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 문정왕후와 백곡처능의 호법 활동

조선 전기 왕실불교의 전개양상과 특징:

탁효정 1
Hyo-Jeong Tak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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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1Academy of Korean Studies

© Copyright 2019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Nov 12, 2018; Revised: Dec 05, 2018; Accepted: Dec 14, 2018

Published Online: Dec 31, 2018

국문초록

본고는 조선 전기 왕실불교의 특징을 여성들의 불교신앙을 중심으로 고찰한 연구이다. 조선 전기는 유교적 통치체제 확립을 원하는 유학자 관료들과 불교신앙을 유지하려 했던 왕실여성들의 갈등이 점점 더 심화된 시기이다. 왕들은 신료들과 함께 불교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축소시키는 각종 정책들을 마련하였지만, 왕실 내에서는 여성들의 불교신앙이 꾸준히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비빈들은 고려의 전통을 계승해 왕실의 복을 비는 사찰을 짓고, 경전을 간행하였다. 세종대부터 성종대까지 다수의 후궁들이 연달아 승려가 되었고, 궁을 사찰로 개조해 살아갔다. 특히 정치적 영향력이 큰 대비들은 남편과 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불교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본고에서는 조선 전기 왕실여성들의 불교신앙이 지닌 특징을 세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는 후궁들의 자발적인 출가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고, 둘째는 적극적인 신행과 불교옹호가 계속되었다는 점이며, 셋째는 조선 후기에 비해 구도적 성향이 매우 강했다는 점이다.

조선 전기 왕실여성들의 불교신앙은 상당히 적극적이면서도 자발적이었다. 이는 여성들의 권한이 조선 후기에 비해 훨씬 더 컸기 때문이고, 불교신앙의 수준 또한 높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왕실여성들의 불교신앙은 불교가 조선 후기까지 지속될 수 있는 중요한 자양분으로 역할하였다.

Abstract

This paper is a study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royal Buddhism of early Joseon Dynasty focusing on women's Buddhism. Early Joseon Dynasty is a time of conflict between Confucian bureaucrats who want to establish a Confucian ruling system and royal women who wanted to maintain Buddhism.

The kings, along with their scholars, prepared various policies to reduce the socio-economic basis of Buddhism, but the Buddhist beliefs of women continued in the royal family steadily. The Queens and concubines of this period inherited the Koryo tradition and built temples for the royal family, and published scriptures.

Many concubines from King Sejong to King Sungjong became monks successively and remodeled the palace into temples. In particular, the Great Queens with great political influence exerted an effort to protect Buddhism by influencing the husband and the son.

This article summarizes the characteristics of the Buddhist faith of the royal women of Early Joseon Dynasty in three ways. The first is that voluntary renunciation of the concubines was continued, the second was the active faith and the advocacy for Buddhism continued, and the third was that the ascetic tendency was stronger tha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Buddhist beliefs of the royal women in Early Joseon Dynasty were quite active and voluntary. This is because women's authority was much greater than in the late Joseon period, and the level of Buddhist faith was also high. The Buddhist faith of royal women in Early Joseon Dynasty served as an important nourishment for Buddhism to last until the late Joseon Dynasty.

Keywords: 조선; 불교; 왕실; 원당; 불사; 비구니
Keywords: Joseon Dynasty; Buddhism; Royal Family; Buddhist Royal Enshrine; Buddhist Service; Buddhist Nun (比丘尼)

Ⅰ. 머리말

조선은 숭유억불을 기치로 내걸고 건설된 나라이다. 조선건국을 주도한 신진 사대부 세력들은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고, 고려대까지 사회 이데올로기로 역할한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왕실 내의 불교신앙은 조선 초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간 지속되었다. 왕실의 폐쇄성은 불교가 지속될 수 있는 특수한 환경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권력과 경제력을 지닌 내명부 수장들의 깊은 신심은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에서 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패막으로 역할하였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유학자들과 불교신앙을 지속하고자 하는 왕실 간의 갈등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왕실의 불사와 왕실 의례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불교식 예제들은 조선 전기 내내 유학자 관료들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성종대 이후 사림들의 정계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왕실의 불교신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럼에도 왕실여성들은 자신들의 불교신앙이 유서깊은 전통이자 효심의 발로임을 강조하며 불교신앙을 고수했다. 이들 중 일부는 스스로 삭발염의를 하고 출가사문이 되었으며, 일부는 정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억불체제 하에 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호하였다. 또한, 다수의 여성들이 사재를 털어 절을 세우고, 경전을 유포해 조선불교의 토양분을 마련하였다.

조선 전기는 약 1,000여년간 한반도에서 뿌리내린 불교신앙과 새롭게 유입된 성리학의 예제가 충돌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다. 본고에서는 조선의 불교정책과 왕실의 불교신앙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왕실여성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불교신앙을 구현해 나갔는지를 살펴보겠다. 이를 통해 조선 전기 왕실여성들의 불교신앙이 지닌 특징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조선 전기 왕실불교의 전개양상

1. 조선 전기 불교정책의 흐름

조선의 건국 주도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에 기반한 국가 건설을 논의하였고, 이들은 고려 멸망의 원인을 불교에서 찾았다. 불교 비판의 초점은 두가지 측면에 맞추어졌다. 첫째는 불교가 내세를 강조해 현세에 소홀하게 만든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자기 수양에만 몰두한 나머지 가족과 나라에서 개인을 소외시킨다는 것이었다(마르티나 도이힐러, 2013: 146-148). 유학자 관료들은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불교를 조선 사회에서 뿌리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왕들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는 승려들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불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임금이 都堂에 명하였다.

“佛氏의 도는 마땅히 淸淨寡慾으로 宗旨를 삼아야 할 터인데, 오늘날 各寺의 住持들이 힘써 산업을 경영하고 女色까지 간범하여 뻔뻔스럽게 부끄러운 것을 알지 못하고, 죽은 뒤에는 그 제자란 자들이 寺社와 노비를 法孫이 서로 전하는 것이라 하여 서로 소송하는 일까지 있다. 내가 潛邸 때부터 이 폐습을 고치기를 생각하였다. 지금 長慶寺 중 定宜가 또 법손이라 일컫고 경상도의 慈化寺를 청구하니, 지금 국초를 당하여 이 폐단을 고쳐야 하겠다. 서울 안에서는 憲府가 외방에서는 監司가 寺社의 間閣․노비․田地와 대소 僧人․법손 노비의 수를 조사하여 아뢰라.”1)

이처럼 태조는 조선 건국 이전부터 불교계의 부패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불교의 종교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교에 대한 깊은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태조의 불교정책 방향은 전조(前朝)의 불교를 계승하고 보호함을 원칙으로 삼되, 현실적인 폐단을 제거해 정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이봉춘, 2015: 150). 이 때문에 태조대의 억불정책은 주로 조정에서의 논의로만 그쳤을 뿐 구체적인 제재가 진행되지는 않았다.

불교계에 대한 강력한 제재는 태종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태종의 억불정책은 주로 경제적인 부분에 집중되었다. 태종은 불교계가 소유한 사원전의 대부분을 몰수하고, 이를 국고로 환속시켰다. 이때 11개의 종파는 7개로 통폐합되었고, 폐지된 종단의 전답과 노비들은 모두 국고로 환수되었다.

이후 세종은 태종의 불교정책을 계승해, 7개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합하고 양종에 각 18개씩 총 36개 사찰을 제외한 나머지 사찰의 폐사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사찰에 속한 노비들을 모조리 혁거 속공하는 한편 폐사된 사찰의 전지는 국고로 환속시켰다. 또한 국가에서 불교계를 관리하던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대신 한양의 흥천사와 흥덕사를 각각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로 삼았다.2) 세종은 1433년(세종 15) 태종이 문소전 불당까지 폐지시켰다.

태종대에 이어 세종초까지 진행된 억불정책으로 조선 불교계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전체 사원전의 10분의 9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태종은 자신의 부왕과 모후를 위해 사찰을 건립하고, 궁 내에서 불사를 벌이곤 했다. 세종 또한 재위 초에는 스스로 불교를 싫어하는 왕임을 자처했지만 재위 중반 이후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말년에는 궁 안에 내불당을 건립하고, 손수 찬불가를 지을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다.

세조대에는 취약한 왕위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노골적인 불교옹호정책이 펼쳐졌다. 세조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불교적 상서(祥瑞)가 보고되었는데, 실록에 실린 이적 관련 기사만 약 40여건이다. 사찰에 봉안된 사리가 분신하고, 우화(雨花)와 감로(甘露)가 내렸으며, 서기(瑞氣)와 異香(異香)이 빛을 내었다는 소식이 연달아 보고되었고, 세조가 방문하는 사찰에서는 석가모니와 관세음보살, 문수보살이 현현하는 이적들이 발생했다. 세조는 상서가 발생한 전국 각지 사찰에 왕실 원당을 세우고, 도성 한복판에 원각사를 세우는 등 불교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들을 전개하였다. 또한, 간경도감을 설치해 한글과 한문으로 된 경전들을 유포시켰다.

하지만 성종대 사림의 정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불교정책은 다시 억불로 전환되었다. 성리학적 소양이 한층 더 높아진 사림들은 왕실에 남아있는 불교의례를 철폐할 것을 요청했고, 도첩제 폐지를 통해 승려가 되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하였다. 그 결과, 성종대에는 왕실의 상장례 의식에 잔존해 있던 불교식 의례들이 연달아 폐지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중종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1516년(중종 11) 『경국대전』에는 남아 있었지만 사실상 사문화된 도승법(度僧法)이 삭제되었고, 승과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또한, 왕실의 기신재와 수륙사도 폐지되었다. 성종대부터 사림들의 주도하에 논의된 억불정책들이 중종대에 이르러 완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명종초 문정왕후의 섭정기간을 전후해 지난 100여 년간에 걸쳐 유학자 관료들이 폐지시킨 각종 제도들이 되살아났다. 문정왕후는 불교중흥을 위해 허응당 보우를 등용해 선교양종을 복설하고, 승과를 부활시켰으며, 도승법을 재실시하였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사망과 거의 동시에 불교중흥책들은 모조리 파기되고 말았다.

2. 왕실의 불교신앙과 불사

조선 전기의 불교정책은 고려 불교계가 지녔던 경제적 토대를 몰수하고, 종파와 사찰의 수를 줄이는 동시에 출가사문의 길을 봉쇄하는 등 억불정책으로 일관되었다. 왕실 상장례에 남아있던 불교식 의례들도 사림들의 정계 진출 이후 대부분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왕실 내의 불교신앙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 전기 왕실에서 불교가 계속 신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몇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왕조개창자인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상당수의 왕들이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였다는 점이다. 불교신자가 아닌 왕들도 모후나 비빈들의 영향으로 불교에 매우 친숙한 상황이었다. 태조는 잠저 시절부터 불교계의 폐단을 시정하겠다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불교 자체를 부정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왕이 되기 전부터 전국 각지에 왕조개창 기도처를 세우고 각종 불사를 일으켰으며,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개성 관음굴 등을 찾아다니며 신행생활을 이어나갔다. 또한 고려의 국사․왕사 제도를 계승해 무학(無學)을 왕사로,3) 조구(祖丘)를 국사로 임명했다.4) 퇴위 후에는 회암사 내에 행궁을 짓고 수도생활을 하였으며, 말년에 머물던 연희방의 궁궐은 흥덕사라는 절로 개조해 요절한 두 아들 방번과 방석, 사위 이제의 원당으로 삼았다.5)

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종과 세종, 세조도 불교를 깊이 신행하였다. 세종은 재위 초까지만 해도 스스로 불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유교적 성군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재위 중반 이후 불경을 즐겨 읽기 시작했고, 1448년(세종 30)에는 내불당을 건립할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다. 세종의 내불당 건립은 조정 대소신료들은 물론 성균관 유생들과 사부학당 학생에 이르기까지 유학자들은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세종은 세자에게 선위를 하겠다는 강수까지 두면서 내불당 건립을 강행하였다.6)

세조는 왕자시절 『석보상절』을 펴내고 모후 소헌왕후를 위해 용문사를 중창할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세조의 대규모 불사는 계속 되었는데, 금강산의 유점사, 장안사, 건봉사, 속리산 법주사, 양양 낙산사, 양평 상원사 등의 명산대찰을 왕실원당으로 지정하였고,7) 1465년(세조 11)에는 도성 내에 원각사를 창건하였다.8) 세조가 불사를 열심히 한 것은 개인적인 신앙의 발로이기도 하였겠지만, 유교의 명분론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정통성의 한계를 불교중흥책을 통해 무마시키기 위한 정치적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하였다.

둘째 조선 전기까지 유교식 의례, 특히 성리학에 기반한 상장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불교식 의례를 대체할 만한 예제가 완비되지 않았던 점이다. 태종이 창덕궁 내에 불당을 지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태종은 창덕궁 내에 신의왕후의 진전인 인소전(후에 문소전으로 개칭)을 건립한 후 옛 제도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부속 불당을 설치하였다. 개국초 태조의 명을 받아 함흥의 4대조 능을 정비할 당시 각 능에 불교식 재궁을 설치한 것도 태종이었다.9)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신의왕후의 제릉 능침사인 연경사를 성대하게 중창하였고, 태조의 건원릉에는 개경사를 창건했다. 이는 태종의 개인적인 신앙심의 표현이 아니라 조선 초까지 아직 불교식 예제를 대체할 만한 제도적 완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태종은 인소전의 부속불당을 지으면서 “내가 처음에는 진전(眞殿)만 세워두고자 하였는데, 김첨(金瞻)이 말하기를, ‘불당(佛堂)이 있어야 마땅하다.’하니, 아울러 짓게 하는 것이 가하다”며 불당의 건설을 명하였다.10)

유교식 의례가 정비된 이후에도 왕실에서는 원당을 짓거나 천도재를 지내는 등 불교를 통한 내세추복의례를 이어나갔다. 또한 국상의례에서 7․7재가 폐지된 이후에도 왕실 비빈들은 선왕이나 요절한 왕자들을 위한 천도재를 계속 설행하였다(지두환, 1996). 이 때문에 왕실에서 불사를 담당할 사찰이 필요했다. 조선시대 내내 왕실원당이 지어졌던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다(탁효정, 2012).

세번째는 조선 초의 왕비와 후궁 등 대부분의 비빈들이 고려의 귀족 집안 출신이었고, 이들의 불교신앙이 아들과 딸, 며느리에게로 계속 전승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비들이 사찰을 창건하는 등 불사를 벌였고, 태종대부터 성종대까지 잇따라 선왕의 후궁들이 집단 출가를 했다는 사실로 볼 때 조선 전기 대부분의 비빈층이 숭불 성향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의 폐쇄적 환경과 여성들의 독실한 불교신앙은 불교가 왕실 내에서 조선시대 내내 지속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Ⅲ. 왕실의 대표적인 호불 여성들

1. 불법의 수호자를 자처한 왕비

조선의 첫 번째 왕비 신덕왕후부터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왕비들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왕비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신앙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들이 사찰에 시주한 내역이나 불사에 참여한 기록들은 사지(寺誌)나 불화(佛畫)의 화기(畫記) 등을 통해 전해진다. 조선 후기 왕비들의 불사가 주로 사찰 내에 기도처를 마련하거나 절에 물품을 시주하는 등의 소극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데 반해,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왕비들의 불사는 사찰 창건이나 불경 간행 등의 대규모 불사로 진행되었다. 또한 일부는 직접 불교정책에 관여할 정도로 적극적인 신앙행위를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불법 수호에 앞장선 이로는 정희왕후, 소혜왕후, 문정왕후를 꼽을 수 있다.

1) 세조비 정희왕후

정희왕후가 주도적으로 불사를 벌인 기록은 주로 대비와 대왕대비 시절에 나타난다. 왕비로 있을 당시에는 남편 세조가 호불군주로서 불사에 앞장섰기 때문에 정희왕후가 불교를 옹호하거나 불사를 주도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이라 하겠다.

정희왕후의 불교 관련 업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능침사의 부활이다. 정희왕후는 1469년(예종 1) 광릉의 능침사인 봉선사를 창건한 데 이어 1472년(성종 3) 英陵의 능침사인 신륵사를 중수하였다. 조선 초에 모든 왕릉마다 설치되었던 능침사는 태종의 유지로 인해 철폐되었다. 태종은 신의왕후의 제릉에 연경사를 중창하고, 태조의 건원릉에 개경사를 창건하였지만, 원경왕후의 사망 후 헌릉에는 절을 세우지 말라고 세종에게 명하였다. 이에 따라 헌릉과 영릉에는 능침사가 설치되지 않았고, 세종대에 정비된 산릉제도에도 능침사가 배제되었다.

하지만 세조는 세종의 능 곁에 보은사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료들을 보내 보은사의 기지를 정하고 지도까지 만들었지만, 절의 공사가 착수되기도 전에 큰 장마가 들어 재목이 모두 떠내려가고 말았다. 곧이어 조정에서는 영릉의 풍수가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의 흉지라는 견해가 다시 제기되면서 영릉 천릉 논의가 전개되었다. 이듬해 세조가 붕어하면서 영릉 천릉 및 보은사 창건 논의는 유야무야 되는 듯했다.

정희왕후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영릉 이장을 진행시키는 한편, 천릉이 끝난 후에는 여주 신륵사를 영릉의 능침사로 삼았다. 이에 앞서 1468년(예종 즉위년) 광릉의 산릉공사가 끝난 후 봉선사를 창건하고 능침사로 삼았다.

또한 정희왕후는 간경도감의 경전간행사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간경도감에서는 유교 경서가 간혹 간행되기도 하였으나, 거의 대부분 불교 관련 서적이 발행되었다. 이 때문에 세조 사후 간경도감의 철폐론이 계속 제기되었고, 결국 1471년(성종 2) 간경도감은 혁파되었다. 이후 정희왕후는 내수사의 자금으로 불경 간행 사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현전하는 조선 전기 왕실본 불교 전적은 총 56종인데, 이 가운데 성종대가 19종(33.92%)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이어 세조대 17종(30.35%), 세종대 11종(19.64%), 연산군대 4종(7.14%), 태종대 3종 (5.35%), 문종대와 예종대의 전적이 각 1종씩 전해진다(곽동화, 2018: 132). 성종 2년에 간경도감이 혁파되었음에도 불경간행사업은 여전히 성종 연간에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성종대에 많은 수의 경전이 간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정희왕후와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비 안순왕후의 경제적 지원과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2) 덕종비 소혜왕후

소혜왕후는 수렴청정을 맡지는 않았지만, 성종의 재위 기간 내내 매우 큰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잘산군이 예종의 둘째아들 제안대군이나 의경세자의 큰아들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할머니 정희왕후와 모후인 소혜왕후의 정치력이 크게 작용했다. 이 때문에 성종은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정희왕후와 소혜왕후의 의견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소혜왕후는 조선의 왕비들 중에서도 가장 학문적 수준이 높았으며, 한글과 한문에 모두 능통했다. 세조대에 언해본 능엄경을 발간할 당시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번역 및 간행에 참여하였는데,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소혜왕후(당시 정빈 한씨)가 참여해 창준(唱準)11)을 담당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12)

소혜왕후는 성종이 왕위에 오른 직후 남편 덕종의 능침사인 정인사를 조선 최고의 가람으로 중수하였다. 정희왕후 사후에는 정희왕후의 유지를 받들어 해인사의 중창을 완수했다. 또한, 간경도감이 철폐되자, 내탕금은 물론 사비까지 털어 경전간행사업을 이어나갔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왕실본 불교전적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경전을 펴낸 발원자는 소혜왕후이다. 소혜왕후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유지를 이어 간경도감 혁파 이후에도 왕실의 재원을 출연해 불교경전들을 간행해 나갔다. 소혜왕후의 발원 및 참여로 간행된 불서는 총 18종이 전해지며, 한문본 12종과 언해본 9종이 현전하고 있다(기윤혜, 2011: 84). 소혜왕후는 불교경전이나 불교의식집 등 다양한 불서를 간행하였고, 한 번에 수백여 권의 서책을 인출해 전국 사찰에 유포시켰다.

소혜왕후의 불교 옹호는 사찰 창건이나 경전 간행에 그치지 않고, 직접 불교 정책에 관여하는 데까지 미쳤다. 소혜왕후는 1484년(성종 15) 왕실여성들의 기도처인 안암사(安巖寺)의 중창을 진행하였는데, 이를 반대하는 상소가 실록에만 17건이 실려 있을 정도로 조정 신료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또한, 신료들이 대비들의 불경 간행까지 함께 비판하자, 소혜왕후는 다음과 같은 한글 교지를 내렸다.

“安巖寺의 옛 터는 법으로 重創을 허락함이 마땅하며, 이 절은 다른 옛터에 비할 것이 아니다. 塔宇도 아직 그대로 있고 僧人도 더러는 거주하는데, 부근의 人民이 침입하여 빼앗아 경작한 까닭으로 貴人이 주상을 위하여 중창하고자 한 것이다. 또 경성 안에는 僧尼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는 까닭으로 여기에서 거처하게 하고자 하였으며, 정희왕후께서 壽康宮에서 철거한 材木을 내려 주시었다. … 중략 … 佛法은 漢․唐 이후로부터 대대로 금할 수 없었던 까닭으로 중에게 도첩을 주고 절을 창건하는 법을 세웠는데, 이제 이 절만을 허락하지 않으면 이는 先王의 萬世의 법을 하루아침에 버리는 것이다.

또 불경을 베끼는 일은 사람의 자식이 되어 哀戚의 情이 무궁한 까닭으로 뜻에는 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하려고 하였으나, 邦憲이 두려워서 우리 두 사람이 스스로 마련하여 이룬 것이다. 畫員이 쓰고 베끼는 일은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래서 啓請한 것이며, 外方의 사람들도 자기에게 없는 물건은 서로 懋遷하여 쓴다. 그런데 지금 화원과 書寫人을 啓請한 일을 그르다고 하는 데 이르렀으니, 인정이 크게 薄하고 惡하므로 통탄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다. 이와 같이 追薦하는 일도 할 수 없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더욱 아프고 상한다.”13)

위의 교지에 따르면, 소혜왕후는 안암사를 중창하는 데에는 돌아가신 정희왕후의 뜻이 담겨져 있으며, 이 절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선왕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성종을 압박하였다. 즉, 이 절을 반대하는 것은 조부모의 뜻을 반대하는 불효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불경을 간행하는 것도 사람의 자식된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고, 간경도감을 폐지한 뒤 두 대비(인수․인혜대비)가 출연한 자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성종은 대비의 언문 교지를 대간들에게 보여주며 대간들의 거듭된 요구를 묵살했다.

1492년(성종 23) 조정에서 도첩제 폐지안이 가결되자, 소혜왕후는 또다시 한글 교지를 내려 이를 저지시켰다.

"우리들은 富貴를 편히 누리면서 국가의 公事에 참여하지 못하나, 다만 〈백성이〉 중이 되는 것을 금하는 법이 크게 엄중하여, 중이 모두 도망해 흩어지고 祖宗의 願堂을 수호할 수 없어 도적이 두렵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先王의 뜻을 잘 이어받드는 것이 바로 帝王의 아름다운 덕인데, 별다른 큰 폐단도 없으면서 선왕의 원하는 뜻을 무너뜨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무릇 새로운 법을 행하는 데에는 반드시 기한을 세워서 알지 못함이 없게 한 뒤에 행할 것입니다. 佛法을 행한 것은 오늘날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니 漢․唐 이후로 유교와 불교가 아울러 행하였고 度僧의 법이 또 『大典』에 실렸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개혁하니 비록 법에 의하여 머리를 깎은 자일지라도 또한 으레 度牒 없이 役을 피하는 자로 여겨 當差하고, 寺主․師僧․維那에게 아울러 役을 정하니, 이는 백성을 속이는 것입니다. … 중략 … 도첩이 있고 없음을 물론하고 그 가진 물건을 겁탈하고 아울러 의복에도 미칠 것이니, 늙은 중은 오로지 제자에 의지하여 양식을 빌어서 供饋하는데, 이제 만약 이같이 하면 반드시 모두 굶주려서 죽을 것입니다. 어찌 和氣를 손상시키지 아니하겠습니까?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려서 곤충과 초목으로 하여금 각각 그 삶을 얻게 하는데, 僧人으로 하여금 곤궁하여 원망을 품게 하면 정치의 체모에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나라 땅은 산과 내가 반이 되는데 깊은 산중에는 중이 있기 때문에 도적이 의지하지 못합니다. 만약 중의 무리가 없어 산골짜기가 비게 되어 도적이 근거를 잡으면 장차 중으로 하여금 절에 살게 하는 법을 다시 세울 것입니다.”14)

소혜왕후의 주장은 ① 불교는 선왕의 유제(遺制)로 대전에 실려 있고, ② 역대 제왕이 불교를 배척하고 싶어도 끊지 못한 것은 인심이 동요할 것을 걱정해서이며, ③ 승려에 대한 탄압으로 그들이 굶어죽게 된다면 이는 화기(和氣)를 상하는 것인데다, ④ 승려가 산중에 살기 때문에 도적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모후가 조목조목 논리적인 주장을 전개하자 성종은 결국 도첩제 철폐안을 유보시켰고, 성종대 도첩제 철폐 논의는 유야무야되었다.

이처럼 소혜왕후는 왕실원당 중창이나 도첩제와 같은 주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조정에 직접 교지까지 내려 성종대 사림들의 강력한 억불정책들을 저지하였다.

3) 중종비 문정왕후

문정왕후 윤씨는 조선의 역대 왕비 중에서도 가장 불사를 많이 한 왕비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불사들은 대부분 대비 시절에 이루어졌다.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맡았다. 이 시기에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를 등용해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한 작업들을 진행시켰다. 선교양종의 부활, 양종 도회소(兩宗 都會所)의 설치, 승과의 복설, 도첩제의 부활, 정업원의 복설 등 지난 100여년간 조선의 유학자 관료들이 왕실과의 투쟁 끝에 이루어낸 억불책들이 문정왕후의 섭정 기간 동안에 상당 부분 복구되었다.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책 중에서도 흥미로운 대목은 왕후의 섭정 기간 동안 내원당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내원당은 원래 궁 안에 있는 불당을 지칭하는 용어였는데, 명종대의 내원당 수는 1550년(명종 5)에 70여개에서15) 4년 뒤에는 300∼400여 개로까지 늘어났다.16) 내원당으로 지정된 사찰은 왕실의 복을 비는 신성한 공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었고, 지방 토호나 유생들의 침탈을 피할 수 있었다. 문정왕후가 수백여 곳의 사찰을 내원당으로 삼은 것은 조선 불교계롤 왕실의 보호하에 두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비록 문정왕후 사후에 그의 불교중흥책은 모두 폐기되었지만, 이 시기 조선불교계가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불화들 가운데 최고의 수작들이 16세기 왕실발원 불화라 꼽힐 정도로 문화적으로는 ‘조선불교의 르네상스’가 이루어졌으며, 당시 승과를 통해 배출된 서산휴정, 사명유정 등의 승려들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불교계의 주요 법통으로 자리매김하였다.

2. 불문(佛門)으로 출가한 비빈

조선 전기에는 다수의 왕실여성들이 출가를 했다. 태조의 며느리 소도군부인 심씨, 세종의 며느리 수춘군부인 정씨, 단종비 정순왕후, 연산군의 후궁 숙의 곽씨 등이 정업원이라는 왕실 비구니사찰을 통해 출가를 했다. 정업원을 통해 출가를 한 왕실여성들의 공통점은 조선 전기에 빈번했던 정치적 사건에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연루되었다는 점이다. 역적의 부인 혹은 역적의 며느리가 된 이들은 내명부의 품계를 박탈당했고, 관비가 되거나 사사될 상황에 놓여있었다. 1․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등 조선 전기에 빈번하게 발생한 정쟁들은 다수의 여성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실록에 등장하는 8명의 정업원 주지 가운데 비구니 해민과 유자환 부인 윤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몰락한 왕족의 부인이거나 며느리였다. 이들은 정업원의 승려가 됨으로써 정치적 보복을 피할 수 있었다(탁효정, 2015).

그런데 조선 전기에 정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수의 왕실여성들도 승려가 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태종의 후궁들로부터 성종의 후궁들에 이르기까지 선왕의 붕어 직후 후궁들이 연이어 집단 출가를 한 것이다. 가장 먼저 출가의 포문을 연 것은 태종의 후궁들이었다.

懿嬪 權氏와 愼寧宮主 辛氏가 임금에게 계하지 아니하고,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후궁들이 서로 경쟁하여 머리를 깎고 염불하는 기구를 준비하여, 아침 저녁으로 불법을 행하였는데, 임금이 금하여도 되지 아니하였다.17)

위의 내용은 태종이 붕어한 지 열흘 뒤의 실록 기사로,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정신료들이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세종까지 만류했으나 태종의 후궁들은 끝끝내 승려로 살아갔다. 후궁들의 집단 출가는 세종의 붕어 직후에도 또다시 발생하였다.

大行王이 薨逝하던 저녁에 후궁으로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된 사람이 대개 10여 명이나 되었다. 각궁의 자수 잘하는 사람을 內殿에 모아서 부처를 수놓게 하고, 또 밖에서 工匠을 모아서 불상을 만들게 하고, 중의 무리로 하여금 그 일을 主幹하게 하였다.18)

위의 기사에서는 대행왕의 후궁으로 여승이 된 이가 10여 명이라고 하였지만, 세종으로부터 후궁 첩지를 받은 이는 9명에 불과했다(이미선, 2012: 69-74). 그러므로 10여 명의 출가자 중에는 상궁이나 일반 궁녀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후궁들의 출가는 문종의 붕어 직후에도 이어졌다.

집현전 부제학 辛碩祖 등이 대행왕의 후궁들이 머리를 깎았다는 것을 듣고 의논하기를,

"신 등이 일찍이 대행왕의 하교를 친히 들었는데, 말씀하기를, ‘세종의 후궁이 여승이 된 것은 부득이한 사세에 몰렸던 것이다. 이 뒤로는 반드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으니, 지금 후궁이 여승이 되는 것은 실로 대행왕의 뜻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許詡에게 말하여 皇甫仁․金宗瑞에게 고함으로써 그치게 하기를 청하였다.19)

이처럼 문종의 후궁들이 삭발염의를 한 데 이어, 단종의 사후에는 왕비와 후궁, 나인들이 함께 머리를 깎았으며,20) 세조의 유일한 후궁인 근빈박씨도 승려가 되었다.21) 또한, 성종의 후궁들도 정업원 여승들을 통해 비구니가 되었다.22)

내명부의 직첩을 가진 채 승려가 된 후궁들은 출가 이후에도 궁 안에서 살아갔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궁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선왕의 붕어 후 후궁들은 자수궁, 인수궁, 수성궁 등에서 함께 기거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거처를 사찰로 개조해서 살아갔다. 궁 안에 불당과 나한전 등을 만들고 종루까지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태종의 후궁들로부터 성종의 후궁들까지 선왕의 붕어 직후 후궁들의 출가는 계속 이어졌다. 후궁들의 출가 사실이 알려질 때마다 조정에서는 큰 논란이 일어났고, 신료들은 왕에게 이들의 출가를 막으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 요구는 모조리 묵살되었다.

내명부 비빈들의 출가는 연산군대 이후 중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들이 출가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이들의 출가를 도운 정업원 비구니들을 처벌하였다. 이후 내명부 직첩을 지닌 후궁이 궁 안에서 출가를 하는 전통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왕실 비구니원의 전통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고, 1661년(현종 2) 인수원과 자수원이 철폐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도성 내 사찰의 창건은 물론 승려들의 출입조차 국법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궁궐 인근에 비구니사찰이 200여 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왕실 비빈들의 경제적 지원과 정치적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 불사에 앞장선 왕실 며느리

조선 전기에는 대군의 부인들이 대대적인 불사를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불사 규모는 매우 커서 조정에까지 보고가 될 정도였다. 특히 젊어 청상과부가 된 왕실의 며느리들은 남편의 재사(齋寺)를 크게 창건해 조정에서 지탄을 받곤 했다. 대표적으로 광평대군부인, 영응대군부인, 월산대군부인을 꼽을 수 있다.

광평대군부인 신씨는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의 부인으로, 남편이 스무살에 요절하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신씨가 조정에서 지탄을 받은 것은 광평대군방 부근에 있던 토당사에 불사를 일으킨데 이어23) 광평대군의 묘사(墓寺)인 견성암을 상당한 규모의 대찰로 조성했기 때문이었다. 『성종실록』에는 광평대군 부인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등장한다.

司憲府大司憲 韓致亨 등이 上疏하기를,

“지난번에 廣平大君 李璵가 죽자, 그 夫人 申氏가 머리를 깍았고, 그 아들 永順君 李溥가 죽자 그 부인 역시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신 등이 일찍이 이를 그윽이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근래에 광평대군의 부인이 그 養母 王氏와 광평대군 父子를 위하여 각각 佛舍를 세우고 影堂이라 일컫고, 그 전지와 노비의 半을 施納하니, 전지가 모두 70여 結이고 노비가 모두 9백 30여 口였으나, 병술년(1466년) 이후에 출생한 자를 모두 속하게 하였으므로, 지금 이를 계산하면 이미 1천여 口가 넘습니다. 지금 南川君은 永順君의 맏아들로서 선조의 제사를 주장할 수 있으니, 영순군이며 광평대군이며 王氏의 넋이 南川君의 廟祀에서 바야흐로 또한 먹는데, 어찌 先王의 제도를 외면하고 따로 僧舍에 나아가서 影堂을 세워 제사를 더럽힐 수가 있겠습니까? 申氏가 전지와 노비를 施納할 적에 김수온이 그 일을 敍述하고 그 文券을 써주고서 그 노비를 받았으니, 贈與하는 契券의 사이에서 그 이익을 요행으로 여기고 달갑게 이를 위하여 일을 해준 것은 곧 市井에서 謀利하는 자들이 하는 짓인데, 조금 지식이 있다고 하는 자들도 또한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24)

위의 기사에 따르면, 광평대군 부인 신씨는 광평대군과 영순군이 세상을 떠나자 이들의 묘소 인근에 절을 세우고, 왕실에서 내린 토지와 노비를 그 절에 시납했다. 당시 광평대군이 희사한 토지는 광평대군방에 속한 토지 가운데 절반에 해당되는 70여 결에 달했으며, 또한 이 절에 소속된 노비는 1,000여 구에 달했다. 이에 조정의 대신들은 절에 토지와 노비를 시납한 광평대군 부인을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위의 기사에 등장하는 김수온의 문건은 『식우집(拭疣集)』에 실린 「견성암영응기(見性庵靈應記)」, 「견성암법회기(見性庵法會記)」, 「견성암안거조사예참기(見性庵安居祖師禮懺記)」 등으로, 이를 통해 그 절이 견성암임을 확인할 수 있다.25) 광평대군부인이 중창할 당시 견성암으로 불리던 이 절은 후에 견성사로 개칭되었다. 1494년(연산군 즉위년) 성종의 능이 광평대군묘에 들어서면서 대군의 묘는 광수산 자락(오늘날의 서울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전되었다. 견성사는 선릉 조성 이후에도 한동안 능역 안에 위치해 있다가, 1498년(연산군 4) 조정 신료들의 폐사 요청이 잇따라 능역 밖으로 옮겨 짓게 되었는데, 그 절이 바로 오늘날의 봉은사이다(탁효정, 2013).

광평대군부인은 출가한 이후에도 특정 사찰에 들어가지 않고, 토당사 인근에 있던 부인의 집에서 기거하였다. 신씨는 토당사를 자주 찾아다니며 불사를 벌였는데, 이 또한 조정에서는 논란이 되었다.26) 『경국대전』에 기재된 부인상사금지법(婦人上寺禁止法)을 어겼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영응대군부인 송씨 또한 사찰을 자주 들렀다는 이유로 실록에 자주 등장한 인물이다. 여기에다 영응대군부인은 절의 주지와 사통한다는 추문까지 실록에 실렸다.

김일손의 공초한 것을 홍사호 등이 서계하기를,

“사초에 ‘중 學祖가 능히 술법으로 宮掖을 움직인다’ 한 것은, 대개 海印寺는 본시 差定된 住持인데 학조가 內旨를 칭탁하고 그 권속으로써 노상 持音을 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 ‘大家와 상통한다’ 한 것은, 학조가 광평대군․영응대군의 田民을 많이 얻었기 때문이고, 이른바 ‘영응대군부인 송씨가 窘長寺에 올라가 法을 듣다가 侍婢가 잠이 깊이 들면 학조와 사통을 했다’는 것은 박경에게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고 하였다.27)

위의 기사에 등장하는 학조는 세조가 왕사로 추앙했던 인물로, 당대 최고의 학승으로 일컬어지던 승려였다. 왕실에서 주최하는 법회나 대군 부인들이 남편의 원당에서 설행하는 법석에 자주 초청되었다. 또한, 금강산 유점사와 가야산 해인사 등 왕실에서 특별히 중요 사찰을 중창할 때마다 화주(化主)로 임명되어 중창불사를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사림들에게 타도대상으로 꼽혔던 인물이었다. 학조와 관련된 추문은 광평대군 부인과 그 며느리에까지 미쳤다.

전에 광평대군의 아내 申氏가 죽은 남편의 재를 올린다는 구실로 여러 번 학조를 청하여 출입이 절도가 없었고, 광평대군의 아들 永順君이 또한 일찍 죽었는데, 그 아내가 홀로 살면서 姑婦가 다투어 의복을 지어다 주니 사람들이 더러 의심하였다.28)

이처럼 성종~연산군대의 실록에는 왕실과 밀접한 승려와 불사에 열심인 왕실여성들을 한꺼번에 엮어 오명을 씌우려는 기사나 사초들이 자주 등장한다.

월산대군부인 박씨 또한 조정에서 자주 논란이 되었던 인물이다. 박씨는 월산대군 요절한 뒤 남편의 묘 근처에 큰 절을 세웠는데, 이것이 조정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다.

“월산대군의 부인이 興福寺에서 法筵을 베풀었는데, 羅幡․寶蓋가 눈부시기가 해와 달과 같았으며, 梵唄의 소리가 바위와 골짜기를 뒤흔들었습니다. 都城의 士族의 부녀자들이 파도처럼 몰리고 물고기 떼처럼 모여들어서 산과 들판에 벌려 서고 잇달았으며, 불공을 드리는 施僧도 오히려 사족의 부녀자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유숙하면서 설법을 들었으니, 朝野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신 등은 이를 듣고서 분격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부녀자가 절에 올라가는 것을 금지한 것이 법령에 나타나 있는데, 지금 대군의 부인이기 때문에 추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이 貴近에서 시작되는 셈이니, 장차 어떻게 사람들을 금지시키겠습니까? (중략) 청컨대 빨리 推鞫하도록 명령하소서."라고 하였다.”29)

위의 기사에 등장하는 흥복사는 월산대군부인이 남편의 묘 근처에 세운 절이었다. 흥복사는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조정 신료들이 수차례 공사 중단을 요청했던 절이었다. 하지만 성종은 자신의 친형을 위해 절을 세우는 것에 대해 차마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러자 조정 신료들은 월산대군부인이 크게 법회를 개최한 것을 문제삼으며, 법석을 금하는 법과 사대부 여성들이 절에 올라가면 안된다는 법을 모두 어겼으니 추국과 처벌을 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조선 전기 왕실 며느리들의 불사에 대한 처벌 요청이나 승려와의 추문은 주로 성종~연산군대에 집중되었다. 이는 사림들의 삼사(三司) 장악과 맞물려 있다. 성종이 훈구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삼사에 집중 등용했던 사림들은 왕에게 왕실 며느리들의 사찰 출입 금지를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이들과 관련된 저자거리의 추문을 실록에 고스란히 실었다.

이러한 유학자들의 여성통제 시스템이 점차 강화되면서 왕실여성들의 신앙행위는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였고, 후대로 갈수록 왕실의 불사도 은밀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Ⅳ. 조선 전기 왕실불교의 특징

1. 후궁들의 자발적 출가

조선 전기에 다수의 왕실여성들이 출가를 하였던 사실을 앞장에서 살펴보았다. 태조의 딸 경순공주, 소도군 부인 심씨, 단종비 정순왕후, 수춘군 부인 정씨 등 역적의 가족으로 몰린 왕실여성들은 물론 내명부에 소속된 선왕의 후궁들도 연이어 삭발염의를 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왕실여성의 출가는 신라와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고대부터 내려온 유습이었다. 그중에는 자발적으로 출가를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여성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출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 나타나는 왕실 여성들의 출가는 국왕과 대소신료들의 극구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후궁들의 출가 사실이 알려질 때마다 조정신료들은 왕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며 “온 나라 신민들이 전하의 유신(維新)의 정치를 우러러 바라보고 있으니, 비하건대 해와 달이 중천에 떠오름과 같으니, 그 시초부터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며 후궁들의 출가를 저지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왕들은 난색을 표하며 “부왕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대들의 말을 따를 수가 없다”고 거부하였다.

왕이 명을 내려도 선왕의 후궁들은 이를 묵살했다. 1452년(단종 즉위년) 의창군 이강이 단종에게 자신의 어미인 신빈 김씨로 하여금 머리를 기르게 하기를 청하였다. 단종은 이 문제를 의정부에서 의논하도록 하였고, 의정부 대신들은 “무릇 부녀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는 것은 몸을 지키고 정절(貞節)을 온전히 하려고 함이지만, 비빈(妃嬪)은 이와 다르니, 마땅히 그 청에 따라야 한다.”고 결론을 내었다. 이에 단종이 대신들의 의견이라는 이유를 대며 신빈에게 환속을 요청했지만 신빈은 왕명을 거부하고 계속 승려로 지냈다.30)

이처럼 조선 전기 왕실여성들의 출가는 왕과 조정신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자발적․주도적으로 승려가 되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조선 전기 왕실 내의 불교신앙이 매우 돈독했으며, 왕실 여성들의 구도 의지가 매우 강했음을 보여주는 시대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 적극적인 신행과 불교 옹호

조선 전기 실록에 등장하는 왕실여성들의 신행 생활은 조선 후기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적극적인 면모를 보인다. 『경국대전』에 부인상사금지 및 사찰 창건 금지 조항이 기재된 이후에도 왕실여성들은 공공연히 절을 세우고, 사찰에서 대대적인 법석을 열었다.

왕실여성들이 이처럼 적극적인 신행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전기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후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족보 상에는 남녀 상관없이 아들 딸이 나이순으로 기재되고, 외손까지 기재되었으며, 양자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다(이남희, 2011). 또한 자녀균분상속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이 높은 여성들은 남편에 예속되지 않은 독립된 경제권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여성들이 불사나 보시 행위를 상당히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고려의 전통이 깊게 잔존해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절에 가서 기도하거나 보시하는 행위는 매우 당연한 일로 인식되었다. 특히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이나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당을 설치하거나 불교식 재를 설행하는 것은 유교에서 강조하는 효 및 강상(綱常)의 도와 일맥상통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신행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16세기 이후 유교의 여성통제 시스템이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신행 범위는 점점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1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조정의 신료들은 여성의 사찰 출입이나 절에서의 불교적 의식을 모두 성적 일탈을 위한 핑계로 간주했고,31) 부녀자가 절에 올라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여성이 음란하고 실절(失節)하여 풍속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32) 물론 사림들의 주장이 당장 왕실여성들의 불사 행위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추문이나 비난에도 불구하고 15세기 왕실여성들은 여전히 불사를 벌이고, 대규모 법회를 개최하였다.

사회적으로도 여성통제 시스템이 관철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 이후부터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후 결혼 뒤 거주제가 부처제(父處制)로 바뀌고, 상속제 또한 남녀균분 상속에서 장자우대 불균등 상속제로 바뀌게 되면서 여성들은 결국 남성들의 집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들의 사회적 위상이 몰락했음은 물론 여성들의 종교활동 범위는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강명관, 2016).

3. 구도적 성향

조선 전기 왕실불교의 특징은 후기와 비교해볼 때 구도적 성향이 매우 강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왕실의 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처가 마련되었고, 사찰 창건이나 불경 간행 등의 주된 목적이 선왕 선후의 극락왕생 발원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이 설치된 왕실원당이 왕자탄생 기도처였던 것과 비교해볼 때 조선 전기의 불교신앙은 구도적 성격이 훨씬 더 강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광평대군 부인이 중창한 견성암에서는 안거회가 자주 열렸는데, 이와 관련해 김수온의 「견성암안거조사예참기」에는 다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

영가부부인 신씨는 크나큰 마음을 일으키고 聰明 靈利를 품었으며 큰 信解를 지녔으므로, 이에 이 절에 조사 예참을 설치하였다. … 중략 … 또한 이 절에서 운수납자 21명과 凡衆 약간 명을 청하여 오로지 三殿(왕, 왕비, 세자)의 만만세를 축원하였고, 그 다음으로 삼한국대부인의 영가와 광평대군 장의공의 영가와 무안군 장혜공의 영가와 영순군 공소공의 영가 및 법계망령이 모두 정토에 오르기를 발원하여 수륙재를 일으키어 시작하고 회향을 하니 부인이 예참을 특별히 설치하였은즉 원돈을 여는 최상의 기틀이니 곧바로 자기를 다함께 족하게 하는 증거의 도리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안거를 일컬어 승려들에게 밥을 먹이는 것일 뿐이다, 다만 불경을 읽는 것뿐이다, 다만 결제로 90일 지낼 따름이라고들 하지만, 수륙재를 설치하여 저승과 이승에 이익을 통하게 하고 조사회를 열어 영산에서 가섭이 心法을 홀로 부치어 세상에 밝히는 것은 절대로 없다가 겨우 있는 것이니 가히 기록이 없어서는 안될 따름이다.33)

위의 글은 김수온의 『식우집』에 실려 있는데, 몇 년도에 작성한 글인지는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천도 대상으로 영순군의 이름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아 1470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광평대군부인이 승려들을 초청해 조사 예참을 설행하는 목적은 영산에서 가섭이 심법을 홀로 부치어 세상에 밝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승려들을 초청해 그들의 수행을 돕는 것이야말로 요절한 남편과 아들을 위한 최상의 공덕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러한 구도적 특징은 인수대비가 간행한 불서의 발원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수대비가 간행한 불경 가운데 발원문이 남아있는 경전은 총 9종이다(기윤혜, 2011: 93)(<표 1>).

표 1. 인수대비 간행 불서의 발행 목적
년도 발원자 발원대상 불서명 목적
1 1472. 6 소혜왕후 세종, 예종, 덕종, 친정 부모 반야바라밀다심경소 선왕과 죽은 남편의 명복, 죽은 부모의 명복
2 1472. 9 소혜왕후 덕종의 봉보부인 미상 덕종의 유모 박씨의 죽음 애도
3 1474. 5 정희/소혜/안순왕후/성종 공혜왕후 며느리의 명복
4 1482 소혜왕후 명숙공주 요절한 딸의 명복
5 1485. 2 소혜왕후 성종 아들의 연수와 귀
6 1485. 夏 소혜왕후 백성 오대진언 백성들의 진언 암송 용이
7 1485. 8 소혜왕후 성종 죽은 아들의 명복
8 1496. 3 소혜왕후 성종 죽은 아들의 명복
9 1496. 5 소혜왕후 백성 육조대사법보단경 백성들의 번뇌 일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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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백성들의 지혜를 증장시키기 위해 발간한 경전이 2종이나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발원 내용에는 남편, 요절한 딸 등 가족들의 명복을 비는 내용이 담겨있으나, 1496년 5월에 발간한 『육조대사법보단경(六曹大師法寶壇經)』에는 온 백성들이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발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에 앞서 1485년에 간행된 『오대진언(五大眞言)』에는 백성들이 불서를 암송하고 익히는데 편리하도록 경전을 발행한다는 발원문이 실려있다(기윤혜, 2012: 93-94). 소혜왕후가 두 경전을 백성들을 위해 간행한 것은 대비로서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실천하기 위한 법보시로 간주된다.

조선 전기 왕실에서 발간한 불경들은 조선 후기까지 전국 사찰 에서 번각되어 보급되었고, 특히 한글 편찬본과 국역본은 일반 백성에게까지 전달되어 불교대중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조선 전기 왕실에서 공덕용 불사로 간행한 불서들은 조선시대 불교사상과 지식을 현재까지 전해준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였다(곽동화, 2018: 134). 또한 인수대비가 간행한 『오대진언』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법회의식의 근간이 되고 있다.

Ⅴ. 결론

본고에서는 조선 전기 국가의 불교정책과 왕실의 불교신앙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왕실의 대표적 불자여성들이 어떠한 방식 신앙을 이어갔는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조선 전기 왕실불교가 지닌 특징을 세가지로 정리해 살펴보았다.

조선 전기는 유학자 관료들의 성리학적 이상주의와 왕실의 불교신앙이 크게 충돌하는 시기였다. 조선 전기 왕실여성 중에서 강력한 권력을 지녔던 여성들은 유학자들에게 정면으로 맞서며 불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정희왕후는 간경도감 폐지에 맞서 왕실의 내탕금을 출연해 경전간행사업을 이어갔고, 인수대비는 성종을 압박해 도첩제를 철회시켰으며, 문정왕후는 허응당 보우를 등용해 지난 100여 년간 유학자들이 폐지한 선교양종과 승과, 도첩제를 부활시켰다.

또한 태종의 후궁으로부터 성종의 후궁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후궁들은 신료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출가자가 되었다. 소도군부인, 정순왕후 등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여성들은 정업원으로 들어가 승려로 살아갔다. 광평대군부인, 영응대군부인, 월산대군부인과 같은 왕실의 며느리들은 엄청난 추문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불사를 벌였다.

본고에서는 조선 전기 왕실불교가 지닌 특징을 세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조선 전기 왕실여성들의 출가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세종대부터 연산군대까지 후궁들의 집단 출가가 이루어질 때마다 조정 신료들의 반대가 줄을 이었지만 왕실여성들은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승려로 살아갔다. 비록 내명부에 속한 여성들이 출가 이후에도 궁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이들은 궁을 사찰로 개조해 신행생활을 이어나갔다. 둘째, 조선전기 왕실여성들의 신행이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점이다. 조선전기에는 일반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뿐만 아니라 왕실 비빈들의 발언권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이들은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불사를 일으켰으며, 국정에 개입해 불교를 옹호하는 정치적 활동을 벌였다. 셋째, 조선전기 왕실불교는 후기에 비해 구도적 성격이 매우 강했다는 점이다. 조선전기 궁 안에서 다수의 출가자가 배출되었던 점이나 이들의 불사의 목적이 하화중생의 실천이었다는 점은 왕실여성들의 구도 의지가 상당히 강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조선전기 왕실의 불교신앙이 매우 깊고, 수준 또한 높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에 대한 사회통제 시스템이 강화되면서, 왕실여성들의 신앙활동도 소극적으로 변모해갔다. 하지만 조선 전기 왕실여성들이 마련한 토대들은 조선 후기에도 불교가 자생할 수 있는 중요한 자양분으로 역할했다.

Notes

1) 『태조실록』 권 12, 태조 6년(1397) 7월 5일 甲寅.

2) 『세종실록』 권24, 세종 6년 4월 5일 경술.

3) 『태조실록』 권2, 태조 1년 10월 9일 정사.

4) 『태조실록』 권6, 태조 3년 9월 8일 을사.

5) 『태종실록』 권13, 태종 7년 1월 22일 정축.

6) 『세종실록』 권122, 세종 30년 12월 5일 정사.

7) 『朝鮮佛敎通史』, 『韓國寺刹全書』.

8) 『세조실록』 권35, 세조 11년 4월 7일 계미.

9) 『태조실록』 권2, 태조 1년 10월 28일 병자; 『세종실록』 권24, 세종 6년 4월 21일 병인.

10) 『태종실록』 권11, 태종 6년 5월 27일 병진.

11) 글을 고칠 때 소리를 내어 읽으면서 바로잡는 일, 또는 그 일을 맡은 사람.

12)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13) 『성종실록』 권164, 성종 15년(1484) 3월 15일 壬寅.

14) 『성종실록』 권271, 성종 23년(1492) 11월 21일 戊子.

15) 『명종실록』 권10, 명종 5년(1550) 3월 11일 乙亥.

16) 『명종실록』 권16, 명종 9년(1554) 5월 19일 戊午.

17) 『세종실록』 권16, 세종 4년(1422) 5월 20일 丙子.

18) 『문종실록』 권1, 문종 즉위년(1450) 2월 27일 壬寅.

19) 『단종실록』 권1, 단종 즉위년(1452) 5월 18일 庚戌.

20) 『海平家傳聞見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1) 『연산군일기』 권55, 연산군 10년(1504) 9월 4일 辛卯.

22) 『연산군일기』 권56, 연산군 10년(1504) 11월 13일 己亥.

23) 『문종실록』 권 7, 문종 1년 5월 3일 경자.

24) 『성종실록』 권11, 성종 2년 9월 14일 계미.

25) 『韓國文集叢刊』 권9 『拭疣集』.

26) 『문종실록』 권7, 문종 1년 5월 3일 경자.

27)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12일 병오.

28) 『연산군일기』 권49, 연산 9년 4월 4일 경자.

29) 『성종실록』 권289, 성종 25년(1494) 4월 17일 乙亥.

30) 『단종실록』 권3, 단종 즉위년(1452) 9월 12일 辛丑.

31) 『성종실록』 권32, 성종 4년(1473) 7월 18일 丁未.

32) 『성종실록』 권32, 성종 4년(1473) 7월 21일 庚戌.

33) 『拭疣集』 卷之二 記類 「見性菴安居祖師禮懺記」 有永嘉府夫人申氏。發廣大心。稟聰明靈利。有大信解。乃於玆寺。設祖師禮懺。(中略) 亦於是。請雲水衲上堂三七凡衆若干。專爲祝三殿萬萬歲。其次爲三韓國大夫人王氏靈駕,廣平大君章懿公靈駕,撫安君章惠公靈駕,永順君恭昭公靈駕及法界亡靈。咸躋淨土之願。水陸起始。繼以坐禪安居。結制於是年四月。回向於七月。夫人之特設禮懺。則所以開圓頓最上之機。直證自已具足之道也。雖然。今世之所謂安居。則不過飯僧而已矣。不過轉經而已矣。不過結制以過九旬而已矣。至於設水陸以通益於冥陽。開祖師會。使靈山獨付迦葉之心法。又明於世。則絶無而僅有矣。是不可以無記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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