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 | 자장율사와 정암사의 역사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 및 분장

황인규 *
In-gyu Hwang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Professor, Department of History Education, Dongguk University

© Copyright 2021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Nov 18, 2021; Revised: Dec 13, 2021; Accepted: Dec 17, 2021

Published Online: Dec 31, 2021

국문 초록

본고는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 사실과 고려 및 조선 시대 진신사리의 이전 봉안, 그리고 임진왜란 무렵 통도사 진신사리의 분장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 연구이다. 자장은 귀국 후 통도사를 비롯하여 진신사리를 전국의 곳곳에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그동안 제 기문에 나타난 자장의 진신사리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다루어진 바 없는 듯하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문헌 기록에 나타난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 사찰은 16소에 이르고 있다. 5대 적멸보궁 또는 이를 포함한 8대 적멸보궁 외에도 『삼국유사』에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경주 황룡사와 울산 태화사, 조선중기 이후의 기문에 보이는 천안 광덕사 등의 사찰들에도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은 한국에서의 진신사리 봉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듯하며, 흥법에 매우 큰 기여를 하였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 사실과 통도사 진신사리의 분장 및 이전 봉안 사실이 뒤섞여 이해되고 있다.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은 자장 당대뿐만 아니라, 조선중기 이후의 기문에서 보이는 경우도 적잖기 때문에 사료 비판을 통한 이해가 필요하다.

본고에서 특히 주목한 것은 제 기문에 나타나는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과 자장이 봉안한 통도사의 진신사리가 고려와 조선초에도 분장되거나 이전 봉안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고려말 임란시 통도사의 사리가 분장된 것은 홍건적이나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한 불교수호의 차원이었다.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실은 자장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 자장의 흥법을 계승 및 추념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Abstract

This paper attempted to examine the fact that monk Jajang's Jinsinsari(Sakyamuni's Buddhist ashes) was enshrined in the literature records, the previous enshrinement of monk Jajang's Jinsinsari during the Goryeo and Joseon Dynasty, and the makeup of Tongdosa Temple's Jinsinsari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It is said that monk Jajang enshrined Jinsinsari all over the country, including Tongdosa Temple after returning to Korea, but it seems that monk Jajang Jinsinsari, which appeared in my article, has not been comprehensively dealt with.

According to my research, there are 16 temples in Jinsin-sa Temple in monk Jajang in the literature records. In addition to the five Jeokmyeolbogung Palace or the eight Jeokmyeolbogung Palace, it is recorded that monk Jajang enshrined Jinsinsari in the Samgukyusa, Gyeongju Hwangnyongsa Temple, Ulsan Taehwasa Temple, and Cheonan Gwangdeoksa Temple, which is seen in the post-Joseon Dynasty. enshrinement of Monk Jajang's Jinsinsari seems to occupy most of the Jinsinsari, and I think it has contributed very much to the expansion of Buddhism.

Until now, it has been understood that monk Jajang's Jinsinsari enshrinement, Tongdosa Temple's costume, and previous enshrinement are mixed. Since monk Jajangsa Temple is often seen not only in monk Jajang but also in articles after the mid-Joseon Dynasty, critical understanding of historical records is needed.

What is particularly noteworthy in this paper is that the Jinsinsari of Tongdosa Temple, which was enshrined by Jajang in the Goryeo and early Joseon Dynasty, was cremated or previously enshrined. In this way, the sari of Tongdosa Temple was dressed up as a Buddhist protection to prevent the invasion of orancae in the north-south.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the truth of Jinsinsari enshrined by monk Jajang was inherited and honored not only in monk Jajang period but also in the later generations.

Keywords: 자장; 진신사리; 통도사; 금산사; 흥천사; 건봉사
Keywords: Monk Jajang; Jinsinsari(Sakyamuni's Buddhist Ashes); Tongdosa Temple; Geumsansa Temple; Heongcheonsa Temple; Geonbongsa Temple

Ⅰ.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반도의 5대 적멸보궁이라 불리는 도량은 모두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다. 우리나라 적멸보궁은 통도사, 상원사, 정암사, 봉정암, 법흥사를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하며, 5대 적멸보궁에 대구 용연사, 구미 도리사, 고성 건봉사를 추가하여 8대 적멸보궁이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적멸보궁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건봉사 등은 임진왜란 시 통도사의 석가 진신사리가 분장된 것이므로 구별하여 이해되어야 하며, 학술적 천착이 필요하다.1)

더욱이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실은 자장 당대인 고대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와 임진왜란 시 통도사에서 분장되거나 이전 봉안된 것도 있다. 하지만 조선후기나 근대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으므로 보다 정치하게 천착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껏 자장이 활동한 고대시기에 국한해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고려시기 이후의 기록들에 대해서는 그리 주목하지 않았다.2) 자장에 관한 연구가 매우 시기가 떨어진 『삼국유사』 등에 의존해서 이루어지면서도 그 이후의 제 기록에 대해서는 대개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간주하여 경시하거나 무시해왔던 것이다.

필자는 조선후기의 제 기록에 보이는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이나 관련 흥법 관련 사실은 단순히 자장의 위상을 가탁하였다고 보기 보다는 자장의 흥법을 계승 또는 추념이었다는 시각에서 이해되고 연구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3)

이에 본고는 자장이 통도사 등 전국 사찰에 진신사리를 봉안 사실과 고려시대와 임진왜란 무렵에 통도사 진신사리가 이전 봉안 및 분장된 사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4)

Ⅱ.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

『삼국유사』에 의하면, 자장은 당의 산서성에 있는 청량산 운제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의 정골사리 치아, 가사, 패엽경 등을 가지고 643년(선덕여왕 12)에 귀국하였다. 자장이 귀국 후 세운 사탑(寺塔)은 황룡사와 통도사, 태화사를 포함하여 10여 곳이 된다고 한다(『삼국유사』 권3, 탑상4 전후소장사리). 조선후기인 18세기 기문이지만, 「통도사 사리가사 사적약록」과 「사바교주 계단원류 강요록」에 의하면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은 황룡사와 월정사, 대화사, 통도사이며(한국학문헌연구소, 1979), 『강원도 정선군태백산 정암사사적』에 의하면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은 황룡사와 월정사, 대화사, 사자산(법흥사), 통도사이다.5) 그리고 「봉정암 칠창사적기」에 의하면 봉정암에도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6) 20세기에 지어진 「금강산건봉사 석가영아탑 봉안비」에는 자장이 오대산(상원사)과 취서산(통도사), 사자산(법흥사), 갈래산(정암사)에 진신사리를 각기 봉안하였다고 하였고(李大蓮, 1928), 「각황사 석가세존 진신사리탑비명」에도 “오대산과 취서산(통도사), 태백산(정암사), 설악산(봉정암) 등 명산에 모셨으며, 그 후에도 종종 한 두 과씩 전해진 것이 있었다.”7)라고 한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에서 현대까지도 자장이 5대 적멸보궁으로 알려진 사찰에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지만, 사료적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믿기에 주저되고 있다. 5대 적멸보궁으로 알려진 법흥사와 봉정암은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채록되어 있지 않았다. 후대 설화에 의하여 야기된 것으로 단정하거나, 보궁이라는 말 자체가 1960년대 이후에 고유명사로 사용된 것이며 5대 적멸보궁이 조계종단의 중요한 성지로 여겨짐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는 견해도 있는 것이다(장성재, 2014: 175-184).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신라시대 불사리탑을 봉안한 탑은 황룡사 9층탑을 위시하여 13기의 탑이며, 구체적으로 황룡사 9층목탑, 태화사탑, 오대산의 중대, 태백산 갈반사, 천안 광덕사, 구례 화엄사 탑, 지리산 노고단 아래의 법계탑, 강원도 사자산 법흥사 탑”이라고 간주하기도 하였지만(신대현, 2003: 173),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 12소와 그렇지 않은 법계탑을 포함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존의 연구자들은 5대 적멸보궁의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므로 신뢰성의 문제를 제기하거나,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을 후대의 이전 봉안과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있다.8)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비교적 사료적 근거가 확실시 되는 것 외에도 조선후기의 기문에 나타나는 천안 광덕사, 김제 금산사, 산청 대원사, 완주 안심사, 구미 석적사, 정선 정암사 등과, 근대 이후의 기록에 나타나는 인제 봉정암, 영월 법흥사, 속초 신흥사, 해남 대흥사, 구례 화엄사 등을 포함하면 문헌기록에 보이는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처는 16소의 사찰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자장의 입적 이후 후대에 진신사리를 분장한 사찰은 고려시대의 개성 개국사와, 보은 법주사이며, 이전 봉안한 사찰은 개성 송림사, 조선초의 한양 흥천사 등으로 4소이다. 임진왜란 시 향산 보현사, (원주 각림사), 고성 건봉사, 대구 용연사, 구미 도리사 등이며, 임시로 봉안한 각림사를 제외하면 3소의 사찰이다. 자장이 직접 진신사리를 봉안하였거나, 이후에 분장 및 이전 봉안한 도량은 모두 24소(23소)의 사찰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수용할 경우,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549년(진흥왕 10) 신라의 승려 각덕이나 양의 사신 심호가 진신사리를 전래한 이후 진신사리가 32소에 달한다는 연구 성과를 수용할 때,9) 한국의 진신사리 봉안처 가운데 자장이 직접 봉안한 사찰의 비율은 약 50% 이상이며, 통도사의 분장 및 이전 봉안 사찰을 포함한다면 자장 관련 진신사리 봉안 사찰은 24소에 달하여 약 75% 정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현재 폐사된 사찰은 황룡사와 울산 태화사, 구미 석적사, 개성 개국사, 개성 송림사, 원주 각림사로 6소이다.

통도사의 분장 사찰은 고려시대와 조선후기의 당대의 기록이므로 비교적 사료적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신라 때 자장이 직접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던 사찰에 관한 내용들도 조선후기, 심지어 근대기의 기록들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엄밀한 사료 비판을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헌 기록에 나타나는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 사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 및 분장 사찰을 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 및 분장(分藏)

(1)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

① 경주 황룡사(폐), 울산 태화사(폐), 양산 통도사, 평창 상원사, ② 천안 광덕사, 김제 금산사, 완주 안심사, 구미 석적사(폐), 구미 도리사, 산청 대원사,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 ③ 인제 봉정암, 속초 신흥사(?), 해남 대흥사(?), 구례 화엄사(?) : (12+4=16)

(2) 고려·조선초 자장의 진신사리 분장

④ 개성 개국사(폐), 보은 법주사, 개성 송림사(폐) : (3)

(3) 임란시 자장의 진신사리 분장

⑤ 향산 보현사, (원주 각림사(폐)), 고성 건봉사, 대구 용연사 : (3)

(4) 조선시기 자장의 진신사리 이전 봉안

⑥ 한양 흥천사(폐), 구미 도리사 : (2)

※ (?)는 사료적 신빙성이 적음, (폐)는 폐사.

자장이 가져온 진신사리는 양산 통도사와 경주 황룡사, 울산 태화사에 봉안되었다.

국사에 전하기를, 진흥왕 태청 3년 기사년에 양나라에서 심호를 보내어 사리 몇 낱을 보내왔다. 선덕왕 때인 정관 17년 계묘년(643년)에 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석가의 두골과 어금니와 불사리 1백 낱과 석가가 입던 붉은 색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한 부분은 황룡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태화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의 계단에 두었으며, 그 나머지는 둔 곳이 상세하지 않다.10)

위의 인용한 글에서 보듯이, 자장은 진신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황룡사탑, 태화사탑, 그리고 통도사의 금강계단에 모셨다고 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찰주본기」에 의하면, 자장은 황룡사 탑을 재건할 때 『무구정광 다라니경』에 의거하여 철반 위에 작은 석탑 99기를 만들고, 작은 탑마다 사리 1립과 다라니 4종을 넣어 안치하였다고 한다.11) 이 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1238년(고종 25)에 몽골의 침략으로 사찰이 화재로 불타버리면서12) 진신사리도 소실된 듯하다.

그리고 자장은 울산 태화지에서 만났던 신인을 위하여 태화사를 창건하고 탑에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지만, 그 후의 역사는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조선초 문인 권근(1352-1409)의 「태화루기」와 이원(1368-1429)의 「태화루시」13)의 기록으로 보아 태화사가 조선초 무렵까지 존속되다가 폐사되기까지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던 듯하다. 이렇듯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했던 황룡사와 태화사는 폐사되었고, 통도사의 진신사리는 현재까지 그 일부가 전해오고 있다.14)

『삼국유사』 권4 의해편 자장정률조에 의하면 자장은 만년에 북상하여 강릉에 수다사를 짓고, 태백산에 석남원(石南院, 淨巖寺) 등을 세웠으며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그 사이에 오대산에 월정사를 세우는 등 5대산 불교의 기초를 이루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자장의 대표적 흥법 및 포교처로 할 수 있는 사찰은 5대 적멸보궁이라고 알려진 평창 상원사와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 그리고 통도사의 진신사리의 분장 사찰인 고성 건봉사 등이며, 통도사를 제외한 진신사리가 모두 강원도에 소재하고 있다.

평창 상원사의 진신사리는 643년(선덕여왕 12)에 봉안되었다고 한다. 고려 원 간섭기 문인 민지(1248-1326)가 기록한 『오대산사적』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기하고 있다.

후에 명주(지금의 강릉이다) 오대산에 찾아가 지로봉에 올라 부처님의 두뇌 및 정골사리를 봉안하고 가라허(伽羅墟)에 비석을 세웠다. 비석은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그 사적을 기록하고 이어 월정사를 창건하고 13층 석탑을 세워 사리 37매를 탑심에 봉안하였다.15)

조선후기의 『강원도 정선군태백산 정암사사적』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적고 있다. 즉, 자장은 왕에게 아뢰어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안치하였으며, 이어서 월정사에 13층탑을 세우고 사리를 안치한 다음에 중대를 개창하여 부처님의 두골[佛顱]을 봉안하였다는 것이다.16) 이렇듯 자장은 평창 상원사와 더불어 정선 정암사에도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18세기의 정암사의 승려 경운 이지가 지은 「정암사 수마노탑지 제3석」에서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우리 부처님 세존께서 열반에 드실 때 불두골, 치아, 손가락 뼈, 사리, 염주, 가사, 패엽경 등 탑묘에 관한 일을 문수보살에게 부촉하시니, 문수보살은 (중국의) 오대산에서 선정에 들어 시절 인연을 기다렸다. 천여 년 뒤 우리나라의 자장스님이 법을 구해 서쪽 중국으로 가서 문수보살이 간직했던 위와 같은 여러 보배를 받아 돌아와 공양을 올리고 청(…)의 오대산, 취서산 통도사, 그리고 이 천기봉 아래의 삼갈반지에 봉안하였다.17)

정암사의 경우도 조선후기의 기문에 의한 것이지만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정선 군수를 지냈던 오횡묵은 1887년 무렵 「정선갈래사 고목기」와 「태백산 정암사사적」을 남겼다. 여기서 자장이 갈래사에 머물면서 “당 태종 정관 19년 을사에 세존 수마류보탑을 창건하였다.”18)라고 하여 역시 이러한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그리고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영월 법흥사에도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1778년 정암사의 승려 취암 성우의 『강원도정선군 태백산 정암사사적』에 의하면,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은 황룡사와 월정사, 대화사, 사자산(법흥사), 통도사라고 하였다.19) 다른 기문에서도 “당 정관 12년 무술년(638년)에 신라의 승려 자장율사가 당 청량산에 들어가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골 사리 가사 수주(염주)를 받들고 돌아와 오대산 월정사, 축서산 통도사, 사자산 법흥사, 갈래산 정암사 등 4산에 소장하였다.”20)라고 한다. 「법흥사 사적비」에 의하면 “사자산 법흥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나라의 흥륭과 백성의 평안을 위해 643년(선덕여왕 12)에 사자산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 창건하고 흥녕사라고 이름하였다.”라고 하여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렇듯 조선중기 이후의 기문이지만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찰이 전국의 제 사찰에서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정선 정암사와 영월 법흥사를 비롯해 천안 광덕사, 김제 금산사, 완주 안심사, 구미 석적사, 산청 대원사 등이다.

광덕사는 신라의 자장이 당에서 수행을 마치고 634년에 귀국할 때 진신사리 10과, 법의, 『화엄경』, 불치(佛齒) 등 많은 불구(佛具)를 가지고 와 광덕사의 진산법사가 나누어 분장하였다고 한다. 조선후기 문인 안명로(1620-?)의 「광덕사 사적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찾아진다.

옛날 신라의 법사 자장(은) … 당의 문종 태화 연간에 법사는 지팡이를 날려 서역에 들어가서 정례를 올리고 문수보살에게서 직접 주처의 교지를 받들고 석가의 진골 어금니와 진신사리 100여 매와 가사 및 불주 및 3천 불을 수놓아 그린 비단 화폭 세틀과 패엽에 쓴 경전과 금은으로 쓴 화엄경, 법화경, 법망경, 유마경, 은중경 등 수백 상자를 백마에 싣고 돌아와서 본국의 명산을 가려서 이를 보관 소장하였는데 오대산 중의 암자나 취서산 서쪽의 통도사, 모악산 금산사, 조계산 송광사 등은 모두 법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해가 바뀌어 태화 6년 임자(832년) 봄에 법사는 석가의 어금니 1매와 사리 10매와 승려 가사 한 벌과 불주 한 자루를 손수 진산에 주었고 금과 은으로 쓴 화엄경, 법화경, 은중경 등 각 2부를 주었으니, 화산에 와서 복된 터전을 잡고 도량을 창건하여 열었는데 종루가 여덟이요, 금당이 아홉, 범각이 2층, 법전이 삼층이었다. 산의 동남방 기슭 푸은 벽상에는 천불전이 세워졌는데 석가의 진신사리와 세 폭의 불상 그림 화폭을 받들어 모셨으니, 이것이 진산화상의 원불(願佛)하는 법당이 되었다.21)

위의 인용한 기문에 의하면 832년 봄에 자장이 석가의 어금니 1매와 사리 10매, 승가사 한 벌, 불주 한 자루를 광덕사의 승려 진산에 주었고 금과 은으로 쓴 『화엄경』과 『법화경』, 『은중경』 등 각 2부를 주어 태화산에 광덕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진산(?-844)보다 180여 년 전에 이미 입적한 자장이 후대의 승려인 진산에게 석가의 어금니 사리 등을 전해주었다고 하여 시기상 모순된다. 이 기문에 의하면 오대산의 암자나 취서산 서쪽의 통도사, 무악산 금산사, 조계산 송광사 등은 자장이 창건한 사찰이라고 하여 순천 송광사도 자장이 창건하였다고 한다.22) 그리고 같은 해 가을에 조선후기 문인 유응운이 지은 「화산광덕사 사실비문 병서」에도 “자장법사가 돌아와 도를 열었고 진산화상이 남쪽으로 와서 개산하였다.”라고 하였다. 앞서 언급한 두 기문보다 앞선 시기인 1463년 10월에 세조의 광덕사 참방과 진신사리 이적을 문인 한계희(1423-1482)가 짓고 정란종이 글을 쓴 「화산광덕사 사리각기명」 등 비교적 사료적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기문 등으로 미루어 보아 자장이 실제 광덕사에 진신사리를 봉안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사료적 뒷받침이 더 필요하다.

김제 금산사에도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던 듯하다. 1971년 11월에 금산사 5층 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에 사리와 함께 기문 등이 발견되어 실물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1492년에 지어진 「모악산금산사 오층석탑 중창기」의 다음과 같은 내용은 이러한 실제의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하고 있다.

5층 석탑은 979년에 조성하기 시작해 982년 완공된 탑으로 옛날에 있었던 석가여래사리 5과와 정광여래사리 2과, 사리 1과가 분신하여 총 3매를 놋쇠로 만든 사리합 장치를 열어 만인이 사리에 공경을 다했다.23)

위의 기문이 소재하였던 금산사의 5층 석탑은 979년에 조성하기 시작해 982년에 완공되었는데, 중창기의 후미에 “옛날의 기록을 다시 베껴 썼다.”라고 하여 그 이전의 기록을 다시 전재하였다고 하여 기록의 신빙성이 증가하고 있다(이분희, 2003: 118-119). 또한 다른 기문에 의하면 신라의 승려 진표가 금산사의 3층 미륵전과 장육삼존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석가여래 사리는 자장이 봉안한 것이며 언제 봉안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는 조선중기 승려 무경 자수(1664-1737)가 지은 기문에서 자장이 귀국 후 용황사(황룡사의 오류)와 금산사에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24) 그리고 조선후기 승려 송담 성유가 1783년(정조 7)에 지은 「호남금구현 동모악산금산사 대법당중수기」에도 “옛날 자장법사가 중국에 들어가 운제사에서 불두골과 사리 100매를 얻어 귀국하여 양산 통도사에 두골을 봉안하고 사리를 사방 명산에 분장하였는데, 금산사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25)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후기 문인 김재찬(1764-1827)도 그의 저서 『해석유고』에서 금산사의 “여래사리”를 언급한 바 있다.26) 이러한 사실 때문인지 조선후기에 금산사가 삼보사찰로 불렸다. 즉, 1828년(순조 28)에 호남 12군현을 유람하고 쓴 저자 미상의 기행록인 『속남유록』에서 “우리나라 사찰에 삼보가 있다. 금산사에는 장륙불이 있으므로 불보이며 해인사에는 대장경이 있으므로 법보는 이 사찰을 이른다. 승보는 보조 이하 16국사가 나왔다.”27)라고 하였다. 이렇듯 금산사는 법보사찰인 해인사와 승보사찰인 송광사와 더불어 불보사찰이라고 하였다(황인규, 2014: 272).28) 금산사는 자장에 의해 진신사리가 모셔지고, 진표가 가람을 대중창하여 장륙불상을 모시게 되면서 불보사찰로 불리게 된 것이며, 고려시대 문헌에도 “금산불우(金山佛宇)”라고 하였다.29) 이렇듯 금산사는 삼보사찰 가운데 불보사찰로 간주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금산사도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로 간주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장은 완주 안심사에도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조선후기인 1759년에 김석주가 지은 「안심사 사적비문」의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 기록에는 절을 창건한 사람이 자장대사로 당 정관 연간의 일이며 … 절에 오래 전부터 불가에서 존숭하는 치아와 사리가 각 1개, 10습(襲)이 보물로 소장되어 있는데 몇 천백 년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남방의 노승 사운 굉혜가 창의하여 부도 세우고 안치하였다.30)

위의 인용한 기문에 의하면 638년(선덕여왕 7) 자장이 안심사를 세우고 부처의 사리 10과와 치아사리 1과를 이 사찰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경내 전각을 건립할 때 세조가 직접 글씨를 써서 보냈는데, 이 기문을 보관하기 위한 어서각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후기인 1759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리 부도비를 건립하였으며, 이와 같은 사실을 『동사열전』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즉, 자장은 귀국하여 황룡사·월정사·태화사·통도사에 봉안하고, 대둔사에 정골사리 1매를 봉안하였다는 것이다(『동사열전』 권1, 자장법사전). 이렇듯 안심사에도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실은 실제의 사실로 간주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장은 구미 석적사에 진신사리를 봉안하였으며, 1743년 무렵 구미 도리사에도 진신사리를 이전 봉안하였다고 한다.

통도사 사적을 살펴보니, 신라 자장 율사가 당에 들어가 사리 백매를 구하여 돌아왔다고 하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석적사 역시 자장율사 때 지어진 것이 아닐까.31)

이러한 조선후기 승려 호은 유기(1707-1785)의 『호은집』에 의하면 자장이 석적사에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의 인용한 기문에서 보듯이 이 진신사리는 석적사가 폐사되자 1743년 무렵에 도리사로 이전 봉안되었다.

『해봉집』에 수록된 도리사석종기[桃李寺石甕記]에 이르기를, “냉산 기슭에 석적사의 옛터가 있다. (그곳의) 불사리 탑이 마을에 사는 김계장에게 현몽하여 계장이 (사리탑에서) 사리 1과를 얻었는데 크기가 율무만하고 그 색이 백옥 같았으며 빛을 발하였다. 이에 도리사의 체안이 널리 시주의 인연을 구하여 이 석종탑[石甕塔]을 만들어 봉안하였다”.32)

1977년 4월에 세존사리탑(국보 제208호)을 해체하여 복원하다가 금동 육각탑 형태를 띤 사리구와 석가모니 진신사리 1과가 발견되었는데 8세기 중엽의 것으로 보고 있다.33) 경내 육각탑은 사리함으로 생각되며, 그 안에 봉안된 사리 1과를 도리사로 옮겨 와서 현재의 석종형 세존사리탑을 건립한 것이다.34) 따라서 사리탑이 현존하고 있으며,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따라서 도리사의 진신사리도 자장이 석적사에 봉안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선후기 기문에 의하면 자장은 산청 대원사에도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즉, 자장이 646년(선덕여왕 15) 중국에서 이운해 온 진신사리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는데,35) 1724년(경종 4)에 태흠이, 그리고 1784년(정조 8)에 옥인이 각기 수리하면서 사리 72과를 얻었다고 한다. 1989년 경내 석탑의 각 부재가 어긋나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사리 58과와 함께 파손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경내 석탑 앞에 있는 배례석의 옆면에 “석가불 사리탑 건륭 갑진 중건(釋迦佛舍利塔乾隆甲辰重建)”이라는 글귀로 보아 1784년(정조 8)에 석탑이 다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유섭, 1954; 정영호, 1998).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자장이 산청 대원사에도 진신사리를 봉안하였을 듯하다.

특히 해남 대흥사에도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기록도 찾아진다. 조선후기 대흥사 승려 범해 각안의 『동사열전』의 자장법사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대둔사 입문방 상량문에 이르기를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새금 백방포에 배를 대어 놓고 정골사리를 모시고 대둔사에 들어갔는데, 그 때 먼저 임정기를 경유하였으므로 임정당을 세우고 탑을 쌓아 사리 1매를 봉안하였으며, 99개는 이미 황룡사·월정사·태화사·통도사에 봉안하였기 때문에 배를 대었던 항구의 이름을 백방포라고 한 것이고, 절에 들어갔던 곳을 입문방이라고 한 것이다. 독룡을 내몰고 주문을 외웠으므로 정진당이라고 하였고 우물을 파고 집을 지었으므로 임정당이라고 하였으며, 우물이 변하고 귀신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학선료라고 한 것이다. 포구 이름과 절의 이름에 모두 자장법사의 옛 자취가 어려 있다”고 하였다.36)

위의 인용한 바에 따르면 「대둔사 입문방 상량문」을 인용하여 정골사리를 모시고 대둔사에 들어갔는데, 그 때 먼저 임정기를 경유하였으므로 임정당을 세우고 탑을 쌓아 사리 1매를 봉안하였다고 하지만 관련 여타의 기록으로 입증되지 않고 있어서 신뢰하기 쉽지 않다.

그 밖에 근대 이후의 기록에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찰들도 더 찾아진다. 즉, 5대 적멸보궁으로 잘 알려진 인제 봉정암과 속초 신흥사, 구례 화엄사 등이 바로 그러한 사찰이다.

『백담사 사적기』(1923년작)에 수록된 「봉정암 중수기」(1781년작)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당에서 얻은 석가불의 사리 7과가 봉정암 탑에 봉안되었다고 한다(「백담사사적기』, 「봉정암중수기」:『건봉사급건봉사본말사적』). 그리고 또한 설악산 신흥사의 기문에 “자장은 652년(진덕여왕 6)에 속초 향성사[신흥사]를 창건하고 9층탑을 조성하여 불사리를 봉안하였으며, 인근에 계조암과 능인암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한국학문헌연구소, 1997, 「신흥사사적」)고 한다. 또한 구례 화엄사도 사적기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진신사리 73과를 사리석탑에 모셨다고 한다. 하지만 이처럼 조선후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대흥사와 근대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봉정암, 신흥사, 화엄사 등의 도량에 자장이 정말로 진신사리를 봉안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매우 크게 들고 있다.

이와 같이 자장이 봉안하였다는 16곳의 진신사리 봉안 사찰 가운데 해남 대흥사와 속초 신흥사와 구례 화엄사 등과 같이 조선후기 이후의 기록에서 등장하기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떨어지고 있다. 아마도 자장의 흥법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 진신사리 봉안 추념 불사일 듯하지만, 향후 좀 더 실증적인 사료가 보강되어 입증되어야 할 듯하다.

Ⅲ. 통도사의 진신사리 분장

조선 숙종대 팔도도총섭으로 북한산성을 쌓았던 승려 계파 성능은 1750년(영조 26) 통도사 계단탑을 증축하고 「석가여래 영골사리탑비」를 세우면서 통도사의 진신사리는 “만세의 영원한 동국의 큰 보배”라고 하였다(「통도사 석가여래 영골사리부도비」(1706년작)).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와 같은 읍지류에서도 통도사가 전국 8도 가운데 종찰이라고 하거나37) 조선 말기의 승려 응운 공여(1794-?, 『유망록』, 「통도사기」)38)와 문신 이승영(1837-1907, 『일사집략』 지(地), 윤 7월 8일)39) 등의 기문에서 통도사가 “불교의 종가”가 된다고 하는 등 자장이 봉안한 통도사가 진신사리의 종찰이었음을 표징하였다. 조선후기의 대흥사 승려 범해 각안(1820-1896)도 “축서산 아래에 독한 용신이 살고 있는 못으로 가서 법을 설하여 용을 조복받고 그 못을 메우고는 거기에 단을 쌓고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고 그 절의 이름을 통도사라고 하였다. 이는 곧 불가의 종가인 셈이다(『동사열전』 권1, 자장법사전)”라고 하여 통도사가 불보종찰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제 금산사가 불보사찰로 인식되기는 하였으나, 금산사보다 통도사의 진신사리는 숭유억불 시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도 더욱 중요하게 간주되었던 듯하다. 불가의 종가였던 통도사의 진신사리는 조선 불교를 중흥하였던 청허 휴정이나 계파 성능이 규정한 것처럼 “동국의 보배”였는데, 홍건적이나 왜구의 침탈로부터 수호하기 위하여 보다 안전한 사찰로 이전하여 분장하였다.

고려후기 문인 익재 이제현(1287-1367)이 지은 기문에 의하면,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합기에 창건된 개성의 개국사는 개국율사로 불리었으며, 계율종의 중심 사찰이었다. 태조의 아들 정종은 개국사에 불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40)

왕이 의장을 갖추고, 불사리를 받들고 걸어서 10리 떨어진 개국사에 이르러 봉안하였다.41)

개국사는 통도사와 더불어 남산종의 본산이며 고려 정종대 봉안한 진신사리는 자장이 봉안한 진신사리의 분신으로 추정된다. 태조의 손자 현종은 개국사의 탑을 수리하고 계단을 설치하여 3,200여명을 득도시키는 등42) 남산종의 본산과 같은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원 간섭기인 1323년(충숙왕 10)에 남산종사(南山宗師) 목헌 구공을 중심으로 한 승려들이 통도사를 중창하기 시작하여 1325년(충숙왕 12)에 완공하였다.43)

홍무 12년(1379, 우왕 5)인 기미년 가을 8월 24일에, 남산종 통도사 주지인 원통무애변지 대사 사문 신 월송이, 그 사찰에서 대대로 소장해 온 바, 자장율사가 중국에 들어가서 얻어 온 석가여래의 정골 하나와 사리 넷, 비라석굴(毘羅石窟)의 금박 가사 하나와 보리수 잎사귀에 쓴 약간의 불경 등을 받들어 모시고 서울에 왔다.44)

위의 인용한 글에서 보듯이 아마도 개국사도 통도사와 같은 남산종이므로 불사리는 통도사와 관련이 있을 듯하며, 자장이 가져온 사리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통도사지』에 의하면 정종의 아우인 광종이 통도사의 석가 가사를 친견하였다고 하는데 향후 사료적 입증작업이 필요하다.

고려말 보은 속리산 법주사에도 자장이 봉안한 진신사리가 분장되었던 듯하다. 1650년(효종 1)에 건립된 「세존사리비」에 의하면 법주사의 사리탑이 1362년(공민왕 11)에 세워졌다고 한다.45)

이 산의 사리 한 알이 절 안에 있은 지가 멀리 천년 전의 일인데도 어제처럼 완연하니 석가의 힘이 진중하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가와 불가에서 대대로 전해오며 소중히 하던 때와 혹 경시하고 업수히 여기던 폐단이 있게 된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대략 말하기를 신라 중엽에 석존사리가 동방에 들어와 명산에 풀어졌는데 모두 일찍이 탑을 세웠으니, 이 산인 즉 사리 1과가 절 안에 있은 지가 멀리 천 년전의 일인데도 어제처럼 완연하다. 신도 백귀선이 집과 재물을 내어 절의 백호의 가에 탑을 세우고 비를 세웠다. 기록하여 이렇게 일렀다.46)

위의 인용한 기문에 의하면, 경내에 전해오던 사리 1과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상주를 거쳐 보은 법주사로 몽진하였을 때 통도사에 봉안되었던 사리이다. 조선후기까지 사리전에 봉안하였다가 1710년에 백귀선 등 3인이 모연하여 탑을 건립했다는 것이다(이기영, 1980: 44-46). 이 세존사리탑은 공민왕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지금의 안동인 복주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는 길에 속리산 법주사에 행차하여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의 사리 3개 중 1개를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홍성익, 203: 63-64). 조선후기 문인 이하곤(1677-1724)도 승려의 말을 인용하여 법주사 장륙불상은 신라 자장이 건립하였다고 하였다.47)

한편, 고려말 왜구의 침탈로 통도사의 진신사리의 일부는 개경 송림사에 봉안되었다.

정사년(1375, 우왕 3) 4월에 왜적이 이곳에 쳐들어왔는데, 그 목적이 사리를 얻는 데 있었다. … 봉안할 곳이 없기에, 마침내 받들어 모시고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 송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48)

1375년(우왕 3) 무렵 통도사가 왜구의 침탈을 받자 1379년에 남산종 통도사 주지인 원통무애변지대사 월송이 석가여래의 정골 하나와 사리 넷, 비라석굴의 금박 가사 하나와 보리수 잎사귀에 쓴 약간의 불경 등을 받들어 모시고자 하였다. 개경에 오자 태후와 우왕의 왕비인 근비 이씨가 예배를 하고 개경 용수산의 성안 송림사 사리탑에 봉안하도록 하였다.49)

그 후 개성 송림사에 봉안되었던 통도사의 진신사리는 조선초 한양의 흥천사에 봉안되었다. 즉, 통도사의 진신사리는 고려말 월송의 노력으로 한양으로 옮겨졌고, 여기서 60여 매로 분신하였다가, 그 중 일부가 개성 송림사에 봉안되었다. 다시 송림사의 사리 일부를 흥천사 사리각에 봉안한 것이다.50) 세종대에 진신사리를 궁궐 안에 봉안하였는데 유자들의 반대가 거셌다.51) 이에 1438년(세종 20) 7월에 불골과 사리를 흥천사 사리각에 다시 봉안하였던 것이다.52) 진신사리는 연산군대 사리각이 화재로 전소되기까지53) 흥천사에 봉안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숭유억불 시책이 강화되고 있었던 시기에 있어서 국도 한양의 불교의 흥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자장이 봉안한 진신사리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여러 사찰에 분장된다. 즉, 조선중기 임란시 통도사 금강계단이 왜구의 침탈을 받게 되자 향산 보현사, 대구 달성 용연사, 고성 건봉사 등에 보관되었다.54) 조선중기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사명 유정은 스승 청허 휴정의 승인하에 통도사의 불사리를 전국에 분장하였다. 휴정은 통도사의 불사리가 “천 사람의 집이 선에 들게 하였고 또한 한 나라가 인(仁)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세상의 존귀한 보배라고 할 만하다.”55)라고 하였다. 이에 휴정은 보현사에 금골사리부도를 1603년에 건립하고 탑비의 글을 직접 짓고 써서 건립하였다.

만력 20년(1592년)에 일본 수군이 우리나라 남쪽에 들어와 불태우고 쓸어버려 억조창생이 어육(魚肉)이 될 때 그 화가 부도에까지 미쳐 보배를 장차 잃을 뻔하여 고민에 싸여 있을 때 마침 의승대장 유정이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성심을 다해 수호하여 완전하게 되었다. 유정은 후환이 없을 수 없다 하여 금골 사리 두 함을 금강산에 은밀히 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이 병든 노인 휴정에게 봉안하도록 하였다. 병든 이 노인이 감격하여 받아 가지고 봉안하려다 이 병든 노인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금강산은 물길(해로)에 가까워 뒤에 반드시 환난이 있을 것이므로 금강산에 봉안하는 것은 장구한 계획이 못되는 일이며, 전에 수군들이 부도를 파헤친 것은 전적으로 금은보배에 있는 것이지 사리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보배를 가져간 후에는 사리는 흙처럼 여겼으니 차라리 옛 터를 보수하여 봉안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곧 한 함을 다시 유정에게 주니 유정은 그 생각이 그럴듯하다고 하여 함을 받아서 옛터에 돌아가 석종에 봉안하였다. 또 한 함은 병든 노인 휴정이 스스로 가지고 삼가 태백산에 들어가 부도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나 휴정의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어 문인 지정과 법란의 등에게 그 일을 주선하여 석종에 봉안하게 하였다.56)

이러한 내용은 그의 저서 『청허집 보유』(무본·기본·경본·신본)과 1600년(선조 28)에 휴정 등이 지은 『영골비명』에도 실려 있다.57) 이에 의하면, 보현사에 봉안된 금골사리는 휴정의 제자인 유정이 임진왜란으로 통도사 금강계단이 왜군에 의해 훼손되고 사리가 절취될 상황이 이르게 되자 휴정을 찾아가 금강산에 봉안할 것을 제안하였다. 휴정은 금강산 역시 바다와 가까이에 있으므로 안전하지 않고 왜군은 사리에 관심이 없으므로, 하나의 함은 통도사로 다시 보내 안치하고, 다른 하나의 함은 휴정의 주석처인 보현사로 옮겨 1603년 금골사리부도를 건립하고 봉안하였다.

그런데 유정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통도사로 보내려던 하나의 사리함을 치악산 각림사에 임시 보관하고, 정유재란이 끝나자 대구 용연사로 이운하여 스승의 지시가 있던 통도사와 용연사로 각기 분장하였다.

만력 임진의 난리에 … 송운대사가 받들어 금강산에 가서 서산대사 휴정에게 물으니 … 한 함은 문인 선화 등에게 주어 태백산의 보현사에 봉안하게 하고 또 하나의 함은 송운대사에게 주어 통도사에 돌아가 탑을 개수하여 봉안하게 하였으니, 대개 그 근본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때 영남에 새롭게 들불이 일어나 모두 새나 쥐들이 쪼고 쓰는 바가 되어 공사를 일으킬 틈이 없었다. 그런데 송운대사가 일본에 어명을 받아 갈 일이 생겨 이에 원불을 받들어 돌아가게 되자 송운대사는 그 함을 치악산 각림사에 두도록 했다. 그 제자인 청진이 비슬산의 용연사에 옮겨 봉안하니 후에 대중들이 서로 의논하여 탑을 만들어 안장하기로 하였다. 또 두 대사의 남긴 뜻에 어그러짐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1과를 받들어 통도사에 돌아가 봉안하고 1과는 남겨 용연사 북쪽 기슭에 봉안하도록 하니, 때는 계축년(1673년) 5월 5일에 탑이 이루어졌고 높이가 5자 5치였다. 58)

위의 인용한 글에 의하면, 통도사의 진신사리는 한 함은 보현사에 봉안하고 한 함은 통도사로 보내고자 하였다. 1604년 유정이 일본에 피로 쇄환으로 탐적사로 가게 되자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의 각림사로 보내졌다. 후에 그 제자인 청진이 1673년 5월 5일 비슬산의 용연사 북쪽 기슭에 탑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그런데 원주 각림사는 임진왜란 시 소실되었으므로59) 당시 유정이 제자 탄옥 등에게 중창하여 봉안하였다고 생각된다.60)

뿐만 아니라 건봉사에도 통도사의 진신사리가 분장되었다.

듣건대, 먼 옛날 자장법사께서 몸소 서방 인도에 가서 석가여래의 정골 및 치아의 사리 그리고 금박을 입힌 가사 몇 벌을 얻어와 양산의 통도사에 간직해 두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전해 내려온 지가 몇 천 년의 유래인지 알지 못한다. 중간에 왜적이 탈취해 감으로 온 나라 사람이 실망에 빠져있었는데, 사명대선사 유정께서 일본국에 사신으로 가서 치아 12매를 도로 봉환해 와서 건봉사의 낙서암에 간직해 두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보배롭게 여긴 지가 또한 여러 해 되었다.61)

건봉사의 사리는 선조의 명으로 1604년(선조 37) 유정이 일본에 탐적사로 파견되어 귀국할 때에 부처의 치아 진신사리 12과를 환수하여 봉안하였다.

Ⅳ. 나가는 말

이상으로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과 분장에 대하여 검토하여 보았다. 자장은 귀국 후 통도사를 비롯하여 진신사리를 전국의 곳곳에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그동안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록에 보이고 있는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찰은 16소에 이르고 있다. 5대 적멸보궁으로 양산 통도사, 평창 상원사, 인제 봉정암, 영월 법흥사, 정선 정암사와, 이에 더하여 대구 용연사, 고성 건봉사, 구미 도리사를 8대 적멸보궁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삼국유사』에 의하면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경주 황룡사와 울산 태화사가 있었으며, 조선중기 이후의 기문에 보이는 천안 광덕사, 김제 금산사, 산청 대원사, 완주 안심사, 구미 석적사, 속초 신흥사, 해남 대흥사, 구례 화엄사 등에도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해는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실과 후대 자장이 봉안하였던 통도사 진신사리가 이전 봉안 및 분장된 사실이 뒤섞여 있다. 고려초에 개국사, 고려말에 보은 법주사와 개성 송림사에 분장되었다가 조선초 한양의 조계종의 본산인 흥천사에 이전되어 봉안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시 향산 보현사와 (원주 각림사), 고성 건봉사, 대구 용연사, 구미 석적사에 통도사 진신사리가 분장 및 이전 봉안되었다. 대개 통도사의 사리가 분장된 것은 홍건적과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한 불교 수호의 차원이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듯이 자장이 귀국하여 황룡사와 통도사, 태화사, 평창 상원사 등에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였지만, 필자가 조사한 결과, 자장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만 16곳으로 나타나며, 고려시대와 특히 조선중기 임진왜란 시 진신사리 분장 사찰 6소, 이전 봉안 사찰 2소까지 합하면 24곳에 달한다. 그 가운데 현재 폐사된 사찰은 황룡사와 태화사, 석적사, 개국사, 송림사, 각림사로 6소이다.

549년(진흥왕 10) 신라의 승려 각덕이나 양의 사신 심호가 진신사리를 가져온 이후 진신사리가 32소에 봉안되었다고 보았을 때, 자장이 직접 봉안한 사찰의 비율은 16소로 약 50% 이상이며, 통도사 분장 및 이전 봉안을 포함하면 진신사리 봉안 사찰은 24소(23소)약 75% 정도를 차지한다.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은 불교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자장이 봉안하였다는 속초 신흥사와 해남 대흥사, 구례 화엄사 등의 경우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는 조선후기의 기록이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주저된다.

자장은 경주 일대뿐만 아니라 북방의 태백산과 오대산, 설악산 일대에서 흥법 및 포교를 펼쳤다. 이러한 자장의 원력이 후대의 불교계에 계승 및 추념된 것이라고 하겠다. 한국불교사 연구에서 자장의 불교계 위상은 자장 당대뿐만 아니라, 불교사에서 제대로 정립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Notes

1) 진신사리에 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논저가 있다. 강우방(1993), 『한국의 불교사리장엄』, 열화당; 신대현(2003), 『적멸의 궁전 사리장엄』, 한길아트; 신대현(2003), 『한국의 사리장엄』 혜안 이러한 논저에서 자장이 봉안하거나 후대에 분장된 진신사리에 관해서 특기하지 않았다. 예컨대 『적멸의 궁전 사리장엄』의 경우처럼 우리나라 사리장엄 37건을 살피면서 자장이 봉안한 5건을 포함하였으나 구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자장의 진신사리에 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논고가 참조된다. 신대현(2006), “진신사리의 한국 내 전파 과정에 대하여(I): 신라의 각덕및 자장이 전래한 진신사리를 중심으로”, 『불교고고학』 6; 한정호(2017), “자장전래 불사리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 검토”, 『문물연구』 32; 한상길(2016), “조선시대 통도사의 사리신앙”, 『한국불교학』 80; 염중섭(2013), “자장의 오대산 개창과 중대 적멸보궁”, 『한국불교학』 67; 장성재(2013), “적멸보궁의 변천과 사상”, 『한국불교학』 67; 이영호(2020), “신라 사리함기와 황룡사”, 『목간과 문자』 25; 남무희(2013), “자장과 한국불교의 불교신앙”, 『한국불교학』 67; 홍성익(2013), “부도형 불사리탑에 대한 연구”, 『전북사학』 43; 김혜완(2014), “고려후기 불사리신앙—진신과 분신사리신앙—”, 『역사와 현실』, 한국역사연구회; 염중섭(자현)(2015), “자장의 전기자료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2) 자장 관련 연구 저서는 신종원(1998), 『신라 최초의 고승들: 원광 안홍 자장』, 민족사 ; 남무희(2012), 『한국 계율불교의 완성자 신라 자장연구』, 서경문화사; 석묘각(2012), 『자장율사: 신라의 큰 별』, 간경도감; 자현 외(2014), 『한국의 사리신앙연구』, 운주사 등이 대표적이다. 자장의 주요 연구성과는 앞에서 언급한 염중섭(자현)의 박사학위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3) 이에 대해서는 별고 “자장의 문헌기록과 흥법 및 추념 사찰”(정암사, 2021, 『문헌자료집-정암사의 역사와 자장율사』)에서 다루었다.

4) 본고는 수마노탑 국보 승격 1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 “자장율사와 정암사의 역사”(정선 하이윈 팰리스호텔 대회의실, 불기 2565(2021). 11.12. 13:00-18:00)에서 발제한 원고를 가운데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 및 분장 사실을 보강 정제한 것이다.

5)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https://kabc.dongguk.edu/

6) “傳言 是庵初始於唐貞觀丙申 羅代人慈藏法師入中國 奉舍利還安于此塔”(李大蓮, 『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 「江原道麟蹄縣雪岳鳳頂庵七創事蹟記」(1870年作).

7) “吾東則新羅慈藏所傳冣多 五臺鷲棲太白雪岳等名山崇奉”(「覺皇寺 釋迦世尊眞身舍利塔碑銘」(1930年作) (대한불교조계종 불학연구소, 2000).

8) 앞서 언급한 강우방이나 신대현 등의 논저도 그러하여 아쉬움을 주고 있다.

9) 신대현(2003)의 『적멸의 궁전 사리장엄』에 따르면 전국의 사리장엄을 집성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모두 37소라고 한다. 그 가운데 자장의 진신사리 봉안 도량을 제외하면 32소에 이른다. “梁遣使與入學僧覺德 逸佛舍利 王使百官 奉迎興輪寺前路”(『三國遺事』 卷3, 塔像4, 前後所將舍利); “國史云真興王大清三年己巳 梁使沈湖送舎利若干粒”(『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4, 眞興王 10년(549) 봄).

10) “國史云真興王大清三年己巳 梁使沈湖送舎利若干粒 善徳王代貞觀十七年癸夘 慈藏法師所將佛頭骨佛牙佛舎利百粒 佛所著緋羅金㸃袈裟一領 其舎利分爲三 一分在皇龍塔 一分在太和塔 一分并袈裟在通度寺戒壇 其餘未詳所在”(『三國遺事』 卷3, 塔像4, 前後所將舍利).

11) 「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12) “蒙兵至東京 燒黃龍寺塔”(『高麗史』 卷23, 高宗世家 25年(1238) 潤4月).

13) “官解初尋寺 僧閑不閉門 山光水色映晴軒 詩景自成繁 古調聞瑤瑟 高吟倒綠尊 歸來長笛月明昏 前路曲通村.” ; 李原, 「次太和樓詩」, 『容軒集』 卷2, 詩, “公餘隨意上高樓 地暖冬天却似秋 山聳奇峯分萬點 江交巨海自東流 梅花初發雪晴岸 草色遙看雨後洲 待得春來增景槩 會將詩酒此重遊”(李原, 『容軒集』 卷2, 「次蔚州太和樓詩」, 詩).

14) “慈藏法師躬入西國而得釋迦如來頂骨齒牙舍利及金點袈裟若干藏之於梁山.”(月峯 雙式, 『乾鳳寺本末寺誌』, 「釋迦如來齒相立塔碑銘幷序」).

15) “後往溟州今江陵也五臺山 登地爐峰 奉安佛腦及頂骨 立碑於伽羅墟碑則隱而不現 以紀其蹟 因創月精寺 建十三層塔 奉安舍利三十七枚於塔心今傳優婆掬多之舍利塔者誤也 已上出元曉所撰傳 一云師旣還國 以梵僧所授佛衣佛鉢菩提腦骨等 入安皇龍寺 仍留其寺而供養.爲欲面見文殊 尋往溟州五臺山 到今月精寺地 假立草庵 留至三日 于時是山陰沉不開 未審其形而去 後又復來創八尺房而住者凡七日云云已上出臺山本傳記”(閔漬(1248-1326), 『五臺山事蹟』, 「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 ; “臺之下有獅子菴 慈藏法師在唐土 淂獅子駄舍利頂骨而還 久住於此因名獅子菴”(『五臺山事蹟』(1914), 「山中散記」).

16) “師以梵僧之說龍王之囑 具聞善德王王欣然 入內殿與群僚禮拜供養拜 師爲國統一如師奏建皇龍寺九級塔 而藏舍利次竪月精十三層塔 而藏舍利因開中台 而安佛顱”(『江原道旌善郡太白山淨巗寺事蹟』).

17) “吾佛世尊示入涅槃以佛頭骨齒牙指節舍利念珠袈裟貝葉等塔廟事付囑文 殊文殊入定五臺以待時緣千有餘年東國慈藏律師求法西遊受文殊所傳如 上數寶歸供養而奉安於淸□之五坮鷲棲之通度及此天倚峯下三葛盤之地”(「정암사 수마노탑지 제3석」, 1874년작).

18) “葛來寺 新羅時有慈藏法師者 自小白山從葛蔓來至于此”(吳宖默, 『叢瑣錄』 13, 「㫌善葛來寺枯木記」); “唐太宗貞觀十九年乙巳 刱建世尊水瑪瑠寶塔”(吳宖默, 『原道旌善郡叢鎖錄』, 「太白山淨巖寺事蹟」).

19)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https://kabc.dongguk.edu/

20) “唐貞觀十二年[戊戌] 戌新羅僧慈藏入唐清凉山奉 釋迦頂骨舍利牙齒袈裟數珠而還藏于五臺鷲棲獅子葛來四山”(尹容善(1829-?), 「金剛山乾鳳寺釋迦如來靈牙塔奉安碑」).

21) “在昔新羅法師慈藏 … 唐文宗太和年間法師飛一錫入西域頂禮文殊躬受佛旨奉釋迦眞骨牙齒及眞舍利百餘枚及伽梨拂塵三千佛織錦三畵幀及貝葉圓詮金銀字華嚴法華長壽梵網維摩恩重等經數百餘凾白馬載輸東還本國擇名山以藏之若五臺之中菴鷲西之通度母岳之金山祖鷄之松廣皆法師卜建之刹也逮太和六年壬子春法師以釋迦牙齒一枚舍利十枚及僧袈一領拂塵一衲親授珍山又授金銀字華嚴法華恩重經各二部來卜華山創開道場鍾樓八金堂九梵閣二層法殿三層巽麓之蒼壁上建千佛殿奉眞舍利及三畵幀是爲珍山願佛之也”(『增補校正 朝鮮寺刹史料』, 「廣德寺 事蹟記」).

22) 자장이 금산사와 송광사를 창건하였다는 사실은 기문의 신뢰성을 떨어드리고 있는 것이지만, 전체적인 내용까지 모두 부정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23) “石(右)塔昔(者)書載錄 大平興國四年起始 大平興國七年壬午歲畢造 焉諸惱流社長化主施主記于後列” 「母岳山金山寺 五層石塔重創記」(이분희, 2013: 139).

24) “至新羅善德仁平三年 迺皇唐太宗貞觀十載 爰有法師慈藏 自愧匏繫東隅 迺奮杯渡西笑 跡之占 須訪謁曼殊聖像於淸凉 僧之眞 必叅拜香圓國師於雲際 受佛法頒世之冥讖 奉山川鎭脉之祕言 師乃劒化鵬溟 刀折鰈海 建貧婆奉伽梨者 一曰鷲栖之通度 脩伽藍安舍利者 二曰龍皇與金山 韙㦲”(『無竟集』 卷2, 「金溝縣母岳山金山寺事蹟詞引」).

25) “昔慈藏法師入中國雲際寺 得佛頭骨與舍利百枚 而還安其頭骨 於梁山通度寺 分藏舍利於四處名山 金山卽其一也”(「湖南金溝縣東母岳山金山寺大法堂重修記」).

26) “峩峩丈六立金身 劉帝銅仙是後身 知爾三千東海路 今來應伴白衣神”(『海石遺藁』 卷2, 「金山寺(金溝)」, 詩).

27) “東國寺刹有三寶 金山寺有丈六佛 故曰佛寶 海印寺有龍藏 故曰法寶 此寺謂之 僧寶以出普照以下十六國師也”(『續南遊錄』), 『續南遊錄』은 1828년(순조 28)에 호남 12군현을 유람하고 기행록으로‚ 1책 14장의 필사본이다(규장각 古4790-20 1책 14장. 판본 필사본, http://e-kyujanggak.snu.ac.kr

28) 현재 삼보사찰이라 불린 기록은 조선 후기 淵泉 洪奭周(1774~1842)가 1832년(순조 28)에 지은, 아래와 같은 「淵泉翁遊山錄」의 기록이 가장 빠른 것인 듯하다(洪奭周(1774-1842), 『淵泉翁集』, 「淵泉翁遊山錄」).

29) “春三月甄萱子神劍 幽其父於金山佛宇 殺其弟金剛”(『高麗史節要』 卷1, 太祖 18년(935) 3월); “百濟王甄萱 爲其子神劍幽於金山佛寺 逃奔錦城”(李齊賢(1287-1367), 『益齋亂藁』 卷9上, 「有元贈敦信明義保節貞亮濟美翊順功臣 太師開府儀同三司尙書右丞相上柱國忠憲王 世家」, 世家 19年 1月).

30) “舊記以爲寺初刱慈莊大師在唐貞觀幾年 … 又寺舊有佛世尊齒牙舍利 各一箇十襲珍藏 不知幾千百年 今老釋運宏慧倡儀設浮屠而安 … 崇禎三己巳四月 日 鐫.” ; 船月 竺什, 「安心寺事蹟碑 陰記」, “寺之初創慈藏法師 貞觀十二年戊戌二刱”(전북역사문화학회, 2007, 232-244).

31) “善州冷山麓 有石積寺古址 又有石塔 薶塵土微露頂 而或間年或間月 發瑞光 樵夫金界丈者 感異夢 獲奉金凾舍利一枚於塔下 則白玉色薏苡 大凾之方面 刻諸八金剛四菩薩 以此決知釋尊之舍利 獻于桃李寺者 殆三十餘載 … 在我東桃李寺爲初 按通度寺蹟 羅之慈藏 入唐求舍利百枚而還 據此則石積寺 亦藏師時所立邪”(好隱 有璣(1707-1785), 『好隱集』 卷1, 「桃李寺石鍾記」).

32) “海峰集桃李寺石甕記云 冷山之麓有石積寺古址 佛舍利塔 現夢於洞居金界丈 丈得舍利一介 大如苡薏 其色如白玉 現放光矣 桃李居釋體眼大士 廣求施緣 造此石甕塔奉安”(「桃李寺事蹟記」).

33) 1977년 사리함에서 나온 사리는 무색 투명하고 둥근 콩알만 한 크기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사리 중 가장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 사리구는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사리 1과를 봉안하기 위해 1987년 석가여래사리탑을 세웠다(장충식, 1977, 2-7).

34) 장충식의 논고에 의하면 사리공을 조사할 당시에 사리기 외에 17세기 백자편만이 조사하였다. 장충식, 위의 논문, 3-4. 필자는 석옹기를 지은 홍명원의 생몰연대와 일치하는 것으로 볼 때 세존사리탑은 17세기 이후에 조성되어 8세기경에 제작된 사리함를 봉안하였다는 견해에 동의하는 바이다(홍성익, 2013, 68-70).

35) 대원사에는 자장율사가 조성하였다는 다층석탑이 보물 제1112호로 지정되어 있다(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하지만 탑의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조선전기로 추정되고 있다(고유섭, 1954; 정영호, 1998).

36) “大芚寺入門房上梁文曰 慈藏法師 自唐來 泊舟於塞琴百舫浦 頂舍利入大芚時 先由臨井基 建臨井堂 立塔安舍利一枚 九十九介 安黃龍月精太和通度 故泊舟浦名百舫 入寺處 名入門房 逐龍誦呪 故名精進堂 抱井建堂 故臨井堂 井變無靈 故鶴仙寮 浦名寺名 皆慈藏法師之古跡”(『東師列傳』 卷1, 「慈藏法師傳」).

37) “通度寺 在鷲捿山 中唐貞觀十七年 新羅善德王時 創建也 事蹟具在牧隱 李穡記文中 而佛殿不設金像殿 後鍊石爲壇中 有石龕 僧傳釋迦如來眞身頂骨舍利四放一片牙齒指節所藏云 是以八道諸剎推稱宗剎”(『輿地圖書』 補遺篇 慶尙道 梁山郡邑誌 佛宇).

38) “自慈藏以後 至今一千二百餘年之間 名僧巨釋 出入常住 爲國之光 化生之事 不可勝記”(應雲 空如(1794-?), 「通度寺記」, 『應雲空如大師遺忘錄』.).

39) “法堂中無佛像 只設卓床 法堂後有石鍾塔 四面圍以石欄粉墻 而是乃釋迦如來舍利百枚及頭骨指節所藏處也 故是爲佛之宗家云 而更不以佛像設儀 若供佛時 則輒開法堂後門 以通石塔之路云矣”(李��永(1677-?), 『日槎集略』 地, 7월 8일(무술)).

40) “淸泰十八年 太祖用術家之言 作寺其間 以處方袍之學律乘者 名之曰開國寺”(『東文選』 卷69, 「重修開國律寺記」, 記).

41) “王備儀仗 奉佛舍利 步至十里所開國寺 安之”(『高麗史』 卷2, 定宗世家 元年(946) 1月); 『松京廣攷』 卷8, 佛宇 1, 開國寺).

42) “是月 修開國寺塔 安舍利 設戒壇 度僧三千二百餘人”(『高麗史』 卷4, 顯宗世家 9年(1018) 潤4月); “命尙書左丞 李可道 往取慶州 高僊寺金羅袈裟佛頂骨 昌林寺佛牙 並置內殿”(『高麗史』 卷4, 顯宗世家 12年(1021) 5月 14日).

43) “故我南山宗師木軒丘公 以辨才義解 賜號定慧妙圓玆行大師 … 自至理癸亥 迄泰定乙丑 三秋而畢功 作慶會以落厥成 見聞者 莫不嘆賞焉 於是 其徒之來圖所以不朽”(李齊賢(1287-1367), 『益齋亂藁』 卷9 下, 「重修開國律寺記」; 『東文選』 卷69, 記).

44) “洪武十二年己未秋八月廿又四日 南山宗通度寺住持圓通無礙辯智大師沙門臣月松 奉其寺歷代所藏慈藏入中國所得釋迦如來頂骨一 舍利四 毗羅金點袈裟一 菩提樹菜若干 至京”(李穡(1328-1396)『牧隱文藁』 卷3, 「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 記).

45) “幸俗離寺, 取觀通度寺所藏佛骨·設利·袈裟”(『高麗史』 卷40, 恭愍王世家 11年(1362) 8月 15日).

46) “略云 新羅中葉 釋尊舍利來入東方施於名山 皆曾建塔而 此山 則舍利一顆奉安於寺中閱千載 而完然如昨 信士白貴善捨家貲 竪塔於寺之白虎邊 因立碑 記之云爾 崇禎紀元後七十五年四月日(康熙四十九年) 肅宗三十六年庚寅”(汝寂 慶秀, 『朝鮮寺刹史料』 上, 「報恩郡俗離山法住寺世尊舍利塔碑銘并序」 126-127); 충청북도, 1982, 『寺誌』 ; 한국불교연구원, 1975, 『법주사(한국의사찰 5)』 참조.

47) “曾見俗離山法住寺 亦有丈六佛 其高不下四五十丈 意者造像者務極壯大 而不復以丈六爲準也 僧曰新羅慈藏禪師所建 輿地勝覽云甄萱刱是寺 未詳孰是.”(『頭陀草』 冊 17 雜著, 「南遊錄 一」).

48) “歲丁巳四月 倭賊來 其意欲得舍利也 … 无所安厝 遂奉以來 … 奉安于松林寺”(『東文選』 卷73, 記).

49) “在龍首山城內”(『新增東國輿地勝覽』 卷4, 開城府 上 佛宇 松林寺); 李穡(1328-1396), 「…又踰西嶺 則松林寺在焉 入拜舍利 下山則唐寺泉洞也 ….」, 『牧隱詩稿』 卷26, 詩 ; 李穡(1328-1396), 「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 『牧隱文藁』 권3, 記 : 『東文選』 卷73, 記 ; 李穡(1328-1396), 「書通度舍利記後」, 『牧隱詩藁』 卷24, 詩. 참고로 544년(진흥왕 5) 陳에서 귀국한 明觀이 가지고 온 佛舍利를 봉안하기 위하여 창건한 칠곡 松林寺와는 전혀 별개의 사찰이다.

50) “佛頭骨捨利 菩提樹葉經 舊在通度寺 因倭寇移置留後司松林寺 遣人取來”(『太祖實錄』 卷9, 5年(1396) 2月 22日).

51) “命安平大君 瑢, 藏佛骨于興天寺舍利閣 佛骨本在此閣 嘗取入禁中 外人莫之知, 至是還之”(『世宗實錄』 卷82, 20年(1438) 7月 7日); 『世宗實錄』 卷81, 20年(1438) 6月 26日(戊寅) ; 『世宗實錄』 卷81, 20年(1438) 6月 28日(庚辰) ; 『世宗實錄』 卷81, 世宗 20年(1438) 6月 30日(壬午); 『世宗實錄』 卷82, 20年(1438) 7月 6日(戊子).

52) “命還佛骨舍利及佛象 於興天寺”(『世宗實錄』 卷82, 20年(1438) 7月 11日).

53) “是夜貞陵寺 (寺名興天 我太祖葬神德王后于貞陵 建寺其東 其後陵移他處 寺仍舊焉) 五層舍利閣災”(『中宗實錄』 권10, 5年(1510) 3月 28日).

54) 淸虛 休靜(1520-1604), 「普賢寺釋迦如來舍利碑」, 『淸虛堂集』, 補遺 篇 : 權瑎, 「龍淵寺釋伽如來浮屠碑」, 朝鮮總督府, 1919, 『朝鮮金石總覽』 下 : 月峯 雙式, 「乾鳳寺釋迦齒相立塔碑」, 朝鮮總督府, 1919, 『朝鮮金石總覽』 下. 또한 경주 북쪽 비학산 법광사의 승려 明玉과 曉軒 등이 진평왕의 願堂이었던 법광사 탑을 중건시 발견된 석가불사리를 1747년에 탑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불사리도 아마 통도사 불사리인 듯하다(申維翰, 「法廣寺釋迦佛舍利㙮重修碑」, 『靑泉集』 下; 조동원, 1982).

55) “令一國興仁可謂世之尊寶也”(『淸虛堂集』, 「娑婆教主釋迦尊金骨舍利浮圖碑」(1603年作), 補遺 篇).

56) “至萬曆二十年 日本海兵入國之南 焚之蕩之 億兆爲魚肉 禍及浮圖 其寶將爲散失 悶欝之際 適義僧大將惟政 領兵數千盡心守 護得完全 然政不無後慮 故以金骨舍利二凾 密似乎金剛 使病老安焉 病老感受欲安之 然病老竊念 金剛近水路後 必有此患安金剛 非長久計也 向海兵之撥浮圖 全在金寶不在舍利也 取寶後視舍利如土也 然則不若寧修古基 而安焉云 卽以一凾還付于政政 然其計受凾 卽還古基而安鍾焉 其一凾則病老 自受持謹入太白山欲建浮圖 靜獨力無何 命門人智正法蘭之輩 幹其事使安鍾”(『朝鮮金石總覽』 下, 「普賢寺釋迦如來舍利碑」).

57) 『靈骨碑銘』은 휴정의 친필로 작성된 「娑婆敎主釋迦世尊靈骨舍利浮圖碑」와 「慈藏律師行蹟」이며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58) “萬曆壬辰之難 … 松雲奉詣金剛 問於西山大師休靜 … 以其一凾授門人禪和等 安於太白之普賢寺 又以一凾付松雲 還之通度 令改塔以安之 盖不忘本也 時嶺南新中燹衆 皆鳥鼠竄 未暇興工役 而松雲有日域衘命之行 仍奉以爲願佛比還 而松雲化其凾留在雉岳覺林寺 其徒淸振移奉於毘瑟山之龍淵寺 後大衆相與謀設塔藏之 又愳其有盭乎兩師之遺意 奉一顆還安於通度 留一顆安于龍淵之北麓 歲癸丑五月五日塔成 高五尺五寸”(權瑎(1648-1723), 『朝鮮金石總覽』 下, 「龍淵寺釋迦如來浮屠碑」(1676年作); 이러한 내용은 梵海 覺岸(1820-1896)의 『東師列傳』 「慈藏法師傳」과 李能和의 『朝鮮佛敎通史』 「達城郡毘瑟山龍淵寺浮圖奉安世尊舍利」에도 실려 있다.

59) “壬辰倭賊之亂 寺盡焚蕩”(李墍, 『大東野乘』, 『松窩雜說』).

60) “壬辰兵燹 松雲適到惜其廢 使坦玉草刱 其制不及古復 令印岑拓舊址增舊制”(任守幹, 「琵瑟山龍淵寺重修碑」(1722年作)); 권해가 지은 「석가여래비」에는 1673년에 사리부도탑을 완성하였다고 하였으나, 용연사 중창 시 봉안하였다가 이때에 부도탑에 봉안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61) “聞夫於過去世 慈藏法師躬入西國 而得釋迦如來頂骨齒牙舍利 及金點袈裟若干 藏之於梁山通度寺 未知其幾千年之流來矣 中間倭來取去 擧國失望我國 泗溟大禪師惟政 奉使于日本 還取齒相一十二枚 藏之於乾鳳之樂西庵 而人皆珍玩者 亦閱年禩矣”(月峯 雙式, 「釋迦如來齒相立塔碑銘幷序」);“先是新羅慈藏法師入西竺 得如來牙十枚 後爲倭所掠去 師乃懇辭乞還 以藏于寺 卽石塔是也”(南公轍(1760-1840), 「乾鳳禪院泗溟大師紀績碑銘」, 『金陵集』 卷16, 碑銘); “禪居號以樂西菴 道在慈藏奉仙凾 衣鉢槿花花影裏 孰能經旨味菰甘.” ; 尹容善(1829-?), 「金剛山乾鳳寺釋迦如來靈牙塔奉安碑」(1906年作), “唐貞觀十二年[戊戌] 戌新羅僧慈藏入唐清凉山奉 釋迦頂骨舍利牙齒袈裟數珠而還藏于五臺鷲棲獅子葛來四山本朝壬辰之難日本人以為寶持去其後甲辰僧泗溟啣 命入日本徧尋而奉還分藏于諸寺而靈牙十二枚藏杆城之乾鳳寺 … 大韓 光武十年丙午 立”(松桂 懶湜(1684-1765), 『松桂集』, 「樂西庵」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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