하게 보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주는 폭력’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태적 관점이나 페미니즘과 같은 철학으로 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주려는 시도들도 있었지만, 역시 완전하진 않았다.
불교적 관점에서 한강의 작품을 바라보게 되면,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설명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이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불교는 종교이기에 앞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써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시설(施設)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종교에 무관하게 세상을 이해하는 좋은 도구로 누구든지 이해하고 사유하고 경험할 수 있다. 강을 건너는 뗏목처럼 써야하는 것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금강경』은 이러한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경전이다.10) 세상을 보는 안목(眼目)을 제시하는 두 가지 범주, 불교와 문학을 융합(融合)함으로써 우리는 두 가지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첫째는 문학작품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이해와 해석이 가능해진다는 점이고, 둘째는 불교의 교리를 단순한 개념이 아닌, 실제 사례로서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사유하게 된다는 점이다.
Ⅳ. 유식(唯識)적 관점에서 본 『채식주의자』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유식(唯識, Yogācāra)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작품은 단순한 ‘채식 선언’의 이야기가 아니라 식(識)의 변현, 업과 종자, 그리고 현실 인식의 붕괴와 재구성을 다루는 매우 깊은 심리적․존재론적 서사로 이해할 수 있다.12) 유식학(唯識學)의 목표는 식(識)을 지혜(智)로 전환하는 것이다. 영혜는 생존을 위해 당연시 되는 ‘폭력의 종자’로 가득 찬 인간사회를 염오(厭惡)한다. 이것은 ‘꿈’이라는 저장된 종자들의 무의식적 출몰로 ‘채식 선언’이라는 일탈행위를 함으로써 그 세계를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영혜의 바람은 정견(正見)과 지혜가 결핍된, 극단적 거부와 부정의 행위로 표출된다. 그래서 그로 인해 또 다른 고통을 낳게 된다. 유식적 관점에서 본 영혜는 식(識)이 지혜로 변용(變容)되지 못하고, 인식의 틀 자체가 붕괴되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 상태에서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의 존재 인식의 전환을 위해선 자신을 비추는 거울, 즉 진리에 대한 경청이 요구된다. 진리의 경청인 문훈습이 원인이 되어 여리작의(如理作意)인 의언(意言)을 낳고, 이것으로 변화의 기틀이 조성될 수 있다(정륜, 2015: 200). 문사수(聞思修) 수행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영혜는 그녀를 바른길로 이끌어 줄 어떤 대상과 계기를 끝내 만나지 못했다.
또 영혜가 어느 날 갑자기 고기를 거부하고 채식선언을 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꿈’이었다.13) 꿈은 그녀의 아뢰야식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수많은 살생의 기억이란 종자(種子)가 인연을 만나 싹을 틔운 현행(現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습관적 경향성이면서 그 결과가 힘으로 유지되는 것을 습기, 훈습(熏習)이라 하는데, 그런 훈습의 결과를 종자(種子, bīja)라 한다(정륜, 2015: 45). 어릴 적에 미친개에 물렸던 기억, 아버지가 그 개를 잔인하게 죽이던 장면 등은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잠재되어 있던 부정적 종자들이 ‘꿈’을 계기로 현실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한강, 2007: 61-63). 독자들은 보통 ‘무슨 꿈 한번 꾸었다고 해서 저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나, 너무 억지스러운 설정 아닌가’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식적 관점에서 보면 꿈은 그동안 쌓여온 무수한 종자들이 시절인연에 맞춰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당위적인 설정이었고 그것이 현실에서의 ‘의도’와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4)
유식에서 제7식인 말나(末那; manas)는 ‘나’라는 자아에 집착하여 끊임없이 분별하는 마음이다. 자아의식은 아뢰야식의 흐름을 자기라고 간주하는 사유를 본질로 한다. 그래서 아견(我見), 아치(我痴),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네 가지 번뇌를 항상 수반한다(다카사키 지키도, 1997: 129). 이로 인해 6종의 인식기관에 의한 인식은 항상 자기가 누구인가를 파악하려는 성격을 띤다(핫도리 마사아키, 1991: 116). 영혜는 생존이라는 명분으로 육식(肉食)을 하는 인간사회를 거부하지만, 그 대안적 개념인 햇빛과 물로 살아가는 식물이라는 또 다른 ‘이상적인 자아’의 모습에 집착한다. 그녀의 육식거부, 음식거부 행위나 햇볕을 쬐고 광합성을 하는 행위는(한강, 2007: 75, 132, 177, 186)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소멸한 무아(無我)의 상태라기보다, ‘폭력 없이도 존재가능한 순수한 존재’라는 또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존재에 자신을 강하게 집착하게 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견디기 힘든 경계들에 대한 염오(厭惡)와 억압된 진심(嗔心)들이, 식물화(植物化)라는 가장 강렬한 형태의 변형된 아집으로 표출된다. 이처럼 유식적 관점에서 보면, 영혜의 기행(奇行)들은 비폭력을 추구했지만, 정작 자신의 말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 결과 아(我)의 소멸이 아닌 아(我)에 대한 강한 집착적 변형이 이루어지며, 자학과 자해의 행동들이 연속되게 된다. 업(業)은 의도를 통해 발생하기 때문에 생각과 견해를 다스리지 않고는 업을 정화하거나 치유할 수 없다(등현, 2022: 74). 주인공 영혜는 명치에 매달린 무수한 목숨을 자각하지만, 정작 자신의 의도들을 인식하여 진정한 고통 소멸로 가는 길엔 이르지 못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섭식을 거부하며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비극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앞에서 논한 것처럼 이 소설을 단순히 영혜라는 주인공 혼자만의 기이한 행동의 서사로 읽게 되면 작품 이해가 난해해지게 된다. 하지만 연기적 관점에서 그들의 고통 관계를 살피고 업의 작용을 이해하는 시선에서 바라보면, 고성제의 실상(實相)이라는 큰 그림을 조망하게 된다. 작품에서 영혜 남편, 형부, 영혜 언니는 각자 그들의 업식(業識)대로 영혜를 바라보고 있다. 남편에게 영혜는 갑자기 돌변한 ‘이상한 아내’로 비추어진다. 형부에게 영혜는 ‘예술과 욕망의 대상’이다. 언니에게 영혜는 ‘연민과 책임을 느끼게 만드는 고통스런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 아버지에게 영혜는 ‘어느날 갑자기 가정에 문제를 일으킨 딸’이다. 유식의 핵심 명제인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은 인물 각자의 시선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또 유식학의 삼성설의 관점에서 보면 영혜의 변화 과정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가 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타인들이 영혜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사람들은 영혜를 보고 ‘미쳤다, 병들었다, 아내로서 부적합하다’ 등 자신들의 허망한 분별심으로서 바라본다. 영혜 또한 ‘나는 나무다’라는 변계소집성의 굴레에 갇힌 존재이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의 관점에서는 모든 존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조건(인연)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예컨대 영혜가 나무가 되고자 하는 행위는 약육강식과 인간 중심적 사회를 벗어나 비폭력적인 생태적 세계로 들어가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편견과 집착이 사라진 본래의 진실한 모습을 뜻한다. 영혜가 채식도 모자라 금식을 하고 나무가 되려는 일련의 노력들은 원성실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서 ‘식물’ 혹은 ‘나무’라는 존재로의 집착, 또 다른 아(我)의 집착에 의해 그 꿈은 좌절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채식에서 섭식 거부의 양상은 이것을 암시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택한 삶의 태도와 방식은 그 나름대로가 믿는 ‘원성실성’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참된 원성실성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고통 소멸을 위해 아(我)를 유지시키는 조건들을 모두 버려야만 고통은 소멸될 수 있을 것인가? 작가는 주인공을 극단적 상황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존재의 물질적 전환이 아닌 인식의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Ⅴ. 결론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그 서사를 이해함에 있어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던 작품이다. 기존에 욕망, 폭력, 생태, 페미니즘, 화자(話者), 자기 중심성에 기반한 작품 이해와 불교적 기호를 통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부분상을 취하거나 이분법적 틀로 작품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작품의 전체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다고 보았다. 본 연구는 불교적 관점을 다양하게 적용하여 즉, 사성제, 공업 사상, 그리고 유식의 관점에서 작품을 고찰함으로써 작품 속에 나타난 고통의 서사를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고자 시도하였다.
그 결과, 작품 속 인물들의 고통은 단순한 개인적․사회적 차원을 넘어서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고통에 얼마나 깊이 가담하고 연루되어 있는가가 작품 전면에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고통에 대한 서사인 『채식주의자』를 사성제라는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독자는 오히려 문제의식과 고통 소멸의 방법을 더 숙고하게 됨을 확인하였다. 또 별업과 공업의 차원에서 인물들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과 공유하는 공동의 업의 관계를 살핌으로써 이들의 연기적 관계를 살펴보았다. 유식의 관점에서는 서사 속 꿈의 기능과 인물들의 행위를 식의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기존에 설명하기 난해한 지점들을 설명하려 시도하였다.
영혜는 고통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처절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고통소멸에 실패한다. 또한 주변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들의 고통의 서사를 ‘읽게 된’ 독자들은 인혜(영혜의 언니)의 시선을 통해(한강, 2007: 198-204) 우리의 공업(共業)을 성찰하고 정견(正見)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인물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로 귀결되는 양상은, 도리어 정견(正見)의 부재, 마음돌봄의 부재, 자아와 타자와의 소통의 부재에 대해 도리어 성찰하게 만든다. 『채식주의자』는 인물들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세밀하게 파헤침으로 독자로 하여금 고성제의 불편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직면하게 만들고, 또 고통에서 벗어나는 조건을 독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사유하게 한다. 이것이 사성제로서의 문학읽기가 가질 수 있는 치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 언급하진 못했으나, 불교적 문학치료의 방향은 단순히 불교문학이라는 한계에 가두지 않고, 다양한 텍스트를 불교적 안목으로 읽어내고 치유되는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가능하지 않겠는가라고 본다.
『채식주의자』는 현대인들 누구나 겪고 있는 고통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때론 영혜처럼, 영혜의 언니처럼 영혜의 남편처럼 영혜의 형부처럼 고통에 반응한다. 한강의 다른 작품과 불교적 사유와 관계된 여러 인접 작품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 점은 이번 연구가 가지는 한계이다. 또한 차후 지속적으로 연계되어 고찰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문학은 고통의 구체적인 모습과 관찰을 깊어지게 한다. 문학은 고성제에 대한 미시적 접근이다. 또한 불교의 사성제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하나의 구체적 방편이 될 수 있다. 작품은 불교라는 범주에서 그들에게 고통 소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성찰하게 만든다. 서로 다른 범주의 관계를 성찰하고 사유하는 일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폭을 보다 넓고 깊어지게 한다. 문학을 수행으로 경험하는 일, 또는 불교를 세상 보는 안목으로서 사유하고 여러 분야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일은 앞으로도 응용불교학에서 다양하고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것은 삶과 괴리되지 않은 문학, 삶과 괴리되지 않은 종교의 참 모습을 되찾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