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근현대 인도는 19세기 말 이후 불교의 역사적 복원과 사회적 부흥을 통해 종교적·문화적 정체성 재구성의 주요 국면을 맞이하였다. 특히, 근대인도 불교 부흥은 흔히 1956년 암베드카르(B. R. Ambedkar)의 대규모 집단개종 사건으로 환원되어 서술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방대한 역사적 흐름 속 하나의 정점을 이루는 사건으로, 전체 서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단절’과 ‘부활’의 이분법적 서사 사이에는 실질적으로 다층적인 행위자들(식민 관리, 고고학자, 인도 및 아시아 지식인, 사회개혁가 등)과 지식 체계(문헌학, 고고학), 그리고 정치적·사회적 요구가 상호작용하며 불교가 현대적으로 재구성되는 복합적인 과정이 자리 잡고 있다.
오버(Douglas Ober)는 그의 연구 Reinventing Buddhism에서 근현대 인도 불교가 단순히 단절된 후 복원된 것이 아니라,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의 망 속에서 과거가 현재로 소환되어 새롭게 구성되고, 나아가 “재발명(reinventing)”된 것이라고 주장한다(Ober, 2016: 5-8)1). 그의 연구는 1839년 『바즈라수치(Vajrasūcī, 金剛針論)』 논서의 간행에서부터 1956년 암베드카르의 집단개종 및 역시 그 해에 있었던 네루 총리가 주관한 국가 주도의 ‘불교 2500년’ 행사에 이르는 시기를 하나의 연속적 경로로 묶어 분석하고 있는데, 본 고에서도 그가 주목하여 분석한 시기를 포함하여 그 이후까지 기준으로 삼는다.
인도 및 남아시아지역에서 현대 인도 불교가 부흥한 것은 다양한 복합적 요인들이 중층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부흥 운동의 주요 배경은 식민지 지배와 이에 따른 고고학·문헌의 재발견, 사회개혁 사조, 국제 네트워크 확장, 인도 민족주의 등 복합적 시대 변화와 맞물려 있다.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식민지 지배는 불교가 체계적으로 ‘재발견’ 된 계기로 작용하였다. 19세기 후반 영국 식민 지배하에서 알렉산더 커닝엄(A. Cunningham, 1814∼1893)이 주도한 인도고고조사국(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의 작업을 통해 보드가야, 사르나트 등의 불교 유적이 발굴·확인되었다(Singh, 2004: 120-145). 외젠 뷔르누프(Eugène Burnouf, 1801∼1852), 막스 뮐러(F. Max Müller, 1823∼1900) 등 서구 오리엔탈리스트들과 인도인 지식인들의 공동 작업은 불교 경전의 편찬과 번역을 통해 불교에 대한 새로운 학문적 지식을 생산해냈으며, 이는 불교를 근대 인도 사회의 중요한 문화 자원으로 재편하는 토대가 되었다(Ober, 2016: 78-79; 4).
둘째, 사회개혁과 집단 해방의 요구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인도 사회에는 카스트 차별, 신분 질서, 사회적 불평등 문제가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불교는 계급 해방, 평등, 윤리, 참된 종교성 등 새롭고 진보적인 이념의 상징이 되어 사회개혁 운동(특히 불가촉천민 운동)과 결합하게 되었다(Zelliot, 1992: 155-178). 특히 암베드카르와 같은 지도자는 불교를 ‘사회적 해방의 도구’로 명확히 위치 짓고, 기존 카스트 질서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신불교(Neo-Buddhism) 운동을 주도하였다(배상한, 2010: 421-422; Ober, 2016: 273-275; 275).
셋째, 범아시아 네트워크 및 국제 교류의 활성화가 부흥 운동에 중요한 추진력을 제공하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스리랑카의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 Dharmapala, 1864∼1933)가 설립한 마하보디협회(Maha Bodhi Society)를 매개로 인도와 스리랑카, 미얀마, 일본 등지의 불교지도자 및 단체들 간의 교류가 긴밀해졌다(Kemper, 2015: 45-67). 이러한 네트워크는 인도를 ‘불교 세계의 성지’로 재부상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인도 내 불교 정체성의 회복과 국제적 종교 공동체 의식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Ober, 2016: 147-148; 168-171).
넷째, 민족주의와 근대 국가 정체성 형성 과정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도 독립운동 및 독립 이후 국가 건설 시기에 불교는 ‘고대 인도의 영광’과 ‘비폭력’, ‘평화’의 상징물로 정치적·문화적으로 동원되었다(Ling, 1980: 189-192). 독립 인도 국기 중앙에 아소카 차크라(Ashoka Chakra), 즉 ‘법륜’을 채택한 것은 불교 유산이 현대 인도 국가의 상징적 기반 중 하나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이다(DeVotta, 2001: 169-171; Ober, 2016: 312-316).
이처럼 현대 인도 불교 부흥 운동의 배경은 단일 요인이 아니라 식민지라는 시대사적 변화, 사회개혁, 국제 교류, 민족주의 등 복합적 맥락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Ober, 2016: 98ff).
이에 본 고는 기존 선행 연구들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Ⅱ장에서는 현대 인도 불교 부흥 운동의 시기별 전개를 체계적으로 고찰하기 위해 이를 세 단계(1890∼1930년대, 1930∼1960년대, 1950∼1990년대)로 구분하고 그 구분 기준을 제시한 뒤 각 시기의 전개 양상을 분석한다. Ⅲ장에서는 암베드카르 운동의 전개를 분석하되, 기존 인도 불교 부흥 운동의 맥락에서 그 연속성까지 고찰한다. Ⅳ장에서는 오버의 이론적 틀을 심화 적용하여 부흥 운동의 내적 동인과 작동 메커니즘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그 총체적 의의를 규명한다. 이를 통해 19세기 이후 인도 불교의 부흥 운동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리하고, 그 부흥의 여러 동인을 살핌으로써 현재의 인도 불교 상태를 확인하고 향후 인도 불교 발전 방향을 가늠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Ⅱ. 현대 인도 불교 부흥 운동의 시기별 전개
근현대 인도 불교의 전개는 시기적으로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하여 접근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1890∼1930년대)는 서구 불교학의 발전과 더불어 불교가 인도로 ‘귀환’한 시기이다. 두 번째 단계(1930∼1960년대)는 사회 개혁적 성격이 두드러진 불교 운동기로, 암베드카르(B. R. Ambedkar)의 신불교 운동, 코삼비(D. D. Kosambi) 부자의 사회주의적 불교 해석, 그리고 인도 샤카족의 부흥운동 등이 특징적이다. 세 번째 단계(1950∼1990년대)는 다양한 불교 전통이 융합하는 시기로, 티베트 불교의 정착 및 위빠사나(Vipassana) 명상 운동의 대중화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삼분법적 시기 구분은 단순한 편의적 분류가 아니라, 각 시기 부흥 운동을 주도한 행위자의 성격과 불교가 수행한 사회적 기능의 질적 전환에 근거한 것이다. 제1기(1890∼1930년대)는 서구 학자, 고고학자, 스리랑카 출신 포교사 등 인도 외부의 행위자가 주도하고 불교가 학문적 ‘재발견’의 대상으로 존재했던 시기이다. 제2기(1930∼1960년대)는 암베드카르를 위시한 인도 내부의 사회개혁가와 달리트 지도자가 운동의 주체로 부상하면서 불교가 ‘사회 해방의 도구’로 기능한 시기이며, 제3기(1950∼1990년대)는 티베트 망명 공동체와 위빠사나 수행 운동 등 외래 전통의 유입과 함께 불교가 교학과 수행이라는 종교 본연의 기능으로 확장된 시기이다. 즉 본 고의 시기 구분은 ‘누가 부흥을 주도했는가’와 ‘불교가 어떤 사회적 기능을 담당했는가’라는 두 축의 전환점을 기준으로 삼는다.
한편 제2기와 제3기가 1950∼1960년대에 중첩되는 것은 이 시기가 지니는 이중적 전환점의 성격을 반영한다. 1956년은 암베드카르의 집단개종으로 사회 개혁적 불교 운동이 정점에 도달한 해인 동시에, 네루 정부가 주관한 국가 주도의 ‘불교 2500년’ 기념행사가 열린 해이며, 곧이어 1959년 달라이 라마의 망명으로 독립 인도에서 불교의 다원적 재구성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따라서 두 시기의 중첩은 분류의 느슨함이 아니라, 사회 운동으로서의 불교 부흥이 정점에 이르는 국면과 다원적 전통이 유입되는 국면이 교차하는 과도기적 이행을 나타내는 것이다.
18세기 말 계몽주의와 함께 태동한 서구의 불교학은 현대 인도 불교 부흥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다만 19세기 서구의 인도 불교 연구는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이나 종교적 관심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그것은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인도 사회의 언어, 종교, 법, 관습, 카스트, 고대 유적과 문헌을 체계적으로 조사·분류하고자 했던 식민지 지식 생산 기획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인도고고조사국 자체가 식민 행정의 일부로 설립된 기구였다는 점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기 불교 유적의 발굴과 산스크리트·팔리어 문헌 연구는 학문적 성과인 동시에 식민 권력과 지식 생산이 결합한 산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후술하듯이, 식민지 지식체계 속에서 생산된 불교 지식은 이후 인도의 지식인과 하층 카스트 운동가들에 의해 지배의 도구가 아닌 해방의 자원으로 재전유(reappropriation)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귀결은 식민 권력의 의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서구 철학자 최초로 불교 사상에 공개적 친화감을 표명했던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의지(will)의 철학과 고통에 대한 탐구는 불교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입장은 불교를 염세적으로 오해를 한 점은 있으나 서구 지식인 사회에 불교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르느와르, 2002: 131-154).
본격적인 불교학의 기반은 외젠 뷔르누프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는 1837년 네팔에서 파리로 전송된 산스크리트 불교 사본들을 분석하여 『인도불교사 입문(L’Introduction à l’histoire du Bouddhisme indien)』(1844)을 저술했다. 이 저서는 불교를 역사적·문헌학적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후 『법화경』의 유럽 언어 최초 완역(1852)으로 이어져 경전 연구의 시대를 열었다.
한편, 막스 뮐러(Max Müller)는 비교언어학과 비교종교학 방법론을 도입하여 불교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그가 기획하고 감독한 50권 규모의 『동방성전(Sacred Books of the East)』 시리즈(1879∼1910)는 힌두교와 불교의 다양한 경전들을 체계적으로 영어로 번역·소개함으로써 서구는 물론 후일 유럽 교육을 받은 인도 엘리트들에게도 불교 원전에 대한 접근 기회를 제공했다. 이처럼 서구의 학문적 성과는 식민지 인도의 지식 생산 체계를 통해 재유통되며, 인도인 스스로의 종교적 유산을 재발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19세기 말 이후는 팔리어 경전과 테라바다 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1881년 팔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를 설립한 토머스 리스 데이비즈(Thomas William Rhys Davids, 1843∼1922)는 테라바다 불교 경전의 체계적 연구와 출간을 주도했다. 스리랑카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팔리어와 불교에 접촉한 그는 불교의 원형을 찾고자 팔리 문헌에 집중했으며, 이는 후에 현대 인도의 불교 부흥 운동에 중요한 문헌적 근거를 제공했다.
헤르만 올덴베르크(Hermann Oldenberg, 1854∼1920)의 『붓다: 그의 생애, 교리, 교단(Buddha: Sein Leben, seine Lehre, seine Gemeinde)』(1881)은 팔리 문헌을 바탕으로 한 서구 최초의 체계적 불교 연구서로, 가장 유명한 책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리스 데이비즈와 함께 테라바다 율장을 편집·번역하며 불교학의 학문적 기초를 다졌다. 이 책은 당대 서구 사회에 붓다의 생애와 교리를 포괄적으로 소개하는 표준적인 저작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알렉산더 커닝엄이 이끈 인도고고조사국은 사르나트, 보드가야 등 주요 불교 유적지를 발굴·확인했다. 특히 아쇼카 석주와 비문의 발견은 불교가 인도 고대사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Singh, 2004: 120-145). 이러한 고고학적 성과는 불교의 인도적 특징을 물리적으로 확인시켜 주었고, 이후 성지 복원 운동의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이런 서구 불교학의 발전을 따라 불교는 인도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 내부가 아니라 스리랑카에서 먼저 발생했다. 1891년 스리랑카에서 마하보디협회를 설립한 다르마팔라는 서구 불교학의 성과를 현실적 불교 부흥 운동으로 전환시킨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891년 보드가야를 방문하여 이 성지가 힌두교도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현실에 충격받고, 불교 성지 복원 운동을 시작했다. 마하보디협회는 인도 각지에 센터를 설립하여 인도인들의 불교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신지학회의 창립자 중의 한 사람인 헨리 스틸 올코트(Henry Steel Olcott, 1832∼1907)는 1880년 스리랑카에서 정식으로 불교도가 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 그는 불교 교육 운동을 전개하여 스리랑카에 아난다 칼리지를 비롯한 주요 학교들을 설립하여, 사망 무렵 약 200여 개의 불교 학교를 설립함으로써 불교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불교 문답(Buddhist Catechism)』은 불교와 과학을 결합하려는 초기 시도였으며, 이는 후에 현대적 불교 해석의 토대가 되었다. 당시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후대의 유럽에도 불교 해석에 대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크리파사란(Kripasaran, 1865∼1927) 스님은 인도 벵갈의 포교사로서 원래 밀교 중심이었던 이 지역에 남방불교를 전파하였다. 다르마팔라나 크리파사란 스님 이후의 현대 인도의 중요 불교 포교승인 아짜르야 붓다락키타(Acharya Buddharakkhita, 1922∼2013)스님에게도 보이지만 인도의 현대불교는 티베트 불교의 예를 제외한다면 주로 남방불교가 회귀하여 전파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1910∼1940년대 스리랑카 승려들이 주도한 남인도 케랄라 포교는 케랄라주 중남부의 이자바(Izhava)와 북부 지역의 티야(Thiyya) 공동체에 일부 불교 개종을 이뤄냈다. 원래 이 지역은 대승불교의 중요 지역이었고, 많은 불교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불교는 케랄라 이자바(Izhava)와 티야(Thiyya) 공동체 하층 카스트들과 연합하여 적극적인 반카스트 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는 20세기 초 케랄라의 대표적 영적 지도자인 스리 나라얀 구루(Sri Narayana Guru, 1856∼1928)의 반카스트 운동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나라얀의 운동은 케랄라 지역의 정치적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 그 영향력을 존속시키고 있으나 불교 운동은 이후 더 이상 명맥을 잇지 못했다.
남인도 타밀 출신의 사회개혁가이자 불교 부흥 운동가인 아이요티 타스(Iyothee Thass, 1845∼1914)는 의사, 언어학자 출신으로 타밀나두에서 불교 부흥 운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는 올코트와 교류 후 스리랑카에서 수계를 받고 남인도에서 1898년 사캬 불교회(Sakya Buddhist Society)를 창립하여, 불가촉천민들이 불교로 돌아가도록 장려하고 교육과 공개강연을 조직했다. 타밀어 주간지 『Oru Paisa Tamilan』2)을 창간하여 불교와 반카스트 담론을 대중화했다. 그의 활동으로 팔라이얀(Palaiyan)과 파라이야르(Paraiyar)같은 불가촉천민 공동체3)들은 불교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한편, 북인도의 럭나우에서는 비구 보다난드(Bhikkhu Bodhanand, 1874∼1952)가 도시 빈민층을 대상으로 불교를 선교하였다. 보다난드는 웃타르프라데쉬의 브라만 출신이었지만 젊은 시절 불교에 매료되어 스리랑카에서 승려가 되고, 인도 럭나우로 귀향하여 도시 빈민 지역에서 노동자와 하층민에게 불교를 전파했다. 그는 학술강연이나 중산층 대상이 아니라, 빈민층 속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원주민 인도인(original Indians) 이론을 펼쳤다. 그는 불가촉천민과 하층 카스트가 인도의 원주민이고, 고위 카스트가 외래 침략자라고 주장했다. 고대에 불교를 믿는 평등한 사회가 있었고, 외래의 침략자가 북인도로 들어와 카스트와 베다 신앙을 강요하며 원주민이 하층민이 되었다고 주장했다.4) 따라서 불교 개종은 본래 종교로 복귀하는 것이고, 유산을 되찾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는 불가촉천민들에게 강력한 심리적, 정치적 영향을 끼쳤고, 심리적 해방감을 제공했다. 그는 럭나우에 불교센터를 설립하여 주거공간, 야간학교, 법률상담, 공동식당, 도서관 등을 하층 카스트에 제공했다. 그곳은 노동자를 조직하는 공간 역할도 하였다. 또 그는 여성 권익의 증진과 여성 불교 지도자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개혁적인 그의 활동은 영국 식민 당국의 감시를 받았지만, 그의 불교센터가 많은 노동 활동가뿐만 아니라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구심점이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1940년대 체포 등의 정치적 탄압을 받으며 명성을 높였다. 그의 럭나우 운동에서 개종자는 수천 명 정도의 소규모였고, 그의 사후에 불교 운동은 약화되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신불교 운동에 중요한 영향력과 선례를 남겼다. 1956년 암베드카르의 대규모 개종 이후 럭나우에서 신불교 공동체가 재부흥했다는 점은 그의 씨앗이 암베드카르를 통해 꽃을 피웠음을 의미한다(Ober, 2016: 258-267).
고아(Goa)의 가난한 브라만 출신인 다르마난드 코삼비(Dharmanand Kosambi, 1876∼1947)는 1902년 스리랑카에서 불교도로 개종하여 승려가 되었다. 환속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팔리어를 가르치며 마르크스주의에 접촉한 그는 1929년 소련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팔리어를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암베드카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불교를 통한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1947년 6월 단식으로 생을 마감한 그는 간디로부터 "인도에서 그와 같은 학문적 깊이를 가진 사람은 없다"는 추도를 받았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불교, 학문, 사회개혁이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의 아들 다모다르 다르마난드 코삼비(D.D. Kosambi, 1907∼1966)는 수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서 아버지의 불교적 사회개혁 정신을 계승했다. D.D. 코삼비는 불교를 경제적 공산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는 불교가 카스트 제도의 엄격함을 완화했지만 완전히 철폐하지는 못했다고 보았다. 그는 올덴베르크의 견해를 인용하여 붓다가 카스트를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이를 폐지하기 위해 영향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불교 승단에서 천민 출신이 8.5%를 차지했다는 리스 데이비즈의 통계를 인용하며, 불교가 사회적 이동을 가능하게 했지만 그것은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주었다. D.D. 코삼비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초기에는 반브라만적 성격을 지녔으나, 점차 준-브라만적 사회관을 채택하였고, 중도를 추구한 불교가 유신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윤회 사상과 요가적 신비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우파니샤드적 관점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1970년대 불가촉천민 운동에서 제기된 마르크스주의 대 불교의 논쟁5)은 코삼비 부자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가촉천민 해방을 위한 종교적 접근과 계급 투쟁적 접근 사이의 긴장은 현재까지도 인도 진보 운동 내부의 중요한 쟁점으로 남아 있다.
1930년대는 인도 불가촉천민 해방 운동사에서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암베드카르는 이전의 사회개혁 운동에서 정치적 권력 획득으로 전략을 변화시켰다. 1930년 3월, 나시크(Nasik)의 칼라람(Kalaram) 사원 진입을 위한 두 번째 사티야그라하(Satyagraha)를 주도하며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들의 사원 참배권을 주장했으나, 상당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암베드카르는 힌두교 내에서의 개혁보다는 근본적인 종교 전환을 통한 해방 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32년 푸나 협약(Poona Pact)은 불가촉천민 정치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간디와 협상을 통해 불가촉천민들은 일반 선거구 내 일정 비율의 의석을 할당받았지만, 암베드카르는 이를 정치적 타협으로 받아들이면서 진정한 사회적 평등은 달성되지 못했음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1935년 10월 13일 예올라(Yeola)에서 열린 공개 집회에서 “불행하게도 나는 힌두교도로 태어났다. 이것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힌두교도로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확실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불가촉민들은 힌두교를 완전히 떠나 다른 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선언하며 종교 전환 운동을 공식화했다(Jaffrelot, 2005: 82).
암베드카르의 정치적 활동은 체계적인 조직 건설을 통해 전개되었다. 1924년 설립된 바히시크리트 히타카리니 사바(Bahishkrit Hitakarini Sabha)는 불가촉천민 교육과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목표로 한 초기 조직이었다. 1936년에는 독립노동당(Independent Labour Party)을 창당하여 불가촉천민 문제를 노동 계급 문제와 연결시키려 했다.
1942년 전인도 지정 카스트 연합(All-India Scheduled Castes Federation, SCF) 설립은 불가촉천민 정치 운동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SCF는 전국적 규모의 정치 조직으로서 불가촉천민들의 독립적 정치세력화를 추진했다. 암베드카르는 이를 통해 불가촉천민스탄(Untouchablestan)6) 개념을 제시하여, 불가촉천민들이 독립적인 정착지를 형성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암베드카르의 불교 전향은 단순한 종교적 개종이 아닌 사회혁명의 수단이었다.
1956년 10월 14일 비자야다사미(Vijayadashami) 축제일7)에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의 주도 나그푸르(Nagpur)에서 행한 50만 명의 불교 개종은 인도 종교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종교 전환이었다. 이후 1957∼60년대에 걸쳐 수백만 명이 추가 개종했다(Queen, 1996: 45-71). 암베드카르의 1956년 개종은 갑작스러운 사건이기보다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긴 역사적 과정의 정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남인도 케랄라의 스리랑카 승려들, 럭나우의 비구 보다난드, 타밀나두의 아요티 타스 등은 이미 1900년대 초부터 불가촉천민과 하층 카스트에게 불교를 전파하고 있었다. 이런 선행(先行) 불교 운동은 암베드카르의 불교 개종에 지적, 조직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불교가 카스트 해방의 실행 가능한 대안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암베드카르의 신불교는 전통 불교와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녔다. 그는 불교를 이성의 종교로 해석하며, 카스트 제도에 맞선 평등 이념을 강조했다. 이는 서구 불교학의 영향을 받은 근대적 불교 해석으로, 종교를 사회개혁의 도구로 활용한 혁신적 접근이었다.
암베드카르는 불교를 선택한 이유로 외래종교가 아닌 인도적 기원이기에 여타의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비난을 피할 수 있고, 불교가 본래 카스트를 거부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며, 이성주의와 과학적 정신, 신이 아닌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자비와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윤리, 그리고 비폭력 원칙 때문이라고 표방하였다.
1956년 9월 30일, 암베드카르는 SCF를 해체하고 인도 공화당(Republican Party of India) 창당을 결정했다. 이는 카스트적 함의를 가진 기존 조직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였다. 인도 공화당은 "자유, 평등, 박애, 정의"를 기본 원칙으로 하여 불가촉천민만의 정당이 아닌 모든 억압받는 계층을 포괄하는 정치세력을 지향했다.
암베드카르는 람 마노하르 로히아(Ram Manohar Lohia), 마두 리마에(Madhu Limaye, 본명: Madhukar Ramchandra Limaye) 등 사회주의 지도자들과의 연합을 추진하여 정치적으로 강력한 야당 역할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1956년 12월 6일 갑작스러운 그의 사망으로 이러한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고, 후계자들은 이념적 통합에 실패하며 당은 40여 개 분파로 분열되었다.
인도 내 샤카족(Shakya) 공동체는 현재 인도 전역에 분포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붓다의 활동 무대였던 북인도, 특히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 지역을 거점으로 가장 활발한 불교 부흥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의 운동은 단순한 종교적 개종을 넘어, 자신들이 붓다의 혈통인 ‘샤카족’의 후예라는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을 복원하려는 ‘재발명(reinvention)’의 성격을 띤다.
샤카족의 불교 부흥 운동은 1900년대 초반, 우타르프라데시의 사회개혁가들에 의해 그 사상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특히 럭나우(Lucknow)를 중심으로 활동한 보다난드 마하스타비르(Bodhanand Mahastavir, 1874∼1952)와 칸푸르(Kanpur)의 아차리아 메다르티(Acharya Medharthi, 1900∼1971)는 이 지역 불교 부흥의 선구자적 인물들이다. 보다난드는 1916년 ‘인도 불교 위원회(Bharatiye Buddh Samiti)’를 설립하고, 그의 저서 『원주민과 아리안(Mula Bharatavasi Aur Arya)』을 통해 슈드라와 불가촉천민이 인도의 원래 통치자였으나 아리안의 침략으로 노예가 되었다는 ‘원주민 이론’을 설파하며 불교로의 귀환을 촉구했다. 메다르티 역시 달리트들이 고대의 지배자(Adi-Hindus)였음을 강조하며 1930년대부터 불교 교육과 반카스트 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초기 운동은 1956년 암베드카르의 대규모 집단 개종과 결합하며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메다르티는 1956년 나그푸르 개종식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이는 우타르프라데시의 샤카족 및 하층 카스트들이 암베드카르의 신불교(Navayana) 운동에 합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샤카족 불교 부흥 운동은 평화행진, 대규모 불교 개종식(Diksha), 법당(Vihara) 및 학교 건립 등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활동으로 발전하였으며, 2000년대에 접어들며 그 양상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현대의 샤카족 불교 운동은 국제적 불교 네트워크와의 연대를 통해 그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초기 운동이 정치적 성격과 정체성 투쟁에 집중했다면, 현대에는 스리랑카의 남방 불교계 및 히말라야 지역의 티베트 불교계와 교류하며 의례와 수행 체계를 정비하고 있다(Lokamitra, 2003). 특히 1959년 달라이 라마의 망명 이후 인도에 정착한 티베트 불교는 북인도 불교 공동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꾸마리 쁘리앙카, 2012: 366ff).
그러나 이러한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샤카족의 불교 부흥 운동은 여러 내적·외적 난관에 봉착해 있다. 첫째,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교리 교육 프로그램과 전문적인 지도자(승려 및 법사) 양성 시스템이 부재하여, 개종 이후 신행 생활이 힌두교 관습과 혼재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지역사회 내 힌두 보수 세력과의 갈등 및 카스트 간의 긴장이 지속되고 있으며, 셋째, 힌두교 사원에 비해 불교 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이 취약하여 법당 건립이나 교육 사업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샤카족의 불교 운동이 단순한 종교 부흥을 넘어 사회적 제도로 안착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1959년 달라이라마의 인도 망명은 현대 인도 불교사에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은 인도를 티베트 불교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며, 인도 불교 부흥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인도 수상인 네루가 제공해 준 다람살라 지역에 망명 정부를 세운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의 종교적·문화적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체계적 노력을 전개했다. 1959년 티베트 공연예술원을 설립하고, 1967년에는 중앙 티베트 고등 연구소를 대학으로 승격시켜 티베트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970년에는 다람살라에 티베트학 연구의 세계적 중심지인 티베트 도서관을 개설하여 8만 권 이상의 사본과 중요 자료를 수집했다.
달라이라마는 200개 이상의 사원을 재건하여 티베트 불교 전통의 연속성을 유지했다. 중국의 억압을 피해 그를 따라 인도로 탈출한 십수만 명의 티베트 난민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인도는 티베트 불교의 새로운 성지로 변모했다. 현재 인도에 거주하는 티베트 난민들은 전 세계 티베트 난민의 73%를 차지하며, 이들은 인도를 제2의 티베트로 만들어가고 있다.
달라이라마의 망명은 단순한 피난이 아니라 인도 불교 부흥의 국제화를 가져왔다. 그는 인도를 자유롭고 번영하는 불교 연구 환경이라고 평가하며, 중국과 달리 인도에서는 중관철학과 불교논리학 등 깊은 철학적 텍스트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티베트 불교의 인도 정착은 20세기 후반 인도 불교의 부흥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Condrolli, 2024).
사티야 나라야나 고엥까(S. N. Goenka, 1924∼2013)의 위빠사나 운동은 1950년대 이후 인도 불교 부흥의 또 다른 핵심축이었다. 인도계 미얀마인으로 태어난 고엥까는 1955년 편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미얀마의 불교 재가법사이자 위빠사나 스승 우 바 킨(U Ba Khin)을 만난 인연으로 그의 문하에서 14년간 위빠사나를 수행했다. 1969년 인도로 돌아온 그는 뭄바이에서 첫 10일 코스는 뭄바이에서 개최하고, 이후 1976년 최초 상설 센터를 이갓푸리의 담마기리에 설립하였다. 고엥까의 접근법은 불교의 비 종파적 특성을 강조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는 붓다가 종파적 종교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해탈의 길, 즉 보편적인 진리를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접근은 카스트와 종교로 분열된 인도 사회에서 폭넓은 호응을 얻었으며, 모든 배경의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명상법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안병희, 2015: 42-43).
1976년 마하라슈트라주 나시크(Nasik) 근처 이갓푸리(Igatpuri)에 설립된 담마기리(Dhamma Giri) 센터는 위빠사나 운동의 국제본부가 되었다. 이 센터는 매달 2회의 10일 코스를 제공하며,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집중 수행을 가능하게 했다. 고엥까는 1982년부터 보조교사 양성을 시작했으며, 1985년에는 위빠사나 연구소를 설립하여 학문적 기반을 강화했다.
현재 고엥까 전통의 위빠사나 센터는 94개국에서 380개가 운영되며, 이 중 241개가 상설 명상센터이다. 인도 내에서도 보드가야, 다람살라, 뭄바이, 첸나이 등에서 11개의 주요 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고엥까의 명상 포교, 혹은 불교 부흥 운동의 특징은 과학적이고 합리적 접근에 있다. 이러한 고엥카의 위빠사나 운동은 현대 인도에서 불교가 이성적 종교로 인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6년 12월 사르나트에서 거행된 상좌부 비구니 수계는 천년 만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스리랑카의 도단고다 레와타 대장로(Venerable Dodangoda Revata Thera)와 마팔라가마 위풀라사라 대장로(Venerable Mapalagama Vipulasara Thera)가 주도하고 한국 비구니들이 참여한 가운데, 11명의 스리랑카 여성이 비구니 수계를 받았다. 이는 11세기 이래 상좌부 전통에서 사라졌던 비구니 승단의 공식적 부활이었다(Tsomo, 1999: 231-232).
1998년 2월 보드가야에서는 더욱 대규모의 국제 비구니 수계식이 거행되었다. 대만 불광산의 성운 대사 주도로 23개국 132명의 여성이 참여한 이 행사는 상좌부와 대승불교 전통이 함께한 역사적 순간이었다(Bartholomeusz, 1999: 265). 인도, 스리랑카, 태국, 대만, 일본, 한국, 콩고, 독일,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스페인, 캐나다, 미국 등에서 온 수행자들이 대만의 15명 비구니와 여러 국가의 비구들로부터 계를 받았다.
이 수계의 교리적 정당성은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으로 비구니 서품은 비구와 비구니 양쪽 승단이 참여하는 이중 승단 수계(dual-Sangha ordination)가 필요한데, 상좌부에서는 비구니 전통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독일 출신의 비구 스님인 아날라요(Anālayo)는 초기 경전 연구를 통해 비구만의 수계도 가능하다는 전거를 제시했다(Anālayo, 2013). 그에 따르면 부처님이 최초로 비구니 승단을 허락할 때 비구들이 비구니 수계를 할 수 있다고 규정했지만, 이후에 이중 승단 수계 규정이 추가되었기 때문에 비구만의 수계도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상좌부 비구니 수계는 상좌부 불교 내에서 오랫동안 끊겼던 비구니 계맥을 복원함으로써 여성의 출가수행 기회를 확대하고, 지역 불교 공동체의 다양성을 증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 불교 부흥과 국제적 교류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Ⅲ. 암베드카르의 활동과 신불교 운동
암베드카르는 1920년대부터 불가촉천민의 권익 신장을 위한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초기 달리트 운동은 암베드카르의 출신 카스트인 마하르(Mahar)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교육 향상과 계몽에 힘쓰는 한편, 기본권 쟁취와 힌두 사회 내부에서의 평등을 추구하였다. 1924년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의 교육과 사회개혁을 목적으로 바히시크리트 히타카리니 사바(Bahishkrit Hitakarini Sabha)를 창립하여 학교 설립, 장학 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1927년에는 마하라슈트라주 마하드(Mahad)에서 불가촉천민들이 공공 식수에 평등하게 접근할 권리를 요구하는 사티야그라하(satyagraha)를 지도하였고, 이 투쟁의 결의로 힌두교 경전인 마누법전(Manusmriti)을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상징적 행동을 감행하였다. 이를 통해 암베드카르는 카스트 신분제를 정당화해온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였고, 불가촉천민 해방을 위한 근본적 사회 변혁 의지를 천명하였다(Zelliot, 1992: 155-178).8) 또한 1930년 나시크(Nasik) 지역의 칼라람 사원 진입 사티아그라하를 주도하여 불가촉천민들의 힌두 사원 출입권을 요구하였으나, 상층 카스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암베드카르는 힌두교 내부에서의 부분적 개선으로는 불가촉천민의 해방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는 점차 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와 종교적 각성을 통한 해방을 모색하면서, 이후 자신의 운동 노선을 사회적 권리 투쟁에서 종교적 각성 운동으로 전환해 나갔다.
암베드카르의 사상은 1930년대를 거치며 힌두 사회 내부 개혁론에서 탈힌두교 및 새로운 종교 수용론으로 크게 전환되었다. 1932년 식민 정부와 전개된 대표권 협상에서 푸나 협약(Poona Pact)이 체결되었지만, 암베드카르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별도의 정치세력화와 사회적 평등 실현을 고민하였다. 푸나 협약으로 불가촉천민에게 일부 공직 할당이 보장되었으나, 이는 근본적 차별 철폐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1935년 10월 마하라슈트라 예올라(Yeola)에서 열린 불가촉천민 대중집회에서 암베드카르는 “나는 불행히도 힌두교도로 태어났지만 결코 힌두교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불가촉천민은 힌두교를 완전히 떠나 다른 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선언하며 공식적으로 종교 전환 운동을 선포하였다(Jaffrelot, 2005: 82). 이 선언은 힌두교 질서와 결별하고 새로운 영적 기반 위에서 평등을 추구하려는 암베드카르 사상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후 암베드카르는 힌두교의 카스트주의에 대항할 대안을 모색하면서 불교를 유력한 선택지로 고려하게 된다. 그는 불교가 인도 고유의 종교 전통이면서도 카스트 차별을 거부하는 평등 사상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1930년대 후반부터 암베드카르는 시크교 등 여타 종교로의 개종 가능성도 검토했으나(Jaffrelot, 2005: 130-132), 궁극적으로 불교가 사회개혁과 정신적 해방의 양 측면에서 가장 합치하는 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1936년 <카스트의 말살(Annihilation of Caste)>을 저술하여 힌두교 경전에 내재한 불평등 이념을 통렬히 비판함으로써, 그는 종교적 세계관의 변혁 없이는 사회적 해방도 불가능함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사상의 변화는 암베드카르로 하여금 종교를 사회 혁명의 도구로 활용하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게 했으며, 이는 훗날 신불교 운동의 이념적 토대를 형성하였다.
암베드카르는 사회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정치세력화를 통해 불가촉천민의 권익을 증진하고자 했다. 그의 운동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수 사회개혁에서 정치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1936년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독립노동당(Independent Labour Party, ILP)을 창당하였다. ILP는 계급 문제와 카스트 문제의 연대를 추구하며, 계급적 억압과 카스트 차별이 교차하는 현실에서 하층 계급의 연합을 도모한 정당이었다. 이어 1942년에는 전국 규모의 불가촉천민 정당인 전인도 지정 카스트 연합(All-India Scheduled Castes Federation, SCF)을 설립하여 달리트들의 독립적 정치세력화를 꾀하였다. 이는 불가촉천민 운동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되며, 암베드카르는 SCF를 통해 차별과 배제에서 벗어난 자치공간으로서 불가촉천민스탄(Untouchablestan) 구상을 제시하기도 하였다(Zelliot, 1992: 183; Jaffrelot, 2005: 130-132). 그는 이러한 정치 조직들을 기반으로 입법기관 진출, 정책 개선, 헌법 제정 과정에서의 영향력 확보 등을 추진하며, 사회적 약자의 법적 권리 보장을 위해 힘썼다. 나아가 암베드카르는 인도 독립 이후 초대 법무장관과 헌법기초위원회 의장을 역임하면서 헌법에 평등권과 차별철폐 조항을 포함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집권당이었던 인도국민회의와의 이념 차이 및 한계로 인해 암베드카르는 1951년 장관직을 사임하고 독자적인 정치 노선을 강화하게 된다. 그는 불가촉천민만의 정당을 넘어 모든 피억압계층을 아우르는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1956년에는 SCF를 해체하고 인도 공화당(Republican Party of India, RPI) 창당을 계획하였다. RPI의 이념은 “자유, 평등, 박애, 정의”로 요약되었으며, 이는 특정 종교나 카스트에 한정되지 않는 포괄적 사회변혁을 지향한 것이었다(Queen, 1996: 45-71; Ober, 2016: 324-331). 비록 암베드카르가 1956년 12월 급서함으로써 RPI 창당은 그의 생전에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그의 정치 조직화 노력은 달리트들에게 정치적 각성과 단결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암베드카르는 오랜 숙고 끝에 불교로의 전환을 자신의 해방운동의 최종 해법으로 선택하였다. 1950년대 초반에 이르러 그는 불교 경전을 연구하고 불교 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개종 준비를 본격화했다. 1950년 스리랑카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국제 불교계와 접촉한 암베드카르는, 불교가 지닌 인간 평등 사상과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불교가 신이나 영혼에 대한 교리보다 이성과 윤리를 중시하며, 자비와 평등의 가르침을 통해 사회적 억압을 극복할 수 있는 종교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한 토착 종교이기에 개종 이후에도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고, 힌두교 진영의 비판을 상대적으로 덜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Ober, 2016: 5-8, 357-358). 암베드카르는 1954년 미얀마 양군에서 열린 제3차 세계불교도우의회(WFB) 대회에도 참석하여 불교 신자로의 전환 의사를 국제적으로 천명하였고, 1955년에는 인도 내 불교 부흥을 위한 조직인 불교회(佛敎會; Buddhist Society of India)를 결성하는 등 개종을 향한 준비를 가속화했다. 그는 불교 교단의 협력을 얻기 위해 스리랑카와 미얀마 등의 승려들과 교류했고, 자신의 추종자들에게도 불교 교리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암베드카르는 이 시기에 불교 교설을 재해석한 저작 『부처와 그의 담마(The Buddha and His Dhamma)』 집필에 착수하여, 새로운 불교 운동의 교과서가 될 경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 저술에서 그는 전통 불교 교의를 현대 사회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불교가 어떻게 사회 해방의 이념을 제공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암베드카르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는데, 불교로의 개종은 단순한 개인의 개종이 아니라 억압받는 집단의 사회혁명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나의 종교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이다. 바로 그것이 불교의 정신”이라고 역설하면서, 불교 개종을 통해 달리트 공동체가 새로운 자존감과 연대 의식을 가질 것을 기대했다.
1956년 10월 14일, 암베드카르는 마침내 역사적인 집단 개종식을 거행하였다. 힌두교의 비자야다사미(Vijayadashami) 축제일을 선택한 그는 마하라슈트라 주 나그푸르(Nagpur)에 약 50만 명에 달하는 불가촉천민 대중을 모아 불교로 귀의하는 의식을 이끌었다. 암베드카르는 자신의 부인과 수많은 지지자들과 함께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들이고, 참석자들에게 불교 신앙을 선언하게 했다. 특히 그는 새로 불교도가 된 대중에게 힌두교의 신과 신앙 행위를 철저히 버릴 것을 맹세하는 22개 조의 서약을 제시하여 함께 선서하도록 하였다. 전통적인 귀의 의례에 이처럼 추가적인 서약을 더한 것은 불교 신앙이 곧 힌두교 사회질서와 단절됨을 명확히 함으로써, 새로운 종교적 정체성이 갖는 사회혁명적 의미를 드러낸 것이었다. 나그푸르에서의 대규모 개종 사건은 인도 근대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종교적 전환으로 평가되며, 종교를 통한 집단적 사회 해방의 한 극점을 보여주었다(Queen, 1996: 45-71). 이 집단 개종의 즉각적 결과로 수십만 명의 달리트들이 불교도로 재탄생하였고, 이후 1957년부터 1960년대에 걸쳐 인도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잇따라 불교로 개종하는 불교 부흥 운동이 촉발되었다. 암베드카르는 개종 직후 불교 신자로서 사회 개혁을 지속할 청사진을 구상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개종 두 달 뒤인 1956년 12월 6일 급작스러운 서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서거에도 불구하고 1956년의 불교 귀의는 인도 사회에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종교적 측면에서 이는 고대로 단절되었던 불교 전통의 인도 부흥을 의미했고, 사회적 측면에서는 천대받던 집단이 스스로 존엄과 평등을 찾아 나선 정체성 혁명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이 사건은 인도 민주주의에 새로운 담론을 형성시켰는데, 종교의 선택을 통한 집단적 저항이 가능함을 보여주어 이후 여러 사회운동에 영감을 주었다. 나그푸르 집단개종 행사에서 암베드카르가 외친 “교육받으라, 단결하라, 권리를 쟁취하라”는 구호는 달리트 공동체의 지속적인 행동강령이 되었고, 인도 불교 부흥 운동의 정신적 유산으로 남았다.
1956년 암베드카르의 불교 개종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19세기 말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도 불교 부흥운동의 역사적 맥락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미 근대 초기에 인도 각지에서는 불교를 통한 사회개혁 시도가 산발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예를 들어 남인도 타밀나두의 사회개혁가 아이요티 타스(Iyothee Thass, 1845-1914)는 영국 식민시대에 불가촉천민들이 본래 불교도였다는 인식하에 불교로의 “귀환”을 주창하였다. 그는 1898년 사캬 불교회(Sakya Buddhist Society)를 창립하고 타밀어 주간지 Oru Paisa Tamilan을 발간하는 등, 불가촉천민들에게 불교 개종을 통한 각성의 길을 열어주었다. 또한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출신의 비구 보다난드(Bhikkhu Bodhanand, 1874∼1952)는 스리랑카에서 출가한 뒤 럭나우(Lucknow)로 돌아와 도시 빈민층 속에서 불교 전도를 시작하였다. 보다난드는 불가촉천민과 하층 카스트가 인도의 원주민이며, 외래 침략 세력이 강요한 카스트 제도로 인해 피지배층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하면서, 불교로 돌아가는 것이 곧 잃어버린 고유한 문화유산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설파하였다(Ober, 2016: 258-267). 그는 럭나우에 불교 센터를 세워 빈민들에게 교육, 의료, 공동 급식, 법률 상담 등을 제공하고, 노동자 조직화와 여성 지도력 양성에도 기여하였다. 그의 운동을 통해 수천 명 정도의 소규모 개종이 이루어졌으나, 보다난드 사후 그 세력은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1956년 암베드카르의 대규모 개종 이후 럭나우 지역의 불교 공동체가 다시 활기를 찾았다는 점에서, 보다난드가 심어놓은 씨앗이 뒤에 열매 맺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암베드카르의 불교 운동은 앞선 세대의 인도 불교 부흥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나아가 스리랑카의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1864∼1933)가 19세기 말 보드가야 불교성지 복원 운동과 국제 불교 교류를 전개한 일이나, 타밀나두와 케랄라에서 스리랑카 출신 승려들이 하층 카스트와 연대하여 반카스트 운동을 펼친 사례 등은 암베드카르 이전부터 불교가 사회해방의 매개로 주목받았음을 보여준다(Kemper, 2015: 45-67). 이러한 선행 운동들은 지적·조직적 토대로서 암베드카르에게 큰 유산을 물려주었다고 평가된다. 실제로 암베드카르는 1956년의 집단개종이 자신만의 업적이 아니라 “과거 여러 성자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며 역사적 연속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현대 인도 불교의 부흥은 이처럼 다양한 행위자들의 노력과 국제적 불교 네트워크의 형성이 축적된 결과로서,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은 그 결정적 정점이었다(Zelliot, 1992: 183-185; Ober, 2016: 237). 그의 불교 개종을 통해 불가촉천민 해방운동은 역사상 유례없는 종교사회적 혁명으로 귀결되었으며, 이는 21세기까지 지속되는 인도 내 달리트 불교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Ⅳ. 현대 인도 불교 부흥 운동의 내적 동인과 의의
19세기 이후 인도 불교 부흥의 첫 내적 동인은 서구권의 불교 연구였다. 19세기 후반 인도 내외의 고고학자와 문헌학자는 유적·비문·사본을 통해 불교의 과거를 재구성하려 했다. 문헌과 유물이 완전히 합치하지 않는 지점에서 상상력이 공백을 메우며 고대 인도 불교가 만들어졌고, 이는 현대 인도에서 불교 부흥의 가능성으로 전환되었다(Ober, 2016: 5-6; 357-358). 1839년 『바즈라수치』의 번역과 출판(Ober, 2016: 202)은 브라만적 사회관 비판을 동반한 근대적 자기의식의 출현으로 상징화되었다. 이후 한 세기 동안 다양한 불교 경전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 형성된 지식은 신문·강연·박물관·전시·순례를 통해 대중에게 유통되며, 불교가 공적 문화자원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Ober, 2016: 357-358). 지식과 유물과 담론이 순환하면서 불교를 재발견하고 재인식하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불교 지식의 생산 주체와 활용 주체가 달랐다는 사실이다. 식민 권력과 서구 학계가 통치와 학문의 목적으로 구축한 불교상(像)은, 인도 사회 내부로 유통되는 과정에서 아이요티 타스, 비구 보다난드, 그리고 암베드카르와 같은 피지배 집단의 지도자들에 의해 반브라만주의와 반카스트 운동의 사상적 언어로 전환되었다. 즉 식민지 지식체계가 생산한 불교 지식이 인도 내부에서 해방 담론으로 재전유되는 과정 자체가 부흥 운동의 연속성을 매개한 기제였으며, 본 고가 규명하고자 하는 선행 운동과 암베드카르 신불교 운동의 연속성 역시 이러한 지식의 순환과 재전유 구조 속에서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서구의 불교 연구는 서구인들에게 불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인도 내부에서도 불교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그 첫 시발은 남인도의 스리랑카였다. 특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인쇄 매체와 해운과 철도 교통의 혁신은 스리랑카, 미얀마, 일본 등 범아시아적 교류를 이전보다 훨씬 촉진하였다(Blackburn, 2014: 45-48). 1891년 다르마팔라가 창립한 마하보디 협회는 보드가야 성지 회복과 국제 네트워크 구축을 핵심 목표로 삼아, 인도 내부의 불교를 전 지구적 불교 부흥 운동의 장(場)에 연결하는 결절점으로 기능했다(Kemper, 2015: 45-67). 또한 1931년 사르나트의 물라간다 쿠티 승원(Mulagandha Kuti Vihara)에서 거행된 사리(舍利) 봉안 의례와 같은 세계적 행사는, 1952년 산치(Sanchi)에서 재현된 사리 봉안식으로 이어지며, 1940∼50년대 인도의 사리 외교9)와 국가적 상징정치를 구축하는 중요한 전례를 창출했다(Ober, 2016: 324-336).
이런 인도 내부의 불교 부흥 운동은 20세기 초에 특히 반카스트 사회 운동과 결합하였다. 오버는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을 1920∼40년대에 이미 활발히 전개되던 하층 카스트 및 불가촉천민 개종 운동, 그리고 보다 덜 유명한 비구 및 지식인들의 선행 작업이 누적된 결과의 정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Ober, 2016: 237). 1956년 나그푸르의 개종식에서 암베드카르는 전통적인 삼귀의와 오계에 더해, 힌두 신앙과 의례를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22개 조의 서약을 선서하게 함으로써, 불교적 정체성은 곧 비(非) 힌두 정체성이라는 사회적 경계를 의도적으로 뚜렷하게 구축했다(Zelliot, 1992: 183-185).
암베드카르는 기존의 재가자 중심 개종식이 지니는 종교적, 사회적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담마 입문식(dhamma dīkṣā)이라는 새로운 의례 공식을 창안했다. 그는 이 의례에 참여하지 않으면 불자로 간주하지 않겠다고 못 박을 정도로, 표준화된 의례의 수행이 공동체 정체성 형성에 갖는 사회적 기능을 강력히 강조했다. 개종 직후 그는 “불교는 단순히 불가촉천민만의 종교가 아니라 보편종교”임을 천명하며, 불가촉천민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억압받는 집단(노동자, 농민, 수드라, 비(非)브라만)의 광범위한 연합을 모색했다(Jaffrelot, 2005: 130-132).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조직화와 정치적 구심점의 한계로, 이 운동은 마하라슈트라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적 특수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그가 유작 『붓다와 담마(The Buddha and His Dhamma)』에서 재구성한 교리들(열반의 현세적 해석, 고통의 사회적 원인 규명)은 불교의 역사적 조건성을 의식적으로 비판하고, 비합리적 요소를 썩은 가지(dead wood)로 간주하여 제거한 뒤, 이성과 사회윤리를 중심에 둔 현대적 종교로서의 담마를 재설정하려는 혁신적 시도로 평가받는다(Queen, 1996: 45-71; Ober, 2016: 274).
또한 20세기 중반 이후의 인도 불교는 티베트 불교(티베트)와 고엥까 위빠사나(미얀마)라는 인도 외적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비구니 수계식(한국, 대만의 도움)이라는 의례를 통해 인도 불교가 불교 원래의 고향임을 만방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인도 불교 부흥의 시기별 특징을 고찰하였을 때 20세기 인도 불교 부흥의 동인은 서구권의 불교 연구에서 시작하여 인도 외적 인물들(다르마팔라)의 인도 불교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는 다시 인도 내부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은 대개 불우한 이웃들에 대한 보살핌, 즉 의료와 교육 같은 복지 부분에서 시작하였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약자, 특히 인도 신분제의 특징상 반카스트 운동과 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중반의 외부적 요인에 의한 내부적 움직임이란 이런 메커니즘은 20세기 중후반에도 나타난다. 20세기 중반 티베트 불교의 유행과 남방불교의 수행법인 고엥까 위빠사나의 유행은 인도 외적인 요소의 유입이라는 측면에서 19∼20세기 초반과 동일한 현상이다. 그런데 이 현상은 20세기 초중반의 인도 내부의 불교 부흥 운동이 반카스트 운동이라는 사회 운동의 형태였던 점에서 수행이라는 불교의 본질적인 측면의 유행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20세기 초반 인도 외적 요인에서 내부 운동으로 불교 부흥이 변화한 점에서 20세기 후반의 외적 요인이 21세기에 인도의 어떤 내부 운동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하는 점이 궁금하다. 특히 20세기 초반의 요인이 불교 사회 운동을 일으킨데 반해 20세기 후반의 외적 요인은 티베트 불교의 교학이나 위빠사나의 수행이라는 불교의 본질적인 점이기 때문에 이것이 21세기에 반카스트 운동과 같은 사회 운동과는 다른 종교적인 인도 내부적 변화를 발생시키지 않을까 하는 추론을 하게 된다.
근대 인도에서 불교는 더 이상 과거의 유물이 아닌, 사회개혁, 평등, 합리성, 보편윤리와 결합된 살아있는 현대적 담론으로 재정립되었다. 오버는 “불교적 장-세계(place-worlds)”가 식민지 시기 고고학 및 문헌학의 성과, 그리고 인쇄 매체, 교육 제도, 도시 공간의 변화와 맞물려 공공의 상상력 속으로 재진입했다고 지적한다(Ober, 2016: 358). 중요한 것은 불교를 둘러싼 논쟁과 찬반 담론 그 자체가 불교의 장소 만들기(place-making)에 기여하여, 인도인들에게 자기 재생과 재건의 대안적 미래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화적 재정립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확산된 산업화, 도시화, 과학적 사고, 대중매체, 이동성이라는 범세계적 흐름과 깊이 호응하였다(McMahan, 2008: 7-9).
불교 모더니즘(Buddhist Modernism)의 형성 맥락을 살펴보면 불교는 하나의 고정된 체계가 아니라 복수의 연결망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해석되어 왔다. 특히 인도는 1890년대 이후 불교가 학습, 실천, 교류되는 공간적 네트워크로서의 핵심 결절점으로 재부상했으며, 이 네트워크는 다핵적이고 비중심적으로 확장되는 구조를 지녔다. 재발견된 성지, 카리스마적 지도자, 철도 및 통신망, 대학과 학회, 다양한 단체들이 상호작용 하며 현대적 불교 주체성을 창출해 내었다.
1956년 암베드카르에 의한 불가촉천민의 집단적 불교 개종은 상좌부 전통에서 명확히 정립되지 않았던 대규모 개종 의례의 공백을 메우려는 의도적 의례의 발명이었다. 그는 이 의례에 참여하지 않으면 불자로 간주하지 않겠다고까지 선언하며, 새로운 불교 대중을 규율하고 결속시키는 실천적 규범을 마련했다. 동시에 22개 조 서약을 통해 힌두 의례와 신앙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불교적 정체성은 곧 비(非)힌두 정체성이라는 경계를 명확히 구축했다.
암베드카르는 개종 직후 불교는 불가촉천민만의 종교가 아니라 보편종교라고 선언하며, 불가촉천민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연합을 구상했는데, 이는 그가 종교를 사회 윤리적 실천으로 재정의한 핵심 구상과 직결된다. 사상적으로 그는 기존 불교의 비합리적 요소를 걷어내고, 합리성에 기초하여 삼법인 등의 핵심 교설을 재구성했는데, 이를 두고 암베드카르는 초기 불전에서 평등의 원리와 합리성을 추출하여 불교를 보편윤리의 종교로 재가공(re-forged)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집단개종의 사회적 효과는 대단했다. 나그푸르 집회에는 50만 명 규모의 대중이 개종하였고, 이후 수개월 동안 서인도와 북인도 전역에서 수십만 명의 불가촉천민이 공식적으로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적 정체성을 택했다(Zelliot, 1992: 183-185).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평화적 집단개종으로 평가되며, 인도의 사회적, 종교적 지형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Queen, 1996: 45).
20세기에 인도는 세계 불교 네트워크의 필수적인 중심축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오버는 “1890년대 이후 순례, 단체, 도시 비하라(Vihara)가 얽힌 촘촘한 글로벌 루프(global loops)가 형성되었다”(Ober, 2016: 146-151)라고 서술한다. 이 네트워크는 단일한 중심이 없이 다핵적으로 작동하며, 인도를 아시아 불교권과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다.
구체적으로, 마하보디협회는 국제적 기부자와 지식인 네트워크와의 연결을 통해 세계적 차원의 불교 협력의 초기 기반을 마련했다(Kemper, 2015: 45-67). 인도 독립 전후에 이 조직은 인도 정부의 공공 외교와 연결되며 불교 유물인 사리를 통한 외교를 주도하는 채널로 변모했다. 네루 정부는 마하보디협회와 긴밀히 협력하여 라다크, 시킴, 아삼과 같은 국경 지역 불교 공동체와 유대를 강화했고, 1947∼1952년 사리의 국내외 순회10)를 통해 인도-아시아 간 외교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활용하였다. 사리 순회는 현지 정부, 불교 단체, 마하보디협회가 공동 주관하는 공연적 외교의 장이었으며, 각지에서 행해진 연설에서는 자비 등의 불교 윤리를 전면에 내세워 인도의 도덕적 리더십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라다크와 같은 변경 지역에 인도는 불교적 문화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의례적으로 후원한다는 명확한 정치적 신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Ober, 2016: 329-331).
현대 인도 불교 부흥은 오리엔탈리즘, 식민 정책, 범아시아 네트워크, 사회개혁 이념, 집단개종 운동이 중층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전개된 복합적 역사 현상이다. 오버의 분석에서 가장 핵심적인 통찰은 불교가 단순히 부활된 것이 아니라 지식, 장소, 정치의 순환 회로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발명(reinventing)되었으며, 이 과정이 최종적으로는 국가의 상징과 외교 언어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은 사회윤리를 전면에 내세워 불가촉천민과 소외계층에 새로운 종교적, 사회적 정체성과 해방의 공간을 제공했으며, 담마 입문식과 22개조 서약이라는 의례적 발명을 통해 공동체의 참여와 결속을 규율하는 형식을 확립했다. 동시에 인도는 사리 외교, 순례 네트워크, 마하보디협회-정부 간 공조를 통해 세계 불교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며, 신생 독립국가의 도덕적, 문화적 위상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역사적 흐름은 현대 인도 불교가 단순한 전통의 계승이나 부활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창조적 실천의 총체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Ⅴ. 결론
지난 천 년 동안 19세기와 20세기는 인도 불교의 가장 중요한 부활의 시기였다. 비록 아직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전례없는 부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본 연구는 지난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일어난 인도 불교의 부흥을 3시기에 걸쳐 분류하여 제시했다. 또한 이러한 부흥의 동인을 설명하고 그 의의를 해설하였다.
먼저 인도 불교 부흥을 3시기로 분류하였다. 첫 번째 단계(1890∼1930년대)는 서구 불교학의 발전과 더불어 불교가 인도로 ‘귀환’한 시기이다. 두 번째 단계(1930∼1960년대)는 사회 개혁적 성격이 두드러진 불교 운동기로, 암베드카르(B. R. Ambedkar)의 신불교 운동, 코삼비(D. D. Kosambi) 부자의 사회주의적 불교 해석, 그리고 인도 샤카족의 부흥 운동 등이 특징적이다. 세 번째 단계(1950∼1990년대)는 다양한 불교 전통이 융합하는 시기로, 티베트 불교의 정착 및 위빠사나(Vipassana) 명상 운동의 대중화가 두드러진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기별 인도 불교 운동의 동인을 분석하면서 19∼20세기 초의 인도 외적 요인(서구의 불교 연구, 스리랑카 다르마팔라의 불교 운동)이 20세기 중반 인도 내부의 불교 부흥과 연관된 반카스트 사회 운동과 연결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의 인도 불교의 외적 요인(티베트와 미얀마)인 티베트 불교와 고엥까 위빠사나의 유행이라는 요소가 21세기에 인도 불교 내부의 일정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추론하였다. 특히 20세기 중반의 인도 불교의 외적 요인은 교학과 수행이라는 불교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점에서 20세기 중반의 인도 내부적 부흥이었던 반카스트 운동 같은 사회운동 형태의 불교 부흥과는 다를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향후 인도 불교의 변화를 깊이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는 시기별 인도 불교 부흥을 제시하면서 이런 부흥의 의의를 또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째, 근대 인도에서 불교는 더 이상 과거의 유물이 아닌, 사회개혁, 평등, 합리성, 보편윤리와 결합된 살아있는 현대적 담론으로 재정립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서구의 과학적 불교의 연구라는 측면으로 인해 시발되어 실제적인 식민지 하의 고통과 더불어 계급 차별에서 오는 차별이라는 이중고를 졌던 인도 민중에게 불교는 그런 고통을, 특히 계급 차별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종교로서 인식되었다. 둘째, 불교는 단지 해탈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개혁과 혁명의 사회적 해탈의 도구로서 민중들에게 인식되고, 실제로 그와 같이 20세기 중반에 암베드카르에 의해 사회 개혁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마지막으로, 20세기 인도 불교의 부흥은 비록 내부적 요인보다는 서구의 학술적 연구나 남방불교권의 인도 불교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발전하는 과학과 교통 덕에 인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점은 21세기 세계불교에서 불교의 본향인 인도가 네트워크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준다. 비록 그것이 인도 내부보다는 인도를 중심으로 한 다른 지역 불교의 활동일지라도 그런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인도의 역할이 21세기에 기대된다. 마치 티베트 불교가 오히려 인도를 중심으로 더욱 세계화된 예에서 보듯 21세기에 인도 불교의 역할이 자못 기대된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