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왜 공동체인가?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는 사회적 가치, 이념의 지배를 받아 왔다. 지배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물질적, 공간적 영역에서 그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씨족 사회에서 현대 정보사회에 이르기 까지 지배적 사상은 그 사회를 대표하는 사상, 철학, 종교의 모습을 보여 왔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유물론자에게도 지배적 사상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념, 신념, 지배적 사상, 철학, 종교는 한 사회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현실의 이슬람 국가는 여전히 종교와 국가 권력이 함께 한다. 제정일치는 21세기에도 공고하게 진행형이다. 서구의 중세는 가톨릭이 지배적인 이념과 일상을 지배했었다. 인간의 모든 영역의 삶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신의 명령이었고, 인간의 구체적인 일상을 간섭했었다. 지배적이었다는 의미는 신앙과 믿음을 통한 삶의 구속이었다. 모든 것이 신의 이름, 영광을 위해 존재했었다.
근대 사회 이후 사회는 종교적 지배를 벗어났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런데 너무나 자명한 것은 여전히 종교는 인간의 삶과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당연한 결과다. 그 숱한 이념과 사상도 인간들에게 전적인 동의를 얻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종교는 사회 집단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집단의 유지와 형성에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사회집단의 한 유형인 공동체는 특히 이념적 조건을 바탕으로 한다. 물론 개인 즉 개체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역시 사회적 이념과 사상이다. 그런데 개인주의의 핵심에서 유추해 보면, 세상의 중심은 ‘개인’이고, 그 개인이 가진 생각은 우주의 별 만큼 많다. 사회과학에서는 개인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개인’이라는 정의는 언제나 사회적 환경 속에서나 가능하다. 1960년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의 논쟁은 사실 이러한 철학적, 인문적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결과는 매우 싱겁게 끝이 난다. 개인은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사회적(공동체)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 치열한 논쟁 속에서 얻은 결론이다.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는 모순적인 사회집단이다. 이미 전근대 사회의 전형적인 공동체는 근대사회에 이후 해체되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전근대’적 형태의 공동체는 사회구성체 유형에서 사라졌다. 이후 평등, 개인, 자유, 자본의 사회적 표어 속에서 공동체는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사회가 출현한 이후 복고적이고 반동적인 공동체적 운동이 있었다. 그러한 운동은 사회적 관성이 작용한 과거로의 회귀에 대한 자연적 반응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공동체의 해체와 등장의 반복적인 움직임이 계속되어 왔다.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 실현의지는 단순히 시대와 역사의 사회적 변화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복고적 공동체운동에서 현대사회의 대안으로서 공동체는 끊임없이 출현해왔다.
본 글에서는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갈증이 왜 존재하는 가에서 출발하면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이념적 근거인 종교성과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점에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먼저 공동체의 논쟁과 정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공동체가 다른 사회 집단과 어떻게 다른가는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 된다. 그와 더불어 생활공동체의 특징 속에서 그러한 논쟁과 정의를 구체화할 것이다. 두 번째 이념과 공동체에서는 이념으로서 종교성에 대한 논의다. 종교학이 아닌 종교 사회학의 관점에서 보기로 한다. 사회학에서 종교는 하나의 사회적 사실이며, 그래서 사회집단의 형성과 유지에서 종교의 역할과 의미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에서 과연 종교성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종교 공동체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념을 가진 공동체를 통해서 그 관계를 보기로 한다.
Ⅱ. 공동체란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왜 공동체를 추구하는가에서 시작된다. 소유의 시대에 공유를 주장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개인의 자유보다 집단 전체의 이익이 우선인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문은 사실 역설적으로 현대 사회에 대한 질문으로 바뀔 수 있다. 개인적 소유가 얼마나 우리를 불평등하게 만드는가? 개인의 무한한 찬양이 같이 사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가? 자유가 최선의 목표이면서 우리는 왜 소외를 느끼는가? 왜 우리는 자연과 조화를 깨버리는가? 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생산하지 못하면 자본주의는 붕괴된다. 끊임없이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주체, 자유를 관념적으로만 되뇌일 뿐이다. 물론 공동체가 모든 사회문제를,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는 결코 없다. 공동체는 실제적으로 이념적으로 대안적 성격을 갖는다. 사실 공동체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현대사회에서 공동체적 삶의 어려움은 단순히 개인이 중심인 사회적 환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적 소유에 대한 혁명적 전환 없이는 공동체에서의 삶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다시 질문으로 되돌아 와보자. 공동체는 기존 사회의 모순과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다른 가치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일종의 운동을 포함한다. 사실 답은 매우 간단하다. 소유를 공유로 바꾸면 된다. 한낱 자연의 한 피조물인 인간이 무슨 권리로 자연을 소유한단 말인가?1) 사회계약설에서는 타당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사회적 이론일 뿐이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갈망은 사회에 대한 대안이며 실천을 동반한 운동일 수밖에 없다. 결과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여전히 진행 중인 것처럼.2)
공동체에 대한 논쟁은 공동체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한다. 사회, 집단, 공동체 등에 대한 정의는 집단의 성격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반영한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이러한 집단의 분류, 범주화가 그 입장과 관점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너무나 당연하다.
또한, 공동체는 가족의 형태에서 인류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회집단은 곧 공동체라는 의미 없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가족은 가장 기초적인 사회이면서 공동체의 원형이다. 그런데 과연 가족은 여전히 공동체 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사실 가족은 그 관계의 깊이와 밀도 때문에 오히려 매우 불안하고, 그래서 해체되는 경향도 매우 많다.3) 그래서 사회적 관계, 공간의 범주와 밀도에 따라 공동체라는 용어가 달리 사용될 수밖에 없다. 분명 가족과 아파트 공동체는 다르고, 종교 공동체와 인류 공동체는 다르다. 공동체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다르다. 필자는 그래서 공동체를 소프트한(soft, 부분적) 공동체와 하드한(hard, 전일적) 공동체로 나눈다. 소프트한 공동체는 자신의 삶의 일부분을 할애하고, 부분적인 이념, 단기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공동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기존의 일상적 삶과 다른, 사건으로서 공동체에 참여한다. 하드한 공동체는 자신의 삶 전체를 공동체에 투여한다. 기존의 가족, 사회적 관계망과 절연하고 공동체에서 일상과 이념을 일치시켜서 살아간다. 하드한 공동체라는 개념은 필자의 용어다. 그 특징은 기존 사회와는 다른 이념, 일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대안공동체 그리고 전체의 일상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생활공동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다양한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사회학적으로 규정해보기로 한다. 집단, 사회에 공동체라는 용어가 사용되면서 개념이 일반화 되어 버린다. 그래서 오래된 힐러리(Hillery)의 정의4)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힐러리가 규정한 사회학적 의미에서 공동체는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공간, 둘째는 상호작용, 셋째는 연대성이다.
첫째, 사회 집단은 일정한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다. 특히 공동체는 기존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곳’, ‘장소’이다. 따라서 물리적 경계가 필요하다. 관념적, 추상적 공동체가 아닌 실제의 공동체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물론 물리적 경계는 이념적 경계와 함께 한다. 단순한 물리적 공간의 의미를 넘어 선다.
둘째, 상호작용이다. 지속적인 관계가 존재해야 한다. 즉, 관계가 제도화가 있어야 한다. 특히 일상의 공유는 매우 중요하다. 대표적으로 공동식사, 공동노동, 공동주거가 있다. 또한, 공동체의 의사결정도 제도화 되어야 한다. 상호작용은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인 동시에 그 관계가 구체적인 집단으로 표면화되기 위해서 존재한다.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도 당연히 상호작용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상호작용은 근접성과 친밀성의 강도가 깊고 시간적으로도 지속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단순한 상호작용의 의미를 넘어 선다.
셋째, 연대성이다. 공동체와 종교의 관계에서 주목해야 될 부분이다. 뒤르켐(Durkheim)이 지적하다시피 근대사회 이후에도 집단의 연대성은 사회 집단의 한 요소였다. 연대성에 대한 언급은 공동체가 다른 사회와 구별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유기적 연대의 강조는 ‘상호의존’이라는 새로운 이념이 연대성의 핵심이 된다. 뒤르켐의 유기적 연대는 퇴니스의 이익사회처럼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념과 신념의 공유를 통해서 나타난다. 특히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종교, 이념, 신념을 통한 연대성은 필수적이다.
현대사회에서 물리적 공간은 이전의 시대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정보사회의 기술은 공간이라는 개념을 더 확대시킨다. 즉, 공간은 이제 과거와 다르게 물리적 한계를 넘어 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는 가상이든 실제든 간에 일정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 공간의 의미의 변화가 공동체의 공간이라는 점을 침해하지 않는다. 공동체에서 공간은 기존 사회와는 서로 다른 이념과 일상을 통해 구체화된다. 공동체에서 상호작용은 가족, 친밀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우리는 공동체라는 말을 상식적으로 사용할 때 가족, 형제애라는 점을 굳이 드러낸다. 그래서 공동체에서는 희생, 헌신이라는 것이 덕목으로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연대성은 그 자체의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사회집단은 연대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연대성은 그 집단의 이념, 신념 그리고 그것이 종교라면 더 큰 효과를 가져온다. 공동체는 그래서 자신만의 공동체 이념을 통해 연대성을 추구하고, 그 자체를 목표로 하기도 한다.
일종의 사회유형으로서 공동체는 생활을 공유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활공동체는 기존의 추상적 공동체와 구별된다. 일상을 함께 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과정이다.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인 가족마저 현대사회에서 그 의미가 축소되고 있다. 2015년 인구조사 결과, 예상을 넘어서 1인 가구가 전체의 27%를 차지했다. 이것의 의미는 분명하다. 이제 가족은 의식주라는 가장 기본적인 일상을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과연 가족을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공동체의 아이러니가 있다. 공동체적 관계의 기초는 가족이다. 가족은 최소의 사회적 단위이면서 다른 사회집단과 차이는 곧 공동체라는 것이다.
물론 가족 공동체가 모든 공동체의 전형이 될 수는 없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가족에서 지역, 도시로의 확대를 가족 공동체의 한계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적 원형으로 가족은 언제나 공동체 관계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본 절에서는 기존의 부분적 공동체 혹은 소프트한 공동체를 넘어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공동체 즉 생활공동체를 살펴보기로 한다.6)
생활공동체는 첫째 기존 사회와는 다른 이념,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참여자는 그 집단의 이념과 가치에 동의해야 한다. 합의해야 한다. 단순히 동의차원을 넘어서, 기존사회와 단절의 의미도 포함된다. 단순히 기존사회와 일상영역에서의 단절만으로는 공동체에 참여할 수 없다. 참여는 할 수 있지만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이념은 단순히 가치의 동의, 합의를 넘어서 구성원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밀접히 관련된다. 두 번째는 자급자족의 경제다. 기존사회와는 다른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방식, 즉 상업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생활공동체는 이러한 자급자족을 목표로 한다. 미국의 공동체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다. 공간의 부족과 구성원의 부족 때문이다. 그래서 외부사회와 일정정도의 경제적 교류는 필요하다. 세 번째는 민주적 의사결정이다. 공동체의 역사에서 종교적 성격의 공동체는 대부분 강력한 리더와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갖고 있다.7) 하지만 생활공동체는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실험을 하고 있고 꽤 성공적이다. 네 번째, 입회에 대한 훈련이다. 기존사회와 다른 이념과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구성원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공동체 생활을 결정하게 된다. 다섯째, 대안 교육을 제공한다. 입회 훈련이 신입자들을 위한 과정이라면 대안 교육은 내부의 구성원을 위한 것이다. 역사를 가진 공동체는 내부에서 태어나거나 외부의 어린 구성원들이 있다. 이들을 위한 자신만의 교육체계를 가진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러한 대안교육이 매우 매력적인 요인이다(이동일, 2011: 34-35).
종교성과 관련해서 주목할 부분은 이념, 신념이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다. 생활공동체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념은 공동체 자체, 공동체 구성원, 외부사회와의 관계를 명확히 해준다. 기존 사회의 이념과 일상적 삶은 공동체와는 다르다. 그래서 공동체가 표방하는 이념은 정신적 경계로서 작용한다. 또한, 구성원들에게 자신들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확신하는 정신적 배경이 된다. 이념은 그래서 일상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공동의 삶은 그러한 이념 없이는 불가능하다.
Ⅲ. 공동체에서 종교성
종교는 분명 사회과학의 주제다. 맑스, 베버, 뒤르켐은 종교를 사회적 변혁, 일상적 삶의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변수로 본다. 맑스(Marx)는 ‘Die Religion ist das Opium des Volkes,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베버는 종교가 자본주의와 선택적 친화력을 가진다고 본다. 뒤르켐은 사회적 통합과 종교 간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고전 사회학자의 종교에 대한 언급은 종교의 일상적 지배력과 영향력을 지적하고 있다.
종교는 사회학에서 하나의 변수이다. 그리고 때로는 독립변수, 때로는 종속변수로 사회현상을 설명한다. 종교성 특히 개인적 종교성은 교리수준, 신앙도, 의식참여 정도, 열정, 생활에서 중요성으로 정리된다(오경환, 1990: 19). 너무나 당연하게 이러한 개인적 종교성은 교회집단, 교회, 교회공동체에 대한 연대감과 친밀감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종교의 형태와 역사와 관계없이 종교성은 개인과 집단(교회, 절, 사원 등)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도구다.
종교는 분명 신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한 경험은 교리, 예의와 의례 그리고 사회적 표상으로 공동체, 집단으로 나타난다. 특히 주목할 것은 종교적 의례와 경험은 의식주에서도 표현된다. 종교가 인간의 불가항력적인 고민 즉 죽음, 불안, 공포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의 활동에서 종교 또는 종교적 행위는 기본적 변수다. 종교적 경험은 그러한 경험을 하는 집단, 공동체로 나타난다. 종교가 한편으로는 개인적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가 집단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다. 종교적 경험이 더 나아가 종교적 의례로서 확대됨으로서, 결국은 하나의 집단, 사회를 구성해 낸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심지어 과거의 원시 종교에 이르기까지 종교 공동체는 다양한 형식으로 존재해왔다. 당연하게도 종교 공동체는 반드시 같은 종교적 경험과 의례를 동반하지만, 그 사회적 기반은 공동체였다(오경환, 1990: 53-65). 공동체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구성원, 물리적 공간(심리적 경계로서 공간 포함), 내적 유대의 토대를 필요로 한다. 공동체가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규정될 때에는 집단으로서 의미를 가져야 한다. 공동체는 사회집단 중에서 구별되는 특징을 지녀야만 한다. 조직, 집단은 당연히 그 조직과 집단이 추구하는 목표를 가진다. 그리고 그 목표는 집단을 공동체적으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그러한 사회 조직형태를 공동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공통의 이념적 요소가 일상적 행위, 상호작용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념과 신념의 존재 유무가 아닌 지배적 경향이 있어야 한다.
사회학에서 집단은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이러한 집단의 구분은 내부 구성원의 공유감정, 내부적 정체성에 의한 것이다. 공동체는 이러한 서로 하나 됨과 소속감, 정체감의 결과이다. 종교는 내부 구성원에게 공동체라는 사회적 집단의 성격을 부여해준다. 결국 종교적 이념, 의례, 감정적 동일성은 공동체의 한 부분임에 분명하다(이원규, 2013: 67).
we-ness는 단순한 목표의식이나 집단의 목표와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집단이 이해나 이익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깊이와 밀도가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구체적 영역을 함께 하려면 이념적 기반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종교는 이러한 점에서 매우 단단한 연결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이념 자체가 목표이고 일상생활의 과정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공동의 경험, 의례, 일상의 겹침에 종교적 동질성과 유대감은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서구의 공동체 역사는 종교 공동체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전통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다수의 공동체에서도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서구 최초의 공동체는 서기 1세기의 에세네 공동체이다. 로마의 종교 박해를 피해 터키와 이집트 등의 지역에서 출현했다. 중세의 가톨릭 수도원은 공동체의 전형적인 모습을 띤다. 서구의 초기 공동체의 특징은 엄격한 기독교적인 전통을 띠고 있다. 대표적인 종교적 공동체는 하모니 소사이어티(1804-1904), 셰이커공동체(1787-현재), 오나이더(1848-1881), 조아(1817-1898), 아마나(1843-1933), 브룩팜(1841-1847), 후터 형제단(1873-현재) 등이다.
이들 공동체는 종교적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운영된 형태였다. 이들 공동체가 와해되는 과정에는 종교적 요인, 종교외적인 요인들이 작용했다. 종교적 요인으로는 종교지도자에 의한 리더십이 오히려 기존의 구성원들 간의 반발로 이어졌다. 또한, 경제적 원인, 외부와의 관계, 자연재해 등 다양한 원인들이 존재했었다. 중요한 것은 종교가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심적 가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플리머 순례자 공동체는 영국청교도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북미신대륙 동부 해안에 자리 잡게 된다. 북미 원주민의 습격과 환경 재해를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한 신앙공동체였다.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종교적 자유와 도덕을 추구한 공동체였다. 후에 북미 인디언과 함께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면서 공존의 추수감사절의 시작이 되는 공동체였다. 신대륙은 개신교도들에게 자유의 땅이었지만 시련의 장소이기도 했다. 인디언의 습격과 척박한 환경은 공동체 구성원에게 견디기 힘들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신앙은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가장 기초적인 배경이 되었다.
한국의 공동체 운동은 서구적 전통과 매우 다르다.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재야의 민주주의 운동과 함께 발전하게 된다. 물론 필연적으로 개발 독재의 소외된 빈민, 노동자은 사회의 주변부로 전락하게 된다. 이때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빈민 구제 움직임은 그들을 함께 묶는 신앙공동체로 발전하게 된다. 종교가 사회민주화, 빈민 구제와 관련되어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990년대 IMF 위기가 시작되면서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위해 공동체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실상사를 중심으로 IMF 위기로 전락한 도시인들을 위한 농촌공동체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캔터(Kanter)는 미국의 유토피아 및 공동체의 기원을 연구하면서 미국 공동체의 흐름을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최초의 공동체로서 종교적 이상을 가진 공동체, 둘째, 산업화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공동체 셋째 인간의 소외와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실현, 인격성장을 위한 공동체로 정리하고 있다. 사실 초기의 종교적 공동체는 기독교 근본주의로서 유럽의 박해를 통해 신대륙으로 이전해 온 공동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신자들의 공동체, 교회 공산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오나이더 공동체, 쉐이커 공동체 등 다수들이 신대륙의 초기 공동체를 형성했다(캔터, 1983: 13-15).
사실 모든 공동체가 종교적 성격을 띠지는 않지만 두 가지 점에서 유사하다. 첫째는, 공산적 소유의 특징이 나타난다. 공동노동과 공동소유가 그것이다. 유독 공동체는 역사와 개념적 어원에서도 보듯이 ‘함께 한다’는 의미가 개입되어 있다. 그래서 함께 생활하고, 함께 생산하고, 함께 소비한다. 공동체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기존사회와 단절된 채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삶을 살아가는 곳에서는 항상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 둘째는, 산업사회, 자본주의사회와는 다른 사회적 이념, 근본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다. 공동체는 사적 소유,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거부한다. 이러한 이념적 편집증은 기존 집단과의 차이뿐만 아니라, 공동체 자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근본적인 요인이 된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종교 공동체는 아미쉬 공동체다. 아미쉬 공동체는 기독교 교파이자 공동체이다. 기독교의 보수적인 교파이면서 엄격한 생활 가족을 바탕으로 한 기업시스템을 채택한 종교를 바탕으로 둔 공동체이다. 아미쉬의 공동체는 신대륙의 다른 종교 공동체와 유사하게 종교개혁의 산물이다. 이들은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제세례파의 한 분파로 1700년대에서 1800년대에 걸쳐 미국 펜실베니아주로 이주한 종교 공동체이다(호스테틀러: 2013: 17). 극단적인 개인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아미쉬는 공동체라는 틀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살아가고 있다.
공동체를 주장하거나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거의 개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공동체라는 사회적 유형이 전근대 사회의 일반적 구성형식이었지만, 사실 ‘인간이 모여 산다’는 단순하면서 분명한 전제에서, 공동체는 출발한다. 퇴니스(Tönnies)가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본능적이라고 본 것은 당연한 결과다. 마페졸리 역시 ‘부족의 시대’를 주장하면서 개인주의는 역사상 한계를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그가 주장하는 부족은 유동적이면서 일회적 모임을 의미하지만 집단속의 개인을 전면에 내세운다. 사회적 유형으로서 공동체가 갖는 그 성격은 집단속의 개인이 헌신, 희생, 목표, 이념에 대한 동의를 바탕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공동체는 심리적으로 동일시, 문화적으로 공동의 가치, 규범, 목표의 동의에서 일체감이 나타난다(신용하, 1985: 41). 개인은 공동체에서 심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집단 속에서 집단의 압력을 느끼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집단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외로움, 소외라는 심리적 현상은 집단의 소속감의 정도에 달려 있다. 뒤르켐의 이기적 자살론은 이러한 집단과의 통합을 사회학적 설명이다.
사실 공동체가 구성원 모두의 전체적 동의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기본적인 공동체의 가치와 공감대를 가져야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결국, 공통의 사회적 목표를 가져야 한다(가드너, 1997: 27). 따라서 종교는 가장 효과적인 목표의식을 갖게 한다.
모든 공동체는 이념을 가진다. 사실 이러한 전제는 왜 공동체를 추구하는가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공동체의 경우, 공동체의 목표나 신념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조직의 구성원리가 개입될 수 있다. 즉, 공동체를 만드는 데 있어서 다른 포괄적인 공동체와는 달리 구체적인 목표가 존재한다. 목표는 특정한 신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종교적이든 종교와 유사한 것이든 간에 구성원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신념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의 사회는 자본주의, 개인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사회적 가치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공동체보다는 개인과 자유, 개인적 소유가 우선이다. 그런데 왜 이념이 필요한가? 그 이념은 기존 사회와 다른 이념을 의미한다. 공동체는 개인적 소유가 아니라 공동체 소유다.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를 추구한다. 공동체에 따라 절대적 리더가 있는 경우와 매우 민주적인 의사결정 체제를 가지고 있다.
현시적 조건 즉 물질적, 정신적 한계로 대부분의 공동체는 그리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공동체 특히 기독교 공동체는 비교적 오래 지속되어 왔다. 그 이유는 종교라는 권위를 통해 공동체가 와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박호성, 2009: 270). 종교적 권위가 갖는 역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특히 리더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공동체 성장에 매우 효율적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성장, 즉 구성원의 증가, 공간의 확장은 이러한 비민주적인 리더의 역할을 거부한다. 역설적으로 강력한 리더의 영향력이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오기도 한다.
공동체(공동사회)는 사회적 의지로서 일치, 인습, 종교로서 성격을 갖는다(퇴니스, 2010: 352). 공동체에서 종교, 종교성이 이념이나 신념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종교, 종교성이 공동체와 관계를 네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종교는 분명 사회집단의 사회적 연대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한 점에서 공동체에서의 종교, 종교성8)이 나타난다. 이익사회는 개인은 이익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계약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한 관계는 목표의 결과에 따라 해체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종교, 이념, 가치를 공유한 집단은 가치 자체가 목표다. 그래서 두 번째 종교성은 특정 사회 집단의 목표를 명확하게 한다. 그래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념, 사상, 종교적 성격 속에서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세 번째, 공동체의 일상의 규정과 생활의 기준을 보여준다. 일상의 삶을 구성하는 것은 어떠한 이념을 표방하는가에 달렸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의례는 그 경험을 공유하는 구성원에서 집단, 유대, 헌신을 가져온다. 일상의 공유는 단순히 의식주뿐만 아니라, 여가, 의례에서도 나타난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집단적 열정, 놀이를 통해 감정적 교류와 그를 통한 일체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점에서 종교성과 공동체는 내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마페졸리(Maffesoli)는 『부족의 시대』에서 종교를 자주 언급한다. 종교성9)을 다른 사회성의 측면으로 즉 핵심은 연결에 있다고 본다. 종교적인 것은 대중들의 유기 결합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 종교성은 어원상 다시 연결하다에서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마페졸리, 2017: 152). 마페졸리에게 있어서 종교는 곧 연결이다.
캔터는 성공적 종교공동체인 오나이더를 연구한 결과, 종교적 믿음이 공동체에 기여한 바에 대해서 지적한다. 물론 공동체의 성공과 실패에 있어서 반드시 종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종교적 기원을 가지느냐, 종교적 유무가 그 절대적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공동체에 있어서 헌신적 자세를 이끌어내는 데 유용한 관심이 종교(성)와 관련되어 있다.
종교는 첫째, 초월적 도덕 질서, 둘째, 영감, 계시, 지혜와 같은 비과학적 근원에 대한 신념, 셋째, 카리스마적 존재의 실재, 넷째, 종교적 집단의 특징인 express ceremonies(표출적 행위, 행사)의 존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특징은 종교적 구심점이 없는 집단에서도 발견되기도 한다. 캔터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공동체에서 헌신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헌신 메커니즘의 중요한 요소로 종교적 성격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캔터, 1983: 107-109).
캔터의 이러한 언급에서 얻는 교훈은 특정 종교만 아니라, 이념적 동의가 얼마나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중한 요소인가를 알게 해준다. 종교 공동체를 비롯해서 모든 공동체는 헌신, 희생을 요구한다. 심지어 부분적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공동체는 구성원에게 무엇을 해주기보다는 무엇을 요구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러한 공동체의 요구는 종교적 의미에서 신념, 믿음의 합의 내지는 동의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개인적 이익, 개인적 이해를 넘어서는 그 무엇, 즉 개인을 손해를 얻어 내는 것은 결국 종교적 신념과 이념의 결과이다. 공동체는 단기적인 개인적 손해가 장기적인 이익을 이끌어낸다는 약속이 개인에게 체화되어야 한다. 그러한 기대는 이념, 신념, 종교적 믿음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뒤르켐은 종교에서 주술적 관계의 모순적 상황을 지적하면서 주술적 신앙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주술적 신앙은 사람을 묶지 못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종교적 신앙체계들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종교적 신앙체계는 집단의 구성원에 의해 인정되며, 개별 구성원들은 공통적 신앙으로 인해 서로 결합되어 있다고 느낀다. 사실 같은 신앙체계를 가진 구성원들은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서로 강한 통합력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뒤르켐, 1992: 76).
그런 의미에서 뒤르켐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공동체는 기존의 사회와는 다르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개인, 자본, 자유, 소유라는 가치, 이념은 공동체와 대비된다. 공동체는 집단, 공유를 목표하는 사회집단이다. 기존 사회와 다르다는 것은 단순히 일상과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정신적 경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실제 공동체에서 종교, 이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1960년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경제 발전이 최대의 목표였다. 이러한 성장위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도시빈민, 노동자 문제를 노출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은 노동환경과 생존권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공동체를 형성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레공동체와 같은 종교 공동체들이 출현하게 된다. 특히, 두레공동체는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에게 구호와 종교적 봉사를 제공하게 된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종교적 수행이나 수도를 위한 공동체들이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면서 기존의 기독교공동체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연결한 ‘소비자생활협동조합’(생협) 등 다양한 공동체들이 출현하게 된다. 1990년대는 IMF와 같은 경제적 위기로 새로운 삶의 모색으로 귀촌, 귀농, 귀어의 형태들이 증가하게 된다. 특히 기독교 위주의 공동체에서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인드라망생명공동체’와 같은 불교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들도 출현하게 된다, 한편, 생태공동체는 자연과 조화, 생태적 관심은 한국 공동체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이동일, 2011: 57-63).
한국의 공동체, 공동체 운동은 이와 같이 한국이라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환경에서 그 변화의 추세가 달라졌다. 본 절에서는 비종교 공동체로서 변산공동체, 야마기시공동체10) 그리고 종교 공동체로서 기독교공동체, 불교공동체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변산공동체는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동체가 추구하는 이상적 목표를 통해서 추구하는 가치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삶을 목표로 한다. 자급자족과 공동체로서 사회적 관계를 이상적 목표로 삼는다. 무엇보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삶은 자연과 조화, 일상의 공유를 통해서 자신들의 가치를 이루어 가고 있다. 그래서 친환경 농업, 자연의 흐름에 따른 작업은 당연하다. 일상에서 구성원은 자연과 인간과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일상에서 노동, 의식주11)의 공유뿐만 아니라, 경제적 평등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분배는 개인적 분배가 아니라, 공동체 분배로 나타난다. 구성원들은 경쟁, 소외, 교육의 대안으로 공동체를 선택한다. 기존 사회의 가치와 배치된다. 변산공동체는 공동주거, 공동노동, 공동식사를 일상에서 실현한다.
야마기시공동체는 야마기시즘이라는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53년 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에 의해 만들어진 공동체다. 변산공동체와 달리 야마기시즘이라는 명확한 이념을 표방하고 있다.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윤성열, 1999: 25-26). 첫째, 돈 지갑 없는 일체 경영을 표방하고 있다. 일체의 의미는 개개인의 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경영을 의미한다. 둘째, 분배, 급료가 없다. 개인적으로 분배하지 않는다. 노동의 결과는 공동체에 귀속된다. 셋째, 민주적 의사결정이다. 법인의 대표는 존재하지만 결정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참여한다. 넷째, 공용이다. 모든 것을 함께 사용한다. 주거, 식사, 의류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께 사용한다. 다섯째, 분업을 통한 일의 분배다. 구성원은 각각의 의사에 따라 각자의 일을 결정하고 나눈다. 여섯째, 연찬이라는 과정을 통해 모두가 자신의 의견과 서로 다름을 끊임없이 대화하고 의논한다. 마지막으로, 일체생활을 통해 개인적 생활을 지양한다. 야마기시공동체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야마기시즘으로 공유(共有), 공활(共活), 무소유(無所有)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변산공동체와 야마기시공동체는 비종교적 이념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이다. 공동체의 이념과 가치가 종교에서 시작되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집단의 유대감과 정체감, 일상의 영역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이념, 가치는 종교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같은 이념과 가치를 공유하고 일상생활의 기초로서 작용한다는 점은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을 의미한다.
종교를 바탕으로 한 사회집단은 기본적으로 공동체를 전제한다. 기독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인간은 공동체적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공동체와 공동체에서의 생활은 지상에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뒷셀, 1990: 33), 그래서 기독교공동체는 생활을 함께하는 삶을 전제로 한다. 밥을 함께 먹고, 타인을 위한 노동, 모든 소유를 공동으로 한다(뒷셀, 1990: 29). 하나님, 교회, 신자는 기독교의 탄압의 역사에서부터 이미 공동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1999년부터 시작된 불교공동체다. 귀농자들을 위한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변산공동체와 유사한 점은 땅에 기반하는 과거 농촌공동체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공동체 자체의 추구보다는 어떠한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한다. 나라는 존재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습(習)에서 벗어나, 함께 돕고 내 생명과 뿌리가 타인에 있다는 연기법을 이해하고 자 한다. 개인이 바뀌지 않으면 공동체라는 형식은 의미 없다고 본다.
공동체의 역사에서 중세의 수도원은 전형적인 공동체였다. 사회구성원이 이념과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은 이미 공동체로서 조건을 갖추게 된다. 현대사회의 위기는 곧 현대사회의 이념과 가치의 위기라는 점은 당연하다. 그래서 공동체가 종교든 비(非)종교든 이념과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곧 현실세계에 대한 대안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된다.
Ⅳ. 유토피아와 공동체
자본주의의 위기는 이미 예견되어 있던 일일지도 모른다. 개인이 서로 무한으로 경쟁한다는 것은 불평등과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소유와 존재는 이미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불평등이 심화되어 가는 지금의 모습에서 모든 사람들은 개탄해 마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 자신을 내려놓지 않는다. 사적 소유는 언제나 포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유혹이다. 자본주의 모순은 근대사회 이후 계속 제기되어 왔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여전히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유지해 왔다.
필자는 다른 공동체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하나의 과정이자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공동체는 분명 지배적인 사회 집단은 아니다. 지배적인 기존사회에서 주변부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다. 사실 긴 역사는 언제나 과거에서 현재의 답을 찾고, 기존의 비주류가 다음 역사의 주류로 자리 잡기도 한다. 미래사회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재의 공동체는 기존 사회의 모순과 소외, 힘듦에 대한 대안적 과정이다. 그래서 종교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종교의 모순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종교의 기본적 인간에 대한 물음과 고민과 위로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대안으로서 현실의 모순에 눈을 뜬 사람들 중에 일부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다. 그곳에 있기를 원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회적 실체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것은 종착역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저 실험하고, 개인과 공동체간의 간극을 체험하면서, 극복하고자 하면서 그리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은 지금, 이곳에 살고있는 우리들에 대한 성찰이며, 현실 문제에 대한 일종의 해결 운동이다.
종교는 그리고 종교성은 이러한 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목표와 연대감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개인적 구원이나 구복적 역할이 아니라, 삶의 질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들에게 유토피아를 제공해주고 있다. 마페졸리는 종교가 개인과 사회를 다시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보았다. 어떤 종교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종교는 하나의 집단적 경험이고,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개인과 집단을 연결한다. 그래서 이념, 가치와 연결된다. 생각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사회적 이념, 가치, 종교는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어떠한 공동체도 개인이 아니라, 집단, 공동체가 중심이다. 그래서 개인주의가 중심이 된 현대사회에서 그저 이념, 가치의 변화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현실은 언제나 실천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종교가 현실에서 실천에 계기가 된다면 공동체 운동이라는 유토피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존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