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논문

수인스님의 수행, 사상 그리고 실천*

최연희 **
Yeon-hee Choi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대전 보현정사 주지
**The Chief Priest, Daejeon Bohyun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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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Jun 12, 2024; Revised: Jun 22, 2024; Accepted: Jun 25, 2024

Published Online: Jun 30, 2024

국문 초록

본 본문에서 분석하는 수인스님은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산업화 시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였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운문사를 정화하고, 중찰불사를 통해 비구니 대가람의 기틀을 마련한 공로가 있다. 이러한 성과는 대립과 투쟁, 폭력이 압도했던 시절에 화합과 자비, 상생이라는 불교의 가치를 통해 사찰을 정화했다는 점에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논의해야 하는 활동이다. 그럼에도 수인스님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며, 학계에서도 크게 주목하고 있지 않다. 본 논문은 수인스님의 수행, 사상 그리고 실천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그 본질과 의의를 탐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첫째, 스님에게 수행은 종교지도자라는 공인의 삶을 굳건하게 버티는 토대였다. 스님 자신도 투철하게 수행하였고, 제자들과 불자들에게 신심을 다해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둘째, 스님의 사상은 무욕과 정진행으로 정리할 수 있다. 스님은 언제나 무욕과 무상의 삶을 살았고, 이는 인욕과 자비로 삶에서 구현되었다. 또한 스님은 출가수행자라는 자신의 본분(本分)과 본심(本心)에 최선을 다했다. 셋째, 스님의 실천은 사찰안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을 향하였다. 스님은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는 원칙을 강조하며, 모든 사람을 위해 자비행을 추구하였다. 이처럼 수인스님의 수행, 사상, 실천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우리는 수인스님의 가르침이 오늘날 한국사회와 한국불교가 처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the diverse activities and significant achievements of Bhikkhuni Sooin, spanning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o the industrialization era. In particular, she contributed to laying the foundation for the Bhikkhuni great temple through the purification and rebuilding of Unmun-sa. Additionally, her achievements are especially meaningful and deserving of discussion because they purified temples through Buddhist values of harmony, mercy, and coexistence during times when confrontation, struggle, and violence were prevalent. Despite these contributions, research on Bhikkhuni Sooin remains limited, and she has not received substantial attention in academic circles. This paper aims to systematically analyze Bhikkhuni Sooin's practice, thought, and social engagements to explore their essence and significance. Firstly, for Bhikkhuni Sooin, practice was the foundation that supported her public life as a religious leader. She was deeply dedicated to her own practice and earnestly encouraged her disciples and followers to engage in sincere and diligent practice. Secondly, her thought can be summarized by the principles of desirelessness [無欲] and diligent practice [精進行]. She lived a life characterized by desirelessness and impermanence, which manifested in her patience and compassion. She devoted herself fully to her fundamental role and original mind as a monastic practitioner. Thirdly, Master Sooin's actions extended beyond the confines of the temple to embrace the wider world. She emphasized the principle of equality of all life and pursued compassionate actions for the benefit of all people. By comprehensively analyzing her practice, thought, and social engagements, we confirm that her teachings possess the potential to contribute to resolving various issues faced by contemporary Korean society and Buddhism. This study highlights the enduring relevance and significance of Bhikkhuni Sooin's teachings in addressing the challenges of today.

Keywords: 수인스님; 수행; 사상; 실천; 무욕; 정진행; 자비; 상불경보살; 사찰정화; 운문사
Keywords: Bhikkhuni Sooin; Practice; Thought; Social Engagements; Desirelessness [無欲]; Diligent Practice [精進行]; Compassion; Sadāparibhūta Bodhisattva[常不輕菩薩]; Temple Purification; Unmun-sa

Ⅰ. 서론

한국불교학계에 ‘승가학’이라는 단어는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지만, 교계와 학계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다. 때문에 ‘승가학’이 불교학과 어떤 측면에서 다른지, 또 달라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내용을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충분하지 않다.

승가학은 한국불교학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승가학을 최초로 주창하고 중앙승가대 승가학연구원 설립에 기여한 종범스님은 서구 인문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현재의 불교학은 불교이념을 나타내는데 적절하지 않으며,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믿음, 실천을 강조할 수 있는 학문적 뒷받침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전통불교학의 정체성을 계승해 불교를 전하고, 승가를 육성하는데 적합한 승가학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종범스님의 주장에 대해 당시에도 다양한 찬반의견이 제기되었다(현대불교, 2001.12.03.).

승가학에 대한 찬반의견은 있지만, 서구의 인문학적 방법론에 천착한 오늘날의 불교학이 ‘신앙으로서의 불교’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으며, 출가수행자들의 실천적 삶과 양성에도 기여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는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하듯, 출가수행자 관련 연구는 그리 많지 않으며, 한국 근현대기에 활동한 승려들에 관한 연구는 더욱 찾기 어렵다. 최근 15년 동안(2008∼2022) ‘한국불교’를 주제로 발표된 국내 연구논문을 대상으로 연구동향을 분석한 결과에 ‘근현대기에 활동한 승려와 한국승가’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박종향 등은 토픽 모델링 기법을 활용하여 9개의 토픽을 추출하였는데, 그 결과는 ‘불교 사회화와 대중화’, ‘불교 수행과 신앙 전통’, ‘불교학 연구와 방법론’, ‘원효와 한국 불교철학’, ‘선의 역사와 근대의 선승’, ‘동아시아 속의 한국불교’, ‘신라와 고려의 불교 사상’, ‘사회 복지와 불교적 실천’, ‘불교 교단과 종파의 전개’였다. 연구자들은 이 9개 토픽이 한국불교학의 주요 분야와 주제들을 시대별로 포괄하고 있으며, 2000년대부터 꾸준히 게재되고 있다고 분석하였다(박종향·김은영·김용태, 2024).

한국불교학계에서 승가와 개별 승려 연구는 관심 밖의 연구주제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비구니 연구에 대한 관심은 더욱 적다. 즉, 이중으로 배제되고 있는 연구주제이다. 광우스님을 연구한 원법스님은 “비구니는 비구와 더불어 승가의 기본 구성원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고” 있다고 불교학계의 연구경향을 비판하고 있으며(원법, 2022: 248), 근대 한국 비구니 선수행 문화를 연구한 임홍경과 홍상욱도 ‘비구니 연구가 전국비구니회나 한국비구니연구소, 개별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나, 앞으로 더욱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임홍경·홍상욱, 2020: 212).

비구니 승가와 개별 비구니의 연구가 부족한 이유로 사회경제적 구조, 기록을 남기지 않은 승가 문화 등이 제기된다. 기존 연구에서 제기되는 이러한 이유들에 본 연구자도 동의한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이유에 더해서 명망가 중심의 연구 관심에도 주목한다. 비구니 관련 연구들은 광우스님, 명성스님, 대행스님, 은영스님 등 극히 소수의 비구니 스님들로 제한되어 있다. 이와 다르게 효록스님은 ‘한국 비구니 생애사 연구’라는 연구에서 대한불교조계종에 출가해 구족계를 받은 40∼60대 여성 출가자 10명을 분석하기도 하였다. 이 연구는 연구대상 비구니의 성장 배경, 성장 과정, 출가 동기, 비구니로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역경)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대처/해결 방법을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비구니를 종교지도자로 주목하지 않으며, 때문에 그들의 사상과 실천을 끌어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처럼 비구니 연구를 포함하여 한국불교학에는 출가수행자(승려)를 종교지도자로서 주목하는 그래서 찬탄해야 하는 소수의 승려들과 그렇지 않은 일반 승려들로 구분하는 시선이 존재한다. 이러한 시선들은 일부 승려들의 행적을 신화화하고, 기타 나머지 승가 구성원들을 연구에서 배제하는 오류를 낳는다.

하지만 한국 승가에는 종교지도자로서 자신만의 사상을 정립하고, 이를 사회에서 실천한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 현대 한국불교의 성장에는 비구니 스님들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앞서 언급한 비구니 스님들뿐 아니라, 교계에서 주목하지 않지만, 한국불교와 비구니 승가를 위해 헌신하고, 정착과 성장에 기여를 한, 그래서 기억해야 하는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수인스님이다. 수인스님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한국전쟁, 산업화에 이르는 근현대기에 활동하였고, 포교 활동에 주력하면서 사찰을 창건하였다. 포교에 전념하면서도 불교정화운동에도 참여하여, 오늘날 비구니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운문사를 정화하고, 비구니 대가람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비구니의 대외 활동이 어려웠던 당시의 사회환경을 고려하면, 이러한 성과들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 비구니 승가는 이제까지의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비구니 출가자 감소라는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첫걸음은 선대의 모범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즉, 근현대기에 활동한 비구니 스님들을 발굴하고,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새로운 희망찾기이며, 내일을 위한 준비라는 의미가 있다. 수인스님은 이러한 작업에 적합한 스님 중 한 분이다.

한 종교지도자의 삶과 사상, 실천을 분석하고 정리하기 위해서는 문헌조사와 인터뷰 등이 활용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근현대기에 활동했던 대다수 비구니 스님은 법어집 등처럼 문헌자료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이에 주요 연구방법으로 인터뷰를 활용하였다. 연구하려는 스님과 함께 활동했고 관련 기억이 있는 연구참여자들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또한 수인스님이 남긴 혹은 스님과 관계된 다양한 자료들을 찾아서 인터뷰 자료들과 비교 검토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1)

인터뷰 조사는 연구자가 연구참여자를 직접 만나서 면담하는 것을 권장한다. 대면인터뷰를 통해서 시간의 제약을 덜 받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주제에 대해 깊게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구술자가 주석하고 있는 사찰을 직접 방문하여 대면하여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하지만 인터뷰를 계획하고 진행하던, 당시는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시기로서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던 시기였다. 이로 인해 일부 면담조사는 비대면 전화인터뷰로 진행하였다. 전화를 이용하여 면접조사를 진행한 사례 중에는 이후 여건이 충족되어 사찰을 직접 방문하여 추가로 대면조사를 진행한 사례도 있다. 면접조사는 수인스님의 상좌 및 손상좌 5명, 운문사 학인 2명 총 7명을 실시하였다. 모든 면접조사는 연구참여자의 동의를 받아 녹취하였고, 이후에 한글워드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전사하여 분석에 활용하였다.

표 1. 연구참여자 현황
연구참여자 수인스님과의 관계 면접 일시 비고
성○·상○ 상좌·손상좌 2020년 4월 17일, 7월 17일 대면(1·2차)
재○* 운문사 학인 2020년 6월 7일 대면
혜○ 손상좌 2020년 6월 27일, 8월 11일 전화(1차), 대면(2차)
묘○ 손상좌 2020년 6월 27일, 8월 11일 전화(1차), 대면(2차)
일○ 손상좌 2020년 7월 9일 대면
자○** 운문사 학인 2020년 7월 18일 전화

* 재○스님과의 면담은 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병실에서 대면하여 진행하였다.

** 자○스님과의 면담은 전화인터뷰로 진행되었으나, 스님과 연구자와의 직접 통화가 어려워서 스님의 상좌가 연구자의 질문을 전달하고 스님의 대답을 연구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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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스님에 대한 기억이 있는 구술자(상좌스님과 손상좌스님, 당시 학인스님)들의 나이가 70대 중후반 2명, 80대 5명으로 인터뷰를 장시간 진행하기 어려웠다. 보통 면담은 1시간 정도 진행되었는데, 연구참여자 중 일부는 면담이 30분을 넘어가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등의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또한 일부는 고령으로 인해 당시의 일 중에서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억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기억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구술하는 것을 주저하기도 하고,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강한 확신을 표하기도 하였다.

Ⅱ. 수인스님의 삶과 수행

수인스님은 1899년에 태어나서 거의 1세기를 살았고, 한국의 역사를 함께 하면서 출가수행자로서, 사회와 불교의 요구를 회피하지 않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였다. 수인스님의 삶을 3시기 -출가수행기, 교화활동기, 이타회향기-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1. 출가수행기

수인스님은 1899년 9월 3일(음) 부친 유석곤(兪錫坤)과 모친 윤영호(尹永浩) 사이 1남 2녀 중 둘째 딸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속명도 수인이다. 수인이 8세였던 해에 부친이 돌아가셨고, 이 일을 계기로 집안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당시 비구니 수행도량인 운문사 청신암이 위치한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있던 고모집에 맡겨졌다. 수인의 고모는 당시 청신암 원주 행민스님과 인연이 있었다. 마을로 탁발을 온 행민스님과 우연히 만나면서 수인은 출가에 이르게 되었다. 고모에게서 어린 수인의 사정을 들은 행민스님은 수인에게 함께 절로 가자고 권하였다. 수인은 고모의 허락과 스스로의 결심에 의해 행민스님을 따라 청신암으로 입산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수인스님은 훗날, “고모님 허락이 있으면 스님 노릇을 열심히 하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운문회보, 1988.11.25.; 상영, 2009).

수인스님은 11세가 되던 해인 1909년 12월 18일 본사인 운문사에서 해담(海曇)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2) 사미니계 수지 이후 14년 뒤인 1923년 3월 15일 통도사에서 해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5년 뒤인 1914년에 양산 통도사(옥련암) 강원에 입교해서 사집부터 배웠고3), 법화경과 화엄경까지 보았다. 수인스님은 당시 조실이었던 해담스님으로부터 사집·사교·대교·수의과 등 1924년까지 10여 년 동안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섭렵하였다.

수인스님은 특히 법화경을 일심전념으로 보았고, 이후에 후학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신도들을 제접(提接)할 때도 법화경의 말씀을 들어 법문을 설하였다. 통도사 강원에서 간경을 시작한 1914년부터 30여 년 동안 수행을 지속하였다. 특히 강원의 간경을 마친 후 참선 수행에 주력하였다. 첫해에는 만공(滿空, 1871-1946)스님이 있는 부산 금련산 마하사 반야암 선방에서 하안거에 들었다. 이를 시작으로 금정산 대성암·천성산 내원사·금강산 유점사·보덕암·신계사 법기암 등에서 20여 안거를 성만했다. 마하사 반야암 선방에서 수행할 때는 하루 18시간 용맹정진하였다. 이런 모습에 만공스님은 “수인 수좌 대단하이. 나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마음속에는 명안종사의 가르침을 담고, 몸으로는 출가자의 습의를 익혀 부처님 정법을 담는 법기가 되시오”라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포교 원력을 세우고 처음 창건했던 사찰이 금련산 옛터에 위치한 서운암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때의 인연은 수인스님에게 매우 뜻깊은 인연이었음이 분명하다.

2. 교화활동기
1) 포교활동 시작

수인스님이 쉼 없이 정진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수인스님 자신은 어떤 장애와 경계에도 걸림이 없는 참수행자로 성장하였고 단단해졌지만, 세속의 중생들은 그렇지 못했다. 일제의 갖은 수탈정책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고 희생을 강요 당했으며, 희망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인스님은 나라를 잃은 중생들이 고통 속에서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데, 속세를 떠나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은 부처님의 뜻을 따르는 제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수인스님은 중생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이들과 함께 하면서 이들을 구제하기로 결심하였다.

수인스님은 1940년 세수 42세에 부산 금련산 기슭의 사찰터에 ‘서운암’ 창건 불사를 시작하였다. 1941년 정전(正殿)을 개설하고, 주지로 취임하였다. 수인스님은 수행과 사찰운영 등에서 언제나 여법하게 행동하였고, 신도들에게는 한결같은 자비로 대하였다. 신도들에게는 이해하기 쉬운 생활법문으로 포교하였고, 공부와 염불 등 수행을 권장하였다. 이 때문에 수인스님이 운영했던 사찰에는 항상 신도들이 많이 찾았다. 사찰대중에게는 불자들의 시주공덕에 대해서 강조하며 “시주에게 감사하라”고 당부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음에도 한국사회에는 평화가 찾아오기보다는 불안과 고통이 지속되었다. 남과 북은 이념으로 분열되어 민족은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었고, 급기야 1950년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동족상잔으로 국민들의 희생과 고통은 이어지고 있었고, 국토와 재산은 파괴되었다.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와중에 수인스님은 “불교는 호국의 기치로서 입정안국(立正安國)이 수행의 요체”라며, 매일 주야조석(晝夜朝夕)으로 법당에서 사분정근을 이어갔다. 수인스님은 ‘깊은 신심’으로 교학연찬과 선풍진작에 솔선하였고, 사찰도 투명하게 운영하였다. 수인스님의 사찰운영은 지역을 넘어 전국 불교계에도 알려졌고, 사부대중의 존경을 받았다.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사찰 주지를 임명할 때 이러한 수인스님의 사찰운영 능력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수인스님은 포교와 교화활동에 전념하면서도 참선과 간경·주력 정진을 놓지 않았다. 특히 안거수행을 강조하였다. 수인스님은 주지 소임으로 바쁜 와중에도 방부를 들고 안거수행을 실천하였다. 운문사 주지 시절에도 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서 한두 달씩 정진하였고, 1958년 ‘범어사 금어선원 조실 동산’의 명의로 발행한 제107호 안거증서가 유품으로 남아 있다.

2) 운문사 주지 활동

경상북도 청도군 호거산에 위치한 운문사는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되던 1950년대 초기에는 대처승이 점유하고 있던 사찰이었다. 사찰의 관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10여 동의 전각이 다 허물어져 있었고, 심지어는 굴뚝까지도 어느 한 곳 온전한 데가 없었다.

수인스님은 사찰운영 능력을 인정받아 운문사 주지로 임명되었고, 임명 직후 권속 및 다른 비구니들과 함께 운문사로 들어갔다. 수인스님은 사찰정화를 위해 비구니들의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도반이었던 금룡스님과 협의하여 금룡스님은 주지, 자신은 총무를 맡기로 하였다. 1955년부터 1966년까지 운문사에서 12년간 사찰살림과 운영을 주도하였다. 특히 주지로 활동하는 기간에는 소작인들에게 상환되어 있던 사찰 소유의 전답 120여 마지기를 환수하고, 사찰 소유권 재판에서 승소하는 등 대처승과의 대립관계도 청산하여 비구니 사찰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정화운동 초기에 비구니에게 할애되었던 동화사가 다시 비구사찰로 전환되면서 운문사에게 비구니 총림의 역할이 부여되어 비구니들을 위한 전문강원을 개설하였다. 1회 졸업생으로 10명이 배출되었고,4) 이들은 비구니들의 권익 옹호와 계율 및 도제양성에 기여하였다. 당시 운문사의 환경과 조건을 생각하면 비구니 총림의 역할을 떠맡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인스님은 비구니 승가의 발전이라는 대의와 공익을 위해 이를 감당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스님은 공익을 언제나 먼저 생각하는 종교지도자였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운문사 주지 재임 시의 일화가 있다. 사찰정화 및 비구니 사찰 유지의 어려움과 이에 대응하는 수인스님의 지혜를 알려주는 이야기로 여러 행장에 빠짐없이 소개되고 있다. 당시는 비구니의 위상을 정립하지 못했던 때여서 비구니가 주석하는 사찰에 비구들이 들러서 위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기도 했던 시절이다. 하루는 한 비구가 운문사에 들러서 경내 마당이 움푹 패여 물이 고인 것을 보고 냉소를 머금으며 물었다고 한다. “저것이 무엇이오?” 이 물음에 수인스님은 ‘연당(蓮塘)’이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비구는 다 무너져 가는 요사채 굴뚝을 보고 무엇이냐고 물었고, 이에 수인스님은 ‘첨성대’라고 답하였다. 수인스님의 재치 있는 대답에 이 비구는 더 이상 흠을 잡지 않았다.

피폐해진 운문사에 취임하여 강원개설, 학인수용, 각 전각의 기와 번와불사, 원광·보양·원응 3국사 비석·비각 중수, 상수도 공사, 산판도굴방지, 개금불사 등 수많은 불사에 10여 년간 진력을 다하였다. 여러 사찰 불사 중에서 수인스님은 교육환경을 조성하는 데 특히 주력하였다. 비구니 도량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초기부터 비구니 강원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학인들이 공부하고 수행하며 숙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당우와 요사채를 마련하기 위해 10여 동의 당우를 보수하였고, 허물어진 벽을 세우고, 지붕의 깨진 기와를 교체하고, 굴뚝을 수리하였다. 따라서 운문사의 모든 대중, 특히 문중의 상좌와 손상좌들은 새벽예불과 저녁예불 외에는 시간 대부분을 화주와 울력에 매달렸다. 이처럼 운문사 전체 대중이 사찰불사에 참여하였다.

오백나한전(이하 오백전) 불사와 관련해 경봉(鏡峰, 1892-1982)스님 관련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수인스님은 오백전이 협소하여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통도사 극락암 조실이었던 경봉스님이 사리암에서 기도를 마치고 운문사에 들렀다. 오백전을 참배한 뒤 경봉스님이 나한님 한 분을 살며시 들자 그 밑에 연기(내력)가 나왔다. 그래서 대웅전 서편으로 오백전을 신축하였다. 1958년 오백전 신축불사를 시작하여 1961년 단청불사에 이어 1965년 개금불사까지 마무리하였다. 오백전 신축불사를 계기로 대웅전에 모셔 놓았던 오백전의 주불인 석가모니불을 옮겨 모시는데 토불(土佛)이라서 옮기는 게 쉽지 않아 동민(洞民) 30여 명을 동원하였다고 한다(한국비구니연구소 편, 2007: 115).

상수도불사도 수인스님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공사이다. 운문사는 오래전부터 개울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사리암 기도객과 관광객들이 늘어남에 따라서 식수로 사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서 운문사에서 사리암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물탱크를 설치하고 파이프를 연결하고 식수를 공급하는 불사를 하였다. 하지만 당시는 장비가 없어서 산길을 따라 땅을 파고 파이프를 묻는 작업을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진행해야 해서 공사 기간과 인부 모두 다른 곳보다 2배나 더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어렵게 상수도공사를 완공하고, 수각에 물을 채워 깨끗한 물을 부처님께 올렸을 때 운문사 전체 대중이 기뻐하였다고 한다(명희, 1986).

한국전쟁으로 산림이 크게 훼손되어 산림제도가 정비되었다. 이로 인해 ‘사찰림’이더라도 관청의 허가 없이 벌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지역민 중에는 관청 및 사찰 몰래 사찰림을 도벌하는 사건들이 잦았다. 운문사가 위치한 호거산은 둘레가 80리, 넓이가 3,139정보나 되어 산림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아일보> 1955년 5월 19일자에는 부서진 다리 수리를 위해 목재업자가 청도 운문사 사찰림을 벌채한 사건, 같은 신문 6월 19일자에는 사찰림 일부에 대한 위조 벌채허가 서류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었다(법보신문, 2015.08.11). 특히 숯을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는 밀양 주민들의 도벌(盜伐)을 막는 일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수인스님은 운문사 주지로서 사찰림 보호에 앞장 서 불법 벌목을 막아서 관청과 신뢰관계를 구축하였다.

수인스님은 총무로서 소임을 시작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구두 주지 임명받은 대로 사찰의 살림을 총괄하는 주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58년부터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주지로 공식 임명되었고, 1966년까지 2만기를 공식 주지로 역임하였다. 총무란 이름으로 활동한 기간까지 합하면 총 12년 동안 운문사가 비구니 중심도량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였다.

3) 그 외 활동

수인스님은 종단에서 공식적인 운문사 주지로 임명되어 임기를 시작한 1958년부터 능인학원(대구 능인중·고등학교) 이사로 취임하여 8년간 청소년 포교에 열성을 보였다. 능인학원 이사 활동은 당시 경북 종무원장 서운(瑞雲)스님의 부탁이 있었다. 당시 불교재단이었던 대구 능인학원은 대처승과의 시비 중에 있었고, 이 문제해결의 적임자로 수인스님을 추천한 것이다. 수인스님은 능인학원이 조계종 종립학교로 남게 되는 데 역할을 하였다. 능인학원 관련 일을 보기 위해 대구로 출타하는 일이 있었고, 이 경우에 수인스님은 도지사의 관사에서 능인학원 관련 일을 의논하였다.

당시 운문사까지 이동하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대구에서 숙박이 필요하였다. 수인스님은 평소에도 자신을 종교인으로서 존경하고 있었던 도지사의 관사에서 잠을 청했다(명희, 1986). 당시 도지사는 박경원 장군이었는데, 부부가 함께 스님이 창건한 부산 서운암에서 생남기도(生男祈禱)를 하고 가피를 입은 경험이 있었다. 이 경험이 있어서 이들은 수인스님을 평소 존경하고,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인스님이 대구에서 일을 보면 숙박 등 편의를 제공하였고, 능인학원 일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서 조계종 종립학교로 유지될 수 있었다.

또한 수인스님은 1959년 세수 61세 때에는 제2대 중앙종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비구니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종회의원으로 종무행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고, 특히 비구니 위상정립과 권익옹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3. 이타회향기

수인스님은 운문사 주지를 내려놓은 이후 1967년 경남 양산군 기장면 동부리(당시 주소)에 위치한 보명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이때는 지역주민들의 초청이 있었다. 수인스님은 보명사에서 20년간 주지로 재임하였다. 보명사는 1942년 10월에 여성재가불자 6명과 출가자 1명 명의로 창건하였지만, 번듯한 법당이 없었고, ‘교당(포교당)’으로 불리고 있었다. 수인스님이 주지로 취임하기 이전에도 여러 스님이 머물다 갔지만 창건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할 뿐 정식 사찰로서 활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인스님은 주지로 부임하면서 보명사를 조계종 소속으로 등록하고, 대웅전을 건립하는 등 ‘사찰’로서 면모를 갖추도록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주목되는 점은 청소년법회를 꾸준하게 지원하였다는 점이다. 수인스님은 자신이 직접 청소년법회를 운영하지 않았다. 젊은 출가자들에게 법회 운영의 책임을 맡겼고, 지원만 할 뿐 간섭하지 않았다. 손상좌인 혜◌에게 청소년법회를 맡겼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이 기간에, 사찰에서 『법화경』과 『금강경』을 강설하면서 후진들과 신도들을 교육하였다. 출가자들에게는 경전을 한 줄씩 읽으면서 독해하도록 하였고, 재가자들에게는 이해하기 쉽도록 설법하여 인기가 많았다.

비구니승가 원로로서 1982년부터 부산 범어사에서 조계종 단일구족계단이 열리자 수인스님은 3년 동안 비구니 증사로서 비구니 배출의 증명을 맡아 비구니의 사표가 되었다. 비구니 증사로 법을 전할 때는 “수행자가 동·하안거 기간인 결제 철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참선수행 처소에 머물러야 한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절 문을 나서는 일이 없어야만 삿된 마음이 없어지고 공부가 익어 평생 절을 지킬 수 있다”라고 가르침을 전하였다.

수인스님은 고령이 되자 주지직을 내려놓고 보명사에서 서운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처를 옮긴 뒤에도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에 꼭 참석하였다. 예불 후에는 두 시간씩 기도정근을 하였고, 사찰의식에도 대부분 참여하였다. 이후 90대 중반 거동이 어려워져 대웅전 출입이 힘들어지자 대웅전이 보이는 요사채의 한 공간에서 예불하였다. 이곳에서 예불만이 아니라, 여러 수행을 실천하였다. 오고 가는 많은 신도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 또한 수인스님은 자기관리에도 철저하여 의제(衣制)를 항상 여법하고 단정하게 갖추었고, 생활도 규칙적으로 지속하였다. 이 때문에 잔병치레 없이 건강을 유지하였고, 대다수 고령자가 겪는 만성질환의 고통을 겪지 않았다. 이에 신도들은 수인스님에게 건강 비결을 자주 질문하였고, 수인스님은 자신의 수행담을 들려주면서 수행과 일상생활을 부처님 가르침대로 행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적게 먹고 잠잘 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손에서 일거리를 놓지 말고 잠시라도 여유가 있거든 부처님의 경전을 독송하거나 염불을 하면 자신의 건강은 물론 가정과 이웃이 행복하니 이것이 곧 부처님 제자의 일상(日常)이니라(상영, 2009: 164).

서운암에서도 수행은 계속되었다. 수인스님은 요사채에 머무는 시간 대부분을 「대방광불화엄경 왕복서(大方廣佛華嚴經 往復序)」을 독송하면서 보냈다. 이처럼 수인스님은 출가 이후 90 평생 수행을 철저하게 실천하였고, 반듯한 생활을 유지하였다. 이를 출가수행자의 본분사로 생각하였다. 서운암에 머물면서는 후학들과 신도들에게 말이 아닌 행동과 실천을 통해 수행상을 보여주었다.

1997년 3월 12일 음력 2월 초나흘 수인스님은 주위를 정돈하고 상좌와 손상좌를 불러들이더니 “이제 세속의 인연이 다하여 공적(空寂)할 때가 되었다”라고 말하고 입적하였다. 세수 99세, 법랍 89세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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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수인스님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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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사상: 무욕(無欲)과 정진행(精進行)

9세에 입산하고 11세에 수계하여 99세에 입적한 수인스님은 거의 90년의 세월을 ‘승려’로서 살았다. 이는 스님이 사적인 삶이 거의 없는 ‘공인(公人)’으로서 삶을 한평생 살았다는 의미이다. 요즘처럼 언론과 시민사회의 체계적인 감시와 비판은 없지만, 어쩌면 과거에 ‘비구니’를 향하는 감시와 비판이 더욱 날카로웠을 수 있다. 사회와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이겨내고 비구니(종교지도자-공인)로서의 삶을 여법하게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생의 토대가 되는 불교사상이 튼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인스님은 사상을 분석할 수 있는 법문집을 남기지 않았고, 상좌스님들은 수인스님의 법문을 기록하지 않아서 스님의 사상은 스님의 행적을 통해 유추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수인스님을 기억하는 여러 상좌스님과 학인스님의 증언을 통해서 스님의 사상을 무욕과 정진행으로 정리하였다.

1. 무욕(無欲)6) 사상

수인스님의 삶을 제자들은 무욕과 무상의 삶으로 기억하였다. 농지개혁으로 약화되기는 했지만, 한국사회에서 사찰들은 전통적으로 토지 소유자로서 ‘지주’의 역할을 하였다. 토지를 소작 맡기고 얻는 임대수입은 사찰에 귀속되었지만, 당시에는 승려의 개인소유 제도도 있었다. 수인스님도 은사로부터 물려받은 개인 논이 있었다. 수인스님은 이 소작료를 사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사찰과 마을(사하촌) 주민들을 위해 회향하였다.

당신 돈을 곡수(穀數)7) 받아서 옛날에 논이 조금 나옵니다. 그걸 받아서 대처승 내보내고, 불사하시고, 거기 가서 또 산신각 짓고 그렇지요(성○8)).

그래 곡수 받아가지고, 내 없는 사람들 다 대주고, 한 말도 주고, 당신 논이 한두 마지기 정도 돼 있거든 그 곡수 받아서 내는 부분 없고, 그걸 받아서 다 희사했어(성○).

신도들에게 설법했을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수인스님은 손수 사찰정화를 진행한 사찰(영주암)을 비구에게 아무 조건 없이 인계함으로써 실천하였다. 제자들의 구술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욕심이 없다’라는 인용구에는 이러한 일화들에 기인한 것으로 짐작된다.

욕심도 없고. 상도 없고, 머… 한 푼 들어오면, 두 푼 보시했어요. 노장님이. “돈 모아서 내가 뭐 할 끼고, 내가 부처님한테 바쳐야지”하고, 곡수 받은 돈, 거 조금 받아서 영주암 중창했지, 서운암도 지었지. 저기 기장 보명사도 하시고. 돌아가실 때 돈이 없었어요. 돈 100만 원이 없었어요. (연구자 : 그럼 다 불사하신 데 쓰신 거예요?) 예, 불사할 때 쓰고. 큰스님네한테 베푸시고, 따라갈 스님이 없어요. 너무 착해. 인욕도 많이 하시고(성○).

수인스님의 무욕의 삶은 제자들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혜○은 수인스님의 좌우명을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 나오는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었다고 심층면담에서 언급하였다.

來無一物來 去亦空手去

自財 無戀志 他物 有何心

萬般將不去

唯有業隨身

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

이 세상에 올 때 우리는 한 물건도 가져오지를 않았고

이 세상을 떠날 때 또한 빈손으로 가게 되리니

자신의 재물도 아끼는 마음이 없는데

다른 사람의 재물에 무슨 욕심이 있겠느냐.

그 어떤 것도 저승길에 동행하지 못하지만

오직 생전에 지은 업만은 따라 가나니

사흘 동안 닦은 마음 천년의 보물이요

백 년 동안 탐한 재물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티끌이니라(원순, 2010: 138-141).

글쎄 뭐 좀 머고. 노스님은 항상 그러셨거든. 백년탐물이 일조진이라고 삼일수심천재보라고. 그게 좌우명이었어. 삼일수심이 천재보라고 그게 좌우명이거든(혜○).

위에서 언급된 경구는 마음이 중요하며, 참된 자아와 행복을 찾으려면 탐욕을 버리고 집착을 없애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앞의 문장까지 보면 인생을 오고 감에 있어서 재산과 명예·권력 그 어떤 것도 가져가지 못하지만, 오직 자신이 지은 업(業)만을 가져간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수행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수행을 통해 마음을 가리는 삼독을 소멸하는 선(善)을 많이 행하고, 악(惡)을 멀리 해야 한다는 실천적 의미도 담고 있다.

이 문구가 갓 출가한 사미/사미니가 읽는 입문서이자 기본규율서에 담겨 있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스님의 불교사상 핵심을 공(空) 혹은 무(無)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무욕(無欲)은 명예와 권력욕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욕구 중에서 가장 강한 욕구가 명예욕이라고 이야기한다. 명예욕은 불교용어를 빌리면 ‘상(相)을 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인스님은 운문사 주지로 10여 년간 재임하면서 사찰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아무 미련없이 사찰 주지 자리에서 내려왔으며, 이후 역사에서 그러한 사실들이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제자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를 권하였다. 수인스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말들을 ‘상을 내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모든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며 거부하였다.

내가 막 노스님이 그런 거 미리 말을 안 해 가지고 우리가 했다는 그거는 상으로 안 내느냐고 하니까. 내가 노스님한테 막 그러니까는. 사리암 원주보고 그카니까. 노스님이 야, 야, 염라대왕한테 가면 다 나와가 있다. 그리 안 해도 저절로 다 되니까 신경 쓰지 마라 안 해도 된다. 내 보고 그래. 지금 우리가 ○○하고 이래하듯이 이렇게 하면은, 안 그래케도 된다. 다 저기 염라대왕 앞에 가면 다 적혀 있으니까 내가 가면 가기만 하면 된다. 이러셔. (중략) 절대 못 하게 해. 다 알고 있으니까 하지 말라고, 말하지 말라고, 그러지. 얼마나 좋은 말씀하시는 데. 상내면 안 된다. 이러면서, 상내지 말라. (중략) 나는 막 큰절, 큰스님네 보고 내가 막 그렇게 했거든. 막 이런 것도 했는 것도. 저런 것도 노스님이 했다고 말하면 될 건데 말 안 하고 그런다고. 내가 막 사리암 원주보고 막 그렇게 했거든. 그렇게 하니까. 노스님이 그렇게 하지 마라. 내 절대 그런 거 안 해도 된다. 하지 말라 그랬다 (상○).

수인스님은 출가수행자로서 세속적인 가치에 근거하여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세속을 초월하여 일체의 분별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고 실천하였다. 사찰정화와 중창불사에 헌신한 자신의 노력이 역사에 기록되기보다는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수인스님도 다양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출가수행자로서 묵빈대처(默賓對處)를 선택하였다.9)

2. 정진행(精進行) 사상

이제는 노스님이 된 제자들은 한결같이 수인스님을 ‘스님노릇’을 잘한 출가자로 기억하고 평가하였다. 수인스님을 가장 오래 시봉한 상좌 상○은 스님에 대한 평가를 묻는 연구자의 질문에 대해 “뭐 중노릇을 잘한 것, 그것밖에 더 있겠어요. 정말 열심히 하고 잘 한 거.”라고 답하였다. 불제자로서 출가수행자로서 자신의 본분(本分)과 본심(本心)에 최선을 다한 수인스님의 노력에 대한 상좌들의 평가이다. 즉, 수인스님의 노력은 꾸준하였고, 올바르고 바른 노력이었다는 평가이다. 단순히 열심히 노력했다는 의미만을 담고 있지 않으며, 올바른 방향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꾸준히 노력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 우리는 자비정진(慈悲精進)으로 정리할 수 있으며, 이는 수인스님 불교사상의 또 다른 핵심이다. 수인스님의 정진행 사상은 깊은 신심과 수행의 철저함, 자비행으로 구현된다.10)

우리 노스님은 신심이 많아. 어릴 때 가셔 가지고 법당에 가서 절 안 하실 때가 없고. 희한하게 하시는 갑다. 불공을 하시면 3시간도 하고 5시간도 하고, 오죽하면 그만 하이소. 옛날에는 불 떼 가지고 이래 하니까. 조금만 하고 내려 오이소. 그러면 “부처님한테 잘 해야지(성○).”

사리암 기도하러 갔다 내려오면서 그래요. 사리암 그 도랑물을 떠다가 부처님한테 만날 큰절 부처님한테 올렸는데, 그러지 말고 내가 여∼ 물을 해 놨으니 이 물로 올리라고. 그래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항상 부처님한테는 좋은 물을 올려야 된다고(상○).

신심 있게 잘 하고. 그런 것을 해야 한다고 그런 부탁을 많이 하셨지. 오죽하면 듣기 싫었으면 기억하고 있을까. 항상 불법에 대해서 신심껏 해라. 잘못하면 벌 받는다. 잘해라. 계속 그런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우리 노장님이 신심이 많아요. 어데 가도 부처님한테 절하느냐(절하느라)고 안 들어오시는데, 법당 안에 꼭 절하고 들어오시지. 들어 오이소. 와이라노. 내가 하는데 놔 나라. 내가 신심 있어 내가 하는데, 니가 그리 방해하면 안 된다. 나 꾸짖고 그랬지(성○).

수인스님이 말년을 보냈던 서운암의 연구참여자들은 스님이 ‘신심이 많았다’라고 기억하였다. 어린 시절 상좌로서 수인스님을 보필하였던 성○는 추운 겨울에도 3~5시간씩 기도를 하는 스님에게 불평하기도 하였고, ‘신심 있게 잘 하라’라는 가르침을 잔소리처럼 자주 들었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산세가 험해서 젊은이들도 오르기 힘든 사리암에 거의 매년 2박 3일 일정으로 기도 다녔다고도 언급하였다.

성○와 상○이 언급한 일화 중에서 수인스님이 더 이상 법당에 올라가기 힘든 상황이 되자 법당이 보이는 곳에서 매일 기도하고 예불을 드렸고, 이 때문에 장삼을 매년 1개씩 해서 입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일화를 통해 우리는 수인스님의 정진행 사상이 신심과 엄격함, 철저함, 자비로 구체화되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상○ : 우리 노스님은 99세까지 장삼을 일 년에 하나씩 떠줬어요.11) 저[대웅전] 못 간다고 요서 예불로 얼마나 하시는지 몰라요. 염불하시고 절하시고 그래 가지고 옷 장삼을 고창에서 3개 했어요. 한 해에 하나씩 장삼을 뜯었다니까.12) 우리는 몇 년 입어도 안 헤져. 안 떨어진다. 우리 노스님은 얼마나 장삼 이런 것도.

성○ : 신심이 있으니.

상○ : 우리 보살들이 그걸 보고 그칸다. 거기 못 간다고 여기 매 앉아 계시고, 우리 기도하면 여기에 매 앉아 계시고.

연구자 : 법당에 못 가시니까.

성○ : 신심을 우리 노스님 따라갈 사람 없어요.

연구자 : 그럼 법당에 언제까지 올라가셨는지?

상○ : 구십 몇 살까지 올라가서, 95세, 96세까지는 올라갔어요. 근데 97세 되니까 못 올라가고 여기 앉아서 법당을 보고 매 예불한다고 그것도 장삼이 다 떨어지도록.

부산시 수영구 망미산 중턱에 있는 서운암은 사찰의 가장 높은 곳에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 좌측 낮은 곳에 긴 건물이 있고, 이 건물에 종무소와 요사채·공양간 등이 있다. 해당 건물의 입구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사무를 보는 공간에서 대웅전 건물이 보인다. 해당 공간에서 수인스님은 예불시간에는 예불을 드리고, 때에 따라서는 절이나 염불 등 개인적인 수행도 실천하였다. 사찰을 방문하는 신도들은 이 모습을 보았고, 이 행동은 깊은 신심과 수행자로서의 엄격함 및 철저함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우리 노장님이 [참선] 많이 하셨지. 참선 안 하시면 주력하시고, 주력 안 하시면 경(經) 드시고, 일체를 그냥 안 계시는데. 손님 오시는 것, 재하시고, 그리 안 하면은 책을 보고 염불하라 하시고 가만히 계시는 스님이 아니라고 너무 그리 하니까는 나는 어떤 때는 걱정된다. 아니 이제 그만하고 불공도 하면 보통 3시간 5시간 이래하니까. 얼마나 지겹습니까. 그래서 스님 불공 제발 좀 그만해 주이소. ‘야, 큰일 나겠네(성○).’

교와 선을 함께 수학하였던 수인스님은 수행에서도 특정한 수행법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참선과 주력·간경 등 여러 수행법을 실천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불공도 오랜 시간 공들여서 봉행하였다. 이 때문에 어린 제자의 눈에 스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는 스님’이었다. 이는 나이 든 이후의 생활에서도 반복되었다. 수인스님의 손상좌로 70년대 후반에 약 2년 동안 수인스님을 시봉한 혜○의 기억에서도 같은 모습이 언급되었다.

이렇게 내가 밤에 자다 이렇게 가만히 보면은 밤중에도 가만히 앉아 있어 있으면서 참선을 하시더라고. 불경을 보셨고 염불도 하셨고 주력도 하셨고 기도도 하셨고. 그 승려로서 이제 다른 거는 외전은 절대 안 보셨어. 다른 책은 안 보셨고 그것만 이렇게 늘 이렇게. 승려의 그것만 이렇게 늘 지켰었고(혜○).

1970년대는 수인스님이 부산 기장군에 위치한 보명사의 주지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주지 업무로 바쁜 낮 시간에는 수행을 하지 못해서 밤 시간을 활용하여 수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에도 수인스님은 참선·간경·염불·주력·기도 등 다양한 수행법을 실천하였다. 또한 외전을 굳이 보지 않고 경전만을 읽은 것은 그의 삶의 단계와 관련되어 보인다. 70년대 후반은 수인스님의 세수를 고려하면 생의 마무리를 위해 지난 삶을 정리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불교공부에 더욱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스님네는 참선·주력·간경, 이런 거를 내 것으로 만들고, 바깥에 나가면 안 된다. 열심히 공부도 잘 해야 되고. 그렇다고 정말 그런 소리를 매 들어도 예. 맨날 하는 소리다 싶어. 인자는 가만히 생각하면 그렇다니까(상○).

맨날 하는 소리가 그래요. 노스님은 절대 중은 [안거 중에] 밖에 나가면 안 된다. 항상 결제 중에는 나다니지 말라. 옛날에는 결제 중에 나가면 맞아 죽어도 아무 그것도 안 했답니다. 옛날에는 노스님이 그리 하시고 항상 결제는 절에서 공부하고 내투지 않았어요. 공부하고 있어야 된다고. 노스님은 맨날 하는 소리가 그 소리. 내 노스님하고 같이 살았거든요(상○).

이처럼 정진행 사상은 제자들에게 유훈(遺訓)처럼 전해졌다. 수인스님의 첫째 상좌 창법(昌法, 1918-1984)13)이 세수 67세에 입적하여 손상좌 상○이 수인스님을 가장 오랜 기간 시봉하였다. 그가 스님에게 가장 자주 들었던, 즉 스님이 가장 강조했던 말은 수행의 철저함이었다.14)

Ⅳ. 실천: 상불경 보살행과 화합승가를 위한 사찰정화

승려로서 거의 90년의 삶을 보낸 수인스님은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산업화 시기까지 활동하였으며, 매우 다양한 활동을 하였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는 여러 활동과 성과 중에서도 상불경 보살행과 운문사 사찰정화 활동에 주목한다. 상불경 보살행은 ‘불성론’이란 불교의 핵심 교리를 삶으로 구현한 실천을 의미한다. 운문사 사찰정화는 대립과 투쟁, 폭력이 압도했던 당시 사찰정화 속에서도 화합과 자비라는 불교적 가치를 실천한 특별한 실천이었다.

1. 상불경 보살행

종교인이자 출가수행자로서 수인스님의 실천은 자비행에서 드러난다.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은 한결같이 수인의 성품을 ‘자비’로 표현하였다.

늘 이렇게 당신이 늘 이렇게 자비스럽고 완전 자비고, 어 그리고 아주 겸손도 하시고(혜○).

‘자비’는 불교의 대표적인 덕목으로 모든 붓다의 제자들이 실천하는 덕목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출가수행자인 수인스님의 자비행이 특별한 주목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수인스님의 자비행은 일반적인 의미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Daum 어학사전)는 행위이기보다는 ‘본래성불(本來成佛)에 대한 깊은 믿음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무연자비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본래성불은 모든 중생은 스스로 안에 온전한 불성을 갖추어 있어 지혜와 자비의 덕성이 이미 구현되어 있다는 사상이다. 인간은 원래 미혹하고 사악하기 때문에 원래 없는 지혜를 만들어 내고 자비를 단련해야 한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오히려 중생들에게는 이미 깨달음이 구비되어 있고, 자비의 덕성은 늘 발현되고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마다 깨달음과 자비로운 행위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미산, 2015: 154-156). 따라서 모든 중생에게 차별 없는 절대평등한 자비행을 실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건 없는 자비의 실천이 가능하다.

본래불성에 대한 깊은 믿음은 남녀노소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진 온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하고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하지만 실제 그러한 마음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으며, 그러한 마음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일체 존재를 존귀한 존재로 여기고 공경심을 갖고 대한 인물을 『법화경』에서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로 그리고 있다. 상불경보살은 『법화경』 제20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에 등장하는 보살이다. 이름의 뜻을 보면, 상불경은 ‘항상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라는 뜻이며, 안으로는 불경(不輕)의 이해(理解)을 품고, 밖으로는 불경의 대상을 공경하며, 몸으로는 불경의 실행을 세우고, 입으로는 불경의 가르침을 설하였다.15)

보다 구체적으로 상불경보살의 실천을 보면, 위음성왕(威音聲王) 여래가 이 세상을 떠나신 뒤 정법이 멸하고, 상법시대가 되자 교만한 제자들이 큰 세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때 상불경이라고 하는 보살비구가 있었다. 그는 비구·비구니·우바이·우바새를 볼 때마다 예배·찬탄하고서 “존귀하신 분이여, 저는 당신들을 깊이 공경하고 가벼이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모두 보살행을 실천하여 성불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我深敬汝等 不敢輕慢所以者何 汝等皆行菩薩道當得作佛)”16)라고 예경하였다. 그는 멀리서 사부대중을 보아도 일부러 그곳까지 가서 예배·찬탄하였다(이재수, 2004: 350). 보살은 본래성불론과 인불사상 등으로 반복되는 불성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였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해코지도 인욕하였다.

사부대중 가운데 화를 내거나 마음이 부정(不淨)한 이가 있어 나쁜 말로 욕설을 하면서 말하기를 ‘이 무지(無智)한 비구야, 어디서 왔기에 스스로 말하되, 나는 그대들을 경멸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마땅히 성불하리라고 수기(授記)를 주는가. 우리는 그런 허망한 수기를 받지 않겠다’라고 하였느니라.17)

상불경보살의 실천처럼 수인스님도 모든 중생을 불성을 갖춘 존귀한 존재로 존중하고 차별 없이 대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은 수인스님이 자신의 제자들도 함부로 하대하지 않았다고 구술하였다. 수인스님에게 『초발심자경문』18)을 배운 인연으로 매해 세배를 하러 가는 노스님을 따라 수인스님을 만난 인연이 있는 한 비구니는 수인스님의 인상에 대해서 점잖고 딱딱하지 않게 정중하게 자신을 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언급하였다.

항상 인사하러 세배하러 가면 항상 점잖으시고 딱딱하신 게 아니라 점잖∼하시면서 이렇게 우리한테 대하신 그 기억이 나요(지○).

이러한 수인스님의 인품은 당시 불교계와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 경상북도종무원에서 작성한 스님의 개인신상조사서 특징란에 “자비인내(慈悲忍耐)”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당시 지역불교계에서 수인스님은 자비와 인욕을 실천하는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운암에서 함께 주석했던 성○와 상○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를 설명하였다. 제자들도 윗사람처럼 존경하였고, 신도들도 마찬가지로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나아가 신도들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았고, 신도들을 보살이라는 호칭의 뜻 그대로 보살로 대하였다고 한다. 또한 상대의 나이를 고려하지 않고 어린아이들도 하대하지 않았다고 설명하였다. 아래의 수인스님 상좌스님들과 연구자의 대화에서 스님의 상불경 보살행 실천을 확인할 수 있다.

상○ : 항상 뭐 상좌나, 손주나 이렇게 만나도 항상 큰 스님을 대하듯이 이렇게 대하세요. 노스님이. 손주상좌가 오든지, 늘 상좌가 오면은 아랫사람을 웃사람처럼 존경하고 항상 그랬어요. 뭐라카고 그래 안 하시고. 꼭 좋은 말로 이렇게 해주시고. 미안할 정도로 그런 말씀 좋게 하시고. 항상 다정다감하시고. 안 머라 합니다.

연구자 : 아까 말씀 중에 큰스님께서 상좌나 손상좌들한테도 높이고 그랬다고 하셨는데, 신도분들한테도 그러셨나요?

상○ : 예. 신도들도 하나도 신도고 처사들하고, 머리 하나 달린 신도고 나는 스님이다. 그게 없어요. 항상 그 사람도 항상 존경하고 좋게 하고 야 야 어디를 보면 볼 점이 있다. 와 그 사람이라고 나쁠까. 다 좋은 점이 있어. 그라믄 안돼요. 그러면 항상 좋게 애기 합니다.

성○ : 요런 아-들도 하대하는 법이 없어요.

상○ : 우리는 스님이고 자기네들은 보살이라고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우리 노스님은 그런 거 하나도 없어요. 항상 보살도 막 보살도 보살인데. 보살이지하면서 절대 못하게 해요. 항상 좋게 얘기하고 좋은 말 해주고. 얼마나, 우리 노스님 같은 분이 참말로 우리가 지금 안 보고 말해 가지고 그렇지. 참말로 너무 너무 참 좋은 분이라예.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손상좌 일○스님이 젊은 시절 안거수행을 하고 있을 때 수인스님에게서 편지를 받았고, 이때 편지글이 높임말로 되어 있어서 같이 편지를 본 당시 입승이 수인스님을 ‘본받을만한 노인네’라고 칭한 일화이다.

일○ : 엄청 자비스럽지.

연구자 : 어떤 일로 자비스러웠던 일 하나, 이럴 때 참 자비스럽다고 느꼈던 그런 얘기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일○ : 젊은 사람들한테 참 공손하셨지. 내가 오대산 살 적에 노스님한테 편지를 했더니 답장을 보냈는데 ‘해라’라 안하고 일○수좌 정진하시니라고 수고하시지요. 해라를 안 해.

연구자 : 하대는 안 했다. 손자한테도.

일○ : 입승스님이 묵스님이 아이고 이 노스님은 손주상좌한테 편지를 하시면서 이렇게 해라를 안 하고, 저기 참 노인네 본받을 노인네라고 그랬어.

경전 속의 상불경보살은 이상적인 보살상으로 사람에 대한 존중과 인욕, 특히 인간존중의 귀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 모든 불제자들은 익히 알고 있는 교리이지만, 이를 제대로 실천하는 이는 많지 않다. 대부분 제도와 관습에 따라서 행동한다. 제자와 사찰 신도들을 항상 존댓말로 대하지 않는다고 흠이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인스님은 자신이 배운 바를, 자신이 믿는 바를 실제 삶에서 구현하였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갈등과 반목을 반복하는 현대 한국사회를 생각하면, 모든 존재의 존엄성과 존귀함을 드러내는 수인스님의 성품과 실천은 오늘날 그 필요성과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서로 신뢰하고 믿을 수 있으며, 서로를 완벽한 인격체로 대하는 인간관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와 여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보편적인 신행과 전법의 모델이 될 수 있다(김종두, 2018: 106).

2. 화합승가를 위한 사찰정화

불교정화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5년 8월 12일과 13일 이틀간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승려대회에서 종회의원 56명과 중앙간부를 선출하였고, 종헌수정안 등이 통과되었으며, 각도 종무원 간부와 전국 623개 사찰 주지 인선도 선임하였다. 특히 각처의 사찰 주지의 부임이 시급한 문제로 논의되었다(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편, 2015: 205). 당시 법률에 따르면 사찰 주지 임명에는 문교부장관의 허가가 필요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공식 절차를 밟지 못하고, 주지 소임을 맡았다. 1955년 8월 12-13일에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623개 사찰의 주지를 총무원에서 임명했음에도 21개 사찰의 주지만을 인가 신청하였고, 문교부는 이중에서 19개 사찰의 주지만을 인가하였다. 결국 604개 사찰의 주지는 정부의 인가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주지로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불교정화운동 시기에 사찰의 주지 소임 수행 여부는 개별 사찰의 정화 상황에 따라 결정되었다. 동화사처럼 정화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 주지 직무를 수행하였지만, 그렇지 않고 대처승과의 갈등이 지속된다면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공식적인 주지 임명 절차와 무관하게 일선 사찰의 주지 임명과 부임은 전국승려대회에서 임명되고, 해당 사찰에서 정화운동을 전개하고, 대처승으로부터 ‘사찰 접수’를 하는 순서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대다수 사찰의 주지 소임은 공식적인 임명절차를 밟기보다는 비공식적으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운문사 초대 비구니 주지도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와 연관되어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70년대에 2년 동안 수인스님을 시봉했던 혜○도 수인스님에게서 이러한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에서, ‘그러면 운문사 주지를 수인스님이 맡고...’”라는 말씀이었다. 수인스님은 이처럼 전국승려대회에서 운문사 주지로 임명되었지만, 이는 당시 공식적인 절차가 아닌 불교계 내부의 비공식적인 임명이었다.

1950년대 중반 사찰 주지 임명은 곧 사찰정화라는 중요한 과제 부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사찰정화는 물리적인 점유를 동반하였다. 따라서 사찰정화를 위해서는 지역 비구니 승가의 결집을 통한 인적·물적 자원 확보는 매우 중요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수인스님은 물리력을 동반한 사찰정화보다는 화합승가를 구축함으로써 사찰을 정화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이는 당시 시대적 환경에서 비구니 승가의 취약함을 반영한 결과이며, 동시에 화합을 강조한 부처님의 뜻을 현실에서 실천함으로써 진정한 승가의 본분을 다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래서 스님의 화합승가는 우선은 지역의 비구니 승가를 향했고, 그다음은 대처승까지를 포괄하였다.

우선, 지역 비구니 승가를 포함하는 화합승가 구축을 위해 수인스님은 지역불교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던 금룡스님에게 주지직을 양보하고, 자신은 총무를 맡았다. 수인스님이 직접 작성한 이력서도 1955년 운문사 총무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초대 주지였던 금룡스님은 얼마 되지 않아 주지 소임을 내려놓았고, 사중회의를 통해 수인스님이 주지를 맡았다. 공식적으로 주지에 취임한 수인스님은 사찰운영과 재판 과정을 운문사 대중들과 공유하며, 당시의 어려운 현실을 헤쳐 나갔다. 특히 사찰 정화 과정에서 대처승들과의 싸움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이때 학인스님들의 역할이 컸다.

대처승하고 싸웠던 것밖에 생각이 안 난데. 대웅전에 와 갖고 앉아 갔고 안 비켜주고 너희는 무슨 자격으로 ‘이년들아’ 하면서 막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언제 비구니 스님들은 또. 대웅전에 와 가지고 자리 차지하고 막 그랬대 ‘이 자식들아! 느그는 처자식이 다 있는데, 절에 가서 살 자격이 있나’ 하고 그래. 맨날 그러고 싸웠던 기억 밖에 없다 하더라구(자○).

묘○ : 그때 그 당시에는 대처승하고 싸움할 때다. 재판하고. 그리 할 때라 좀 시끄러워서 학인들이 있어도. 공부도 옳게 못하고, [대처승들이] 내 시비 걸고, 절마다 기도하느라고. 그랬어요.

연구자 : 음. 그러면 재판할 때도, 재판할 그때도 학인들이 있었네요.

묘○ : 네 있어도, 몇이 안 되도. 전부 우리가 대처승한테 이겨야 한다고. 공부는 열 제치고 다 기도만 했지요. 열심히 했지요. 그래서 우리 수인 노스님이 재판할 때 서울로 어디로 다닐 때 재판에서 이겼어요. (중략) 그때 학인스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또 그 힘으로써 또 운문사가 이겼지. 그때 다 절마다 [재판을] 다 졌는데 운문사만 이겼거든요. 그렇게 함으로써 운문사가 강원이 됐고, [재판에서 졌으면] 그때 벌써 강원이 없어졌지. 넘어갔으면, 운문사 딴 스님들이 탐을 냈거든요. 그래도 수인 노스님이 당신이 고생해가면서 했는 바람으로….

운문사가 온전하게 비구니 사찰로 인정받기 이전, 1∼2년간은 대처승과 사찰을 분점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부터 대처승이 사찰에서 나가고, 재판이 이어지던 시기에도 대처승과의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사찰은 혼란스럽고 시끄러웠다. 그럼에도 강원의 학인스님들은 사찰을 떠나기보다는 정화과정을 함께 하였다. 정화과정 시기의 학인스님들은 대처승과 물리적인 충돌을 경험하였고, 재판 승소를 위해 기도에 매진하였다.

이처럼 당시 사찰환경이 어지럽고 소란스러워 공부하기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인스님들이 자발적으로 정화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운문사와 시대적 분위기가 그러한 자발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정화운동에 참여했던 비구니 덕수스님은 “비구니들이 힘이 없고 연약하고 배움도 없었지만 종단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언제나 앞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일이 다 되고 나면 비구니들이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구술하였다(덕수·보인·정화, 2002: 278). 정화운동의 결과로써 사찰 주지를 임명하는 과정에서도 “비구스님들은 비구니들이 큰절을 맡게 되었다고 말이 많았습니다.”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였다(덕수 외, 2002: 272). 비구니 총림으로 총무원의 공식적 결정과 정부의 정식 허가도 있었음에도 동화사는 1년이라는 짧은 기간만 유지되었다. 동화사에서는 80여 명이 함께 수행하고 있었는데, 비구스님들이 내려오면서 동화사 강원이 폐지되었고, 나중에 상주하였던 비구니스님들은 경주 분황사, 태백산 홍제사, 선암사 등으로 흩어졌다. 이는 불교계에서 비구니 위상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수인스님은 비구니 사찰을 더욱 굳건하게 지켜야 한다는 다짐을 하였다.

운문사 사찰운영이 점차 안정화되고 사찰정화도 성공적으로 안착하자, 수인스님은 대처승과의 화합도 생각하였고, 이를 실천하였다. 즉, 화합을 위한 실천이 비구니 승가에 머물지 않았다. 수인스님은 대처승을 불교계에서 축출하는 방식보다는 그들과 더불어 상생하는 방법을 추구하였다. 운문사를 상생과 협력의 방법으로 정화를 마무리하였다.

대처승, 돈을 주고 다 내보내고. 상황을 정리하고. 뭐 이런 거 저런 거 농 같은 거도 정리를 다 하고. 전부 다 우리 노장님이(성○).

전부 돈 다 자기가 우리 노장님이 손수 돈을 다 저기 해가. 그 사람들 돈을 다 줘서 내보내고. 논 정리도 다 하고. 집 없는 사람들 집 마련해 주고(성○).

상○ : 기장에는 그 가고. 주지 내놓고. 운문사 나오셔 가지고. 기장 가시고. 그런데 영주암 가서 뒤에 땅 사고 그 해놔 놓고 운문사 주지하러 들어가셨어.

성○ : 영주암 가셔 가지고. 정화하셔 가지고. 그 대처승 돈 다 내주고 내 보내고.

연구자 : 영주암도 그랬어요?

상○ : 노스님이 영주암에 계시면서, 대처승을 위해서 연산동에 집을 6만원 주고 집 하나 사서 내 보내고 (질문자 :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살 수 있도록 해주고 그렇게 영주암에 조금 계셨어.

성○ : 영주암도 정화하고.

연구자 : 정화하고, 비구스님 주셨네요.

상○ : 응.

연구참여자들의 기억에서처럼 대처승과의 물리적인 충돌은 오래 지속되었고 그들과의 소송도 고생 끝에 승소로 마무리되었다.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고 더 이상 사찰 관련 그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찰정화가 마무리되면 대처승은 가족과 함께 사찰이 위치한 지역에서 멀리 떠나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운문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대처승들을 설득하고 상생의 방안을 마련하였다. 수인스님은 자신의 몫으로 들어오는 ‘곡수’를 모아서 정화하려는 사찰의 대처승이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어 자발적으로 사찰을 떠날 수 있도록 하였다. 거주할 수 있는 집도 마련해주고, 생계비도 일부 지원하고 빚을 대신 갚아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정화 이후에 대처승들이 사하촌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광복 후 운문사 주지를 역임하였던 김상영(대처승)도 정화 이후에도 운문사 밑 사하촌에 계속 살면서 사찰 일도 하고 수인스님의 개인 논 소작도 하였다.

대처승을 상생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실질적으로 함께 사는 방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인연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찰소유권을 둘러싸고 물리적으로 충돌을 겪었고, 재판 다툼 과정 중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Ⅴ. 결론

본 연구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산업화에 이르는 근현대기에 활동한 수인스님의 삶, 사상, 그리고 실천을 조망하였다. 수인스님은 포교에 전념하면서도 불교정화에도 참여하여, 오늘날 비구니 대가람으로 성장한 운문사를 지역 비구니승가와 학인스님들과의 화합을 통해 정화하고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는 대외적 활동에 어려움이 있었던 당시의 환경을 극복하고 거둔 의미있는 성과로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계승해야 하는 모범이다.

11세에 수계하여 99세에 입적한 수인스님은 거의 90년의 세월을 ‘승려’로서 살았다. 90 평생 스님은 종교지도자로서 ‘공인(公人)’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출가수행자로서 청정한 삶은 무욕과 정진행으로 정리되는 스님의 불교사상으로 가능하였다. 스님은 언제나 무욕과 무상의 삶을 살았고, 이는 인욕과 자비로 실제 삶에서 구현되었다. 또한 스님은 불제자로서 출가수행자로서 자신의 본분(本分)과 본심(本心)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스님의 또 다른 불교사상은 정진행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만큼 스님의 삶은 올바르고 바른 노력이었다. 즉, 단순히 열심히 노력했다는 의미만을 담고 있지 않으며, 올바른 방향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꾸준히 노력하였다.

승려로서 거의 90년의 삶을 보낸 수인스님은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산업화 시기까지 활동하였고, 매우 다양한 활동을 하였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는 여러 활동과 성과 중에서도 상불경 보살행과 화합을 통한 사찰정화에 주목하였다. 상불경 보살행은 ‘불성론’이란 불교의 핵심 교리를 삶으로 구현한 실천이었다. 노보살님들에서 어린아이들까지,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상좌, 손상좌)에게도 언제나 부처님으로 대하는 스님의 모습은 당시에도 현재에도 상불경보살 그 자체이다. 또한 운문사 사찰정화는 대립과 투쟁, 폭력이 압도했던 시절에 화합과 자비, 상생이라는 불교의 가치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논의해야 하는 활동이다.

더불어 운문사 정화와 비구니 총림 건설을 위한 수인스님의 노력은 사찰 주민들과 주변 대중스님들의 지지와 협력을 끌어냈었고, 이러한 지지와 협력은 스님의 모범적 수행과 실천으로 가능하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스님의 수행과 실천이 개인 내면만을 향하지 않았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수인스님은 서론에서 강조했듯이, 오늘날 비구니 승가와 한국불교가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종교지도자이며, 출가수행자의 전형이다. 탈종교화로 종교의 사회적 위상이 낮아지고, 출가자가 감소하고 있는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승려에게 올바른 삶과 수행, 실천을 요구한다. 따라서 승가양성을 위한 승가교육에 대한 더 큰 관심이 필요한 시기이다. 수인스님을 검토하고 되살려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수인스님은 불교사상과 행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할 수 있는 연구자료가 많이 남겨져 있지 않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이 문제는 여타의 근현대기 비구니 스님 연구에서도 반복될 문제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요청된다.

Notes

* 이 논문은 본 연구자의 박사학위논문 중 일부를 발췌·재구성하였고, 초고는 2024년 대행선연구원 제8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되었음을 밝힌다.

1) 「운문사 주지 직무 행사 정지 및 사찰 점유 해제 가처분 이의 공소 사건에 관한 대구고등법원 판결문(단기4292년 12월 16일)」, 「나한전건축에 대한 이유서와 각서」(대한불교조계종 내부자료), 「주지 임명 내신에 관한 일」(대한불교조계종 내부자료), 「개인신상조사서」(대한불교조계종경북종무원 내부자료) 등이 대표적인 자료이다.

2) 수인스님 관련 기존 자료들(「성월당 수인 노사 영결식 자료집」, 『깨달음의 꽃 2』 등)에는 사미니계를 ‘1912년 4월 15일 운문사에서 유긍파(兪肯坡) 사리(舍利)노스님을 계사’로 수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수인스님의 총무원 승적원부에는 1909년 12월 18일에 운문사에서 해담스님을 계사로 수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 논문에서는 총무원의 공식기록에 따라 사미니계 수계 관련 기록을 따랐다. 참고로 비구니계 수계 관련 기록은 모든 자료에서 일치한다.

3) 이전 자료들(「성월당 노사 영결식 자료집」 등)에는 사미과부터 수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1958년 「수행이력서」와 「개인신상조사서」에는 사집부터 수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행이력서」는 수인스님이 직접 기록한 자료이며, 「개인신상조사서」는 경북종무원의 공식기록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본 논문에서는 이 기록들의 내용을 따랐다.

4) 수인스님의 상좌 성우스님이 기록한 행장에는 “송사가 길었던 관계로 수행자들의 의식주가 어려운 지경임에 스님께서는 탁발과 절약으로 원융살림을 이끌어 비구니스님들이 환희용약하며, 성월당을 중심으로 화합 결속하니 사세가 신장되고 계율이 엄정하였습니다. 이에 종단에서는 정화 후 팔공산 동화사 비구니 제일총림이 운문사로 옮겨옴에 우선 비구니승들의 교육을 위해 강원을 개설, 10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니 지금의 비구니계단종사인 지원스님과 정훈스님, 제운스님 등이 운문사 강원 제1회 졸업생인바”로 되어 있다. 지원스님의 행장에도 1958년 운문사 강원 수료로 기록되어 있다(한국비구니연구소 편, 2007). 이러한 기록과 다르게, 『운문사지』(2018)에는 1958년 통도사 강사 혜련스님을 모시고, 비구니 전문강원을 개설하였고 1964년 제1회 졸업생 6명을 배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운문사편찬위원회 편, 2018: 328-330). 하지만 여러 스님들의 증언과 기록을 종합하면, 운문사 비구니 강원은 1955년에 제응스님을 강주로 최초로 개설되었고 1958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으로 전환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경조(2020)를 참조할 것.

5) 한국불교에서 법랍을 계산하는 기준은 세 가지(출가득도·사미/사미니계 수지·구족계 수지)이다. 연구자는 이 세 기준 중에서 사미/사미니계 수지를 기준으로 법랍을 계산하였다. 출가득도를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어린 나이에 입산하여 사찰에서 생활한 기간까지 법랍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이 시기를 승려로서의 삶을 결심하고 노력한 시기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연구자는 법랍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미/사미니계 수계 이후 구족계를 수계하기까지의 기간은 승려 개개인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상이하기 때문에 구족계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도 법랍 관련 기준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최근에는 사미/사미니계 수계를 기준으로 법랍을 기산한다.

6) 무욕(無欲)은 ‘욕망이 없음’을 뜻하지만, 그 근본은 해탈을 의미한다. 가산불교대사림 무욕 항목에서는 다음의 경전을 소개하고 있다. 『중아함경』 권10(대정장 1: 485b6)에 “부처님이시여! 무욕이란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아난다여! 무욕이란 해탈하게 한다는 뜻이다. 아난이여! 만약 욕(欲)이 없다면 모든 음(婬:貪)·노(怒:瞋)·치(癡) 등에 서 벗어날 수 있다’. 世尊 無欲爲何義 世尊答曰 阿難 無欲者 令解脫義 阿難 若有無欲者 便得解脫一切婬怒癡”라 하였다(이지관, 2005).

7)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논밭에서 곡식이 소출되는 수량’(Daum 어학사전)이지만, 연구참여자는 소작료란 의미로 사용하였다.

8) 연구참여자들의 경우는 경칭을 생략하였다.

9) 운문사에 처음 소임을 맡아 들어갔을 때 주지라는 명예보다는 ‘비구니승가의 협력’을 먼저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의 명예보다는 운문사와 비구니승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것으로 추측된다. 운문사 관련 자세한 내용은 경조(2020)를 참조할 것.

10) 구체적인 자비행 실천은 이 논문의 4장을 참고하기 바란다.

11) ‘옷을 지어주다’는 의미이다.

12) ‘옷이 해어져서 뜯어졌다’는 의미이다.

13) 창법스님은 평생 참선수행한 비구니계의 선사로, 당대의 비구고승이 ‘도인’이라고 칭할 만큼 선객의 위엄을 간직했던 인물이다. 근현대기 비구니사에서 가장 처절한 용맹정진의 구도자로 알려진 만성과 가장 오랫동안 수행정진의 인연을 맺었다(하춘생, 2013: 247-248).

14) 안거기간 수행에 대한 당부는 젊은 시절 만공회하의 견성암 경험의 영향이라 생각된다. 견성암은 1916년 1월 개설한 근대기 최초의 비구니선원이고, 비구니들이 이곳에서 수행력을 키웠다. 스님과 그의 맏상좌 창법도 이곳에서 구도열정을 불사르며 수행하였고, 선객의 기개를 떨쳤다(하춘생, 2009: 12).

15) “內懷不輕之解 外敬不輕之境 身立不輕之行 口宣不輕之教 人作不輕之目”(『妙法蓮華經文句』, T34, 140c).

16) 이를 ‘불경이십사자’라고 한다.

17) “四眾之中 有生瞋恚 心不淨者 惡口罵詈言 是無智比丘從何所來?自言我不輕汝 而與我等授記 當得作佛 我等不用如是虛妄授記”(『妙法蓮華經』, T9, 50c).

18) 연구참여자 지○은 면담에서 자신의 노스님이 수인에게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다고 언급하였다. 하지만 다른 연구참여자들은 『법화경』이라고 일관되게 언급하였다. 또한 연구자는 은사 명희에게 수인이 해당 노스님에게 『법화경』을 교수(敎授)하였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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