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논문

불교적 상생의 방안과 실천에 대한 고찰

설상동 *
Sang-dong Seol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현통사 주지
*Abbot of Hyeontongs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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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Nov 07, 2024; Revised: Nov 20, 2024; Accepted: Nov 28, 2024

Published Online: Dec 31, 2024

국문 초록

이 논문은 불교적인 상생의 방안과 구체적인 실천 체계는 어떠한 시각을 지니고 있는가를 분석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사회적, 심리적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불교적 시각을 분석했다. 대승경전을 중심으로 분석한 이 부분에서는 욕망이 갈등의 원인이며, 상생의 저해요인임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했다. 특히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4상에 대한 집착이 다름 아닌 갈등의 원인으로 이해하고자 한 점이다. 4상으로 표현되었든 혹은 욕망이나 대상의식, 집착 등으로 표현되었든 그것은 닫힌 생각이며, 사회분열의 원인임을 밝히고자 했다. 『유마경』에서는 그것을 “전생의 망상과 전도된 일체의 번뇌” 혹은 나에 대한 집착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닫힌 생각으로 이해하고, 그런 상태에서는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대상만을 의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인종, 출신성분, 빈부귀천, 남녀, 지역, 종의 차이 등등에 사로잡혀 본질적 가치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교적 수행자들은 경험적으로, 대상 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언어와 논리를 부정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언어와 논리의 부정을 통해 닫힌 생각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는, 현실은 욕망이 춤추는 세상이며, 욕구의 충족을 위해 각자 노력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인간들이 화해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함경』에서는 인간들이 화합하면서 살 수 있는 여섯 가지의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적인 용어로 육화경(六和敬)이라 하는데, 이러한 방안의 실천을 통해 공존공영이 가능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6화경이란 신·구·의 화경과 이익(利)·윤리(戒)·견해(見)의 화경이다. 화합과 공유를 통해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어떻게 하면 공유사회가 가능한가에 대한 실천의 방안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구·의 화경이란 사회생활의 기본이 되는 몸과 입과 마음의 화합과 상호공경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익과 계율과 견해의 화합을 강조한다. 특히 계율을 윤리 내지 도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세 가지도 인간 생활의 기본이 아닐 수 없다. 이익과 윤리와 견해의 화합과 공경을 통해 상생과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는 원시 승가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시설된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현대사회에 의미를 제공하거나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응용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적 안락의 세계, 자유와 평화를 공유하기 위한 노력은 인식의 전환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욕망의 원인과 한계를 통찰하고, 분별과 닫힌 정신세계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깨우치는 것이기도 하다. 연기론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공업중생론과 보은(報恩)의 관념, 그리고 회향의 정신을 그 기반으로 논리가 전개된다는 점이다.

대립과 갈등의 해소와 구성원의 상생과 화해는 노력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현실적 사안이다. 종교적 논리와 방법을 통해 일종의 규범처럼 설파하고 있지만, 특히 육화경은 이익과 윤리적 공유를 통해 화해하고 상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Abstract

The paper aims at analyzing the perspective of the Buddhist conexistence and the concrete practice system. Overall, it is largely composed of two parts.

Firstly, the paper analyzed the Buddhist viewpoint on the cause of social and psychological conflict. In this section, which analyzed the Mahayana Sutra, it was illuminated from various perspectives that desire is the cause of the conflict and is an obstacle to coexistence.

In particular, the obsession with the Four Phase emphasized in the Diamond Sutra is trying to understand it as the cause of conflict. Whether expressed as the Four Phase or as desire, object consciousness, or obsession, it was intended to clarify that it is a closed thought and is the cause of social division. In the Vimalakīrti Nirdeśa Sūtra, it is expressed as "the delusion of the past life and all the defilements that has been reversed or an obsession with ‘I’.

Secondly, the reality is a world dominated by desires and people strive to satisfy their desires. The Buddha seems to have thought about what ways humans can reconcile in this reality. Therefore, the Agama sutras present six practical measures for humans to live in harmony. It is called ‘the Six Harmony and Ethical Sharing (六和敬)’ in Buddhist terms, and it was believed that through the practice of these measures, a society capable of coexistence and co-prosperity could be built.

‘The Six Harmony and Ethical Sharing’ is the harmonies and respects of the new and the old and benefit, ethics, and perspective. It is the Buddha's teaching that peace can be built through harmony and sharing, and it shows how to make a shared society possible.

In conclusion, Buddhism understands that the ultimate world in Buddhism can be possible through transformation in realization. Resolving confrontations and conflicts, coexistence and reconciliation of members are realistic issues that cannot be resolved without effort. It is worth noting that the Six Harmony and Ethical Sharing suggests concrete action plans through the benefits and ethical sharing.

Keywords: 상생; 화해; 전도망상; 대상의식; 공업중생
Keywords: Coexistence; Harmony; Delusion; The Four Phases; Object Consciousness

Ⅰ. 들어가는 말

본고는 화해에 대한 불교적 입장과 방안에 대한 탐구이다. 다만 방대한 불교경전 중에서 화해와 유관한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본고에서는 초기대승 경전 중에서 널리 알려진, 『금강경』, 『유마경』을 중심으로 갈등의 원인과 해소의 방안을 정리하고, 초기불교 시대의 경전인 『아함경』에 나오는 육화경(六和敬)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실천의 방안에 대해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가를 정리하려고 한다. 육화사상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이지만, 상생을 위한 불교적 방안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먼저 화해(和解)에 대한 사전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표준국어사전에 의하면 화해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 없앰. 둘째, 법률 민사상의 분쟁을 재판 이외에 당사자 간에 해결하는 일. 또는 그 화해 계약. 셋째, 사기(邪氣)가 겉과 속의 중간 부위에 있어서 한법(汗法)이나 하법(下法)을 쓸 수 없을 때에 적용하는 치료법.

동일한 독음이지만 한자가 다른 화해(和諧)라는 단어도 있는데, ‘서로 응하다. 서로 조합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본고에서는 화해라는 단어의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다만 이상에서 살펴본 세 가지 개념 중에서도 첫째에 해당하는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아마 주최측에서 필자에게 요청한 내용도 그러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화해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정리하자면 먼저 원효의 「십문화쟁론」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주장의 핵심은 사상적 대립과 갈등에 대한 원효의 입장을 회통론에 입각해 정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넓은 의미에서 화해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 논리에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고에서는 제외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원효가 말하고 있는 화쟁은 단순한 화해의 논리가 아니라, 보다 포괄적이고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화쟁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피력해 왔다.1) 따라서 여기서는 화쟁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그 이론이 지니는 함의에 대해 대략 정리해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첫째, 화쟁은 사상이 아니라 논리적 접근법 혹은 사유방식이라 보는 입장, 둘째, 화쟁논리, 회통논리는 원효의 독자적 사유방식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 등이다.

다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발제를 청탁한 의도가 사회적 갈등과 분열 속에서 개인적 화해나 사회적 통합을 위한 화해의 방법이나 화해에 대한 불교적 입장이 무엇인가를 밝혀주었으면 하는 의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원효의 화쟁이론은 ‘사회적 분열이나 사상적 논란’에 대한 부분적인 화해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할 수는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반면에 개인적 갈등이나 사회적 분열에 대한 화해의 논리로 활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런 점을 감안하고 불교는 어떠한 화해의 입장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방대한 불교문헌이나 종파를 감안하면 연구의 폭을 좁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소의경전이 『금강경』이란 점을 감안하여, 「금강경』을 중심으로 화해의 방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경전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 종단에서 소의경전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대승경전보다 영향력이 크고 넓다고 볼 수 있다. 연구의 텍스트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이하 『금강경』)을 주로 활용하고자 한다. 또한 기타 경전은 보조자료로 활용할 생각이다.

II. 갈등의 원인에 대한 분석

그렇다면 인간사회의 불화와 갈등의 원인은 무엇이고, 이들에 대한 불교적 시각은 무엇일까? 유명한 대승경전 중의 하나인 『유마경』에서는 불화와 갈등을 중생의 아픔[病]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픔의 원인을 갈애나 애착으로 진단한다. 『유마경』의 「문수사리문질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화는 동아시아 불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많은 대중의 주목을 받아왔다.

“거사의 이 병은 어째서 생긴 겁니까? 생긴지 오래 되었나요.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유마힐이 대답했다. “어리석음으로 애착이 있습니다. 바로 나의 병이 생깁니다. 중생들이 아프기 때문에 나도 아픕니다. 만일 모든 중생의 아픔이 사라진다면 나의 병도 사라질 겁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생사의 세계에 들어왔으며, 생사가 있으면 아픔이 있습니다. 만일 중생이 아픔을 여읠 수 있다면 보살도 다시는 아픔이 없습니다.”2)

이상의 인용문에서 본고의 주제와 유관한 핵심 단어는 아픔과 어리석음, 애착이란 단어이다. 아픔이 현실적인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면, 어리석음과 애착은 이러한 상태를 만들게 한 원인으로 파악할 수 있다. 기타 다른 언급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아픔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대립과 갈등, 불신과 불화 속에 발생하게 되는 실존적 고뇌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등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들은 대립과 갈등, 불화와 불신을 연출하고 있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고뇌를 경전에서는 아픔이라 표현한다. 어찌 보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사회적 현상이다. 그렇지만 아픔의 개념과 원인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경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어지는 대화는, 어떻게 하면 마음을 조절하여 아픔으로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문답이다.

문수사리가 말했습니다. “거사여, 병든 보살은 어떻게 그 마음을 조절합니까?” 유마힐이 대답했습니다. “병든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지금 나의 이 아픔은 모두 전생의 망상과 전도된 일체의 번뇌로부터 발생하지만 실체적인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가 아픔을 받아들입니까? 4대가 화합하기 때문에 몸이라는 임시적인 이름이 있습니다. 4대는 주체가 없으므로 몸 역시 아체가 없습니다. 또한 이 아픔의 발생은 모두 나에 대한 집착에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나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만 합니다.’ 이미 아픔의 본질을 알면 아상과 중생상은 제거됩니다. ... 어떻게 아체와 아소(나의 소유)를 여윕니까? 두 가지 법을 여위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두 가지 법을 여윕니까? 안과 밖의 모든 존재를 생각(구분)하지 않아서 평등하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평등이라 합니까? 나에게도 평등하고 열반에도 평등함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와 열반은 모두 공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공이라 합니까? 이처럼 두 법은 결정된 성품이 없어서 평등함을 얻습니다.”3)

인용문에 의하면 아픔의 원인은 전생의 망상과 전도된 일체의 번뇌라 진단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 경문에서 어리석음과 애착이라 규정한 것과 달리, 망상과 잘못된 번뇌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나에 대한 집착도 아픔의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은 다시 아체(我體)와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으로 세분하고 있다. 아체와 아소에 대한 부정과 무집착은 무아(無我)란 용어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무아에 대한 실천행은 공의 인식과 실천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유마경』에서 아픔의 원인으로 제시된 ‘어리석음과 애착’이나 ‘전생의 망상과 잘못된 번뇌’, 내지 ‘나에 대한 집착’ 등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아상과 중생상 등은 모두 부파불교 이래 불교계에서 주목했던 번뇌론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이에 대해 세밀한 이론을 전개한 유식사상의 대표적 논서인 『성유식론』에 의거해 살펴보면 불교에서 번뇌를 불화나 갈등, 불행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유식사상에서는(김윤수, 2006: 549-555) 번뇌를 크게 근본번뇌와 지말번뇌로 구분한다. 지말번뇌는 근본번뇌로 인해 파생되는 번뇌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근본번뇌보다 개별적이고 소소한 번뇌이다. 반면에 근본번뇌는 포괄적이며, 다양한 지말번뇌를 발생시킨다. 유식사상에서는 근본번뇌에 속하는 것을 여섯 가지의 번뇌로 설명하고 있다. 탐·진·치·만·의·악견(貪·瞋·癡·慢·疑·惡見)이다. 『성유식론』에 의거해 구체적인 내용을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탐욕이란 “존재와 존재의 원인에 대해 물들어 탐착(貪著)하는 것을 체성으로 삼고, 능히 무탐(無貪)을 장애하여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을 업으로 한다. 말하자면 갈애(渴愛)의 힘에 의해 취온(取蘊)이 생겨나기 때문이다(김윤수, 2006: 550).”라고 정의하고 있다.

성냄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 미워하고 성내는 것을 체성(體性)으로 삼고, 능히 무진(無瞋)을 장애하여 불안과 악행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으로 한다. 말하자면 성냄의 심소는 반드시 신심을 몹시 괴롭혀서 모든 악업을 일으키게 하는 불선(不善)의 성품이기 때문이다(김윤수, 2006: 550-551).’라고 정의한다.

어리석음[癡]이란 ‘모든 이치와 현상에 대해서 미혹하고 어두운 것을 체성으로 삼고, 능히 무치(無癡)를 장애하여 일체의 잡염(雜染)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으로 한다. 말하자면 무명에 의해서 의심, 삿된 결정[邪定], 탐욕 등의 번뇌, 수번뇌와 업을 일으켜서 능히 후생의 잡염법(雜染法)을 초래하기 때문이다(김윤수, 2006).’라 정의한다.

거만함이란 ‘자기 자신을 믿어 남에 대해서 높이 올리는 것을 체성으로 삼고, 능히 거만하지 않음을 장애하여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으로 업을 삼는다. 말하자면 만일 거만이 있으면 덕과 덕이 있는 이에 대해서 마음이 겸손하지 않고, 이 때문에 생사에 윤회함이 끝이 없어, 모든 괴로움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김윤수, 2006: 551-552).’라 정의한다.

의심이란 ‘모든 진리와 이치에 대해서 유예(猶豫)하는 것을 체성으로 삼고, 능히 의심하지 않는 선한 품성을 장애하는 것으로 업을 삼는다. 말하자면 유예하는 것에서는 선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김윤수, 2006: 553).’라 정의한다.

악견이란 ‘모든 진리와 이치에 대해서 전도되게 추탁하는 잡염의 지혜를 체성으로 삼고, 능히 선한 견해를 장애하여 괴로움을 초래하는 것을 업으로 한다. 말하자면 악견을 가진 자는 괴로움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김윤수, 2006: 554-555).’라 정의한다. 또한 악견에는 다섯 가지로 세분해서 거론하고 있다. 살가야견(薩迦耶見, Satkāya)·변견(邊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이다(이만, 2006: 222-223).

살가야견은 오취온의 몸을 나의 것이라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변견은 자기 몸에 관한 견해 위에 이것이 단멸하여 뒤가 없다고 분별하거나, 혹은 상주불멸하는 것이라고 한쪽으로 집착하여 인과의 도리를 모르는 견해를 말한다. 사견은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여 유루무루의 윤리적 내지 종교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견해를 말한다. 견취견은 자기가 주장하는 모든 악견에 집착하여 가장 훌륭한 견해라고 국집하고, 또한 자신을 가장 청정한 사람이라고 집착해서 온갖 쟁론을 일으킬 소의가 되는 견해를 말한다. 계금취견에서 계금은 계법(戒法)을 말하는 것으로서, 진정한 계법은 유루무루의 선법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한 견해에 의한 계법은 유해하고 무리하다. 부정한 계법과 그 의지처인 오온을 가장 훌륭한 것이라 하고, 청정한 열반을 취득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계금취견이라 한다.

유식사상의 번뇌에 대한 입장을 『성유식론』에 의거해 살펴보았지만, 번뇌를 세밀하게 구분해서 설명한다는 점이 『유마경』에서 아픔의 원인으로 제시한 원인들과 다른 점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포괄적 시각에서 본다면 『유마경』의 내용은 유식사상의 번뇌론 안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남종선의 소의경전으로 널리 애송된 『금강경』에서는 이러한 번뇌를 4상이나 4견으로 표현한다. 4상이라 할 때의 상은, 相 혹은 想이란 글자를 혼용하고 있다. 특정한 형상이나 관념을 지시한다. 그래서 사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말한다. 4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4)을 강조한다. 4견이란 유신견·변집견·사견·계금취견·견취견과 상통하는 의미이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라 해서 4상의 상이란 글자 대신 견(見)이란 글자를 활용하고 있는 점5)이 다르다. 특정한 견해란 이미 특정한 카테고리에 닫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금강경』에 나오는 다음의 경문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해 보자. “수보리야, 보살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이렇게 보시해야만 한다. 여래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일체 모든 존재의 형상은 바로 형상이 아니다. 또한 말씀하길, 일체의 중생은 바로 중생이 아니다.”6) 논리적 비약이 심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고가 특정한 범주에 갇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논리적 수단이다. 즉비의 논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법은 무실·무허(無實·無虛)하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법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면 마치 사람이 어둠 속에 들어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일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한다면 마치 사람에게 눈이 있어서 햇빛이 밝게 비치면 갖가지 빛깔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7)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금강경』이 추구하는 중요한 사상적 핵심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상에서 인용한 경문의 논리적 토대는 무실무허(無實無虛)에 있다고 본다. 실체도 없고, 허상도 없다는 전제 위에서, 집착의 대상은 어느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경전에서는 여래를 “진실을 말하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자,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8)라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실체와 허상이라는 대립하는 두 개의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진실은 파악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금강경』의 입장이다. 어떤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어떠한 전제나 영향 속에서 형성된 관념의 조각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한다. 실체는 허상이 아니며, 허상은 실체일 수 없다. 하지만 ‘실체와 허상’이 있는 그대로 융합된 하나의 세계가 현실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이 있는 그대로를 의미하는 ‘여(如)’이며, ‘진실’인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무엇인가 대상에 사로잡힌 구도자는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갇혔다는 의미에서 ‘암(闇)’이라고 한다. 이처럼 의식이 특정한 것에 갇힌 사람,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진실을 볼 수 없다고 본다. 4상이나 4견을 통해 그러한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다. 동일한 의미에서 『법화경』 「방편품」에서는 “부처님의 지혜는 심원하여 볼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우며, 들어갈 수도 없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을 『금강경』에 의거해 해석한다면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방편품」의 표현은 ‘어둠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떤 대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사론』에 의하면 ‘사물에 사로잡혀 있다’는 표현에는 다섯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해석한다. 자성, 의식의 대상, 집착의 장소, 원인, 사용(私用)행위 등이다. 에드워드 콘즈는 이것에 ‘대상 의식’이라는 번역어를 부여하고 있다. 혹은 와스트라는 학자처럼 장소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대상 의식에 빠져 있던, 특정한 장소에 갇혀 있던, 제한된 범위에서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불교에서는 닫힌 생각으로 이해하고, 그런 상태에서는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겨우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대상만을 의식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자면 인종, 출신성분, 빈부귀천, 남녀, 지역, 종의 차이 등등에 사로잡혀 본질적 가치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수행자들은 경험적으로, 대상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언어와 논리를 부정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불교의 종파에 따라 해석상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정토종 계통의 교학적 해석에서는 ‘여래의 도움으로’ 혹은 교법에 의지해서 존재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고 표현한다. 즉 부처님의 도움이 아니면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부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부처님이 직관에 의지해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했듯이, 부처님을 믿는 자들도 역시 직관이란 도구를 통한 체험에 의지해 존재의 실상이나 생명의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만인을 향하고 있지만, 대상의식을 버린 사람, 헤아리거나 비교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같은 이론을 『법화경』에서는 ‘오탁악세’라 하며, 여기서 핵심어는 ‘탁과 악’이란 두 글자이다.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 흐리고 더럽고 악한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이른바 겁탁 · 번뇌탁 · 중생탁 · 견탁 · 명탁이니라. 사리불아, 이와 같이 겁이 흐리고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이 되면 사람들의 허물이 무거워져서 인색하고 탐내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치성하여 좋지 못한 근성이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방편의 힘으로 일불승을 삼승으로 나누어 설하시느니라.9)

인용한 경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탁(濁)’은 의미상으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암(闇)’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모두 대상의식이나 분별의식에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탁·암·명(冥)·치(癡)로 표현되는 닫힌 사고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청관음경소』에 의하면 “두루 빛을 놓는다는 것은 바로 위대한 지혜의 광명을 청해 조복(調伏)하고 유선(柔善)하는 것이다. 무명(無明)을 제거하면 치암(痴闇)은 바로 제거된다. 화엄에서 방광이라 하는 것과 같다. 혹은 간탐과 성냄 등을 제거하거나 여러 가지를 치료한다.”10)고 말한다. 빛이 치암과 무명을 제거한다는 주장은 『화엄경』에서도 흔히 언급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광명이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의 빛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수행을 통해 닫힌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며, 그 결과 상대적인 대상의식을 탈피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광명으로 인식한다. 그렇기에 간탐과 미움 등의 다양한 인간들의 닫힌 생각을 치료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대상의식이나 분별의식, 내지 닫힌 생각으로 표현되는 치암·탁·무명 등은 갈등의 씨앗이며, 불화의 제공자들이다. 화해와 평화를 구가하기 위해서는 그런 점에서 먼저 닫힌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4상이나 4견에 집착하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때문에 수보리야, 일체의 모든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야만 한다. 마땅히 색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소리·냄새·맛·감각·인식의 각종 대상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야만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야만 한다.”11)고 거듭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머무는 마음은 어떤 대상이나 특정한 범주에 집착하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III. 화해와 상생의 실천 방안

2장에서 불화와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원인을 파악하고 나면 화합과 화해의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닫힌 생각, 대상의식, 분별의식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나와 나의 소유에서 시작되는 근본적인 번뇌를 해소하고, 존재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생명 그 자체로 바라보게 된다면, 그때 진정한 화해와 평화는 가능해지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유식사상에 입각해 본다면, 자기 자신의 한정된 판단능력을 인정하고, 자신의 주관과 판단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의 의미, 생명의 본질적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할 때, 대립과 갈등은 해소되고 진정한 화해와 평화가 가능해진다고 본다. 『법화경』에서는 무엇보다 상대적 가치를 존중하고 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삼초이목의 비유처럼 각각의 능력과 개성을 인정하되, 그것이 차별의 원인이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이란 지적에 봉착할 수도 있다. 현실은 욕망이 춤추는 세상이며, 욕구의 충족을 위해 각자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인간들이 화해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함경』에서는 인간들이 화합하면서 살 수 있는 여섯 가지의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적인 용어로 육화경(六和敬)이라 하는데, 이러한 방안의 실천을 통해 공존공영이 가능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6화경이란 화합과 공유를 통해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어떻게 하면 공유사회가 가능한가에 대한 실천의 방안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용은 경전에 따라 다소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면 지향하는 바가 같다고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경전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신업화경법(身業和敬法), 어업(語業)화경법, 의업(意業)화경법, 이(利)화경법, 계(戒)화경법, 견(見)화경법을 6화경법이라 한다(『식쟁인연경』, T1, 906c).

(B) 자신업(慈身業), 자(慈)구업, 자의업, 이익, 계율, 견해를 들어 여섯 가지의 위로법, 사랑하는 법, 즐기는 법이라 한다『주나경』, T1, 755b)

이상의 (A)와 (B)의 인용문은 화합하고 공경한다는 의미의 화경(和敬)과 사랑한다는 의미의 자(慈)라는 단어의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화합하고 공경하는 마음은 바로 사랑[慈]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표현상의 차이일 뿐,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고 인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모두 공동의 화합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구성원 각자가 실천해야 하는 가장 핵심적인 사안들이란 점이다. 특히 『식쟁인연경』에서 강조하는 이익(利), 계율(戒), 견해(見)의 화경은 사회의 화합과 안정을 구축하기 위해 구성원 각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만일 법의 이익이나 세상의 이양(利養)을 얻으면 모두 함께 받으며, 혹시 발우를 가지고 차례로 걸식하되, 얻은 바의 음식이 있으면 대중에게 알려주고 대중과 함께 받되 홀로 숨기고 사용하지 않는다. … 또한 계율을 깨뜨리거나 단절하지 않으며, 계를 지키는 힘이 견고하여 허물을 여의고 청정해지면 때와 장소를 알려 두루 평등하게 시주의 음식 공양을 받아야만 한다. 이처럼 청정한 계율을 함께 하며, 함께 수행하고, 함께 알고, 함께 범행을 닦는다. 이것이 계화경법이다. 또한 만일 성스러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출리의 길을 보면, 내지 고뇌의 극단을 소진하기에 이르면, 이와 같은 모습을 실답게 보고, 동일하게 행동하고 동일하게 알며 함께 범행을 닦는다. 이것을 견화경법이라 한다.12)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세 가지는 이익과 계율과 견해의 화합이다. 특히 계율을 윤리 내지 도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세 가지는 인간 생활의 기본이 아닐 수 없다. 이익과 윤리와 견해의 화합과 공경을 통해 상생과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는 원시 승가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시설된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현대사회에 의미를 제공하거나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응용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생각이지만 불교의 육화경은 제러미 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사회』에서 밝히고 있는, 학자들이 공유사회의 사례를 통해 밝힌 몇 가지 특징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에 의하면 공유사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한다(안진환 옮김, 2014: 262).

즉 첫째, 공유사회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면 누가 공유물을 전용할 수 있고 없는지 분명하게 정의한 한계가 필요하다.

둘째, 전용을 위해 할당할 수 있는 노동과 재료, 금전의 양을 정하는 규칙뿐 아니라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양과 사용시간, 장소, 기술 등을 제한하는 전용 규칙을 확립해야 한다.

셋째, 공유사회협의회는 전용규칙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또 민주적으로 그 규칙을 결정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수정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넷째, 공유사회협의회는 공유물 관련 활동의 감시를 전용 당사자들이나 그들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이 맡도록 보장해야 한다.

다섯째, 규칙을 위반한 전용자에게는 원칙적으로 다른 전용자나 그들에 대해 책임지는 관리자가 사전에 등급별로 체계화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로 앞으로의 참여가 틀어지거나 공동체 안에 악의가 발생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 공유사회협의회는 전용자 사이에, 또는 전용자와 관리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 조속한 해결을 위해 저비용의 사적 중재를 신속히 이용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 놓아야 한다.

일곱째, 공유사회협의회가 확립한 규칙은 정부 관할권에 의해 그 합법성이 승인되고 용인되어야 한다. 만약 정부 당국이 공유사회협의회의 자주적 관리 권한을 인정하지 않고 사실상 불법으로 간주한다면 공유사회의 자치는 지속될 가능성이 시간이 갈수록 사라진다.

물론 제러미 러프킨이 소개하고 있는 내용과 6화경 사이에는 규칙의 제정과 갈등의 조절에 관한 내용의 유무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경전에선 6화경의 가르침을 설하고 난 뒤에 다툼을 종식시키고, 수행자 공동체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 7멸쟁법(滅諍法)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갈등의 조정도 매우 자율적이고 합리적이란 점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6화경의 가르침이 지니는 실천규범으로서의 성격이 보다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주나경』에선 6화경을 설하고 난 뒤에, “이 가르침을 행하면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공동으로 화합하고 기뻐하며 다투지 않을 것이며, 한마음으로 하나 되고, 한 가르침으로 하나 되어 마치 물과 젖이 하나가 되듯이 즐겁게 유행하면 내가 세상에 있을 때와 같을 것이다.”13)라고 하여 6화경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육화경 가르침에는 상생의 정신이 전제되어 있다. 상생의 정신은 공유와 분배의 정신을 토대로 공동의 안녕과 평화를 지향한다. “불교경제학은 사회 전반에 보이는 이타주의와 호혜성의 진화를 분석한 새뮤얼 보울스나 허버트 긴티스 같은 경제학자들의 관심사를 공유한다(박찬국 옮김, 2024: 58).”는 분석이 가능한 이유이다. 상생에는 우선 몸과 입과 마음의 화합이 필요하다. 불교윤리의 기본은 몸과 마음과 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3업의 청정함이 개인의 일상뿐만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청정함으로 확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몸과 입, 그리고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따라 분란과 평화가 엇갈리기에 세 가지의 화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금강경』에서 마땅히 집착하는 마음 없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보다 분명하게 다가온다고 생각된다.

두 번째는 계율과 견해와 이익의 화합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몸·입·마음의 화합을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맑고 청정한 정신에 기인한 윤리 도덕의 공유, 전체의 단결과 화합을 해치는 견해에 대한 경계, 작은 이익이라도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고자 하는 정신 등이 여기에 있다.

또한 『육화경』은 두 가지로 분류해서 이해하기도 한다. 신구의 3업의 차원과 이익과 계율과 견해의 차원이다. 3업이 내부적 조건이라면, 이계견(利戒見)은 외부적 조건이다. 내외의 화합과 공경이 중요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즉 자비로운 3업의 실천을 통해 공동의 이익, 동일한 윤리조건, 동일한 견해 등이 필요하며, 이러한 것은 정치적 환경이나 제도의 문제로서 사회적 동일성, 즉 평등성이 요구되는 것이라 본다(권기종, 2008: 61).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공동운명체의 인식과 공동사회를 구축하고자 하는 열망이 전체적으로 합의될 때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동시에 “공유사회 모델을 지속시킨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바로 참여의 조건으로 구성원들이 동의하는 자기 규제 및 자기 강제의 규약과 이에 수반하는 처벌이다. 자체의 규약과 처벌이 없는 경유 공유사회의 지속을 불가능할 수 있다(안진환 옮김, 2014: 253).”는 제러미 러프킨의 진단과도 상통한다.

IV. 맺는 말

사회적 갈등과 불안을 최소화하고, 공동체 구성원의 화해와 협력 속에 사회적 평화를 구축하는 일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 다툼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과학과 경제의 발전은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으며, 그런 만큼 상생과 평화 속에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목소리 역시 커지고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 상생의 공유사회가 구축되는 일에 불교적인 인식체계나 실천의 방법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초기불교 시대의 불교적 사회관에서 본다면 인간은 본래 공존공영의 공유사회에서 살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다만 인간성의 퇴보와 타락으로 소유를 중시하는 사회로 전환되었으며, 그 결과 대립과 갈등의 세계로 전환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상향처럼 인식되고 있는 상생의 공동체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실천규범과 인식체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공업중생이란 인식 속에서 나의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공동의 이익과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활용하고자 하는 불교적 가르침은 그런 점에서 상생과 화해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무집착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닫힌 생각을 버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자세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적 안락의 세계, 자유와 평화를 공유하기 위한 노력은 인식의 전환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며, 그것은 욕망의 원인과 한계를 통찰하고, 분별과 대상의 세계에 갇혀서는 안된다는 점을 깨우치는 것이기도 하다. 불교적 수행은 단순하게 개인의 깨달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화해와 안락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연기론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공업중생론과 보은(報恩)의 관념, 그리고 회향의 정신을 그 기반으로 논리가 전개된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대립과 갈등의 해소와 구성원의 상생과 화해는 노력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현실적 사안이다. 종교적 논리와 방법을 통해 일종의 규범처럼 설파하고 있지만, 특히 육화경은 이익과 윤리적 공유를 통해 화해하고 상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규범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첨예하게 대두하고 있는 이익과 견해를 공유할 수 있다면 사회적 갈등과 불안을 해소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선결요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Notes

1) 원효의 사상이 화해와 종합으로 이해되고 서술되는 현상은, 사실은 한국불교의 성격에 대한 논의 특히 ‘(회)통불교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한국불교를 ‘통불교론’으로 규정하는 시각들은 최남선(1930, 『불교』74)를 필두로 하여, 조명기(1930) ; 개정 논문(1972), 박종홍(1958); 이기영(1982) 등을 대표적인 논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 대하여 심재룡은 「한국불교는 회통적인가」(1985)에서 반론을 제기하였고, 같은 맥락의 「한국불교는 회통불교인가」(2000년 여름호)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이봉춘이 다시 통불교론의 유효성을 주장하는 「회통불교론은 허구의 맹종인가」(2000년 겨울호)라는 반박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아주 극소수의 논의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불교학계에서의 논의들은 통불교적 성격 규정을 수용하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통불교론의 입장에 서 있는 논의들의 주요 근거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원효의 화쟁사상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원효의 화쟁사상이 화해와 종합의 통불교로 이해되고 있음을 간취할 수 있다. 원효의 사상을 화쟁사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본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화쟁사상이야말로 원효불교학의 방법론이자 학문적 귀결’이라고 주장하는 鎌田茂雄, (1987)이나, 원효의 사상을 ‘和諍一乘義’로 평하는 吉津宜英(1991)이 대표적이다.

2) “居士是疾, 何所因起? 其生久如? 當云何滅. 維摩詰言: 「從癡有愛, 則我病生; 以一切眾生病, 是故我病; 若一切[7]眾生病滅, 則我病滅。所以者何? 菩薩為眾生故入生死, 有生死則有病; 若眾生得離病者, 則菩薩無復病”(『유마경』 권2, T14, 544b).

3) “文殊師利言 居士! 有疾菩薩云何調伏其心 維摩詰言有疾菩薩應作是念今我此病, 皆從前世妄想顛倒諸煩惱生, 無有實法, 誰受病者! 所以者何 四大合故, 假名為身 四大無主, 身亦無我 又此病起, 皆由著我。是故於我, 不應生著。既知病本, 即除我想及眾生想。... 云何離我, 我所 謂離二法。云何離二法 謂不念內外諸法行於平等。云何平等 謂我等, 涅槃等。所以者何?我及涅槃, 此二皆空。以何為空 但以名字故空。如此二法, 無決定性, 得是平等”(『유마경』 권2, T14, 544c).

4) “須菩提! 若菩薩有我相, 人相, 眾生相, 壽者相, 即非菩薩。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須菩提! 菩薩應如是布施, 不住於相。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금강경』, T8, 749a).

5) “須菩提 若人言 佛說我見, 人見, 眾生見, 壽者見。』 須菩提! 於意云何 是人解我所說義不. 世尊 是人不解如來所說義。何以故 世尊說我見, 人見, 眾生見, 壽者見, 即非我見, 人見, 眾生見, 壽者見,是名我見, 人見, 眾生見, 壽者見”(『금강경』, T8, 752b).

6) “須菩提 菩薩為利益一切眾生, 應如是布施。如來說 一切諸相, 即是非相. 又說 一切眾生則非眾生”(『금강경』, T8, 750b).

7) “須菩提 如來所得法,此法無實無虛。須菩提 若菩薩心住於法而行布施, 如人入闇, 則無所見. 若菩薩心不住法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금강경』, T8, 750b).

8) “須菩提 如來是真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금강경』, T8, 750b).

9) “舍利弗! 諸佛出於五濁惡世, 所謂劫濁, 煩惱濁, 眾生濁, 見濁, 命濁。如是, 舍利弗! 劫濁亂時, 眾生垢重, 慳貪嫉[8]妬, 成就諸不善根故, 諸佛以方便力, 於一佛乘分別說三”(『법화경』 권1, T9, 7b.)

10) “普放光者。即是請大智光明為調伏柔善。滅除無明癡闇即消除。如華嚴又放光。或除慳除恚等。種種所治”(『청관음경소』, T39, 968a).

11) “是故須菩提, 諸菩薩摩訶薩應如是生清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 香, 味, 觸, 法生心,應無所住而生其心”(『금강경』, T8, 749c).

12) “又復若得法利及世利養悉同所受。或時持鉢次第行乞。隨有所得飲食等物白眾令知。與眾同受勿私隱用。若眾同知者即同梵行。此名利和敬法又復於戒不破不斷。戒力堅固離垢清淨已。知時知處普徧平等。應受施主飲食供養。如是淨戒同。所修。同所了知同修梵行。此名戒和敬法。又復若見聖智趣證出離之道。乃至盡苦邊際。於如是相如實見已。同一所作同所了知同修梵行此名見和敬法。如是等名為六和敬法”(『식쟁인연경』, T1, 906c).

13) “復行此六慰勞法。阿難。如是汝於我去後共同和合。歡喜不諍。同一一心。同一一教。合一水乳。快樂遊行。如我在時”(T1, 755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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