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태고선이 간화선(看話禪)에 집중적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평가는 부정할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온전히 수용할 수도 없다. 어떤 주제로 접근하건 간화선을 중심에 앉히는 일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전부로 간주할 경우 태고선의 요소를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간화선은 조사선(祖師禪)의 세계를 좀 더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조사들의 어록 등에 잠재되어 있던 방법적 단서들을 특화시켜 화두 공부의 틀을 만들면서 시작된 것이다(김영욱, 2006a: 248)” 다시 말해서 간화선은 조사선의 혈손(血孫)이며, 태고선도 큰 구도로 나누면 간화선을 포괄하는 조사선을 필요불가결한 배경으로 삼고 있다.
태고의 간화선은 조사선이라는 체재의 산물이기에 이들을 한 쌍으로 거두지 않으면 각자의 본질을 간파할 수 없다. 간화선의 화두 참구는 조사선의 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특수한 방법으로 설정되었다. 이런 이유로 간화선을 중심으로 삼는 선법에는 조사선 풍의 문답과 법어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태고 이전 진각 혜심(眞覺慧諶)의 어록에는 조사선의 활기가 뚜렷하며, 동시대의 나옹 혜근(懶翁惠勤)에게도 두 가지 선이 공존한다. 태고선에서 조사선의 면모는 『태고어록』의 입원상당(入院上堂) 등에 분명히 나타나며 적지 않은 시문(詩文) 곳곳에도 그 특징이 각인되어 있다.
간화선사로서 태고는 무자(無字)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1) 그것과 무관한 문답이나 법문 또는 시문 따위에도 그 기저에는 동일한 논리와 형식이 보인다. 무자 참구의 요령을 최초로 내세운 오조 법연(五祖法演)과(김영욱, 2003) 그것을 기반으로 삼아 이 화두 참구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확장시킨 대혜 종고(大慧宗杲)에게도 화두 참구법과 함께 조사선의 사유방식이 동시에 나타난다.
온갖 유형의 매개를 벗어나 눈앞에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조사선의 단적(端的) 경계는 화두 참구의 결과인 동시에 그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참구가 무르익지 않아 갖가지 분별의 매개에 속박되어 있는 이상 단적 경계는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단적 경계와 화두 참구는 떨어질 수 없는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참구의 극치에서 화두가 타파된 이후라야 단적 경계가 눈앞에 실현되어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우선 태고선에 나타나는 조사선의 선경(禪境)을 궁구하고 그것과 화두 참구의 관련성을 보여줄 예정이다. 이를 토대로 지난한 관제인 ‘현대적 의의’를 도출해 볼 생각이다. 이 문제는 넓은 의미의 공부나 학문이라는 영역 또는 그 속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한정하여 태고선이 오늘에 던지는 메시지를 간략하게 짚어보는 선에서 마무리하겠다.
태고선의 근본 자료는 『태고어록』2)이다. 본론에 들어가서는 태고의 원 자료를 풀이하면서 그것을 적절하게 해석할 수 있는 도구를 태고 이전의 동일한 혈맥 관계인 조사선이나 간화선의 문헌에서 끌어와 활용할 생각이다. 조주 무자에 편중되어 있는 태고의 간화선은 그만의 특성이라기보다 전통적인 공부법을 충실히 계승하였다는 평가가 적절하다. 그렇다면 누구의 어떤 관점을 그 주된 공부법으로 수용하였을까?
태고선에서 간화선 전반의 논리나 강조점에는 누구보다 대혜 종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 밖에 그 어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고봉 원묘(高峰原妙)·몽산 덕이(蒙山德異)·천목 명본(天目明本)을 비롯하여 진각 혜심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김영욱 외, 2009: 35). 전승관계를 주제로 다루지 않겠지만 석옥 청공(石屋淸珙)에게 인가받고 그 법을 이었다는 일반적 평가를 부정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선법에서 내밀한 관련성은 또 달리 궁구해야 할 문제이다.3)
보조 지눌(普照知訥)이 마음의 본체를 드러내기 위하여 쓴 ‘공적(空寂)’·‘영지(靈知)’라는 개념을 태고는 화두를 바르게 들고 있는 심경으로 활용했다.4) 간화선의 관점에서 화두가 항상 뚜렷하게 들려 있는 상태에 공적과 영지가 모두 구현되어 있다는 뜻으로 변용하여 보조의 전통을 새롭게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역대의 간화선사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독창적 관점인데, 지관(止觀)과 정혜(定慧)가 화두를 궁구하는 간화법에 모두 구현되어 있다고 한 진각 혜심의 주장과 매우 근접해 있다.5)
잠정적이지만 태고 선법의 내밀한 관계를 따지자면 대혜를 뿌리로 삼고 몽산 등이 곁가지로 가볍게 달라붙어 있는 정도이며, 보조와 진각 등 고려 선사들의 특징을 잡아내고 그것을 계승하여 조금이라도 부각하고자 애쓴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Ⅱ. 태고의 선경(禪境)
‘태고(太古)’라는 명칭은 태초(太初)이자 시원(始源)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득히 지난 저편의 시공간에 주어졌던 그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곳곳에 구현되어 있다.6) 태고의 소식은 ‘분명하고 뚜렷이 드러나 있는’ 눈앞의 그 자리에 늘 살아 움직인다. 그것이 바로 선사 태고가 지향하는 단적(端的)인 선경(禪境)이다. 언어와 사고의 틀에 지배당하는 갖가지 격(格)이 허물어지면서 이 경계가 나타난다. 할 일을 마쳐서 더 이상 힘들여 간섭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도에 들어맞는 무사(無事)·무심(無心)의 세계도 그것을 바탕으로 실현된다.
조사선에서는 일상에서 주고받는 범부의 말을 쓸지언정 확정된 개념어의 사용을 지극히 꺼린다. 이로써 그 언어에 담긴 관념에 예속되는 폐단을 피하고자 한다. 설령 전통적인 교학의 언어를 수용하여 그대로 써먹더라도 곧바로 해체하여 폐기하는 장면을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단지 한순간 활용하고 버리는 몰가치한 소재이기 때문에 확고하게 들어설 자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문자 속에 담긴 세계가 확고하게 지식이나 정해진 관념으로 자리 잡기 전에 샅샅이 찾아내어 철퇴를 휘두르는 이유도 그것이다. 태고는 말한다.
이전부터 배워서 이해한 문자와 언어는 한칼에 두 동강 낸 다음 심지(心地)를 참구하여 이번 생에 일대사를 알아차려야 한다. …중략… 사람의 심지는 지극히 미세하고 지극히 오묘하여 언어로 이해할 수 없고 생각으로 알 수 없으며 침묵으로도 통할 수 없다. 다만 모든 시각에 오로지 이 일만 놓치지 않고 들고서 어떤 경우에도 잊지 않는다면 자연히 모든 것이 그것과 한 덩어리가 될 것이다(김영욱 외, 2009: 463-464).7)
‘심지’는 사유나 침묵 또는 언어를 매개로 그 진면목이 열리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수단이 무기력하게 되는 찰나에 맞이한다는 뜻이다. 진여라거나 부처라고 해도 또는 번뇌라거나 중생이라고 해도 결국은 어느 편이나 몰가치하여 높낮이의 맛이 전혀 없도록[沒滋味] 조정한다.
같은 맥락에서 눈앞에서 감각 가능한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그 무엇을 암시하는 방법도 즐겨 쓴다. 이것은 조사선의 시어(詩語)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현전물(現前物)을 통하여 곧바로 가리키는 직지(直指)의 방법은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이후 일상적 사태 속에서 평상심(平常心)의 도를 구현하려는 조사선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김영욱, 2006a: 276).”
태고도 이 방법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그가 주변 사물과 자연물을 묘사한 시를 적지 않게 지은 이유도 이러한 직지의 단적인 세계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형식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눈앞의 현상 그대로를 수용한다고 결정지으면 본래의 뜻에서 빗나간다. 「골짜기의 맑은 물[淸澗]」(『太古語錄』: 690c11.)이라는 시에서 보자.
참선하여 체험한 경계와 어김없이 딱 들어맞는[最切] 소식은 다름 아닌 지금 그 현장에서 보고 들리는 골짜기 물의 흐름과 그 소리이다. 선지(禪旨)와 부합하는 눈앞의 이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지음(知音)이다. 「고송(古松)」에서 “만고의 아득한 허공에, 한 조각 가을 달 떠 있고, 바윗가 소나무 빽빽한데, 그윽하게 울리는 소리 딱 들어맞는구나. 딱 들어맞는 이 소리 누가 들을 줄 알까?”(『太古語錄』: 687a18.)8)라고 읊은 대목도 동일한 취지이다. 태고는 「무슨 말 하랴[何說]」(『太古語錄』: 689a17.)에서도 시냇물 소리와 산의 경치를 딱 들어맞는[最親切] 소식이라 읊었다.
갖가지 모든 현상은 명상9) 전혀 없지만, | 一切諸法絕名相 |
시냇물 소리와 산 경치는 딱 들어맞노라. | 溪聲山色最親切 |
딱 들어맞다 하니 대체 그것은 무엇일까? | 最親切 是什麽 |
다만 속으로 기뻐할 뿐 내 무슨 말 하랴? | 只可自怡吾何說 |
이 시의 핵심어와 대의는 모두 소동파(蘇東坡, 1036-1101)의 오도송(悟道頌)과 비슷하다. 특히 두 번째 구절에서 유사점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것이 무엇에 딱 들어맞는다는 뜻인가? 참된 이치를 전하는 모든 말과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동파의 그것과 동일하다. 여기서 이미 파격(破格)이 실현되었다. 시냇물 소리와 산 경치가 모든 언어와 관념의 격을 남김없이 흡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동파는 각조 상총(照覺常總) 선사와 무정화(無情話)에 대하여 의견을 주고받다가 각성이 일어나 새벽에 선사에게 게송 한 수를 바쳤다(卍137: 318b6.).10) 무정화란 시냇물 소리나 산의 경치와 같은 무정물이 진실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표면적으로는 부처님의 설법이 시냇물 소리에 구현되고, 산 경치가 법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취지이다. 태고를 인가해준 석옥 청공도 동파의 이 시를 제기하고 평가한다. 겉으로 드러난 소리와 색에 기울어진 견해를 비판하는 관점을 기초로 삼았는데, 여기서 태고가 숨긴 도리까지 살필 수 있다.
내가 보아하니 왕공과 대신 가운데 이 도를 좋아하는 이들이 매우 많지만, 막상 도를 주제로 이야기하는 국면에 이르면 상대가 자신의 견해를 따라 주기만 바라고 상대의 통렬한 지적은 두려워한다. 그런 까닭에 동파 거사는 조각 선사의 손에 산 채로 묻혀 소리와 색 속에서 지금껏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중략… 학은 으슥하고 깊은 못에서는 날개를 펴기 어렵고, 말은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힘이 없으면 바람을 좇아가지 못하는 법이다(卍122: 625b5.).11)
사대부들이 동파의 본의가 소리와 색에 있다는 견해를 고집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대부분 동파를 그 잘못된 경계에 묶어 두고 있다는 말이다. 석옥은 ‘소리와 색을 떠나서도[離] 안 되지만 소리와 색 그대로도[卽] 맞지 않다’12)라는 도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에 적절한 조건이 아니면 학이 날갯짓하지 못하듯이 도를 전하기 알맞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전개할 수 없고, 천리마가 아니면 천리마[追風]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본의를 아는 지음이 아니면 그 언행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마무리하고 있다.
이처럼 진여와 같은 최상위 개념어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속박을 경계하고자 도입한 현전물(現前物)에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된다. 떠나서도 안 되고 그대로 수용해도 안 되는 이치가 그것이며, 모든 언어와 만법을 관문(關門)으로 전환하여 면전에 실현된 화두와 곧바로 마주칠 수 있도록 하는 효용이 나타난다. 다시 태고가 말한다.
이 하나의 그 무엇은 언제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늘 움직이는 반경 안에 있다. 발을 옮길 때마다, 경계와 마주치거나 대상을 만나는 곳마다에 뚜렷하고 분명하게, 분명하고 뚜렷하게 있다. 존재 하나하나에 밝게 드러나고 만물 하나하나에 나타난다. 모든 행위 양태에서 고요히 밝게 보이는 그것을 방편으로 마음이라 하고 도라고도 하며, 만법의 왕이라고도 하고 부처라고도 한다(韓6: 677b2.).13)
언제 어디서나 뚜렷하고 분명하게[端端的的] 드러나 있는 그것을 어떻게 규정할 수 없어 하나의 그 무엇[一物]이라 제시한다. 눈앞에 드러나 있지만 ‘그 무엇이라고도 결정지어 말할 수 없고, 어떤 이름이나 개념과도 친근하지 않지만 동시에 가능한 모든 명칭이 붙어도 무방하다.’14) 곧 마음·부처·도 등이라 하여도 상관없지만, 그중 어느 것이라 단정할 수 없고 언젠가는 ‘해체되어야 할 잠정적 장치’15)에 불과하다. 장치와 해체는 조사선에서 쓰는 보통의 수법이다. 매력적인 장치를 마련해 두고 상대를 끌어 들였다가 상대가 그것에 보금자리를 틀고 머물려는 순간 아낌없이 부수어버리는 전략이다. 이 ‘하나의 그 무엇’은 사방 천지 어디에나 드러나 있음에도 마음이나 부처 따위의 수단으로는 확고하게 포착할 수 없다. 혜심은 눈앞에 드러난 단적 세계가 어떤 격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취지를 전한다.
눈앞에 있는 그대로가 옳으니 분별하려 하면 바로 어긋난다. 말해보라. 이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마음이라거나 부처라거나 해서는 안 된다.16)
마음이나 부처는 이미 확고하게 굳은 격(格)이 되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그 무엇’을 박제화하는 틀에 불과하다. 가림막이라곤 전혀 없이 벌거숭이처럼 드러나 있지만, 생각으로든 말로든 잡아들이려 하면 생명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화두는 이러한 갖가지 언어의 장애를 제거하는 또 하나의 언어이다. 태고는 말한다.
바로 이 모니불께서는 고요히 하는 일 없이 늘 움직이지 않으신다. 깨끗이 씻은 벌거숭이요 알몸 그대로 드러난 듯하여 뚜렷하고 분명하지만 잡을 수단이 전혀 없다. 살아 움직이는 석가가 무슨 소리를 내던가? 석양의 모래밭 갈매기가 스스로 이름을 부르는구나.17); 신령하고 밝은 하나의 그 무엇이 천지를 덮고 있지만, 안팎으로 헤아리며 찾으려 해도 잡을 수단이 전혀 없다. 생각이 다하고 마음이 궁색해져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그대가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인 소식 인정 못함을 알겠구나.18)
천지 사방에 가득한 그것이지만 잡을 수단이 없다. 무엇보다 생각과 마음의 기력이 다 소진하도록 시도하는 그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꽃으로 전한 소식은 마음·부처·도 등 모든 사고의 격식을 부수는 파격(破格)의 교외별전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세계는 언제나 주어져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당사자가 그것을 직접 누리려면 드러남을 가리는 언어와 관념의 격을 허물어뜨려야 한다. 태고가 확고한 격을 부순 뒤에 드러나는 이 소식을 전한다.
허공을 짓눌러 부순 다음 뚜렷이 홀로 나타나 비로자나불의 정수리를 차지하고 앉았노라니 눈앞에는 법도 없고 부처도 없구나. 부처도 없고 법도 없어 참으로 하늘은 높고 땅은 평평하며, 마음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라 비로소 물은 맑고 산은 푸르도다.19)
허공은 삼라만상을 감싸고 세계를 포괄하는 공간으로 모든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양식[格] 중 하나이다. 최상의 격이라 할 수 있는 이 허공을 부수는 순간 부처가 되었건, 법이 되었건 그 밖의 다른 모든 격도 여지없이 함께 무너진다.20) 파격이 실현된 뒤의 세계에서는 부처 따위의 관념이 부서져 이것으로 조정되고 물들지 않은 단적인 소식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늘은 높고 땅은 평평하며’, ‘물은 맑고 산은 푸르다’라는 지극히 분명하지만 더 이상의 분별이 붙을 수 없고 특별한 맛이 없는 몰자미(沒滋味)의 극치가 보인다. 여기서 하늘과 땅 그리고 물과 산 등 모든 존재 관계는 평등하여 고하 등의 모든 범주와 격이 사라진다.
따라서 파격의 소식과 하나로 어울리면 뚜렷하고 분명한 경계를 사방에서 마주칠 수 있다. 따라서 그때마다 파격의 그 자리가 목적지가 되어 굳이 다른 곳으로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 태고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 전체를 집으로 삼고 특별한 일 하나도 없으니, 평소의 모든 행동거지가 참으로 까닭이 없도다[大無端]. 만 리로 펼쳐진 평야, 곳곳에 솟은 청산, 그곳에서 속박 없이 이리저리 거닌다네.21)
이미 실현된 목적 앞에 특별히 도모할 일이 없어 행동거지 하나마다 특별히 지향할 까닭이 없다. 더 이상 추구할 목적과 대상이 없는 무사인(無事人)의 경계이다. 찰나마다 그 현장에서 마주치는 하나하나가 과정과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된다. 이를 선사들은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목적지를 밟는다’22)고 한다. 그때마다 자리 잡은 눈앞의 그곳이 어디로 가는 여정의 객지가 아니라, 안주할 고향과 같기 때문이다. 이 경계에는 더 이상 구하거나 찾을 이상향이 없다. 태고는 그 심경을 속박 없이 이리저리 거니는 평야와 청산에 반영하였다. 「지나가는 구름[過雲]」(『太古語錄』: 689a23)이라는 시이다.
이것 또한 이상적 선경(禪境)에 도달한 납자의 자취를 제목처럼 ‘지나가는 구름[過雲]’에 빗대어 묘사한 시이다. 구름이 아무 까닭도 없이 지금 그곳에 머물고,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지 종잡을 수 없다[太無端]. 마치 할 일을 마친 수행자처럼 구름도 언제나 떠돌다 머무는 그 자리가 목적지와 다르지 않으며, 어디로 가는 과정과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구절은 달마사행(達摩四行) 중 ‘그 무엇도 구하지 않는 행동거지[無所求行]’23)와 동일한 형식이다. 세상 어디나 돌아다니고 어디서나 마주치지만, 너무 지근의 거리라 오히려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라는 뜻을 조사선에서 누누이 밝힌다.24) 격에서 자유로운 차별 경계를 확고하게 변하지 않는 격에 가두고 그것을 통하여 보려 하기 때문에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다음은 「화원(化元)」25)이라는 시의 구절이다.
만물의 차별이 그대로 진실이기에 조화의 근원이 되는 ‘하나’로서의 일자(一者)를 전제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는 그 일자야말로 허물어야 할 격이다. 내디디는 걸음마다 목적지라는 맥락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그 근원은 차별의 현상을 귀착시키는 일자가 아니라 나은 놈과 못난 놈으로 가르는 차별 그대로 무방한 세계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눈앞에 단적인 진실을 드러나도록 하는 파격은 어떤 방법으로 실현하는가? 이것을 태고는 「차문(此門)」(『太古語錄』: 688b23.)에서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면전에 주어진 단적인 길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지 마음을 먹고 일정한 범주에 따라 구한다면 더욱 멀어진다.26) 따라서 그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공부하는 방법에 물든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지시하고 있다. 면전에 주어진 밝은 곳 그대로 여여한 본체이다.
몸과 마음의 법을 한꺼번에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중략… 마음 바탕이 고요하고 동요하지 않으며 의지하여 얽매인 대상이 없어 몸과 마음이 문득 텅 비게 되니 마치 허공에 의지한 모양과 같을 것이다. 바로 이곳에 다름 아닌 밝디밝으면서도 또렷하고, 또렷하면서도 밝디밝은 그것이 나타나 있다. 이 순간이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상세히 살피기 아주 좋은 기회로서 그것을 화두로 들자마자 깨달을 것이다. 마치 물을 마시면 차가운지 따뜻한지 스스로 아는 것과 같으리라.27)
몸과 마음이 고요하여 어떤 대상에 따라서도 동요하지 않을 때 단적인 진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 자리에서 화두를 참구하기에 최적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뚜렷하고 분명하게 눈앞에 주어진 이 단적인 세계는 견고한 철문인 듯이 보이지만 늘 활짝 열린 문이다. 태고가 「철문(鐵門)」(『太古語錄』: 688c7)에서 그 취지를 밝힌다.
활짝 열려서 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지만 생각과 말을 그것에 덧붙이면서 도리어 못 보도록 막는 장애를 초래한다. 눈앞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는 생각과 말이라는 격에 따라 보려는 시도이다.
향엄 지한(香嚴智閑)은 소리를 듣고 도를 깨우친 인연[聞聲悟道]을 대표한다. 그를 미몽에서 일깨웠던 소리도 사유분별에 물든 언어가 아니라 우연히 그 주변의 대나무에 돌조각이 부딪히면서 난 소리였다.28) 그는 “도는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통달하며 언어에 달려 있지 않다. 하물며 빈틈없이 들어차고 뚜렷하게 드러나 있어서 간격이 전혀 없는 진실에 애써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임에랴! 잠시 빛을 돌림에 의지하면 나날이 쓰는 것이 모두 공이 되거늘 미혹된 무리들은 스스로 등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29)라고 말한다. 향엄이 이전에 막혔던 까닭은 주변에 가득 널린 그것을 오히려 애써 생각하며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암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날이 쓰는 모든 물건이 공을 발휘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법문할 때 늘 소지하는 주장자나 건추로 근본 도리인 제일의(第一義)를 직지(直指)하는 법문도 그 토대는 동일하다.
주장자를 잡고 올렸다가 한 번 내리치고서 말했다. “제일의는 바로 이 주장자가 이미 건추와 더불어 분명하게 다 말해버렸다.”30)
주장자와 건추의 존재 그대로가 고스란히 제일의이며, 단순히 제일의를 지시하는 매개체에 그치지 않는다. 파격의 효용이 일용물의 자유로운 활용으로 전개되는 예이다.
이상과 같은 파격의 소식에 어울리는 인물상은 납자(衲子) 또는 납승(衲僧)이다. 누더기를 입은 수행자인 납자는 파격을 시행하면서 상하의 그 어떤 지위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로운 무위(無位)의 세계에서 노닌다. 납자야말로 조사선의 본보기가 된다.31) 납자가 수행과정의 전형적인 인물이라면 이 납자가 구현하려는 이상적 인물상은 조사(祖師)이다. 그러나 조사의 반열에 올랐을지라도 단단히 굳은 갖가지 잘못된 신념을 때려 부수어 해체시키는 납자의 파격을 유지하는 한에서 선가의 이상적 인격으로 간주한다.
할 일을 모두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납자는 더 이상 수도와 참선에 의탁하여 소득을 노릴 필요가 없다. 특별한 마음을 먹지 않아도 움직임마다 본분에 부합하고 도에 들어맞는 길이 열려 있는 탓이다. 태고가 구현하고자 했던 그 경계를 우리는 다음 가송 「태고암가(太古庵歌)」(김영욱 외, 2009: 487)에서 읽을 수 있다.
뚜렷하고 분명한 단적인 세계는 모든 오염된 사유분별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만 제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어떤 조작도 가하지 않는 무사(無事)의 경계에서 그 세계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곧 단적 세계의 절정은 더 이상 간섭하지 않고 눈앞에 드러난 그대로 두는 무사의 경지에서 맞이한다. 「신재(愼齋)」(『太古語錄』 「愼齋」: 687b19.)라는 제하에 실린 송이다.
봄은 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서로 다르게 변화하는 그대로 가감(加減)할 여지가 없는 풍경이다. 원오 극근(圜悟克勤)이 “봄의 난초와 가을의 국화, 그 하나하나가 각자 시절에 들어맞는다”32)라고 한 말에도 그 소식이 담겨 있다. 조사선에서는 이와 같이 그때마다 다르게 드러나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을 중시하여 “불성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시절인연을 관찰해야 한다. 시절이 무르익으면 그 이치는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33)라는 말을 상용한다. 그 까닭은 시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꿰뚫어볼 뿐 어떤 작위도 가하지 않는 무사에 본분의 소식을 담고자 하기 때문이다. 시 「요암(了菴)」(『太古語錄』: 688c22.)의 3, 4구이다.
이처럼 그때마다 대상을 마주하는 근저에는 무사가 깔려 있다. 할 일을 마쳐서 무사이고, 애써 하지 않고 그대로 맡겨두어도 무방하기 때문에 무사이다. “무딘 듯 일 없이 청산을 마주하고 있노라”34)라고 읊은 구절에도 어떤 일도 조작하여 덧붙이지 않는 무사의 속뜻이 들어 있다.
그곳에는 애써 파고들며 지어내는 주인(主人)의 자리는 없다. 다음은 태고의 「낙도가(樂道歌)」를 받아본 석옥 청공이 그 답변으로 붙인 게송(『太古語錄』: 683b5.)의 일부이다.
주인이 그곳에 있거나 없거나 상관하지 않고 손님인 듯 주인인 듯 모호한 그 자리에서 달과 바람의 소식이 전개된다. 그렇게 주인 노릇하지 않고 사량과 작위가 끊어진 순간 고스란히 드러나는 무사의 세계에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본지풍광(本地風光)의 부호이다.35) 태고는 「소 먹이길 그만둔 늙은이[息牧叟]」라는 시에서 그 세계를 읊는다.
소 치는 늙은이가 어디로 끌고 가 먹일까 고민하더니, 고삐 내던지고 무생가 한 곡조 한가롭게 부르고 나서, 고개 돌려 보니 먼 산에는 석양이 붉게 물들었고, 봄의 끝자락 산중에는 여기저기 꽃 떨어뜨리는 바람 불더라.36)
마지막 두 구절에서 눈앞에 보이는 단적 세계를 묘사했다. 소 치는 본업을 다 마쳤기에 소를 끌고 다니는 수단인 고삐를 내던져 소 주인의 구실을 팽개쳤고, 그 순간에 전개되는 신세계를 보여준다. 고삐는 미혹한 자들이 의지하는 언어와 그 속에 들어 있는 온갖 관념을 상징한다. 단적 경계는 결정적인 이해와 분별의 의지처로 삼는 이것을 빼앗긴 다음이라야 맞이할 수 있다.
앙산(仰山)이 “밭 가는 농부의 소를 몰아내고,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는다. 이것이 바로 선대로부터 내려온 발톱과 이빨과 같은 수단이다”37)라고 했던 말이 그 뜻이다. 오조 법연은 “밭 가는 농부의 소를 몰아내어 그의 곡식이 무성하게 자라도록 하고,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아 그가 영원히 굶주림을 끊도록 한다”38)라고 함으로써 의지하던 수단을 빼앗긴 그 순간부터 농부와 배고픈 자의 소망이 진실로 채워진다는 취지를 전한다. 그 수단은 속박의 기본 형식이기 때문이다.
화두 참구의 절정에서도 이렇게 기대고 의지하던 수단을 빼앗기고 맞이하는 궁지(窮地)를 이 공부가 성취하는 최선의 결과라 한다. “마른 똥막대기 화두는 어떻게 공부하고 있습니까? ‘잡을 수단이 전혀 없고’ 아무 맛도 없어서 뱃속이 답답하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이 타파하기 아주 적절한 소식입니다.”39) 대혜의 이 말은 참구하고 있는 화두에 더 이상 분별의 수단이 붙을 수 없어 궁리할 길이 완벽하게 막힌 경계를 나타낸다. 사실상 이곳이 백척간두인 것이다.
수행자가 본분사를 마치고 맞이하는 무사의 경계도 이렇게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모든 인위적 시도를 털어 없애어 범부의 견해이건 성인의 견해이건 통하지 않는 그때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진실이기도 하다. 태고가 말한다.
이 안의 미묘한 도리는 본디 어떤 지적인 분별도 허용하지 않으니 주인 중의 주인은 이와 같을 따름이어서 영원히 암자의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깨끗이 씻어낸 듯하여 꾸밈도 없고 치우침도 없으며, 모두 떨어버린 듯하여 자유자재하다. 범부와 성인이라는 터럭만한 견해조차 모두 쓸어 없애어 전혀 알지도 못하고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다. 하하하! 이것은 무엇일까? 암자 앞 소나무와 잣나무는 혹독한 추위에도 끝내 푸름을 바꾸지 않는구나.40)
모든 견해를 쓸어 없앤 경계, 칭송 받을 성인이라는 견해도 없고 비난 받을 범부라는 견해도 없다. 새들이 꽃을 물어다 바칠 자취를 찾지 못하여 울고 돌아간다는 그 경지를 말한다. 「단암(斷庵)」(『太古語錄』: 689b4.)이라는 시에서 태고가 그 취지를 전한다.
제3구는 4조 도신(道信)을 만나기 이전의 우두 법융(牛頭法融)의 일화에 따른다. 법융의 수행을 보고 새들이 그 모습에 감탄하여 꽃을 물어다 바치다가 4조를 만나 바른 안목이 트인 이후에는 새들이 꽃을 바칠 길이 사라졌다는 이야기41)를 소재로 삼아 몰종적(沒蹤迹)의 경지를 묘사하였다. 이 경지에 이르면 꽃을 바치려 해도 종적을 찾을 도리가 없고, 반대로 미혹시키려 할지라도 그 상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42) 마지막 구절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라기보다는 일상의 단면이며, 귀천의 구분 없이 한가롭게 반복되는 그 형식을 향연(香煙)에 담았다.
「은계(隱溪)」(『太古語錄』: 689b12.)에서도 무심·무사의 경지를 읊었다.
흐르는 물에 잠긴 달이 냇물에 씻기는 듯한 모양에서 시상을 취했다. 처음부터 달은 흐르는 물에 자신을 맡길 생각이 없었고, 냇물도 달을 씻을 마음이 없어 서로에게 무심하고, 씻거나 씻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사의 극치를 묘사하고 있다. “대나무 그림자 너울너울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 / 달빛이 바닷물을 뚫어도 파도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노라”43)라는 야보 도천(冶父道川)의 송을 떠올리게 한다. 다음은 「운석(雲石)」(『太古語錄』: 689a9.)이라는 시이다.
무심하게 바라보는 그 풍경은 간섭하는 주인이 없는 그대로 호시절이다. 태고 스스로 자신이 노니는 경계를 전한다.
“대중들이여, 어디서 이 노승 태고가 노니는 곳을 보겠는가?” 주장자를 올렸다가 한 번 내리치고, 말없이 있다가 말했다. “북쪽 산마루의 아름다운 꽃은 붉은 비단에 수를 놓은 것과 같고, 앞개울의 물은 쪽빛과 같이 푸르다.”(김영욱 외, 2009: 415)44)
본래 태고의 소식은 만물이 차별화되기 이전 태곳적 무차별한 풍경이다. 그것이 아득한 시간 저편에 있지 않고 지금 눈앞에 그대로 구현되어 있어서 묘하다. 산마루의 꽃 그리고 개울의 물은 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고 그때마다 변화하는 차별의 세계이다. 동시에 여기가 무차별의 태고가 머물고 노니는 터전이다. 눈앞에 펼쳐진 꽃의 아름다운 모습과 개울물 소리는 다른 그 무엇을 지시하는 ‘손가락’과 같은 수단이 아니며, 그 자체가 ‘달’과 같은 본래의 의도이다. 이것이 현장을 곧바로 가리키는 직지(直指)가 가능한 근거이기도 하다.
석류꽃은 불처럼 붉고 갈대꽃은 눈처럼 희며, 보랏빛 제비는 재잘대며 지저귀고 누런 꾀꼬리는 재재대며 운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니 자세히 살펴볼 일이며, 딱 들어맞는 이 소식을 흘려보내는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45)
그 현장에 당장 보고 들리는 모든 소리와 빛깔은 다른 그 무엇을 암시하는 수단이나 말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진실한 당체이기 때문이다.
시냇물 소리가 가장 딱 들어맞게 진실을 말하고, 산(山) 빛 또한 본분을 유사하게 보여주는구나(김영욱 외, 2009: 417).46)
이곳에 마음이나 불성 따위의 엄정한 격을 가지고 배후에서 조종하는 존재라곤 없다. 이러한 격에 기대어 이해하려는 찰나에 단적인 그것은 왜곡되어 자취를 감춘다. 격을 산산이 부수고 구현하는 무사의 극치에서 산이 스스로 빛을 발하고 시냇물은 방해 없이 졸졸 소리를 낸다.
파격과 무사의 소식은 화두가 실현되어 어떤 분별도 붙지 못하는 몰자미(沒滋味)의 상태와 밀접하다. 간명하고 단적인 언어로 단적인 세계를 고스란히 담는 방법 이외에 드러난 진실을 보여줄 도리는 없다. 이것은 차별 현상을 드러난 그대로 무심하게 고스란히 수용하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주어진 그것과 다른 별도의 도리에 기대어 이해하려는 악습47)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차별로 드러나 있지만 사유분별의 산물인 일정한 격으로는 담지 못한다. 화두 참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분별의 길이 막힌 곳에서 진행된다는 특성과 유사하다. 태고가 체험했던 ‘꿰맨 흔적도 없고 잡을 여지도 없는 경계’도 그와 같다. 조각조각 이음새가 없는 통짜의 한 덩어리는 어떤 수단으로도 엮어낼 수 없는 동시에 조정할 여지가 없는 경계이기도 하다. 분별은 대립이거나 조화이거나 둘 이상의 비교대상이 남아 있는 한에서 성립하기 때문에48) 이렇게 한 덩어리진 것에서는 써먹을 방도가 없다.
옛날 신라에서 돌아다니며 수행할 때 전단원(栴檀園)에 이르러 무영수(無影樹) 아래서 꿰맨 흔적도 없고 잡을 여지도 전혀 없는 경계에 부딪히고 나서 마침내 만 길 절벽에서 온몸을 던짐으로써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가 홀연히 다시 살아났다.49)
분별과 사유의 수단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그 경계는 좌로 갈 길도 없고, 우로 갈 길도 없으며, 그 자리에 머물 수도 없다. 이 한 덩어리는 면전에 고스란히 주어져 그것 이외에 다른 그 무엇도 없는 경계가 펼쳐진다. 이 진퇴유곡의 죽음에서 재활의 길이 열린다. 태고는 「무정(無定)」50)에서 이렇게 그 의미를 읊는다.
앞의 두 구절은 ‘하나의 그 무엇’을 묘사한다. 그것이 좌우와 유무 등 양단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지만 그때마다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있다. 제2구도 마찬가지 논리로 삼제의 시간 그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음을 나타낸다. 수행자의 깊은 속이 이러한 경계에 이르러 한 치의 어김도 없이 딱 들어맞아 한 덩어리가 된다면 천지 사방의 삼라만상 낱낱이 온통 그것일 뿐이다. 제목 ‘무정(無定)’과 같이 이 하나의 그 무엇은 무엇이라 결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이것도 저것도 모조리 하나의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이는 안팎의 모든 것을 하나의 의심으로 만들어 완성된 화두의 의단(疑團)과 다르지 않다. 온몸을 내던질 백척간두 내지 은산철벽의 궁지도 그 맥락이며, 화두를 참구하다가 도달하는 극점과 통한다.
그 화두가 유와 무 어느 한편에 떨어져 속박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활구(活句)로 남으려면 실(實)이 아닌 허(虛)에 담겨야 한다. 화두를 실로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선어(禪語)로서의 활력을 잃고 만다. 이 맥락에서 태고는 말한다.
학인들이 방편을 빌리는 것을 가지고 진실한 법[實法]이라 여기고 버리지 않는다면 이 어찌 큰 병통이 아니겠는가!(김영욱 외, 2009: 462)51)
왕의 창고에 대단히 귀중한 보물이나 위력이 뛰어난 무기[實]가 있을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와 같다. 교학의 기본 형식이나 근본 원리 또는 일반적인 선법(禪法)이 모두 실(實)이 아니므로 이 허(虛)를 암시하고자 “우리 왕의 창고에는 이와 같은 칼이 없다”52)라고 한다.
태고의 이곳에는 본래 하나의 법도 없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53); 옛날 소설산에 있을 때 하나의 법도 남들에게 설하지 않았고, 지금 사나당(舍那堂)에 살면서 또한 하나의 법도 남들에게 설하지 않는다(김영욱 외, 2009: 410).54)
조사선 전통에서 자연스럽게 도출할 수 있는 이치이지만, 특히 간화선의 집대성자 대혜 종고는 “남에게 전할 실법이라곤 없다”55)라고 거듭 강조하며 명시적으로 밝힌다. 아마도 이러한 관점이 화두 참구의 효용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 추정한다.
화두는 즉(卽)과 리(離) 어느 편도 통하지 않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모든 모색의 수단이 힘을 상실하는 그때 적절히 공부할 최적의 상태가 구현된다. 굉지 정각(宏智正覺)이 “이 말 그대로[卽]도 아니며 이 말을 떠난 것[離]도 아니니 취하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한다”56)라고 한 말도 이러한 화두의 본질에 따른다. 본디 “한 사람은 허(虛)로 전했는데 만인이 오인하여 실(實)이라 전하였다”57)라는 선가의 상용어도 이를 경각시켜 활구를 유지하려는 의도이다.
파주(把住)와 방행(放行)을 소재로 주고받은 태고의 문답에도 화두 참구의 도리가 내포되어 있다. 유와 무를 제거해야 할 장애로 수용하여 모두 허용하지 않는 방식을 파주라 한다면, 두 가지를 각각 치유의 수단으로 모두 받아들이는 방식은 방행에 가깝다. 파주와 방행은 조사선의 전통에는 새의 양 날개와 같이 불가결한 요소이다. 때로는 유가 되었거나 무가 되었거나 선이나 악이나 모두 허용하는 방행을 시행하다가 때로는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 파주를 세워 모든 길을 틀어막기도 한다. 이들 두 가지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수법으로 유무 양단은 그때마다 모두 살기도 하고 모두 죽기도 한다. 한번은 뒤집어졌다가 다시 거꾸로 놓으며, 유로 가려 하면 무로 뒤집고 무로 가려 하면 유로 뒤집어 모든 통로가 막힌 완벽한 궁지(窮地)로 유도한다.58) 이것은 화두의 허(虛) 앞에 노출되는 장면과 다르지 않다.
태고와 문답한 어떤 학인이 “방행하면 삼현과 십지의 성인이 번갈아가며 서로 경하하겠지만, 파주하면 중국의 6대 조사와 인도 전통의 28대 조사가 우러러보려 해도 방법이 없다”59)라고 한 무문 혜개(無門慧開)의 말을 인용한 뒤에 “이제 화상께서는 방행을 시행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파주를 시행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태고는 “하늘의 별이란 별은 모두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인간세상의 물줄기는 동해로 흐르지 않는 것이 없다”60)라고 대답하였다.
태고의 답변은 파주와 방행이 모두 귀착되는 지점이 있다는 취지처럼 들릴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태고는 조사선의 일반적 사유방식에서 멀어진다. 그 속뜻은 무엇일까? 방행과 파주를 하나의 틀로 활용한 다음에 “방행이 옳은가? 파주가 옳은가?”라고 하는 의문으로 되돌려 두 가지 모두 해체함이 조사선의 일반적 방법이다.61) 북극성과 동해를 최후로 귀착되는 실(實)로 굳혀 놓는다면 이러한 사유법과 배치된다. 태고의 마지막 말은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선사로서의 상투적인 트릭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방행과 파주를 잠정적인 소재로 활용하였을 뿐이며, 이 방법은 보편적으로 모든 가치와 개념에 적용된다. 또한 조사선 안에서 여래선과 조사선의 차별을 이해하는 방식도 마찬가지 논리이다. 상식적 판단과는 달리 결코 조사선을 우위에 두지 않으며, 둘 사이에 우열이 없고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며, 선기(禪機) 활용의 소재로서 용도를 마치면 폐기될 뿐이다.62) 확고한 범주나 가치로 굳어지는 잘못을 막고, 이 두 가지 도구를 해체하여 유연하게 운신하도록 이끄는 말로 추정할 수 있다. 이들 사제의 이어지는 다음 문답에 보인다.
“옛날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인연과 오늘 영녕사 법당의 일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그대가 살펴보라! 같은가, 다른가?”63)
부처님의 염화(拈華)와 가섭의 미소(微笑)로 요약되는 영산회상의 교외별전(敎外別傳)과 태고의 현재 법회를 비교하여 문제로 제기하였다. 같거나 다르거나 양자 중 어느 편으로 결정하기를 기대하는 일은 무의미하다.64) 누구도 답을 내지 않고 의문과 의문을 교환하면 그만이다. 그 의문 자체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극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학인이 그렇게 물어 스승 태고의 심경을 두드려보았고, 태고는 어떤 손질도 하지 않고 그 질문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모든 구절을 의문 속에 몰아넣는 방법은 화두 참구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납자가 지니는 전통적인 지략이다. “천차만별의 물상과 사태들을 같고 다름이라는 대대(對待)로 귀속시키더라도 다시 천차만별로 갈리며 그런 가운데서도 ‘같은가, 다른가?’라는 물음이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한에서 이 또한 화두로서 생명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의 소임은 그 선까지이며, 답의 도출은 궁극의 목적이 아니다(조영미, 2015: 161-162).”
선문답은 하나의 질문에서 하나의 대답으로 마치는 형식이 아니다. 외형상 확고한 답의 모양을 꾸미더라도 내심은 의문의 철퇴를 기꺼이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는 화두 참구상의 의심이 모든 분별에 가하는 움직임과 다르지 않다.
하나의 대답은 의심 속에 들어가야 되살아나며, 결정된 대답으로 수용하는 순간 사구(死句)가 되어 무덤에 묻혀버린다. 그것은 철두철미 질문 또는 의문에서 또 다른 의문을 던질 뿐이며, 결코 시원하게 해답을 주는 방식으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의심과 질문에서 새로운 의심과 질문을 열어놓는다. 비록 어떤 해답을 제시한 듯한 모양을 취하더라도 의문이 잠복되어 있는 함정이기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속박으로 전환된다.
일정한 화두를 타파하고 실현하는 안팎의 경계에 대하여 조사선과 마찬가지로 간화선에서도 추상화하지 않는다. 하나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보이는 방법이 즐겨 쓰인다. 최종적으로 어떤 분별이나 말 그리고 그 어떤 인식 틀에도 가둘 수 없는 경계를 고스란히 남겨둘 뿐이다. 이것은 사람이 애써 주재하며 관여할 일이 아니다. 태고는 말한다.
향상하는 하나의 길은 어떤 성인도 전하지 못한다.65) 말해 보라! 무엇을 전하지 못한다는 뜻일까? 이에 대하여 만약 조금이라도 분별이 끼어든다면 본질과 멀리 떨어질 것이다. 제대로 알고 묻는 자에게도 30방을 때릴 것이고, 모르고 묻는 자에게도 30방을 때릴 것이다(김영욱 외, 2009: 399).66)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모두에게 평등하게 시행하는 방(棒)은 무자 화두의 유와 무 양 갈래 길을 모두 틀어막아 궁벽한 지경으로 몰아붙이는 수법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조사선의 방법이 간화선에 투영된 전형적인 예이며, 태고선에 체질화되어 있는 본질적 속성이다.
Ⅲ. 태고 간화선(看話禪)의 요소
화두 무자(無字)는 유·무 대립의 틀에 속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는 저편의 그 무엇도 아니다(김영욱 외, 2009: 438).67) 그렇다면 무엇일까? 무자는 의문 자체이며, 이에 대하여 어떤 해답을 내리기만 하면 때려 부수는 도구가 된다. 무자는 오로지 의문으로 남아서 그것에 달라붙는 갖가지 잡다한 분별에 가하는 철퇴일 뿐이다. 그것은 숱한 분별을 부르며 유혹하는 일종의 덫을 닮았다. 더 이상 분별에 걸려들지 않고 오로지 무자에 대한 의문만 남아 탐색할 길이 막막해지는 궁지(窮地)에서 타파의 소식이 온다. 확정된 해답인 듯이 던져주어도 화두인 한에서는 그것은 위장전술에 불과하다. 그곳에는 의문이라는 복병이 항시 매복하면서 역공으로 뒤집을 준비를 하고 있다.
모든 유형의 참선에서 사유분별은 장애로 간주된다. 간화선에서는 이러한 사유의 반대편에 참구라는 방법을 내세워 구분한다. 참구는 화두를 받아들여 대결하는 방법이며, 그 참구를 움직이는 핵심 동인은 의심이다. 의심 속에는 갖가지 분별과 언어의 장애를 파괴하는 기능이 들어 있다. 참구상의 의심은 대체로 의단(疑團)과 의정(疑情)을 주요 개념으로 쓴다.
내외의 일체를 화두에 대한 하나의 의심으로 통일시켜 한 덩어리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의단이라 한다.68) 모든 분별과 경색된 갖가지 관념을 하나의 의심덩어리로 몰아넣은 다음 때려 부수려는 의도가 최후의 목적으로 기다리고 있다.69) 안팎의 모든 존재를 하나의 의심으로 덩어리 지으려면 화두를 참구하는 매 순간마다 의심이 살아 움직여야 한다. 그 의심의 작용을 의정(疑情)이라 한다. 의정은 원인 내지 과정에 해당하는 참구의 불가결한 작용이고, 의단(疑團)은 그러한 의정으로 점철된 참구의 최종 결과물이다.
참구의 가장 우선적 조건은 화두에 대한 의정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의식을 차지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요소가 순수하게 의심덩어리로 전환되어 마음의 작용이 틀어막힌 경계를 나타낸다.70) 태고는 화두 참구의 자가 점검법으로 제시한 조목에도 이것을 집어넣었다. 곧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활동을 할 때 분명하게 화두를 알아차리며 모든 것이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는가?”(김영욱 외, 2009: 427)71)라고 살피는 방법인데, 어떤 화두를 참구하는 초기부터 완벽하게 타파할 때까지 이런저런 생각은 모두 던져버리고 단 한 찰나도 의정만 놓치지 말고 빈틈과 끊어짐이 없이[無間斷] 살피는 것이 참구의 요령이다.72)
태고는 단도직입적으로 가만히 사유분별하며 헤아리는 방식이 화두 공부의 독소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 해독제로 참구를 내어놓는다.
결코 사유분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활발한 작용을 멈춘 채로 우두커니 생각으로 헤아려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두커니 생각으로 헤아린다면 본래의 뜻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활구(活句)에서 참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김영욱 외, 2009: 444).73)
이 대목에 근거하여 말하면, 참구의 방법이라야 활구와 맞닥뜨릴 수 있고 사유분별로 접근하는 순간 모조리 사구(死句)로 굴러 떨어진다. 활구와 사구는 어떤 구절의 우열에서 갈라지는 차별이 아니고 귀천을 불문하고 무슨 구절이 되었건 그것을 대하는 방법에서 구분된다. 그 방법은 바로 참구와 사유분별의 차이이다.
“참학하는 사람은 반드시 활구를 참구해야지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 된다”74)라고 하는 간화선의 상용구에서 ‘사구의 참구’는 사실상 ‘구절에 대한 온갖 생각(사유분별)’을 말하며, 참된 의미의 참구는 아니다. 이 상용구에 대한 명쾌한 풀이를 후대의 청허 휴정(淸虛休靜)이 제시한다. 곧 활구는 “마음으로 헤아릴 길도 전혀 없고 말을 따라 좇아갈 길도 없어서 모색할 도리가 없다”, 사구는 “이치로 통할 길도 있고 말을 따라 좇아갈 길도 있어 듣고 이해하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라고 하면서, 전자는 참구(參句)라 하고, 후자는 참의(參意)라 하여 구분하였다(김영욱 외, 2010: 102).75) 의미로 가득한 세계를 궁구하기 때문에 참의라 하였고, 이는 결국 사유분별의 장애를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유와 구별되는 참구는 무엇인가? 참구는 화두를 붙들고 궁구할 때 발생하는 이런저런 분별이나 기발한 착상이나 심오한 이치를 담은 구절 따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씩 건져내어 ‘의심’으로 몰아넣는 작용이다.76) 참구의 핵심은 의심이라고 거듭 강조해도 무방하다.
참구란 이 하나의 화두를 살핀다[參]는 뜻이다. 화두를 살피면서도 밖으로 의정을 일으키지 않는 까닭에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닫고,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달으며, 의심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라고 한다. 의심이 곧 (참구의) ‘참(參)’이다. 의심이라는 생각은 진실로 깨달음의 본체를 가로막는 장애이지만 그 기세를 따라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도리어 빌려 쓸 만하여 장애를 무너뜨리는 기술로 간주한다. 대체로 의심과 깨달음의 기틀은 서로 짝이 되고 그 세력은 상호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의심을 중시해야만 한다.77)
효과적인 의심을 할 수 있도록 저들 사유에 잠재된 고하의 가치를 모조리 무너뜨리는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여의주의 가치도 똥 덩어리의 값으로 떨어진다.78) 이것은 올라가 있는 놈은 끌어내리고 낮게 움츠린 놈은 높이 추켜올림으로써 사유의 재료가 되는 단단한 관념의 뿌리를 결국은 걷어 내버리는 수법이다. 반면, 사유분별은 고하와 좌우 등의 차별을 전제로 그때마다 뚜렷하게 시비를 가르는 방식이 그 특징이다. 그래서 “화두 공부는 분별하거나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는 지점으로부터 본래의 궤도로 들어간다(조영미, 2015: 157).”
태고는 누누이 궁극의 이상적 경계에 대하여 “지(智)로 닿지 못하고 혜(慧)로 궁구할 수 없다.”(『太古語錄』: 686b19)79)고 하거나, “식으로 헤아릴 수 없고 지혜로 닿지 못한다.”(『太古語錄』: 687c5)80)라고 한다. 여기서 지혜란 사유분별을 특징으로 하는 인식활동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과 대적하여 물리치는 수단으로 의심이 숨어 있다.
의심의 성격을 분명하게 규명하기 위하여 간(看)과 염(念)을 비교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간(看)은 화두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간수(看守)의 맥락이고, 끊어지는 틈 없이 생각으로 늘 물고 있는 작용이 염(念)이다. 화두 탐구의 바른 방향은 그 두 가지가 아니라, 의(疑)일 뿐이라는 뜻이다.
이 의(疑)라는 한 글자는 오로지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하였을까?’라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의심이다. 조주의 무자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것[看]도 아니요, 조주의 무자를 부단히 생각하는 것[念]도 아니다. 요즘 학인들은 대부분 이 무자를 살피거나 이 무자를 부단히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학인들은 여기에 이르면 정신 바짝 차리고 반드시 그 학인이 당시에 어떤 의심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야 한다.81)
놓치지 않고 간수하는 방법은 화두 참구의 요소이기도 하지만 의심이 빠지면 그것도 사구가 된다. 또, 부단히 생각하는 방법은 의심과 정면으로 배치한다. 간과 염은 의(疑)에 수반되는 작용인 한에서 제한적으로 화두 참구의 범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82) 그만큼 참구의 골수는 의심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참구는 몸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되어 화두를 의심한다는 뜻이다. 참구는 온갖 사유와 분별이 의식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화두를 든 굳은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도 않게 하면서 모든 생각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또 다른 무기와 같다.83) 이 무장해제의 중심에서 항상 움직이는 원동력은 의심이며, 의심의 요령은 쇠망치와 같은 파괴력이다. 부처가 되었건 조사가 되었건, 불성이나 진여와 같이 아무리 최상의 지위나 정상에 자리 잡은 궁극의 목표라 할지라도 일종의 유혹이며, 의식을 예속하는 함정에 불과하다. 그것을 조사가 일으키는 병[祖病]과 부처가 초래하는 병[佛病]이라 한다.84) 조사와 부처에 편리하게 기대어 운전할 의도로는 모조리 휩쓸고 화두 하나만 덩그러니 남기고 승패를 가르는 지점에 이르지 못한다.
화두나 선문답을 이해하는 근거 없는 전제는 좀벌레와 같이 그 진실을 흉측하게 먹어 들어간다. 저들 선어(禪語)를 마주하고 난관에 부딪히기만 하면 이해하고자 기대는 마음·진여·부처 따위의 관념이 그 전제이다. 그렇게 부당한 전제를 도려내는 특별한 수단을 별도로 구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조사들의 일상 언어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사들은 그 폐단을 감파하고 불필요한 전제가 되어 선어를 오염시킬 만한 그 말들의 뿌리를 미리 뽑아버리기도 한다. 조주 종심(趙州從諗)은 잉여물과 다름이 없는 그러한 전제들을 처음부터 쓸어 없애는 수법을 쓴다. 태고가 바로 그 조주를 불러들였다.
불전(佛殿)에서 말했다. “조주 고불(古佛)은 ‘불(佛)이라는 한 글자조차도 나는 듣기 싫다’라고 하였다.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싫다는 것조차도 싫으니, 옛날의 내가 바로 그대였고, 오늘의 그대는 바로 나이다.’ 향을 사르고 부처님께 예배를 올렸다(김영욱 외, 2009: 417).85)
조주의 눈에 ‘불(佛)’이라는 한 글자는 아주 엄한 명령이면서 닳고 닳아버린 한마디이기도 하다. 이는 본래 해탈의 소식이었지만 가장 분명한 속박의 형식이기도 하기에 조주는 부처가 있거나 없거나 모두 내치고 머물지 못하도록 한다.86) 듣기도 싫다는 그 말을 외도나 무지렁이가 아니라 조사의 대표 격인 조주가 던져 더욱 참신했지만 이제는 다들 입을 대는 바람에 더 써먹기도 쉽지 않다. 이 국면에서 태고는 조주의 그 말을 제기하여 똑같이 싫다고 되돌려주는 수법으로 묘수를 발휘하였다. “도둑의 말을 타고 도둑을 뒤쫓고, 도둑의 창을 빼앗아 도둑을 죽인다”87)라는 전법을 태고가 숙지하고 있는 탓이다.
사실은 본래 싫다고 한 그 말에 조주는 함정을 파놓았고, 고의적으로 저지른 잘못 또는 착각이기도 하였다. 이 착각을 알아차린 태고가 자신도 ‘싫다’고 함으로써 또 하나의 착각으로 응수한 국면이다.88) 이것을 장착취착(將錯就錯)이라 한다. 상대가 하나의 착각을 덫처럼 던져 놓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자신도 마음먹고 착각으로 대하는 조사선의 일반적 책략이다. 이 착각은 실제로 범한 잘못이 아니라, 상대의 말과 창을 빼앗아 상대를 공격하는 수법 그대로이다.
태고가 부처님을 호위하려는 마음에서 조주를 공격했다면 그는 무지한 말류의 선사에 불과하다. 본분을 추구하는 납자인 한에서 태고의 저 말에는 부처님에게도 결코 호의적인 의도가 들어 있지 않았고,89) 조주를 등질 마음도 없었다고 보아야 바른 방향이다. 자세히 보면 이렇게 독한 수법에 조주의 취지를 살리고 선대 조사로서 그가 베푼 은혜를 갚으려는 태고의 의도가 들어 있다.90)
이러한 사유법에서는 부처와 중생 또는 열반과 생사 따위의 대립하는 양자는 각각 한 지점에 자리 잡고서 맞바꾸어도 되는 지극히 평등하고 몰가치한 관계로 설정된다. 태고는 말한다.
내가 만약 이 일(본분사)을 제기하여 퍼뜨리더라도 그 뒤에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여기에 도달하면 부처라는 이름도 써먹을 수 없고, 조사라는 이름도 쓸모가 없으며, 납승이라는 이름도 써먹을 수 없다. 사과·사향과 삼현·십지와 등각·묘각이라는 이름도 쓸모가 없고, 열반이라는 이름도 써먹을 수 없으며, 생사라는 이름도 쓸모가 없고, 팔만사천의 바라밀이라는 이름도 써먹을 수 없으며, 팔만사천의 번뇌라는 이름도 쓸모가 없다. 대장경 전체의 교설이 그 무슨 쓸데없는 말인가! 또한 천칠백 공안은 그 무슨 잠꼬대란 말인가!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은 그 무슨 어린아이 장난이란 말인가!(『太古語錄』: 672b15.)91)
부처를 비롯하여 그 성취한 경지와 생사·열반 그리고 그 모든 진실을 담은 대장경의 교설과 무수한 공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쓸모없는 그 무엇으로 끌어내렸다. 이처럼 선가의 납자가 추구하는 본분사의 관점에서는 교학 전체가 쓸모없기에 불립문자(不立文字)92)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길을 열 수밖에 없다.93) 고위의 가치가 폐기 대상으로 전락하듯이 최하위의 가치들도 그것과 섞여 자신의 헛된 관념을 벗는다.
여기서 불(佛)이나 무자 화두 상의 불성(佛性) 따위는 본질적으로 소재에 불과하며 결코 주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중생 등으로 대체해도 별반 차이가 없으며, 필요에 따라 잠시 세웠다가 허무는 무대 장치와 같다. 그 이야기를 태고가 전한다.
5교와 3승 12분교는 부처님이 지린 오줌일 뿐이며, 대대로 이어온 부처님과 조사들은 꿈속에서 꿈을 이야기하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만약 어떤 도리를 조작하여 헤아린다면 선종의 종지를 매몰시킬 것이며, 세속적 진리 체계에 따라 헤아린다면 앞서간 성인들의 뜻을 등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다 해도 안 되고, 이렇지 않다고 해도 안 되며, 이것저것 모두 안 된다고 해도 또한 안 됩니다(김영욱 외, 2009: 406).94)
온갖 관념과 그 속에 물들어 있는 권위라면, 그것이 부처일지라도 불변의 전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교설이 오줌인 이유는 그것을 보옥으로 여기고 끌어안는 순간 자신을 더럽힐 가능성이 잠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와 조사를 배경으로 구축한 도리를 보금자리로 삼아 사유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다. 태고가 ‘도리를 조작하여 헤아린다[作道理商量]’고 한 말은 대혜와 지문 광조(智門光祚) 등이 참구의 병통으로 제기했던 조목이다.95)
태고가 영녕선사(永寧禪寺)에 주지로 들어가면서 ‘방장(方丈)에서 행한 법문’96)에서 살펴보자.
태고가 방장실에 자리 잡은 다음 주장자를 세웠다가 한 번 내리치면서 말했다. “바로 이곳은 부처도 삶아 내고 조사도 삶아 내는 거대한 화로이고, 생도 단련하고 사도 단련하는 악독한 집게와 망치이다. 그 예봉에 맞서는 자는 간담을 상하고 혼까지 잃는 법이니 노승에게 얼굴이 없음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다시 세웠다가 한 번 내리치고 “무수한 부처님들이 이곳에서 흔적도 없이 녹고 부서져버렸다”라고 한 뒤 다시 세웠다가 한 번 내리쳤다(『太古語錄』: 671a21.).97)
조사선에서 방장은 불조(佛祖)의 산실로서 ‘현장의 부처’가 거처하는 장소이다. 화로에서 풀무질하고 단련하여 물건을 만드는 대장간처럼 방장은 다양한 수단과 방편으로 학인들을 이끌어 부처나 조사의 반열에 올려놓으려 시도하는 근거지이다. 하지만 부처도 조사도 결국 흔적도 없이 녹여 없앨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 태고는 “빼앗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준다”98)라는 여탈자재(與奪自在)한 전략을 펼치고 있다. 마지막에 ‘부서져버렸다’고 하여 빼앗았지만 필요에 따라 주기 위한 허언(虛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임제의 살불(殺佛)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태고는 성불(成佛)과 살불(殺佛)의 경계 자체가 허물어진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99)
이처럼 조사의 방장에서는 상하의 모든 가치가 뒤집어엎어져 평등한 지위로 돌아간다. 모든 가치가 평등한 관점에서 자리를 맞바꾸어 부처님의 흔적도 지우고 탁월한 분별의 기량도 무화(無化)되므로 이곳은 해골이 널려 있는 무덤과 다르지 않다.100)
조사의 세계는 뛰어난 영웅이 주인공으로 앉아 있을 권좌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곳의 주인공은 어떤 법도에도 묶이지 않고 주어진 틀을 거스르며 자유롭게 역량을 발휘하지만 자신의 몰락을 즐겁게 기다린다. 매일 스스로 ‘주인공!’ 하고 부르고 스스로 ‘예!’ 하고 응답했던 서암 사언(瑞巖師彦)의 화두가 주인공이라는 선어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염송가(拈頌家)들이 그 주인공을 ‘헛것’이라 함으로써 활용을 극치로 끌고 간다는 점101)에서 불성 등의 개념과 동일하지 않다. 단지 부르고 대답하며 주고받는 그것만 있을 뿐 그 배후에 불변의 그 무엇 또는 근원을 상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련한 선사들에게는 주인공이나 불성이나 그때마다 잠깐 활용하고 버리는 소도구에 불과하다.
태고가 그러한 주인공의 본 모습을 말한다. “어리석은 말더듬이 주인공이여! 뒤집어 행하기도 하고 거꾸로 펼치기도 하며 규범에 매이지 않는구나.”(김영욱 외, 2009: 485)102)
화두 참구의 극점은 하나의 조짐으로 다가온다. ‘마음이 갈 곳이 사라져’103) 나아갈 길도 돌아설 길도 없고, 그 자리에 머물 수도 없이 완벽하게 막힌 궁지(窮地)가 그것이다. 화두를 궁구하는 어떤 분별의 수단도 통하지 않지만, 이것은 공부가 무르익어 화두가 타파되기 직전의 소식이기도 하다. 태고는 무자를 참구하다가 이 경계를 체험하였다.
나중에 문득 조주의 무자 화두를 들고 궁구하다가 입을 댈 수 없어 마치 쇳덩이를 씹은 듯하였지만 곧바로 쇳덩이와 같은 그곳에서 끝까지 맞섰다(『太古語錄』: 696a24.).104)
‘입을 댈 수 없다’는 말은 무자 화두에 대하여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막히고,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몰렸다는 의미이다. 무자를 잘 먹을 수 있도록 익숙한 말과 관념을 섞어서 입맛을 달래곤 하다가 이처럼 씹어서 삼킬 수 없는 쇳덩이와 같은 궁지에 몰린 것이다. 태고는 이 점을 중시하여 곳곳에서 참구자들을 이곳까지 유도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해제(解除)에 앞서 대중에게 나날이 행하는 공부를 물었더니 서당(西堂)이 “옛날에는 (모든 소리가) 부처님의 음성이고, (모든 육신이) 부처님의 색신이라는 도리105)를 이해의 기반으로 삼았지만, 태고의 회중에 이르러 본분사에 근거한 가르침을 받은 이후로는 이전에 익혔던 기량 따위는 모조리 사라졌고, 다만 고요히 가라앉은 심지에서 조주의 무자를 참구하며 살폈을 뿐인데 모기가 무쇠소에 올라탄 꼴과 비슷한 지경이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그러므로 무쇠소(鐵牛)라는 그 말을 써서 호를 삼고 그에 따라 게송을 지어 보냈던 것이다. 이로써 무쇠소에게 아픈 채찍을 가하여 땀을 내게 하면 조주의 본의를 마주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太古語錄』 「鐵牛」: 685c3.).106)
무쇠소의 등을 뚫고자 시도하는 모기의 비유는 대혜 종고 등의 간화선사들이 화두의 기본적 속성 또는 화두 공부의 궁극처를 묘사하는 말로서 즐겨 쓴 것이다(김영욱, 2006a: 255). 모든 화두는 처음부터 분별하기 불가능하도록 조정하여 주어져 있기 때문에 무에 분별을 붙이면 구태여 유라고 일러주고, 유에 기울어져 헤아리면 무라고 일러줌으로써 유무가 모두 지우개107)일 뿐 실이 없는 허언(虛言)이라는 사실과 마주치게 한다. 그 순간 무쇠소에 올라탄 모기와 같은 지경이 된다. 그놈이 부리를 이곳저곳에 꽂으면서 피를 빨 수 있으리라 착각하는 모양과 마찬가지로 무자 등의 화두를 요모조모 기발한 생각으로 알아맞힐 수 있다고 오인한다. 그 잘못된 기대가 완벽하게 좌절하는 순간을 맞이하면 분별에 철퇴를 가하는 화두가 자기 역할을 완수한 것이다.
단지 화두를 들고 하루 온종일 모든 행위 반경 안에서 오로지 그것만을 잊지 않고 절실하게 궁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궁구하며 화두와 끊임없이 반복하여 대결하면 깨달을 시기에 도달할 것입니다. 반드시 조주가 말한 뜻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돌아보아야 하니, 그러다가 마치 쥐가 소뿔로 만든 쥐틀에 빠진 것과 흡사하게 되면 거꾸로 뒤집어져 나아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것입니다(김영욱 외, 2009: 439).108)
무쇠소를 뚫으려는 모기와 쥐틀에 빠진 쥐와 같이 어떤 요령도 부릴 수 없고, 모든 수단을 모조리 빼앗긴 이 상황은 사유분별로 더듬어 갈 수 없는 궁지를 비유한다. 그런 이유로 이를 좋은 소식이 올 조짐이라 한다. 참구 안에 자리 잡고 부단히 가동하는 의심이 이러한 결과를 불러들인다. 잡념이 되었거나, 잘 짜인 사유분별이 되었거나 화두에 달라붙는 그 모든 것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쓸어 없애는 빗자루와 같은 역할을 다름 아닌 의심이 맡기 때문이다.109)
의심은 사유가 철저하게 궁지에 몰린 상황으로 더욱 세차게 밀어붙인다. 무슨 뜻인가? 참구가 무르익지 않은 단계에서 화두에 사유분별이 붙어서 파고드는 일은 흔히 발생하기 때문에 그 사유를 애써 없앨 필요 없이 일어날 때마다 의심에 올려놓고 버리다 보면 더 이상 사유로 갈 길이 없어 궁색한 지경에 이른다. 의심은 여기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길을 틀 수 있다. 태고는 말한다.
화두가 자연히 순수하게 익어서 한 덩어리가 되면 몸과 마음이 홀연히 비고 응결된 듯이 움직이지 않아서110)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두를 공부하는 당사자만 남아 있는 경계이니, 당사자가 만일 화두 이외의 다른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헛된 것에 미혹111)될 것이다(김영욱 외, 2009: 423).112)
오직 화두 하나만 남아 있고, 이를 두고 일어나는 모든 분별의 길이 막힌 경계가 그 궁지이다. 화두 이외의 다른 생각이란 화두 참구를 방해하는 온갖 사유분별이며, 오직 의심만이 이것을 대적하여 물리칠 수 있다.
태고는 염불(念佛)에도 이와 동일한 방법을 적용한다. 이것은 화두 참구와 염불을 방법적으로 통일시킨 선정일치(禪淨一致) 사상이다. 염불의 극치도 생각으로 더 이상 짚으며 갈 수 없는 궁지에서 주어진다.
아미타불이라는 명호를 마음에 놓아두고 언제나 잊지 않으며, 찰나마다 (다른 생각이 들어올) 빈틈이 없이 절실하게 참구하며 생각하십시오. 만약 생각이 고갈되고 지향할 의지가 막히면113)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고 돌이켜 관찰하고, 다시 ‘이렇게 돌이켜 관찰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고 관찰하십시오. 이와 같이 빈틈없이 궁구하고, 또 빈틈없이 궁구하십시오. 이렇게 궁구하는 마음이 끊어지면 자기 본성의 아미타불이 우뚝하게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김영욱 외, 2009: 453).114)
참구하는 화두에 대한 어떤 종류의 분별이나 사유의 기량도 통하지 않아 마음이 갈 곳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의심은 극치에 도달한다.
바로 이러할 때 ‘어떤 것이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일까?’ 하는 의심만을 오로지 잊지 말고 절실하게 궁구하다가 홀연히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면, 그 의심과 한 덩어리가 될 것이다(김영욱 외, 2009: 459).115)
일체가 의심과 한 덩어리가 되면 모든 관념과 가치는 무의미로 전락한다. 의단은 어떤 언어의 구절이 되었건 이렇게 몰락된 경계(沒滋味)에서 궁구하도록 유도한다. 이상과 같이 의심은 확고하다고 간주되는 진리나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식에 잠복된 모든 관념의 보루를 허물어뜨리는 무기이다.
스승에게 받은 화두이거나, 스스로 제기한 화두이거나 처음 참구하던 것을 본참화두(本參話頭)라 한다. 참구의 원리는 동일하므로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두를 바꾸도록 권하지는 않는다.116) 이렇게 본다면 태고가 초기에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참구한 다음117) 오로지 무자 화두에 치우쳤던 까닭을 굳이 파 뒤질 필요는 없다. 태고는 무자에서 화두 참구의 보편성을 확보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고는 누차 “이 무자는 유·무의 무도 아니고 진무(眞無)의 무도 아니다”118)라고 함으로써 이 화두를 궁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을 드러낸다. 유·무의 무는 유와 대립하면서 필연적 짝이 되는 무로서 모든 사유분별의 일반적 형식이며, 진무의 무는 상대적 존재를 모두 넘어선 영역에 설정하는 일종의 실체에 대한 분별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무자를 잘못 참구하는 열 가지 병통[十種病] 중 앞의 두 가지에 해당한다.
틀림없이 십종병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 두 가지만 제기하였을까? 진각 혜심의 영향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십종병은 모두 유심(有心)과 무심(無心) 등의 양단에 따라 지배되는 분별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혜심의 주장과 부합한다. 곧 혜심이 십종병의 조목을 하나씩 들어서 설명한 다음 “넓게 말하면 십종병이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유심과 무심, 언어와 침묵이라는 양단에서 생기는 병통을 벗어나지 않는다”(『狗子無佛性話揀病論』: 70b6.)119)라고 한 그 말에 해당한다. 유심과 무심은 무자 화두를 공부하면서 유와 무라는 관념에 지배되는 마음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병통은 의심하지 않고 화두를 분별로 헤아려 알아맞히려는 시도이다. 이는 활구(活句)가 아니고 사구(死句)이다. 활구는 병통을 초래하는 분별을 제거하고자 그 반대편에 설정한 수단이다. 무나 유나 활구가 될 수도 있고, 사구가 될 수도 있음은 앞서 살펴보았다. 태고는 무자가 이 두 가지 어느 편도 아니라고 물리침으로써 활구로 보존한다. 그러한 분별의 범주로는 맛볼 수 없는 화두[沒滋味]를 분별에 오염되지 않도록 지키려면 무슨 말과 마주치거나 늘 의심이 움직이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활구는 분별로 더듬는 순간 그 활기를 죽여 사구로 전락한다. 사구야말로 분별이 달라붙어 깃들기 딱 좋은 보금자리요 함정이다. 이렇게 사구의 함정이 항상 잠복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선어에는 있다는 맛도, 없다는 맛도 그 밖의 어떤 아름답거나 뛰어난 맛도 없다는 사실을 경각하고 있어야 한다.120) 의심은 이것을 허물어뜨리는 본질적인 작용이며, 한 치의 분별도 붙지 못하는 활구가 반드시 그 뒤를 따른다. 대혜 종고가 “이 무(無)라는 한 글자는 허다하게 잘못된 지각을 꺾어버리는 무기이다”(『書狀』: 921c8)121)라고 한 말에도 무자의 기능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태고는 “표현할 말도 끊어지고 못할 말도 전혀 없으니, 순수하게 맑디맑아 맛이라곤 하나도 없다”(『太古語錄』: 688b19.)122)라고 하여 어떤 맛도 없어서 해야 할 말도 없지만 하지 못할 말도 없기에 더 이상 언어에 좌우되지 않는 자유로운 심경을 보였다.
이것저것 모색하는 방법으로는 화두 참구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조사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사유분별 앞에 은산철벽과 같은 화두를 던져 놓는 전략을 펼친다. 분별로 모색할 거리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화두 공부는 시작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은산철벽의 그 자리가 목적지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모색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때마다 병통이 된다.
결국 하나의 화두에 어떤 맛도 붙지 못하는 순간 화두는 그 극치에 이른다. 이렇게 무르익은 화두야말로 활구로서 타파의 전조가 된다.123)
오자(誤字)를 지워서 고치는 자황(雌黃)이라는 도구처럼 조사선에서는 스스로 한 말을 지워서 부정하는 전략으로써 주어진 모든 분별을 빼앗는 수단을 부린다. 화두 참구의 관점에서는 무라는 글자도 오자이고, 유라는 글자도 오자이다. 무자에 대해서는 유자를 자황으로 삼아 지우고, 유자에 대해서는 무자를 자황으로 삼아 지운다. 유무가 상호 철퇴를 내려야 무자를 참구하는 효용이 실현된다.
굉지 정각이 “개의 불성이 단적으로 있다고 말하면 뒤로 와서 오히려 없다고 말해주며, 단적으로 없다고 말하면 앞으로 와서 오히려 있다고 말해준다”124)고 한 말도 개의 불성이 “있다” 하거나 “없다” 하거나 이 두 가지 답변에는 그 말 자체로 가리킬 수 있는 분명한 뜻이 없다는 의미이다.125) 이 맥락을 선사들은 용두사미(龍頭蛇尾)126)라는 말로 평석한다. 조주는 무(無)라고 하여 용머리를 씌운 듯하였지만, 굉지 정각은 유(有)를 덧붙임으로써 뱀 꼬리로 낮추었던 것이다. 이렇게 용이 뱀이 되고, 뱀을 다시 용인 듯이 포장하는 연속된 비판의 과정이 의식의 모든 허위를 제거하는 칼날로 쓰인다. 이러한 점에서 비판으로 열려 있지 않는 경직된 언어를 사구(死句)라 규정한다.
유와 무를 걸림 없이 넘나드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조주의 혀에 뼈가 없다’고 평가한다. 또한 상대가 단단히 박고 있는 헛된 의식의 뿌리를 흔들어서 뽑고자 여러 가지 장치를 꾸며내어 ‘교란’시키는 방법을 쓰는데, 화두의 이 속성을 특별히 효와(誵訛)라 한다(김영욱, 2002: 225, 2006c: 128).127) 무자에 대한 설암(雪巖)의 평가에서 재차 살펴보자.
설령 어느 누가 무자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게 되더라도 조주가 이번에는 그 학인에게 유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은 무슨 의도인가? 예부터 지금까지 열이면 열 모두 평지에서 제 다리에 꼬여 넘어지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나에게는 별도로 무슨 할 말이 있을까?(『雪巖祖欽語錄』 권4: 559a16.)128)
무에 거점을 마련하려 들면 유로 뒤흔들어 교란하고, 무에 안주하려 하면 유로 교란하는 수법이다. 조주가 제기한 무자를 어떤 분별의 틀로도 조정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이다. 이 무는 다른 어떤 관념과도 연관이 없이 효와의 허(虛)로 움직이며 교란하다가 사라진다. 다만 제 다리에 꼬여 넘어지듯이 그것을 받아들여 유다, 무다 착각하기에 그때마다 물리치는 또 하나의 말을 던져줄 뿐이다.
이와 같이 화두는 유무 등의 언어로 유발하는 장애를 제거하는 또 하나의 언어이다. 유와 무가 장애가 되기도 하고, 각각 상대를 제거하는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화두로서의 유와 무는 모두 허(虛)이기 때문에 어느 편도 상대를 이기지 못하는 줄다리기를 하는 양상과 같다. 이는 간화선 이전부터 널리 발견할 수 있다.129)
의문과 의문의 교환은 하나의 화두를 또 다른 화두로 응하는 방법과 통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의문과 마찬가지로 무슨 대답이 되었거나 그것은 또 하나의 의문이요 화두인 것이다. 분별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경지에서 화두의 의단이 타파된다. 화두를 또렷하게 의식하고 있는 까닭에 혼침의 공망에 떨어지지 않고, 화두에 다른 잡념이 붙어있지 않으므로 망상분별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이 압축되어 있는 태고의 다음 말을 보자.
조주가 무(無)라고 한 뜻, 간절하게 궁구하여야 하리라. 궁구하다 어떤 분별도 할 수 없는 경계에 이르면, 본래 모양 그대로 드러난다네. 의심 다하고 분별 잊은 곳에, 조주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만일 별도로 생각을 일으킨다면, 눈앞이 촉도(蜀道)처럼 험난하리라(김영욱 외, 2009: 447).130)
궁구는 사유분별이 아니며 도리어 분별을 궁지로 몰아붙이는 효용을 발휘한다. 획기적인 전환의 기회를 맞이하려면 이 궁지에 주목해야 한다.
태고는 “만사의 집착을 내려놓고 살펴보면 / 모든 길이 막혀 철벽과 같으리라 // 망념이 모두 소멸하여 사라지고 / 사라진 것을 다시 지워 없애면 // 몸과 마음을 허공에 맡긴 것과 같아 / 고요한 빛이 번득이게 되리라”(김영욱 외, 2009: 490)131)라고 한다. 분별로 모색할 길이 없는 궁지에서도 오직 화두만 남아 있어야지 다른 생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 궁지가 화두 타파의 전조이기 때문이다.
Ⅳ. 현대적 의의 - 태고 공부법의 시사점 -
이상에서 살펴본 태고선의 선경(禪境)과 화두 참구법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재편될 수 있을까? 조사선이나 간화선이 현재의 우리 상황을 풀이하거나 해결하는 도구를 가지고 있기는 한가? 과거의 선사들이나 그 전통을 이은 오늘의 후손들이나 그 특유의 세계 안에서 오늘날의 거시적인 난제들을 해결하는 묘수를 직접 제공할 수는 없다. 그때마다 정치사회적으로 특수한 문제를 마주하고, 그 진단과 해결책으로 주문을 외우거나 요술을 부리듯이 ‘화두를 참구하시오’라고 엄숙하게 한마디 던진다면 질문이나 대답이나 모두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그런 유의 응답은 화두 참구를 실행하려는 사람들이나 그들을 섬기는 이들끼리만 통하는 암호로 추락하여 보편적인 전달력을 상실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로 태고선이 일깨워준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을 학문이라는 대상에 좁혀서 적용함으로써 그 현대적 의의를 짚어보는 정도로 마무리하려 한다. 특히 의심의 방법에 집중하겠다. 오늘날의 학문 자체나 그것을 추구하는 학자의 상황 속에 태고의 선법을 생짜 그대로 전하여 감동을 줄 수는 없어도 탄력적으로 받아들여 반추해 본다면 학문 활동을 수행하는 개개인들의 속을 정화하는 강력한 비판의 도구를 그 의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수많은 정보로 넘쳐나는 지금의 사회는 우리를 고민에 빠뜨리기도 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기도 한다. 두 경우 모두 해법을 위한 선택의 가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태고와 같은 납자의 눈이라면 이렇게 쉽게 해법을 주워 담을 수 있는 환경은 가장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다. 얼마든지 고를 수 있다는 생각에 따라 선택을 위한 고민은 경멸당하고, 흐리멍덩한 중간 지대는 외면당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화두 참구는 늘 그 어떤 선택도 궁색하게 만드는 중간 지점으로 유도한다. 그것은 모든 선택지를 다 뭉그러뜨려 이끌어줄 어떤 지침도 없는 곳에 던져놓는다. 문제가 일시적으로 해결되었더라도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갈등 국면을 처음과 똑같이 진지하게 맞아들어야만 한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햄릿은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 직전까지 물려 있던 문제, ‘이것이냐, 저것이냐?’ 곧 ‘죽느냐, 사느냐?’라는 갈등 상황을 그 죽음이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고, 반대로 삶을 선택했더라도 그 갈등 국면에 여전히 묶여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햄릿의 결정적 장면을 화두 참구의 의심으로 여과해서 보는 해설이다. 이에 따르면 햄릿이 삶과 죽음 그 어느 편을 선택했더라도 ‘죽느냐, 사느냐?’ 그 문제는 미해결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처럼 확실하고 안정된 답을 어떤 위대한 법사가 정해주기를 바란다면 이 의심의 방법에 잠재된 확장력을 턱없이 축소하고 비판의 예각도 무디게 만들 것이다.
학문은 글자 그대로 배움[學]과 물음[問]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 배우고 익히는 성실성이 없으면 학자의 본분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지만, 물음을 던지는 일이 적절치 못하거나 드물어도 학자의 기운을 잃어버린다. 각 분야에서 대대로 인정받아 구축한 이론이나 체제·해석법 따위를 익히는 작용이 배움이다. 그러나 한정도 없이 그 방식에 안주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관점과 안목으로 신세계를 열 수 없다. ‘이전부터 배워서 이해한 문자와 언어는 한칼에 두 동강 내어라’고 한 태고의 말은 학습한 자신의 지식에 옹색하게 갇히는 폐단을 암암리에 지시한다.132)
학문하는 사람들의 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지적 정보를 검토하는 지향성을 화두 참구상의 의심에서 빌려올 수 있음은 분명하다. 일체를 의심으로 몰아넣어 안팎 전체를 의심덩어리로 만들고 마주치는 대상마다 의심을 불어넣어 세상에 주어진 관념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수법이 그 방법의 기초이다. 의심을 이대로 적용할 수는 없어도 자기 생각이라곤 한 점도 없이 해답을 훔쳐보듯이 여기저기서 지식 정보를 주워 담아 자기 의식에 군림하도록 허용한 마음에 의심은 철퇴와 같은 무기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 헛된 신념을 교란시켜 뿌리째 뽑는 방법을 무자 화두 참구에서 발견한다. 유무 어느 편이 되었건 안주하는 순간 반대편으로 유도하여 교란시키는 수법을 가리킨다. 무자는 확정된 해답이 아니라 무한히 의문을 부르고 결정된 생각을 부수는 도구일 뿐이다. 어떤 학적 체계에 굳어진 가설과 전제를 반성하고 뒤집는 학자로서의 기본적인 감성도 이와 같아야 한다. 이를 본으로 삼으면 일정한 체계의 장치에 갇히지 않고 늘 해체하여 부수는 의식을 연마하도록 경각시킬 수 있다. 조사선이나 간화선 연구자들이 저도 모르게 달고 있는 각종의 법도도 마찬가지로 의문의 대상이다. 가장 근절하고 싶어 했던 폐단을 자기 스스로 장착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모순이다.
온갖 유형의 주장과 이론에 대하여 의문 부호를 부가하여 뒤집어엎고 무엇보다 자신의 확신에 스스로 기만당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의심에 따라 스스로 비판의 수용에 열려 있어야 한다. 위대하다고 굳어진 말들을 개방하여 새롭게 구성하는 열쇠도 의심 속에 있다.
태고선에서 분명히 관찰되듯이 화두 또는 공안(公案)은 어떤 전례가 있더라도 누구에게나 비판의 철퇴를 맞도록 열려 있다. 이것은 화두의 태생적 본질이고 의문에 의문으로 꼬리를 맞물려 이어지는 개방의 본성과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일부 수행자만 독점권을 행사하도록 공안을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폐쇄성은 공안의 본질과도 정면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신화처럼 정착된 갖가지 이론과 주장의 아낌없는 몰락과 파멸을 조사들의 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몰락했던 그 정신을 망각하는 한 조사선은 현실에 구현되지 못한다. 부처가 되었거나, 최고의 깨달음이 되었거나 일방적으로 굳혀지면 결국은 속박의 거점이 된다. 그것을 빼앗는 무기가 의심에 들어 있다. 어떤 위대한 명제도 의문으로 여과되어 또 하나의 문제로 산출되는 한에서만 제값을 찾을 수 있다. 반면에 확고한 진리의 저울이 되어 그것을 기준으로 헤아려 모든 의문이 녹아내리면 폭력과 강요의 도구가 될 뿐이다. 신화화된 모든 이론적 문자의 부호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지만, 납자들은 그 달을 보려는 순간 그것마저 문질러 없애고 허상임을 일깨우는 수법을 즐겨 쓴다.
조사선이나 간화선의 아름다운 유산들도 반드시 의심의 필터에 걸러져서 재생해야 한다. 그 의심은 현실의 어디에 있는가? 자유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의식에 그것은 잠재되어 있다. 화두 참구의 정신을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그들 각자가 지닌 건전한 비판의 열망에 드넓게 트인 길을 열어준다. 이러한 예를 이웃 종교에서 찾아보면 기독교 개혁가 루터가 성경 해석의 자유를 모든 이에게 부여했던 취지와 통한다. 그가 면죄부를 팔아먹는 타락한 교회의 권력에 맞서 내세운 무기는 기독교 본래의 진리와 정의였다. 그러기 위하여 독일 민중에게 그 정신을 널리 유포하려면 대대로 공고하게 유지하는 수단이 요청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의 성직자들이 독점하고 있던 지적 자산을 세상의 공유재산으로 개방하는 작업이었다. 일부 사람만이 읽고 해설할 수 있도록 묶어두었던 라틴어 성경의 독일어 번역판 유포가 그것이다.
화두와 공안의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고, 그에 근거하여 다양한 해설을 허용하는 방안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공안을 풀 수 없도록 단단히 잠가 두고 싶어 하는 무리들은 마치 깨우친 경지를 말로 개방하면 망가지는 듯이 우려하지만, 그것은 어떤 고상함이나 신비에 따르는 결과도 아니고 오로지 무지와 착각의 소산일 뿐이다. 선문답이나 공안에 대한 번역과 풀이는 하나의 압축된 지식체계를 그 진실에 맞게 읽도록 하려는 학문적 시도로서 이 분야를 공부하는 학자들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과제에 속한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 훌쩍 넘어서 쉬운 한글로 푸는 일을 능사로 여기는 자들의 무지한 만용은 그보다 더 위험하다. 후손들의 방황을 조장하지 않으려면 어디까지나 원천의 진실에 부합하는 한에서 창안의 길로 나가야 한다.
누구라도 태고가 던진 말에서 한 조각이라도 진실을 얻었다고 여긴다면 그는 스스로 기만당할 것이다. 태고는 한 점의 실(實)도 남겨 두지 않고 철저하게 허(虛)를 타고 활용하는 전형적인 납자의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태고는 거시적인 방법을 일깨워준 스승이지, 어떤 내용물을 던져준 시혜자는 아니다.
무엇인가를 얻어 그것을 편리하게 휘두르는 바로 그때 그것에 철저하게 속박된다. “편리한 수단을 얻었을 때 그 수단의 함정에 빠진다”133)라는 말이 그 뜻이다. 자유롭게 된 그 순간 자유를 잃게 되고, 편리한 수단을 장악하고 활용하는 그때 그 수단에 묶인다. 우리가 태고의 수단에서도 자유로워야 하는 까닭이 거기 있다. 도대체 무엇이 함정과 속박으로 변질될까? 그것은 편리한 기회를 제공하는 듯하지만 권력이 쓴 가면의 일종이다. 태고선이 본래 권력과 무관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여 묶이면 그 사람에게 권력으로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스스로 부여한 규범과 본보기는 언제나 그렇게 부담스러운 권력으로 변질되는 법이다. 외부에서 가해오는 무자비한 권력의 횡포에는 반발심을 쉽게 일으키지만, 자신이 끌어들여 앉힌 그것에는 더욱 힘을 부여하여 자기최면 상태로 중독되는 경향이 있다. 참구법의 의심에서 우리는 잘못되거나 유연성을 상실한 사고와 가치를 뒤집어엎는 방법을 배울 뿐만 아니라, 자신 속에 군림하는 조각조각의 끈끈한 지식과 관념을 도려내는 예리한 칼날을 연마할 수 있다.
이렇게 가더라도 본디 구할 일이란 없고, | 恁麽行也本無求 |
이렇게 가지 않아도 이 또한 자유롭다네. | 不恁麽行亦自由 |
동서남북 그 어느 길이나 원만히 통하니, | 東西南北圓通路 |
매일 걸림 없이 움직이며 멋대로 오가리. | 日日騰騰任去留 |
(『太古語錄』: 689c11)
무엇인가 구하려고 떠나는 일도 없고, 머무른다고 그 자리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어느 편에서도 자유롭고 어디서도 달리 부족하여 구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머문 자리나 떠나는 걸음이나 모두 자유의 구현인 그 태고의 선경(禪境) 중심에는 바닷물 어디에나 녹아 있는 소금처럼 곳곳에 빈틈없이 ‘의심’이 스며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