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사실과 재현의 관점에서 수인스님 다시보기:

최연희 *
Yeonhee Choi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대전 보현정사 주지, 중앙승가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실천불교학전공 박사과정.
*Ph.D Student, Joong-ang Sangh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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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Nov 04, 2020; Revised: Dec 18, 2020; Accepted: Dec 21, 2020

Published Online: Dec 31, 2020

국문 초록

본 연구는 ‘비구니 관련 자료와 연구의 부족’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실과 재현’의 관점에서 근현대 시기에 활동한 1세대 비구니 스님들의 서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수인스님과 운문사를 주제로 다룬 여러 텍스트에서 관련 서술을 정리하고 검토하였다. 분석결과, 비구니 사찰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불교정화운동 시기에 여러 비구니 스님들의 노력으로 대처승과의 투쟁과 재판을 거쳐 운문사가 청정도량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재현되지 않고 결과만이 서술되어 있었다. 때문에 당시 대처승으로부터 비구니 사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던 수인스님과 대중스님들의 노고가 망각된 채 후세에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대가람의 기초를 마련한 불사도 사실에 부합하게 재현되지 못하고 단편적인 사건들로 나열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불교정화운동 시기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사찰을 되찾고 재건하는 일련의 과정을 주도하였던 수인스님은 ‘종교지도자’로서 기록되지 않고 있다. 운문사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던 당시 운문사 대중스님들과 지도자였던 수인스님의 원력과 성과를 의미 있는 역사로서 바로 세우고 기록하기 위해서 이제는 사실에 의거한 서술로의 수정작업이 필요하다.

Abstract

This paper intended to analyze the recent issues about Buddhist bhikkhuni, which were active in Korea in the 50s and 60s [the first-generation bhikkhuni]. For this purpose, this study reviewed critically the contents about the Buddhist monk Sooin at related books. This study results are so following: First, in the contents, only the result is described simply rather than the process of converting of Unmunsa Temple to Bhikkhuni Temple. Unmunsa Temple became a pure and sacred temple after overcoming struggles and trials with the married Buddhist monks during the period of the Buddhist Purification Movement. Because of this, the hard work of Sooin and temple community who tried to protect Unmunsa Temple from the married Buddhist monks at that time have been forgotten and have not been passed on to next generations. Second, the description regarding the reconstructions of temple buildings and temple works was focused to list as fragmentary events, not reproduced in accordance with the facts. For this reason, Sooin, who led the process of purifying and rebuilding temple from the period of the Buddhist purification movement to the mid-1960s, was not recorded as a “religious leader”. In order to correctly record and evaluate the vows and achievements of temple community and Sooin, who was the leader of the temple community at the time, when the foundation for the development of Unmunsa Temple was been laid, it is now necessary to revise the contents about Buddhist monk Sooin with fact-based content.

Keywords: 운문사; 불교정화운동; 비구니; 역사바로세우기; 수인; 사실; 재현
Keywords: Unmunsa (雲門寺); the Buddhist Purification Movement; Bhikkhuni; Right Modification of History; Sooin (守仁); Factual Contents; Representation

Ⅰ. 서론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비구니는 한국불교를 지탱하는 버팀목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와 고려는 물론이고, 억불숭유의 조선시대에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개항과 해방, 불교정화운동 시기를 거쳐 현대에 이른 오늘날 한국불교의 발전에는 비구니의 노력이 기여한 바가 크다. 하지만 한국 비구니 승가와 비구니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소수의 연구들도 비구니들의 수행과 비구니 강원, 문중에 대한 연구, 근대 이전 역사에 등장하는 비구니에 대한 연구, 교리적 관점에서 비구니 위상에 대한 연구 등에 집중되어 있으며, 비구니에 대한 인물사적·종교지도자적 접근은 미비하다(전해주, 1999; 전호련, 2006; 김영미, 2007; 황인규, 2007, 2008, 2010a, 2010b, 2010c; 김정숙, 2010; 김정자, 2010; 조은수, 2010; 차효록, 2013; 하춘생, 2013; 조승미, 2014; 혜원, 2014; 임홍경, 2017). 특히, 현대 한국불교의 토대를 마련한 비구니에 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긍정적인 사실은 최근 묘엄스님과 광우스님, 명성스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 스님은 한국 비구니 승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비구니 교육에 큰 기여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인영(2012)은 묘엄스님의 생애와 한국 비구니 승단에 대한 연구를 면접조사와 문헌조사방법을 활용하여 분석하였다. 김정자(2013)는 명성스님의 생애와 교육관, 비구니 승단과 관련된 활동을 정리하였다. 김광식(2016)도 운문사의 현대사적 사격을 정리하고, 현재의 사격에 큰 기여를 한 명성스님의 교육내용과 이념을 정리하였다. 광우스님에 대한 학술연구는 없지만 최정희는 광우스님을 인터뷰하여 스님의 삶과 수행을 정리한 대담집(『부처님 법대로 살아라』, 조계종출판사, 2008)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근래까지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고, 비구니 승가 발전에 크게 기여한 스님들에 대한 연구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비구니 관련 연구의 확장과 심화를 위해서는 한국 비구니 승가의 발전을 주도한 스님들의 활동을 가능케 한 선대(先代) 비구니 스님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해방 이후 근현대기(50·60년대) 한국 비구니 승가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스님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비구니 관련 연구는 보다 확장되고 심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연구에서는 묘엄스님 등을 2세대 비구니로, 이 논문에서 분석하려는 수인스님1)을 비롯한 선대 비구니 스님들을 1세대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학술연구의 측면에서 1세대 비구니 스님들에 대한 연구가 쉽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다. 명성스님을 연구한 김정자(2013: 2-3)도 선대의 비구니들은 거의 저술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 제자들 역시 스승의 행장과 교지를 어록으로 남기지 않았다고 연구의 어려움을 언급하였다. 비구니라는 정체성의 제약과 50∼70년의 시대 상황에서 법문집과 글을 남긴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행히 얼마 전부터 한국 비구니 관련 자료들이 발굴·정리되고 있다. 중앙승가대학교의 한국비구니연구소에서 비구니 관련 자료집과 연구서를 출판하고 있다. 『신문기사로 본 한국 근현대 비구니 자료집(1∼6)』(2003), 『신문기사로 본 한국 비구니 자료집(2001-2006) 1∼2』(2007), 『신문기사로 본 한국 비구니 자료집(2007-2012) 1∼3』(2015),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중·하』(2007), 『한국비구니명감』(2007), 『비구니와 여성불교: 학술논문자료집 1∼5』(2003), 『한국 비구니승가의 역사와 활동』(2010) 등이 현재까지 발간되었다. 전국비구니회에서도 2009년에 『한국비구니의 수행과 삶 1∼2』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노력 중에는 개별 사찰 단위에서 진행된 작업도 있다. 대표적인 작업은 운문사(雲門寺)의 역사 정리 작업이다. 운문사는 약 3년 동안 사료(史料)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로 『운문사지(雲門寺誌)』를 2018년에 발간하였다. 『운문사지』의 서문에 언급된 바와 같이, 수많은 사찰의 기록이 정리되지 않고 유실되거나 잊혀가는 상황에서 사찰의 기록을 정리하고, 이를 사지로 발간하는 일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운문사지 간행위원회 편, 2018: 5). 운문사는 1950년대 중반에 비구니 도량이 된 이후 비구니 승가교육의 중심 사찰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또한 그동안 한국불교사에서 소외되고 배제되었던 ‘비구니’가 역사 서술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일을 스스로 ‘재현’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일부 서술 특히 1세대 비구니 관련 서술의 경우는 자료의 부족과 관련 내용을 구술하거나 확인시켜줄 수 있는 연구참여자의 부재로 인해 ‘기록’과 그에 근거한 ‘평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다. 역사 서술로서 재현은 기록 및 기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특정한 과거의 사건에 대해 다양한 관점의 ‘역사 서술’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관련된 사안에 대한 평가가 정당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세대 비구니 수인스님의 경우이다. 수인스님은 근현대기에 포교와 교화 분야에서 적극 활동하였고, 불교정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비구니 역사의 측면에서도 비구니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운문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대처승과의 재판, 10년간의 중창불사 등은 ‘비구니 승가의 토대 구축’이라는 흐름에서 역사적 조명과 평가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비구니 승가에서 수인스님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비구니 사찰로서 운문사 초기 형성과정과 비구니 승가교육의 초기 역사를 생략(혹은 축약)하고, 이후의 역사만을 기술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 연구에서는 ‘사실과 재현’이라는 관점에서 수인스님에 대한 서술 내용을 검토하고, 사실과 재현 사이에서 발견되는 긴장과 그러한 긴장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였다. 또한 사실과 재현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였다.

Ⅱ. 연구방법

이 연구에서는 수인스님 관련 서술 내용을 확인하고, 서술과 관련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문헌조사와 면접조사를 활용하였다. 첫째, 문헌조사는 수인스님 관련 서술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스님의 행장 및 관련 서술이 소개된 텍스트를 검토하였다. 서술을 통해 재현되는 사건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총무원 등에서 관련 문헌도 조사하였다. 둘째, 면접조사는 사실을 확인하고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수인스님과 함께 운문사에서 생활하였던 스님들을 면접하고 당시 상황을 확인하였다. 기억이 가진 한계로 인해 면담 내용 모두를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때문에 여러 구술자들의 구술내용과 기 발표된 논문과 자료들과 교차 검증하였다. 더불어 복수의 구술자들이 확인해주는 내용을 통해 기록에 담겨져 있지 않은 역사의 이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집된 구술 자료는 문헌자료로 확인할 수 없는 기록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문헌조사

사실과 재현 사이의 간격이 있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 본 연구에서는 다양한 자료를 검토하였다. 특히 연구자와 연구 대상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하여 연구의 중립성과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문서화된 자료와 구술 자료를 교차 검증하여 관련 내용을 확인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① 1958년 11월 13일 총무원에서 발행한 ‘주지 임명 내신에 관한 일’과 ② ‘1959년 12월 16일 대구고등법원의 판결문’, ③ 1957년 4월 17일자 ‘나한전건축에 대한 이유서’와 관련 ‘각서’(1957년 5월 30일)을 주로 검토하였고, ④ 1950년대 비구니 정화운동과 비구니 강원 관련 자료도 확인하였다. ‘주지 임명 내신에 관한 일’은 운문사에서 사중회의를 통해 결정한 주지 선출 관련 내용, 금룡스님의 사표 수리와 수인스님의 주지 임명을 총무원에서 결제한다는 총무원의 공식문서이다. ‘1959년 12월 16일 대구고등법원의 판결문’은 정화 이전 대처승 주지 중 한 명이었던 김상영(金尙永)2)이 제기한 소송 ‘운문사 주지 직무 행사 정지 및 사찰 점유 해제 가처분 이의 공소 사건’에 관한 판결문이다. ‘나한전건축에 대한 이유서’와 ‘각서’는 오백전 건축을 위해 감독자(대처승 한영기3))가 임의로 진행한 벌목에 대한 사찰의 입장을 정리하고, 그 후속 조치에 대한 내용이 담긴 문서이다. 이 문건들을 통해 연구자는 검증하려는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확인하거나 추론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수인스님이 오랜 기간 주석하였던 부산 서운암에서 수인스님이 직접 작성한 이력서와 운문사 관련 문서 등도 확보하였고, 연구에 활용하였다.

2. 면접조사

수인스님에 대해 구술할 수 있는 연구참여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면접조사는 구술자들이 주석하고 있는 사찰을 연구자가 방문하여 직접 대면하여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하지만 최근의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 상황에서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행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로 인해 대면 접촉이 제한되어 일부 면담조사는 비대면 전화인터뷰로 진행하였다. 전화를 이용하여 면접조사를 진행한 연구참여자 중에서 일부는 이후 여건이 충족되어 사찰을 직접 방문하여 추가로 대면조사를 진행한 사례도 있었다. 면접조사는 수인스님의 상좌 및 손상좌 5명, 운문사 학인 2명 총 7명을 실시하였다. 모든 면접조사는 연구참여자의 동의를 받아 녹취하였고, 이후에 한글워드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전사하여 분석에 활용하였다(<표 1>).

표 1. 연구참여자 현황
연구참여자 수인스님과의 관계 면접 일시 비고
성○·상○ 상좌·손상좌 2020년 4월 17일·7월 17일 대면(1·2차)
재○* 운문사 학인 2020년 6월 7일 대면
혜○ 손상좌 2020년 6월 27일, 8월 11일 전화(1차), 대면(2차)
묘○ 손상좌 2020년 6월 27일, 8월 11일 전화(1차), 대면(2차)
일○ 손상좌 2020년 7월 9일 대면
자○** 운문사 학인 2020년 7월 18일 전화

* 재○스님과의 면담은 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병실에서 대면하여 진행하였다.

** 자○스님과의 면담은 전화인터뷰로 진행하였으나, 스님과 연구자와의 직접 통화가 어려워서 스님의 상좌가 연구자의 질문을 전달하고 스님의 대답을 연구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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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수인스님과의 기억이 있는 구술자(상좌스님과 손상좌스님, 당시 학인스님)들의 나이가 70대 중후반 2명, 80대 5명으로 인터뷰를 장시간 진행하기 어려웠다. 보통 면담은 1시간 정도 진행되었는데, 연구참여자 중 일부는 면담이 30분을 넘어가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등의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또한 일부는 고령으로 인해 당시의 일 중에서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억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기억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구술하는 것을 주저하기도 하고,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강한 확신을 표하기도 하였다.

Ⅲ. 수인스님 관련 서술 내용

이 장에서는 수인스님과 관련된 서술 내용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재현들은 당시 부산·경남지역에서 활동했던 금룡스님과 연관되어 있으며, 일부 내용은 충돌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장에서는 기존 책과 글들에서 수인스님과 금룡스님에 대한 서술들을 간략하게 검토하고 정리하였다.

1. 운문사와 1950·60년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위치한 운문사는 560년에 창건한 고찰이다. 608년 원광국사의 제1차 중창 이후 9차에 이르는 중창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과 같은 대가람의 사격(寺格)을 갖추었다. 운문사의 사격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가람을 구성하는 전각의 숫자보다는 운문사가 실질적인 비구니 승가교육의 최대도량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구니 교육체계가 갖추어지기 이전인 1950년대 말부터 비구니 전문강원을 개설하여 후학들을 양성하여 오늘날 비구니 승가교육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이처럼 중차대한 일들이 한국불교와 종단이 아직 체계를 갖추기 이전인 불교정화운동 시기, 즉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 중반까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운문사에서는 비구니들의 원력으로 불교정화운동의 혼란함을 극복하고, 비구니 총림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하였다. 대처승들과의 투쟁을 통해 비구니 사찰로 전환하였고, 비구니 전문강원을 개설하였고,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전각을 수리·신축하는 등의 불사도 진행하였다. 이처럼 지역 비구니들과 학인들과 함께 불사를 원만하게 진행한 비구니 지도자가 있었음에도 현재 관련 기록들에서 이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2. 서술 내용
1) 『깨달음의 꽃』(1권 1998; 2권 2001)

해방 직후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던 금룡스님과 수인스님은 비구니계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한 고승이다. 때문에 비구니 스님의 행장을 주제로 하는 책들에는 두 스님이 함께 기술되어 있다. 『깨달음의 꽃』은 하춘생이 불교계 언론 기자 활동을 하면서 기획기사로 작성했던 글들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 비구니의 행장을 정리한 초기 저작이란 의미가 있다. 인터뷰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작성하였다.

금룡스님 행장에는 운문사 초대 주지를 역임했다는 내용과 강원을 개설하였다는 내용이 짧게 기술되어 있다. 반면에 수인스님 행장에는 스님이 당시 다 허물어져 가는 10여 동의 전각이며 심지어는 굴뚝까지도 어느 한 곳 온전한 데가 없었던 운문사를 오늘날 비구니 제일총림으로 새롭게 일으켜 세웠으며, 강원 개설과 기와불사, 상수도 공사 등 주지로서 이룬 성과도 비교적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주지 소임과 관련되어서는 “1955년 8월 15일부터 1966년 12월 30일까지 운문사 주지직을 3만기 역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1대부터 3대까지 역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 (금룡)스님은 운문사 초대주지를 비롯하여 서울 개운사·부산 소림사 등 제방에 주석하면서 선교겸전(禪敎兼全) 수행에 힘쓰는 한편 대중 애호에도 노고를 아까지 않았다(1권, 188-189).

  2. (금룡스님) 운문사 주지로 재직하고 있을 때에는 통도사 강주 오해련스님을 모시고 강당을 개설하니(1권, 189)

  3. 당시 다 허물어져 가는 10여 동의 전각이며 심지어는 굴뚝까지도 어느 한 곳 온전한 데가 없었던 운문사를 오늘날 비구니 제일총림으로 새롭게 일으켜 세운 그 비구니는 성월당 유수인 스님이었다. 스님은 1955년부터 1966년까지 주지직을 수행하는 동안 절 운영의 책임자로서 소명을 다하는 등 10여 년 동안 운문사의 이력을 드높이는 당간지주가 되었다. 강원개설은 물론 각 전각의 불상 개금과 기와불사를 비롯해 원광(圓光)·보양(寶壤)·원응(圓應) 세 국사의 비석과 비각을 세우고 상수도 공사 등 수많은 불사를 일궈낸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2권, 79).

  4. (수인스님은) 1955년 8월 15일부터 1966년 12월 30일까지 운문사 주지직을 3만기 역임하는 동안 소작인들에게 상환되어 있던 절 소유의 전답 120여 마지기를 환수하고, 당시까지만 해도 온전하게 해결되지 않았던 대처승과의 대립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2권, 83).

2) 『한국비구니수행담록』(상권 2007a)

비구니 관련 역사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10여 년 이상 지속한 한국비구니연구소에서 편찬한 『한국비구니수행담록』에도 수인스님과 금룡스님이 모두 실려 있다. 수인스님은 운문사 주지직을 초대에서부터 3대까지, 1955년부터 1966년까지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운문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과정도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금룡스님의 경우는 출가이력에 연도 표기 없이 ‘운문사 주지 역임’이라고만 기술되어 있으며, 주지 소임은 불교정화운동을 추진해온 실무 중에서 주지로 임명받게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1. 수인스님 출가이력: 1955-1966 운문사 비구니 초대 주지와 2, 3대 주지 역임(112)

  2. 수인스님은 정화 이후 팔공산 동화사 비구니 총림에서 운문사로 옮겨오면서 소임을 맡았는데, 대처승이 휩쓸고 간 운문사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1955년 스님은 운문사 주지직을 맡아 직접 후학의 도제 양성을 위해 강원 교육 체제를 신설하면서 각종 불사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대처승의 모함과 소송 제기로 법정에 세 번이나 서게 되었다(114).

  3. 금룡스님 출가이력: 운문사 주지 역임(117)

  4. (금룡스님은) 운문사 초대주지를 비롯하여 서울 개운사 주지 등 대중외호에도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118-119).

  5. (금룡스님은) 정화 이후 한국불교 정화를 추진해온 실무 중에서 대찰은 40세 이상으로 십하안거 이상과 대교과를 졸업한 동등자격자로서 운문사 초대주지로 임명받게 되었다. 주지 소임과 함께 스님은 초대 강백으로서 정화 이후 현대식 비구니강원을 처음으로 설립하는데, 통도사 강주로 계시던 오혜륜 스님을 모시고 강당을 개설하였다(120).

3)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2권 2009)

전국비구니회에서 2009년에 발간한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 2권에도 수인스님과 금룡스님 모두 소개되어 있다. 금룡스님의 경우에는 초대 주지 소임을 맡았고, 비구니 강당을 설립했다는 두 가지 내용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수인스님 행장에는 주지 임명 과정과 불사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수인스님을 다룬 장의 제목은 「운문사 초대 주지 성월당 수인 스님」이며, 1955년 8월 15일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운문사 주지로 임명하는 임명장이 하달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1. (금룡) 스님은 정화 이후 초대 운문사 주지 소임을 맡았고, 그 소임의 첫걸음이 통도사 혜륜 스님을 강주로 모셔 비구니 강당을 설립한 것이다(26).

  2. (수인스님에 대한)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져 경상도와 충청도, 나아가 서울에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1955년 8월 15일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수인 스님을 청도 운문사 주지로 임명하는 임명장이 하달되었다. 1950년대 초반부터 몰아닥친 비구와 대처의 갈등은 운문사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다행히 광복 후 최초의 운문사 주지4)로 수인 스님이 임명됨으로써 운문사는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자리 잡아갔다. 이처럼 종단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수인 스님의 포교와 불사의 원력은 끝이 없었다. 서운암 근처의 영주암 주지를 겸직하여 3년의 소임을 여일하게 살고, 범어사 주지를 역임한 조정관 스님께 무위 양도, 또 다른 포교의 당간을 세웠다. 수인 스님은 세수 58세(1955)에 운문사 초대 주지가 된 뒤 4년씩 연이어 3회를 근속하였다. 오늘날 운문사가 한국불교 최대의 비구니 총림으로 자리 잡게 되는 그 시작이 곧 수인 스님의 수행력과 땀에 있었던 것이다(155-156).

  3. 전 주지였던 대처승 쪽에서 사찰 소유권을 빼앗으려는 소송을 벌였다. 이 소송은 대처승 쪽의 항소로 대법원까지 갔지만, 결국 불법(佛法)과 세법(世法) 모두에서 완전히 승소함으로써 운문사는 명실상부한 비구니 수행도량이 되었다. (수인)스님은 운문사를 지키기 위해 법정에 선 것만도 여러 번이었다(157).

  4. 운문사 주지 진산식도 치르지 못한 채 소유권 문제로 2년 여 간 재판에 매달리다 보니 정작 승소 판결을 받았을 때는 사찰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157).

  5. 운문사 주지를 한 만기 살고 나서 마무리하지 못한 불사와 사원정리를 위해 두 번째로 주지 소임을 임명받았다(160).

  6. 수인 스님은 1955년 8월 15일부터 1966년 12월 30일까지 만 12년간 운문사 주지 소임을 사는 동안, 당우와 전각 정비는 물론 불보살 개금 등 사찰 불사를 성취하였다. 나아가 운문사에 비구니총림을 세워 비구니 수행도량의 면모를 새롭게 일궜다(161).

4) 『운문사』(2011)

대한불교진흥원에서 2011년 발간한 『운문사』는 앞에서 정리한 책들과 달리 스님들의 행장이 아니라 사찰 운문사에 대해 정리한 자료이다. 이 책에서는 ‘초대·2대 금룡스님 / 3대 수인스님’으로 정리하였다. 금룡스님이 2대 주지까지 역임하였다는 기록은 이 책에서만 발견되는 내용이다. 1977년에 발간된 『운문사지』(아세아문화사)에 초대 금룡스님, 2·3대 수인스님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그 후 발표된 금룡스님 행장들에도 스님은 초대 주지만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 (1955년) 운문사가 비구니 사찰이 되어 월광 금룡(금룡)스님이 초대 주지로 임명되었다(66-67).

  2. 운문사 역대 주지/1·2대 주지 금룡 1955-1962/3대 수인 1962-1966(262)

운문사에서는 사찰의 1,500여 년 역사를 정리·기록한 『운문사지』(전 2권)를 2018년 간행하였다. 이 사지는 2015년에 작업을 시작하여 3년의 작업을 거쳤고, 사찰의 창건부터 근현대 비구니 교육도량의 역사까지 담고 있다. 『운문사지』의 역사 서술은 사찰의 공인 기록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사지에서 확인한 내용을 사실(진실)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엄중함을 인식하고 운문사지발간위원회는 『운문사지』의 발간을 위해 사적 자료들과 역사적 기록들을 집대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운문사지』에는 수인스님과 금룡스님에 대한 기존 서술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설명과 그러한 서술 내용을 어떻게 검증하였는지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무런 설명 없이 사지에는 관련 내용들을 정리하고 있다. 특히, 주지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금룡스님을 비구니 강원 개설과 제8차 중창불사의 주체로 기록하고 있다. 수인스님은 1958년 운문사 주지로 부임하였고, 당시 금룡스님과 함께 강원 교육과 불사에 전념하였으며, 그러던 중 대처측과의 재판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가와 관련된 부분에서도 앞서 살펴본 글들에서 금룡스님이 초대 주지로서 행한 일은 비구니 강원 개설이 유일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운문사지』에는 오백전 건축을 비롯한 제8차 중창불사를 이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수인스님의 업적으로는 ‘강원 교육 체계를 신설하고, 각종 불사에 전념했다’고 짧게 기술되어 있다. 이는 수인스님의 행장에 기록된 내용, 즉 운문사 중창불사를 이끌었고, 토지 문제도 해결하여 강원 운영을 위한 재정문제도 해결하였다는 내용과 많은 부분이 다르다.

  1. 1955년 비구니 사찰이 된 운문사의 초대 주지로 금룡 스님이 임명되었다. 당시 두터운 명성과 덕망에 힘입어 주지로 부임한 금룡 스님은 1957년 오백나한전을 건축하고, 오백나한 개분불사와 비로전의 비로자나불 개금불사를 시행했다. 이를 통해 해방과 불교 정화 시기를 흐르는 동안 흐트러졌던 도량을 일신하는 제8차 중창을 이끌었다. 또한 1958년에는 전문 강원을 개설하고 통도사 강주인 오해련 스님을 강주로 모셨다. 스님은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아 체계적인 경전교육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고자 비구니 전문 강원인 ‘운문승가학원’을 설립한 것이다(70).

  2. 월광금룡-초대 주지. 1954년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난 후 운문사가 비구니 전문 강원 교육의 중심 도량으로 발전하는 초석을 마련한 인물은 초대 주지였던 월광금룡스님이다(116).

  3. (금룡스님은) 교단 정화운동 이후 한국 불교 정화를 추진해온 능력을 인정받아 1954년 말 비구니 사찰로 변모한 운문사에 초대 주지로 부임했다. (중략) 스님은 운문사 주지로 재직하면서 먼저 경전 교육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대적인 안목으로 전하고자 비구니 강원을 설립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체계적인 강원 교육을 바탕으로 올바른 불교 정신을 정립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1958년 통도사 강주였던 오해련 스님을 모시고 비구니 전문 강원인 ‘운문사 강원’을 설립했다. (중략) 물론 재임 중에 운문사의 제8차 중창을 꾀한 사실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119).

  4. 성월수인 2∼3대 주지. 1958년 운문사 주지로 부임한 스님은 정금룡 스님을 모시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강원 교육 체계를 신설하면서 각종 불사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한 대처승의 모함과 소송에 휘말려 세 번이나 법정에 섰는데, 마지막 재판 때는 승소한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합장한 채로 관음 주력 삼매에 들었다고 한다(122).

6) 운문사 홈페이지(www.unmunsa.or.kr)

앞에서 정리한 『운문사지』와 함께 운문사 홈페이지는 사찰에서 인정한 공식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매체이다. 홈페이지(운문사 소개 - 운문사 역사 - 천년 그리고 지금 - 근현대의 운문사)에는 『운문사지』에서와 같이 초대 주지 금룡스님, 2·3대 주지 수인스님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1950·60년대 운문사의 역사에 대해서는 ‘1950년대 교단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룡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8차 보수·중창하였다.’라고 약술하고 있다.

  1. 1950년대 교단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룡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8차 보수·중창하였다. 이후 2·3대 유수인, 4대 배묘전, 5대 이태구, 6대 안혜운, 7대 위혜안 스님을 거쳐 8대부터 12대까지(1977-1998) 전명성 스님이 운문사 주지와 학장을 겸임하면서 제9차 중창불사를 이룩, 대웅보전과 요사 등 29동을 신축하고, 만세루 등 기타 전각들을 중수하는 등 명실공히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Ⅳ. 수인스님 관련 서술 내용 분석 및 논의

앞장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수인스님 관련 서술 내용은 자료에 따라 상이하다. 운문사 초대 주지 역임 여부, 운문사 주지 재임기간 중 업적, 운문사 주지로서의 평가 등에서 차이가 발견된다. 특히 『운문사지』의 서술 내용을 통해 재현되는 수인스님은 ‘별다른 업적 없는 2·3대 주지’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금룡스님의 서술 내용과 연관되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 장에서는 수인스님 관련 서술 내용을 분석하고 논의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우선 수인스님과 금룡스님 관련 서술 내용을 정리하였다(<표 2> 참고). 그 후 『운문사지』를 중심으로 관련 내용을 분석하고, ① 운문사 초대 비구니 주지, ② 오백전 불사, ③ 제8차 중창불사 주체, ④ 운문사의 동화사 대체 시기, ⑤ 운문사 초기 강사스님을 주로 논의하였다.

표 2. 수인스님과 금룡스님 관련 서술 내용 정리
번호 연도 자료 제목 법명 주지 업적
1 1998 깨달음의 꽃 금룡스님 초대 강원 개설
수인스님 1·2·3대 전문 강원 개설, 중창불사
2 2007 한국비구니 수행담록 금룡스님 초대 강원 개설
수인스님 1·2·3대 전문 강원 개설, 중창불사
3 2009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 (2) 금룡스님 초대 강원 개설
수인스님 1·2·3대 전문 강원 개설, 중창불사
4 2011 운문사 금룡스님 1·2대 강원 개설, 중창불사
수인스님 3대 -
5 2018 운문사지 금룡스님 초대 전문 강원 개설, 중창불사
수인스님 2·3대 강원 교육 체계 신설, 각종 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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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문사 초대 비구니 주지 관련
1) 불교정화운동 중 비공식적 임명

한국불교의 정화를 위해 1955년 8월 12일과 13일 이틀간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승려대회에서 종회의원 56명과 중앙간부를 선출하였고, 종헌수정안 등이 통과되었다. 각도 종무원 간부와 전국 623개 사찰 주지 인선도 이 승려대회에서 선임하였다. 특히 각처의 사찰 주지의 부임이 시급한 문제로 논의되었다(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편, 2015: 205). 당시 법률에 의하면 사찰 주지 임명에는 문교부장관의 허가가 필요하였다. 「문화 제1879호」는 이를 보여주는 사료이다. 「문화 제1879호」에는 ‘단기4288년 8월 15일자로 신청한 사찰주지 임명의 건 별지와 같이 여히 인가함.’이라는 전문(全文)과 함께 문교부에서 인가한 19개 사찰의 이름, 주지 성명, 주지 법명, 주지 성별, 법납, 안거 수, 법계, 주지스님의 재적 사찰명이 정리되어 있다. 일례로 성문스님은 1955년 8월 12일 또는 13일 중에 동화사 주지로 임명되었고, 8월 15일자로 주지 임명이 신청되었고, 8월 24일에 문교부 인가를 받았다(“사찰정화대책위원회 구성과 승려대회 3.” <불교신문> 2002.2.15.).

하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공식 절차를 밟지 못하고 주지 소임을 맡았다. 1955년 8월 12∼13일에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623개 사찰의 주지를 총무원에서 임명했음에도 21개 사찰의 주지만을 인가 신청하였고, 문교부는 이중에서 19개 사찰의 주지만을 인가하였다. 결국 604개 사찰의 주지는 정부의 인가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주지로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불교정화운동 시기에 사찰의 주지 소임 수행 여부는 개별 사찰의 정화 상황에 따라 결정되었다. 동화사처럼 정화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 주지 직무를 수행하였지만, 그렇지 않고 대처승과의 갈등이 지속된다면 그렇지 못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당시 개별 사찰의 정화는 온전히 해당 사찰의 정화를 담당한 비구/비구니들의 역량에 의해 좌우되었다. 결국 당시의 공식적인 주지 임명 절차와 무관하게 일선 사찰의 주지 임명과 부임은 전국승려대회에서 임명되고, 해당 사찰에서 정화운동을 전개하고, 대처승으로부터 ‘사찰 접수’를 하는 순서로 전개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러한 역사적 여건을 고려하면 대다수 지역 사찰의 주지 소임은 공식적인·문서화된 임명절차를 밟기보다는 비공식적으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운문사 초대 비구니 주지도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와 연관되어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5)

2) 당사자 간의 합의와 사중회의를 통한 소임 결정

불교정화운동 중 운문사가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첫 번째 비구니 주지에 대해 두 가지 서술, 즉 금룡(金龍)스님6)이라는 주장과 수인(守仁)스님7)이라는 두 가지 서술이 존재한다. 이 문제는 비교적 쉽게 정리할 수 있다. 연구자가 검토한 여러 자료들8)을 종합하면 행정적 관점에서 초대 주지는 금룡스님이며, 수인스님은 총무였다. 수인스님이 1973년에 직접 작성한 이력서에도 1955년 운문사 총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운문사 초대 주지의 선임 과정은 불교정화운동 및 비구니 승가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선, 검토할 지점은 초대 주지인 금룡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발령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지 임명 내신에 관한 일’에는 “귀하의 내신서에 나타난 정금룡사를 운문사 주지로 발령한 사실이 없음으로 이 분은 귀도에서 위촉하신 운문사 관리인으로 사료되오니 귀도에서 사표수리와 함께 면임 처리 하시기 바라오며”라고 기록되어 총무원을 통한 공식적인 발령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9) 때문에 주지 금룡으로 기록된 운문사 서류들과 함께 초대 주지란이 빈칸으로 남겨져 있는 총무원 서류도 존재한다.

또한 초대 주지였던 금룡스님은 일반적으로 주지 임기라고 생각하는 4년을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 주지 소임을 내려놓았고, 자필이력서에 따르면 당시 총무였던 수인스님은 1958년 2월 10일 주지로 피명(被命)되었다. 그리고 1958년 11월 13일에 총무원에서 공식적으로 임명을 받고 운문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주지 소임 결정 및 사의 표명 등이 당시 사찰의 문화를 고려하면 사중회의와 당사자 사이의 합의를 통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신서’에서도 1958년 2월 사중회의를 통해 금룡스님의 사의를 수리하고 수인스님을 주지로 선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구술에 의하면 당사자 간의 합의가 있었다.

[부산] 소림사에 있던 스님하고, 노스님[수인스님]하고 둘이 친군데. 친구끼리, 둘이가, 살면서, 형님이 주지하소. 이렇게 하니까(상○).

당신이 주지하고 형님이 주지 먼저 하소(성○).

자기 도반이래. 금룡스님이 도반이래 가지고. 그래가지고. 그냥 스님이 그러면 그 주지를 해라(혜○).

금룡스님이 ‘너 주지해라. 나 갈란다,’ 소림사 간다고 하면서, 그래 간다고 하셨다고(상○).

도반스님이니까. ‘당신하소. 주지 당신하소. 나는 절이 있어서,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 못하겠다.’ 당신이 하라(성○).

구술자들은 금룡스님과 수인스님이 서로 협의하여 소임을 결정하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술 내용은 수인스님 행장에 기록된 내용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확인해준다.10)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① 수인스님은 정화 당시 구두(口頭)로 주지 발령을 받았고, ② 운문사로 들어오면서 도반이었던 금룡스님과 협의를 통해 금룡스님은 주지, 수인스님은 총무 소임을 맡았고, ③ 금룡스님은 주지 소임을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놓았다. 이후 수인스님은 사찰 관리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비구니 전문 강원도 개설하는 등의 업무를 실행하였다. 1988년에 수인스님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이를 기사화한 운문회보에는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운문사도 예외는 아니었던터라 정화되어 처음 초대 주지스님으로 금용 노스님이 들어오시고 노스님은 총무직을 맡으셨다 한다. 직책으로는 총무였지만 실무로는 전체적인 운영을 거의 도맡아서 하시는 형편이셨다. 그러다가 일 년 후엔 주지직을 맡으시면서 직접적으로 후학의 도제양성을 위해 강원교육체계를 시설하시면서 각종 불사에 전념하였다(“그대로 천진불 서운암 수인 노스님.” <운문회보> 제23호(1988.1.25.), 한국비구니연구소 편(2003), p. 295에서 재인용).

주지 선임 과정과 시기가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대체적인 역사적 흐름 및 연구참여자들의 구술 내용과 일치한다.

2. 오백전 불사 관련

운문사가 창건 이래 나한신앙의 중심도량으로 발전되어 왔음을 고려하면, 오백전은 매우 중요한 전각이라 할 수 있다. 오백전은 원광국사(圓光, 542-640)가 창건한 이래 중창과 중수를 거듭하였고(박순천, 2016: 164, 177), 제8차 중창불사 중에서도 앞선 시기에 진행된 불사이다. 『운문사지』를 비롯한 여러 글에 현재의 오백전은 금룡스님이 1957년에 건축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운문사지 간행위원회 편, 2018: 70; 박순천, 2016: 177). 하지만 이는 오백전의 불사 과정을 고려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기술내용이다. 현재의 오백전은 여러 차례의 불사를 걸쳐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수인스님이 작성한 「운문사 역사 불사한 기록기」에는 오백전 불사 내역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過去法堂[오백전]은 어느 時機에 없어졌고 佛像은 大雄殿 內에 奉安되어 見者로 遺感이러니 釜山信者 百餘名이 共同發起하여 西紀 一九五八年 戊戌春에 新建하고 一九六一年 辛丑春에 現住持 兪守仁 主動으로 丹靑佛事하고 一九六五年 乙巳에 改金佛事까지 圓滿成就하다.

기록을 검토하면 1958년 신축불사, 1961년 단청불사, 1965년 개금불사를 통해 오백전 불사는 마무리되었다. 주지 재임 기간을 고려하면 오백전 불사의 실질적인 주체는 수인스님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벌목사건이 있었던 1957년에 건축불사가 마무리되었다고 보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오백전 건축불사는 수인스님이 주도하였다고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오백전 건축과 관련되어 주목되는 점은 오백전 건축 과정에서 무단벌목으로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내용이 기록된 ‘나한전건축에 대한 이유서’와 ‘각서’를 통해 당시 주지의 잦은 부재로 인해 행정상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나한전건축에 대한 이유서’에 기록된 “본인이 있는 소림사로 찾아와서”, “본인이 신병치료를 위하여 부산에 가는데”라는 문구로 보아, 금룡스님은 운문사보다는 부산 소림사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구술자들도 금룡스님이 운문사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주지 재임 시에도 부산에 있는 사찰에 더 오래 머물렀다고 확인하였다.11) 병환으로 의사전달에 조금은 어려움이 있었던 재○스님도 뚜렷하게, 당신이 운문사 학인으로 있던 시절에 금룡스님은 사찰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과 나한전불사를 했었고, 수인스님을 주지스님이라 칭하였다는 내용을 언급하였다.

[금룡스님이] 7개월인가, 그렇게 살았다. …… 말씀만 주지 했지. 일이고 머고 총무고 머 그런 거 …… 소림사만 왔다 갔다 하셨어요(성○; 1차).

운문사로 주지를 하러 가셨어. 구두로 당신은 총무하고 당신은 주지하소 그리 되어가지고. 그래 석달도 안 계셨어요. 용노스님은(성○; 2차).

금룡스님은 두 달 뿐이 운문사 안 머물러 있었어. …… (수인노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였어요?) 응 두 달만 머물고 그리고 이제 범일동에 있는 무슨 (소림사?) 소림사를 딱 가셨대. 두 달 딱 머물다가(혜○).

[금룡스님] 사찰에 없었다(재○).

금룡스님은 외부 법문 일정도 많았다. 금룡스님은 1948년부터 1957년까지 10년 동안 매년 15일간 부산 소림사에서 하루 두 차례 산림법회를 진행하였다. 부산 소림사 이외의 많은 사찰에서도 법문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스님은 “험한 산길도 천리 뱃길도 마다 않으시고 행하신 법문행각은 1년에 평균 석 달은 법화경이나 화엄경 산림을”하였다(김응철, 2007: 479-480; “비구니 최초 화엄법사 금룡법사의 행장.” <운문회보> 제8호(1984.4.5.)).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금룡스님은 운문사에서 주지로서 실질적인 역할을 하기 보다는 명의상 주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3. 제8차 중창불사 주체 관련

앞에서 정리한 바에 의하면 『운문사지』를 제외한 나머지 자료들에는 비구니 강원 개설은 금룡스님, 제8차 중창불사는 수인스님의 업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유일하게 『운문사지』에서만 금룡스님이 “도량을 일신하는 제8차 중창을 이끌었다”고 서술하고 있다(운문사지 간행위원회 편, 2018: 70). 『운문사지』에 서술된 제8차 중창불사 관련 내용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제8차 중창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운문사지』의 목차 ‘제2장 창건과 중창의 역사’에는 ‘제8차 중창’이라는 항목은 없지만, 1950년대 비구니 사찰로의 전환 이후의 불사를 ‘해방과 정화 시기를 지나는 동안 흐트러졌던 도량을 일신한 제8차 중창’으로 설명하고 있다(운문사지 간행위원회 편, 2018: 70). 이를 기초로 정의하면, 제8차 중창불사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폐해진 도량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사찰로 전환된 이후 새롭게 정비하고 비구니 승가교육의 토대를 마련한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실시된 10여 년간의 불사’이다. 구체적으로는 비구니 전문강원 개설, 오백전 관련 불사, 비로전의 비로자나불 개금불사, 상하수도 공사, 운문사 토지 환수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정의와 불사 내역을 고려하면, 제8차 중창불사는 수인스님이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수인스님은 총무였던 시절부터 사찰의 살림과 운영을 총괄하였고, 1958년 2월 빠르면 1957년 가을부터 실질적인 주지로서 사찰 정비에 힘을 쏟았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 결실이 대처승측과의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1959년에도 1955년 전국승려대회의 정당성을 둘러싼 법적 다툼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전국적으로 70건 이상의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12)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사찰을 불법적으로 침탈하였고, 주지를 참칭하고, 사찰 재산을 불법 매각한다’는 신청인(대처측)의 주장에 대해 대구고등법원 재판부는 수인스님의 불사를 근거로 이들의 주장이 부당하다고 판결하였다. ‘판결문’에는 수인스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被申請人[수인스님]은 淸淨比丘로서 物慾을 超脫한 受戒僧侶인지라 本件雲門寺의 住持로 任命邇來 비록 短期間이였으나 帶妻僧在職時의 負債計金 4,999,500圜을 償還하였고 房舍修理 및 改築各佛像等의 塗金塗粉 및 造成을 하였고 花草 및 林木盜伐을 防止하는 等 寺刹의 保存에 盡力하여 왔으며 信徒도 從來의 數倍로 增加하고 있다(“운문사 주지 직무 행사 정지 및 사찰 점유 해제 가처분 이의 공소 사건에 관한 대구고등법원 판결문(단기 4292년 12월 16일).”).

판결문에는 수인스님의 주지 업무 성과로 전각 수리와 불상 개금불사 등 각종 불사내역을 나열하고, 그 주체로서 스님을 명시하고 있다.

수인스님은 이후 1966년까지 주지 소임을 맡아서 사원 정리를 위한 제8차 중창불사에 힘을 쏟아 오늘날과 같은 운문사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특히, 운문사 비구니 강원은 1956년, 비구니 전문강원은 1958년에 설립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당시 강주로 임제응(濟應)스님13)을 초빙하였다. 이처럼 중창불사의 일환으로 비구니 강원이 개설되었다.

4. 운문사의 동화사 대체 시기 관련

현재 운문사 관련 기록들에 의하면, 운문사는 초기 비구니 사찰로 할애되었던 동화사가 비구 사찰로 다시 전환되면서 이를 대체하는 사찰로 운문사가 비구니 사찰로 지정되었다고 기술되고 있다(본각, 2007: 329). 하지만 이에 대한 사실관계의 확인이 필요하다.

만약 운문사가 동화사를 대체하는 비구니 사찰로 할애되었다면, 비구니가 운문사 주지로 임명된 시기는 동화사가 다시 비구 사찰로 전환된 1956년 5월 이후여야 한다. 총무원에 1956년 5월 18일에 접수된 동화사 주지 성문스님의 서신에 의하면, 첫째 동화사를 양보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비구니 대중이 갈 곳을 처리해 달라는 내용과 둘째, 1956년 5월까지도 운문사는 사찰정화 중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혜원, 2014: 221에서 재인용). 현재 확인가능한 모든 기록에는 운문사 초대 주지 임기 시작년도는 1955년도이다. 동화사처럼 문교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운문사 초대 비구니 주지는 1955년 8월 비공식적인 절차에 의해 주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년여 간의 도량정화를 거쳐 운문사의 운영권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고려하면, 운문사가 사찰정화에 성공하고 비구니 사찰로서 토대를 다져가던 시기와 동화사가 다시 비구 사찰로 전환된 시기가 맞물리면서 운문사가 비구니 승가를 대표하는 사찰의 위상과 역할을 떠안게 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운문사는 외부의 도움 없이 사찰 자체의 노력만으로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가능케 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므로 비구니사와 한국불교사에서 가진 의미는 더욱 크다.

5. 운문사승가대학 초기 강사스님 관련

『운문사지』 7장 승가 교육 1절 운문사승가대학에서는 “운문사 강원은 1958년 당시 주지였던 금광스님이 통도사의 비구 강사인 오해련 스님을 모시고 개원했다”(운문사지 간행위원회 편, 2018: 328)로 기술되어 있다. 이후 ‘임재응(濟應)14) 스님이 1964년부터 1966년까지 강주를 지냈다’고 정리되어 있다(운문사지 간행위원회 편, 2018: 328, 337).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점이 연구 진행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운문사지』의 기록과 다르게 제응스님이 1964년 이전에도 운문사승가대학 강주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다수의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우선, 이번 조사에서 주지 수인스님과 강주 제응스님이 함께 찍힌 1960년도 사집졸업 기념사진을 발굴하였고, 이 기념사진에 등장하는 자○은 1959년도에 제응스님에게서 초심을 배웠다고 구술하였다.

우리 스님께서는 운문사 살았던 시절이 아주 짧고 그 그때 수인노스님은 주지스님이라고 불렀고 그다음에 강사스님은 대처승 제응스님인가? (예, 예, 제응스님) 그 스님한테 당신은 초심부터 배웠는데 초심도 이제 그 중간에 가르친 학인이 마땅하게 없어 가지고 제응노스님한데 바로 배우셨다 하더라고. 그러고 이제 사라호 태풍[1959년]이 오고 난 뒤에 바로 갖는 경우가 되어 가지고, 인자 사라호 태풍 때 넘어진 나무들, 상판(?)해가지고 불 때던 뭐∼ 그거 하던 그 시절이었다 그러시네.15)

또한 약 3년 뒤인 1962년도 승가대학에 재학하였던 일○도 당시 강사스님이 제응스님이라고 증언하였다.

연구자: (62년에도) 학인들은? 거기에서 글도 배우셨어요?

일○: 응 금당에서

연구자: 누구한테 배우셨어요? 강사스님 누구셨어요? (일원스님: 응?) 강사, 강사스님?

일○: 제응스님

연구자: 제응스님. 응∼. 그때 학인들은 얼마나 되셨어요?

일○: 학인들은. 한 30명∼40명 있었어.

또한 부산 보광사 주지를 역임한 정명(淨明)스님은 ‘1958년 운문사에서 임제응 강주스님께 사미니과를 수학’하였다고 구술하고 있으며, 1966년부터 운문사 비구니 강원 강사로 부임한 묘엄스님도 운문사는 1958년 비구니 강원을 개원하였고, 당시 강주는 제응스님이었다고 확인하고 있다(한국비구니연구소 편, 2007a: 553; 묘엄 구설·김용한 역음, 2008: 286; 정인영. 석담·이향순 역, 2012: 268-269). 또한 초대 강주에 대해서도 다른 증언을 확인하였다.

연구자: 처음에 오해련 스님 오셨잖아요.

성○: 우리 노장님 들어가시고는 제응스님. 그 스님도 나가고. 오해련스님 나가고

연구자: 오해련 스님은 몇 철이나 계셨어요?

성○: 기억이 안 나요. 제응스님이 오래 계셨어요. 기장도 와 계시고. 강사에 오래 하셨어요. (수인스님이) 주지 내놓으셨을 때까지.

연구자: 그럼 묘엄스님 들어오면서 나가셨나요?

상○: 노스님 나오시고, 이내 나오셨다.

연구자: 그때 처음에 왜∼ 그 인제 강원할 때 이제 수인노스님께서 거기 주지 맡아서 들어가셔 가지고. 처음에는 그 제응스님 아니 오해련 스님을 모시고 했죠?

묘○: 아니 맨 처음에는 임제응, 제응스님 모시고 계시다가, 중간에 오해련 강사스님. 또 모시고 있다가. 그 스님이 가시고 난 뒤에 임제응스님이 다시 오셔 가시고 계셨죠.

연구자: 처음에 임제응스님 모셨다가 해련스님 잠깐 계셨다가 다시 임제응스님.

묘○: 예

연구참여자 성○와 상○은 1958년부터 1966년까지 수인스님의 주지 임기 동안 강주를 역임하였다고 확인하였고, 연구참여자 묘○은 1955년 운문사에 처음 비구니 강원을 개설할 당시 강사는 제응스님이었고,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하기 전에 잠깐 해련스님이 강사를 맡은 것으로 기억하였다.

Ⅴ. 사실로서의 수인스님 보기 및 제언

1. 사실로서의 수인스님 보기

수인스님에 대한 사실과 여러 텍스트의 재현 사이에 간격이 발생한 이유는 첫째, ‘불교정화 시기의 혼란과 불안정’으로 인해 운문사 주지 임명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고, 둘째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비구니 위상’을 고려하여 비구니의 힘을 집결하기 위해 스님들의 합의에 의해 소임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술 내용에 대한 분석과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은 수인스님에 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수인스님은 서운암(1940년 창건)과 영주암(1954-1956년 주지) 운영을 통해 사찰 운영과 포교 분야에서 능력이 검증된 ‘종교지도자’였다. 또한 수인스님은 통도사 대교, 수의과를 졸업하였고, 20안거 이상을 성만하여 선교를 겸전하였다. 1955년 당시 수인스님의 법랍은 47년(세수 57세)으로 지역 불교계에서는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 수인스님은 운문사의 주지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1950년대는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이었고, 대한불교조계종의 기틀을 만들어가던 시기였다. 하지만 일제의 사찰령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던 시기여서 사찰 주지 임명에도 정부의 인가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청정 비구/비구니의 부족으로 전국의 사찰에 주지를 임명하기도 힘들었다. 1955년 2월 4일 비구와 대처가 불교정화에 대해 논의하였던 불교정화대책위원회에서는 승려자격 8대 원칙 - ① 독신, ② 삭별염의, ③ 수도, ④ 20세 이상, ⑤ 불주초육(不酒草肉), ⑥ 불범사바라이(불살생·불투도·불사음·불망어), ⑦ 비불구자, ⑧ 3년 이상 승단생활을 해 온 자 - 에 합의하였다. 정부는 이 원칙에 의거해 자격 심사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전국의 승려 가운데 승려자격 8대 원칙에 부합하는 승려의 수는 1,189명이었다. 당시 신문기사에서도 이러한 상황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선학원계 승려들은 40년간이나 대처승 세력에 빼앗겼던 한국불교의 주도권을 다시 찾고 전국 일선 180 사찰의 새주인 되었으나 이 많은 사찰을 수호할 주지의 부임은 그들 지도층의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중략) 현재 ‘선학원’계 승려는 약 800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이들 전원을 주지로 임명한다는 것은 이지종교(理智宗敎)로 알려진 ‘불교’의 전도가 높은 지식과 교양을 필요로 하는 점에 비추어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대처승 包攝 不可避 선학원측, 주지인선에 腐心.” <동아일보> 1955.8.22.; 황인규(2007), p. 289에서 재인용).

이러한 시기에 수인스님의 수행과 사찰운영 능력이 알려졌고, 이를 근거로 운문사 운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55년부터 1966년까지 12년 동안 한때는 총무로서, 이보다 더 긴 시간은 주지로서 사찰의 운영을 총괄하였다.

둘째, 수인스님은 운문사 운영을 위해 지역의 비구니 스님과 학인스님의 협력과 참여를 이끌어낸 지도자였다. 수인스님과 금룡스님이 소임 문제를 함께 고민한 이유도 비구니 사찰로서 운문사의 사격을 공고하게 다지기 위해서라고 추측된다.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의 결과로 비구니 총림으로 할애되었던 동화사는 여러 이유에서 다시 비구 사찰로 전환되었고, 운문사는 이를 대체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비구니의 위상을 고려하면, 운문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비구니의 힘을 모으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수인스님은 사찰 운영과 재판 과정을 운문사 대중들과 공유하며 힘을 모아 헤쳐 나갔다. 특히 사찰 정화 과정에서 대처승들과의 싸움은 오래 기간 지속되었고, 그 기간 동안에 학인들의 역할이 컸다.

그때 그 당시에는 대처승하고 싸움할 때다. 재판하고. 그리 할 때라 좀 시끄러워서 학인들이 있어도 공부도 옳게 못하고, [대처승들이] 내 시비걸고. ○○○○○○ 기도하느랴고. 그랬어요.

(그러면 재판 할 때도, 재판할 그때도 학인들이 있었네요?)

네 있어도, 몇이 안 되도. 전부 ○○○○○○ 우리가 대처승한테 이겨야 한다고. 공부는… 열 제치고, 다 기도만 했지요. 열심히 했지요. 그래서 우리 수인노스님이 재판할 때 서울로 어디로 다닐 때. ○○○○○○ 재판에서 이겼어요.

그때 학인스님이 있었기 때문에 또 그 힘으로써 또 운문사가 이겼지. 그때 다 절마다 [재판을] 다 졌는데. 운문사만 이겼거든요.

그렇게 함으로써 운문사가 강원이 됐고, [재판에서 졌으면] 그때 벌써 강원이 없어졌지. 넘어갔으면 운문사 딴 스님들이 탐을 내거든요. 그래도 수인노스님이 당신 고생해가면서 했는 바람으로 강원이…(묘○).

학인들하고 내 싸웠다고 하더라고 그 대처승들하고 학인들 정화해가지고 …… 싸운 기억밖에 없데. 싸운 기억하고 산에 [태풍으로 부러진] 나무 재로 간 기억밖에 없데(자○).

당시 정화운동에 참여했던 비구니 덕수스님은 “비구니들이 힘이 없고 연약하고 배움도 없었지만 종단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언제나 앞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일이 다 되고 나면 비구니들이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구술하였다(덕수·보인·정화, 2002: 278). 정화운동의 결과로서 사찰 주지를 임명하는 과정에서도 “비구스님들은 비구니들이 큰절을 맡게 되었다고 말이 많았습니다.”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였다(덕수·보인·정화, 2002: 272). 비구니 총림으로 총무원의 공식적 결정과 정부의 정식 허가도 있었음에도 동화사는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유지되었다. 동화사에서는 80여 명이 함께 수행하고 있었는데, 비구스님들이 내려오면서 동화사 강원이 폐지되었고, 사중에 상주하였던 스님들은 경주 분황사, 태백산 홍제사, 선암사 등으로 흩어졌다. 이는 불교계에서 비구니 위상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수인스님은 비구니 사찰을 더욱 굳건하게 지켜야 한다는 다짐을 하였고, 이를 위한 전략으로 정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금룡스님과 협력하는 전략을 취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2.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한 제언

본 연구에서는 1세대 비구니 수인스님 관련 서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비구니 사찰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비구니 스님들의 노력으로 대처승과의 투쟁과 재판을 거쳐 전환되는 과정이 재현되기보다는 결과만이 서술되어 있었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대가람의 기초를 마련한 불사도 사실에 부합하게 재현되지 못하고 단편적인 사건들로 나열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불교정화운동 시기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사찰을 되찾고 재건하는 일련의 과정을 주도하였던 수인스님은 ‘지도자’와 ‘종교인’로서의 재현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운문사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던 당시 운문사 대중과 지도자로서 수인스님의 노력을 의미 있는 역사로서 바로 세우고 기록하기 위해서 이제는 사실에 의거한 서술 내용으로의 수정작업이 필요하다.

주지로서의 업적 및 평가 관련 서술 관련되어 연구자는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제언한다.16) 첫째 운문사 소유권 재판의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기술되어야 한다.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한 비구니의 공로가 인정되어 1955년 개운사와 선암사, 동화사, 운문사 등이 비구니 사찰로 할애되었다. 특히 동화사는 전국비구니총림으로 개설하기 위해 비구니들이 도량을 인수하였고, 1년 정도 운영하였음에도 본사급 사찰을 비구니가 맡은 것에 대한 비구들의 불만이 지속되어 결국 다시 비구 사찰로 전환되었다. 동화사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은 당시 비구니의 위상과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수인스님은 재판을 통해 운문사의 소유권을 지켜냈고, 소유권을 지켜낸 근거는 사찰 운영 성과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당시 재판 승소는 비구니 교육도량과 비구니총림으로서의 공식적인 출발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운문사지』에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에 대한 기술이 없고, “한 대처승의 모함과 소송에 휘말려 세 번이나 법정에 섰는데, 마지막 재판 때는 승소한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합장한 채로 관음 주력 삼매에 들었다”라는 일화만 소개되어 있다(운문사지 간행위원회 편, 2018: 122).

둘째, 운문사 제8차 중창불사의 주역은 수인스님으로 정정되어야 한다. 이는 ‘원력을 가진 승려들이 수행한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한 불사’(김광식, 2016: 133)라는 중창불사(重創佛事)의 의미를 온전하게 반영한 역사 서술이다. 수인스님은 대처승과의 소유권을 두고 재판하는 와중에도 방사를 수리 및 개축하였고, 여러 전각의 불상 개금불사, 기와 불사, 비석과 비각 조성 등을 수행하였다. 사찰 경내 상하수도를 정비하고, 임목 도벌을 방지하는 등 사찰 보존에 기여하였다. 또한 비구니 전문 강원을 개원하여 비구니 승가교육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다. 주지로서 재임한 기간을 고려하더라도 중창불사를 실질적으로 지도했을 개연성은 금룡스님보다는 수인스님이 높다. 금룡스님이 주지로서 활동한 기간은 내신서를 기준으로 1955년부터 1958년까지로 ‘제8차 중창을 이끌었다’고 기술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1955년부터 총무로서 실질적인 사찰 운영을 담당하였고, 1958년부터 1966년까지는 공식 주지로서 재직한 수인스님이 중창불사를 주도하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그럼에도 『운문사지』에는 “1958년 주지로 운문사 주지로 부임한 스님은 정금룡 스님을 모시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강원 교육 체계를 신설하면서 각종 불사에 전념했다”로 기술되어 있다(운문사지 간행위원회 편, 2018: 122).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운문사의 서술 내용을 수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Ⅵ. 결론

역사에 대한 서술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이해되며, 기록의 가치는 그것이 담보하고 있는 객관성과 정확성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역사를 서술하거나 기록을 편찬하는 경우에는 기록의 진위를 판별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편견이나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록’에 편견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 역사가들도 기록이 한 사건의 전모를 완전히 객관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며, 자신들이 서술하는 역사가 실재를 완벽하게 서술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안병우, 2017: 380).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 서술, 사건, 기록, 기억을 검토할 때는 오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비판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이 연구에서 살펴본 1세대 비구니들의 경우에는 검증의 대상이 되는 ‘역사 서술’이 많지 않으며, 관련된 자료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수집된 여러 자료들을 통해 수인스님 관련 서술 내용 중 일부를 검증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역사 서술과 기록, 기억에 내재된 오류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우리가 접하는 서술과 사실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그 한 사례로서 『운문사지』에 기록된 수인스님 관련 서술을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수인스님 관련 서술들은 사실을 제대로 재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즉, 총무와 주지로서 12년간 운문사에서 책임을 다한 수인스님에 대해서 『운문사지』에는 관련 사실들을 축약하고 단순하게,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간격 혹은 긴장을 확인한 본 연구자는 서술 내용의 진위 여부와 맥락을 파악하였고, 서술과 사실의 격차를 줄이는 검토 작업을 진행하였다. 연구자는 종단과 법원의 공식 자료 및 학술 자료들을 교차 검증하여 운문사 초대 비구니 주지 선임 과정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초대 주지 선임 과정에는 불교정화운동 시기의 혼란함과 승가 내부의 불평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비구니 승가의 협력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하지만 연구자는 개인 연구자로서 자료 접근 등에서 여러 한계를 경험하였다. 보다 면밀하고 광범위한 자료 확보와 검증을 위해서는 종단과 운문사 차원의 조직적인 관심과 연구가 절실하다. 운문사가 지닌 역사적 의의를 고려하여 운문사의 비구니 도량 전환 과정 및 초대 비구니 주지, 제8차 중창불사, 비구니 전문 강원 개설 등의 주제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요청된다.

Notes

1) 연구자는 수인스님의 증손상좌로 특별한 관계에 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며, 찬탄을 목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으로도 오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의문과 오해는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본 연구자는 전국비구니회에서 활동 중에 운문사를 여러 번 방문하면서 운문사 초대 비구니 주지 기록의 혼란은 비구니 역사 문제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2) 김상영(金尙永)은 광복 이후 2대와 3대 주지를 역임한 대처승이다(한국학문헌연구소 편, 1977: 246).

3) 한영기(韓永基)는 운문사 광복 후 제4대 주지 시절에 재무 소임을 맡았던 대처승이다(한국학문헌연구소 편, 1977: 246).

4) ‘광복 후 최초의 운문사 주지’라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1977년 편찬된 『운문사지』에 따르면 광복 후 첫 번째 주지는 대처승 ‘김상명(金常明)’이다(한국학문헌연구소 편, 1977: 245).

5) 1970년대에 2년 동안 수인스님의 시자였던 혜○의 구술에 의하면 수인스님은 서울에서 운문사 주지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에서 당신이 그러면 운문사를 주지를 스님이 맡고 석남사는 그 스님, ○○스님이 맡으라고 하고 그래했대.”

6) 금룡스님(1892-1965)은 1892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하였고, 1909년 나이 18세에 운문사에서 선덕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스님은 30여 년간 비구니 법사로 법문 행각하였고, 1965년 세수 74세, 법랍 57세로 전주 정혜사에서 입적하였다.

7) 수인스님(1899-1997)은 1899년 경북 월성에서 태어났고,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운문사가 위치한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고모님 댁에서 살게 되었다. 10살 되던 해에 스님은 마을로 탁발 온 청신암 행민스님을 만났고, 이를 계기로 행민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운문사 주지와 중앙종회의원, 능인학원 이사, 단일계단 비구니 증사 등을 역임하였고, 세수 99세, 법랍 89세로 1997년 부산 서운암에서 입적하였다.

8) “1958년 11월 13일 총무원에서 발행한 ‘주지 임명 내신에 관한 일.”, “1959년 12월 16일 대구고등법원의 판결문.”, “1957년 4월 17일자 ‘나한전건축에 대한 이유서와 각서(1957년 5월 30일).” 등.

9) 내신서(內申書)는 ‘공개하지 않은 인사 문제나 사업 문제 따위에 관하여 상급 기관에 올리는 보고서’를 뜻한다(다음 어학사전).

10) 이와 관련되어 금룡스님의 행장에는 주지 선임 과정에 대한 서술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11) 금룡스님이 운문사에 주석하였던 구체적인 기간은 구술자에 따라 구술 시점에 따라 상이하였다. 하지만 구술 내용은 운문사에 비교적 짧은 기간 주석하였고, 주지 소임을 수인스님에게 이양(移讓)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12) 1955년 전국승려대회와 불교정화대책위원회 결의의 정당성에 대해 대처측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1956년 6월 15일 법원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이 결의가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을 들어 감독 관청의 간섭을 부당한 것으로 판결하였다. 비구측은 이 판결에 불복하고 서울고등법원에 항고를 하였다. 서울고등법원에서는 비구측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 문제는 결국 대법원에서 판결을 받게 되었다. ‘정화운동’은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진행되었기 때문에 독재정권이 무너졌으므로 무효라는 대처측의 주장을 대법원이 받아들여 대처측에 승소 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대해 불교계 언론에서는 당시의 사회적 조건을 고려하면 비구측이 법적 다툼에서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고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법부는 대부분 일제강점기 지주 출신들로 일본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으며, 대처승들과 비슷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었고, 당시 법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의 것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이다(“‘정화운동’의 법정공방.” <법보신문> 2008.5.13.; 박부영, 2012: 17-39). 실제 판결이 비구측에 불리하게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에 비구측은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비구 6명이 할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시기에 1961년 5·16군사 쿠데타로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이 무너지고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군사정권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여 정국을 장악하고 불교계에서 현재 법원에 계류 중인 75건에 달하는 소송을 일체 중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62년에 통합종단이 출범하였다.

13) 제응스님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제응스님의 제자로는 도선사 염불선원장을 역임한 도우스님이 있다. 도우스님은 1935년 경북 상주 남장사에서 제응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제응스님 직전에 강주였던 오해련스님이 통도사에 주석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확인된 기록에 의하면 최소한 1927년부터 1942년까지 강원의 책임자로 있었다(양관, 2011: 211-216).

14) 『운문사지』에는 ‘재응’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다른 자료들에는 ‘제응’으로 표기되어 있다.

15) 자○스님과의 면담은 전화인터뷰로 진행되었으나, 스님과 연구자와의 직접 통화가 어려워서 스님의 상좌가 연구자의 질문을 전달하고 스님의 대답을 연구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16) 초대 주지 관련 문제는 이미 언급했듯이 초대 주지 금룡스님, 총무 수인스님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다만, 금룡스님 주지 재임기간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총무원의 내신서와 대구고등법원의 판결문을 종합하면, 공식적인 재임기간은 1955년 8월 15일부터 1958년 11월 7일까지이다. 하지만 수인스님의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스님은 1958년 2월 10일부터 주지로 활동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의 구술과 오백전 관련 이유서와 각서를 감안하면, 그 이전부터 실질적으로 주지로서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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