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지리산 화엄사는 신라시대 창건되어 현재까지 예경과 공양이 이어지는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화엄사는 544년에 고승 연기(緣起)1)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발표된 연구(황태성(무진), 2022: 16-22)를 통해 8세기 중반 황룡사의 연기법사가 창건한 것으로 정리되었다. 544년 창건을 기록했던 중관혜안(中觀海眼, 1567∼?)은 1636년 편찬한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湖南道求禮縣智異山大華嚴寺事蹟)』(이하 『화엄사사적』으로 표기함)에서 자료의 부족을 호소하였고(한국학문헌연구소 편, 1997: 7-8), 전란으로 황폐했던 임진왜란 전후의 사정을 생각하면2) 기록의 혼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황룡사는 당 태종에게 화엄을 강설하고 화엄을 최초로 신라에 가져온 자장(慈藏, 594/599∼653/655)이3) 주석했던 왕실 직할 사찰이었다(이행구(도업), 1995; 염중섭(자현), 2016). 8세기 중반이 되면 황룡사의 화엄 고승들의 활동이 문헌자료에 보인다. 그렇다면 황룡사는 통일신라시대 자장계 화엄의 전통이 이어지는 사찰로 판단해도 무리가 없다. 신라 화엄을 대표하는 의상(義湘, 625∼702)과 원효(元曉, 617∼686)는 황룡사와 연관 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화엄사 창건주 연기가 편찬한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新羅 白紙墨書 大方廣佛華嚴經)』(이하 『백지묵서 화엄경』)과 대각국사의천(大覺國師義天, 1055∼1101)의 『신편제종교장총록』4)과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5) 을 보면 연기는 당대 화엄을 대표하는 황룡사의 고승이었다. 연기는 황룡사의 고승이었기 때문에 자장의 화엄 계통을 이은 화엄사의 창건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화엄사를 창건했던 연기의 자장계 화엄 계통이 고려 건국 이후 의상의 화엄 계통으로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후삼국시대 관혜(觀惠, ?∼?)의 남악 자장계 연기의 화엄은 희랑(希朗, ?∼?)의 북악 의상계 화엄과 대립을 하고 있다. 이러한 대립을 고려 초 균여(均如, 923∼973)가 의상계 화엄으로 통합하고 있다. 또한 904년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의 해동화엄 십산6)에 화엄사는 신라의 대표적 화엄 사찰로 서술되고 있다. 이후 고려 후기 1281년 일연의 『삼국유사』에 화엄사는 의상전교 십찰7)의 의상계 화엄 사찰로 서술되고 있다. 이를 통해 화엄사의 자장계 연기의 화엄은 고려 초·중기까지 이어오다 고려 후기가 되면 의상계 화엄으로 획일화된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본 논고는 화엄사 창건주 연기의 자장계 화엄 계통을 연구하고, 고려 초 균여의 화엄 통합 이후 고려 후기 의상계 화엄으로 획일화되는 계승의 관계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더불어서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종과 세종 이후 화엄사의 창건주 연기와 화엄 전통성은 퇴색되고 사라지는 과정도 검토하려 한다.
Ⅱ. 통일신라시대 화엄사 창건주 연기법사의 황룡사 자장계 화엄
1636년 편찬된 『화엄사사적』 이전 연기와 화엄사에 관한 문헌자료는 네 가지가 있다. 네 가지 문헌자료는 755년 완성된 국보 제1965호인 『백지묵서화엄경』8)과 11세기 말 쓰인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1487년 쓰인 『추강선생문집(秋江先生文集)』,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1978년 발견된 『백지묵서 화엄경』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으로 황룡사의 승려 연기가 죽은 아버지를 위해9)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지역을 주축으로 만들었다.10) 8세기 중엽 창건된 화엄사의 창건주 연기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사료였다. 『백지묵서 화엄경』은 황룡사 연기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로 일단락시킨 결정적 문헌자료이다.
『대각국사문집』에는 화엄사 및 연기법사와 관련한 중요한 두 가지 기록을 볼 수 있다. 「화엄사예연기조사영」과 「유제지리산화엄사」이다. 의천은 1092년 무렵 화엄사에서 연기의 진영(眞影)을 참배하면서, ‘3천여 문도를 거느리고 원교(圓敎) 즉 화엄의 종풍(宗風)을 드날린 인물’이라는 평을 남기고 있다.11) 또한 화엄사에 대한 감회를 「유제지리산화엄사」의 시로 남기며, 효대(孝臺)를 언급하여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의 연기와 어머니의 관계를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12)
의천은 화엄사를 방문하며 연기의 진영을 참배하고 연기의 화엄의 종풍을 찬탄하였다. 이는 고려 1092년에는 화엄사를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로 연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92년 화엄사를 대표하는 ‘연기’라면 호남지역을 움직여『백지묵서화엄경』을 사경한 754년 황룡사의 연기와 같은 인물로 판단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조선시대 화엄사를 설명하는 두 문헌은 연기와 어머니의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조선 초기 인물인 남효온의 『추강선생문집』 1487년 10월 7일의 내용에 보면 화엄사의 설명과 함께 연기가 화엄사를 창건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연기의 어머니와 <사사자삼층석탑>의 관계를 화엄사 승려가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연기를 제자 천 명을 거느린 선사로13) 본 점이다.
밥을 먹은 뒤에 내려와서 황둔사(黃芚寺)를 구경하였다. 절의 옛 이름은 화엄사(花嚴寺)로, 명승(名僧) 연기(緣起)가 창건한 것이다. (···) 연기는 옛날 신라 사람으로, 그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서 절을 세웠다. 제자 천 명을 거느리고서 화두(話頭)를 정밀히 탐구하니, 선림(禪林)에서 조사(祖師)라고 불렀다.14)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를 알 수 없는 연기(煙氣)가 화엄사를 창건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어서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로(俗云) 연기와 어머니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리산에 있다. 승려 연기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화엄사를 건립하였다. (···) 석상이 어머니를 받치고 서 있는데, 세상 사람 이야기로 ‘연기와 그 어머니의 화신(化身)’이라고 한다.15)
이상의 문헌을 보면 연기가 화엄사를 세운 인물로 확인된다. 정리하면 1092년 의천의 연기(緣起)는 화엄사를 대표하는 승려로 서술되어 있다. 1487년 남효온의 연기(緣起)는 화엄사를 창건한 승려로 나타나지만, 선종의 조사로 서술되어 있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연기(煙氣)는 화엄사를 창건한 승려이지만 어느 시대 사람인지 모른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국의 화엄은 의상이 대표한다. 의상으로 대표되는 의상계 화엄은 8세기 중반 무렵부터 드러나기 시작하여 고려 후기에 완성되는 것이다. 의상은 신라와 당의 전쟁이 시작되는 670년 신라에 귀국하고 있으며, 전쟁이 종결에 이르는 676년 영주에 있는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다.
16년 봄 2월에 고승(高僧) 의상(義相)이 왕의 명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였다.16)
함형(咸亨) 원년(670년) 경오(庚午)에 귀국하여, (···) 의봉(儀鳳) 원년(676년)에 의상이 태백산(太伯山)에 돌아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대승(大乘)을 널리 펴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17)
이러한 의상의 이동은 문무왕이 당나라와 전쟁을 치르기 시작하며 경주와 먼 영주 땅 오지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18) 부석사는 작은 움막이거나 초가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김복순, 2002: 262). 또는 부석사가 『삼국사기』의 문무왕의 명령으로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을 근거로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 창건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전해주, 1994: 93-94). 문무왕과 의상이 모종의 합으로 영주에 화엄 사찰인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할 자료는 없다.
의상은 부석사를 창건한 676년 이후 입적할 때까지 경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의상의 생전에 의상의 화엄 세력은 신라 화엄을 이끄는 집단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의상의 제자들이 활동하는 8세기 중반부터 의상의 화엄은 드러난다(김복순, 2008: 139-140). 분명한 것은 의상이 당대 신라 화엄을 이끌었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자가 집단을 이루면 스승을 높여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의상계 화엄은 의상의 제자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8세기 중반부터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다.
문헌으로 확인되는 신라 화엄의 최초 기록은 자장이다. 자장은 화엄을 신라 최초로 들여온 인물이다. 그리고 당나라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원효도 화엄을 바탕으로 자신의 불교 사상을 확립하고 있다.
『화엄경(華嚴經)』의 “일체 무애인(無㝵人)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이름을 무애라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19)
자장의 화엄에 관한 관련 문헌을 정리하면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된다. 먼저 장안 공관사(空觀寺)의 법상(法常)은 자장이 존중하여 자주 참배하러 가고 교류하였는데, 법상이 『화엄경』을 연구하기 시작한다.20) 둘째, 자장은 장안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의 암자에서 639년에서 641년까지 수행을 하였다.21) 셋째, 중국 오대산 북대(北臺)에서 기도하던 자장이 꿈속에서 문수보살 석상에게 받은 게송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則見盧舍那.”은 『화엄경』 권16 「수미정상게찬품제14(須彌頂上偈讚品第十四)」의 내용이다.22) 넷째, 신라로 돌아온 자장이 자기 집을 원녕사(元寧寺)로 만들어 낙성식을 할 때 잡화(雜花)23) 1만 송을 강론한다.24)
자장 이전에 신라에서 화엄과 관련된 문헌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자장이 중국에 불교를 배우러 간 유학 시기에 『화엄경』을 접하고 배웠던 것은 확인된다. 자장은 신라로 귀국하여 자기의 집을 원녕사로 만들고, 낙성식을 하며 『화엄경』 1만 송을 강론했다. 이것은 자장이 화엄에 대한 이해의 경지가 깊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신라에서 『화엄경』을 전파하고, 자장계 화엄 집단이 구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장의 신라에서의 위치를 보았을 때 이것은 충분한 가능성을 확보해준다.
신라에서 자장의 위치와 역할을 볼 때 자장의 화엄 집단이 구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장은 분황사에 신라로 귀국한 643년 3월 16일25) 잠시 머문다. 신라에 도착한 자장을 부른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은 자장에게 대국통(大國統)을 맡긴다. 대국통 자장은 황룡사 2대 주지에 취임하며, 선덕여왕에게 구층 목탑의 건립을 건의한다.26)
자장은 이후 선덕여왕의 도움을 받으며 신라의 승단을 정비하는 작업을 진행한다(염중섭(자현), 2016: 47-97). 선덕여왕으로 대표되는 신라 중앙정치권력 집단과 합심하여 신라의 불교를 정돈하려는 노력은 신라에 불교가 주도 종교로서 자리 잡게 하였다. 자장에 의해 신라의 열 집 중에 여덟, 아홉 집은 수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였기 때문이다.27) 이러한 선덕여왕과 신라 중앙정치권력 집단은 자장을 밀어주고, 자장은 신라의 불교를 정돈하여 불교를 신라의 주도적 종교로 자리 잡게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룡사에 자장의 화엄 계파가 형성되었을 것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자장이 황룡사에 주지로 있으며 국가적 불교 활동하는 과정에 자장계 화엄이 만들어졌다고 판단하는 것은 합리적 판단이 된다.
자장의 죽음 이후 신라에서 자장의 위치를 대신한 것은 같은 당나라 유학파인 의상과 신라 국내파인 원효이다.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시기가 되면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의상은 영주 부석사로 물러나게 된다.
의상과 원효는 황룡사와 관련이 나타나지 않는다. 의상과 원효 이후 그 제자들의 활동도 황룡사와의 연관은 찾을 수 없다. 원효가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설법했다는 기록이 확인되지만28), 황룡사는 진골 출신 이외는 출입할 수 없는 왕실 사찰이었기에 일시적인 상황일 뿐이다. 의상의 화엄을 대표하는 신림(神林)과 표훈(表訓)은 불국사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29) 의상의 화엄은 제자들도 황룡사와 연관이 없다. 여기서 황룡사의 화엄은 의상의 화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경덕왕 재위 기간인 8세기 중반 무렵 『삼국유사』에는 화엄 승려가 갑자기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경덕왕은 “황룡사의 대덕(大德) 법해(法海)를 청해 『화엄경』을 강의하도록 했다.”라는30) 기록이 있다. 또한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 4권이 794∼799년 일본에서 필사되는데, 서두(書頭)에 “황룡사 석표원집(表員)”이 적혀 있다.31) 『화엄경문의요결문답』은 8세기 중반에 찬술된 것으로 보이며(정재영, 2009: 37; 박미선, 2011: 40), 황룡사의 승려 표원이 주인공이다. 표원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은 신라의 여러 화엄 고승의 『화엄경』에 대한 강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의상의 『화엄경』 강의 인용은 세 차례로32) 다른 고승의 인용에 비해 적은 수다(염중섭(자현), 2016: 36). 한번은 비판적인 인용을 하고 있는데(김상현, 1991: 57), 이것은 표원이 의상계 화엄이라면 어려울 것이기에 의상계와 구별되는 화엄으로 보는 근거가 된다.33)
황룡사의 연기가 『백지묵서화엄경』 사경 불사를 시작하는 8세기 중반의 시점에 황룡사 화엄의 고승인 법해는 경덕왕이 청하여 『화엄경』을 강의하고 있다. 또 다른 황룡사 화엄의 고승인 표원의 『화엄경』 강의 문집을 일본에서 필사하고 있다. 이것은 8세기 중반에 황룡사는 자장계 화엄이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는 증거자료가 된다. 황룡사에 자장계 화엄이 집단을 이루지 않는다면 화엄을 대표하는 고승도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표원의 의상에 대한 비판적 견지의 강의 인용을 보아 황룡사의 화엄은 자장계 화엄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근거 자료가 된다. 황룡사에 자장이 아닌 다른 화엄의 세력에 대한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이다. 『백지묵서화엄경』은 80 『화엄경』으로 두 축인 권1∼10와 권44∼50이 1978년에 발견되었다. 두 축에서 모두 발문이 확인되었으며, 사경의 발원자는 황룡사(皇龍寺) 연기법사(緣起法師)로 밝혀졌다.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면서 호남지역을 움직여서 80 『화엄경』의 사경 불사를 하고 있다. 또한 의천은 화엄사에서 연기의 진영을 참배하고 있으며, 연기의 문집을 간행하고 있다. 『백지묵서화엄경』을 사경한 연기는 의천이 참배한 연기이며, 화엄사의 중요한 대표적인 고승이다. 또한 연기는 황룡사의 연기이다. 이것을 종합하면 연기는 황룡사의 화엄을 이은 고승이며, 황룡사 화엄은 자장계 화엄이기에 자장의 화엄을 이은 고승이 된다.
황룡사는 신라 중대에서 후대까지 자장의 화엄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754년 『백지묵서화엄경』의 황룡사 연기는 자장의 화엄 전통을 갖는 승려라고 단정해도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룡사의 연기는 화엄의 세력 확장과 맞물려서 호남지역을 동원하여 개인적인 염원의 사경 불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세력의 연기라면 지금의 화엄사를 창건하였다 해도 무리가 없다. 또한 의천의 화엄사 연기와 『백지묵서화엄경』의 연기가 동일 인물이란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연기는 화엄사의 중요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다시 종합한다면 자장의 화엄을 연기가 이었으며, 화엄사는 자장계 연기의 화엄 사찰이라 정의해도 무리가 없다.
의천은 화엄사에서 전하지 않는 「연기본전(緣起本傳)」을 보았다고 한다. 본전운(本傳云)의 본전은 「연기본전」을 말하는 것이다(염중섭(자현), 2016: 35). 「연기본전」은 연기가 화엄사의 중요 인물이란 점을 다시금 확인해 준다. 더하여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보면 의천이 사망하는 고려 1100년대까지 연기가 화엄사의 대표 고승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또한 의천은 연기가 “훌륭한 논장(대승기신론)과 거룩한 경전(화엄경)에 두루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라고 말한다. 더불어서 “원교(화엄)의 종풍을 해동(신라)에 가득하게 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고려 의천이 말하는 연기는 신라를 대표하는 화엄에 능통한 황룡사 출신 자장계 화엄의 승려임이 다시금 확인된다.
Ⅲ. 화엄사의 고려시대 의상계 화엄 통합과 획일화 그리고 조선시대 화엄 상실
남악은 지리산(智異山)을 의미한다. 신행(神行, 704∼779)의 비문34)은 813년 건립되었으며, 지리산을 의미하는 ‘남악’의 서술 표현이 최초로 나타나는 문헌이다. 비문을 보면 “남악(南岳) 단속(斷俗)의 사(寺)”35)라고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남악은 지리산을 뜻하는 또 다른 이름이며, 단속은 지명이다. 이후 남악 지리산의 표현은 904년 편찬된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에 나타나는 “남악 지리산 화엄사”라는 서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어서 952년 간행한 『조당집(祖堂集)』에는 “남악 실상사”36)라는 표기가 보이는데, 실상사는 지리산에 있으며, 남악은 지리산을 지칭한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표현은 고려 후기 일연이 1276년 무렵 편찬한 『삼국유사』의 “남악 화엄사”라는 서술로도 확인된다. 이상으로 남악은 지리산을 지칭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북악은 의상계 화엄을 대표하는 부석사를 뜻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삼국 시기 관혜는 남악 화엄사의 화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관혜가 남악을 대표한다는 것은 북악 의상계 화엄과는 구별되는 계파를 이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균여(均如, 923~973)가 북악의 화엄을 이었으며, 화엄을 통합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러한 표현은 화엄사가 균여에 의해 의상의 화엄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관혜의 남악 화엄은 화엄사를 대표한다. 후삼국시대 남악 지리산의 화엄을 대표하는 사찰은 화엄사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균여는) 북악의 법통을 이은 분이다. 옛날 신라의 말년 가야산 해인사에 화엄을 대표하는 두 명의 스님이 있었다. 한 명은 관혜공으로 후백제 견훤의 복전이고, 다른 한 명은 희랑공으로 우리나라 고려 태조의 복전이다. 두 분은 믿음을 따라 불법을 떨치려는 마음은 같았으나, 원을 이루는 방법이 달랐다. 이 마음이 문도들에게 침범하여 물과 불이 되었으니 하물며 법을 떨치는 방법이 시고 짠 것과 같이 차이가 있었으며, 지금까지 전해져 폐단을 제거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관혜의 무리를 남악이라 했으며, 희랑의 무리를 북악이라 했다. 균여는 매일 남과 북의 뜻이 달라 어울리지 못함을 탄식하여 여러 가지 나누어지지 않게 하고, 많은 갈래를 막아 한가지 불법의 뜻의 바퀴로 모으기 위해 수좌 인유와 남악과 북악을 돌아다녔다. 이에 큰 법고를 울리고 큰 법당을 세워 불가의 어린 무리가 다 균여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37)
앞서 살펴보았듯이 의천이 1092년 화엄사에서 연기의 진영을 참배하였다는 것은 화엄사는 연기의 화엄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균여의 화엄 통합은 북악과 남악의 다툼을 해결한 것이지 의상의 화엄으로 통합했다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의천의 연기 진영 참배는 화엄사에서 연기가 대표적 인물로 숭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기로 대표되는 황룡사 자장계 연기의 화엄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해인사의 희랑은 북악을 대표하고 있으니 의상의 화엄인 것은 확실하다. 관혜가 북악 의상의 화엄을 대표하는 희랑과 대립하고 있고, 균여도 북악 의상의 화엄을 이었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관혜와 희랑의 대립은 북과 남의 지역적 대립이 아니라, 화엄 계파 간의 대립일 가능성이 크다. 의상의 화엄이 북과 남으로 갈라져 다툰 것이 아니라, 계파가 다른 북과 남이 다툰 것이 남악이란 표현에서 설득력이 있다.
후삼국 시기 남악 화엄사를 대표했던 자장계 화엄의 고승 관혜를 중관해안은 『화엄사사적』에서 소개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후백제의 견훤을 지지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중관해안은 신라와 고려를 중요시하였기에 후백제 견훤을 지지하다 패배한 관혜를 의도적으로 뺀 것으로 판단된다.
후삼국시대 화엄은 왕건과 견훤의 지지 방향에서 북악과 남악으로 대립하고 있다. 여기서 관혜가 남악으로 지칭되는 화엄사의 화엄을 대표한다면 북악을 상징하는 의상의 화엄과 대립하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 이런 대립의 중심에는 자장계 연기의 화엄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관혜는 자장계 연기의 화엄을 대표하는 나말여초 승려가 된다.
종합하면 통일신라 8세기 중반 연기는 화엄사를 창건한다.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이며, 황룡사는 자장계 화엄이 세력을 이루고 있다. 자장계 화엄은 8세기 중반 의상계 화엄과 구별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후삼국시대가 되면 관혜는 자장계 연기의 화엄 사찰인 남악 화엄사를 대표하여 북악 의상계 화엄을 대표하는 희랑과 해인사에서 대립하고 있다. 이후 고려 균여에 의해 두 화엄의 대립은 의상계 화엄으로 해결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후삼국시대 화엄사와 관련된 사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서 살펴보았듯 『균여전』을 보면 가야산 해인사에는 고려의 왕건을 지원하는 북악(北岳)의 의상계 화엄 희랑과 후백제의 견훤을 지원하는 남악의 자장계 연기의 화엄 관혜의 두 계파로 양립하였다. 후삼국시대 남쪽 후백제의 영역 화엄을 대표하는 자장계 화엄 승려 관혜의 남악은 지리산 화엄사이다. 이것은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영역에서 화엄을 대표하는 화엄사의 위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가 된다.
남악은 지리산을 뜻하며, 남악 지리산을 대표하는 화엄 사찰은 화엄사이다. 고려가 후백제를 흡수한 936년 이후에도 화엄사의 남악 화엄은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가 후백제를 흡수한 상황에서, 의상의 북악 화엄과 남악의 자장계 연기의 화엄은 다툼 속에 있다. 화엄사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하는 936년 초기까지 호남을 대표하는 화엄의 사찰로 그 권위가 손상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균여의 생전 시기인 973년 이전 남악의 화엄은 북악의 화엄에 통합된다. 여기서 973년 이후에는 중앙정치권력의 지지기반을 상실한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고려 중앙정치권력 집단에서 후백제를 지지한 관혜의 화엄사를 지원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연기의 화엄에 관한 찬술은 의천이 간행한 『신편제종교장총록』에 5종 47권이 포함되어 알려져 있다. 이것은 1073년에 시작하여 1090년에 의천이 완성한 고려와 송나라, 요나라 등지의 불교 목록집이다. 여기에 『(화엄경)개종결의』 30권·『(화엄경)요결』 12권(혹 6권)·『(화엄경)진류환원낙도』 1권·『(대승기신론)주납』 3권(혹 4권)·『(대승기신론)사번취묘』 1권의 연기의 찬술38) 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시대 화엄사 주지 전형수교관(傳賢首敎觀) 의학사문(義學沙門) 준소(俊韶)는 의천과 교류하며 『원종문류(圓宗文類)』의 간행에 함께 참여한다(정병삼, 2020: 17). 이러한 인연이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연기의 찬술이 포함될 수 있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염중섭(자현), 2020: 13-14). 의천이 연기의 찬술 목록이 포함된 『신편제종교장총록』을 완성한 7년 후 화엄사를 방문하여 연기의 진영(眞影)에 참배한다. 이것은 1097년 고려 불교계에서 연기의 유명세를 알려줌과 동시에 화엄사에 연기계 집단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연기의 화엄은 1281년이 되면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화엄사가 의상계 화엄의 사찰로 나타나는 것이다. 904년 최치원의 『법장화상전』과 1281년 일연의 『삼국유사』를 비교하면 이러한 상황을 알 수 있다.
904년 최치원은 『법장화상전』에서 신라 해동 화엄을 대표하는 10개의 산과 화엄 종찰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이것은 신라의 화엄을 대표하는 산과 사찰을 설명한 것이다.39) 반면, 1281년 일연은 의상은 『삼국유사』에서 의상의 화엄을 따르는 화엄십찰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화엄의 전통이 의상의 화엄으로 통합되었음을 확인해준다.
열 개라는 한자 십(十)은 열 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꽉 찬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법장화상전』에서 해동화엄의 십산(海東華嚴大學之所有十山焉)은 총 12개의 사찰인 데, 십산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의상전교 십찰(湘乃令十剎傳教)은 6개의 사찰을 십찰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십산과 십찰의 십은 열이 아니라 꽉 찬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중 화엄십산과 화엄십찰에 공통으로 소개되는 사찰은 화엄사와 부석사, 해인사, 범어사, 옥천사의 5개의 사찰뿐이다.
904년 『법장화상전』은 분명하게 신라의 화엄 대학인 해동화엄의 십산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의상의 화엄뿐 아니라, 자장의 화엄 등 모든 신라의 화엄을 대표하는 사찰을 의미한다고 정의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923∼973년에 생존한 인물인 균여가 해인사의 화엄을 의상의 화엄으로 통합한다. 이후 300여 년이 흐른 1281년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고려 후기에는 의상의 화엄십찰로 고려의 화엄이 통합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다.
종합하면 화엄사의 자장계 연기의 화엄은 973년 전후 균여에 의해 생명력을 잃기 시작하여 1281년에는 의상계 화엄으로 통합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화엄사의 화엄 전통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완전하게 사라지게 된다.
연기에 관한 설명으로 754년 『백지묵서화엄경』은 신라 황룡사의 연기로 설명하고 있다. 1097년 의천은 화엄사의 신라 고승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1487년 남효온은 옛날 신라사람 연기가 화엄이 아닌 선문의 고승이라 표현하고 있다. 고려시대까지 이어온 통일신라 황룡사의 연기는 조선 초기가 되면 선승 연기로 변화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화엄사의 연기 화엄의 전통은 사라지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1530년 ‘연기(煙氣)’는 한자의 변화와 맞물려 이미 전설상의 인물로 변화하여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다’라고 하고 있다.
연기 화엄의 전통이 사라지는 흐름은 연기 한자 이름의 변화로 이어진다. 한자는 다르지만, 한글 발음은 같은 연기라는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 조선 전기 1487년 음력 10월 6일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화엄사에 들른 남효온은 연기를 한자로 ‘연기(緣起)’라 표현하고 있다. 이후 1530년에 편찬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연기(煙氣)’로 1630 『화엄사사적』은 ‘연기(煙起)’로 표현하고 있다. 754년 『백지묵서화엄경』과 1097년 의천의 그리고 1487년 남효온은 ‘연기(緣起)’의 같은 한자로 표현하고 있으나, 이후에는 발음은 같으나 한자는 다르게 표시되고 있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연기(煙氣)’로 한자가 변하기 시작한다. 또한 연기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표현이 나오기 시작한다. 1636년 중관해안의 『화엄사사적』에는 연기를 ‘연기(烟起)’라 표현되어 있다.
정리하면 통일신라 754년 『백지묵서화엄경』과 고려 1097년 의천 그리고 조선 초기 1487년 남효온은 연기(緣起)로 표현한다. 이후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연기(煙氣)로 표현이 변하며, 1636년 중관해안의 『화엄사사적』은 연기(烟起)로 변하고 있다. 다시 정리하면 754년 연기(緣起) → 1097년 연기(緣起) → 1487년 연기(緣起) → 1530년 연기(煙氣) → 1630년 연기(烟起)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면 조선이 건국된 이후 1487년과 1530년 사이에 화엄사는 종파의 성격을 잃고 연기에 대한 전승 또한 잃어버리는 변화가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것은 조선의 숭유억불의 정책으로 태종에 의해 오교양종40)으로 통합된 조선 불교는 세종에 의해 선교 양종41)으로 통합되면서 화엄사는 선종 사찰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가 있었기에 화엄사를 창건한 중요 인물 연기에 대해 갑자기 한자 이름의 표현이 혼란해지고, 출신과 그의 행적이 무시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라 판단된다.
화엄사가 선종에 통합된다는 것은 화엄사의 종파 특성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 연기 화엄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사사자삼층석탑>의 연기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효를 중요시하는 유교적 사상과 연관되어 후대에까지 이어져 오는 것으로 보인다.
Ⅳ. 결론
신라의 화엄은 다양한 화엄 계통이 공존하였다. 한국 화엄을 대표하는 의상의 화엄뿐 아니라, 원효와 자장계 화엄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은 선행연구를 통해 밝혀져 있다. 본 논고의 핵심은 화엄사는 황룡사의 자장계 화엄의 계통으로 8세기 중반 연기법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장계 화엄은 고려 초·중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 점이다. 또한 더불어서 화엄사에서 창건주 연기가 잊혀지고 화엄의 계통이 사라지는 과정을 확인한 점이다.
자장은 신라 불교계를 대표하는 국통이며, 왕실 직할 사찰인 황룡사의 주지로서 계율을 정하여 불교를 정착시켰다. 무엇보다 화엄을 신라에 최초로 전래하였으며, 황룡사를 중심으로 정착시킨 고승임을 8세기 중반 화엄 관련 문헌자료의 검토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연기는 8세기 중반 화엄사를 창건한 황룡사 자장계 화엄의 고승임을 『백지묵서 화엄경』과 대각국사의 문헌자료를 검토를 통해 밝혀내었다. 이상에서 통일신라 화엄사는 자장계 연기의 화엄 전통을 이어가는 사찰이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의상의 화엄 계통은 고려 건국과 맞물려 세력을 확산하고 있으며, 고려 후기에는 의상 화엄으로 한국 화엄이 획일화된다. 이는 본 논고의 다음의 연구로 확인된다. 후삼국시대 남악 지리산의 관혜는 자장계 연기의 화엄사를 대표하는 승려이다. 또한 남악의 관혜와 대립한 북악 희랑은 의상 화엄을 대표한다. 해인사에서 남악 관혜와 북악 희랑의 대립은 의상 화엄을 대표하는 균여에 의해 통합된다. 여기서 화엄사의 자장계 연기의 화엄의 전통은 후삼국시대와 고려 건국 초기까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본 논고는 이어서 904년 편찬된 최치원의 『법장화상전』과 1281년 편찬된 일연의 『삼국유사』에 서술된 해동화엄 십산과 의상전교 십찰의 의미 변화 차이를 검토하였다. 이것을 통해 고려 후기 한국 화엄은 의상의 화엄으로 획일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태종과 세종의 불교 통폐합으로 사찰의 전통이 사라지고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역사성이 사라지는 과정에 화엄의 창건주 연기와 화엄 전통이 사라짐을 확인하였다.
이상으로 화엄사의 자장계 화엄 계통을 밝혔으며, 또한 의상계 화엄으로 통합되고 획일화되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또한 화엄사의 창건주 의상의 전통이 조선의 건국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하며, 화엄의 전통은 상실되고 있음을 검토하였다. 무엇보다 본 논고 연구의 의미는 그동안 잃어버린 화엄사의 자장계 연기의 화엄 계통을 밝혔다는 점에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