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시책으로 ‘무종단 산중불교’라고 하여 불교의 침체기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후기 불교는 산중을 중심으로 불교의 발전을 꾀했다. 조선후기 간행된 『동사열전』의 고승 198명 가운데 대부분이 조선후기 고승의 입전된 사실을 통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명종대 문정왕후의 불교 후원과 허응보우의 선교양종 복립으로 봉은사와 봉선사를 본산으로 하는 선종과 교종이 16년간 존립했다. 특히 선교양종의 승과 실시로 청허휴정과 사명유정 등이 배출되어 조선후기 산중불교를 주도하게 된다. 청허휴정뿐만 아니라 청허의 동문인 부휴선수의 문도도 산중불교시기의 주역이었다.
본고는 부휴의 상수제자인 벽암각성의 문도 백곡처능의 생애와 호법활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 동안 백곡처능의 연구는 그가 조선 정부에 올린 1,815자의 상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그의 상소를 올린 시대적 배경인 효종대와 현종대 불교시책과 관련하여 진척되기도 하였다(김기녕, 2000, 2003; 김영태, 1973; 김주호, 1994; 남희수, 2005; 오경후, 2009; 이봉춘, 1990; 이종찬, 1993; 임재완, 2015; 차차석, 2009).
본고는 백곡처능의 생애 전반에 대한 검토와 그의 사승, 도반, 문도, 그리고 교유 승려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한다.1) 아울러 그의 불교계 대내외적 호법활동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생애와 사제 및 교유(交遊) 인물
백곡처능의 생애와 활동에 관하여 가장 대체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은 유가문집에 소재한 「백곡선사비명(白谷禪師碑銘)」과 「백곡선사탑명(白谷禪師塔銘)」2)일 것이다. 백곡의 문집인 『대각등계집』에는 행장이 실려 있지 않고 식암(息庵) 김석주(金錫胄, 1634-1684)와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의 서문이 실려 있을 뿐이다(백곡처능, 2015). 이러한 기문과 문집류와 금석문 등에 실린 단편적인 기록이 산견되어 구체적인 생애를 알기 쉽지 않다.
그의 성은 오(吳)씨나 김(金)씨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으나3) 「백곡처능사비명(白谷處能師碑銘)」 병서(幷序)에 기록된 바와 같이 속성은 전(全)씨요, 이름은 신수(愼守)요, 법명은 처능(處能), 자호(自號)는 백곡(白谷)이다.4) 그의 조상이나 가계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당대 문장가이자 선조의 부마인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1588-1644)에게 사사하고 많은 문인들과 교유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경상도 양반가 전씨의 자손인 듯하며 어머니는 김씨였다. 그의 어머니 김씨가 늘 홍제사(弘濟寺)5) 석불에게 기도하거나6), 인도승이 2개의 구슬을 머금는 태몽을 꾸고 1617년 5월 3일에 1남 1녀 가운데 아들로 태어났다.7) 그는 ‘법골(法骨)이 기수(奇秀)하여 어려서부터 불사(佛事) 놀이 하기를 좋아했으며, 혹 승니(僧尼)를 만나면 문득 나아가 좇았다’8)고 한다.
그는 나이 12세인 1628년(인조 6)에 벽암각성의 제자 의현(義賢)9)에게 출가하였다.10) 그 후 16세인 1632년(인조 10)에 운장(雲莊)에 머물고 있던 신익성에게 찾아가 유가 경전을 배웠다.11) 이 산장[雲莊]은 경기도 인근 양수리 근처 고산(孤山) 창연정(蒼然亭) 백운루(白雲樓)를 지칭하는 듯하다.12) 신익성은 한가할 때 양수리 창연정에 머물면서 승려들과도 교유하였으며13), 백곡은 신익성의 산장 창연정 근처의 낙수암14)에 머물렀던 듯하다.15)
백곡은 여기서 20세인 1636년(인조 14)까지 4년간 머물면서 유교 경전과 시문을 배웠다.16) 백곡은 출가 승려였음에도 출가 사찰을 떠나 유자와 조우하여 유교 경서와 역사서, 한유와 소동파의 저술까지 두루 배웠다. 백곡은 나이 20세(1636년, 인조 14) 무렵 문장의 기예보다 출가시 초심을 다시 세워 지리산 쌍계사에 머무르고 있던 벽암각성을 찾아가 수제자17)가 되어 20여 년간 함께 하였다고 한다.18) 아마도 그의 스승 벽암각성이 입적할 무렵인 1660년 전후까지 스승 벽암각성이 주요 활동을 하였던 순천 송광사와 완주 송광사, 합천 해인사, 보은 법주사 등의 사찰에서 스승 벽암과 함께 그 뜻을 받들어 불사에 참여하였다.
백곡은 스승 벽암에게 입실하던 해인 1636년 사미로서 「순천 송광사 개창비」를 세울 때 스승 벽암의 뜻을 받들어 그의 유가 스승이기도 한 신익성에게 비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19) 신익성은 그런 백곡이 선문(禪門)으로 뛰어 들어간 지 이미 몇 년이 되었다고 하므로 아마 백곡은 벽암의 제자인 의현에게 입실했던 듯하다. 백곡은 선학뿐만 아니라 30세인 1646년(인조 24)에는 ‘글 공부가 완성되어 우뚝하니 세상에 나가게 되었다’20)고 스스로 밝히고 있으며, 스승 벽암도 백곡에게 글을 보내 ‘상수제자의 글을 보니 문장이 매우 기이하고 예리하여 좋아하게 되어 임금의 칭찬이 이와 같다’21)고 하였듯이 30세인 1646년 무렵에는 문장으로 스승 벽암뿐만 아니라 인조에게까지 인정을 받았다. 당대의 문인 식암 김석주도 ‘대사의 문장은 자못 광대무변하였는데 마치 계곡의 물이 쏟아져 나오는 듯 하였고 강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듯하였다’고 하였으며, 동명 정두경도 ‘더욱 감탄하고 칭찬하면서 기재’라고 하였다.22) 불교계도 그리 인식하였다. 예컨대 자수무경(子秀無竟, 1664-1737)은 ‘우리나라의 시승(詩僧)은 고금에 수가 많지만 문장과 도덕을 함께 갖추고 있으며,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 분은 오직 백곡스님뿐이다’23)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후기 고승 사암채영(獅巖采永)도 그렇듯 인식하였으며24), 후대의 벽암 문파 월하계오(月荷戒悟, 1773-1849), 편양 문파 인악의소(仁岳義沼, 1746-1796)와 더불어 불교계의 문장가로 알려졌으며25), 범해각안(梵海覺岸, 1820-1896)도 ‘세속에서는 흔히 백곡(栢谷)26)·무용(無用)·해붕(海鵬)을 승가의 문장가라고 일컫는다’27)고 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백곡은 스승 벽암에게 입실하던 해부터 스승 벽암과 함께 하였다. 즉, 1636년 사미로서 「순천 송광사 개창비」를 세울 때 참여하였는데, 5년 후인 1641년(인조 19) 벽암과 함께 완주 송광사에서 삼세불상 대화사(大化士)로 참여하였다. 1646년(인조 24) 합천 해인사에서 「만월당기」를 작성하고 보은 법주사에서 장육금신상(丈六金身像)을 중수하였는데28), 스승 벽암의 불사를 계승한 것이다. 이렇듯 백곡은 스승 벽암의 주 활동 무대인 순천 송광사와 완주 송광사, 합천 해인사, 보은 법주사 등의 사찰에서 스승과 불사를 함께 하면서 보조국사 지눌의 선풍을 현창하고자 하였으며, 1657년(효종 8) 무렵 지리산 칠불암에서 스승 벽암의 저술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에 대한 발문을 지으면서 불교 의례집의 간행에 동참하여 불교의례의 확립으로 유교의례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1652년(효종 3) 선종의 본산이자 불교의 중심사찰이었던 광주 봉은사 삼세불상 진금대화사(眞金大化士)로 참여한 것도 불교 흥법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한다.29)
백곡의 스승 벽암은 선조대와 인조대 의승장으로 활동하거나 남한산성 도총섭으로 국가적인 불법을 흥성시켜 조정과 민중의 주목을 받아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1649년(효종 10) 인조가 승하하자 벽암으로 하여금 천복도량(薦福道場)을 베풀게 하였는데, 이에 대한 상소를 백곡이 지음으로써30) 조정의 주목을 받으면서 불교계에서도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백곡은 1652년(효종 3) 무렵 이후 대둔산 안심사를 흥법(興法)의 본산으로 삼고자 하였던 듯하다. 「안심사사적비명」에 의하면 안심사는 세조대 무렵 석가 진신사리가 소장되어 있어 세조와 왕실을 주목을 받은 곳으로 백곡은 「안심사사적비명병서(安心寺事蹟碑銘幷序)」를 지었으며, 영산회괘불도 등의 불사로 안심사의 중흥을 꾀하였다. 1657년(효종 8) 백곡이 안심사에서 강법을 개당하자 학도들이 운집하였다고 한다.31)
백곡은 그러면서 1657년(효종 8) 봄에 임성충언(任性忠彦, 정관일선의 문도)의 수제자 남봉영신(南峰英信)과 함께 벽암이 주관하는 강학회에 참여하는 등32) 스승과의 동행도 계속하였으며, 1660년 스승 벽암이 입적하자 추념사업에 동참하였다. 1663년(효종 4) 「화엄사벽암대사비」33)와, 1664년(효종 5) 「법주사 벽암대사비」의 건립에 참여하면서 스승의 유지를 받들었다.
백곡은 1661년(현종 2) 정월에 8,150자에 달하는 상소문을 지어 불교배척의 부당성을 6개 항목으로 정리하여 올렸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예시하면서 불교가 국가의 다스림에 방해되거나 해롭지 않았다고 하면서 불교의 전래 이후 사찰은 국가를 비보(裨補)하고, 승려는 국가와 민중에 애국 애민의 종교였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면서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 봉은사와 봉선사는 역대 왕실의 내원당(內院堂)과 외원당(外願堂)으로 폐훼하거나 축출해서는 안된다고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백곡은 조정에 상소를 올린 후 1665년(현종 6) 곡성 도림사 아미타불 좌상의 조성 불사34) 외에는 아미산과 성주산을 비롯해 속리산, 청룡산, 계룡산 등을 유력하였다.
백곡은 그의 문집에 의하면 ‘(나이) 이십 대에는 멀리 유람 다니길 좋아하여 금강산의 봄을 희롱하였다’35)고 스스로 말했듯이 가야산, 묘향산, 보개산, 설봉산 등 전국의 명산 대찰을 유력하였었는데36), 스승 벽암의 입적 후에도 전국 명산을 유력했던 듯하며, 대둔산 안심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다.37)
1660년 스승 벽암의 입적 후 활동으로 주목되는 것은 스승 벽암이 재직하였던 남한산성도총섭을 제수받은 사실과 스승이 저술한 불교의례집 『석문상의초』 간행과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비문 불사의 참여일 것이다.
백곡은 스승 벽암의 수제자로서, 그리고 불가의 문장가로서 주목을 받아 1666년(현종 7) 남한산성 도총섭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670년(현종 11) 다시 제수되었으나 몇 달 되지 않아 사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38) 『대각등계집』에 의하면 자신이 ‘천리 밖 영남에서 도총섭을 지내노라 십년 동안 숲에서 다 낡은 승복을 입었다’39)고 하여 영남도총섭을 제수받아 10년간 재직하였던 듯하다.
백곡이 남한산성 도총섭을 거절하고 3개월 정도만 재직하였던 것은 스승의 뜻을 충실히 받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즉, 백곡은 1657년(효종 8) 전라도 낙안 금화산 징광사(澄光寺)에서 스승 벽암의 불교 의례집인 『석문상의초』를 간행하였으며, 1678년(숙종 4) 10월 백곡은 백암성총(栢庵性聰)이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비문을 다시 새겨 중건하였을 때 선사로서 참여하는 등 보조국사 지눌의 선풍을 현창하고 불교의례의 보급으로 불교계를 수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40)
백곡은 그러면서 1671년(현종 12) 계헌(戒軒)이 신륵사 중수시 「신륵사나옹중수비명 중수서(神勒寺懶翁重修碑銘 重修序)」를 지었던 듯하다.41) 1674년(현종 15) 가을에 「유점사 산영루 중수기」를 짓고 1676년(숙종 2) 백곡의 제자 조영의 요청으로 부여 「임천 향림사 사적비명」을 지었다.
백곡은 말년인 1680년(숙종 6) 봄에 김제 금산사에서 대법회를 5일간 열었는데42), 후에 화엄산립 법회의 선구가 되었다. 얼마후 백곡은 세수 64세, 선납(禪臘) 49세로 금산사에서 입적하였으며, 모악산 금산사, 대둔산 안심사, 계룡산 신정사(현재 신원사)에 각기 그의 부도탑이 세워졌고, 1683년(숙종 9) 그의 어록인 『대각등계집』이 각판되었다.
백곡처능의 스승은 벽암각성과 그의 제자 의현이다. 먼저 의현(?-1624, 인조 2)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익성의 문집에 의하면, 의현은 진일(眞一)·성수(性修)·희안(希安)과 더불어 벽암의 수제자였다.43) ‘진일과 희안은 말솜씨가 좋으며 성수는 염불 잘 하고, 글은 의현’44)이라고 하였다.
의현은 풍수지리에도 밝았다.45) 의현은 남한산성 천주사와 장경사에 머문 후46) 전라도 영광 백련암, 덕유산 백련암, 영남 대승사에 머물렀다.47) 강화도 일대의 백련사, 적석사, 전등사, 정수사 등의 사찰을 유력하였다.48) 의현은 신익성과 의현의 제자 계정(戒淨)과 함께 천마산과 성거산을 구경하고 돌아서 태화산으로 들어가 십여 일을 유람하였던 기록이 찾아진다.49) 의현은 1634년(인조 12) 경 초여름에 열반하였다.50)
의현의 문도는 많았는데 그 가운데 계정과 경호(敬浩)51), 백곡 등이 있었다. 계정은 남한산성에 머물렀는데52), 청량산 지장암에 머물기도 하였다.53) 안동 봉정사 앞 덕휘루(德輝樓)를 짓는데 응호(應瑚), 처원(處元), 학초(學草), 처엄(處嚴), 두해(斗海), 처안(處安) 등의 승려와 함께 하기도 하였다. 백곡은 의현의 심부름으로 신익성이 병중에 있을 때 신익성을 보살폈고, 신익성의 양주 선영 근처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법당으로 삼아 지내기도 하였다.54) 문도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백곡이 12세에 의현에게 출가하였다는 것이다.55)
다음으로 백곡의 스승 벽암각성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벽암각성(1575-1660)은 청허휴정과 더불어 조선중기 산중불교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던 부휴선수의 상수제자였다.56) 부휴선수가 말년에 청허의 문도가 되면서 청허계 문하의 방계로서 벽암각성, 뇌정응묵(雷靜應黙), 대가희옥(待價熙玉), 송계성현(松溪聖賢), 환적인문(幻寂印文), 포허담수(抱虛淡水), 고한희언(高閑熙彦) 등의 7대 문파를 형성하였다. 청허의 최대 문파인 편양언기파가 17세기까지 묘향산을 중심으로 북방에서 주요 활동을 하였으며, 18세기 이후 호남을 비롯한 남방에 진출하여 전국적으로 활동하였다. 부휴계는 호남을 중심으로 삼남지방인 송광사, 화엄사, 쌍계사, 법주사 등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김용태, 2006; 2009).
신익성이 남긴 비문에 의하면 기암법견(奇巖法堅), 송월응상(松月應祥), 편양언기, 성정(性淨) 등 여러 선사들과 근세의 노성(老成)하고 덕이 있는 승려들을 논하였는데, 모두 제월경헌(霽月敬軒)을 으뜸으로 일컬으면서 남승(南僧)인 벽암각성과 소요태능(逍遙太能) 또한 높이 추켜올리고 탄복하였다고 한다.57) 벽암은 남승을 대표하였던 듯하다.58)
벽암각성은 1589년(선조 22) 부휴선사에게 사사한 후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 지역을 유력하였고,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 이듬해인 1593년 사명유정의 천거를 받은 부휴선수 대신에 해전에 참전하였다. 그 후 백곡처능이 출생한 1600년(선조 33)에 지리산 칠불암에서 스승 부휴선수에게 강석을 전수받게 되는데, 후인 1615년(광해군 7) 스승 부휴선수가 입적한 후 다시 칠불암에 주석하게 된다. 벽암의 제자 백곡도 1657년(효종 8) 스승 벽암의 저술 『석문상의초』의 발문과 간기를 짓게 되는 등 부휴선수, 벽암각성, 백곡처능으로 이어지는 삼화상 도량이었다.
벽암은 1612년(광해군 4) 2월에 일어난 김직재의 옥사에 연루되어 스승 부휴선수59)와, 부휴의 문도 의승수군 승대장(義僧水軍 僧大將) 자운삼혜(慈雲三惠)와 더불어 무고를 당하였지만(한국문헌연구소, 1977: 563)60), 그것을 계기로 선수의 도가 뛰어나고 말이 곧고 바르다고 비단가사 두 벌을 하사받고 광해군에게 부각되었다(황인규, 2009). 부휴와 문도 벽암, 고한희언 등이 광해군의 능침사찰인 봉인사 등 원당의 증명사로 참여하고, 연산군에 의해 선교양종의 본산제가 허물어지자 명종대에 허응보우가 선교양종을 다시 세울 때까지 본산의 역할을 한 광주 청계사61)의 재(齋)에 참여하였다.62) 위에서 언급한 하옥 사건과 청계사 재를 베푼 시기를 전후로 부휴와 벽암은 순천 송광사, 해인사, 쌍계사 등을 중심으로 부휴와 문도 벽암이 주석하며 중창을 하였는데, 후에 벽암의 문도 백곡도 이러한 사찰에 함께 하게 된다.
벽암은 1624년(인조 2)부터 1627년(인조 5)까지 8도 도총섭으로 남한산성을 축성하였으며63), 그 공으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을 받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전국에 격문을 보내 의승군 3천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돌아왔다.64) 그 해에 백곡이 지리산 쌍계사에 주석하고 있었던 벽암에게 입실하여 그 후 20년간 추종하기 시작한다. 1640년(인조 18) 8월에 규정도총섭으로 적상산성을 수축하고, 사고(史庫)를 수직하였다.
벽암각성의 문도는 취미수초(翠微守初, 1590-1668)65), 백곡처능, 고운정특(孤雲挺特), 모운진언(暮雲震言), 동림혜원(東林慧遠), 벽천정현(碧川正玄), 침허율계(枕虛律戒), 회은응준(晦隱應俊) 등이 있다.66)
백곡의 도우는 『해동불조원류』에 의하면 ‘취미수초, 고운정특, 모운진언, 동림혜원, 벽천정현, 월파인영(月波印英), 무의천연(無依天然), 제하청순(霽霞淸順), 유곡충경(幽谷冲冏), 한계현일(寒溪玄一), 연화인욱(蓮華印旭), 나암진일(懶庵眞一), 침허율계, 회은응준, 허월승준(虛月勝俊)’67) 등의 승려들이 찾아진다. 그 가운데 백곡과 교유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승려는 처원(處愿)68)과 선화경림(禪花敬林) 등이다. 선화경림69)은 봉은사를 중건한 승려이다.70)
백곡의 문도는 『해동불조원류』에 의하면 구암승각(龜嵓勝覺), 식영진명(息影眞明), 법형일호(法浻一湖), 옥명조영(玉明祖瑛), 회선일명(懷善一明), 초화성정(楚華性靜), 법란영초(法蘭靈椘), 계징(戒澄), 계심(戒諶), 법령(法玲), 경호(鏡湖)71) 등이 있었다.
옥명조영은 부여 임천 가림산 성흥산 「향림사 사적비명」을 스승 백곡에게 지어달라고 하였다. 향림사의 승려 제월경헌(1542-1632)의 제자 명의(明義)가 향림사를 중창하고 1676년(숙종 2)에 조영에게 사적비명을 그의 스승 백곡에게 부탁한 것이다.72)
문집에 의하면 조영은 선조대 문인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후손으로 8세에 속리산에서 출가하여 후에 진언장로(眞彦長老)를 참예하고 내전(內典)에 통달하고 시에 능했다. 1688년(숙종 24) 봄에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의 낙영산 도명암에서 10여 일간 이하곤(李夏坤)에게 『능엄경』을 강경해주고 결사를 맺었다고 한다.73)
백곡의 제자이자 도반인 동계경일(東溪敬一, 1636-1695)은 자정(慈淨)과 함허(涵虛)의 도량인 청주 낙영산 공림사를 증축하고 1687년(숙종 13)에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고 한다.74) 동계는 『동계집』을 남긴 문도이며75), 태허(太虛)라는 도명(道名)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76), 스승 백곡에 대한 시문을 몇 수 남기고 있다(김승호, 2006). 회선일명은 백곡의 추념사업을 하고 1682년 9월 9일 김석주에게 그 서문을 주선한 승려이다.77) 초화성정(김상현, 2006)은 그의 도반 동계경일과 옥명조영이 중수하였던 공림사 인근 서쪽에 있었던 백련암의 심각(心覺)과 신회(神會)와 더불어 1642년(인조 20)으로부터 1647년까지 6년 동안 중창하였다.78) 편양언기의 제자 환적의천(1603-1690)은 철원 보개산 심원사의 만세루가 임진난으로 병화를 입자 중수하고자 계징에게 위촉하였으며79), 상원암에 머물기도 하였다.80) 계심과 경호는 해남 대흥사 13대종사 중 제5종사인 설암추붕(雪巖秋鵬, 1651-1706)과 교유하였다.81) 법령은 백곡의 제자였으며82), 환성지안(喚惺志安, 1664-1729)이 지은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가 1689년(숙종 15)에 안변 석왕사에서 간행될 때 각수(刻手)로 참여하였는데, 환적의천의 제자 풍계명찰(楓溪明察, 1640-1708)이 별좌(別座)로 참여하였으므로83) 백곡에 이어 그의 문도 법령도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곡집』에 보이는 원동자(元童子) 원수천(元壽天)84)도 백곡의 문도이나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리고 백암성총은 취미수초의 법제자로 백곡의 조카 제자였다.85)
백곡이 교유한 승려는 자신이 속한 부휴선수계 승려들일 것이다. 대표적으로 벽암의 상수제자인 취미수초86)와 그의 문도 옥뢰양열(玉瀨良悅)87) 등이다. 양열은 월저도안 등과 교유하였다.88)
『백곡집』에 의하면 청허휴정계 승려들이 대부분이다. 청허휴정의 법맥상 적통인 편양언기와 교유하였으며89), 그의 제자인 환적의천90), 편양언기의 도우인 휴운담언(休雲曇彦)의 제자 덕인(德仁)과 교유하였다.91) 덕인은 부휴선수와도 교유하였으며92), 당대 문인들이 남긴 시문도 전하고 있다.93)
또한, 백곡은 청허휴정의 상수제자인 송월응상의 문도 춘파쌍언(春坡雙彦)의 제자 설청지습(雪淸智什)과 교유하였다.94) 지습은 유점사95)와 건봉사 등에 머물렀는데, 백곡과 함께 『석씨원류(釋氏源流)』를 간행하였다.96) 그 외에 「화엄사벽사대사비」 음기에 도반으로 나오며 응암(應巖)과도 교유하였다.97)
Ⅲ. 불사(佛事) 참여와 법회도량(法會道場) 개최
백곡처능은 나이 26세인 1642년(인조 20)에 해인사로 거처를 옮겼는데 스승 벽암각성이 1642년(인조 20)에 가야산 해인사로 이주하여 허응보우(1509?-1565)가 찬술한 『수월도장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1권)을 간행하였을 때 발문을 지었다. 이 책은 사찰 도량에서 행하는 의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병란으로 화재로 소실될 우려가 있었는데 반운당(伴雲堂) 지선(智禪)이 그의 동학 9명과 함께 해인사에서 중간하였다.98) 이 책은 보우(普雨)가 도량의식의 관법(觀法)을 문답 형식으로 화엄의 원융한 교리를 진언으로 해석한 불교 수행서이다. 백곡은 스승 벽암각성과 함께 당시 불교 수행서의 보급에도 노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백곡은 불교 의례집의 간행에도 동참하였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17세기 중반 부휴선수의 문도 벽암각성이 『석문상의초』를, 사명유정의 문도 허백명조(虛白明照, 1593-1661)가 『승가예의문(僧伽禮儀文)』을 각기 편찬하였다는 것이다. 『석문상의초』는 1636년(인조 14) 각성이 편찬한 것을 1657년(효종 8) 백곡이 칠불암에서 발문을 지었으며, 『다비문(茶毘文)』을 합철하여 징광사에서 간행되었다.99) 『석문상의초』(상하 2권 1책 목판본)는 1636년 벽암각성이 화엄사 장실(丈室)에서 쓴 서문에서 상례가 매우 중요한데, 당시 불가에는 상의(喪儀)에 대한 근본이 없고, 시행되는 것이 규범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중국의 불교는 우리나라의 예(禮)와 부합되지 않으므로 『선원청규(禪苑淸規)』, 『오삼집(五杉集)』, 『석씨요람(釋氏要覽)』 등에 의거하여 그 핵심 내용을 뽑아 편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100)
백곡처능은 1657년 지리산 칠불암에서 『석문상의초』를 간행하면서 발문을 지어 옛 찬요집 즉, 『선원청규』, 『석씨요람』, 『오삼집』 등에서 대례(大禮)와 관련된 내용을 발췌한 것을 백곡처능이 필사해서 청계법정(淸溪法正)과 징광사에서 간행하였다.101) 이와 관련한 내용이 『영월당대사집(詠月堂大師集)』에도 백곡처능이 같은 해 봄 영월청학(詠月淸學, 1570-1654)의 제자 청계법정으로부터 문집의 서문을 청탁받아 청학의 제자인 법정, 인징(印澄), 명정(明淨)이 징광사에서 간행하였다고 전한다.102) 벽암각성의 제자이자 백곡처능의 도반 나암진일이 1660년(현종 1)에 『석문가례초(釋門家禮抄)』103)를, 사명유정의 제자 허백명조가 1670년(현종 11) 통도사에서 『승가예의문』을 간행하였는데 내용상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확산 보급되고 있었던 성리학계의 『주자가례』를 참작하여 불교의 기존 청규들을 토대로 불교 승려의 상제(喪祭)에 관한 불교 의례집으로서 유교의 상례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이선아(태경), 2015). 조선후기에 이르러 불교의례의 정착과 불교 대중화가 심화되었던 시기였다. 백곡의 스승인 벽암각성은 1600년(선조 33)에 그의 스승인 부휴선수로부터 강석을 물려받은 후 1603년 지리산 쌍계사 말사인 능인암에서 불서를 간행한 이후 1633년부터 1635년까지 순천 송광사와 태인 용장사 등지에서 불서를 대규모로 간행하였다(송일기, 2017).
백곡은 45세인 1664년(현종 5) 대둔산 안심사에서 청허휴정의 『심법요초(心法要抄)』 간행시 서문을 지었다. 그 서문과 발문에 의하면 휴정의 문도 소요태능이 『심법요초』의 원고를 보관하여 전하였으며 목양색(牧羊賾)과 추계유문(秋溪有文, 1614-1689)이 대둔산 안심사에서 간행하였으며, 백곡이 서문을 지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송정숙, 2012). 백곡은 『심법요초』의 서문에 ‘서산이 틈틈이 도로 들어가는 요령을 기술하고 ‘심법요초’라는 제목을 붙였다’(김영욱·조영미·한재상, 2010: 263-264)고 하였으며, 추계유문의 발문에 ‘서산이 『심법요초』를 지은 본래 뜻은 마음을 닦는 사람들에게 힘들이지 않고 쉽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라고 하였다.104) 이렇듯 백곡은 우의정 김석주에게 「안심사 사적비」의 비문을 받았으며, 허응보우와 그에 의해 발탁된 청허휴정의 『심법요초』를 간행하여 불교 수행서를 간행 보급하고자 하였으며, 특히 대둔산 안심사를 중흥하고자 하였다.105)
백곡은 53세인 1673년(현종 14)에 양주 불암사에서 판각된 『석씨원류』 발문(跋文)을 지었다. 『석씨원류』는 1425년 현재의 영파시인 사명(四明) 출신의 대보은사(大報恩寺) 보성(寶成)이 석가의 일대기와 불법(佛法)이 중국에 전래한 이후 원대까지 유통된 사실을 글과 그림으로 편찬 간행한 책(목판)으로, 상편의 내용은 『석가여래응화록(釋迦如來應化錄)』의 내용과 거의 같다(최연식, 1998). 불암사본(8책) 권말 처능의 발문에 의하면 1631년(인조 9) 명의 사신으로 다녀온 정두원이 명의 승려 대겸(大謙)으로부터 한 질을 선물 받아 금강산의 승려 춘파(春坡)에게 전해 주었으며, 춘파의 부탁으로 금강산 유점사 승려 지습이 경기도 양주의 불암사에서 목판본으로 판각하였다고 한다(송일기, 2014; 송정숙, 2012; 이영종, 2016).
백곡은 24세인 1640년(인조 18) 스승 벽암각성과 함께 순천 「송광사개창비」 건립에도 참여하고106), 그 이듬해인 1641년(인조 19) 완주 송광사 삼세불상 대화사로 동참하여(이강근, 1999) 보조국사 지눌의 현창사업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후 백곡은 같은 해 4월 안심사에서 영산회 괘불도 제작에 황금대시주(黃金大施主) 불사를 하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안심사의 중흥에 노력하였다. 그 후 36세인 1652년(효종 3) 스승 벽암과 함께 허응보우가 불교 중흥을 위해 본산으로 삼은 광주 봉은사의 삼세불상 진금대화사로 참여하여 허응보우의 불교중흥을 계승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아울러 같은 해 스승 벽암이 호서지방의 중요 사찰로 삼았던 속리산 법주사에 들어가 장육금신상을 중수하였다.107) 사리장치(舍利裝置) 동판문(銅版文)에 의하면 법주사 중심 법당인 용화보전에는 미륵장육상이 있었으나 1597년 9월 정유재란시 왜군의 방화로 법주사의 전각들과 함께 용화전 내부의 장육상도 파괴되었다. 1602년 10월부터 법주사 전각들이 재건되기 시작하였는데, 팔상전 상량문에 의하면 1626년 6월에 상량하였다고 한다. 1624년에 현진이 소조불상을 만들고, 팔상전에 조성하여 봉안하였으며, 아마도 백곡이 장육상을 조성한 듯하다. 이로써 법주사는 용화보전과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가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108) 그 후 백곡은 45세시 대덕(大德)으로 1665년(현종 6) 곡성 도림사에 머물면서 아미타불좌상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백곡은 20세인 1636년(인조 14) 지리산 쌍계사로 들어가 벽암각성에게 입실하고 20여 년간 사사하였는데109), 입실하던 해 사미 백곡이 스승 벽암각성의 뜻을 받들어 「순천 송광사 개창비」의 비문을 신익성에게 부탁하였다.110) 이 비의 건립은 1622년 주지 응호가 벽암각성을 초빙하여 수선사 결사를 개창하였던 보조국사 지눌의 도량을 계승하여 전주에 송광사를 창건하였음을 밝히고 있다.111) 그 후 백곡은 말년인 57세인 1678년(숙종 4) 백암성총이 원 비문을 다시 새겨 1678년(숙종 4) 10월에 순천 「송광사보조국사비(松廣寺普照國師碑)」의 재건립에 참여하였다.112)
백곡은 41세인 1657년(효종 8) 전라도 대둔산 안심사에 머물면서 「안심사사적비명병서」를 지었다. 이에 의하면 안심사를 중창한 수천은 1636년 건립된 「천주부 송광사개창비」에 벽암각성의 문도였으며, 중창자인 선열도 1663년에 건립된 「구례 화엄사벽암각성비」에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벽암의 문도로 완주 송광사 대웅천 중창을 주도하였던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안심사의 중창은 전주 송광사 승려로 벽암각성의 문도이자 백곡의 도반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하겠다. 대둔산 안심사에는 세조 이전의 시기부터 세존의 사리가 봉안되어 왕실의 축원 사원이었다. 백곡의 스승 벽암각성과 그의 스승 부휴선사가 석가 진신사리를 봉안한 남양주 봉인사의 사례를 본받아 백곡처능도 안심사를 중흥하고자 한 듯하다. 진신사리 1개를 사운과 굉혜 두 스님이 앞장을 서서 부도를 세우고 봉안하였다는 것이다.113)
백곡은 1664년(현종 5) (45세) 안심사에서 「안심사사적비문」을 받으러 우의정 김석주에게 부탁하였으며, 비는 그 후인 1759년(영조 35)에 세워졌다. 1658년 안심사에 머물렀던 백곡이 주지 명능(明能)의 뜻을 전하며 부탁하여 우의정 김석주가 안심사의 사적을 찬(撰)하였고, 이것을 100여 년 후에 이조판서를 지냈던 홍계희(洪啓禧, 1703-1771)가 글씨를 썼고, ‘대둔산안심사비(大芚山安心寺碑)’라는 비석 이름은 영의정 유척기(兪拓基, 1691-1767)가 쓰는 등114) 왕실 축원사원으로서의 면모를 알 수 있다(도윤수, 2016). 그 후 백곡이 56세인 1676년(숙종 2) 그의 제자 조영의 요청으로 부여 「임천 향림사 사적비명」을 짓기도 하였다.115) 백곡은 스승 벽암각성이 입적후 44세인 1663년(현종 4) 「화엄사 벽암대사비」116), 그 이듬해 1664년(현종 5) (45세) 「법주사 벽암대사비」의 건립117)에 참여하여 그의 선풍을 진작하고자 하였다.
백곡은 30세인 1646년(인조 24) 구례 화엄사에서 강설하였다. 임진왜란 때 화엄사의 주지였던 설홍(雪泓)대사는 300여 명의 승려를 이끌고 왜군에 대항하다가 전사하였으며, 화엄대선(華嚴大禪) 겸 선교판(禪敎判) 간눌자운(澗訥慈雲)은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화엄사의 전각이 소실되었는데, 인조 때 벽암각성과 그 문도들에 의해 중건이 되었다. 벽암은 1630년에서 1636년 사이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한 금강문, 나한전, 영전, 명부전, 보제루, 천왕문, 적묵당, 일주문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는데, 그의 제자인 백곡이 법회를 개최하여 선풍을 계승 진작하였다.118) 특히 백곡은 33세인 1649년(인조 27) 인조가 승하하자 벽암으로 하여금 화엄사에서 천복도량을 베풀게 하였는데 백곡에게 명하여 소(疏)를 짓게 하였다.119) 1648년(인조 26) 취미수초도 이를 계승하여 법회를 하였으며, 그 후 화엄사의 중창으로 1649년(효종 1)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 숙종대 선종양교대가람(禪宗兩敎大伽藍)으로 승격되면서 법회와 강론이 활발하게 계속되었다. 즉, 1706년(숙종 32)에는 대선사 명곡현안(明谷玄眼)이 선교를 강론하였고, 1708년(숙종 34) 화엄종주 설암추붕이 『대장경』을 강설하였다.
백곡은 41세인 1657년(효종 8) 봄에 정관일선의 문도 임성충언의 수제자 남봉영신과 함께 벽암각성이 주관하는 안심사의 강학회에 참여하였다.120) 그 이듬해인 1680년(숙종 6) (59세) 백곡은 금산사에서 대법회를 5일간 주관하였다(황인규, 2015). 후에 환성지안이 화엄산림법회를 크게 개최하는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황인규, 2008).
Ⅳ. 호법(護法) 불교계 활동
백곡처능은 46세인 1666년(현종 7) 조정에서 남한승통직을 제수받았으나 거절하였으며, 4년 후인 50세인 1670년(현종 11)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제수받고 3개월 만에 사퇴하였다. 1674년(현종 15) 「봉국사신창기(奉國寺新創記)」를 지은 후 ‘겸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兼八道禪敎十六宗都摠攝)’직에 재임하였다. 같은 해 여름, 총섭 사퇴 전 분애신정과 광릉 천주사에서 조우하였다. 『대각등계집』에 의하면 자신이 ‘천리 밖 영남에서 도총섭을 지내노라 십년 동안 숲에서 다 낡은 승복을 입었다’121)고 하여 영남도총섭을 제수받아 10년간 재직하였던 듯하다.
남한산성 축성은 1624년 4월에 시작되어 2년여 후인 1626년 11월에 완성되었는데 많은 승군이 동원되었다.122) 남한산성의 조영과 함께 승군을 동원하고 통솔하는 팔도도총섭 직책이 만들어졌는데, 송월응상이 물망에 올랐다. 이는 임진왜란시 의승군을 지휘해 조정의 인정을 받았던 사명유정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으나 거절하였다.123) 대신 응상의 문도인 허백명조가 맡았으나 무산되었다.124) 그리하여 남한산성 초대 팔도도총섭을 벽암각성이 맡게 되었다.125) 벽암은 명종대에 복립된 선종의 본사 봉은사의 주지와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을 역임하였으며,126) 무주 적상산성의 사고 수호 임무를 주관하는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을 맡기도 했다.127) 벽암은 남한산성 축성의 공적을 인정받아 인조로부터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의 시호와 의발을 하사받았고,128) 잠저 시절의 봉림대군을 평안도 안주에서 만나 화엄사상의 요체를 질의한 일도 있다. 이후 국왕이 된 효종은 1650년(효종 1) 벽암이 주석하고 있던 화엄사를 ‘선종대가람’으로 지정하고 수차례 안부를 묻기도 했다. 벽암의 문도인 회은응준도 이어 1647년 남한산성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었다.129) 그 후 백곡처능이 그 소임을 맡게 되었으나130), 처음의 제안에는 거절하였다가 후에 수용하였으나 3개월만 재직하다가 퇴임하였다. 북한산성 도총섭은 벽암각성의 손제자인 계파성능이 맡았으므로131), 벽암각성계가 남북한산성의 축성에 관여하는 등 불교계를 대표하여 국가적 사업도 주도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황인규, 2016).
백곡이 44세인 1660년(현종 1)에 일반 백성들은 승려가 되는 것을 엄금 당하였으며, 승려가 된 자는 모두 환속시키고 그것을 어기는 자는 죄를 과하였다. 다음 해인 1661년 1월에는 성안의 자수원과 인수원의 비구니원을 헐어 없애버리고 이어서 여승들을 환속시켰으며, 또 봉은사와 자수원에 봉안하였던 역대 왕의 위패를 땅에 묻고 봉은사와 봉선사도 헐어서 승려들을 모두 환속시켜 불교를 사태훼파(沙汰毁破)하려고 하였다.
백곡처능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661년(顯宗 2) 정월에 8,150자 달하는 상소문을 지어 그 부당성을 6개 항목으로 정리하여 올렸다. 불교가 국가를 비보하고 애국 애민의 종교였음을 강변하면서 역대 왕실의 내원당과 외원당을 폐훼하거나 축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였다.
필자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조선 전기에도 불교계의 상소가 있었다(황인규, 2005b; 2011). 즉, 태조대에 양가도승통 상부132)와 흥천사 감주 상총의 상소가 있었고133) 태종대 자초와 성민이 상언을 올렸다.134) 그리고 세조대의 왕사 수미135)와 예종대의 혜각존자 신미가 불교계 전반에 대하여 시정 사항을 요구하면서 상소를 올렸다.136)
조선후기 현종대에 백곡처능이 장문의 상소를 올린 이유는 불교의 이로움을 논하면서 조선중기 이래 본격화된 억불시책, 특히 현종대 척불시책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핵심내용은 성리학적 예제의 확립에 따른 승려의 혁거와 사찰을 대표하는 선교 양종의 본산과 비구니원의 철훼였다. 이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백곡은 승려의 혁거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여말선초 숭유억불 운동과 시책은 조선중기 이후 본격화되었다. 즉, 조선후기 무종단 산중불교시대에 이르러 승려의 공식적 출가 통로는 없어졌으나, 도첩제의 폐지로 승려들의 출가는 계속되어 열 집에 아홉 집이 비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승려의 출가는 계속되었으나, 현종대 척불시책이 강화되자 백곡은 정면에 나서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다(황인규, 2004; 2005b).
그리고 백곡은 선교양종 본산인 봉은사와 봉선사의 혁거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봉선사는 세조의 능침사찰로 지정되고, 봉은사는 연산군 때 견성사(見性寺)로 중창되어 성종의 능침사찰로 지정되어, 이 두 사찰은 왕실의 가장 중요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흥천사와 흥덕사가 이전의 왕실의 능침사찰이었던 것에 비해 봉은사와 봉선사는 당대 왕실의 가장 중요한 능침사찰이었다(황인규, 2011). 특히 봉은사는 봉선사의 전례에 따라 왕패를 받아 왕실의 비호를 받는 사찰로 인식되었다. 이 두 사찰은 ‘승려들의 뿌리가 된다’고 지적되었다.137) 1550년(명종 5) 선교양종이 복립되자 그 이전의 양종의 도회소였던 흥천사와 흥덕사 대신에 봉선사와 봉은사가 불교 본산 사찰이 되었으나 현종 대에 철훼하려고 하자 백곡이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특히 백곡은 한양 도성 비구니 양원의 철폐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국초 이래 도성의 대표적 비구니 도량이었던 정업원은 연산군 대에 폐치되었지만138), 이를 대신하여 1661년(현종 2) 무렵까지 자수원(자수궁)과 인수원(인수궁)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139) 이러한 도성 내의 비구니원 자수궁(원)과 인수궁(원)은 왕비 및 공주 등 왕실녀와 사족의 부녀자들의 출가 및 신행처로 궁궐 내에 있었던 일종의 내원당 내지 내불당이었다.140) 불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는 분위기 속에서도 비구니들은 왕실 불교를 주도하면서 도성 밖의 사찰과도 소통하면서 불교계 수호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현종 대에 이르면서 불교에 대한 탄압은 매우 심해졌으며, 궁궐 내의 자수원과 인수원, 도성내 비구니 도량이 폐치되었다.141) 즉, 인수원과 자수원의 두 비구원의 불상을 철거하고, 사찰을 혁파하여 자수원의 터에 북학(北學)을 설립하였다.142) 그 재목과 기와를 성균관 학사를 수리하는 데에 쓰게 하였으며, 인수원의 자재는 왕실녀의 치료소인 궁궐 밖 질병가(疾病家)를 신축하게 하였다.143) 그리고 40세 이하의 비구니는 환속시켜 결혼하게 하고, 나이가 들어 살아갈 곳이 마땅하지 않은 비구니는 도성 밖 비구니 도량으로 보내거나 환속하게 하였다(황인규, 2011).144)
이때 백곡처능은 전국의 승려를 대표하여 ‘간폐석교소’라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으로 봉선사와 봉은사는 철폐를 면할 수 있었고 도성 내의 마지막 남은 도량들로 지켜질 수 있었다(김용조, 1979).145)
Ⅴ. 나가는 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곡처능은 조선후기 척불시책이 강화되자 이에 저항하기 위해 조정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불교 호법과 불교계 수호를 꾀한 걸출한 고승이다. 그동안 그에 대한 연구는 상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본 연구는 그의 생애와 활동, 스승과 문도, 교유승려, 불교 호법과 불교계 수호에 관한 종합적인 검토를 하고자 하였다.
그의 저술인 『대각등계집』이 있으나 불교관련 기문보다는 시문과 유자의 교유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오히려 유가문집에 관련 시문이 적지 않으며 불교 승려문집에도 시문이 실려 있으나 그의 생애와 호법활동을 체계적으로 살피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그의 생애 및 활동에 관련한 기문은 유자가 지은 2건의 비명이 있으나 간략할 뿐이고 불사 등 불교미술 관련 기문이 소수 전하고 있다.
백곡의 성은 전씨로, 벽암각성의 제자 의현에게 출가하고, 당대의 문인 신익성에게 유가사상을 4년간 사사하였다. 그런 후 벽암에게 입실하여 20여 년간 그의 수제자로서 순천과 전주 송광사를 비롯해 화엄사, 해인사, 법주사 등의 사찰에서 불사를 하면서 보조국사 지눌의 선풍을 현창하고 대둔산 안심사에서 가장 오래 머물면서 불법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며, 말년에 김제 금산사에서 산립법회를 연 후 입적하였다.
백곡은 허응보우와 그에 의해 선발된 청허휴정의 불교수행서 등을 간행 보급하여 불교 수호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특히 스승 벽암의 『석문의상초』 등의 불교 의례집을 간행하여 불교의례를 보급하여 유교계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당시 척불시책이 강화되어 승니의 혁거, 불교 본산이었던 봉은사와 봉선사와 도성내 비구니원 인수원과 자수원의 철훼 시도가 전개되자 장문의 논리정연한 상소를 올려 불교호법과 불교계 수호를 위해 정면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백곡은 그의 스승 벽암과 그의 제자 회은에 이어 남한산성 도총섭으로 선정되었으나, 그의 사제와는 달리 잠시만 응했을 뿐 사의하였다.
백곡은 당시 대표적인 유가의 문인 동양위 신익성과 불교계 고승 벽암각성을 이은 대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그의 문장뿐만 아니라, 당대 유자들과 교유하면서 부휴문파의 수장 벽암의 수제자로서 척불시책이 강화되는 시기에 불교 호법과 불교계 수호를 위해 저항한 고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