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조선 전기 숭유억불시대(崇儒抑佛時代)에 불교미술(佛敎美術)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찬란했던 귀족불교의 고려시대가 막을 내리고,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전래 없는 불교 탄압기가 돌연 도래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왕조의 건국주도 세력인 사대부는 유교사상으로 무장한 신흥세력으로, 이들의 등장으로 인해 나라의 건국이념은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한다. 신(新)왕국에 걸맞게 모든 국가적 의식과 문물제도는 유교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재정비되는 대대적인 변혁의 시기가 도래한다. ‘숭유억불’이라는 슬로건 밑에 불교는 청산해야만 하는 구(舊)제도로 전락하게 된다. 막대한 수의 사원의 혁파, 사찰 영지 및 노비의 국유화 작업이 대대적으로 행해지는데, 이러한 불교의 탄압은 종교적 차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재정 및 노동력 확보, 구 귀족세력의 기반 제거 등 정치경제면에 있어, 나라의 ‘생사(生死)’가 달린 시급한 과제였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고구려 시대부터 전래되어 약 천 년 동안을 이어온, 이미 사람들의 생활에 너무나도 깊게 침투한 생활 ‘신앙(信仰)’으로서의 불교이다. 그래서 조선 전기에는 ‘제도로서의 유교’와 ‘신앙으로서의 불교’가 불가피하게 대립하는 일대 혼란이 생긴다. 이러한 모순이, 새로운 유교국가로서 모범을 보여 마땅한 궁정 왕실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었던 것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실이다. 유신들의 격한 항소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 왕실에서는 불교식 기일재(忌日齋)를 비롯한 다양한 용도의 불사(佛事)가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불사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바로 왕실발원(王室發願)의 불화(佛畵)이다.
본 논고에서는 문정왕후 발원 관련 불화의 형식적 특징을 고찰하기 위해 그 당대의 대표 작품을 사례로 들어 형식 및 화풍을 논한다. 이러한 작품들의 제작자로서 이자실(李自實)이라는 화가의 활동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는 공의왕대비 발원 <관세음보살32응탱(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을 비롯하여 회암사(檜巖寺) 중수(重修) 기념 문정왕후 발원 탱화 군(群)에도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본 논고에서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이자실필(李自實筆)의 일본 사이묘지(西明寺) 소장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를 매개로 관련 대표 작례들을 고찰한다. 이에 16세기 불화 형식 및 양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이자실 관련 작품이, 어떻게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불화의 마지막 양식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는지 살핀다. 이 마지막 왕실 불화 양식은 문정왕후 시기 발원 불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그 경향을 조선 전기 왕실 불화의 흐름 속에서 진단해 본다.
Ⅱ. 문정왕후 시기 작례의 형식분석
여기서 문정왕후 시기라고 함은 명종이 즉위한 1545년부터 문정왕후가 서거한 1565년의 20년간을 지칭한다. 문정왕후(생몰년 1501-1565년)는 12세 어린 나이의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하자 약 8년간 수렴청정을 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녀의 막대한 영향력은 계속되었고, 사망년도인 최후의 순간까지, 회암사 중수 관련하여 대대적인 불화 제작 불사가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16세기에 한해서 문정왕후 관련 이전의 대표 작례를 고찰한다. 그 이유는 문정왕후 발원 작품군의 형식적 특징의 선례적인 모범을 보이는 작풍이 이미 16세기에 출현하기 때문이다. 이는 16세기라는 시대를 대표하는 이자실이라는 화사(畵師)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기입된 <관세음보살32응탱>과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니수월관음도(金泥水月觀音圖)>, 2점을 중심으로 16세기 불화 화풍을 결정짓는 형식과 양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정29(1550)년명의 본 작품 <그림 1>은 일본 교토의 정토종 본산인 지은원에 훌륭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본 작품은 조선왕조 제12대왕 인종대왕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부인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발원한 왕실작품으로 그 역사적 가치 또한 크다. 작품 크기가 종횡 약 2미터에 달하는 대형의 화폭에는 신비로운 산수를 배경으로, 관음의 화신 고난 구제 장면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다. 화면의 공간구성과 유려한 필치에 나타
나는 회화적 우수성 때문에, 본 작품은 조선 전기뿐만 아니라, 한국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동아시아의 관음화신 신앙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이렇게 독보적인 회화적 창조성을 보이는 작품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인정되므로, 본 작품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산속의 수많은 계곡과 계곡 사이에서 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속에 숨겨진 속세의 천차만별의 삼라만상, 즉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온갖 어려움과 위협적인 죽음의 장면 장면들이 하나하나씩 드러나고, 이는 어느덧 화면 전체를 파노라마처럼 가득 메우고 있다. 이러한 재난과 고통의 극적인 순간순간을, 작품 가운데 위치한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은 하나도 빠짐없이 두루 살피고 있는 모습이다.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인 불신론, 즉 삼신사상 중에서 응신(應身)의 개념이 극대화된 것이 이 관음32응신이고, 그 방편(方便)의 영험한 순간을 도해한 것이 본 작품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고려 양식과 완전히 결별한 조선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고려조를 풍미했던 수월관음과는 전혀 다른 양식의 관음보살을 볼 수 있다. 고려 특유의 섬려한 장식성과 귀족적 취향은 사라지고, 대신 적극적이고 대담한 유희좌 자세의 원색 색조대비가 강한 정면상의 관음보살이 나타난다.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는 균일한 철선묘(鐵線描)의 고려 수월관음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경쾌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비수선(肥瘦線)의 묘사로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변화는, 마치 고도의 장인성이 요구된 ‘공예적 성향’에서, 표현력 있는 ‘회화적 성향’으로 전환한 느낌이다. 이렇게 자세와 형식, 묘선과 채색에 있어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양자의 관음을 기존 연구에서는, 고려 수월관음의 연장선상, 또는 유사한 범주의 것으로 취급하곤 했다. 그러나 이들 양자의 차이를 구별하여 규명할 필요가 있겠다. 바로 이러한 차이야말로 고려와 다른 ‘조선적’이라고 할 만한 특성을 말해주기 때문이고, 또 여기에 조선 후기로 이어지는 불화의 형식 및 양식적 특징이 창안되기 때문이다.
본 작품에서는 명나라 궁정 작품(특히 홍무·영락·홍희·선덕연간)의 형식적 영향관계를, 구제고난(救濟苦難) 장면들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이것을 산수화라는 배경 속에 앉혔다는 사실은 매우 특이한 본 작품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선덕7(1432)년명 「관세음보문품」 사경(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의 고난구제 장면은, 본 작품의 세부장면과 흡사한 형식적 특징을 보인다. 사경에서 횡으로 나열되는 장면들이, 본 작품에서는 대형화폭(201 × 151 cm)에 독특한 형식의 산수 계곡을 배경으로 한 데 유기적으로 어우러지게 창조적으로 재현되어, 경전의 단순한 도해 또는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닌 한 폭의 산수하로도 손색이 없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했다는 것이다. <관세음보살32응탱>에서는 기존 불화와는 다른 현실적 공간감과 조감도식(鳥瞰圖式) 관점, 그리고 산수 표현 속에, 고원법(高遠法) 또는 앙시(仰視)·평원법(平遠法) 또는 수평시(水平視)·심원법(深遠法) 또는 부감시(俯瞰視)의 삼원법(三遠法)이 자유자재 응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전통적 불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례 없는 구도의 창안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화기를 보면, “嘉靖二十九年庚戌四月旣晦我 恭懿王大妃殿下伏爲 仁宗榮靖大王仙駕轉生淨域恭募良工綵畵 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 一面送安于月出山道岬寺之金堂永奉香火禮尓(가정29년 경술 4월 초하루 우리 공의왕대비전하는 인종영정대왕의 영혼이 정토에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양공을 모색해 그로 하여금 채색화 관세음보살삼십이응탱 한 폭을 그리게 하여 월출산 도갑사 금당에 봉안케 했다. 이에 삼가 향을 올리고 예를 갖춘다)”라고 주색(朱色)의 글씨로 명기되어 있고, 작품 좌측 하단에는 “臣李子實沐手焚香敬畵”라고 금색의 글씨로 명기되었다. 왕실발원 작품이 어째서 한반도의 가장 남단지역인 이 멀리 떨어진 전라남도 도갑사에 봉안하였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이는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왕조 제12대 왕 인종은 재위기간이 겨우 8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의 모친인 장경왕후(중종의 제1계비)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뜨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중종은 제2계비 문정왕후를 맞게 되는데, 이 문정왕후의 등극으로 왕실의 외척은, 이미 승하한 <제1계비파(대윤파)> 대(對) <제2계비파(소윤파)>로 나뉘어, 치열한 파벌쟁투가 시작된다. 인종의 즉위로 대윤파가 일시 득세하지만, 그는 재위 8개월 만에 병사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그의 죽음으로 문정왕후의 어린 아들 명종이 12살 나이로 즉위, 대세는 역전되어, 소윤파가 대윤파를 대대적으로 숙청·유배·처형하는 을사사화가 발발한다. 이 여파로 인종 주변의 외가 및 처가관련 희생인물은 약 일 백 명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인종의 생전에서 사후까지의 모든 고난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 바로 본 작품을 발원한 그의 부인 인성왕비(공의왕대비). 본도가 제작된 것은 인종이 서거한지 5년째 되는 해로, 여전히 관련 인물들에 대한 징벌이 계속 되던 해이다.
<금니수월관음도>(<그림 2>)는 먼저 관세음보살이 앉은 형식에서 <관세음보살32응탱>과 동일한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정면의 유희좌로 앉아 오른팔을 곧게 딛고 왼팔을 오른쪽 무릎에 걸치고 있다. 교차한 앉은 다리의 자세와 전체의 각도 역시 동일하다. 보주형 보관, 가슴의 영락 장식, 천의가 배 부위에서 휘감아 내려오는
모습, 손과 발의 비례, 기암대좌의 표면과 농담의 처리 등 매우 흡사하다. 특히 얼굴 묘사에 있어서, 초승달 같은 가는 눈썹과 코 중심선 좌우 동그란 콧 망울의 표현, 폭이 좁은 작은 입술 등의 표현을 보면, 두 작품이 같은 화사의 것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형식적 특징은 사라(紗羅)의 표현이다.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나타나는 투명한 사라는 여기에서 간략화된다. 보관 위를 살짝 덮고 그 뒤로 보일 듯 말 듯 흘러내리게 표현했는데, 이것은 <관세음보살32응탱>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동일한 특징이다. 특히, 관세음32응신탱을 기존 고려 관세음보살과의 차이를 논할 때, 선묘의 차이를 들었었다. 철선묘와 비수선에서의 차이를 지적한 바 있다(<그림 3>~<그림 8>). 고려 작품은 고도의 ‘공교(工巧)로움’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본 작품 및 <관세음보살32응탱>은 소기(小技)에 구속되지 않는 보다 자유로운 ‘회화적 대담성’을 그 특징으로 함을 알 수 있다.1)
이같이 본 작품에서는 더이상 고려시대의 양식적 잔재를 찾아볼 수 없고, 전혀 다른 회화적 미감의 완성을 볼 수 있다. 본 작품에서는 금니(金泥)를 마치 수묵(水墨)처럼 사용한 기법을 볼 수 있다. 필선에 음영과 강약이 들어가 있다. 즉, 고려불화 또는 사경화에서 익숙한 오롯한 중봉의 세밀한 철선묘가 아니라, 금니로서 선의 강약과 농묵을 표현한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관세음보살 형상의 기본 윤곽선, 광배, 군의 등에서는 기존의 불화에서 사용된 철선묘를 고수하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 것들은 전통적 형식의 불화에서 벗어난, 장인적 철선묘가 아니라 회화적 비수선이다. 관세음보살을 앉힌 주변의 배경은 한 폭의 산수화를 방불케 한다. 기암대좌의 음영 표현과 두 줄기의 대나무, 그 위로 살짝 펼쳐진 소나무 가지의 모습 등은 산수화에 능한 일필휘지의 필치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관세음보살32응탱>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손꼽힌다. 즉, 산수화와 불화의 오묘한 합작이다. 과연 어떤 화가가 불화에도 능통하고 산수화에도 능통해서 이러한 대담하고도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창작해 낼 수 있었을까. 16세기의 불화 형식을 모범이 되는 이들 작품을 제작한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이자실이라는 화가의 성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료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章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금니수월관음도>의 화기를 보면, (정면에서 보아) 좌측 상단 공간에 아주 잘 보이도록 “金身螺髮玉毫紺目 一瞻一禮得無量”이라고 일곱 자(字)로 이루어진 두 절의 게송이 쓰여 있다. 우측 중간 정도의 바위 윗면에는 “李氏閔氏”라고 작게 명기되어 이씨와 민씨의 성을 가진 두 분을 위해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측 하단에는 “比丘希顔”라고 화사의 존명을 알 수 있다. 상기 살펴본 작품의 세부 형식상의 동일함 이외에 금니로 쓰여진 화기의 필치 등으로 보아도, <관세음보살32응탱>과<금니수월관음도>를 그린 화가는 동일 인물로 추정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자실과 비구희안은 동일인에 대한 이칭(異稱)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다음 장에서 논할 일본 교토(京都) 사이묘지(西明寺) 소장 이자실필(李自實筆)<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아미타삼존도>(<그림 9>)는 일본 교토 사이묘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자실이 금선묘로 그린 아미타삼존(아미타불, 좌측 지장보살, 우측 관세음보살)이다. 본 작품은 묘우닌(明忍) 율사(律師)가 소지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묘우닌 율사는 게이초 7년(1602년)에 사이묘지를 재건한 장본인이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회암사 <약사삼존도>와 흡사하여 회암사 중수 기념 발원문에 언급된 사백탱(四百幀) 중에 한 점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이에 사백탱 관련하여 현존하는 작품으로 기존에 집계된 것은 총 6점2)에서 본 작품을 추가하여 합 7점이 공개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앞으로 추가적으로 더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필치 상으로 보아 이자실의 친필 작품으로 보이는 것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회암사(檜巖寺) <약사삼존도>, 일본 도쿠가와(德川)미술관 소장 <약사삼존도>, 그리고 미국 메리 앤 잭슨 버크콜렉션 소장 <석가삼존도>를 꼽을 수 있다. 일본 사이묘지 소장 <아미타삼존도>를 포함한 이들 작품은 자색(紫色) 바탕의 금선묘(金線描)가 두드러지는 특징을 갖는다. 나머지 일본 호주인(寶壽院) 소장 <약사삼존도>, 일본 류죠인(龍乘院) 소장 <약사삼존도>, 일본 코우젠지(江善寺) 소장 <석가삼존도>는 감색(紺色) 바탕에 채색화(彩色畵)로서, 구도나 불보살들의 비례 등의 표현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같은 묶음으로서의 여타 회암사 관련 작례와 맥락을 같이 하지만, 세부 문양이 상기 제시한 이자실 친필 작품으로 보이는 작품 군(群)과는 사뭇 다르다. 보다 덜 화려하고 보다 소략하며, 두터운 채색의 질감이 두드러진다. 물론 미국 메리 앤 잭슨 버크콜렉션 소장 <석가삼존도>도 채색화이지만, 금선묘의 밝은 채도가 여타 채색화 군의 작품과는 차이가 현저하여, 이 작품은 형식 및 양식상 이자실 친필 추정 작품 군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다시 본 논고에서 국내 처음으로 소개하는 일본 사이묘지 소장 이자실 필 <약사삼존도>로 돌아가 보자. 본 작품의 화기에는 우측 하단에 “金身螺髮玉毫紺目 一瞻一禮得無量福”이라고 종렬 2열로 쓰여 있고, 그 바로 밑에 “李自實敬施”라고 명기되어 있다. 좌측 하단에는 붉은 글씨로 “平等心王院”이라고 이중선의 사각구획 안에 마치 직인처럼 쓰여 있다. 이에 사이묘지(西明寺) 내의 뵤우도우신오우인(平等心王院)에 보관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2열로 쓰인 문구는 상기 <금니수월관음도>에 쓰인 것과 완전히 동일한 문구로, 이는 이자실이 즐겨 썼던 문구로 추정된다. 특히 아미타불 또는 관세음보살 관련한 미타신앙 계열의 두 작품에서 이 문구가 동일하게 발견된다는 것은 이자실이 불교 교리에도 능통했던 화승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자실은 <관세음보살32응탱>에서 산수화의 최고 기량까지 선보였다. <관세음보살32응탱>에서 공의왕대비 전하가 물색해서 찾았다는 이 ‘양공(良工)’ 이자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산수화(山水畵)와 불화(佛畫), 양자에 걸쳐 모두 능한 인물로서의 그의 기량은 의문에 여지없이 우수하다는 정평이 나 있다. 이자실에 대해서는 먼저 이동주 의 ‘이자실은 이상좌와 동일인’이라는 추론이 있다. 그 유명한 <송화보월도>의 작가인 이상좌가 바로 이자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논고를 집필한 바 있다(이동주, 1996). 이러한 추론에 따라 이자실이 조선 전기 화원 이상좌와 동일 인물이라고 규정짓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으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5), 또 이자실이 이상좌의 아들이라는 학설이 제기된 바 있다. 이자실이 이상좌의 아들이라는 설은 매우 흥미로운데, 이를 제시한 이양재(李亮載)는 허균(許均)의 「이정애사(李楨哀辭)」에 기재된 “李楨哀辭曰, 楨父崇孝, 祖陪連, 曾祖小佛”의 내용을 들어 이정의 아버지 숭효, 조부 배련(이자실), 증조부 소불(이상좌)의 가계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허균은 당시 금강산 장안사에서 이정과 오랫동안 절친하게 함께 지낸 사이이므로 허균의 사료가 1차 사료이자 가장 객관적 기록이라고 주장한다.3)
이러한 학설들은 모두 화원 화가로서의 良工으로서의 이자실의 면모와 比丘 畵僧으로서의 면모를 같이 입증해주는 증거로서, 이자실의 畵工 및 佛母로서의 이중적 기량이 어떻게 동시에 구비될 수 있었는지 추론 가능하게 해주는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화공으로서 불화가 가능했던 良工을 물색해서 먼저 발굴했던 인물은<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 발원한 공의왕대비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불모로서의 기량이 증명된 이자실은 그 뒤 문정왕후 시대에도 왕실발원 불화 불사의 중심인물로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일본 사이묘지 소장 <아미타삼존도>에는 “金身螺髮玉毫紺目 / 一瞻一禮得無量福 / 李自實敬施”라는 화기가 명기되어 있다. 그림을 그린 자의 자필 서명에 해당하는 “李自實敬施”라는 필치를, 동일한 화가의 작품 <관세음보살32응탱>과 비교해 보면 같은 특징을 가진 서체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관세음보살32응탱>에 금니로 쓰인 문구 “臣李子實沐手焚香敬畵”를 살펴보면 성씨인 “李”자의 나무 목(木) 부수에서 좌측 획을 길게 빼는 듯이 쓴 필치가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일자 획을 그을 때 무게감 있게 살짝 둥글게 획을 마감하는 습관도 유사하다. “金身螺髮玉毫紺目 / 一瞻一禮得無量福”의 7자 2줄의 문구는 <금니수월관음도>에 명기한 문구와 동일하므로, 이 문구는 이자실이 아미타불 또는 관세음보살 관련 미타신앙 또는 극락신양과 관련된 작품에 즐겨 썼던 상투적 문구임을 알 수 있다(<그림 10>과 <그림 11> 비교). 이러한 연관성으로 인해 이자실이 썼던 자신의 또 다른 명칭이 “比丘希顔”임을 알 수 있어서, 수수께끼의 인물 이상좌와 이자실에 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더하고 있다.
다음으로 “金身螺髮玉毫紺目 / 一瞻一禮得無量福”이라는 문구의 출처를 살펴보도록 하자. “金身螺髮玉毫紺目”이라는 문구는 중당(中唐)의 시인 백거이의『수아미타불찬(繡阿彌陀佛贊)』에서 동일한 절구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4) 영가추복을 위해 자수로 제작한 아미타불 불화를 보고 백거이가 찬하여 “善始一念 千念相屬 繡始一縷 萬縷相續 功績成就 相好具足 金身螺髻 玉毫紺目 報罔極恩 薦無量福”라는 수아미불찬을 남겼는데, 상기 제시한 대로 그 내용 중에 “金身螺髻玉毫紺”와 정확히 일치하는 문구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아미타 불신(佛身)에 대해 “金身”, “紺目” 등의 용어를 공통적으로 쓴 것으로 송대 택영법사(擇瑛法師)의 『찬아미타불게(讚阿彌陀佛偈)』를 들 수 있다. 그 내용 “阿彌陀佛身金色 相好光明無等倫 白毫宛轉五須彌 紺目澄清四大海 光中化佛無數億 化菩薩眾亦無邊 四十八願度眾生 九品咸令登彼岸”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백거이의 찬시나 택영법사의 찬불게나 모두 아미타불의 보신(報身) 상호의 장엄(莊嚴)의 모습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인데, 이는 물론 『관무량수경』의 아미타불 진신관(眞身觀)에 묘사된 표현에서 유래함을 알 수 있다. 장황한 묘사 중에서 관련 문구만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阿彌陀佛身相光明如百千萬億夜摩天閻浮檀金色”, “白毫宛轉五須彌 紺目澄清四大海”, “阿彌陀佛有八萬四千相 一一相中 各有八萬四千隨形好 一一好中 復有八萬四千光明 一一光明 遍照十方世界念佛眾生 攝取不捨” 등의 표현 내용들을 들 수 있겠다(<그림 12>). 이는 『관무량수경』뿐만 아니라, 아미타삼부경에 해당하는 『무량수경』 및 『아미타경』에서도 아미타불 진신(眞身)의 장엄에 대한 묘사 부분에서 유사하거나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 전기 <관경변상도> 하단에 선도대사(善導大師, 613-681)의 찬불게 등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당(唐)나라 정토종의 대성자로 잘 알려진 선도대사의 것이 전통적으로 유명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자실이 굳이 백거이의 찬시를 인용한 것은 당시 척불(斥佛)의 분위기를 고려하여 유생(儒生)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백거이의 시문을 빌려 쓴 것으로 사료된다. 그 외,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예불문 중에 『관음예문(觀音禮文)』 또는 『화엄대례문(華嚴大禮文)』 등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확인된다. 관 세음보살 또는 아미타불에 회향하여 극락세계를 염원하는 문구에서 빈번히 찾아볼 수 있는 표현들인데5), 이들 모두 그 출처는 근본적으로 아미타경전류에 근거한 아미타불 진신관에 대한 장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자실이 궁중 畫員이면서도 이같이 佛經의 내용에 통달해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家系가 본래 畵僧 출신이었다는 상기 인용한 학설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Ⅲ. 조선 전기 불화의 형식적 양상의 전개
본 장에서는 조선 전기 불화의 특징과 그 시대적 변화의 경향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형식 분석에 들어가고자 한다. 일본 소재 조선시대 작품 약 120점 중에서도, 왕실 주변에서 제작된 작례를 중점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 작품들은 작품의 품격에 있어 매우 우수하고, 또 기년명 년기명(年紀銘)의 작품이 다수 있어 기준작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문정왕후 시기 불화가 어떠한 맥락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지 표출하고자 한다.
조선 전기는 조선건국 1392년부터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난 선조 시대까지를 말한다. 역사학자들에 의해 조선 전기는 더 구체적으로 양분된다. 그 제1기는, 태조 초 1392년부터 성종 말 1494년까지로 조선왕조의 창업 및 독자의 체계를 정비하여 완성하는 시기로 정의된다. 제2기는 연산군 1495년부터 선조 말 1608년까지로 권력 쟁투가 심화되어 사화가 잇달아 일어나는 시기, 또 같은 시기에 이황·이이의 출현으로 정주학(程朱學)의 연구가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이같이 조선 건국에서 약 1백년을 분기점으로 조선왕실의 중앙집권세력이 15세기의 훈구(勳舊)에서 16세기의 사림(士林)으로 변한다. 사장(詞章)을 중시하고 또 사상종교적인 면에 있어 어느 정도 개방적이었던 훈구세력(제1기)은 제도 정비에 있어서 문화적 창조성을 보인다. 그러나 16세기에는 세력 중심이 오로지 경학(經學)과 성리학적 질서만을 고수하는 사림세력(제2기)으로 바뀐다. 이 같은 시대구분은 미술사 분야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불화의 경우 제1기는 주선건국 1392년부터 1500년까지, 제2기는 1500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까지 또는 선조말년인 1608년까지로 분류된다(문명대, 1977: 50; 유마리, 1994: 239). 단지 미술사 분야에 있어 이 같은 구분은, 1세기를 단위로 해서 기계적으로 분할했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제1기는 고려의 쇠퇴기 또는 고려의 전통과 조선적인 신양식의 과도기로서 정의된다. 제2기는 명종조(1546-1567년)의 문정왕후 섭정기에 해당하는 약 20년간에 걸친 불교중흥책이 실시된 시기였다. 16세기 궁정과 관련된 화기가 쓰여진 작품이 16점 현존하고 있기에, 선행하는 ‘조선 전기의 불교연구’라 하면 이들 작품들에 초점이 맞추어져지는 경향이 있었다. 기존의 그리 많지 않은 편수의 조선 전기 불화 관계 논문의 대다수가 이 시기의 것을 그 주제로 취급하고 있다. 물론 제2기(16세기)의 왕실 대비(大妃)에 의해 주도된 불사도 중요하지만, 제1기 15세기 후반의 세종조 말기에서 세조조까지 사이의 君王에 의해 직접적으로 계획된 국가적 차원의 흥불사업(興佛事業)을 무엇보다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기 현존 작품은 숫자상으로는 적지만, 오히려 조선시대 불교문화의 성립 양상을 알기 위해 기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사료된다. 화기에 의한 왕실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확인되는 작품, 약 4점, 왕실주변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 3점과 15세기의 현존 작례는 소수이기에, 형식분류 혹은 당시 전반적인 경향이 어떠했다고 말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의 결핍 상황 속에서도 현존하는 몇몇 점이 말해주고 있는 바는 매우 크다. 논자는 다음과 같은 선행연구와는 다른 형식 분류를 시도해보았다. 먼저, 조선 전기 불화를 표현형식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3종류의 유형으로 분류해보았다.
<제1형식>은 고려의 답습형식(踏襲形式), 고려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려하는 의지가 보이는 형식이다. (통일신라에 대한 향수가 가득한 고려 초기 작품들처럼), <제2형식>은 과도기 및 신양식의 성립기의 작례, 조선적인 창조적 변형이 보이기 시작하는 형식이다. <제3형식> 작품의 정형화(定型化) 및 도상의 다양화 시기의 작품으로, 이들은 조선적 형식으로 이미 정착한 형식으로, 궁정형식과 사원형식(대형불화) 두 종류로 나뉜다. 위와 같은 작품의 유형분류와 함께, 명(明)의 궁정(宮廷) 형식의 수용, 도상의 다양화, 귀족중심의 양식에서 탈피해 민중화되는 사원형식(寺院形式)의 등장 등의 제 양상을 보기로 한다. 이 세 가지 유형은 사실상 조선초기에서 전기 전반에 걸쳐 병존하는 현상을 보이지, 통사적 선상에서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괄한 바와 같이 <제1형식>과 <제2형식>은, 상기 제1기의 조선 건국에서 성종시대(14세기말-15세기말)까지 사이의 형식이고, 또 <제3형식>은 제2기 16세기 중반 이후에 현저하게 드러나는 경향으로 해석해도 좋다. 이 같은 형식 분류와 맞물린 시기 구분은 자칫 작품의 경향을 도식화할 수 있는데, 이미 밝혔듯이 상기와 같은 경향은 조선 전기 전반에 걸쳐 혼재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나눈 형식이 두드러진 경향이라는 것이지, 상기와 같은 시기적 분류에 맞아 들어가지 않는 예외 작품도 있다는 것을 재차 언급해 둔다.
교토·지온인(知恩院)에는 지치(至治)3(1323)년명 고려후기 작품과 1465년명 조선 전기 작품6)의 관경변상도가 각 한 점씩 소장되어 있다. 이들 작품에는 연대와 발원자가 기재된 명문이 있어, 같은 주제의 작품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어떻게 취급되었는지 비교 고찰하기에 적절한 예를 제시한다. 이들 두 작품은 16관을 배치하는 독특한 기본 구도가 유사하여, 1323년 고려 본(本)이 1465년 조선 본의 전례가 되는 모범작이 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양 작품 모두 화면의 상단에 일몰관(日沒觀)·수상관(水想觀)·지상관(地想觀)·수상관(樹想觀)·총관(摠觀)을 같이 하나의 공간 속에 처리하여 작품 전체의 천공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연출하고 있다. 이 같은 윗부분의 구성에 의해 마치 그 아랫부분의 정토세계가 바야흐로 막을 여는 것 같은 효과를 준다. 구품(九品)은 가장 하단에 3개로 구획된 연못에 상배생상관(上輩生想觀)·중배생상관(中輩生想觀)·하배생상관(下輩生想觀)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관경변상도의 한국적 정착과 전개를 보이는 독특한 구도이다. 후쿠이(福井)·사이후쿠지(西福寺) 소장 고려 <관경16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는 일몰관을 작품 상단의 중앙에 두고, 제2 수관에서 제13 잡관까지를 작품 양측에 6개의 작은 원 안에 묘사하여 줄 지워 배치하고 있다. 상·중·하품의 생상관을 작품의 중앙에 3단으로 중첩되게 배치하여, 중생의 극락 ‘왕생’에 묘사의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온인(知恩院) 소장 고려 본과 조선 본의 두 작품의 구도와 비교해 보면, 그 강조의 포인트가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지온인 소장 두 작품과 기본 구도를 공유하는 작품으로, 지온인 소장 고려 본과 같은 연도에 그려진 아이치(愛知)·린쇼우지(隣松寺) 소장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를 들 수가 있다. 한편, 남송(南宋) 계열의 작품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되는 상기 사이후쿠지(西福寺) 본과 같은 기본구도를 하고 있는 작품으로는 가마쿠라(鎌倉) 時代에 그려진 나라(奈良)·아미타지(阿彌陀寺) 본과 교토(京都)·쇼우코우지(長香寺) 본의 <관경16관변상도>가 있다. 이 같은 구도의 관경변상도 작품 군과 비교해 볼 때 지은원본 작품의 독자적인 공간해석은 매우 눈에 띄는 특징이라 하겠다.
지온인 소장 고려 본(本) 작품에서는 신관(身觀)의 장면이 화면 가운데에 배치되어 있는데, 흥미를 끄는 것은, 그 중심의 주존 군상이, 정토삼부경에 설해지는 관상(觀想)의 불신 장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성문 및 보살의 무리를 둥근 구도로 배치하여 회상(会上)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문에 중점을 둔 설법회상도와 같은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사이후쿠지 본(本)은 최상단에 설법 청중 존상군이 배치되어 있는데, 마치 이하의 극락세계의 현란한 구조를 설법으로 여는 듯이 보이는 구도이다. 그 주존 주변의 단책형(短冊形)의 명문에는 “十大弟子·十六聖衆·六大天王”이라고 쓰여 있다. 이데 세노스케(井手誠之輔)는, 이 같은 기존의 남송 계열 도상에는 보이지 않는 독특한 여래설법 장면에 관하여, 십대제자·십육성중 등의 존명을 바탕으로, 이것을 16관의 묘리(妙理)를 설파하는 석존의 설법 장면으로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기술하고 있다(『고려불화(高麗佛畫)』, 1997: 79). 지온인 소장 조선 전기 본(本)에는 이 같은 중심부의 설법 청중의 존상 군이 더욱 확대되어, 한층 더 강조되어 있다. 마치 다른 부분이 배경으로 후퇴하고, 이 중심군을 전방에 돌출시키는 것 같다. 이 작품에 선행하는 조선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같은 교토 지온인 소장의 작품에는, 이 같은 변화가 보다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에 관해 지온인 유물 대장(台帳)에는〈釈迦說法圖〉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는 작품의 이 같은 도상학적 특징(설법하는 주존과 이를 경청하는 무리가 강조된 특징)에 기인하여 붙여진 명칭일 것이다. 여기서 논자가 언급하는 이러한 도상학적 특징은, 조선시대 불화의 영산회상도와 같은 장르의 큰 유행을 고려했을 때, 이는 매우 중요한 특징으로 주목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게다가, 이 같은 설법 장면을 강조하는 도상의 경향이 새로운 전개를 보이는 작품으로 국내 봉정사 벽화 <영산회상도>를 들 수 있겠다. 이 작품은 봉정사의 중창시기인 1435년이 그 제작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훼손이 심한 상태이지만, 그 기본구도가 지온인 소장 고려시대 작품인 아미타정토 장면과 매우 흡사하여, 고려시대의 도상을 답습하고 있슴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설법 장면에 대해, 이미 아미타설법이 아니라 석가설법이라는 조선적인 새로운 해석이 더해지게 된 사실이, 벽에 쓰여진 “靈山會圖”라는 화기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정토회상의 형식을 빌어 ‘영산회상’을 표현하고, 미타정토와 석가정토, 미타신앙과 법화신앙의 표현이 교합적으로 동일한 형식의 도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7)
세밀한 장식성에 있어서는, 조선본은 고려본과 같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본이 갖추고 있는 정치한 묘사를 바탕으로 한 귀족적 취향은 사라진다. 조선본에는 고려본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한 회화적 표현력이 넘치고 있다. 불화에 있어 이 조선적 특유의 회화성은, 15세기 후반의 회화적 입체감이 두드러지는 사이후쿠지의 <수월관음도>를 거쳐, 시대가 내려갈수록 그러한 특징이 강화되어, 16세기의 지온인 <관세음보살32응탱>에 이르러 그 경향은 극대화된다고 하겠다. 고려시대 작품에 나타나는 종교적 근엄함에 비교해 보면, 이 같은 분위기는 세속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신자가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화감과 생동감을 가져다준다. 다른 불교미술의 영역에서는 고려형식의 답습경향은 특히 사경화에 있어 현저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효녕대군이 발원한 <묘법연화경> 변상도(1448년)에 있어서는 고려형식이 그대로 확인된다. 불화 이외의 영역에서 고려 작례의 모방이 명확한 사례로서 원각사 십층석탑을 들 수 있다. 제작시기가 원각사 건립의 세조13년(1467)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석탑은, 고려 충목왕4년(1349), 원(元)에서 초빙되어 온 공장(工匠)에 의해 건립된 경천사 십층석탑을 모방하고 있다. 억불시대에 가장 모험적인 대대적인 불사로 여겨지는 원각사 건립에 있어, 고려의 경천사탑을 재현하려고 했다는 의지가 관찰된다.
먼저 고려시대의 형식을 토대로 새로운 형식적 요소의 수용을 보이는 작례를 살펴보자. 답습형식과 신형식의 중간형식으로, 과도기적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구형식과 신형식의 요소의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 고려적 주제를 새롭게 재현한 작례로서 무위사 후불벽화 <아미타삼존도>를 들 수 있겠다. 한국 전라남도 강진군 소재의 성종7년(1476)명의 이 벽화는 실로 양호한 상태로 약 5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불가사의하게 생각될 정도로 신선한 표현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것을 그린 화사는 고려시대에 활동했던 화사이거나 고려시대 화법을 간직한 인물로 추정된다. 세부 표현의 정교함에 있어, 비단 바탕에 그려진 작품에 뒤지지 않는 벽화로서는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 무위사 법당 후벽 불화의 필법이 절묘한 것은, 예로부터도 정평이 나 있었는지, 조선 전기 문인인 임제(林悌, 1549-1587)의 칠언근체시(七言近体詩)8)에서도 이것이 확인된다.
본도는 아미타를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협시로 한 전형적인 아미타삼존도이다. 등 뒤 위쪽으로는 젊은 아난(정면에서 보아 왼쪽)과 나이 든 가엽(정면에서 보아 오른쪽)로 판별되는 두 사람을 포함한 6명의 제자군을 조합한 독특한 존상구성을 보인다. 또, 양 협시는 눈에 익숙한 고려 양식으로 표현한 한편, 본존 여래에는 어딘가 이국적인 풍모가 겸비되어 있다. 세부 표현에 있어서도 1465년의 지은원본 관경변상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징으로서, 두정부(頭頂部)의 정상계주(頂上髻珠)·장방형의 광배·주색대의(朱色大衣)에 묘사된 이례적인 원형의 금선 문양·연화좌의 아래까지 늘어지는 주대의(朱大衣)·그리고 이것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군청의 복편의(覆偏衣)·기묘한 사자를 배치한 대좌·존상의 얼굴 및 육신에 묘사된 입체적인 음영법 등이 관찰된다. 정상계주에서는 서기(瑞氣)의 소용돌이가 위쪽 좌우로 분출되고, 그 속에서는 좌우 2구의 화불이 탄생하고 있다. 또 광배 외연부(外縁部)에는 활활 타오르는 듯 분출하는 화염문의 서가가 둘러져 있다. 마치 이 화염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 광배 윤곽에서 뭉게뭉게 구름과 같은 기운이 발산되어, 작품의 상반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고려불화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본존불 밖으로 분출하는 강력한 서기의 표현이다. 중존인 여래는 이 같은 변화를 보이지만, 협시의 피모지장(被帽地蔵)과 투명사라를 두르고 있는 관음은 균일한 묘선 ·중층의 의습형식·다채로운 영락장식 등의 표현에 있어 고려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투명했던 두광이 농후한 녹색 불투명한 두광을 하고 있는 것은 눈에 띄는 다른 점이라 하겠다. 녹색의 불투명한 두광은 특히 존상의 머리부분을 강조하여, 그 존재감을 높이는 효과가 있는데, 이는 <관세음보살32응탱>을 비롯하여 다수 작품에서 확인되는 기법으로, 조선 전기의 한 형식적 특징인 된다.
조선 전기 ‘새로운 도상의 창안’이라는 점에서 여기서 다루려는 작품은 효고(兵庫)·쥬린지(十輪寺) 소장 <오불존도(五佛尊圖)>9)(현재 오사카(大阪)시립미술관 기탁 소장)이다. 본 작품의 제작연대에 있어서는 선행연구에 의해 “조선 초기” 혹은 “16세기”라는 두 가지 설이 제시되어 있다. 이렇게 의견 차이가 나는 두 가지의 연대 추정에 대해 논자는, 본 작품의 연대 상한 작품으로 교토·지온인 소장 <관경변상도>(1465년)을, 연대 하한 작품으로 고야산(高野山)·곤고우부지(金剛峯寺) 소장 <석가팔상도>(1535년)를 들어, 양 작품과의 형식 비교를 통해, 본 작품이 이 양 작품 사이의 특정 시기, 즉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임을 논했다. 이 작품의 제작 시기를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인데, 그 이유는 도상 구성에 있어, 본 작품이 한국 불교회화사상 갖는 의미가 지극히 크기 때문이다. 본 작품에는 전례 없이 보기 드문 도상이 관찰된다. 화면의 중심에는 양팔을 벌리고 설법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 노사나불이 있다. 보관을 쓰고 대의(大衣)를 통견(通肩)으로 두르고 있는 보살형(菩薩形) 노사나불을 가운데 두고 노사나3존이 가로로 배치되었다. 그 위로는 지원인(智拳印)의 여래형(如来形) 비로자나불, 그 아래로는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이, 종(縦)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심의 노사나불 좌우로는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횡(横)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심의 노사나를 공유하는 독특한 십자(十字) 구도를 보이고 있다. 종(縦)을 구성하는 비로자나·노사나·석가모니는 법신·보신·화신의 삼신 체계를 나타낸다. 상단의 법신 비로자나의 주변에는 보살들이 운집하여 합장하고 있고, 하단의 화신 석가의 주변에는 중생계의 중생이 무리를 이루어 예배하고 있다. 상방의 「법계」와 하방의 「사바계」의 사이에는 대승적 구원을 상징하는 보신불(노사나·아미타·약사)의 세계가 횡렬로 구성되었다. 조선 후기 불교미술에서 주류를 형성하는 도상은, 삼불(三佛,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한아미타와 약사) 또는 삼신불(三身佛, 법신 비로자나·보신 노사나·화신 석가)의 조합이다. 그 중에서도 야외 불사에 사용되었단 대형의 괘불(掛佛) 도상은 설법인의 화려한 장엄을 한 보살형 노사나에 집중된다. 즉, 조선 후기 불화에 그려진 주요한 존상 모두가 본 작품에 나타나고 있다. 본 작품에서 일목요연하게 도해된 삼신불(三身佛)과 보신으로서의 삼불(三佛)의 신앙체계가, 이 작품에서 그 융합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전체의 불교도상을 지배하는 기본 원형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부의 표현 형식을 보면, 고려시대 작품의 의습 문양으로 자주 등장하는 S자 문양을 기본단위로 한 유기적인 서기(瑞氣)의 보상화문이 법의 전면을 덮는 시문방식은 사라지고, 여래의 대의에는 회전하는 듯한 짧은 소용돌이 문양으로 내부를 채운 원문(圓紋)이, 보살 및 속세형 인물에는 조선 특유의 간략화된 국화문(菊花文)・원문(圓文)·화문(花文)이 확인된다. 엄격한 철선묘와 정밀한 세부묘사로 안정된 귀족적 세련미를 표현했던 고려시대의 작품과는 다른 바로크적인 밝은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오불존의 원융적 집합·예배하는 보살 및 궁녀들·기악을 연주하는 악녀(楽女)·피어오르는 오색의 구름·그 가운데 3번 반복해 모습을 드러내는 왕과 왕비 등의 표현 배경에는 무언가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숨어있는 듯하다. 특히 여래 제 존의 표현에 있어, 방원(方圓)의 얼굴 모양, 솟아 올라온 육계의 정상계주·2중의 방형 광배·상하 대칭의 앙련대좌(仰蓮台座)·높은 수미단의 단층적인 형태 등은 서장(西蔵 또는 티베트)식 불화의 형식적 요소의 영향이 보인다. 본 작품 이전 작품에서는, 상기와 같은 요소 중에 몇 개의 특징만이 국부적으로 나타났지만, 본도에서는 그것이 모두 갖추어 나타나, 형식 및 양식의 정형화(定型化)가 진행된 것이 관찰된다. 본 작품에 나타나는 방형광배(方形光背)와 정상계주 등의 티베트 불화의 형식적 요소는 이미 1463년 사경판화(간경도감 출간, 동국대중앙도서관 소장)에서 확인된다. 15세기 중엽 이전까지는 고려식이 압도적으로 고수되었지만, 15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명(明)나라의 양식, 보다 정확히는 원(元)의 티벳 불교형식이 명에 수용되어 명의 궁정양식으로 변용된 것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교토(京都)대학 부속도서관 소장의 가와이분코(河合文庫)의 사경판본 2점, 세종14년(1432) 간행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大佛頂如来密因脩証了義諸菩薩萬行首楞厳經)>과 16세기(임진왜란 이전) 간행의 <묘법연화경제삼권(妙法蓮華經第三巻)>을 비교해보면, 15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형식 및 양식의 차이가 확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기의 제1형식과 제2형식에서 다룬 작품을 포함하여 15세기 왕실관계 불화로 확인되는 작품 약 4점, 그리고 왕실 주변 작품으로 추정되는 작품 2점을 포함하여, 15세기 왕실관계 작품은 다 합쳐도 7점 정도밖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편, 16세기에 들어 왕실관련 불화로 확인되는 작품은 약 16점에 달하는데, 이는 주로 16세기 후반, 즉 명종(1546-1567)과 선조(1567-1608) 시기에 집중되고 있다. 또, 이 16세기에는 ‘궁정형식’과는 구별되는 ‘사원형식’으로 판단되는 다양한 도상의 커다란 폭 불화가 다수 현존하여, 당시 불화의 양식이 상당히 다채로웠음을 나타내고 있다(<그림 13~그림 14> 참조). 주로 16세기 후반에는 문정왕후(1501-1565)가 12세의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행한 시기, 즉 문정왕후가 불교중흥정책을 시작한 시기(1546년에서 약 20년간)로 초점이 모아진다. 선행하는 대부분의 조선불화 연구는, 문정왕후 시기에 발원한 작품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10) 특히 문정왕후가 1565년에, 명종과 명종비 그리고 그 후계(後繼)를 비롯하여 왕실의 안녕을 위해 발원한 불사로, 경기도 양주 회암사를 중수하고, 석가·미
륵·약사·미타를 각각 금화(金畵) 50점·채화(彩畵) 50점씩 합 4백점을 제작하였다는 사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시기의 작례는 “기념비적” 또는 “불교의 르네상스”(『세계미술전집』 조선왕조 편, 1999: 397)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 불화 또는 ‘조선 전기의 궁정양식’이라고 하면 바로 이 문정왕후 발원과 관계있는 작품이 예로 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문정왕후 발원 6점은 그 크기가 평균 가로 30센티 세로 60센티의 비교적 소규모의 작품이다. 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회암사 약사삼존도>에서 보이는 형식의 구도가 도식적으로 반복된다(<그림 15>~<그림 22>). 물론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도 그 화려한 금니의 사용은 눈에 띄는데, 4백점의 탱화라는 그 수량은 공전절후(空前絶後)의 규모이기도 하다. 16세기 후반의 상기 6점과 밀접한 유사성을 보이는 작품으로 엔츠우지(圓通寺) 소장 <약사만다라도>(1561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불회탱(四佛會幀)>(1562년) 등이 자주 예시된다(<그림 23>). 이들 작품에 공통하는 형식적 특징은 이미 서술했듯이 16세기 궁정양식을 정의하는 기반이 되는, 정상계주·방원형의 얼굴·층층으로 구획된 수미좌·간략화된 의습 문양 등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 일련의 문정왕후 발원 작품보다도 작품성에 있어 오히려 주목해야할 작품은 16세기 불화의 백미라 생각되는 교토·지온인 소장 <관세음보살32응탱>(<그림 1>)과 미국 보스톤미술관 소장 <약사삼존도>로 사료된다.
먼저 예시로 드는 <관세음보살32응탱>11)은, 『법화경』의 「관음보살보문품」에 설해진 ‘응신교화(應身教化)’라는 주제를, 현실적 산수를 배경으로 생생하게 도해한 독창성 넘치는 작품이다. ‘응신구제(應身救済)’ 및 ‘7난3독(七難三毒)’의 각각의 장면은 명대 왕실의 보물로서 대대로 전해 내려온 선덕(宣徳) 7(1432)년명(年銘)「묘법연화경관세음보문품(妙法蓮華經觀世音普門品)」의 경전 삽화(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와 도상이 흡사하여, 조선 전기에 있어 명나라 궁정양식의 영향이 확인되는 예라 하겠다. 하지만 이를 수용하여 독특한 구성을 창안, 산수를 배경으로 배합하여, 해당 주제의 장면들을 조화롭게 표현해내고 있다. 회화적 독창성이 두드러지는 본 작품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작이라 하겠다. 화면에는 관음보살이 응신하여 왕림한 다양한 극적인 순간이, 일련의 극적인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다. 구제 장면을 들여다보면 재난에 맞닥뜨린 중생의 심각성보다는 이를 경쾌한 필치로 묘사해내고 있어, 오히려 상황이 관조되고 있는 듯한 낙천성이 느껴질 정도이다. 고려불화의 철선묘와 치밀한 장식성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엄숙성보다는 자유로움과 생동감을 만끽할 수 있다. 광활한 산세를 마치 병풍처럼 펼쳐 그린 본 작품에서는 절대적인 종교화로서의 고려불화에서는 맛 볼 수 없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이 같은 회화적 표현력은 고려작의 귀족적인 섬세함과는 지향하는 바가 크게 달라, 작품의 제작 집단 및 그 시대취향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엄격한 의궤(儀軌)의 틀에 근거하는 고려의 예배화(禮拜畵)로서의 엄숙함 취향에서, 조감도식 관법과 설화적 표현이 두드러지는 조선적 특징이 확인된다 하겠다.
다음으로 미국·보스톤미술관 소장 <약사삼존도>는 위에 기술한 문정왕후시대의 일련의 작품 형식을 예고하는 선구작이라 하겠다. 작품의 중앙 하단에 있는 붉은 바탕의 사각 구획의 화기에는, 여타 문정왕후 발원 작품, 예를 들면 회암사 본의 화기 “嘉靖乙丑年正月日 聖烈仁明大王大妃殿下”와 같이 발원 날짜와 대비(大妃)의 공식적 호칭과 같은 기재가 없다. 화기 모두(冒頭)의 “大妃殿下”가 문정왕후를 가리키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유사한 시대라면 공의왕대비이거나 시대가 조금 더 올라간다면 정현왕후(慈順大妃)일 가능성이 높다(<그림 24>). 하지만, 화기의 내용을 분석하면, 문정왕후발원 일련의 작품에 기재되는 화기와 같은 단어 및 어휘가 쓰여지는 등 매우 유사한 문장 패턴이 관찰된다. 16세기 후반 궁정 작품의 존상과 본 작품의 중심3존(약사여래와 일광·월광보살)의 형식적 유사성에서, 이 작품이 16세기의 제 3/4분기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 작품 에는 같은 16세기의 제3/4분기에 발원된 문정왕후 관련의 작품과는 다른 특징이 보인다. <회암사 약사삼존도>(1565년)를 포함한 6점 및 엔츠우지 소장 <약사여래도>(1561년)에 보이는 빠른 필치로 그려진 필선의 움직임은, 본 작품에는 전혀 볼 수 없다. 오히려 명확하고 날카로운 필력의 명확성에 눈길이 한참 멈추게 된다. 상기 기술한 1560년대의 불화 군과 거의 동일한 시기이지만, 한층 우수한 묘사력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이 불화군보다 조금 선행하여 제작된, 후행하는 불화군의 규범이 되는, 즉 본 작품을 계기로 그 이후 작품의 규범으로서, 그 이후 양식을 규정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될 정도로 수작이다. 넓은 어깨와 풍만한 방형의 얼굴이 만들어내는 당당한 상체의 기풍, 이와 대비되는 섬세하고도 유연한 수수(手首)와 설법인의 손가락 표현·솟아올라온 육계 위의 보주·합장하고 중앙을 향해 협시하고 있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의 자세, 보살의 동글한 협(頬)의 3/4측면관의 얼굴, 가늘고 기다란 손 등은, 상기 엔츠우지 본과 사불회탱 및 일련의 회암사 발원 본이 지향하는 특징적 형식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 작품의 경우, 양 보살의 의습 문양이 독특한데, 월광보살은 주색(朱色), 일광보살은 녹청(緑青)의 바탕에 원문양이 아니라 횡장(横長)의 타원형의 꽃문양이 천의(天衣) 전면에 시문되어 있다. 이것은 본 작품에서만 확인되는 진귀한 문양으로, 거리를 두고 보면 마치 구갑문(亀甲文)과 같은 효과를 낸다. 이 특별한 문양은 양 보살의 몸을 따라 흘러내리는 옷자락과 함께 작품의 인상을 한층 강하게 하고 있다.
이같이 본 작품은 같은 16세기 후반 작품과의 형식상 유사성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지온인 본과 또 다른 강렬한 회화적 표현력으로, 상기 1560년대의 여타 작품과는 구별되는 한 차원 높은 품격을 구비하고 있다. 특히 중심 삼존의 육신은 명도가 높은 금색으로 처리하여, 배경에 운집한 12신장의 육신은 검고, 음영 처리를 하여 입체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금색이 현저한 육신과 색채가 선명한 옷을 걸친 삼존과의 효과적 대비에 의해, 호법신으로서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다. 12신장은 포즈 및 얼굴의 각도가 각양각색으로 표정이 풍부하고, 도석(道釋)인물화에 보이는 기괴한 느낌이 있다. 이 같은 신장의 표현은 시텐노지(四天王寺) 소장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1587년)의 팔부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다음에 소개하는 궁정형식과는 구별되는 사원형식 작품군에 있어 이 같은 도석화적인 뉘앙스의 호법신장의 전개가 고찰된다. 이상, 제시한 대표 작품들은 16세기 후반의 문정왕후발원 작품군에 있어 모범작 또는 기준작으로 역할을 했다고 추정되는데, 16세기 궁정양식의 형성과 전개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할 수 있다.
16세기로 접어들면, 전술한 것과 같은 16세기 독특한 궁정양식이 나타나는 동시에, 거폭(巨幅)의 사원양식 불화, 즉 왕실의 원찰(願刹)이나 내원당(内願堂)이 아니라 야외에서 개최되는 법회 용도로 제작되는, 대중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불화가 등장한다. 이 양식은 왕실 발원 작품과는 다른 양식을 보이는, 조선 전기 16세기에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경향이므로, 간략히 다루기로 한다. 현존 작품 중에 고베(神戸)·다몬지(多聞寺) 소장 가정 20(1541)년명 <천장도(天蔵圖)>를 예로 보면, 궁정양식과는 크게 다른 양식을 접할 수 있다. 먼저 크기에 있어 세로 폭이 거의 2m(세로 199.8cm, 가로 162.5cm)에 이르는 거폭으로, 평균 폭 35cm 정도의 마포(麻布) 5폭을 연결하여 바탕천을 만들고 있다. 민중 발원의 불화는 대개가 마본(麻本)으로 궁정의 견본(絹本) 일색의 고급소재와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안료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궁정불화에서 사용된 짙고도 선명한 안료가 아니라, 보다 농도가 엷은 안료가 쓰여졌다. 궁정불화에 있어 광배의 윤곽선, 옷의 문양, 불보살의 육신 등에 많아 쓰인 금색 안료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된다. 또 화려한 장식과 의습에 시문되는 문양도 자취가 사라지고, 협시군중의 옷을 보면, 문양이 일체 없는 단색의 옷마저 나타난다. <약사만다라도>라고 잘못 명칭이 붙여져 있는 고야산(高野山)·죠키인(常喜院)의 작품도 이 천장도와 같은 주제와 형식의 작품으로, 얼굴과 신체의 윤곽선, 옷의 자락과 장식 등을 그린 굵은 묵선이 양 작품에 있어 같이 두드러진다. 윤곽선을 두껍게 그리고, 문양을 억제하는 것으로 화면 전체에 평면적 명쾌함을 부여하고, 그 위에 농묵선(濃墨線)으로 표정 등에 악센트를 주고 있다. 묵선의 맛을 그대로 살린 점이 특징이다. 화기에 있어서, 궁정양식에서는 적지(赤地)의 화기란(畵記欄)에 금니로 쓰는 것이 통례이지만, 사원양식의 경우는 묵서로 쓴다. 또 궁정 발원의 경우, 발원자는 궁정 내에 권위를 갖는 왕실직계 또는 왕실 주변의 인물로 개인 또는 많아도 2, 3인의 소수이지만, 사원양식의 경우는 다몬지(多聞寺) 본과 같이 약 20인의 발원자 이름이 화기란에 병렬로 나열되는 등, 공동 시주자의 숫자가 많다.
다몬지 작품처럼 다수의 시주자 이름이 화기란에 나열된 사원양식 작품으로, 고야산(高野山)·곤고우부지(金剛峯寺) 소장 가정14(1535)년명 <석가팔상도>를 들 수 있다. 이 작품도 묵선의 묘미를 활용하여 설화적인 분위기를 십분 내고 있는 작품으로, 대형 마폭(麻幅)(세로 372.8cm, 가로 175.7cm)에는 석가팔상의 일대기가 펼쳐지고 있다. 이 작품 이외에 3m를 웃도는 작품으로 오사카(大阪)·시텐노지(四天王寺) 소장 만력15(1587)년명 <령산회상도>(세로 325.2cm, 가로245.5cm)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압도적으로 유행한 영산회상도의 가장 빠른 작례로서 귀중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예로든 16세기 사원양식 작품은, 곤고우부지 소장 <석가팔상도>와 시텐노지 소장 <영산회상도>를 포함하여, 오카야마(岡山)·타카라시마지(寶島寺) 소장 <삼장도(三蔵圖)>(1588년)·효고(兵庫)·야쿠센지(薬仙寺) 소장 <감로도>(1589년) 등, 거의가 조선 후기 불화에 있어 커다란 비중을 점하게 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서, 조선 후기 작례의 선구 작으로 극히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이같이 16세기 후반기에 급격하게 다양한 도상이 출현하고, 이들 작품이 조선 후기 불화형식을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금후에도 구체적으로 연구되어야할 중요한 과제라 하겠다.
Ⅳ. 결론
이상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불화의 맥락을 살펴서, 문정왕후 발원 작품이 어느 선상에 어떻게 위치하는지 표출하고자 하였다. 이에 문정왕후 발원의 일련의 작품들은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불화의 마지막 양상’을 보여주는 형식이라고 하겠다. 왕실 후원 불사는 고려시대를 이어 숭유억불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까지 그 명맥이 면면히 이어지는데, 이러한 후원의 주최로는 대비(大妃)의 역할이 컸다. 정희왕후, 정현왕후, 인성왕후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정왕후로 이어지는 왕실의 여인들의 역할이 실로 컸다. 이 같은 왕실 불사의 전통 선상에서 마지막 정점을 찍은 불사(佛事)가 바로 문정왕후와 보우대사의 원력으로 진행된 불화 제작이다. 물론 명종 대를 이어 선조 대에도 비빈(妃嬪)들에 의해 <자수궁정사지상보살도>(1575-1577)와 <안락국태자경변상도>(1575) 등과 같은 작품들이 제작되지만, 사실상 공개적인 대(大)불사 차원의 것은 문정왕후의 회암사 중수 기념 발원 탱화를 마지막으로 왕실 양식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에 조선 전기의 왕실 발원 불화의 양상의 변화를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리고 3형식의 비교를 통해, 전체 흐름 속에서 문정왕후 시기의 작품들이 어떠한 위치 또는 위상을 점하는지 논하였다.
이같은 비교고찰의 작업 속에서 당대 대표 작품의 주요 제작자인 이자실이라는 화공의 활동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는 공의왕대비 발원 <관세음보 살32응탱(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을 비롯하여 회암사(檜巖寺) 중수(重修) 기념 문정왕후 발원 탱화 군(群)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하였음을 화기 및 형식 분석을 통해 확인하였다. 특히 본문에서는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는 이자실 필(筆)의 일본 사이묘지(西明寺) 소장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를 매개로 관련 유사 작례들의 비교고찰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16세기 불화의 형식 및 양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이자실의 작품이, 어떻게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불화의 마지막 대미 를 장식하게 되는지 집중적으로 고찰하였다. 마지막 왕실불화 양식은 문정 왕후 시기 발원 불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이같은 경향을 조선전기 왕실 불화의 전체적 흐름 속에서 고찰하였다.
16세기에는 왕실양식과 사원양식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이다가, 왕실양식은 문정왕후 발원 불화를 계기로 막을 내리게 되는 현상을 보인다. 사원양식은 콘고우부지 소장 <석가팔상도>(1535)와 다몬지 소장 <천장도>(1541) 등을 필두로 시텐노지 소장 <영산회상도>(1587)를 정점으로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이들 사원양식은 작품의 재질, 안료, 시문 방식 등에 있어서 왕실양식과 큰 차이를 보인다. 마본의 경우가 많고 견본이라고 하더라도 왕실본의 것처럼 짜임새가 조밀하지 않고 성기다. 또, 안료 등에서도 품질 차이를 보이는데 왕실의 것이 보다 명료하고 채도가 높고 흡착성이 좋아 剝落이 훨씬 덜하다. 그리고 사원양식만이 살아남아 조선 후기로 이어지게 된다. 사원양식이라는 용어는 조선 전기 왕실양식(또는 왕실발원 불화양식)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본 연구자가 논의전개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사용한 것임을 밝힌다. 추후 보다 세밀한 비교고찰을 통해 양자의 개념 및 양식을 대비 정립하여 제시할 것을 기약한다. 조선 후기 지방의 주요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민적인 사원양식의 과도기적 또는 선구적 양상으로서의 16세기 불화의 다채로운 면모를, 문정왕후 발원 왕실양식을 중심삼아 대비 제시하여, 조선 전기에서 조선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면모를 고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