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논문

서간문에 나타난 출가 초기 법정의 사상 고찰: 『마음하는 아우야』를 중심으로

여태동 *
Tae-dong Y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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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기자
*Report, Buddhist News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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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Mar 03, 2025; Revised: Jun 15, 2025; Accepted: Jun 20, 2025

Published Online: Jun 30, 2025

국문 초록

법정의 글은 대부분 출가 후 15년이 훌쩍 지난 1970년 중반부터 문학지나 신문 혹은 책을 통해서 만난 것들이다. 이번 논문에서 분석하는 50편의 편지글은 법정이 출가 전 청년시절과 출가 초기의 마음가짐을 살필 수 있다. 일체 흐트러짐 없는 법정의 편지는 대부분 사촌동생 박성직에게 보낸 글이다.

법정이 보낸 50편의 편지글에서는 출가 전 고뇌를 극복하고, 수행자로서의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수행자의 모습을 갖춘 모습도 보인다. 온갖 번뇌에 찬 ‘청년 박재철’이 ‘비구 법정’으로 거듭 나는 면모를 볼 수 있다.

특히 50편의 편지글에는 출가 초기의 행적을 날자 별로 기록하고 있어, 법정의 출가기록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을』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출가 후에도 다양한 문학과 철학서적을 탐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편지글은 법정의 문학적 토대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도 알 수 있다. 1960년대에는 해인사에서 사회민주 인사를 접하면서 사회민주의식을 깨우치기도 했음을 편지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인연으로 황산덕 교수,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법정의 이러한 사회민주화에 대한 활동은 1975년 불일암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계속된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당당한 목소리를 냈고, 강원도 오두막에서도 세상의 혼탁함을 비판했다. 그 결과물로 ‘맑고 향기롭게’라는 시민운동 모임을 주창하고, 길상사를 근본도량으로 삼았다. 법정은 세상을 정화하기 위한 노력을 원적에 들 때까지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Abstract

Most of the writings of the Ven. Beopjeong have been through literary magazines, newspapers, or books since the mid-1970s, more than 15 years after he became a monk. The 50 letters analyzed in this paper can examine the attitudes of young people before and early on when he became a monk. Most of the letters from the monk are sent to his cousin Park Sung-jik.

In the 50 letters sent by the Buddhist monk, he can overcome his agony before joining the sangha and try to find himself as a practitioner. He can also be seen as a practitioner. You can see ‘Park Jae-cheol’, a young man in all kinds of anguish, being reborn as ‘Ven. Beopjeong’.

In particular, 50 letters contain records of the early days of becoming a Buddhist monk by date, which is an important material for confirming the records of the monk’s becoming a Buddhist monk. It is also confirmed that he wrote a short story titled ‘Autumn’. The letters, which confirms that he is still devouring various literary and philosophical books even after joining the sangha, shows how the literary foundation of the monk was formed. The letter reveals that he enlightened the sense of social democracy when he encountered social democratic figures in Haeinsa-Temple in the 1960s. That relationship led him to participate in the pro-democracy movement with Hwang San-deok, Jang Joon-ha, and Ham Seok-heon.

Ven. Beopjeong's activities for social democratization continued even after entering Bulilam-Temple in 1975. He also spoke confidently about the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in 1980 and criticized the chaos of the world in a cabin in Gangwon-do.

As a result, he advocated a civic movement group called ‘Clear and Scented’. It can be said that Ven. Beopjeong showed efforts to purify the world until his all life.

Keywords: 법정; 박성직; 함석헌; 장준하; 사회민주화 운동; 편지글
Keywords: Ven. Beopjeong; Park Sung-jik; Ham Seok-heon; Jang Joon-ha; Activities for Social Democratization; Letters

Ⅰ. 들어가는 말

우리 시대에 큰 울림을 남기고 2010년 원적에 든 법정(法頂, 1932∼2010)의 출가 초기에 대한 행적은 『영혼의 모음』, 『무소유』 등 그의 몇몇 저서에서 부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을 뿐,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후 법정이 원적에 든 지 1년이 지나 사촌동생 박성직이 엮어 낸 『마음하는 아우야!』에 자세한 행적이 기록돼 있다.

본 논문은 법정이 사촌동생 박성직에게 보내 온 총 50편의 편지를 분석해 출가 전 목포 정혜원 등 출가 전과 출가 초기 심경을 살피고자 한다. 행자시절 수행사찰인 통영 미래사와 사미계를 받고, 비구계를 받았던 시기 수행했던 사찰인 쌍계사와 해인사 시기와 1970년대 초 출가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살펴봄으로써 법정의 출가 초기의 사상 형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법정은 박성직뿐만 아니라, 절친 박광순 등 많은 인연들과 나눈 편지를 남겼다. 이들 편지의 대부분은 안부를 전하는 내용과 업무에 관한 내용, 자연의 섭리를 설명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번에 분석한 편지는 법정이 출가 수행자로 기초를 다지는 시기에 쓴 편지글로 출가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갖춰가는 사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2011년 책을 출간되었을 때는 ‘56년 만에 공개된 법정스님의 지혜와 인정 넘치는 편지글’이라는 의미를 담았다는 점에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출판사 서평에는 “이 책은 법정 스님이 출가를 결심한 1955년부터 해인사를 떠나 송광사 불일암으로 들어가기 전인 1970년대 초반까지, 스님과 같은 방을 쓰며 친형제처럼 자랐던 사촌 동생과 일상의 안부를 주고받은 편지글을 엮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 책의 한쪽에는 법정이 직접 펜으로 쓴 원본 편지를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다. 다른 쪽에는 편지의 내용을 수록하였다. 책의 의미에 대해서도 “『무소유』를 통해 ‘법정’이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만나기 전 가족을 돌보지 못하고 세속을 떠나야 했던 한 청년의 심정, 이름 없는 출가승이 되어 산중에서도 아우에게 책을 읽으라, 인생을 깊이 사색하라 등의 재촉하는 형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출가를 결심했을 그때 스님의 마음과 출가한 후 수행자로서 뜻이 굳건해지는 스님의 생생한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가 만났던 법정의 글은 대부분 출가 후 15년이 훌쩍 지나 1970년 이후부터 문학지나 신문 혹은 책을 통해서 만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번에 분석하는 50통의 편지글은 법정이 청년 시절과 출가 초기에 흐트러짐 없이 정갈한 문체와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 그의 성품을 가감 없이 엿볼 수 있다.

편지글에서 법정은 출가 전 고뇌를 극복하고, 출가 수행자로서의 모습을 갖춰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표 1>). 이를 통해 고뇌에 찬 ‘청년 박재철’이 우리 시대를 맑힌 참 수행자 ‘비구 법정’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표 1. 사촌동생 박성직에게 보낸 법정의 출가 초기 편지글
순서 날짜 보낸 곳 내용
1 1955년 8월 12일 목포 정혜원 안부와 현대문학 서적 송달 요청
2 1955년 11월말 목포 정혜원 출가 전날 목포를 떠나며
3 1956년 3월 21일 통영 미래사 출가 후 가족에 대한 걱정과 안부
4 1956년 4월 12일 통영 미래사 행자시기 심경
5 1956년 5월 9일 통영 미래사 행자시기 심경
6 1956년 6월 17일 통영(충무) 행자시기를 마치고 쓴 편지
7 1956년 9월 6일 쌍계사 탑전 하동 쌍계사 탑전 수행 생활
8 1956년 9월 27일 쌍계사 탑전 하동 쌍계사 탑전 일상 생활
9 1956년 11월 22일 여수 흥국사 한달 여 흥국사에서 겨울 보낸 편지
10 1956년 12월 12일 여수 흥국사 흥국사 떠나며 쓴 편지
11 1956년 12월 15일 쌍계사 탑전 쌍계사 탑전으로 돌아온 내용
12 1957년 3월 30일 고창 선운사 해인사 가기 전 선운사에서 안부
13 1957년 7월 26일 합천 해인사 해인사서 첫 편지
14 1957년 9월 27일 합천 해인사 불국사 통도사 범어사 여행
15 1957년 10월 7일 합천 해인사 단편소설 『가을』 존재 확인
16 1957년 10월25일 합천 해인사 산사 상황과 책 보존 당부
17 1958년 5월 13일 합천 해인사 원고지 5권(500매) 보내줄 것 요청
18 1958년 6월 4일 합천 해인사 『현대문학』 구독 확인
19 1958년 7월 24일 합천 해인사 고향집 안부 문의
20 1958년 8월 9일 합천 해인사 사전 받고 사촌 동생 대학 진학 당부
21 1958년 8월 27일 합천 해인사 사촌동생에 금주 당부
22 1958년 9월 19일 합천 해인사 불교의 수행목적 서술
23 1958년 11월 5일 합천 해인사 승적 발급 서류 보내줄 것 요청
24 1958년 12월27일 합천 해인사 연말 소회 언급하고 가족 안부 물음
25 1959년 1월 1일 합천 해인사 새해 소망 밝힘
26 1959년 3월 10일 경남 진주 동해안 유랑 소식 전함
27 1959년 4월 15일 합천 해인사 유달영 『인생노트』 일독 권유
28 1959년 4월 30일 합천 해인사 친구 박광순 교수에 책 전함
29 1959년 5월 1일 합천 해인사 철학과 문학서적 박성직과 박광순 교수에 전하라는 내용
30 1959년 7월 6일 합천 해인사 부처님 말씀 전함
31 1959년 7월 12일 합천 해인사 ‘진실하라’ 생활신조 당부
32 1959년 10월 11일 합천 해인사 ‘성실하라’ 당부
33 1960년 1월 1일 합천 해인사 해인사 학산대 사진엽서로 신년 안부
34 1960년 1월 7일 합천 해인사 고향에서 나오는 김을 해인사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
35 1960년 1월 8일 합천 해인사 까뮤 교통사고 소실 담고 『문예지』와 『현대문학』지 송달 요청
36 1960년 1월 25일 합천 해인사 해인사 떠날 생각 담고, 돈 천환 보내며 소포요금이라 생각 말 것 당부
37 1960년 2월 19일 합천 해인사 선원 삼월초 나답게 살기 위해 다른 산(영축산 통도사)으로 옮길 예정 기록
38 1960년 10월 20일 양산 통도사 통도사서 『불교사전』 편찬 활동 내용
39 1961년 6월 15일 합천 해인사 해인사로 회귀. 법정원고용지 사용
40 1961년 8월 21일 합천 해인사 일본 불서와 철학책 보내 줄 것 당부
41 1961년 9월 12일 합천 해인사 보내 준 책 도착과 독서의욕 표현
42 1962년 5월 19일 합천 해인사 출판사 일로 상경/소소산방 원고
43 1962년 10월 11일 합천 해인사 군대 소식 묻고 산중 소회 밝힘
44 1962년 10월 31일 합천 해인사 불교성전 원고 작업 내용
45 1963년 6월 25일 합천 해인사 해인사 들를 것 당부/법통사 원고 용지
46 1963년 7월 19일 합천 해인사 ‘소소산방에서’ 표현/두별동산 원고
47 1963년 9월 29일 합천 해인사 고향 다녀온 이야기/법통사원고용지
48 1964년 1월 10일 대구 역전 인세 6500원 맹장염 어린이에 희사
49 1964년 1월 14일 대구 해인사 떠나 대구서 씀
50 1970년 11월27일 광주(서울)봉은사 서울에서는 칠보사에서 잠시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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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출가 초기 시기별 편지글 분석

1. 출가 전 목포 정혜원 시기

이 시기에 박성직은 2통의 편지를 받는다. 집을 떠나 온 뒤, 자신이 두고 온 책들에 대한 걱정과 주변인의 안부가 주를 이룬다. 목포를 떠나 출가하기 전날에는 담담한 각오가 담겨 있다.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라”1)는 내용은 출가 전 상당한 마음공부가 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다. 당시 법정의 학력으로 보았을 때는 상당한 엘리트로, 출가 후에도 승단에 상당한 역할을 할 재목이라는 걸 보여주는 글귀다.

무더운 여름철에 고생하였으리라. 내 책들도 잘 있는지 모르겠다. 편지는 안 왔기에 아직 소식 없는 줄 믿는다만 궁금하기에 다시 묻는다. 그리고 서울 동섭이 형님도 아직 안 왔겠군. 아무런 소식도 없는 걸 보면. 내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내려 올 적엔 도시의 여름철 풍속이 비위에 거슬려 뒤도 안 돌아보고 왔더니. 이젠 내 숨결이 배어든 그 방이 –조용한 空間(공간)- 이 그립다. 오늘 아침과 어제 아침에는 절 뒤에 너마지기 논을 휘갈고 다녔다. 매루2)를 떠느라고……. 비가 안 와 농가에는 야단들이다. 색다른 구름 한 오라기만 흘러가도 하늘을 우러르고 하는 어제 오늘 비 기다리는 농촌이다. 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8월 20일 무렵에나 그 곳에 올라갈 예정이다. 『현대문학』 9월호가 나왔거든 신자네3) 누님한테서 돈 꾸어서 사 보내주었으면 쓰겠다. 대양서점에 가서 내 이름을 말하면 250환에(이활인) 줄 것이다. 깨끗하고 험 없는 놈으로 골라 보내라. 8월호가 아니라 9월호다. 종이에 잘 싸서 보내주라. 그동안의 그곳 소식 궁금하다. 무더운 계절에 몸조심하고 잘 있어라. 낮잠은 건강에 해롭다고 한다. 제철4) 1955.8.12. 한낮(박성직 엮, 2011: 15-17).

‘청년 박재철’이 출가하기 전 목포에 위치한 정혜원에 머물던 시기의 편지다. 사촌 동생 박성직은 “스님이 출가하시기 전 학비를 벌기 위해 정혜원에서 잠시 일할 때 보낸 편지입니다(박성직 역, 2011: 17)”라고 밝히고 있다.

출가 전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던 사찰이어서인지 “내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내려 올 적엔 도시의 여름철 풍속이 비위에 거슬려 뒤도 안 돌아보고 왔더니. 이젠 내 숨결이 배어든 그 방이 –조용한 空間(공간)- 이 그립다”라며 집으로 향하는 귀소본능이 역력하다. 자신의 숨결이 배어있는 ‘조용한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출가에 대한 생각을 마음 속에 담았을지는 모르나, 전혀 내비치지 않는 시기라 여겨진다. 그해 초겨울 출가를 단행하는 법정이었지만, 8월의 편지에서는 출가에 대한 마음은 읽을 수 없다.

다만 “내려 올 적엔 도시의 여름철 풍속이 비위에 거슬려 뒤도 안 돌아보고 왔더니”라는 표현으로 도시보다는 산중생활을 동경하고 있는 심중은 헤아릴 수 있다. 또한 청년 박재철은 조용한 공간에서 사색(명상)을 즐기는 심성을 엿볼 수는 있다. 이 편지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상과대학에 재학하고 있었던 법정이 출가 전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문학』 9월호가 나왔거든 신자네 누님한테서 돈 꾸어서 사 보내주었으면 쓰겠다”는 내용은 훗날 법정이 1971년 『현대문학』 3월에 ‘무소유’라는 이름으로 글을 게재한 인연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보인다.

곤궁한 생활에 대한 편린과 알뜰하고 근검절약하는 ‘청년 법정 박재철’의 모습도 보인다. “신자네 누님한테서 돈 꾸어서 사 보내주었으면 쓰겠다. 대양서점에 가서 내 이름을 말하면 250환에(이활인) 줄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평소에 서점을 많이 이용해 2할을 할인 받고 있는 부분도 보인다. 이러한 생활의 곤궁함과 시대적 상황의 암울함과 존재론적 고민이 담겨 있다.

박성직은 “스님은 가난으로 힘들게 이어오던 대학을 3학년이 되면서 휴학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사정을 스님의 친구들이 알고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어 3학년 1학기는 무사히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2학기에 스님은 친구들의 도움을 완강히 거부하고 휴학을 합니다. 정혜원에서 잠시 일하는 와중에도 스님은 무엇보다 집에 두고 온 책들을 궁금해 하셨습니다. 그만큼 책들을 아끼던 분이셨습니다(박성직 역, 2011: 17)”라고 밝히고 있다.

정갈하고 근면한 성격도 보인다. “깨끗하고 험 없는 놈으로 골라 보내라. 8월호가 아니라 9월호다. 종이에 잘 싸서 보래주라”라는 구절과 “낮잠은 건강에 해롭다고 한다”는 구절은 해인사에서 대중생활을 통한 공동체 정신을 함양한 이후, 혼자 지내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수행자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을 보여주고 있다.

산으로 돌아가면 한층 분발해서 가족을 등지고 출가한 보람을 하루 속히 성취하기에 애쓰련다. 집에 있는 아희들에게도 한결같이 내 형제간으로 알고 친절히 하여라. 모두 인연이 아름다운 형제들이다. 어머니에게도 항상 마음 편히 해 드리고. 진학을 못한다고 비관은 말아라. 전혀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복받은 사람들이냐! 마음을 안정하고 착하게 살아나가면 무슨 길이 트이는 법이니라. 너희들을 대할 때 나는 양심에 무한한 가책을 받는다. 미약하나마 힘을 조금도 보탤 수 없는 무능한 나를 부끄러워할 뿐이다. 성직아! 고난을 겪는 사람은 행복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훨씬 인생에 대해서 경험이 많아서 자신이 생기고 또한 생활에 대한 저항력도 길러지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인생에 대해서 심각하게 체험한다는 것이다.…(중략)…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라. 안녕히. 목포를 떠나기 전날 밤. 정혜원에서 철(박성직 역, 2011: 15-17).

“목포를 떠나기 전날 밤”이란 편지 말미글로 보아 1955년 연말 즈음으로 추정된다. 박성직은 “이 편지는 출가를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집에 오신 다음 보낸 편지입니다. 그날 형님이 저를 바라보는 심정이 어떠했을지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혼자 계시는 큰어머니(법정 스님의 어머니)와 할머니, 마냥 철부지인 저, 그리고 가족들을 뒤로 하고 출가를 결심하셨을 형님의 마음이 제 머리 하얗게 변해버린 지금에서야 다가옵니다(박성직 역, 2011:19-21).”라고 밝히고 있다.

2. 통영 미래사와 하동 쌍계사 탑전 시기

이 시기에 사촌동생 박성직과 4통의 편지를 나눈다. 대부분 안부를 묻고, 두고 온 속가의 방에 걸린 그림과 책에 대한 우려도 담겨 있다. 주변인들에 대한 충언도 하고, 출가 수행자로서의 일과를 설명하며 권유도 한다. 힘든 출가 초기생활에도 불구하고, 힘들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고, 묵묵히 자신의 공부를 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안하다. 죄스럽다. 네 입학관계도 보지 않고 떠나와 버렸다. 세상 일이 한바탕의 꿈이라더니 꼭 꿈속 같기만 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어버렸다. 할머니, 작은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너희들을 배반하였다. 출가(出家)가 나로서는 어떤 연유에서 일지라도 집안에 대해서는 배반이 아닐 수 없다. 얼마간의 수도(修道)를 쌓은 뒤엔 다시 세상에 나아갈 것이다. 그동안은 죄인이다. 죽일 놈이다. 할머님, 작은아버지 모두 나를 얼마나 원망하랴 ……. 오늘의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중략)…너 학교는 어떻게 됐느냐?…(중략)…돈이 아쉬우면 내 책이라도 팔아서 쓰도록 하여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광순이5) 형님과 잘 상의해서 하여라. 나보다 더 잘 알아 해줄 것이다.…(중략)…죽일 놈의 형 제철. 1956.3.21.(박성직 역, 2011: 24-27).

자신의 출가에 대해 법정은 “미안하다. 죄스럽다”는 첫 구절부터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출가 후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보인다.

“세상 일이 한바탕의 꿈이라더니 꼭 꿈속 같기만 하다.”는 둘째 문장에서는 『금강경』 사구게인 제32품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의 유위는 환상이다. 환영이나 이슬이나 물거품 같고, 꿈이나 번개나 구름과 같네. 유위는 이와 같이 보아야 하네(이중표, 2019: 98-99)”의 내용을 쓰고 있어 이미 출가 전부터 알고 있는 점으로 보아 대학시절이나 정광정혜원 시절에 불교경전을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의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대목은 출가 수행자로서의 단단한 각오가 있어 보인다. 말미의 “죽일 놈의 재철”이란 구절 역시 자신이 출가해 가족에게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다시 한번 밝힌다.

성직아. 네 편지 너를 만나본 듯 반가이 받아 보았다. 그리고 더욱 기쁜 것은 내 꿈속에서처럼 네가 합격했다는 소식이다.…(중략)…남의 앞에 부끄럽지 않게 ‘힘껏’ 공부하여라.…(중략)…절 아래 동구 길에 벌써 벚꽃이 한창이다. 분명 봄인가 싶다. 이곳 절 주위에 빽빽이 둘러싸고 있는 숲(전나무 숲)에 들면 노루가 뛰어다니고 꿩이 푸덕이고, 산비둘기가 구구댄다. 그리고 비 개인 개울물 소리가 뭇 여물다. 밤이면 나무 사이로 내다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이 푸르게 초롱인다. 자연은 아름답다. 이런 곳에선 세상에서 부리던 거친 마음들이 깨끗이 사라져 버린다. 맑은 공기를 마셔가며 공부하기가 실로 즐거웁다.…(중략)…아침이면 세시에 일어나고 밤 아홉 시엔 잠자리에 든다. 수면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모든 일은 습관에 달렸다. 잠은 잘수록 더 오는 것이니까.…(중략)…내 출가에 대해 어머님은 태순에게 원망하고 있는 모양 같은데 나는 오히려 태순에게 감사한다. 누구 때문에가 아니라 내가 내 스스로를 이끌어 나가야 되지 않겠느냐?…(중략)…네가 내 대신 어머님의 아들 노릇을 해 줄줄 믿는다.…(중략)…다시한번 부탁은, 절대로 내 거처(있는 곳)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서울이나 일본 같은데 가버렸다고 해 두어라. 네 사진 있거든(없으면 그냥 두고) 한 장 내가 가지고 싶다.…(중략)…철. 1956. 4.12. 아침(박성직 역, 2011: 28-34).

통영 미래사에서 행자생활 시절 쓴 편지다. 가족(동생)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녹아 있다. 아직 출가 수행자로서 세속의 인연의 끈에 매달려 있는 상황임이 보인다. 꿈에 조차 사촌 동생의 진학 소식에 관심을 가지며 공부를 독력하고 있다.

사찰 아래 벚꽃이 만개한 내용과 전나무 숲길과 산새들 소리, 개울물 소리 등 법정의 쉽고 편안하면서도 가슴에 와 닿는 산문의 글솜씨가 보인다. 출가 후 일과에 대한 심경도 보인다. 새벽 3시에 일어나고 저녁 9시에 잠드는 것과 피곤할 터이지만 잠이 부족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고단한 힘든 생활이었겠지만, 사촌 동생에게 쓰는 편지이고 자기 스스로 선택한 출가의 길이기에 꿋꿋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도 여겨진다. 출가를 독려한 친구에 대한 원망을 하는 어머니에게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며 오해를 풀어줄 것을 당부하기도 한다. 이 당시도 가족, 특히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고 있으며, 사촌동생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출가 수행자로서의 길을 철저하게 가겠다는 의지로 자신의 거처에 대해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 것을 재차 당부하는 내용은 법정의 출가 초기의 심경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말미에는 아직 행자기간이라 세속이름인 ‘철’이라고 쓰고 있다.

보고 싶은 아우 성직아. 네 사진 잘 되었더라. 네 얼굴 그대로더라.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여러 번 펼쳐 본다. 오랜만에 오늘 시오리 산길을 걸어 시내에 내려왔다. 거리에는 벌써 여름이더라. 아이스케-키 집 치장이 사뭇 시원스레 보이더라. 요사이 산골엔 송화가루가 안개라도 낀 듯 보오얗게 날린다.…(중략)…형 철 쓰다. 1956.5.9. 내 답장 없더라도 아무 염려는 말아라. 마음대로 안 되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 철(박성직 역, 2011: 36-37).

통영 미래사 행자시절 편지로 사촌동생 박성직의 사진을 받아보고 느낀 소외를 썼다. 통영 읍내로 걸어 내려가 시장을 본 모습이다. 자신의 저서에서는 이 시기 시멘트 포대를 매고 미래사로 올랐던 고단한 시절을 술회하고 있기도 한데, 동생에게 힘든 일을 고백하기 싫은 지 아주 평온한 행자생활인냥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오늘 이곳 미래사6)를 떠난다. 스님7)을 따라 지리산에 있는 조그마한(세상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암자8)를 가게 되었다. 나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들을 말아주기 바란다. 나는 언제고 잘 있으니까. 할머님, 작은 아버님, 작은 어머님, 어머님 너희들 모두 함께 안부 전해드려라.…(중략)…우리 어머님 말 잘 들어 드려라. 내 책들 – 그림들도 다 평안하겠지. 쓸 데가 있으면 책장 위에 놓인 신문들 써도 좋다. 하지만 내 냄새를 맡고 싶거든 그대로…… 1956.6.17. 충무시를 떠나면서 우체국 창가에서 철 쓰다(박성직 역, 2011: 38-39).

하안거를 마치고 사미계를 받은 후 은사 효봉과 함께 하동 쌍계사 탑전으로 가기 전 통영(충무)에서 보낸 편지다. 사미승이어서인지 두고 온 책에 대한 미련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안부를 묻고, 속가에 자신의 체취를 남겨놓고 싶어 한다. 출가 수행자로 속진(俗塵)의 때(垢)가 완전히 빠지지 않은 모습으로 쌍계사 탑전에서 수행으로 이런 자신의 모습도 극복해 나간다.

이제 내가 다시 너희들이 있는 집을 찾아들 땐 ‘그 전의 형님’이 아닐 것이다. 내 못 돼 먹은 성질도 많이 가셔졌을 테니까. 나는 지금 아무런 걱정도 없이 평안히 지내고 있다. 올 여름엔 통 더운 줄 몰랐다. 옷 걱정도 없다. 여름엔 시원한 삼베(마포) 옷을 입었었다. 아무런 아쉬운 것도 없다.…(중략)…성남이, 종환이, 또 길원이도 떠들지 않고 공부 잘할 줄 안다. 귀중한 하루하루를 아무 보람 없이 헛되이 흘려보내는 것은 한 가지 자살행위 – 자기를 죽이는 짓이 될 게다. 밀레의 ‘만종’이 있는 방안도 잘 있느냐? 네가 있으니 마음 놓인다만. 대성동의 그 너절한 골목이 그리웁다. 지금도 이웃 방에 복이네가 사느냐?…(중략)…새벽 네 시 쯤에 일어나(저녁 10시에 자고) 문 열어 공기 바꾸고 세수하고, 숨쉬기 운동 좀 하고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정신이 아주 맑아질게다.…(중략)…1956.9.6. 형, 철 씀. 이곳 주소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탑전) 法頂(법정)스님 앞. 法頂(법정)이란 내 불명(佛名)이다(박성직 역, 2011: 42-47).

출가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갖춘 듯한 언행이 보인다. 자신이 다시 속가를 방문했을 때는 승복을 입고 가기 때문이고, 사미계를 받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행자생활을 하면서 속세의 때도 벗겨낸 듯 “내 못 돼 먹은 성질도 많이 가셨다”고 고백한다.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연장자로서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충고한다. 출가 전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에 다니는 몇 안되는 ‘엘리트 형’으로서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대목이다.

사미계를 받아 출가 수행자로서의 길을 가고 있음에도 세속의 묵은 인연에 대한 미련이 보인다. ‘대성동의 너절한 골목과 방안에 걸려 있던 밀레의 종’에 대한 그리움이 보인다. 사촌동생에게 잘 보관해 달라는 당부도 한다.

출가 수행자로 새벽 3시에 일어나 저녁 9시에 잠드는 일과에 적응한 듯, 사촌 동생에게도 이런한 생활습관을 적극 권하기도 한다. 출가 수행자로서의 적응력이 보인다. 당시의 소통법이 편지가 주요수단이라, 사촌 동생에게는 자신의 거처를 적확(的確)하게 알려준다. 또 자신의 법명인 ‘법정(法頂)’을 부각시키고, 출가 수행자로서의 자부심을 은근히 드러내 보이기도 하는 편지글이다.

법정은 1971년 『현대문학』지의 기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16년 전 은사 효봉 선사를 모시고 단 둘이서 안거를 했었다. 선사에게서 문자를 통해 배우기는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한권 밖에는 없지만, 이곳 지리산 시절 일상생활을 통해서 입은 감화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 시절 내가 맡은 소임은 부엌에서 밥을 짓고 찬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진시간이 되면 착실하게 좌선을 했다. 양식이 떨어지면 탁발을 해오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50리 밖에 있는 구례장에서 장을 보아왔다(법정, 1981).

박성직 거사는 “이날 보내 온 편지의 겉봉에 처음으로 ‘법정(法頂)’이라는 불명(佛名)을 쓰셨습니다. 지금까지 형님은 푸른 산을 좋아해 청산(靑山)이라는 호를 즐겨 사용하셨는데……(박성직 역, 2011: 48)”라고 밝히고 있다. 박 거사에게도 형님이 아닌 스님으로 다가오는 시기였다.

얼마 전에 스님 모시고 순천 송광사로, 구례 화엄사로, 천은사 등지를 다녀왔다. 여기 저기 다니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가는 곳마다 이젠 내 집이거든……. 며칠 안 있어 서울을 가게 되었다.…(중략)…추석! 이곳에서도 떡을 하고 적을 부쳐 먹고 했다. 명절 때면 그리운 사람이 많다.…(중략)…너는 답장을 하지 말고 다음 내 소식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라.…(중략)…1956.9.27.(박성직 역, 2011: 42-47).

법정은 쌍계사 탑전에서 효봉 선사를 모시고 송광사 화엄사 천은사를 다녀오고, 서울나들이를 하기도 했다. 은사와 함께 다니는 일이 즐겁다는 감회도 밝히고 있어, 출가 수행자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세속에서와 같이 명절인 추석에는 음식을 나누기도 하지만, 여전히 두고 온 세속인들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이곳은 여수에서도 한 사십 리 산으로 들어온 흥국사다. 마음에 들어 이곳에서 겨울을 지내기로 했다. 마음에 들어 이곳에서 올겨울을 나기로 했다. 중은 가는 곳마다 지낼 집이 마련되어 있으니까. 아주 멋진 일이지. 앞으로 삼 개월 동안은 아무대고 갈 수가 없다. 1956.11.22. 아침(박성직 역, 2011: 54-56).

출가 후 이듬해 쌍계사 탑전에 머물다가 불현듯 거쳐를 옮긴 사찰이 여수 흥국사다.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스승 효봉스님이 동산(東山), 청담(靑潭) 스님 등과 같이 제4차 세계불교도우의회 대회9)에 참가하기 위하여 네팔로 출국한 상황이었다. 스승에게 절을 비우고 떠나겠다고 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추론하건데 흥국사에서 겨울안거를 날 것이라는 기별로 보아서 스승과 상의를 하고 떠난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던 것으로 다음 편지에서 드러나 보인다.

이번에 어떤 사정이 있어 부득이 이곳(흥국사)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 자리 잡아 다시 내 소식 있을 때까지는 편지하지 말어라. 1956.12.12. 낮. 형 법정. 흥국사를 떠나면서(박성직 역, 2011: 58-59).

“이곳은 다시 지리산 쌍계사 탑전이다. 지리산의 웅장한 산세가 내 마음에 든다. 옛날 있던 곳이라 모든 것이 익숙하다. 우리 스님께서는 지금 북인도 네팔에 가 계시니까 한 분 스님10)과 함께 단 둘이 즐거웁게 지내고 있다.…(중략)…1956.12.15. 지리산에서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60-63).

한 달 여 동안 여수 흥국사에서 동안거를 지낼 요량으로 머물다가 떠났다가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아마도 스승의 부름을 받고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이로 보아 당시의 수행환경은 너무도 열악해 종단의 어른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효봉스님은 해외 출장을 다녀 올 만큼 종단의 어른이었지만, 제자를 건사하기에는 다양한 변수가 있었음이 엿보이는 글이다.

지금 이곳은 전라북도 고창군에 있는 선운사라는 절이다. 별로 마음에 흡족치 않아, 다른 곳으로 옮기려던 것이 이제껏 약간의 사정으로 머무르게 되었다.…(중략)…먼저 번에 가지고 오려고 했다가 놔두고 온 몇 권의 책이 필요하여 광순이 형보고 찾아 보내주라고 했다. 『문학개론(백철 저)』, 『소설작법(정비석)』, 『조선미술문화사논총(고유섭)』, 『조선미술사연구(윤희순)』 그리고 노트 두 권이다.…(중략)…1957.3.30. 새벽 법정 합장. 성직아! 형님이 부탁한 책 5권과 내가 보려고 한 권 『삼태랑의 일기』를 합하여 6권 가지고 갔다. 네가 없으므로 내가 책장을 뒤졌으니 그리 알아라. 3.31 순(淳)(박성직 역, 2011: 66-69).

해인사로 가기 전 선운사에 머물며 주석처를 찾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편지다. 당시 출가 수행자의 상황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보이며, 사미 법정도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본다.

그 와중에서도 법정은 문학에 대한 애정으로 집에 두고 온 책을 친구 박광순을 통해 받아 보는 열정을 지니고 있다. 책 가운데는 불교미술에 관한 서적과 문학에 대한 서적이 있어 향후 법정의 문학적 소양과 불교미술에 대한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3. 해인사 시기

이곳 해인사는 그 유명한 ‘팔만대장경’이 보존되어 있는 국보사찰로서 이름 난 곳일 뿐더러, 한국 절 중에서 가장 질서가 잡힌 곳이다. 현재 스님네는 한 60명 가량 계시는데,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는 그런 절이 아니고 순전히 공부만 하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비교적 규율이 엄격하다.…(중략)…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그저 먼 날에 죽어 버렸거니 생각하여라. 실은 죽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중략)…정 합장. 1957.7.26.(박성직 역, 2011: 70-72).

너의 글에서 내가 거쳐하던 방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중략)…그제(24일)에서야 열흘만의 여행에서 돌아왔다. 경주로 불국사, 석굴암 …… 신라 천년의 자취를 찾았더니라. 울산으로 양산 통도사로, 동래 범어사, 온천, 부산, 김해 …… 이렇게 닥치는대로 흘러다녔다.…(중략)…해인사 중 법정 합장. 1957.9.27. 옷을 부칠 때 함께 『콘사이스』도 보내 주었으면 한다. 책장 맨 아래 칸에 흰 종이로 책 가위11)한 것인데, 『영화사전』이라 펼쳐보면 쓰여 있다. 일본 글로 된 것이다(박성직 역, 2011: 75-78).

책장 오른쪽 서랍 안에 졸작 『가을』12)이라는 소설이 있다. 한번 너만 읽어 보아라. 1957.10.7. 밤. 정 합장.…(중략)…될 수 있으면 ‘큰 사전’13)을 계속해서 사 놓으면 공부하는데 아주 필요할 것이다(박성직 역, 2011: 83).

해인사에 걸망을 풀어 놓은 법정은 자신의 출가를 세상에 ‘부존재의 존재’로 보았다. 죽어버렸거니 생각하라며 실은 죽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전하고 있다. 박성직은 이 편지를 받고 “어린 제게는 너무도 매정하게 느껴져 섭섭했다(박성직 역, 2011:73)”고 밝히고 있다.

해인사로 간 해 9월에는 불국사, 해인사, 통도사 등을 만행한 기록도 보인다. 해인사에서도 공부에 대한 의지를 이어가며, 일본어 사전을 보내달라고 하며 공부를 이어가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사촌 동생에게도 한글사전을 사서 공부하도록 권하고 있다.

10월 7일 편지는 법정의 문학적 관심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편지로 평가된다. 출가 전 대학시절 이미 단편소설인 『가을』을 습작했다는 사실이다. 주위에 알리기가 부끄러웠는지 사촌 동생에게만 읽어보라고 당부하는 모습은 ‘수줍은 문학청년’의 감수성을 느끼게 해 준다.

요즈음 산사가 시장의 소란 같다. 사람의 더미, 사투리의 공개장. 책들 잘 보존하기 바란다. 1957.10.25.(박성직 역, 2011: 85).

세상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고해(苦海, 괴로움의 바다)이니라. 그러기에 삼천 년 전 인도의 왕자는 그 호화로운 궁전을 박차고 출가 입산하여 일체에 걸림이 없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중은 가만히 앉아서 목탁이나 치고 염불만 외우는 그런 소극적인 수행자는 아니다. 고행이 곧 수행인 것이다. 죽고 사는 이 고해를 수행의 힘으로써 벗어나는(해탈하는) 것이다.…(중략)…춘원님은 지은 것은 대게가(몇몇 통속작품은 말고) 믿고 읽을 만하다.…(중략)…『원효대사』를 구해 읽어라.…(중략)…1958.5.13.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90-92).

네가 『현대문학』지를 본다니 반갑다. 문학이란 어쩌면 건전한 생활을 위해서 제일 가는 방편인지도 모른다. 문학에서 새로운 자기를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서는.…(중략)…1958.6.4.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90-92).

한 가지 부탁은 술은 절대로 먹지 말아야 한다.…(중략)…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속세에서의 경험이 있다. 부처님의 말씀에도 술을 마시면 우리의 지혜종자가 없어진다는 것이다.…(중략)…1958.8.27. 정 합장(박성직 역, 2011: 90-92).

해인강원(3기) 학승으로 공부하고 있었던 법정은 사촌 동생에게 편지를 꾸준히 보내며 소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인사에 관광객이 많이 와서 소란한 전경도 전하고, 목포 자신의 방에 두고 온 책에 대한 관심도 보인다.

그러면서 공부하는 학인으로 붓다가 왕궁을 버리고 출가한 상황을 비유해 자신도 고해의 바다를 건너갈 각오를 밝히기도 한다. 경전공부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함께 춘원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를 권하기도 하고, 『현대문학』지를 읽고 있는 동생을 격려하기도 하며, 문학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밝힌다. 부처님의 제자답게 불음주의 계를 지킬 것을 강권하고 있는 모습은 사미인 법정이 철저한 계행을 기반으로 경전을 섭렵하고 있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나는 베토벤에서 혹은 그 밖의 훌륭한 인격들의 생애에서 위안들을 받곤 했었다. ‘괴로움을 뚫고 기쁨으로!’라는 베토벤의 철학. 고난 속에서도 훌륭한 음악을 탄생시킨 베토벤! 나의 젊은 스승이여! 책장 속에 로맹 로랑이 쓴 『베토벤의 생애』가 있을 것이다. 아직 안 읽었다면 읽어 보아라. 재독도 좋다.…(중략)…사람은 종교적인 생활을 가져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생활의 정화가 올 것이기에.…(중략)…아무것도 신앙하지 않는 것보다는 얼마나 장한 일이냐. 영세를 받아도 좋고, 세례를 받아도 좋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이 우주 주인은 항상 ‘나’(자기)라는 걸 망각해서는 안 된다.…(중략)…불가에서는 ‘내가 곧 부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인간의 모양이 잘 났다는 데서가 아니라, 내가 닦아(수행)서 깨치면 똑같은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또한 누구에게서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다른 것이 아닌 나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하는 구경의 목적이 내가 깨달아서 고해의 일체중생을 제도하는데(건지는데) 있는 것이다. 생활의 주체는 항상 ‘나’다.…(중략)…산승 법정 합장. 1958.9.19.(2011: 112-116).

새해에는 집안이 두루 평안하고 더욱 큰 뜻을 이루기를 부처님 앞에 빈다. 나무아미타불!…(중략)…울지 마라, 울지를 마라, 몇백 번 상하고 다치면서 괴롭고 절망하고 울부짖는 동안에 인간은 자란다.…(중략)…행복은 사금처럼 가벼이 날아가 버리지만, 불행은 두고두고 네 마음 속에서 인생의 문을 열어주는 귀한 열쇠가 되리라. 부디 불행에 굽히지 말고 살아라.…(중략)…1958.12.27. 해인사에서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120-123).

법정은 베토벤의 고난을 롤모델로 삼고 있다. 후에 쓴 글(<대한불교>, 1966,1,16일자.)에서도 베토벤을 언급하기도 한다. 역경을 딛고 아름다운 음악을 탄생시킨 고난의 생애를 거론하며, 사촌동생에게도 베토벤의 생애를 읽어보길 권한다. 이와 함께 이 편지에서는 경전에 대한 공부가 심화되고 있으며, 일체중생이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는 붓다의 가르침을 설파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대승불교의 가르침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가르침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참선수행의 핵심인 ‘자신을 깨달음(自覺)’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불교의 궁극과 자신이 공부하는 목적을 일체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과 예술을 함께 공부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체화하고 있는 모습은 훗날 법정의 글이 온 국민에게 공감과 감동을 주는 충분한 자양분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울지 마라”라는 표현을 반복하고, 고난 속에 인간은 성장함을 상기시키며, 사촌 동생에게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것을 권한다.

새해 안녕? 아무리 세계에 종말이 내일로 명백하다 하여도 나는 오늘 능금나무를 심는다. 새해 아침.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127).

해인사에 들어온 지 3년 차에 접어든 새해에 쓴 편지다. 1958년 새해편지는 보이지 않지만(유실된 것으로 추측), 법정은 매년 새해마다 지인들에게 이런 안부편지와 각오를 담은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곧 비구계를 받을 시기로 해제 후 만행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강원을 졸업하는 시기로 내전(內典, 불교경전)을 통해 어엿한 수행자의 모습이 갖춰졌을 뿐만 아니라, 내면도 상당히 성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경에 할 일이라곤 자기의 존재를 크게 깨달아서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목표로 두고 있다는 표현과 “세세생생 수도승이 되어 생사해탈의 무상도를 이루리라”는 각오는 승가의 일원이 된 출가 수행자 법정의 모습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한 보름 전에 해제를 하고, 해인사를 나와 내 마음의 고향인 경주, 신라 천년의 꿈이 어린 서라벌을 찾았더니라. 석굴암에서 부처님을 뵈옵고, 동해바다와 향수에 맺힌 수평선을 실컷 보았다. 통도사에서 일주일간 비구계 살림을 마치고, 부산, 김해, 마산을 거쳐 여기 진주에 어제 도착했다.…(중략)…우리들이 부모형제를 팽개치고 산중에 들어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도하고 있는 뜻은 그 나고 죽는 바다에서 뛰어 내리려는 더 없이 큰 욕심 때문이란다. 거짓 없이 너에게 말하마. 형아는 금생뿐이 아니고, 세세생생 수도승이 되어 생사해탈의 무상도를 이루리라. 하여, 고통바다에서 헤매는 내 이웃을 건지리로다. 아우야. 산승의 생활이 결코 평안한 기생충의 생활은 아니란다. 하나에서 열까지가 죄다 고행이다. 여기에서 배겨나는 기질이 드물다. 중생(이웃)을 건진다는 일이 얼핏 듣기에 막연하고 우스운 소리 같지만, 우리가 구경(究竟)에 할 일이라곤 자기의 존재를 크게 깨달아서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중략)…1959.3.10. 진주에서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128-132).

해인강원 졸업반을 맞이한 법정의 당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해제를 해 경주와 동해바다를 거쳐 통도사를 참배하고, 부산, 김해, 마산을 거쳐 진주에서 보낸 편지다. 비교적 자유로운 만행을 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그런 상황이지만 스님으로서의 위의와 품격을 지키려는 의지가 보인다. 스스로 금생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수도승이 되어 생사해탈의 무상도를 이루겠다는 다짐도 한다. 소위 스님으로서 세속의 때를 벗어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유달영씨의 『인생노트』라는 책을 읽어 보아라. 전에 『사상계』지에 실렸던 것인데, 얼마 전 단행본으로 나왔을 것이다. 너에게 좋은 스승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중략)…법정 합장. 1959.4.15. 해인사.(박성직 역, 2011: 136).

광순에게 보낼 책 『인도 철학사』 『시지프스의 신화』 『꺄뮤의 사상과 문학』 『싸르트르의 사상과 문학』. 안녕히. 해인사에서. 1959.4.30.(박성직 역, 2011: 139).

책을 좀 보냈다.…(중략)…마하트마 간디는 내가 존경하는 인격 가운데 하나다. 너에게는 많은 공감이 있을 줄 안다.…(중략)…1959.5.1. 해인사 사문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142).

먼저 말했던 유달영씨의 『인생노트』는 읽어 보았느냐? 아직도 읽지 않았다면 내게 있는 걸로 보내 주리라. 나도 음력으로 칠월 보름을 지내고는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볼 뜻이다. 단단히 공부해서 출가한 보람을 하루 속히 이루어야겠다.…(중략)…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 - 佛陀. 1959. 칠월 육일. 해인사에서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145).

어엿한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법정은 외전(外傳, 불교경전 외 문학 철학 예술 등 학문)도 틈틈이 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친구 박광순 교수를 통해 문학과 철학, 예술 등의 서적도 탐독하고 있었다. 유달영 씨의 『인생노트』도 소유하며 읽고 있었고, 사촌 동생에게도 강권하고 있다. 이런 내•외전을 통해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메시지를 법정은 전하고 있다.

서울 법대에 계신 황산덕 교수14)께서 지난 해 여름부터 나에게 사상계지를 보내주고 있다. 거기에서 유 선생님과 함께 함 선생님의 글을 감명 깊게 읽을 수 있었다.…(중략)…행이 없는 이론은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남이 행하기 어려운 것을 내가 행하는 데 뛰어난 인생의 보람이 있는 것이다.…(중략)…어쩌면 초가을 쯤 목포에 한번 들릴 지도 모르겠다.…(중략)…너 술, 담배는 먹지 않겠지? 절대로 멀리 하여라. 너는 결코 사회악에 병들지 말아라.…(중략)…1959.7.12. 산승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148-152).

날로 짙어가는 산색을 바라보며 산승은 가을하고 있다. 건강하게.…(중략)…1959.10.11. 아듀. 법정(박성직 역, 2011: 155).

1959년 7월 12일 편지에서 법정의 사회민주화에 대한 인식이 출가한 초기부터 형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편지에는 1958년 여름부터 『사상계』지를 받아보았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에 황산덕 교수는 불자로 박정희 정권 하에서도 민주화를 주장했던 진보적인 인사였다. 해인사에서 강연에서 만난 것으로 보인다. 여수 흥국사 주지 명선 스님15)도 생전에 “황산덕 교수가 해인사를 자주 찾아와 강의를 했으며, 법정 스님을 총애하며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불교신문>, 2020.03.25일자)”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법정은 다음 편지글에서 말하듯이 “행이 없는 이론은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남이 행하기 어려운 것을 내가 행하는 데 뛰어난 인생의 보람이 있는 것”이라고 밝힌다. 비구계를 받고 해인사 선원에 주석하고 있던 법정은 목포에도 다녀올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운신의 폭도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구계를 받은 승려로서 법정은 사촌 동생에게 술을 먹지 말라는 불음주계를 강권하고 있으며, 담배도 피지 말라고 적극 설득한다. 술, 담배를 사회악으로 규정하며, 절대 병 들지 말아라고 권하고 있다. 1959년 마지막 편지에서는 산승으로서 가을을 즐기는 여유로운 모습도 보이고 있다.

4. 해인사와 양산 통도사 및 서울나들이 시기(1960년-1964년)

나와 한솥밥을 먹고 있는 도반들에게 우리 하이마아트의 겨울의 미각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고…(중략)…김을 소포같은 길로 좀 보내 줄 수 없을까? 백여명 대중 스님네가 공양하려면 한두 톳 가지곤 어려울 테고 적어도 대 여섯 톳은 있어야 할 텐데. 한번 출가한 주제에 생가에 신세를 진다는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다. 너에게만 알리고 싶다.…(중략)…1959+1 1월 7일. 염체 없는 중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161).

출가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대중들에게 공양을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엿보이는 편지다. 편지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동생 박성직 거사에게만 알린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유는 그 다음 내용에 들어 있다. 수행공동체에 고향의 겨울미각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톳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인간미 넘치는 법정의 모습이 보인다.

어제 까뮤씨가 교통사고로 인해 별세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산승은 다시 한번 무상을 마음했다.…(중략)…이 편지 받는 대로 목포엘 가서 소포로 책을 부쳐 주었으면 고맙겠다.…(중략)…보낼 책은 『문예지』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전부와 『현대문학지』는 다음 번호(통권번호)대로 골라서 부치면 된다.

1호, 2,3,4,5,6,7,8,9,11,14,15,16,21,22,23,24,25,45(이상 19권)…(중략)…1960. 1.8. 밤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163-165).

출가 후에도 여전히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모습이다. 훗날 『현대문학』에 ‘무소유’라는 글을 게재한 인연도 이 편지에서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투고가 아니라, 이미 문예지의 성격을 파악하고 준비한 작품의 투고라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정월 보름 해제(解制) 뒤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 보고 싶다. 한 곳에 삼 년 넘어 있으니 도심(道心)이 평범(平凡)해지려 한다. 그리고 이곳은 관람객 때문에 항상 분주해야 하니, 수도(修道)하는 데는 큰 장애다. 멀리 동해(東海)바다가 내다보이는 한적한 암자(庵子)같은 곳을 꿈꾸어 본다.…(중략)…돈 천환을 동봉한다. 소포요금(小包料金)이라곤 생각지 말아라. 다른 식구들에겐 이런 말도 않도록.…(중략)…1960.1.25. 산승 법정 합장

어렵게 마련하기는 했습니다만, 고향의 김을 보내드리고는 저 혼자 얼마나 뿌듯했는지 스님은 모르셨나 봅니다. 산중에서는 더없이 귀한 돈 천환을 보내주시다니요. 늘 형님께 받기만 하던 제겐 모처럼의 보람이었는데……. 제 마음을 몰라주는 형님에게 그날은 무척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박성직 역, 2011: 167-169).

들어 알겠지만 지난 이른 봄에 이곳 통도사(通度寺)로 옮겨 왔었다. 까닭은 『불교사전』을 편찬하는데 도와달라는 청을 받고-. 지금까지 다른 세 스님과 함께 원고정리에 여념이 없었지. 얼마 전에 원고는 탈고되어 지금은 교정을 보고 있다. 수 일 안으로 서울에 가서 조판•인쇄에 착수할 것 같다.…(중략)…나는 초연한 수도승이기보다는 하나의 자연인으로서 진리를 모색하는 철학도가 되고 싶을 뿐이다.…(중략)…1960. 12. 21 산승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172-175).

해인사 강원에서 졸업을 하고 거쳐를 이동하려 하는 시기다. “한 곳에 삼 년 넘어 있으니 도심이 평범해지려 한다”는 대목이 고무적이다. 길에서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님도 45년을 천하를 주유(周遊)하며 중생을 제도했다. 법정 역시 한 곳에 오래 머물면 타성에 젖을 것을 염려하며, 수행처를 옮기려 하고 있다. 아마도 이때까지는 운허 스님으로부터 『불교사전』 편찬을 제안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생에게 돈 천환을 보내며 소포요금이라 생각하지 말고, 형이 주는 마음의 표시라 여기게 한다.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당부도 한다. 출가 사문으로서 세속과 인연을 멀리 하는 의미에서 가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강권하고 있다.

이러한 편지에 박성직 거사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형, 법정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고 술회한다. 산중에서 아껴 쓰며 마련한 돈 천환이 천금같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받을 사이가 아닌데, 괜히 돈을 받은 동생의 마음은 섭섭해진 것 같다.

1960년 12월 21일 편지글에는 해인사에서 통도사로 『불교사전』 편찬을 위해 내려온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1년 만에 세 명의 스님이 원고를 정리해 조판과 인쇄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을 전하고 있다. 불교사전 편찬 작업을 하면서도 자신은 초연한 수도승보다는 자연인으로서 진리를 모색하는 철학도가 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법정의 삶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난 서울에서 『불교사전』 출판을 끝내고 이십여 일 전에 다시 이곳 산사로 내려왔다. 이 여름엔 다시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하나, 우리말로 옮겨볼 예정이다.…(중략)…주소는 경남 합천 해인사. 다른 이에겐 산승의 거쳐를 알리지 말아라. 1961. 6.15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172-175).

1961년 6월 편지로 약 1년 6개월 만에 『불교사전』을 편찬하고, 해인사로 내려온 기록이 보인다. 이때부터 법정은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본격적으로 나선다. 1962년 『선가귀감』을 번역했고, 1967년 동국대학교 역경원 편집부장을 맡아 『법화경』, 『숫타니파아타』를 한글로 번역했으며, 1972년에는 동국대 서경수 교수와 함께 2년 여에 걸쳐 『우리말 불교성전』을 편찬했다.

박성직은 “이렇듯 법정 스님은 학자나 고승들만 읽었던 한자로 된 불교경전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불교 대중화에 힘쓰셨습니다(박성직 엮, 181)”라고 밝히고 있다.

아득히 있는 못난 형을 위해서 수고를 좀 해 주어야겠다. 책장에서 책을 찾아 보내주었으면 해서-. 모두가 일본글로 된 책이다. 일-광사림, 이-독화사전, 삼-선의 연구, 사-철학의 근본문제, 오-속편 철학의 근본문제, 육-동양윤리, 칠-철학통론, 팔-학생과 선철, 구-학생과 독서, 혹시 칠 철학통론은 있는지 없는지 기억이 희미하다.…(중략)…그리고 남아 있는 일본책 목록을 죄다 적어 보내주었으면 한다만 직장에 지장이 없도록 쉬는 날을 골라 하여라. 1961. 8.21.(박성직 역, 2011: 182-185).

출가 후에도 불교경전뿐만 아니라, 일반서적을 탐독한 법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어로 된 책을 별 장애없이 읽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일반철학 서적과 사전류, 불교서적까지 일본책을 통해 사고의 영역을 넓혔음을 볼 수 있다. 또 일본서적 목록을 보내달라는 대목은 많은 일본어 서적을 대학시절에 구해서 읽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법정의 학문 능력은 출가 후 3년의 강원수학 경력으로 불교사전을 편찰할 만큼 뛰어난 능력을 함양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군에서 보내준 두 번째 소식 잘 받았다.…(중략)…집을 떠난 지 오래될 수록 자신의 수행을 위해서 지난 일들을 하나하나 잊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떠나버린 아들을 그리워하는 홀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출판일로 이삼일 뒷면 다시 산사를 떠나 상경할 예정이다. 그러한 인연이 된다면 오는 가을쯤 옛 살던 고장을 다녀왔으면 싶다. 그렇게 전해주기 바란다. 사실, 지금 나는 옛집의 주소조차 다 잊어버렸단다. 1962. 5.19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192-195).

이제는 군인이 되어 늠늠(름)한 모습이 믿음직스럽기도 했는데, 유니폼을 달리한, 형제의 대화에서 나는 그 사이의 여백(세월이 만들어 놓은)을 메꾸기에 칠팔 년 전의 모습들을 확대하느라고 사뭇 비약을 했더니라.…(중략)…1963. 7.19 소소산방(笑笑山房)에서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209).

1962년과 1963년 두 편의 편지는 사촌 동생 박성직 거사가 군대에 입대해 군인신분으로 있을 때 나눈 편지다. 첫 편지에는 육친의 정을 모친은 느끼고 있겠지만, 법정은 출가 수행자로서 세속의 일을 하나하나 잊어가고 있고, 잊겠다는 각오를 밝힌다. 그러면서 계속 출판일로 서울을 오가는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로 보아 법정은 1960년 이후 본격적인 출판일에 뛰어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편지에서는 출가 후 7년 만에 박성직 거사와 해후하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해인사에 머무르는 방이 ‘소소산방(笑笑山房)’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당시에 법정은 해인사에 방을 두고, 서울과 해인사를 오갔던 것으로 파악되며, 그가 ‘소소산인(笑笑山人)’이라는 필명으로 글도 발표한 것을 증명하고 있다.

5. 광주(서울) 봉은사 시절(1964년 이후)

해인사를 아주 떠나오고 말았다. 너무 오래 한 군데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수도하기에 너무 평범한 곳이 되고 말았다. 내가 이제 갈 곳은 교통도 통신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아주 아주 궁벽한 산중(山中)일 것이다. 그러한 곳에서 철저하게 수도해야겠다. 그저 편히 살기 위해 출가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중략)…1964. 1. 14 대구에서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226-227).

해인사를 떠난 법정은 박성직 거사와 6년 동안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사촌 동생에게 산중으로 간다는 서신을 보냈지만, 사실은 상경해서 동국역경원에서 역경위원으로 팔만대장경 번역과 <대한불교>에 글을 쓰는 등 본격적인 서울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간간이 해인사를 오가기도 했다. 아마도 멀리 산중으로 떠나려 굳은 마음을 가졌지만, 경전번역과 글쓰기를 계속 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사실로 볼 때 법정으로 출가 이후부터 늘 자연에서 수행하며 깨달음을 얻으려는 불교생태주의적 입장에 선 에코카르마(eco- karma)의 세계관을 이미 체화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직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십일월 이십칠일)를 오늘 오후에나 받아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데, 요즘의 내 건강과 주위의 여러 가지 형편이 나를 부자유하게 만들고 있다. 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은혜로운 분은 작은 아버지시다. 나를 교육시켜 눈을 띄워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할머님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오늘은 법당에 들어가서 많이 울었다…(중략)…나는 겨울 안거가 지나야만 출타를 할 수 있으므로 봄에 찾아갈까 한다.…(중략)…1970. 11.27 밤 법정 합장(박성직 역, 2011: 231-236).

1970년대에 들어 6년 만에 작은 아버지의 부고를 받고 쓴 편지글이다. 자신을 교육시켜준 분이기에 가장 은혜로운 분이었고, 그래서 법당에 가서 많이 울었다는 내용은 사뭇 육친의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한다.

이와 함께 법정은 자신의 현재 상황이 좋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다. 서울살이를 하면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사로 사회민주화 운동에 앞장 서 와서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고 있던 상황으로 ‘부자유’라는 문구를 쓰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법정은 출가 수행자로 안거 기간에는 외부출입을 하지 않는 원칙을 견지하며, 다음해 봄에나 가족을 찾아갈 계획을 밝히고 있다.

1970년에 접어들면서 법랍도 15년이 넘어가고 있는 시기여서 승려로서는 중진에 해당하는 위치다. 가족에 대한 애정을 느끼면서도 출가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잊지 않는 ‘비구 법정’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Ⅲ. 나오는 말

지금까지 사촌동생 박성직과 나눈 법정의 편지글에는 출가 초기부터 70년대 초반의 수행자의 삶을 통해 법정의 출가 초기 사상이 어떻게 정립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았다. 법정의 출가 초기 탑전에서의 수행시절에는 필요 없는 책에 대해 미련을 버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출가 이후 계속 경전공부를 하면서도 문학서적과 사상계 등의 서적을 읽으며, 불교와 문학, 철학에 대한 공부를 계속했다.

이를 통해 법정은 왜곡된 우리나라의 사회의식을 깨우치는 불교계 인물이 되었다. 특히 해인사 시절 황산덕 교수와 인연을 계기로 『사상계』를 발행한 장준하와 만났고, 『씨알의 소리』의 발행인인 함석헌을 알게 된 인연은 법정이 1960년대 불교계의 대표적 민주화 인사로 나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법정은 종교를 초월해 많은 민주 인사들과 교류하며, 우리 사회의 잘못을 바로잡는 불교계의 대표적인 민주인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법정의 이러한 사회민주화 활동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5년 불일암으로 들어가서도 이어진다. 불일암에서도 부조리했던 우리 사회를 향한 올바른 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당당한 목소리를 냈다.

이러한 내용은 그의 저서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버리고 떠나기』,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 『산방한담』, 『오두막 편지』, 『낡은 옷을 벗어라』 등 수많은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원도 오두막으로 들어가서도 법정은 세상의 혼탁함을 그냥 관조만 하지 않았다. 결국 ‘맑고 향기롭게’라는 시민운동 모임을 주창하며 길상사를 근본도량으로 삼아 세상을 정화하려는 모습을 원적에 들 때까지 보여주었다. 이처럼 법정이 우리 시대에 남긴 큰 울림에는 출가 초기부터 편지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정립해 왔음을 엿볼 수 있다.

Notes

1) 이와 같은 글귀로 박성직은 2018년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2) “벼에 붙어 있는 병충해 이름으로 이를 없애기 위해 약을 뿌리거나 대나무 가지로 벼를 쓸어내기도 했다(박성직 엮, 2011: 15.).”

3) 고모님 딸.

4) 법정의 속명.

5) 대학시절 같은 학과에 재학 중이던 법정의 가장 친한 벗으로 전남대 교수로 재직하다 2021년 6월 19일 작고했다.

6) 통영의 미래사, 스님은 이곳에서 효봉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7) 은사인 효봉을 말한다.

8) 하동 쌍계사 탑전을 말한다.

9) “세계불교도우의회(WFB)가 주최하는 국제 불교행사를 말한다. 2년마다 개최된다.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는 1956년 11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열렸다. 이때 불교 국가마다 서로 다르게 사용하는 불기를 통일하기로 결의하고, 1956년을 불기 2500년으로 정했다. 이를 보면, 2008년은 불기 2552년이고, 양력 5월 15일을 부처님오신날로 결정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표로는 청담, 효봉 동산이 참석하였다. 현재는 태국이 주관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세계불교도대회)

10) 법정의 저서 『무소유』에 나오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의 주인공 수연스님을 말한다.

11) 책을 상하지 않게 종이 등로 씌운 책 커버.

12) 출가하시기 전에 쓰신 스님의 첫 단편소설(박성직 엮, 2011: 83).

13)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큰 사전으로 한글학회에서 편찬해 1947년에 첫 권을 발간한 뒤 1957년 6권 규모로 을유문화사에서 완간했다(박성직 엮, 2011: 83).

14) Daum 포털사이트의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황산덕(1917-1989) 교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2024년 2월 1일 검색)

14) “호는 석우(石隅), 만년에는 취현(翠玄). 평안남도 양덕(陽德) 출생. 아버지는 경환(慶煥)이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 법문학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였다. 1943년 일본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합격하여 경상북도청에 근무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청에 근무하다 사임하고, 1948년 고려대학교 부교수로 국제사법(國際私法)과 법철학을 강의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여 1952년 1월 같은 대학 조교수에 임명되었다. 1954년에는 「자유부인」의 작가 정비석(鄭飛石)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60년 서울대학교에서 국내 최초의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8년 김범부(金凡父)와 동방학연구소(東方學硏究所)를 설립하였다. 1963년 9월 이른바 ‘정치교수’로 서울대학교 교수직에서 파면되어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66년 12월에는 성균관대학교 법정대학장으로 취임하여 1974년 같은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가 이내 법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 1976년 12월 문교부장관으로 전임되어 이듬해 12월까지 재직하였다. 그의 법사상은 서양의 법철학을 동양적 불교사상으로 소화하여 법실증주의와 자연법론을 극복한 법도구론(法道具論)을 정립하려는 데 있었다.”

15) 법정 스님과 해인강원 3기 동기생, 2023년 입적.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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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1974. 『숫타니파아타』. 서울: 정음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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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1976. 『무소유』. 서울: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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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1978. 『서 있는 사람들』. 서울: 샘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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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1982. 『말과 침묵』. 서울: 샘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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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2010. 『산방한담』. 서울: 샘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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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글 ․ 박성직 엮음. 2011. 『마음하는 아우야!』. 서울: 녹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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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순. 2015. 『나의 태평정기』. 광주: 아시아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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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글 ․ 박성직. 2018.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라』. 서울: 책읽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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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2019. 『낡은 옷을 벗어라』. 서울: 불교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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