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청담의 심학과 정화운동:

유승무 *
Seungmu Lew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교수
*Professor, Joong-ang Sangha University

© Copyright 2021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May 14, 2021; Revised: Jun 16, 2021; Accepted: Jun 22, 2021

Published Online: Jun 30, 2021

국문 초록

이 글에서는 마음사회학적 시각에서 청담의 심학과 정화운동 사이의 관계를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청담 이해를 시도해 보았다.

이 글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제2장에서 일종의 이념형으로서 마음사회학적 이론 틀을 구성하고, 그 이론 틀을 염두에 두면서 제 3장에서는 청담 심학과 그 특징을 도출하였고, 제 4장에서는 청담의 사회적 실천을 상징하는 정화운동과 청담 심학 사이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일종의 집합적 사회운동으로서 정화운동을 위한 청담의 실천활동을 그의 심학의 사회적 발현으로 해석해 보았다. 그리고 제 5장에서는 이 글의 이론 틀이 내장하고 있는 이론적 함의의 하나인 개시개비를 잣대로 하여, 청담 심학과 그 사회적 발현이 갖는 이론적·실천적 위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 보았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러한 해석적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청담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이 글의 논지에 따르면 새로운 정체성이란 ‘청정한 마음사회의 이론가이자 청정한 마음사회의 실천가’란 것, 바로 그것이다. 청담은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닫는 수행조차도 수단으로 간주한다. 그의 최종 지향점은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이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간화선 수행자와 다른 청담만의 특징이자 청담 심학의 독특성이다.

이 글 전체를 통해 분명하게 밝혔듯이, 청담은 ‘청정한 마음을 가진 청정한 사람들의 청정한 사회’란 꿈을 구현하기 위해, 치열한 무문관 수행으로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치는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체험에 농축된 에너지를 끌어들여 그 담지자인 승가를 청정한 교단으로 혁신하려는 정화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20세기 한국의 기념비적 보살이었다.

Abstract

In this article, I have attempted to understand Cheongdam(靑潭) in a new way by interpret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himhak(心學; the theory of mind) of Cheongdam and the Korean Buddhism's purification movement(韓國佛敎淨化運動) from a sociological perspective. The main points of this article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of all, in Chapter 2, We constructed a sociological theory frame of mind as a kind of ideal type, and in Chapter 3 demonstrated the Shimhak(心學; the theory of mind)of Cheongdam and its characteristics on the base of this theoretical framework, and in Chapter 4, we presented the social practice of Cheongdam. By reveal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ymbolic purification movement and the Shimhak of Cheongdam, I tried to interpret Cheongdam's practical activities for the purification movement as a kind of collective social movement as a social expression of his Shimhak. And in Chapter 5, we revealed the theoretical and practical status of Cheongdam‘s Shimhak and its social manifestation.

Needless to say, this interpretive work opened up the possibility for us to redefine the identity of Cheongdam. According to the thesis of this article, the new identity is that of 'the theoretician of a clean mind society and a practitioner of the clean mind society'. Cheongdam regards even the practice of realizing the original place of mind as a means. His ultimate goal is not enlightenment, but social practice of enlightenment. This is the unique characteristic of Cheongdam that is different from the general Zen meditation practitioners, and it is the uniqueness of the Shimhak(the theory of mind) of Cheongdam.

As made clear throughout this article, in order to realize the dream of 'a pure society of pure people with a pure heart', Cheongdam not only experienced the awakening of the original mind(Buddhahood) through Zen practice, but also the energy concentrated in that experience. He was a monumental Bodhisattva in 20th century Korea who successfully led the purification movement to innovate into a pure denomination by attracting and reinforcing its bearer, the Sangha.

Keywords: 청담; 심학; 정화운동; 정체성; 청정한 마음; 본래의 마음자리(불성)
Keywords: Cheongdam(靑潭); Shimhak(心學); the Korean Buddhism's Purification Movement(韓國佛敎淨化運動); Identity; Original Mind(Buddhahood)

Ⅰ. 왜 청담의 심학과 정화운동을 연관시키려고 하는가?

청담스님(이하, ‘청담’)은 1971년 11월 15일 열반하셨다. 얼마 후(2021년 11월 15일) 우리는 청담의 열반 50주기를 맞이한다. 이러한 시간의 화살은 우리에게 새삼 청담 열반 50주기를 맞아 청담을 어떻게 기억하고 또 미래에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과제를 던진다. 그런데 이 과제는 늘 해석 및 이해의 선결정을 요구한다. 기억과 재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해석적 이해가 전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관심은 다시 어떻게 청담을 이해할 것인가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환은 한편으로는 이 글의 목적이 청담을 이해해 보는 것으로 한정됨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글이 청담의 기억과 재현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의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논의의 주제를 한정하더라도 청담의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청담과 관련된 제반 사실들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선행연구들을 꼼꼼히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서, 일단 청담이 직접 쓴 기록을 묶은 『청담필영(靑潭筆影)』, 청담 관련 자료를 엮은 <청담대종사전서(靑潭大宗師全書)> 여섯 권, 그리고 『청담대종사와 현대한국불교의 전개』란 단행본과 학술지 『마음』에 실린 청담 관련 선행연구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필자는 청담을 논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정화운동’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거치기 전에도, 이런저런 공적·사적 인연 및 사연으로 청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필자에게는 ‘청담’하면 떠오르는 두 단어가 바로 ‘마음’과 ‘정화운동’이기도 하였다. 서울 우이동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도선사를 내 집 드나들 듯 다닌 필자의 뇌리에는 알게 모르게 이미 청담스님을 상징하는 두 단어가 깊이 각인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필자의 입장은 확고했다. ‘마음’과 ‘정화운동’으로 청담을 이해하고, 그 기반 위에서 청담을 기억하고 또 재현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입장이 결코 새롭지 않다는 데 있다. 실제로 청담의 마음 사상에 대한 논의는 매우 많다. 앞서 제시한 단행본들에서는 그 누구라도 청담 자신이 어떠한 마음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청담의 마음 사상 혹은 마음 개념에 대해서는 단행본이나 학술지를 통해 이미 다각적인 연구들이 축적되어 있다. 정화운동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불교정화운동에 대한 그 어떤 논의에서도 청담이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정화운동과 청담의 관계는 수없이 논의되어 왔다1). 설상가상으로 누구나 다 말할 수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말해 둔 것을 이렇듯 소중한 공간에서 재탕하는 것은, 필자가 가장 싫어하는 짓(?)에 속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청담을 새롭게 이해할 것인가?

이 글의 문제제기는 이렇다. 청담의 마음 사상(혹은 마음 관념, 혹은 마음 개념)—이 글에서는 심학(The theory of Maeum)이라 부른다—과 정화운동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이 글은 바로 이 관계에 기초하여 청담을 새롭게 이해해 보고자 한다2). 그런데 이렇듯 새로운 이해를 위해서는 청담 개인이 가진 마음사상 즉 심학과 일종의 사회현상인 집합운동으로서 정화운동 사이의 관계를 설득력 있게 논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필자가 아는 한, 사회운동을 마음과 연관시켜 논의한 연구는 물론 그것을 뒷받침할 사회이론도 전무하다. 당연히 청담과 관련하여 이 두 가지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는 선행의 경험적 연구조차 없다.

이에 아래에서는 이 글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이론적 차원에서 마음과 사회의 관계를 논의하기 위한 매우 정치한 이론 틀(theoretical framework)3)을 구성한 다음, 경험적 차원에서 청담의 심학과 정화운동 사이의 관계를 실증해 보고, 마지막으로 일종의 이념형(ideal type)으로서 이 글의 이론 틀을 활용하여 청담의 심학과 정화운동 사이의 관계를 해석해 봄으로써 청담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에 도달하려고 한다.

Ⅱ. 마음사회학적 이론 틀의 구성(Theory Building)4)

통상의 사회학적 분류에 따라 마음 사상(혹은 심학)과 사회현상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는 연구를 마음사회학이라 명명할 수 있다면, 그 관계를 논의하기 위한 사회이론은 마음사회학적 사회이론 혹은 마음사회학적 이론 틀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필자가 『마음사회학』이란 졸저를 통해 마음사회학적 이론 틀을 제시하고, 그에 기초하여 다양한 실증적 연구를 수행해 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해서, 여기에서도 일단 그 마음사회학적 이론 틀을 이 글의 주제를 다루기에 적합하도록 변형하여 청담연구의 마음사회학적 틀로 제시하려고 한다.

우선 인간의 영역을 작업적 차원에서 아래 <그림 1>과 같이 규정해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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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인간의 작업적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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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인간의 영역을 크게 인간의 고유한 내적 욕망의 영역과 외부를 지향하여 타자(여기서는 사회)와 접촉하는 활동기관의 영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불교교리에 기초하여 인간의 내적 욕망은 탐욕, 분노, 그리고 무지로, 인간의 활동 기관은 몸, 입, 사고 활동 등으로 설정하였다. 마지막으로 두 영역 사이의 관계는 상호의존관계와 상호침투관계로 설정하였다.

두 번째로, 우리는 사회의 영역을 아래 <그림 2>와 같이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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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사회의 작업적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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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사회의 영역도 둘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사회의 기능체계(societal systems)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기능체계의 코드와 프로그램에 따라 그것을 환경 속으로 실현하는 사회의 구동기관 영역이다. 전자는 체계차원의 정치체계 및 경제체계와 상호작용 및 조직을 포함하는 생활세계로 설정하였고, 후자는 정책(사회운동 포함), 매스미디어, 그리고 연구(학문 활동 포함) 등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기능체계와 구동기관 사이의 관계는 상호의존 관계 및 상호침투 관계를 갖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세 번째 단계로 우리는 인간과 사회의 상호작용(상호의존성 및 상호침투성)을 <그림 3>과 같이 설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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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인간과 사회의 상호의존성 및 상호침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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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에서 동그라미, 네모, 별 모양 등 각종 도형은 인간의 세 가지 내적 욕망과 사회의 각종 기능체계를 상장하는 도형인데(<그림 1>과 <그림 2>의 도형을 참고하라), 우리는 그러한 도형들의 복잡한 얽힘과 변형을 통해 인간의 내적 욕망과 사회의 기능체계 사이의 상호의존성 및 상호침투성을 표현하였고, 그 상호의존성 및 상호침투성이 제 3의 영역을 구성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긴급히 요청되는 개념이 <그림 4>의 ‘마음’ 개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고유한 인식 능력을 반영하고 있는 ‘인간의 영역’과 ‘사회의 영역’은 상호의존하거나 상호침투하면서(공진화하면서) 의미(意味)를 생산하는 바, 바로 그 의미(‘뜻’의 ‘맛’)를 인지하고 연결하는 매질(媒質; substrate)이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음이 인간 활동(신체활동, 언어활동, 사고활동)의 일(事) 혹은 업(業)의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매체(symbolically generalized media)’이자 사회 구동(연구 활동, 미디어 활동, 실천적 정책 및 운동)의 기능 혹은 역할의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매체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음이란 매질은 그 특정 요소들 사이의 반복적 상호작용과 그 구조화로 인하여 특정한 형식으로 구체화되어 발현될 때 비로소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구성할 수 있다. <그림 4>에서 ‘내 마음’ 및 ‘사회의 마음’으로 발현한 것이 바로 그 형식 즉 마음이란 매질의 형식이다. 여기에서 매체와 형식의 차이는, 루만(N. Luhmann)의 개념을 원용하면, 요소들의 단단한 연동과 느슨한 연동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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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마음의 총체적 영역과 그 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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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에서 ‘내 마음’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마음을 의미하며, ‘사회의 마음’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로 만들어지는 ‘집합적’ 마음을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내 마음’은 이성, 감성, 정서, 기억, 상상력, 의지 등의 요소로 발현하며, ‘사회의 마음’은 시대정신, 이데올로기, 계급의식, 여론, 지역감정, 집합의식 등으로 발현한다. 그리고 ‘내 마음’의 영역과 ‘사회의 마음’의 영역은 각각 외부에 열려진 파선(擺線)으로 표시하였고, 그 두 영역이 겹쳐지는 교집합 영역을 설정함으로써 내 마음과 사회의 마음이 상호침투성을 갖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이 마음 영역 속에는 앞서 논의한 모든 단계의 작동들이 다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 영역은 단순히 영혼, 생각, 의식, 심리 등 인간 내부의 정신적 활동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외부가 부재한 총체로서의 세계’를 감싸고 있는 정신적 그 무엇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심외무물(心外無物)을 강조하는 선불교의 마음 개념이나 만물의 주재자(主宰者)로 자리매김되는 성리학의 마음 개념과도 유사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변화는 인간의 삶은 물론 사회의 작동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상의 논의에 근거하여 다섯 번째 단계부터 우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영역 즉 마음의 영역을 추가하였다. 아래 <그림 5>는 내 마음(의지, 기억, 감성, 이성, 상상력 등)의 영역과 그 구성과정을 도식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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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내 마음의 영역과 그 구성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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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내 마음’의 영역은 <그림 1>과 <그림 3>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의 구성에는 인간의 내적 욕망과 활동기관의 작동(<그림 1>)은 물론 ‘사회적 영역’의 일부(<그림 3>)가 침투하여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인간과 사회의 상호작용(<그림 3>)이 <그림 4>의 교집합 영역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내 마음의 형성과정에는 ‘사회의 마음’(이데올로기나 집합의식 등)까지도 부분적으로 침투해 들어와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내 마음은 다시 내적 욕망과 활동기관에 피드백(되먹임)되거나 혹은 내적 욕망을 거쳐 인간의 활동기관으로 이어짐으로써 마음 영역 내부의 자기준거적 자기생산(autopoiesis)을 지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은 인간의 내적 욕망처럼 내부에 존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영역 외부에 속하기도 하고 인간의 영역을 모두 관통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내 마음은 사회적 체계에서 관찰할 경우 블랙박스로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조차도 인격 혹은 페르조나(Persona)로 관찰될 수밖에 없다.

여섯 번째 단계로 우리는 ‘사회의 마음’(시대정신, 이데올로기, 계급의식, 여론, 집합의식, 지역 감정 등)의 영역과 그 형성과정을 <그림 6>과 같이 도식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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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사회의 마음’의 영역과 그 형성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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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회의 마음’ 영역은 <그림 2>와 <그림 3>의 영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사회의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사회의 각종 기능체계의 작동이나 사회의 구동기관의 활동뿐만 아니라 <그림 3>을 통하여 ‘인간의 영역’ 일부가 침투하여 일정한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내 마음’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그림 4>의 교집합 영역에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영역도 부분적으로 침투해 들어와 있다. 또한, 사회의 마음은 다시 사회적 기능체계와 구동기관에 피드백(되먹임)되거나 혹은 그 기능체계를 거쳐 사회의 구동기관으로 이어짐으로써 사회 영역 내부의 자기준거적 자기생산(autopoiesis)을 지속한다. 결국 사회의 마음도 사회의 기능체계 내부에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 외부에 존재하기도 하고 사회의 영역을 관통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상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그림들을 종합하여 아래 <그림 7>로 도식화한 마음사회학적 이론 틀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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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마음사회학적 이론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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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은 마음을 매개로 한 인간의 삶과 사회의 작동 사이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마음사회학적 이론 틀이다. 여기에서 각 영역 사이의 화살표는 상호의존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각 영역을 실선이 아니라 점선으로 구분한 것은 각 영역들의 상호침투 가능성을 표현한 것이며, 짙은 부분은 교집합 영역이다. 그리고 그림 하단의 가로로 엇갈린 화살표는 시간의 변화나 상황에 따라 각 영역의 크기가 수축 혹은 이완될 수 있음을 표현하였다.

Ⅲ. 청담의 심학과 그 특징

불교와 유교가 기나긴 삶의 역사를 관통해 온 한국사회의 경우, 매우 강력한 심학의 전통이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효, 지눌, 득통과 같은 불교사상가, 퇴계, 율곡, 서애, 성호, 다산 등 유교사상가, 그리고 경허, 성철 등 근현대 불교사상가에 이르기까지 심학은 한국인들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면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한 심학사의 반열에서 청담을 빼놓을 수는 없다.

실제로 청담이라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마음’이다. 무엇보다도 청담스님은 20세 때 박포명 스님의 ‘마음’ 법문을 듣고 출가의 의지를 갖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바, 이는 ‘마음’이야말로 청담의 ‘제 2의 탄생(the second birth)’, 즉 출가의 계기를 준 그 무엇임을 의미한다. 이렇듯 마음이 청담의 출가자로서의 삶의 결정적인 변수였기 때문일까, 청담의 출가생활은 마음공부, 마음교육, 그 마음공부의 사회적 실천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출가 후 50년간 마음공부만을 하였다”(청담문도회, 1999a: 115)라는 청담 자신의 회고가 이를 직접 증거한다. 또한 『청담대종사전집』의 제 1권 제목이 『마음』이란 사실과 진주산업대학교부설 청담사상연구소의 논문집 명칭이 『마음사상』으로 정해졌다는 사실도 ‘마음’이 청담의 상징임을 증거한다.

이는 청담이 불교를 오로지 마음 개념으로 재해석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청담은 “팔만대장경 전부가 마음이란 두 글자로 되어 있다”(청담문도회, 1999a: 115)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는, 종교학적 차원에서 말하면, 마음이야말로 온 우주에 편만하고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초월적인 그 무엇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그러한 점에서 청담에게 있어서 마음은 기독교의 절대적인 신에 비견될 정도로 절대적인 것, 즉 부처 그 자체다. 실제로 청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은 일체가 마음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마음이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만든 마음과 만들어진 것은 주관과 객관이 분립하게 되어 거기에는 주관 · 객관이 또 벌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일체유심(一切唯心)이라고만 설하고 지을 조(造)자 하나를 빼버려야 알기 쉽다. 오직 마음뿐이다. 일체는 마음뿐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불법(佛法)이다. 전체가 하나란 소리는 일체가 다 불법이란 소리와 한 가지이다. 일체법이 다 불법이란 소리는 일체가 다 마음이라는 뜻이고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이다(청담문도회, 1999b: 103).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특히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한다. 그 하나는 이렇듯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주장이, 마치 원효가 토감(土龕)에서 본래의 마음자리를 체험하고 귀일심원을 주장했듯이, 청담 또한 극한적인 선수행을 통해 불성을 직접 체험한 바탕에서 나온 주장이란 사실이다. 실제로 청담은 철저한 수행을 통해 삼매에 들어서 ‘똥과 향의 부재와 무경계’의 경지를 직접 체험한 것으로 전해지는 바5), 바로 이러한 체험이야말로 일체유심의 확신이나 마음이 곧 부처라는 확신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다. 청담은 그 체험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생각이 뚝 떨어져 버려서 일체의 망상이 없어져 몸뚱이도 어디갔는지 모르고 이 세계도 안보여 다만 자기 정신만 하나 깨끗하게 남아 있는 경지”(청담, 1977: 342). 여기에서 그 경지는, 청담에 따르면,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마음 아닌 마음’, 즉 마음자리이다. 이 마음자리가 본심의 자리이자 부처의 마음 즉 불성의 자리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렇듯 마음을 독자적 근원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이 글의 이론 틀에 입각하여 해석하면, 청담은 ‘개인의 영역’을 삶의 결정적인 인자로 간주하는 유아론(唯我論)이나 ‘사회의 영역’을 우선적인 변수로 전제하는 유물론(唯物論)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을 결정적인 요인으로 전제하는 유심론자(唯心論者)이다. 물론 불교 일반이 이미 유심론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불자라면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리고 굳이 일체유심조를 언급할 것도 없이, 불교의 의의는 탐진치 삼독을 여의고 불성 즉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달음으로써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적 차원에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은, 삼독을 여의고 본래의 마음자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모토로 하는 간화선 행자인 청담의 경우도 결코 예외일리 없다. 청담은 육체나 생각을 나로 여기서 생겨난 가아(假我)로부터 본래의 마음자리인 진아(眞我)로 회심하는 실천을 이른바 마음공부 즉 수행으로 간주했다. 청담은 『金剛經大講座』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체를 나라고 하다 보니 主觀·客觀의 거리를 인정하게 되고 둘로 생각하지만, 마음도 아닌 이 마음이 나인 줄 어느 정도 깨달으면 이 우주와 나는 둘이 아니라는 대목이 나옵니다.”(청담, 1977). 이 인용문에서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닌 자리가 바로, 청담의 표현을 직접 빌리면 ‘아무 생각이 없는 적멸의 본심 자리’ 혹은 ‘청정한 자기 마음의 경계’이다. 그 경지를 청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자기 마음 가운데 잠재의식 세계까지 다 뿌리를 뽑아 없애고, 청정무비(淸淨無比)의 본래 ‘마음’ 자리만 남겨서 육신과 법신이 둘이 아니고 ‘마음’과 현상이 둘이 아닌 곳에 들어서야 한다. 그래서 ‘마음’으로만 초월한 것이 아니고, 육신까지 완전히 해탈하여 할 일을 다 마친, 즉 아무 일도 없는 경지다(청담문도회, 1999a: 208).

이 마음의 경지가 곧 불교가 추구하는 반야지혜인 바, 청담은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부처도 중생도 다 끊어져서 일체를 상대하지 않는 主·客 이전, 피아 대립 이전의 밝은 지혜가 그것을 가리킵니다(청담문도회, 1999a: 147).”

그러나 청담의 심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유심론자들과는 달리, 청담에게 있어서 마음자리의 초월적 체험은 마음의 무한한 역능에 대한 청담의 흔들리지 않은 확고한 신념으로 굳어졌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신념의 비타협적 실천으로 이어졌다. 이는 이 글에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두 번째 사실이다. 실제로 청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지의 근본이 마음이고, 만사의 주체가 마음이다(청담문도회, 1999a: 116).”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신념이, 마치 원효의 토감 체험이 한평생의 실천으로 이어졌듯이, 청담의 실천으로 이어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인욕보살로 회자되어온 청담은 투철한 실천활동가였다. 청담은, 그의 상좌인 혜정에 따르면,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든 불교의 진리란, 지식을 구하는 자를 위하여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즉 세계의 고통을 해탈하려는 것이다. 지식을 경계하라는 말과 세계의 고통을 해탈하라는 말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행동하라는 일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얻은 다음에도 행동하라(허혜정, 2002: 255).

이러한 청담의 실천 지향성은 실제로 두 가지 방향의 실천 활동으로 구현되었다. 그 하나는 마음자리를 깨닫게 하여 인간을 혹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 즉 ‘인간개조’이다. 청담은 미신에 빠지는 신도들을 올바른 신행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하셨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청정하게 밝지 못하면, 만사를 원망과 질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여 미신이 생기는 법이다. … (중략) … 내 마음에 때가 있으면 남도 때가 있어 보이고, 내 마음이 깨끗하면 남도 깨끗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청정하게 밝혀 자신을 계몽해야 한다(청담문도회, 1999a: 160).

실제로 청담은 이러한 법문을 통하여 이른바 ‘신도정화’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열반의 순간까지 게을리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다른 하나는 그 실천적 연장선상에서 그러한 깨달음을 사회로 회향하여 사회를 실천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즉 ‘사회개선’이다. 청담의 마음사상을 가장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마음이 곧 나」라는 법문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끝으로 간추려 다시 말하자면, 신만이 우주의 주재자란 유신사상(唯神思想)이나 오늘날과 같은 물질만능의 유물사상(唯物思想)으로는 자꾸 허덕이는 인류에게 암흑의 구렁만이 주어질 뿐이지 ··· 오직 내 마음이 우주를 주재하는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불타의 유심사상(唯心思想)만이 참혹한 암흑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구원하는 참된 길인 것이다(청담문도회, 1999a: 138).

바로 이러한 유심사상에 대한 투철한 믿음이 청담으로 하여금 이른바 ‘사회정화’의 실천을 자신의 당위이자 모든 불제자의 당위로 인식하도록 이끈 것이 보인다. 이상의 두 가지 실천을 청담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눈 · 귀 · 코와 이 몸까지 남을 위해 아낌없이, 인간개조 선구자로서 사회개선 앞장서고, 육신을 내라하면 천만겁을 생사유전, 자비심으로 근면하여 극락세계 이룩하고, 이 마음 깨달아 영원히 대자유로운 부처가 되자(허혜정, 2002: 262).

이 인용문에서 잘 드러나듯이,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과 인간개조 및 사회개선의 실천이 불이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청담 심학의 독특성이다. 실제로 청담은 치열한 수행을 통해 본래의 마음자리를 체득하여 자신의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확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러한 확신에 바탕하여, 자비행을 불교의 최종 목표로 설정하고 실천한 대승보살이었다. 청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를 찾아 나 혼자만이 부처가 되고자 하면 모두가 틀렸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함은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이다. 중생이 되지 않고 어떻게 그 불성을 내 것으로 할 수 있겠는가? 없다. ··· 법을 구하고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자는 중생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가르친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불자들이 법을 구하고자 한다면 대중과 함께 사는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것이... 봉사하는 보살도(菩薩道)다. ··· 남을 위하고 법을 위한다는 생각 없이 행해야 한다. 이 혼탁한 사회 속에 뛰어들어 비록 내 한 몸 때가 묻는 한이 있더라도 주변을 정화(淨化)하는 것이야말로 불자(佛子) 본연의 자세인 줄 안다(청담문도회, 1999a: 234).

이 지점에 이르면,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닫는 수행조차도 수단으로 위치하고 이른바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이 행위자 자신의 최종 지향점으로 재설정되는 바, 이것이 바로 간화선 행자 일반과는 다른 청담만의 특징이자 청담 심학의 독특성이다.

실제로 청담은 자신의 깨달음을 일반화하여 불교 신도와 같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함으로써 인간개조를 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회로까지 확장하려고 하였다. 청담스님의 저술에 이따금씩 등장하는 신도정화 및 사회정화란 표현이 그 증거다. 물론, 붓다 이래 불교의 담지자가 승가였듯이, 청담에게 있어서도 인간개조 및 사회개선의 담지자는 승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우 불행하게도 당시 한국불교의 승가는 일제 36년간의 왜색화로 인하여 승려의 대처화와 같은 부정적 현상들이 만연해 가고 있었다. 본래의 청정한 마음자리의 깨달음을 강조한 청담의 시각에서 볼 때, 당시 한국불교는 당연히 누란의 위기로 관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한국불교의 승단을 정화하는 것이야말로, 심학의 최종 목표를 인간개조와 사회개조에 두고 있었던 청담의 가장 시급한 실천적 과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과 관련하여 청담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일제가 이 땅을 침략한 이래 우리나라 불교계에는 여러모로 변동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승려들이 술 · 고기 · 담배를 먹고 특히 대처문제였다. 원칙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것, 이것이 부처님 이후 출가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이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수천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전통이었다. 어쨌든지간에 청정해야 할 불법문중에 훼법분자(대처승)이 생겨났으니 근대 한국불교 승단에서 막행 · 막식하고 처자를 거느린 비법승배들이 종권을 농락하고 교계를 오탁케 한 데서 마침내 호법정화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청담문도회, 1999c: 39).

이러한 회고담을 볼 때, 승단(혹은 교단)의 정화는 청정한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달아 인간개조와 사회개선을 위해 실천행을 해야 한다는 청담 심학의 특징이 낳은 자연스런 귀결로 보인다. 이는, 이 글의 이론 틀에 입각하여 재해석하면, 청담의 사회적 실천 활동조차도—여기에서는 정화운동조차도—마음의 영역을 인간의 삶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사례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청담 심학은 정화운동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자.

Ⅳ. 청담 심학의 사회적 발현으로서 정화운동

누구나 인정하듯이 청담은 정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실제로 청담은,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화신으로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정화운동의 고비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다하여 정화운동을 성공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다면 청담의 리더십, 추진력, 그리고 원력의 원천은 무엇이었는가? 실로, 현대사회에서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조차도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던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당시 교단 내외의 조건들을 고려해 볼 때, 청담이 정화운동을 주도할 정도의 원력을 가졌다는 사실, 정화운동의 결정적인 고비마다 청담의 독특한 카리스마가 엄청난 팔로우쉽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불의한 현실에 비타협적 불복종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매우 지난한 반동의 반복을 거치면서도 끝내는 정화운동을 통하여 교단 내의 만연한 일제잔재를 청산하였다는 사실 등은 별도의 설득력 있는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별도의 설명이란 정화운동 과정에서 청담의 결정적인 역할을 그의 심학과 연결시켜 해석하고자 하는 이 글의 설명을 가리킨다. 해서, 아래에서는 이 글의 이론 틀에 입각하여 정화운동과정에 나타난 청담의 결정적인 역할을 그의 심학적 특징과 연결시켜 해석해 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청담은 왜 당대 그 누구도 감히 나서려고 하지 않았던 정화운동을 주도하려는 원력을 가졌는지를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듯이 청담의 정화운동은 192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교정화의 기원을 청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의 한국침략과 더불어 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려는 식민지 정책의 비호 아래 파계괴법자(破戒壞法者)들이 사찰을 장악하고 교단에서 당당히 호령하게 됨에 그 수효는 순식간에 늘어 갔고 이때부터 불교는 타락의 길로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이러는 가운데 적은 비구 스님들을 모아 불조보위책(佛祖保衛策)으로 1926년 12월 안국동 선학원을 본거지로 종풍의 중흥을 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불교정화운동의 봉화인 것이다(청담문도회, 1999c: 39).

그런데 당시의 대외적 조건을 보면, 일제가 사찰령 등을 통해 한국불교를 지배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단 내적으로는 대부분의 승려가 대처의 삶을 사는 등 한국불교의 왜색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청담이 정화운동을 주도한다는 것은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돌리려는 역류의 방향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일제의 간섭과 통제를 받아 좌절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담은 1년 여 기간 동안 전국의 강원을 찾아다니며, ‘대처승이 전국의 대찰과 종단의 각급 기구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개혁하자’는 취지의 종단개혁의 깃발 아래로 동지를 규합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이 학인대회를 무산시키려는 방해활동을 지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28년 3월 14일 오후 2시 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이 주재하고 있던 바로 그곳 즉 각황사에서 학인대회가 열렸다.

그렇다면 당시 종단 내외의 조건으로 볼 때 거의 무모한 일에 가까운 학인대회를 청담으로 하여금 강행하도록 만든 원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에 청담의 심학이 있었다는 것이 이 글의 이론적 전제다. 마음, 특히 청담의 심학은 계산성, 논리성, 합리성, 효율성 등을 거뜬히 초월하는 힘을 내장하고 있는 에너지원(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실증해 보자. 무엇보다도 먼저, ‘조선불교학인대회 발기취지서’에는 다음과 같이 청담 심학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조선불교의 실정은 어떠합니까? 조선 학인의 의기(意氣)는 어떠합니까? 시대는 불교의 것이 되려 하건마는 이를 거척(拒斥)하는 자가 도로혀 불교자신(佛敎自身)이요, 학인자신(學人自身)인 관(觀)이 없지 안치 아니합니까? 계(戒)에서 어떠하며, 정(定)에서 어떠하며, 혜(慧)에서 어떠합니까? ··· 아주 무상(無狀)한 자멸의 길을 취(取)해 가는 현상을 볼 때에 배교역법(背敎逆法)의 무서운 가책(呵責)이 남아 있는 불심(佛心)으로 용기(용기)치 아니치 못할 것입니다. 불교의 흥쇄는 필경 조선불교자(朝鮮佛敎者)의 일심(一心)입니다. 조선불교의 기도(起倒)는 조선불교자의 일심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부호자(扶護者)요, 정법의 파지자(把持者)인 학인에게 그 최고의 책임이 있을 밖에 없습니다. 학인의 성도(省到)와 자각과 분발과 정진 여하는 이제 조선과 세계를 정법으로써 살리기도 할 것이며, 죽이기도 할 것입니다. ··· 마하야나의 일실정도(一實正道)를 회척홍통(恢拓弘通)하기에 승가의 본령을 발휘하자(청담문도회, 1999c: 47-48).

이 인용문에 알 수 있듯이 조선학인대회 발기취지서에도 청담 심학의 두 가지 특징 즉 일심의 자리를 자각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인간 개조 및 사회개선을 실행하자는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특징이 바로 당대 학인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사회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동원능력을 확보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이 학인대회를 계기로 ‘조선불교학인연맹’의 결성으로 이어지고, ‘회광’이란 잡지를 발간하는 등 후속 조치들이 잠시나마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정화운동의 전사(前史)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일제가 그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탄압하면서 미완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담도 1932년 3월 15일 개운사 대원암 강원에서 개최한 정기총회를 끝으로 그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직후에도 남북분단과 한국내전으로 인하여 정화운동은 좀처럼 다시 싹을 틔우지 못하였다. 본격적인 정화운동이 시작된 것은 1954년 ‘대처는 사찰을 떠나라’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화유시 이후부터다. 비록 대통령의 지속적인 유시가 정화운동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비구승의 협조 및 자발적인 참여는 물론 대처승의 반발과 저항도 운동의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화운동의 주도자로 활동한 청담의 참여는 정화운동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이에 아래에서는 54년 이후 청담이 정화운동에 어떻게 참여하여 무슨 역할을 하였고, 또 그러한 활동이 청담 심학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정화유시(1954년 5월 20일)는 정화운동이 본격적으로 개시될 수 있는 합법적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일제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정화운동을 시작했던 청담의 입장에서는 해방공간에서 합법적 조건이 주어졌다는 것은 정화의 천재일우의 기회가 주어진 것에 다름 아니었다. 때문에 당시 고성 문수암에서 담장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피골이 상접하도록 정진하고 있던 청담은, 1954년 8월 24-25일 선학원에서 개최된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 참여하였다. 그렇다면 이른바 무문관 수행을 결행하던 청담은 왜 이렇듯 세속적인 정화운동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일까? 일부 전언에 따르면 효봉 스님의 요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필자가 볼 때 청담은 타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자발적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청담 심학의 특징에 따르면 마음공부와 그 사회적 실천은 수단과 목적의 관계처럼 연속적 계기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에서 청담의 활동은 이를 잘 증거한다. 이미 정화유시 직후인 1954년 6월 24일 비구승 원로들이 안국동 선학원에 모여 ‘불교교단정화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정금오, 부위원장에 김적음을 선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위원회의 결의로 이루어진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의 주요 안건이 ‘교단정리’, ‘승니교육’, ‘종헌제정’ 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담은 이 대회에서 벌써 교단조직을 구체화하고 있는 ‘영산도(靈山圖)’를 운집 대중들에게 설명하였다. 영산도가 부처님의 제자들을 상중하와 원근의 공간적 구도 속에 위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승단의 조직원리, 즉 법의 위계(법계)에 따라 사회적 지위의 결정하는 원리를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당시 교단의 조직을 대처육식의 당사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현실은 본말이 전도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회에서 청담이 본 안건도 아닌 영산도 설명을 시도한 것은, 그 내용 즉 교단조직 전체를 영산도의 원리에 따라 재구성하고 있는 조직도와 그 설명6)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 사실 자체가 이미 당시의 전도몽상의 현실을 정화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서 청담이 영산도를 설명했다는 사실은 마음공부를 통해 청정한 회복하고 그것을 사회운동으로 실천하려고 한 청담심학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동 대회에서 청담은 이른바 ‘긴급정화’로 불리는 승려의 자숙조건을 제시하였다7). 그 내용은 ‘비구와 비구니는 동거하지 말고 일절 거래를 말 것, 승적을 새로이 할 것, 사승 퇴속시는 다시 스승을 정할 것, 가정 정리가 완료되지 않은 승려는 속히 정리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내용에서 잘 드러나듯이 ‘긴급정화’는 ‘승려정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 후속 조치로 나온 것이 9월 28일-29일 선학원에서 개최된 전국비구승대회였는데, 청담은 실무총책임자인 도총섭(都摠攝)에 피선되었고, 바로 여기에서 대처승 자격을 호법대중으로 처리한다는 방침이 천명되었다. 이렇게 볼 때 청담은 처음부터 대처를 왜색화의 상징으로 인식했고, 따라서 인적 청산의 대상으로 설정하였음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는 청담 심학의 특징에서 유래한 자연스런 귀결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청담의 태도와 그 실천은 당시 교단의 상황을 고려하면 무모한 것일 수도 있었다. 비록 대통령의 유시가 뒷받침되기는 했지만, 당시 불교교단은 대처승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동의 동원능력이란 측면에서 보더라도, 당시 대처승들은 한국불교를 대표할만한 1천 3백여 사찰을 운영하고 있었던 반면에 비구승들은 고작 암자 10여 개를 가지고 있었다8). 청담의 상좌 혜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단과 정치적 권력·재력을 거머쥐고 있는 7천여 명의 대처승들을 상대로, 맨주먹뿐인 6백여 명의 비구승들이 정화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논리로는 풀리지 않는 불가능한 과업이었다’. 이러한 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할 때, 당시 대처승을 사찰에서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음에 틀림없다. 오히려 당시의 온건파나 이후의 화동파의 주장처럼 점진적 청산 안이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담은 비타협적이고 급진적 태도로 일관하였다. 바로 이 점 또한 마음정화, 교단정화, 그리고 인간개조(신도정화) 및 사회개선(사회정화) 등의 선형적 연속성을 그 내용으로 하는 청담 심학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청담 심학의 특징은 그 이후 정화운동의 고비마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도총섭이 된 청담은 54년 12월 10일에서 13일까지 제 3차 전국비구승대회를 한국불교 종무행정의 상징인 태고사(현 조계사)에서 개최했는데, 이는 다시 비구종단이 재생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바로 이 거사를 성취하기 위해 청담은 전원 순교의 결의를 이끌어 내었고, 그것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실천했다: ‘1차로 단식하고, 2차로 한중기도(寒中祈禱)하며, 3차로 통곡호소(痛哭呼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세가 1955년 비구의 총무원 사무실 점거, 난투극, 그리고 문교부의 개입에 이은 8대 원칙의 합의(독신, 삭발염의, 수도, 20세 이상, 불음주육, 불법사바라이, 비불구자, 3년 이상 승단생활자), 즉 승려자격을 비구로 한정하는 결과로 이어졌음은 주지의 사실과 같다.

물론 이렇듯 청담 도총섭의 주도로 이룩한 엄청난 성과조차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란 뒷받침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는 한계는 분명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4·19 혁명 이후 정화운동을 지속적인 유시로 뒷받침하고 있던 이승만이 하야하면서 대처승들의 강력한 반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 청담은 또 다시 순교단을 조직하여 대응함으로써 대통령의 유시 없이도 대처와의 투쟁을 이어갈 수 있었다. 순교가 육신을 희생해서 무엇인가 더 높은 가치를 획득하는 사건이란 점을 고려하면, 순교단의 조직을 발상했다는 사실 자체가 육체적 존재는 가아(假我)일 뿐이고, 진아(眞我)는 본래의 마음자리라는 청담 심학의 특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청담은 이차돈의 순교를 이 땅에서 불교가 중흥할 수 있었던 상징적 사건으로 간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친필로 직접 그려 간직하고 있었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9). 그 후 지지부진하던 정화운동은 강력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개입하면서 1962년 통합종단을 설립하였고, 정화운동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한국불교의 모습은 청담의 시각에서 볼 때 부패와 타락을 거듭하였고 이는 청담으로 하여금 정화운동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에 대한 응전이 바로 청담의 ‘유신재건안’이었고, 그것의 실패가 1969년 청담의 탈종을 가져왔음은 주지의 사실과 같다. 그렇다면 승단이 불교의 유일한 담지자임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청담이 왜 유신재건안을 제시하였고, 또 탈종까지 감행한 까닭은 무엇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교단의 타락상 등 당시 종단의 현상이 정화에 대한 청담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고, 이는 청담 심학에서 보면 자가당착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청담의 탈종은 청담 심학에서 유래한 정화운동의 마지막 방편에 다름 아니었다. 실제로 청담은 1970년 총무원장으로 다시 취임하여 도제 양성, 포교, 역경 등 3대 종책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함으로써 불교현대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마침내 불교중흥사의 불멸의 별이 되었다.

Ⅴ. 마음사회학적 분석틀에 의한 청담의 해석

이상으로 우리는 청담의 심학과 그 사회적 발현으로서 정화운동을 실증해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는, 이해의 마지막 단계의 과제 즉 ‘그렇다면 우리는 청담의 심학과 그 사회적 실천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가 남아 있다. 이를 위해 여기에서는 제 2장에서 이론적 차원에서 구성한 마음사회학적 분석틀을 일종의 이념형으로 삼아 제 3장과 제 4장의 사실들을 해석해 보고자 한다.

1. 마음사회학적 분석틀의 이론적 기능

제2장의 <그림 7>에 나타난 삼원(三元) 영역 즉 인간의 영역, 사회의 영역,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마음 사이의 관계는 수평적 시각에서의 상호작용(상호의존 및 상호침투)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2차원적 도식의 한계로 <그림 7>에서 명확히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그 삼원영역 사이의 중층적 관계는 수직적 관점에서도 포착할 수 있다. 여기에서 수직적 관점이란 인간의 영역을 토대로 설정할 경우의 인간 우선성(혹은 인간 중심성)의 전제와 사회의 영역을 토대로 설정할 경우의 사회 우선성(사회 중심성)의 전제를 동시에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마음의 우선성(유심성)도 전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세 가지 우선성은 다시 다양한 하위 이론적 의의를 수반한다.

첫째, 인간의 우선성을 전제하는 경우는 프로이드나 니체처럼 인간의 내적 욕망이나 생의 의지에 우선성(선차성)을 두고자 하는 이론적 가정, 행위이론이나 언어이론처럼 인간의 활동기관에 우선성을 두고 있는 이론적 가정, 그리고 이성(합리성), 기억, 상상력 등에서 출발하는 이론적 가정 등으로 세분된다.

둘째, 사회의 우선성을 전제하는 경우는 맑스의 사회구성체 이론이나 루만의 체계이론 혹은 하버마스의 소통이론처럼 사회적 기능체계에 우선성을 두는 이론적 가정, 미디어 이론이나 정책이론처럼 사회의 구동기관에 우선성을 두는 이론적 가정, 그리고 이데올로기론이나 집합의식에서 출발하는 이론적 가정 등으로 세분된다.

마지막으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연기성을 강조하는 불교사상이나 이기성(理氣性)과 마음의 관계성을 강조하는 유교사상처럼 마음 영역에 우선성을 두는 이론적 가정도 가능할 것이다. 이 이론적 가정에 따를 경우, 인간과 사회 사이의 마음 소통이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생산지로 등장한다. 더 나아가 <그림 4> 및 <그림 7>에 따르면, 이 소통조차도 마음을 매개로 촉진될 수도 있지만, ‘내 마음’에 의한 타심(他心) 가능성 및 ‘사회의 마음’에 의한 일방적 압력 가능성에 의해 왜곡되거나 심지어 불통(不通)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이론적 가정조차 수용하고 있는 <그림 7>은 소통을 사회적 체계 내부로 제한하는 루만의 체계이론적 소통이론, 행위자 네트워크의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고 있는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이론(ANT) 그리고 그 이후의 비판적 실재론이나 신유물론 등과도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다.

이상의 이론적 함의를 알뛰세(L. Althusser)의 이론 유형으로 압축적으로 요약해 보자. 우선 <그림 7>은 상즉상입의 ‘상호의존적 발생의 법칙’에서 도출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일반성Ⅱ’ 즉 창의적인 연역적 이론구성에 해당한다. 또한 <그림 7>은 이 글의 제 3장과 제 4장의 경험적 연구를 수행하는데 도움을 주는 ‘일반성Ⅲ’로 기능하는 동시에 개시(皆是)와 개비(皆非)를 동시에 논의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일반성Ⅰ’ 즉 선행이론 비판의 이론적 기능도 수행한다. 그런데 우리는, 연역적 이론 틀인 <그림 7>을 구성했고, 그것을 이념형으로 삼아 제 3장과 제 4장과 같은 경험적 연구를 수행했으며, 나아가 이제는 제 5장의 시도 즉 ‘일반성Ⅰ’의 차원에서 청담 심학의 개시와 개배를 논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여기에서는, 제 5장의 시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에 앞서, <그림 7>이 어떻게 개시개비의 판단 근거로 작용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해 두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개시의 차원에서 관찰하면 <그림 7>은, 비록 부분적 인정에 한정되어 있겠지만 두 가지 결정론(인간결정론과 사회결정론)에 따른 다양한 하위 사회이론의 이론적 가치를 모두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우선성을 두는 유심론(마음의 우선성 이론)까지도 긍정하게 된다. 이러한 근거 때문에, 인간결정론이나 사회결정론 뿐만 아니라, 기존 사회학의 인식관심인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우선적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차화하고, 오히려 마음에 우선성을 두고 그 인간적 발현과 사회적 발현을 추구한 청담의 사례를 이론적 거부감 없이 용이하게 검토할 수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그림 7>을 염두에 두면서 청담 사례의 다양한 측면들을 놓치지 않고 관찰할 수 있었고, 그러한 점에서 그것(이론 틀)은 제 3장과 제 4장의 경험적 연구를 가능하게 한 방법론적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청담의 경험적 사례가 불교문화나 유교문화가 역사를 관통해 온 한국사회의 심학사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사례란 점을 고려하면, <그림 7>은 심학이 발달한 사회의 경험적 사례, 그 중에서도 특히 심학과 그 인간적·사회적 발현 사이의 관계를 연구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일반화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청담과 같은 유심론자들의 사회적 실천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는 바, 이는 유심론 및 유심론자를 개시하는 근거일 뿐만 아니라 마음사회의 존재와 그 작동을 개시하는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다.

반면에 그러한 장점은, 개비의 차원에서 관찰해 보면, 곧바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개시는 개비와 ‘동일성 혹은 한 단위성(Einheit)’을 갖기 때문에 개시가 현재화(顯在化, actualized)하는 순간 개비는 잠재화된 상태로 자신을 은밀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잠재화가 곧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는 <그림 7>에 근거하여 우리는 개비를 드러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림 7>에 근거하면 유심론 혹은 유신론적 주장은 인간에서 출발하는 행위론이나 사회구조에 우선성을 두는 사회결정론을 경시함으로써 그 이론들이 갖고 있는 개시의 측면이나 감점을 담아내지 못하거나 심지어 배제하는 경향을 가진다. 이는, 개비의 차원에서 관찰하면, 청담 심학과 그 발현이 인간의 강력한 욕망이 결과하는 현상이나 사회구조가 갖는 영향력을 경시하게 되는 한계나 오류를 내포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에, 그리고 제 2장과 제 3장 및 제 4장에서 각각 ‘일반성Ⅱ’와 ‘일반성Ⅲ’가 처리되었다는 전제 하에, 다음 절에서는 ‘일반성Ⅰ’의 차원에서 청담 심학과 그 발현의 개시개비를 <그림 7>에 의거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청담 심학과 그 발현의 마음사회학적 해석

앞서 수없이 언급한대로 청담 심학은 인간의 욕망이나 사회의 구조적 작동에 우선성을 두기보다는 그것을 부차화하고 오히려 마음에 선차성을 부여하여 인간개조와 사회개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특징을 가진다. 이 글의 이론 틀로 해석하면, <그림 1>의 인간 영역에 선차성을 두는 이론들이나 <그림 2>의 사회 영역에 우선성을 두는 이론은 물론 <그림 3>처럼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이론과는 달리, 청담은 <그림 4>가 암시하는 것처럼 마음에 근원성, 선차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청담의 심학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기존의 모든 사회학적 시도와는 달리 마음에 의해 그들이 구성되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러한 점에서 서구 사회(과)학과는 차별성을 갖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만약 마음을 학적 대상에서 배제하거나 경시하고 있는 기존의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보면 청담의 주장은 신비적이거나 논리적이지 못한 억지처럼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심학사의 흐름을 개시의 측면에서 관찰하면 마음을 주재자(主宰者)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울 뿐, 논리적이지 않다거나 억지처럼 해석되지 않는다. 청담과 같은 선사들의 수행체험을 개시하는 순간, 일체유심 즉 마음을 온 우주에 편만해 있는 것이자 생명을 잉태하는 주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신비주의로 보이기는 커녕 마음의 역능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청담 심학과 그 발현이 당시 최소한 한국불자들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지점에서 청담의 사례를 개시의 차원에서 관찰해 보자.

청담을 선사의 체험이란 시각에서 관찰하는 김용환(2004)의 논의를 빌리면, 청담의 심학과 그 발현에는 치열한 수행을 통해 본래의 마음자리와 그 근원성를 체험한 청담의 마음가짐(Maeum setting)이나 마음체계(Maeum system)가 자리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가 제 3장과 제 4장에서 자세하게 실증한 것처럼 청담은 마음의 근원성과 그 인간적 결정성은 물론 사회적 결정성도 주장하는 유심론자다. ‘내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내 나라도 맑고 깨끗해진다(心淸淨國土淸淨)’는 청담의 지론은 그 단적인 증거다. 이러한 청담의 주장은, 이 글의 이론틀과 관련해서 해석하면, 마음에 의해 인간영역이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 5>는 물론 마음이 사회의 영역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그림 6>을 실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글의 이론틀은 <그림 4>와 같이 마음의 근원성 및 선차성을 담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 5>와 <그림 6>이 보여주고 있듯이 그 인간적·사회적 역능을 표현하고 있는 바, 바로 이 이론 틀에 의할 때 청담의 주장은 개시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청담의 사례는 어떠한 이론적·실천적 위상을 가질 것인가? 이에 아래에서는 제2장에서 구성한 마음사회학적 분석틀과 앞 절에서 언급한 개시개비의 논리를 활용하여 청담 심학과 그 사회적 발현의 의의를 객관적으로 해석해 보고자 한다.

앞서 자세하게 논의하였듯이 청담의 사례는 불교사회 혹은 유교사회의 심학적 특성 즉 마음의 근원성과 그 우선성 혹은 선차성을 전제하고 있다. 실제로 청담은 <그림 7>의 인간의 영역 즉 탐진치와 삼업을 구성요소로 작동하는 인간의 영역을 가아(假我)로 간주하고, 그것을 초월한 본래의 마음자리 즉 불성을 진아(眞我)로 규정한다. 이는 교리적으로 보면 화엄사상의 일체유심조는 물론 법성이나 불성을 전제하는 모든 불교사상과 한치도 어긋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는 선불교의 불성 체험이란 사실로도 뒷받침되는 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청담의 심학은, 최소한 불교적 차원에서는 분명히 개시의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그림 5>와 <그림 6>에 따르면, 마음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 마음과도 상호작용하는 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청담의 심학과 그 우선성은 이론적 차원에서도 개시의 차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런데 청담은 이러한 심학을 사회적 실천의 정당한 근거로 간주했다. 실제로 청담은 가아가 아니라 진아(眞我)가 인간을 변화시키고 그가 속해 있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회의 모든 악덕은 오직 자기 한 마음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매우 불행하게도 <그림 7>만으로는 진아와 그 사회적 발현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고, 오히려 청담이 주장하는 가아가 사회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실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화운동이 성공하였지만 그것이 청담 심학의 발현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통령의 유시, 일제 잔재 청산을 기대하고 있던 해방공간이란 역사적 조건은 물론 집합운동적 차원의 조건들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개비의 측면에서 관찰할 경우, 정화운동을 청담심학의 발현으로서만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한계는 청담 심학 자체에 내포된 개시개비의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그림 7>에 나타난 영역의 표현들이 암시하듯이 인간의 욕망은 보통사람의 삶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마음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근원적 에너지이자 생의 원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가아로 간주하는 청담의 심학은 이러한 생의 또 다른 원천을 경시하는 한계를 갖는 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청담 심학은 개비의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도 마음 영역 밖에서 체계나 생활세계가 스스로 작동한다. 굳이 맑스, 루만, 뒤르껭과 같은 사회학자들을 언급할 것도 없이 사회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바, 이를 진아의 산물로만 해석하는 것은 최소한 사회학적 차원에서는 무리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청담의 정화운동 개입은 실천적 차원에서도 큰 함의를 지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선 청담의 사례는 마음의 역능을 실증하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청담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의 수행을 통해 마음 자리를 깨치면서 자신의 출가자로서의 삶을 완벽하게 실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체험을 교단정화운동에 그대로 적용시켜 정화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등 실제로 엄청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청담의 사례는 개시의 측면을 지닌다.

그러나 청담의 사례는 탁월한 카리스마를 가진 매우 희귀한 특수한 사례이다.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아무나 청담과 같은 삶을 살 수도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좌불와는 고사하고 단 한순간도 수행하지 않은 채 현실의 일상을 살아가기도 한다. 아마도 당시 교단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통합종단 이후의 종단 현실 즉 정화운동의 성공 이후에서 종단이 타락하고 위기에 빠지게 된 현실과 그것을 회의하고 탈종이란 극약처방을 감행한 청담의 삶이 이를 잘 반증해 주고 있다. 게다가 <그림 7>에 따르면, 개인의 역능은 사회의 고유한 영역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바, 이는 청담 개인의 실천조차도 정화운동의 충분조건은 아님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청담의 실천을 정화운동 성공의 유일한 변수로 간주하는 것은 개비로 해석될 수도 있다.

Ⅵ.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마음사회학적 시각에서 청담의 심학과 정화운동 사이의 관계를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청담 이해를 시도해 보았다.

이 글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글에서는 우선 제 2장에서 일종의 이념형으로서 마음사회학적 이론 틀을 구성하고, 그 이론 틀을 염두에 두면서 제 3장에서는 청담 심학과 그 특징을 도출하였고, 제 4장에서는 청담의 사회적 실천을 상징하는 정화운동과 청담 심학 사이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일종의 집합적 사회운동으로서 정화운동을 위한 청담의 실천활동을 그의 심학의 사회적 발현으로 해석해 보았다. 그리고 제 5장에서는 이 글의 이론 틀이 내장하고 있는 이론적 함의의 하나인 개시개비를 잣대로 하여, 청담 심학과 그 사회적 발현이 갖는 이론적·실천적 위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 보았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러한 해석적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청담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이 글의 논지에 따르면 새로운 정체성이란 ‘청정한 마음사회의 이론가이자 청정한 마음사회의 실천가’란 것, 바로 그것이다. 이 글 전체를 통해 분명하게 밝혔듯이, 청담은 ‘청정한 마음을 가진 청정한 사람들의 청정한 사회’란 꿈을 구현하기 위해, 치열한 무문관 수행으로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치는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체험에 농축된 에너지를 끌어들여 그 담지자인 승가를 청정한 교단으로 혁신하려는 정화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20세기 한국의 기념비적 보살이었다.

이 글의 맥락을 고려하면, 이러한 결론은 청담의 기억과 재현의 문제로 이어져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지점에서 우리가 분명히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청담을 ‘청정한 마음사회의 이론가이자 청정한 마음사회의 실천가’로 기억하고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담의 심학과 정화운동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한 이 글이, 청담을 이렇게 기억하고 재현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Notes

1) 심지어 필자조차도 이미 청담스님의 정화운동에 관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유승무, 2004).

2) 김선근이 자신의 논문(김선근, 2004)에서 청담스님의 정화이념의 실천을 두 가지 즉 교단을 청정하게 바꾸는 외적 정화와 인간의 견성불사인 내적 정화로 나누어 논의하고 있지만, 이 둘의 관련성을 체계적으로 논의하고 있지는 않다.

3) 필자는 이를 마음사회학적 이론 틀이라고 부른다.

4) 이 장의 내용은 유승무·박수호(2020)의 논의를 토대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유승무·박수호·신종화(2021, 근간)를 참고하기 바란다.

5) 실제로 청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각이 끊어져서 마음이 삼매에 들어 일념이 되면 똥·향내가 나지 않는다(청담, 1977: 383).”

6)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허혜정의 글(2002)을 참고하기 바란다.

7)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광식의 논문(2002)을 참고하기 바란다.

8) 심지어 당시 대처승들은 청정한 비구승들의 방부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바, 이는 당시 비구승들에게는 수행의 공간조차 부재했음을 의미한다.

9) 이 그림은 『청담대종사전서1: 마음』(청담문도회, 1999a)의 사진 자료로 묶여져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참고문헌

1.

김광식, 2002. “청담스님과 불교정화운동.” 『청담대종사와 현대한국불교의 전개』. 청담문화재단: 323-356.

2.

김선근. 2004. “청담 대종사님의 정화사상.” 『마음사상』 2: 1-38.

3.

김용환. 2004. “청담 선사의 마음 · 참나 · 생명의 시론적 연구.” 『마음사상』 1: 127-165.

4.

유승무. 2004. “청담스님의 불교 정체성과 정화운동의 전개.” 『마음사상』 2: 107-146.

5.

유승무 · 박수호. 2020. “동양사회사상적 사회변동이론 시론: 인간적 · 사회적 마음 구성체의 변동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81: 131-163.

6.

유승무 · 박수호 · 신종화. 2021(근간). 『마음사회학』. 한울.

7.

청담. 1977. 『금강경대강좌』. 보성문화사.

8.

청담문도회. 1999a. 『청담대종사전서 1: 마음』.

9.

청담문도회. 1999b. 『청담대종사전서 3: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10.

청담문도회. 1999c. 『청담대종사전서 4: 잡언록』.

11.

허혜정. 2002. “청담의 구세사상과 원향.” 『청담대종사와 현대한국불교의 전개』. 청담문화재단: 253-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