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장애에 관한 불교윤리학적 인식과 실천: 『입보리행론(Bodhicaryāvatāra)』을 중심으로

김근배(담준) *
Geun-bae (Dam-jun) Kim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조계종 교육아사리
*The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Ordination Catech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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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May 08, 2019; Revised: Jun 17, 2019; Accepted: Jun 21, 2019

Published Online: Jun 30, 2019

국문초록

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을 불성을 지닌 평등한 존재로 받아들인다. 여기에 장애인이 예외가 될 수 없다.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건강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장애인을 비정상으로 범주화하고, 사회의 주변부적 존재로 규정하거나, 은연중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요구한다. 장애인이 이러한 차별적 인식이나 사회적 환경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면, 우리 사회를 성숙한 시민사회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서 당당한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장애인이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게 하는 공업(共業)적 차원의 물리적 환경의 구축과 함께, 시대적 흐름에 맞는 장애인관의 확립이 요구된다. 불교적 장애인관은 『입보리행론』에서 제시되었던 자타평등법(parātma-samatā)과 자타상환법(parātma-parivartana)에 근거한 보리심 수행법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불교적 수행 혹은 실천을 통해 장애인을 포함한 열악한 환경에 놓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윤리적 감수성은 함양된다. 그리고 그 형성된 성품이 자연스럽게 사회적 실천으로 드러난다. 장애인을 비롯한 이방인,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의 기본적 권리가 존중되고 수용되는 사회가 우리 모두가 바라는 살기 좋은 사회이다.

Abstract

Buddhism accepts all human as equal beings with Buddha-dhātu [佛性]. The disabled cannot be an exception here. Disabled people are “respectable beings” who deserve to lead a decent life equally with non-disabled people. However, our society still requires us to categorize disabled people as abnormal and to define them as outcasts of society or to live as “invisible beings” in a metaphorical way. If a disabled person suffers from this discriminatory perception or social environment, it would be difficult to call our society a mature civil society. To ensure that the disabled can live as a responsible player in our society, it is necessary to establish a view of the disabled that suits the trend of the times, along with the establishment of a physical environment that allows the disabled to live conveniently in their daily lives. The Buddhistic view for impairment can be found in the practice of just based on the Parātma-Samatā [自他平等法] and the Parātmaparivartana [自他相換法] which were presented in the Bodhicitta [菩提心]. Through this Buddhist performance or practice, ethical sensitivity to the socially vulnerable in poor conditions, including the disabled, is fostered. And the character of it naturally manifests as a Collective Karma level social practice. A society where the basic rights of the disabled, the alien, the minority, and the socially disadvantaged are respected and accepted is a life-friendly society we all hope for.

Keywords: 장애(인); 자타평등법; 자타상환법; 공업(共業); 윤리적 진보
Keywords: The Disabled; Parātma-Samatā [自他平等法]; ParthtmaParivartana [自他相換法]; Collective Karma [共業]; Ethical Progress

I. 서론

불교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생명을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적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상호의존적이고 평등한 존재로 이해한다. 인간은 빈부나 출생에 따른 신분에 의한 차이, 인지 능력의 차이, 여기에서 다룰 장애와 비장애의 존재론적 차이에 의해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품격이 높은 출신성분이 아니라, 그가 행하는 윤리적 행위에 의해 드러난다는 경전상의 표현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법정, 2010: 게송 136, 462). 또한, 불교에서는 전생의 업(業, karma)이 아닌 현세의 업에 의해 인간의 삶이 규정된다고 보기 때문에, ‘장애는 전생의 업’에 따른 결과라는 식의 의지적 노력이 배제된 ‘결정론적 혹은 숙명론적 업보설’도 거부한다. 즉, 붓다의 업설은 과거의 업이 아닌 현재의 바른 행위나 수행을 더욱 중요시한다. 우리가 업보나 윤회(인도에서 문헌상의 윤회사상은 우파니샤드 시기에 처음 나타난다.)에 대한 숙명론적 해석을 받아들이게 되면 현재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는 전생에서 찾으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거나, 행위의 자기책임성이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나 구조적 모순을 외면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불교인들은 숙세의 바르지 못한 행위로 인해 현재의 장애의 과보를 그대로 받게 되었다는 생각을 불교의 업설로 받아들인다. 이는 당연히 장애인들을 비롯한 합리적 상식을 지닌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해석일 뿐만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들에게는 부당한 고통을 가중시키는 생각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한 사람의 정체성은 전생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행위[業]를 통해 드러난다는 붓다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장애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바꿔 나가야 한다. 개인의 수행과 불교적 사회적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는 연기적 사고, 혹은 불교의 업은 개인의 업[不共業/別業]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공동의 업[共業, Sādhāraṇa-Karmam]1)까지도 포함한다는 인식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나 잘못된 사회적 제도나 시스템을 바꾸어 나가려는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도 필요하다.

불교는 모든 인간이 잠재적인 불성2)을 지니고 있고, 또 평등하고 본래 청정한 존재라고 주장하지만, 이에 합당할만한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처우개선을 위한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관심과 실천은 여전히 미흡하다.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 수준 역시 오해나 편견(偏見, prejudice)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이런 현실적 상황의 개선을 위한 한 과제로서, 이 글에서는 대승불교의 핵심인 보리심과 보살행에 대해 논하고 있는 산티데바(Śāntideva, 寂天, 687-763)의 『입보리행론(Bodhicaryāvatāra)』3)의 내용을 중심으로, 불교윤리적 관점에서 장애인에 대한 소외와 차별(ableism)을 극복하기 위한 인식론적 전환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아울러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 확대되고, 각 존재가 지닌 고유의 가치가 존중되는 것을 윤리적 진보라고 봤을 때, 과연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해서는 윤리적 진보의 가치가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고자 한다.

Ⅱ. 장애에 대한 동·서양 시선의 변천과정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특정 시대나 사회의 변화나 국가의 상황에 따라 변해왔다. 고대사회에서는 자연환경으로부터 자신의 종족을 보존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국가의 번영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장애인은 어린 시절에 유기되거나, 자연 도태되는 경우가 많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서구 유럽 문명의 원천인 고대 그리스 및 로마와 기독교 문명에 있어 장애와 관련한 인식과 처우는 대단히 낮은 수준이었다. 그 흔적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열등한 부모의 자식들은, 그리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의 자식으로서 불구 상태로 태어난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듯, 밝힐 수 없는 은밀한 곳에 숨겨 둘 걸세(플라톤, 2016: 460c).

유아를 유기할 것이냐 양육할 것이냐는 문제에 관해 말하자면, 장애가 있는 아이의 양육은 법으로 금해야 한다. 그러나 자녀 수가 너무 많아서 행해지는 유기를 사회적 관습이 금한다면 산아제한을 실시해야 한다. 부부가 이런 규정을 어기고 교합하여 아이를 가지면, 태아가 감각과 생명을 갖기 전에 낙태해야 한다(아리스토텔레스, 2009: 1335b19).

위 첫 인용문의 ‘은밀한 곳에 둔다’는 말은 장애를 지닌 영아의 유기(遺棄)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민들로 구성된 일종의 공동체로서 국가를 말할 때, 여기서의 시민이란 보육과 교육의 대상이 되는 남자 아이들을 포함하지만, 장애인을 비롯해 여성, 노예들은 제외된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산아제한을 목적으로 장애아를 비롯한 장애가 없는 영아살해가 용인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전사 중심의 강한 군대를 기반으로 한 스파르타 같은 국가에서는 신체가 기형, 즉 장애로 태어난 영아에 관해서는 경제적인 이유와 상관없이 살해하도록 법적 차원에서 제도화하고 있었다(손광훈, 2013: 45). 서구에서의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은 중세까지도 이어진다. 특히 그 당시에 정신이상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대처했다. 이에 대한 대응이나 치료 역시 악마를 물리치는 주문이나 그 밖의 여러 방법으로 영혼을 고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중세 사람들은 이들을 악마에게 사주(使嗾)를 받거나, 혹은 악마와 계약을 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이단’으로 취급되었고, 이들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죄를 지은 자로 간주되어 처벌을 받았다.

고중세 시대의 서구 장애에 대한 차별이나 배제의 역사는 플라톤 이래 ‘완전’을 지향하는 그들 서구의 인식과 이에 기초한 사회적 담론과 관련이 있다. 비장애와 장애, 정상과 비정상, 완전과 불완전 등의 대립적인 사유체계가 그것이다. 이분법적 사유에 근거한 사회적·차별적 시각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고, 또한 그들이 당연하게 누려야 할 권리가 박탈되는 것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해왔다. 이러한 인식과 행위는 근대에 들어서 장애인에 대한 ‘인도주의적 처리’가 강조되던 시기에도 더욱 강화된다(이동희, 2014: 168-169). 인간 이해에 대한 플라톤적 ‘정상/완전체’과 ‘비정상/불완전체’라는 서구의 이분법적 근본 사유체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서구사회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 및 장애인복지의 이념이 정착되면서 근대 이후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균등한 기본적 인권을 가진 인격체로서 존중하려는 노력과 그와 관련한 운동들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즉, 이전까지 부정되어 왔던 장애아동교육이 개신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19세기 초기에 유럽 각지에 장애인 수용시설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이후에 현대적 의미의 장애인복지는 형성기를 맞게 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선진국들이 정상화(normalization) 원리를 사회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장애인복지의 이념이 정착됨과 아울러 현대적 의미의 장애인복지의 기본적 틀이 마련되면서 의료재활, 직업재활 중심의 장애인 제도가 아울러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관점이 서구와는 본질적으로 상이하다. 우선 장애인에 대한 독립된 명칭이 따로 없었다.4) 전일적(全一的)이고 유기적인 세계관에 근거한 이 문명권의 사유체계, 특히 불교에서는 생명을 개체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주는 연기적(緣起的) 존재로서 이해하기 때문에 장애가 특별하게 차별의 근거가 되지는 않았다. 오늘날과 같이 거의 모든 유형의 장애인이 있었지만, 몸이 불편했더라도 일반인들과 어울려 살았으며, 장애에 대한 편견도 심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처우에 있어 일방적으로 서구는 차별과 억압의 역사인 반면, 동아시아 문명권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으며,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존중받아온 역사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동아시아의 전통과 역사에 있어서도 물론 차별의 사례들이 드러나지만, 장애인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에 있어 서양과 본질적인 측면(사유의 형식)에서 그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특히 우리의 역사에서 장애인은 사회적 약자이면서도 동시에 일반인과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전통사회 속에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동정과 혐오라는 양가적 태도가 공존했지만,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으로 장애인에 대한 구제 사업이 있어 왔고, 조선시대에도 장애인 복지정책에서 장애인들이 그들만의 직업을 가지고 자립하도록 했다.5) 장애와 비장애에 대한 엄격한 구분이 없었던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개인이 지닌 능력이나 장기, 재능으로 판단을 했지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이유로 사람을 홀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조선시대에 있어서 장애인은 몸이 다만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정창권, 2011b).

그렇지만 근대에 접어들면서 장애인은 서서히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배척되기 시작한다. 정부수립 이후 장애인에 대한 기본적 정책은 장애인을 사회로부터 분리해 수용소에 가두어 치료하거나, 따로 모아 교육을 시키는 것처럼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이동희, 2014: 169).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장애인에 관한 정책은 장애인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범주화하는 형태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사회적 접촉의 강화를 통해 장애인을 경제활동 및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기보다는 여전히 세상과 격리하고 고립시키는 접근 방식을 고수한다. 이는 장애 문제에 대한 서구의 이해와 접근이 주로 자신의 경계 밖의 사람들을 타자화(他者化)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져 왔고, 차별과 소외, 배제의 논리 위에 서 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사유의 전통 하에서 장애인은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 비장애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비주체적, 의존적 존재로 규정된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가 허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장애인에 대한 혐오(Ableism)가 표출된다.

근대에 이르러 이와 같이 장애인들의 삶이 위축된 것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본질적으로 문제를 지니고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을 부정적으로 대하기 시작한 사회적 환경 때문이다. ‘정상/비정상’은 사회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나누어지는 것이다. 역사는 주변자들이 스스로의 처지를 직시하고, 주체적으로 만들어낸 힘으로 진보해왔다. 중심으로만 향해있던 시선을 되돌려 자기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이들과 연대할 때 중심/주변, 정상/비정상의 허구는 극복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져야 하고, 예컨대 장애인이 주변에 같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가지 않으면 공생(共生)의 아름다움을 피워낼 수 없다(김찬호, 2014: 94-109). 그리고 현대 사회의 한 나라의 인권의 수준과 윤리적 성숙도는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처우가 어떠한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기회나 권리를 박탈 당하지 않도록 사회가 얼마나 힘쓰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그 사회의 윤리적 수준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현재의 우리 사회는 아래 <표 1>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장애인들이 바라고 원하는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표 1. 장애인 차별 인식 (단위: %)
구분 2005년도 2011년도 2014년도 2017년도
없다 13.3 19.3 27.4 20.1
있다 86.7 80.7 72.6 79.9
100.0 100.0 100.0 100.0

출처: 보건복지부 한국보건사회연구원(2018: 19), 『2017년 장애인실태조사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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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불교의 장애에 대한 인식의 틀

1. 불교 업설(業說)과 장애

『장애복지법』 제2조에서는 장애인에 대해 “장애인이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체적 장애’는 주요 외부 신체 기능의 장애, 내부기관의 장애 등을 말하고, ‘정신적 장애’는 발달장애 또는 정신 질환으로 발생하는 장애를 말한다. 불교에서의 장애의 개념 역시 이런 현대적 의미의 장애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불교적 의미에서는 보다 폭넓은 차원에서의 탐진치(lobha/dosa/moha)와 같은 정신의 부정적 측면, 윤리적 태도의 결여 등의 문제 역시 장애로 보고 있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즉,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말하는 장애에는 해당하지 않더라도 열반에 이르는 데 걸림이 되는 부정적 성향(inclination)이나 부도덕 등도 장애라고 했던 것이다. 이는 ‘한 생각 성내는 데에 백만 가지 장애의 문이 열린다(一念瞋心起 百萬障門開)’(西山, 1988: 125)라고 하는 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불교에서는 이렇듯 사회생활에 부적응을 초래하는 여러 정신적·신체적 문제를 장애로 간주한다. 하지만 마음의 모든 불건전한 요소들의 제거하면서 올바른 성품을 계발하고, 자비를 실천하려는 수행자의 삶을 지향하는 한, 곧 “장애를 없애기 위해 그릇된 길에서 마음을 되잡아 항상 바르고 완벽한 목표에[이르도록] (8-187)6)”(청전스님 역, 2014: 173) 나아가는 한, 장애가 열반에 이르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시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천안제일(天眼第一)의 지혜의 눈을 성취한 아나율(阿那律, anuruddha)과 지적 능력이 떨어지지만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 아라한의 지위까지 오른 주리반특(周理般特, cullapanthaka)과 같은 경전상의 수행자들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구도의 결심을 내보이고자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 각오로 자신의 팔을 단번에 잘라버린 중국 선종의 2조 혜가(慧可)나 나환자로 3조가 된 승찬(僧璨)의 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서는 이처럼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열반에 이른 수행자들에 대한 긍정적 기술이나 장면도 등장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일부 경전에서는 장애에 대한 부정적 언급도 심심찮게 드러난다. 한 예로 전생에 부처님의 법을 비방하거나 부정한 자들이 비록 사람의 몸을 받지만 갖가지 신체적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다는 투의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헤매면서 한량없는 겁을 지나면 그들이 법을 무너뜨린 업의 남은 세력이 다하려 할 때에 아귀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에 태어나나니, 비록 사람이 되었으나 천한 무리 즉 소경이나 벙어리의 집에 태어나고 … 선현아, 그들은 법을 무너뜨린 업을 짓고, 자라게 함이 지극히 깊고 무거운 까닭에 이와 같이 사랑스럽지 못하고, 지독한 고통의 과보를 받나니, 그 종류가 여러 가지 있음은 다 말할 수 없느니라(역경위원회 역, 1992: 252-253).

전생에 악업을 행하고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갖가지 신체적 장애가 생긴다고 말하는 위의 내용은 장애는 과거의 업에 대한 결과라고 하는 숙명론적 수준의 해석으로도 비친다. 그러나 위의 인용이 업과 그에 따른 과보가 그만큼 엄중하다는 의미를 담고는 있지만, 숙명론으로 곧이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전생[과거]의 업이 지금 자신의 존재방식을 결정한다고 받아들이는 한 현재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개인의 어떠한 노력이나 의지도 부정되기 마련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과 그에 따른 윤회(saṁsāra)는 고정적이고 단일한 실체가 불변적으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결과로 이어지고,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 또 다른 결과로 이어지는 이숙(異熟, vipāka)으로서 성립한다. 윤회는 고정 불변의 자아가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부단한 생(生)의 흐름일 뿐이다. 여기에 자기동일성을 지닌 실체적 존재는 성립하지 않는다. 『입보리행론』에서는 이 무상(無常)한 존재의 윤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청전스님 역, 2014: 155).

[이 생의] 내가 ‘다음 생의 고통을 겪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망상은 전도된 견해이다. 이와 같이 죽은 것도 다른 것이고, 태어나는 것 또한 다른 것이다(8-98).

이 게송의 의미는 어떤 고정불변의 자아가 있어서 업을 행하거나 업의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무아와 공성에 대한 강조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이 ‘자아’가 존재한다고 받아들이는 잘못된 견해를 유신견(有身見, Sakkāya Diṭṭhi)이라고 하듯이, 붓다는 업을 행하고 또 업의 과보를 받는 주체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아울러 아래 경문(經文)에서와 같이 과거의 업이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과적 원리는 수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생의 행위에 의해 그 과보를 그대로 받는다는 숙명론적 업설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누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떤 업을 지었건 그 업의 결과를 그대로 경험하게 된다.’라고 한다면 청정범행을 닦음도 없고 바르게 괴로움을 종식시킬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누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떤 형태로 겪어야 할 업을 지었건 그것의 과보를 경험하게 된다.’라고 한다면 청정범행을 닦음도 있고 바르게 괴로움을 종식시킬 기회도 있다(강조는 필자에 의함, 대림스님 역, 2017b: 569-570).

불교에서는 여러 상황이나 조건, 그리고 노력 여하에 따라 업에 대한 과보가 달리 나타난다고 본다. 즉, 인간의 운명은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개인적 노력이나 수행, 행위의 선악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일종의 주체의 의지를 강조한 도덕적 책임주의이다. 붓다는 중생들을 지금 현생에서 바른 행위를 하도록 인도하고자 한다. 현재의 업이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때문에 중생들에게 자신의 노력과 행위에 따라 예상되는 결과를 변화시킬 수 있는 현재의 능동적 행위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잘못된 행위, 즉 악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업장소멸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현세에서 더 이상의 악업을 짓지 않고 개인적 선업을 쌓아가는 수행의 삶이기도 하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수행의 과정을 “몸을 닦고 계를 닦고 마음을 닦고 통찰지를 닦아서 [덕이] 모자라지 않게 되면, 이러한 사람은 약간의 악업을 짓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다 겪게 되고, 다음 생에는 그 과보가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표현한다(대림스님 역, 2017b: 571). 불교의 업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함으로써 온전한 인간평등의 실현을 위한 토대를 갖추고 있다. 이에 따른다면, 불교 경전 속의 여러 장애인 수행자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존재론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장애인을 차별해야 할 근거는 없다. 장애인, 비장애인은 모두 “[몸에] 손발 등 여러 부분이 있지만 온전히 보호해야 할 하나의 몸인 것처럼 세상의 고락 안에 다른 중생이 있지만, 모두 나와 같이 행복을 원하는 것은 똑같기”(8-91) 때문이다(청전스님 역, 2014: 154).

장애에 대한 불교의 업설의 핵심은 물론 장애인 당사자에게는 ‘장애는 전생의 업이다’라는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의 제시와 함께 그들의 삶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복지 차원의 장애인에 대한 자비의 실천에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불교의 자비는 현실의 고통이 어디에서 유래했던 무엇보다 그 고통의 해결을 통해 중생들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주고자 한다. 다르게 말하면 자비는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 모든 유정적(有情的, sentient) 존재의 행복을 바라면서 남의 상처와 고통을 의식하고 기꺼이 거기에 공감하고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와 그 실천에 다름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또 어떤 특수한 경우에서뿐 아니라, 언제나 모든 사람들 상호간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취할 가장 근본적인 태도가 곧 자비이다(박이문, 2017: 507). 그렇다면 장애 문제에 대한 불교 윤리적 입장은 동체자비(同體慈悲)의 정신에 입각해 장애/비장애에 대한 구분 없이 모든 존재들의 삶은 고통을 받고 있거나 받을 가능성을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겠다는 심성에 기반을 둔 일상에서의 실천을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나아가 윤리가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넘어선 층위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적 삶에 근거해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각기 구체적인 윤리적 상황에서 최대, 최고의 지적 노력을 동원하여 그때그때에 가장 옳다고 판단되는 행위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자비심에서 우러나는 실천적 행동으로 옮기는 것뿐이다(박이문, 2017: 532).

2. 『입보리행론(Bodhicaryāvatāra)』에 근거한 장애 문제의 접근

불교의 장애인관은 타인의 아픔과 고통이 곧 나의 고통과 아픔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차별적 존재로 구분하지 않는 인간 평등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평등 정신에 입각한 ‘고통’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 경론이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Bodhicaryāvatāra)』이다. 여기에서는 자타평등법(parātma-samatā)과 자타상환법(parātma-parivartana)으로서의 대승 보살의 보리심(bodhi-citta) 수행과 윤리를 들고 있다. 자타평등법은 우리는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7) 모두가 소중한 존재라는, 즉 자신과 타인은 동등한 존재라는 점을 공평한 태도로 관찰하고 실천하는 수행법이다. 자기와 남이 본질적 차이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타상환법은 공감적 상상력(sympathetic imagination)에 통해 자신과 타자의 입장을 바꾸어 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타의 동일성에 근거하여 다른 존재의 고통이 결국에는 자신의 고통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보리심 수행법은 티벳 전통에서 특히 중요하게 받아 들여져 왔다(Barbra Clayton, 2018: 146). 이러한 공감능력은 보리심 수행의 핵심요소이다. 자타불이(自他不二)로서의 ‘인간의 공감능력’에 대한 분명한 긍정은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이를 구제해 주려는 마음씨를 지니고 있다는 현대 과학에서의 실험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현대 진화심리학의 논의에서는 신생아는 태어난 첫날 다른 신생아의 통증에 반응하여 운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경향은 타고난 것으로 본다(Simner, 1971: 136-150).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러워하는 타인을 보면 그들이 겪는 고통에 연민을 느끼고 그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는 타인의 행동을 보는 것을 통해서 마치 내가 그 행위를 하는 것처럼 활성화(活性化)되는 거울뉴런(Mirror Neuron, 거울신경세포)이 존재한다는 것으로도 설명 가능하다(Rizzolatti and Craighero, 2004: 169-192). 하지만 거울뉴런의 존재와 기능을 통해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 능력이 저절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현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상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마음챙김(mindfulness)이나 보리심의 계발과 같은 종교적 수행이 요구된다. 이 수행을 체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통해8) 자리(svārtha)와 이타(parārtha), 남성/여성, 장애/비장애, 이기주의/이타주의라는 이분법적 경계는 무화된다. 그리고 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유정적 존재를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평정한 마음[捨, upekṣā]으로 대하는 무아(無我)의 윤리적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입보리행론』에서는 이러한 실천과 보리심의 수행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게송으로 표현한다(청전스님 역, 2014: 154-164).

나는 남의 고통을 없애야 한다. 고통이기 때문에 나의 고(苦)와 같다. 나는 남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중생이기 때문에 나의 몸과 같다(8-94).

‘낮은 이’를 ‘나’라고 생각하고 나를 타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식의 분별이 없는 마음으로 시기, 경쟁, 자만에 대하여 수습(修習)해야 한다(8-140).

나를 비롯한 모든 존재는 고통과 행복을 똑같이 느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 자신처럼 타인 또한 보호해야 한다는 샨티데바의 생각은 여러 군데서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산티데바의 게송에는 ‘타인의 입장에 설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함축되어 있다. 이는 자신과 타자, 혹은 인간과 다른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려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이는 자비의 정신이 그 핵심이기 때문에 ‘자비의 윤리(ethics of compassion)’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중생이 잠재적 부처라는 점에서 절대 평등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비의 요체가 된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모습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즉, 장애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려는 의지와 실천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비(행)’일 것이다. 모든 존재는 똑같이 고통과 행복을 경험하기 때문이다(Clayton, 2018: 146). 이러한 자비정신에 근거하여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장애인을 나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존재로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품격 있는 시민사회이다. 그런 사회적 환경의 조성을 위해서는 『입보리행론』에서 제시한 자타평등이나 역할 전환(reversal of roles)/역할치환 학습, 여러 수행의 경험을 통해 장애/비장애 이분법적 구조에 대한 편견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짓는 개인의 업[別業]과 사회적 차원의 공통의 업[共業]은 분리할 수 없는 연기적 관계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불교의, 특히 대승의 업설은 행위의 자기책임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사회적 측면을 환기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Ⅳ. 윤리적 진보와 장애

장애인복지에 대한 인식에 있어 아직도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주로 동정과 보호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장애인을 배려나 후견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여 은연 중에 그들은 주체적인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시각이 강하다. 장애의 사회적 보호관리라는 이러한 견해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시민권의 일원으로 사회적 주체로서 수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객체로 분리시켜 주류사회로부터의 배제와 은폐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이동희, 2014: 166). 이는 모든 장애인에게는 품위 있는 생활을 정상적으로 최대한 누릴 자격이 있다는 장애인 권리에 대한 부정이다. 또한, 이는 자기의 업으로 인한 과보를 자신뿐 아니라, 공동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받게 되며,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행한 선악의 과보를 자신도 공유한다는 공업(共業, Sādhāraṇa-Karmam)으로서의 업설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다(水野弘元, 1954: 113 참조). 불교의 업설에 따르면, 개인의 운명은 개인적 업[不共業]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업[共業]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박경준, 2013: 294). 개인의 행복 역시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 제대로 구축되었을 때 가능하다. 개인과 공동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사회는 연기적 공존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 차원의 업과 공동 차원의 업이 별개가 아님에도, 지금까지 불교의 업설은 자신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신이 직접 받는다는 개인적 차원의 업에 주로 주목해 왔지만 모두에게 공통의 과보를 가져오는 공업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장애의 상당수 원인은 교통사고, 산업재해와 같은 후천적 요인으로 말미암은 결과인 것처럼, 장애를 개인의 업으로만 볼 수 없는 경우는 많다. 개인의 전생의 업 운운하기에 앞서 장애는 누구에게나 일상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문제이다. 우리가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사회적 환경이나 제도를 갖추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이타적인 행위이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곧 “남을 위해 일을 한다 할지라도 오직 남을 위한 기쁨 하나로 하는”(8-109) 행위에 다름 아니다(청전스님 역, 2014: 158). 장애인은 사회 통합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장애인과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공업중생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장애인에 대해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존엄성을 가진 사회구성원, 권리의 주체로서 인정하려는 노력이다. 이는 또 장애인복지 이념으로서 많이 제시되고 있는 정상화(normalization)이기도 하다. 정상화란 장애인이 지역사회와 격리되지 않고 정상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권리로 보장되는 사회 만들기를 의미한다(박광준, 2010: 386). 다시 말해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게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차별과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인간다운 권리를 누리면서 일상의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인간답게 살 권리는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우리나라 사람이든 외국인이든, 장애인이든 아니면 비장애인이든 간에 누구나 동등하게 누려야함은 대한민국 헌법에 엄연히 명시된 내용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34조』의 조문 5)를 보면,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라고 하여 인간다운 삶을 모든 국민의 ‘권리’로 규정하고 있다.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약칭: 장애인차별금지법) 1조의 “이 법은 모든 생활영역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장애를 이유로 차별받은 사람의 권익을 효과적으로 구제함으로써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권 실현을 통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내용과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국민은 국가운영에 필요한 공동의 비용을 조세의 형태로 납부하고(이명원, 2018), 정부는 다양한 정책을 통해 여러 자원을 재분배한다. 국가가 사회보장이나 사회복지의 증진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온정주의적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헌법적 ‘의무’이다. 그 ‘의무’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더 높은 책임의식과 의무의 강제이다. 이는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법으로 보장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려고 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적 정의(justice)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통받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제대로 작동할 때 비로소 정의로운 사회이고 건강한 사회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법률로서 장애인의 권리가 부여되기는 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온전하게 그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결국 장애인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장애인에 대한 지원이나 후견(後見)과 같은 개인적 선업(善業)을 쌓기 위한 노력과 함께 공업차원의 사회제도적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집단적 방식의 실천도 필요하다. 예컨대 지역사회의 힘으로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들에게 식사, 이동, 주거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사회 통합 돌봄[community care]’ 시행이나, 건강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장애인의 특성에 맞는 의료지원을 보다 확대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장애인의 권익 보호 등을 위한 노력과 함께 높은 수준의 윤리적 의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윤리적 의식은 나 자신의 고통과 기쁨만 아니라, 가족의 고통과 기쁨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아가 나, 나의 가족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민족 단위, 다른 모든 유정들에게까지 그 범위가 넓혀질 때 윤리적 의식은 어떤 진보를 이루었다고 생각되며, 더욱 보편성을 띠게 된다. 『입보리행론』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보리심과 보살행에 입각하여 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고통 받는 존재의 내재적 가치와 존엄성을 존중하고,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하겠다는 발원을 실천하고자 하는 자비의 윤리는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처럼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진보적 가치를 지닌 윤리이다. 한 집단의 윤리적 수준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의 친밀도나 유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인격적으로 얼마나 대등하게 대우받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차별이 여전하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윤리적 현실이 성숙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적자생존의 가치관과 장애를 가진 존재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해온 진부한 사회 속에서 살아왔다면, 우리는 이런 잘못된 사회적 환경을 바꿔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적 의미의 수행은 내적인 마음의 질적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업 차원의 일에도 책임감을 느끼고, 원인과 해법을 찾아 나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요청이자 현대적 의미의 수행이고, 윤리는 궁극적으로 실천을 인도해야 한다는 측면에서의 실천윤리이기도 하다.

Ⅴ. 결론

위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서구와 달리 한국 장애인의 역사는 대단히 건강한 전통을 지녀왔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이러한 장애인의 역사는 단절되고,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보호나 치료의 명목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나 배제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장애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복지서비스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다는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장애인을 비정상으로 범주화하고, 정상인(?) 자신의 욕망 혹은 체면유지를 위해 장애인을 사회 주변부적 존재로 규정하거나, 은연 중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요구한다. 우리 사회는 주류의 삶의 영역을 침범하는 이들 존재가 거북하기 때문에 혹은 지역의 이미지가 나빠진다거나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까 하는 염려, 장애인은 위험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거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들을 보인다. 만약 장애인이 차별적 인식과 대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면, 우리 사회를 성숙한 시민사회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정 사회의 도덕적 수준은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 동등하게 인격적으로 존중받으며 사는가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장애인이 예외가 될 수 없다.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서 당당한 주체로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상에서 장애인이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게 하는 공업적 차원의 사회 환경의 개선도 요구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시대적 흐름에 맞는 장애인관의 확립이다. 장애 문제에 대한 불교적 접근으로서 산티데바가 『입보리행론』에서 제시했던 보리심 수행법으로서의 자타평등법과 자타상환법을 우리는 주목해볼 수 있다. 이 수행법은 불교적 황금률(Golden Rule)로서 자리이타적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대승보살의 보리심에 의한 실천이 일반의 사회적 실천과 구분되는 지점은 자신을 성찰하는 선정(禪定)의 과정 혹은 명상적 방식에 근거한 실천이라는 데 있다. 윤리와 관련한 불교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의 공통점과 차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추후의 과제로 미루어두기로 한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자비의 마음과 그 실천을 통해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윤리적 감수성은 자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성된 성품이 자연스럽게 사회적 실천으로 드러난다.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공감능력은 향상되고, 자비는 상황에 맞게 늘 재구성된다. 장애인, 이방인을 비롯한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의 기본적 권리가 존중되고 수용되는 사회가 우리 모두가 바라는 살기 좋은 사회이다.

Notes

1) 공업(Sādhāraṇa-Karma)은 초기불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개념으로,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와 같은 북방 부파들에 의해 제창되었고, 이후 대승 불교권에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초기 불전에서 말하는 업이 다분히 개인적인 업[自業, kammassakatā]을 의미한다면, 대승에서는 개인적 업이 주변에 미치는 파급력, 사회적 측면을 한층 더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불교의 업설에서도 공덕(puñña)을 남들과 나누는 사회적 행위 등도 중요하게 다루기 때문에 업에 대한 이해에 있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2) 여기에서는 인간을 ‘불성을 지닌 존재’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불성은 대승에서만 등장하지 초기 불전에는 나타나지 않는 개념이다. 때문에 초기 불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용어를 굳이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의문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불성 개념은 대승의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심화시키고 확대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승의 불성사상이 나오기 전에도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객으로 온 오염원들에 의해 오염되었다.”(대림스님 역, 2017a: 87)라고 하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이 본래 청정한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심성본정(心性本淨) 사상이 들어있다. 그래서 불성을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무명이 사라진 본래의 청정한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낸다고 보면, 대승의 개념이라 하여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여기에서는 이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3) 『입보리행론』은 7세기 인도의 불교학자 샨띠데바(Śāntideva)의 저술로, 보리심(bodhicitta)에 대해 자세하고 광범위하게 논하고 있다. 이 저술은 산스크리트역·티벳역·한역(漢譯) 등이 현존한다. 한역의 경우, 『보리행경(菩提行經)』(T32)이라는 이름으로 송나라 때 인도의 승려 천식재(天息災)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산스크리트본의 2장(「죄업참회품」)은 내용이 축소되어 있고, 3, 4장(「보리심 전지품」, 「보리심불방일품」)은 아예 빠져 있는 불완전한 번역으로 동아시아권에서는 그리 큰 대중적 관심을 끌지 못했다. 반면에 후기 인도불교, 특히 11세기 이후의 티벳 불교로 눈을 돌리면, 이 논서의 주석서만 130여 가지가 넘는 등 『입보리행론』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입보리행론』이 과거에는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여러 역서들이 출간되면서 지금은 이와 관련된 논의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티벳본을 산스크리트본과 대조해서 원문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청전스님 번역의 『입보리행론』을 주로 참조하였다.

4) ‘장애(disability)’ 혹은 ‘장애인(the disabled)’이란 근대의 자본주의 성립과 더불어 생겨난 개념이다. 현재는 대상으로서의 사람(person)이 앞에 붙는 것이 적절하다고 간주되어 ‘a person with disability’, 즉 ‘장애[불리한 조건]를 지닌 사람’ 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중국에서는 장애인을 잔질자(殘疾者), 독질자(篤疾者), 폐질자(廢疾者) 등으로 불렀고, 이 용어들이 국내 사료에서는 『고려사』에서부터 등장한다.

5) 정창권(2011a)의 연구에 따르면, 장애인이었으면서 그들의 뜻을 편 사례로 척추장애를 안고 있음에도 우의정과 좌의정 등을 지낸 허조, 기형아로 태어났지만 나중에 생육신이 된 권절,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우의정이 된 윤지완, 청각장애를 지녔지만 이조판서와 대제학에까지 오른 이덕수 등을 들면서 조선시대에는 장애인만을 위한 관직이 따로 있었다고 말한다. 이 저서는 고대 삼국에서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조의 말기에 이르기까지 2,000여 년의 한국의 역사, 그리고 문학, 법률, 풍속, 회화, 음악 등에 나타난 장애인 관련 기록을 가능한 한 모두 수집하여 항목별로 정리한, 말 그대로 ‘장애인사 자료집’이라 할 만하다.

6) 여기에 표기된 앞의 번호는 『입보리행론』의 품을, 뒤는 게송번호를 나타낸다. 『입보리행론』의 아래 인용도 이와 같다.

7) 이는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공리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utility)와도 유사한 맥락이다. 공리성의 원리란 행복을 증진시키거나 반대하는 것에 따라서, 각각의 모든 행위를 승인(approve)하거나 부인(disapprove)하는 원리를 뜻한다. Jeremy Bentham(1948: 2) 참조.

8) 바렐라는 이를 ‘윤리적 숙련(ethical expertise)’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자아의 비어있음[無我]’을 깨닫는 수행을 윤리적 훈련을 비롯한 모든 훈련의 핵심적 바탕으로 본다. 이 숙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련자는 수련한다(좋은 나무는 좋은 씨앗을 만든다). 즉, 나쁜 행동을 피하고 이로운 것을 행하고 명상하며 더욱 더 넓게 그의 행위를 확장해간다. 그러나 일상적인 기술의 통달과는 달리 윤리적 숙련의 방편에 도달하면 모든 습관이 제거되고, 수행자는 지혜로부터 직접적이고 자연스럽게 지혜와 자비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프란시스코 J. 바렐라, 2010: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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