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본 논문은 9-10세기 신라시대 조성된 선사의 비문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작성된 문헌 사료인『삼국사기』와『삼국유사』와 신라시대 차 문화의 상황을 비교 검토하였다. 선사의 비문은 신라시대 당대의 불교계 상황과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일차적 사료이기에 13세기 이후의 시각이 반영된『삼국사기』와『삼국유사』보다 중요도를 더 두었다.
화엄사는 8세기 중반 신라의 왕실 직할 사찰인 황룡사의 연기법사가 창건한 사찰이다(황태성(무진), 2022). 그리고 황룡사는 신라에 최초로 화엄을 가져온 자장(慈藏, 594/599-653/655)이 주석했던 사찰이다(염중섭(자현), 2016). 이것을 토대로 화엄사는 신라 왕실 직할 사찰이며, 자장계 화엄을 이은 연기법사의 화엄종 사찰로 정리되었다(황태성(무진), 2023: 1-28). 본 논문은 이상의 연구를 토대로 8세기 중반 창건된 화엄사는 왕실 직할 사찰로 지리산 일대와 서쪽 호남지역1)을 통솔하기 위한 화엄종 사찰임을 먼저 밝히려 한다.
이것은 828년 대렴이 중국 당나라의 차를 신라에 가져왔을 때 지리산 화엄사 일대에 차를 재배했음을 알려준다. 828년 당시에도 호남과 지리산 권역에 화엄사에 비견될 웅장한 사찰은 찾아볼 수 없다.2) 그렇기에 지리산 일대에서 유일하게 확인되는 왕실 직할 사찰 화엄사에서 대렴의 차를 재배했다는 것은 합리적 추론이 된다.
그리고『삼국사기』의 대렴이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를 심고, 이후 신라에 차 마시는 문화가 성행했다는 내용에서 다음의 의미를 도출한다. 먼저 8세기 중반 화엄사는 창건과 함께 차를 재배하였다. 다음으로 828년 대렴의 차 화엄사에서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신라 왕실에서 차 재배를 공인하여 차를 지리산 권역과 호남지역에 보냈기에 차 마시는 문화가 융성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상으로 본 논문은 지리산에 차를 재배하여 신라 전역에 차 마시는 문화를 퍼트린 곳은 구례 화엄사임을 밝히려 한다. 대렴이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와서 심은 곳은 하동이 아닌 구례 화엄사이다. 하동에는 828년 폐사된 작은 절터가 있었을 뿐이다. 또한 대렴이 가져온 차는 당나라의 차이고, 이미 화엄사에서는 차를 재배하고 있었다는 점을 본 논문은 밝히려 한다.
II. 828년 대렴의 중국 차 지리산 재배의 의미
신라시대 활동한 선사의 비문에는 6명의 선사에게서 차와 관련된 내용이 서술 표현되어 있다. 먼저 남악 지리산 하동 쌍계사의 진감혜소(眞鑑彗昭, 774-850, 하동쌍계사진감선사탑비 河東雙磎寺眞鑑禪師塔碑)의 비문은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알려준다. 먼저 불교 예식과 관련 없이 차를 마시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감혜소는 차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하동 차 시배지의 근거자료에 큰 약점이 된다. 차에 관심 없는 선사가 차를 재배했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신도들이 당나라의 차를 얻어 선사에게 올리고 있는데, 무심하게 물에 끓여 마시고 있다. 차를 그냥 물에 넣어 끓이고 있는 선사의 행동은 차에 관한 무관심의 행동으로 보인다. 그리고 진감혜소가 차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직접 말을 하며 표현하고 있다. 진감혜소가 직접 차를 가져온 신도들에게 자신은 차를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840년-850년 쌍계사에 있을 때의 차에 대한 무관심의 표현이다.
(840-850년 사이) 어떤 사람이 중국의 차(漢茶)를 선물하자 곧 돌솥에 넣어 장작을 피우며 가루로 만들지 않고 그대로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것이 맛이 어떤 맛인지 모르겠다. 속을 적실 따름이다.”라고 하였다.3)
다음은 낭혜무염(朗慧無染, 800-888, 보령성주사지낭혜화상탑비, 保寧聖住寺址朗慧和尙塔碑)이 성주사에 머문 시기인 847년부터 857년 어느 때이다. 왕자의 신분인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이 제자의 예를 다하며 차를 보내고 있다. 이것은 신라시대 차를 매우 귀한 물건임을 알려준다. 귀하기에 왕이 예를 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는 일반적으로 아무나 재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시사한다. 즉, 왕실에서 인정하는 특정한 사찰에서 재배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정이 가능해진다.
(847-857년) 그때(즉위 전) 헌안대왕(憲安大王)께서는, …… 멀리서 제자의 예를 보이고 차와 향을 예물로 보냈는데, 한 달도 거르지 않도록 하였다.4)
헌안왕이 859년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 장흥보림사보조선사탑비 長興寶林寺普照禪師塔碑)에게 장흥에 있는 보림사인 가지산사(迦智山寺)를 기증하고, 거처를 옮기기를 청하기 전에 차를 선물하는 등 정성을 다하는 내용이다.
(859년) 왕명(헌안왕)으로…… 차와 약을 보내고 맞이하게 하였다.5)
867년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이 제천 월악산 월광사에 거주하는 원랑대통(圓朗大通, 816-883, 제천월광사지원랑선사탑비, 堤川月光寺址圓朗禪師塔碑)을 주지로 임명하고, 차와 선물을 보내고 있다.
(867-875년 사이) 경문대왕께서는…… 잇달아 은혜를 베풀어 차와……멀리에서 보내는 두터운 혜택을 베풀어 주셨다.6)
893년 수철화상(秀澈和尙, 817-893, 남원실상사수철화상탑비,南原實相寺秀澈和尙塔碑)이 경남 지금의 양산인 양주(良州) 심원산사(深源山寺)에서 입적하자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이 직접 차와 향을 내려주고 있다.
893년 수철화상이 입적한 후……여덟 차례나 재를 베풀어 백일의 예를 갖추었으며, 갖가지 차와 갖가지 향을 모두 왕실에서 내주었다.7)
882년 징효절중(澄曉折中, 826-900,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탑비, 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이 891년 병화를 만나 피신을 떠난다. 이후 강원도 평강에 이르렀을 때 진성여왕이 국사를 청하며 차와 향의 선물을 보내고 있다.
“대왕(진성여왕)이…(중략)…차와 향을 담은 양함을 보내었다.8)
이상에서 차에 관한 의미를 살펴보면 차는 왕이 선사에게 내려주는 최고의 선물이며, 최상의 공양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이 차를 직접 내려주었다는 것을 선사의 비문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강조는 신라시대 차는 일반인들이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귀한 물건임을 알려준다. 차는 왕과 왕실에서 사들이거나 구하여 내려주는 귀하고 비싼 공양물인 것을 알게 해준다. 신라시대 차가 귀하고 비싸단 것은 진감혜소의 비문에 나타난 선사의 차에 관한 말에서도 확인된다. 차의 재배는 왕실에서 인정하는 특정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일 것임을 시사한다.
한국에서 차에 관해 언급한 오랜 문헌은『삼국유사』와『삼국사기』이다. 두 문헌을 살펴보면 신라에서 차는 대렴이 가져온 중국 당나라 차를 지리산에 심는 828년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는 불교가 전래된 이후 늦어도 7세기부터는 왕실과 귀족들이 불전에 공양 올리는 귀한 물건임이 확인된다.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5가지의 차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먼저 661년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이 자신과도 연관되는 가야의 왕을 위해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있는데, 제사를 지내는 음식 중에 차를 술과 떡, 밥, 과일과 함께 올리도록 지시하고 있다.9) 제사에 올리는 음식은 그 시대 가장 귀한 재료를 올린다는 것은 상식적이다. 왕조 국가인 신라에서 종묘(宗廟)에 제사 지내는 음식에 차를 올린다는 것은 차가 그만큼 귀한 재료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떡, 밥, 과일과 함께 차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차를 음식의 종류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700년 전후 보천과 효명의 두 가지 내용을 보면 차는 부처님에게 공양 올리는 공양물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차를 마신다는 의미보다는 불전에 공양 올린다는 의미가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00년 전후) 두 태자(보천과 효명)는 매번 골짜기의 물을 길어와 차를 다려서 공양하고.10)
(700년 전후) 보천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중략)…다시 50년 동안 도를 닦으니…(중략)…정거천(淨居天)의 무리가 차를 다려 공양하였고.11)
8세기 중반 경덕왕과 관련한 두 가지 차의 내용은 불교 예식 이후 차를 마시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760년) 경덕왕 19년…(중략)…왕이 가상히 여겨 좋은 차 1봉과 수정 염주 108개를 하사하였다. 문득 한 동자가 있어 외양이 곱고 깨끗하였는데 무릎을 꿇고 차와 염주를 받들고 전각의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중략)…동자는 내원(內院)의 탑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고, 차와 염주는 남쪽 벽 벽화의 미륵보살상 앞에 있었다.12)
(765년) 3월 3일에 왕(경덕왕 24년)이 귀정문(歸正門)의 누 위에 나가서…(중략)…한 승려가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서 또는 삼태기를 졌다고도 한다. 남쪽에서 왔다. 왕이 그를 보고 기뻐하면서 누 위로 맞아서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누구요?”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충담(忠談)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어디서 오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소승은 3월 3일(重三)과 9월 9일(重九)에는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차를 다려 공양하는데, 지금도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에게도 차 한 잔을 줄 수 있소?”라고 하니, 승려가 곧 차를 다려 왕에게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는 특이한 향이 풍겼다.13)
760년 경덕왕은 월명사에게 차 1봉지와 수정으로 만든 108 염주를 선물하고 있다. 월명사에게 준 선물 중 귀한 수정으로 만든 108 염주와 차를 승려에게 선물한다는 것은 차가 귀한 선물이란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충담과 경덕왕의 내용은 차를 불전에 공양 올리고 음료로 마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경덕왕은 충담이 준 차를 마시며 맛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다. 이것은 경덕왕이 평소 차를 마시고 있었기에 차 맛을 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760년에는 최소한 왕은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차 문화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나온다. 828년 지리산에 차를 심은 이후 신라의 전 지역에서 차를 마시는 문화가 성행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지리산에서 재배한 차를 통해 차 마시는 문화가 성행하게 됐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겨울 12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문종(文宗)이 인덕전(麟德殿)에 불러 대면하고 연회를 베풀어 주었으며 차등을 두어 하사품을 내렸다. 입당(入唐)했다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茶)의 씨앗을 가지고 와, 왕이 사자에게 시켜 지리산(地理山)에 심도록 하였다. 차는 선덕왕(善德王)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 이르러 성행한다.14)
840년 이후 진감혜소의 비문 내용을 보면 차를 선사에게 먼저 선물하고 있으며, 선사는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고 바로 끓여서 마시고 있다. 840년에는 승려사회에 차를 음료로 마시는 문화가 일반화되어 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앞서 살핀 다섯 명의 선사의 비문에 보이는 왕이 선사에게 선물하는 차도 불전에 공양 올린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그렇다면 9세기 초가 되면 차는 음료의 의미로 보편화되어 있다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이러한 중심에 지리산에서의 차 재배가 있는 것이다.
828년 대렴이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를 심은 곳이라 주장하면서 차 시배지로 기리는 모습이 하동 쌍계사 일원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문헌으로 확인되는 신라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인 7세기 이후부터 차를 재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를 재배하기에 불전에 차를 공양 올릴 수 있는 양의 차를 공급할 수 있다. 또한 쌍계사를 창건한 진감혜소의 비문을 보면 중국 차라는 지칭이 보인다. 이것은 재배하는 차가 따로 있기에 중국차와 구분한다는 것을 의미해준다. 이러한 것을 종합하면 7세기 신라에서는 차를 재배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이 ‘차 시배지’의 가장 큰 문제점이 된다.
지리산 하동 쌍계사는 ‘대렴의 차 시배지’로 알려져 있다. 대렴이 가져온 중국 차를 쌍계사에 심으면서 한국에서 본격적인 차 마시는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황을순, 1975). 하동 쌍계사를 창건한 진감혜소의 일대기를 연대순으로 보면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 확인된다. 지금의 하동 쌍계사는 840년 전후에 진감혜소가 ‘옥천사(玉泉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진감혜소의 비문 서술 순서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830년 진감혜소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상주(尙州) 장백사(長栢寺)에 거주하고 있는데, 찾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거주 기간이 최소 1년 이상이 돼야 이름이 알려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판단일 것이다. 이후 사람들이 많아지자 진감혜소는 하동 지리산 화개곡(花開谷)의 절터에 거주한다. 이 시기 걸어서 이동했다는 표현과 장백사에서의 거주를 고려하면 832년은 된 것이다. 이 사찰은 미상의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창건한 사찰이지만 폐사된 상황으로 확인된다. 삼법화상의 절터(遺基)라고 서술 표현하고 있으며, 진감혜소가 사찰의 건물(堂宇)을 다시 짓거나 고치니(纂修) 완벽한 사찰로 이루어지고(儼若化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838년 민애왕이 선사에게 ‘혜소(慧昭)’’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황룡사의 승적에 올려주고 있다. 838년 민애왕이 이름과 승적을 올려주고, 이후 몇 년이 지나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삼법화상의 절터에서 남쪽 고개에 옥천사를 창건하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쌍계사인 옥천사는 840년 전후에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옥천사를 창건한 이유는 찾아오는 제자 등 사람이 많아지자 큰 터로 자리를 옮긴 것이 합당한 해석일 것이다. 이후 육조혜능(六祖惠能, 638-713)의 영당(影堂)을 세웠다. 진감혜소의 입적 이후 886-887년 사이에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이 쌍계(雙溪)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15)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삼법화상이 창건한 사찰은 대렴이 차를 가져온 828년에는 폐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하동 쌍계사는 대렴의 차 씨를 심은 곳일 수 없다. 삼법화상의 사찰 터는 폐허란 것을 앞서 살펴보았다. 여기서 삼법화상의 사찰은 8세기 중후반에는 창건된 사찰로 판단된다. 사찰의 목제건물이 무너지려면 적어도 50년의 기간이 흘러야 폐사가 되어 전각을 새로 지어야 할 상황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감혜소가 832년에는 삼법화상의 옛 절터에 와서 불사를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8세기 중반 어느 때 삼법화상이 사찰을 창건했을 것이다.
하동 쌍계사가 대렴이 가져온 중국 당나라 차 씨를 심은 곳이 아니란 점은 진감혜소가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한 비문의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앞서 확인했듯이 진감혜소가 남악 지리산 하동 지금의 쌍계사인 옥천암에 거주하던 때였다. 어떤 신도가 중국의 차를 진감혜소에게 선물하자 자신은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비싼 차를 마시지 않는 청렴한 수행자의 본분을 밝히고 있다는 점을 진감혜소의 비문에서 강조한 것일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진감혜소는 평소에 차를 멀리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또한 진감혜소가 차 맛을 모르며 속을 적실뿐이란 말은 다음의 의미가 있다. 9세기 중반에는 차의 의미가 불전에 공양 올리는 것과 함께 음료의 의미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으로 차를 마시는 음다의 행위가 9세기 중반에는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하동 쌍계사 일원의 ‘차 시배지’의 문제점은 확인된다.
Ⅲ. 화엄사의 지리산 권역과 호남지역 ‘한국 차 첫 재배지’ 가능성 검토
‘차 시배지’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차를 재배한 지역을 뜻한다. 그러나 첫 차 재배지를 특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의 차 시배지에 관한 백제나 가야에서의 가능성에 관한 연구들 또한 확인된다.16) 삼국에서 불교가 전래되면서 시작되는 차 시배지의 역사는 어느 지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특정하기보단 신라와 백제 그리고 가야에서 다발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판단일 것이다.
구례 지리산에 백제는 사찰을 창건하지 않았으며, 8세기 중반 이전 신라 또한 호남지역에 사찰을 창건하지 않았다는 것은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자료로 확인된다. 신라는 백제를 660년 멸망시켜 흡수하였지만 8세기 중반 화엄종 사찰이 창건되기 전까지 백제지역에는 사찰을 창건하지 않는다. 고려 또한 백제 관련 사찰과 백제 고승을 이은 사찰의 창건은 없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에 와서도 이어져 백제의 전통을 이은 불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8세기 중엽 경덕왕 시기에 화엄의 승려들은 대거 활동하기 시작하며(신형식, 2004: 160), 화엄종 사찰들이 지리산 권역에 창건되는 모습들이 갑자기 나타난다. 화엄 사상이 경덕왕(景德王, 재위 739-742)의 왕권 확립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직접적인 상황을 확인할 수 없으나(김복순, 1988: 125-127), 관련은 있어 보인다(최병헌, 1982: 84). 경덕왕의 왕권 강화와 관련하여 화엄 사상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경덕왕 재위 기간인 8세기 중반 화엄이 경덕왕과 관련을 갖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김상현, 1989: 239; 김재경, 2007: 155-156; 신형식, 2004: 160).
660년 백제를 정복하고 이후 668년 고구려 또한 당나라와 함께 멸망시킨 신라는 690년을 전후하여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이 관료제를 완비하고 정치 질서 체계를 확립한다(신형식, 2004: 147-150).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외교적으로 정치체계의 질서와 왕권의 강화에 힘쓴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은 중앙집중적인 안정된 사회를 이룩한다. 이후 중국식 행정관리 체계를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중앙행정관부를 완비하여 귀족의 세력을 약화한 경덕왕은 왕권 강화를 통한 중앙집권화를 이루게 된다(신형식, 2004: 153-159). 그러나 경덕왕은 귀족들의 도전을 염려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화엄의 불교 사상은 경덕왕에게 왕권 확립(김상현, 1984: 59-92; 길영하, 1988: 3-48; 김수태, 1991)의 사상적 배경으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세기 중반 경덕왕은 왕권 확립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노력에 화엄에서 사상적 배경을 확립하였다(신형식, 2004: 160). 이를 통하여 화엄의 세력을 확산하여 호남지역에까지 불교의 이념으로 중앙정치권력의 통치 배경을 제공하게 된다는 이론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왕권의 안정에 도움을 주며 세력을 확대하는 화엄은 지리산 권역과 호남지역을 아우르는 모습들을 보이기 시작한다.
경덕왕과 불교와의 역학적 관계 속에 화엄은 호남지역으로 확대되어 간다. 화엄사와 연관이 깊은 황룡사의 연기 법사는 754년 호남지역을 활용하여『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新羅 白紙墨書 大方廣佛華嚴經)』17)의 사경 불사를 일으킨다. 경덕왕 시기 화엄의 자부심은 화엄종을 대표하는 본존불을 요구했고, 그 요구를 바탕으로 밀교의 도상에서 화엄의 본존불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작을 보여주는 것이『백지묵서화엄경』의 변상도에 나타나는 보살의 머리를 하는 비로자나불이다. 이러한 화엄종 본존불을 독창적으로 창작하려는 노력은 보살의 머리 형태가 아닌 여래의 머리 형태를 하고, 손의 수인은 지권인을 한 화엄종의 본존불로 나타난다. 이것은 766년 지리산 동쪽인 <산청 석남암사지에 탄생한 비로자나불좌상>이다.
806년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 7년에 왕은 사찰의 창건을 금지하고 있다.18) 왕이 직접 명령하는 사찰 창건의 금지는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8세기 중반 지방으로 사찰 창건을 시작하여 확장하는 화엄종은 806년을 기점으로 지방에서의 사찰 창건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상으로는 합천 해인사의 802년 창건이 화엄종 사찰 창건의 마지막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미 화엄종은 지방에 자리 잡았으며, 왕이 지방 사찰 창건을 금지해야 할 정도로 사찰 창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후 어떠한 화엄종 사찰은 선종 사찰로 변모한다.
신라 사회에서 806년 애장왕의 사찰 창건 금지는 절대적인 명령이며, 어길 수 없는 명령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화엄 사찰은 8세기 중반 지방에 사찰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806년을 기점으로 화엄 사찰의 창건이 마무리된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이것은 여섯 개 선사의 비문에서 확인된다. 여섯 개 선사의 비문에서 보이는 8세기 중후반 창건되는 화엄종 사찰은 다음과 같다.
신행(神行, 704-779, 산청단속사신행선사비, 山淸斷俗寺神行禪師碑)의 비문은 산청 단속사에 세워져 있다. 단속사는『삼국유사』에 763년 신충이 왕을 위해 창건했다는 내용과 748년 직장 이준이 전에 있던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고쳐 단속사라 하였다는 각기 다른 두 내용이 전한다.19) 단속사가 당나라 북종선을 대표하는 통일신라 선종 사찰로 보는 연구도 있으나(정동락, 2011: 343-344), 본 논자는 화엄 사찰로 판단한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8세기 중엽 지리산 일대에는 화엄종 사찰이 창건된다(황태성(무진), 2022: 90-109). 둘째, 단속사가 북종선의 선종 사찰이라면 신행의 법맥을 이은 지증도헌의 비문에 단속사와의 인연이 표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증도헌의 비문에는 단속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화엄 사찰뿐이다. 그렇기에 단속사는 8세기 중엽 창건된 화엄 사찰로 판단된다.
진감혜소가 862년 하동지역의 지리산에 들어와서 삼법화상의 옛 절터에 기거한다는 것은 앞서 살펴보았다. 또한 삼법화상은 빠르면 8세기 중반에 절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유는 862년 폐허가 되었다면 두 세대인 60년은 이전인 8세기 중반부터 800년에는 창건된 사찰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학술적으로 확인된 것으로 8세기 중반 지리산 일대에 창건된 사찰은 산청 석남암사(지)20)와 구례 화엄사 그리고 단속사이다.
적인혜철(寂忍惠哲, 785-861, 곡성대안사적인선사탑비, 谷城大安寺寂忍禪師塔碑)은 직접 동리산(桐裏山)의 작은 사찰에 거주하며 ‘대안(大安)’이라 이름하고 있다. 대안사는 적인혜철이 대안사로 오기 전부터 승려들이 머물고 있던 작은 사찰이었다. 적인혜철이 찾아간 839-846년 이전에 곡성의 깊은 산속에 선종의 암자가 창건됐을 가능성은 적다. 그리고 선종 사찰이었다면 선사의 비문에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리산 권역 8세기 중후반 창건 되던 화엄종 승려의 사찰처럼 대안사도 화엄종 승려가 창건한 암자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적인혜철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안사에 거주하는 것을 보았을 때 화엄종과 선종의 밀접한 관계에서(황태성(무진), 2022: 90-109) 화엄종 승려의 사찰일 가능성이 크다.
보조체징은 837년 무렵 설산 억성사(雪山億聖寺)에서 염거의 법을 잇고 있다.21) 억성사는 8세기 중반 화엄종 사찰로 창건된 사찰이지만(황태성(무진), 2022: 99) 837년에는 선종 사찰이 되었다. 또한 859년부터 선사가 거주하는 가지산사(迦智山寺)는 현재의 보림사이며, 화엄종 승려인 원표(元表大德, ?-?)22)가 8세기 중반 창건한 사찰이다.23) 보림사는 750년 무렵 창건된 화엄종 사찰이 859년 선종 사찰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가지산사가 보림사로 바뀌는 것은 보조체징이 입적한 이후 883년에 왕이 ‘보림(寶林)’이라는 현판을 보내주면서이다.24)
홍각선사(弘覺禪師, 816-883, 제천월광사지원랑선사탑비, 堤川月光寺址圓朗禪師塔碑)의 비문 파편이 수습된 현재 선림원(禪林院)은 염거(廉居, ?-844)가 머문 설악산 억성사(億聖寺)로 판단 된다(권덕영, 1998: 82-83). 1948년 선림원지에서 발견되고 1951년 월정사에서 불길에 녹았지만, 명문이 확인된 선림원종(禪林院鍾)이 있다. 804년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 5년 주조된 선림원종을 보면 종을 주조하던 상황의 글이 새겨져 있다. 글을 보면 종의 주조에 참여한 인물 중 802년 애장왕 3년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화상(順應和尙)이 나온다. 화엄종 사찰인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이 함께 한다는 것은 억성사는 화엄종 사찰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종을 주조할 때 당사(當寺)의 옛 종의 쇠 280정을 사용한 것을 보았을 때 종이 주조되는 804년 이전 창건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25) 종합하면 억성사는 8세기 중후반 창건된 화엄종 사찰이 된다.
수철화상이 실상사에 첫 인연을 닿은 것은 실상선정(實相禪庭)에서 홍척을 만난 때부터이다. 그렇기에 수철화상은 복천사에서 수계를 받는 838년 이전 홍척에게 출가하여 실상사에 거주하고 있다.26) 지증도헌(智證道憲, 824-882, 문경봉암사지증대사탑비, 聞慶鳳巖寺智證大師塔碑)의 비문에는 826년경 당나라에서 홍척이 귀국하여 남악에 머무는데 실상사에 대한 설명이나 창건에 관한 자료는 없다.27) 8세기 중반 지리산 권역에는 화엄종 사찰이 창건되고 있다. 또한 826년경 선종 사찰의 창건 예는 찾을 수 없다. 홍척이 826년 남악에 머물렀다는 것은 기존 사찰에 거주한 의미로 종합된다. 또한 화엄종 사찰에 선사들이 거주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에 실상사는 화엄종 사찰로 창건되었을 것이다. 실상사 창건에 관한 여러 선행 연구 중 본 논자는 화엄종 사찰이란 주장에 동의한다(정동락, 2011: 343-344).
이상으로 창건연도가 확인되는 화엄종 사찰은 지리산 일원의 766년 조성하는 <산청석남암사지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관련된 석남사, 748년 중창·763년 창건된 산청 단속사, 759년 무렵 원표가 창건한 장흥 보림사, 8세기 중엽 연기법사가 창건한 화엄사 포함 4개의 사찰이 있다. 8세기 중후반 창건된 화엄종 사찰로 추정 가능한 사찰은 지리산 하동 삼법화상의 사찰 터, 곡성 동리산 태안사, 서산 보원사, 양양 선림원(억성사), 남원 실상사의 5개의 사찰이 있다.
8세기 중후반 창건되거나 추정이 가능한 화엄종 사찰 중 지리산에 창건되는 화엄종 사찰은 산청 석남암사, 산청 단속사, 하동 삼법화상의 사찰 터, 남원 실상사, 구례 화엄사, 곡성 태안사의 6개의 사찰이 있다. 그리고 지리산 권역 서쪽에 8세기 중후반 창건되는 화엄종 사찰은 장흥 보림사, 서산 보원사의 2개의 사찰이 있다. 그 외 8세기 중후반 창건되는 화엄종 사찰은 양양 선림원이 있다.
이상을 살펴보면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8세기 중반 6개의 화엄종 사찰의 창건이 지리산 권역에 몰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흥 보림사, 서산 보원사를 보면 산사 사찰인 화엄종 사찰이 8세기 중후반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호남지역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8세기 중엽이 되면 지리산 권역을 중심으로 화엄종 사찰이 창건되어 호남지역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화엄사는 8세기 중엽에 창건되는 큰 규모를 갖춘 사찰이다. 또한 화엄사는 명칭을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신라 화엄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그리고 왕실 직할 사찰 황룡사의 연기법사는 화엄사를 창건한 중심인물이다. 이를 통해 8세기 중반 창건 이후 화엄사는 지리산 권역과 옛 백제 지역인 호남지역 불교계를 아우르는 중심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이는 9세기 관단 사찰의 역할로 증명된다.
화엄사는 호남지역 화엄종을 총괄하는 관단 사찰이다(한기문, 1988: 47-49). 선각형미와 동진경보는 호남지역 사찰에서 수도하던 승려인데, 882년과 886년 관단 사찰인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있다. 이를 통해 화엄사가 호남지역을 총괄하는 화엄종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다.
8세기 중반이 되면 화엄종 사찰이 지리산 권역에 창건되며, 이러한 화엄종 사찰의 창건은 호남지역으로 퍼진다. 화엄 사찰의 확산은 신라 화엄종에 자부심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 자부심은 8세기 중반 이후 지리산 권역에 창건되는 화엄종 사찰의 독창적으로 창작되는 석조 조형물을 탄생시킨다. 첫 독창적 창작의 시작은 766년 조성된 산청 석남암사지 화엄종 본존불인 여래형 지권인의 불상 양식이다. 이러한 독창적 창작 양식의 조형성은 화엄사의 석조 조형물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것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 최초 고복형 <화엄사석등>, 한국 유일의 전각의 내벽을 두른『화엄경』인 <화엄석경>이 대표한다(황태성(무진), 2022: 187-234).
신라에 화엄을 최초로 전파한 인물은 자장이다. 자장이 신라에서『화엄경』을 전파하고 자장계 화엄종 집단이 황룡사에 구성되었다는 것은 추정 가능한 일이다. 신라에서 자장의 화엄종 집단이 구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장이 신라로 귀국한 643년 3월 16일30) 이후 선덕여왕은 자장에게 대국통(大國統)을 맡긴다. 대국통 자장은 황룡사 2대 주지에 취임하며, 선덕여왕에게 구층 목탑의 건립을 건의한다. 자장은 이후 선덕여왕의 도움을 받으며 신라의 승단을 정비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자장의 노력은 신라의 열 집 중에 여덟, 아홉 집은 수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게 만든다.31) 이러한 상황에서 황룡사에 자장의 화엄종 계파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경덕왕 재위 기간인 8세기 중반 무렵에 『삼국유사』에는 화엄종 승려가 갑자기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경덕왕은 “황룡사의 대덕(大德) 법해(法海)를 청해 『화엄경』을 강의하도록 했다.”32)는 기록이 있다. 또한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 4권이 794-799년 일본에서 필사되는데, 서두(書頭)에 “황룡사 석표원집”이 적혀 있다.33)『화엄경문의요결문답』은 8세기 중반에 찬술된 것으로 보이며(박미선, 2011: 40), 황룡사의 승려 표원(表員)이 주인공이다. 표원의『화엄경문의요결문답』은 신라의 여러 화엄 고승의『화엄경』에 대한 강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의상의『화엄경』 강의 인용은 세 차례로34) 다른 고승의 인용에 비해 적은 수다. 한번은 비판적인 인용을 하고 있는데(김상현, 1991: 57), 이것은 표원이 의상계 화엄종이라면 어려운 일이다. 표원은 의상계와 구별되는 화엄종으로 보는 근거가 된다(고익진, 1989: 365). 8세기 중반 의상계와 구분되는 화엄종은 자장계가 강력한 후보가 된다.
754년 무주지역을 중심으로 불사를 시작한『백지묵서화엄경』의 발원자인 황룡사 연기법사는 화엄사를 창건한 인물이다. 또한 연기법사는 자장계 화엄종 승려로서 지리산 권역과 호남의 화엄종을 총괄한다. 이러한 연기법사가 창건한 화엄사의 자장계 화엄의 위상을 살피기 위해서는 나말여초 활동한 관혜(觀惠, ?-?)를 살펴보면 된다. 관혜는 남악 화엄의 대표로 의상계 화엄을 대표하는 북악 부석사의 승려인 희랑(希朗, ?-?)과 대립하였다.35) 이것은 남과 북 지역적 대립이 아닌 화엄종 파벌의 대립이다. 이를 통해 남악 화엄사가 의상계 화엄과 구별되는 화엄종 파벌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파악된다(황태성(무진), 2022: 50-51). 나말여초 화엄종은 왕건과 견훤의 지지 방향에서 북악과 남악으로 대립하고 있다. 여기서 관혜가 남악으로 지칭되는 화엄사의 화엄종을 대표한다면 북악을 상징하는 의상의 화엄종과 대립하는 특징이 있어야 한다. 이런 대립의 중심에는 자장계 연기의 화엄종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관혜는 나말여초 지리산 권역과 호남을 대표하는 자장계 연기의 화엄종 승려가 된다. 여기서 화엄사는 나말여초 시대까지 지리산 권역과 호남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화엄사에는 현재 국보가 5점과 보물은 8점이 있다. 이중 통일신라 시기 조성된 유물인 <사사자삼층석탑>, <각황전앞석등>, <동·서오층석탑>, <화엄석경>, <서오층석탑출토사리장엄구>는 지리산 권역 사찰 중 최고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황룡사 연기법사가 창건한 화엄사는 8세기 중엽 경덕왕과의 관계에서 왕실 직할 사찰로 창건되었다. 종합해 보면 화엄사는 지리산 일대와 호남지역을 통솔하는 중심 사찰이며, 왕실 직할 사찰로 창건된 것이다.
828년 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를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는 것은 지리산에 차를 재배할 수 있는 큰 사찰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리산의 사찰에 차를 재배하게 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차를 재배한 인력이 있는 큰 사찰이 828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찰은 지리산에 화엄사가 유일하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다. 지리산 일대에 8세기 중반 사찰이 창건되고 828년이 될 때까지 대단위의 불사를 이룬 사찰이 화엄사 이외에 또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 시기 화엄사에 버금가는 대단위 불사를 이룬 사찰이 있다면 대렴의 차 씨를 심을 사찰이 되기 때문이다. 지리산 지역에 8세기 중엽부터 828년 이전 창건되어 운영되는 사찰은 남원 실상사, 산청 석남암, 산청 단속사가 있다.
먼저 남원 실상사는 지증도헌의 비문을 보면 홍척이 826년 남악에 도착했을 때 이미 창건되어 있던 화엄종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차를 재배하고 수확하여 다른 지역으로 보내줄 만큼 큰 사찰이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수철화상의 비문에 보면 수철화상이 838년 실상사에 도착했을 때 이름이 실상선정(實相禪庭)이었다. 826년 홍척이 거주하기 시작한 화엄종 사찰이 838년 12년 동안 선종의 사찰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상사는 화엄종의 큰 사찰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화엄종의 큰 사찰인 화엄사, 해인사, 부석사나 서산 보원사는 선종 사찰로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9세기 초 선사들이 거주하면서 선종 사찰로 변모하는 화엄종 사찰은 다음의 특징이 있다. 작은 화엄종 사찰에 유명한 선사가 거주하면서 중창 불사를 일으켜 선종 사찰로 만드는 모습들을 보이는 것이다.
장흥의 보림사는 8세기 중반 원표가 창건한 가지산사를 보조체징이 859년 왕의 지원을 받아 선종 사찰로 변모시켰다. 또한 실상사는 826년 홍척이 도착했을 때 큰 사찰이 아닌 곳으로 확인된다. 산청 석남암은 한국 최초의 비로자나불좌상이 조성된 사찰이다. 그런데 이 사찰은 작은 사찰임이 확인되기에 차를 재배한 사찰일 가능성이 없다. 산청 단속사는 신행이 거주하고 813년 신행의 비문을 건립한 사찰이다. 화엄종 사찰이면서 신행의 비문을 건립하지만, 선종 사찰로 거듭나지 못한 사찰이다. 이것은 신행의 북선종 세력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신행의 비문을 보면 선사의 비문을 건립할 때 신라의 왕이나 중앙정치권력 집단의 소통이나 후원은 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속사도 차를 재배하여 외곽에 보내주어 차 문화가 성행하게 할 정도의 큰 사찰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남는 사찰은 화엄사이다. 화엄사는 지금 남아있는 사찰의 사격으로 보아도 충분한 사찰이다. 8세기 중반 왕실 지원의 불국사와 버금가는 불사를 이룬 사찰이기 때문이다.
차를 재배한다는 것은 차의 소비자와 차를 재배할 기술자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집단이 함께 있어야 차를 재배할 수 있다. 차를 모르는 지역에서 차를 재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828년 흥덕왕은 화엄사가 큰 사찰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며, 화엄사에 차를 재배할 사람들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828년 대렴의 차 씨를 통해 전국으로 차가 유행한 것이 아니라, 이미 화엄사는 차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차가 재배되고 있는 곳이어야 차 씨를 보내 차를 재배하게 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828년 화엄사는 왕실과 소통하고 왕이 차의 재배를 명령하는 왕과 관련이 깊은 사찰이다. 황룡사는 왕실 직할 사찰이고,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법사는 황룡사 출신이기 때문이다. 흥덕왕이 지리산 화엄사에 차를 재배하라 명령했다는 것은 이러한 이유로 설명된다. 또한 828년 화엄사에 차를 재배한 이후 신라에 차가 성행하였다는 것은 다음의 의미를 내포한다. 왕이 지방의 사찰이 커가면서 차의 수요를 중앙 경주에서 충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리산 화엄사에 차를 재배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는 적어도 호남권 화엄종 사찰에서는 화엄사의 차를 전달받고 있었다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828년 차 씨를 지리산 화엄사에 보낸 것은 흥덕왕이 차를 재배하도록 한 것만이 아니라, 차 재배와 전국으로 차를 전달하는 거점으로 공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덕왕이 화엄사를 차 재배와 함께 전국으로 차를 전파하는 거점으로 공인한 이후 신라 전역에 차가 성행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삼국사기』의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 이르러 성행한다.’36)라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상으로 화엄사는 대렴의 차 씨를 재배한 곳이며, 차 마시는 음다의 문화를 전국으로 성행하게 한 사찰임이 확인된다.
Ⅳ. 결론
본 논문은 신라시대 당대 화엄사의 상황을 알 수 있는 9-10세기 조성된 선사의 비문과 고려시대 문헌 사료를 통하여 다음을 확인하였다. 화엄사는 8세기 중반 황룡사의 연기법사가 왕실의 직할 사찰로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 왕실에서 황룡사 연기법사를 통하여 화엄사를 창건한 이유는 지리산 권역과 호남지역을 총괄하는 중심 사찰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또한 화엄사는 8세기 중반 한국 차를 지리산에 재배하여 828년 이후 차를 마시는 문화를 전국으로 확산시킨 사찰이다.
신라는 7세기 말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옛 백제의 권역인 지리산 일대와 호남지역에 사찰을 창건하지 않는다. 그런데 8세기 중반이 되면 경덕왕의 왕권 강화 정책과 맞물려 지리산에 창건한 화엄사를 중심으로 화엄종 사찰들이 창건된다.
본 논문의 의미는『삼국사기』의 828년 대렴이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를 지리산 화엄사에 심은 이후, 차를 마시는 문화가 신라 전역에 성행한 이유를 밝힌 것에 있다. 828년 화엄사에 대렴이 가져온 차를 흥덕왕이 심게 하면서 화엄사가 재배한 차를 공인하여 전국에 차를 퍼지게 한 것으로 이해하여 풀어내었다. 이러한 해석만이『삼국사기』에 보이는 신라 선덕왕 때부터 있었던 차가 828년 이후에 전국으로 성행한 이유가 해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