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월주 스님의 행원(行願)과 한국사회의 발전

송월주 스님의 사상과 보현행:

신규탁 1
Gyoo-Tag Shin 1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1Professor, Department of Philosophy, Yonsei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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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Feb 28, 2018; Revised: May 11, 2018; Accepted: Jun 20, 2018

Published Online: Jun 30, 2018

국문초록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봉사활동, 복지활동, 구호활동, 더 나아가 이름은 다르지만 남을 위한 일들이 많이 있다. 송월주 스님도 그런 일을 하신 한 분이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월주 스님의 그런 실천 활동을 대승불교 실천운동의 연장선에서 이해하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남을 위하는 월주 스님의 실천운동에는 이런 운동을 하는 일반 사람들과 공통적인 면모도 있지만, 스님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점이 있다. 그것은 ‘보현행’이다. 즉, ‘보현의 보살행’이 있다. ‘보현행’은 대승불자들에게는 공통적인 이상인 동시에 또 이념이기도 하다. 월주 스님은 불교적인 체험에 입각한 보살행을 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비로법계의 진리를 체험하고, 그 체험에 입각한 보살행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구호활동에 특징이 있다.

Abstract

In this paper, I understand and evaluate his ideas in the extension line of the Buddhist practice movement of the Mahayana. There are various types of service, welfare and relief activities in the world. By the way, This is the same in that the names are different but intended for others. He is the one who did it. He has something in common, but there is something special about him that can not be seen by others. That is the practice of Samantabhadra. The practice of Samantabhadra is a common ideology and ideology of Mahayana Buddhism. He has a bodhisattvas based on Buddhist experience. His Buddhist experience is the cause of Huayan philosophy (華嚴哲學), which is characteristic of his philosophy of practice.

Keywords: 송월주; 보현행; 화엄철학; 이타행; 대승불교; 실천운동
Keywords: Song Uel Ju (宋月珠); The Practice of Samantabhadra (普賢行); Huayan Philosophy (華嚴哲學); Consideration; Buddhist Practice Movement

Ⅰ. 머리말

송월주라는 스님이 계신다는 것을 필자가 알게 된 것은 필자의 대학생활과 시작을 같이했다. 첫 번째는 1978년 어느 날이었다. 워커힐 뒷산에 영화사가 있다. 이 절은 당시 태고종 스님들이 점유했었는데, 월주 스님이 중심이 되어 이 절을 조계종에서 접수했다. 어린 나로서는 하도 신기해서 버스를 갈아타고 또 걷고 그렇게 그 절을 가 보았다. 거기서 스님을 뵈었다. 두 번째 대학생불교연합회 서울지부 활동을 하면서였다. 1979년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서울지부 사무실이 서울 안암동에 위치한 개운사 경내의 총무원 청사 지하실에 있었다. 당시 조계종은 총무원 청사가 둘이었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법당 뒤에 있었다. 송월주 스님은 당시 개운사 측 총무원장이셨는데, 당시에 나는 멀리서 그 분을 뵈올 수 있었다. 세 번째는 면전에 뵈었는데, 1980년에 나는 봉선사에 의지해서 살았다. 봉선사 주지였던 월운 스님께서 서울로 학교 가는 길에 월주 스님께 서류 봉투를 전하라는 심부름을 시키셨다. 온 이유를 말하고 인사를 드리고 봉투를 전해드렸다. 월주 스님 曰 “행자가 이렇게 돌아다니면 쓰나?” 당시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행자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봉선사의 기강을 욕 먹인 것 같아 지금도 죄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1987년도 동경으로 유학 가기까지 서울에 살면서 내게 들려오는 월주 스님은 조계종 종단의 지위 높은 행정가였다. 당시 조계종의 종단정치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는 4년 임기인 총무원장들이 1-2년에 바뀐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의 유학 기간 동안은 서의현 스님이 긴 시간 총무원장을 해서 외형적으로 종단은 안정세처럼 보였다. 1993년 유학을 마치고 오니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1994년 개혁 종단이 들어서면서 월주 스님의 이름이 다시 들려왔다. 28대 총무원장(재임; 1994-1998)이 되셨다.

필자에게 월주 스님은 조계종과 태고종 사이의 ‘분규 중심에 선 인물’, 다시 조계종 종단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로 기억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종단의 중책을 마친 뒤에, 월주 스님의 행보는 큰 변화가 있는 것으로 필자에게는 기억되기 시작했다. 소위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는 인물’로 바뀌었다. <우리 민족 서로 돕기>, <실업 극복 국민 공동위원회>, <실업 극복 국민재단 함께 일하는 사회>, <지구촌 공생회>, <함께 일하는재단> 등, 그 명칭만 보아도 그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본 논문에서는 송월주 스님께서 종단의 행정에 손을 놓으신 1998년 이후, 스님의 사회활동을 ‘보살행’이라는 대승불교 운동의 지평위에 올려놓고,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 사용하는 ‘보살행’이란 ‘보살된 자의 실천’을 뜻한다. 보살행은 대승불교 운동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불교 교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보살사상의 등장은 중요한 연구의 테마이기도 하다. 그런데 필자의 본 논문에서는 보살사상의 연원이나 역사적 추이를 살펴보지는 않을 것이다.1) 이 방면에 대해서는 국내에는 이봉순 교수의 연구에 잘 정리되어 있다. 필자는 월주 스님이 주관했던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스님의 그 일이 화엄교학을 연구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주목했다. 그 결과, 필자가 얻은 결론을 간단하게 적으면 아래와 같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봉사활동, 복지활동, 구호활동, 더 나아가 이름은 다르지만 남을 위한 일들이 많이 있다. 월주 스님도 그런 일을 하신 한 분이다. 그런데, 월주 스님에게는 그런 공통적인 면모도 있지만, 스님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철학이 있다. 그것은 ‘보현행’이다. 즉 ‘보현의 보살행’이 있다. ‘보현행’은 대승불자들에게는 공통적인 이상이요 이념이다. 그런데 월주 스님에게는 화엄교학에서 말하는 보살행이 있다는 것이 본 연구자의 연구결과이다. 스님은 불교적인 체험에 입각한 보살행을 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로법계의 진리를 체험하고, 그 체험에 입각한 보살행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구호활동은 특징을 갖는다. 필자는 ‘화엄의 수행법’에 관련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신규탁, 2007a, 2013). 이 대목에서 필자는 화엄의 수행법을 ‘비로법계를 깨치는 일’,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는 수행’으로 정리했다. 월주 스님의 세상 구호활동에는 이 두 요소를 갖추고 있다. 이것이 월주 스님이 보여준 실천 운동의 특징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런 연구 결론을 얻었는가? 이제 그것을 교리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문헌분석적으로 설명해 가기로 한다.

Ⅱ. 본 논문에 사용하는 용어 정의: ‘법성교학’, ‘법성종학’

본 논문을 집필하면서 필자가 목표로 했던 과제는 다음과 같다. 월주 스님의 사상과 보현행을 불교사상적으로 접근해 보자. 즉, 스님의 이타행을 화엄사상을 통해 조명함으로써 불교사상적 기반과 의미를 평가해 보자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필자가 사용한 ‘보현행’과 ‘화엄사상’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불교 용어이다. ‘화엄사상’이라는 큰 범주 속에 ‘보현행’이 포함될 것이다. 문제는 ‘화엄사상’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이다. 필자는 ‘華嚴學’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한국 불교학계의 용어 사용에 대해서 먼저 검토한 바 있다. 이 문제는 오래전 ‘한국불교학회’에서도 발표를 했는데, 여전히 연구 진행 중이다. 당시 필자는 잠정적으로 이렇게 제안했다. ‘화엄사상’나 ‘화엄학’이라는 용어 사용을 잠시 멈추고, ‘법성교학’ 내지는 ‘법성사상’으로 새로운 개념을 사용해보자고 말이다. 이제 본 논문에서는 이렇게 새롭게 필자가 제안한 개념을 바탕으로 ‘월주 스님의 이타행’을 조명하여 처음의 집필 의도에 부응하고자 한다.

‘華嚴學’이라는 용어를 필자가 처음 접한 것은 金仍石 교수의 『華嚴學槪論』(동국대학교 출판부, 1960)이라는 책이다. 다음으로 본 것이 張元圭 교수의 「華嚴學의 大成者 法藏의 敎學思想(1)」(『불교학보』 제13집,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76)이다. 장 교수님은 그 후에서도 ‘華嚴學’이라는 용어를 제목에 넣은 논문 활동을 했는데, 그 분의 학문에 대해 필자는 『불교평론』에 소개한 바 있다(신규탁, 2014b). 이상의 책이나 논문 제목으로 쓰인 ‘華嚴學’이라는 용어는 일본으로부터 이 땅에 ‘근대적 의미의 불교연구’가 수입되면서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물론 일본의 그것은 ‘서양의 충격’과 관계되었음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學’에서 사용되는 ‘學’이 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 둘이 있다. 첫째는 고유한 ‘연구 범위’ 내지는 ‘연구 분야’가 있어야 한다. 즉, ‘범위’ 내지는 ‘분야’가 여타의 學과 구별되어야 한다. 즉, 둘째는 그 범위 내지는 분야를 연구하기 위해 마련된 고유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논증의 형식을 띠어야 한다. 주의 주장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러면 과연 위에서 말한 ‘서양의 충격’에 의해서 만들어진 ‘華嚴學’이라는 명칭이 과연 독특한 ‘연구 범위’와 ‘방법’을 염두에 두고 붙인 명명법인가? 조심스럽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서양의 충격’에서 비롯된 ‘華嚴學’이란 명명법은 비록 연구의 ‘대상’에는 고유한 영역이 있지만, 연구의 ‘방법’에 여타의 學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 일본에서는 언제부터 ‘華嚴学’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가? 그것은 명치유신 이후이다. 당시 일본 학계는 유럽의 학문을 수용하면서, 여러 신조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学’이다. 유럽에서 생성된 각종 학문을 번역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만든 신조어이다. 철학이니, 물리학이니, 수학이니, 기하학이니, 하는 등등의 ‘○○学’ 그것인데, 소위 ‘天台学’이니 ‘禪学’이니 ‘華嚴学’이니 ‘淨土学’이니 하는 용어도 이런 과정에서 생긴다. 게다가 종파 불교인 일본의 불교계는 근대화를 겪으면서 저마다 근대적 법령에 의한 ‘學校法人’을 설립하여 소위 大學이라는 교육기관을 운영했다. ‘宗立大學’을 운영하면서, 그들은 위에서 말한 ‘○○学’이라는 이름 뒤에 ‘專攻’이라는 이름을 붙여 소위 ‘宗学’의 일환으로 ‘천태학 전공’이니, ‘밀교학 전공’이니, ‘선학 전공’이니, 또는 ‘천태 전공’이니, ‘밀교 전공’이니, 하는 신조어까지를 생산해내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신조어를 만드는 과정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일본에서는 凝然 스님이 쓴 『八宗綱要』라는 책이 일찍이 유포되었고, 또 일본의 ‘分度僧制度’로 인해, ‘天台宗’이니, ‘華嚴宗’이니 ‘眞言宗’이니 하는 ‘○○宗’이라는 용어가 역사적으로 친숙해져 있었다. 이런 일본 불학계로서는 ‘○○宗’에 ‘宗’이라는 글자 대신 ‘学’이라는 글자를 대치하여, ‘禪学’이니 ‘華嚴学’이니 ‘淨土学’이니 하는 이름 붙이는 방법은 큰 거부감 없이 수용 정착되었다.

그런데 종파불교는 일본불교사의 특징으로, 그것을 중국이나 한국에까지 확장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비록 중국 수나라 시대의 ‘衆’으로 승려들의 전공을 분류하는 방식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과 같은 의미의 ‘종단’으로 볼 수는 없다. 동아시아 근대에서는 유럽의 학문이 이 지역에 전래되면서 사상가의 ‘號’ 내지는 ‘이름’ 뒤에 ‘學’ 자를 붙여서 ‘○○學’이라는 식으로 작명을 했다. 이렇게 작명하는 내면에는 당시 동아시아 지성계의 ‘유럽 콤플렉스’가 바탕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주자학’이 그렇고 ‘양명학’이 그러며, ‘심학’이 그렇고 ‘이학’이 그러며, ‘천태학’이 그렇고 ‘정토학’이 그러며, ‘선학’이 그렇고 ‘화엄학’이 그러며, ‘유식학’이 그렇고 ‘구사학’이 그렇고, 등등이 그렇다.

일본에서의 경우는 ‘화엄종’이라는 용어와 그에 상응하는 교단 조직이 있었던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근대적 학문의 훈련을 받은 일본에서의 불교 연구자들은 이 점을 유의하여, ‘華嚴敎學’ 내지는 ‘華嚴思想’이라는 명칭을 선호했다(高峯了州, 1942, 1976; 坂本幸男, 1956; 鎌田茂雄, 1978). 이 문제에 대한 반성적 검토도 역시 병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木村淸孝 교수는 『화엄경』에 직접 설해진 사상을 ‘『화엄경』사상’, 화엄종에 속한 승려가 체계적으로 구성한 사상을 ‘화엄교학’으로 구분하여 사용하려는 시도도 했다. 이 문제를 한국에서 처음 책으로 발표한 것은 동국대 학술원의 HK교수 김천학 박사의 『균여 화엄사상 연구』이다. 이 책에서 김 박사는 “「華嚴學」을 화엄가에 의해 구성된 교리 조직 및 객관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제 학문 분야를 망라하는 개념으로 포괄적으로 사용한다(김천학, 2006: 3).”라고 정리하고 있다. 한편, 전남대 철학과의 조윤호(2003) 교수는 ‘華嚴佛敎’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 용어에 대한 정의는 따로 하고 있지 않다.

한국의 경우는 『한국화엄사상연구』(동국대학교 출판부, 1982)에 여러 논문들을 소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화엄사상’, ‘화엄교학’, ‘화엄학’ 등, 다양하게 표기하고 있다. 중화민국(대만)이나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경우도 한국과 상황은 비슷하다. 중국의 侯外廬는 ‘華嚴學’으로, 대만의 唐君毅는 ‘華嚴宗’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釋元旭 編譯, 1988). 최근도 ‘華嚴學’이라는 용어 사용은 여전하다(劉貴傑, 2002; 崔奧飛, 2013). 한편, 서구에서는 The Philosophy of Hwa Yen Buddhism이라는 이 책명이 보여주다시피 ‘화엄철학’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이 책은 1977년 펜실배니어 주립대학 출판부에서 영어로 선보였는데, 국내에도 번역 소개되었다(츠앙, 1990).

그런데 근대 이전 중국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남송 志盤의 『佛祖統記』(1267년)에서는 ‘賢首宗敎’이라는 이름 아래에, “初祖終南法順法師, 二祖雲華智儼法師, 三祖賢首法藏法師, 四祖清涼澄觀法師, 五祖圭峯宗密法師, 長水子濬法師, 慧因淨源法師, 能仁義和法師”(『대정장』 49: 0292c)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때의 ‘賢首宗敎’의 뜻은 ‘현수 스님의 사상을 으뜸으로 치는 가르침’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그 후 청대의 錢塘의 慈雲續法 스님이 편집한 『法界宗五祖略記』(1680년)가 등장한다(『신찬속장』 77: 0619b). 5조를 나열한 것은 『佛祖統記』와 일치한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法界宗’ 역시 ‘법계를 으뜸으로 치는(조사에 관한 간략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중국 송대의 契崇이 1061년에 편찬한 『傳法正宗記』 역시 이런 맥락을 유지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시대를 달리하면서, 지역을 달리하면서, 다양한 이름 붙이는 양상이 있었지만 그들의 책이나 논문에서 다루는 내용에 큰 차이는 없다.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형태적으로는 『화엄경』의 전래와 번역에 관한 연구, 『화엄경』을 연구하던 인물 연구, 『화엄경』의 주석에 관한 연구, 소위 ‘화엄 5조’ 내지는 ‘화엄 7조’들의 저술에 관한 연구 등이다. 내용적으로는 一眞法界, 一心, 佛性, 理事, 相卽相入, 地位, 三性, 三聖, 法界觀, 六相圓融, 十玄緣起, 性起論, 敎判, 普賢行願, 등등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필자에게는 석연하지 못한 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엄경』 자체를 연구하는 것으로 ‘화엄학’을 규정하려는 입장이다. 김천학 교수가 정의한 대로 ‘華嚴學’을 규정하려면, ‘화엄가’의 의미를 또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김 교수는 ‘화엄가’를 정의 내리지는 않았다. 과연 ‘화엄가’란 무엇인가? 『화엄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화엄가’인가? ‘家’가 무엇인가? 천태지의도 『화엄경』을 연구했는데, 그도 ‘화엄가’인가? 선종의 선사들도 『화엄경』을 운운하는데, 그들도 ‘화엄가’인가? 여기서 필자는 김 교수가 사용한 용어를 시비하려는 것은 아니다. ‘『화엄경』’이라는 핵심어를 매개로, ‘화엄학’을 정의하는 것 자체의 모순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둘째는,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언급해 오던 ‘화엄조사설’의 계보에 등장하는 인물을 매개로 ‘화엄학’을 규정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5조설’이든 ‘7조설’이든 말이다. 만약 이렇게 ‘화엄조사’에 관한 학설에 입각하여 ‘화엄학’을 규정 짖는다면, ‘화엄학’은 과거에만 존재하고, 현재에는 없는 셈이다. “『화엄경』에 직접 설해진 사상을 ‘『화엄경』사상’, 화엄종에 속한 승려가 체계적으로 구성한 사상을 ‘화엄교학’으로 구분”하려는 것도, 그렇게 하려는 의도가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더 섬세하게 규명해야 할 것들이 생긴다. ‘화엄종’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우선 제기된다. ‘5조설’ 혹은 ‘7조설’로 설명하려고 할 것이다. ‘宗’ 소위 ‘학파’ 개념에 대응하는 것으로 재해석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祖統’이라는 계보의식만 있을 뿐이다.

이런 두 가지 모순 때문에, 필자는 ‘사람’이나 ‘경전’을 기반으로 학문을 정의하는 기존의 방법을 잠시 보류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소위 ‘華嚴祖師’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主義’ 내지는 ‘主張’을 주목했다. 三論을 연구했다고 삼론종 또는 삼론학이라 명명하고, 천태의 제자라고 해서 천태학 또는 천태종이라 명명하고, 『화엄경』을 연구했다고 화엄종 또는 화엄학이라고, 정토부에 속하는 경전을 연구했다고 해서 정토종 또는 정토학이라고 하는, 소위 ‘연구의 대상’으로 그들 학문공동체의 이름을 규정하는 것을 보류하기로 한다. 그렇게 하기 보다는, 대상이야 어떠하든 연구 과정에서 노정되는 ‘철학적 주의 또는 주장’으로 그들 학문공동체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것이 필자가 여러 논문과 발표문에서 제안하는 새로운 명명법인 ‘法性敎學’ 또는 ‘法性宗學’이다.

‘法性宗’이라는 용어는 필자의 새로운 造語는 아니다. 당나라 圭峰宗密(780-841)의 저작 속에 중요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그는 일찍이 ‘철학적 주의 또는 주장’을 기준으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3宗으로 대비한 바 있다. 3宗 중에서 ‘법성종’에 대한 규봉종밀의 설을 필자는 학계에 정리하여 발표한 바 있다(규봉 종밀, 2010; 신규탁, 2013). 여기에서는 그 요점만 도표로 인용한다.

표 1. 性·相·空 早見表
분류의 기준 법성종 법상종 파상종(공종)
1 1승과 3승의 차별 唯有一乘 一乘為權
三乘為實
敎如筏喩應捨
2 1性과 5性의 차별 一切衆生皆有佛性 有五種種性 一體衆生性空
3 唯心과 眞妄心의 차별 諸法唯眞心 諸法唯妄心 一切境界唯是妄心
4 眞如의 隨緣性과 凝然性의 차별 眞如具二義 眞如唯不變 悟妄皆空, 空不變易
5 3性의 空·有의 卽·離의 차별 三性空有卽 三性空有離 三性無自性
6 중생과 부처의 부증불멸의 차별 生佛元平等 生佛不增滅 生佛皆空
7 2諦의 空·有와 卽·離의 차별 二諦空有卽 二諦空有 所詮法義不出二諦
8 4相이 同時냐 前後냐의 차별 四相一時 四相有前後 時無別體
9 能所와 斷證의 卽·離의 차별 能所斷證卽 能所斷證難 與性宗文同義異
10 佛身 유위 무위의 차별 報化皆無爲 佛報化唯有爲 有爲無爲俱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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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기존의 3종의 분류에 의한 ‘법성종’ 중에서, 그 속에 드러나는 ‘철학적 주의 또는 주장’으로 불교를 학적으로 분류하여 그에 따라 ‘법성교학’ 또는 ‘법성종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법성교학’ 또는 ‘법성종학’의 핵심 개념은 두 말 할 것 없이 ‘법성’이다. 중생의 심신작용에는 불생불멸하며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본바탕이 있는데, 이 본바탕을 法性(dharmatā)이라 한다. 중생의 본바탕인 법성에는 불가사의한 영험과 청정한 지혜의 기능이 있다. 이것이 법성교학의 ‘형이상학’이다.

한편, 『화엄경』에서는 ‘한마음[一心]’이라 한다. 본바탕인 ‘한마음’ 위에서 소위 12支 연기가 펼쳐진다. 12 연기의 각 支 하나하나는 모두 공하고 무상하지만, ‘한마음’은 본래의 바탕이므로 영원하다. 연기의 소산인 ‘현상’에 휘둘리지 말고, 본바탕인 ‘한마음’을 각자가 저마다 몸소 체험하여, 그 본바탕에 갖추어진 불가사의한 능력을 꾸밈없이 사용하면서 세상살이하자는 것이 법성교학의 ‘가치론’이다.

그러면 본바탕을 어떻게 하면 체험할 수 있을까? 그것은 ‘無妄心’이 되어야 한다. ‘무망심’이란 망심을 없앤다는 뜻이다. 인연에서 만들어진 허망한 일체의 망심이 사라지면 불생불멸의 무위법인 열반이 드러난다. 우리는 ‘선행된 인상’을 가지고 사물을 인식한다. 이런 인식 방법으로 인해 생긴 지식에는 대상 즉 경계가 있다. 이 대상인 경계는 선행된 인상과 매개되어 우리들의 의식 활동 속에 표상된다. 이런 원초적인 순환 구조 때문에 본바탕은 ‘인식’이라는 방식으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무망심’이 될 때에 무매개적으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체험하는 게 아니라,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무망심’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화엄조사들은 ‘觀法’을 활용한다(신규탁, 2014a). 이상이 ‘법성교학’ 및 ‘법성종학’의 얼개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기존의 이 분야 연구자들이 ‘화엄조사’ 또는 ‘『화엄경』 연구’를 기준으로 해서 ‘화엄교학’ 또는 ‘화엄학’을 규명하는 학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을 잠시 보류하고, ‘철학적 주의 또는 주장’을 기준으로 ‘법성교학’ 또는 ‘법성종학’으로 학적 토대를 제시하려 한다. 이하에서는 장을 달리하여 ‘법성교학’, 또는 ‘법성종학’에서는 ‘어떻게 수행’할 것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간단하게 정리하기로 한다.

Ⅲ. ‘법성교학’의 수행법

『華嚴經』과 관련된 불교의 수행법 내지는 실천을 논함에 있어 항상 거론되는 경전적 근거는 소위 「普賢行願品」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청량징관의 주석과, 그 주석에 대한 규봉종밀의 復注가 있다. 또 이 두 교학승들의 입장을 계승하면서, 「普賢行願品」을 화엄종의 수행 儀禮에 활용하기 위한 작업을 한 학승이 있다. 그것이 바로 晉水靜源(1011-1088) 법사의 『華嚴普賢行願修證儀』(No.1472本, No.1472本)이다.2) 정원 법사의 이런 수행의식들은 의천(義天; 1055-1101) 스님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고, 의천 스님은 이런 儀式들을 바탕으로 해서 천태종을 세운다(신규탁, 2007b).

필자는 기왕에 『華嚴普賢行願修證儀』를 자료로 하여 정원 법사가 화엄의 수행법을 연구 발표한 바 있다(신규탁, 2013). 이하에서는 그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월주 스님의 ‘이타행’과 관련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요약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그 수행법의 첫째는 ‘비로법계를 깨닫는 것’이고, 둘째는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는 것’이다.

첫째는, 비로법계를 깨다는 일을 보자. 정원 법사에 의하면 ‘비로법계’란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一眞無碍法界’ 혹은 ‘一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一心’은 성인과 법부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眞心’이라고 한다. 이렇게 ‘비로법계’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는, 다시 ‘진심’의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 ‘진심’에 관한 설명이 불경의 곳곳에 나오는데, 그 불경들의 敎相敎釋에 따르면 거기에는 표현법이나 설명의 방식은 다르다. 본 논문과 관련해서만 설명하겠다. 화엄종의 전통에 서 있는 학승들의 敎相判釋 전통에서는 『화엄경』을 ‘別敎’에 배속시키고 있다. 이런 『화엄경』에서 말하는 ‘眞心’은 ‘法界心’을 지칭한다. ‘법계심’은 3種世間과 4種法界를 자기 안에 완전하게 포함하고 있다. 이런 ‘법계’를 체험하는 방법으로 그들은 ‘端坐思惟’ 즉 조용하게 앉아서 관찰 사유하는 실천법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는,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는 수행을 보자. 그러면 어떻게 보현의 행원을 실천하는가? 정원 법사에 따르면 ‘觀行’을 하라고 한다. 필자는 ‘관행’을 ‘觀察하는 수행’으로 해석했다. 관찰 그 자체가 수행이다. 이 수행에 대하여 정원 법사는 구체적으로 ‘帝網無盡觀’과 ‘無障碍法界觀’이라는 관찰 방법을 제시한다. 간단하게 이 두 가지 관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帝網無盡觀’이란 「보현행원품」의 ‘10大行願’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것을 정원 법사는 크게 다섯 범주로 요약했다. 첫째는 禮敬門이고, 둘째는 供養門이고, 셋째는 懺悔門이고, 넷째는 發願門이고, 다섯째는 持誦門이다. 다음, ‘無障碍法界觀’이란 “일체의 染法과 正法 자체가 모두 ‘장애가 없는 법계의 마음’이라고 묵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능히 관하는 지혜도 역시 모두 법계의 마음이라고 묵상하는 것이다.”3) 이런 사상을 집약적으로 드러낸 작품이 바로 『修華嚴奧旨忘盡還源觀』이다. 정원 법사는 『화엄망진환원관』을 법장 스님의 저서로 보고 있지만4) , 이 책은 한 필자의 창작이라기보다는 당나라 법성교학의 총 결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저서는 기본적으로 『대승기신론』을 근간으로 해서 법성교학을 종합 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故 장원규 교수도 일찍이 언급한 바 있다(장원규, 1979: 20-21).

이상에서 필자는 법성교학 내지는 법성종학의 수행법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비로법계를 깨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보현행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법성교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위의 두 일은 본질적으로 하나란다. 선후 관계가 아니란다. 제 마음 속에 있는 진심을 깨쳐 그것과 하나 되어 자기에게 본래 구비되어 있는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화엄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뒤에서 밝히겠지만, 월주 스님의 각종 ‘이타행’이 바로 이 지점에서 화엄교학의 이타행을 실천한, 필자가 말하는 법성교학 실천가로서의 월주 스님이 높이 평가되는 점이다.

Ⅳ. ‘법성교학’의 지평에서 바라본 월주 스님

월주 스님의 실천사상을 설명함에 있어 필자는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다; 태공 월주 큰스님 법문집』(송월주, 2016)에 실린 「머리말」에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월주 스님의 불교사상 내지는 그의 실천철학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그것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평소 ‘귀일심원(歸一心源) 요익중생(饒益衆生),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서 중생을 이익케 하라’,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만물여야일체(萬物與我一體), 천지가 나와 한 뿌리요, 나와 한 몸’이라는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법의 다른 표현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연결된 존재요,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아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일생은 연기법에 입각해서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온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송월주, 2016).

월주의 실천 철학이 여기에 모두 요약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이하에서 말해보기로 한다. 크게 세 대목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째, 귀일심원(歸一心源) 요익중생(饒益衆生).

둘째,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만물여야일체(萬物與我一體).

셋째, 연기법(緣起法)에 입각한 보현행원(普賢行願) 실천.

월주 스님의 실천철학의 특징은 위의 첫째에 가장 극명하게 노정된다. 필자가 법성교학 내지는 법성종학의 지평위에서 월주 스님을 평가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 있다. 위에서 밝혔듯이 화엄교학의 전통에서 말하는 실천 수행은 ‘悟毘盧法界’와 ‘修普賢行’이 양대 축임을 밝혔다. 그러면 필자는 정원 법사의 설을 인용하여, 이 둘은 즉 ‘悟毘盧法界’와 ‘修普賢行’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설명했다.5) 월주 스님은 ‘歸一心源’과 ‘饒益衆生’을 둘로 보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는 이 둘을 선후 관계로 보거나, 또는 ‘歸一心源’이 없는 ‘자기식’의 ‘饒益衆生’을 한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자기식’이란, ‘주의’, ‘이념’, ‘종교’, ‘철학’, ‘입장’ 등등 소위 세상의 가치를 지칭한다. 한 예를 들어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의도를 선명하게 해보고자 한다. 민주주의 입장에서 ‘요익중생’을 하면, 사회주의 입장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그게 ‘요익중생’이 될까? 개혁주의 이념에 입각해서 ‘요익중생’하면 보수주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을 위하는 일일까? 태공당 송월주의 실천철학은 인간의 본심 근원에 들어간 그 자리에서 나오는 그런 이타행이다. 생명의 본래 자리에 들어가서 하는 이타행이다. 그는 보현행과 깨달음을 하나로 보고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 구절이 “보살행이 곧 깨달음이다(송월주, 2016)” 이 구절은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다; 태공 월주 큰스님 법문집』 제2장의 제목이다. 편집자가 지어 붙인 것일 것이다. 제2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참으로 적절하게 장의 제목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민족사의 편집주간 사기순 선생의 안목이 돋보인다. “곧”, 한자로 말하면 “卽”의 철학이다.

이상은 필자가 위에서 셋째로 거론한 “연기법(緣起法)에 입각한 보현행원(普賢行願) 실천.”과도 일맥상통한다. 연기법 중에도 월주 스님은 ‘事事無碍法界緣起法’에 입각한 ‘普賢行’을 하고 있다. 월주 스님의 법문집을 보면 그가 도처에서 연기법을 얼마나 당시의 현실과 상황에 적절하게 법문을 하고 있는지를 독자들은 읽을 수 있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의 유명한 구절6) 을 월주 스님은 자신의 법문에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이런 실천철학의 입장에서 월주 스님은 나도 기쁘고 남도 기쁜 일을 해왔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법은 세간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살펴서 밥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약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약을 주어야 합니다(송월주, 2016: 7-8).” 필자는 이 대목을 읽으면 <사시불공>의 ‘請詞’가 머리에 떠올랐다. 이하에 그 내용을 보자.

南無一心奉請. 以大慈悲, 而爲體故, 救護衆生, 以爲資粮. 於諸病苦, 爲作良醫. 於失道者, 示其正路. 於闇夜中, 爲作光明. 於貧窮者, 令得伏藏. 平等饒益, 一切衆生. 淸淨法身, 毘盧遮那佛. 圓滿報身, 盧舍那佛. 千百億化身, 釋迦牟尼佛. 西方敎主, 阿彌陀佛. 當來敎主, 彌勒尊佛. 十方常住, 眞如佛寶. 一乘圓敎, 大華嚴經. 大乘實敎, 妙法華經. 三處傳心, 格外禪詮. 十方常住, 甚深法寶. 大智文殊菩薩, 大行普賢菩薩, 大悲觀世音菩薩, 大願地藏菩薩, 傳佛心燈, 迦葉尊者, 流通敎海, 阿難尊者, 十方常住, 淸淨僧寶. 如是三寶, 無量無邊, 一一周邊, 一一塵刹. 唯願慈悲, 憐愍有情, 降臨道場, 受此供養(『한불전』 10: 555a-b).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사찰에 매일 巳時에 올리는 佛供의 禮文이니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불자들은 귀에 익숙할 것이다. 자비를 본질로 삼기 때문에 중생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자량을 삼으시어, 병든 자에게는 의사가 되어주시고, 길 잃은 자에게는 바른 길을 제시하시고, 어둠 속에서는 광명을 놓으시고, 가난하고 궁색한 자에게는 곳간 되어주시는, 그런 불법승을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는 대목이다. 이런 점에서 월주 스님은 응당 공양을 받을 만한 ‘應供’이시다. 동시에 스님은 <사시불공> 축원에 나오는 ‘世世常行菩薩道’를 실천하면서 ‘究竟圓成無上覺’을 추구하는 보살행자라고 생각된다.

Footnotes

1)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은 이봉순(1998)을 참고하라.

2) 이 두 대본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규탁(2013) 제13장 참조.

3) 『華嚴普賢行願修證儀』(『신찬속장』 74: 369b), “二無障礙法界觀, 謂常想一切染淨諸法, 擧體全是無障礙法界之心, 此能觀智, 亦想全是法界之心.”

4) 『修華嚴奧旨忘盡還源觀紀重校』(『대정장』 45: 641a), “昔孤山智圓法師嘗稱, 杜順尊者, 抉華嚴深旨, 而撰斯文. 蓋準唐中書舍人高郢序北塔銘耳, 淨源向讀唐丞相裴休述妙覺塔記, 記且謂, 華嚴疏主仰賢首還源翫味亡斁, 若驪龍之戱珠也, 乃知斯觀實賢首國師所著斷矣. 抑又觀中, 具引三節之文, 皆國師之語章章焉.: 옛날에 고산지원법사(976-1022)는 두순 존자께서 화엄의 깊은 종지를 결택하여 이 글을 지으셨다고 일찍이 말했다. 생각건대 이는 당나라 중서사인 벼슬을 한 고영(高郢)이 序한 『北塔銘』 에 의거해서 그렇게 한 것 같다. 나 정원이 일찍이 당나라의 승상 배휴가 찬술한 『妙覺塔記』를 읽었는데, 거기에서 이르기를 “화엄 소주(=청량 징관)께서 현수 법장 스님의 『망진환원관』을 보시고 그 맛에 취해 놓지 않기를 마치 검은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것 같으셨다”고 했다. 이로서 『망진환원관』이 현수 국사께서 지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망진환원관』 속에 3절의 문장을 갖추어 인용했는데 이는 모두 현수국사의 문장이다.”

5) 『華嚴普賢行願修證儀』(『신찬속장』 74: 369a),“旣得了悟無障礙法界于本心 旣得了悟無障礙法界于本心. 是中本具十蓮華藏微塵數相好, 帝網無盡神通功德, 與十方諸佛, 更無差別.” 우리말 번역: “본심(本心)에서 무장애법계를 이미 분명하게 깨치면, 그 속에는 본래부터 연화장세계의 무수히 많은 상호(相好)와 제석천의 그물 코 처럼 겹이 하염없이 많은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 (이러한 상호와 공덕은) 시방의 부처님들과 비교하여 전혀 차이도 다름도 없다.”

6) 『화엄경』 「여래출현품」(『대정장』 10: 272c-273a), “이때에 여래께서 법계의 일체 중생을 널리 관찰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기이하고 기이하다. 이 모든 중생들이여!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찌 미혹하여 보지 못하는가? 나는 마땅히 성스런 진리를 가르쳐 주어 그들이 망상을 영원히 떠나, 제 스스로 자신 속에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를 볼 수 있게 하여 부처와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게 하리라’고 하셨다.”(규봉 종밀, 2010: 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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